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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덕장 길에서 / 홍신선
 

 

아침나절 읍내버스에 어김없이 장짐을 올려주곤 했다
차안으로 하루 같이 그가 올려준 짐들은
보따리 보따리 어떤 세월이었나
저자에 내다팔 채소와 곡식 등속의 낡은 보퉁이들을
외팔로 거뿐거뿐 들어 올리는
그의 또 다른 팔 없는 빈 소매는 헐렁한 6.25였다

그 시절 앞이 안 보인던 것은 뒤에 선 絶糧(절량)탓일까
버스가 출발하면
뒤에 남은 그의 숱 듬성한 뒷머리가 희끗거렸다
 
그 사내가 얼마 전부터 보이지 않는다
깨빡치듯 생활 밑바닥을 통째 뒤집어엎었는지
아니면 생활이 앞니 빠지듯 불쑥 뽑혀 나갔는지
늙은 아낙과 대처로 간 자식들 올려놓기를
그만 이제 내려놓았는지
아침녘 버스가 그냥 지나친 휑한 정류장엔
차에 올리지 못한
보따리처럼 그가 없는 세상이 멍하니 버려져 있다
읍내 쪽 그동안 그는 거기 가 올려놓았나
극지방 遊氷(유빙)들처럼 드문드문 깨진 구름장들 틈새에
웬 장짐들로
푸른 하늘이 무진장 얹혀있다

 

 

 

2017 제17회 노작문학상 수상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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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회 노작문학상 수상자로 시인 홍신선(73)씨가 선정됐다고 새봄출판사가 20일 밝혔다.

 

1965'시문학'을 통해 등단한 그는 시집 '황사바람 속에서', '연을 점찍다', '마음경', '삶의 옹이', '사람이 사람에게' 등을 냈다. 현대문학상, 한국시인문학상, 농민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김달진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홍 시인의 수상작은 '합덕장 길에서' 4편이다. 올해 노작문학상 수상작품집은 새봄출판사에서 출간된다.

 

이번 수상작품집은 22일 서울 홍대에서 개최되는 와우북페스티벌에서 처음 공개된 후, 30일 화성 노작문학관에서 열리는 노작문학제 기간에 다시 한 번 전시될 예정이다.

 

한편 노작문학상은 1920년대 일제치하의 암울한 시대를 낭만주의 시와 신극운동으로 극복하려 했던 노작 홍사용(1900~1947) 시인의 문학정신과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01년 제정된 상이다.

 

1회 안도현 시인을 시작으로, 이면우, 문인수, 문태준, 김경미, 김신용, 이문재, 이영광, 김행숙, 김소연, 심보선, 이수명, 손택수, 장옥관, 신용목, 신동옥 등이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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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수지 / 신동옥

 

 

물이 빠지면 고기 아니면 진흙인데

 

누가 관정管井을 팠나

기갈이 들린 눈알 같다

 

저 닫힌 수면 아래

화택火宅이 한 채

 

죽은 것 산 것 몽땅 저 속에 있다

 

온몸에 뼈란 뼈는

죄 부서져

불로 돌아가고 바람에 흩어져라

 

눈보라 치듯 휘돌다가

피리 소리를 내며 빨려든다

 

소용돌이친다

 

방죽에는 구두가 한 짝

 

석축石築,

억새밭

 

머리가 검은 짐승 한 마리.

 

 

 

2016 제16회 노작문학상 수상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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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시가 주최하고 화성시문화재단 노작홍사용문학관이 주관하는 제16회 노작문학상을 신동옥(39) 시인이 받는다. 수상작은 '저수지' 5편이다.

 

13일 화성시문화재단과 노작문학관에 따르면 제16회 노작문학상 수상자로 신동옥 시인이 선정됐다. 시인창작기금으로 2000만원이 수여되며 시상식은 1016일 노작문학관에서 열린다.

 

신동옥 시인은 1977년 태어나 2001년 계간 시와반시를 통해 등단했다. 저서로는 시집 악공 아나키스트 기타’, ‘웃고 춤추고 여름하라’. 산문집 서정적 게으름이 있고, 2010년 윤동주상 젊은작가상을 수상한 바 있다.

 

노작문학상은 일제강점기 동인지 백조’(白潮)를 창간하며 낭만주의 시를 주도했던 시인이자, 극단 토월회를 이끌며 일제에 굴하지 않은 예술인이었던 노작(露雀) 홍사용(1900-1947) 선생의 정신을 기리고자 지난 2001년부터 그해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 활동을 펼친 시인에게 수여되고 있다.

 

1회 안도현 시인을 시작으로 이후 이면우, 문인수, 문태준, 김경미, 김신용, 이문재, 이영광, 김행숙, 김소연, 심보선, 이수명, 손택수, 장옥관, 신용목 시인이 수상했다.

 

올해부터는 신극 운동을 이끌었던 노작 홍사용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희곡부문이 신설됐다. 한편 올해 노작문학상 수상작품집은 새봄출판사에서 10월 출간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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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 / 유자효

 

 

그를 향해 도는 별을
태양은 버리지 않고

 

그 별을 향해 도는
작은 별도 버리지 않는

 

그만한 거리 있어야
끝이 없는 그리움

 

 

 

황금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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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한 포기 동양란이 앉은 듯한 울림

 

시집 황금시대를 읽고 있노라면 한무리의 남녀들이 손에 손을 맞잡고 달의 빛그물 밑 넓은 마당에서 강강수월래를 노래하며 원을 그리고 도는 듯한 그림이 선명하게 눈앞에 떠오른다. 그러나 그의 시조는 또한 그 그림과 함께 서늘한 중립성을 시 한 편 한 편마다 지니고 있기에 그 그림은 또한 강렬한 메시지를 던져준다.

 

단 하나의 시어도 허투루 쓰지 않는 한국 시조의 미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그의 시들. ‘거리는 특히 그러한 한국 시조의 정수를 보는 듯한 감을 느끼게 한다. 한 포기의 동양란이 앉아 있는 듯한 그의 시조의 선명한 그림과 함께 가만히 던져지는 가슴을 울리는 메시지. 세월이 켜켜이 앉은 흙마당의 부드러운, 그러나 서늘한 중립성의 시적 위로.

 

그는 한 편의 좋은 시가 추구하고 있는 시적 위로가 어떤 위상을 안고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가슴 깊이 깨닫고 있는 시인이 분명하다. 그 시적 위로가 따스한 시어들의 꽃이불이 되어 춥고 가난한 사람들을 덮어 주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구름처럼/꿈결처럼/흐느끼듯 물 흐르듯//흙이거나/불 속에서나/다시 태어난 그 순간이나//빛나는 황금시대는 누구에게나 있건만’(달항아리전문)

 

시적 위로를 알고 있는 시인 유자효의 시조들을 오늘의 공초문학상 수상작으로 보내는 이유다. 아름다운 달항아리의 빛그물에 싸안긴, ‘서늘한 중립의 오늘의 시적 위로.

 

- 심사위원 이근배·김초혜·강은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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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 먼 길 / 김초혜

 


오 하느님
나이는 먹었어도
늙은 아이에 불과합니다

햇살은 발끝에 기울었는데
내 몸이나 구하고

굽은 마음 어쩌지 못해
얼굴을 숨기기도 합니다

몸안에 가득 들여놓은 꽃은
붉은 조화 나부랭이였습니다

어찌
고요를 보았다 하겠습니까

 

 

 

멀고 먼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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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늙은 아이가 바라본 신비한 세상

 

김초혜 시인은 한때 사랑 굿이라는 시편으로 세상을 풍미했던 베스트셀러 작가다. 1980년대나 1990년대 젊은 시절을 보낸 사람치고 시인의 시편을 한 번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에게도 청춘은 흘러 이제 노년이다.

 

노년에 이르게 되면 시도 따라서 노년에 이르게 마련. 그래서 시가 늙는가. 아니다. 시가 변한다. 변하더라도 좋은 쪽으로 변하는 데에 시인의 성취가 있고 독자의 기쁨이 있다. 가능하다면 시의 길이가 짧아져야 하고 그 내용이 깊어져야 하고 시선이 맑고 그윽해져야 한다.

 

딱 여기에 해당되는 시인이 바로 김초혜 시인이다. 그러기에 심사위원 세 사람은 쉽게 호흡을 같이 했고 이견 없이 김초혜 시인의 시집 멀고 먼 길을 수상작으로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시집 표제작이기도 한 시 멀고 먼 길은 최근 시인의 시적인 노력과 근황을 한눈에 보여 주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무엇보다도 노년에 이른 시인의 해맑은 눈이 돋보인다. 그러면서도 겸허가 가득하다. 차라리 한 편의 기도문이다. 무릇 기도는 절대자에게 드리는 인간의 하소연과 소망의 표현. 여기서 시인은 즐겨 어린이가 되고자 한다. ‘늙은 아이가 그것이다.

 

정말로 좋은 시인은 젊어서는 젊은 노인이지만 늙어서는 늙은 아이가 될 수 있는 시인이다. 이야말로 시인에게 이른 신의 축복이요 선물이다. 늙은 아이가 되어서 보는 세상은 당연히 아름답고 신비하고 또다시 사랑스럽기 마련이다.

 

김초혜 시인이 바라본 세계, 김초혜 시인이 내놓는 시편들이 그러하다. ‘멀고 먼 길세상을 한 바퀴 돌아왔지만 시인의 숨결은 지쳐 있지 않고 시인의 마음결은 여전히 싱싱하고 촉촉하다. 뿐더러 고요하기까지 하다. 거기에다가 지혜에 가득 차 있다.

 

고요한 지혜의 바다, 그 바다에 꽃으로 피어난 겸허한 고요. 상이란 들쑥날쑥이다. 먼저 받을 수도 있고 나중에 받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좋으신 시인의 이름으로 받으시는 상에 마음의 꽃다발을 미리 전한다.

 

- 심사위원 이근배·신달자·나태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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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 이기영

 

 

오래된 악사들과 귀에 익은 째즈와

시끌벅적한 서른아홉 체 게바라와 스물일곱의 이상이 있다

 

부르주아적 시가를 피우는 이상과 노동자의 술 모히또를 마시는 체 게바라

 

절인 청새치와 코히마르 해변에 뜬 붉은 달을 말하면

어린 여인들의 앳된 입술과 꼬치니로cochinillo에 대해 입맛을 다신다

 

혁명은 주방장이 추천한 오늘의 아기 통돼지 바비큐보다 못하고

달아나지 못한 열세 명의 아해들은

가난한 생일 파티가 열리고 있는 마술사의 입속으로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다

 

더부룩한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불금이라 선언하고

눈이 너무 부시다고 선글라스를 껴야한다고

 

봉고, 바따, 체께라, 마라까스가 찬찬Chan Chan을 연주한다

 

-나는 알토 쎄드로에서 마르카네로 가고 쿠에토에 도착한 후에는 마야리로 가

인생에 흐르는 힘 어쩔 수 없다네*

 

시인도 못 되고 내일의 혁명가는 오늘의 혁명을 모르는

불온한 승객들은 이 밤 또 어디로 다 흘러가나

 

그와 그가 감쪽같이 사라진 오, 쿠바!

 

*‘찬찬의 노래 가사 중에서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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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에서 활동하는 이기영(사진) 시인이 첫 시집으로 제14회 김달진창원문학상을 받는다.

 

김달진문학상운영위원회는 이기영 시인이 시집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천년의시작)’으로 제14회 김달진창원문학상의 수상자로 선정됐다고 밝혔다.

 

김달진창원문학상은 구체적인 지역 가치의 실천과 전망을 제시해주는 문학을 격려하기 위해 제정한 상으로, 최근 2년 동안 시집을 펴낸 경남 출신 또는 경남에 거주하는 문인을 대상으로 공모·시상한다. 시상식은 오는 98일 창원시 진해문화센터에서 개최되는 김달진문학제에서 함께 열리며 수상자에게는 1000만원의 상금이 주어진다.

 

심사위원(이하석·신덕룡·김문주)들은 심사평에서 그간의 수상자와 달리 첫 시집을 낸 신진급 시인을 격려하는 일도 지역문학상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의의를 설명한 뒤 수상작에는 인간관계의 경험들을 자신의 찬찬한 언어로써 구축해 가는 시인의 개성적 어법이 돋보인다고 평했다.

 

이 시인은 스무 살부터 꿈꾸던 시인의 삶을 살기 위해 10여 년 전부터 죽을힘을 다해 시에 매달려 늦깎이 시인이 됐다세속과 영욕을 초탈한 절대 세계를 지향했던 김달진 선생의 이름으로 받는 상은 더없는 영광이며, 더 고민하고 치열하게 시를 쓰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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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남지의 새들 / 배한봉

 

 

해 지는 하늘에서 주남저수지로

새들이 빨려 들어오고 있다, 벌겋다, 한꺼번에 뚝뚝, 선지빛으로 떨어지는 하늘의 살점 같다

 

한바탕 소란스러운 저 장관

창원공단 퇴근길 같다

 

삶이 박아놓은 가슴팍 돌을 텀벙텀벙 단체로 시원하게 물속에 쏟아내는 몸짓 같다, 온몸으로 그렇게

삶을 꽉 묶어놓은 투명한 끈을 풀고

집으로 돌아오는 가장들,

그 질펀한 힘이 선혈 낭자한 시간을 주남저수지 물바닥에까지 시뻘겋게 발라놓았겠다

 

장엄하다, 이 절정의 파장

삶의 컴컴한 구덩이조차도 생명의 공명통으로 만들 줄 아는

저 순하고 아름다운 목숨들,

달리 비유할 것 없이 만다라의 꽃이다

저 꽃 만져보려고 이제는 아예 하늘이 첨벙 물속에 뛰어드는 저녁이다

 

 

 

 

주남지의 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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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회 김달진창원문학상에 배한봉 시인의 주남지의 새들(천년의 시작/2017)’이 선정됐다.

 

배 시인은 수상소감을 통해 갈수록 제게 시는 어렵습니다. 왜 그러한가 하고 보니 제가 시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시를 쓰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시에게 좀 살려달라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빕니다. 앞으로 시에 사는 사람이 되기를 제가 저에게 요구합니다.”라고 밝혔다.

 

함안에서 태어난 배 시인은 1998현대시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잠을 두드리는 물의 노래’, ‘악기점’, ‘우포늪 왁새’, ‘주남지의 새들등을 펴냈다.

 

김달진창원문학상은 ()시사랑문화인협의회·창원시김달진문학관이 주최하고 김달진문학상운영위원회가 주관해 도내 출신 또는 도내 거주 시인을 대상 전년도 7월부터 당해연도 6월까지 발간된 시집을 대상으로 선정한다.

 

올해는 이하석·신덕룡·김문주 시인이 심사를 맡았다. 심사위원들은 시인은 자연과 생명에 관한 개성적인 시선으로서 이미 한국시단에서 독보적인 영역을 인정받고 있는 중견시인이다다섯 번째 시집 주남지의 새들은 생명에 대한 열렬한 애정으로서 자연과 삶의 세계를 물들이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서정의 전통을 고스란히 계승한, 서정의 적자(嫡子)"라고 평가했다. 시상식은 99일 제22회 김달진문학제에서 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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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중력 화요일 / 김재근

 

 

1

바닥이 없는 화요일

슬로우 슬로우

자신의 음성이 사라지는 걸 본다

발이 가는 식물의 잠, 초록의 잠 속처럼

희미해지는 손목

깁스를 한 채,

언제 일어나야 할까

창문에 닿는 겨울 음성들의 결빙

맑아지는 링거의 고요

혈액이 부족한 걸까

그렇게 화요일이 왔다

 

2

화요일을 이해한다는 건 뭐지

화요일은 무얼 할까

 

일주일이 세 번 오고

화요일이 두 번 오고

 

화요일에만 피어나는 장미와

화요일에만 죽는 장미의 눈빛

밤하늘에 붙여놓을까

 

가시에 긁힌 잠 속으로 되돌아오는 화요일

이해해도 될까

 

3

시시해지는 화요일

 

화요일의 날개

화요일의 입술

화요일의 같은 숫자

화요일의 손목

 

회전목마처럼 화요일이 돌아와도

화요일인지 아무도 모르겠지만

 

4

눈알을 씻는다

 

느린 얼굴로 떠오르는

화요일의 낙서

 

너도

나처럼 죽은 거니……

 

 

 

 

무중력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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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근(50·사진) 시인이 제12회 김달진창원문학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시인은 지난해 3월 시집 <무중력 화요일>을 펴냈다.

 

김달진문학상운영위원회는 지난 20147월부터 올해 6월까지 최근 2년간 발간된 시집을 심사해 김 시인의 시집을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김달진창원문학상은 시사랑문화인협의회·창원시김달진문학관이 주최한다. 기성·신인 구분 없이 경남지역 출신 또는 현재 경남에 거주하고 있는 문인의 시(시조)를 심사해 매년 시상한다.

 

올해는 이하석 시인, 신덕룡 시인(문학평론가·광주대 교수), 김문주 시인(문학평론가·영남대 교수)이 본심에 오른 6권의 시집을 심사했다.

 

심사위원들은 "지역 문단에 활력을 주고 자극이 되면서도 한국시단에 새로운 물길을 제공할 수 있는 가능성, 시적인 것에 대한 갱신과 개성적인 시적 영토를 개진한 사례를 주목했다. 수상작으로 결정한 김재근의 <무중력 화요일>은 이에 상응할 만한 충분한 개성을 갖고 있는 세계였다"고 심사평을 밝혔다.

 

김 시인의 시어에도 주목했다. 심사위원들은 "그의 시는 그 자체로서 완결된 심미적 세계라 할 만하지만, 그 언어를 부리는 주술사의 상처와 쓸쓸한 내면을 틈틈이 되비춘다""낯설지만 매력적이고, 무중력의 언어-현실처럼 보이면서도 끊임없이 중력을 느끼게 하는 삶-현실을 반영한다"고 평가했다.

 

김 시인은 부산에서 태어나 해운대고, 부경대 토목과를 졸업했다. 현재 진해에서 감리사로 일하는 그는 2007년 한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고, 2010년 창비신인시인상을 수상했다.

 

시상식은 93일 창원시 진해문화센터에서 열리며, 김 시인은 창원시가 제공하는 상금 1000만 원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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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디아에게로 가는 길* / 강희근

 

길은 꿈이 아니라 걸어가는

발이다

발은 그 자리 있어서 생애, 시간, 노을

리디아 푸르푸라리아는

필립비 사람 필립비의 길

동트는 아침에서 설레는 저녁까지의

거기 물이 흐르고 흐르면서 아름다운

태초,

나는 태초가 되고 싶었다

태초는 점 하나에서 선, 선에세 둘레

이어 이르는 영혼의 거접이여

경당은 조용했다

리디아 푸르푸라리아는 여자이므로

깃발, 사탕, 그리고 사랑의 사투리

말씀으로 가는

길,

하나

*유럽 최초의 카톨릭 신자

 

 

 

리디아에게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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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시와 이형기 시인 기념사업회(회장 박우담)20세기 우리나라 지적서정의 대표시인 이형기를 기리는 2020년 제10회 이형기 문학상 수상자로 강희근 시인(77)을 선정했다고 지난 6일 밝혔다.

 

선정 시집은 `리디아에게로 가는 길`(현대시학사ㆍ2020)로 등단 55주년을 기념해 발간됐으며 강 시인의 21번째 자작시집이다.

 

이번 상은 예심과 본심을 거쳐 선정됐다. 심사위원인 오형엽 교수(고려대)와 이재복 교수(한양대)는 본심 심사에서 "언제부터인가 우리 시단에 삶의 알맹이는 없고 껍데기만 요란한 시가 우리의 눈을 현혹시키고 있다. 이에 비해 강희근 시인의 이번 시집은 길에 대한 성찰로 가득하다. 자신의 삶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성찰을 통해 삶의 고양과 그 아름다움이 그 어떤 여타의 시집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한 경지를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수상자 강희근 시인은 경상대학교 명예교수로 그간 국제펜 한국본부 부이사장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을 지냈고`프란치스코의 아침` 21권의 시집과 `시 읽기의 행복` 15권의 저서를 출간했으며공보부 신인예술상김삿갓 문학상가톨릭문학상 특별상경남도문화상송수권 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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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렌즈 / 차주일

 

 

나는 꿈을 꾸고 해몽까지 하는 사람이지만

꿈은 내 능동이 아니지.

 

여러 등장인물로 한 편 이루어진 꿈은 피동,

원하든 그렇지 않든 구성되는

내 삶은 타자가 주인공이 되어 지나간 막간일 뿐.

 

능동과 피동이 동거하면

통념을 넘어서는 통설이 태어나지.

 

나 역시 미완성 각본 어디쯤에서

누군가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으리.

 

인류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눈송이를 모으고

빙산을 갈아 블록렌즈를 만드는 사람이 있어,

나는 잠깐 꿈 밖으로 태어나

사랑을 제공하는 천직을 가졌으리.

 

내 수정체에 든 온갖 피사체로

너라는 한 점을 어렵사리 착상시키고

체온으로 그린 입체를 탁본하여

내 해몽대로 네 얼굴이 생겨났으리

 

네가 오늘 사용할 내 표정을 고르기 때문에

내 배역은 사후에 전생이리.

 

 

 

 

어떤 새는 모음으로만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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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산 박두진문학제 운영위원회와, 한국문인협회 경기 안성지부는14회 혜산 박두진 문학상수상자로 차주일 시인(사진)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혜산 박두진 문학상은 혜산의 시 정신을 기리기 위해 시인의 고향인 안성시의 후원으로 2006년 제정했다. 심사위원회는 차주일 시인의 작품들이 각별한 전언과 함께 언어적 친화력과 보편적 인간 본질에 관한 사유를 두루 결합하였다고 보고, 시인의 언어와 사유가 혜산 선생이 추구해온 인간 본질에 대한 깊은 투시의 세계와 만나는 섬세한 지점이었다고 판단, 시인의 시세계가가 오래 지워지지 않을 진정성 있는 내러티브를 내장하면서 그 내력들로 하여금 시인 자신의 기원을 유추하게끔 하는 특성을 지속적으로 보여왔다고 평가했다.

 

특히 수상작으로 선정된 얼음렌즈외 다수의 시에서 시인은, 삶을 타자가 주인공이 되어 지나간 막간으로 비유하면서 능동과 피동, 얼음과 불씨, 꿈과 해몽 사이에서 사랑을 세공하는 천직을 꾸준히 이이온 자신이 시력을 고백하고 있고, 존재론적 기원을 지나 삶의 다양한 무대로 진화해 왔다고 했다.

 

차주일 시인은 1961년 전북 무주에서 출생, 2003 현대문학에 시 당선, 시집으로 시집 <냄새의 소유권>, <어떤 새는 모음으로만 운다> 가 있으며, 현재 계간 시 전문지[POSITION] 주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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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에 대하여 / 허영자

 

 

유리창을 닦으니

세상이 환하다

안경을 닦아 쓰니

세상이 환하다

마음을 고쳐먹으니

세상이 환하다

너와 나

선 자리를 바꿔보니

세상이 환하다.

 

 

 

 

마리아 막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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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낳은 시인 혜산 박두진문학제 및 국내 최대 문학관건립 개관식이 지난 16일 문향인 안성맟춤랜드 내 남사당공연장에서 성황리 열렸다.

 

이날 행사는 혜산기념사업실무추진위원회와 안성문협 안성예총 안성문화원이 주관하고 문화체육부의 후원으로 청록파 혜산 박두진 시인의 문학적 업적과 고결한 시 정신을기리어 제13회 혜산 박두진 문학상으로 시인 허영자씨가 수상 됐다.

또한 제1회안성문학상에는 시인 하종성 문학공로상에는 시인이며 기업인 문영환씨가 선정 됐다.

 

제2부에는 혜산 박두진 시인의 시비 제막식에 이어 지난 해 안성맟춤랜드 내 총 공비 29억여 원을 투입해 대지 1만 여㎡에 연면적 999.4㎡ 지상3층으로 건립해 오늘 개관식을 가졌다.

 

우석제 시장은 축사에서 “한국이 낳은 청록파 시인 박두진을 기리며 오늘 전국 최대의 문학관을 개관해 문학과 문화예술의도시 안성의 긍지를 돋보이게 했다”며 “시에서 더 많은 문인이탄생 될수있도록 적극 나설것”이라고 말했다.

 

제막식과 개관식에는 우 시장과 김학용의원을 대신 한상수 사무처장이 참석하고 양운석 백승기도의원과 신원주 안성시의장을 비롯해 시의원 전국문인등 500여 명이 참여해 성대한 축제분위였다.

 

박두진 문학상 수상자 심사위원은 조남철 (전)한국방송통신대학총장을 비롯해 박라영 전수상자 오문석 문학평론가 조선대학교수 이갑세 안성문인회지부장 유성호 한양대학교수가 심사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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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 수업 / 신승철

 

못 배운 사람

혹은 잘난 사람

억울한 사람, 가난한 사람

분별을 잃고 헤매는 사람

돈 많다고, 힘 있다고

잘난 척하는 사람

평평해질 때까지

그대들이

내 마음속에서

나무처럼, 풀처럼

의자처럼

편안해질 때까지

이윽고 그대들이

이 의식 속에 모두 들어와

함께 하나의 삶이 되고

산과 들, 강물과 더불어

하늘 아래

그대들이 나와 함께

하나의 대지가 될 때까지

하나의 꿈으로 완성될 때까지

우리 모두는 함께 기다려야 한다네

왜냐하면 그대들이 바로 나인 까닭에

내가 바로 그대들인 까닭에

 

 

 

기적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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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가는 이 길이 결코 헛된 길은 아니다. 하지만 지구의 중력에 꼭 붙들려 매어 사는 인간으로서, 일상의 사사로움에 ‘사사로움이 없음’을 알면서도, 그 사사로움 속에 몸과 마음을 맡기는 일로 가끔은 잠을 이룰 수가 없으니, 아직은 미완未完의 인생임을 알아서인 것이다." 신승철 시인의 시집 중 '기적수업'의 한 구절이다.

정신과 전문의인 신승철 시인이 시집 '기적수업'을 펴냈다.

 

이 시집엔 '기적수업' 외에 '병' '어둠 속에서' '오케이' '설산雪山에 올라' 등  불교의 감성과 기독교적 영성이 녹아 있는 총 5편이 실려 있다.

신승철 시인은 1953년 경기 강화에서 출생했으며,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연세의대 정신과 교수, 1987년 미국 텍사스 의대 정신보건과정 연구교수, 전 서울 가정법원 가사조정 위원(1997~2001)을 역임했다. 정신과 전문의, 신경과 전문의이며 1978년 혜산 박두진 선생님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등단하여 시인으로 맹활약하고 있다. ‘장영실 문화대상’을 수상했으며 ‘조선일보 신승철의 부부진단(1997. 3~1998. 4)’을 연재했다.

저서로는 학술서적 '연변 조선족 사회정신의학 연구', 에세이집 '한 정신과 의사의 노트' '남편인가 타인인가' '있는 그대로 사랑하라' '나를 감상하다', 역서 '비폭력의 기원-간디의 정신분석' '아직도 가야할 길' '사랑은 모든 것의 해답' 'TMS 통증치료 혁명'이 있다. 이밖에 시집으로 '너무 조용하다' '개미들을 위하여' '그대 아직 창가에 서서 오래도록 떠나지 못하고있네' '더 없이 평화로운 한때'가 있다.

 

 

 

더없이 평화로운 한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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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산 박두진문학제운영위원회와 한국문인협회 경기 안성지부는 올해 박두진문학상 수상자로 신승철 시인을 선정했다고 지난달 22일 밝혔다.

 

혜산 박두진 문학상은 혜산의 시 정신을 기리기 위해 고향인 안성시 후원으로 2006년 제정됐다. 해마다 수상자는 발간된 시집 중에서 우수한 시적 성취와 활동을 보여준 시인 중 혜산의 시 정신과 시 세계를 반영해 예심에서 추천된 본상 후보 여섯 명 가운데 엄선한다.

 

수상작으로 선정된 신승철 시인의 기적수업은 박두진 선생이 근대사의 역사에 착근한 바 있는 장시(長詩) 전통을 확장적으로 계승하면서, 인간과 우주와 신성(神聖)에 대한 창의적인 해석으로 매우 중요한 형이상학적 탐구의 결실을 보여줬다는 평을 받았다.

 

신승철 시인은 무위(無爲)의 세상을 노래하면서, 갈수록 생각과 말과 행동이 더욱 단순해지는 삶을 살게 되는 것 같다고 고백한다. 시인의 말마따나 등단 40년을 맞고 있는 중진 시인은 수행자인 듯 영적 관조와 침잠 과정을 통해 시 세계의 완결성과 가능성을 모두 바라보게 한다.

 

심사위원단은 혜산 선생의 지향과 유산이 창의적으로 섭렵되고 계승된 이 시집은 그의 오랜 시력(詩歷)에 상응하는 크나 격려가 되기를 희망한다며 선정 이유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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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상] 오월사리 혹은 풀치의 춤 / 윤경예

 

 

나는 먼 데에서 와서 비늘이 긁혔다가 새로 돋는 정오의 바다를 봐요

 

심해의 어둠에 미끄러지는 걸 좋아하는 풀치들

아가미 내리그으며 쏟아지는 어둠 속에서

수평선으로 당겨졌다가 이내 물러서는 춤을 추고 있는지

 

당신은 그 춤을 오월사리라고 이야기했지요

 

바다의 첫말을 꺼내기도 전

귓불 먼저 몽글해지는 소리 같았죠

검은 여로 와서 함께 덮은 웅숭깊은 별의 덫개였을까요?

 

가늘고 긴 당신의 숨소리처럼 봄빛 덜 빠진 바다

아직 두꺼운 낯을 가진 여름은 시작되지 않았죠

그래서 심해는 차고 깊고 해초들은 무섭게 자랐죠

 

어떤 쪽에서도 출항기를 쓰는 뱃고동 소린 들리지 않았죠

그러나 저 무수히 많은 오월사리가 사라진다 해도

당신은 결코 저 춤을 건지는 일은 멈출 수 없다고

물이 살져 오른 포구에서 기어이 닻을 올리고 있었죠

 

심해 밑이 아가미 명당인 걸 당신은 어떻게 알았을까요

다순구미 볕을 괴고 있던 당신의 어깨가 들석거릴 때

다 갯바닥에서 피어오르는 저 춤 때문에

머리 풀린 어스름이 해안가로 변져온다고 했지요

 

심해는 비늘밖에 보이지 않아 심해라지요

나는 지금 뼛속까지 훤히 비추고도 남을 저 춤을 따라가요

내 몸이 짠내 나는 파도임을 아는 난 풀치니까요

 

 

 

 

[남도작가상] 국도 1호선 표지석 앞에서 / 김현장

 

 

대의동 모퉁이에 엉거주춤 앉은 노인

검게 바랜 손으로 표지석을 만진다

멀어진 신의주 고향길

눈 가득 울음 고여

 

목젖까지 차오른 그 사연을 펼쳐보면

동란 때 목포로 와 머구리 잠수부로

가는 줄 하나 의지해

잠든 바다 깨웠다

 

평화광장 머구리횟집 칠흑 내리 밝히는데

가을비는 알콜과 섞여 부재로 다강고

적막 투명한 울음이

가슴을 적신다

 

 

 

 

 

 

[심사평]

 

목포문학상 후보작으로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작품을 숙독하면서 응모하신 분들의 뜨거운 목포 사랑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일단 그 사랑의 마음을 어떻게 표현했는가에 따라 좋은 시냐 아니냐가 판별된다는 점을 먼저 말씀드리고 싶다. 여기서 표현을 강조하는 이유는 그 방법에 있어서 문체나 문장의 완성도도 중요하거니와 작품에서 나타내고자 하는 주제 의식이 명확해야 한다. 시는 삶에 대한 명상과 언어에 대한 명상이 얼마나 잘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도 표현의 방법에 포함될 것이다. 시는 한사코 형이상학이 아니다. 현란하거나 난해하게 쓰려는 유혹을 뿌리쳐야 소통과 공감의 좋은 시가 완성될 것으로 믿는다.

 

후보작 중 갯벌을 읽다문장” “경전등 기시감이 느껴지는 단어들과 표현들로 신선함을 느끼기 어려웠다. 응모작 세 편의 수준도 심사의 대상임을 알아주길 바란다. 그곳에 갔네는 치열한 시적 감각이 아쉬웠다. 동시에 관념성을 극복하는 것도 중요한 점임을 부탁드리고 싶다. 목포의 신사는 상상력은 좋으나 그 상상력을 구체적인 실존 경험으로 되살렸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을 남겼다. “바다의 후손 갈매기” “밤이면 해골을 쓰고 달려오는 파도” “백구두를 신고와 같은 표현들도 다시 한번 생각해보길 바란다. 폐항은 주제에 맞추려 하다 보니 이미지나 표현 자체가 너무 어둡다. 오히려 폐항이라는 시적 대상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긍정적 사유가 녹아들었더라면 훨씬 더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았다. 십이동파도선의 해남청자, 새를 품다는 시조로서 정형적인 언어 구조상 자유시보다 훨씬 미학적 균형이 요구되면서 동시에 공감대 형성도 중요하다는 점을 인식해주었으면 좋겠다.

 

최종적으로 오월사리 혹은 풀치의 춤을 본상 당선작으로, 국도 1호선 표지석 앞에서를 남도작가상 당선작으로 선정하였다.

 

본상 당선작 오월사리 혹은 풀치의 춤은 제목도 시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 다른 작품들에 비해 신선하고 시적 사유와 사물을 바라보는 개성적인 눈이 남다르다. 특히 탄탄한 구성과 신선한 표현 그리고 이미지의 전개가 힘이 있어 시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함께 응모된 두 편의 작품들도 긍정의 눈으로 세계를 보는 자신만의 문체의 완성도가 높다.

 

남도작가상 당선작 국도 1호선 표지석 앞에서는 목포가 신의주까지 대한민국 국도 1호선의 기점이라는 표지석을 소재로 하여 동란 때 목포로 와 머구리 잠수부로삶을 살아온 실향민 노인을 등장시켜 한 편의 드라마를 아주 자연스럽게 시조의 형식에 잘 담아낸 점이 감동적이다. 특히 첫 번째 수의 울음이 세 번째 수에서 긴 적막 투명한속울음으로 승화되면서 국도 1호선 표지석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와 상징성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당선되신 두 분께 축하의 말씀을 드리고 탈락하신 분들께는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요즘처럼 모순이 난무하고 완고한 마음의 시대에 시가 얼마나 소중한 위로와 안식을 주는 것인지 심사 내내 느꼈음을 고백한다.

 

본심위원 : 허형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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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 임유영

 

모자 하나가 멀리 호수 위에 둥둥 떠 있는 걸 보았다. 가벼운 짚으로 만든 모자 같았다. 크기는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팽이 크지 않아 보였다. 리본이나 꽃 장식도 없었다. 끈이 달렸는지 모르겠다. 크만큼 시력이 좋지는 않았다. 아케이드의 마네킹 위에 모자가 얹혀 있으면 나는 그것들을 약간 두려워하며 지나친다. 모자는 사람을 상상하게 만든다. 특히 누군가의 머리를. 머리 중에서도 이마를, 땀이 맺힌 이마. 주름이 잔뜩 진 이마. 검버섯이 가득한 이마. 이것은 뙤약볕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내 조모의 이마. 조모께서는 결코 모자를 쓰지 않으셨다. 그것이 얼마나 여성답지 못한 일인지에 대해 사람들은 수근거렸지만, 조모는 개의치 않으셨다. 옅은 이맛빛 잔털로 살짝 덮임 조그만 이마. 이건 내 조카의 것이다. 조카의 머리통은 덜 여문 배를 억지로 나무에서 따온 것처럼 생겼다. 그애는 늘 머리에 꼭 맞는 모자를 쓰고 외출한다. 우리 가족이 마지막으로 조모님을 모시고 이 호숫가에 온 것은 이십여 년 전이다. 조식을 마친 뒤 온 가족이 조모님을 부축해 가벼운 산책을 나섰다. 호숫가로 밀려온 물이 뭍에 닿을 때마다 흩어지고 다시 밀려갔다. 조모님이 중얼거리셨다. 바다......바다......바다...... 우리 중 누구도 그것이 파도가 아니라고 설명할 수 없었다.

 

 

 

 

아침

 

오년 전 나는 호수에 한 번 뛰어들었다. 아무 준비 없이 훌쩍 뛰어내렸다. 출렁다리는 출렁거렸고, 내가 뛰어내리거나. 말거나. 나도 모르게 한 손으로 코를 꼭 쥐고, 눈을 감고, 다른 한 손 끝과 양발 끝을 힘주어 모으던 짧은 순간에, 어, 이건 제대로가 아닌데, 생각했고, 눈을 뜨니 병원이었다. 는 문장은 다시는 실제로 떠올리고 싶지 않다. 입고 있던 흰색 반바지와 베이지색 티셔츠 대신 환자복을 입고 있었고, 휴양지의 병원 응급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지나치게 격정적인 바이올린 연주. 아무 냄새도 맡을 수 없었고 머리가 이루 말로 할 수 없이 지끈거렸고. 다른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눈을 끔벅. 감았다 뜰 때마다 보이는 흰 것들. 그것들은 긴 벌레처럼 움직였다. 호수에 사는 커다란 기생충이 내 눈알 속에 들어갔다고 생각했다. 나를 발견했다는. 얼굴이 새카만 남자가 멀리서 나를 보고 손을 흔들며 크게 웃었다. 박수를 짝, 짝, 짝 치더니 주먹을 쥐고 허공을 흔들다가. 기지개를 켜며 뒤돌아 떠났다. 마치 아주 대단한 일을 완료한 사람처럼. 자신이 한 일에 흡족한 듯 보였다. 그가 떠나고 내 몸에 커다란 기저귀가 채워진 걸 알아차렸다. 더듬어보니 탐폰이 없었다. 나는 아직 그것을 제거한 사람이 누구인지 모른다. 저희도 시스템이라는 게 있다고, 무뚝뚝한 간호사는 반복할 뿐이었다.

 

 

 

 

아침

 

  새 아이보리 비누를 뜯어 세수했다. 가방에서 튼튼한 주머니 두 개가 달린 푸른 면직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양 소매 끝에 자개로 만든 단추가 세 개씩, 등뒤에 두 개가 달려 있는 옷이다. 단춧구멍이 너무 작아 끼울 때마다 고생스러웠다. 그러니 풀어지지도 않겠지. 누가 일부러 잡아 뜯지 않는 이상. 양말은 연회색 실크 양말을 가져왔다. 검은 구두는 어젯밤 미리 닦아두었다. 구두가 푹 젖을 생각에 조금 울적해졌었다. 비 오는 날엔 결코 신지 않았던 양가죽 구두.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비싼 구두. 졸업식에도, 처음 피어노 연주를 들으러간 공연장에도, 부유하지만 엄청나게 부자는 아닌 친구들을 만났던 시내의 식당에도 신고 갔던 것. 유치한 장식은 없지만 은근히 굽이 높은 구두. 굽의 바깥쪽마다 색이 열게 닳았다. 굽은 두 번 갈았다. 왼쪽보다는 오른쪽이 더 빨리 닳곤 했다. 구두방에 갈 적마다 멋쩍었다. 나는 오른쪽으로 더 기울었답니다. 혹은, 저는 왼쪽으로 더 기울었다면 어땠을까? 과연?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 오른쪽으로 기울었던 중 만났던 사람들. 왼쪽으로 스쳐지나갔을 모르는 사람들. 사람들? 말하고 싶지 않다. 고백하고 싶지 않다. 최종 끝. 끝의 끝으로 간다. 가고 말 것이다.

  거울 속에 푸른 옷을 입은 여자가 서 있다. 긴 머리칼을 어깨 뒤로 넘기고. 나를 바라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게 만들고자 했던, 아무 의미를 담지 않고자 했던, 저 갈색 눈동자. 밤의 겉껍질을 둥글게 오려붙인 듯한. 비밀을 간직하고자 했던. 두 개의 논. 죽은 사람에게도 비밀이 있을까? 죽음은 비밀일까? 폭로일까? 죽음에 대해서는 아직 모른다. 시체, 시체에겐 비밀이 없다. 시체는 폭로일 거야.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폭로. 아무래도 머리는 하나로 묶는 것이 좋겠다. 발견될 때를 대비하면 그쪽이 낫다.

 

 

 

 

 

아침

 

오믈렛. 한데 섞인 흰자와 노른자의 중립적인 맛. 사각사각 씹히며 풋내를 살짝 풍기는 피망의 향기. 아주 잘게 썰린 햄의 질감과......버터. 강렬한 버터의 향기. 불에 충분히 달궈진 버터와 부드러운 달걀의 신비로운 조화. 신적인 것. 강렬한 것. 달걀과 불과 기름, 약간의 소금과 후추. 그러나 어떤 비법에는 아주 적은 양의 설탕이 포함되기도 하는데, 마치 독약의 이로운 활용법처럼. 설탕이 독이라는 데 동의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그중에서 가장 순수한 설탕의 혐오자들은 의사가 아니라 알콜중독자들이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개 단맛을 싫어하다못해 거기에 반대하기까지 한다. 그들에게 달콤한 것은 오직 술이면 족하다는 듯이. 그러나 그들은 모르지. 아침의 오믈렛에, 짭짤한 비스킷에, 심지어 튀김옷 반죽에도 비밀스럽게 존재하는 설탕. 설탕을 잽싸게 뿌려 넣는 어떤 사람의 손. 아침을 만드는 사람의 손. 안주를 만드는 손. 여자. 여자의 손. 묶인. 찔린. 찢긴. 손. 희고 검고 누럼 세계의 손. 여자가 가진 손. 레이디스 핑거. 쿠기의 이름. 알코올 중독자 중에도 여자가 많은데 누군가 그들에겐 각별히 키친 드링커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 내 위장을 들여다볼 검사관은 술을 아주 많이 마시는 여자였으면 좋겠다. 알코올 중독자라면 더할 나위 없다.

 

 

 

 

 

아침

 

간밤에 바에서 가벼운 프로세코를 한 병 주문했다. 산듯하고 청량했다. 천천히  두 잔을 마신 뒤에 아페롤과 칵테일 글라스를 청했다. 글라스에 아페롤을 약간 따르고 거기에 프로세코를 가득 채웠다. 달콤하고 향기로웠다. 초여름의 휴영지에 잘 어울리는 선택이다. 프로세코가 다 떨어져서 우아한 동작을 즐겁게 감상했다. 샴페인 잔을 들고 테라스에 나가니 호숫가의 야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재스민 향기와 잔디 깎은 냄새, 물비린내가 섞인 바람이 불어왔다. 검은 호수 위로 잔물결이 부서진 샹들리에처럼 반짝였다. 완벽한 밤이었다. 체라스 난간에 올라가 그대로 떨어지고픈 강렬한 충동이 일었다. 충동을 억누르느라 애쓰던 중 내가 취했음을 깨달았다. 옷깃을 여미고, 글라스를 테이블에 올려두고, 종업원들에게 인사를 건넨 뒤 방으로 돌아왔다. 방문을 열자 나의 갈색 트렁크와 푸른 원피스, 잘 닦아둔 검은 구두가 그대로 잘 놓여 있었다. 창밖에서는 아직도 호수의 물결이 반짝이고 있었기에 나는 책상 위의 펜을 집어 글을 쓸 뻔했다. "나는 매번 무거운 문을 밀면서 왔습니다......" 지금 내 앞에는 빈 종이가 한 장 있을 따름이다.

 

 

 

 

 

 

아침

 

  손목시계를 차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 시계는 내가 가진 가장 무거운 금속일 것이다. 얼핏 보면 번쩍이는 금팔찌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황동으로 만들어 저미도록 얇은 금박을 입힌 시계다. 나는 과시적인 장신구를 좋아하지 않지만 유행을 완전히 무시하지도 않는다. 크고 빛나는 것을 목, 귀, 손가락에 전부 휘감는 대신 팔목에 하나 정도 걸기. 이것이 내가 유행을 따르는 방식이다. 치장의 욕구는 내가 잘 조절해온 충동의 하나다. 갑싼 여자로 보이고 싶지 않다. 죽임당한 여자 대신 죽음을 선택한 여자로 보였으면 좋겠다. 이상한 일이지. 장신구를 사는 데엔 돈이 든다. 고귀한 여자는 돈을 쓰지 않는가? 성모님이라면 돈을 쓰는 일은 없겠지...... 하지만 성모상은 얼마나 화려한가! 성모님도 죽은 여자라고 볼 수 있을까? 죽어도 죽지 않는 여자라고 해야 하나. 나도 집에 성모상과 초로 꾸민 간이 제단을 갖추고 있지만, 이제 초를 밝히고 성모께 기도를 드리는 일은 영영 없을 것이다.

  깊은 강바닥에서 댐을 만드는 수부들은 납덩이로 만든 허리띠를 찬다고 한다. 시계를 찬들, 허리띠를 찬들, 내게 손목이나 허리가 남아 있으려나.

 

 

 

 

 

 

아침

 

  멀리서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린다. 빨강, 파랑, 노랑 색색의 공들이 높이 떠오르고 떨어지고, 아이들은 얕은 물에서 놀고 어른들은 호숫가에서 일광욕을 한다. 그토록 조용히던 밤이 이토록 많은 사람들을 쏟아내다니. 그래 나는 해가 뜨지 않는 아침을 찾으려 이곳에 왔지. 숱한, 헛된 밤을 따라온 것이 아니다. 아이들이 웃는 소리를 듣는다. 양산을 쓴 숙녀들의 속삭임도 호숫가를 따라 천천히 걷는다. 깨끗하고 예쁜 조약돌을 찾아 주머니에 넣는다.

 

 

 

 

 

 

아침

 

나에 관해서라면 아무것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곧 누군가는 알아차려 주리라. 얼마나 지나야 할까? 누군가. 누구일까? 여러 명일까? 단 한 사람일까? 남자일까? 여자일까? 남자일 것 같다. 그이는 뜨내기 순정일까. 별 어려움을 모르고 자란 젊은 남자일까. 물론 산전수전 다 겪었을 수도 있지. 상관없다. 아니, 상관있다. 나는 죽은 자의 얼굴을 하고 있겠지. 죽은 장의 얼굴이 어떤 것인지는 몰라도 죽은 자의 얼굴이겠지. 틀림없이. 그는 눈썹을 높이 들어올리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침을 꿀꺽 삼킬까. 경험이 많은 중년의 경감일지도 몰라. 수영을 잘하는 어린 아이라면 어쩌지? 엄마 심부름을 끝내고 한달음에 호숫가로 달려와 옷을 벗어던지고 날씬한 전갱이처럼 헤엄치던 아이라면 어저지. 그 애가 여자애라면 어떡하지. 어떡하긴. 달려! 전속력으로 뛰어가렴. 가가운 건물 쪽으로. 옷은 되도록 주워 입고. 네가 발견한 끔찍한 광경을 가장 먼저 만나는 어른에게 알리렴. 너는 울거나, 소리 지르거나, 주저앉을 지도 모른다. 괜찮아. 털어놓은 다음엔 되도록 빨리 잊어. 전부 잊어버려. 친구들에게 너의 무용담을 자랑하며 떠벌려도 좋다. 그럼 더 빨리 희미해지겠지. 이보다 더 무섭게 만들 수는 없을 거야. 걱정 마. 금찍한 일은 어른들에게 맡기고, 모두 잊어버려.

 

 

 

 

 

 

차회 예고

 

다음 편에서도 주인공은 죽지 않고

이야기는 계속된다는 예고,

대신 조연 중 누군가 희생될지도 모른다.

다음 편에서 나는 손수건을 꼭 쥐고 울 준비를 하고.

울고 난 뒤의 지루함을 버틸 채비를

과자를 준비한다. 우유를 따른다.

다음 편의 그다음 편에도

예고가 있나? 이야기는 계속

되나? 여보세요.

가다듬은 목소리로 자,

 

왼손 역지 끝마디에

새카만 점이 한 개 생겼습니다.

구두점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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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 인간 / 김범남

 

  허름한 옷 입고 재즈만 듣는다. 사랑의 원가에 애착의 비용을 들인다. 가끔 일상은 사람을 멀어지게 만든다. 거리와 집

착의 변수에 비례해 만각된다. 비위에 거슬리는 언행으로 허덕거린다.


  나머지도 인간이다.


  이틀간 잠만 잔다. 수면 부족과 의욕상실증이 만든 침착함이다. 잉여가 없는 느린 속도를 즐긴다. 기억은 꿈을 만들고,

우연은 희망이 된다. 액세서리 지식을 걸치고 동굴로 들어간다. 틈을 타고 빛이 침투한다.


  방관자도 나머지 일부다.


  역방향과 정방향, 선택을 종용한다. 기울어진 생각으로 방향을 찾는다. 모순이다. 모서리와 모퉁이도 나머지다. 일부가

모여 전부가 된다. 구석을 찾을수록 신경은 예민해진다. 평면의 날카로움이 보인다.


  남는 인간이 나머지다.
  남은 인간도
  나머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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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시를 읽는 사유의 맛, 시인 역량 가늠하기 충분”

 

얼마나 많은 기다림이 있었을까요. 간절함이란 상자를 설렘으로 열었습니다. 조심스럽게 읽으면서 먼저 심사기준에 못 미치는 시를 상자에서 덜어내었습니다. 억지로 쓴 시, 형식만 시인 시, 엄살과 과장이 넘치는 시, 시적 자유란 이름으로 비문을 마구 늘어놓은 시, 밋밋한 문장을 행만 갈라놓은 시 등이 먼저 상자를 떠났습니다.

 

그리하여 ‘나머지 인간’ 외 4편과 ‘지리산 편지’ 외 3편이 남았습니다. 다시 몇 편을 더 뽑았지만, 또 두 편만 남아서 우열을 겨루게 되었습니다. 어느 누가 당선돼도 영광스러운 제1회 당선작으로 손색이 없었습니다.

 

마지막까지 겨루다가 선에서 밀려난 작가의 작품은 삶을 진솔하고 감동적으로 읽어내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문장을 명랑하게 다루면서도 의미의 벼릿줄을 놓치지 않는 시였습니다. 그런데 왠지 오십 년 이전의 어느 농촌 마을을 거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신춘문예 응모가 아닌 개인 시집에 들어가면 어색하지 않았을 텐데, 새로운 시와 시인을 기다리는 신춘문예라서 아쉽게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선작으로 뽑힌 ‘나머지 인간’ 외 4편은 행간이 넓고 의미가 깊게 압축된 시였습니다. 언뜻 보면 불친절하지만, 촘촘한 의미의 집을 열고 들어가면 시를 읽는 사유의 맛을 한층 느낄 수 있는 시들이었습니다. 각 연과 행이 직조한 복층 구조는 시인의 역량을 가늠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이제 공감과 감동이라는 보편적 예술 가치에도 혼신의 힘을 기울이시길 바랍니다. 나 혼자만의 어깨 울음에서 모두의 어깨춤으로 나아가는 시를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선에서 밀려난 분들에게는 곧 더 좋은 일이 당도하리라 믿습니다. 거듭 당선을 축하드립니다.

 

- 심사위원 이정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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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그리운 상어 / 이은원

 

어떤 소리는 먼 데서 굴러온다

멀리서 오는 것들은 쉬 눈에 띄지 않는다

소리의 바퀴는 날카롭고 건강한 이빨을 가졌지만

함부로 물진 않는다

 

희부연한 동체가 물끄러미 미끄러져가는

먼 훗날 바다속 이야기

그것은 간격과 반격에 대한 사유

간격은 빛과 어둠을 만들고

너와 나를 만들고

깊은 물살을 만든다

 

꼬리를 만들고

지느러미를 만들고

차르르 차르르 데본기의 바다를 유영한다

우리는 붙잡히기 위해 달아나고

사라지기 위해 나타난다

 

부레가 없어 끊임없이 폐달을 밟아야 하는

운명의 바퀴살은 한곳에 머무는 순간 사라져버릴 것이다

장렬히 끝내는 것만이 최선이었던

사랑이라는 형태가 주는 기기묘묘한 내용들

기억은 떼를 지어 몰려다니는 습성이 있다

 

가을이 오면

붉은 나무는 붉은 눈물을 흘리고

모든 소리는 네게로 선회하는 날개를 가진다

붙어있던 것들이 떨어져 나가는 소리

먼 데로 굴러가는 소리

 

그리움은 어딘가 오고 있을 먼 먼 사랑의 시제

구김살 있는 삶의 정경과 전방위적 슬픔

핏빛 주검들 사이로

막가는 재미를 바퀴는 안다

 

차르르 차르르 먼 길 돌아

나는 나에게 도착한다

소리가 소리를 반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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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의 노래

 

마음은 고여본 적 없다

 

마음이 예쁘다고 말한다고 해서 그 마음이 영영 예쁘게 있을 수는 없고, 마음이 무겁다고 말한다고 해서 내 마음이 계속 무거울 수는 없는 것이다.. 마음은 도대체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그건 미주와 미주라고 생각했던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앉아 다른 책을 읽다가

 

뒷목 위로

 

언젠가 미주가 제목을 짚어주었던 노래가 흘러나오고

미주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미주를 바라보았을 때

미주만이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이다

 

아무리 마음이 따뜻하다고 말해도 미주의 마음이 따뜻한 채로 있을 수는 없단 말입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도무지 없는 것이라서, 마음이 흐를 곳을 내버려둘 뿐입니다.

 

너는 미주의 노래와 만난 적 없다

미주의 노래는 처음부터 끝까지 미주의 노래일 뿐이다

 

 

 

 

 

오늘 태어나는 말들에게

 

오늘 우리는

누군가의 낮에 그늘을 만들 수도 있고

누군가의 밤에서 어둠을 몰아낼 수도 있다

 

말이 생각에서 태어났다고 해야 할가요. 공기에서 태어났다고 해야 할가요. 진짜 같은 말과 가짜 같은 말들, 아마도. 조금은. 언젠가와 같은 단어는 마음이 숨도록 내버려두기 좋습니다. 진짜 같은 마음에 취하도록 빚으시고 사랑을 증거하지 못하도록 만드신 날들.

 

어쨌거나 말은 지금 여기에서 태어났다는 말은 이곳을 맴돌다가 누구의 귓가에 뿌리를 내리고, 마음이 흐를 때 말은 곧이곧대로 흐르기로 결심한다

 

꿈에서 만날 수 있는 얼굴들, 당신이 기억에서 왔다면 이 꿈이 끝난 뒤에는 어디로 갑니까. 누구에게 건넨 말들은 누구의 귓가에 뿌리내립니까. 영영 모르는 이의 귓가로 흘러가는 가요. 평생을 솜털처럼 날아가는가요. 내 뜻과는 상관없네요.

 

사선으로 놓인 빛을 따라 말들이 지나간다 시간보다 이른 속도로 도착하고 있다

 

그 애는 혼자서도 먼 곳으로 흐르며 일렁이고 있다

영원히 오해받을 수 있는 시간들 오해받아야 하는 시간들

언제고 뒤늦은 시간들 속에서

 

 

 

 

 

 

내게 기쁨만을 보여주세요

 

당신은 매일매일 같은 시간에 나타나 우리는 언덕 위에 일렬로 서서 총을 겨누고 언제나 충분히 죽이지 못해서 그 환한 낮이면 다시

 

낮마다 언덕을 기어 올라가고

나는 당신을 죽이고

잠을 자고 일어나서 다시

언덕을 기어 올라가고

늘 같은 하루를 살고 당신에게 겨누며

우리는 얼어 죽였고 당신은 언덕을 기어 올라가고

 

내게 기쁨만을 알게 해줘요 당신은 언덕을 올라오고 싶지만 언젠가 도착하고 싶지만 않고 조금은 발을 멀리 뗀 채로 그래야만 바다에 떠밀려 짖지도 않고 그렇다고 발 딛고 살아갈 용기는 없는 그렇게 언덕을 닿지는 못한 채로

 

영원히 언덕을 올라가고만 싶은 사람으로

 

그렇게 남아주세요

 

당신이 나를 기억하고 있어요

아둔하게 웃어요 영원히 달려요

 

 

 

 

 

 

물 위에지은 집

어젯밤에 삼킨 알약이. 아침까지. 씁쓸하게 맴도는 이유가 뭐야. 몰라. 알 게 뭐야

 

언제부터 아무개 씨. 하고 부르는 일이 익숙해졌을가. 외로울가봐 나는 집에도 못 가요. 이상하고 어눌한 사투리로

 

씩씩하게. 올라가는 역사의 에스컬레이터. 가방근을 두 손으로 쥐고. 명량만화에 나오는 누구처럼. CCTV를 노려보며. 익숙해지지 않도록. 중요한 느낌이 그냥 지나가버리지 않도록

 

숲에 물감을 엎질렀는데, 다행히 홍수를 피해서 다시 색칠할 수 있어요. 다시 색칠하면 돼요.(정말?) 오늘은 명량소녀 내일은 말괄량이. 그래도 항생제는 쓰리게 녹고 나는 녹아내리는 그의 집이 되고. 

 

그럼 언젠가는 나 쉴 곳도 내가 될까요?

 

놓인 것은 열하나. 약은 물에서 느리게 녹고, 쉽게 삼킨다. 너도 위로가 필요하니. 고개를 숙이면 쏟아지는 하루. 혼자 돌아오는 길도 모르는. 저 너머의 수도꼭지

 

 

 

 

 

 

식도염

 

집에 들어가는 것은

내가 아는 가장 괜찮은 기억을 낚으러 가는 일입니다

 

닫힌 문을 열며 머뭇거립니다 생경한 예감입니다

 

안으로

다시 나오지 못할 만큼 안으로 들어갑니다

내 방으로 들어갑니다 저 방에 들렀다가 다시 나와도 됩니다

여전히 내 방이거든요

 

손님이 끊긴 지 오래인지라 가지고 있는 기억은 조약합니다

 

해묵은 독에서 어제의 쌀을 길어 올립니다

낡은 가구를 고쳐 쓰는 일이 즐겁습니다

나도 모르게 떨어뜨린 물건들을 찾으러 다닙니다

 

이 안에는 오직 내가 걸어온 무구한 길

손수 만든 발자국으로만 채웠습니다 그러나

가끔은 초대하지 않은 그림이 걸리기도 합니다

 

그 누구 여기에 있으라 한 적 없지만

가난한 마음으로도 충분히 이곳을 지깁니다

 

묵은 쌀의 까끌함이

살아 있다는 괴로움을 쏟아붓습니다

 

괜찮습니다

 

오늘의 쌀을 씹어 삼키지 못하는 것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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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제조공장 굴뚝에 사는 소녀를 아니? 4편 / 정성원

 

 

일정한 무게를 가진 안개

폐가 부풀어 하늘로 붕붕 뜬다면 누구 배 좀 눌러주실 분?

 

허공에서 소녀가 뿜는 안개는 단조로운 모양이야

 

이를테면

 

안개공장장이 소녀로 가득 찬 옷장을 가졌다든지 한 명씩 꺼내 속을 갈라본다든지 겉은 늙고 속은 생생한 아이러니를 마주한다든지

 

옷장의 소녀가 갈라지는 건 단추야

그럼에도 심장이라 우겨볼까

 

상관없고,

 

소녀는 달마다 죽은 태양을 낳는다

 

죽은 태양에 뿌리내린 안개나무, 온기를 흡수하지 못한 꽃송이, <찾습니다> 전단지가 소리 지르며 피어나는 계절에

 

나무마다 물이 오르고

 

수많은 실종이 만개하는 모습은 어떨 것 같아?

 

멈추지 않는 는개, 머리어깨무릎발무릎발, 멈추지 않는 노래,

 

상실은 자주 노래를 부르게 한다

노래를 뿜어내는 굴뚝에서

 

포식자가 된 안개를 모른 척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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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무지 잠들지 않는 밤엔 해바라기를 생각해요

 

 

양이 울타리를 넘는다

 

양털베개를 벤다 양은 찢어진 입과 긴 손가락을 가졌다 숨을 마시려 배를 달싹일 때마다 밀쳐둔 잠이 일렁인다

 

해바라기 뿌리에 숨겨둔 태양은 집으로 갔을까

어리석은 글자를 쓴 날엔 더욱 허기지는 밤이 찾아오고

 

어둠이 입속으로 쏟아진다 단단한 글자가 심장을 찌른다

손가락을 펼치니 한낮이 보이고 한밤이 보이고

양이 울타리를 넘는다

 

허리를 동그랗게 말고 나를 빼곡히 알아가는 밤

불면은 불멸이 될 것이고 내 몸엔 양털이 돋을 것이고

 

해바라기가 허공으로 길을 내는 곳에서

 

눈을 감는다

생각과 생각 사이에서 꽃이 핀다 꽃잎이 흩날리는 벽지에 잠이 뒤척인다

 

점점 두꺼워지는 어둠

기분을 굽힌 잠이 어둠을 삼키다

 

일흔아홉 여든 마리, 이리저리 몸을 들썩이다가

 

빙글빙글 도는 해바라기 벽지를 본다 다시 눈을 감는다 양이 울타리를 넘는다

 

 

 

 

 

 

 

깊은 개념은 얕은 문학시간에 다 배운 것 같아요

 

봄을 가르치지 않는 학교에서 시를 배운다

시의 해석을 받아 적는 것은 신물 나는 일,

 

나에게 주어진 하늘은 네모난 창

위로의 말이 창밖에서 서성인다

 

이팝나무와 나비를 구분 못 하는 눈이 나에게 필요할까요 눈을 바람에게 주고 깊은 잠에 빠질까요

 

수척한 바람이 손짓을 한다

 

떨어지는 꽃잎이 구름 쪽으로 가닿는다

 

구름 너머 보이는 아버지

바다에서 출렁여야 할 당신이 햇볕물살을 그물에 담고 있다

 

빌어먹을 아버지,

나는 지금 푸른 비늘이 필요하다고요

 

이쯤에서

아버지에게 날개를 입혀주면 흥미로울까

 

. 생각 말고 잘- 생각하라던 문학 수업은 순전히 말장난

형식적인 문학 선생은 건조한 기호

아버지와 나는 아빠와 구름이라는 단조로운 공감각

언어를 탐색하는 우리는 일그러진 교실의 자화상

 

끝나는 종이 울린다

날개 입은 아버지가 손을 뻗는다

 

구름이 곡진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손가락선인장

 

장마가 시작되면 마르는 것을 생각해

비의 그림자가 버석거린다 냄새는 말캉하고

 

죽으면서 경쾌한 비

 

젖는 곳이 있다면 한쪽에선 증발하는 마음

 

공평한 방식으로 비가 내린다

 

비의 얼룩이 지워지면 백단이 핀다

오아시스로 가자, 서로의 손가락을 깨물며 광활한 모래 언덕으로 가자

 

갈망은 처음부터 목이 마르는 목적을 가졌지

그것은 행선지를 방황하는 모래알갱이처럼 우리의 방황이 깊어진다는 말

 

등을 구부릴 때마다 굴곡진 생의 촉수를 달고

한 번도 내 편인 적 없는 너를 생각할래

 

백단 숲에 손가락이 핀다

알 수 없는 감정이 괜찮다는 표정으로 흔들린다

비의 내용을 기록하는 손가락이 버석거린다

 

 

 

 

 

 

혼자 울어야 해서 시시한 상상만 해요

 

 

비밀을 도모했대

그러니까 우리는 하늘을 갖기로 했다는 말이래

비둘기 깃을 빌려 입고 하늘에 가까워질 때 시력을 나눠주기로 한 거래

 

꽤 기분 좋은 날이었대

 

손바닥을 펼치면 별의 잔해가 빼곡했대

그런 날은 많은 문을 그렸대

반짝이는 것을 보면 다 열 것 같았던 문은 종일 닫혀 있었대

 

뒤를 보아야 하는 순간을 모른 척한 거래

그렇다고 앞을 보는 것이 쉬웠다는 말은 아니래

 

쉽게 죽어야 하는 것들과 어렵게 살아야 하는 것들을 생각했대

하늘이 내일이라는 말 같아서 내일에 동조하지 않기로 했대

 

비둘기는 어쩌다가 인간의 눈을 탐내게 되었을까

 

비둘기 깃을 빌리는 날이 늘어갈수록 눈이 흐려졌대

비둘기는 자기가 사람 족속이 다 된 줄 알았대

 

뜸뜸하게 운 것 같기도 했다는데

 

별 냄새가 진동하는 밤에는 눈이 먼저 아파왔대

 

비둘기가 눈알을 쪼아 먹는 상상을 했대

숨을 크게 들이쉬고 팔을 활짝 펼쳤대

 

비둘기 깃을 입었대

날아야 하는 순간에도 발은 그대로 땅이더래

 

우리는 비밀에 침묵해야 했대

침묵할수록 또렷해지는 순간이 스펙트럼으로 터지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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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에서 텔레비전 보기  4편 / 문이례

우리(We)와 우리(Cage) 사이

 

 

밖은 우리의 함정이었다

 

울타리를 친다는 건 거부의 표시일까

 

아무도 침범하지 않고 경계를 무너뜨리지 않는 게 관계망이라면 문 안쪽은 안전하다는 거겠지, 포식자가 걸어온 길엔 왜 자꾸 문이 사라지는 거니! 서로를 겪는 방식이 달라 곳곳에 우리가 필요했지 우리는,

 

우리가 있어 슬프다가도 우리가 있어서 안전하다는 생각

 

아이들과 동물원에 온 인솔교사는 호랑이보고 귀엽다를 난발하고

발톱을 감춘 호랑이가 원하는 게 뭔지, 이들의 뇌 속 세계

 

아무것도 모르는 해는 척, , , 돌아가고

 

어제는 아버지랑 실랑이하다가 휴지통이 날아왔지

변화구를 던지듯 심각하게 노려보던 눈

 

누군가의 내일이 여기라면

사각이 좀 더 안전한 방법이길,

 

모서리는 깎이더라도 우리의 안전이 될 수 있다는 모순!

 

매일매일 갇힌 동물처럼

어느 것 하나 함께라 부를 수 없는 나의 우리를

동물원 가서 묻는다, 갇힌 슬픔이 튀어나와 나를 덮칠 것 같아도

 

벗어나지 못하는 건 나만이 아니라는 것

물려받은 유전자가 그렇다는 걸

 

동물은 왕국을 포기하고,

텔레비전을 보는 우리는 우리를 훌쩍 뛰어넘지 못하는데

밖은 여전히 우리를 뛰쳐나간 아이들의 뒤집기가 한창이다

 

우리가 모르는 우리가 가끔 내 눈에만 보이지만

선뜻 먹이를 주지도

손을 내밀지도 않는

 

목숨을 건

네모 속 갇힌 최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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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넛방, 그 숲

 

홀연 문을 밀면 나무의 말이 들릴까요

 

꽉 닫힌 그의 서랍을 열 때는 무엇을 먼저 꺼낼까

누구도 예측 못 한 새들의 변명은 겨울이명으로 남아

두 귀는 뾰두라지처럼 감정을 부풀리고 있어요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무너지고 마는 폭설의 위협

어디까지가 그 서랍의 내면인지

 

자물통을 채우지 않아도

종종 열리지 않던

서로의 걸음은 그렇게 갈무리되죠

 

말의 눈꺼풀을 들춰보면 바람의 문자들이 적혀 있을 거예요

 

입을 닫고 각자의 방으로 흘러간 물관처럼

누구라도 소리 지를 것 같은 계단의 침묵

 

새벽녘, 초인종이 울리면 두려워요

숲을 훔쳐 사라진 달이라도 품어야 할지

아무 뜻 없이 읊조리는 후렴을 읽을 수 없어

모래폭풍이 지나간 빈방만 쳐다보죠

 

나무의 냄새를 좇고 있는

서랍 속엔 꺼내지 못한 말이 웅크리고 있어요

 

그냥 문을 닫기 두려워

내 귀가 열릴 때까지

 

새의 게스트하우스를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고 돌아서죠 

 

 

 

 

 

청춘들

  

1교시

 

실제처럼, 어설픈 엉덩이라도 흔들면

 

가벼운 손뼉쯤을 받을 수 있을까 구령이 반복되면, 어쭙잖은 농담들은 계속해서 따라붙고,

애인은 묻지 않은 내 엉덩이만 놀리지

하나 하면 둘이 아닌, ‘ 하고 걸어가는 발맞추기

 

-여긴 민방위 훈련장입니다!

 

아무도 뛰지 않는

저 밀림 속으로 맹렬하게 달려가는 공상으로

뒤뚱뒤뚱 엉덩이는 훈련 중,

술만 마시면 떠들던 옛 애인은

수영도 못하면서 해병대 나왔다 자랑질이고, 특수부대 나온 그 친구의 친구는 여자 뒤만 졸졸 따라다니다 돈만 털리고 차였다지

어정쩡한 하루

발이 묶인 우린 별수 없이 애인이랑 훈련 같지 않은 훈련으로 뒹굴고 나면, 온몸에선 땀이라도 나야지

하루는 어디서 보상받아야 할지, 서로의 총구 갖고 장난치듯

가슴 향해

빵야…… 빵야…… 하고 싶은

 

2교시

 

모든 지하는 구멍으로 통한다는 걸,

버스를 탈출해 지하로 흘러든 날

암흑 속에 갇힌 짐승도 웃음꽃이 피었지

지하를 지하고

올라오면

지켜야 하는 게 뭔지도 모를

주어 없이, 주인 없이

쏟아지는 햇살에 뿌루퉁해진 빨간 입술들

차라리 교복이라도 입고 뛸 걸 하는 생각

내가 똥개가 된 듯, 훈련 뒤의 어두운 그림자처럼

책상다리라도 있었으면

굴러가는 바퀴처럼, 치워진 책상다리 밑으로

이 도시의 착란을

 

민방위는 없고, 민간과 방위만 있는 21세기

 

교실로 들어서면 훈련보다 더 한 세상이 펼쳐지던 그때로 고! ! !

배가 고픈 아이처럼 매점으로 뛰어가던,

 

도로는 버스를 재촉하고

내 뱃속 훈련이라도 마치기 위해

이제 뛰어야지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여전히 훈련 중인

어정쩡한 오후를 씹고 있는

청춘들

 

 

 

 

 

입양

   

250가지의 항목을 꼼꼼히 표시하고도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모른 채

 

거품은 제거해주시고

속은 냉정하고 겉은 부드럽게

 

뜨거운 심장도 추가해주세요

 

커피에 샷 추가를 외치듯, 그 느낌만 품고 가족을 원하던 그녀

유리잔처럼 투명한 낯빛에도 가끔 그늘이 지듯

 

받아 든 주문서에 걸크러쉬한 속내를 내비치더니, 인큐베이터 속 빛이 들어오면 모르는 세계가 쿵, 떨어질 것 같아 조바심을 쳤다

 

카페 안엔 정자를 구하는 많은 여자가 주문서 들고 줄을 서고

 

아이 1, 2, 3, 4는 빛을 보기 시작하였다

 

한 여자가 투덜거리며 카페를 나서도

서로의 감각은 아닌 척,

주문서를 뽑으면 다시 샷 추가할 수 없다는 경고문만 입구에 나풀거리는데

 

커피 그라인더에서 나온, 단맛과 신맛이 혀를 마비시킬 동안

씁쓰레한 세상은, 우리의 웃음과 눈물까지 걸러내는지

 

아빠가 없어도 찾지 않는다. 체크

혼자서도 척척 일을 잘한다. 체크

놀이동산에 가자고 떼쓰지 않는다. , 등에 체크를 하고 있는 이들

 

아이는 어떤가요? 라는 질문에는

아직 잘!

차차 입맛에 적응되겠죠!

부적처럼 달고 다니는

 

엄마가 내 첫인상을 견디는 것처럼

난 태어나 한 번도 울지 않는 나를 견디는

 

여전히 카페 안은 샷 추가로 붐비고 

 


 

 

 

반사거울

  

걷는 것이 서툰 아이에겐

주춤거리는 억양은 집에 두고

 

마트료시카 인형처럼 숨겨진 얼굴이 불쑥 튀어나와, 아기일 때도 어른일 때도 항상 나는 없는, 난 나일 때가 제일 좋은

 

침대 밑에서 종일 입을 뾰족하게 만들지!

 

친척들을 만날 때는, 복사에 복사를 반복하는 입꼬리는 없어도, 거울만 툭, 툭 내밀면 난반사된 얼굴들 튕겨 나가는데 아니라고, 아니라고

 

어제의 대화는 어디에 박혀 있는지, 부메랑처럼 돌아오는 그들의 궁금증

 

자고 일어나면 어항 속에 갇힌 금붕어가 된 이야기, 입을 벌린 내게 쏟아지는 엄마의 알 수 없는 얼굴

 

부유물처럼 둥둥 떠다니는데,

 

나라는 아이는 하얗게 포장되어 침대 밑에 두고

사진 속 그는 책상에 앉아 고개만 끄떡이네,

 

울렁증을 앓듯 허파가 벌렁거려 쓸데없이 손톱만 뜯고 있는데

 

착한아이라서 그래,

그런 쪽팔리는 말 이제 사양할게

 

주머니 속 거울 꺼내 가십거리 얼굴 닦아내면

물방울처럼 사라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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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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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동욱

 

 

호스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면

물줄기는 날카로워진다

연약함을 가장하지 않는다

 

다시 아침

어김없이 남자는 옥상에 올라

채소에 물을 준다 채소는

스티로폼 박스에 담겨 있다 정확히

박스는 사각의 스티로폼, 하얗게

모여 있는 알이 위태롭다

 

옥상 아래 아이들은 잠들어 있고

언제 깨어나 울지 모른다, 시커멓게

동굴 같은 입 가득 허기를 물고 남자에게 물을지 모른다

그건, 아직, 네가 알 수 없는 일

아내는 왜 나비를 좋아했을까

 

남자는 채소에 물을 준다

언젠가 하얀 뿌리까지 닿을 수 있을까

자주 뽑히는 너희는 왜 이다지 순종적인가

왜 우리는 반복되는가

어서 자라라

다시 돌아오지 말아라

남자는 호스를 움켜 쥔다

우리는 무해한 짐승일까

 

초식동물 목덜미를 파고드는 송곳니처럼

담장 위로 박혀 있는 병조각이 햇빛과 첨예하다

 

 

 

여우의 빛

 

nefing.com

 

 

부천문화재단은 1322회 수주문학상수상작에 이동욱(42) 시인의 ()’를 선정했다.

 

수주문학상은 부천 출신 시인 수주 변영로(1897~1961)를 기리기 위해 제정됐다. 전국 문학인 404명이 지원한 이번 문학상의 출품작은 총 3,308편이다.

 

심사위원단은 이미지의 전면화, 이미지를 제시하는 새롭고 신선한 언어의 운동이 눈길을 끌었다날카로운 물줄기의 반복과 채소의 순종이 대비되는 장면이 강렬하고 참신하다고 평가하며 선정 이유를 밝혔다.

 

수상자 이동욱 시인은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바위제목의 글로 수상소감을 대신하고 이번 수상을 통해 시인으로서 나아갈 길을 명확하게 깨달았다는 소감을 밝혔다.

 

이동욱 시인은 200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과 200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당선됐으며, 2019년 소설집 여우의 빛을 출간했다.

 

수주문학상은 수주 변영로 선생의 올곧은 시 정신과 뛰어난 문학성을 잇고 발전시키기 위해 1999년 제정됐다. 시 부문 문학상으로 수주문학제 운영위원회와 부천문화재단이 주관하며 부천시가 주최한다. 수상자는 상금 1,000만 원을 받고 당선작은 현대시’ 9월호에 게재될 예정이다.

 

시상식은 919일 복사골문화센터 2층 복사골갤러리에서 열리며 수주 변영로의 정신을 연구하는 콜로키움을 함께 가질 계획이다. 이날은 9월 초 당선작 발표 예정인 부천신인문학상의 시상식도 열려 부천에서 발굴한 신인과 지역 문학인들이 함께 만나는 자리로 준비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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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은 손 / 김철

 

 

지금은 폐업한 저곳은

한때 똑같은 손들이 쉴 새 없던 곳

어떤 손에 맡겨도 척척 만들어지던 것들이

가끔은 손가락을 찌를 때

그때만 잠깐 달라지던 손, 손들

늙은 엄마의 똥 귀저기를 갈던 손

치켜든 주먹을 만류하던 손

도시락을 싸고 설거지를 하고

이스트처럼 부풀던 제빵사 필기 문제집을 넘기던 손

온갖 손들이 모여 똑같은 일을 하던 곳

가장 낮은 단가의 수량들이

최저임금으로 쏜살같던 곳

백 개를 조립하면 은전 몇 닢

만개를 조립하면 아껴먹어야 하는

, 뿌듯한 삼겹살

언뜻 보면 백 송이도 넘는

활짝 핀 목련꽃같이 모여 있던 손들

그리고 형광등 아래 거대한 몸통의 자본

그 자본의 한 부분만 만들어 내던

가난한 밑천 같던 가내 수공업

조각만 만지다 전체를 잃어버리는

똑같은 손들의 저 아득한

하청의 하층들

 

 

 

살아남은 자의 도시

 

nefing.com

 

 

전태일의 노동해방, 인간해방 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1988년 제정된 전태일문학상이 올해로 27회째를 맞았습니다. 그 짝인 전태일청소년문학상도 올해로 벌써 14회째입니다.

 

27회 전태일문학상에는 시 192/753, 소설 97/118, 생활·기록문 77/104편이 접수되었습니다. 14회 청소년문학상에는 시 145/491, 산문 149/154, 독후감 35/35편이 응모되었습니다.

 

전태일문학상 시 부문 당선작은 똑같은 손4편입니다. 시인이 선택한 제재들을 그려내는 상상력이 좋습니다. 노동에 대한 주제 의식도 깊습니다. 투고한 작품들 모두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 단단해질 거라는 믿음도 들었습니다. 하청의 하층을 작업하는 손들, 단체 행동하는 블루컬러의 나무들, 스탬프를 먹는 저녁 등을 인식하는 시인의 시선이 환기력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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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상] 원창리 13호 / 허남훈

 

원창리 13호

 

누가 아직 밥을 먹고 있다

 

반쯤 열린 대문과 빨랫줄의 팬티와 널브러진 신발들은 한통속이다

 

숨죽인 나는

결의에 찬 그 아침의 사내처럼

아니 결례 앞에 주저하는 순한 청년처럼

아니 사실은 밀정처럼

 

대문가를 서성인다

 

80년이 지나도록 이곳에

표지석 하나 세우지 못한 우리가

 

배신자가 아니라면 누가,

 

아직 밥을 먹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회중시계의 바늘은 날카로워졌을 것이다

뱃속의 쇠고기 국은 더 뜨거워졌을 것이다

 

“선생님, 저와 시계를 바꾸시죠. 제게는 이제 한 시간 밖에 소용없는

물건입니다”

 

프랑스 조계 화룡로 원창리 13호

백범 김구의 낡은 시계를 품은 사내가, 두 아이의 아빠가, 스물다섯

의 청년이,

도시락과 수통을 들고 집을 나선다 그 아침의 소풍을,

그 영원한 찰나를, 담대한 선택과 직시를

 

뒤쫓던 나는 놓치고 만다

그랬을 것이다 그는,

아니 그들은 행적을 지우며 빠르게 걸었을 것이다

상하이에서, 항저우에서, 난징, 하얼빈, 그리고 광저우에서

 

상하이 하비로 312호

임시정부의 두 번째 청사 터에 들어선 H&M 매장

그 화려한 네온사인 아래로

중절모에 회색 양복을 입은 사내가 바삐 걸어간다

 

그날,

가지고 간 도시락이 아직 남아 있다

누가 아직

 

 

 

 

 

[우수상] 독도의 노래 / 윤빛나

 

 

독도의 노래 출렁이는 어머니의 수첩

다시 파랑의 책갈피를 넘길 때

사자의 화음, 광휘를 번득이던 황금빛 동해 언덕

혹등고래 떼 우글거리던 영원의 바다가

독도의 심장에 정박하여 우람하다.

민족의 발자국 첨벙첨벙 백의의 역사.

물떼 묻은 하얀 손이 강철같은 정의의 밧줄을 뿌려

접안을 시도하던 겨레의 가슴들

백두의 바다가 태산처럼 독도를 세우던 무궁화의 아침.

사자의 바다가 과묵한 반도(半島)를 깨우고

푸른 가산도를 베고 누운 태평양의 한낮

하얀 우주의 시계 위에 건곤감리(乾坤坎離)

진리의 나래가 닳고 닳아도

청홍백(靑紅白), 불멸의 지느러미를 휘두르던 독도.

청룡의 땅, 독도 바다, 기린초 사는 숲속으로

물결치는 박주가리 고운 팔월, 전설의 바다.

하얗게 타오르던 어머니의 땅으로

곰딸기 열매 붉은 칠월의 강토(疆土), 이사부 길에

파랗게 울려 퍼지는 조국의 노래 용감하다.

금강산 짊어지고 사는 단군의 고향

맑디맑은 태백의 파도가 치달려온 능선.

괭이갈매기 소리, 우산봉 부둥켜안은 여든아홉 선열의 바다가

조국의 해원(海園)으로 스며드는 깊디깊은 한국령(韓國領).

백두의 푸른 맥박, 청혈을 뿜어내던 기억의 물살들.

젊은 태극의 바다, 대한봉에 으르렁거린다.

삼천리길 달려온 아침의 태양

거룩한 땅의 이름으로 뿌리내린

아름다운 꽃밭에 들리는 독도의 노래

높디높은 겨레의 꿈 영그는 독도의 벼랑마다 맺힌 그 숨결.

오래된 조국의 새암이 달리고

신서란 향기 꽁꽁 감아 돌던 물마루

돌고래빛 한라의 바다가

사자의 섬에 퍼덕인다.

 

 

 

 

[우수상] 떡국 / 박다은

 

냉동실에서 삼 년 묵은

가래떡처럼 몸을 굽히고

할아버지는 삼 년을 더 살았다

매년 떡국을 퍼먹었던 놋그릇에

칠십오 년 인생을 지탱해온

총알 자국 투성인 몸뚱이가

절반도 안 되게 담겼다

1953년에 멈추어진 나침반 바늘처럼

가만히 앉아 북을 바라보던 뒷모습

소금 같기도 참깨 같기도 한

할아버지 부스럭부스럭

사탕 훔쳐가는 소리를 내며

부서지는 할아버지를

북쪽으로 향하는 꽃가마에 태워 보냈다

꽃문을 열고 나온 어린 소년이

멀리 두고 왔던 여동생의 손을 잡고

천국 방앗간으로 향하는 길

끝도 없이 뽑아져 나오는

엄지와 새끼 새끼와 엄지가

약속하듯 얽혀 있다

하나로 이어진 탯줄 자르듯 똑,

한 뼘의 가래떡을 썰어

육수와 팔팔 끓여내는 새해의 아침

아기처럼 놋그릇에 눕혀진

할아버지 통통한 젖살을

아긍 깨물어 보았다

 

나는 한 살을 더 먹었다

 

 

 

 

 

[우수상] 할머니의 대나무 숲 / 태성일

 

할아버지는 6.25전쟁 때 경찰로 근무하시다가

북한군에 의해 돌아가셨다.

영원에서 영원으로 이어지는 시간 속에서

잠시 세상에 들르셨다가 그렇게 다시

영원 속으로 홀로 여행을 떠나셨다

 

할머니는 삶이 힘이 들 때마다 자식들 몰래

할아버지의 사진을 꺼내어 한참을 보시곤 하셨다

사진속의 할아버지는 엄숙한 표정이다.

다시 찍을 수 없는 사진

좀 웃어 주셨으면 좋으련만

항상 꺼내 보아도 엄숙한 표정이다

 

할아버지 사진은 오랜 시간 버티다가

가로로 3줄 금이 생겼다

사진에 생긴 줄이 할머니 이마 주름을 닮았다

그 줄을 보시며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사진도 세월 가는 것이 힘에 부치나 보다”

 

할머니는 사진을 쳐다보시며

억울한 일, 힘들었던 일 다 쏟아 놓으셨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엄숙한 표정의 할아버지는

금세 환히 웃으시며

"그래요, 당신이 옳아요. 그래도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

당신은 웃는 게 더 예뻐"

"둘째가 당신한테 잘못 했네요. 그래도 너무 야단치지 말아요

내 보기에는 둘째가 속정이 제일 깊다니까"

이렇게 할머니를 달래시곤 하셨다

 

할머니는 세상 살아가며 들은 애먼 소리

가슴속에 켜켜이 쌓아 놓았다가 더 쌓을 공간이 없어지면

할아버지 앞에서 다 쏟아 놓으셨다

 

할아버지 사진은 할머니의 대나무 숲이다

가슴속에 꾹꾹 눌러 놓았던 힘들었던 일

너저분하게 풀어 놓아도

늘 말없이 들어주시고 인자한 웃음으로 답해주시는

할아버지 사진은 할머니의 대나무 숲이다

 

 

 

 

 

[장려상] 영웅의 유언 / 박상환

 

이 광장의 함성 속에

나의 피와 살점과

내장과 뼛조각들을

단 하나 남김없이 모두 바치노니

 

부디 후손들이여

이 희생을 헛되이 말라

 

우리에게 닥친 고된 시련이

온전히 우리만의 시련이기를

 

우리의 운명은 오로지 우리의 것이거늘

누가 마음대로 이 운명을

저들의 손아귀에 놀아나게 했는가

 

기억하라 후손들이여

우리가 이토록 목놓아 울부짖던

우리의 자유와

우리의 신념과 우리의 희생을

 

총과 칼로 혀를 찢고

곤봉과 매질로 갈비뼈를 부숴도

우리의 운명은

우리의 소망대로 이끌기를 원하노니

 

그들의 썩은 야욕에

우리의 신념을 적시게 놔두지 말라

 

젖가슴을 빼앗긴 갓난아이처럼

무력하게 울고만 있지 말라

 

그대들은 목숨을 걸고

조국의 존엄함을 지키라

빼앗긴 그것을 염원하며 스러진

우리들의 목숨을 잊지 말라

 

언젠가 후손들이 공기처럼 누리게 될

조국의 안녕과 조국의 자유와

조국의 존엄함과 조국의 영광을 위하여

나 지금 뼈부스러기까지 한점 남김없이

모두 그러모아 미련 없이 바치리니

 

그대들은 그 결과를 반드시 지키라

그대들은 그것을 소중히 지키라

 

조국이 힘을 잃어 어둠이 몰려 올 때에는

다 같이 손을 잡고 적과 맞서 싸우라

 

다시는 무력하게 나라를 잃지 말고

다시는 분열하여 핏빛 세상을 만들지 말라

 

이 조국에 쏟아지는 햇빛과

이 조국에 쏟아지는 빗물과

이 조국에 쏟아지는 영광 한점 한점이

온전히 조국의 것이 될 수 있도록

끝까지 싸워 승리하라

 

 

 

 

 

 

[장려상] 연서 / 김서영

 

오늘 나는 누덕한 종이 사이 가장 하얀 것을 골라

내세에 있는 당신께 연서를 부칩니다.

 

사랑하는 당신

그 곳은 정말 꿈같은 곳입니까.

내가 그대 고운 이름 세글자를 또박히 부를 수 있는 곳입니까.

당신 머리칼을 휘날리며 같이 그윽한 꽃향기를 맡으러 갈 수 있는 곳입니까.

 

당신은 꽃으로 살기 싫다했지요.

꺾으면 꺾이는 꽃이 아닌 바람이 되기를 소망했지요.

그래서 당신은 바람이 되었습니까.

배우고 싶던 것

입고 먹고 싶던 것

이루고 싶어 했던 간절한 꿈

당신이 열망하던 모든 것이 이루어졌기를 항상 바라고 바랍니다.

 

나의 일생의 염원은 그대가 자유로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었고

나의 염원은 이루어졌으니 이제 그대는 행복해지소서.

감히 누구도 그대의 행복을 제할 수 없는 따스한 그 곳에서 부디 평안하게 살아주소서.

 

그대가 밟고 있는 땅엔

나의 피가 흩뿌려졌었지요.

나의 젊음은 아직도 그 곳에 있습니다.

 

당신이 살아있기에 내가 존재 할 수 있음을

내가 존재하였기에 당신이 살아 있을 수 있음을 알고 있겠지요.

그러니 다신 아름다운 내 고향을 빼앗기지 말아주소서.

세상이 멸하여도 그 땅의 주인은 당신임을 잃지 말아주소서.

이것이 당신을 위해 목숨을 바친 나의 마지막 당부입니다.

 

 

 

 

 

[장려상] 눈보라 / 유택상

 

죽은 나무들이 숨죽이며 살아서 산 능선마다 울음소리를 낸다

죽어서 떠돌다가 눈보라에 묻혀 일어서지 못하는 형제들 휴전선 고지마다

고요도 숨죽일 만큼 수십 년 바람소리만 내고 있다

어디엔가 응어리진 뒤틀린 산길 끓어졌다 이어지는 생(生)

산자락 마디마디 매달린 녹슨 철모의 외로운 새의 눈물들

거기 색바랜 아버지의 군복이 구겨져 있다

 

강산이 피로 물들었다, 문지방을 넘던 포성소리 바람들이 수백 번 흔들어 삶을

폐허로 못을 박았다

주먹 쥔 지평선은 무방비로 서 있어도 나무들은 폭풍처럼 이글거리는 섬광처럼

삭풍에 눈보라를 일으켰다

산,고지마다 비목이 서 있다, 비목 위에 앉아 있는 새들

몸에 흉터를 남기고 날지도 못하고 있다

다만 그것이 고뇌에 찬 마음들이

휴전선 이곳저곳에 깊이 누워 있는 얼룩진 군복의 아픔을 품고 있는 것이다

북쪽으로 떠나보낸 얼굴들을 잊고 싶은 것이다

구름 낀 골짜기가 생사의 갈림길 이었을까?

 

어지럼증과 현기증을 호소하던 굽이치는 능선들, 재 넘어 숨죽인 고향

진통제를 꽂고도 어두운 들판을 달리던 삭풍

아내와 딸 아버지와 어머니가 내가 아직 모르는 길 앞에서 절망할 때

생사를 모르는 추운 길 위 숨결들

하늘은 철책도 경계도 없었다

외로워서 죽지 않으려고 얼굴을 땅에 묻고 물을 빨아 검은 젖을 먹던 새들

이젠 눈물이 말라버렸다 산과강이 찢어져 울음은 눈물없이 건조해졌다

지도는 환기되지 못하고 비명으로 갈 수 없는 길이 막혀 있다

물줄기는 뭉개지면서 희미해졌다 산을 횡단하던 길은 숲의 어둠으로 둘러 쌓였다

 

새가 운다 징소리가 들린다

밤낮을 되풀이하면서 목청을 틔우며 아픔을 받아들이는 득음(得音)

입보다 귀가 더 밝은 온몸의 촉수

전선의 밤은 애타면서 바스러지게 새의 소리에 귀가 쫑긋 똬리를 틀고 있다

꽃잎의 낙화에도 얼룩진 아픔을 씻어내고 게워내려는 빗방울

상처와 울음이 서로 눕히는 소리 절명의 눈물이 간당간당 할 때

나는 푸른 나뭇잎에 온몸을 맡겨 날개를 달고 사라져가는

먼 하늘의 내력을 더듬고 싶은 것이다

 

 

 

 

 

 

[장려상] 국혼: 아직도 우리 곁에 남아 있는 그들 / 김다희

 

봉오동 죽음의 골짜기에서

날아온 나비는

하얀 국화 꽃 위에서 단잠을 취하고

 

탑골공원의 수많은 민들레 씨앗은

단단하고 비옥한 땅위에 꽃을 피우네

 

철새는 원래 내 땅이 아닌 듯 날아가고

참새와 비둘기가 광화문 광장을 가득 메우네

 

서대문 형무소에 피고 있는 진달래꽃이

마당을 가득 짖은 보랏빛으로 메우면

 

슬며시 다가가 가슴에 대어보고

눈에 대어보고

코에 대어본다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나도

아름다운 이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

남기기 위해서

 

눈에, 입에, 코에 가슴 깊숙이 새겨본다

 

 

 

 

 

[장려상] 단지동맹 / 이종완

 

단지동맹

 

팔십 년대가 흘려두고 간 오래된 풍경화

그 헐거워진 나사못의 녹슨 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거리에 서서 가만히 사방을 둘러보면

길은 나의 첫 걸음에서부터 시작되고

부정의 그림자 뒤에서 가만히 숨어 있을 수는 없다.

내게 보이는 것을 나는 본다.

내가 지켜야 할 것들을 나는 지킨다.

보이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지켜야할 것을 끝끝내 지켜야 한다.

지친 발걸음이 쌓이면 풀들은 잠시 멈추고

뒤를 돌아보라고 한다.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

그때 다잡던 그 마음

열두 개의 단지로 남은 의기

모든 것이 흐트러져 있어도 하나하나 일으켜 세워야한다.

감당해야 할 일 온 몸으로 감당해 가며

이름 있는 자들도 이름을 지우며 가는 길

작은 어둠을 밝히는 그때의 핏방울들

떠난 이들의 맑은 눈물로 방울방울 내리는데

상처가 지나가면 새살이 돋아 오르듯이

숨어있던 고통과 오랜 줄다리기는 계속되고

연록으로 돋아오를 조국의 산하를 그리는 이들이여

어눌한 눈길로 바라보는 포시에트 항구

러시아 아이들의 눈길에서 떨어져 내리는 작은 평화는

어느새 하얗게 젖어버린 물안개가

반짝이는 흔적을 지우려 할 때

우리들은 굳건하게 뿌리내린 한 그루 푸른 솔이 되어

익숙한 몸짓으로 새로운 하루를 길어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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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상] 고패질 / 최류빈

 

후박나무 밑동에 손금이 오른다

곡면으로 직히는 도끼의 말

죽은 나무 깊은 협곡, 진한 생명선으로 남아

너의 찬란한 운명을 증명하고 있다

여린 살 비워갈수록 물고기가 태어나

비늘을 털고 잎처럼 매달리는 논센스

파랑을 건너온 이파리가 천칭처럼 흔들린다

바람의 주술로 총소리 분분한 소리복채

한 쪽으로 기울수록 반대편이 고갤 드는데

나는 땅의 말로 묻히고 너는 오르는 도끼처럼

하늘에 걸리는 달그림자다

아픈 도끼를 뽑아올릴 때마다 살이 자라는

우람한 나무다

너는 짐승처럼 솟아 도끼에게 포효하고 있다

날이 스친 빗면이 조각하는 을씨년스런 표정

죽어 얼굴로 내걸린 너는 신이랴

침략당하면서도 음각으로 호통을 치는 후박나무 일생

파리한 도끼를 아예 뽑아 들고는

복판에 천하대장군, 살을 덜어 양각 오롯한 너

울툴한 겉껍질 사이로 실금처럼

핏물이 흐른다

 

 

 

 

 

[우수상] 무궁화 식당 / 이정희

 

달걀형 무딘 톱니로 허공을 밀어 젖힌다

 

바람의 속살을 휘어잡고

꽃이 되기 위해 뜬구름을 선택했다

빨강보다 연보라를 매단 죄

손에 물마를 날 없이 움직였다

밑 부분이 더 짙은 단심 그늘

종형의 짧은 잎자루처럼 지루한 나날들

 

울타리가 되기로 한 날로부터 한식집을 열고

화려한 자태보다

날마다 싱싱한 꽃을 피우며

꺽이지 않는 섬유질처럼 살기로 했다

 

삼천포 부둣가 허름한 골목에서

스스로 터득한 비법

새벽마다 부풀어 터지는 꽃잎으로

신선한 꽃밥을 차렸다

간발의 차이로 어긋나는 맛과 사투를 벌이며

우툴두툴한 세상 둥글게 말았다

 

검붉은 저녁놀을 즐길 여유도 없이 

종종걸음 치며 내일을 준비한다

서민적이고 대중적인 메뉴

수시로 진딧물이 달려들어

뒷덜미를 낚아채고

디딤돌마저 건들리기 일쑤

 

빛바랜 잔가지 끝에 레시피를 눌러 적고

갈색 풍미를 곁들인다

푸른 핏줄이 이슬 고여 젖은 눈망울

날갯죽지 파고드는 벌새다

 

보라색 꽃을 매단 푸른 건물

군데군데 마른 얼룩이 찍혀있다

햇살을 건너가는 초록 발톱

내일 아침 환한 꽃이 조식이다

 

 

 

 

 

[우수상] 발로 깍은 나무 / 권효은

 

바람이 말하더군요

이 의자는 참으로 곱다고 말입니다

얼마나 고울까

작은 새도 동동 구르며 무게를 덜고

그 위의 이슬도 미안하여

나이테를 돌고 돈다고요

 

시시 검은 두발은 나무를 안고

발가락에 쇠를 얹어

노수의 심장을 두동강 내셨었지요

아픔을 가리는 것은 허공 속의 화약

온통 잡히지 않는 것뿐

머리 위에 내려앉은 어린 솔잎조차

털어내지 못하는

당신을 보며

나는 원망하였습니다. 조국을

그리고 평화로운 타인의 삶을

 

동강난 나뭇가지는

곧게 뻗은 또 하나의 복사뼈

발가락 사이로 고개 내민 풀이며

손이었다면 향기가 없어 뜯어낼 욕심이겠지요

아, 이토록 너그러운 당신

 

아버지

아버지가 만든 발로 깎은 나무는 의자가 되었습니다

의자의 주인은 없지만

천공을 벗겨 내려앉은

저 빛의 줄기도

감히 바로 앉지 못하는

당신의 훌륭한 의자입니다

 

고요한 푸름이 찾아옵니다

이곳에 앉아 계시던

아름다운 어느 날처럼

 

 

 

 

 

 

[장려상] 나비무덤 / 최다혜

 

할머니의 눈가에는

나만 볼 수 있는

나비무덤이 있다

 

죽은 흰나비의

요람이다

 

나비는 할머니의 눈가를

거닐기도 한다

나비의 발자국은 검버섯이 됐다

 

가끔은 날갯짓을 세게 해서

할머니의 눈가를 젖게 하고

 

가끔은 날갯짓을 적게 해서

할머니의 눈가를 주름지게 한다

 

그 주름 사이로 다니며 할머니와

40년을 보냈다

 

할머니는 오월이

겨울같은 봄이라고 하셨다

죽음같은 봄

 

동네에 향냄새가 그득한 오월이면

흰나비는 요람에서 나오지 않았다

흰나비가 요람에서 나오지 않아도

할머니의 눈빝 반달은 늘 젖어 있었다

 

군복입은 손자를 보며 흠칫하던 할머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기덮인 나무관을 온몸으로 끌어안았다

던 할머니의 마음을 생각한다

잊으라 하면서 떠나지 못하는 흰나비의 

마음을 생각한다

오랫동안 거세된 그 슬픔들을 생각한다

그 사람의 슬픔을 생각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심연의 끝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누구도 그 봄에서 멀어지지 못했다

 

언제쯤 흰나비는 요람에서 잠을 잘까

언제쯤 향냄새 나는 날에도 할머니 눈밑

반달이 메마를까

 

어쩌면, 이 생에, 못이룰, 일 들

 

 

 

 

 

 

[장려상] 탕 안의 전사 / 김동은

 

세월의 깊이가 천장에 붙어

또옥, 똑 떨어지며 비 내리는

공중목욕탕 구석엔

강원도의 굴곡진 철책선을

이마 깊이 착색한 노인이

6월 내내 몸을 닦고 있었다

 

흙의 온도가 피처럼 뜨거워지는 날이면

태백산처럼 굽은 등허리에 돋은 상흔이

가슴 깊이 파고들어 울음조차 토할 수 없다고 했다

한 때 굵은 잔뼈였던 앙상한 둔부를 이끌고

탕으로 기어오르는 노인의 허리춤에는

알 수 없는 이름들이 주름과 함께 늘어져 삐걱거렸다

 

탕에서 피어오르는 자욱한 연기에서

때로 화약 냄새를 맡는다고,

38도C 따뜻한 탕 안의 물결 아래

전우의 얼굴이 발가락 사이를 찰방거리며

늙그수레한 몸의 진땀을 쫙 빼 놓는다고 했다

살갗에 닿는 회상의 파동이 잠잠해질 때면

노인은 탕에서 내려와 끝도 없이 몸을 씻었다

피 냄새가 난다고, 내 몸에서 자꾸 피 냄새가 난다고

 

아득하게 번쩍거리는 총부리와

거칠게 떠안은 책임의 삯은

듬성듬성 빠져 볼품이 없어진

백발의 머리칼을 흩트려 놓았다

희어진 입가에 떨리며 흘러나오는

전설이 된 꽃의 노래는 전사가 되어

돌 뿐인 탕 안에, 낮고 흥건하게 미끄러졌다

 

수건으로 조심스레 떫어진 입가를 훔치고

해독할 수 없는 상처를 보듬어 닦는

노인의 가냘픈 뒷모습은 고독한 숙명처럼 장엄했다

 

 

간판이 군데군데 떨어져 나간

낡은 목욕탕 출구를 나서며

구식구식 이름을 꿰매어 붙인 노인의 등에는

회수하지 못한 영혼과

빛처럼 흩어진 살점들

속 깊이 허기진 혼잣말

적막한 전사의 마지막 모습이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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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CTAL / 장미도

 

바이닐은 붉은 색이다 너는 신중히 지문을 고른다 그때의 PRM은 33이었다 비가 내리거나 겹겹이 두터운 목소리를 가지게 되는 날에는 45가 되기도 했다

 

바 자리에서는 같은 방향을 보게 된다

헤드 셸이 바이닐 위로 수평 이동을 하는 것처럼

 

어떤 마음은 물속에 손을 넣어 물거품을 만지는 것 같다

 

통유리 창 안으로 햇빛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고

나날이 익어가는 얼굴이 앉아 있다

 

밤이 오면 산은 하늘보다 어두워진다 경계를 다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어둠 속에서도 왜 여기와 저기가 나뉘는 걸까

너는 빈 의자를 쓰다듬으며 말한다

 

오래도록 바라보고 조심스럽게 만지면

무언가 생길 것 같은 예감

그런 것들은 오래전에 하수구 속으로 흘러 들어갔고

 

누군가는 수영을 한다 누군가는 뜰채로 죽은 벌레를 건져낸다

 빗방울이 수면을 뾰족하게 부수며 낙하한다

 

돌아오는 마음은 찾아가는 발걸음보다 빨랐다

옆모습으로 앉아 있는 사랑

폭이 좁은 허공에서는 왼발을 헛딛게 되고

붙잡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스스로 물속에 뛰어든 개미가 있을까

손이 허공을 휘저어도 밤은 무너짖 않고

 

음악은 뒷면에서도 가능했다

아주 천천히 개미는

앞면에서 앞면의 이쪽으로 이동한다

 

헤드셀은 늘 같은 부분에서 음 이탈을 했다

 

 

 

 

 

젤리의 사생활

 

포장지는 완성되었고 젤리는 불숙 끼어들었다

 

컨베이어 벨트처럼 이동하는 회색 구름

 

젤리는 그저 어느 날 툭 하고 나타난 것이다

영양 정보 설명서는 젤리의 입장을 대변하지 못했다

 

포장지 안에 속해 있다는 사실은 불필요한 긴장을 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유용하지만 젤리를 심리적으로 불편하게 한다는 단점이 있다 한 철학자는 젤리에게 사회적인 성분이 함유되어 있음을 증명하고자 했으나 그 성분이 어떤 맛을 내는 알 수 없었다

 

젤리는 고체도 액체도 아니었으므로 누구에게도 해를 가하지 않았다

손가락은 말랑말랑한 젤리 사이에서 더 말랑말랑한 젤리를 고른다

 

젤리와 손가락을 햇볕에 전시해두면

방부 처리 되지 않은 손가락이 먼저 썩어갈 것이다

 

이것은 젤리에게 어떤 위로도 되지 못한다

 

젤리는 혓바닥을 파랗게 물들이거나 이빨의 틈새를 파고들 수도 있겠다 미각을 뒤엎은 젤리는 질리지도 않고 포장지와 함께 늙어갈 수도 있겠다

젤리는 모든 기대를 저버릴 수 있다

 

어제의 구름이 지나가고 오늘의 구름이 되돌아왔다

구름의 뒤통수가 같은 색이었던가 젤리는 알 수 없다

 

당신이 모르는 당신의 틈에서

젤리는 당신과 함께 썩어갈 것이다

젤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였다

 

 

 

 

 

델타의 방

 

0

삼가가형의 방 안에 D와 D'와 모르는 사람이 있다

 

0

나는 세 개의 꼭짓점 안에있다 D와 D'사이 기울어지는 선 안에

D는 의자에 앉아 있다

 

0

나는 세 개의 상상 속에 있다 어제의 밤도 휘어지는 새벽도

창밖에는 비가 온다고 하자 비가 내린다

 

0

D가 눈알을 굴린다 죽은 척을 하자 그날처럼 D의 칼끝이 심장을 찌르면 이미 찔렀다 하자 어쩌면 동공에 힘을 풀자 우리는 이미 사각형이라고 하자 D의 정수리에 칼끝을 찍어서 D'를 만든다 D''를 만들어 D와 엮는다 당신은 하나의 점이 된다고 하자

 

허공에 꼭짓점을 찍고 점과 점 사이를 접는다 방을 구긴다 우리는 방금 사랑했다고 하자 방은

 

0

45도 기울어 있다 파이프를 따라 물이 흐르는 소리를 듣는다 물은 아래에서 위로 흐른다

0에서 델타로

 

해야 하는 일보다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그것이 언젠가 해야 하는 일이 되도록

나는 문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타원형의 손잡이를 돌린다

 

0

또 다른 삼각형의 방에서

D는 의자에 앉아 있다 입을 반만 벌리고서

 

델타와 O사이에 D가 있다

 

0

벽을 부수자 파이프 속으로 도망가자 아래에서 O 위로 추락하는 원

 

1

거리를 걸을 때마다 세계를 거대한 방이라고 생각했다

빗소리가 거리에 무수한 꼭짓점을 찍고 있다

 

 

 

 

 

사이에 선

 

선은 사이에 있다 선은 선을 넘어 사이는 단발머리

 

나의 선은 노랑, 품 안에서 잠들고 멀리서 깬다 줄무늬를 삼키는 선, 어둡고 습한 탁자 밑에서 토악질을 한다

 

선은 제일 늦게 뽑힌다 머리를 넘기는 손

머리카락은 계속 자라난다 아프지 않게 자를 수 있다고 믿고 싶다 아프지 않은 건 다 남의 것이다 주머니에 가위를 자기고 다닌다

 

초인종을 눌러도 대답 없는 시계는 나뭇잎을 떨구고 벌레는 동그란 허공을 먹고 몸에 동그라미를 새긴다 선은 서서 그네를 탄다 무릎을 굽히고 도약하는 자세가 된다 선은 뛰어오르고 몸은 남는다

 

모래로 만든 케이크에 나뭇가지가 꽂혀 있다 열은 부러지고 하나만 남는다 생일은 한 번 분이라서

 

손가락은 허공에 동그라미를 그린다 동그라미는 지워지고 손가락은 몸으로 돌아온다 손가락을 자르려면 손가락이 필요해서 자르지 못한다

 

가을과 몸은 등을 돌리고 잔다 아무렇지 않게 전구를 갈고 쏟아지고 엎어진 것들을 주워 담는다 원래대로 돌려놓으면 몸이 자란다 몸은 벽에 기대어 잠들고 옆자리에 앉은 사람과 어깨를 부딪친다

 

죽은 것에는 다른 이름을 붙여줘야 한다 죽은 선을 죽은 선이라고 부르면 안 된다 오늘을 어제라고 부르듯이 손가락 끝에 동그라미가 남듯이

 

초가 타오르고 촛농이 남는다 왜 케이크에는 아무 향도 나지 않는 초를 꽂는 걸까 잘린 머리카락이 바닥에 흩어져 있다

 

뛰어오른 건 무엇일까 이번 생은 한 번뿐이어서 다행이야 그런 생각은 생일 전후에 떠오른다

 

바다에 가기로 했었잖아 속눈썹이 눈을 자른다

 

무기명으로 발소리가 도착한다

선, 안 밟았어

 

 

 

 

 

레이스와

 

호수는 얼어붙고 쉽게 한 방이 된다 열린 창문 안족에는 레이스 레이스 커튼, 커튼을 찢으며 햇빛이 들어온다

 

커튼을 뚫리는 벽 실금이 뿌리 내린 흰 벽에 커튼의 그림자가 인쇄된다 접을 수 없는 페이지 벽은

 

움직이지 않는 커튼 정지한 수면

창밖이 흔들리고 갓 태어난 그림자의 얼굴이 뒤섞인다 그림자는 아니 벽은 서늘해서

 

고양이가 고양이의 그림자를 깔고 앉아 있다 3시에는 없었고 방문까지 닿을 것 같다가, 벗어날 것 같다가, 4시에는 약간

 

어떻게 약간이 가능하니 약간은 숨을 쉬는 내가 말한다

고양이는 입을 다물고 있다

 

그림자는 거대해지고 고양이를 거대하게 삼키고 옷장을 거울을 씹어 먹는다 거울 속 나와 눈이 마주친다 그림자의 눈은 심장에 붙어 있다 가장자리는 모두 이빨

방을 삼키고 굳은 벽을 핥아 먹는다 수평선 깊숙한 곳에서부터 탄생한 혀로,

 

벽에서는 폐허의 맛이 난다

 

방 안을 가득 채운 레이스

레이스는 쓸모없고 출구도 없이 쉽게 찢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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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이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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