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 여수항 멸치잡이배 / 이병일
어질어질한 물 그늘이 스며오듯이
꽃나무들같이 번져오는 것들이 있다네
흰빛으로 밝게 저무는 것들이
멀리서 뒤척이며 떠밀린 멀미를 부른다지
그 희끗한 것들이
그 희끗한 것들이
바다의 색채마저 바꿔놓을 때
멸치잡이배는 푸른 고래의 입이 되어
아가리 가득 반짝이는 빛을 담고 있다네
무늬가 희고 푸르고 희고
그러나 고래의 눈엔 빛처럼 꿈틀거리는
섬세한 잔가시나무를 가진 것들을
바다로부터 잡아 올리고 있다네
해질녘부터 그날 새벽까지
꺼끌꺼끌 잠을 털고
더러운 손으로 그물을 길어 올리는, 그러나 고래의 탈을 쓴
여수항이 멸치잡이배를 오밀조밀 풀어놓고 있다네
[우수상] 장군의 섬 / 김형미
- 장군도*
붉은 꽃이 지자
바람은 몸을 비틀었다
뒤를 버려야 앞으로갈 수 있는 목숨의 길
두려움의 꽃대는 강력하여
베어내는 칼끝이 그믐처럼 휘었다
구걸하는 것은 목숨이 아니라서
쓰라릴수록 눈물은 단단해졌으므로
설움을 뭉쳐 목책을 쌓았다
꽃피는 바다를 지키는 일이라면
물속인들 꿈속인들 쌓지 못할 성이 있으랴
사시四時와 더불어 바다의 초입에서
풍찬노숙을 견디는 장군의 섬
저 만치 홀로 피안에 들고
벌어진 기억사이로 해마다 봄은 꽃을 불러
슬픔의 간격을 메우고 있다
* 전라남도 여수시 중앙동에 있는 섬
[가작] 다시 햇살이 된다 / 함영옥
- 향일암에서
어제 저녁이었던 아침은
향일암에선 다시 햇귀로 뜬다
계단이 지어 놓은 돌틈을 밟으며
햇살은 맨 먼저 법당 앞을 기웃거린다
간절함은 펄펄 뛰는 바다를 재운다
가슴이 잦아든다
그리움이 찾아온다는 기별이다
여기저기서 파도가 뒤척일 때면
나는 향일암으로 돛을 올린다
수평선조차 아득한 소용돌이 속에
배 한 척 띄우면
모난 세상은 누그러지고
채워지지 않는 구석들
만선이 된다
파도를 일으키는 건 언제나 바위였다
그러나 수천 년도 넘게 부대끼며 살아내서
바다를 다독이는 것도 바위였다
밀물로 몰아쳐 어쩔 줄 모르던 하루도
그냥 못이기는 척 썰물을 따라 나선다
바다 물결이 젊은 숨결로 들어 올리던 아침
이제 어둠은 졸음 겨워도 좋다
두 다리로 닻을 내려도 좋다
[심사평] 다도해 건너는 동백
해양문학이라고… 익히 들어왔지만 선자(選者)로선 이렇듯 실무적(?)으로 ‘해양’을 접해보긴 처음이다. 예심을 거쳐 선자에게 넘어온 시 작품은 모두 60여 명의, 3백 여 편이었다. 그야말로 시가 펼쳐 보여주는 아름다운 여수 바다였으며, 만 파도를 헤쳐 나온 사람들의 굳센 삶의 내용이 장관이었다.
해양을, 여수를 사랑하는 이들의 귀한 시편들 중 1차, 2차에 걸친 속독으로, 다시 한 차례의 정독으로 다음과 같이 8명의 작품을 우선 선정하였다. 즉, 7번의 「春 夏 秋 冬」 등 9편, 9번의 「장군의 섬」 등 5편, 15번의 「금오도」 등 6편, 32번의 「소리도 해녀민텔」 등 5편, 45번의 「다도해 건너는 동백」 등 10편, 69번의 「게놈프로젝트」 등 6편, 70번의 「물 위의 산」 등 5편, 71번의 「푸른 뿔」 등 8편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위에 열거한 작품(시인)들 중 다시 7번, 15번, 32번, 69번, 70번, 71번의 작품들은 또 다음 기회를 보기로 하고 제외하였다.
7번의 경우,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로 나눈 여수의 풍광과 「여수의 맛」을 소개하고 자랑하는 등의 ‘기획’이 돋보이긴 했으나 시대적으로 많이 뒤처지는 언어감각과 시적 완성도가 문제였다. 15번의 작품에 대해서도 7번과 같은 내용의 지적을 하고 싶다. 그리고 32번의 경우 착상은 기발한 데가 있으나, 그것을 온전히 소화시켜 형상화해내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었다. 그것은 어떤 조급증이나 지나친 자신감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으니, 앞으로도 모쪼록 유념하시기 바란다. 69번의 경우 작품 「게놈프로젝트」에서 불필요한 언어유희를 즐기고 있는데, 진정성에 ‘트러블’이 생기기 십상인 그 점 선자로선 결코 달갑게 평가해줄 사항이 아닐 것 같다. 70번의 작품 「물 위의 산」이 함께 보내온 다른 작품에 비해 어느 정도 성과를 나타내고 있으나, 그 외 작품들은 좀 더 가차없는, 그러면서도 주도면밀한 퇴고 과정을 거쳤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리고 71번에겐 32번에게와 같은 지적을 하고 싶다. 언어운용 등에서 자신감이 지나쳐 거기에 가려진, 정작 자신만이 보지 못하는 ‘독자의 불만이나 이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러 고심 끝에 53번의 「다시 햇살이 된다」 등 5편, 9번의 「장군의 섬」 등 5편, 「여수항 멸치잡이배」 등 10편, 이렇게 모두 세 시인의 15편의 작품을 ‘당선작(가작, 우수작, 대상)’ 군(群?)으로 결정했다. <가작>을 차지한 53 번의 경우 대상을 두고 서둘러 자아도취하거나 ‘쫄지 않고’ 끝까지 차분하게 관찰하는 소중한 장점을 가졌다. 이 점 앞으로도 잘 살려나가시길 바란다. 단, 언어가 지나치게 소박한 것 같으니, 앞으로 열심히 잘 극복하시기 바란다. <우수작>을 거머쥔 9번의 경우 작품 「장군의 섬」이 참으로 ‘우수’했다. 『붉은 꽃이 지자/바람은 몸을 비틀었다//뒤를 버려야 앞으로 갈 수 있는 목숨의 길//두려움의 꽃대는 강력하여/베어내는 칼끝이 그믐처럼 휘었다』 감각적이고도 서늘한 사유를 지닌 이 시가 그러나 ‘동봉’해온 다른 시들을 ‘작품성’ 쪽으로는 전혀 견인하지 못했다. 다만 「장군의 섬」 1편이 나머지 작품들까지 ‘우수’하게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작품 간의 편차가 심한 편이다. 앞으로 한 편, 한 편, 시를 쓸 때마다 한 마디, 한 마디도 놓치지 말고, 그야말로 ‘절차탁마’하시기 바란다. 거기에 비로소 진정! 시 쓰는 기쁨이 있을 것이다.
선자가 마침내 당선작으로 뽑은 작품은 45번의 시, 여수항 멸치잡이 배」이었다. 그리고 ‘동봉’해온 시들, 즉 「다도해 건너는 동백」 「어부림, 테트라포드」 「여수항을 위한 찬가」 「 「쇄빙선 일기」 등의 작품이었다. 45번이 보내온 작품엔 드넓은 해양이, 여수 앞바다가 참 많았다. 그런데, 그리하여 45번은 45번의 작품들끼리, 그러니까 위에 적은 45번의 작품 5편끼리 저들 앞자리를 두고 다퉜던 것 같다. 그만큼 45번의 작품은 그 수준이 고르다는 이야기이다. 『흰빛으로 발게 저무는 것들이 / 멀리서 뒤척이며 떠밀린 멀미를 부른다지 / 해질녁부터 그날 새벽까지 꺼끌 꺼끌 잠을 털고』 『눈뜨고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벼랑이 내게 있어//바다에게 재갈 물린 뚱뚱한 침묵으로 떠오를 때!』 『항해를 시작하는 아일랜드 행, 선장은 먼 바다가 침묵과 절규로부터 시작된다고 믿는다』 이렇듯 45번의 몇 몇 작품에서 몇 구절 뽑아봤지만 일정한 톤의 목소리가 감각적이면서도 안정감을 보이고 있어 좋다. 그러나 45번 역시 절차탁마가 부족한 것 같다. 군데군데 허사와 군더더기가 보인다. 뼈를 깎듯 스스로 해소해야할 일이다.
상은 물론, 칭찬이다. 당선자 분들 오늘 마음껏 춤 춰도 좋겠지만, 이 지면에 활자화된 자신의 시, 다시 한 번 찬찬히 읽어보는 시간도 참 소중하고 유익하리라 믿는다. 축하드린다.
문인수
출처 : 신춘문예공모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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