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 미래도 / 정두섭
나는 계단입니다 당신이 밟으면 도가 되지요
나는 계단입니다 당신이 밟으면 레가 되지요
나는 계단입니다 당신이 밟으면 미가 되지요 당신은 한꺼번에 두 계단을 오르고
계단은 솔, 계단은 사라지고
나는 계단입니다 당신이 밟아도 계단입니다 계단은 소리가 없고 계단은 회색입니다, 불 꺼진
당신은 계단입니까
나는 계단입니다 당신이 밟으면 시가 되지요
출구는 입구입니다
고장 난 무지개가 떴습니다
빨주노초파, 남들은 다 어디로 가는 걸까요
보지도 않고
계단은 숨이 가빠 저절로 계단을 타고
사람들은 또각또각 시간을 뚫고 지각도 뚫고 지상으로 솟구칩니다
건반을 밟으면
무지개의 바깥 계단이 움찔합니다 그러나 소리가 없지요
반건 오징어처럼 오므린
음계 바깥의 음계입니다 색깔도 없지요 울음도 메말랐으므로
나는 계단을 지배합니다 출발과
도착, 점과 점 사이를 반복하는 계단
바깥은 따듯해, 바깥은 느긋해?
납작 엎드려 계단을 기웃거리다가
오 거룩한 주머니여 때 묻은 입술로*
계단을 짓밟아주세요, 아낌없이
당신은 계단입니까 나는 당신의 안쪽 계단입니다
* 계명(階名)의 유래, ‘세례자 요한의 찬가’ 변용
[금상] 한 입 코끼리, 그리고 스무고개 달팽이 / 동하
1.
한시라도 빨리 코끼리를 집어삼키기에는 걸음이 느리다.
달달할 거야, 달콤할 거야.
안간힘을 써서 달리는 중이야. 온 몸이 근육통에 아플 정도로.
모가지를 빼들고 수탉이 울어댄 먼동부터 삭풍에 놀라 붉게 타오른 저녁 앞까지
코끼리를 미행한 목격자가 있으니까.
2.
코끼리라는 이름만 들어도 투명해져.
나는 등에 언제나 무게를 지니고 있어.
무게는 무계無稽를 지니고 있어.
둥글둥글 한 것 같으면서도 속은 구겨져 있어 한 없이 모난, 물음표.
3.
달팽이집을 깎는다.
너무 어렸다는 죄 때문에
너무 무지했다는 죄 때문에
멈출 수 없이 스무고개 달팽이집을 깎는다.
달팽이집을 깎는 방법은 주변에서 들려오는 수많은 소리들과
수많은 목격과 고뇌로 둥글고 명확한 모양으로 깎는 것.
속에서 시커먼 냄새와 시퍼런 멍이 들고
다시 아물만하면 반복
달팽이집 안으로 영겁의 시간동안 메아리가 퍼지는 소리가
청동이 울리는 것 같다.
고독과 마주하는 중이다.
4.
서늘하면서 달콤한, 고상하면서도 즐거운
나는 프로이트의 환자였다.
코끼리에 이끌려 다가가면 거리감을 상실하고 만,
혹은 몇 번의 유혹이 깨져야 너를 가늠할까.
혹은 너와 나를 가름할까.
낌새를 알지 못하게 느릿느릿, 사자처럼 다가갈 것이다.
5.
집어넣기엔 커다랗게 아프다
다시 스무고개 달팽이집을 깎는다.
결국
너는
커다랗다
[금상] 사과를 바라보는 / 서승원
사과를 베어 물었더니 입술이 부어올랐다
독하게 날 떠난 애인의 뒷모습처럼 쓰렸다
사과는 농담으로도 내게 사과하지 않았고
나 또한 붙잡지 않았다
더는 친해지지 않아 다행이었다
난 왼손잡이다 욕부터 먹으며 자랐다
사과를 깎으면 누이들이 달려와 오른손을 내밀었다
칼날은 내게 먼저 달려들었다
누이들은 날 사랑한다고 했으나 칼끝은 날카로웠다
사과는 둥글려고만 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내가 되어서야 사과를 내밀었다
잘린 몸으로 온 사과는 불통이었다
자주 입안이 헌 나와 유독이었던 사과와
그 후 아내는 내게 사과를 권하지 않았다
나도 아내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비가 적게 오는 해에도 사과는 열렸다
쉬운 상대 한 그루쯤 키우고 산 것이
다행인 나날이었다
[은상] 황구지천 / 수퍼스톰
1
어릴 적 황구지천은
내 마음에 운하를 파고 흐른 갠지스 강이었다
그곳에 서두르지 않는 기다림이 있었다
맑은 물살이 풍화한 지구각질을 하류로 굴려 보내는 것을 보았고
성스러운 물로 세례를 받듯 봄부터 가을까지
물로 뜨거운 이마를 적시는 사람들도 보았다
간혹 장마철에 익사한 이름 하나 쓸쓸히 떠내려갔더라도
그것은 수몰된 과거의 지평선일 뿐
사람들은 여전히 물고기의 비린내를 따라다니며
물에 발자국을 수없이 찍었다
천변의 수양버들 그늘아래에서는 매일 불의 혀가 자랐다
다시 죽을 수 있는 느긋한 불길의 지문은
갠지스 강의 판화였다
2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이
양은 솥바닥을 핥던 불의 혀를 완전히 잘랐다
사람들은 더 이상 물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았고
수양버들 밑에 심었던 연기의 뿌리도 뽑혔다
물속에서 자란 수많은 종양을 뜯어 먹은 물고기들은 소경이 되거나
목발을 짚었다
아픈 물위에서 구름처럼 부푼 거품이 바람에 쓰러져 신음하며
서해를 향해 흘러갔다
물은 오랫동안 감옥에 갇혀있었다
3
지난해 늦가을
황구지천을 따라 허공에 박혀있던 수많은 점자를 보았다
손가락으로 점자를 읽지 않았어도
마침내 긴 감옥살이에서 물이 서서히 풀려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물에 혈색이 돌았다
날개달린 점자가 허공을 뚫고 자맥질했다
4
그러나 끊어졌던 불의 혀는 아직도 자라지 않고 있다
점자 머물다 떠난 허공, 아직 따스하다.
*황구지천은 경기도에 위치하는 하천으로 의왕의 왕송저수지를 거쳐 권선구 당수동 · 금곡동 · 장지동 · 대황교동을 거쳐 화성시 태안읍 · 정남면 · 양감면으로 이어진다
[은상] 나비의 여행공식 / 천수
강물을 기어올라 처음 본 행성의 봄은
꽃들의 만찬이었다,
이때는 행글라이더를 타고
공중에서 해시계 태엽을 감는 소년처럼
나비도 날개 속에 쉽게 바람을 가둘 수 있다고 생각했다,
꽃들에 다가갈 때는 어린 손님처럼
언어대신 애교스런 율동을 먼저 지어야 했는데
오히려 너무 화려한 빛과 색채를 지닌 꽃들의 조롱을 견딘 건 의문이다.
하루 같기도 하고 일년 같기도 한 꿈들이 스쳤다.
행성에서 봄에서 여름까지는 몸도 공기도 가벼웠고
늦여름부터는 점점 길 위에 그려진 그림자의 질감이 만져졌다,
언제부터인지 다른 빛깔의 무리진 나비들이
들판에서 산이나 강으로 가면 돌아오지 않았다.
들꽃들도 저녁마다 너른 들판에서 드문드문
한적한 마을의 길가로 옮겨가고 있었다.
나비는 행성을 빠져나가는 길을 알고 있었다.
행성에 잔류 중인 나비들은 서로 스칠 때 특유의 율동 몸짓 손을 흔든다.
이것은 일테면 다른 행성에서의 자기들끼리의 약속,
무너진 봄의 빛깔로 돌아가고픈
해맑은 소년의 의식으로, 모든 기억도 결국 처음으로 돌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맹랑한 첫인사처럼 나비는 지상에서 채취한 무늬의 날개를
어두운 그림자 속에 고이 접어 밀어 넣는 것이다.
제 그림자를 다룰 줄 아는 나비를 나는 언제 어디서 보았을까?
호랑나비 한 마리 가을 길로 한들한들 날고 있다.
해시계 태엽이 풀려가는지 길 위에 제 그림자를 펼치고
여행 중 여러 행성 머물 때 각 행성에 맞게 도안한 무늬중 하나를 벌써
제 긴 그림자 속에서 살펴 고르고 있다.
[동상] 문어(文魚) / 이규성 (동피랑)
해병이라 불러줄래?
머리통이 포탄이야
물올라 빵빵한 내 뒤통수를 툭, 쳐봐
안전핀을 뽑고 터져줄게
귀신 잡는 해병처럼
얼굴에 해먹빛 화장을 하여줄게
난 기분에 따라 군장이 바뀌어
조심해!
덜컥 붙잡고 끈적끈적 널 빨아버릴지
너의 칼날 앞에 나는 맨살이지
끓는 냄비 속 통째로 날 처넣겠다고
뚜껑이나 덮어줄래?
이승쯤 피로나 풀며 건널 수 있어
밖으로 내미는 발이 있으면 그냥 둬
평생 기었던 바닥, 상류가 알기나 할까?
당신이 승리에 도취된 듯
내 주검 질겅질겅 씹어 삼키겠다면
내 검은 추깃물 함부로 버리겠다면
각오해!
깜짝, 너 식도를 막아줄게!
[동상] 세렝게티가 걸려있는 동물원 / jooni
저 삐쭉한 전나무 배꼽 높이에
세렝게티 초원이 걸려 있다면 믿으시겠어요
마른 나뭇가지 하나 달랑,
누가 매달아놓았다고 우기시겠지만, 아니에요
틈만 나면
긴 혀를 날름거리며 빨아 대는대요
물리지도 않는 걸 보면 분명해요 그런데
우글거려야 할 아카시아 잎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둘러봐도
풀 한 포기 없는 메마른 흙바닥
기웃대는 구경군들 뿐,
하지만 상관있나요
싱싱한 이파리들이 무성하게 달려있다고
계속 우기는대요
광활한 아프리카가 펼쳐져 있다는대요
쌉싸름한 초원이 씹힌다는대요
얼룩말 코끼리 사슴들도 울타리 저 너머에서
할 일없이 어슬렁거리고 있으니
착각은 아닌가 봐요
휑하니 걸려 있는 마른 가지가 진짜 아프리카 초원일까요,
공갈 젖꼭지일까요
목이 길어 슬픈 짐승은
절대 생각을 굽히지 않아요
긴 모가지가 온통 고집이에요
빈 가지의 허공에
혀를 날름거리며 긴 하루를 핥아요
침 질질 흘리며 혀에서 피가 나도록,
날이 저물면
낮의 초원은 더 넓어지나 보죠
혀의 놀림이 더 빨라지고 거칠어졌어요
긴 목이 끌어올리는 낮은
신음소리가 캄캄한 어둠을 몰고와요
[동상] 탁본 / 윤희승
오랜 응달에서 새겨진 비문의 형체는 쓸쓸해 보인다
마흔 둘,
어릴 땐 그도 그늘 바깥에서 뛰놀았다
뒷산의 뻐꾸기소리며
진달래 피는 소리며
첫사랑 두근거리던 가슴과
앞산 엄마 무덤가에 잡초를 뜯던 어린 손을
탁본 뜬다
지나간 여자가 없기에 같이 뜰 여자는 없다
허기를 달래던 라면 몇 가락과
절뚝거리던 왼 무릎의 시린 소리와
삭이던 외로움 몇 자락과
술잔에 일렁이던 울음의 파문 몇 개도
눌러 뜬다
그 흔한 아버지의 이름도 비문엔 없다
한 생애를 뜬다
젊은 날을 비껴가던 햇살의 문양을
끈덕지게 달라붙던 불운의 촉수를
망울이다 만 꽃자리의 흉터를
소용돌이치던 설움의 파편을
꾹꾹 눌러
뜬다
어쩌면 나였을지도 모를
한 음각의 비문,
갓 태어난 아기의 숨소리를
탁본한다
영안실이다
[동상] 서커스 / 시엘06
천막 안에
천국을 비끄러매습죠
다시 없는 기회 아니겠습니까
광대 뒷면을 의심하시나요
요놈 주머니를 털어보았자 시뻘건 히죽거림 말고 뭐 있겠수
괜히 우울을 주물럭대지 마십시오
자, 들어가서 무조건 화려해집시다
뿜빠라 뿜빠
곧 마술사가 그림자를 열어 보이겠습니다
타로 카드를 뒤집어서 우리들의 회한도 얇게 하겠답니다
보세요, 눈물에 시간을 뽑아버리니
이렇게 에메랄드가 되잖아요, 박수를
이봐요, 공중그네 아가씨
반대편 남자를 사랑하나요?
허공에서 배신은 가장 높은 묘혈이지요
사내의 회전과 의문의 타이밍
살짝 죽음에 할퀴는 이 짜릿함, 제발 박수를
소녀여,
삶이란 등을 휘어 입에 무는 백색 공
엄마, 그렇죠?
모든 구부림은 아름다운 거죠?
말해 뭐하니, 너의 역전은 언제나 황홀하단다
외줄 좁은 면을 흠모합니다
공중을 걷기 전 까지는 모든 완성을 미루세요
직립은 부끄러운 바닥입니다
당신들을 위해 제 현기증을 바치겠어요
오, 박수는 치지 마세요
저 시커먼 유속 위를 걸어가는 내 발바닥의 노래
저는 괜찮습니다, 아니 상관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