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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 차호지

 

 

오전이 다 가도록 누워 있었다 몸을 뒤척이고 이불을 걷어내고 다시 덮고 창문을 조금 열었다 바깥에서 열차가 들어오며 나가는 소리가 들리고 천장에 창문 무늬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방 안에는 필요한 것이 모두 있었지만 한번 사용하고 난 것을 다시 사용할 수는 없어서 새 것을 가지려  누군가 나가야 했다 나간 사람은 다시 돌아와야 했고 돌아오면 다시 누워야 했다 누워서 창문을 보다가 창문을 창문이라고 생각해도 되는지 묻고 아직 그래도 되겠지요? 그래선 안 된다고 대답한 사람이 창문을 찾으러 나갔다가 바깥에는 창문이 여러 개 있어 어느 것을 가져와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고 침대에 누워 창밖을 보며 무엇이 새 것인 창문입니까?  창 밖으로 보이는창문을 가리키며 이것이다 저것이다 안에 뭐가 있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말했던 사람이 창문을 향해 나가고 열차에서 내린 사람이 열차에 타기 위해 열차가 멈추는 동안 창문을 통과한 새가 방으로 들어오고 새 것이었던 새를 찾으려 천장으로 걸어오는 사람이었던 이들과 천장에서 멀어지는 열차를 보며 침대에 누워 말했다 여기에 오기까지 통과해온 창문 속에 무엇이 있었는지 그 안은 너무 좁고 들어온 것들이 나가지 않고 있었다고

 

 

 

 

 

 

모험 / 차호지

 

 

친구는 떠났다. 내게 책을 맡기고 갔다

 

나는 책과 함께 떠났다

 

품에 안긴 책은 자구 흘러내린다. 나는 아무래도 길을 잃은 것 같다

 

친구가 돌아왔으면 좋겠다. 책을 데려갔으면 좋겠다

 

집을 찾아갈 수 있겠니?

 

책을 안고 구부정하게 걷는다

 

집에 가자. 책에 대고 말한다. 계속 말한다

 

책이 말을 하면 친구는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도망간다. 내가 왜 도망을 가고 있지?

 

도로는 텅 비어 있다

 

책을 가방에 넣으려고 하자 서점 직원이 나타나 내가 책을 훔친다고 말한다

 

 

 

 

 

 

카운터포인트 / 차호지

 

 

방금 총성이 들렸다고 아침 조깅을 즐기던 외국인이 말했다. 나는 해변에 넘어져 있었다. 아직 개와 산책하는 주인도 없는 모래사장에. 없는 모서리에 걸려 넘어지는 척을 했는데 정말 넘어져버렸다. 파도치는 해변을 보고 파도가 밀려가고 밀려오는 소리를 들으면서. 밀려가고 밀려오는 걸 이해하지 못하면서. 여기 봐요. 무릎에 모래도 조개도 묻지 않았어요. 아가 깨진 유리를 발로 밟았는데 상처도 없어요. 밝히는게 없었거든요. 느낌이 이상해서 신발을 벗었는데 여기 바닥에 아무것도 없어요. 모래사장에서. 그렇게 여기서 같이 걷기로 한 사람과 통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신기하다. 신기해서 같이 와보고 싶었어. 수화기 너머에서 그 사람은 춥다고 말했습니다. 감기에 걸렸느냐고 물으니 밖ㅔ 눈이 내리고 잇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여름이고 그 삶과 나는 같은 호텔에 묵고 잇습니다. 나는 그 사람의 거짓말이 속상해 울었습니다. 그 사람은 나를 달랩니다. 그렇지만 눈이 오고 있는데 눈이 오지 않는다고 말하면 그건 거짓말이잖아. 그렇지. 눈이 오지 않는데 오고 있다고 말하면 그것도 거짓말이지. 그렇게 통화가 끝나고 우리는 왜 언제나 이럴까 왜 만날 수 없을까 골똘히 생각하며 걷다가 외국인을 만나고 외국인에게 말하고 외국인은 이해하지 못한다. 총성을 듣고 생각이 났다. 우리는 반대 방향으로 발사되었던 것이다.

 

 

 

 

 

 

 

캉기 / 차호지

 

 

캉기 씨는 유명하다. 친구와 나는 종종 캉기 씨 이야기를 한다. 그날도 캉기 씨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저 사람 캉기 씨 아니야? 친구가 말했다. 창밖을 보니 캉기 씨처럼 생긴 사람이 걷고 있었다. 세상엔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많지. 그런데 그건 정말 캉기 씨였다. 친구와 나는 창문 너머 캉기 씨의 걷는 옆모습을 보며 캉기 씨의 본명에 관해 이야기한다. 친구는 그걸 알고 있고 나는 모르고 있다. 나는 멋쩍어하며 진자 이름이 캉기 씨인 캉기 씨에 대해 생각한다. 캉기 씨는 나의 먼 친구와 함께 본 단편 영화제의 단편에 조연으로 출연한 적이 있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캉기 씨의 이름을 보지 않았다면 주인공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던 사람이 캉기 씨였다는 걸 몰랐을 거였다. 펄럭이는 하얀 이불 빨래를 배경으로 캉기 씨의 옆얼굴이 정지해 있다. 친구는 울기 시작한다. 작년에 죽은 친구 캉기 씨 생각이 난다고 했다. 친구가 핸드폰에 저장된 캉기 씨 사진을 보여주었다. 캉기 씨는 카메라를 보고 있지 않다. 친구와 나는 캉기 씨가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 한참 이야기했다. 그동안 친구와 나는 자리를 계속 옮긴다. 좌석은 텅텅 ㅂ비어 있다. 캉기 씨는 무척 천천히 걷고 있다. 걸으면서 가가워지고 있다. 친구 얼굴에 캉기 씨 옆얼굴 모양으로 그림자가 드리운다. 캉기 씨의 이마와 캉기 씨의 코와 코가 닿아 있다. 그림자는 점점 둥글어진다. 얼굴 위에 얼굴이; 덮인다. 캉기 씨가...... 우리는 계속 이야기한다. 캉기 씨는 이쪽을 보고 있었을까?

 

 

 

 

 

 

 

의인법 / 차호지

 

 

친구가 말했다 나는 일찍 죽을 거야 죽겠다는 말이야? 묻자 그건 아니라고 했다 친구는 건강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니었다 종일 어딘가 아프다고 했다 다리가 아프거나 배가 아프거나...... 친구는 물병 뚜껑을 열지 못할 만큼 힘이 약했지만 그렇다고 애를 스면 열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친구가 내민 물병을 나는 열어 왔다 그런 말 하지 마 말하면서도 친구가 오래 살지 못한다는 게 정말일 것 같았다 깨어 있는 대부분 시간에 친구는 잠을 잤다 잠을 자는 동안 친구의 친구들이 친구를 찾아왔다 친구는 아직 자고 있어 아직도? 곤란한 얼굴로 친구의 친구들이 떠나갔다 그들은 이전에도 몇 번인가 친구를 찾아왔었다 다음에 또 올지는 모르겠어 새벽녘 잠시 눈을 뜬 친구에게 그렇게 말했다 친구는 알겠다고 말하고 금방 다시 잠들었다 친구는 이제 잘 깨어나지 않는다 나는 친구 대신 친구의 일을 보는 게 익숙해진다 뚜껑을 돌려 여는 것처럼 내게는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친구 대신 친구의 옷을 사고 친구의 친구들을 만났다 친구 몫의 밥을 먹었다 친구의 일을 하고 친구가 받아야 할 돈을 받았다 그 돈으로 누워 있는 이불을 바꿀 것이다 겨울이 오고 있었다 따뜻한 이불이 있었으면 좋겠다 친구는 그렇게 생각할 것 같았다 친구는 점점 늦게 눈을 뜬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친구가 일어나게 되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일찍 죽게 될 거야 나를 노려보며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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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CTAL / 장미도

 

바이닐은 붉은 색이다 너는 신중히 지문을 고른다 그때의 PRM은 33이었다 비가 내리거나 겹겹이 두터운 목소리를 가지게 되는 날에는 45가 되기도 했다

 

바 자리에서는 같은 방향을 보게 된다

헤드 셸이 바이닐 위로 수평 이동을 하는 것처럼

 

어떤 마음은 물속에 손을 넣어 물거품을 만지는 것 같다

 

통유리 창 안으로 햇빛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고

나날이 익어가는 얼굴이 앉아 있다

 

밤이 오면 산은 하늘보다 어두워진다 경계를 다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어둠 속에서도 왜 여기와 저기가 나뉘는 걸까

너는 빈 의자를 쓰다듬으며 말한다

 

오래도록 바라보고 조심스럽게 만지면

무언가 생길 것 같은 예감

그런 것들은 오래전에 하수구 속으로 흘러 들어갔고

 

누군가는 수영을 한다 누군가는 뜰채로 죽은 벌레를 건져낸다

 빗방울이 수면을 뾰족하게 부수며 낙하한다

 

돌아오는 마음은 찾아가는 발걸음보다 빨랐다

옆모습으로 앉아 있는 사랑

폭이 좁은 허공에서는 왼발을 헛딛게 되고

붙잡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스스로 물속에 뛰어든 개미가 있을까

손이 허공을 휘저어도 밤은 무너짖 않고

 

음악은 뒷면에서도 가능했다

아주 천천히 개미는

앞면에서 앞면의 이쪽으로 이동한다

 

헤드셀은 늘 같은 부분에서 음 이탈을 했다

 

 

 

 

 

젤리의 사생활

 

포장지는 완성되었고 젤리는 불숙 끼어들었다

 

컨베이어 벨트처럼 이동하는 회색 구름

 

젤리는 그저 어느 날 툭 하고 나타난 것이다

영양 정보 설명서는 젤리의 입장을 대변하지 못했다

 

포장지 안에 속해 있다는 사실은 불필요한 긴장을 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유용하지만 젤리를 심리적으로 불편하게 한다는 단점이 있다 한 철학자는 젤리에게 사회적인 성분이 함유되어 있음을 증명하고자 했으나 그 성분이 어떤 맛을 내는 알 수 없었다

 

젤리는 고체도 액체도 아니었으므로 누구에게도 해를 가하지 않았다

손가락은 말랑말랑한 젤리 사이에서 더 말랑말랑한 젤리를 고른다

 

젤리와 손가락을 햇볕에 전시해두면

방부 처리 되지 않은 손가락이 먼저 썩어갈 것이다

 

이것은 젤리에게 어떤 위로도 되지 못한다

 

젤리는 혓바닥을 파랗게 물들이거나 이빨의 틈새를 파고들 수도 있겠다 미각을 뒤엎은 젤리는 질리지도 않고 포장지와 함께 늙어갈 수도 있겠다

젤리는 모든 기대를 저버릴 수 있다

 

어제의 구름이 지나가고 오늘의 구름이 되돌아왔다

구름의 뒤통수가 같은 색이었던가 젤리는 알 수 없다

 

당신이 모르는 당신의 틈에서

젤리는 당신과 함께 썩어갈 것이다

젤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였다

 

 

 

 

 

델타의 방

 

0

삼가가형의 방 안에 D와 D'와 모르는 사람이 있다

 

0

나는 세 개의 꼭짓점 안에있다 D와 D'사이 기울어지는 선 안에

D는 의자에 앉아 있다

 

0

나는 세 개의 상상 속에 있다 어제의 밤도 휘어지는 새벽도

창밖에는 비가 온다고 하자 비가 내린다

 

0

D가 눈알을 굴린다 죽은 척을 하자 그날처럼 D의 칼끝이 심장을 찌르면 이미 찔렀다 하자 어쩌면 동공에 힘을 풀자 우리는 이미 사각형이라고 하자 D의 정수리에 칼끝을 찍어서 D'를 만든다 D''를 만들어 D와 엮는다 당신은 하나의 점이 된다고 하자

 

허공에 꼭짓점을 찍고 점과 점 사이를 접는다 방을 구긴다 우리는 방금 사랑했다고 하자 방은

 

0

45도 기울어 있다 파이프를 따라 물이 흐르는 소리를 듣는다 물은 아래에서 위로 흐른다

0에서 델타로

 

해야 하는 일보다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그것이 언젠가 해야 하는 일이 되도록

나는 문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타원형의 손잡이를 돌린다

 

0

또 다른 삼각형의 방에서

D는 의자에 앉아 있다 입을 반만 벌리고서

 

델타와 O사이에 D가 있다

 

0

벽을 부수자 파이프 속으로 도망가자 아래에서 O 위로 추락하는 원

 

1

거리를 걸을 때마다 세계를 거대한 방이라고 생각했다

빗소리가 거리에 무수한 꼭짓점을 찍고 있다

 

 

 

 

 

사이에 선

 

선은 사이에 있다 선은 선을 넘어 사이는 단발머리

 

나의 선은 노랑, 품 안에서 잠들고 멀리서 깬다 줄무늬를 삼키는 선, 어둡고 습한 탁자 밑에서 토악질을 한다

 

선은 제일 늦게 뽑힌다 머리를 넘기는 손

머리카락은 계속 자라난다 아프지 않게 자를 수 있다고 믿고 싶다 아프지 않은 건 다 남의 것이다 주머니에 가위를 자기고 다닌다

 

초인종을 눌러도 대답 없는 시계는 나뭇잎을 떨구고 벌레는 동그란 허공을 먹고 몸에 동그라미를 새긴다 선은 서서 그네를 탄다 무릎을 굽히고 도약하는 자세가 된다 선은 뛰어오르고 몸은 남는다

 

모래로 만든 케이크에 나뭇가지가 꽂혀 있다 열은 부러지고 하나만 남는다 생일은 한 번 분이라서

 

손가락은 허공에 동그라미를 그린다 동그라미는 지워지고 손가락은 몸으로 돌아온다 손가락을 자르려면 손가락이 필요해서 자르지 못한다

 

가을과 몸은 등을 돌리고 잔다 아무렇지 않게 전구를 갈고 쏟아지고 엎어진 것들을 주워 담는다 원래대로 돌려놓으면 몸이 자란다 몸은 벽에 기대어 잠들고 옆자리에 앉은 사람과 어깨를 부딪친다

 

죽은 것에는 다른 이름을 붙여줘야 한다 죽은 선을 죽은 선이라고 부르면 안 된다 오늘을 어제라고 부르듯이 손가락 끝에 동그라미가 남듯이

 

초가 타오르고 촛농이 남는다 왜 케이크에는 아무 향도 나지 않는 초를 꽂는 걸까 잘린 머리카락이 바닥에 흩어져 있다

 

뛰어오른 건 무엇일까 이번 생은 한 번뿐이어서 다행이야 그런 생각은 생일 전후에 떠오른다

 

바다에 가기로 했었잖아 속눈썹이 눈을 자른다

 

무기명으로 발소리가 도착한다

선, 안 밟았어

 

 

 

 

 

레이스와

 

호수는 얼어붙고 쉽게 한 방이 된다 열린 창문 안족에는 레이스 레이스 커튼, 커튼을 찢으며 햇빛이 들어온다

 

커튼을 뚫리는 벽 실금이 뿌리 내린 흰 벽에 커튼의 그림자가 인쇄된다 접을 수 없는 페이지 벽은

 

움직이지 않는 커튼 정지한 수면

창밖이 흔들리고 갓 태어난 그림자의 얼굴이 뒤섞인다 그림자는 아니 벽은 서늘해서

 

고양이가 고양이의 그림자를 깔고 앉아 있다 3시에는 없었고 방문까지 닿을 것 같다가, 벗어날 것 같다가, 4시에는 약간

 

어떻게 약간이 가능하니 약간은 숨을 쉬는 내가 말한다

고양이는 입을 다물고 있다

 

그림자는 거대해지고 고양이를 거대하게 삼키고 옷장을 거울을 씹어 먹는다 거울 속 나와 눈이 마주친다 그림자의 눈은 심장에 붙어 있다 가장자리는 모두 이빨

방을 삼키고 굳은 벽을 핥아 먹는다 수평선 깊숙한 곳에서부터 탄생한 혀로,

 

벽에서는 폐허의 맛이 난다

 

방 안을 가득 채운 레이스

레이스는 쓸모없고 출구도 없이 쉽게 찢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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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 캠프 / 김지연


네가 없었으면 좋겠어

그그렇게 생각한 아침에도

손을 뻗으면 허공에서는 손이 자라났다


그런 아침에도 이불을 떠나고


이것 좀 봐,

자꾸 옆을 돌아보며 걷게 될 때


손안에 들어와 갇히는 풍경이 많았다 손안의 세계를 움켜쥐고 걸었다 그것은 너무 가볍고 너무 작아서 작은 틈새로도 줄줄 흐르기 쉬워서 잡은 손에만 온 마음을 쏟아야 했다


언제였더라 우리는 서울숲을 함께 걷고 있었지

뿔도 없이 동그랗고 작은 머리를 가진 사슴 한 마리가 우리를 쫗아왔어


녀석의 등을 쓰다듬으면 얇은 가죽 아래 움직이는 가느다란 여러 개의 뼈가 느껴졌지


손가락에 닿는 손허리뼈를 어루만지며 걷는 동안

잘못 뭉친 눈송이처럼


손을 떠난 순간 바스러질 것 같던 그 등을 생가괬다


러시아에서는 사슴을 만나면 죽거나 죽이거나, 둘 중 하나래


손목의 끝에 달린 것이 그냥 사라진다면 함께 길을 걷기에 좋은 가볍고 따뜻한 손이 만들어질지도 모른다


잡은 손에만 온 마음을 쏟으며 옆을 돌아볼 수 없는 마음으로 걷다가 앞으로만 향하는 눈빛으로 걷다가 손목의 끝에 달린 것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았을 때


피 흘리는 사슴 한 마리가 도로에 누워 있었다


둘 중 하나는 나여야 했어


사슴을 껴안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기도는 등 뒤의 길을 지웠다


사슴의 굳어가는 몸이 풀을 쓰러뜨리고 있다 발보다 먼저 길을 만들고 있다 누운 풀 위로 발이 겹쳐지고 있다 사슴의 아직 따뜻한 피는 내 발자국으로 굳어간다


눈을 떴을 때 나는 바닷가 별장에 있었다

친구들이 모두 둘러 앉자

바닷물이 집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꽉 잡아


손을 잡으면 손목의 끝에 매달린 인간의 무게는  분명하고 묵직했다








전망대


우리는 빛 대신 꽃을 들고 만났다


오늘은 누군가 집어 던진 돌처럼

깨진 창문 안쪽에 놓여 있다


어둠 속에서

창백한 무대 조명 아래에서

빛을 내는 얼굴을 보면서

봄밤 흰 목련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어


꺼지지 않는 빛을 위해

새 건전지를 넣던 손으로


향을 피우고

올림픽공원을 걸었다


지는 꽃잎은 우리의 발밑에서 악취를 풍기며 문드러지고

목덜미에 붙어 흰빛으로 피부를 비춘다

이것이 아름다움이라는 듯이


거울이 없던 시절의 인간은 어땠을까 강물에 비친 일렁이는 얼굴이라면 미워하지 않기도 쉬웠을까


철문에 기대어 흔들리면서 한강 변을 달리는 무수한 헤드라이트 불빛을 본다 불빛과 겹치며 흔들리는 얼굴을 본다 불빛은 너무 많고 너무 작아서 도무지 사람으로는 느껴지지 않고


여기는 멀리서 보면 아름다운 것들만 가득해

손을 대면 아름다운 것이 자꾸 죽었다


우리의 끝은 다 바스라졌다

이런 식으로도 영원은 만들어진다


누운 이불에서는 아늑하게 들이 베겼다

공원에서 모래를 잔뜩 묻히고 돌아와 잠든

작고 늙은 루*의 곁처럼


빛을 들고 섰을 때 우린 다 늙어버린 것 같았지


꽃을 들고 선 우리는

몸통에 붙은 팔다리가 자기 것인 줄도 모르고 무서워서

몇 시간 전에 태어난 사람들 같았다


* 장모 닥스훈트 소형견 이름 








중력과 은총*


깃털을 베고 잠이 들었다가 깃털이 옮겨붙은 채로 걸었다


여름 바닷가였다

너는 개를 싫어하는 개를 한 마리 데리고 왔다

기다리라고 말했다


흰 발등을 가진 사람들이 오가는 해변은 검은 발자국으로 자욱했다

돌아보는 얼굴과 흔들리는 꼬리로 가득한 해변에서

발이 없는 것처럼 기다리는 그런 개를 두고 걸었다


기다리는 개의 마음은 다른 개들을 쉽게 지운다

너의 개는 한아름 광안리에서도 유일한 개가 되어 엎드릴 수 있다


너무 큰 날개 때문에 제대로 걸을 수 없는 천사 이야기를 알아?

걸음마다 모래에 빠진 발을 꺼내면서

나란히 비틀대던 네가 물었다


신발 끝에서 모래가 흩어졌다

모래에 섞인 것들이 해변의 불빛을 쪼개고 있다

수평선 근처에서 터지다 만 불꽃들은 달빛과 뒤엉키고 있다


바닷가에선 싸구려 불꽃도 이상하게 아름다워

사진으로 본 아름다운 것들은 다 잊자


기다리는 것이 오리라는 것을 그 개는 알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세상의 아름다움이 아닌 것 같았다


보도블럭이 발자국을 지우고 있다

개는 꼬리를 흔든다


병 조각이며 마른 밥알, 깃털이 섞인 모래알이

잔뜻 따라붙은 날개의 천사가 똑바로 걷고 있다


잠에서는 깃털 하나하나가 새라도 된 것처럼 날아다녔다


* 시몬 베유








글라스 하우스*


눈동자는 눈앞의 풍경을 비추고 연인의 눈동자는 등 뒤의 풍경을 비춘다 여름 숲에서 연인의 눈 속은 유리창 너머 실내처럼 무성한 나뭇잎 사이 한 줌의 어둠으로만 보인다


인간의 불안은 벽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옆에서 발생하는 풍경의 모든 순간을 볼 수 있다면 불안하지 않을 거라고, 치과에서도 눈을 감지 못하는 그의 연인은 말했다


그는 여름 내내 일렁이는 나뭇잎 그림자만 보다가 유리로 된 집을 지었다 그 집은 벽 대신 네 개의 커다란 창을 가졌다 눈동자의 실내 같은 그 집에서는 안팎이 사라지고 옆만 남았다 두 사람은 옆이 되어 포개진 풍경이 모두 같은 질감으로 요약되는 세계를 어루만졌다


유리에 부드럽게 흘러넘치는 오후의 햇빛은 우리의 얼굴처럼, 나뭇잎처럼, 이불처럼 매끄럽고 차갑게 보이는 모든 걸 만질 수 있다면 보이는 대로 믿게 되겠지

그런데 왜 왼손이 쥔 옆의 손은 오른손이 만지고 있는 눈앞의 손가 다를까


믿음을 넘치는 온도가 두 사람의 손안에 가득차 있다

그러나 믿음을 넘치는 것을 가장 믿는 것으로 만들어버리고 마는 어린 마음


눈빛은 사물의 뒷면을 깸녀서 나아간다 연인의 눈빛은 피부를 투명하게 만든다 나란히 침대에 누워서 자욱하게 천장을 떠다니는 사물의 뼛가루를 헤아리며 어린 마음은 부서질 ㅅ 없는 뼈를 가진 사람처럼 두려움 없이 웃는다


이제 우리는 너무 가까워서 서로의 눈에 비친 풍경으로만 어디에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네

눈동자에 포개진 붉은 빛 위로 같은 붉은 빛의 눈동자가 겹치고 있어

투명한 피부의 연인을 안으면 팔이 녹았다


불타는 숲을 비추는 유리는 얼린 불꽃처럼 펑펑 깨졌다

차갑고 매끄러운 불꽃이 찬란하게 쏟아진다


큰 숲과 숲의 모든 것이 불탄 여름이었다

잿더미 사이를 걸으며 흩날리다 더 깊은 데로 가라앉는 검은 잎들을 본다


미래 바깥에서 어린 마음이 낡고 있다

어린 마음은 무성한 유리 조각 속에서 자꾸 태어나는 것처럼 누워 있다


* 미국 건축가 필립 존슨이 설계한 사면이 유리로 된 주택







흰 개


어디에나 해가 넘치는 오후였다 해가 넘치는 어디에서 해가 우리를 넘치고 그것이 우리를 지치게 했고 지친 우리의 이마 위로 넘치는 해가 빛났다


물결 위로 해가 넘치고 난간 위로 해가 넘치고 이것이 어떤 오후라도 넘치는 해 아래서 물결은 빛나고 빛나는 물결은 아름답고 아름다운 빛나는 물결 너머 흰 개의 엎드린 등은 희게 빛난다 그것은 곁에 두기에 곁을 주기에 좋은 빛이다


흰 개는 나를 좋아하는 것 같은 흰 개다 발등 위로 나를 좋아하는 흰 개가 턱을 기댈 때 부드럽고 따뜻하고 축축한 것을 기댈 때 우리의 머리 위로 해가 쏟아지고 우리는 함께 빛나고


넘치는 해는 흰 개의 검은 눈으로 넘치다 그 속으로 사라질 것이고 어둠이 내릴 것이고 빛나는 검은 눈 속에서 그 빛은 끝없이 넘치고 흐르고 그것은 모든 것이 어두워진 다음에도 계속될 빛이어서


넘치는 빛 속에서 일어나 발을 털었다 보얗게 이는 흙먼지도 발등 위 흰 개의 흔적도 모두 반짝이는 것이었다


작고 약한 짐승의 놀라운 온기가 거기에 있었다 언제라도 곁을 주기에 곁에 두기에 좋은 온기로 거기에 있다 흰개의 눈 속에서 그 비좁은 무한에서 모두가 믿을 수 없이 가까운 곁에서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온기를 느끼다 믿을 수밖에 없는 마음이 될 것이고 끝없는 처음으로 눈이 내릴 것이고 모든 눈송이가 빠짐없이 상냥할 것이고 우린ㄴ 상냥한 흰 눈을 나눠 맞으며 희게 빛나는 세계를 바라보겠지 바라보면서 갓 지은 흰밥을 나눠 먹겠지 그런 희고 빛나는 온기를 나눈다는 것


넘치는 빛 속에서 모두 빛나는 것이었고 눈이 부신 일이었다고 모든 것이 곁에서 일어난 눈부시게 빛나는 일이었다고 흰 빛을 띠면서 희게 빛나는 눈밭에서 더 흰 빛으로 환해지는 흰 개의 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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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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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의 전개 외


윤은성





영원이라는 말을 쓴다 겨울의 도끼라는 말처럼 우연히 여기라고 쓴다 공원이라고 쓴다 누군가를 지나친 기분이 들었으므로


모자를 벗어두고 기타를 치고 있는가 물구나무를 서고 있는 아이의 다리 위로 그대는 날아가려 하는가 발을 버둥 가릴 때 옷깃을 쥐려 하는 손들이 생기고


손목을 내리찍으려고 돌아다니는 도끼


물이 어는 속도로
얼음이 갈라지는 속도로
겨울의 공원이 생기지. 해가 저물도록 벤치에 앉아서 책을 읽던 사나이여
그대의 곁에서 넘어지고 일어서는 어린 수리공들
우리는 우리의 작업을
언제든 완료할 수 있지,


그저 꽃잎을 떨구면 그저 붉은색

페인트 통을 엎지르면


상점은 짜부라지면서 물건을 토해내지, 상점의 주인처럼 주인의 집주인처럼 이빨들이 썩어가지, 그림자에서는 머리카락이 점점 길어지고 그대의 책장이 넘어가고
또 해가 저물지, 테이블 위의 물컵은 놓아둔 그대로 있는데 무엇이 여기서 더 아름다울 수 있겠는가


우리는 우리의 불씨를 사방에 퍼뜨리고 말았다네, 우는 말들을 내버려두고 그대의 늙은 신부들이 먼 도망을 준비한다


수리공이 모이자
그대에게 주려던 꽃이 굳고
페인트가 빠르게 갈라지기 시작한다




의자 밑에서 듣는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악수하는 두 마리의 코끼리를 본다거나
검은 승용차가 집 앞에 도착한다거나


손을 귀처럼 떨군다 물방울마다 창문이 비친다 투명은 어디에든 차 있는가 창문은 아귀가 맞지 않는 종인가


이런 창밖을 기억한다 볕이 지글거리는, 남자가 걷어찬 푸른 의자 같고 의자의 주인인 노인의 다리 같고, 그녀가 내다 놓은 마른 선인장 같은,
골목을 돌아 나가는 고양이의 얼룩 같은


그런 뺨을 기억한다


그가 지났던 곳에 생긴 그을음을
깨진 접시 위에서 파닥거리는 날생선을
그녀가 문지른 뺨에서 떨어지는 소금을


의자가 다시 접착되는 순서에 상관없이
해약하는 계약들의 종류에 상관없이


하루 중 한 순간은 기대어 손을 편다
벽과 손 사이에 화흔火痕인 두 개의 눈이 있다


갈라지는 손바닥, 두 마리의 코끼리와 그 사이의 코끼리
포트가 끓어오르고 손등 위로 오토바이가 지나간다 휘발유 냄새가 끼쳐오고 사라지는 기나긴 오후
이런 오후로부터 바닥의 청중들은 생기지
어느 벽으로든 튀어 오르고 싶다


점심을 먹고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화흔에 물이 모인다
네 개의 귀 사이에서 얼룩이 잠깐 웃는다




파티션



내가 티스픈으로 계단을 휘젖는다 할지라도
석양이 얼음의 관절을 파고든다 할지라도


얼음의 여름이 가파르고 얼음의 무릎들은 호흡의 간격이고 나는 나의 속도를 늦출 수 없고


시계가 느립니다
1초의 간격은 어디서부터 정지한 석양입니까


기념일에 귀가하지 못하는 자세처럼 등뼈의 관념이 가로등을 닮아가고 분침이 없는 눈동자 안에 눈동자 없는 광장 안에 바람이 불지 않고


시계의 표정은 어디에서 비롯된 전차입니까
얼굴이 궤도에서 노동은 어디서 멈춥니까


                                *


굴곡으로만 이루어진 총탄이라 할자라도
만국기가 흩날리는 액자 속이라 할지라도


화분이 점점 느립니다 어항이 점점 느립니다 팔꿈치를 얹어 놓을 탁자가 느립니다


새파란 사나이와 더 새파란 사나이 사이
유리의 벽을 생각할 때 깨지고 다시 붙는 공기의 속도
이 혈관의 지속을 멈출 수 없고


창이 지나가고 탁자가 삐걱이고 나의 팔꿈치가 기우뚱하고
고개를 내미는 자리와 고개를 집어넣는 자리와


살갗에 늘어붙은 탄피를 끍어내며
서로를 마주 보는 사나이들



윤은성
1987년 전남 해남 출생
중앙대학교 국문과 대학원 재학 중
2017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시 당선


-「문학과사회」 2017년 여름호

출처 : 시인회의
글쓴이 : 미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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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살이 모르는 입꼬리

 

숫자를 좋아하는 흰 토끼는 편지를 써 오라고 했어
거짓말을 완벽하게 훔친 아이에게 내주는 특별 숙제
말랑말랑한 지우개 똥 연필 끝에 꾹꾹 뭉쳐
사랑하는 선생님, 저희가 잘못했대요.

 

시험지 위로 진눈깨비가 내리는 교실

 

무서운 이야긴 속으로 해야 더 무섭지
칠판이 두 쪽으로 갈라지고
그 속에서 모르는 아이가 빳빳한 채로 상장을 받고
종례가 끝나면 답장이 왔어
아니, 너희가 아니라 너지.

 

안으로 접힌 귀 토끼의 가장 단순한 장점
만져보고 싶어 3분의 1로 나뉜 귀
왜 우리들은 밋밋한 귓바퀴를 가졌지?
좀더 수학적으로 생기질 못하고

 

어렴풋이 웃고 나면 어른에 가까워질까?
토끼의 진짜 얼굴은 손목에 새겨놔야겠어
기다리는 미술 시간은 오지 않는데

 

명치를 찌르면 실내화가 미끄러지는 마술
복도 끝과 끝이 어떻게 다른지 설명해봐
부풀어 오른 선생님, 시리도록 하얀,

 

뒷문에서 굴러 나오는 귀 두 짝
청소 도구함에 숨은 눈알
창문에 붙은 천삼백일흔 개의 입 그리고 입

 

나는 토끼를 해부하는 상상을 했을 뿐인데요?
책상 밑에 숨어 지우개 똥만 뭉쳤는데요?

 

 

 


괄호 속에 몸을 집어넣고 옅어지는 발가락을 만지는 중입니다

 


열아홉은 괄호가 포함된 사건이었습니다

 

하나, 바닥에 빨간 울음이 흥건합니다 누군가 날카로운 어젯밤을 소화시키지 못했나 봅니다
둘, 여기서부터 가족들의 방은 멉니다 커다란 구름이 말라가는 거실입니다
셋, 시계의 뒤편이 기억하고 있는 시간을 봅시다 아빠는 오후 아홉 시처럼 생겼습니다
넷, 우리들은 우리들로 남아야 하기에 아직은 식탁에 앉아 실마리를 꼭꼭 씹어 삼킬 뿐입니다

 

벽 너머에서 엄마는 푸르스름 야위어가고 아빠는 배를 까고 누워 노랗게 불어갑니다 시침으로 꿰맨 교복 치마는 나의 알리바이 무지개의 꿍꿍이를 눈치챘나요? 엄마 아빠가 시계 속으로 분주하게 스며들고 있습니다 나는 혀가 고부라진 아이 입안 가득한 째깍 소리를 녹여 먹으며 내일의 과목을 생각합니다

 

구름이 눈썹을 찡그리는 날부터
나의 이름이 느리게 증발할 때까지

 

증거가 되지 못한 물방울들은 곧 이름을 잃어버립니다 아직 쓸 만한 우리들이에요 까드득까드득, 아빠는 질문을 씹어 먹습니다 어떻게 하면 흘러내리는 심증을 촛농처럼 굳힐 수 있나요? 시간의 부스러기가 천장에서 쏟아집니다 미제로 남은 우리들이에요 까드득까드득, 마음껏 부서질 수 있는

 

빨간 울음이 바싹 마르는 아침, 귓속에서 알람이 울립니다
아흔아홉번째 이명입니다

 

딱딱한 무지개가 완성되면 깨끗한 얼굴로 학교에 갑니다 오전 일곱 시는 무엇이든 시들게 만들 수 있고 그러나 오후 네 시에는 조금 웃어보아도 괜찮은 것 아홉시의 발소리가 들릴 때마다 뒤꿈치에 쌍무지개를 그려보기도 합니다만 우리들은 조금도 겹쳐지지 않습니다 무지개의 꿍꿍이를 눈치 챘나요? 촉촉한 물방울들이 문 틈새로 탈출합니다 언제 어디서 다른 색깔의 울음이 발견될지 모릅니다

 

무지개가 시간을 읽기 시작할 나이부터
열아홉이 어른들을 타고 멀리 날아갈 때까지

 

 

 

 

 

요절한 여름에게

 


편백나무가 날아오르는 시간
당신은 그대로 숲을 향해 걸어가

 

첫 번째 돌에 표시해둔 나를 지나쳐
마치 갈림길에서 힌트라도 쓸 것처럼
척척함과 약속은 잘 어울려
더듬더듬 목구멍 들춰 어둠을 만지듯이

 

나는 오늘 가지색 인사법을 배웠고
카나리아를 내년 귀퉁이에 묻어주었지
철제로 된 새장이 무엇을 책임져?

 

날개 터는 방법을 잊어버렸어 어쩐지
뾰족한 부리는 당신의 피상
나는 오늘 도도한 레몬처럼 거절했고

 

편백나무의 날숨은 뿌리를 놓치는 것
배 속이 잠시 투명해지는 그런 것
내가 따뜻한 흙을 퍼먹는 동안에
당신은 그대로 숲을 향해 걸어가

 

새끼손가락을 주머니에 넣고
어제로 통하는 길을 잘 안다는 듯이
그러나 모르는 발바닥처럼
하늘을 지나치게 올려다보며

 

우리는 절벽을 잊어버릴 수 있어

 

똑똑한 버섯들은 어떻게 우는지 들어봐
조금씩 해가 길어지고 땅이 흔들리고
당신은 그대로 숲을 향해 걸어가

 

 

 

 

커밍아웃

 

축축한 비밀 잘 데리고 있거든
일찌감치 날짜가 지난 토마토 들키지 않고
물컹한 표정은 냉장고에 두고
나는 현관문을 확인해야 해
아픈 적 없는 내일을 마중 나가며

 

취한 바람이 호기롭게 골목을 휘돌아 나갈 때
나뭇잎이 되고 싶어 아무 데서나 바스러지는
우리가 서로를 꺼안을 때 흔들리는 그늘
더 낮은 곳으로 자리를 옮겨 가는데

 

아무도 모르는 놀이터에서 치마를 까고 그네를 탔어
미끄럼틀과 시소의 표정
낮지도 높지도 않은 마음을 가지자
혼자라는 단어가 낮설어지면
얼음 땡,
크레파스 냄새 나는 빨주노초 아이들
웃음먼지를 풍기며 뛰어나가고

 

배 속에선 만질 수 없는 부피들이 자란다
누가 우리를 웅크리게 하는 걸까
웃지 않는 병원에 가야겠어
문 닫은 교회에서 기도를 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여관에 하루 정도 재울까
창문이 많은 복도에서 자꾸만 더러워질까

 

뉴스는 토마토의 보관법을 알려주지 않는다
설탕에 푹 절여지고 싶어
사소한 기침이 시작된다
내 컵을 쓰기 전에 혈액형을 알려줄래?

 

옷장에서 알록달록한 비밀이 흘러나와
자라지 않는 발목 아래로, 말을 잊은 양탄자 사이로
기꺼이 불가능한 토마토에게로


 

 

 

뱀의 날씨

 


할머니는 그날 오후 빨래를 개고 있었습니다
삼촌의 파자마 속으로 기어 들어가면서
얼룩은 아들로, 아들은 엄마로 볏겨내는 거라면서
척척한 양말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었습니다

 

얼룩은 그늘에서 말려야 하나요?

 

삼촌은 허물을 벗고 삼촌들로 불어납니다
엄마라는 단어에 슬슬 똬리를 트는
독신주의 채식주의 완전무결 무신론자 삼촌들
입속에 불혹이 자라 말을 잊은 삼촌들
특기는 식탁 밑에서 기절하기
마흔답게 혓바닥 날름거리기 또는
잠자는 할머니를 죽은 쥐로 착각하기

 

얼룩은 그늘에서 더 축축해지나요?

 

집 안 가득 비눗물이 차오릅니다
방 세 칸이 조금은 말끔해진 것 같습니다
이제 곧 얼룩의 무늬가 바뀌는 시간일 텐데요
할머니가 좀처럼 탈수되지 않습니다

 

부글부글 거품이 된 집을 내려다봅니다
누가 옥상에 삼촌을 널어놨습니다

 

깊어진 그늘의 손을 잡아봅니다
나를 벗을 준비는 이제 되었습니다

 

 

 

 

 

 

 

 

 


심사 경위

 

올해 신인문학상에서는 심사 방식상의 작은 변화를 꾀했다. 현재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문인들을 초청함으로써 좀더 다양한 문학적 입장과 취향을 심사에 반영하고 나아가 문학과사회 신인상이 견지하려는 문학적 모험의 스펙트럼을 확장하고자 한 것이다. 시 부문에서는 최하연, 이제니 시인, 소설 부문에서는 백민석, 한유주 소설가와 함께 투고작들을 꼼꼼하게 살펴보면서 편집동인들(강동호, 금정연, 김신식, 이경진, 조연정)은 한국 문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패기 넘치는 신예들을 탐색하고자 노력했다

 

▲힘들었고, 부끄러웠고, 이상했다. 6인용 책상 위에 가득 놓은 투고작들을 하나하나 책상 아래 종이 상자로 옮기는 일은 쉽지도, 자랑스럽지도, 당연하지도 않았다. 시를 계량화하는 노동이라니, 나는 비로소 빌라도의 심정을 이해했다. 심사에 참여한 소감을 쓰는 지금도, 이 이상한 기분은 가시지 않는다. 시를 쓰기 시작한 뒤로, 시는 나에게 목적이었을까, 수단이었을까, 돌이켜보건대, 아마도, 결국 이도 저도 아니게 될 것이다.(이하 심사평 생략)_최하연(시인)

 

▲시란 무엇인가, 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 앞에서 예심 내내 다소 엄격한 잣대로 작품을 읽어서인지도 모르겠으나 울림을 주는 작품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을 읽으면서도 고민은 마찬가지였다. 응모자들의 이름을 바꾸어 읽는다 해도 그리 다르게 읽히지 않을 정도로 비슷비슷한 시편들, 그야말로 잘 만들어졌다고 여겨지는, 그러나 텅 비어 있는 시들이 대부분이었다. 어떤 간절함을 가지고 써나갔는가, 자기만의 언어를 어디까지 밀고 나갔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선뜻 손을 들어줄 만한 작품을 찾기 어려웠다.(이하 생략)_이제니(시인)

 

▲총507명이 응모한 올해의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시 부문은 양적으로 작년과 유사한 수준을 유지했다. 심사를 하는 과정에서 흥미롭게 여겨졌던 것은 소위 ‘서정시’라고 광범위하게 지칭되는 전통적인 계열의 시들이 해를 거듭할수록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예년의 심사평에서도 유사한 소회를 밝힌 바 있지만, 이러한 현상은 2000년대에 촉발된 다양한 시적 실험의 파장과 영향이 어느새 안정적인 방식으로 시 창작의 현장에 스며들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분명한 징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향 관계나 모방이라는 단순한 말로 충분히 아우를 수 없을 만큼 이러한 변화의 폭과 깊이는 근본적인 것으로 보인다. 시에 대한 기존의 관습적인 이해가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변화는 긍정적인 신호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시에 대한 통념의 파괴가 역설적으로 시에 대한 또 다른 형태의 통념을 낳는 계기가 된 것은 아닌지 냉정하게 되물어야 할 시점에 이르렀는지도 모르겠다.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의 감정과 생각들을 낯선 감각으로 능란하게 기록하는 응모작들이 많았지만, 응모자들이 구가하고 있는 자유가 시에 대한 치열한 사유를 생략하고 포기한 결과가 아니었는지 의문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다. 경험이 매개되지 않은 날 선 언어들을 장황하게 전시하도록 내버려두는 듯한 작품들이 적지 않았으며, 낯설고 특이한 이미지와 단어들을 조합하면 곧바로 시적인 문장을 탄생시킬 수 있다는 아니한 태도 역시 자주 목격되었던 것이다. 1차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18명의 응모자들(강은재, 강혜빈, 김민지, 남다솜, 박경주, 박영, 박하원, 백선율, 베이지, 서호준, 신수형, 양은경, 엄기수, 오경은, 이동호, 이희형, 정송라, 정화연)의 작품들을 좀더 단호가고 꼼꼼하게 검토한 것도 그 때문인데, 그 결과 최종적으로 정솔아(⌜인터뷰이와 인터뷰어의 관계에 대하여⌟외 9편), 베이지(⌜컷⌟외 13편) 백선율(⌜암전⌟외9편), 정화연(⌜유원지⌟외 9편), 강혜빈(⌜열두 살이 모르는 입꼬리⌟외9편)의 작품들을 두고 본격적인 논의를 진행했다.

 

베이지는 본심에 오른 응모자들 가운데 가장 파격적인 작품세계를 보여주었다. 그의 시는 기성의 의미를 파산시키고 새로운 의미 생성의 가능성을 집요하게 탐문 하려는 의지로 충전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실험적인 의지가 시의 언어를 작위적으로 포박하고 있다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정솔아는 시적인 상황을 재치 있게 조성하는 능력이 범상치 않았으며 시적 긴장이 일어서는 순간을 감각적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다만 시적인 정황과 순간을 연출하는 것에 몰두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시의 전체적인 구조를 희생시키는 경우를 종종 발견했다. 백선율은 겉으로는 단아하고 미니멀해 보이지만 현실과 꿈의 결계를 청신한 감각을 돋보이게 만드는 능력이 인상적이었다. 다만 응모한 시편들만으로는 그이 시가 지닌 스펙트럼의 넒이를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지적되었다. 전반적으로 시들의 색채가 비슷하다는 뜻이다.

 

논의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작품은 정화연과 강헤빈의 시였는데, 두 응모자의 작품들은 마치 그럴 수밖에 없다는 듯 색채가 서로 달랐다. 우선 정화연의 ⌜유원지⌟외 9편에서는 응모자 자신의 체험이 시로서 강력하게 육화되고 있다고 느껴질 만큼 깊은 울림을 느낄 수 있었다. 타인에 의한 폭력과 고통을 소재로 자신의 일상과 육체를 낯설게 되돌아보는 그의 시선은 신선한 감동을 선사하고 있었다. 다만 지나치게 자신의 겸험에 몰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그것이 오히려 신인으로서의 시적 언어의 확장을 가로막는 장벽이 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었다.

 

반면 강혜빈의 ⌜열두 살이 모르는 입꼬리⌟외 9편은 이미지들을 감각적으로 산개해나가는 동화적인 상상력을 독자를 유혹하듯, 매끄럽고도 유려하게 펼쳐내고 있었다. 시들 사이에는 다소 편차가 있었으나 시적 진술들이 조성하는 리듬감도 매력적이었으며, 여기에 아이 화자 특유의 자유로운 화법이 더해져 ⌜괄호 속에 몸을 집어넣고 옅어지는 발가락을 만지는 중입니다⌟와 같은 감각적인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던 듯하다. 오랜 습작을 통해 단련된 시처럼 보이지는 않았으나 때로는 숙성을 거치지 않은 가능성이야말로 한 시인의 장점을 더욱 만개시키는 창조의 원천이라는 생각 끝에 강혜빈을 당선자로 결정했다.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모든 응모자들에게 응원과 감사의 말을 전한다._『문학과사회』 편집동인 : 강동호, 금정연, 김신식, 이경진, 조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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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와 오후 / 임지은

 

둘둘 말아놓은 오후는 옷장 밑으로 굴러 들어간다

꺼내려 할수록 더 깊숙이 처박힌다

개가 인형을 물고 뜯는다는 것은

산책이 필요하다는 신호

나는 움직이고 싶은 생각이 없다

 

시계에서 꺼낸 숫자를 개에게 던져준다

그러자 한 시이면서 세 시인

게으르면서 일곱 시인 개가 다가와 얼굴을 핥는다

개의 혀는 무섭도록 따뜻하고 돌기가 있다

차가운 음료에 맺힌 오후가

개의 콧잔등을 적신다

 

먼지를 뒤집어쓴 개는

손바닥만 한 햇빛을 베고 잠이 든다

나는 숫자가 다 떨어진 시계를 쳐다본다

언제 발끝에 오후가 물들었는지 지워지지 않는다

비누처럼 미끄러운 것이 필요하다

 

한시야, 세 시야, 얼어붙은 일곱 시야

아무리 불러도 시계는 움직이지 않고

검은 개만이 일어나 눈앞에 놓인 오후를 삼켜버린다

오후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털이 나 있다

으르렁 소리를 낸다

순식간에 문밖으로 달아난다

 

개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오후를 보낸다

일 년이 넘도록 개는 돌아오지 않고

낮은 문턱이 있는 방바닥을 쓸어본다

읽을 수 없는 숫자처럼 생긴 털들이 잔뜩 묻어난다

 

나는 털을 뭉쳐 조금 늦은 한 시를 만든다

신발이 벗겨진 세 시를 만든다

옆면이 구겨진 일곱 시를 만든다

처음 보는 시간들로 시계를 가득 채운다

오후가 조금 다른 속도로 흐르기 시작한다

 

그늘을 머리끝까지 덮고 잠이 든다

꿈속으로 검은 개가 찾아온다

개는 꼬리를 흔든다

뜨거운 오줌을 싼다

발끝이 하얗게 물들어서 지워지지 않는다

죽음처럼 축축한 것을 입에 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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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당선작 _울타리의 노래(외 4편)/ 이설빈

 

 

울타리의 노래

 

 

 

1

아이들은

펜스를 짚고 넘어가

좀더 큰 아이들은

펜스를 훌쩍 넘어가

어른들은 점잖게

펜스를 들추고 넘어가

마치 펜스라는 게

치마 속에 있다는 듯이

여기, 나는 펜스에 걸터앉아

모든 걸 넘겨봐

 

아직도 목초지는 멀고

노래는 혀까지 미치지 못하고

눈썹에 고인 땀방울이

잠깐, 빛을 받아 넘쳐서

먼 지평의 굵은 턱선을 강조하는 시간

 

아직도 목초지는 멀고

바람이 불 때만 의미를 갖는예민한 솜털처럼

성급한 땀방울 하나

내가 이룬 모든 걸 거꾸로

그늘 속에 드리우고 있어

있지, 아직도 목초지는 멀고

아직도 목초지는 멀어

 

2

내가 이룰 것들이란 다 무엇일까

한 획의 비행운?

점진적인 책갈피의 이동?

열두 개의 그림자 태엽?

노예선의 새로운 깃발?

주머니가 덜 마른 코트?

커다란 굴뚝을 입에 물고

여기, 나는 완강히 버티고 서서

모든 걸 넘겨 보낼 작정이야

아직도 목초지는 멀고, 맞아

내 검은 워커는 진창에서 얻었지

무릎까지 푸욱 잠겨서

비석에 새겨진 이름에는 이끼가 자라지

입술을 뒤덮는 콧수염처럼

 

3

아직도 목초지는 널고

건초지는 발밑에 영원처럼 머물고

노래도 새들도 떠난 둥지에는

느긋한 노을 한 줌

내가 이루지 못한 모든 걸

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어

알아, 아직도 목초지는 멀고

나를 가리키던 시간들

내가 될 수 없던 몸짓들

그것들 모두가

내 생의 단위로 자라날 때까지

여기, 나는 펜스에 기대서서

그 모든 걸 굽어봐

 

4

아이들은

펜스를 짚고 넘어가

좀더 큰 아이들은

펜스를 훌쩍 넘어가

아기들은

펜스를 기어서 지나가

마치 펜스라는 게

텅 빈 빨랫줄인 것처럼

사람들, 눈부신 속옷들

바람에 멀리 날려 가고

목초지만큼 멀어져 가고, 나는

여기, 기다란 그림자 되어

펜스를 넘어서는데

하나, 둘…… 눈이 멀어

울타리를 지워가는데

 

 

 

숨 숲 수프

 

 

 

개구리를 토해 낸 뱀이 개구리의 어두운 허기로

쉬이익— 빨려 들어가듯

벌목꾼은 숲으로

 

붉은 책갈피를 펼쳐보는 저녁,

배꼽의 태엽을 거꾸로 돌려보면

나는 그녀의 배 속에서 소화되는 것처럼 보이겠지

 

갑자기 수면 위로 끌어올려진 심해어의 눈알처럼

인광을 내뿜는 무수한 저녁의 육체들

신경이 퉁퉁 불어서

 

근육질의 구름

우르릉우르릉 비석을 갈고 있다

벌목꾼은 검은 매왈츠*를

 

이제 검정 크레파스를 긁어내면 무지개가 맺힐 겁니다

그건…… 그건 살색이에요!

비명이 울창하던 노을

 

반달도끼로 도려낸 숲의 싱싱한 내장들

 

검은 책갈피를 펼쳐보는 새벽

감전된 새가 창백하게 짖었다

무딘 도끼날에 베어오는 소름

벌목꾼은 늪으로

 

쥐 먹은 자리를 에워싸는 머리카락들처럼

한데 모여 늪을 끓이는 침엽수들

개구리들의 눈빛을 모아 독기를 푼다

 

머리통은 예리한 발톱에 꿰여 지붕 위로

몸통은 덕지덕지 크레파스 늪 속으로

 

개구리 배 속에서 꾸역꾸역 자라난 뱀은

개구리—허눌을 벗는다

벌목꾼은 검은 매 왈츠를

 

 

   ————

   * Chris Garneau의 음악「Black Hawk Waltz」(Hidden Track)

 

 

 

몰락의 맛

 

 

 

  네가 하프라인을 줄기차게 넘나드는 왼쪽 날개였을때

  누군가네 얼굴이 새겨진 은화들을 수거하고 있었다.

 

  네가 출렁이는 골망처럼 환호성을 네지를 때마다

  누군가 네 얼굴이 새겨진 은화들을 으깨고 있었다.

 

  네 시선이 오른쪽 카메라를 의식했을 때,

  전광판에 비친

  너의 뻥 뚫린 뒤통수와 마주쳤을 때,

  누군가 네 얼굴이 새겨진 은화들을 녹여서

  한 발의 탄환을 만들고 있었다.

 

                                                   *

 

  네가 플래시 세례를 받아

  안락의자의 늙은이로 다시 깨어났을 때

  산성山城처럼 커다란

  네 초상화를 그리던 잡부들은

  수염을 그려낼 목탄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사실은…… 갑자기 늘어난 네 흰 수염들 때문에

  초벌한 선산先山 전체를

  다시 한 번 불태웠다고 고백했다.

 

  너는 콧구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달덩이를 올려다보며 파이프를 입에 물었다.

 

                                                   *

 

  시간은 맑은 콧물처럼 훌쩍훌쩍 뒤로 흘러,

  거친 약솜으로 콧물을 훔치다 인중이 벌겋게 달아오른, 어느 저녁나절.

 

  네가 가지절임을 억지로 삼키는 아이였을 때

  네 어머니의 도마 위에서 사내들은 코가 잘려나갔다.

 

  네가 가지절임에서 질질 새어 나오는 물빛으로 잠들 때

  코 잘린 사내들이 수면 위로 입술을 떠올렸다.

 

  네가 물었다.

  너희의 이름은 무엇이냐?

                                                                                그들이 답했다.

                                                                            코 잘린 심연이오.

                                                                         핏물 빠진 수련이오.

 

                         수면에 바싹 다가가서 네가 물었다.

                               그럼 네 이름은 무엇이냐?

                                     바싹 다가선 코에

                       코 잘린 자리를 맞대며 그들이 답했다.

                             잘린 코들을 지지는 인두요.

                       몸을 버린 창백한 코…… 냄새를 맡아라.

                                          기억해내라.

                                          기억해내라.

 

                                                   *

 

  그렇다.

  너는 규토硅土 위에 지어진

  두 개의 집에 살았다.

 

  첫 번째 집에 돌아오면 네 어머니가

  축구화를 뒤집어 넣어주었다.

  신발장 속으로

  신발장 속에서

  정든 피라미드가 닳고 있었다.

  남몰래 가지절임을 뱉었던

  네 입안에서

  네 입안에서

  귀뚜라미가 울고 있었다.

 

  두 번째 집으로 돌아가면 네 아버지가

  마우스피스를 물려주었다.

  열기와 침묵 사이로

  열기와 침묵 사이에서

  관중들의 목젖이 헐고 있었다.

  어깨를 맞대고 양손으로 거시기를 가린

  네 이빨들 뒤에서

  네 이빨들 뒤에서

  골키퍼가 떨고 있었다.

 

                                                 *

 

  너는 총구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탄환이 장전된 파이프를 빨고 있다.

 

  네가 말했다.

  그렇다. 이것은……  냄새가 없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잡부들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파이프가 아닙니다!

 

                          창문에 바싹 다가서서 네가 말했다.

                               이것이 파이프가 아니라면

                                     이것은 또한……

                                   가지절임도 아니다.

 

  너는 파이프에 불을 당긴다.

 

                                                  *  

 

  파이프는 단 한 번 격렬하게 불을 뿜었고, 양 갈래로 뚫려 있는 화장터의

굴뚝처럼, 너의 머리통은 앞뒤가 분간이 되질 않아 연기가 오래 머물렀다.

비탄과 폭동이 동시에 메아리치며 두개골 같은 성채城砦를 무너뜨렸고 폭

우 속의 지렁이처럼 장례 행렬은 잿더미 선산으로 민머리를 들이밀었다.

네 심복이 중얼거렸다.  유지를 받들겠습니다.  선생님의 오늘까지를 초상

화에 넣겠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선조께서는…… 닥쳐올 사건보다 열등

하게 존재하지 말라고 하셨지요.  잡부들은 무너진 성곽의 돌들로 무덤 위

에 탑을 쌓았고 꼭대기에 네 가죽을 벗겨 만든 커다란 북을 달았다. 쇠파이

프로 북을 내려치며

 

  심복이 물었다.

  선생, 이것은…… 파이프가 맞지요?

  초상화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

  * 마그리트의 그림「이미지의 배반(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불안의 탄생석

 

 

 

  처음으로

  누군가 말했다

 

  여길 봐 우리가 무엇 앞에 서 있는지

  커다란 바위가 있고

  작은 돌들이 있어

  커다란 바위 둘레를 맴돌면서

  어떻게든 옮길 생각을 하면서

  우리는 죽을 때까지 함께일 수 있다

  그러나 작은 돌들을 걷어차면서

  어쨌든 치울 생각을 하면서

  우리는 너나없이

  두 손 다 썼다고 여기면 먼저 떠나는 거다

  아마 죽을 때까지 어긋나겠지

 

  누가 먼저 말했건 그건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다시 처음으로

  비가 내린다. 빗방울. 빗방울을 끌어내리는 손은 더 가벼운 빗방울들이다. 빗방울들. 작은 창에 게으르지만 분명하게, 내 뒤틀린 의식 위로 또 다른 흐름을 보태며 방점을 찍으며, 애써 가라앉힌 닻을 끌어올린다. 닻들을 올린다. 닻들을 끌어올리는 손은 더 무거운 닻이다. 닻을 올린다.

 

  처음에 덧붙이며

  눈뭉치가 구른다.

 

  언제나 처음인 것처럼

  두발자전거를 탄다. 오르막길. 자전거에서 내린다. 네발자전거가 되어 나는 언덕을 끌고 있다. 내가 끌고 있는 것은 언덕이 아니라 단지 내 시선이다. 그 누가 한 번도 앞을 지나간 적 없는 것처럼 안경을 닦는다. 그 누가 한 번도 뒤를 봐준 적 없는 것처럼 성냥을 긋는다.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인다.

 

  처음에로 연결된 전신주

  지나치며 본다. 아직도 묻히기를 거부하고 허공에 붙들린 채로 또 다른 경이의 교각으로 떠 있는, 그것을 본다. 높은 뇌압腦壓을 부여잡은 양극지의 긴장과 그보다 질긴 피복으로 감싼 무도정無道程의 흐름. 흐름? 순환. 그 성긴 편직編織건물들 사이 무정형으로 누빈 풍경들, 서로의 몸속으로 쑤셔박은 배관들을 나는 언덕에 심긴 채로 내려다본다. 비탈길. 비탈길? 가속구간. 

 

  다시 처음에 덧붙이며

  눈덩이가 구른다

 

  언제나 처음인 것처럼

  머리맡에 냉장고를 두고 이부자릴 편다 누군가 십 년째

  같은 자리에서 냉장고 문을 연다 위에서부터 차례로

  내용물은 모른 채 그것을 나눠 품은 비닐들

  기한 지난 쇠잔한 눈빛들 푸르게

  푸르게 발등으로 떨어진다 움찔

  움찔 냉장고 옆에 잠들어 있던 내가

  눈 뜬다 그 발은 아무것도 꺼내지 않고 문을

  닫는다 이마와 귓불이 서늘하다

  반쯤 덜 녹은 눈빛 얼렸다가

  닫힌다 냉장고가

 

  마지막인 듯 처음으로

  웅웅거린다……  꿀벌 떼가 비상하는 꿈…… 낡은 선풍기……  말벌이 되는 꿈……  라디에이터……  꿀벌 떼가 덮치는 말벌이 되는 꿈…… 물 새는 보일러……  내 꿈이 너의 꿈에 침수되는 꿈…… 따뜻해……  자다가 투욱,

  힘껏 감아 던진 고무동력기

  힘줄 풀리는 소리

  들린다. 예감의 오라 감기는 소리.

  뒤에서 팽팽하게 당겨지는 목줄.

  나는 기울어지며

  수평을 무너뜨리며,

  내가 딛고 있는 경계의 접점 속으로

  매듭 속으로 파묻힌다.

 

  또다시 처음에 덧붙이며

  눈사태, 눈사태, 눈사태, 눈사태? 눈사태에 이은

  산사태. 팔다리 수십 개

  눈덩이마다 박혀 있다.

  눈덩이는 수천 개

 

  처음이 어려운 것이다

  냉장고 문짝에서

  자석이 떨어진다.

  한기에 파묻힌 내 이마로

  자석이 떨어진다.

  낮달, 처음에로 끌려갈 뿐이다.

  별들의 예인선 다가온다.

  낮달.

 

  어렵게 처음에 덧붙이려는

  몸 잃은 팔다리 수만 개

  제자리를 찾아 밤하늘에 꿈틀거린다.

  나는 아— 하고

  처음으로 올려다본다

 

 

 

 빙점(氷點)

 

 

 

  이곳은 아무리 지나쳐도 강조되지 않는다

 

                                                     *

 

  욕조가 없고 창문이 없고 절정이 없으리라는 사실을 나는 또 지나친다 조심해야 한다 내가 딛고 선 빙판이 투명해질 때를 조심해야 한다 내가 딛고 선 꿈이 수위를 높일 때를 너무 많은 심증은 초점을 부러뜨린다 네 탓이오 네 탓이오 너의 큰 탓이다 그러므로 가파르게 책망하오니…… 이 밤의 심지는 깎여나간다

 

                                                      *

 

  빛의 탄주彈奏는 눈앞을 컴컴하게 만든다 이곳에서 소금은 고향을 잊는다 이곳에서 낙엽은 스스로 썩지 않는다 이곳에서 물방울의 세계는 다시 한 번 뒤집히고 중력은 잠의 머리채를 잡아챈다 그리고 검고 매끄러운 벽돌이 구워지고 벽돌은 어떤 색유리보다도 성실하게 빛을 상영한다 이곳에서 방아쇠는 당겨지지 않았으나 메아리는 그 죽음보다 많은 뼈들을 일으켜 세우며 끌려간다 시간 밖으로 호명할 수 없는 날씨 속으로 기억의 구멍은 저벅저벅 뚫리고 그 숨통을 매듭지을 구두끈은 언제나 모자라다 이곳에서 방충망은 벌레와 문자를 구분 없이 거르고 부들부들 기도문을 읽으면 악몽은 기도문을 거꾸로 뇌까린다 코앞에서 마주 보는 거울 속에서 그 누구도 마주보지 않는다 그곳에서 유한은 무한을 함부로 다루기 시작한다 이곳에서 더 이상 되풀이되지 않으리라  나는 촛불을 불어 이곳을 구기고 싶다 저편에서 유언을 적지 못한 하늘이 날마다 자신을 번복하듯이 나는 아무리 깎아내도 강조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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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4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결과 발표

 

 

  [심사 경위]


   올해로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은 14회째를 맞이한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인유는 흔한 수사지만, 그간 배출된 작가, 시인, 평론가들의 면면을 떠올리면 2000년대 이후 한국 문학의 ‘강산’을 변화시키는 데 이 상이 기여한 바를 자부하고 싶어진다. 문학의 새로운 진화를 적극 수용하고, 진화의 양태와 생리를 한발 앞서 찾아 읽겠다는 의욕과 의지는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변하지 않은 스스로와의 약속이었다. 그래서 이 ‘상징적 입사식’의 통과는 자신의 고유성을 드러내해야 하는 쪽의 부담만큼이나 그것을 골라내고 가늠해야 하는 쪽의 어려움도 잇따른 과정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뜻 깊은 호명의 순간으로 이 상을 거쳐 간 이들의 행보와 다채로운 축적은 상의 성격을 형성하고 유지하고 있으며, 이 점이야말로 문학과사회 신인상의 의의와 전통을 세우는 가장 든든한 뼈대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정은 이제 일부러 표내지 않아도 표가 나는 자연스런 모양새를 얻고 있는 듯하다. 올해 응모된 작품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기성의 세계에 기대거나 안주하기보다 다소 서투르고 투박해도 자기 본연의 목소리를 서사의 구성 가운데, 행간의 숨은 어조 속에 구축하고 표명하려는 의도가 뚜렷하게 드러난 예가 많았다. 이러한 강한 의도성이 완성도를 감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었지만, 실험성에 대한 예민한 자의식은 여러 시행착오를 겪는다 해도 새로운 문학을 낳는 밑거름이자 그러한 욕망을 가동하고 지속시키는 원동력이라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그러니 기성의 문법과 스타일에 기대기보다 실험의 가능성을 믿고 미지의 결과를 향해 성큼 나아가는 과감한 걸음에 마땅히 격려의 박수를 쳐주어야 할 것이다. 문학과사회 신인상은 그러한 과감성이 성숙의 예비조건으로 감지되는 문학적 동량을 향해 열린 문이자 편안한 익숙함보다는 때로 낯선 불편함을 마다하지 않는 오롯한 개성의 출현을 위해 마련된 통로이다. 그리고 이것은 본 상이 소수의 향유자가 고집하는 특정의 경향을 지지한다는 것과는 그 뜻이 엄연히 다르다. ‘신인’의 함의가 결정되지 않은, 결정되길 거부하는 현재 진행형의 가능성을 가리키는 한, 한국문학의 역사적 풍경을 새롭게 바꾸어갈 징조로 예감되고 문제적 징후로 되새겨지는 모든 다양한 시도와 결실에 우리는 언제든 첫번째로 그 이름을 불러줄 것이다.


   활짝 개방된 문과 닦아놓은 길을 따라 나타날 새로운 얼굴들은 기쁜 마음으로 맞이할 반가운 존재들이다. 올해는 신인상의 이러한 성격에 어울리는 이름을 부를 수 있게 되어 더없이 즐거운 한 해다. 총 981명이 응모한 가운데, 시 부문에는 483명, 소설 부문에는 487명, 평론 부문에는 11명이 노고의 산물을 보내주었다. 두 차례의 심사가 이루어졌으며, 4월 4일에 응모작 전체를 살피는 예심이 열렸고, 예심을 통과한 작품들을 심사자들이 2주간 재독한 뒤 4월 18일에 본심을 진행하였다. 지난해에 소설 부분에서만 당선자를 내었던 아쉬움 탓에 올해 예심에서는 모든 부문에서 당선자를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며 더더욱 주의 깊게 원고를 살피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오랜 검토 끝에 시는 16명, 소설은 13명, 평론은 2명의 응모자가 예심을 통과하였고, 본심에서 이들 중 당선의 후보로 꼽을 수 있는 작품을 선별하여 최종 논의에 들어갔다. 시와 소설 모두 후보작들이 예년에 비해 각자의 다양성을 뽐내는 경향이 두드러져 해당 작에 대한 심사자들의 품평도 상세하게 제시되었으며, 그만큼 토의도 긴 시간 동안 이루어졌다.

 

   논의 끝에 심사자들은 문학과사회 신인상의 취지가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는 점에 이견 없이 동의하였고, 최종적으로 신인상이라는 명칭에 걸맞는 작품에 작은 영광이 주어져야 한다는 데 흔쾌히 합의하였다. 이렇게 행복한 고민의 과정을 거쳐 올해에는 시와 소설 두 부문에서 당선을 결정하였다. 두 분의 당선자가 ‘새롭다’라는 형용에 어울리는 인물임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 심사자들의 마음은 뿌듯하다. 비록 평론 부문에는 당선자를 내지 못했지만, 텍스트와 대결하길 마다하지 않는 치열한 비평적 성찰의 싹을 확인하였으니, 내년에는 좋은 결실이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문학이 여전히 인생을 걸어볼 만한 벅찬 꿈이라는 것을 자신들의 글을 통해 돌아보게 해준 응모자들 모두에게 이 자리를 빌려 거듭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글쓰기의 고통을 마다하지 않는 예비 작가들에게 동병상련의 공감과 힘찬 응원을 함께 전한다.

 

 

   심사위원

   김형중 강계숙 이수형 조연정 강동호

 


 

심사평


[시 부문]


  _작년 신인상 공모에서 시 부문은 당선작을 내지 못했다. ‘미래의 시’를 발견하고 인정하는 일에 좀더 엄격하려는 욕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투박한 눈이 그것을 미처 알아보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등단 이후 의욕적인 자세로 후속 작업에 대해 고민하며 자신의 문학 세계를 단단하게 일구어 나가는 많은 신인들을 보며, 당선작을 내지 못한 필요 이상의 망설임과 무책임한 태만을 동시에 반성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올해 심사에서는 더 단호해지고 더 섬세해지고자 했다. 이러한 우리의 결심에 응대해주는 시들을 적지 않게 만나볼 수 있었다.
   올해 시 부문 응모자는 모두 483명으로 그중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응모자는 김후빈, 윤은숙, 이다희, 이설빈, 이수인, 이종민, 이준형, 정솔아, 제주림 이상 9명이다. 9명 응모자의 시들을 꼼꼼히 읽은 후 김후빈, 이설빈, 제주림의 시로 본격적인 논의 대상을 좁혔다. 시와 소설의 경계를 실험하듯 장황하게 서술하며 시적 긴장에 소홀한 경우, 체험의 시적 형상화에 있어 체험의 인공성이 다소 어색하게 두드러진 경우, 단순한 문장의 나열이 간결한 배치의 매력으로 상승하지 못한 경우, 무엇보다도 기성 시인의 분위기를 강하게 발산하는 경우 등이 배제되었다.


   <非子> 외 9편을 응모한 김후빈의 시 중에는 죽음을 다루는 시들이 흥미롭게 읽혔다. <자연사박물관> <눈의 결정> 같은 시이다. 저수지에서 익사한 “언니”의 죽음을 그리는 <눈의 결정>은 특히나 강렬했는데 “물이 눈 속에서 얼어버릴 때” “물의 무늬가 결정지어질 때” 같은 구절들이 죽음의 순간을 강하게 환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이라는 소재가 시적 충격을 위해 동원되었다기보다는 어떤 강력한 체험과 결부되었을 것이라는 확신을 줄 정도로 김후빈의 시에서는 전반적으로 깊은 울림이 느껴지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김후빈의 시를 당선작으로 뽑는 일을 망설이게 한 것은 응모작의 제일 첫 머리에 놓인 <非子> 같은 시 때문이다. “비자나무”와 “非子”의 동음이의어를 활용하고 더불어 한자 非자의 이미지까지 함께 녹여낸 이 시는 이러한 조합의 상상력이 조금 단순하게 보였고 결정적으로 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아마도 가족 안에 새겨진 시간의 형상들)와 매력적으로 뒤섞이지 못했다는 인상을 주었다. 언급한 작품들 이외에 특별히 인상적인 작품을 찾지 못한 것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설빈의 시는 보내온 열 편의 시가 다소 편차를 보이기는 했지만 상상력의 깊이와 넓이의 측면에서 세 명의 후보작 중 가장 패기 있는 작품들로 느껴졌다. 시 한 편 한 편의 길이가 다소 길게 느껴지는 경우도 있고 출처를 알 수 없는 다양한 이미지들이 조금 두서없이 장황하게 병치되는 부분들도 없지 않지만, 그러한 병치가 말의 반복과 변주를 통해 리듬감을 형성해 시적 긴장을 성공적으로 이룰 때나, 결국 시인의 의도 안에 잘 통제되고 있는 듯한 안정감으로 승화될 경우, 그 매력이 상당했다. <울타리의 노래>가 전자에 속하는 성공적 사례라면 <몰락의 맛>은 후자에 속한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자신만의 독창적이고도 견고한 세계를 오랜 습작의 기간을 통해 단련해왔다는 확신은 받을 수 없었다. 생경함에 기대려는 태도가 오히려 낡은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했고(“규토硅土” “빛의 탄주彈奏”와 같은 낯선 한자 어휘를 노출시키는 장면들), 비슷한 이미지의 어휘들을 교체하며 같은 문장 구조를 단조롭게 나열하는 <빛>과 같은 시는 시적 방법론에 대한 응모자 자신의 불안을 반증하기도 했다. 물론, 스스로의 미숙함에 대한 불안으로 인해 범하는 실수가 줄어들 경우 어떤 매력적인 작품을 보여줄지는 <울타리의 노래> 같은 시가 증명해주고 있다. 이 가능성을 쉽게 저버릴 수는 없었다.


   <미래의 식탁> 외 9편을 응모한 제주림은 간결한 문장들 속에 일상적 삶의 단편들을 낯선 방식으로 매끄럽게 녹여내는 솜씨가 안정적이다. 이 응모자가 얼마나 오랜 습작의 시기를 거쳤는지 확신하게 해주는 부분이다. 관례에 어긋나는 언급인 듯도 하지만, 사실 제주림이 작년 신인상 심사의 본심에서 언급되었던 어떤 응모자와 다른 이름의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시를 보고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었는데 놀랍게도 작년의 심사평에서 언급되었던 이 응모자의 단점들이 올해의 응모작에서는 거의 대부분 보완되어 있었다. 그래서 특별히 애착이 가는 응모자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일상의 익숙한 풍경들을 낯선 관계를 통해 재현하는 방식이 한정적이라는 점, 다루고 있는 대상 세계가 조금 협소하다는 점 등 많은 부분이 극복되어 있었다. 그런데 심사 현장에서 한 심사자가 지적했듯 제주림의 시는 아직 첫 시집을 내지는 않았지만 최근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이십대 중&#8231;후반의 어떤 여성 시인들이 공통적으로 보이는 미니멀리즘적 경향을 환기한다는 점에서 우리를 주저하게 했다. 이러한 공통된 시적 성향이 어떤 시대나 세대의 일반적 특징을 재현한 결과인지, 아니며 그저 일시적인 문학적 유행 현상의 결과인지 명확하게 따져봐야 할 문제이지만, 어느 쪽이든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제주림만의 독창성이 희박해지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제주림의 시를 읽으며 우리는 시적 독창성과 완성도를 함께 갖추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되었다.


   이 세 명의 후보자 중 특히 이설빈과 제주림의 시에 대해 오랫동안 논의하였다. 논의가 꽤 길어졌는데 이는 심사위원 간의 의견 차이 때문이라기보다는 이 두 응모자 간의 뚜렷한 특징의 차이 때문이었다. 세 명의 심사위원들 각자가 애초에 당선작으로 염두에 둔 쪽은 분명한 편이었지만, 이설빈과 제주림의 시를 함께 낱낱이 비교해 읽을수록 각각의 매력은 물론 아쉬움도 상대적으로 커지면서 마지막에는 어느 쪽도 쉽게 지지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설빈이 보여주는 미숙함과 가능성에 대해, 제주림의 시가 보여주는 안정감과 익숙함에 대해 주로 이야기했다. 이야기가 끊임없이 공전되었고 결국 신인상의 기본 취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고, 마침내 우리는 이설빈을 선택했다. 뻔한 말로 현재의 완성도보다는 미래의 가능성을 생각하기로 했다. 마지막에 손에서 내려놓은 제주림의 시에 대해서는 여전히 아쉬운 마음이 크고, 결국 손에서 놓지 않은 이설빈의 시에 대해 불안한 마음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단호해지기로 했다. 우리는 이설빈의 가능성을 믿어보기로 했다.
   선택을 당하는 쪽이 아니라 이번에는 운 좋게도 선택을 하는 쪽의 입장에 서게 된 사람으로서, 선택하지 않고 내려놓은 쪽에 마음이 더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우리 자신의 수많은 경험을 통해 알고 있듯 선택에서 배제된 사람은 쉽게 자책에 빠진다. 상실과 실망에 대한 보상 행위로 자신을 선택하지 않은 사람을 탓해볼 수도 있다. 건강한 결과로 이어지려면 어느 쪽이 더 효과적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그 과정들이 부디 스치듯 짧게 지나가기를 바란다. 스스로를 믿고 앞을 보기를 바란다. 조금은 뿌듯한 마음으로, 대체로는 불안한 심정으로 시인으로서의 첫 발을 내딛고 있는 수상자 이설빈에게도 똑같은 말을 반복해 하고 싶다. 스스로를 믿고 앞을 바라보자.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시 당선 소감

이설빈

1989년 서울 출생. 강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재학 중.

 

어렵고

 

가렵다.

 

 

두렵고

 

마렵다.

 

             

             ——《문학과사회》2014년 여름호

출처 : 푸른 시의 방
글쓴이 : 강인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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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심사평

 

총 874명이 응모하여 예년과 비슷한 성원을 해주었다. 심사위원들은 그중 예심을 통과한 11명, 강민근, 구현우, 김창훈, 김해슬, 김혜린, 이시용, 이재은, 임지은, 최설, 최세운, 최수현의 시에 주목하였다. 이 중 습작 수준에 머물러 있거나 기성의 시를 연상시키는 경우를 우선 배제하였고,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이 전통적으로 중요하게 고려해온 덕목인 자기만의 개성적 목소리가 시편에 내재되어 있는가를 중시해서 최종적으로 5명의 응모작으로 압축하였다. 강민근, 구현우, 김창훈, 임지은, 최수현 시를 두고 심사자들은 장고(長考)에 들어갔으나, 흔쾌히 당선작을 내기 어렵다는 데 모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최종심에 남은 대상작들이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우선 시편의 완성도가 높은 경우는 누군가의 시와 닮았다는 인상을 강하게 주었다. 몇 해 전부터 신인상 심사 때마다 2000년대 이후 한국 시단에서 크게 주목받았던 시인들을 떠올리게 하는 시편들이 많다는 사실은 계속해서 제기되었던 문제다. 올해에도 여전히 유사한 한계가 되풀이되고 있음을 확인했다. 한편, 완성도 면에서는 다소 아쉬움을 준다 해도 앞으로의 가능성에 기대를 걸어봄직한 특유의 패기와 고유의 독특함이 묻어나는 시편이 눈에 띄었다면 그 또한 반가운 일이었을 텐데, 매력적인 신인들이 보유하기 마련인 그러한 미덕을 발견하기 어려웠다는 점도 심사자들의 고민을 깊게 하였다. 마지막까지 이야기된 것은 최수현의 시였다. 속칭 ‘B급 정서’로 불리는 도발성과 불량함이 스산한 불안감과 우울의 정서와 결합된 양상이 또 다른 세대적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고 여겨졌고, 이를 파격적이거나 자극적인 요설의 형식이 아닌 정제된 언어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 큰 장점으로 지목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정서의 양식화가 심사자들이 판단하기엔 모 시인의 경우와 너무나 닮아 있다는 점이 단점으로 지목되었다. 최수현의 시를 당선작으로 결정하는 것을 끝내 주저하게 만든 것은 바로 이 기시감 때문이다. 자기만의 시적 개성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좀더 과감한 실험성과 용기 있는 일탈이 그에게는 더 필요할지 모르겠다. 심사자들은 이러한 논의 끝에 결국 올해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시 부문의 당선작은 내지 않기로 뜻을 모았다. 기대를 갖고 소식을 기다렸을 응모자 분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응원과 감사의 말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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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일들

  

나는 모른다네

 

창밖을

너구리를

개와 고양이의 꼬리 사용법을

장미꽃이 가장 간지러운 순간을

예수의 손바닥에 박힌 못의 크기를

탄성을 자아내는 여러 가지 체위를

당신의 혀에 돋은 새빨간 돌기의 감촉을

여름에 어울리는 머리색을

열매가 부풀어 오르는 아픔을

지금의 바람과 내가 몇 번째 대면하고 있는지를

허기가 나에게 주는 기쁨과 슬픔을

 

창밖에서

권투선수는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얼굴을 내려치네

빗나간 훅

 

설령, 설령

디귿의 마음으로

당신은 나를 함부로 이해하네

나의 긴 갈색 머리

웃고 있는 칠월의 책상에 걸터앉아

갈겨쓰네

갈겨쓰고 있네

디귿, 디귿, 디귿이라고

 

함부르크로

떠나는 배를 향해 손을 흔드는

아이들처럼

찍찍찍

세상이 내 것인 것처럼

갈겨쓰네

 

사랑을 아십니까

길에서 그런 질문을 받아본 적 없네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고 싶은

나의 다리들

다리들

다리의 다리들

 

책장 위를 우아하게 걷는

열 개의 다리를 가진

고양이의 자의식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를 시도하네

 

비명처럼 길고 긴

기차

검정 거울

나는 모르네

어퍼컷 혹은 라이트 훅

내 몸을 빗나간 뼈들

바닥을 뒹구는 뼈들

 

               *

 

옆 집 오빠는 키가 작지만

여러 가지 표정을 가졌고

나를 볼 때마다 미소를 짓네

캄캄한 주머니 속

그의 그림자

자꾸만 길어지는 그림자

디귿의 심정으로

난간에 기대

화단에 핀 장미를 내려다보며

우리는 인사를 나누네

 

그와의 대면이 몇 번째인지

모르지만

모르핀의 투명함

분침이 툭 하고 내려앉는 순간을 목격하는 것

나는 배고파요

 

주머니 속의 주머니

주머니 속으로 삼켜지는 주머니

주머니와 주머니들만의 어둠

인사처럼 텅 빈

권투선수의 꽉 쥔 주먹

부풀어 오르는 손톱자국

 

나는 가장 단순한 사람의 얼굴로

오빠를 바라보았네

턱을 괸 채 킬킬대는 칠월의 꽃들

너구리가 디귿을 물고 골목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네

 

 

 

샹주망 아버지

  

   도마뱀. 물을 핥는 두 개의 뾰족한 빨강. 육교 아래를 질주하는 새벽의 차들. 불빛들. 샹주망. 샹주망. 부릅뜬 눈. 눈두덩을 쓸어내리는 손. 아버지 당신은 아래가 젖은 채 침대에 누워 계시네요. 부르르 떨며. 제 손목을 움켜쥐시네요. 당신은 양서류. 나는 가장 어두운 물 밑을 헤엄쳐요. 산호를 찾아. 다섯 손가락을 벌리고. 입을 벌려요. 차들. 차들. 육교를. 내 아래를 관통하는 차들. 불 위를 떠다니는 배. 주머니 안에 숨겨진 손. 당신이 나를 만들었어요.

 

   아버지. 춤을 추고 싶어요. 물속에서. 다리가 움직이지 않아요. 시멘트의 높은 육교 위에서. 너무 먼 차들. 손끝을 모으고. 샹주망. 샹주망. 물 위를 걷는 도마뱀. 당신의 손톱이 팔뚝을 파고들어요. 땅 밑으로 나를 끌어내려요. 아버지 아파요. 아파요. 떨고 있는 쇠 난간. 속을 흐르는 피. 차가운 밤의 불빛이 나를 얼려요. 보내줘요. 혀의 움직임. 혀의 속도. 혀의 방향으로. 물을 그러모으는 손들. 샹주망. 샹주망.

 

 

* 샹주망Changement : 발레 동작 중 양다리의 장딴지를 부딪히며 공중으로 도약하는 자세를 말하며, 프랑스어로 변화라는 뜻을 갖고 있다.

 

 

 

박쥐

 

   긴 꼬리 구둣발 소리 미간을 찌푸린 오월의 빛 친하게 지내자 꽃봉오리를 쥐어뜯는 왼손 끈적이는 보도블록 슬로우 다운 슬로우 다운

 

   벗겨지지 않는 피 냄새. 굳게 입을 다문 밤의 냄새가 난다 길 끝에서 두 남자는 주먹질을 하고, 코끝에 손가락을 대고 냄새를 맡으며 냄새는 어디로부터 오는가

 

   육교 아래서 비를 피하며 물 뜯는 소리를 듣지 차는 멈추고 차창을 내린 하얀 얼굴의 남자는 묻지 찢겨진 입술을 찾아줄까? 묻지 떨고 있는 오월의 난간을 붙들고 가방끈을 꽉 붙들고 고개를 숙이지

 

   슬로우 다운 아버지처럼 웃는 밤거리의 남자들. 뒤집힌 괴물들 세상에서 가장 뻔한 노래를 부르지 슬로우 다운 차창을 내린 얼굴처럼

 

   발톱 오늘 밤의 발톱 셔터가 내려진 꽃집 앞 화분들 발톱에 걸린 긴 소매들 병뚜껑을 모으는 취미 출처가 불분명한 다리의 멍들 뭉개진 꽃잎은 손안에서 끝없이 끈적이고 있지 슬로우 다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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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은선 / 1987년 서울 출생. 2010년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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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청년*

  

이란 사는 파란 남자는 베이지색 배 안에서 가능성이다

둘 중 한 쪽은 반이 추는 노란 춤일 것이고

자궁이 좁아 옆이 붙어버린 샴의 형일 것이며

엄마는 파라솔의 알록달록 아래 자주 눕고

태양의 정면을 쳐다보는 이란의 유일한 베이지다

파란 것은 배고파 어떡해 자꾸 묻는 아이의 느낌이고

노란 것은 스미고 번져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파란 옆인데

 

둘이 붙은 것은 파라솔 근처의 태양 때문임을

로션 바른 베이지가 알고 있다

먹힌 것은 그래서 노랑

동생의 배로 잡혀 들어간 트윈의 형

파랑의 움직이는 반

예뻐 죽기 직전인데

 

왜 청년은 임신인가 노랑을 품었으므로

 

형은 손톱이 자란 노란 손을 굽힌 채 내내 있었을 것이고

형은 치아가 솟은 노란 입을 모은 채 파란 놈의 내장이 되는데

놀랍지 여기서 노랑을 유지해 이건 형의 고발인가

노랑의 극단적 위장 파랑

 

사실 살인은 청년 베이지가

파랑노랑 분명하지 못한 놈이

누구에게 배웠나 멋으로 옆을 갈랐나

몸 작은 형은 곱슬거리다 죽지도 못하고 어쩌다 죽지도 못했는데

아니라면 임신이지 그러니까 약간 유머야 배 배 배

내 배 속에 형이 들어 있다

 

꺼내봐 네 형

죽었나 살았나 몇 살이야

 

동갑이군 여전히 노래

네놈은 파랑인데 위장이고 형이 노랑이고 아 참

형이 넌가? 너 이란이야 청년이야 이거 알록 아냐?

 

그러니까 이게 배 안에 두 배가 붙어 한 배가 한 배를

왜 먹었지요?

 

 

* 22세 이란 청년의 몸에서 태아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그 시신은 청년이 엄마의 태내에 있을 당시 함께 자라던 쌍둥이 형의 몸으로 밝혀졌다.

 

 

 

 

아버지 딸뱀

  

소녀의 이름은 외자, 뱀이다

줄거리는 몸 쓰는 놈으로 섭외하고

누린내가 퍼지면 인물들 움직인다

그는 앉아 있고 단 한 번, 푸드덕댄다

백발을 감아올려 뱀을 세운 딸은

아비 앞에 선 채로 생리를 쏟아내고

기름이 다 빠진 뱀은 다리가 휘어진다

타닌 타닌 타닌*을 외치는 소녀

불현듯 안구를 꺼내 눈구멍을 비우고

멀미 오른 몸은 뒤를 건드리며 부드러워지는데

 

아비는 지금 무엇을 하나

나는 시력을 잃었으므로

 

어제 아비는 울었다 어제의 아비는 이제

아비의 어제

이제 나는 영영 아비를 알 길이 없고

 

한낮 어둑한 후방의 얼굴

깜깜한 얼굴을 삼키며 몸을 불리던 나는

곁이 없어 마른 접시에 든 낙지처럼

배 붙일 곳이 필요하므로 뒤로

뚱뚱하다

 

(팽팽하고얇은측백잎날렵한근육한점)

 

정사도 없이 부푼 몸이 나는 어지러운데

왔다 몸 쓰는 놈 이명을 다스리는

개들의 돌림노래

 

휘파 피 파 휘 축축한 켄터키 뱃집에 햇빛 비치어

어느 뱀 검둥이 시절 휘파 피 팟 척 척

 

저 해는 긴 뱀을 감아올릴 때 아버지는 벌써 익었다

 

아비를 굴리며 노는 어린 뱀 세상을 모르고 감나

분장할 시절이 닥쳐오리니 치장해라 아버지 딸뱀

 

그리운 아버지 등장하시어 울던 몸 오라며 운 날

척척한 등허리 찢으며 놀자 선지를 튕기며 놀자

 

 

* 타닌(tannin) 무두질 : 타닌을 이용하여 짐승의 생가죽에서 털과 기름을 뽑고 가죽을 부드럽게 만드는 과정.

 

 

 

똥굿

  

똥이 폭발한다

꿈에서

젖은 하체가 달아난다

고의는 아니었고

하체는 하의 안에 있다

항문들은 줄을 지어 따라가고

사라지고

순식간에 퍼지는 낮잠의 바닐라

똥 싼다

밑이나 열자

항문이 질과 담합하여 새로운 구멍을 내세울 때

머리를 아래로 하고 기름에 튀겨보지

카락 카락 탁탁 튀는 낱개들 몸살들 쏟아지는

내장들 우리도 할 말이 있다

잠 속의 항문 마이크 물면

누구냐 질

너의 스위치를 켜라

띠용띠용

둥둥 떠다니던 잠자던 마초

꿈을 배신하며 기어코 죽어가

마초를 꿈꾸던 대낮의 애인

불 끈 질을 열고 시체를 내보내

항문엔 담배를 물리지

엉덩이를 낮추고 제법 연기도 뿜어

여배우 같아

임신도 했어 영화같이

엄마 이거야 탯줄 대신 숙주나 연결해줘

여자 다산콜센터로 달려가 허벅지를 연다

부탁해요 데친 숙주

120: 어서오십시오미친년 네 똥집이나 한 입 먹어라

여자: 그래요 그래요 정다운 나의 다산콜센타

임신은 아니었고 항문은 돌아왔다

안심할 일은 아니다 어쨌든 나는

잠이 폭발한다

  

이번 꿈은 액자식 키보드 구성

똥물 쓴 내가 휙 돌아보면

누군가 똥 싸고 있고 그놈 항문 파내면

내 뒤가 쓰라리고 밑을 건드리면 위가 넘어가고

머리칼 튀고 날고 머리통 구르고

엔터엔터 신나게 두드리는데 얼굴에 엔터 똥칠이고

누가 나 좀 말려봐요 쟤 좀 건져줘요

저년 싸겠네 저거 꿈꾸다 구체적으로 웃는 거 봐

굿이라도 해야겠지 똥병이지 저거

거기 똥신이시어

차라리 나 타인 되게 하시오 이 몸 작살에 올릴 테니

제대로 썰어 다시는 붙지 않게 멀리멀리 뿌리시오

워이 똥물 워이 똥 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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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진 / 1981년 서울 출생. 2008년 서울예술대학 연극과(연기 전공) 졸업. 2006~2010 극단 〈골목길〉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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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총 368명이 응모한 올해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시 부문은 예년에 비해 100여 명 정도 수가 줄어 기대할 만한 작품이 적지 않을까라는 우려 속에 심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우려를 비웃듯 심사위원들을 긴장시키고 설레게 만드는 수작(秀作)이 그 어느 때보다 많았다. 예심을 통과한 이들의 수가 15명에 이른다는 점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들의 이름을 전부 부기해도 좋을 만큼 작품의 수준과 완성도가 모두 당선작으로 뽑아도 무방하다는 이야기가 오갈 정도였다. 구현우, 김복희, 김선미, 박수지, 백지은, 송민규, 안희연, 양안다, 유재숙, 이소연, 이진기, 장수진, 정재우, 주완식, 한그린 등은 곧 다른 지면을 통해서라도 만나볼 이름들이다.

   15명의 작품 중 누구를 본심의 대상으로 삼을 것인가부터 행복한 고심거리였다. 올해의 경우, 심사를 진행하기 전에 심사위원들이 중요한 규준으로 의견을 모은 것은 기성의 틀을 벗어난, 이해를 거부하는 과감한 ‘파격’으로 보일지라도 자기만의 독창적인 시적 발화를 선보이는 진정한 ‘신인(新人)’의 형상을 찾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중략)

 

   논의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것이 백은선과 장수진의 시였다. 그런데 그간의 심사에는 없었던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이 제정된 이후 단 한 차례도 없었던 시 부문의 공동 수상을 진지하게 논의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만큼 백은선과 장수진 중 그 누구의 시도 손에서 내려놓을 수 없었다.

   백은선의 시는 장황한 말의 집적으로 시를 불필요하다 싶을 만큼 길게 만드는 요즘의 경향과 비교할 때, 선명한 이미지의 제시와 긴 호흡을 다채롭게 변화시키는 유려한 리듬을 통해 한국 시에서 장시의 새로운 미학을 일굴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기대하게 만드는 예로 꼽을 수 있다. 그 가운데 드러나는 선연한 상처의 흔적과 세계와 사물을 대하는 부정적 대결의식은 뒷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날카로움 또한 숨기고 있다. 로르카의 민요시를 떠올리게 만드는 감각적 리듬감은 그가 계속 견지해야 할 큰 장점으로 보인다.

   장수진의 시는 자신이 창출한 형식을 스스로 그 내부에서 산산조각 내려는 강력한 자기파괴적 힘을 발하는 요설로 시종일관한다. 흡사 접신의 경지에 이른 무당의 굿판을 떠올리게 할 만큼 말의 폭포가 쏟아져 내리는 독백조의 발화는 단정하고 우아한 정제미와는 전혀 거리가 멀다. 하지만 그의 시에 내재된 요설의 형식과 거친 리듬은 시대를 조롱하며 비극적 웃음과 울음을 동시에 토해내는 자의 목소리를 연상시키며, 그러한 목소리가 갖게 마련인 강한 마력으로 독자를 자기 세계로 이끄는 형용키 어려운 매력을 뿜어내고 있다. 자기 내면에 도사린 퇴폐와 파멸의 징후를 거침없이 발산하는 그의 시는 한국 시에 또 다른 ‘마녀’의 출현을 예고하고 있는 듯하다.

   이렇듯 기성의 시와 타협하지 않으려는 독자적 개성이 빛을 발하는 이들 중 한 사람만을 당선자로 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심사위원들은 단 한 명을 선택하는 일을 과감히 포기했다.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되는 두 명의 새로운 시인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통해 배출할 수 있게 된 것을 기쁜 마음으로 축하한다. 수준 높은 기량의 시편들을 함께 투고해준 응모자 분들 모두에게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린다. 한국 시의 미래는 고맙게도, 감히, 여전히, 밝다. _ 이광호, 강계숙(문학평론가)

 

1차 심사: 이원, 강정, 강계숙   2차 심사: 이광호, 강계숙

 

 

            —《문학과사회》2012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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