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젖 / 박수서
애가 닳아보지 않은 사람은, 애가 어디부터 끓어오르는지 모른다. 살면서 애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애를 어느 쯤에서 입 크게 벌리고 한 입 물어야 되는지 모른다.
애는 속 깊이 시작됐으니 가장 속에 가깝다
갈비뼈와 장기에 숨어 꼴딱 꼴딱 숨 쉬는 애를 볼 줄 아는 사람은,
날이면 날마다 속이 젖 같다고 한다.
혀 짧은 소리로 젖 같은 세상이라고 목젖이 훤히 보일만큼 끌끌 앞당기는 혀가 먼저 속 길을 연다.
어머니는 양푼에 박박 속 젖을 무친다. 속 젖은 무치기 나름이라고,
간이 배이려면 속절없는 세월도 함께 버물려야 한다고.
吉夢
밤마다 꿈을 꾸었는데,
그가 그의 머리채를 흔들고 거친 숨을 몰아쉬고 끝에서 온 것처럼 끝으로 가려하고 고향이라 말하는 폐허의 동굴로 날갯짓 하고 떨어뜨리고 돌아와버린 깃털은 다시 찾지 않고 어두운 세상을 헉헉거리며 숨통의 진이 다 빠질 정도로 날려버린 날숨은 말라버린 풀처럼 쓸모없이 딱딱해져 가고,
삶이 그만하자고 어깨를 툭툭 치고, 그는 갈수록 딱딱하게 말라가고 세상의 풀이란 풀은 모두 꽃으로 만들었던 축복받은 능력도 사라져가고, 동굴 밖 육식짐승떼의 넘침과 짖음.
죽음이 목젖까지 올라 스스로 날개를 꺾고 벼랑 끝에서 우 우 밀려가고, 숨이 마르고
그가 꿈꾸던 세상은 너무도 흉해서 오히려 길한 흑백영화였네.
밤마다 꿈을 꾸었는데,
그가 새떼를 몰고 세상 끝에서 작은 새들을 날려 보내네.
현장 검증
여자는 없었다. 간밤 통곡소리만 쌓아두고 재와 함께 날아가 버렸는지. 한 순간 불더미가 되어버린 家系에 대한 내력은 지방뉴스에서 줄기차게 연자방아를 찧었고, 훈련이 안 된 방화범 우발氏는 정말 막장의 인생에 딱 어울리는 포즈로 수사관의 지시에 따라 꽃이었다가 포르노 배우가 되었다가 선량한 지방자치제 郡民이 되기도 한다. 지난밤에 저질러진 사건은 술에 취한 평범한 가장이 장모를 칼로 찔러 살해하고 집안에 불을 질러 팔 개월 살아온 아들을 한줌 연기로 날려버린, 누가 보아도 반인륜적인 폭동이었다.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은 부녀자들의 추리로 얼버무려진 사건의 에피소드들을 방방곡곡에 유포했고, 순식간에 우발는 개, 돼지보다 못한 놈이라고 모두 굳게 믿고 있었다. 여자는 보이지 않는다. 누구보다 뚜렷하게 사건의 진행을 알고 있을, 피살되는 어머니를 보며 통곡했던 여자는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가루처럼 날아가 버린 아들과 칼끝에 숨통을 어미를 위하여 어디서 招魂하고 있는가. 우발氏는 입을 다물고 온몸으로 사건의 顚末을 진술하고 있다. 진실은 공중분해 되어도, 이 시대에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일을 목격하고 있는 나는 이상한 나라의 국경에 서 있는 듯 실핏줄이 쭈뼛 쭈뼛 살아 올라왔다.
오산리
남대천 발자국 꾹꾹 찍어 따라 올라와 보네
골골골 치매에 걸린 번데기 공장은
흉가처럼 늑골을 빼어놓고 웅웅 혼을 갉아먹고 있었네
어지러워라
있잖아요, 그때 오산을 주름잡던 번데기 공장
울산에서 부산에서 인천에서 돈 벌러 온 열 예닐곱 소녀들
번데기 주름만 잡은 게 아니라 동에 사내들까지 주름잡던
70년대 아가씨들이
90년대 아가씨를 낳고 70년대 사내들이
90년대 사내를 키우고
그럭저럭 밀레니엄이네 뭐네 하면서
리조트다 동계올림픽이다 대리석처럼 반짝반짝 깔린 신작로에
살점 한 점 떼어주고 유령처럼 서 있던 번데기 공장
아작아작 번데기 씹는 소리 그 옛날 나제통문처럼
내 마음의 국경을 넘나드는데
나는 신호를 기다리네
뚜뚜 걸리지 않는 70년대 傳信을.
사향제비나비의 기억
오산리 군내버스 정류장 낡은 커피 자판기 옆으로
새마을 운동처럼 집집마다 퍼져 있는 우편함이 있다
간간이 전기세 통지서나 들어오는,
점포 주인네 양반같이
늙은 졸음이 묻어 있는 사각의 뜰 안으로
오늘은 사향제비나비 한 마리
고단한 비행을 끝내고 쉬고 있다
박제된 기억이 울울 개울가에서 흘러 들어와
쉬땅나무 꽃잎을 물고 꿀을 빨아올린다
푸덕 푸덕 날아오를 것만 같아 뚜껑을 살면서 연다
푸르르 퍼져오는 냉기,
날개는 검버섯처럼 얼룩이지고
유언도 없이 굳어버린 꼬리모양 돌기는 손만 다면 부스럭
으깨질 것 같다, 누가 이곳에 널 매장했느냐?
겹눈이 부들부들 떨린다
아침의 엉겅퀴며 산초나무를 잊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널 다시 야산에 돌려보낼 수도 없지 않느냐?
네가 앉았던 꽃이며 나무며 이제 영영 널 기억 못할지도 몰라
동물도감처럼 꽁꽁 굳어 있지만, 더욱 가벼워진 날개
풀소리처럼 살랑살랑 저어 기억의 꿀단지로 추락한다.
붕어즙
아가미 호흡을 하듯 허리를 굽히고 책을 보고 있는데 어머니께서 사발을 책상 위에 톡 내려놓는다 몸에 좋은 거라고 비늘 냄새가 코를 찌른다 살아서 펄럭여야 할 은빛 깃발들이 내장과 함께 피와 함께 용해되어 한 사발의 액체로 유영한다 꼬리짓을 하는 것 같다 파다닥 한 놈이 물결을 만들고 또 한 놈이 만들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원심의 물결이 진혼가를 부른다 나는 대한의 사람으로 한 모금 마셔본다 비린내에 혀가 움츠리고 뻐끔뻐끔 입술이 움직인다 조금 있으니 푸른 소금냄새가 생기고, 태평양으로 인도양으로 푸드득 번쩍 비늘이 은화처럼 뒤집어진다 水中의 공기가 없어져 숨이 막힌다 헉헉 세포와 세포 사이에서 작은 폭발이 일어나고 그 사이로 무언가 손톱처럼 자라난다 앗! 몸에 비늘이 돋아났다
나는 블랙홀 같은 사발 속으로 끌려 들어간다
엎드려 있는 남자
누워 있다 보면 어느새 엎드려 쏴 자세다
전방은 갈색 새떼들이 일렬횡대로 낮은 포복을 한다
몇 발은 빚나가고 몇 발은 갑옷 같은 새털에 퉁겨져 나오고
우연히 총알을 맞은 새 한 마리 떨어지자 나머지 새들도
주르륵 사라져 버렸다 코앞에 단풍든 낙엽 같은 깃털 하나
내려앉고 핏방울은 아직도 살아 꿈틀거렸다
몇 번 옴지락거리더니 액체인간처럼 부활하여
깃털을 물고 푸덕 날아가 버렸다
등 뒤로 낯익은 목소리가 칼끝에 베어왔다.
껌은 버리고 껌종이를 씹었다
술을 먹어서였을까, 아침 길에 주머니에서 껌을 꺼내 입에 문다는 것이 껌은 버리고 껌종이를 씹었다 다음엔 새 껌을 실수 없이 입안에 몰아넣었지만 땅바닥에 떨어져버린 단맛을 어찌 알겠는가? 떨어져 버린 것, 이미 멀어져 버린 것들은 속물처럼 근사해 보였고 나는 누군가의 구둣발에 찍혀야 할 운명 때문에 가슴이 아팠다 문득 손을 뻗어보려 하였지만 잽싸게 손등을 후려치며 나, 아프지 않다고 오히려 단물만 버리고 멀어져버리는 것보다 덜미안하다고 꿀 같은 눈물이 아스팔트 위로 퍼졌다 끈적끈적해서 도무지 신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무언가 도와달라는 투로 바라보자 고개를 돌려버린다 멀어져 버린 것들은 미련만큼의 자존심으로 등돌리려하지 않는다 한 번 떨어짐에 아팠던 가슴이 다시 아프기 싫은 모양이다 나는 신발을 벗고 껌종이 속으로 기어들어간다
뿔
1.
강에서 키우던 모래알들은 각이 생길 정도로 써걱거리며 운다 구르던 모래알들은 둥글게 뭉쳐 무엇을 만드는 듯하더니 뾰족한 뿔이 생기고 상처 난 발목을 찌르기 시작한다 누군들 뿔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있겠는가? 궤도를 벗어난 주체를 언제라도 찌를 수 있는 뿔, 그렇게 해서라도 삶을 지탱하려하는 딱딱한 의지의 투구를 눌러쓴 딱정벌레들. 제 몸보다 무거운 상처와 벗겨지지 않는 얼룩을 알처럼 품고, 무당벌레 같은 무늬의 뿔을 달고 힘들게 기어가는 그레고리 잠자처럼 우리는 보이지 않게 딱딱한 옷을 갈아입고 변신하며 산다, 뿔을 가지고
2.
흰 종이 위에 소의 뿔을 그려본 적이 있다 이상한 일이다 뿔을 그렸는데도 먼저 생각나는 것은, 땅을 파헤치는 단단한 발목이다 발목의 氣가 뿔까지 꼿꼿이 전달되는 것이 전류처럼 팽팽하다 발목이 없다면 뿔의 힘이 완전할 수 있겠는가? 소는 몸전체가 뿔이다 깍여져 도장이나 장신구가 되지 않는다면 겁 없이 찌를 수 있는 놈이다 뒷굽을 우뚝 세우고 달려드는 공격성이 원시의 벽화처럼, 퇴화되지 않는 영원한 생명이다 흰 종이 위로 뿔이 성기처럼 단단해지고 힘줄이 붉어온다
춤꾼
춤추던 여인의 발목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툭, 힘줄이 굵어지고 퉁퉁 부어오르는 발목이
아슬아슬 꺾어지려,
세계는 용수철처럼 엉켜지지만 않는다면 움직여주지.
꺾인 발목으로 춤꾼이 된다는 것은
무엇보다 영혼을 다듬는 일이다
발목을 솟아 올려 땅 위에 떠 있어도
중심을 잡을 수 있는 것은,
더욱 영혼이 아픈 일이다
가락이 튕겨져 나오고 옷고름을 조이듯 완강하게
춤춘다 통. 통. 영혼이 석류처럼 터져 나온다.
유배記
가슴 안으로 꿈틀꿈틀 솔잎이 자라네
가위를 들고 들어가 잘라내려 드니 심장에 염증이 생기네
며칠째 편두통에 시달린 게 솔잎혹파리 때문일까
푸드덕, 오열하던 까마귀 떼가 날아가 버리네
솔숲에 버려진 게 나 뿐인가 싶어 [도덕경]을 읽다,
코를 막게 하는 퀘퀘한 냄새에 좀벌레가 되네.
송홧가루 날아가는 끝에 누구의 安家가 있을까
생각해 보네
솔잎끼리 쓰르르 쓰르르 어깨를 어루만지는 음절이
뭉게뭉게 피어나는 선인장 같네
살아있는 것은 모두 허리에 복대를 하고
지긋이 삼림욕이나 할 것 같지만 솔 이파리 주렁주렁 열리는
이슬을 보지 않은 그는 모르는 일이네
감기약을 먹지 않고는 피로가 나가지 않을 것 같지만
두엄에 묻어둔 솔순주가 있어 필요 없을 듯싶네
술기운이 올라 그늘진 곳으로 버섯처럼 기어 들어가
한 筆의 꿈을 꾸네
샘 안에서 누군가 멀겋게 바라보며 울고만 있네
언제 이곳에 찾아들었나
봄날 아름답던 진달래 말고는 기억하지 못하네
손가락 마디가 솔껍질을 닮아 갈수록
송진같이 뚝뚝 떨어지는 눈물과
고향에서 배웠던 토정비결 조각을 맞추네
샘물에 자꾸 짭조름한 소금기가 생기는 듯 싶어
독한 술을 마시네
폭설 경계
낮부터
늘어진 휴일 달력 한 장의 꿈으로
죽은 자를 만나고 오는 나는
포르말린 상태로 靈의 경계에
바짝 들러붙어 있다
마른 겨울을 동굴 속에 두었다 꺼내
비린내 나는 되새김질을 해대는 그가
씹으면 씹을수록 눈발을 미치게 만드는
힘 꽤나 쓰는 呪力을 자랑하여도
나는 우두커니 바라볼 뿐,
대낮의 폭설을 잡아둘 엄두조차
철썩철썩 쌓이는 무덤의 높이도
몰랐다
삶의 가장 게으른 성감대로부터
올라온 눈발은 꺼칠한 손바닥을 어루만지고
사 주 팔 자로 늘어진
케이블 선을 무 뽑듯 뽑아 버린다
어쨌거나 한 번 죽기는 죽어야겠다
그가 찾아온 날은 언제나
밖보다는 안이, 몸보다는 마음이
폭설로 정체되었지
결빙구간을 맨발로 걸어온 그가
먼저 손을 내밀지만 않았어도 나는
그를 순순히 따라갔을지도
코리안 느와르에 감긴 남자
로우 앵글 쇼트로 달려드는 카메라를
배반한 여자의 따귀를 때리듯
과감하게 후려치고,
한 주머니에서 싹이 올라오는 양아치들을 보네
狼牙를 갈 듯 어린 부랑아들은 필름 한 구석에서
라이터를 켜고, 입에 담배를 꼬나물며 지가 먼 정우성인줄 알고
개 똥폼만 잡다 세기말의 문짝을 놓아버린다.
초고속 절망과 어둠을 러쉬필름에 모조리 담아내도,
불온한 세상은 그렇게 걱정한 것처럼 아작 나지는 않을 거야.
신들린 무당의 한 올의 입방아가 세상에 빛이 되는,
그토록 다급해진 세상의 삼류극장에서
거룩한 초호화 캐스팅으로 연이어 흥행 일순위를 달리는
코리안 느와르에 감겨 있는 한 남자
가 오늘은 영사기를 부숴 버렸다.
막힌 하수구가 뚫렸다.
누와르 론
단지 어둡다고
단지 우울하다고
그 여자, 삶 전체가 느와르라고 깨진 소주병처럼
베일 듯이 윙윙거리네.
도살장에서 목이 따여 뜨거운 한 드럼의 선지를 토해내는
돼지를 보고,
제왕절개로 허연 뱃가죽을 째고 태어난
핏덩이 아이를 보고,
무엇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니?
피는 피고
아픔은 아픔인 거야.
내 말이 너무 단정적이니?
우, 우울해 하지 마.
너의 코드로 텃새처럼 앉았다 가는 그 남자 있잖아
험프리 보카트 …… 바바리코트 깃을 올리며 정말 느와르적으로
미궁에 빠진 너의 우울을 수사하는 총잡이가
오늘은 무슨 단서라도 찾았을 줄 아니.
나는 너의 낡고 긴 느와르 필름에 감겨
도무지 投映되지 않아
휴관중이야.
인연에 관하여
그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왼손을 내밀었다
나는 무슨 자기력처럼 오른손이 끌려나갔다
왼손과 오른손의 결합, 맥을 집듯 조심스럽다
속살과 속살이 부둥켜 흔들려야 하지만,
등껍질을 어루만지고 쓰다듬는다
물갈퀴질을 하듯 손이 흔들렸다
계속해서 딸꾹질을 하는 어린 손이 흐드러지며
뚝 떨어지는 순간, 수십 수백 개의 손들이
길을 잃고 숲을 헤매기 시작했다
그가 놀라서 눈물을 찔끔 흘렸을 만큼
먹이를 나르는 개미떼처럼 찾아온 손들이
그와 나를 거미줄처럼 엉켜 놓았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가시처럼 따갑게 넝쿨을 쳤고
밤송이만한 꽃들이 피어났다.
다림질
누군가 그리움으로 꽂히었다 가슴에 화살촉 같은 것이
꼬리지느러미로 꽂히었다 나는 갈비뼈 사이에서 칼을 빼어들어
비늘을 긁어냈다 우두둑 떨어지는 은빛 이파리들
무덤같이 심장 쪽으로 모여든다 박동에 맞추어 오리걸음을 하는
작은 도끼를 든 물방울들이 콕, 콕, 콕, 핏줄과 핏줄을 절단 내놓고
나는 이제 부속품이 망가지고 전깃줄마저 끊긴 전류가 통하지 않는
다리미다 다리미는 옷을 빳빳이 잡아주는 것이 일이지만
도대체 전기가 없는 다리미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리움의 플러그를 꽂고, 쿵쿵 와이셔츠로 바지로 너의 스커드로
지금 가슴에 다리미가 찍힌 것 같다
조기를 바르며
푸른 냄새 생기고
나는 바다에 푹 빠지는 꿈을 꾼다
남자는 생의 어느 부분은
저려진 생선처럼
한 사람의 입안에서 오물오물 씹혀지는 단맛이고 싶다
잘 발라진 생선 뼈 한 쌍 폴개어 한 번 더
죽어 버린다
푸른 지느러미 칼날처럼 생기고
뒤엉켜 푸덕거리다
서로의 살점을 찢고
운다
피는 눈물보다 진하다고
나는
아가미를 열었다 닫는다.
달팽이 론
집에 돌아온 저녁 딸아이의 더렵혀진 옷을 보고 이유를 따지는 동안, 누룽지처럼 달라붙은 찌꺼기들을 하나, 둘 걷어내며 아이의 눈에서 한 마리 달팽이를 발견했다. 왜 이렇게 됐니? 정말 어쩌자구 세상은 자꾸 앞으로만 튕겨져 나가는 거니? 뒤도 한번 바라보지 않고 사냥개에 쫓기는 토끼처럼 달리기만 하다 나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분실했는지. 어린이집에 다니는 딸아이는 아기 흉내를 내며 하루 종일 방바닥을 휘집고 다니다 엉망이 된 옷 때문에 꾸지람을 듣는데, 내가 정말 꾸짖을 자격이 있는가. 테잎을 되돌려 아기처럼 뻑뻑 기어다니는 추억 속에는 자궁 깊숙한 곳으로부터 흘러나온 잃어버린 베니싱 트윈 같은 어떤 달팽이의 영혼이 살고 있나, 다그치지 않고 조금씩 조금씩 기어서 끈적거리는 점액으로 지구를 토해 내며 꼭 한 톨의 눈물만 흘리며 귀가할 줄 아는, 세상 가장 낮은 바닥을 가장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그렇게 욕망을 탕진하는 한 촌(寸)의 겸손한 미물이여. 나는 딸아이에게 달팽이처럼 기어 다닐 수 있는 바닥을 만들어 주고 싶어 가슴 한 구석부터 쓸고 닦는다.
연가
당신이 손금을 열고,
여린 핏줄을 내 살점 어느 한 뜰에
뚝 떨어뜨리고 홀로 서 있습니다.
당신이 옹알이를 하고
어린 살갗은 내 지문 문틈으로 꼭꼭 들어와
자장, 자장, 자장, 합니다.
당신에게 보여줄 수 없는 진실이 너무 많아서
나는 솔가지처럼 부끄럽습니다.
꼭 유전자만이 아니라 당신이 없으면 못 살 것 같은 이유는 뭘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더니, 당신 같은 여자 아니면 또
사랑할 여자가 어디 있을까 싶습니다.
문이 열리려 합니다.
이제 당신은 문고리를 붙잡고 가, 나, 다, 라, ……
들에 나가겠지요
백설공주도 신데렐라도, 콩쥐, 팥쥐도…… 세상이 꽃밭만은 아니라고
울며 달려오는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그전에 나는 당신 손을 붙잡고 김제평야 어는 강가에서
갈대처럼 살며시 말하렵니다
세상이 꼭 바람 같다고
그래서,
자꾸 흔들린다고.
버스를 기다리며
1.
신호판 앞에 선다
버스가 떠났을지도 몰라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기다리다
귀가하는 사내의 엷은 과일봉지를 보며 문득
며칠 전 버스 안에서 만난 아이를 생각한다
물풀 위를 헤엄치는 관상어의 볼펜알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자, 쫑긋 윙크를 해주었더니 소르르 金같이 웃었다
이제 막 말을 배우는 아이는 공기방울처럼 아빠, 아빠를 띄웠다
아이가 대롱대롱 포도알을 만들고, 나는 어렸을 적 꿈이 아빠였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딸아이를 생각하며 인형을 하나 사고,
너와 나의 운명은 토큰의 양면이구나, 중얼거리며
쑥스럽게 구두짝을 맞춘다
어느덧 장마를 알리는 빗방울이 구두코에 콧물처럼 떨어진다
2.
먼저 떠나버린 것들을 기다린다는 것은 같은 노선으로
또 다른 버스가 오기를 기다리는 일은 아니다 그것은
헤어진 여자의 전화번호를 외우고 있는 것처럼,
방금 떠나간 버스의 뒷모습을 보며 동전을 만지작거리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헤어진 여자와의 밤꽃 같은 날들을 기억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떠나버린 것들은 모두 발차 직전 품어내는
버스의 매연만큼 얼룩으로 남겨지고 더러는 굶주린 사람이
라면을 사고 나서 받는 영수증처럼 미련의 꼬리표로 집을 짓는다
나는 오늘도 먼저 간 버스를 기억하며 신호판과 함께 이곳에 박힌다
라면 냄비 밑에서, 울고 있다
술자리가 끝나고 일행 중 K의 집에서 동침을 하자 약속하고, 둘이는 고래고래 소리치며 은방울 형제처럼 <서른 즈음에>를 골목에 엎질렀습니다. 담벼락에 나란히 서서 지퍼 까고 오줌줄기도 맞췄습니다. 그럭저럭 큰 소란 없이?K의 집에 도착했습니다. 냉장고에서 맥주 3병을 꺼내 이것만 마시고 자자하여 밥상에 앉았습니다. K는 아침에 라면을 먹었던 모양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음탕한 담론을 나누며 맥주잔이 몇 잔 부딪치고 나서야 나는 라면 냄비 깔판의 정체를 알았습니다. 몇 해 전 볼펜 꾹꾹 눌러 싸인까지 하여 건네준 제 시집이었습니다. 손가락을 냄비 손잡이에 걸고 살짝 들어올렸다 놓았더니, 그 때부터 K는 어린소의 눈으로 자꾸 저만 바라보았습니다.
첫눈
부끄러운 첫날, 낮 밤 기다려 누에처럼 꿈틀거렸을 겨울선녀들 첫 밤은 은빛 깃발들 간지럽게 바람에 메달린다 부스럭 소리도 없이 살갗에 스치는 이파리들 뜨거워서 뜨거워서 첫 생리를 알리려다 녹아 버린다 송송 부서진다 사라진다 바로 눈꺼풀에서 손등에서 얼어 충혈된 하늘에서 밤새 흰 알을 낳는다 따스한 땅위에서 부화된다 물방울 같은 작은 새들이 금방 달음질을 배우고 금방 날으려 한다 동동 구른다 할머니 눈속까지 뚝뚝 떨어진다 기억으로 만든 새새끼 다른 새새끼를 찾아 깊숙한 생명의 면섬유 속속 빠지려 발을 내민다.
아버지의 나락
마당 한 귀에 웅덩이를 파고
이 집에 온 이후 줄곧
집안에서 걷어 올린 폐물을 매장한다
푸세식 변소처럼 꾸역꾸역 밷어내는 암모니아 향,
콩잎은 방긋방긋 웃으며 깊은 광합성을 하고
씨앗은 어디서 흘러들었나
적상추는 자라 벌써 옹알이 한다
코끼리 똥처럼 차오른 폐물들
뜨거운 낯빛에 단단히 말린다
나는 그랬다
몇 번을 썼던 유서를 깻잎처럼 차곡차곡 쌓아뒀을
그러고 토방 위 막걸리 주전자처럼 쓰러져 있는
깨지고 상처난 아버지의 나락을
말린다
바싹 마른 쓰레기를 태우면
바스락 바스락
허수아비같이 목소리 낮은 아버지
새 쫓는 소리 들린다
오이
텃밭에 숨죽이고 살며시 올라와
훌쩍 커 버린 오이넝쿨을 앞뜰에 옮겨 심으려
뿌리를 뽑는다
주섬주섬 묻어 나오는 흙 알갱이는 유전자처럼
끈을 놓으려 하지 않는다
호미질을 하고 옮겨 심는다
다독다독 흙을 덮어주고 넝쿨을 일으켜 세운다
이파리가 눈꺼풀처럼 감겨있다
달싹 오무겨 붙은 이파리
한 번 뿌리를 내린 곳에
가만히 두었으며 고추장에 푹 찍어 한 입
즐거운 밥상이 되었을 것을
무슨 욕심으로 생목숨을 끊어놓았나
해도 없는 흐린 날
하늘을 보며 양지를 찾는다
너무나 부끄러운 내 몸이
춥고 으실으실 떨려서
괴목초등학교
한 소설가는 분필을 끊고 맑은 적상산 줄기를 엮어 진짜 소설가가 되었고, 나는 이곳에 오면 밑둥부터 깎이는 아련함에 젖네. 안개가 걸쳐있는 운동장으로 빨래처럼 늘어진 내 시는 가짜 시가 되고, 오늘도 꽃씨를 버리는 백선생은 묵묵히 손금 같은 희망을 포기하며 아이들의 눈 속에 작은 꽃씨나 되었으면 하네. 얼마나 꿈꾸었던가 눈물나는 시 하나 썼으면 - 하늘을 암만 뒤집어도 눈물 한 방울 없네 - 꾹,꾹,꾹, 헛웃음이 새어나오고 부질없는 짓이라고 단념하려들면 겨드랑이가 간지럽네. 거짓말 하지마! 목을 조이는 강박증이 ...... 헉,헉, 진짜 시를 쓰고 싶어 교무실 뒤 60년대 변소에서 방광에 힘을 주고 "시"라고 쓰네
강물을 읽다
한때는 자잘 자잘 모여 있던
작은 물방울이었을 것이네
세상의 폭우를 견디며 스스로 살을 찌우고
家系를 이루고 이웃을 만들고
서로를 보듬고 다독이며 세상으로 가는
물길을 만들었네.
물이 마르지 않는 한 강은
이 땅의 젖줄이 되어 젖을 물리는 어머니처럼
노을 아래 밥 짓는 연기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촌락의 즐거운 풍경을 안고
세상의 아픈 상처를 쓸어내리네.
삶이란 강물이 서로의 어깨를 기대어 한 몸으로 흐르듯
누군가에게 거뜬히 어깨를 빌려줄 수 있는 평화를 아는 것이니,
살며 세상에 부끄럽지 않으려면
저 강물처럼 얻어맞으면서도 뻔한 끝을 갈 수 있는 것
모래알 하나 품지 않고 비우고 다시 비우고 갈 수 있는 것
앞서지 않고 길을 내주어도 공평하게 갈 수 있는 것
그 것을,
나는 水中 깊이 뛰어 들어 튼튼한 아가미를 열고
강물을 읽고, 뱉고, 하며 알았네.
공포 백작
빌딩이 갑작스런 테러로 주저앉는다.
아자작, 천지가 꺼지고
송사리 떼처럼 소름끼치는 번식력으로
날개뼈를 쫙 펼치며
자근자근 공포를 씹는 백작이
짜자 잔
재난 속에서 기어 나온다.
쓱 웃다 흘러 들어가는 입술 안으로
금니가 번쩍,
샘 레이미의 앙각(仰角)이
팡팡 터지는 금빛을
둥글게 둥글게 무삭제 원판 공포로
심의를 마친다
백작은 전후좌후를 가리지 않고
리도카인에 흠뻑 취해
물개처럼 왕성하게 애드립까지 보여주다
쿵, 떨어진다
그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공포를 공포로 입막음하는
사랑을 사랑으로 도둑질하는
필름 전부를 갉아먹어도 결국 토해내는
공포, 끝내 주인공이면서도
단 한 컷의 까메오로 미분되어지는
백 편이 한 편 같은 극영화 안으로
검은 망토 휘날리며
공포 백작은 나타났다 사라진다.
겨울, 포장마차
1.
그 사람 잊으려고
한女子 사랑했네
살아있는 것은 상처였네
나, 진눈깨비 내리던 날
발가락부터 시려왔네
사랑하지 않겠네
눈먼 말처럼 포장마차만 끌진 않겠네
그리하여,
끝끝내 꽃처럼 붉게 피어나겠네
고갈비 한 접시
잘 발라진 이별을 씹네
2.
내가 술에 뭉개져 쓰러지는 날은
하찮은 사랑 때문이기도 하지만
늪으로 미끄러지는 영혼의 발목을 잡아두기 위해서야
그래, 까짓 것 사랑이 별거니?
회화繪畵처럼 고급스런 절규는 아니어도 좋아,
한번 부둥켜안고 쓰러질 벽만 있다면
거기서 내가 찢겨 몽타주가 되고
벽화가 되고
후생後生 또 다른 벽의 염색체가 된다 해도
나는 행복하여, 톱날 같은 그리움을
종기처럼 쪽 짜내는 거야.
외투
그때부터 딱 맞았다
검정봉지처럼 헐렁하지 않고
골목처럼 좁지 않았다
푸덕, 철새가 날아가고
깃털 하나 어깨로 떨어졌다
깃털이 또 다른 깃을 세우며 상처를
다독였다
나는 아프지 않다고 중얼거렸으나
읊조림은 벌써 저수지다
몸을 띄웠다
물귀신이 되지 않으려면 숨을 고르고
무게를 줄여야 했다
물속에서
간신히 빠져나와
일본귀신처럼 납작 엎드려 갈대밭으로
우물을 옮겼다
그때 새소리 들린다
새떼를 가두려 두 팔 활짝 펴고
박쥐처럼 날개를 벌렸다
날개가 외투가 되었다
그때부터 딱 맞았다.
비를 몰다
그를 만나러 비를 몰고 간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혹독한 계절에 칼날이 서있어도
부서지듯 이데올로기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의 눈빛에 가라앉은 실오라기를 풀기 위해
아슬아슬하게 단추를 풀고, 빨치산처럼 숨어 보았다
살얼음처럼 쩍쩍 갈라지는 기억을 피하여
먼 남반구까지 도망와 한 사발의 라면을 삶는다
후루루 면발이 넘어간 뒤
이빨에 낀 고춧가루도 상처인가 싶어
습관적으로 이쑤시개를 건넨다
곪아도 딱지 끼지 않은 몽유병으로
밤마다 리비도를 찾아 헤멘다
환절기 아이 울음소리가 마른 잎새 한 줌으로
콜록 콜록 상투화되는 건조한 오후,
얼마나 사랑이 가벼운 계절인가
사랑해 주지 않아도 좋다
정부의 품에서 황진이처럼 놀아나도 좋다
상체에 약초를 바르고 붕대를 감아줄 날
나는 폭우를 데리고 돌아가리라
그의 가뭄으로
박수서
1974년 전북 김제출생
2003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마구간 507호’외 2편으로 작품활동 시작
2006년 시집 「박쥐」
제8회 시와창작문학상 심사평
회를 거듭할수록 응모작의 수준이 높아진단다. 편수도 많아졌다. 8회에는 전자우편과 우편발송을 모두 합하여 160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고마운 일이다. 당선작 없음이 잦아 8회까지 오는 동안 세 분밖에 선정하지 못한 전례가 있음에도 애정 어린 관심을 보여주신 모든 투고자에게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심사평 대표집필을 맡은 김에 이 부분에 대한 해명을 해야겠다. 빈번한 ‘당선작 없음’에 가장 큰 책임은 바로 이 문학상의 1회 수상자인 필자에게 있다. 발행인과 필자 사이에는 두 가지 약속이 있었다. 첫째, 어설프게 메이저 문학상 행세를 하지 말자였다. 수준이 올라가다 보면 언제가 남들이 먼저 알아주는 날이 올 터이니. 둘째, ‘당선작 없음’을 두려워하지 말자. 화려한 경력을 지닌 투고자가 응모할지라도 아닌 것 아니다 하는 태도를 굳게 지키자. 이 두 가지 약속이 반타작 수상이라는 오점 아닌 오점을 남겼다. 독자와 투고자의 혜량을 빈다.
본선에 오르지 못한 작품들에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고 한다.
1. 투고작의 수준이 고르지 못한 경우이다. 30편이 넘는 작품으로 물량공세를 펼친 이들 가운데 많았다. 시를 쓰게 하는 영감이라고 해서 모두 가치가 있는 건 아니다. 어떤 영감은 기꺼이 버릴 줄도 알아야 한다.
2. 상투적 어휘를 남발하는 경우이다. 아무리 참신한 시상이라도 표현이 관용과 상투를 벗어나지 못하면 성공할 수 없다.
3. 충분히 함축할 수 있는 곳을 주저리주저리 풀어 쓰는 경우이다. 시의 미덕은 난삽한 수다가 아니라 응집된 힘이다.
4. 빛나는 이미지를 낳고, 그 사이 또는 그 끝에 시인이 해설조로 언급하는 경우이다. 이러한 해설은 이미지의 광채를 더럽히고 갉아먹는다. 연극이 진행 중인데 연출자가 자꾸 무대에 뛰어올라 관객에게 해설을 하는 격이다.
5. 잘못되거나 편협한 지식 위에 발상의 줄기를 세우는 경우이다. 시를 잘 쓰겠다고 시만 읽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보이다. 공부는 넓고 깊을수록 좋다. 한국시의 지평이 인문학은 물론 과학, 의학, 심리학, 우주과학 등으로 넓어지기 바란다.
본선에 오른 이는 김*영, 박수서, 신*근 안*빈, 한*수 이상(가나다 순) 다섯이다.
김*영은 시의 대상을 고르는 시선이 매우 따뜻하나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시다운 긴장을 잃고 짧은 수필로 내려앉는 좋지 않은 버릇이 있다. 신*근은 실험정신이 돋보이고 주목할 만한 세계를 지녔다. 하지만 시선의 거리를 유지하여 긴장감을 이어가지 못하며 논리의 전개에도 유치한 기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안*빈은 아직 자기 내면의 소리를 찾기 이전으로 보인다. 시상 전개에 활달함이 부족해 전반적으로 답답한 느낌을 준다. 한*수는 신중하고 진지하나 잔소리가 많다. 구석구석 빤한 발상으로 스스로 발목을 붙잡는다. 기계적으로 번역한 글에서 보이는 번역문체(특히 의존명사 ‘것’의 과다)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반드시 시정해야 할 좋지 않은 버릇이다. 박수서는 몹시 근면한 시인 같다. 언어를 정제하는 솜씨가 만만치 않다. 이번 원고는 일상에서 끌어낸 소재를 다룬 시편을 고른 것 같은데, 다른 소재를 다룰 때의 모습도 보고 싶다. 시에 실험이 너무 없음이 아쉽다. 다른 시인들과 차별화된 모습이 부족함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부분이 아닐지.
전체적인 완성도를 기준으로 비교 우위에 있는 박수서를 선하기로 합의했다.
크건 작건 문학상 수상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운명이 그를 채근하는 신호임을 명심해 주기 바란다. 투고해주신 모든 분들께 거듭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하는 바이다.
심사위원: 양영길, 임정일, 유용선(대표 집필)
당선소감
돌아오지 않았다. 진작 내방에서 날려 보낸 새는 가슴 안으로 다시 오지 않았다. 새가 없는 날들은 가슴이 아팠다. 술을 끊어보기도 하고, 미친 소처럼 머리를 박듯 헉헉거리며 마셔보기도 했다. 깨달음은 술이 시가 되지 않는 다는 것과 술이 새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뿐 아무것도 없었다. 살면서 나는 자꾸 시에게 미안해졌다. 시에게 상처 주지 않으려 손을 놓고 싶지만 너무 가슴이 아팠다. 여러 번 시와 등지고 떠나려 했지만, 젊은 날의 추억이 이명처럼 울었다. 이제, 시가 내게로 와서 어깨를 다독인다. 튼튼한 말 한 마리 몰고 와 나를 태운다. 넓은 초원을 달리고, 오늘 밤부터는 시와 뜨겁게 연애하는 환상몽만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부족한 시를 選해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리며, 시의 끈을 놓지 않게 길을 열어주심에 더욱 감사드린다. 오늘 저녁은 사랑하는 딸들과 떡갈비라도 한점하며 기쁨을 꼭꼭 씹어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