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 부문 당선자
김상우 「데면데면」 외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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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 기원 / 민경란
이것은 노아의 방주 이래 물의 연대기를 기록한 서書
음감이 뛰어난 거인 하나 구름의 전신에 폭우의 음보를 그려 넣었다 한다
팔을 들어 폭풍의 도입부를 연주하자
지상의 모든 물줄기들이 자제력을 잃고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한다
한 악장이 끝나자 지상의 체온이 상승했다 한다
다음 악장이 끝나자 '꽃이 피고 지고'라는 글귀가 사라졌다 한다
사람들의 표정이 우기로 가득 찼을 때
어제 헤어졌던 적도의 사내를 오후의 카페에서 다시 만날 지경이라 했다
'내 안의 침묵이 부서지고 있어 이 정도는, 눈물 한 점 떨어뜨린 것에 불과 해'라고
거인이 중얼거렸다 한다
역류, 침하, 붕괴, 수몰을
표류하는 물위의 집에서 사람들이 나눠 쓰고 있었다 한다
어느 날, 누군가 해로부터 달려왔다 한다
자신을 거인의 옆에서 악보를 넘기던 페이지 터너*라 했다 다음 악장이 준비될 때까지
뉴턴의 사과를 심으라 했단다
그제야 꼭지가 떨어져 나간 우산 아래 옹송거리던 새들이
유실된 항로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한다
* 페이지 터너 : 연주자의 옆에 앉아 악보를 넘겨주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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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 부문 당선자 - 박한라
■ 당선소감
병으로 인해 개미 다리조차 튼튼해 보이고 부러웠던 시절, 아무도 손을 내밀지 않을 때 오직 신과 시만 손을 건넸다. 이상했다. 약보다 시가 내 혈액을 돌아 나를 낫게 했다. 삶이란 이해되지 않으므로 오해할 수 있어 좋다. 그러므로 나는 시를 꾸준히 먹어야 오래 살 것 같다. 그리고 이제 나도 그 누구에게 처방을 받았듯이 더 큰 아픔을 주는 시의 처방을 내려주고 싶다. 아픔은 더 큰 아픔이 있을 때 낫는 것. 남의 불행이 나에게 씁쓸달콤한 감각으로 전이해오는 악마의 슬픔을 다 같이 누렸으면 좋겠다. 아니, 나에게도 그런 아픔이 있을 거라는 예지로 두려웠으면 좋겠다. 다른 말 필요 없이 진실로 시를 사랑하므로, 나는 시로서 계속 번식하고 진화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게 산소호흡기를 달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깊게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그리고 1년 전 시를 포기하고 싶을 때 나를 붙잡아주시고 ‘너의 시 쓰기는 탁월하다. 그러니 자신을 굳게 믿어라’라고 믿음의 암시를 주신 김명인 선생님께 한없이 감사드린다. 처음으로 너는 시를 잘 쓴다고 인정해주신 이재무 시인님과 대학생 시절 내가 절망했을 때 따듯한 인간애로 상한 마음을 낫게 해주신 손택수 시인님께도 감사드린다. 글의 기반을 닦아주신 김완하 교수님과 정기철 교수님, 항상 믿어주시는 것만으로 감사한 부모님과 대학원 지도교수님이신 이혜원 교수님께도 깊은 감사드린다.
■ 심사평
예년에 비해 응모작이 많았다. 자극적이고 말초적인 감각의 드라마와 미디어와 영상의 시대에 가려 시의 구심력이 사라져간다는 세간의 흉문에 상관없이 여전히 시를 그리워하고 시가 줄 수 있는 위안과 희망을 믿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많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응모작의 성향이나 시적 수위의 편차는 조금씩 다를 수 있어도 전체적으로 관통되어지는 신뢰가 있었다. 시가 기능할 수 있는 인간의 마음 한 구석에 해당하는 자리를 마련하는 일을 이들은 자신의 삶속에서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총 500여 편을 검토한 후 최종적으로 압축되어 올라온 작품들은 <고양이 안테나> <붉은 기호의 행방> <누구나 갈비뼈에 몸을 묶고 산다> 였다.
민경란의 <붉은 기호의 행방>은 이미지가 활달하고 언어를 다루는 감각이 돋보이는 시였다. 하지만 자신이 대상을 통해 시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가 모호한 점이 아쉬었다. 좀 더 말하고 싶은 것을 뒤로 숨기고 정밀한 이미지로 집중한다면 새로운 시로 탄생할 거라고 믿는다.
이인호의 <누구나 갈비뼈에 몸을 묶고 산다>는 시어를 고르는 수준이 섬세하고 따뜻한 서정성이 돋보이는 시였다. 하지만 동봉한 다른 작품들 중에 상투적인 표현과 일상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진술들이 눈에 거슬렸다. 세계를 인식하는 통찰력과 함께 신인으로서 신선한 패기가 보태어진다면 좋은 시로 거듭날 것이라고 믿는다
박한라의 <고양이 안테나>를 당선작으로 결정하는 데에 별 망설임이 없었다. 응모된 작품 중 눈에 띌 정도로 압도적인 작품이었다. <고양이 안테나>는 고양이털이 수신하는 주파수의 시적 발상이 신선했고 마지막까지 호흡을 놓치지 않고 시적으로 전개해 가는 완성도도 높은 작품이었다. "고양이는 털을 곧추세워 계절을 탄 바람의 끝자락을 강신호로 받아낸다" 같은 표현이나 "전파를 헤엄쳐 온 밤하늘의 음량이 점점 높아진다" 같은 시행은 숙련된 신뢰를 주었다. 응모한 다른 작품의 고른 수준 또한 이 시를 당선작으로 결정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시의 매혹을 아는 시인이라 조금만 더 집중한다면 멋진 결실을 얻을 것이라 여긴다.
<심사위원 공광규, 김경주, 정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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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작가회의는 문예진흥기금 특별지원조건으로 확인서를 제출하라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요구를 거부하기로 전 회원의 뜻을 모아 결의하였습니다. 이 확인서에는 “광우병국민대책회의에 소속되었으나 실제 불법 시위에는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았음을 확인하며 향후 불법폭력시위 사실이 확인될 경우 보조금 반환은 물론 관련된 일체의 책임을 지겠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국작가회의는 이러한 내용의 모욕적인 확인서 제출을 거부하고, 정부의 정책에 무조건 찬성할 것을 요구하며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지침에 강력히 항의하고자 합니다.
따라서 한국작가회의에 대한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2010년 문예진흥기금 정기공모 사업 보조금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습니다.(2010년 문예진흥기금 공모에 선정된 사업 보조금은 3개 사업 3,400만원이고, 이 가운데 2,000만원이 『내일을 여는 작가』 발간에 배정되어 있습니다.) 이에 작가편집위원회는 비상편집회의를 열어 『내일을 여는 작가』의 발간을 잠정적으로 중단하기로 하고, 편집위원이 전원 사퇴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공지사항 아래글 "작가편집위원회에서 드리는 말씀" 참조)
[제10회 『내일을 여는 작가』 신인상 공모]도 무기한 연기하기로 하였습니다. 아울러, 부득이하게 지금까지 접수된 응모작은 반환해 드리게 되었습니다. 『내일을 여는 작가』 발간이 정상화될 때까지 신인상은 공모하지 않습니다. [제10회 『내일을 여는 작가』 신인상 공모]에 많은 관심과 성원을 보내주신 예비문인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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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물 외 4편 / 최옥자
연잎 위에 고인 물방울에 거미 한 마리
갇혀 있다. 연잎의 먹이가 되어 허우적댄다
연잎은 먹이가 지칠 때가지 조용히 기다린다
거미의 비명은 물방울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몇 겹의 그물 밖에 펼쳐진 여름의 고요에 가 닿지 못한다
기다림의 팽팽한 끝, 거미의 움직임이 느려진다
긴 다리를 쭉 뻗어 내리며 고개를 떨어뜨린다
햇빛이 물방울을 증발시킨다
물기 마른 연잎 위엔 죽어있는 거미
어느새 몸을 말리고
느긋한 여름 하늘 끝 거미줄을 친친 감고 있다
죽어서도 멈추지 않는
시방(十方)으로 뻗어나가는 저 생명의 모의(謀議),
죽은 어미 몸에서 새끼거미들이 빠져 나온다
아직 세상의 눈물을 맛보지 못한 몸이 투명하다
어미의 몸에 감긴 거미줄을 찾아낸
새끼거미들이 하나 둘
어미의 거미줄을 타고 연잎을 빠져나가
하늘로 하늘로 오르고 있다
죽지 않는 식욕
활어가게에서 사온 고등어 등에서 집어등 불빛이 새어 나온다 한 사내의 주름 깊은 가슴이 바다의 기억인양 조명(照明)되고 있다
일렁이는 것들은 녹슬지 않는 것인지 아직도 싱싱한 시간들, 파도가 고등어 등에 바다의 기억을 새겨놓듯 물마루에 걸린 아내 얼굴이 사내의 가슴에 주름살을 만들고 있다
그물을 끌어 올릴수록 더욱 쏜살같이 내달리는 고등어 떼
힘을 주었다 풀어도, 아귀를 벗어나려 필사적인 고등어 위로
뭍으로 달아난 아내 얼굴이 겹쳐진다
여전히 누그러지지 않는 성깔들이 서로의 가슴에 생치기를 내는 저녁, 도마 위의 고등어가 파닥거리다가 숨을 놓는다
나는 얇게 저민 고등어 살을 꾸역꾸역 삼킨다
상처에 대한 호기심은 언제나 솔깃하다
도토리거위벌레의 시간
마른 도토리가 두드린다. 갈참나무 그늘아래 펼쳐 놓은 초록빛 보자기 위로 대구루루 구르던 도토리 몇 알, 풋풋했던 여름날의 얘기가 저장된 껍질을 깨고 그대의 시간이 부화를 시작하는 중이다. 날선 칼로 싹둑 자른 듯 나뒹구는 갈참나무가지의 상처 만져보았는가, 도토리 속에 알을 낳고 어느 날 문득 생가지를 잘라 땅에 떨어뜨린다는 도토리거위벌레, 영문도 모르는 애벌레들은 지상의 제 집 한 채를 야금야금 파먹다가 겨울이 오면 새 집을 찾아 땅속으로 떠난다지. 그날 왜 도토리를 가져왔을까. 유리그릇에 담겨 내 방 앉은뱅이책상 위에서 겨울을 보낸 도토리, 가끔 흔들어 보았지만 유충은 보이지 않고 희미한 숨소리, 난 그대의 목소리가 도토리 속에서 잠자고 있다고 믿었다. 갈참나무가지를 잘라내던 도토리거위벌레의 시간처럼 그대가 얘기하던 57분 동안 지구의 자전 속도가 변하고 있었을까. 갈참나무에 등 기댄 그대 주위를 하루가 공전하고 있었다. 그날의 그대 목소리가 도토리 밖으로 나오고 있다. 그대가 얘기하는 동안 무심히 흘렀던 57분 동안의 말들은 성충이 되는 과정을 거쳐 내게 돌아온 것이다. 다시 태어난 도토리거위벌레가 어미와 똑같은 삶을 산다 할지라도 그 시간의 눈금들이 정말 같은 의미를 잦는 것일까. 누군가를 마음에 담는다는 것은 그런 것 아닐까요? 비록 그대 떠도는 곳 알 수 없지만 그대 목소리 힘들 때마다 도닥도닥 내 등 다독여주는데 그것으로 그대의 시간은 충분한 것 아니까요.
게거미*의 7월
혜화역 3번 출구에 부는 바람은 뾰족하고 눅진해
그 바람 속에서 그녀가 달곰한 냄새를 피우고 있어
꽃잎에 오래 엎드려야 꽃이 되지
꽃잎이 되고서야 향기를 품지
향기도 그물이야
대학로의 풍경이 된, 그녀의 그물 안에는 시간들이
가위 바위 보를 하고 있어
10시가 이기든 오후 3시가 이기든 마찬가지야
아이 업은 포대기 연신 뽀얀 젖으로 적시며 그녀,
그저 하루를 구워갈 뿐이야
국자에 설탕을 녹여, 소다를 섞어, 부글부글
그녀처럼 끓어올라
철판에 붓고 누름판으로 누르면 달고나 달달달달 달고나
노릇노릇 익은 그녀가 별모양을 새기지
7월의 햇볕이 날카롭게 보도블록에 꽂혀 가
아이 입에 젖을 물리도 그늘은 오지 않아
그물 사이를 빠져나가는 시선들이 가시처럼 박혀 가
그녀가 잠시 졸고 있는 사이 낮별들이 떴어
북두칠성이 자꾸만 별들을 만들어내 방금 태어난 게자리별이
집게발 들어 바람의 모서리를 잘라내
북극성 향해 옆걸음질 쳐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사라지지
흔적 없는 그녀의 남편도 저 북극성을 보았을까
오늘도 그녀의 그물 안에는 기다림만 가득하지
* 거미줄을 치지 않고 꽃그늘에 숨에 먹이를 잡으며 게처럼 옆으로 걷는 거미
펠릿Pellet*
새들은 소화기관을 단순화시켜 몸무게를 줄인다지. 통째로 삼켜 소화되지 않는 먹이의 뼈와 털을 부리를 통해 뱉어낸다지.
융화되지 못하는 단어들이 떠다니는 퍼즐 위로 흰눈썹황금새 한 마리 내려앉는다. 햇살을 삼켰다 내뱉듯 부리를 크게 벌리고 목울대 울컥, 단전 깊은 곳에서 끌어낸 문장의 찌꺼기 뱉어낸다. 귀퉁이들이 떨어져나간 단어 조각들이 삭이다만 문장부호들이 엉겨있다. 바람의 행간에서 지혜를 구해야 하는 삶의 단애, 부득이한 선택이 진화로 이어지고 진리가 지구 밖으로 알려지는 이 순간에도 나는 퍼즐에 매달린다. 내가 배운 유일한 문장은 부패되고 쓸모없어진 지 오래, 퍼즐의 완성을 꿈꾸며 흰눈썹황금새가 뱉어놓은 문장의 찌꺼기 헤집어 보았는데, 넓적사슴벌레 하늘소 풍뎅이의 등껍질조각들, 매미 나비의 날개조각들, 나는 낱말조각들을 그러모은다. 내가 믿은 진실의 팔 할은 거짓말, 암기를 끝내기도 전에 과거가 되어버리는 문자에 밀려 늘 변두리에서 오그라지고 있는 내가 오늘도 퍼즐 위에 토해내는 시 한 줄
■ 심사평
이번 신인상 시 부문 응모자는 120여 명에 달했다. 응모작의 전반적인 경향은 제 나름대로 개성적인 어법과 섬세한 표현감각을 지니고는 있으나, 너무 말이 많고 사변적이어서 마치 소설의 한 대목을 읽고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그만큼 복잡다단하고 최근의 시적 경향 또한 이를 부추기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시와 삶의 진정성이 배제된 이러한 흐름은 혼란만 부추길 뿐 결코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러는 중에서도 본심에 오른 고은희, 최옥자, 김혜숙, 안병호, 서근희, 안정윤, 윤범일의 시들은 기성시인들과는 다른 자기만의 개성을 지니고 있었다. 가령, 최옥자의 「그물」, 고은희의 「맨발의 표정」, 김혜숙의 「소리집 풍경」, 안병호의 「뼈」, 서근희의 「茶飯事」, 안정윤의 「툰드라 산 19번지」, 윤범일의 「호떡주의자에게」 등은 대상을 형상화하는 솜씨와 신선한 표현이 심사위원들의 시선을 붙잡았다. 그러나 안병호의 경우 가족사나 가난의 소재를 다루되 너무 길다는 점에서, 윤범일의 경우 표현의 묘미에만 주력할 뿐 주제의식이 뚜렷하지 못하다는 점에서 먼저 제외되었다. 남은 세 사람의 시들은 막상막하여서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주로 생태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는 김혜숙은 “주인이 없어 지나가는 햇볕이 문을 열어주던 트라이앵글 꽃밭”(「트라이앵글 꽃밭」) 같은 빛나는 표현감각과 “붉고 뜨거운 불의 핏물을 다 빼내야 소리의 집이 된다는데”(「소리의 집」) 같은 대상에 대한 깊이를 겸비하고 있다. 그러나 다소 주관적이고 불명확한 진술이 마음에 걸렸다. 주로 태생지인 강원도에서의 자기 체험적 요소를 시적 소재로 끌어들이고 있는 고은희는 짧고 군더더기가 없으며 단호한 어법을 거느린 독특한 문체, 비극적인 서사를 잘 갈무리한 솜씨 등 이번 응모자 중에서 솔직히 가장 발군이었다. 그래서 끝까지 심사위원들과 격론을 벌였다. 다만, 「꽝꽝나무 아버지」 같은 경우 너무 긴 가족사를 압축적으로 표현하려다 보니 다소 주관적 표현 위주인데다가 구체성이 떨어지지 않느냐는 지적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아쉽지만 고은희의 시적 가능성에 계속 주목하기로 하였음을 밝힌다. 당선자로 뽑은 최옥자의 시들은 주로 모성애를 시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데, 섬세한 관찰력과 묘사력 그리고 주제의식이 명확한 게 특장이다. 게다가 언어의 운용이 뛰어나고 「게거미의 7월」처럼 표현의 재미까지 곁들이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의 생활체험을 시적 진정성의 차원으로 끌어올리고 있다는 점을 높이 샀다. 그러나 시적 완결성 차원에서 아직 미숙한 점도 있음을 아울러 밝힌다. 부디 당선에 취해 자만하지 말고 「팰릿」의 새처럼 좋은 시를 부지런히 토해내어 주목 받는 시인이 되길 바란다.
< 심사위원 : 최두석, 김선태(글), 공광규, 고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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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닫이 외 4편 / 정진혁
도시의 산동네가 낯선 서산댁은
낡은 반닫이 문을 연다
바다가 펼쳐지며 먼 갯벌에서 불어온 비린내가
온 방안을 적신다
서산댁은 맑은 눈으로 바다를 뒤져
뭔가를 꺼내고 있다
길게 비벼온 생의 자국들이 시커멓게 눈을 뜬다
갯벌에서 막 나온 낙지의 발이 지난 기억처럼
반닫이 밖으로 삐져나오고 있다
한참을 뒤지다 찾고 있는 것을 잊은 듯
미동 없는 짐승이 되어
세월처럼 쭈그리고 앉아 있다
남편이 간 물길을 쳐다보는 것일까
집채만 한 파도가 일렁인다
거기 황혼의 빛이 있고
죽어라 갯벌 속을 긁어대던 호미소리며
굴 까던 시린 손이
조개국물 같은 진한 슬픔을 찾는 것인가
생의 비릿함에 문을 연 것은 아닐 터
먼저 보낸 남편의 따듯한 손길이 배인 옷 한 벌이며
갯벌 속을 헤매며 입던 후줄근한 몸빼바지
몇 벌 꺼낸다
이고 지고 살아온 보따리가 어지럽다
낙지며 소라 바지락 맛조개
보이는 것만을 믿고 잡아 올리던 손이
그 어디를 뒤져도 헛손질이다
살다보면 그런 게 있다
어디서부터 느릿느릿 걸어 나오는 것인지
도대체 잡을 수 없는
낮잠 같은
반닫이 속을 다 비우고도 찾을 수 없는
통곡 같은
시커먼 갯벌 속에서
찾을 것이 더 있다는 듯
서산댁은 쉽게 문을 닫지 못하고
그녀의 몸이 점점 갯벌 속에 잠긴다
바람 부는 날
반쯤 내용을 잃어버린 바람이 불고 있다
연둣빛 테이프에 붙어 날리는 하얀 종이
男시다 모집에서 力(역)시다만 남은
길 잃은 개의 사진에 개꼬리만 남은
회생이 없는 파산만 남은
빌라월세 있음이 어울리는 옹색한 글자들이
너덜너덜 전봇대에 붙어 나부끼고 있다
지나는 행인들은 글자에 담긴
밑바닥을 아는지 모르는지
침묵이 지나가고
찢겨진 글자들은 세상이 궁금해
몇 안 되는 언어로 소리를 지르면
생의 모서리에 달라붙어 숨을 조이는
연둣빛 테이프가 손에 힘을 준다
한낮의 전봇대는
그저 그림자만 낳고 생각에 잠겨 있다
바람이 불수록 기억할 것이 있다는 듯
파다다닥 한낮을 깨우는 초라한 소리 깊어 가는데
아직 닿아야 할 길을 비틀거리는 발걸음에 가두고
생을 반쯤 잃어버린 사내가
전봇대의 양쪽 어깨를 잡더니
머리를 처박으며 마구 흔들어 댄다
검게 탄 목덜미가 울렁이며 헐렁한 바지가 펄럭인다
그의 손이 연둣빛이 되어 전봇대에 달라붙는다
반쯤 내용을 잃은 바람이 소리소리 지른다
길 잃은 사내가
회생이 불가능한 사내가
개꼬리만한 가난을 숨기지 못하고
바람에 숨차게 흔들리고 있다
수도배관
너를 만나기 위해 나를 깎는다
거칠게 일어나는 쇠의 소리 앞에서
너를 향한 길을 연다
세월로 깊어지는 골짜기 만나기 위해
만나서 이어지고 상처 아물어
눈물 하나 흘리지 않고 흐르기 위해
막막한 산 속에서
꼭대기와 꼭대기가 이어지는
하얗게 빛나는 나사산 정상에서
날카로운 쇠의 냄새 앞에서
밋밋한 시간의 틈에 앉아 둥글둥글 살아온 삶을
그늘진 마음만큼 깎아낸다
어디선가 꾸르륵 이어져가야 할 소리 들린다
나사 절삭기 앞에서
이편에서 건너편으로 가기 위해
삽입길이를 확인하고
기억을 정리하는 중이다
오래 나를 따라다닌 그리움이 나사산을 센다
하나 둘 셋……
날카로운 비명소리
그 소리 따라 걷다보면
어느새 나를 축축하게 적시는 너
깎이는 아픔이 커서 열이 나고 단내가 나더라도
내게서 너에게로 가는 거친 마음에 기름이 흘러
아픔을 식힌다
아직 아물지 못한 상처를 테프론으로 감는다
아픔 새나가지 않도록 하얗게 감는다
네 몸속으로 들어간다
새롭게 난 길
수도꼭지를 틀자
내 생의 내면을 가로지르며
쏟아지는 물소리
신경치료
생의 옷자락이 너덜거린다
구석에서 구석으로 몰리며
질기고 딱딱한 삶을 씹어대다
귀퉁이가 깨지고 금이 간 사내는
삶에 바람이 드는 것을 시리게 아파한다
가장 위험한 이빨이라고 의사는 입속을 뒤진다
신경을 죽이는 그의 손에
지난 시간의 푸르고 시린 기억이 지워지고 있다
단단히 뿌리를 박고
억센 가시도 씹어대던 당찬 맞물림이
이를 갈아대는 기계소리와 신경을 긁어대는 세상 인심에
무표정으로 죽어가고 있다
한때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사내는
꿈속에 길게 뿌리를 뻗는 죽은 신경의 끈을 잡고
이제 역이든 공원이든 어디에서도 잘 수 있다
사내의 헝클어진 머리 모양은
사내의 옷차림은
이미 신경치료가 끝났다
이빨 모양을 본떠 금 간 삶을 덮어 씌어야 한다
투구처럼 반짝이는 생기가
깨진 생을 감싸 안는다
다른 재질로 다른 빛깔로 살아야 하는 날들이
어금니 옆에서 반짝인다
지녀온 삶의 각도를 다시 조정해보는 거다
바람이 분다
바람은 한낮의 거리에 잠들어 있는
술 냄새 풍기는 사내를
시리게 하지 못하고 비껴간다
사람들은 모두 그러려니 치부하고 있다
그 방치의 일부분에
신경이 죽은 이빨이 침묵하고 있다
어둠의 집
고구마 상자를 열자
지난 여름의 햇살이 꿈틀대고 있었다
살아갈 날들이 뿌리 없는 줄기에 매달려 있었다
보이는 것만을 믿어 온 나는 죄인이었다
발자국도 없이 걸은 길이
어둠 속에서도 파랗게 엉켜 있었다
그들이 찾아낸 빛
네 귀퉁이 틈으로 줄기가 발을 뻗었다
뻗어 나가지 못하는 시간을 밀어보다가
보일 듯 말 듯한 틈으로
손을 내민 마음
상자 안을 온통 지탱하고 있었다
마당이 없이 방 하나가 전부인 집
수원시 북수동 273번지
등짝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곳
벽에서 언제나 어둠의 냄새가 묻어나던 집
일곱 켤레의 신발이 쉴 곳을 찾지 못해
아무렇게나 뒹굴던 집
창이 없는 집
밤이면 내 누울 자리
아버지 너무 답답해요 창이라도 하나 내요
아버지는 소리로 벽을 밀어보다가
방문 앞에 상자를 깔고 한뎃잠을 주무셨다
온종일 자전거 페달을 밟던 다리를 웅크리고
상자 위에서 주무시는 아버지
어둠의 집을 지탱하며
가난의 틈을 비집느라 자꾸 말라가고 있었다
물기하나 없이 줄기를 키우는 고구마 안에
아버지를 먹고 자라던 수척한 기억이 새겨 있었다
■ 심사평
일백여 명에 가까운 응모자 가운데 본심에 올려놓은 임혜진, 정진혁, 권지현, 하얀, 고민교, 서로, 임태경, 전은영, 황인산, 최정하, 이설야, 김나래의 시들은 기성 시단과 다른 나름대로의 개성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서로의 <신상명세서>, 임태경의 <현대인의 생활백서>, 하얀의 <메어리 포핀즈의 초대>, 임혜진의 <머리카락이 길 때쯤엔> 등은 읽기의 재미와 신선함을 주었다. 그 가운데 임혜진의 시들은 전편이 고른 수준이라는 인상을 주어 한참동안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들 시의 문장들이 어쩐지 생활 경험과 충분히 손잡고 있지 않다는 느낌이 들어 당선의 대상에서 먼저 내려놓았다. 황인산의 작품들은 생활 경험과 감정을 시원시원하게 진술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으나 여운이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쉬움이 남는 작품들이다. 마지막에 남은 정진혁의 시들은 폭넓은 제재로 화자의 현장을 잘 붙잡고 있었다. 또 모든 시편을 긴 호흡으로 무리 없이 소화하고 있었다. 정진혁의 시에 등장하는 인물과 제재는 “방 하나가 전부인 집”이며, “전봇대에 붙은 구인광고”이고, 수도배관과 치과의 신경치료를 하면서 얻은 삶의 은유이다. <반닫이>에서는 도시 산동네로 와서 사는 바닷가의 인물이 반닫이 문을 열면서 바다로 향하는 상상과 기억의 진술이 자연스럽다. 남편을 일찍 여읜 인물의 갯벌 노동과 “조갯국물 같은 진한 슬픔”과 “생의 비릿함”이 시 전체 어조와도 잘 어울린다. 몇 편에 보이는 이런 시의 진술과 구성 능력을 높이 사서 당선작으로 뽑았다.
- 심사위원 : 공광규(글), 김선태, 고영
제10회 내일을 여는 작가 신인상 (0) | 2014.10.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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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회 내일을 여는 작가 신인상 (0) | 2014.10.25 |
제7회 내일을 여는 작가 신인상 (0) | 2014.10.25 |
제6회 내일을 여는 작가 신인상 (0) | 2014.10.25 |
제5회 내일을 여는 작가 신인상 (0) | 2014.10.25 |
뻘밭 외 5편 / 이용헌
방글라데시에서 왔다고 했다
물음표 모양의 쇠갈고리를 들고
폐지뭉치를 퍽퍽 찔러대는 그의 오른손은
의문투성이다
다섯 손가락 중 세 개는 보이지 않았다
남은 두 개는 엄지와 검지뿐이었다
검은 눈썹 아래 짙푸른 눈망울을 끔뻑이며
온종일 1톤 트럭에 폐지를 싣는 그의 손놀림은
뻘밭을 기어가는 게발 같았다
끼니때마다 그의 왼손에는 바다가 들려 있었다
그가 마른기침을 할 때마다 파도는 넘실거렸다
가끔은 은빛 숟가락을 입에 문 게발이
펄펄 끓는 순두부 사발에 꼼지락거리다가
땡그랑 댕댕, 나동그라지기도 하였다
그때마다 붉은 노을이 제본소 바닥에 흩어졌다
모르겠어요 이제는 맵지 않아요
그의 혀끝은 이미 바다 건너 두고 온 맛과 키스와
달콤한 모국어를 잃어버렸다
세 개의 손가락이 잘려나간 이후
그는 더 이상 아내에게 편지를 쓰지 않는다고 했다
그의 고향은 방글라데시,
인도양의 푸른 파도가 제본기의 책갈피처럼
펄럭이며 밀려올 때면
그는 공장 한 귀퉁이 폐지뭉치 위에서
낡은 지도책을 펴놓고
엄지와 검지로 바다의 거리를 재기도 하였다
바다의 문장
‘ㅡ’모음 하나뿐인 속초 앞바다가 진종일 시를 쓰고 있네. 수평선 가득 떠도는 비문非文을 처얼썩철썩 후려치며 온몸으로 시를 쓰고 있네. 달랑 남은 백사장 위에 천 번도 더 썼다 지우는 시, 밀었다 두드렸다 밤새 퇴고推敲를 해도 끝내 한 행을 넘지 못하네. ‘ㅡ’ 아득도 하다는 듯 ‘ㅡ’ 깊기도 하다는 듯, 달빛은 자꾸 허연 지우개가루를 뱉어내네. 철퍼덕철퍼덕 앉았다 누웠다 파도는 빈 종이만 구겨 던지네. 생각하매 나 태어난 생生의 바다도 ‘ㅡ’모음 하나였네. ‘ㅡ’모음으로 누워 젖을 빨고 ‘ㅡ’모음 하나로 옹알이를 하였네. 모음에 자음을 더하거나 자음에 모음을 더하기까지는 무수한 입술들이 스쳐갔네. 행과 행을 넘어 행간을 짚기까지는 아직도 숱한 눈과 귀를 훔쳐야 하네. 태초의 문장은 모음 하나, 속초 앞바다가 온몸으로 태초의 말씀을 풀고 계시네. 까마득한 수평선 위로 낯익은 자음들이 날아가네.
좌판 스크린
진눈깨비 날리는 중부시장, 명란젓을 팔던 노파가 졸고 있다
갯지렁이처럼 불거진 손등을 무릎에 포갠 채
꼬무락꼬무락 바다의 밑바닥으로 가라앉고 있다
물너울 넘실대던 흥남 앞바다로 가는 것일까
스무 살 저편 그녀는 바다를 건너는 게 꿈이었다
한 뙈기 밭두렁에 눌러 붙은 열두 식구의 목구멍은
아버지의 그물질에 달려 있었다
망망창창 아침 바다는 매양 날것으로 반짝였으나
배가 고파요 어머니,
어느 해 겨울부터 어머닌 아버지를 깨우지 않았다
개마고원을 넘어온 높바람이 밤배를 밀던 밤
물살을 가르는 그녀의 등줄기에는 지느러미가 돋고 있었다
아버지의 그물 속에서 팔딱이던 눈 퀭한 생선처럼
그녀의 눈동자엔 물거품이 일었다 지고
꿈을 짚던 관자놀이엔 아가미가 벌쭉거리고 있었다
낯선 포구의 밤이 흐르는 건 시간 문제였다
탱탱한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뭇 사내의 알을 배는 일뿐이었다
밤마다 등지느러미를 흔들며 젖은 옷고름을 풀어헤치면
그리움의 자손들이 치어 떼처럼 몰려 왔다
자줏빛 젖꼭지가 퉁퉁 불어 있는 날들이 늘어갔다
그녀는 밤새 낳았던 알을 노을에 절이며 울었다
명란젓이요 명란,
길모퉁이를 도는 바람이 비닐천막의 치마폭을 걷어올리자
한 무리의 명태 떼가 흥남 앞바다를 가르며 달아난다
화들짝 놀란 그녀의 고쟁이 속에서 후훅, 갯내음이 쏟아진다
너의 나무였다
하늘 아래 와지직 찌그러지고 싶을 때가 있다
단 한 번 너에게 몸을 허락하고
무참히 던져져 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물을 담으면 물이 되고 술을 담으면 술이 되고
내 온전히 네 것으로 되는 길은 아득하나
뜨거우면 뜨거운 대로 차가우면 차가운 대로
꼭 한 번 몸을 열어 촉촉해지고 싶은 날이 있다
처음부터 나의 생生은
네 목울대 근처를 서성이는 목마른 나무였거나
차마 혀와 입술로 해갈하지 못한
또 다른 고백을 받아 적는 순백의 종이였거니
수천 수만의 꿈 잘리고 말리다가
끝내는 마음까지 척, 비어버린 종이컵이 되었다
알아?
단지 네 입술이 몸에 닿는 순간 미련 없이 열반하는 나
방하착放下着*
백병원 영안실 앞마당, 잿비둘기 한 마리가 언 땅을 찍고 있다
채송화 줄기처럼 연붉은 발가락을 바짓단 밖으로 내놓고
불광동 옥탑방에 세 들어 살던 비둘기가
탑골공원에 나가는 일은 일과 아닌 일과였다
3호선을 따라 무악재를 넘어 종로3가에 이르는 길은
그가 기억해야 하는 유일한 항로였다
기껏해야 빵부스러기로 끼니를 때우는 노후지만
척신隻身의 그에게도 날개는 있었다
장기판을 거들거나 사물패를 따르다가도 그는 훌쩍
하늘로 오를 수 있었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높이 날 수 없다는 것, 그에게는
적빈赤貧이 곧 자유였다
방하착放下着을 아시나요?
날개가 점점 무거워져요
더 이상 내려놓을 것도 없는 나이에 그는 그녀를 만났다
창공의 편대에서 떨어져 나온 은빛 비행기처럼 희디흰
그녀의 처소는 달비듬만 내려앉는 공원벤치라 했다
한때는 축포소리에 맞춰 수없이 하늘로 솟아올랐다는 그녀는
어느 날부터 날갯짓을 하지 못했다
누구 하나 속깃을 씻겨주는 이도 없었다
그녀가 하는 일이라곤 싸구려 밥집을 기웃거리거나
근처 낙원떡집 앞을 서성이거나 가끔은 넋 나간 기억으로
도로를 무단횡단 하는 것이었다
출근길 신호대기 중 횡단보도 너머로 본 그것,
희뿌연 아스팔트 위에 채송화 꽃물 붉었던 그 자리,
오늘 그녀는 이승의 마지막으로 방하착을 알고 갔을까
모가지가 댕강댕강 잘려나간 가로수들이 조문행렬로 서 있는
마른내길 영안실 앞마당,
잿비둘기 한 마리 등솔기를 들썩이며 곡哭을 하고 있다
* 방하착(放下着):일체의 집착이나 생각을 내려놓는다는 뜻의 불교용어
금성가구
작업실 문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막차를 놓치지 않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하던 내가 마침 금성가구점 앞에 멈춰 서게 되리라고는, 가랑비가 굵어지지만 않았어도 몰랐을 것이다. 가방 속에서 접이우산을 꺼내 펼치려다 우연히 그 집 유리창 안을 훔쳐보게 되리라고는, 아니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내가 그쪽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쪽이 나에게 보여준 셈이었지만 여하튼 달빛은 이미 허옇게 내뱉은 혼령을 거두어 가고 버즘나무 이파리가 상두꾼을 대신하여 땅을 치던 밤이었다. 어둑한 보도 위에는 진종일 밟힌 시간들이 오와 열을 맞춘 채 쓰러져 있었고 나는 늦은 문상을 끝내듯 저벅저벅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때 통유리 너머로 괭이눈처럼 반짝이는 것들이 보였다. 입술과 입술이 움직이는 것 같기도 했고 눈동자와 눈동자가 서로를 탐조하는 것 같기도 하였다. 처음엔 건너편의 네온등이 딸꾹질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까이서 본 그들은 분명 쌍쌍이 궁둥이를 포개고 있었고 번들거리는 대리석 위에서 떼를 지어 교접하고 있었다. 어둠 속 의자들이 밤마다 은밀하게 열락을 즐기는 것은 어쩌면 공공연한 비밀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금성가구를 지날 때마다 금성으로 가는 꿈을 꾸곤 했었다. 가끔은 유년에 즐겨 듣던 트랜지스터라디오도 떠올렸지만 어느 날부터 흘러간 노래 같은 건 가슴에 남겨두지 않기로 했다. 과거를 소멸시키며 가앙가앙 우주로 멀어져 가는 일은 풍구질을 뿌리치고 날아가는 쥐불깡통처럼 뜨겁고 아뜩하였으나 정말이지 한순간에 지상을 떠난다는 것은 얼마나 환상적인가. 허나 금성으로 가는 길은 겨우 사거리 신호등 앞에서 멈추곤 했었다.
오늘도 금성가구 앞에는 색색의 의자들이 늘어 서 있다. 아니 앉아 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들은 부뚜막의 고양이처럼 다소곳이 앉아 손님을 기다리거나 페르시안 고양이마냥 무료한 하품을 하고 있다. 그러나 낮 동안의 의자들은 청량리나 미아리의 여자들처럼 암고양이 소리를 내거나 절대 다리를 꼬고 앉는 법이 없다. 이제 금성가구 안에 또 하나의 금성이 있다는 건 내 마음 안에 또 하나의 내 마음이 있는 것처럼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심사평] 현실을 포착하는 힘있는 언어
예년에 비해 응모작이 적었지만,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작품이 많았다. 오랜 기간 작품을 써 온 흔적이 역력한 작품도 많이 눈에 띄었다. 민족문학작가회의 기관지라는 점을 의식해서인지 노동과 일상을 서정적 시선으로 포착하고 그려내는 작품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 중에는 제법 안정적인 시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분들도 있었다. 그러나 심사위원들을 한숨짓게 만든 것은, 고민 없는 서정과 치열한 가치가 보이지 않는 노동, 사소하기만 한 일상의 풍경이었다. 매끄럽고 안정적인 언어만이 능사는 아니다. 이런 것들을 극복하고 나를 둘러싼 거대한 세계와 대면하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튼튼한 언어를 창조해야 한다.
논의를 거쳐 최종적으로 남은 이들은 송부선, 신호승, 이설야, 심진숙, 이용헌 등 5명이었다.
송부선 씨의 작품들은 안정적인 서정적 언어를 구사하고 있음에도, 전체적으로 진부한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신호승 씨의 작품들은 개성적인 언어와 리듬이 눈에 띄었지만, 군더더기가 많았다. 이설야 씨의 작품들은 대체로 유년의 풍경을 남다른 시각으로 그려내는 데 성공하고 있지만, 습작기에서 흔히 나타나는 수사에 대한 욕망을 버리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심진숙 씨와 이용헌 씨의 작품들을 놓고 마지막까지 고민했다.
심진숙 씨는 환상과 현실을 적절하게 조화시켜 안정적인 시세계를 보여주었다. 「내 꽃신, 초록물뱀」「파라핀으로 만든 아버지」 같은 작품은 그의 환상이 구체적인 현실의 고통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는 점을 확신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응모작들에 소품이 많고, 형식에 치중하다 보니 진정성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 점은 그의 단점이었다.
이용헌 씨는 현실을 포착하는 시선에 만만찮은 깊이와 진정성을 지니고 있었다. 무엇보다 시를 이끌어가는 힘 있는 언어가 그의 장점이었다. 작품마다 편차가 있고, 거친 부분도 없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의 진정성과 힘 있는 언어에 힘을 실어주기로 했다. 더욱 정진하길 바란다.
심사위원 : 안상학. 김근.
[당선소감]
꿈속에서도 시를 썼다. 때로는 깜깜하고 때로는 눈부신 무언가가 나를 끌고 다녔다. 몽유(夢遊)의 행려처럼 하릴없이 곤고한 나를 인도하고 지배하는 내 안의 교주는 시공을 넘나드는 시마(詩魔)였다. 눈을 뜨면 쪽창에 걸린 새벽별이 예언의 묵시처럼 가물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사이비 신도(信徒), 시시종종 시를 욕보이고 구구절절 문학을 배반하기 일쑤였다. 고백컨대 나는 아직도 사무사(思無邪)의 근처에도 이르지 못했다. 평생을 시인 흉내만 내다가 자취도 없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러함에도 시는 나에게 절망이자 곧 희망이다. 비루한 현실에서 절망을 구걸 없이 살려낼 수 있는 것은 시의 힘을 빌리는 일뿐이었다. 궁극적으로 절망의 밑바닥에는 생과 사의 양단(兩端)만이 존재한다. 생을 버리지 않는 한 선택의 여지는 희망 쪽이다. 그 희망 쪽에 목숨을 걸게 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절망과 슬픔들이었다. 나는 그것을 슬픔의 미학이라 부르고 싶다. 문학은 결국 상처와 결핍의 이야기며 행복을 꿈꾸는 사람의 이야기임을 믿는다. 그러기에 나는 사람 냄새가 나는 시를 쓰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세상의 모든 악다구니와 하늘의 말씀을 등에 짊어지고도 달팽이처럼 유유히 사유의 늪을 기어가고 싶다. 이제 시를 잃고 흘러간 과거는 나의 이력에서 지울 것이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뒤에서 힘이 되어준 풀밭 동인들, 특히 문학에 대한 열정만 믿고 노심초사 조언을 아끼지 않은 선배 시인들께 고마움을 전하며, 부족한 글을 영광스러운 자리에 올려주신 심사위원님께도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또한 늦깎이로 다시 출발하는 나를 묵묵히 응원해준 여러 벗들과 광은, 채은 두 아이와도 이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다. 시작은 이제부터다.
제9회 내일을 여는 작가 신인상 (0) | 2014.10.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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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내일을 여는 작가 신인상 (0) | 2014.10.25 |
제6회 내일을 여는 작가 신인상 (0) | 2014.10.25 |
제5회 내일을 여는 작가 신인상 (0) | 2014.10.25 |
제4회 내일을 여는 작가 신인상 (0) | 2014.10.25 |
ㅋㅋ
제8회 내일을 여는 작가 신인상 (0) | 2014.10.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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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회 내일을 여는 작가 신인상 (0) | 2014.10.25 |
제5회 내일을 여는 작가 신인상 (0) | 2014.10.25 |
제4회 내일을 여는 작가 신인상 (0) | 2014.10.25 |
제3회 내일을 여는 작가 신인상 (0) | 2014.10.25 |
도원경(桃源境) / 김경철
전생에 한 번 와 봤음직한 어느
후미진 뒷골목, 오래 전 잃어버린
집 주소지를 찾은 듯 멈추어 서서
오래전 잊고 있었던 복사꽃 향기를
훅 하니 맡는다
오늘은 운이 좋아 이곳을 찾아왔다지만
내일은 운이 나빠 이곳을 영원히 찾을 수 없을지 모른다
담에 어린 꽃문양이 손 사이로 지나간다 안방의 벽에서부터 흘러왔을, 뿌리내린 자잘한 금들의 냄새가 훅하니 다가온다 어딘가로 건너가고 있을 저 자잘한 금들, 안을 열면 고스란히 귀뚜라미의 젖은 눈썹들이 쌓여 있을 법한, 햇살에 감긴 눈꺼풀에 한 세상이 어린다. 혼몽한 꿈결에서나 본 듯한 시절이,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이다 빗물이 소복이 고인 장독대며 말라버린 우물에 철렁 떨어진 불빛들이 고스란히 하늘로 올라갈 때까지 내 눈의 일부가 저 불빛 속에서 자랐다 만져질 듯 만져지지 않는 한 사람을 찾기 위해 복사꽃 환하게 핀 집 안을 남몰래 살펴보게 되는 것이다 졸다가 지나가버린 한 생처럼 오래 전 이곳에 묵었던 바람에 타고 있는 저 향기.
왕오천축국으로 가는 주문
- 절벽에 찍혀 있는 새
입을 열자, 산철쭉에 앉은 붉은 점모사 나비가 파르르 떠는 스님의 눈가에 스쳐 날아간다. 거북의 등껍질 속 갑골문자를 읽는 듯한 저 주문은 서쪽으로 지는 저녁해를 달았다. 목구멍 너머 발끝에 걸린 왕오천축국으로 가는 말문(末文)은 아니었을까? 목구멍 속, 울대에 매달린 붉은 꼬리 원숭이가 목젖에 범벅이 되어 있다. 끄아악 끄악 입으로 넘어오려는 저 포유류는 주문의 근원은 아니었을까? 사람은 누구나 제 목소리를 닮은 짐승 하나씩 키운다. 햇살 한줌과 터럭에 걸린 이슬을 모아 한 끼를 때운 듯한 가랑잎 위에 맺힌 다시래기 소리처럼 저 주문은 쓸쓸한 화전의 열기는 아닐까? 스님의 콧잔등에 어린 땀방울은 열을 마친 염주알로 둥글게 하나씩 떨어지고 있다. 허공에서의 삶을 다 마친 거미의 속눈썹이 땅 그늘에 맺혀 있다. 박제된 벌레들의 날개 소리 속에서 불고 있는 주문의 열은 스님의 눈을 해동시킨다. 눈알에 절벽에 새가 찍혀진 것처럼 금이 간다.
택시미터기 안에 뛰고 있는 저 말
혹, 도로 너머, 광야가 펼쳐졌다면
택시미터기 안에 뛰고 있는 저 말은
몇 천 킬로미터라도 상관없다는 듯이
내달렸을 것이다 초목과 유목민이 사는
몽골 어디쯤, 흙 속에 움트는 씨앗처럼
몽골 고원지대를 소원했을 것이다
나침반처럼 자장 끝을 매섭게 노려보는
저 말, 말 등잔이 몽골알타이에서
고비알타이로 이어진 산맥처럼 씰룩이며
울란바토르의 젖줄, 툴강이 생각난 듯,
처음 켜는 시동처럼, 온 몸을 부르르 떤다
과열된 엔진처럼 부동액을 끌어올리며
전생에 한 번 스쳐온 듯한 그 길, 그 고원,
그 광야를 떠올리면서
수백 억 년에 걸쳐 묻어두었던
원유를 뽑아 올리면서 화염처럼 뜨겁게
심장을 달군다 신호도 없고 경계도 없는
그 광야로 택시미터기 안에서 뛰고 있는 저 말은
한없이 뛰어간다 마침내 택시 그림자가
택시를 박차고 달려나간다 도로 너머 광야가 펼쳐진 듯
택시 한 대가 눈동자 속 터널을 빠져나간다
천 개의 고원
심장에 닿기 위해 내 안의 말은
사방팔방 몇 십 리, 몇 천 킬로미터라도
상관없다는 듯 내달려간다 히말라야
산하에서 내려다본 무수한 하천 너머
푸른 대지를 녹이는 한낮의 햇살처럼
작고 따사로운 풀잎에게 눈인사하는
내 안의 말은, 산양의 피를 마시는 저
저녁의 목책까지 훌쩍 뛰어 넘어간다
동음이의어로 가득한 일상의 목울음까지
내 안의 말은 새롭게 되새김질한다
산과 바다를 향해 절벽이 끌어안는
포말까지, 버티고 서서 우는 내 안의 말은
잠시 말울음으로 흩어진 갈매기떼를
정렬시키고 다시 비상한다 내 안의 말은
심장 너머를 본다 천 개의 고원, 천 개의
하천이 모이는 이 바다에서 내 안의 말은
말갈기로 이글거리는 태양을 본다
내 안의 고동이 저기 저 천 개의 고원까지
둥둥둥 울려 퍼지는 뱃고동으로 전해진다
하루를 천년처럼 충전하는 하루살이처럼
내 안의 말은 잠깐 동안 반짝인다, 눈빛을
시집가는 날
가을에는 붉은 단풍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시집간다. 자기 가문을 떠나 다른 가문으로 이동하는 바람의 가마를 탄다. 허나 눈물짓지 아니하는 단풍이 없고 뒤돌아 손 흔드는 쓸쓸함이 베이지 않은 나뭇잎이 없다. 부정의 부정을 손 흔드는 단풍이여, 가을이여. 나 시집간다.
황금 들판을 지나 남으로 남으로 이동하는 새떼들에게 한 편의 시를 띄워 보낸다. 허구처럼 쓸쓸한 날, 지나온 생이 그렇다. 저 논에 무르익어 가는 벼들은 왜 고개 숙일까. 밑동이 베이는 아픔을 삭이기 위함인가. 나 빈 논처럼 쩍쩍 갈라지는 겨울 지나 봄을 맞는 새색시 같다. 허나 시집이란 나 아닌 다른 사람의 텃밭을 가꾸다, 꽃 지고 속내 오므리는 열매처럼 단 하나의 씨앗을 뱉어내는 것. 붉은 저고리 하나 푸는 밤. 하늘은 높고 쓸쓸한지 이내 손톱을 깨문다. 철렁, 우물에 떨어진 두레박처럼, 다시는 길어 올리지 못할 마음 하나 깊고 깊다. 문풍지 너머 벌레들의 울음이 밤송이처럼 까칠하다.
제7회 내일을 여는 작가 신인상 (0) | 2014.10.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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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내일을 여는 작가 신인상 (0) | 2014.10.25 |
제4회 내일을 여는 작가 신인상 (0) | 2014.10.25 |
제3회 내일을 여는 작가 신인상 (0) | 2014.10.25 |
제2회 내일을 여는 작가 신인상 (0) | 2014.10.25 |
사랑에 관하여 외 3편 / 김자흔
광화문 사거리
공중전화부스 안에서 나는 당신에게 꽝꽝꽝 내 마음을 찍어대고, 올 듯 말 듯 당신은 여전히 오리무중이고, 나는 기다림이 무서워 펄떡거리는 내
심장을 꺼내 길바닥에 펼쳐놓고, 여긴 뜨거운 무덤 속이에요 수증기가 자욱이 깔려 있죠 낮은 목소리로 내가 웅얼거릴 때 당신은 이제 막 졸린
눈곱을 떼내며 느릿느릿 내 심장을 곁눈질하고, 당신에게 나는 이렇게 자신이 없는가 생각할 때 공사판 기계가 파르릉 소릴 내지르고 내 젖은 눈썹
위로 푸른 낮달이 흐르고, 숨을 곳을 더듬거리다 나는 기어이 공중전화기 속으로 몸을 숨기고, 오만한 당신이 느리게 나타났을 때 나는 내 작은
몸을 돌돌 말아 구멍 속에 더 깊이 숨겨놓고, 늘 그랬듯이 당신은 눈 한번 꿈쩍없이 뜨거운 입김 하나로 아주 쉽게 숨은 날 찾아내고, 엉뚱하게도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오직 이것뿐이라서 날 좀 안아 줘요!
당신의 심장 속에 무례하게 날 가두어 버리는
당신은
당신은
목내이
한 구의 살아 있는 미이라를 보았다
인공위성이 찍어보낸
화성의 분화구처럼
숭숭 삶들이 빠져나간 육신의 구멍,
가만히 들여다보면
구멍 뚫린 분화구에 물 흐르던 흔적이 보인다
지금
미이라는 협곡의 물줄기 찾아 헤매는가
숨소리 가랑가랑 잦아들고 있다
활시위를 당겨도 될 만큼
열두 쌍의 늑골을 차례로
누이고
미이라가 앙상한 무릎 뼈를 곧추 세운다
짧은 빛살 분화구 속으로
푸스스 떨어져내리는 살비듬들,
마른 입술이 하얗게
타들어간다
드디어 물꼬를 찾아낸 걸까
힘겨운 손짓으로 미이라가 교신을 보낸다
바쁜 길 어떻게 왔냐고,
송출한 무전을
감지하는 순간
흉부가 거칠게 들썩인다
이마에 가 닿은 손길 황급히 거두며
재빨리 무선 송출을 차단시킨다
분화구를 적시는
뜨거운
눈물!
폐암 구멍에 링거줄 하나 꽂지 못한
한 구의 미이라,
그 미이라가 더듬더듬 협곡의 물꼬를 찾아
헤매고 있다
초조(初潮)
엄마는 샘물 속에 똬리를 틀고
앉았다
나는 방안에서 기어 나와 엄마를 불렀다
엄마, 목이 말라요
얘야, 저 복사꽃이 빨갛게 터져 나와야 한단다
엄마는
샘물가에 있는 복사꽃나무를 가리켰다
엄마, 내 몸에도 열꽃이 번지고 있는 걸요
나는 샘물 앞에 엎드려 힘들게 목을 축였다
샘물
돌 틈 사이로 알 밴 가재가 들락거렸다
엄마, 저 알 밴 가재가 먹고 싶어요
무슨 부정 탈 말을……
엄마가 끙, 일어나 되돌아
앉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복사꽃이 톡톡 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엄마, 속이 자꾸 메슥거려요
나는 웩웩 게움질을 해댔다
이젠
때가 되었구나
엄마가 똬리를 풀어 탁탁 물결을 치자
알 밴 가재가 빨간 새끼들을 쏟아냈다
새끼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엄마를 한
입에 삼켜버렸다
나는 까무룩 정신을 놓아버렸다
아랫도리로 뜨거운 열꽃이 마구
터져나왔다
아버지의 우화
아버지 똥간에 빠져
온 집안을 인분 냄새로
진동시켰다
똥간에 빠져 목숨이 위태로웠던 날을
전부 잊은 듯,
아버지 술버릇은 여전히 고약해 툭하면
똥간으로
기어들었다
여름내 바글대던 구더기,
오글오글 아버지 목을 타고 올라왔지만
끝내 돋지 않는 아버지의
겨드랑이
날개,
아버지는 똥파리도 되지 못했다
겨우 앞다리 비비는 소리로 낮게 웅얼거릴 뿐이었다
똥간에서 허우적대던 아버지를
윗방에
누이고 화롯불에 고구마를 구웠다
친구가 사립문에 와서 나를 불렀다
친구는 별 내색이 없었다
고구마광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버지 겨드랑이에 조금씩 날개 돋는 것이 보였다
섣달 그믐이 지고 있었다
[심사평]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선명한 이미지
시집을 읽어내는 독자들은 줄어들지만 시를 쓰는 사람들은 전혀
줄어들지 않는다. 이번 「내일을 여는 작가 신인상」에는 홍보가 미흡했는데도 불구하고 1백여 명의 시 천여 편이 응모되었다.
일정 수준에
오른 작품들은 크게 보아 자연 서정 계열의 시들과 환상성을 흡수한 시들로 나눠서 살펴볼 수 있었다. 현실이 반서정적이라서 그런지 자연에 대한
열망을 극대화하여 표현하는 시들이 많았다. 대개 현재의 자연과 기억 속의 자연을 오가며 본질적 삶을 탐구하는 경향이라 할 수 있는데, 모티프나
화제의 참신성이 부족하고 과도한 감정이입을 발견하게 되는 아쉬움이 있었다. 또한 시 밑자락에서 송가(頌歌) 풍의 배음(背音)이 흘러나오거나, 시
전면에 교훈적 메시지 등이 노출되어 쉽게 자연과 합일될 수 없는 복잡다단한 현실을 투영하는 미적 새로움이 부족했다. 한편, 어두운 내면 풍경을
보여주는 환상시들도 눈에 띄었다. 환상적인 조형기법을 이용하여 황폐한 내면 세계를 그려내고 있는 시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대개 현재와 미래에
비전을 열어줄 치열함 대신 개인적인 내면의 비극성 앞에서 좌초하는 경향이 많았다.
시는 무언가가 끊임없이 밀고 올라오는 것이다. 시적
대상과 내면의 관계가 분리되지 않고 혼융되면서 육체와 영혼을 함께 표현하는 것이다. 본심 심사는 이런 관점에서 시읽기를 꼼꼼히 하였다.
본심에서 집중 거론된 신인은 세 명이었다. 김산옥의 「앵무새 재우기」외 9편, 문채영의「바닥은 흐른다」외 9편, 그리고 김자흔의 「사랑에
관하여」외 9편이 경합하였다.
김산옥의 시들은 대상에 대한 꼼꼼한 묘사를 통해 이미지의 결합을 시도한 점이 좋았으나, 시인이 의도하는
바가 불투명하고 소품에 그친 경향이 있다. 물론 시는 그 자체의 이미지만으로도 충분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미지는 그 안에 숨겨진
다채로운 의미가 언제든 격발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어야 될 것이다.
문채영의 시들은 김자흔의 시들과 함께 끝까지 선자들을 고심케
하였다. 둘 다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자연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자신만의 시적 스타일을 견지하고 있다.
문채영의 시들은 이번
신인상에 응모된 투고작 중에서 가장 안정감이 돋보인다. 표현도 오랜 사유 끝에 나온 것들이라 끝까지 시적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다. 「바닥은
흐른다」, 「어느 노인의 목욕」 같은 시는 완성도나 이미지를 결합하는 능력에 있어 빼어난 솜씨를 보여준다. 가령 「어느 노인의 목욕」은 관계는
관계이면서 관계가 아닌, 헛껍데기의 인간 관계에 대한 비유이다. 치매 노인과 간병인 여자와의 관계는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가 서로 유용한
경제 수단으로 관계를 맺는 것임을 보여준다. 다만, 자연 서정에 흐른 시편들에서 보이는 안정감이 다소 상투성으로 흐른 측면이 있다.
김자흔의 시편들은 문채영에 비해 안정감은 다소 부족하다. 「사랑에 관하여」, 「목내이」, 「초조(初潮)」, 「아버지의 우화」등이 다채로운
이미지를 사용하면서도 비교적 자신의 감정과 현실을 통어하였으나, 다른 시편들은 그 이미지들이 응축되지 못하고 풀어지는 것이 단점이다. 그러나
감정이 분출되는 대로 내뱉는 것 같으면서도 표현하는 방식이 새롭고 시적 패기가 있다. 예를 들어 폐암 환자의 숭숭 뚫린 구멍에서 생명의 물길을
발견하려는 「목내이」나,「초조(初潮)」의 ‘샘물 돌 틈 사이 알 밴 가재’와 ‘복사꽃’의 대립은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선명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결국 이번 심사는 분출하는 이미지에 가능성을 열어두고, 오랜 고심 결과 김자흔의 시를 당선작으로 내밀게 되었다.
아깝게 탈락된
문채영에게는 격려를, 김자흔에게는 축하의 인사를 드린다.
-- 안도현(우석대 문창과교수․시인), 박형준(시인)
제6회 내일을 여는 작가 신인상 (0) | 2014.10.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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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 내일을 여는 작가 신인상 (0) | 2014.10.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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