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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빨간 장날 / 이여원


   빨간 장날에는 슬쩍 훔치고 싶은 것들이 많지만 하늘이 맑아서 예비용 서답이 없는 처녀들은 불안합니다 음전이 할머니도 오늘만큼은 빨간 몸빼를 갈아입고 빨간 장미 무늬 양산을 쓰고 왔군요 빨간색에 민망한 파란꼭지를 단 파프리카가 파라솔 아래 담겨있고요


  빨간 날은 빨강들이 옹기종기 건너오고 있습니다 그날은 기상예보처럼 빨간 게 무겁고 가벼울 수도 있습니다 운수처럼. 장날은 빨간 쉼표 같은 날, 아랫배부터 살살 흥이 올라 파장까지 번져 올라갈 수도 있습니다


 되바라진 처녀들이 올 적마다 주머니가 불룩해져 가고 얼굴은 빨개집니다 초록색 지붕의 범수 아제도 하얀 삼베적삼에 빨간 목수건 걸치고 붉은 팥을 경운기에 싣고 왔군요 모두들 꽁꽁 숨는 빨간색과 드러내는 빨강이 숨바꼭질하듯 합니다


  월요일의 빨간 수탉벼슬을 따라가면 빨간 일요일이 나오고 일요일 처녀 일요일 소녀 일요일 폐경들이 왁자한 장날입니다


  모든 빨강은 식욕의 끝에서 자라고 있는데 흰 바지 밑에 빨간 양말 아저씨는 왜 나이가 들수록 빨간색을 묻히려고 할까요


  구름의 한쪽 끝에서 빨간색이 터집니다


  아슬아슬한 나이들이 모여들어 뭉게구름을 만듭니다 빨간 장날이 되면 사르르 아픈 배 챙겨 온 새털구름은 다 흘러 가버리고 발을 동동 구릅니다 빨간 고추잠자리 서너 마리가 날고 서쪽으로 뉘엿거리는 하늘빛이 붉습니다

 

 

 

 

[우수상] 워킹데이 / 김말희   

 

이제부터 시작하자 하나, 둘, 셋 낮은 휘파람이 꽃들을 깨운다

무작정 걸어본 날 밀물처럼 숨을 들이키자 신이 내게 속삭인다.

참 오랜만이지? 문화회관 창문 틈으로 노인들의 느린 동작과 노랫가락들, 모두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변함없이 도로를 지키고 있는 저 나무들은 몇 해를 지나도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성이고,

생리대와 양말 몇 켤레, 스타킹, 난전에서 파는 속옷을 담은 검은 봉지가 어색하지 않다

사람들은 오래된 반지의 색을 복구시키는 방법을 묻는다

변한 것을 복구하는 일이란 여과의 과정을 거치는 것, 여과시켜야 할 무엇을 생각했다

나를 통과한 빛과 물과 음식들까지, 지구 밖으로 뱉어내었던 수많은 찌꺼기들은 여과된 물질의 잔재, 걷는다는 것은 그것들을 걷어내는 일, 해를 바라보며 피어나는 꽃들의 속도를 따라 하나, 둘, 셋 서성이던 나무들 속으로 경쾌하게 걸어든다

 

  

 

 


[우수상] 후 / 김태희     

 

바람은 별 수 없이 한 쪽으로만 불었다.

모든 것이 죽고 나면 이것들을 기록하지 못할 것 같아

바람은 이 세계보다 조금 더 앞에 서 있었다.

거짓말의 뒷면을 보며 비웃는 날이면

여름의 폭염보다, 겨울의 폭설보다

더 고약한 하나의 계절처럼

덜 자란 아이들의 등을 떠밀었다.

그것은 비겁했다.

하지만 바람은 세계를 닮아 있었고,

아이들은 이제 막 색종이를 가위로 자르는 법을

배우느라 고요했다.

사랑은 바람을 따라 깔깔 거렸지만,

다 자라난 아이들은 귀를 틀어막고

제 자리에 앉아만 있었다.

아이들의 사랑은 동화책을 따라 그린

연습장 속에 차곡차곡 쌓였다.

잘 잘라 만든 색종이는 제목이 되어

정성스럽게 붙어 있었다.

바람은 벌써 세계를 한 바퀴 돌아왔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다 큰 아이들은 아직도 등교하는

길 위에 나타난다.

바람은 쉰 냄새를 흉내 낸다.

그것이 모두가 싫어하는 것이란 걸

알게 되었다.

뿌리가 자유로운 야생화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다는 사실과

모두에게 퇴화되지 않는 다른 모양의

퍼즐이 그려져 있다는 사실을 숨긴다.

어느 기록의 한 줄에도

바람은 불었다 로 남을 것이고,

거짓말의 앞을 본적 없는

바람의 방향은 언제나

우리가 고개를 돌리고 난 후,

일 것이다.

 

 


[우수상] 바람의 학명 / 설수인

 

순을 잘라내도 웃자라는 저 파릇파릇한 분열증,

소란은 햇살이 노랗게 질릴 때 까지 깊어진다

용수철의 용도는 눌러앉지 않겠다는 뜻이고

눌러놓지 못하는 바람 한 장이 들어있다

바람의 학명은 메니에르증후군,* 바람의 문양은 달팽이모양이다

별이 빛나는 밤에 떠도는 반 고흐

귀가 없는 바람이었을까

달팽이는 숲속의 공주

온 몸을 도르르 말고 버려진 사과처럼 잠은 계속된다

마법은 사과의 껍질처럼 도르르 벗겨졌을까

바람을 눈으로 맞으면 눈물이 흐르고

머리카락에 묻은 바람은 오랫동안 헝클어져 있다

귀로 들어오는 바람소리는 위험하다

뿌리가 있는 바람은 병이 된다

이 병의 치료방법은 습기 많은 여름을

한동안 창문에 묶어 놓는 것

바람꽃은 바람 없이도 흔들린다

흔들리는 순간을 관계라고 한다면 소통은 이명 같은 것

고요가 가득 들어있는 침묵, 바람이 없는 병

바람은 제 씨앗을 꽃의 수술로 삼는다.

소용돌이 뼈를 갖고 있는 바람의 학명은

지금 침대에 묶여 있다

 

* 메니에르병:내이(內耳)의 질환

 

 

 

 

 

[심사평]


  요즘 몇 몇 심사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심사위원들의 중론은 ‘시 참 잘 쓴다’다. 잘 쓰는 데 막상 뽑자고 들면 선뜻 손에 잡히는 작품이 없이 망설여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잘 쓴 시들’의 공통점은 모두 비슷비슷하다는 점이다. 잘 쓰긴 했으나 그 시들이 삶의 매듭 매듭에서 간절히 흘러나왔다기보다 책상머리에서 만들어진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말을 잘 다루는 것이지 시의 본질, 삶의 본질에서 노래되어 나온 시가 아니란 얘기다. 공허한 말의 성찬이다. 제품화혹은 규격화 되어간다고나 할까? 되려 서툴고 어눌한 시를 눈여겨보게 된다. 거기에서 따스함과 시의 본질을 보게 된다. 시의 울림 대신 기교가 차지한 셈이다. 생각해봐야 할 점이다.


  <빨간 장날>을 보내주신 이여원 씨의 시는 우선 독특한 색감에 초점을 맞춘 점이 참신했다. 우리네 삶의 낮은 자리요 소박한 욕망의 거리라고 할 수 있는 ‘장날’의 풍속을 ‘빨강’에 대비시키다는 것은 쉽게 얻을 수 있는 발상은 아니다. 그만큼 발랄한 시선으로 포착한 장날이지만 발랄한 세계만을 보여줄 수는 없는 노릇. 남녀노소, 희로애락이 여러 색채의 대비을 통해 스러져가는 청춘과 인생을 은유화해 들어간 점이 좋았다. 사랑스런 풍속화를 보여준 수작이었다.  <워킹 데이> 의 김말희 씨의 시도 활달하다. 어느 날 문득 ‘걷는다’. 오랜 만에 걷게 된 감격인지 아니면 ‘걷는 것에 대한 의식’인지 알 수 없으나 새삼 세계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는 것처럼 신나고 아름다운 일이 어디 있으랴. 걸음걸이에서 만나는 사물들은 모두 긍정의 표정으로 다가오고 있다. 새삼 몸으로 만나고 표현된 시간과 공간의 실감이 좋았다.

  시에 순위가 있다는 것처럼 넌센스도 없다. 그러나 어쩌랴. 운이 부족한 여러 분들에게 섭섭한 마음을 전하며 ‘순위’에 든 분들에게 우주적 축하를 보냅니다. 


심사위원: 윤제림, 장석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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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회 시흥문학상 시부문 당선작] 한휼

 

대상

털실이 풀리는 저녁 / 한휼

 

 

  하루 종일 감긴 저녁의 내부는 단단하다 아버지는 무엇이든 감는다 죽은 바퀴벌레를 삼키는 고양이 울음소리 뻐거덕거리는 회사의자와 숙취 엘리베이터가 없는 아파트와 텅 빈 가죽지갑까지, 무엇이든 감아 표면을 둥글게 만든다 어머니의 잔소리는 뜨개질바늘처럼 늘 아버지의 어깨에 꽂혀있다

 

  고양이가 털실을 가지고 노는 저녁은 위험하다 아버지의 올이 풀리지 않는다면 고양이는 맛있는 고양이 스튜가 될지도 모른다 발톱이 빠질 때까지 닫힌 방문을 박박 긁는 것은 괜한 짓이다 발톱이 털실뭉치 속에 박히기라도 하면 그것도 큰일이다 단단한 털실에 턱을 괸 채 밤새 무서운 꿈을 꿔야 한다 몸을 뒤척이다가 고양이 수염이 털실의 눈알을 찌르기라도 한다면, 그때 탈구된 털실의 내부가 털실 바깥으로 튀어나와 벽시계가 멈추기라도 한다면,

 

  털실을 요리조리 드리블 하기 위해 고양이의 발톱은 초저녁부터 안으로 말려들어가 있다 누가 이토록 단단하게 감아놓았나 털실뭉치 깊숙이 파고든 털실의 끝을 찾을 수 없다 털실의 끝을 잡아당겨야 털실 맨 안쪽에 도사리고 있는 아버지의 미간을 펴줄 수 있을 텐데

 

  털실이 고양이의 눈동자처럼 동그랗게 감긴 저녁, 고양이가 발끝으로 털실 아래쪽을 툭, 건드려본다 뭉툭한 앞발로 윗목에서 아랫목으로 굴릴 때마다 아버지를 감았던 털실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한다 소매 끝이 풀리자 아버지의 손목시계가 9시 정각을 알린다 뉴스 속 가장들이 한 올씩 풀려 나온다 사고뭉치들은 대부분 털실뭉치들이다 화면이 끓어오르고 털실은 계속해서 라면처럼 풀려나간다

 

  털실이 다 풀려버린 아버지의 어깨와 쇄골이 앙상하게 드러난다 어머니가 뜨개질바늘로 고양이의 붉은 털옷을 짓는다 고양이 발톱이 고양이를 밀고 고양이 바깥으로, 빨치산처럼 몰래 빠져나온다

 

 

 

 

우수상

() / 조경선

 

 

1.

꽃은 피는데 내가 살지 않은 봄이 온다

나는 지상에서 나무 깎는 노인

나무들은 우뚝 나무로만 서서 한 생을 탕진하는데

우듬지만이 까마득하다

둥지 잃은 새들이 잘린 그루터기에 맴돌아도

나무가 나에게 걸어오는 시간 따윈 묻지 않는다

저 깊숙한 울음까지 새길 수 있을까

환지통을 참으며 나무가 말라갈 때

바람이 무딘 손금을 부추긴다

 

나무가 모르는 방향에서 칼을 고른다

첫 날()은 표피만 살짝 건드려야 한다

작은 숨소리만 들려도 칼을 뱉어내니

이겨내선 안 된다

무중력 상태까지 나를 놓치며 결을 따라 흘러야 한다

깎아내면 깎아낼수록

이빨을 드러내는 것이 나무의 본색(本色)

그때 나무가 칼을 선택한다

살을 내주며 나무가 나를 길들인다

모르는 형상(形象) 안에 칼은 갇히고

끝내 어떤 대답도 듣지 못한다

나무의 얼굴을 꺼내며 없는 봄을 탕진한다

 

2.

잘려진 밑동이 다시 잘려 나간다

내력이 둥글게 말리고

날을 삼킨 결이 암호로 풀어진다

 

또 한 생을 절단 내는 순간이 온 것이다

오래된 내 상처가 목장갑 안쪽에서 꿈틀대기 시작한다

 

관을 주문한 자가 죽어서 관을 기다린다

그가 말한 먼 훗날은 그리 먼 때가 아니었다

 

먹선을 튕기면 끌은 정교해지고 망치는 거세진다

나무속을 파내는 일이란 불편을 깎아내는 일

그의 체온과 진지한 몸짓을 생각하며 틀을 짠다

 

막무가내로 박혀있던 울음소리를 걷어낸다

수십 겹의 울음이 뭉쳐져 있다가 풀어진다

그에게 줄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인 여백엔

울음 따윈 없어야 한다

겨우 여섯 개의 판자가 생을 요약한다

 

뚜껑을 만들기 전 숨을 고른다

관을 닫을 때 어둠에 눌리지 않아야 한다

가만히 관에 누워 본다

완전한 처음, ‘내 나무의 완성을 본다

 

 

 

 

우수상

트러블 메이트 / 강경아

 

 

  구부러지기 쉬운 말들의 행방을 구름에게 따질 필요는 없어. 바싹 구워진 자음과 모음은 크래커의 부스러기처럼 번번이 흘리길 좋아하지. 바람의 구둣발 앞에선 일제히 모르쇠로 돌아 서 있으면 괜찮을 거야. 비대칭 언어들의 질주가 오선지 위에 걸릴 때면 한 옥타브씩 지워지는 너의 허밍소리가 그리워 질거야. 정말 괜찮은 거니. 파열음이 쏟아지는 블랙박스 속에서 사잇소리처럼 끼어들기 좋아하는 일인칭 언어들, 그 낄낄대는 된소리의 일방적 좌담들, 한 수 거들지 않아도 비공식적으로 우리는 하나.

 

  우리, 우리, 울타리는 뛰어 넘기 위해 만들어진 거라고 말했지. 걸려 넘어져도 뛰어 넘어서야한다고 방점을 찍으며 강조할 땐 말라붙은 감정이 움찔거렸지. 눈물 같은 건 방울방울 굴리기 쉬워 걷어 차버리면 그 뿐이라고, 카푸치노의 거품처럼 아무 맛도 나지 않는 언어들에 대해, ~ ~ 저어 버리면 사라져 버리는 것들에 대해, 기호에 따라 시시때때로 입맛이 달라지는 표정들이 골똘하게 다가오는 저녁이야.

 

 

  안녕, 프렌즈.

 

 

 

 

 

우수상

플레이밍* / 지연(김지연)

 

 

옷을 겹으로 입어도 춥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컴에 들어간다 검지에 매달린 눈들

붉은 눈들이 동동 떠서 당구를 친다

 

회사에서 잘렸다 아파트 이자 낼 돈이 막막하다

분노는 쓰리쿠션

온탕 속에서 키보드를 두드린다

외면당하며 스친 눈알들이 멈칫

제 눈알을 검지 큐대로 날린다

살아있는 것들은 제 눈알이 받은 충격만큼

회전시킨다 담배를 꼬나물고 쓰발

 

창밖에 눈발처럼 날리는 진눈깨비

휘둥 녹으며 곤궁하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내 몸을 튕긴다

춥다는 천개의 손 천개의 눈

 

알몸 같은 욕설들

플라스틱 웃음과 울음 사이

문지르거나 확대하거나 벗기며 벗어진다

검지에 달린 눈이 모락모락 춥다

누군가 나를 친다

내가 모르는 곳으로 혈관 터진 눈이 굴러가고 있다

 

* flaming: 인터넷에서 플레이밍은 공공연히 누군가에게 심하게 빈정대는 것을 의미한다.

 

 

 

출처 : 신춘문예공모나라
글쓴이 : copyzigi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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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안녕, 피쉬맨/ 박윤근
 
이 도심 주위로는 굵직한 어군이 형성돼 있다
수심의 저점을 읽은 누리꾼
솟아오르는 작은 고기, 민감한 입질도 놓치지 않는다
파도의 중간쯤에 구겨 앉은 남자 주위로
빠른 어족의 등락으로 물결이 친다
사내의 손이 마우스에 푸른 등을 켠 채
해저의 기억 안팎을 오가며 포인트를 찾지만
몇 시간 째 미끼만 갈아 끼우고 있다
밀물과 함께 고기 떼가 몰려든 온 객장은
상한가를 치고 빠져나갔지만
객장의 전광판에는 잡히지 않는다
불안해지는 일기예보 속
장세의 흐름이 하락 쪽으로 기울자
저울 위 생선처럼 저 남자
비릿한 땀 냄새를 풍기며 기우뚱거린다
팽팽하던 낚싯줄이 수면 아래로 풀려간다
증시 막장, 깜박이던 전광판 불빛도 꺼지자
어둠이 남자의 의자에 해초처럼 감긴다
저 깊은 바닷속으로 끌려가고 있다
오랜 시간 아가리를 벌리고 있던 통발 하나
파닥이는 고기 한 마리 입에 문다
이곳에서는 철 지난 바다의 풍경을 묻지 않듯
도시에서 떨어져 나간 버그*처럼
사라진 남자의 행방에 대해 아무도 묻지 않는다

 * 버그: 시스템 오동작의 원인이 되는 프로그램의 잘못.


우수

너에게 나라는 질량/김유섭
 
너를 만날 때마다
무게의 눈금이 보고 싶지만
바람에 날리는 옷자락을 따라 사라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단다
이곳이 아름다운 별이라 하더라도
확신 없이 떠돌아야 하는 궤도
함께 웃고 떠들고 집으로 돌아와 백지처럼 증발해버린
너를 마주하게 되는 날들이 눈부셔
나는 자꾸만 허공 쪽으로 고개를 꺾고
허리마저 비트는 버릇이 생겼단다
가슴을 열어 펼쳐 보이는 그 짓
한 줌 부스러기 같아서
다가가 덥석 껴안았던 그 어색한 눈빛
나는 형틀에 묶인 얼굴로
내동댕이쳐져서 흘러 다닌단다
얼마나 자주 낯선 질량 속으로
나를 던져 넣어야 했던지
한 치 오차도 없는 저울의 계산법으로
너는 휘파람 불며
이 광활한 세계를 잘도 오가는구나


 우수

입술/김도형
 
우리가 떨어져 있는 순간
이 계절이 지나가면 나만의 種을 가질 수 있을까
예기치 못한 표정은 머리카락처럼 자라나지
우리는 결국 누군가의 모방일 뿐
서로 붙어있을 때 침묵을 배워
 
지평선과 수평선이 키스할 때
구름은 자꾸 노을을 밀어내지
밤이 노을의 등에 실려 찾아오면
우리는 또 다른 기원이 될 수 있을 거야
마침내 다르다는 것을 알아버린 순간
완전한 種이 될 수 있겠지
 
이곳의 반대극점에선 바람의 껍질도
조금씩 떨어지고 있어
바람도 새로운 種이 되려는 중인 걸까
아직 다가오지 않은 계절을 생각하며
 
우리는 함께 새로워지기 위해
서로 메마르기만을 기다리지
바람은 노을이 사라지는 곳에서
달빛과 짧은 입맞춤을 하고 있어
우리가 완전하게 합쳐질 때야 비로소,
하나의 種이 될 수 있을 거야
언제나 같은 모습의 누드가 선명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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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회 시흥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가묘 / 장이옥

 

언 땅 귀퉁이를 숟가락으로 긁는다. 사과 반으로 잘라 발 집어 넣으면 손바닥에 흥건한 흙냄새 방울방울 식은 땀이 무덤이라는 듯 흘러내리는, 산 그림자를 따라 마을 입구로 옮기는 뻐꾸기 울음에 노랑나비 한 마리가 민들레 꽃잎 위에 촛불을 켠다. 동그랗게 말려 들어가는 아버지, 주무세요? 사과나무 굽은 가지가 내려와 가쁜 숨소리에 졸졸 구멍을 낸다. 바닥에 누워 있는 아버지 발 등에서 사과 한 개가 짓무르고 있다. 이 골목 저 골목 기웃거리며 사과 사세요. 구석구석 다니며 그늘 솎는 어머니, 나는 깨진 창을 주머니에 넣고 해가 지도록 만지작거린다. 하나 둘 셋 넷 햇살 놓쳐버린 잠 속에서 놀란 송아지처럼 껌벅이는 눈, 천장에 박혀 푹 꺼진다. 햐안 머리에 벌레 알 까는 줄 모르고 드르렁 드르렁 땅만 뒤집는 아버지, 텅 빈, 속이 바짝바짝 타고 있다.

 

 

오래된 미래에서 온 답신 / 김혜숙(수원시 영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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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물론 /추영희

- 내추성

 

씨실과 날실이 한 올씩 교차하는 촘촘한 평직1) 옥양목 한 올 떠보면 질기고도 순한 봄풀 같은 올과 올들의 결속 여물게 물고 물린 광목 당목 모시 포플린으로 들어본 이름들 몸의 촉수를 조밀하게 건드리며 몸을 읽는다 구부리던 무릎, 잠시 기대던 등, 무언가 잡으려던 팔의 반경들만큼 촘촘한 동선을 그리며 바스라지는 직조

 

틈틈이 맞닿는 조밀함이 오히려 몸의 방향에 쉬이 상처 받다니 너무 많은 결속이 서로의 틈들을 트지 못해 가다듬은 형상은 쉬이 일그러지고 가늠한 선은 분분하게 어긋난다

 

풀꽃무늬 포플린 올 속 풀물처럼 낀 단단한 몸의 기억 움켜진 것 느슨히 놓으면 그제서야 적당한 틈으로 편히 드는 몸같이 마음이 드는 거라 하는데

 

너무 많이 맺은 것들만큼 상처도 자글자글하다

 

1)평직: 직물의 삼원조직인 평직 능직 수자직 중에서 가장 간단한 조직으로 씨실과 날실이 한 올씩 번갈아가며 교차하므로 조직점이 많아서 강하고 실용적이나 구김이 잘 생기고 표면이 거칠며 광택이 적다. 광목 옥양목 모시 삼베 등의 직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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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별 연애 지침서 / 이면(임현)


자판기

자판기 커피를 뽑을 땐 누군가 불쑥 내 손을 움켜쥘 것만 같아 허리를 숙이고 세상 가장 좁은 문에 기어들 듯 들여다보지 그러면 거기 작고 하얀, 뜨거운 손과 악수 할 수 있어 누군가의 심장을 녹여 만들었다고 해도 믿을지 몰라 데면데면한 얼굴들 사이에서 홀로 뜨거운, 키―스 들었어? 지금 네 손에서 뛰고 있는 그 박동소리


무엇보다 밀고 당기는 게 중요하죠 무턱대고 들어가려 했다간 벽이 됩니다 이건 원리예요 쉽게 변하지 않아요 열 번 두드려 안 열릴 문 없다지만, 요즘 세상에 어디 가당키나 한가요? 달로 내딛는 첫발처럼, 그래요 지구인을 위한 이벤트라고 생각해요 일종의 쇼라구요 자존심은 6분의 1 만능열쇠나 맞는 열쇠나 그게 그거 아닌가요? 어쨌든 열어보란 소립니다 노크는 필수 기본부터 지켜요 그런데, 아까부터 왜 자꾸 밀어요? ‘당기시오’라고 몇 번을 말했는데


윈도우

정기적인 업데이트 요망


막차

누군가의 내장이 되는 일이란 몰려오는 잠처럼 지루해 버튼같이 불거진 젖꼭지를 붉어질 때까지 누르고 싶어져 따옴표처럼 손을 들고 있어야 할 때도 있지 할 말 따위 그 안에 갇혀 들리지 않아 귀를 숨기고 자는 사람들 풍경이 바뀌어도 자리를 비킬 줄 몰라 동전 같은 무표정을 흔들고 싶어 꿈들이 짤랑짤랑 튀어나와 차창에 엉겨 붙을 거야 덜컹거리는 연애는 멀미가 나 뿌옇게 흐려지는 건 밖이 아니라 네 눈꺼풀이야 나는 온몸이 귀 먹먹한 고막을 뚫듯 밤을 미는, 지루한 숨소리를 듣는 중이지

 

 

 

꿈꾸는 거인 / 김효용


달의 지면을 외눈의 거인이 걷는다 당신의 방까지 이어진 가느다란 진동을 오랜 청취자인 화병이 듣고 있다 수도꼭지가 반쯤 자세를 틀고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감상을 쏟아놓는다 이국의 땅을 돌아온 침묵이 달의 계곡에 쌓이고 있다 들끓는 그 곳을 건너는 거인이 당신의 꿈을 꾸고 있다 길은 달의 뒷면으로 이어져있다 당신이 수도꼭지를 틀고 화병의 물을 가는 사이 달이 몸을 튼다 거인이 심연을 낚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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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늘 푸른 응급실 / 이언지

 

사람들은 신중한 보폭으로 그곳을 찾는다

 

푸른 링거병을 든 나무 간호사들은 한결같이 친절하다

 

피톤치드를 처방하는 의사의 얼굴은 깊이 아파 본 자에게만 보일 것이다

 

ㅡ산이 뚜벅뚜벅 내게로 걸어온 순간 먼 슬픔은 시작되었다

 

하룻밤 사이 한층 다복한 꽃송이를 달고 선 산벚나무 아래

 

그곳 어디쯤에 흘렸을 내 눈물의 부스러기들을 더듬으며 산벚나무 하얀 꽃들을 올려다본다

 

제 살로 초록빛 띠를 두른 리기다소나무 옆

 

길게 팔을 늘어뜨린 산벚나무 하얀 손이 어깨를 건드린다

 

마주잡은 손의 감촉이 서늘하다

 

서늘함 속에 따뜻한 미소를 담고 사는 이들의 방

 

하얀 꽃잎 다섯 장에 서린 심연의 기둥을 들여다본다

 

사라져 갈 것이다 그 꽃들, 사라져 영원을 돌볼 것이다

 

ㅡ나를 괴롭히고 고문하던 모든 것들을 서스펜스라고 하자

 

그때 점점 가까이 다가오던 노랫소리

 

홀로 오는 이들은 허리춤에 노래를 달고 오기도 하는데

 

기댄 사람, 누운 사람, 소리 지르는 사람

 

마른 소나무 거꾸로 매달려 절벽에 의지하듯*

 

한순간 몸을 열어 귀 기울이다 보면 아픈 시간도 금세 지나갈 것이다

 

늘 푸른 응급실

 

그곳은 따뜻한 밖이며 서늘한 안이다

 

처방전을 들고 내려오는 사람들의 얼굴이 한 잎 나뭇잎을 닮았다

 

* 이백 촉도난

 

 

 

 

 

[우수상] 유형별 연애지침서 / 이면

 

 

 

 

 

 

 

 

 

[우수상] 꿈꾸는 거인 / 김효용

 

달의 지면을 외눈의 거인이 걷는다 당신의 방까지 이어진 가느다란 진동을 오랜 청취자와 화병이 듣고 있다 수도곡지가 반쯤 자세를 틀고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감상을 쏟아놓는다 이국의 땅을 돌아온 침묵이 달의 계곡에 쌓이고 있다 들끓는 그곳을 건너는 거인이 당신의 꿈을 꾸고 있다 길은 달의 뒷면으로 이어져 있다 당신이 수도꼭지를 틀고 화병의 물을 가는 사이 달이 몸을 튼다 거인이 심연을 낚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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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귓바퀴 / 곽예


찢어지고 뭉개진 네 귓바퀴

꽃잎 같다

핵폭발이 일어나도 꽃잎은

입구를 막고 고요히 필 것만 같다

어머니 울음 돌아 나오고

사람들 웅성거림 집으로 가고

이윽고 벌레가 먹는다 해도

구멍 난 채 바퀴로 구를 것 같다

언덕을 넘어간 선명한 자국

쓰다듬다 엎드려 입술을 대고

상준아 부르면

바퀴는 눈물을 흘릴 것 같다





<은상>



부활 / 함선영


사과를 반으로 쪼갠다


한 쌍의 나비





<동상>


귓속 / 황재윤


  마이산 가보이 고거 진짜 말귀 같데 봉우리가, 아짐메 아이씨들이랑 부처, 보살도 그 들앉아서 북치고 종치고 떠들어싸이 고마 그 큰 귀때기 뒤에 구멍이 송 송 뚫렸데 그래도 신음 하나 안 내고 재재 앓는 소리들 다들어주이 ‘아구, 아~야, 으짜긋노 우리 아’ 하면서 바람 불러다 온 전신 쓰다듬으이, 첨엔 뭐 이런 게 다 있노 싶데 그다 가만 보이 구멍 뚫린 데도 이 귀때기봉우리가 들앉았더라고! 신기하데 또 이갑룡인가 하는 도사가 돌삐 가져다 막 쌓은 탑들이, 태풍불어도 끄덕안한다카던데, 갸들도 밤 되모 몰래 그 귀때기 안에 안 들갔다 오겄나? 기적 어쩌구 사람들 씨부리는 것도 다 모리는 소리! 부처도 귀가 안 크더나 이 귀때기는 마, 말하면 숨차다


  근데 하산해서 지하철 타니까, 사람들이 주둥일 명태포처럼 길게 펼쳐서 보고 있는데 거기 사람도 울고, 소도 울고, 저 북극의 빙하도 눈물을 기냥 뚜욱 뚝, 그기 열 받은 땅 뒤치락거리는 몸짓도 있데, 좀 자세히 보이 양복 입고 인물은 훤한 것들이 주디는 남산만하더라꼬 고마 확, 들어가서 깨뿌고 싶더라 귀에 안테나를 쌔리 달아도 시원찮을 판에 아후, 갑자기 열불 나네, 에고 내사마 말 고마 할란다 그 갔다 오이 눈에 비는 게 다 주디든데, 입 닫고 인자 어둑어둑해져야지 않겄나 저 밤하늘 봐라, 별이 마 수두룩하이 쫑알 안거리나 길 구석에 주둥이빌딩들 불뚝, 불뚝, 내 맴 구석에도 솟을 기 눈에 훤하다 그기다 내 안 보이모 내 갈기 휘날리도록 구석구석 주둥이 찾으러 내뺀 깅께, 그리 알아라, 알긋쩨?

 

 

<장려상>
 

소리길 / 김설진

 

미처 몰랐다
소리도 길이 있다는 걸,

후비고 쑤셔도 불평 없던 귀가 말썽이다
이명과 두통을 동반한 성난 소리길
기막히게, 귓속에 또 하나의 길을 만들었다
밖으로 나가는 길을 찾지 못한 말들이 머릿속에서
우왕좌왕, 들어선 말도 돌려 세워 동문서답,
간단한 수술과 처치로 며칠이면 정상일 거라는데
한 평 남짓, 철저한 고요 청각실에 갇히고 나서야
간질거리는 귀지 소리도 반갑다 몸의 물길이 말라가는 나이,
이제야 귀를 열어본다

귀에 단 소리만 듣고 쓴 소리는 막아 버렸던 시간
말라가는 소리샘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쏟아낸 말이 누군가의 건조한 귀지가 되어 떨어져 나온다

귀를 막으면
소리는 나가지도, 들어오지도 않을 것이다
달팽이관이 걸러내고 전정기관이 중심을 잡아주는
정제된 문장들, 모든 것들이 내는 소리는 보이지 않는 생의 지침서
억지 이정표를 세워두면 그 자리에 멈추어 버리기도 한다
가끔은 촉촉한 귀지로 보호막을 세워야 한다

병원 입구
붉은 조끼를 입은 직원들
임금인상을 외치고 있다
귀는 막고 입만 열어둔
길 잃은 소리가 와르르 쏟아진다

 

 
 

갯벌도서관 / 권여원

 

썰물에 열리는 점자도서관
밤새 불어난 목록들이 물때에 맞춰 진열되면
하나둘 손님이 들기 시작하지요
어제 대여해 간 태양은 반납이 되어
도서관에 불을 켜지 않아도 환해요
언젠가는 빌려간 책이 돌아오지 않아
며칠째 비가 내린 적도 있지요
농게는 갯벌에 새겨놓은 점자책이 젖었다고 뻘을 말리고
백로는 장문으로 쓴 고둥의 편지를 곁눈질 하고 있어요
고개 숙여 젖은 책을 읽을 때마다 갈매기 사서는
바짝 긴장하지요 목록에서 빠진 것들을 기록해야 하거든요
눈치 빠른 도둑게는 쪽수에 구멍을 내고 글자를 삼키고 있어요
게구멍끼리 이은 점들을 따라가면
도형의 비밀이 풀리거든요
갯벌은 커다란 노트, 새끼 게가 갓 배운 글씨를
비뚤비뚤 뒷발로 쓰고 있고
사람들도 몰려와 호미로 쪽수를 넘기며
뻘밭에 엎드려 바다를 읽고 있네요
높이뛰기로 밀물과의 거리를 측정하고 있는 짱둥어
저만큼 밀물이 다가와요
어제는 뻘게가 쓴 일기장이 지워졌다고 투덜거렸어요
이제 문을 닫아야 하는 시간
누군가 또 태양을 빌려갔는지 어둑해졌어요
갯벌에 그어진 밑줄만 잘 읽어도 그날 양식은 두둑해진다던
갈매기가 밀물에 진흙 발을 씻고 있네요
갈매기 사서는 대여해간 목록을 체크하며
긴 부리로 하루를 넘기고 있어요
더듬거리며 읽던 갯벌의 문장들
밀물이 한 장 한 장 넘기고 있어요

 

 

 

우수상

 

은행잎과 은행 / 김진기


장대비가 다녀간 후

길가 은행나무에 빳빳한 오만 원 신권이 열렸다

나는 바삐 돈을 따서 주머니에 구겨 넣는다

그래도 어쩐지 불안하다


이때 내 핸드폰이 자지러진다

은행이다

받자니 비수가 날아 올 것이고 안받자니 후환이 두렵다

강한 자력에 내 몸은 졸아 들고

밀려들 불안감에

바지가랑이에서 은행 알이 후두두 쏟아진다

두리번거리다가 나는 대낮에 극장으로 몸을 감춘다

 

어둠은 좋다

삼복을 밀어낸 자리에 서늘한 냉기를 채워 놓았다

바닥에 캐시밀론 음악을 깔고 그 위에 배우 특유의

자장가로 잠의 질감을 높인다

나는 눈을 감고 7급 공무원을 본다

맞아,

나는 그때 무조건 공무원으로 갔어야 했다

그랬다면 지금의 불황 따위는 남의 일


내 통장은 날로 도톰하게 살이 불어났을 것이다

영화는 끝났다

그러나 앞이 캄캄하다

무엇이 발목을 잡는다

잠결에 안경을 떨어뜨린 것이다

더듬더듬 안경을 찾아 끼고 바깥을 나오니

이번엔 주머니 속 핸드폰이 사라졌다

은행은 그의 멱살을 잡고 사정없이 흔들 것이고

그는 홀로 이 난관을 견딜 것이다


거리의 은행나무가 바닥에 엎드려 독촉장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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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삽 / 이종섶

 

   오래 쓰면 쓸수록 뾰족한 그곳이 둥그런 엉덩이처럼 변해가는 삽, 처음부터 찌르기 위해 만들어진 삽날은 흙을 갈아엎고 퍼 나르는 동안 닳고 닳아 유순하게 변화되기까지 수없는 세월을 홀로 울며 견뎌야 했다

 

 

   조금씩 추해지는 표정을 감추려고 찬물로 세수하는 것도 잠시뿐, 쓰레받기로나 쓰이는 늘그막이 되어서야 위협적인 꼭지 부드럽게 깎여 거름더미라도 한 짐 푸짐하게 퍼주고 싶은 착하디착한 곡선으로 변한 것이다

 

 

   땅을 파면 팔수록 산봉우리 닮아가고 모래를 뜨면 뜰수록 물의 흐름 배워가는 삽 한 자루의 성실한 노동 앞에 겸손히 머리 숙이고 싶은 날, 평생 맞서기만 하던 땅위에 서서 일방적으로 저지른 잘못을 사과라도 하듯 자근자근 눌러보는 삽날의 애교

 

 

   나의 노년도 저랬으면 좋겠다 싶어 몇 군데 짚이는 곳을 슬며시 만져보지만 여전히 느껴지는 딱딱한 감촉, 남을 찌르며 살아야했던 아픔을 언제까지 겪어야 하는지 알 수 없어 괴로운 밤 땅을 파기 위해 삽질을 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을 다스리기 위해 땅을 파야했던 삽 한 자루의 수행이 떠오른다

 

 

   땅은 삽날을 갈아내기 위한 숫돌이었을까 강할수록 부드러운 숫돌을 사용해야 한다며 꼬리뼈의 흔적조차 완전히 없애버린 그곳을 내놓고 다니는 짐승 한 마리, 모든 것을 달관한 자세 하나 얻기 위해 날카로운 송곳니도 사나운 포효도 다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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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어느 전시회  / 박노혁
 


살아온 시간들은 소멸되지 않는다.
 
기억들은 집을 짓고
저마다의 마을을 이루며 살아 가고 있다.
때로 길이 끊어져 영원히 갈수 없는 별이 되었다해도
그곳에서 고스란히 살아 숨쉬고 있다.
 
그리하여 삶이 잔잔해지는 어느 늦은 오후에
꿈틀거리며, 기억들은 시간의 문을 두드린다.
 
유년의 마당에서
젊은 아버지가 나를 목마 태우고 환하게 웃고 서 계신다..
나의 첫사랑이
목련나무아래 기대어 낙화처럼 손짓하고 잇다.
바람의 자락을 잡고 춤추는 보리밭
작은 새와 잠자리, 나비. 양떼구름. 붉은 입술처럽 번지는
버들피리 불며 뛰어놀던 기억의 능선.
 
지나간 시간은 스쳐지나온 액자속의 그림들처럼.
차곡차곡 기억의 마을로 사라져 가고.
그리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다하는 날
밤하는 별들처럼 하늘 한켠에
빼곡히 전시되어 있으리라.
 
지워지지 않는 그리움이여..

 

 

 

금상

 

누이가 오래 된 집으로 걸어온다 / 김영호


1. 

 귀가를 서두르는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장맛비에 젖는다 세족식처럼 길이 씻긴다 가로등 불빛이 울음을 그친 눈빛 같다 실직한지 오래인 아버지 우중충 젖은 벽지에 한숨이 머리를 박는다 책가방이 흠뻑 젖어있다


2. 

 몇 시간째 눈이 내린다 꿈의 세계로 달려가던 밤이 나침반을 내 던지자 장판 아래 어두운 구들 틈새 사이를 비집고 그림자도 없는 일산화탄소가 방안으로 들어온다 창백한 꿈속에서 차례로 기어 나온 동생들과 누이가 윗목에 엎어진다 한 장씩 늦은 책장을 넘기던 내 눈에 아슬아슬한 뉴스의 한 장면이 스친다 어디선가 북 소리가 불안하게 울린다 하늘에 오르지 못한 하얀 눈이 쓸모없는 날개처럼 굴뚝에 처박혀 있다


3. 

꺼지지 않는 연탄불은 

어머니의 뜨거운 사랑이다


소리 없이 시작되는 연극처럼 

새벽을 연 어머니  

부엌에서 밥솥의 하얀 김이 안개의 발원지처럼 솟고

끼니마다 상에 오르는 콩나물 냄새가

문틈 사이를 지나 동 트기 전 어두운 새벽을 깨운다

 

연탄불에 엉덩이를 댄 세숫대야엔

언제나 조용히 물이 끓고 

그 물을 아끼며 식구들이 차례로 잠을 털어낸다


창호지에 찬란한 아침이 드리우면

오늘의 기대감이 외출 할 시간이다 


4.

 오래 되어 거뭇한 손과 어두워진 눈이 바늘귀에 실을 꽂듯 고등학교를 졸업한 누이는 우유회사 꿈 많은 스무 살 신입사원이었다 적은 월급이 대나무 살처럼 가늘게 쪼개져도 누이의 얼굴은 늘 갓 따온 채소처럼 파랬다 서른을 넘겨 만난 서글서글한 인상의 그 사내를 따라 미국으로 간 누이의 목소리는 일요일이면 어머니의 안부를 살피기 위하여 안방에 나타났다 바람난 그 사내가 언젠가 집을 나갔다는 말이 송곳 같았다 뜨거운 연탄불같은 사랑으로 아들을 키우는 누이의 한 쪽 턱이 헤쓱한 하현달처럼 차츰 기울어갔다


누이가 오래된 집으로 걸어온다 선인장 화분에서 백년에 한번 피는 보랏빛 꽃이 봉긋 솟아오른다


 늘 끼고 살던 시집과도 멀어진 듯한 요즘이다. 진달래 피고 뜰앞에 백목련이 눈부시게 피어나니 자구만 옛생각에 젖어든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으며 시를 읽는다. 김영호의 '누이가 오래된 집으로 돌아온다'를 읽으면 가슴 아래께에 아득한 통증이 느껴진다.
 

 

 

 

우수상

 

그 여자의 바다 / 김명숙

 

바다가 길을 내어 놓는다


포구를 떠나간 사내가 돌아오지 않자

바다를 통째로 마시겠다던 그녀

사내를 기다리다 썰물이 되어 나섰다


바다 끝자락까지 가면 사내가 있을 것 같아

질벅한 갯벌의 사타구니도 마다하고

수평선을 향해 내닫는다

 

바다만 바라보다 섬이 되고팠던 여자

그 사내에게만 치마를 벗고 싶었던 여자

덕지덕지 바위에 붙어 있는 따개비 같은 상처가

그녀 안에서 구획을 넓혔다

 

뚝심 좋은 사내가 미끼를 던져도

아랫입술 질끈 깨물며

애꿎은 손톱만 물어뜯던 날들이

그녀 앞에 쌓여갔다, 깻단에서 깨 쏟아지듯.


섬을 떠난 그녀,

어부가 된 남자의 바다가 된다

 

 

본심 심사위원 약력

 

심사위원장 / 조병무

 

시부문

조병무. 평론가, 시인

호는 평리(平里) 함안 고향, 마산 성장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현대문학’(‘63-’65) 문학평론으로 등단.

수상 :

현대문학상. 시문학상, 윤동주 문학상 본상. 동국문학상. 조연현 문학상 등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장.

문학평론가 협회 부회장.

‘96문학의 해 기획팀장 및 기획분과회장,

군포문인협회 회장.

동덕여대 문예창작과 교수 역임.

현 한국문인협회 이사,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이사, 한국현대시인협회 고문 및 평의원, 문학의 집 서울 이사, 군포신문 논설위원,

저서 : 문학평론집 : 『가설의 옹호』『새로운 명제』『존재와 소유의 문학』『시짜기와 시쓰기』,『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문학작품의 표현과 기술』『한국소설묘사사전(전6권)』

시집 :『꿈 사설』『떠나가는 시간』『머문 자리 그대로』, 수필집 『니그로오다 황금사슴』『꽃바람 불던 날』『기호가 말을 한다』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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