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어의 방 외 4편 / 이경호
꽃핀 꽂은 별들이 첨벙첨벙
청어의 입으로 들어가는 날
삶을 꾸덕꾸덕 말리는 죽도시장 좌판
잔가시를 뱉는 짧은 겨울햇살
노파는 수심을 알 수 없는
주름 바다를 키운다
사주단지 앞세워 시집오던 첫날밤부터
비린내로 쩐 소매
노파의 주름이랑은 청어 떼가 헤엄치는 길
청어는 노파의 살과 뼈를 다 갉아먹고
고단한 물빛 지느러미를 흔들며
고향 심해바다로
물살을 가르며 헤엄치는 봄꿈을 꾼다
청어뱃속에 바람소리 여물어 갈 때
파랑노래가 된다
노파는 작고 푸른 부레를 베고 눕는다
첫 별이 뜨면 수평선 너머로
청어의 방 하나 생기고
그때부터 하현달은 자라기 시작한다
노파는 어디로 갔나
낮하늘에 낙관 하나 희미하게 찍어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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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절기 관절염
무릎이 멍든 밤이면, 멍을 뚫고 굴참나무가 자란다
굴참나무엔 도토리거위벌레가 기생하고
개똥지빠귀 철새가 몰고 온 창백한 구름,
구름을 접는 달빛 계단에
어린 개암나무 그늘이 주저앉아 운다
땅 밑을 굴러간 도토리들이 나무뿌리를 더듬다가
햇빛을 외면한 어둠에서 만난
휘파람소리
늙은 뿌리 혈관은 내일을 예감하고
꽃과 잎은 대궁에 도착하기도 전에 관절염을 앓는다
물관과 체관을 흔들어대는 푸른계절
나뭇잎은 더운 숨으로 허공을 나부끼게 한다
굴참나무 옹이에 들어앉은 상처
환절기에 파르르 떨며 살아남은 잎맥들의 시간
건조한 발목에 장수풍뎅이가 터를 잡고
숲은 바람의 숨결을 쌓아 올린다
어제를 쌓고 오늘을 여며, 내일을 만들고 있다
귀신 고래의 혈통
나는 사월에 죽은 귀신고래의 혈통
나의 내부는 함부로 어두워지지 않는다
봄빛 떠도는 적막에서 태어나
수평선 넘나드는 비명소리를 가졌다
눈물 젖은 눈으로 울다가 귀신을 만나면
죽은 고래의 영혼이 옮겨온다는데
등줄기에 업보를 짊어지고
물빛 다리를 파도더미에 놓는다는데
나의 전생은 잔별로 풀어헤친 윤슬
내 가문의 뿌리를 찾아 헤매는
파도더미는 흰 핏줄을 다발로 허공에 터트린다
최초의 피가 뿌리를 내릴 뭍이 없다
헛것을 보는 눈이 침침하다
구천을 떠돌던 공기방울들이
노을과 피를 나눠가질 때
따개비로 주저앉는 저녁이 돈다
습습한 플랑크톤 잔뼈를 뱉는 정어리 떼가 밀려온다
누가 귀신고래의 혈통을 찾아 헤매는가
나는 귀신고래가 숨어서 키운 상처다
새를 기다리는 밤
빛바랜 이파리 사이로
새가 숨소리를 묻고 그림자로 흔들리고 있다
구름이 머물다 떠난 자리
벌거벗은 바람이 날선 하루를 벗겨낸다
발가락에 피를 말리며 떠다니는 무수한 새들의 수다
푸른 한나절 바람을 품었다 날리는 중이다
애기무덤가 칡꽃 술에
뜨거운 입맞춤 하는 부리들
칡꽃에 찍힌 입술자국은
계절을 잃어버렸다
환한 향기로 발아하는 그믐밤
붉은 꽃물 떨구며 새를 기다리는 밤이 야위어가고 있다
그렇지
바다는 수심으로 파도를 키운다
가시를 발라먹은 손가락
받아들일 수 없는 어둠
이러지도 저러지도 꼼짝할 수 없는 궁지
파도가 온몸에 푸른 흠집을 내도
밥에 섞인 모래 씹는 기분으로
바람을 걸러내는 모래
깊고 캄캄한 바다 푸른 밑에는
긴 창과 단단한 칼로 무장한
사람 사람들
성난 짐승으로 사납게 무리 져 오는 비린내
낚싯배는 미끼속에 바늘을 내리고
해초 사이를 비집고 다닌다
귀속을 간질이는 물결
눈동자를 파고드는 날개짓
부서지는 바람소리
끌어안고 뛰어내리는 절벽
깨지면서 길을 연다
어둠을 찌르고
부서지는 방향으로
넓고 하얀 바다가 고요의 심지를 세운다
[당선소감] 시창작에 도전하다
30대 초반 직장생활에 회의를 느낀 적이 있었다. 마음을 다스리기 위하여 인생계획표를 작성하고, 즐거운 목표를 세웠다. 정년까지는 열심히 일하고, 정년 이후에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자. 내가 계획했던 일은 세계를 여행하며 여러 풍광을 사진기에 담는 일 이었다.
종부(宗婦)로서 고생한 아내를 즐겁게 해주고 싶은 마음도 숨어 있었다. 그러나 아내의 건강은 해외여행을 허락해주지 않았다. 같이 있고 싶어 하는 아내의 권유와 틈틈이 시를 읽고 위로를 받으며, 자연스레 시창작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글쓰기 소질은 없지만 노력하다 보면 잘 쓰게 되지 않을까? “끝이 무디다 보니 구멍 뚫기가 어려울 뿐, 한번 뚫리게 되면 그 구멍은 크게 뻥 뚫린다.”는 옛말에 조그만 희망을 걸었었다.
오늘 당선소식은 이런 나의 초심을 잃지 말라는 게 아닐까! 열심히 쓰다보다 좋은 글이 나올 수 있다는 격려가 아닐까! 제2의 인생은 시창작으로 살아가려고 한다. 잘 익어 향기가 오래 남는 시작품을 쓰고 싶다. 좋은 글을 위해 최선을 다해 쓸 것이다.
미흡한 시를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과 한국문학방송 관계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심사경위]
올해로 열 번째가 되는 한국문학방송 신춘문예다. 이번에도 과거(1회~8회)의 경우와는 달리 응모자격 제한(공모 요강)에 따른 순수 미등단자(문예지나 전국·지역 일간신문 등의 신춘문예, 현상공모전 등에서 당선 또는 수상한 사실 없는)로서, 170여 명이 응모했다.
1차 예심에서 23명이 선발되어 본심으로 상정됐고, 본심 1차에서 5명(작품수로는 25편. 1인 5편 응모)이 선정됐다. 본심 2차에서는 각 작품별로 채점(점수)제 방식을 통해 최종적으로 1명이 당선자로 결정됐다.
본심은 채점과 집계가 완전히 종결될 때까지 심사위원끼리도 누구인지 그리고 몇 명인지 알 수가 없도록 철저히 미공개 및 보안을 유지했다(심사위원의 소신과 자율성, 공정성 등 보장). 채점 착안 사항은 문법·어법·표현의 적절성, 주제와 내용의 부합·일관성, 감동·느낌, 시적구조와 메타포의 깊이, 작품의 신선감·독창성, 작가적 역량·성장가능성 등이었다.
심사위원은 해마다 전원 교체 위촉함을 원칙으로 하는데, 이번 예심은 안재동 시인(한국문학방송 주간)이, 본심은 조영민 시인, 권오성(필명 권이화) 시인, 이경숙 시인(아래 사진, 무순)이 각각 맡았다.
- 심사위원 조영민, 권오성, 이경숙 시인
한국문학방송에서 시행한 2019년도(제10회) 신춘문예 현상공모에 이경호(67) 씨가 당선됐다.
당선작은 <청어의 방>, <환절기 관절염>, <귀신 고래의 혈통>, <새를 기다리는 밤>, <그렇지> 등 5편으로, 채점(점수)제 방식인 본선에서 다른 응모자들보다 상대적으로 고르게 높은 점수를 획득함으로써 당선의 영광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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