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 빨간 장날 / 이여원
빨간 장날에는 슬쩍 훔치고 싶은 것들이 많지만 하늘이 맑아서 예비용 서답이 없는 처녀들은 불안합니다 음전이 할머니도 오늘만큼은 빨간 몸빼를 갈아입고 빨간 장미 무늬 양산을 쓰고 왔군요 빨간색에 민망한 파란꼭지를 단 파프리카가 파라솔 아래 담겨있고요
빨간 날은 빨강들이 옹기종기 건너오고 있습니다 그날은 기상예보처럼 빨간 게 무겁고 가벼울 수도 있습니다 운수처럼. 장날은 빨간 쉼표 같은 날, 아랫배부터 살살 흥이 올라 파장까지 번져 올라갈 수도 있습니다
되바라진 처녀들이 올 적마다 주머니가 불룩해져 가고 얼굴은 빨개집니다 초록색 지붕의 범수 아제도 하얀 삼베적삼에 빨간 목수건 걸치고 붉은 팥을 경운기에 싣고 왔군요 모두들 꽁꽁 숨는 빨간색과 드러내는 빨강이 숨바꼭질하듯 합니다
월요일의 빨간 수탉벼슬을 따라가면 빨간 일요일이 나오고 일요일 처녀 일요일 소녀 일요일 폐경들이 왁자한 장날입니다
모든 빨강은 식욕의 끝에서 자라고 있는데 흰 바지 밑에 빨간 양말 아저씨는 왜 나이가 들수록 빨간색을 묻히려고 할까요
구름의 한쪽 끝에서 빨간색이 터집니다
아슬아슬한 나이들이 모여들어 뭉게구름을 만듭니다 빨간 장날이 되면 사르르 아픈 배 챙겨 온 새털구름은 다 흘러 가버리고 발을 동동 구릅니다 빨간 고추잠자리 서너 마리가 날고 서쪽으로 뉘엿거리는 하늘빛이 붉습니다
[우수상] 워킹데이 / 김말희
이제부터 시작하자 하나, 둘, 셋 낮은 휘파람이 꽃들을 깨운다
무작정 걸어본 날 밀물처럼 숨을 들이키자 신이 내게 속삭인다.
참 오랜만이지? 문화회관 창문 틈으로 노인들의 느린 동작과 노랫가락들, 모두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변함없이 도로를 지키고 있는 저 나무들은 몇 해를 지나도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성이고,
생리대와 양말 몇 켤레, 스타킹, 난전에서 파는 속옷을 담은 검은 봉지가 어색하지 않다
사람들은 오래된 반지의 색을 복구시키는 방법을 묻는다
변한 것을 복구하는 일이란 여과의 과정을 거치는 것, 여과시켜야 할 무엇을 생각했다
나를 통과한 빛과 물과 음식들까지, 지구 밖으로 뱉어내었던 수많은 찌꺼기들은 여과된 물질의 잔재, 걷는다는 것은 그것들을 걷어내는 일, 해를 바라보며 피어나는 꽃들의 속도를 따라 하나, 둘, 셋 서성이던 나무들 속으로 경쾌하게 걸어든다
[우수상] 후 / 김태희
바람은 별 수 없이 한 쪽으로만 불었다.
모든 것이 죽고 나면 이것들을 기록하지 못할 것 같아
바람은 이 세계보다 조금 더 앞에 서 있었다.
거짓말의 뒷면을 보며 비웃는 날이면
여름의 폭염보다, 겨울의 폭설보다
더 고약한 하나의 계절처럼
덜 자란 아이들의 등을 떠밀었다.
그것은 비겁했다.
하지만 바람은 세계를 닮아 있었고,
아이들은 이제 막 색종이를 가위로 자르는 법을
배우느라 고요했다.
사랑은 바람을 따라 깔깔 거렸지만,
다 자라난 아이들은 귀를 틀어막고
제 자리에 앉아만 있었다.
아이들의 사랑은 동화책을 따라 그린
연습장 속에 차곡차곡 쌓였다.
잘 잘라 만든 색종이는 제목이 되어
정성스럽게 붙어 있었다.
바람은 벌써 세계를 한 바퀴 돌아왔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다 큰 아이들은 아직도 등교하는
길 위에 나타난다.
바람은 쉰 냄새를 흉내 낸다.
그것이 모두가 싫어하는 것이란 걸
알게 되었다.
뿌리가 자유로운 야생화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다는 사실과
모두에게 퇴화되지 않는 다른 모양의
퍼즐이 그려져 있다는 사실을 숨긴다.
어느 기록의 한 줄에도
바람은 불었다 로 남을 것이고,
거짓말의 앞을 본적 없는
바람의 방향은 언제나
우리가 고개를 돌리고 난 후,
일 것이다.
[우수상] 바람의 학명 / 설수인
순을 잘라내도 웃자라는 저 파릇파릇한 분열증,
소란은 햇살이 노랗게 질릴 때 까지 깊어진다
용수철의 용도는 눌러앉지 않겠다는 뜻이고
눌러놓지 못하는 바람 한 장이 들어있다
바람의 학명은 메니에르증후군,* 바람의 문양은 달팽이모양이다
별이 빛나는 밤에 떠도는 반 고흐
귀가 없는 바람이었을까
달팽이는 숲속의 공주
온 몸을 도르르 말고 버려진 사과처럼 잠은 계속된다
마법은 사과의 껍질처럼 도르르 벗겨졌을까
바람을 눈으로 맞으면 눈물이 흐르고
머리카락에 묻은 바람은 오랫동안 헝클어져 있다
귀로 들어오는 바람소리는 위험하다
뿌리가 있는 바람은 병이 된다
이 병의 치료방법은 습기 많은 여름을
한동안 창문에 묶어 놓는 것
바람꽃은 바람 없이도 흔들린다
흔들리는 순간을 관계라고 한다면 소통은 이명 같은 것
고요가 가득 들어있는 침묵, 바람이 없는 병
바람은 제 씨앗을 꽃의 수술로 삼는다.
소용돌이 뼈를 갖고 있는 바람의 학명은
지금 침대에 묶여 있다
* 메니에르병:내이(內耳)의 질환
[심사평]
요즘 몇 몇 심사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심사위원들의 중론은 ‘시 참 잘 쓴다’다. 잘 쓰는 데 막상 뽑자고 들면 선뜻 손에 잡히는 작품이 없이 망설여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잘 쓴 시들’의 공통점은 모두 비슷비슷하다는 점이다. 잘 쓰긴 했으나 그 시들이 삶의 매듭 매듭에서 간절히 흘러나왔다기보다 책상머리에서 만들어진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말을 잘 다루는 것이지 시의 본질, 삶의 본질에서 노래되어 나온 시가 아니란 얘기다. 공허한 말의 성찬이다. 제품화혹은 규격화 되어간다고나 할까? 되려 서툴고 어눌한 시를 눈여겨보게 된다. 거기에서 따스함과 시의 본질을 보게 된다. 시의 울림 대신 기교가 차지한 셈이다. 생각해봐야 할 점이다.
<빨간 장날>을 보내주신 이여원 씨의 시는 우선 독특한 색감에 초점을 맞춘 점이 참신했다. 우리네 삶의 낮은 자리요 소박한 욕망의 거리라고 할 수 있는 ‘장날’의 풍속을 ‘빨강’에 대비시키다는 것은 쉽게 얻을 수 있는 발상은 아니다. 그만큼 발랄한 시선으로 포착한 장날이지만 발랄한 세계만을 보여줄 수는 없는 노릇. 남녀노소, 희로애락이 여러 색채의 대비을 통해 스러져가는 청춘과 인생을 은유화해 들어간 점이 좋았다. 사랑스런 풍속화를 보여준 수작이었다. <워킹 데이> 의 김말희 씨의 시도 활달하다. 어느 날 문득 ‘걷는다’. 오랜 만에 걷게 된 감격인지 아니면 ‘걷는 것에 대한 의식’인지 알 수 없으나 새삼 세계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는 것처럼 신나고 아름다운 일이 어디 있으랴. 걸음걸이에서 만나는 사물들은 모두 긍정의 표정으로 다가오고 있다. 새삼 몸으로 만나고 표현된 시간과 공간의 실감이 좋았다.
시에 순위가 있다는 것처럼 넌센스도 없다. 그러나 어쩌랴. 운이 부족한 여러 분들에게 섭섭한 마음을 전하며 ‘순위’에 든 분들에게 우주적 축하를 보냅니다.
심사위원: 윤제림, 장석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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