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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의 왼손


왼손으로 늘 바닥을 쓸고 앉는 외할머니

넓은 치마폭을 가지런히 모으면

그 한 자락을 손에 감고 난 드러누워

옛날이야길 듣는다.

우렁각시를 시작으로

귀신과 원님이 너나들이 하고

맨손으로 호랑일 잡았다는 왕손 아제 펄펄 날고

맘씨 고운 친구 순덕이가

정신대에 끌려간 대목에 이르면

저고리 고름으로 코를 푸는 척하며

눈물을 훔치는 외할머니의 왼손

시주승의 홀쭉한 바랑에 됫박 쌀 담을 때도

내 상고머릴 쓰다듬을 때에도

왼손만을 재게 놀린다.

동백기름 발라 쪽진머리 반드레 매만지고

사분사분 마실갈 때면

어머니는 명주솜 넣어 누빈 천으로

어깨에 붙은 몽당팔을 감싸고

텅 빈 오른팔을 저고리 앞섶에 여며드린다.

외할머니의 오른팔을

질겨빠진 피댓줄이 감아먹은 후부터

어머니 가슴엔 피멍이 들고

덜컹덜컹 왁자하던 외가의 정미소는

친친 거미줄을 쳤다.



해오라비난초


그를 보고 깜짝 놀랐지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한 나비, 아니 학이던가

긴 다리가 흙살에 갇힌 하얀 나비

날아보지 못하고 죽은 그의 제삿날

음복한 술이 과했는지 이내 몽롱하네

환하게 웃는 사진 속 그 사람

설핏 작은 눈이 커지네

조곤조곤 귀엣말 이어지고

내 머리 쓰다듬던 그 손길

목덜미를 간질이던 입김이 스물스물 피어나네

나는

훌훌 벗고

춤을 춘다 땀으로 얼룩진 초혼제

너울너울 날개 펴고 바짝 세운 머리 꽃술

못내

발을 뗄 수 없어도 덩실덩실

춤이야말로 몸시가 아니던가

기신기신 어깨춤에 올라

달보드레한 입술에 잠시 머물다가

난향 가득한 귓가에 이르네

잘 사시오, 그 매정한 인사가

닿을 듯한 이명 같은 먼 울림

피와 피가 수런거리고

살과 뼈가 뒤엉켜 이룬 마지막 기상

허공에 그리는 동그라미 커질수록 다가오는 이

순간, 격랑에 휩싸여

둥둥 춤추며 날아오르는 저, 순백의 꽃잎



누운 자에게 말 걸기


천불산 운주사 와불 옆에

이른 서리 푸르게 떨어지는 낙엽들

물들이지 못한 말 너무 많아

낮은 바람에 실랑이네

앉은 불(佛) 선 불(佛)

세상을 벗은 그들

잘난 탑(塔) 못난 탑(塔) 모두 모여

빌고 또 빌, 그 무엇이 아직도 남아

자리 털지 못하고 서성이는가

그윽한 눈길 한번 못 맞추고

머슴바위 늘인 목 서늘한데

칠층탑 위에 앉은 조롱새

웃는 듯 우는 듯 날 새워도

무심히 뜬구름만 보는 염불

천 년 누운 자리 등창 나

이제 물릴 만도 한데

뼈 속조차 한기 든 저문 날

서성이는 바람 베고

그 곁에 허리 감고 누워나 볼까



패싸움


상추 치커리 고추가 눈 부라리며 막말을 한다. 근대 아욱도 분기탱천 발길질 요란하다.

풀숲에 갇힌 쑥갓 쪽파는 머리채를 잡혔다. 이파리 절반은 벌레한테 내주고 겨우 손가락만큼 영근 총각무 씩씩대며 허연 팔을 걷어부쳤다.

하얀 손차양 아래 고개 내민 당귀는 우아 떨며 샐쭉거리고, 죄 푸른 것들 사이에 붉은 얼굴 백일홍까지 삿대질하고 나섰다.

구석진 자리에 멀거니 서있는 돼지감자, 시앗에게 안방까지 내 준 큰엄니처럼 주춤주춤 물러선다.

나 이렇게 도리천 아수라 속에서 자랐다.



백구두


아침부터 구두를 닦는다. 솔질을 하고 퇴퇴 침을 뱉어가며 헝겊을 야물게 잡고 광을 낸다.

하얀 구두코가 반짝반짝 빛난다. 날선 바지에 중절모 눌러 쓴 아버지 찡긋 웃으며 내게 동전 한 닢 건내준다.

한량아버지 나서면 골목 끝으로 모든 빛이 따라 나간다. 이 골목에서 쓸개 빠진 놈은 네 놈 뿐이여 할머니 고함소리 자지러진다. 할머니만 이마에 옥양목 머리띠 질끈 동여매고 눕는다.

어머니 재바른 빗자루 소리가 나른한 마당에 다시 햇살을 쓸어 모은다. 며칠, 때론 몇 달 만에 돌아온 아버지 양복에 박하향 가득하다.

언제고 다시 떠날 백구두, 댓돌 위에서 멀뚱거리고 있다.




당선소감 (노정숙)


  시가 좋아 시 동네에서 어정거린 것이 10년이 넘었습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십 년쯤 지나면 그 분야에서 꾼이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돌아보니 안일한 생각이었습니다. 꾼이 되는 것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치열함이 문제였습니다. 시는 질투심 많은 연인과 같아, 몰두하여 바친 시간만큼만 야박한 눈길을 줍니다. 곡진한 마음이 아니면 희미한 미소조차 어림없습니다. 불같은 사랑을 전력투구로 퍼부어야 합니다. 때론 치열한 시 쓰기보다 시인들을 만나 밥정나누기를 더 즐기기도 했습니다. 끈질기게 심각하지 못한 제 성정이 시작(詩作)의 치명적 결함이라는 것을 깨닫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좋은 시를 만나며 가슴 덥히던 순간의 감동을 떨치지 못하고 짝사랑에 매달려 있습니다.

  저를 닮아 야무지지 못한 제 분신들이 열린 세상에 나가서 눈총받이가 되지 않을까 염려되기도 합니다. 이 수상은 느슨한 제 시작에 박차를 가하라는 뜻으로 알고 정진하겠습니다. 늘 깨어서, 가슴 뛰는 사람으로 나아가겠습니다. 10년을 함께한 시인회의와 서시 동인과 기쁨을 함께 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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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의 별


그의 혹에서는 모래바람 소리가 들린다.

가람병원 8층 사막의 경유지에서

아버지는 투명한 비커 속

잠잠해지는 모래바람을 본다

오래전 물이 마른 웅덩이 일까

떼어내지 못한 담낭, 가뭄은 상처가 깊어서

소변을 보고 돌아누운 어깨가 흔들린다.

하루 세 번 비커에 소변을 받고

사막의 모래 돌풍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릴 때

신기루 같은 선잠에 드는 낙타

늘어진 목덜미에 손을 얻으면

흩어지며 무늬를 만드는 모래 알갱이

수많은 아버지들의 무덤, 그의 땅에서는

풍장 된 낙타들의 뼈가 만져진다

지린내 퍼져가는 4인실 병동

먹다 남긴 복숭아 캔에 황사먼지가 내려앉는다.

되돌아오기엔 너무 멀리 걸어 나온 낙타 한 마리

비커 바닥에 담석 알갱이들이 샛별로 빛나기 시작한다.



바람의 말줄임표


실밥을 뽑고 할아버지는

잘려나간 길들로부터 자유로워 졌다.

한성병원 202호실, 모든 길을 꿰매어 논 할아버지가 있다.

병수발 들던 고모가 마중 나가 조용한 병실

가습기 연기가 야윈 얼굴을 스쳐지나간다.

발톱부터 빠져나갔다, 무릎만 남아 균형 잃은 다리

창가로 들어온 햇살 한 줌 빈자리를 채운다.

선산에서 다시 찾게 될

왼쪽다리, 할아버지 무릎에 실밥자국으로 남아 있다.

살기 위해 다리를 버린 할아버지는

불사의 길은 알지 못했으나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는 법은 알고 있었다.

잠든 할아버지의 날숨에서 다리를 잘라먹은 단 내가 나고

링거액이 심박수처럼 떨어진다.

달구지를 타고 두렁을 지나오던 날들

썩어버린 시절을 봉하는 마지막 바느질이었고

새로 시작될 바람같은 날들을 향한 말줄임표였다.

실이 빠져나간 자리로 뭉특하게 남은 흉터

할아버지 왼쪽 무릎아래

햇볕이 새 터를 잡는다.



말레이가비알


난간에 걸린 이름표에 김이 서린다.

물속에 오래 잠겨 있어도 부르트지 않는 몸

악어새가 오지 않는 대공원 파충류관

말레이가비알 악어 두 마리

입을 다물고 환영처럼 사라지는 서로의 몸을 본다.

수조 벽에 긁혀 조금씩 마모되었을 꼬리

좁은 웅덩이가 그들에게는 유일한 천적이다.

더 이상 얼굴을 늪 안으로 넣지 않고

늪을 부유하던 몸은

수조의 물 위를 떠다닌다.

꼬리를 휘두르며 사냥하던 육식의 본능은

이제 사육사가 주는 고기를 받아먹는 것

말레이가비알 악어를 찍던 남자

움직여 보라는 듯 난간을 발로 찬다.

챙, 하고 진동하는 난간에도

다문 입을 열지 않는다.

청각부터 굳어 가는지

떠날 준비를 하는지

말레이가비알, 말레이시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악어 두 마리

산 채로 박제가 되어간다.

요철무늬 사이가 깊게 패인다.



구세군


올해도 서울역 앞에는 산타가 온다.

종소리에 맞춰 흔들리는 자선냄비

생의 밥그릇은 항상 저렇게 비어 있다.

기차를 타기 위해서는 저 가파른 계단을 올라야 한다.

한 번의 헛발질로 미끄러졌을까, 저 남자

아득한 시절로 돌아가는 차표는 영영 끊겼는지

비둘기처럼 모여든 사내들의

뜯어진 신발 틈으로 삐져나온 맨발이 환하다.

몇 번이나 담배를 구걸하다 체념대신

여러 번 누빈 이불보를 덮고 누운 남자

종소리, 캐럴소리 듣는지

끊기지 않는 선율 따라 붉은 냄비가 흔들린다.

마이크를 든 산타가 종착역을 알리는

역장처럼 목청을 높인다 또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개찰구에서 쏟아져 나오는 동안

밤은 거대한 이불보를 펼친다.

털어낸 솜이불에서 오래 묵은 먼지를

첫 눈발을 날리고 있다.



처녀자리의 계절


할머니는 죽어서 처녀자리가 되었다.

한별 아파트 202호

아버지가 옥매트 전선을 묶는다.

삼촌과 인부가 자개장롱을 들어 옮기고

하나씩 비워지는 방

엄마는 노끈에 묶인 점성책을

통재로 들어 현관에 내놓는다.

누렇게 변한 책 귀퉁이

곳곳이 접혀있다.

오래된 책 냄새가 현관을 매운다.

운세는 할머니의 유일한 취미

매일 아침 각자의 운세를 짚어보고

호통을 치던 할머니는 별이 되었다.

움직이지 않던 별자리도 서쪽으로 이동하는 겨울

높아지는 하늘이 보인다.

계절따라 별자리도 바뀐다고

점성을 좋아하던 할머니는

계절을 따라 가셨다.


 

 



당선소감 (안양예술고등학교 3학년 7반 정예림)


  제게 문학은 한 없이 높은 산이었습니다. 열심히 오르다가도 정상은 보이지 않아서 주저앉기도 했습니다.

  저는 대체로 일상에서 겪었던 것을 시로 씁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다리에 남은 바람의 말줄임표와 아버지의 안에 있는 사막을 보면서 꼭 한번 시로 써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야생성을 잃은 채 살아가는 말레이가비알 악어를 보면서 그들의 슬픔을 느끼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것들을 자신만의 언어로 이해하고 싶었습니다. 아마 제 나이의 또래들이 걱정하는 게 내가 가는 이 길이 맞는가, 일 것입니다. 그때마다 자신의 결정에 책임을 지는 법을 가르쳐주신 김유미 선생님과 윤한로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재작년 항상 저희에게 웃음으로 가르침을 주신 유한칠 선생님과 항상 못난 딸을 응원해주신 부모님께도 감사하다 전하고 싶습니다. 높디높은 문학의 산을 걸으면서 만난 27기 문창과 동기들, 물동이에게도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한 없이 부족하고 더 배워야 할 저에게 이런 큰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분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 기회는 저에게 시작이라는 의미입니다.

  나태하던 자신을 혼내고 더욱 열심히 하라는 문학에 정진하라는 뜻의 상인 것 같습니다 언젠가 산에 올라 야호를 외칠 수 있는 그 날까지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노력하는 문학인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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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세베리아* 증후군

싹을 잘라 물 컵에 담근 산세베리아
하얗게 뿌리 내립니다
귀를 쫑긋 세우고 실눈 뜨는 산세베리아
그늘을 받아먹은 귀가 파랗게 자라고
우리 엄마 혓바닥도 퍼렇게 자라납니다
허둥지둥 시작한 오늘 아침
나는 한쪽 귀를 뚝 떼어 놓고 학교 갈 준비를 합니다
엄마 혓바닥이 자라 입 밖으로 나오기 전
떼어 놓은 내 귀에도 산세베리아가 돋아야 할 텐데
오늘따라 늑장 부립니다
잔뜩 웅크린 귓불이 결국
어제와 똑 닮은 아침을 만듭니다
나는 산세베리아 귀에 대고 말합니다
엄마, 학교 늦겠어요
꽁무니를 붙어 다니는 치와와가 따라 짖습니다
엄마도 쟁반에 토스트 한 쪽, 우유 한 잔을 담아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닙니다
아침 한 끼 굶는다고 큰일이야 나겠어요
엄마는 혓바닥을 길게 내어 놓으며
수험생이 아침 거르면 안 된다고 합니다
남은 한쪽 귀도 어떻게 떼어 놓을까 고민합니다
하루쯤 귀 없이 산다 해도 별 일 없겠지요
엄마 혓바닥은 내일 아침에도 어김없이 자랄 텐데
나는 활짝 핀 산세베리아 귓불로 얼굴을 가리고
현관문을 나섭니다
가방 속에 몰래 숨겨두었던 또 하나의 귀
꺼내 붙이고 학교에 갑니다

*산세베리아: 영명 MotherinlawTongue로 잔소리를
많이 하는 장모의 혓바닥 같다는 뜻.



  할머니의 식사법

밥을 먹으며 그녀가 엄마를 큰 소리로 읽는다
숟가락을 뜰 때마다 활자가 조금씩 짙어진다
책갈피처럼 펼쳐진 밥상이 엄마처럼 가벼워지고
낱장마다 줄을 그으며
그릇에 담긴 엄마를 조금씩 덜어내는 일
언제나 낯설고 언제나 익숙하다

끼니때마다 책을 펴드는 그녀
오늘은 뒷장으로 넘기며
엄마의 어제와 그제를 거슬러 읽는다
벌써 십 이년
책표지가 열리듯 수술실 문이 펼쳐지고
백 년처럼 길었던 열다섯 시간이 찢겨졌다
두 손을 모아 잡고 있던 엄마 얼굴은
구겨진 책장이 되었다
낱말 빼곡히 들어찬 부록처럼 우리는 남겨진 채
마흔 둘째 쪽에서 굵은 제목의 아버지가 찢겨나갔다
그때부터 그녀는
엄마를 소리 내 읽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우리는 언제든지 수정 가능한 문자
짜거나 싱겁게 몇 번이나 지워지고 다시 쓰여
갈피마다 너덜 하다

오늘도 어김없이 밥상에 오른
엄마라는 책,
서른여덟 쪽에서 책장을 덮는 그녀
우리에게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책표지가 되라 한다
비둘기는 심심해

주인님은 각본대로 신문지를 찢고 나를 꺼내요
처음인 듯 어리둥절하게 태어나는 나를
사람들은 천사라고 부르지요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태어나 잠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지만
박수 소리와 함께 금방 지워지지요
머리부터 꼬리까지 바싹 구워진 한낮
장구밤나무가 나뭇잎으로 허겁지겁 부채질하고
흰 장갑 낀 주인님은 손바닥을 보이며 마술 부리죠
천 원짜리 지폐가 만 원으로 부푸는 손바닥 세상
쏟아지는 환호와 박수가 유일한 출구예요
신문지 속에 빠진 내 깃털이 시들시들 말라가는데
사람들은 주인님 손끝만 보고 있어요
나에게 허공은 아무 의미가 없는데
날지 못하는 나를 왜 천사라고 하는지
아이들도, 어른들도 심심해서 그럴까요
뜨거운 바람이 머리칼을 태우고 
딩디기딩딩딩, 누군가 손가락을 튕겨요
문득 박자 맞추기에 턱없이 짧은 부리가 슬퍼졌어요
부리에 반사되는 햇빛 때문에 눈물이 났죠
눈물 맛도 심심해 무척 화가 났어요
나에게는요, 심심한 것만큼 슬픈 일은 없거든요
박수 소리는 아무리 쪼아도 허기를 채우지 못해
붉은 발톱으로 주인님 손가락을 움켜쥐었죠
하지만 곧 새장 속에 갇혀버려요
걱정하지 않아요 나만의 세상을 만들면 되죠
주인님을 공중에 날려 마음껏 쪼아 먹다가
아침이 되면 훅, 날리는 상상
멋지지 않나요?

  중심이 기울다

가슴에 봉곳한 두 칸짜리 방
기한이 남아 있는데 철거 통보를 받았다
심장에 백기 한 장 꽂아두고
사후관리가 전문이라는 철거대책반 찾아갔다
철거 동의서는 대책반 임의대로 체결되었고
이제 짐 싸는 일만 남았다
미처 짐을 다 옮기기 전, 차디찬 기계음으로
방 한 칸을 들어내기 시작했다
사후처방으로 특수기능이 첨가된 뽕브레지어로 문을 잠갔다
유선을 따라 부풀던 방,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남은 방이 여진으로 마구 흔들렸다
이미 마그네틱이 손상된 희망은
인식 기능을 잃은 마음 감식기를 끊임없이 긁어대고
그 자리에 타이커브*, 페미라*로 모든 가능성을 타진했다
기한이 표기되지 않는 권리증을 가졌던 시절
평생, 이 자리에 남아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남아 있는 방을 지키기 위해 설치한 경고등마저
중독성이 강한 불안으로 먹통이 되었다
출입이 통제된 방
굳게 채워진 자물통의 무게로 기우뚱 거린다
불안한 중심이 자꾸 한쪽으로 기울여간다
저울추 같았던 두 칸의 방
내 몸의 축이었다

*타이커브, 페미라 : 유방암 치료제

와산교*가 늘어졌어요

와이퍼가 몸을 흔들어 빗물을 털어내요 라디오 볼륨을 타고 피아졸라*의 젖은 목소리는 차창에 엉겨 붙어요 입술을 더듬어 내려와 젖가슴이 춤을 추게 해요

빗물은 줄기 마디마디를 움직이고 부푼 엔진소리는 탱고를 추어요 물방울이 흐름새를 앞서며 입김을 불어요 가랑이를 벌리는 다리가 가쁜 숨을 쉬고요 날숨의 부력으로 어둠이 발광을 해요

차창이 물광으로 화장을 해요 와산교가 행렬을 가늠해요 우산을 높이 쳐들고 잡아당겨요 끌려가고 싶어 와이퍼를 더 빨리 작동해요 신음하는 속도는 바퀴에 깔려버려요

중심 잃은 속도가 손바닥에 엉켜 붙어요 손바닥과 와이퍼가 키스를 해요 우산 끝으로 와산교 꼬리가 길게 빠져나와요 한껏 흥이 난 피아졸라는 엉덩이를 흔드는데 제기랄, 욕설처럼 늘어지는 저녁이에요


* 와산교: 은평구 증산동 불광천 다리 이름
* 피아졸라: 아르헨티나의 전설적인 연주가이며 작곡가 탱고음악의 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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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설특보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맨 꼭대기 층 강의실에, 우린 철새처럼 앉아
길을 묻어보곤 했다
점자를 짚어내듯 취업 공고문을 손 짚어 읽다보면
자주 길에서 길을 잃어버렸다
그럴 때마다
간판도 없는 술집에 앉아
눈발이 거세지는 서로의 눈을 닦아주거나
촛불이 되어 대신 울어주며
발치 할 수 없는 희망을
계산서에 빼곡하게 부적처럼 적어두곤 했다.
취할수록 편안해지는
거짓말이 늘수록 새 하얀 세상
자취방에 앉아,
바라본 창밖의 검은 하늘
밤이 별의 관절 속에 못을 박고 있다.

 

 

수의



해두면 오래 산다는 말에 미리 지어둔
수의,
웃돈까지 주며 맞춘 것 치곤 너무 볼품이 없다.
헐벗은 것보다
그나마 조금 나은 가벼움마저 없다면,
빨래 걱정 덜어내 줄
욕심 없는
저 누런 빛깔이 아니라면,
무르자고 성화라도 낼 판인데.
시골에 둔 누렁이 쓸어주듯 곱다, 참 곱다 하신다.
일평생 처자식 뒷바라지만 알고
까막눈이 된 게,
이제 막,
새 옷 한 벌 얻어 입는 게
저토록 신명이 나는 일인 것일까.
이젠, 먹지 않아도 배부를 것 같다하시더니
밑이 트인 자루처럼 먹은 걸
자꾸만,
도로 게워내신다.
내 등에 업힌,
수위 한 벌
벌레 먹은 사과보다 가볍다.


망치를 맞다

액자의 뒤편처럼
어둠이 짙게 서린 야시장에는
못과 같이,
억척스레 삶을 붙들고 사는 이들이
밤하늘, 별들의 묵고 시린 기침보다 가득하다
처자식만을 생각하며
지금까지 묵묵히 가정에 못 박혀 살아온
사내부터
허리가 한껏 휜 노인까지.
주어진 한 줌의 삶을
소란스럽게 흔들며 일구는 사람들.
그들이 쏟아내는 힘겨운 한숨마다
오지 않은 미래를 보는 듯
삶의 탁한 기후와 온기가 끈끈하게 전해진다.
그 모습을 보며,
이제껏 사소한 일에도 삐걱거리며
어긋나기만 했던
나를 가만히 망치 밑으로 들이밀어 본다.
망치질 소리가 멈추지 않는다.

  유령 도서관

밤이 개관 되면, 옥상 가득 펼쳐지는 별자리
우린 그 책을 빌린 적이 있다
연체된 지도 모르고...
서로 다른 꿈을
달의 담벼락에 빼곡히 적어놓고,
밤새 여기 저기 꽃가루를 묻히며,
새벽이 짓눌린 골목에서 공기처럼 뛰어놓았다.
다른 이정표를 보며 걷다가,
학벌이 없다는 게,
뒤를 받쳐주는 누군가가 없다는 것이,
말 못할 아픔으로
퉁퉁 사랑니처럼 붓고 나서야
서울의 밤하늘에
밀서처럼 감춰진 별들을 꺼내어 읽어볼 수 있었다.

장기

영토가 장기판과 같이 둘로 나뉘고도,
한 수도 물러섬이 없는 지금 이 팽팽한 시점이
한데 나고 한데 지는 별들에게
얼마만큼이나,
낮 부끄러운 일인지
왜 그들은 알면서도 모르는 것일까.
지키지 못할 거짓말에
속고 우는 국민들은,
언제까지 경첩처럼 가슴에 못을 박고 살아야 하나.
문득, 네모진 칸칸이
서해안에 자리한 섬과 같아 보인다.
숨고를 틈 없이
온 사방에 철책선이 휘둘러 쳐진...
그래도,
목숨을 담보 삼아,
근근이 바다로 나가 살던
사람들에게
언제까지 정부는 무리수를 둘 것인가.
방치된 산새의 알처럼
겁에 떨며,
물방울로 웅크린 그 한 소년을 보고도
어찌 눈뜨고 태극기를 볼 것인가.
쉽게 들리던,
플라스틱 장기알이 천근만근이다.

 

 

당선소감(최영정)

사실 길을 걷으면서도, 방향을 자주 잃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겨우 목적지엔 다다랐을 때, 가까스로 펜 한 자루를 쥘 수 있었습니다. 문득 그간의 바람과 부패한 눈빛들이 떠오릅니다. 지상에서 눈물이 가장 반짝이는 유일한 순간은, 시가 되었을 때인 것 같습니다.

한 장의 사진만 그토록 기다렸는데, 그 간절함이 드디어 카메라 플래시처럼 갑작스럽게 터져 나왔습니다. 정말 눈부신 울음이었습니다.

흔들리는 것들에겐 분명 속력이란 게 있고, 밤하늘엔 소중하지 않은 별들이 없습니다. 더 많은 별을 만들고 더 많은 별을 고민하겠습니다. 당선 소식을 전해 듣고, 어떤 자세로 어디에 어떻게 서있었는지. 구름 위를 걷으면서도 발이 빠지지 않아 불안한 지금, 가장 낮은 곳에서 큰 목소리로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는 그런 시를 써나가겠다고 다짐해봅니다.

심사위원님과 그리고 부모님,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 김수복 교수님, 강상대 교수님, 박덕규 교수님, 최수웅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또 저희 대학교 1기 김지훈, 임현준, 최정환 선배님 감사합니다. 또한 외숙, 선미, 자민이, 경준이, 영호, 유리, 혜미야 고맙다. 끝으로 제가 아는 그 한 사람이 정말 멋진 기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더욱 시를 향해 정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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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열리는 문이 있다
열린 문 뒤로 다가가 가만 들여다보면
웃음 속살 같은 쌀알들이 껍질을 벗고 있었다
미끈하고 반질반질하게 태어난 알맹이들
열어젖힌 정미소 문 앞에 차르르르
마술처럼 쏟아졌다
헐떡거리며 돌아가는 거친 기계음과
깊고 어둑한 그늘을 등지고
아버지 당신의 노동은 흥얼흥얼 사다리를 오르내렸다
밥과 응석과 꿈을 받아 삼키며
나의 한나절은 뱅뱅 맴을 돌다 가끔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쌀알을 밀어내고 껍질을 벗은 노란 쌀겨들이
정미소 앞마당을 꽃가루처럼 날아오르는 순간
당신의 현기증은 허공을 딛고 나의 놀이도 멈추었다
기계의 발톱에 물린 사나운 시간들
다시는 그 마당에 가지 못했다
굳게 갇힌 문안에서 그 어떤 소리만 새어나와도
멀리 달아났다
어느 날 늙은 기계들이 밧줄에 묶여 끌려 나갈 때까지
나는 그 문을 마주하지 못했다.

 

 

고향식당 정씨

 

사내, 한때 푸른 등을 넘어 파도를 꺾었다
부챗살 같은 굵은 가시를 펴고
사방을 헤엄치던 그 사내의 어깨가
오늘은 변두리 개천에서 꿈틀 거린다
오늘 따라 성가신 지느러미를 달래며
새벽 장을 보러 나간다
펄떡거리는 날비린내와
개흙처럼 미끈거리는 길바닥에서
일없이 담배를 피워 문 사내의 손이 타들어 간다
꼬막을 퍼 담는 할머니와
고등어 토막 내는 청년의 눈빛이 힐끔 거린다
오늘은 떨이 물건 없수다
달고 쓴 손님 척척 발라내는 고수들의 칼끝
푸르고 깊은 한 가운데
나자빠진 활어 한 마리 낚지 못하고
퍼덕이는 지느러미를 몰고 새벽시장을 빠져 나온다.

 

마리화나를 위하여

 

흐린 눈 껌벅이며 먹이를 삼키는 먹구렁이
깊고 검은 입 반 쯤 벌린 채 멀리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는 다시 번들거리는 배를 끌고 조금씩 다가오는 그를 만나러 갑니다
빙빙 다른 길을 맴돕니다
멀리 서둘러 달려온 출발점도 되돌아봅니다
어느 곳으로도 도망칠 수 없는 돌아서면 다시 앞을 가로막는 칭칭 먹구렁이
다 큰 개망초 언덕마다 부시게 피고 움츠린 몸이 천천히 먹힙니다
더듬더듬 검은 입 속으로 들어갑니다
발밑에 어둠이 똬리를 틀고 미끄러운 비탈 오르고 내리다 엉킨 몸이 풀립니다
마침내 취한 해가 둥둥 떠다닙니다.

 

 

박하사탕

 

출출한 빈 그릇이 식탁마다 둘러앉은
다 저녁 밥집에 털퍼덕 주저앉았다
육개장을 기다리며 자꾸 부어오르는 허벅지를
문지른다 이걸 어째
다섯 시간은 더 버텨야 할 두 기둥을 
달랜다 달래다 일없이
휴대폰 1번을 꾹 누른다 혼자
라면을 끓이던 아이가
숙제 다 했구요 준비물도 다 챙겼어요
뒷말 이르기도 전에 아이는 전화기를 내려놓는다
야, 야 쥔아줌마 잔소리로 볶아 내온 밥상이 차려지고
벌건 고추기름을 걷어낸 세상은 여전히 맵다  
육개장에 다시 밥을 만다 이번엔 휴대폰이 울린다
안사장 내일 세시쯤 갈게
벌써 한 달, 건물주가 과일을 씹으며 통보를 한다
입안이 화끈거리고 삶이 부어 오른다 
쥔아줌마 내미는 박하사탕 받아들고 
차가운 외투 부스럭부스럭 사탕 한 알 쥐어주고 돌아서던
아버지의 등 뒤를 오늘은 내가 따라 간다.

 

나팔꽃

 

창신동 외딴 섬
빨래가 펄럭인다 곳곳에
버려진 살림살이와
급한 걸음이 남긴 신발 한 짝
절반이 넘는 짐을 덜어 내고도
제 무게조차 견디지 못하는 철거민 아파트

담벼락에 나팔꽃 징하게 펄럭인다



 

 

당선소감(안진영)

폭설이 내리는 벌판에서 다시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미안하다고, 이미 무릅까지 덮으시고도 미안하다 하셨습니다.

 

그렇게 그날은 종일 눈이 내렸고 나는 아버지를 오래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움이 얼고 다시 녹아 시가 될때까지 매번 시에 기대고 시에게 배우면서 살아가는것이 참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내 서성이는 모퉁이에 문을 열어 빛을 보여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더 측은한 눈으로 시를 살면서 시를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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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바닥

 

전복을 씻는다
칼등이 스칠 적마다 움찔거리는 발바닥
겹겹 눌어붙은 찌든 때가 밀려나온다
파도를 등에 지고 거친 바위를 걸었을
단단한 바닥 하얗게 드러난다
군데군데 부비트랩 숨어 있던 아버지의 길은
언제나 가슴 졸여야 했고
피딱지 엉겨 붙은 물집 잡힌 발바닥엔
뜨거운 슬픔이 고여 있었다
늦은 밤 고단한 아버지 몸이 앓는 소리에
단칸방 문풍지가 파르르 떨리곤 했다
있는 힘을 다해 껍질에 몸 붙인 전복
예리한 칼끝이 멍든 핏줄기를 건드렸는지
푸른 내장 주르르 흐른다
전복 등껍질 벗겨내자
때 절은 거뭇한 패각 안쪽에
아버지의 한 생애 아롱져 있다

 

 

여자만汝自灣

 

뻘배 탄 아마조네스 꼬막껍질을 밟고
태고적 자궁 속으로
밀림 같은 아득한 세월 달려 나온다
여자만의 사내들은 뻘 밖에서 불을 쬐거나
꼬막을 구워 소주를 마신다
세상의 문 닫는 시간 안개주렴 발을 내린다
나문재 꽃무늬 속치마 축축이 젖어온다
바람도 없는 바다호수 밤새 뭍의 허리 껴안고
아랫도리 뻐근해지도록 자맥질하는 바다
구멍마다 드러누운 파도 호흡이 거칠다
움트는 꽃잎, 검은 자궁 들썩인다
달이 여문다
여명의 문고리 잡고 몸 푸는 만삭의 여자만
양수 터진 갯벌은 질펀한 해산을 하고
태를 자른다
딱딱한 껍질 열고 젖꼭지 찾는 여린 혓바닥들
스멀스멀 뒷걸음질 치는 바다
첫국밥 들인 여자만에
해미가 빠진다
충만한 밤을 지낸
여자만 여자들
뻘배를 타고 또 하루 문을 연다
꽃 없는 포구 花浦에 흐드러지게 참꽃 핀다

 

빨래경전

 

어머니
지겹지 않으세요
아침마다 손으로 읽는
그 페이지
오늘은 세탁기에서 읽어요
비누거품 풍선 불면
얼룩 팡팡 터져요
통돌이 난타 두드려요
온 가족 윙윙 부비부비 춤 춰봐요
우주로 밥상 날린 아버지 외박한 오빠
다 함께 차차차,
어깨를 흔들어요
온 가족 신나게 트위스트
늘어진 브래지어 고리 물고 림보 해봐요
막내 새까만 발바닥 요리조리 헤엄쳐요
벨 울려도 허리 굽히지 마세요
스텝 꼬인 빨래 쏙쏙 뽑아
비행기를 날려요
한 장 더 넘기면
어머니, 햇살 눈부셔요

 

 

하관

 

볕 좋은 선산발치
가묘 걷어낸 네 귀 반듯한 방에
아버지를 모신다
하관 밧줄 내리자
흰 국화 꽃송이 가슴에 얹고
상두꾼 올리는 흙밥 받으신다
달구질로 꾹꾹 눌러 쌓아올린 고봉
어머니 자분자분 어루만지니
아버지 두 다리 쭉 펴신다
새로 지은 봉분에 향 피워 혼백 부르고
메 올려 잔 친다
형제들 차례로 줄지어 엎드린다
크고 작은 등 산맥처럼 이어지는
한 家系 그윽하게 읽고 계시는 아버지
고향동네 내려 보이는 금당 산마루
양지바른 푸른 집에 언제든 다녀가라
갈참나무 가지 흔들어 눈짓 하시고
청솔 누비는 시원한 바람소리에
밝은 잠 드신다

 

미로 찾기

 

길을 잃었다
환한 통로에서 길과 엉켜버린 발
오르던 계단을 돌아서 내려가자
지하의 동굴이 迷路인지
좀 전 플랫폼이 건너편이다
빛 속으로 달려 나온 전동차는
멀미처럼 @@골뱅이를 쏟아놓는다
컴퓨터 화면을 누비던 핏발들이 몰려나와
지루한 반복 음으로 바닥을 두드린다
사방으로 뚫린 迷路에서
사람들은 未路 속으로 떠밀려간다
길눈 어두운 나는
낯설고도 익숙한 경계에서
아직도 두리번거리고
벽에 걸린 지도는 명쾌하다
길을 잃는다는 것은
길을 찾는다는 것
지하철 진동이 무겁게 닿았다
또 떠나고
몰려오는 발자국 소리들
미로를 빠져나간다

 

 

당선소감(이언주)

어느 날 詩가 내게로 왔다. 손 내밀면 금방이라도 닿을 것 같은데, 한 뼘 모자라는 곳에 서서 더 이상 거리를 좁혀주지 않았다. 시인이고 싶었다. 잡히지 않는 갈망으로 신열을 앓았던 시간들. 이제껏 한 가지 일에 매여 이렇게 몸서리친 적이 있었던가.

 

가끔씩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문학소녀 시절, 행여 삼류소설이나 쓰고 있을 미래의 자신을 상상하기 싫어 문학과는 전혀 상관없는 전공을 택했다. 그러나 유목민으로 낯선 곳을 떠돌던 한 때, 지평선 끝까지 펼쳐진 푸른 초원 위에 화살처럼 쏟아져 내리는 햇살 때문에 글을 쓰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지나온 곳마다 국적 잃은 향수병을 발자국으로 찍고 다녔다.

 

내게 시는 ‘기쁨 두 배, 고통 네 배’이다. 수염뿌리를 허공으로 내밀어 가쁜 숨을 몰아쉬던 열대도시 가로수처럼 공기 속으로 생각의 뿌리를 내리고 연명하기엔 언제나 목이 말랐다. 다가가면 저 만치 달아나는 시를 잡기 위해 새 해가 되면서 두 권의 공책을 준비하였다. 우연이었을까. 한 권은 표제가 ‘詩作’ 이고, 다른 한권은 始作이란 뜻의 ‘카이스’ 라고 붙였다.

이제 정말 시작이다!

 

언제나 희망을 잃지 않게 용기를 준 뚝방동지 정하린 오정순씨 정말 감사하고, 당선과 함께 친정을 만들어주신 심사위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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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비

 

태양의 가난한 침묵을
보았다 힘겹게 무너진 벽을 짚고
나는 반토막 어둠으로 흔들리고 있다
좁은 골목을 우회하는 끈적한 욕망들
파리한 그림자를 따라 파란 담벼락을 기어오른다
나는
애초부터 폐허의 주인이었다!
폐허를 감추기 위해 더 넓은 이파리가 필요하다
완전히 어두워질 그때를 기다려
창살을 움켜잡는다
처음 가지를 뻗는 휘어진 벽
눈을 감고 이파리를 펴며 간다
부서진 창틀을 지나야한다 문득
새들이 가볍게 날아간다
악착같이 버티고 있는 나는
중지할 수가 없다 돌아갈 수조차 없다
나는 납작 엎드려 친친 올라간다

 

 

정류장 근처

 

은행나무에서 누런 시간이 무겁게 떨어진다
아스팔트 바닥에 노을이 부서진다
하나 둘씩 네온 불빛이 공중으로 흩어진다
어색한 침묵은 끝내 나뭇가지를 흔든다
버스는 오지 않는다
이파리 하나 도로에 떨어진다
그림자를 핥고 가는 찬바람이
노선 위를 서성이는 사내의 기침을 쓸어간다
비에 젖은 사람들의 영혼은 무겁다
가지 끝에서 괴로워하는 잎들의 떨림은 무겁다
바람은 이제 나뭇가지를 흔들지 못한다
외투 안으로 어둠이 파고든다
사내가 뱉어놓은 기침소리가 나무를 흔든다
잠들지 못한 빈가지가 흔들린다
핼쑥한 가로등은 먼지를 뒤집어쓰고
고통스럽게 떨고 있는 그림자를 핥고 있다
하지만 정작 떨고 있는 것은 내 등뼈 속의 심장이다
나를 대신하여 우는 누런 잎이 바닥을 치며
어둠 속에서 버스를 기다린다
보도블록 위에
영혼이 가벼워진 비둘기들의 털이 나뒹군다
노선도는 언제나 그 자리에 꽂혀 있다
오지 않는 버스가 나를 기다리고 있고

 

두고나온 집

 

채송화 꽃잎들은 잠이 들고
하늘을 쳐다보던 해바라기가 나를 응시한다
내가 대신 하늘 향해 고개를 쳐든다
늙은 감나무 가지를 올라탄 능소화
모자를 찾다가 모가지 채 떨어진다
바닥에서 까맣게 말라가는 것은
능소화 꽃잎이 아니라 나의 고독이다
내 그림자가 땅을 쓸어가면서 신음한다

마룻바닥을 핥는 오래된 바람
나는 잠시 지친 몸을 그 위에 앉힌다
늙은 감나무 가지가 푸르다
툭 떨어지는 능소화의 울음소리
무서워 달아나버린 직박구리 어린 새
빙빙 돌아 어디로든 날아가면 그만이지만
그만이지만
내 몸 반을 가려주는
낡고 부서진 지붕은 자꾸 그림자를 밀어내고 있다
해바라기 씨 자국보다 깊게 패인 두 눈
나는 오래된 마당에서 꿈도 없이 구름모자를 쓰고 있다

 

 

염창동 버스정류장에서

 

속도를 늦추는 바퀴들
알 수 없는 한숨을 내려놓는다
제각기 다른 얼굴들을 한 사람들이 걸어간다
엉켜있는 시간들을 끌고 막차는 떠나고나는 이곳에서 꽤 오랫동안 웅크린
자세로 병든 비둘기 걸어가는 자세로
불빛을 펴며 익숙한 장애물을 찾는다
다른 사람들 분주히 길 위에서 날개를 펴고

침침한 시력으로 간판들을 읽어간다
삼겹살 3300 돈가스 2900 피자 5900
광어한마리 9900 안주+생맥주500cc 9900
김밥 한줄 1000 로또누적금액 118억
신발 끈이 풀어진 사람들을 따라간다
지친 발자국 수효만큼 어지러운
보도블록 위로 비틀거리는 발목들

그렇게 새벽이 왔다
이파리들은 아직 타올라야 할 것처럼 무성하다
바람이 분다
나무는 하얀 불꽃같이 웃는다
잠시 머물다가는 자동문이 나를 향해 열린다
속도가 길 위를 쓸고 지나면
욕망들이 외상값처럼 달려든다
나는 긴장한 눈으로 노선도를 쳐다본다
바퀴들이 멈춰 있다

 

구름이 사는 골목

 

먹구름이 바닥에 총을 겨누고 있어
채송화 콘크리트 비집고 붉은 꽃잎 뱉어내고 있어
집 앞 하수구가 텅 비어있는 것은
동사무소 계약직 할머니들이 삽질을 잘했기 때문이야
수백 번의 구직검색을 하면서도
먹구름이 몰려 올 거라는 걸 몰랐던 거지
자고 일어나면 실신한 구름들이 빈 병에 채워지곤 했지만
하릴없이 푸른 병들을 세어볼 순 없었어
헝클어진 구름을 끌어내려 가위질하고 망치질하여
다시 지붕 위에 올려 놓았어
건축기사처럼 간단하게 틈을 막아버렸지
오늘은 왜 미친바람이 불어오는지
비 섞인 바람은 고통스럽게 바닥을 쓸어가는데
참, 실직 중인 것을 잊어버렸네!
와이셔츠 단추를 잘라내어
아들놈의 장난감차에 헤드라이트를 붙여야겠어
빗방울이 창문 틈새로 들이치고
우리집 창문은 몇 개였더라?
쑤군거리는 낡은 책상 위
이력서의 글자들이 숨죽이며 꿈틀하는 것은
서랍 속 모나미 볼펜이 지렁이를 낳고 있기 때문이야
아주 늦게 창문을 열어야겠어
불빛은 맨홀 뚜껑 구멍으로 힘없이 빠져
지렁이 몸통에서 꿈틀하는데
나는 그것을 보고 있어
창문을 열고 바람 속에 웅크리고 한참!

 

 

당선소감

늦게 시작한 詩作, 뜻밖의 소식에 부끄러웠다.
한 편 한 편 시 쓰는 것에 늘 최선을 다했다. 사실 시를 쓰다보면 시와 맞닿는 나의 고통스러움을 중지할 수가 없다. 지금 이 순간도 책상에 배를 대고 글자만 찍고 있다. 시의 뒤를 따라가는 끈적한 욕망들이 나를 자꾸 재촉하고 있기 때문이다. 매일 조금씩은 고통을 위하여 살고 싶다.

紅詩 동인의 선생님들 그리고 일 년 넘게 자신감을 심어준 고영선생님께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이제는 선생님 말씀대로 맘껏 나를 드러내며 쓰겠습니다.
시사랑 사람들 원희언니 혜선언니 혜숙언니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
내게 있어 사철나무와 같은 호애클럽이 없었다면 시를 썼을까. 혜란 미라 세정 지연 성신 모두에게 이 순간의 기쁨을 나누고 싶다.
사랑하는 내 아들 동언 승언 그리고 21년을 무심히 지켜봐주는 내 님에게도 지독한 고마움을 전달하고 싶다.

내 시가 첫 인사를 할 수 있도록 미숙한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진심 가득한 감사를 드린다. 부지런히 시 쓰겠다는 것으로 약속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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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러쉬

 

라린코나다, 바람의 분진같은 사내 몇몇이
하루종일 동굴 천장에 매달려있다.
조도를 낮추며 새어들어오는 뙤약볕, 때때로
바람은 예고도 없이 굴 속에 침입한다.
그들은 라린코나다 갱도에서
지층의 나이테를 긁어모으고 있다.

강원도 정선 화암광산 안
석탄처럼 검은 얼굴을 가진
아버지는 너무 오래 병을 참아왔다.
이젠 하나의 폐광이 되어버린 아버지의 몸,
말을 내뱉을 때마다 호흡곤란처럼
세상이 가르릉가르릉 거렸다.
폐가 조금씩 무너져 내리는 것으로 보아
곧 밤이 찾아올 것입니다. 아버지는 꿈속에서
페루의 갱도로 들어서고 있을까
저녁은 독성 폐기물처럼 번지듯 퍼져오고
시간 위로 오래된 수면이 뚝
뚝 떨어지고 있다.

사내들의 허기가 뙤약볕에 황금처럼 반짝거린다.
안데스에 반흔으로 남겨진 것은
이들의 몸 속에 긴 세월 박혀있던
금들이 내비치는 것은 아닐까
빙하 밑 광산에 묻어놓은 뼈조각들이
우글우글 부풀어오르고 있다.
어둠 속으로 점점 깊숙이 들어가는 발자국 소리.

사내의 등에 묻어있던 사금가루가
아버지의 폐로 날아든다.
시간이 전속력으로 공회전하는 오후 병실
아버지도 골드러쉬 행렬을 따라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신문 속
폭설같은 눈동자에서 이따금씩 아버지가 비춘다
나는 혼자서 햇무리를 반시계 방향으로 돌리다가
여기로 돌아왔다.

 

 바람에 실려

 

풍성한 바람들이 몇 갈래로 나뉘어지는 저녁
양탄자 위에 실직의 시간을 펴놓고
신밧드가 머리 위의 수건을 고쳐 맨다
신밧드는 여행할 때처럼 반쯤 누워서
텔레비전 속의 사막을 집으로 실어 나른다

누런 모래 알갱이를 껴안고 웅크려있는 신밧드
수많은 여행을 기록해 온 것처럼
머리의 수건이 해져있다
소녀들의 치마같이 펄럭거렸던 양탄자도
그가 집으로 돌아오던 길목처럼 사방이 구겨져있다
바람에 실려 칼라하리 사막을 옮겨 나르는 동안
신밧드도 길을 잃었던 것일까
올이 풀려 여기저기 흩어지는 햇빛이
바짓단 속의 모래를 잠깐씩 들춰본다
수시로 이동하는 모래언덕처럼
텔레비전의 전파가 느닷없이 끊긴다 순간
리비아 근처에서 퇴직을 한 바람이
집안을 맴돌다 사라진다 신밧드는
바람에 의지할 때처럼 몸을 꼿꼿이 세우고
그가 실어 나는 대륙을 떠올려본다

신밧드 얼굴에 주름처럼 지도가 새겨진다
동화책 속 사막 한 가운데서 모험을 하던 신밧드가
텔레비전 앞 곤히 잠든 아버지를 부르고 있다.

 

타자에 대한 단상

 

순간포착을 하는 순간
타자의 손이 방망이에 붙어 달아난다
달리는 말처럼 고삐를 늦추지 않고 날아간다

바람을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
곤봉에 붙은 체조선수의 손가락처럼
방망이에 붙은 뭉툭한 손바닥이 날아간다
한 때 타자의 뼈에 붙은 갑각이었던 손
타자의 손은 원의 균형을 잃지 않는다

방망이를 원으로 돌리며 공에 붙기 위해
안달 났던 타자의 호흡도 날아가고 있다
퇴족하듯이 뒷걸음질 치는 선수
육체가 하나의 활시위가 되고
팽팽히 당겨진 타자의 얼굴이
늘어난 고무줄처럼 울퉁불퉁하다

뼈마디를 퉁기며 달아난 화살하나가
어지럽게 선수의 눈동자 속을 돌고 있다.

 

 

 

 

어바웃 프리다 칼로

 

매일 같은 그림을 보는 것처럼 세상엔
마음에 잘 담아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가령, 두 다리를 벌리고 누워서
하혈하는 그녀 침대 끝자락에 누워있는
그녀의 생애를 유산하고 있다.
저만치 창밖에서 뜬 해는 때때로
피같고 태아같다.
수정란을 쏟아내고
끝없는 터널 같은 세상의 혈관 속으로
칼로가 몰래 들어간다
365일 하혈하는 밤, 그림을 그리며
농도 짙은 달빛이 물감처럼 허공에 번진다
가랑이 사이로 빠져나가는 시간을 쥐고
그녀가 앞으로 고꾸라진다
홀로 저만치 굴러가는 물컹한 기억
누군가 그릇에 담긴 조그마한 씨앗을 들고나간다
그녀의 몸에서 나온 태아가 굳어간다
배를 드러낸 그녀가 몸을 떨며
탯줄을 끊고 나간 아기를 생각한다
나를 닮아 눈썹이 갈매기처럼 이어져있을까
어떤 수평선 위로 날아가고 있을까
핸리포드에 찍힌 그녀의 발자국이 흐느낀다.

병실 안 병든 아침이 먼저 일어나 창문을 연다
그녀가 그 앞에 추모비처럼 서있다.

 

인쇄소

 

인쇄소는 귀가 밝다

귓바퀴 속으로 들어가는
하루의 소리들은 전단지처럼 여기저기 뿌려지고
사내들이 이끌어 간 발자국 위로 활자들이 우수수 쏟아진다
아침마다 책 뭉치처럼 부러져있는 인쇄소에는
하루 종일 수군거리는 말싸움이 가득하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프레스가 덜컹거리면
겹겹이 쌓인 잉크통 위로 더께가 앉고
인쇄소는 지나간 시간만큼 더 무거워진다 때때로
분철하느라 동그랗게 뚫린 종이들처럼
인쇄소엔 멈추지 않는 함박눈이 내린다

돋보기를 쓴 채 구겨진 포장지처럼 잠들어 있는 주인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은 끊임없이 술렁거리고
여기저기서 맡긴 기억들로 인쇄소는 항상 분주하다
밑바닥부터 차곡차곡 쌓여지는 종이처럼
가끔 인쇄소도 통째로 이 동네의 밑바닥이 된다

새벽부터 길목엔 막 찍어낸 신문지 냄새가 나고
바람 저만치엔 박스도 뜯지 않은 소설책들이 산처럼 쌓여있다
기억을 되풀이 하는 삶이 빛으로 복사되는 아침이다

 

 

당선소감
시를 쓰는 동안 아이를 잃은 프리다 칼로처럼 아무것도 만들 수가 없었습니다. 두근대는 깊은 밤 폐광 속으로 들어가는 여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펜을 잡을 때마다 밤이 길을 이끌어오고, 바람은 집 앞에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누군가 버린 것들, 혹은 잃어버린 것들을 짊어지고 늘 어디론가 숨어 들어갔습니다. 그 자리에서 시를 썼지만, 그것 역시 헛것일 때가 많았습니다. 항상 생각했습니다. “시는 언어의 스펙트럼에 나만의 색깔로 내뿜는 아름다운 운율의 생명체 이므로 때로는 진지함으로 때로는 발랄함으로 때로는 따스함으로 때로는 날카로움으로 시가 나를 선택하게 하자, 그리고 상상력의 한계를 뛰어넘자” 라고 다짐했습니다. 가끔씩 제 몸이 깊은 터널처럼 느껴져 저는 밤이면 수없이 빨려 들어갔습니다. 온 몸 전체가 현악기의 몸통처럼 수없이 울릴 때가 있었습니다. 멀리서 터져오는 메아리, 메아리 같은 것들이 밤마다 저를 일으켜 세우고 또 펜을 잡게 했습니다. 시를 쓰지 않아도 늘 어두운 밤들이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터널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늦은 저녁 골목길에 낮게 깔린 안개처럼 저는 항상 밑에서 서성거렸습니다. 끝없이 빨려 들어가는 동안, 제가 의지해온 것은 터널에서 낯선 궤도를 따라 멈칫멈칫 하던 저를 붙잡아준 펜, 한 자루였습니다. 오늘 한통의 전화로 깊은 폐광 속으로 더욱 더 밀어 넣어 주신 심사위원 분들 감사합니다. 무엇보다도 어두운 나머지 딸이 길을 잃을까 걱정하시는 부모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때로 길을 잃을 때마다 늘 제가 옳은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격려해주셨던 전상국 작가, 이윤학 시인, 시 선생님인 신동옥 시인, 윤한로 선생님, 모든 분들을 항상 기억하고 있습니다. 언제였던가 감히 시는 허락된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상처받고 버려진 것들을 아름답게 하는 것, 세상을 떠나는 것들을 잡지 못하고 가만히 서서 바라보는 것이 시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펜을 잡으면 사람들의 슬픔이 떠오릅니다. 반짝하는 것은 모두 눈물이고, 먼 하늘에서 힘주고 있는 별들에 대해서 저는 오늘 밤에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눈물을 담는 가슴이 되고 싶습니다. 몇 편의 시로 자욱한 그리움들을 몰아내기는 어렵겠지만 자만하지 않고 결코 쉬지 않겠습니다. 분발하기 위해 견고한 날개를 만들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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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회 서울디지털대학교 사이버문학상 당선작 - 성백선 ‘분합문’ 외 6편 /가작 - 유원희 ‘별을 파는 여자’ 외 4편


제 2 회 서울디지털대학교 사이버문학상이 막을 내렸다. 심사위원인 도종환 시인, 이재무 시인, 유성호 문학평론가, 길상호 시인 등은 당선작으로 성백선의 ‘분합문’ 외 6편을, 가작으로 유원희의 ‘별을 파는 여자’ 외 4편을 선정했다. 2008년 제 2 회 서울디지털대학교 사이버문학상은 응모자가 674명, 응모작품은 4000여 편에 달했다. 이는 서울권 일간지 신문의 신춘문예를 상회한 수치이다. 뜨거운 관심에 감사드린다. 당선자들에게는 소정의 상금과 상패가 수여된다. 아울러 계간 문예 ‘시작’에도 작품이 실리게 된다. 시상식은 2월 28일(목) 오후 5시 서울디지털대학교 2층 회의실에서 열린다.


당선작 - 성백선 ‘분합문’ 외 6편
가작 - 유원희 ‘별을 파는 여자’ 외 4편


심사위원장 - 도종환 시인(한국 작가회의 사무총장)
심사위원 - 이재무(시인), 유성호(문학평론가, 한양대 교수), 길상호(시인)



* 당선작 - 성백선


분합문



보 기둥 위 쌓인 고요가
벽 치고 수장을 들인다
살대로 달빛무늬 낸 소목의 솜씨
칠흑에 갇혀가는 서까래 밑
둔탁한 배목이 서너 개 박히고 나면
수직을 가늠하는 다림추의 미동도 멈춰 선다
단절된 괴에 동그마니 남아
떨그럭떨그럭 파동을 견디던 등자쇠
건너편 지도리에게 여음을 흘려 보내지만
동선은 보이지 않고 온기는 멀다
속살 드러내어 내밀한 눈빛 당기던 탱탱한 거리엔
마주앉은 속내끼리 경계를 허무는 소리도
천장 긁어 샛길 내는 쥐들의 부산함도
벽채 타고 반경 좁히는 고양이 아기울음도 그쳤다
품고 놓아주기를 반복하는 간극은
언제나 짧은 망설임을 남겨
은은한 창 같은, 거칠은 벽 같은 발자욱이
상 머뭇거리는 문전
나누어졌다 싶으면 어느 결엔가 다시 합쳐져
누마루와 팔작지붕 사이 환했던 소통이
옹이 진 정적으로 무료할 즈음
설주를 에돌던 삭풍이라도 맞아들일 양
좁고 짧을지 모르는 생의 공간을
한 간 확장하듯
벽이었다가 문이기도 한 널
지금은 번쩍, 들어올려야 할 때



애어리염낭거미


누가 잎새 끝에
저토록 푸른 누각을 세웠을까
정교한 산실 들어선
우거진 수풀 한가운데
성자의 입김 가득할 것 같은 염낭엔
낙엽층을 배회하고 돌아온
성체가 몸 푸는지
부들 뿌리로부터 신음이 부화한다
산고를 둘러싼 우주의 소음들
한여름 어스름에 비껴가고
지금 막 알에서 깨어난 어린 것들은
세상으로의 탈피를 시도하느라
생별을 입에 물고 있다
뱃속 그득 비정의 즙 짜 넣으면서
아, 살아있는 것들의 살고자 함은
이토록 뼈를 깎는 일이던가
생존의 늪지대에서
천적으로 변태한 새끼들에게
제 살과 뼈 뜯어 먹히고
어미의 골육을 포식한
패륜의 바다 위
거미 피륙으로 짠 섬이 전설로 흐르다
소리 없이 가라앉는다
세상의 푸르게 눈물겨운 것
다 흘려주고
말없이 형체 없이
하늘 가신 내 어머니처럼



독살꽃


멀리 갯바위 사이로 한 사내가 보인다
나는 괭이갈매기 눈으로 그의 움직임을 앞지른다
꽃지에서 굴혈포까지
조난의 시간 밑으로 흘러든 항로가
흙모래를 털고
어깨에 찰박이는 뻘빛 그물이
촘촘한 하루치 숨을 토해내는

드문드문 난 들불의 흔적과 소나무 사이
간조를 기다리는
따개비 껍질 같은 오두막이 움푹하다
물때 맞춰 막아놓은 그의 생존이
수면을 차고 오르기를, 파닥이기를
간절하게 물은 빠져나갔건만
개펄 위 불쑥 솟은 뾰족한 독살
돌 꽃 돌꽃
'꽃만 나고 말았네유'
그의 비릿한 기다림에 나는 초저녁 붉새로 번졌다

물고기를 잡아먹고 살았던
선사 수렵시대 바닷바람이
방파제에 부딪혀 해무 속으로 사라진 뒤
삶의 편린들 짭조름히 잦아드는 포구에선
도회지 어부들이 뱃길을 닫고 있었다
근근한 그의 어족은 격랑에 휩쓸려
꾸르륵꾸르륵
해조음만 꽃 주위로 무성히 몰려다니고

나는 몸 구석구석 돋아난 돌꽃의 순을 따다가
그의 어장 가득한 물고기로 흐드러지게 피었다



아침, 모네의 정원


그곳엔
빛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가슴 부풀어오른 수련이
마알간 바람으로 머리를 빗고
부신 눈으로 첫 빛을 밟는다
밤새 태양으로부터 달려 온
맨발의 하루가 뒤따르며
보폭을 키우는 사이
투명한 채색이 시작되고
흩뿌려진 햇발 위 조금씩
드러나는 색색의 일정들은
더 선연한 제 색을 찾아갈까
갓 깨어난 버드나무 아래
그림자 숨긴 여백이
새벽 내음을 코끝에 묻힌 채
풋 정오의 계단을 살핀다
햇살들의 빼곡한 일과가
어제에 이은 연작의 색감을
연못 위에 띄우는 찰나,

아직 이른 아침이다.




갈릴레이 망원경


이미 일순간의 착시가 사라진 지 오래였어요
투명한 유리 곱게 갈아 오목한 얼굴에 썼어요
겹겹이 둘러진 포물선 띠가 벗겨져 나갔어요
알몸으로 원점에 서 있는 그대 우뚝하였어요
태양의 흑점을 찾듯 그대 심장을 더듬었어요
천체를 떠다닌 빛과 박동 소리가 몰려왔어요
가까이 반사된 자리에 홍염이 이글거렸어요
산란을 마친 낮이 밤의 깊이로 빠져들었어요
차갑고 무표정한 거리가 환히 웃고 있었어요
쌍안에서 굴절하던 그대도 고색창연하였어요
시야를 가렸던 처음 내 눈은 선입견이었어요
흐린 초점 다시 맞춰 선명한 심상 포착했어요
그대 뒤돌아서면 반대편에 거울을 세워뒀어요
때론 도구도 정직하고 부드러운 눈길이었어요
관측을 마친 나는 목성의 가니메데가 되었어요
기꺼이 그대 곁을 돌고 도는 위성으로 살았어요



바퀴


길모퉁이 담벼락에
곯아떨어진 질주가 푸석하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루하루의 간격을 조율해 주던 삶의 속도들
어느 막다른 길목에 멈춰 선 것일까
울퉁불퉁한 일상 날렵히 나르던 회전은
비포장의 순간들을 갓길에 부려놓고
생애 어디 구간쯤 정체돼 있는지
온종일 시간 헛도는 소리만 헐렁하네
언제고 든든한 바람 넣은 탄력 위
휘파람 싣고 페달 밟으면
혼미한 내일의 여정에라도
동그라미 그려가며 오를 수 있을 텐데
역주행하다가, 전력투구하다가 가뿐 숨
평평히 고르고 윤활유 주입하면서
모난 길 훌쩍 건너뛸 수도 있을 텐데
환상 속에서는 늘 가파른 언덕 다다른
바퀴가 신들린 발처럼 날아다니고
내 어제의 지체된 두 바퀴도
주어진 거리만큼은 완주하려는지
지금 막 막힌 길목을 우회하고 있네



뚜껑




오피스텔에서 내려다 본 운니동 기와집들
검은 뚜껑들이 다닥다닥 세월을 덮고 있다
뚜껑을 열면
그늘 쓰고 문명을 피해 들어앉았던
개화 덜 된 세간살이가 비춰지면서
속속들이 차있는 나직한 군상들의 내부가
햇빛에 파르라니 눈 흘길 것 같다

뚜껑 속에 잠겨 있는
벽에 걸린 아이 낙서의 표정
마당 가운데 흐르는 수도의 사계절
개집 옆 작은 화분들의 자투리 여유
담장에 널린 이불의 낮과 밤
대문에 세워둔 자전거에 감긴 거리
한 사람당 할당된 시간과 공간이 똘똘 뭉쳐져
제자리에서 굴러가고는


세월의 뭉치마다
속도 다른 흔적들이
지워질랑 말랑한 뚜껑엔 다시
리모델링된 비밀번호가 채워지고
내 뚜껑은 24시간 개방돼 있어도
모호한 채 무늬만 내고 있는데

어느 날 열린 지붕 아래
테라스가 된 발 밑에서
내 뚜껑 속을 올려다보고 손짓하는
40년 전 상고머리 계집아이가 생경한 건
낮은 곳 앞서 흐른 삶의 기복들도
덮개 안에서는 그만치
출렁거리다 넘치고 싶었나보다



* 심사평

서울디지털대학교 문예창작학부와 계간 『시작』이 주관하는 제2회 <서울디지털대학교 사이버문학상> 심사는, 674명이 응모한 가운데 풍성하게 치러졌다. 무엇보다도 우수한 작품들이 많았고, 오래 연마된 시의 행을 따라가는 일은 실로 즐거웠다. 특히 캐나다, 일본 등 국외에 거주하는 응모자들을 대하면서 심사위원들은, <서울디지털대학교 사이버문학상>이 다국적인 문화를 수용하고 사이버 공간에서의 문학 활동을 활성화시키는 데 큰 기여를 하고 있음을 공감했다. 또한 시편들의 내용과 형태는 다양한 연령과 삶의 모습을 추측케 했는데, 이를 통해 아직도 문학이 사회 전반에 녹아 있다는 희망도 얻게 되었다.

예심을 통해 올라온 응모작 가운데 심사위원들은 김강식, 김수정, 김지영, 성백선, 송하얀, 유원희, 이종숙, 현혜숙 씨(가나다 순) 등 여덟 분의 작품에 주목하였다. 완성도에 있어서 다소의 차이는 느껴졌지만, 이들의 시편들에는 모두 시적 안정과 변화를 주도해가는 힘이 내장되어 있었다. 그것은 결코 단기간의 습작으로 얻을 수 없는 힘이어서, 독자의 내면에 큰 파장을 일으킬 것이 분명했다. 심사위원들은 시의 완성도, 언어구사 능력, 구성력 등 다각적인 차원의 논의를 거친 끝에 세 명의 후보를 다시 선정하였다.

우선 김지영 씨의 작품 중에는 「모란꽃살문」이 눈에 들어왔다. 선암사 원통전의 모란꽃살문을 통해 설화 속 시간을 바라보는 눈길이 섬세하고 신선하게 다가오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뒤에 이어지는 작품들의 편차가 심해 아깝게도 최종 논의에서는 제외되고 말았다. 이에 따라 마지막으로 논의된 후보는 성백선, 유원희 씨였다. 이 중 유원희 씨의 작품은 다양한 삶의 모습을 진솔하게 시로 감싸 안는 진정성이 높이 평가되었으나 언어 반복, 시적 반전의 미약함 등이 지적되었다. 이에 비해 성백선 씨의 작품은 사물을 바라보는 인식의 깊이가 남달랐고, 내용과 형태의 완결성에도 무리가 없었다. 특히 「애어리염낭거미」는 거미의 생태를 어머니의 삶으로 반전시키는 시적 역량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그리하여 심사위원들은 논의를 거듭한 끝에 유원희 씨의 작품을 가작으로, 성백선 씨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결정하는 데 합의하였다.
당선되지 않은 분들에게는 이번 응모가 더욱 정진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기를 바라고, 당선자에게는 거듭 축하와 격려의 말씀을 드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두 번째 당선자를 낸 <서울디지털대학교 사이버문학상>이 해를 거듭할수록 더 큰 시인의 산실이 되길 기대한다.

출처 : 파도가 부는 집
글쓴이 : 찬밥 원글보기
메모 :
 
별을 파는 여자

남구로역에 발 뻗어 먹고사는 삼성식품, 여자는
초저녁이면 문을 내리고
친정으로 별의 씨앗을 구하러 간다
하늘밭으로 나서는 여자의 손엔 망태가 없다
별의 씨앗을 담아오는 것은 손도, 호주머니도 아닌
언제부턴가 불쑥 뛰어나온 그녀의 두꺼운 등이다
별은 진열하지 않고 등에서 하나씩 꺼내 판다
아침이면 가게 앞으로 쪼르륵 쪼르륵 발소리가 몰려든다
직업소개소 봉고차에 실려 가지 못한 사내들이
밤새 염불로 굴렸던 시커먼 한숨을 뱉어 낸다
여자는 별 하나씩을 사내의 가슴밭에 밀어 넣는다
별 키우는 법은, 입꼬리를 높이 올려 설명해주고
혹시 아프거나 칭얼거리면
반드시 진찰 받으러 오라는 눈짓도 잊지 않는다
물 건너에 탯줄을 둔 검붉은 손도
커피 자판기에서 아침을 들이키는 지팡이도
여자가 등에서 꺼내준 별씨 하나씩을 담아 간다
가게 앞엔 별계단이 있다
그 별계단에 올라 본 사람만이
여자의 키가 허리쯤에 있다는 것을 안다
그녀의 밥그릇은 작다
별씨를 가득 싣기엔 배보다 등이 불러야한다
여자가 TV를 보면서 사발면을 들이킨다
가을 가뭄에 말라버린 별들이 브라운관에서 우르르 쏟아진다
여자는 자꾸 블라우스 속으로 손을 집어넣는다

  1-day

동네 안경점에서 구입한 1-day 콘텍트렌즈, 아침마다 비누로 손을 씻고 렌즈 속에 내 몸을 집어넣는다 통통한 허벅지 한쪽은 남겨둔다 아차하다 쓸개 빠진 여자, 간이 배 밖에서 펄떡거린 여자는 맵시가 없다 잘못 잠근 블라우스 단추는 그대로 둔다 하루쯤 옆으로 걸어도 좋을 것 같다 구두는 광을 내야한다 가끔 태양이 트림을 하면 1.0 시력으로는 받아낼 수가 없다 에스라인 몸매로 집을 나서 첫 번째로 만난 남자에게 청혼을 한다 아침 결혼식 주례는 신호등이 딱이다 아프리카 여자들처럼 배꼽에 피어싱을 한다 하루 세 번 결혼식에 그 정도의 멋은 기본이다 내 배꼽에 입을 맞춘 남자들은 쇠로 만든 콩깍지를 쉬운다 시계가 오른쪽으로 고개를 기웃 할 때 중혼 준비를 한다 이번엔 젖꼭지에 피어싱을 한 남자를 택해 혓바닥으로 마빈 게이* 노래를 연주한다 되돌림표가 없는 악보에 남자를 태운다 세 번째는 대머리 남자가 좋다 이마에 누드 문신을 그린다 두 명의 남편들이 축전을 보내온다 그래도 걱정 없다 뚱뚱해도 자고나면 또 처녀, 내일은 내일의 렌즈가 필요하닌까

*마빈 게이 - 미국 흑인 R&B 가수, 음악프로듀서 1984년 45세 나이로 사망

담벼락 병동

대학병원 담벼락이 철거되고 있다
넝쿨장미의 인대들도 톱니바퀴에 몸을 내주고 있다
병실 유리창에서 담을 넘봤던 눈빛들이
동네 밖으로 산책을 시작한다
여름내 방문객들이 흘려준
보송보송한 사연들을 취재한 은행나무가
노란 쪽지를 병실로 휙휙 날린다
양손 보따리에 끌려 다닌 발걸음들
무너진 담벼락에 눈물과 한숨을 맡겨 놓고
억지웃음으로 병실로 향한다
뒤뚱거리는 발자국에서 배냇냄새가 기어 나오고
머리를 붕대로 감싼 휠체어 노인은
길 건너 죽집에서 햇볕을 끌어다 쓴다
의족으로 키를 맞춘 목발 아이는
대학꽃집 화분에 제 발목을 심는다
구로시장 앉은뱅이 의자들도
골다공증 치료를 받아 또 무거운 하루를 받아낸다
세상의 가위질에 긁힌 골목길들이 회진을 기다리는 동안
온 동네가 회복실로 옮겨간다

  작업복 이력서

드르륵 드르륵 귀를 세운 엄마의 재봉틀이
모락모락 솥뚜껑을 넘어갑니다
새벽 등성이를 넘어갑니다
드르렁 드르렁 아버지 지난 발자국들도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폅니다
누비처럼 앉아있는 부스럼딱지 위로
데굴데굴 실밥 타고 굴러갑니다
골목길을 짊어졌던 갈지자걸음도 끌려 와
꽁꽁 실밥 속에 묶여집니다
너털웃음에 덧댄 침 자국이 보일까봐
재봉틀 바퀴가 너스레를 떱니다
아버지 얼굴에 웃음소리가 풀리지 않도록
꼭꼭 실밥을 동여맵니다
흐린 손금을 풀어 마지막 실밥을 동여맵니다
아버지 키가 한 뼘이나 자랐습니다

구로동엔 펭귄이 산다

구로2동 우체국 계단 입구를 지키는 펭귄 우편함
앞 집 구두 수선 노인과 수다를 떨다
가끔 행인이 밀어 넣은 편지를 받아먹고
관할지역과 타 지역으로 나눠진 두 입을 옴질옴질 거린다
아침이면 우편함에서 뒤뚱뒤뚱 뛰쳐나와
저녁내 남극에서 보내온 우편물을 스케이트에 싣고
슬로우 슬로우 퀵퀵 오른발, 왼발을 동네 이불속으로 밀어 넣는다
이층집 세발 할머니네는 노란 스쿠터를
편식하는 경식에겐 크릴새우를
33번지 노처녀는 총각을
아래층 새댁은 아파트당첨권을
통통한 은아에겐 비키니 수영대회 포스터를 배달하면
구로동 한낮에 오로라가 떠오른다
구로디지털단지역엔 온갖 펭귄들이 돌아다닌다
가끔은 누군가에게 보내고 싶은
집안의 펭귄들이
우편번호부를 뒤적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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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다음 자연사박물관

등 푸른 추억

시 : 정상조

여기가 어딘지 몰라, 눈만 휘둥그레져 있는 고등어. 쭈그리고 앉아 있는 어머니의 뱃살처럼 켜켜이 쌓인 고등어는 시장바닥에 피어오르는 한기와 사람들의 흥정 소리에 대가리 없이도 그 사이를 헤엄쳐 나갔다. 대야에 남은 고등어는 그래도 대가리는 갖은 채, 밥상 위에서 지 몸 타는 줄 모르고 백열등만 응시했다. ‘또 고등어야’ 등 푸른 연기에 침묵은 소금처럼 스며들었다. 침묵의 수평선이 눈을 뜨자, 고등어는 아이의 입을 헤엄쳐 갔다. 목구멍에 잔가시가 걸려 아파하는 울음소리에 어머니는 맨밥을 밀어 넣으셨다. 고등어는 그 많은 가시를 삼키고도 아프지 않았을까. 아이가 남기고 간 상처들의 잔해를 어머니는 도둑고양이처럼 맨밥과 함께 목구멍으로 넘기셨다. 밤마다 파도치는 어머니의 뱃속에 고등어는 커가고 있었다. 다음 해, 간인지 쓸개인지 알 수 없을 커다란 어항이 어머니 몸속에서 나왔다. 그 곳에 고등어는 없었다. 다만 대형 고등어가 살았다는 붉은 흔적뿐. 퇴원 후에도 어머니는 뱃속에 고등어를 키우신다. 가끔, 내뿜는 담배연기 사이로 헤엄치는 등 푸른 추억이 떠오르곤 한다

<서울디지털대학교 제1회 사이버문학상 당선 가작>


율:Enigma - Almost Full Moon

출처 : 김기홍시인의 꿈과 희망을 찾아서
글쓴이 : 김기홍 원글보기
메모 :

 

 

 
줄장미 붉은 손바닥

초여름 아침 등촌동 자동차공업사 옆 담벼락을 지나는데 줄장미 붉은 가시가 홑겹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출근길 발걸음이 함부로 뻗친 가시에 걸려 잠시 허둥거렸다. 제 毒手에 찔린 줄장미 꽃모가지들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옷깃을 움켜 쥔 줄장미 독 오른 손바닥들이 옛 애인을 붙잡고 늘어지던 내 넝쿨손 같아 도망치듯 전철역까지 줄행랑을 쳤다. 가슴을 쓸어내리는 손바닥이 십년 전처럼 까칠했다. 젠장, 외로움에 긁히고 그리움에 긁히는 게 사랑이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니는 사람들은 조금씩 긁힌 손바닥을 갖고 있다. 사람들은 쉽사리 상처를 보여주지 않는다. 악수가 따듯한 건 상처가 상처를 어루만져주기 때문이다. 가슴을 쓸어내리던 손바닥을 펴면 아직도 털어지지 않는 붉은 가시들, 종일 손바닥이 따가웠다. 태양의 모가지가 뭉툭뭉툭 지고 있었다.

카페 라 캄파넬라

큐빅이 박힌 하이힐을 신고 표범무늬 미니스커트에 엉덩이를 걸친 女子 살갗이 슬쩍 보이는 반라의 시스루를 두르고 알 듯 모를 듯 미소를 흘리며 서 있는 女子 얇고 가느다란 시선만 던져도 울퉁불퉁 심장이 뜨거운 사내들이 침 삼키며 눈독을 들이는 女子 뒤로 다가가 허리를 덥석 안아 버릴까 얇은 시스루를 확 벗겨 버릴까 이런, 그 女子의 입술에서 따듯한 영혼이 실핏줄처럼 퍼져 나가게 돌려 버릴까 젠장, 숨 막히게 맑은 투명한 에스라인 허리를 손가락 끝으로 간질여볼까 혀끝으로 꼭지가 짓무르도록 핥아 볼까 아아, 女子의 입 속으로 바람을 불어넣는다면 배가 부풀어 오를까 아니면 스커트가 벌렁거릴까 사내들이 동공이 커진 눈동자를 번뜩이며 다가온다 이런, 스커트 밑으로 밀고 들어오는 이 부드러움은 무엇인가 이봐, 눈 큰 겁쟁이, 축제 준비는 다 됐니? 자, 그럼 실컷 만져 봐, 뇌쇄적인 女子의 몸매, 이런 와인 잔은 아마 처음일 걸?

늦겨울

느그들은 나 죽기 전에 시집들 안 갈래 요새 아그들은 참말로 애인들도 잘 사귀드만 느그들은 여태 뭣했냐 저 시랭이 마을 사는 끝자는 아들을 셋이나 낳고도 그 머이메와 끝내뿔고 딴 서방을 꿰차고서 딸 하나를 낳아서 알콩달콩 잘도 키우고 살드그만 느그들은 여태 뭣했냐 넘들은 시방 손주를 장개보낸다고 청첩장을 뿌리고 난린디 나는 딸 셋 중 하나도 못 치워서 복장이 터져뿔것다 참말로, 근디 시방 어디여, 여즉 사무실이라고, 그놈에 사무실은 매미맹키로 붙어서 끄륵끄륵 일만 해싸면 무슨 똑바라진 사내자식 하나 엮어준다디 인제 그만 일을 끝내뿔고 싸게싸게 나와서 술 한 잔 먹어제끼고 맘에 든 사내가 있거던 거그서 그냥 모른척 자빠져쁘러 지도 사람인디 나 몰라라 하것냐 뽀뽀는 안 허더라도 업어다 이불에는 눕히지 않겄냐 그렇게 갈켜줘싸도 그노메 좋은 머리는 어따가 쓰는겨 초등핵교도 안 댕긴 명옥이도 남재 만나서 잘만 살더그만 대학까정 나온 느그들은 여태 뭣했냐 잔소리라 생각허들 말고 퍼득 정신차려 시간이 없당께 고놈이 고놈잉께 인제 고만 고르고 화딱 소매를 끌던지 바지가랑이를 잡아댕기든지 하랑께 술 몽땅 묵고 자빠져쁘러 고것이 최고여 그라고 나중 지가 안 그러고 고놈의 술땀시 그랗게 되야부렀서야 하면 그만이랑께

땡? 법정

육법전서 너머로 보이는 거리에는 실어증에 걸린 사람들로 북적인다. 한 장 남은 달력 위로 다급하게 달려드는 발자국 밑으로 마른 햇볕이 끼어든다. 오후 네 시의 아찔한 구멍 속으로 비둘기들이 들락거린다. 법원입구 플라스틱 화분에 담긴 툰드라꽃배추가 미색의 소환장을 던진다. 덜컹 내려앉는 사람들의 놀란 가슴을 짓누르는 판결문 낭독소리. 판결문은 양자 누구에게도 위로가 되지 못한다. 돌아서는 고소인의 뒷모습과 구속된 피고인의 뒷모습은 동전의 양면처럼 닮아 있다. 완벽한 증거들로 가득 찬 네모난 형사공판조서 속에서 각진 얼굴들이 빠져나오려고 아우성이다. 법원사무실에서 바라본 풍경 속에서 태극기는 여전히 높이높이 바람에 펄럭인다.

네모난 겨울 - 법원사무실에서 바라본 풍경

초여름 아침 등촌동 자동차공업사 옆 담벼락을 지나는데 줄장미 붉은 가시가 홑겹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출근길 발걸음이 함부로 뻗친 가시에 걸려 잠시 허둥거렸다. 제 毒手에 찔린 줄장미 꽃모가지들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옷깃을 움켜 쥔 줄장미 독 오른 손바닥들이 옛 애인을 붙잡고 늘어지던 내 넝쿨손 같아 도망치듯 전철역까지 줄행랑을 쳤다. 가슴을 쓸어내리는 손바닥이 십년 전처럼 까칠했다. 젠장, 외로움에 긁히고 그리움에 긁히는 게 사랑이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니는 사람들은 조금씩 긁힌 손바닥을 갖고 있다. 사람들은 쉽사리 상처를 보여주지 않는다. 악수가 따듯한 건 상처가 상처를 어루만져주기 때문이다. 가슴을 쓸어내리던 손바닥을 펴면 아직도 털어지지 않는 붉은 가시들, 종일 손바닥이 따가웠다. 태양의 모가지가 뭉툭뭉툭 지고 있었다.

당선소감
새삼스럽게 가슴을 후벼 파기 시작했다. 이젠 잊었다고 생각했던 기억들이 일시에 떠올랐다. 독한 가시에 찔리면서도 시를 떠나보내지 못했던 건 별빛에 어깨를 기대며 시를 읽어주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붉게 꿈틀거렸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짝사랑만 하던 내게 비로소 따듯한 악수가 전해졌다. 정말 다행이다. 이젠 내 붉은 손바닥에도 새순이 돋아날 것이다. 새순에서 푸른 미소가 번지고, 뭉툭뭉툭 지던 태양의 모가지도 하늘로 떠올라 빛나는 여름 속에서 자라날 것이다. 꿈틀거리고 요동치며 오래도록 선연한 기운을 풀어낼 것이다. 가느다란 넝쿨로도 세상의 담벼락을 온통 휘감는 줄장미가 될 것이다.
영국의 낭만파 시인 셸리에 의하면 ‘시는 영원한 진실 속에 표현된 삶의 이미지’ 라고 한다. 앞으로 나는 시적 진실이 표현된 삶의 이미지를 묘사하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작품을 뽑아주신 서울디지털대학교 여러 선생님들께 감사드리며, 날로 중요성을 더해가는 지식정보사회에서 서울디지털대학교의 위상이 더욱 더 빛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가작

 

 

마녀


4층 금강극장에 한 마녀가 살았다

그녀의 이름은 순자

마법에 빠진 동네 총각들은

TV에서 볼 수 있는 영화들을 극장에서 봤다

사내들이 계단을 오를 때마다 받쳤던

순정 한 방울, 주머니 속 먼지 두 스푼에 속눈썹 말아 올라간

그녀는 빗자루를 타고 종횡무진 날아다니며

사내들의 마음을 쓸어 담았다

마녀가 황금 빗자루를 쫓아

스크린 속으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자

탈색된 머리카락을 엮던 영식이 형은

몇 가닥 남지 않은 머리털을 부여잡고 울었다

장대비가 쏟아지던 날

꼬여버린 빗질 따라 마녀사냥꾼들이 동네로 들어왔다

붉은 부적딱지에 집이 불타오르자

마녀의 어머니는 불을 끄기 위해 애를 썼지만

도착한 것은 구급차였다

이듬 해 병실에 마귀할멈이 나타났다

그녀의 얼굴에는 수면제 4알, 한숨 세 스푼이 만들어낸

층층 계단이 놓여 있었다 금강극장 계단보다 높았다

그녀의 손에는 회한(悔恨)에 젖은 대걸레가 쥐여져 있었다

스크린의 턱을 넘다가 남자 발에 걸려

빗자루는 걸레가 되었다고 했다

부적 딱지를 많이 삼켜

굽어진 그림자 얼룩으로 가득 찬 병실.

그녀는 오늘도 잘 닦기지 않는 얼룩을 어루만지고 있다

젖은 걸레가 마르는 날,

나는 순자에게 소박한 빗자루를 선물하고 싶다



단단한 붕어빵


좁아터진 붕어빵틀 속에

밀가루 반죽처럼 길게 늘인 콧물 단

꼬마 하나 이리저리 뛰어 다녔죠

코가 막혀 숨을 몰아쉬니

한숨쉬면 복달아난다는 말에 꼬마는 숨을 참으며 살았죠

넘실거리는 소주에 그날 번 일당 띄우고

큰소리로 항해하신 아빠 이름은 마도로스 김

밤마다 암고양이 울음소리가 꼬마 귓등을 간지럼 태우면

어김없이 다음날에는 얼어버린 붕어빵 몇 개 놓였지요

아가미까지 말라버린 붕어빵을 꼬마는 먹지 않았어요

킁킁거리는 소리에 소주 뚜껑으로

꼬마 주머니는 아빠 술배처럼 불룩해졌죠

꼬마는 붉은 해가 뜨는 밤보다

잠들 무렵에

암고양이 울음소리가 안 들릴까 걱정했죠

울음소리 들리지 않으면 아침이 오지 않았을라나,


더 이상 탈 배가 없어 대낮부터 들어온 아빠가

엄마 가슴에 술 붓자, 푸른곰팡이 찍히는 소리 들리네요

꼬마는 답답해 아궁이 뒤에서 몰래 한숨을 내쉬자

푸른곰팡이 집 전체에 퍼져, 꼬마 몸까지 피워 오르네요

꼬마는 101마리 달마시안 그린다고 수많은 푸른 점에

개 그림 그리는데 한마리가 부족하네요

집나간 개새끼, ‘멍멍’ 동네방네 짖어대는 소리가 정겹네요

그 날 밤 암고양이 울음소리 사라져 꼬마는 무서웠어요

한숨 소리에 암고양이 제 새끼 놔두고 달아난 줄 안

꼬마는 한숨을 감추기 위해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어요

마을 어귀에서 담배를 피우며 꼬마는 붕어빵을 굽네요

암고양이가 먹어본 건 단단한 붕어빵이라

후후 불어가면서요



최후의 만찬


맨주먹으로 세상을 주무르겠다고 하던 시절

공장 앞 부동산 화투판에서 공갈빵을 맛 본 아버지는

도너츠 구멍으로 보이는 세상이 작아보였다

도너츠에 이스트를 넣으신 아버지

부풀다 부풀다 터져버린 그 날,

도너츠는 설탕 옷 대신

붉은 차압딱지로 포장되어 나왔다

그 해 공장은 붉은 시럽에 빠져 익사했다

아버지는 직원들과 최후의 만찬을 가지기 위해

도너츠 구멍처럼 작아져 버린 방에

직원들은 서로 부둥켜안은 채 둥글게 앉았다

반죽은 여자가슴 주무르듯 해야 한다는 김씨 아저씨

세상 모든 것은 구멍 없이는 살수 없다고 소리치던 최씨 아저씨

모두들 채울 수 없는 목구멍에 술잔을 부었다

술에 불어버린 방에서는 한숨만이 여기저기서 피어올랐다

아버지는 도너츠가 불던 휘파람소리가 듣고 싶어 했지만

더 이상 만들 손이 없어 입으로 도너츠를 만들었다

집안 가득 흰 도너츠는 우주선처럼 날아오르며

매캐한 설탕 가루를 집안 가득 뿌렸다

긴 한숨을 타고 우주선이 내 머리 위로 착륙하려 하자,

아버지는 우주선을 향해 재떨이를 날리셨다

휭 휭 날아오르다 내 이마밖에 닿지 못한 무능함에

더욱 커진 우주선이

시럽처럼 붉어져가는 방을 졸라매자,

사람들은 울음 섞인 휘파람을 내쉬었다



면도


무딘 주름살 꺼내놓은 채

이젠 날도 서지 않은 면도기로

사내는 면도를 해본다

칼날 사이에 켜켜이 쌓인

사내의 모진 인생을 면도기는 안고 살았다

탁탁 털어내지만,

사내의 매끄러운 인생에 잘려나간

아버지의 두개의 손가락만이 세면대 위에 떨어진다

턱 주위에 거품을 바르자, 거울에 아버지 얼굴 보인다

제 숨 다 쉰 거품들

‘지 애비 닮아가네’ 소리에 사라지고

욕실에 던져진 구멍 난 양말에서

아버지 배꼼 얼굴을 내민다

무딘 면도날에 베인 상처 틈으로 흐르는

시간은 뚝 뚝 끊어진다

상처를 막자, 사내의 그림자에서 걸어 나오는 아버지

무딘 칼날로 그림자를 깎으려는 사내는

깎기지 않자 면도기를 버린다

혼자 면도를 할 수 있는 사내에게

아버지는 일회용이었다

팽팽한 면도기로 난도질을 해봐도 떨어지지 않는 그림자

불을 끄자

사내가 없고 아버지도 없다

섞이지 못한 채 고여 있는 침묵뿐.



숨바꼭질


달빛 속으로 적막마저 숨은 밤

달동네에서 숨바꼭질이 시작된다

도둑고양이가 품고 있던 바람은

술래의 주먹 속에서 비명을 지른다

술래는 무너진 담벼락 따라 숨은 사람을 찾아 나선다


처음으로 잡혀 나온 사람은 ‘늘봄상회’할아버지

달동네에 뿌리내린 수염을 술래는 송두리째 뽑아간다

폐지를 덮고 자던 박스아줌마는

식어버린 아궁이에 숨어있다, 연탄집게에 엉켜 나온다

일찌감치 몇 푼의 보상금을 받고

숨바꼭질을 끝내는 사람들이 더러 나타난다

달빛 파편이 시퍼렇게 빛난 집에는

아버지가 버리고 간 소주병에 갇힌 채

숨어있는 남매 하나 깨져 나온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수묵화를 그렸던 집에

아무개 할아버지가 주검이 된 채 실려 나온다

모두 발견됐지만 끝끝내 한 소녀가 발견되지 않았다

숨바꼭질의 주도권은 술래에게 있으리라.

술래는 단단한 이빨을 드러내며 한 입 한 입 달을 집어 삼킨다

게걸스럽게 씹어대던 빛나는 잇몸에 흘러내린 핏줄기는

도둑고양이일까

이빨 틈에서 떨어져나간 이름표가

신문 하단 미아 찾기에 얼굴 없이 내려앉는다


달빛 찢어

마디마디에 붙인 대숲에서는

못 찾겠다, 꾀꼬리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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