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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고 또 벗고 / 황경순

심해(深海)에 사는 키다리게

탈피를 위해 얕은 물로 대이동을 시자ㄱ한다

헌 껍데기를 버리고 새 껍데기가 나기까지

2주일 동안 사투가 시작된다

눈빛만 살아있고

속살이 드러나 말랑말랑해진 키다리게

거대한 기오리의 뱃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물고기 떼에게 뜯어 먹히기도 한다

일부의 희생으로 한 편에선 짝짓기도 하지만

살아남기 위해서 감수해야만 하는 2주일

그 2주일을 버텨야만 몸이 1.5배 죽죽 늘어난다

무거워진 몸이지만 발걸음도 가볍게

다시 심해로 힘차게 돌아간다

100년을 사는 거대한 3.5미터 키다리게

거미처럼 몸통보다 다리가 길어

심해에서 천하무적 종횡무진하는 키다리게

20번이나 헌 옷을 벗고 또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으며 나날이 새로워지는 키다리게

비슷하게 100년 가까이 사는데 자라지도 않고

쪼그라드는 인간,

쪼그라들수록

벗고 또 벗고

눈은 빛나야 하는데

나날이 새로워져야 하는데

이제 그들은 흔적도 없다

깊이깊이 숨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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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울게 하소서 / 김인육

-어머니의 세족

 

발이 운다

울음은 어디에사 정령처럼 깃들어 있지만

발이 울면 온 몸이 따라 운다

온 몸 구멍에서 붉은 눈물 쏟는다

 

모두를 위로 밀어 올리느라

늘 밑바닥만을 전전했던 맨발

그래서 발의 눈물에는

고단한 흙 냄새가 난다

사막을 건너는 낙타의 거품 냄새가 난다

 

최후의 만찬이 있기 전

한 거룩한 사내는

사랑하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었다는데

 

그녀의 발이 벌벌 우는 밤

오늘은 죄 많은 내가

거룩한 그녀의 발을 씻어준다

 

나를 밀어 올리느라

평생 맨발이었던 여인을 안고

돌아온 탕아가 눈물의 세족식을 한다

애달팠던 그녀의 최후를 씻는다

 

발을 씻어주는 것은

진정하 섬김이요

사랑의 표징일지니

눈물 다하도록, 내 죄를 세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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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소리 / 유현숙


목이마르다.

타르타로스의 호수 한복판에서도 갈증하는 탄탈로스처럼 나는 언제나


처마 끝 단풍나무가 비에 젖는

오대산 중대사자암에 들어 108배를 올렸다.

부서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되새길수록 무릎 아래에 눈물이 고이는 건

어디에도 닻을 내리지 못하는 까닭일까.

빗소리가 남긴 그림자의 빛깔에 대하여 골몰해 본다.


이승길 다니러 오시는 기일상(忌日床)에 눈록(嫩綠)의 차 한잔 올리는 저녁

어머니 계신 길, 서쪽으로 삼천리를 가야 닿는 공간이라 했는데

장미목 다탁 위로 다정하고 맑은 바람이 머문다. 찻잔을 쥔 그의 손끝에 찻물빛 스몄다.


젊은 날, 목을 매단 친구의 죽음을 목도한 후로

어떤 염세는 평생 허리 굽히고 고개 숙이게 했을까.

젖은 나뭇잎들 아직도 속뜰에서 수수거리고

나는 빗소리가 남긴 그림자의 빛깔과 수수 천리 저 너머의 공간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주춧돌 젖으면 비가 오듯이

눈 감고 내가 깊어지면 사방팔방 뼛속까지 감지되는 기미(機微), 그곳에 당신 있어

나는 구름을 거머쥐고 마른 목청으로 그대를 채색한다.

새벽에는 바람을 닫고 돌아앉아 진공관에 불을 붙였다.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간 한 음악가의 생을 더듬는 일, 그를 듣는 일*은

파인 허공의 그림자 한 장을 걷어내는 일

바람을 품어 부드러워진 댓잎이 되는 일

입 닫고 장마저 비우고야 긴 잠드는 개구리를 생각하는 일

사람이 짓고 사람이허문 경계에 대하여 질문하는 일

비로소 한 수유(須臾)의 적막에 물드는 일이리.



  ————

  * 슈만의 첼로협주곡은 라인강에 투신자살을 하기 전, 1850년에 작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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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디 / 김세영


절지동물보다 마디가 많다
그들보다 무게가 많아
아파서 못 쓰게 된 마디가 많다


직립으로 걸을 때부터
발가락 마디마디들
발목, 무릎, 고관절들이
크랭크축처럼 움직여 왔다


앞발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손가락 마디마디들
손목, 팔꿈치, 어깨 관절들이
삼단노선의 노잡이처럼 움직여 왔다


손가락 마디를 꺾으며
캐스터네츠 소리를 낸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팔을 들면 어깨 마디에서
일어서면 무릎 마디에서
뚝,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난다


꼬리뼈 마디를 텔로미어*처럼 깎아내는
손목시계의 초침의 칼날이
매장된 기억의 무덤을 파헤쳐서
소리 뼈마디 하나를 보여준다


내 손목을 놓지 않으려던 굳은 마디의 손목이
무게를 견디지 못해 부러지는 노송의 가지처럼
뚝, 꺾어지며 들렸던, 그 마지막 소리를


직립원인이 된지도 백만 년이 훨씬 지났는데도
아직도 서툰 직립보행으로 발목이 잘 접질리고
등뼈 마디마저 가끔 삐끗하여
유인원의 보행법이 그리울 때가 있다


짧고 마디 진 다리로 긴 몸통을 받쳐 들고
산악열차처럼 올라가는 절지동물의 보행법을
깔딱고개에서 흉내 내어 볼 때가 있다


절지동물보다 마디가 많다
그들보다 오래 살아
굳어서 못 쓰게 된 마디가 많다.


* 세포 속에 있는 염색체의 양쪽 끝단에 있는 부분을 말하며, 노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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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트 / 조동범

 

차창으로 바람은 물렁하게 저녁을 속삭인다. 지평선 너머로 모래바람은 불어오고, 렌트, 당신은 속도를 높여 죽은자들의 지평선 너머를 상상하며 절망에 빠진다.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흑인 영가의 음역은 어디로 흘러가는가. 그것은 알 수 없다고 렌트, 당신은 천천히 읊조린다.

 

렌트, 쿵쾅거리는 엔진은 육기통이다. 여섯 개의 피스톤은 단 하나의 속도가 되어 이곳을 떠나려 한다. 죽은자는 어느새 무덤을 나와 붉은 사막과 붉은 언덕이 있는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는가. 도로의 끝에 과연 끝은 있는가.

 

일기장은 타오르며, 저녁 어스름을 들려주던 검은 재가 되어 사라진다. ‘누구의 것도 아닌 이번 생이여’라고, 라디오의 늙은 가수는 노래하며 흐느낀다. 렌트, 길의 저편에는 오래 전에 죽은 동물의 냄새가 피어오르는구나. 불길한 무덤처럼 부풀어오르는

 

한줌 태양을 향해, 단 한번도 내 것이 아니었던 생을 향해 렌트, 당신의 속도는 사라지는구나. 핸들을 잡은 나의 손은 렌트, 당신의 전생을 기억하지 못한 채 길의 끝을 그저 가늠해볼 뿐이구나. 내 것이 아닌 별빛을 바라보며 렌트,

 

당신을 바라보며 나는 육기통의 엔진처럼 두근거린다. 어디선가 붉은사막의 밤을 서성이던 여우의 울음소리가, 언제나 허상인 렌트, 당신의 비밀을 속삭인 듯도 하였다. 그리하여 렌트. 쿵쾅거리는 엔진은 육기통이고 그것은 영원토록, 당신과 나의 심박이 되지 못하는구나. 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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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뿌리 / 이채민

 

봄부터 식탁에는 꽃보다 모래알이 수북했다

현관에는 독버섯을 밟고 온 신발짝이 훌쩍거렸다

잠든 사이 꿈에서 걸어 나온 사자死者

선명치 않은 발자국을 자주 남겼다

 

엄마의 부음을 들고 온 여름은

찐득하고 어두웠으므로

자주 바람을 불러들였다

꽃을 이고 태어난 딸의 팔자를 염려하던 엄마는

바람을 싫어했지만 나는 바람의 행적을 따라다녔다

그리고 바람이 소리를 걸어 둔 언덕에

활짝 핀 죽음을 꼭꼭 묻어 주었다

 

여름이 지나고

냉장고에서 세탁기에서 책상 위에서 찻잔에서

엄마는 꽃잎처럼 사뿐히 날아와 이것들과 나를 다듬는다

한 곳을 응시하다 틀어진 척추뼈를 만져 주고

바람의 발톱에 쓰러진 어느 날도 잘 일으켜 세운다

죽은 자의 눈동자에 빛의 뿌리가 있음을

여름을 지나며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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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강 발가락 / 권덕하

 

 

저건 뿌리다

무른 진흙 딛고 참은 울음이다

너덜겅 걷다가

배운 다리품이 감췄다가

비어져 나온 생각,

 

식구들 잘 보듬고 가만히 나가

어둑발 훔치며 좌판 펼치는

아내의 걸음새에

땅을 미는 힘으로 솟은 햇귀가

속 깊이 쟁여 준 가락이다

 

 

 

 

생강 발가락

 

nefing.com

 

 

() 전문 계간지 미네르바가 운영하는 제4회 질마재문학상 수상자로 김승희(61·왼쪽) 시인이 선정됐다. 197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시인은 태양 미사’ ‘달걀 속의 생()’ ‘희망이 외롭다등 시집을 펴내고 현재 서강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시상식은 61일 오후 5시 함춘회관에서 열린다.

 

역시 미네르바가 운영하는 제6회 미네르바작품상 수상의 영예는 권덕하(56·오른쪽) 시인에게 돌아갔다. 시인은 2002작가마당’, 2006시안을 거쳐 등단한 뒤 꾸준히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시상식은 질마재문학상 시상식과 나란히 61일 오후 5시 함춘회관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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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사슴동굴  / 김정임


 오동나무 안에 당신이 누워있다 부은 무릎을 펴는지 나무 틈 사이 삼베옷 스치는 소리가 새 나왔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빙 둘러서서 제를 올렸다 


 어디쯤에 꽃잎이 열린 곳일까 눈이 어두운 사람처럼 오동나무 무늬를 더듬어야 우리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추억들이 푸른 핏줄을 터뜨리며 둥글게 솟은 흙 속으로 스며들자 검은 구름이 터질 것 같이 어깨를 들썩였다

     

 당신은 이미 저 빙하기 붉은 사슴동굴에서 슬픔이 깃든 뼈를 수만 번 누이는데 나는 어느 시간의 물거품을 휘젓고 있는 것일까


 물기 빠져나간 바람의 흰 깃털이 저녁 숲에 흩날렸다 깊은 숨을 몰아쉬는 당신이 달력 속에 굵은 빗금을 천천히 그었다

 

 

 

 

 

[심사평] 몽환, 혹은 제의적 상상력 돋보여


  몇 편의 후보작을 두고 논의한 끝에 우리는 쉽게 김정임 시인을 이번 수상자로 정하자는 합의에 도달했다. 심사에 올라온 약 10여 편의 그의 작품들은 고른 수준을 유지하는 가운데 꽤는 독특한 시세계를 열어 보이고 있었다.

 그의 시편들은 주로 암각화내지 각종 구비전승 속에 남겨진 원시부족들의 삶이나 툰드라 지역민들의 습속을 성찰하고 있다. 굳이 말을 만들자면 이들 시편의 상상력은 제의적 상상력이라고 할 터였다. 그래 그의 시의 주체들은 하늘과 땅, 인간 세계의 경계를 허물고 넘나든다. 뿐만 아니라 생과 사 역시 격절된 세계가 아닌 연속된 시간 위에 놓여 있다. 이 일련의 시적 사고내지 상상력은 그의 작품을 몽환적으로 읽게 만들고 있다.

 이번 수상작으로 결정을 본 「붉은 사슴동굴」 역시 사자(死者)가 시적 주체인데, 그는 제를 올리는 사람들과 달리 지금 이곳을 벗어나 붉은 동굴에서의 회귀적 존재로 거듭나는 기이함을 보여준다. 이 같은 작품세계란 우리 시단에서 독특한 시세계이자 유니크한 개성의 하나로 읽힌다. 우리는 그가 앞으로 한결 더 참신한 시세계를 열어 갈 것을 기대한다. 


                                         본심 : 강 우 식, 문 효 치, 홍 신 선(글)  

                              예심 : 미네르바 편집위원회



 

|수상소감| 조용한 울림   


수상 소식을 들었을 때 기쁨보다는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이 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 걸까, 매순간 시적 시간을 충분히 살았는가, 하는 자책감에 제 시를 돌아보았습니다. 시는 저에게 우주라는 기호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정신의 에너지를 제대로 부려 보았는지를 되물었습니다. 

             

생은 무언가 끊임없이 지불하기를 요구합니다. 어둠에 밀리면서 어두운 글자를 빌렸습니다. 이제는 마왕 대신 파가니니를 듣겠습니다. 


동굴 벽에 부딪쳐 돌아오는 원시의 조용한 울림을 만나기 위해 앞으로도 호젓한 숲길을 헤매게 되겠지요. 돌아갈 수 없는 날을 가득 품은 시원의 음악이라 불러도 될까요. 시가 아니었으면 만나지 못했을 사람의 인연이 가장 아름다운 오늘입니다. 부족한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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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미네르바 작품상

 

계간 '미네르바'는 제4회 미네르바작품상 수상자로 문학평론가 김석준 씨를 선정했다고 겨울호(통권 44호)를 통해 밝혔다. 수상작은 '디지털 시대에 시 쓰기의 위의:소통, 인륜성 그리고 상상력'이다. 심사위원단은 "달라진 문학장과 미디어 환경에서 우리 시가 어떤 소통과 인륜성 그리고 상상력을 견지해야 하는지를 논의하고 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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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반던지기 / 최금녀


오십견이라는 것은

적어도 오십은 넘겼다는 말

사십은 안전하다는 뜻?

가당찮게 오십견이 오십같는 소리로

왼쪽어깨에 태클을 걸었다


굳어진 왼쪽 어깨 모시고 나가

원반 선수처럼 하늘에 원을 그리며

몇 십번 돌리기도 하고

적외선 불빛아래

땀 뻘뻘 흘리는 사역

침으로 콕콕 찔러 윽박지르지만


오십견이라는 놈

두꺼운 벽으로 길을 막고

이 정도는 시작이라고 으름장


나, 생전 처음

단전에 기 모으며

굳어지는 내 삶 정수리에

어깨 휘들러 원반을 던지느니

있는 힘 다하여.


 

 

 


[수상소감]


아름다운 구속


감사합니다. 상을 받는 다는 것은 언제나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비어가는 제 등잔에 기름을 채워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의 말을 올립니다. 모자라는 점은 두고두고 연마하겠습니다. 열정 하나만으로 느지막하게 시작한 저는 늦었다는 초조감으로, 나이도 잊어버렸고 TV나 신문 보는 시간도 아꼈으며 집안 살림도 멀리하면서까지 노력과 정성을 투자해 읽고 쓰고 했습니다. 그러나 쓰면 슬수록 좋은 시는 쉽지 않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게 될 뿐입니다. 가끔 생각에 잠깁니다. 시가 무엇인데...아직 마땅한 답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생에서 시처럼 나를 놓지 않고 이끌어준 것도 없었습니다. 시처럼 나를 순백으로 물들여 준 것도 없었습니다. 시는 내 삶의 지표요 나를 찾는 구체적 꿈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벗을 수없는 멍에요, 짐이기도 합니다. 시는 이미 내 삶의 점령자이며 나의생활은 시의 구속 속에 들어있습니다.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할 시인이 아이러니컬하게도  깊은 구속에 묶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아름다운 구속, 가치 있는 구속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상은 등단하여 불태우는 제 열정에 격려를 주신 것이라 여겨져 더욱 고맙습니다. 오랫동안 자양분으로 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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