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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꼭지 없는 데스크 / 양우정

 

9시 뉴스가 사라졌다

사라진 탁자의 단면과 아이들이 사라진 거리와

이불 속 사라진 역사를

앵커는 가장 진보적이라 했다

새로운 것과 익숙한 것 사이 삼킬 것을 고르는 일은

친구 같은 낯선 사람을 고르거나

시민권자의 얼굴 중 가죽 벨트 구멍이 가장 많은

내부제보자를 물색하는 일 일지 모른다

다중의 몽타주를 읽는다는 것

불빛 하나만으로

깜깜한 터널을 더듬어 가는 것은 아닌지

절망과 희망의 구호를 친숙한 놀라움이라던

물음 없는 누드크로키의 데스크

봉쇄된 의뭉한 눈속임의 뒷말을 피할 수 있을까

하루의 꼭지였을

진실이 묻힌 단독 인터뷰는

방송에 앉지 못하고

사라진 기사를 사지 않겠느냐는 암표상이

불쑥불쑥 소매를 잡아끌며

잠입취재를 시작하는 사이

언제나처럼 틀어진 계획의 비명들은

특종이라는 실시간 뉴스로

엉키고 치렁거리는 거리로 흘러나오고 있다

 

익명의 제보와 소문이

반항적인 저녁을 조금씩 지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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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4의 것들과 수건돌리기의 결말 / 정유종

 

내가 너를 불러냈으므로

우리가

조우할 수 있다면

그 막연한 가능성으로부터

너는 내가 사랑했던 소녀이거나

소풍 전날 걱정했던 날씨이거나 또는

그 무엇이거나

온전히 과거로부터 오는 것일 수 있고

구름이란 형태에 숨어 얼마간 지나가는 중일 수 있다

0.004마이크로그램?

그 작은 무게가 있으면 구름으로부터 해소될 수 있는

빗방울 직전의 빗방울이거나

그러므로 지금 모든 공중은 잿빛일 수 있다

회한을 잔뜩 머금은 표정이었다가

후두둑 포탄 같은

슬픔을 뿜어낼 수 있다

 

떨어지는

모든 슬픔들의

발,

 

내가 너를 생각했으므로

광장은 어디로든 벌어질 수 있다

길 위를 달려가는 모든 자동차들이 어쩌면

이곳으로 오고 있는 모든 너의 차 안이 되고

누군가를 만나기로 했고

만나야만 했던 장소마다 네가 생겨난다

너는

전광판의 시계가 차곡차곡 바꾸고 있는 시간이거나

노래방에서 포도몰로 시네마로

비의 징후를 느낀 비둘기가 긋고 가는 사선이거나

 

내가 너를 불러냈으므로

나의 모습은 기다리는 자의 것을 차용할 수 있다

시선은 광장이 아무렇게나 번져가는 곳

바람이 어쩔 줄 모르고 서성이는 나뭇잎 근처이거나

배터리 매우 없음 잔량 4%로 점멸해가는 휴대폰 액정이거나

그러나 절체절명의 한 통화를 기다리는 이가 될 수 있다면

4%는 얼마나 거대한 힘인가

나는 광장에 앉아

너를 필사적으로 쫓던 나의 장면들을

구경하고 있던 것인데

이제 이 4%의 힘으로 무엇을 쫓아야 하는지

언제부터인지 모를 불길한 그림자가 내 뒤에 놓여 있다

비둘기 한 마리 날아오르고,

 

끊임없이 돌아가는 것이

결말인가?

 

너는

내가 언젠가 사랑했던 소녀이거나

아주 먼 심해로부터 이곳으로 돌아온 구름의 시간이다

엄마! 지금 축축한 무엇인가 내 이마를 긋고 갔어, 라는 식으로

직감하는 회전이다

그러므로

빗방울 이후의 빗방울은 다시 심해가 될 수 있다

유독 4℃의 물이 되어 가장 깊은 바다가 될 수 있다

물이 다시 떠올라도 4℃는 그곳에 남는다

심해어들이 무사히 헤엄치며 점점 시력을 잃어간다

 

너는 언젠가 걱정했던 소풍 전날의 날씨이거나

어둠 속에서 깜빡이는 심해어의 흐릿한 비늘이거나

 

내가 너를 불러냈으므로

너는 이 잿빛 광장을 통째로 끌어안으며

나타날 수 있다

 

조금은 죽음이었고

조금은 로맨스였던

내가 있던 자리마다 빈칸이었으므로

네가 가진 모든 경우의 수를 내게 대입할 수 있다

다시,

비둘기 한 마리 공중으로 그어 올려지고

어떤 비둘기의 사체는

여전히 잊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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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미래도 / 정두섭

나는 계단입니다 당신이 밟으면 도가 되지요
나는 계단입니다 당신이 밟으면 레가 되지요

나는 계단입니다 당신이 밟으면 미가 되지요 당신은 한꺼번에 두 계단을 오르고
계단은 솔, 계단은 사라지고

나는 계단입니다 당신이 밟아도 계단입니다 계단은 소리가 없고 계단은 회색입니다, 불 꺼진

당신은 계단입니까
나는 계단입니다 당신이 밟으면 시가 되지요

출구는 입구입니다
고장 난 무지개가 떴습니다
빨주노초파, 남들은 다 어디로 가는 걸까요
보지도 않고

계단은 숨이 가빠 저절로 계단을 타고
사람들은 또각또각 시간을 뚫고 지각도 뚫고 지상으로 솟구칩니다

건반을 밟으면
무지개의 바깥 계단이 움찔합니다 그러나 소리가 없지요
반건 오징어처럼 오므린
음계 바깥의 음계입니다 색깔도 없지요 울음도 메말랐으므로

나는 계단을 지배합니다 출발과
도착, 점과 점 사이를 반복하는 계단
바깥은 따듯해, 바깥은 느긋해?
납작 엎드려 계단을 기웃거리다가

오 거룩한 주머니여 때 묻은 입술로*
계단을 짓밟아주세요, 아낌없이

당신은 계단입니까 나는 당신의 안쪽 계단입니다  


* 계명(階名)의 유래, ‘세례자 요한의 찬가’ 변용

 

 

[금상] 한 입 코끼리, 그리고 스무고개 달팽이 / 동하

 

1.
한시라도 빨리 코끼리를 집어삼키기에는 걸음이 느리다.
달달할 거야, 달콤할 거야.
안간힘을 써서 달리는 중이야. 온 몸이 근육통에 아플 정도로.
모가지를 빼들고 수탉이 울어댄 먼동부터 삭풍에 놀라 붉게 타오른 저녁 앞까지
코끼리를 미행한 목격자가 있으니까.


2.
코끼리라는 이름만 들어도 투명해져.
나는 등에 언제나 무게를 지니고 있어.
무게는 무계無稽를 지니고 있어.
둥글둥글 한 것 같으면서도 속은 구겨져 있어 한 없이 모난, 물음표.


3.
달팽이집을 깎는다.

너무 어렸다는 죄 때문에
너무 무지했다는 죄 때문에
멈출 수 없이 스무고개 달팽이집을 깎는다.

달팽이집을 깎는 방법은 주변에서 들려오는 수많은 소리들과
수많은 목격과 고뇌로 둥글고 명확한 모양으로 깎는 것.

속에서 시커먼 냄새와 시퍼런 멍이 들고
다시 아물만하면 반복

달팽이집 안으로 영겁의 시간동안 메아리가 퍼지는 소리가
청동이 울리는 것 같다.

고독과 마주하는 중이다.


4.
서늘하면서 달콤한, 고상하면서도 즐거운
나는 프로이트의 환자였다.
코끼리에 이끌려 다가가면 거리감을 상실하고 만,
혹은 몇 번의 유혹이 깨져야 너를 가늠할까.
혹은 너와 나를 가름할까.

낌새를 알지 못하게 느릿느릿, 사자처럼 다가갈 것이다.


5.

집어넣기엔 커다랗게 아프다
다시 스무고개 달팽이집을 깎는다.

결국
너는
커다랗다

 

 

 

 

 

[금상] 사과를 바라보는 / 서승원

                   

사과를 베어 물었더니 입술이 부어올랐다

독하게 날 떠난 애인의 뒷모습처럼 쓰렸다

사과는 농담으로도 내게 사과하지 않았고

나 또한 붙잡지 않았다

더는 친해지지 않아 다행이었다

 

난 왼손잡이다 욕부터 먹으며 자랐다

사과를 깎으면 누이들이 달려와 오른손을 내밀었다

칼날은 내게 먼저 달려들었다

누이들은 날 사랑한다고 했으나 칼끝은 날카로웠다

사과는 둥글려고만 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내가 되어서야 사과를 내밀었다

잘린 몸으로 온 사과는 불통이었다

자주 입안이 헌 나와 유독이었던 사과와

그 후 아내는 내게 사과를 권하지 않았다

나도 아내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비가 적게 오는 해에도 사과는 열렸다

쉬운 상대 한 그루쯤 키우고 산 것이

다행인 나날이었다

 

 


 

[은상] 황구지천 / 수퍼스톰

 

1
어릴 적 황구지천은
내 마음에 운하를 파고 흐른 갠지스 강이었다
그곳에 서두르지 않는 기다림이 있었다
맑은 물살이 풍화한 지구각질을 하류로 굴려 보내는 것을 보았고
성스러운 물로 세례를 받듯 봄부터 가을까지
물로 뜨거운 이마를 적시는 사람들도 보았다
간혹 장마철에 익사한 이름 하나 쓸쓸히 떠내려갔더라도
그것은 수몰된 과거의 지평선일 뿐
사람들은 여전히 물고기의 비린내를 따라다니며
물에 발자국을 수없이 찍었다
천변의 수양버들 그늘아래에서는 매일 불의 혀가 자랐다
다시 죽을 수 있는 느긋한 불길의 지문은
갠지스 강의 판화였다

2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이
양은 솥바닥을 핥던 불의 혀를 완전히 잘랐다
사람들은 더 이상 물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았고
수양버들 밑에 심었던 연기의 뿌리도 뽑혔다
물속에서 자란 수많은 종양을 뜯어 먹은 물고기들은 소경이 되거나
목발을 짚었다
아픈 물위에서 구름처럼 부푼 거품이 바람에 쓰러져 신음하며
서해를 향해 흘러갔다
물은 오랫동안 감옥에 갇혀있었다  

3
지난해 늦가을
황구지천을 따라 허공에 박혀있던 수많은 점자를 보았다
손가락으로 점자를 읽지 않았어도
마침내 긴 감옥살이에서 물이 서서히 풀려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물에 혈색이 돌았다

날개달린 점자가 허공을 뚫고 자맥질했다

4
그러나 끊어졌던 불의 혀는 아직도 자라지 않고 있다
점자 머물다 떠난 허공, 아직 따스하다.


*황구지천은 경기도에 위치하는 하천으로 의왕의 왕송저수지를 거쳐 권선구 당수동 · 금곡동 · 장지동 · 대황교동을 거쳐 화성시 태안읍 · 정남면 · 양감면으로 이어진다

 

 

 

 

 

[은상] 나비의 여행공식 / 천수

 

강물을 기어올라 처음 본 행성의 봄은
꽃들의 만찬이었다,
이때는 행글라이더를 타고
공중에서 해시계 태엽을 감는 소년처럼
나비도 날개 속에 쉽게 바람을 가둘 수 있다고 생각했다,
꽃들에 다가갈 때는 어린 손님처럼
언어대신 애교스런 율동을 먼저 지어야 했는데
오히려 너무 화려한 빛과 색채를 지닌 꽃들의 조롱을 견딘 건 의문이다.
하루 같기도 하고 일년 같기도 한 꿈들이 스쳤다.
행성에서 봄에서 여름까지는 몸도 공기도 가벼웠고
늦여름부터는 점점 길 위에 그려진 그림자의 질감이 만져졌다,
언제부터인지 다른 빛깔의 무리진 나비들이
들판에서 산이나 강으로 가면 돌아오지 않았다.
들꽃들도 저녁마다 너른 들판에서 드문드문
한적한 마을의 길가로 옮겨가고 있었다.
나비는 행성을 빠져나가는 길을 알고 있었다.
행성에 잔류 중인 나비들은 서로 스칠 때 특유의 율동 몸짓 손을 흔든다.
이것은 일테면 다른 행성에서의 자기들끼리의 약속,
무너진 봄의 빛깔로 돌아가고픈
해맑은 소년의 의식으로, 모든 기억도 결국 처음으로 돌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맹랑한 첫인사처럼 나비는 지상에서 채취한 무늬의 날개를
어두운 그림자 속에 고이 접어 밀어 넣는 것이다.
제 그림자를 다룰 줄 아는 나비를 나는 언제 어디서 보았을까?
호랑나비 한 마리 가을 길로 한들한들 날고 있다.
해시계 태엽이 풀려가는지 길 위에 제 그림자를 펼치고
여행 중 여러 행성 머물 때 각 행성에 맞게 도안한 무늬중 하나를 벌써
제 긴 그림자 속에서 살펴 고르고 있다.

 

 

 

[동상] 문어(文魚) / 이규성 (동피랑)                         
                                     
해병이라 불러줄래?
머리통이 포탄이야
물올라 빵빵한 내 뒤통수를 툭, 쳐봐
안전핀을 뽑고 터져줄게
귀신 잡는 해병처럼
얼굴에 해먹빛 화장을 하여줄게
난 기분에 따라 군장이 바뀌어
조심해!
덜컥 붙잡고 끈적끈적 널 빨아버릴지
너의 칼날 앞에 나는 맨살이지
끓는 냄비 속 통째로 날 처넣겠다고
뚜껑이나 덮어줄래?
이승쯤 피로나 풀며 건널 수 있어
밖으로 내미는 발이 있으면 그냥 둬
평생 기었던 바닥, 상류가 알기나 할까?
당신이 승리에 도취된 듯
내 주검 질겅질겅 씹어 삼키겠다면
내 검은 추깃물 함부로 버리겠다면
각오해!
깜짝, 너 식도를 막아줄게!

 

 

 

 

 

[동상] 세렝게티가 걸려있는 동물원 / jooni

저 삐쭉한 전나무 배꼽 높이에
세렝게티 초원이 걸려 있다면 믿으시겠어요
마른 나뭇가지 하나 달랑,
누가 매달아놓았다고 우기시겠지만, 아니에요  
틈만 나면
긴 혀를 날름거리며 빨아 대는대요
물리지도 않는 걸 보면 분명해요 그런데

우글거려야 할 아카시아 잎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둘러봐도
풀 한 포기 없는 메마른 흙바닥
기웃대는 구경군들 뿐,
하지만 상관있나요
싱싱한 이파리들이 무성하게 달려있다고
계속 우기는대요
광활한 아프리카가 펼쳐져 있다는대요
쌉싸름한 초원이 씹힌다는대요

얼룩말 코끼리 사슴들도 울타리 저 너머에서
할 일없이 어슬렁거리고 있으니
착각은 아닌가 봐요
휑하니 걸려 있는 마른 가지가 진짜 아프리카 초원일까요,
공갈 젖꼭지일까요
목이 길어 슬픈 짐승은

절대 생각을 굽히지 않아요
긴 모가지가 온통 고집이에요
빈 가지의 허공에
혀를 날름거리며 긴 하루를 핥아요
침 질질 흘리며 혀에서 피가 나도록,
날이 저물면

낮의 초원은 더 넓어지나 보죠
혀의 놀림이 더 빨라지고 거칠어졌어요
긴 목이 끌어올리는 낮은
신음소리가 캄캄한 어둠을 몰고와요

 

 

 

 

[동상] 탁본 / 윤희승

 

오랜 응달에서 새겨진 비문의 형체는 쓸쓸해 보인다

마흔 둘,

 

어릴 땐 그도 그늘 바깥에서 뛰놀았다

뒷산의 뻐꾸기소리며

진달래 피는 소리며

첫사랑 두근거리던 가슴과

앞산 엄마 무덤가에 잡초를 뜯던 어린 손을

탁본 뜬다

 

지나간 여자가 없기에 같이 뜰 여자는 없다

 

허기를 달래던 라면 몇 가락과

절뚝거리던 왼 무릎의 시린 소리와

삭이던 외로움 몇 자락과

술잔에 일렁이던 울음의 파문 몇 개도

눌러 뜬다

 

그 흔한 아버지의 이름도 비문엔 없다


한 생애를 뜬다

젊은 날을 비껴가던 햇살의 문양을

끈덕지게 달라붙던 불운의 촉수를

망울이다 만 꽃자리의 흉터를

소용돌이치던 설움의 파편을

꾹꾹 눌러

뜬다

 

어쩌면 나였을지도 모를

한 음각의 비문,

갓 태어난 아기의 숨소리를

탁본한다

 

영안실이다

 

 

 

[동상] 서커스 / 시엘06

 
천막 안에
천국을 비끄러매습죠
다시 없는 기회 아니겠습니까
 
광대 뒷면을 의심하시나요
요놈 주머니를 털어보았자 시뻘건 히죽거림 말고 뭐 있겠수
괜히 우울을 주물럭대지 마십시오
자, 들어가서 무조건 화려해집시다
뿜빠라 뿜빠
 
곧 마술사가 그림자를 열어 보이겠습니다
타로 카드를 뒤집어서 우리들의 회한도 얇게 하겠답니다
보세요, 눈물에 시간을 뽑아버리니
이렇게 에메랄드가 되잖아요, 박수를
이봐요, 공중그네 아가씨
반대편 남자를 사랑하나요?
허공에서 배신은 가장 높은 묘혈이지요
사내의 회전과 의문의 타이밍
살짝 죽음에 할퀴는 이 짜릿함, 제발 박수를
 
소녀여,
삶이란 등을 휘어 입에 무는 백색 공
엄마, 그렇죠?
모든 구부림은 아름다운 거죠?
말해 뭐하니, 너의 역전은 언제나 황홀하단다
 
외줄 좁은 면을 흠모합니다
공중을 걷기 전 까지는 모든 완성을 미루세요
직립은 부끄러운 바닥입니다
당신들을 위해 제 현기증을 바치겠어요
오, 박수는 치지 마세요
저 시커먼 유속 위를 걸어가는 내 발바닥의 노래
저는 괜찮습니다, 아니 상관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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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갈대시집 / 김진수

 

허기를 채운 밀물이 빠져나간

하구언 뻘밭 강기슭에

백발을 흩날리며 서 있는 노인, 팔 척 노구를

가볍게 흔들며 한 소절 한 소절 풀어놓는다

노인의 구술을 받아 적는 참게들

행과 연 가르기에 걸음이 바쁘다

뻘밭이 시집 한 권이다

첫머리엔 무릇 시는 이렇게 써야 한다며

바닷바람의 추천사가 장황하다

별과 달의 축시가 곶감보다 달다

인사말을 대신한 서시는 사뭇 능청스럽게 휘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나눠진 차례가 남다르다

서너 쪽 읽어가다 보니

이빨이 빠져 말이 샜는지,

아님 제대로 듣지 못해 잘못 적었는지

문장이 매끄럽지 못하고 표현이 거칠다

모처럼 좋은 시집 한 권 얻었는가 하였더니

서체도 십인십색이라 읽기가 쉽지 않다

세상에 내놓으려면 우선

물총새 한 마리 초빙해 매끄럽게 윤색하고

표지는 도드라지게 다시 디자인해야겠다

해설은 문단에서 이름깨나 있는 평론가, 종달 도요에게 부탁하고

편집은 전문가인 물결에 맡기니

풍각쟁이 산들바람,

홍보하면 자기라고 엄지손가락 치켜세우고 간다

곧 동네방네 소문나겠다

나는 언제쯤 시집 한 권 가져보려나

어설픈 내 노래는 이제 막 전주가 시작되었다

 

 

 

 

 

 

 

【 금 상 】

녹색 통장 / 동피랑

한라의 수묵(水墨) / 테울

【 은 상 】

잉어 / 미스터한공

화도(畵圖) / 안영주

옥탑방 / 팔삭동이

【 동 상 】

모란 / 시의미학

개망초 꽃 / jooni

35만 400여 시간의 인터뷰 / 동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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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우럭을 굽다가 / 문정완

- 울진 망양정

 

한 사내가 손아귀 칼자루의 권세를 쥐락펴락한다

칼날이 빗금을 쭉 긋자

도마 위에 정수리부터 배꼽까지 칼집이 생긴다

 

우럭 한 마리가

배가 갈라져 내장을 다 쏟아낸 줄도 모르고 꼬리지느러미를 퍼덕인다.

한 바가지 물을 끼얹어 내장과 피를 씻어내는데도

우럭은 마지막 물질인줄 아는 것일까

숨이 끊어질 때까지 여전히 우륵은 아가미를 열고 오므린다

힘겹다 곧 바닥날 숨

 

끈을 놓는 다는 것은 어느 것이나 쉬운 일이 아니다

 

마지막 한 호흡 같은 저 숨결로

우럭은 태평양을 끌어다 대서양으로

대서양을 끌어다 태평양으로

질풍노도의 한 생을 끌고 다녔다

 

흰 접시에 운구 되어 온 우럭이 석쇠에 누웠다

몸 밑에서 숯불이 벌겋게 솟아오른다

한 생이 저렇게 뜨거웠다

아무것도 남아있지도 않은 가벼운 몸이 들썩거린다

점점 비워지는 기억이 물이 빠진다

바다를 떠올리는 꼬리지느러미가 연신 자맥질이다

 

석쇠가 바다인줄 아는 우럭

몸에서 밀물이 빠져나가자 딱딱한 바닥을 드러낸다

흰 갈비뼈가 살점을 비워내자

연혁의 줄거리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가열했던 불꽃이 사그라진다.

석쇠에서 우럭이 지워지고 살점 없는 뼈들이 주방으로 돌아간다

까만 봉다리에 한 생의 그림자가 쓸어 담긴다

쟁반 위 우럭의 머리통

아랫도리가 사라진 줄도 모르고

눈알에 바다가 한 채 덩그러니 떠 있다

 

 

 

 

 

 

 

【금상】

라디오 부스 / 홀든

구두의 행적 혹은 네비게이션 / 김일곤

【은상】

취급 주의 / 서승원

지하 30m에 피는 꽃 / 달못

어떤 상여 / 詩집가는날

【동상】

잇자국 노을 / 네안

겨울의 그늘 / 노크

대나무 숲의 검술 / 겨울과수원

量들의 침묵 / 이주원

누에에게 배우다 / 차윤환

묵죽의 방정식 / 동피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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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호지 / 가문비

  내게 남은 일이란 야윈 문살에 기대어 나를 봉합하는 일

  이슬 내린 새벽과 노을 진 저녁 사이로 은은한 가을을 물들이는 일 인적 끊긴 마당을 향해 묵독하는 일 댓돌 아래 모란을 뚝뚝 떨어트리는 일 침 묻은 손가락을 감추며 정색하듯 시치미 떼던 때 있었지

  수절한 과수의 서러운 일생처럼 부르르 폐가의 문풍지가 운다. 낡은 원고지 여백의 문살마다 육필로 써 내린 문장이 흐릿하다 녹슨 경첩이 낯선 발자국에 삐걱 봉문을 열면 버려진 사발 속으로 도란대는 수저소리 물컹 씹히는 행간들
  
  한 컷의 형상이 별을 띄우고 달빛을 떠먹는다. 사르륵 옷깃을 벗는 꽃그림자, 뽀얀 살결이 풀어헤친 모세혈관들 청청하다 못해 깊다 밤이 쓰러져가는 시간 내내 폐가의 기억은 문 속에 갇혀있고 바람조차 잠긴 문고리를 벗을 수 없다

  한번이라도 문을 발라 본 사람은 안다 멀어지는 것들은 눈이 아니라 손끝으로 더듬어 읽는다는 걸 풀 먹인 창호지일수록 투명하여 한 송이 국화로도 온방을 물들인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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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연協演 / 조성연


  우리가 채록한 땅의 악보 어디쯤인가
  쟁기로 그린 오선이 모퉁이를 돌고 들을 지나
  귀에 딱지 앉은 너름새는 시간의 마디에 늘임표를 찍는다
  이랴
  두툼한 길을 갈 때마다 너의 육중한 발자국 소리
  땅 밑까지 울리는 저음에 귀를 기울이면
  되돌아오는 악절 어느 후렴에서는 함께 자갈을 넘는
  내 작은 발자국은 조금 느리게 두 박자다

  소 울음 같다는 짐작너머
  농자는 근본이라는 당연을 넘어

  음 고르지 못한 악장을 지날 때면
  보다 나은 악상을 위하여 찢어낸 몇 페이지에
  기억나는 선명한 멜로디가 가슴 아리다
  땅에선 언제나 묵은 저음이 자란다
  꾸밈음 넣지 않아도 채보 가능한 음역이 골짜기와 들을 건너
  미지를 가른다
  수레는 낡고 덜거덕거리지만 어느 줄 하나 당겨도
  질기면서 부드러운 겹음 낭낭하다 서로 조이고 늦추면서

  이랴
  바퀴에서조차 둥글게 풀려 나오는 악절
  시김새 곤한 아다지오 돌체 눕던 풀도 몸 일으켜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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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희망정밀 / 김준태

 

쇳밥이 고봉으로 솟아 허기를 깁던

밀링머신 절벽을 깎아내리는 소리가 삐거덕하다

멈춘다

사내의 등허리를 감아 도르르 말리는 기름얼룩이

번지르르하다

무거운 골목이 침윤하는 하오를

헐거운 빗물의 끈으로 동여매고 있다

골목 뒤란 핀 주저흔

꽃등심 만개한 꽃이 비리다

여인의 눈가에 번지는 묽은 추억 너머로

헛배 부른 저녁이 우두둑 뽑혀나간다

자물통 굳게 닫은 희망정밀

허공의 결박을 푼 빈 몸이 공장을 돌린다

악문 입으로 골목을 밀고 가는 여인의 손아귀에

전송을 멈춘 문자가 깜박거린다

사내의 생이 덜컹덜컹 읽힌다 옆구리를 베어낸 붉은 저녁

경첩에 매달린 환영이 불면을 닦아낸다

컴컴한 절벽이 켜켜이 쌓이는 무릎 아래

동그랗게 깎던 희망이 수북하다

 

 

 

[금상] 커피를 내리며/ 淡友 

나는 황인의 주술사
원두 속에 웅크린 원주민을 불러낸다
그 몸에 간직한 검은 바람 강렬한 햇살
한 스픈 두 모금 석 잔만 주문을 건다
커다란 눈동자는 수심 깊어지고
출렁이는 두려움에 제단이 덜걱거린다
'라하 케결정 을간순 이 여피 은검'
그 몸을 빠져 나온 사막이 깔리고
모래 언덕을 넘어 오는 영혼이 거름 종이를 건널 때
절정으로 치닫는 주문, 한 방울만 이 씨씨만 세 컵만
사막의 샘이 제단을 적신다

정갈한 찻잔에 받치는 가장 경건한 시간
원주민의 별 같은 이빨이 딸깍딸깍 찻잔을 깨운다
문명이 익을 때부터 조금씩 반짝이던 소리
식인의 기억이 노을처럼 은밀히
정글을 뚫고 바다를 건너 빌딩 숲을 지나
전라의 영혼을 나른다
'검은 피여 이 순간을 정결케 하라'
오래 그을린 구수한 갈색 피부가
입술에 닿는 순간 혀를 찌르는 전율
나는 도시 속의 눈알 큰 원주민이 된다
독 화살을 메고 쏘아서 적중할
상아색 하트를 쫓는다.          


[은상] 풍경 전사轉寫 / 가문비

횡단보도 파란불이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신호 걸린 택시기사 낙엽 몇 장을 넘기며 일당을 센다
타닥타닥 넘어가는 하루 그 앞을 구부정한 할머니가
유모차를 밀며 천천히 지나간다
가까스로 건넌 홍해의 길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아침마다 클로즈업되는 꿈들로
생활정보지함은 언제나 비어있다 밑 빠진 독으로
구름 낀 하늘로 휩쓸리다 만 전단지 한 장
도시풍을 좇아 단소매를 펄럭인다
썬팅한 창밖으로 역방향 차들이 노출된 필름처럼 겹친다
포플러에 가린 주꾸미 닭발 산낙지 밋밋한 철자들 사이로
파지 실은 손수레가 다가왔다 멀어진다
소나기는 흔적 없이 지워졌다
바닥난 자장면 그릇에 얼굴을 묻은 채 밖을 넌즛한다
서로 마주친 건너편이 민모습을 들이댄다
곱빼기 먹은 입술을 닦으며
잔돈으로 오백 원짜리 학동전을 건네받은 석양
평면의 계절이 도장밥을 묻히고 있다
요철 없는 부리의 문양이 자꾸 온몸을 찍는다

 

 


[동상] 플로레타리아의 창 / 백경

네가 없는 동안에 나는 걷는다 플로레타리아
나는 빙글빙글 목적없이 항해했다
유리컵에 소주는 비어있고
꿈에서 본 잃어버린 너의 첫 구절은 미련없다 돌아오지 않는다
벌써 6월의 나뭇잎이 몇 개나 마르다니
안절부절 왔다갔다 하다가
계단을 내려가 소주를 산다 플로레타리아
플로레타리아 나는 너를 잊기 위해
낮에 술을 마셨다 세상에나
누가 내 꿈 속에다 너를 써 놓았나 플로레타리아
너의 방문에 내 머리는 헝크러진 그물처럼 복잡하다
배 밑에 난 굴껍질을 떼어내듯 거칠어진
얼굴에 수염 속 여드름을 짜내고
나는 대낮의 백향기를 마시며 너를 다시 생각한다
잃어버린 첫 구절에 상관없이 저 건너
이층의 창유리처럼, 배 밑에 난 어탐의 유리눈처럼 매끄럽게
너를 다시 항해하려고 한다
플로레타리아
플로레타리아
창가엔 새로 사다놓은 저 풀잎 화분
내 좋아하던 저 풀잎의 이름이 뭐였더라 로즈마리향이라고
꽂혀있던 저 향기식물의 이름이 뭐였더라
플로레타리아
검은 나뭇잎 새떼가 유리창 속 바람에 한참이나 흔들린다
서로 마주친 검은 눈, 서로 못 본 체 지나는 검은 새들
내 거울에 비정규직을 누르며 군림하는 정규직
플로레타리아 위에 플로레타리아
플로레타리아
건너편 학원선생님의 목소리보다도 더 크게 외치는
창밖에 네시 이십분의 우렁찬 새 소리
밤이 오면 아이가 간지럼을 타는 듯 웃음소리가 들린다
아이의 웃음이 울음소리로 바뀌었다
나의 플로레타리아
너의 플로레타리아 역사는 모든 것을 기록한다
녹빛 나뭇잎에 스민 샛노란 빛과 사각사각 부딪히는 소리가
플로레타리아 오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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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수지 / 최승화

가장자리로 갈수록 보이는 바닥
중심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곳에는
살림살이도 투명해 보인다
산사태가 일어날 때마다
희생을 배경으로 영역을 넓혀가는 저수지
가끔 얼어버린 수면 위에는
미라처럼 굳어버린 치어들이 있다

유입된 물의 경로는 다양하다
둑이 처음 생길 때 본류는 스스로 수압을 만들고
빗물은 이곳저곳으로 흘러들어 압력을 더한다
치어는 치어끼리
대물은 대물끼리
견딜 만큼의 깊이에 자리를 잡는다

대물이 사는 곳은 중심
가끔 사냥을 위해 수면으로 떠오르거나
수초 많은 가장자리를 다녀가기도 하지만
물 빠진 저수지를 보면 안다
그들이 숨는 곳은 언제나 중심
가뭄이 검버섯처럼 핀 변두리에 말라버린 수초를 따라
중심으로 갈수록 진흙탕이다
마지막까지 살아있는 목숨들이 그 속에 있다

물막이 공사가 끝난 신도시 같은 새 저수지
물이 차오른다
중심으로 몰려드는 한 무리의 대물들
다시 주변을 감싸는 투명한 가장자리
그 치어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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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렁한 숨 / 메타포어

굴삭기 궤도에 밟힌 지렁이었다
땅이 눌리는 자국을 따라
몸이 접힌 것이다

거푸집이 된 흙을 털며 움직인다
흙을 조금씩 밀어 틈을 넓히고
좁은 틈에서 꿈틀거리며
몸을 빼내고 있었다

지렁이에겐 물렁함이 숨통이었다
흙이 가진 물렁함이
지렁이를 받아 움츠리고
지렁이의 물렁함이
굴삭기의 무게를 빨아들였다
그 순간에도 미세한 틈을 열어 숨을 삼켰다

둔탁한 굴삭기가 땅을 누르며 간 길이었다
짓눌린 흙을 비비며
지렁이가 간다
물렁한 것을 물렁함으로 다독이듯
흙 한 점 묻지 않은 숨구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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