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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마을이 설원이 되는 동안 / 이예진

 

금값이 올랐다

언니는 손금을 팔러갔다

 

엄마랑 아빠는 이제부터 따로 살 거란다

 

내가 어릴 때, 동화를 쓴 적이 있다 내가 언니의 숙제를 찢으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언니도 화가 나서 엄마의 가계부를 찢었고 엄마는 아빠의 신문을 찢고 아빠는 달력을 찢다가, 온 세상에 찢어진 종이가 눈처럼 펄펄 내리며 끝난다

 

손금이 사라진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집에 남고 싶은 것은 정말로 나 하나뿐일까? 언니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더는 찢을 것이 없었다 눈이 쌓이고 금값이 오르고 검은 외투를 꽁꽁 여민 사람들이 거리를 쏘아 다녔다

 

엄마는 결국 한 돈짜리 목걸이를 한 애인을 따라갔지 아빠는 한 달에 한 번 서울에 오겠다고 했다

 

따로 따로 떨어지는 눈과

따로 노는 낡고 지친 눈빛을

 

집이 사라지고 방향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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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소화되지 않는 '선천적 슬픔', 그것들이 있어 펜을 듭니다

 

글을 쓰면서 이 순간이 오길 기대했는데, 막상 때가 되니 어떤 말도 서툴고 어색한 것 같습니다. 시를 쓰는 이유에 대해 고민한 지 수년이 지났습니다. 저는 한글날에 태어났으며 돌잡이로는 연필을 잡았습니다. 그게 제가 시를 쓰는 이유가 될 수 있을지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지웠다 쓴 문장들이 쌓여서 집을 세우고 가족을 만들고 사람이 되는 과정은 즐겁기도 괴롭기도 했습니다. 여러 사건들이 있었고 그걸 해결하기 위해 버둥대는 저와, 우리가 있었습니다.

 

나의 언니들 중 한 명은 저를 선천적 슬픔이라고 부릅니다. 아직도 몸 안에 소화되지 않는 것들이 있어서 펜을 잡는 것 같습니다. 하루는 꿈에서도 시를 썼습니다. 일어나서 그 문장이 날아갈까 봐 비몽사몽 옮겼습니다. 그날 카페에 앉아 있는데 저만 멈춰 있는 것 같았습니다. 문학을 계속하고 싶은 마음이 언젠가 현실에 잡아먹힐까 봐 두려웠습니다.

 

혼자서만 이 자리까지 온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소식을 듣게 될 때까지 도와주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어 오늘이 있는 것 같습니다. 많은 이름들이 생각나서 하나씩 호명해 봅니다. 저를 위해 적금도 들자고 약속한 두 언니, 재진과 미도, 김박예란과 친구들(다래 선주 길란) 지윤 나은 서영 유경 수많은 언니들이 있어서 지금의 선천적 슬픔을 견딜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함께 쓰던 태의와 산하 세실, 든든한 나의 꼬맹이들 다윤 유현 현경 나연 채영 수은 그리고 니은 받침이 즐거운 여자들 은진 세륜 윤진 민선 은영 우리 오래도록 쓰자, 애정하는 호짜 식구들, 9월의 예버덩 식구들, 대학원 친구들과 9기 콩자반 아이들, 도운과 현영 하령 덕분에 계속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찬, 내가 너의 방공호가 되어줄게.

 

영원한 애제자가 되고 싶은 영미와 하린, 어렸던 저를 단단하게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조차도 저를 믿지 못할 때 끝까지 확신을 준 동생 현정이와 하정이. 너희들의 언니라서 기뻐, 계속 쓸 수 있도록 도와주신 우숙과 재현에도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박상수 선생님, 남진우 선생님, 편혜영 선생님, 신수정 선생님, 안주철 선생님, 김언 선생님, 양근애 선생님 이영주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또 저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신 심사위원분들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앞으로도 계속 나아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심사평] 담담하게 펼친 일상의 세목들로, 가계·욕망·폭력의 민낯을 기록하다

 

새로운 시인의 작품과 대면하게 되는 순간이면 으레 의심을 품게 된다. 이 의심의 방향은 작품과 시인이 아니라 이것을 대하는 스스로를 향한다. 이제껏 내가 시라고 여겨왔던 것들을 되짚어보고 추궁하는 것이다. 불안과 함께 하지만 그렇다고 안도를 바라는 일은 아니다. 늘 내가 가진 관점이 보기 좋게 깨지기를, 그리하여 아프게 갱신되기를 원한다. 물론 이 모든 일은 함께 쓰는 이가 아니라 함께 읽는 이로서 이뤄지는 것이다. 이번 심사에 임하는 위원 모두가 이러한 마음이었다.

 

'나의 마을이 설원이 되는 동안' 외 4편을 투고한 이예진 씨를 202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자로 정한다. 시인의 언어는 선명하고 정직하다.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진술들을 차곡차곡 쌓아 어느새 의무도 당위도 필요 없는 자유로운 세계를 만들어낸다. 아울러 시인은 파편화된 삶의 장면들을 그러모아 큰 서사를 만들어내는 데 능숙하다. 불필요한 제스처 없이 일상의 세목들을 담담하게 펼쳐내면서도 그 안에 가계와 욕망과 폭력 같은 유구한 것들의 민낯을 기록한다.

 

시인이 창출해내는 이미지 역시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사유와 관념을 단단히 비끄러매면서도 일순간 낯선 세계의 이면을 보여주는 지점들이 인상적이었다. 부디 앞으로도 사유와 언어, 서사와 이미지 사이를 마음껏 횡보하며 시작(詩作)해주기를 당선자께 바란다. 진정한 문학적 자유로움과 균형감이란 조심스레 살피며 걷는 일이 아닌 어떤 극단까지 나아갔다 돌아오는 길에 얻어낼 수 있는 것이니까.

 

시와 문학은 현실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순하게 응하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반하는 일에만 복무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살아가며 여전히 읽고 쓰는 일만 우리에게 남을 것이다. 낙선한 분들에게 마음을 다해 위로를 전하고 싶다. 아직 말해지지 않은 시와 살아낼 시간들을 열렬히 응원하는 마음도 함께.

 

우리는 또 어떤 새로운 시간을 마주하게 될까. 불안전하고 불완전한 세계에서 얼마나 많은 의심을 품어야 할까. 그러면서도 어떤 온전한 미감에 깨어지지 않을 삶을 기대야 하겠지. ‘신춘문예’. 계절만 벌써 새봄이다.

 

- 심사위원 : 이수명, 김민정, 박준(대표 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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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볼트 / 오산하

 

 

눈을 감았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국가를 떠올리면서 습한 냄새를 맡으면서 안개 속으로 뛰어들면서 길거리의 새를 하나둘 세면서 걸어

 

눈이 마주쳐도 날아가지 않는 새 발로 바닥을 밟아도 도망가지 않는 새 까만 눈동자를 쳐다보다가 넘어졌어 까맣게 피멍이 들었다

 

하루가 지나서 생일 축하해 문자를 받고 시차가 생겼어 하루 늦게 생일을 맞이하면서 종말을 말하는 사람들과 선물 받은 오르골을 돌리면 모르는 노래가 나온다 노래는 언젠가 끝나겠지

 

전쟁과 전쟁이 끝나고 난 후 언제가 가장 끔찍할 거 같아

 

라는 노르웨이에 가고 싶대 거기에 자신을 묻을 거라고 했어 나는 Green DayHoliday를 들으면서 반역자! 반역자! 죽어버린 사람들의 피가 흘렀어 아 곧 종말이구나 그래서 라는 노르웨이에 가고 싶구나

 

두 개의 음 두 개의 박자 머리 위로 떨어지는 15층의 사람과 다리 밑으로 떨어지는 차 사람의 바싹 마른 피부와 솟구칠 힘도 없는 피 물 물 물 전쟁이 끝나지 않은 곳에 다 녹아버린 얼음의 흔적과 끈적한 더위가 있어

 

라는 붙잡아도 부서진다 길을 걷다가 쪼그려 앉아서 새를 가만히 쳐다봤어 새가 내 눈알을 파먹으려고 해도 가만히 있었어 계속 굴러가다가 영원히 남도록 그곳은 마치 도서관 같다

 

추워 라는 시드볼트로 들어가 문을 닫았어 이건 한 세기 전 살아있던 사람의 눈알이구나

 

계속 걸었어 뚝 뚝 흘리면서 걸었어 끊어진 다리 뒤집어진 배 치지 않는 파도 하늘에서 떨어진 새 검은 새 검은 눈동자 뽑힌 눈알 굴러가는 심장 굴러 떨어지는 법을 배운 나 깔깔 웃는다

 

 

 

 

[당선소감] "잠겨 있다고 믿었던 문을 어떻게든 열어보는 일"

 

어떻게 시작하고 끝맺어야 할지 모르는 날들이 많았습니다. 정말 이렇게 해도 되는 거야? 이렇게 써도 되는 거야? 스스로를 끝없이 의심하게 만드는 곳에서 작은 틈새를 찾아내는 일. 그 사이를 기어코 비집고 들어가려고 애써보는 일. 잠겨 있다고 믿었던 문을 어떻게든 열어보는 일. 작은 시작이 모이고 모여 큰 우리가 된다고 믿습니다.

 

저의 시를 읽어주는 사람들 사이에서 언제나 언어 하나를 던져주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모두들 제가 건네는 처음을 꼭꼭 씹어 주기를, 출렁이고 경계를 지우고 명명하고 다시 경계를 지우며 건넨 이야기의 다음과 그 다음을 만들어주기를 바랍니다.

 

계속 시를 쓸 수 있게 지탱해준 모든 분들에게 고맙습니다. 모두의 이름을 말해야하나 고민했습니다만 이름 부르기에서 오는 감사함이 전해지기를 소망해봅니다. 언제나 함께 해준 희빈, 서정, 은비에게 함께 시를 써준 태의, 예진에게 함께 웃어주는 정음, 지현, 선영에게 여성의 목소리를 전하기 위해 오랜 기간 전시를 준비한 여:2단 친구들에게 주말을 함께한 세원에게 기쁨을 함께 나누는 현지와 나의 가장 오랜 친구 희연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이 모든 함께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김은희, 오인호에게 가장 큰 기쁨을 나눕니다. 저를 가르쳐주신 모든 선생님들이 있었기에 쓸 수 있었습니다. 이 수상소감을 전할 수 있게 해주신 송재학 선생님, 김소연 선생님, 김상혁 선생님 감사합니다.

 

오래도록 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나와 당신과 우리의 이야기를. 문장 하나하나를 새기며. 내달리는 멋진 호랑을, 존재하는 여성인 라의 이야기를 들어 봐주세요. 계속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쓰겠습니다.

 

 

 

 

[심사평] "시류에 민감하면서도 그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개성을 보여주는 시"

 

본 심사평은 시의 어디어디가 부족하다는 식의 충고를 담고 있지 않다. 자기 작품에 관한 엄혹한 평가를 원하는 분도 있겠고, 적절한 지적은 실제로 창작과 퇴고에 도움이 된다. 다만 투고자에게 필요한 건 비판보다 응원이라고 믿는다. 계속 시를 써도 좋다, 이런 말을 누가 해주었으면 하고 바랐던 날이 내게도 있었다. 시가 나를 부른 적도 없고, 그래서 나 없이도 시가 행복하게 잘 사는 것 같아 싫고 무서웠다. 이번 심사평을 통해 당신들 없이는 우리 시가 별로 안녕하지 못하리라는 예견과 확신을 전하고 싶다.

 

'랠리'의 건조한 문체는 대상에 대한 무관심에서 비롯된 게 아니다. 한때 마음을 쏟았던 대상이 로부터 문득 동떨어져 존재하게 되었기에, 그렇게 어쩔 수 없거나 어쩌지 못하는 거리감이 건조한 문장 사이사이로 유출된다. '날개 뒤에는 근육이 있습니다' 4편은 한마디로 거침없다. 하지만 거침없는 중에도 시의 언어는 산만하지 않다. 넘칠 듯 넘치지 않게 제어되는 정념이 놀라웠다. '베네수엘라'는 강렬한 도입부와 여운 깊은 결구로 독자를 매혹한다. 이 작가는 자기 세계를 어느 정도 구축한 듯하다. 작품이 조금만 더 쌓이면 그가 좋은 시를 쓴다는 사실에 누가 토를 달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치카의 숲'은 앞으로도 손해를 볼지 모른다. 신인상 심사는 단정한 정념보다는 떠들썩한 감수성에 후한 점수를 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등단이라는 문턱을 넘고 나면 이처럼 넉넉한 분량에 담긴 유려한 문장이 외면당하는 일은 없다. 지치지 않았으면 한다. '스로디카즈' 4편은 수많은 소년소녀가 등장하고, 위악적인 정황과 대화가 난무하며, 엄청나게 수다스럽다. 당연하게도 몇몇 기성 시인이 떠올랐으나 그럼에도 투고자의 연작은 여전히 새로웠다. 이 새롭고 좋은 작품을 다른 지면에서 곧 만나리라 본다.

 

'시드볼트' 4편은 비참한 죽음과 살아남음에 관한 이야기를 일관되게 풀어낸다. 아포칼립스를 예감하고 노르웨이 시드볼트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린 와 종말에 남겨진(혹은 종말을 목도 중인) ‘, 어느 쪽이 살아남았는지와 상관없이 비슷하게 비참할 뿐이다. 삶과 죽음을 공평하게 끔찍한 것으로 만드는 저 압도적 절망감은 때로 산불, 때로는 깨진 도자기폭풍우로 형상화된다. 시인은 간신히 우연으로 살아가는 사람들”('폭풍우')로서 분명히 어떤 현실의 환유일 비극적 사태를 생생히 기록한다. 비슷비슷한 분위기를 지닌 투고작이 많았음에도 오산하 씨의 활달한 리듬은 단연 돋보였다. 시류에 민감하면서도 그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개성을 보여주기가 쉽지 않음을 알기에 더 믿음이 갔다. 심사위원단을 대신해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송재학, 김소연, 김상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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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명소가 없는 마을의 밤에 / 신이인

 

 

오리너구리를 아십니까?

오리너구리, 한 번도 본 적 없는

 

고아에게 아무렇게나 이름을 짓듯

강의 동쪽을 강동이라 부르고 누에 치던 방을 잠실이라 부르는 것처럼

 

나를 위하여 내가 하는 일은

밖과 안을 기우는 것, 몸을 실낱으로 풀어, 헤어지려는 세계를 엮어,

붙들고 있는 것

 

그러면 사람들은 나를 안팎이라고 부르고

어떻게 이름이 안팎일 수 있냐며 웃었는데요

 

손아귀에 쥔 것 그대로

보이는 대로

 

요괴는 그런 식으로 탄생하는 겁니다

부리가 있는데 날개가 없대

알을 낳지만 젖을 먹인대

반만 여자고 반은 남자래

 

강물 속에서도 밖에서도 쫓겨난 누군가

서울의 모든 불이 꺼질 때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알고 계셨나요?

기슭에 떠내려오는 나방 유충을 주워 먹는 게 꽤 맛있다는 거

 

잊을 수 없다

모두가 내 무릎에 올려두었던 수많은 오리너구리

오리가 아니고 너구리도 아니나

진짜도 될 수 없었던 봉제 인형들

안에도 밖에도 속하지 못한

실오라기

끊어낼 수 없는

주렁주렁

전구 없는 필라멘트들

 

불을 켜세요

외쳐보는 겁니다

, 이상해.

 

 

 

 

[당선소감] "너무 곱씹어 단물이 다 빠져버린 미래...빚을 다 갚은 기분입니다

 

나는 툭하면 이상한 애가 됐다. 초등학생 땐 이름보다 외계인이라는 별명으로 자주 불렸다. 중학교 담임 교사는 나 같은 애랑 잘 지내 주는 반 애들에게 선생으로서 고맙다는 말을 했었고. 고등학교에 올라가 자기소개를 하는데 누군가 이상해! 소리쳤다. 누구는 나한테 특이한 척하지 말라고 하고 누구는 내가 특이해서 좋다고 하고 누구는 남들처럼 지낼 수 없겠냐고 한숨을 쉬었다. 영문을 몰랐다.

 

어쨌든 나도 당신들처럼 살아 보이겠다고, 시 같은 거 다시는 안 쓴다고. , 나 평범하게 잘 사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보여주고 싶었다. 아무래도 실패한 것 같지만.

 

나는 시인이 될 수 없었다. 세상에는 그런 사람이 하나씩 있다고 생각했다. 될 것 같은데, 정말 될 것 같은데. 아는 사람 중에 제일 될 것 같은데 영원히 될 것 같기만 한 사람. 나는 그게 나라고 믿었다. 그걸 받아들였었다.

 

너무 곱씹어 단물이 다 빠져버린 미래가 찾아왔다. 기쁘지도 눈물이 나지도 않았다. 글쓰기를 그만두고 돈을 벌면서부터 내 감정은 존재를 참는 방향으로 단련되어오고 있었다. 빚을 다 갚은 기분, 아니면 받아야 할 돈을 다 받은 기분. 조금 들떴고 홀가분했다.

 

한때 이 자리에 제일 먼저 적으려고 했던 이름을 생각하고 있다. 메모장에 줄줄이 저장해 놓고 누구 선생님, 선배님, 사랑하는 누구 친구, 한 명 한 명 부르려 했던 이름들이 많았다. 지금은 그중 하나도 기꺼이 부르기 어색하다. 그런 사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모두에게 전하겠다. 시인이 되었어요. 고맙습니다.

 

저의 젊은 날에 함께해주셔서 기뻤어요. 우리가 쓰고, 배우고, 마시고, 사랑한 시간을 잊지 않을 겁니다. 끝내 이 말을 전할 수 있게 저를 이쪽에 세워주신 김소연 선생님, 장석주 선생님, 서효인 선생님께 감사드려요.

 

그리고 한 번 더 고맙습니다.

 

최고로 웃기고 올바른 사람인 서우주에게. 여전히 내 편인 김성은에게. 인생의 위로가 되어주는 이대휘에게. 정신여자고등학교의 편견 없던 선생님들에게. 여름이라고 불러달라는 멋쟁이들에게. 점례를 아는 친구들에게. 사랑하는 김미향, 신명균 씨에게. 내게 아직 남은 운이 있다면 모두 주고픈 신예지에게. 당신들이 있어서 난 좀 이상한 채로도 잘 살아 있다. 이 한국 사회에서.

 

나는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살 것이다.

 

 

 

 

[심사평] "완벽한 관리자와 특별한 난동꾼, 그 모두를 해내는 시"

 

개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개성 없는 사람은 없다. 사람은 각자의 고유성을 얼마간은 지니고 있으며 생활과 사유 곳곳에서 그 고유함은 어쩔 수 없이 드러난다. 숨기려 해도 얼핏 내비치는 사투리처럼, 감추려 해도 별안간 나타나는 표정처럼. 시는 나도 모르게 드러나는 개성을 서랍장 곳곳에 잘 수납하고 연과 행에 맞춰 잘 구획하는 관리자일지도 모른다. 혹은 반대로 가끔 얼굴을 비추는 고유성을 극대화해 아무렇게나 던져 버리는 난동꾼일 수도 있다.

 

심사에서는 완벽한 관리자와 특별한 난동꾼 중 하나라도 그 자리에서 나오길 바라게 된다. 관리자이면서 난동꾼이 될 수 있는 시인이 등장하길 차마 바랄 수는 없다. 그런 일은 잘 없으니까. 그 어려운 일이 올해 한국일보 신춘문예에서 일어났다. '작명소가 없는 마을의 밤'은 정돈되면서 어질러진 시였다. 익숙한 지명을 동원하고 친숙한 어투로 말을 건네어 귀를 붙잡아 두면서도 안에도 밖에도 속하지 못한/ 실오라기같은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정리된 채 구성된 이미지 속에서도 곳곳에 돌출하는 의외성이 시 읽는 재미를 더해 주었다. 지금의 시만큼 앞으로의 시 또한 기대된다. 기대하는 자의 설렘을 담아, 축하의 마음을 전한다.

 

함께 마지막까지 이야기한 작품은 ', 하고 열린 옷장', '언젠가 부하들은 반란의 내색을 비춘 적 있다', '한국어 감정' 등이다. ', 하고 열린 옷장'은 사소한 장면을 일시정지 상태로 만들어 더 이상 사소하지 않게 하는 미덕이 있었다. '언젠가 부하들은'은 유머러스하고 의의성 있는 진행이 돋보였다. '한국어 감정'은 언어와 언어가 부딪쳐 생기는 감각과 진폭을 그리는 주제 의식이 담백했다. 모두 당선되지 않을 이유보다 당선될 이유가 더 많았으나, 약간의 행운이 부족했던 것으로 오늘의 아쉬움을 갈음해주시길 부탁드린다.

 

당선자에게 다시 한번 축하의 말씀을 건넨다. 이것도 아니요, 저것도 아닌 세계 어딘가에서 역시나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것들을 껴안으며 써나가 주실 것이라 믿는다. 관리자가 될 것인가, 난동꾼이 될 것인가? 그런 생각할 겨를 없이 시는 당신을 끌고 어딘가로 갈 것이다. 그곳에서 만나면 좋겠다.

 

심사위원 서효인 시인, 장석주 시인, 김소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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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착하게 사랑하기 / 차도하

 

 

몸에 든 멍을 신앙으로 설명하기 위해 신은 내 손을 잡고 강변을 걸었다 내가 물비린내를 싫어하는 줄도 모르고

 

빛과 함께 내려올 천사에 대해, 천사가 지을 미소에 대해 신이 너무 상세히 설명해주었으므로 나는 그것을 이미 본 것 같았다

반대편에서 연인들이 손을 잡고 걸어왔다

 

저를 저렇게 사랑하세요? 내가 묻자

신은, 자신은 모든 만물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저만 사랑하는 거 아니시잖아요 아닌데 왜 이러세요 내가 소리치자

 

저분들 싸우나봐, 지나쳤던 연인들이 소곤거렸다

 

신은 침착하게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는 신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고 강을 보고 걷는다

강에 어둠이 내려앉는 것을, 강이 무거운 천처럼 바뀌는 것을 본다

 

그것을 두르고 맞으면 아프지만 멍들지는 않는다

 

신의 목소리가 멎었다 원래 없었던 것처럼

연인들의 걸음이 멀어지자 그는 손을 빼내어 나를 세게 때린다 

 

 

 

 

2020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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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시는 마스킹 테이프무엇이든 쓰겠다

 

기운이 나지 않아 바닥에 붙어있을 땐 나를 저주하는 사물들과 나를 응원하는 사물들이 싸우는 상상을 한다. 이 생각을 할 땐 늘 나를 저주하는 진영이 우세한 형상인데, 사실 승패는 나에게 달렸다. 내가 기운을 내면 나를 응원하는 사물들이 이기니까. 그럼 기운을 내어 잠을 자거나 수업을 들으러 간다.

 

이렇게 겨우 힘을 내어 살면 무엇이 되는 걸까. 무엇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지 않아서 죽지 않는 사람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자의식 과잉이라고 비웃음 살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생각한다.

 

무엇보다 나는 지금 죽기엔 아깝다. 글을 잘 쓰니까. 글을 잘 써서 발표도 하고 책도 내고 어린 내가 그걸 읽고 오래 간직하는 상상을 한다. 상상은 자유니까. 누가 이걸 하나하나 뜯어보며 아니라고, 그게 죽지 못할 이유는 못 된다고 따져도 어쩔 수 없다 나는 살 거니까.

 

시 당선 소감을 써야 하는데 죽느냐 사느냐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 보면, 나에겐 이게 비슷한 이야기인가보다. 사실, 시는 그냥 뜯어 쓰는 마스킹 테이프일지도 모른다. 모르겠다. 시가 무엇이든 상관없다.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다. 무엇이든 쓸 거라는 말이다.

 

고마운 사람들이 많다. 이름을 하나씩 부르고도 싶지만 나는 이름을 안 믿기 때문에 이렇게 쓴다. 저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같이 수업 듣고, 책과 술, 밥을 사주고, 바다에, 놀이공원에 놀러가고,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기억하고, 내 옷, 내 양말, 노래 취향에 영향을 끼친 분들 감사합니다. 내가 힘들 때 쪽지를 전해준 친구 고맙습니다. 요즘은 어떻냐고 넌지시 물어봐주어서 고맙습니다. 내 시를 꼼꼼히 읽고 어떤 부분이 좋은지 어떤 부분이 아쉬운지 말해준 사람들 고맙습니다. 뽑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고양이를 사랑하고 그림을 잘 그리는 중년 여성에게도 감사합니다.

 

잘 살고 잘 쓰겠습니다. 다 쓰고 나니 둘은 다른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둘 다 잘해내고 싶습니다.

 

 

 

 

[심사평] 단단한 세계를 뒷받침하는 천진한 어투

 

다락방에 몇 년은 묵힌 것 같은 누르스름한 종이에 볼펜으로 눌러쓴 시가 있었다. 잘 풀리지 않는 가정사의 고달픔과 그럼에도 살고자 하는 의지를 쓴 것이었는데, 시보다는 일기에 가까웠다. 당연히 박스에 다시 들어갈 원고였지만 어쩐지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다. 시가 되든 안 되든 쓴다는 행위의 거룩한 순간을 가늠해보는 것이다. 그 중에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순간은 없을 것이다. 이번 신춘문예에 시를 보낸 모든 이들이 이미 시인이라 믿는다. 그분 중에서 한 명의 시인을 공식적으로 호명할 수 있어 두렵고 영광이다. 안타깝고 기쁘다.

 

문학상이나 신춘문예 혹은 각종 지원 사업 심사위원은 수많은 응모작 중에 당선작 일부를 골라야 하는 기능적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들이지 최근의 문학 흐름을 짚는 선지자나 응모작의 전반적 수준을 평가하는 심판자가 아니다. 누군가는 하긴 해야 하나 마땅한 이가 달리 없어 그 자리를 꿰찬 것이라 생각함이 옳다. 그러니까 심사위원은 각자의 양심과 문학관에 따라, 심사를 최대한 잘하면된다. 내가 무언가 놓칠 수 있다는, 겸손함에서 비롯된 불안감이 그 심사를 잘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차도하 씨의 침착하게 사랑하기4편이 불안감을 해소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골똘하게 보냈던 긴 예심 시간과 달리 본심에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만큼 탁월했다. 다소 작은 세계를 말하려는 듯한 제목과는 달리 쉬이 접근하기 어려운 주제를 다루는 용기가 돋보였다. 천진해 보이는 어투가 단단한 세계를 뒷받침하고, 너른 시선이 가벼운 문체를 단속했다. 이 같은 특성을 묶어 범박하게도 새로움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리라. 무엇보다 기성 시인 누구도 쉽게 떠올릴 수 없게 한 개성의 충만함이 눈부셨다.

 

온몸의 외국어5편을 보내준 고명재씨와 모든 끝은 둥글다4편을 보내준 윤혜지씨의 원고도 함께 논의했다. 충분한 시적 성취가 엿보였으나, 구태여 발견한 작은 이유들로 당선작으로 선하지는 못하였다. 어디에선가 다시 이름이 불릴 날이 있으리라 믿는다. 차도하 시인께 축하의 마음을 건넨다. 찬란한 순간의 공간에서 영원한 고통의 세계로 넘어온 것을 환영한다. 이제 시작이니, 크게 숨을 들여 마셔도 좋겠다.

 

심사위원 박상순 시인, 김민정 시인, 서효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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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저렇게 걸어오지 않는다 / 노혜진

 

 

예순두 살에 뽀얀 속살입니다 시야각으로도 알아볼 수 있습니다 다 벗고 만날 수 있고 온몸을 훑고도 괜찮아요 엄마는 때수건과 우유를 손에 들고 옵니다 우리는 깨끗해집니다

 

두꺼운 발톱과 무좀을 병이라 부릅니다 탕의 수증기는 소리와 이야기를 불러 모읍니다 그 발톱으로 네일 숍에 왔대동료들이 웃었습니다

 

회사에서는 엄마 얘기만 합니다 아빠 얘기만 하는 동료에게 묻지 않았습니다 엄마가 없니?” 질문은 되돌려집니다 알고도 모르는 것들을 생각합니다

 

동료를 엄마라고 불렀습니다 아차 하면서 재채기처럼 웃었습니다 자꾸 새어 나오는 웃음만큼 웃음거리들이 쉽게 배어나오는 회사입니다 제가 오늘 재채기를 했던가요

 

바디 클렌저에서 수영장 냄새가 납니다 미즈노 루리코의 헨젤과 그레텔의 섬이 떠오릅니다 카페 화장실 앞에서 스콘을 먹어야 했어요 열고 닫히는 문은 섬이었다가 여름이다가 코끼리였습니다 삼십 분 동안 읽었는데요 시 한 편을 오래 보았습니다

 

매일 달라지는 책을 동료에게 소개하지 않았습니다 쓰는 몰입을 알 리 없어요 동료가 농담을 던졌습니다 등단을 못 하겠구나엉뚱한 발언을 잘 하는 저의 별명은 소설가입니다 시를 씁니다말하지 않아요 동료들은 알고도 모르는 것일까요

 

친구들은 어때요?” 하면 엄마가 떠오릅니다 저의 벗입니다 같은 원 안의 피자를 먹고 다른 날 같은 구두를 신습니다 즐거운 시간은 떼어 두었다가 서로에게 선물합니다 기억이 풍성해지면 쪼그라드는 현재들 진짜 벗들은 기억의 원 안에 있어요

 

항공사가 부도 직전이라는 소문이 돕니다 엄마는 키위를 반으로 자릅니다 포도를 씻고 귤을 깝니다 키위의 씨만큼 늘어나는 의혹들 과일 열한 통을 들고 출근합니다 회사일까 집단일까 궁금합니다 급여가 들어오지 않았으니 과일은 엄마에게 달아 두는 외상입니다

 

조금만 당돌해집시다 구호가 필요합니다 동료는 잘난 척을 하다 동료들에게 혼쭐이 났습니다 저도 잘난 척의 기질이 있습니다 그러니 많이는 말고 조금만요

 

늙어도 우리는 무섭습니다 엄마는 겁보입니다 매일 밤이 오다니 엄마는 차를 몰고 저를 데리러 옵니다 보조석의 방석은 꽃무늬입니다 여성이 되기 위해 꽃을 사들이고 무늬를 사들입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우아합니다 스무 살에 꾸었던 꿈의 일부를 이룬 것 같아요

 

 

 

 

2019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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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시가 드디어 말을 걸어 오네요"

 

눈이 내렸습니다. 택배 상자를 여니 작은 담요 두 개에 싸인 프린트기가 있습니다. 상자 몇 개로 구성된 저의 이삿짐, 그 마지막 상자가 도착했나 봅니다. 급히 요청한 것은 아니니 보내는 사람 자유의 선택이었을, 덤인 것 같아요. 이 프린트기로 출력을 했고 걸었고 무인우편창구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믿어지지 않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오늘을 보존하고 싶습니다. ‘잠은 어떻게 자는 것이었더라?’ 잠이 올 것 같지 않습니다.

 

김소연 선생님을 만나 시를 쓰던 시간 너무 소중합니다. 이만교 선생님을 만났고 시를 알게 된 그 여름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함께 공부하던 곳이 그리울 때면 이 기쁜 소식을 알리는 상상을 했습니다. 정말 이루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제 시를 다정하게 토닥여 주신 심사위원님들과 한국일보에 깊은 감사를 전합니다.

 

시를 말하고 시로 놀던 문우들 즐거웠어요. 또 만나요. 소식을 전하지 못했던 친구들, 지인들 보고 싶었습니다. 친척과 특히 따뜻한 이모 감사해요. 쓰는 것에 대해 가끔 간결한 말로 지지를 보내준 동생아 고마워. 순수했던 아빠에게는 언어가 아닌 언어로 말하겠습니다. 독특한 벗, 엄마에게 흘러넘치는 사랑을 드립니다.

 

지금쯤 11일이 제게 와 주어 고맙습니다. 주로 일하고 남은 시간을 엮어 읽고 쓰고 휴식하던 시간들. 빠른 결과를 바라기도 하는 세상에서 아주 천천히 쌓여 가는 문학의 여정에 대한 이해를 바라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묵묵하겠다는 마음으로 계속 썼습니다. 이상하게 끝날 것만 같던 저의 이상한 시간들이 이상한 것만은 아니었나 봅니다. 말 못하는 시가 수년 동안 침묵을 견디다 겨우 저에게 한 문장을 건넨 것 같은 사건입니다. 시도 그간 저에게 무척이나 말 걸고 싶었던 것 맞죠? 영원히 읽으면서 영원히 쓰고 싶습니다.

 

 

 

 

 

[심사평] "모두가 충분히 시라고 부를 만한 진짜 시"

 

심사위원의 손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않은 작품은 다음 3편과 같다. 노혜진씨의 엄마는 저렇게 걸어오지 않는다’, 김겨울씨의 형벌’, 정유소씨의 외나무다리’. 정유소씨의 작품은 일상의 균열을 끝내 잡아내는 관찰의 힘이 돋보였다. 그러나 시 전반에서 보이는 단단한 진술이 어떤 부분에 있어서 조금은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느 지점에서는 예상된 시의 흐름을 살짝 비틀어보는 엉뚱함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김겨울씨의 작품은 상상의 영역에서 독특한 영토를 이미 확보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에 비해 지나치게 평면적인 제목은 시를 보는 이의 자세조차 느슨하게 만들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제목도 시에 포함된다. 아주 유력한 방식으로.

 

당선의 영예는 노혜진씨에게 돌아갔다. 신춘문예 발표 시즌마다 들리는 비슷한 이야기를 노혜진의 작품은 정면으로 돌파하고 있다. 요즘 시가 시답지 않게 길다, 최근 시는 언어를 정제하지 못한다, 산문시의 경향이 한국시를 망친다 등등. 그런데 과연 그러한가?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일인가? 노혜진의 시는 분명하게 아니라고 답하는 듯하다. 가령 여성이 되기 위해 꽃을 사들이고 무늬를 사들입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우아합니다라는 다소 소설적인 문장은 시에 대한 평균적인 인식에 비해 길게 나열된 엄마의 특정되지 않은 성격으로 인해 그 의미가 넓어진다. 그렇게 우아해진 부분 외 나머지 것들을 더 궁금하게 한다. 나는 이런 전개를 시적이라 부르지 않을 자신이 없다. 경쾌한 발성, 산문 형식을 지탱하는 관점의 전환과 독특한 리듬감, 페이지 전반을 아우르는 페이소스이 모두가 충분히 이미 시라고 부를 만했다. 요즈음 시가 아니고, 진짜 시.

 

이번 심사는 예심과 본심이 함께 진행되었다. 시인에게는 전부라 할 수 있는 자신의 취향을 근거로, 다른 이의 취향을 설득하는 작업을 더욱 치밀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시와 시, 시인과 시인이 서로에게 육박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이 시간을 통하여 새로이 등장한 노혜진 시인의 손을 잡고, ‘시라는 것을 두고 벌이는 유구한 전쟁의 복판을 함께 걸어가도 되겠다 싶다. 앞으로 그가 이룰 겸허한 돌파를 응원한다.

 

심사위원 : 황인숙ㆍ김민정ㆍ서효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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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 이원하

 

 

유월의 제주

종다리에 핀 수국이 살이 찌면

그리고 밤이 오면 수국 한 알을 따서

착즙기에 넣고 즙을 짜서 마실 거예요

수국의 즙 같은 말투를 가지고 싶거든요

그러기 위해서 매일 수국을 감시합니다

저에게 바짝 다가오세요

혼자 살면서 저를 빼곡히 알게 되었어요

화가의 기질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매일 큰 그림을 그리거든요

그래서 애인이 없나봐요

나의 정체는 끝이 없어요

제주에 온 많은 여행자들을 볼 때면

제 뒤에 놓인 물그릇이 자꾸 쏟아져요

이게 다 등껍질이 얇고 연약해서 그래요

그들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사랑 같은 거 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제주에 부는 바람 때문에 깃털이 다 뽑혔어요,

발전에 끝이 없죠

매일 김포로 도망가는 상상을 해요

김포를 훔치는 상상을 해요

그렇다고 도망가진 않을 거예요

그렇다고 훔치진 않을 거예요

저는 제주에 사는 웃기고 이상한 사람입니다

남을 웃기기도 하고 혼자서 웃기도 많이 웃죠

제주에는 웃을 일이 참 많아요

현상 수배범이라면 살기 힘든 곳이죠

웃음소리 때문에 바로 눈에 뜨일 테니깐요

 

 

 

 

2018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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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네팔에서 소원이 이뤄졌네요

 

한 사람보다 한 장면이 먼저 떠오릅니다. 지난겨울, 저는 네팔에 있었어요. 바람이 시작되는 곳 묵티나트에서 포카라까지 산을 타고 내려오면서 야크를 키우는 집에 들어가 질 좋은 치즈를 사 먹기도 하고 11월에 핀 꽃들을 구경하면서 걷는 여행이었죠.

 

매일 산에 있었기 때문에 정확한 위치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마지막 날이었을 거예요. 길을 안내해주던 네팔인 수잔이 일행 모두를 불러 세웠어요. 수잔은 5분 뒤에 재미있는 것을 알려줄 테니 각자 서 있는 위치에서 돌멩이 하나씩을 주우라고 했어요. 우리들은 각자 마음에 드는 돌을 하나씩 주웠습니다. 5분 후 도착한 곳은 경사가 가팔라 사람이 내려갈 수 없는 곳이었어요. 저 멀리에 반토막난 나무가 있었고 댕강 잘려나가 평평해진 부분에는 여러 크기의 돌들이 쌓여있었답니다. 수잔은 돌을 던져서 그 부분에 안착시키면 소원이 이루어질 거라고 말했어요. 우리들은 차례차례 돌을 던지기 시작했어요. 그중 저만 안착에 성공. 그대로 눈을 감고 시인이 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어요. 네팔의 좋은 기운 덕분이었을까요. 오늘부터는 제가 쓴 시를 더 이상 혼자만 읽지 않아도 되네요. 이제 몇몇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당선 소식을 듣고 나서 며칠간 이 사실을 주변 사람들에게 숨기고 있었어요. 그러는 동안 제주에서 김포를 오가는 비행기를 몇 번 탔어야 했는데요. 그 안에서 잔뜩 겁을 먹어야 했답니다. 이 멋진 소식을 아직 누구에게도 알리지 못했는데 비행기가 추락해버릴까 봐서요. 만약 추락한다면 휴대폰의 비행모드를 해제시키고 몇몇 사람들에게 나의 당선 소식을 반드시 알리고 죽으리라 생각했어요. 그때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은 이병률 선배님이었습니다. 그다음으로 황인찬 선배님, 김동영 작가님. 그리고 제주에서 만난 친구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시를 위해 제주에 머물 것 같아요. 가끔씩 제주가 아닌 곳에 다녀오고 싶을 땐 기꺼이 다녀올 거고요. 그곳이 동남아든 유럽이든, 어디든지요.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낯선 것들이 풍부한 공간에 있어야, 제게 시가 오기 때문입니다.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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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만장일치 당선 확정, 독자가 읽게 만드는 시

 

응모작들 가운데 본심으로 올린 것은 총 다섯 사람의 원고였다. 심사를 맡은 세 사람은 일찌감치 그들 중에 둘의 손을 놓고, 남은 셋을 머리에 이고 진 채 논의를 이어나갔다. ‘유리창의 전개4편을 응모한 조주안은 구사하는 문장에 있어 숙련된 대장장이 같았다. "나는 유리창에 보고 싶은 것을 그리면서/ 종교가 태어났다고 생각한다// 유리창을 종교로 품고 자라난 날들을 통해/ 작은 돌에도 믿음이 깨질 수 있다는 것을 안다"라고 시의 서두를 장식할 줄도 안다.

 

다만 이런저런 사유들을 유기적으로 엮어낼 때의 뒷심이 아쉬웠다. 뚝뚝 끊겨 읽히는 피로. 어깨에 옴팍 준 힘부터 빼야 할 것이다. 양은경의 지구만 한 노래, B4편은 구조적으로 아주 잘 짜인 시들의 묶음이었다. 뼈대는 단단했고, 그에 붙은 살은 너무 기름지지도 너무 담백하지도 아니하였다. 특히나 모과의 내부가 좋았다.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한 개성 있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유일하게 이 시뿐이었다. 모창이 아닌, 영향의 영향에서 자유로워지려면 일단 자신감의 회복이 급급할 터였다.

 

우리는 이원하의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4편을 만장일치로 꼽았다. ‘여전히 슬픈 날이야, 오죽하면 신발에 달팽이가 붙을까란 시에서도 느낀 거지만, 거두절미하고 읽게 만드는 직진성의 시였다. 노래처럼 흐를 줄 아는 시였다. 특유의 리듬감으로 춤을 추게도 하는 시였다. 도통 눈치란 걸 볼 줄 모르는 천진 속의 시였다. 근육질의 단문으로, 할 말은 다 하고 보는 시였다. 무엇보다 ''가 있는 시였다. 시라는 고정관념을 발로 차는 시였다. 시라는 그 어떤 강박 속에 도통 웅크려본 적이 없는 시였다. 어쨌거나 읽는 이들을 환히 웃게 하는 시였다. 웃는 우리로 하여금 저마다 예쁜 얼굴을 가져보게도 만드는 시였다. 그 어떤 이견 없이 심사위원 모두의 의견이 한데 모아진 데서 오는 즐거운 불안 말고는 아낄 박수와 격려가 없는 시였다. 앞으로 '제주에 사는 웃기고 이상한 사람'의 유쾌한 행보를 설렘으로 좇아볼 예정이다. 건필을 빈다.

 

심사위원 박상순, 손택수, 김민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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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 미풍 약풍 강풍 / 윤지양

 

 

0100

밤이었다. 눈을 떴을 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발가락으로 더듬다

 

0010

새벽에 매미 우는 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다. 여름엔 매미가 커지고 점점 커져서 새를 잡아먹는다. 새 소리를 들을 수 없다.

 

1000

숨이 막히는 줄 알았어.

 

0100

비행기 엔진 소리

잡아먹힌 새가 매미가 되는 소리

 

1000

(나는 이곳에 없다.)

 

0001

침대 위의 옷가지

 

0100

침대는 깨끗하다. 아직은 숨이 막힐 때가 아니다. 탁자 위 물 한 컵

 

0010

(이곳에 없다.)

 

 

 

 

2017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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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내 안의 소리, 진짜라고 말해줘서 고맙습니다

 

믿기지 않았습니다. 전화를 받은 날, 하루 종일 믿을 수 없었습니다. 전화를 받기 전에 읽고 있던 시집을 더 이상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맥이 풀려서 옆에 있는 동생이랑 끌어안고 집에 돌아갔습니다.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려서 한숨도 못 잤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잠도 조금씩 더 자게 되면서 조금씩 진짜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소감문을 씁니다.

 

시를 만난 것은 언제나 우연이었습니다. 고등학생 때 선생님이 나눠준 프린트물에서 시 한편이 마음에 들어 곧장 그 시인의 전집을 사서 읽게 된 것, 대학교 2학년 때 학교 도서관에서 일하다 서가에 아무렇게나 놓인 시집 한 권을 집어 들어 읽고 놀랐던 것, 졸업하기 전 친구의 추천으로 소설 수업을 들으려다 의도치 않게 시 수업을 듣게 된 것, 모두 우연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도 어쩌면 걸어가는 길의 일부였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어쩌다 시를 쓰게 되었고 어쩌다 이런 시를 쓰게 되었습니다. 다 쓸 때까지 모든 것을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불안했고 그만두고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시가 계속 저를 붙잡았습니다. 끊임없이 망설이면서 가는 길이 이 길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제 시는 어쩌다 어딘가로 가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므로 이 상은 잘 떠나라고 격려해주는 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걸어가는 길도 지켜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시 이외의 책임에 대해서도 생각합니다. 2016년도에는 수없이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일들 속에 숨겨진 이야기들이 있었습니다. 말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야기들을 모두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함께 걷는 길을 찾겠습니다.

 

제가 무슨 짓을 하는지조차 몰라 어리둥절해하던 가족들, 미안합니다. 앞으로도 미안할 일만 있을 것 같아서 더 미안합니다. 계속 시를 쓰라고 격려해주셨던 선생님들께 감사합니다. 제가 저를 믿기 전에 먼저 확신해주셔서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옆에서 응원해주던 친구들, 내 말을 들어주고 기꺼이 글을 봐주는 여러분을 생각하면서 썼습니다.

 

몸 안에 쌓인 풍경들, 소리들, 모든 느낌이 진짜라고 말해줘서 고맙습니다.

 

 

 

 

 

[신춘문예 시 심사평] 무심하고 당돌한 시앞으로가 더 기대돼

 

심사를 맡은 세 사람은 투고작들 가운데 7명의 원고를 1차로 골라냈고, 그 중 셋을 다시 추려 논의를 이어갔다. 강응민의꽃은 여남은 몸짓의 침묵이다2편은 유장한 흐름과 단단한 구축력을 겸비하고 있었다.

 

비교적 긴 시들임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행까지 긴장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다만 그 긴장으로 인해 시의 흐름이 때로 경직된다는 아쉬움을 남겼다. 조금 더 유연하게 강약 조절이 이루어졌으면 좋았을 것이다. 유지나의 귀귀귀귀2편은 장면에서 장면으로 건너뛰는 서늘한 비약이 인상적이었다. 비약 속에 감추어진 감정 혹은 사건이 읽는 이의 마음을 끌어당기기도 했다. 그러나 우연성과 자의성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높지 않은가 하는 의문을 끝내 지우지 못했다. 집중의 힘이 조금 더 강해진다면 이분의 작품도 머지않아 다른 지면에서 만나게 되리라 믿는다.

 

우리는 윤지양의 전원 미풍 약풍 강풍4편에 어렵지 않게 마음을 모았다. 눈치 보지 않고 자신만의 시적 착지점에 닿은, 혹은 닿으려 하는 원고들이었다. 사소한 착상을 충분히 확장시킬 줄 알았고, 그렇게 확장된 세계에는 독특한 파토스가 담겨 있었다. 투고작 전반에 신뢰가 갔다. 이분이 앞으로 쓸 작품들을 계속 읽고 싶어졌다. 5편 중 특히 2, ‘전원 미풍 약풍 강풍누군가의 모자를 두고 어느 쪽을 당선작으로 삼을지 고심했다. ‘누군가의 모자는 괴팍하면서도 생기 있는 상상력이 돋보이는 시였다. ‘전원 미풍 약풍 강풍은 작은 모티브에서 출발하여 무심하고 당돌한 스타일로 감각과 정서를 끌어내는 시였다. 설왕설래 끝에 한겨울에 읽는 한여름의 시, ‘전원 미풍 약풍 강풍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축하드린다. 건필을 빈다.

 

심사위원 김정환, 황인숙, 신해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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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 수목 / 노국희

 

 

물음으로 짜인 나무 그늘에 앉아있어

긴 오후가 지나가도록

지금 나뭇잎 한 장이 세상의 전부인

왕개미 옆에서

나의 주인이 되어주세요

헤프게 구걸도 해보았다

당신의 삶을 훔치는 것으로

도벽을 완성하고 싶었어

알록달록 실패들을 엮어 만든 바구니를 들고

저기서 당신이 걸어온다

마른 생선 하나를 내어주고는

가던 길을 간다

비릿한 기억이 손 안에서 파닥거린다

목이 없는 생선이 마지막에 삼킨

말들이 마른 비늘로

바스러진다

낡은 허물 위로 매미소리가 내려온다

울어본 기억만 있고

소리를 잃은 말들이

그림자 속에서 가지를 뻗는다

 

 

 

 

2016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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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세상에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징검다리 양 끝단에 노부부가 서서 들리지 않는 말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발을 구르다 엉덩방아를 찧고 넘어집니다.

 

맞은편 사람은 내내 어리둥절한 표정입니다. 세상의 모든 대화를 무언극으로 치환하는 상상을 해봅니다. 말이 사라진 곳에서 죄의 무게는 조금 가벼워질까요, 그마저도 불가능한 바람일까요.

 

내가 뱉은 말들은 종종 빗장이 되어 나를 가두었습니다. 비좁은 사각의 모서리에 혀를 내밀면 말들은 얼음 입자로 떨어졌습니다. 그 안에 수많은 내가 들어 있었습니다. 불편했고 불화했습니다. 진심은 침묵의 형식 안에 담겨야 온전하다고 믿었습니다. 몸 안에 쌓인 말들의 더미를 뚫고 내려간 벌레구멍에서 몹시도 떨면서 시로 호흡하는 법을 익혔습니다. 한껏 무용해진 몸에 가장 예민한 더듬이를 장착하고 싶었습니다. 시의 입김으로 견고한 세계의 벽을 천공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가까스로 반대편 입구에 닿은 기분입니다. 머리 위로 동그랗게 보이는 세계는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다만 나와 조금씩 가까워지는 걸음으로 나아가겠습니다. 발자국을 따라 시의 자리가 투명한 징검돌로 놓이면 좋겠습니다.

 

지면 너머로 이상한 용기를 쥐어준 시인들께 감사 드립니다. 문득문득 곁을 만들어준 벗들에게, 오랜 시간 기다려주신 부모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세상을 향해 질문을 던지기를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울음들이 부딪혀 만드는 균열 소리에 귀를 세우고 노래하겠습니다.

 

 

 

 

[심사평] 과감한 언어의 도전

 

1차 심사를 거치고 난 뒤 심사위원들의 손에 들려 있던 작품은 세 편이었다. 김수화씨의 아버지가 족문을 옮기는 방식’, 이언주씨의 만두를 빚다’, 노국희씨의 위험 수목이 최종적으로 거론됐다.

 

세 편의 작품 모두 그럴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우선 김수화씨의 작품은 삶의 경험을 지나친 감정적 과장 없이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풀어내는 기량을 보여줬다. 이언주씨의 작품 역시 일상적 소재에서 삶의 실감을 잘 구현해내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다만 김수화씨의 경우 군더더기 없이 경험을 풀어내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발화법이 지나치게 안정적이어서 신인의 패기에 값하는 도전의식이 아쉬웠다. 이언주씨의 경우에도 단정한 사색이 장점이 되지만 동시에 언어의 입체적 개진이라는 측면에서는 아쉬움을 남긴다.

 

심사위원들은 이와 같은 아쉬움을 뒤로 하고 노국희씨의 위험 수목을 당선작으로 선보이는 데 합의했다. 과장이나 엄살이 없이 기억과 상처를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구도에 있어서는 안정적이면서도 동시에 과감한 언어 운용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물음으로 짜인 나무 그늘” “울어본 기억만 있고/소리를 잃은 말들과 같은 긴장감 있는 상상력이 당신의 삶을 훔치는 것으로/도벽을 완성하고 싶었어와 같은 도전적인 문장에 실려 전개되고 있다. 취의와 언어 운용 능력에서 안정감과 패기가 함께 드러나고 있어 짧지 않았을 시 쓰기의 이력에 신뢰감을 갖게 한다. 좋은 신인을 시단에 소개하는 즐거움이 적지 않다. 앞으로의 도정에 문운이 함께 하길 기대한다.

 

심사위원 김소연(시인) 조강석(문학평론가) 황인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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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의 척후병 / 김복희

 

 

연속사방무늬 물이 부서져 날리고

구름은 재난을 다시 배운다

가스검침원이 밸브에 비누거품을 묻힌다

바닥을 밟는 게 너무 싫습니다

구름이 토한 것 같습니다

낮이

맨발로 흰색 슬리퍼를 끌면서 지나가고

뱀이 정수리부터 허물을 벗는다

구름은 발가락을 다 잘라냈을 겁니다

전쟁은 전쟁인거죠

그는 무너진 방설림 근처에 하숙하고

우리 집의 겨울을 측량하고 다른 집으로 간다

우리 고개를 수그려 인사를 나누었던가

폭발음이 들렸던가

팔꿈치로 배로 기어가 빙하를 밀고 가는 정수리

허물이 차갑게 빛난다 눈 밑에서 포복하던 생물들이 문을 찧는다

인질들이 일어선다

 

 

 

[당선소감] 지진이 나도 무너지지 않는, 잘 휘어지는 건축물을 짓고 싶습니다

 

자주 슬프고 화가 많이 납니다. 그런데 무서워져서 화를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시가, 저로 하여금 무엇도 할 수 없도록 가슴을 뜨겁게 하고,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하는 이상한 입 모양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저를 자꾸 방에서 나오게 하고, 어디론가 데려가고, 사람들 앞에서 말을 더듬게 합니다. 많이 더듬어서, 더듬는 것으로 기공이 많고 잘 휘어지는 건축물을 짓고 싶습니다. 지진이 나도 무너지지 않고 사람들을 잘 재워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그 건물에서 잘 자고 싶습니다. 그런 건물 부자가 되어서 세 같은 거 받지 않고 다들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대책 없이 낙관적인 저를 살펴준 가족과 친구들아, 고맙습니다. 진도에서 태어나 노화도, 고금도, 완도, 광주를 거쳐 지금 서울입니다. 당신들이 제가 모자란 짓을 저지를 때 지켜봐 주고, 다정해 주어 이만큼 삽니다. 저도 사랑합니다. 저를 제자로 받아 주신 강헌국 지도교수님, 고맙습니다. 글과 음악과 농담을 공유하는 문우들, 많은 술과 커피를 함께 마셔주고, 서로의 글을 읽어주기도 하는 아름답고 미친 바보들, 고맙습니다. 제가 종종 없어져도, 다시 나타날 때마다 어깨동무해주세요. 부탁합니다. 오랫동안 책으로만 만나 뵈었던, 그래서 저 혼자 좋아했던, 남진우 이문재 황지우 심사위원님들, 고맙습니다. 진심으로 쓰겠습니다. 시 쓰는 게 좋다는 제 말을 들어주신 신용목 이영광 권혁웅 선생님, 고맙습니다. 저도 조용히 쓰겠습니다.

 

몇 해 전, 당신께서 하신 말, 멈춘 자리에서 오래 머무르라는 그 말이 제 창문입니다. 방에서 나왔다고 생각했지만 계속 다른 방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뛰어내리지 않고 계속 쓰겠습니다.

 

 

 

 

 

2015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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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의 전개 / 윤종욱

 

 

밤새 발 밑에는 좁은 사막이 쌓였어요

새벽은 불투명하게 돌아왔고

매일매일 더 늙은 모습으로

우리는 입이 말라 버린 나무

조금씩 빠르게 허물어지는 어둠처럼

우리는 잎이 진 사람

침묵을 정확하게 발음해 보세요

턱 끝까지 숨이 막힐 만큼

우리가 창문이 없는 방이었을 때

내일을 열어 볼 수는 없었어요

우리가 방에서 갈라져 나온 뒤에

우리는 식탁의 높이에 맞춰 앉았어요

모래를 모두 쓸어 낸 몸으로

표백된 셔츠를 입고

찻잔의 깊이와 끓는 물의 부피를 재며

우리는 눈대중으로도 알고 있었어요

어둠이 얕은 곳에서는

언제 눈을 떠야 하는지를

어디에 눈을 둬야 하는지 말이에요

시계는 벽을 등지고 있었는데

시계는 무엇이든 가리키려 하고

우리는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해요

사막의 발단을 출발하여

가느다란 아가미가 발생하기까지

우리는 진화하는 걸까요

밖은 왜 여전히 어두운 거예요

우리의 아침을 활기차게 열어 보세요

분주한 아침이 지나고 나면

엄마가 시키는 대로 문을 닫고

우리는 방으로 들어갔어요

 

 

 

[당선소감] 방 안에 갇힌 나의 방에서 창문을 두드리고 깨뜨려

 

방 안에 빈방이 들어와 앉는다. 나는 빈 방 안에 닫혀 있다. 닫힌 방은 나를 열어 보지 않는다. 나는 초점이 나간 머릿속을 뒤척인다. 밤새도록 침묵이 휘몰아친다. 침묵은 나를 깨트린다. 나는 주워 담을 수 없는 말이다. 나는 아무 말도 아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아닌 나는 여기에서부터 다시 발생한다. 다시 눈이 생기고 다시 귀가 생긴다. 다시 어둠이 보이고 다시 어둠이 들린다. 최초의 방식은 이렇게 시작된다. 내가 어둠에 희석되는 동안 방 안에는 두 개의 세계가 공존한다. 고립된 나의 세계와 스스로 자립하려는 세계. 안의 세계와 밖의 세계. 어둠이 무서운 나는 스스로 자립하려는 세계에게 목을 건다. 목은 점점 더 길어지고 점점 더 길어진 목은 점점 더 발끝에 닿아 있다.

 

그러므로 다시 방 안이다. 방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존재는 누구에게나 존재에 대해 묻는다. 나는 시간을 허비하는 데 시간을 허비하며 나는 방의 안과 겉을 뒤집는 데 몰두한다. 나는 오랫동안 창문을 두드리며 나는 오랫동안 창문을 깨트린다. 아마 신선한 공기와 칼날 같은 빛이 반쯤 잠든 나를 깨울 것이다. 까먹지 않는다면 방은 곧 전개된다.

 

김행숙 이원 선생님, 황지우 이문재 남진우 선생님, 한국일보사에 헤아릴 수 없을 모든 마음을 드립니다.

 

 

 

 

 

[심사평] 발명과 발견, 색깔 다른 두 신인 서로의 장점 배웠으면

 

시에서 발견과 발명은 구분된다. 발견이 낯익은 대상에서 낯선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이라면, 발명은 대상과 무관하게 낯선 의미를 빚어내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발견은 소통 가능성(서정시), 발명은 소통 불가능성(비서정시)과 직결되고, 다시 발견은 언어의 투명성(우리), 발명은 언어의 불투명성()과 연관된다. 우리 현대시는 발견과 발명 사이에 서식한다.

 

최종적으로 두 편을 놓고 논의가 이어졌다. 발견인가, 발명인가. 한 작품은 습작기가 단단해 보였다. (가족)을 중심으로 대상을 장악하고 그것을 질서화하는 능력에 신뢰가 갔다. 동봉한 응모작 수준도 일정한 편이었다. 반면, 다른 한 작품은 앞의 작품과 대척점에 자리했다. 재난 상황이라는 대상을 넘어 낯선 이미지를 통해 이질적 세계를 구축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전자는 발견의 시, 후자는 발명의 시에 가까웠다.

 

발견의 시가 윤종욱씨의 방의 전개였고, 발명의 시가 김복희씨의 백지의 척후병이었다. 윤종욱씨의 경우 방의 발단이나 도 당선작으로 손색이 없었고, 김희씨의 토마토라 한다도 인상적이었다. 윤씨는 안정감이 돋보였고, 김씨는 상대적으로 가능성이 커 보였다. 심사위원들은 고심 끝에 두 신인을 동시에 문단에 내보내기로 했다. 서로 다른 개성이 발명을 아우르는 발견, 발견을 아우르는 발명의 길을 열어나가면서 우리 시의 풍요로움에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시인으로서 탄생 장소와 시간이 같은 두 신인에게 두 배의 축하를 보낸다.

 

최종심에 오른 나머지 두 편의 시도 오래 기억될 것이다. 김유씨의 성찬의 시간이 갖고 있는 미덕은 가독성이었다. 일상적 언어를 능란하게 직조하는 능력이 깊이의 시학과 결합한다면 보다 성숙한 차원으로 올라설 것이다. 고동식씨의 금단은 진술(아포리즘)이 묘사를 압도하는 대목이 못내 아쉬웠다. 진술과 묘사 사이의 균형을 찾아낸다면 조만간 우리 시의 전면에 나타날 것으로 믿는다. 분발을 바란다.

 

심사위원 남진우, 황지우, 이문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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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 김진규

 

 

메마른 나무옹이에 새 한 마리가 구겨져있다

다물어지지 않는 부리 위를 기어 다니는 어두운 벌레들

작은 구멍에 다 들어가지 않는 꺾인 날개가

바람에 흔들리는 이파리들의 그림자를 쓰다듬고 있다

누군가가 억지로 밀어 넣은 새의 몸을 오래도록 들여다본다

나도 분명 그런 적이 있었을 것이다

어울리지 않았던 것들의 속을 채워보기 위해

아귀가 맞지 않는 열쇠를 한 번 밀어 넣어 보듯이

혼자 날아가지도 못할 말들을 해본 적이 있었을 것이다

둥근 머리통을 한참 보다가 눈이 마주친다

이쪽의 눈과 저쪽에 있는 새의 눈이 마주치자,

여태껏 맞아본 적 없는 햇빛이 머리 위로 쏟아진다

머리통이 간지러워져서,

나도 어딘가 머리를 드밀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방에서 방으로 옮겨갈 때의 걸음을 생각해보니

나는 언제나 이곳과 저곳의 국경을 넘는 사람인 거 같아

누워있는 사람의 말을 대신 전할 때

구겨진 새의 몸을 손으로 감싸서 누구한테 내밀 듯

나도 어떤 말인지 모를 말들을 했던 것 같아

새의 부리가 날보고 웅얼거리는 것 같아서

내 귀가 어쩌면, 파닥거리다가 날아갈 것 같아서

나무옹이를 나뭇가지로 쑤신다

좀 더 따뜻한 곳으로 들어가라고

삼키지 못할 것들을 밀어 넣듯이 밀어 넣는다

 

 

 

 

 

2014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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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착한 척하며 숨지 않고 시로 아직 옮기지 못한 많은 것들에 말 걸겠습니다

 

별 하나 뜨지 않은 새벽에 조용한 방안에서 전화를 끊고 난 뒤는, 담담하다 못해 암담했습니다.

 

베란다에 가끔 기타만한 갈매기가 앉아 한참을 울다갑니다. 밤길에는 라쿤들이 구석에 모여 자기 그림자를 빚습니다. 시로 아직 옮기지 못하는 많은 것들을 캐나다에서도 봅니다. 앞으로 더 많은 것들에게 말 걸어보겠습니다.

 

어릴 때부터 나쁜 역할은 정말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빠서 주목받느니 착하게 뒤에 숨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자주 착한 척하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나에게만 나쁜 역할을 주어볼까 합니다. 착한 척, 거짓으로 사는 걸 가만두지 않겠습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고마운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못난 저에게 많은 걸 알려주신 김용범 선생님, 이윤학선생님, 홍우계 선생님, 윤한로 선생님, 조동범 선생님, 박주택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안양예고 문창과와 경희대 국문과 선후배 동기, 왓 형님들, 오록당 멤버들, JJ 덕분에 살고 있습니다. 경희 문예창작단 식구들 앞으로도 계속 같이 가고 싶습니다. 무뚝뚝한 아들 때문에 힘드셨을 부모님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직 어설픈 저에게 기회를 주신 세 분의 심사위원 선생님 감사 드립니다.

 

 

 

 

 

[심사평] 세심한 관찰력광경이 감각적인 성찰로 진화

 

응모자는 884명이었다. 이분들의 시 4,000여 편을 예심해서 우선 30여 편을 추렸다. 이 시들에는 소위 '미래파'가 많았다. 기존 시단의 미래파가 예비 시인들에게 여전히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징표일 테다. 최종 본심에 김동수('새가 그려준 지도'2), 이재근('토르소' 5), 김진규('나무라기엔' 2)를 올렸다. 다른 분들이 최종 본심에 못 든 이유는 2%가 모자라서다. 미래파건 전통파건, 앞의 '유행'에 젖은 뒤 그것을 돌파해야 하는데, 강력한 경향이랄지 추세에 흔들렸다. '영향에 대한 불안'이 부족해 보였다. 휘둘리지 말고 돌파해야 한다.

 

이재근의 '토르소'는 시적 논리가 이미지의 다양성을 제압할 만큼 탄탄하고 스케일이 큰 시다. 우리 삶에 대한 긍정적, 남성적 힘이 있다. 그런데 굳이 흠을 잡자면 논리가 과해서 이미지를 밀어낸다. 이 부분을 해결하면 뚝심 있는 큰 시인이 되리라. 김동수는 시를 상당히 많이 써본 솜씨다. 이미지 전개가 조화롭고 참신하다. 기발하면서도 튀지 않는 시어들로 논리와 이미지 사이가 친근하다. 그런데 전하는 바가 또렷하지 않다. 물론 좋은 시는 해석의 지평이 열려 있게 마련이지만, 시에 허용되는 '모호함'에도 한계가 있다. 두 분 시 모두 이만하게 쓰기 쉽지 않아 아쉽지만, 한 편만 뽑아야 하기에 어쩔 수 없었다. 다른 기회가 주어지리라 믿는다.

 

김진규의 '대화'를 당선작으로 뽑는다. '메마른 나무옹이에 새 한 마리 구겨져 있다', 죽은 새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그 고통을 '구겨진 새의 몸을 감싸서 누구한테 내밀듯' '좀 더 따뜻한 곳으로 들어가라고' 같은 시구가 달래준다. 김진규는 관찰력이 뛰어난 시인이다. 세심한 관찰로 잡아낸 광경이 감각적인 성찰로 전화(轉化)한다. 아마도 죽음을 아는 게 성년이리라. '비성년' 이미지에서 시작해 '비성년'을 어떻게든 벗어나고자 하는 고통스런 움직임이 고통스러우리만큼 집요하게 그려져 있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새로 태어나는 시인을 보는 건 즐거운 일이다.

 

심사위원 정호승, 김정환, 황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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