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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하 등고선 / 김시언

 

내려가야 닿을 수 있는 산정이 있다
침침한 지하 속을 걸어 오르는 산,
지층과 지층 사이
반지하 쪽방 곰팡이 핀 벽지를 뜯어낸다
벽지 속에 첩첩이 덧대어 껴입은 벽지들
층층이 등고선 무늬를 이루었다
어느 바위에서 떨어졌을까
모래알들 서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벽지 틈
비를 머금은 구름이라도 지나가는지
이불을 덮고 뒤척이는 물소리가 들린다
손바닥만 한 창을 비집고 드는 햇살을 따라
따글따글 끓어오르는 먼지들,
반층 눈높이로 보는 하늘은 반층 더 높아서
무릎을 꺾어 펴는 계단마다 등고선 주름들이 굽이친다
모란꽃을 뜯어내면 아메바가 나오고
아메바를 뜯어내면 푸른 하늘이,
아이들 찡그린 낙서들을 품고 있다
매미 유충처럼 벗고 싶은 허물들
꽃무늬 포인트 벽지 한 장으로 다시 등고선을 그린다
무늬가 촘촘할수록 가파르고 거친 산
방이 벼랑을 품고 융기한다

 

 

 

 

도끼발[斧足]*


  지동차 타이어를 갈갈이 찢어놓을 거야 천 년을 벼린 도끼발로 단숨에 내리칠 거야 터진 타이어 조각은 차선을 바꾸며 나뒹굴고 길바닥엔 급정거한 금들이 뱀처럼 서로 엉켜 들겠지 백 리 천 리를 걸어도 굳은살 하나 박이지 않던 뻘밭, 그때 내가 휘두른 도끼는 혀를 닮아 있었지 파도와 해초와 바위와 입맞춤하던 혀 하지만 이제 나는 단단해졌어 딱딱한 도로를 걷느라 강철보다 더 굳어져버렸어 바닷가 신도시 오늘도 나는 아스팔트길을 밀고 올라와 맨발로 걷지 아주 오래전에 죽은 동족이 석회질로 다닥다닥 붙어 있는 길 제한속도를 위반한 차들이 스키드마크를 내며 질주하는 길

 

  타이어 바퀴 아래 부서진 모래알이 되어 저 껑충한 아파트를 기어오를 거야
  아파트를 내리쳐 벽마다 균열을 내고
  벌어진 틈으로 해식동굴 빠져나가는 바람 소리를 낼 거야
  걷다 보면 부은 발 어루만져주던 파도가 그립기도 하겠지
  야반도주하듯 떠나간 낙지 일가는 어느 해변에 이삿짐을 풀었을까
  잊지 마 나는 바다의 도끼발
  바다가 다 사라져도 나는 사라지지 않지

 

  * 부족斧足 : 조개의 도끼 모양 발을 일컫는다

 

 

김시언:
1963년 서울 출생. 경기대학교 인문대학 독어독문학과 졸업.
인천대학교 교육대학원 독어교육학과 수료.
<주간경향> 교열기자. <인천IN> 취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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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회 《시인세계》신인작품 공모 당선작 발표

 

 

      새로운 시인

      〈당선작 없음〉

 

 

 

 

 

【심사평】시와 ‘시적인 것’을 구별하라

 

   결선에 오른 열여덟 분의 응모작을 몇 번이나 주의 깊게 읽었다. 그 중에서 「밤의 시학이 원하는 단편들」외(성혜경), 「자줏빛 가죽 드레스」외(신지영), 「이끼의 섬」외(이아랑) 등 세 분의 작품을 주목했다. 그러나 세 분의 작품들은 다른 두 분의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얻는 데 실패했다. 나 역시 이들의 작품이 아직은 당선이라는 중력을 감당하기에는 모자라다는 점에 동의했다.

   끝내 당선작을 찾지 못했다. 응모작들을 읽은 소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시들이 지나치게 길고 장황했다. 시가 말의 응축과 언어의 내핍의 바탕으로 의미를 세우는 장르라는 걸 응모자들이 잊은 것처럼 보였다. 둘째, 시들이 공감이 가지 않는 자의적(恣意的) 말놀이에 빠져 있었다. 모호함에도 그럴 만한 당위성이 있어야 한다. 자기도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方言)들은 시가 될 수가 없다. 시단에 유행하는 한 기류의 영향 탓인지도 모른다. 셋째, 상투성에 오염되어 있는 시들이 많았다. 이는 자기 체험을 꿰뚫어보는 통찰과 독창적인 사유가 없다는 뜻이다. 이런 부류들은 시가 아니라 ‘시적인 것’에 매혹 당한다.

   ‘시적인 것’들은 널려 있지만, 정작 그 중에 제대로 된 시를 찾기는 어려웠다. 당선작을 내기 어렵다는 두 분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_ 장석주

 

   문제는 일상생활의 산문을 시에 도입하면서도 시의 특성을 살린다는 어려운 가능성을 성취하는 데 있다. 일상생활의 산문을 도입해서 그대로 산문이 되어버린다는 것은 시의 패배이자 자기부정이다. 많은 응모작품들이 산문이 되어버리는 함정에 빠져 있다는 느낌이다. 약속이나 한 듯이 장황하고 사설이 많고 생략과 절제의 미덕을 모르는 것이 안타깝게 생각되었다. 그 점 치열한 자기반성이 요청된다. (끝으로 이아랑, 이재근의 작품에 대하여 언급함) _ 유종호

 

   결국 ‘새로운 시인’의 탄생을 다음 기회로 미루게 되었다. 투고된 대부분의 시들은 산문체의 장황한 서술방식을 취하고 있으며, 상상력마저 간접체험의 것으로 채워져 있었다. 언어의 긴장과 압축, 함축된 시 본래의 모습과는 달랐다. 투고시를 모두 읽고 선자 세 사람은 이 같은 소감을 동시에 주고받았다. (끝으로 성혜경, 이재근, 기랑, 이아랑, 신지영의 작품에 대하여 언급함) _ 김종해

 

 

 

                   —《시인세계》2012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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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 김도언


당신은 지구에서 가장 친절한 사람의 목소리를 갖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말을 들었던 사람이 오래 전 죽은 것은 온전히 당신의 불행이다. 매일매일 당신은 무릎 아래에서 올라오는 동생들의 저녁을 돌보고 어머니의 길고 긴 목을 닦아주었다. 오랫동안 배를 타다가 육지로 돌아온 거친 사내들은 당신의 생밤 같은 얼굴을 만지고 싶어 했다. 당신은 그 중 한 사내의 힘줄을 아무도 몰래 끊고 싶었다. 숲 쪽으로 세 번, 바다 쪽으로 두 번 울었던 여름, 당신은 정갈하게 애인과 헤어졌다. 피로 쓴 편지를 주고받은 적 없었으나, 심장에 그어진 파문 때문에 당신은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당신은 애인의 허리가 가르쳐준 굴욕을, 손톱을 베어내며 조금씩 떠올렸다. 하얀 종아리를 가진 애인을 죽이지 못한 것이 후회됐다. 달도 뜨지 않은 밤이 깊어, 마당에 매어둔 자전거들이 말처럼 휭휭 울었다. 당신은 관대한 사람들의 생애가 종종 실패하는 것을 목격했다. 별과 비와 시, 눈을 감아도 너무나 잘 보이는 것들만이 문제였다. 어머니의 배꼽을 베고 눈을 감은 아버지의 싱거운 모험을 생각하기도 했다. 동생들은 더디 자랐고 당신은 오랫동안 당신에 머물렀다.




레비 스트로스의 청바지 / 김도언


물경 101세로 세상을 떠난 문화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C. Levi Strauss)가 무질서와 우연에 기댄 삶의 샘플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이름과 같은 리바이스(Levi’ Strauss) 청바지를 입고 유인원의 유골을 채집하는 여행을 떠났다고 상상하자. 그에겐 제임스 딘 같은 늠름한 동행자가 없다. 그의 배낭 속엔 여벌의 청바지와 가죽신발, 지식의 풍속, 상상력의 논문집이 들어 있을 뿐이다. 그는 결국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 끝에 유인원의 유적을 찾는 데 성공했다. 통곡하는 열대와 희희낙락하는 냉대 사이에서 우리의 잠은 누구에 의해 보호되는가라고 물었던 유인원의 흔적을 찾았을 때, 그는 인류가 불면증에서 구원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유인원의 불면증이 다음 날 자신의 치부를 무엇으로 가릴 것인지를 고민하면서 시작됐을 거라고 추정했다. 레비는 자신의 생각을 친한 시인에게 들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다음 날 그는 내 형제들과 부모들이 나누었던 언어가 해방시킨 것은 슬픔밖에 없다고 말한 유인원의 기록도 찾아냈다. 레비가 겸허하게 고개를 숙였을 때 청바지 자락이 천막처럼 펄럭였다. 보풀이 일었다. 바람이 관통하는 세계 속에 얼마나 풍부한 결핍이 있는가, 얼마나 무한한 부재가 사는가. 레비는 청바지 호주머니에 유적지에서 채집한 작은 볍씨와 눈썹과 각질 조각을 넣었다. 그러자 청바지에 불룩한 푸른 힘줄이 생겼다. 레비는 죽기 직전에서야 리바이스를 벗었다. 문화의 근육으로 단단해진 청바지의 빛은 어지간히 바래 있었다.




스티븐스의 아침 / 김도언


스티븐스는 자전거를 닦는다

차가운 겨울 아침

스티븐스가 털모자를 쓰고

자전거를 닦는다

그러니까 자전거를 닦는 일은

누군가에게는 아주 사소한 일일 테지만

스티븐스에겐 가장 스티븐스다운 일이다

스티븐스는 털모자를 벗고

자전거 바퀴에 달라붙어 있는 거리들의

혈액을 털어낸다

혈액이 반짝인다

스티븐스가 지나간다

스티븐스가 지나간 자리에

그가 닦은 자전거가 있다

아침도 먹지 않고

자전거를 닦는

스티븐스의 아침은 겨울의 외부에서 돌아왔다

스티븐스가 털모자로부터 멀어진다

낙엽이 어슬렁거린다

스티븐스의 자전거는 한번도 쓰러진 적이 없다

그걸 이해한 자 역시 스티븐스뿐이다


 


K의 장애 / 김도언


성공한 시인으로 평가받는 K는 우울증과 관련해 그 어떤 징후도 가져보지 못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그는 주말마다 콤플렉스를 꺼내 체중계에 달아보곤 했다. 견디기 힘든 것은 콤플렉스에서 풍기는 악취였다. 나무의 고독을 경외하고 가족과 불화하는 것이 그의 전략이었는데, 아주 가까운 사람조차 그것이 그의 고의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는 동료 시인들을 좋아하지 않았고 늘 다니던 길로만 다녔으며 우연히 어깨를 부딪치는 사람에게 격렬한 살의를 느끼기도 했다. K는 물론 가족에게 전화 같은 걸 하지 않았다. 그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자신을 사랑할 수 없을 때나 하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나쁜 짓을 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지만 착한 아이들을 칭찬하지도 않았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날 때는 탁구장에 가서 탁구장 주인과 내기탁구를 쳤다. 그것이 그에게 있는 유일한 융통성이었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다는 생각을 종종 잃어버렸다. 식초와 매운 것을 좋아했고 구두는 검은색만 신었는데 너무 자주 빨리 걷는 바람에 구두굽을 자주 바꿔야 했다. 언젠가부터는 식초에 흥건히 젖은 구두코를 빨아보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지만 그는 그것을 실행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는 병적으로 강을 좋아했다. 특히 수변에 지어진 수영장을 좋아했다. 수영장에 딸린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는 젊은 여자들의 이름을 상상하다 보면 지루한 계절이 금방 지나갔다. 가끔 그의 상상 속에서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언어가 태어나곤 했는데 그는 그것들을 모두 시에 사용하지는 않았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K는 가끔 시를 부정하기도 했다. 그의 시는 그의 미각과 그의 상상력을 모두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의 시는 언제나 열심히 역부족이었고 그의 인격이나 건강을 호전시키지도 못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계속 나쁜 시를 쓰는 것밖에 없었다. 그의 나쁜 시는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젊고 어리석은 시인 몇몇은 그의 나쁜 시에 열광했다. K는 나쁜 시에 일가견을 갖게 되었다. K는 오랫동안 슬픔에 빠질 때도 있었다. 그것은 그가 경멸하고 조롱했던 것들을 용서할 때 찾아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누구한테도 용서받지 못했고, 그것은 그를 용서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것들을 그가 난폭하게 척살했기 때문이다. 그는 힘껏 용서에서 도망쳐 장애의 세계로 나아갔다.



그리고 너는 / 김도언


두 마리의 개가

차바퀴에 깔려 죽은

비둘기의 날갯죽지에 코를 박고

존재하지 않는

하늘의 냄새를 맡고 있다

그리고 너는

황홀하지 않아서

발가락이 시렵다

사랑 앞에 놓인 전치사를

지우던 밤

큰 눈이 내린 도시의 까마귀들처럼

불편한 신경질 때문이라고

그리고 너는

나를 바라보던 마지막 눈을 닦고

그리고 너는

귀를 파다가 죽었지

죽어버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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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회《시인세계》신인상 당선작_ 최라라

 

 

비를 맞는 자세 (외 4편)

 

   최라라

 

 

 

너를 위하여

푸른 세탁소가 자전거를 탄다

빗방울이 닿는 순간 푸른은 잠시 푸른을 잊는다

작정한 듯 세탁소는 흠뻑 젖는다

자전거가 걱정할 일은 아니다

다 젖어주는 것이 젖지 않는 방법이라는 걸

자전거만 모를 뿐이다

 

소리 혹은 소음

엄마가 쪽진 머리 자르고 파마를 했다

아버지는 저녁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숟가락 끝이 부르르 떨렸다

엄마는 쩝쩝 소리 나게 밥을 먹고

오빠와 나는 씹지도 못한 밥을 삼켰다

빗방울이 저들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부딪혀 깨진 파편들이 땅바닥에 떨어져내렸다

비의 바깥에서 비를 맞는 저녁은

손톱 밑이나 발톱 밑이 먼저 젖는다

 

어떤 보고서

페이지를 넘기기 전 나는 생각한다

비의 직립은 겨울나무의 성립과 병행하는 걸까

나무는 비의 형태로 서 있고

비는 나무의 자세로 내린다

사람의 직립과 비할 바는 아니다

무엇이든 피하고 보는 사람과는 달리

비가 어깨 움츠리는 자세를 취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어느 날, 우연히,

진숙이 할머니는 허리 구부러진 채로

큰오빠는 똑바로 누운 채로

세탁소 김씨는 자전거 위에 앉은 채로

비를 맞는다

혹자들의 의견,

두 팔 벌리거나

고개 한껏 젖혀 하늘로 향하는 포즈는

빗속으로 들어가기에 가장 좋은 자세

우연히, 비가 당신에게 온다면

무작정 끌어안고 볼 일이다

젖은 다음의 당신과 악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신발장에서 뱀장어 찾기

 

 

 

   1

   케이, 너 정말 내 뱀장어 못 봤어?

   그가 바지주머니에서 파란 별똥별 하나를 꺼내 흔들었다

   얼마 전 신문에서 본 사라졌다던 그 별이었다

   케이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2

   장화 사러 갔다가 뱀장어 한 마리 샀다 수족관이 좁아서 꼬리가 나선 모양으로 감긴 뱀장어였다 길이가 긴 플라스틱 통을 사서 풀어주었다 꼬리가 펴지지 않아 통은 길이만 긴 바지 같았다 장화를 살 걸 그랬다 뱀장어에rps 옷보다는 뚜벅뚜벅 걸어갈 장화가 필요한지도 모를 일이었다

 

   뱀장어 파는 가게는 신발 가게에 살짝 걸쳐져 있다 신발 진열대와 수족관 끝부분이 겹쳐 있어서 뱀장어와 신발이 가족 같다 신발 보러 갔다가 뱀장어 사는 일은 자연스런 우연이다 장어! 장어! 신발 주인이 쇳소리 치는 순간 주인이 다르다는 걸 알 수 잇을 뿐 뱀장어처럼 움직이는 신발은 어디에서도 살 수 없는 일이다

 

   3

   깜빡 잠든 사이 뱀장어가 사라졌다

   101번 타고 오다 109번으로 환승해서 온

   그 길을 뱀장어가 돌아갔으리라는 생각은 너무 동화적이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졋다는 건

   순순히 누군가를 따라갔다는 뜻

   저녁 내내 뱀장어와 얘기하던 케이가 있었다

 

   4

   케이의 별은 입구가 좁고 통로는 넓었다

   별 한가운데서 만난 케이는

   뱀장어 꼬리 신발을 신고 잇었다

   활짝 펼쳐진 꼬리를 보려고

   나는 동전을 꺼내 신발 위로 던졌다

 

   5

   케이의 별에 뱀장어가 산다는 건

   누구나 믿을 만한 사실이 되었다

   잃어버린 신발들이

   케이의 별에 가득하다는 것도

   아무도 본 적은 없지만

   증명된 사실이 되었다

   신발을 잃어버리는 일은

   케이의 별에서 오래된 금기사항 중 하나

   뱀장어를 찾는 일도 그 중 하나가 되었다

 

 

 

카메라 루시다

 

 

 

사진을 찍을 때는

사진이라는 생각에 눈 맞추지 말아요

굳이 무엇이든 봐야 한다면 당신을 보세요

한 시간 전쯤의 당신이면 어떨까요

금 간 거울 속 당신이나

깜빡 잊어버린 순간의 당신이라도 상관없어요

카메라는 가장 아름다운 당신을 향해

신호를 보낼 거예요

그러니까 그렇게 두 팔 꼭 붙일 건 없어요

지금은 슬픈 타조처럼 날개를 활짝 펼칠 때,

사진 속 순간은 당신도 모르는

당신의 틈이니까요

거기엔 당신과 당신 사이가 들어 있답니다

웃으면서 흘렸던 눈물과

미안해, 사과부터 하고 싶던 생일날의 입술

혼자 먹는 밥상을 차리던 손끝

사진엔 그런 것들이 숨김없이 찍혀 있지요

참고로 나는 사진 찍을 때

그를 부른답니다 그 순간

한 시간 전의 내가 얼마나

환하게

따뜻하게

불려오는지,

 

 

 

나는 나를 충전한다

 

 

 

삐딱하게 걸린 수건은 안정적이다

창을 흔드는 바람은 지나치게 고요하고

허리 쪽이 덜 마른 스타킹은

어제까지 적적햇을지도 모른다

작은 때수건은 긴 때수건을 덮치고

방해받지 않은 시간은 방해받을 시간을 위해 존재한다

실리콘에서 자란 곰팡이를 꽃이라고 부르는 이유와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시간 사이를 관계라고 해도 될까

물방울은 사라진 게 아니라

유리에게 먹힌 거라는 결론을 얻기까지

나는 자꾸 발밑으로 침을 뱉는다

대칭을 잃으려고 허리 구부리는 순간

먼저 갸우뚱해지는 벽을 타고

물 흘러가는 소리

나는 미동도 없이 흔들린다

나는 빈틈없이 안정적이다

 

 

 

때밀이 변천사

 

 

 

   돌멩이로 때 밀던 어릴 적이 있었다 둥글고 가볍고 매끄럽고 까칠한 돌멩이를 찾느라 오래 강가를 빙빙 돌곤 하던 날이 있었다 그 돌멩이가 어느 날 이태리타월이 되었다 돌멩이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쓸 만하다고 내 등을 밀면서 엄마는 말하곤 했다 손바닥을 쏙 집어넣던 이태리타월이 펼친 수건 모양으로 커지기 시작했다 셀프 등밀이였다 슬쩍슬쩍 눈치 보다 등 미실래요? 타이밍 맞춰 말 건네면 아무도 마다하지 않던 시절, 등 돌리고 앉은 순간이 참 고맙고 편안한 시절이었다 요즘은 목욕바구니마다 긴 이태리타월 하나씩 담겨 있다 사람들은 옆 사람에게 등을 맡기지 않는다

 

 

————

최라라 : 본명 최영미. 1969년 경주 출생. 계명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수료.

 

 

▮ 제18회 신인작품 공모 본심에 오른 21명

권수진 「어떤 눈」 외 9편

김서주 「기린 씨에게 보내는 편지」 외 9편

김지훈 「수취인불명」 외 9편

박경주 「계란이 왔어요」 외 9편

신지영 「내정자」 외 10편

안명하 「자본 속의 카스트」 외 14편

유병현 「갈멜 수도회 부활절 장엄 미사」 외 9편

유지원 「모래시계」 외 9편

이명예 「붉은 집」 외 9편

이수진 「의자」 외 9편

이어진(본명 이혜순) 「케익이 된 사람」 외 10편

이예진 「불의 언어」 외 9편

이현일 「디펜드 하세요」 외 10편

임민경 「디데이 토마토」 외 9편

전경심 「당신의 메밀꽃 필 무렵」 외 10편

전영관 「밀입국」 외 14편

정동재 「태양을 붙잡는 끈」 외 9편

조유선 「나는 당신을 암기합니다」 외 9편

조혜경 「의자」 외 18편

최라라 「비를 맞는 자세」 외 10편

하수옥 「주사위」 외 9편

 

 <시인세계> 2011 여름호 신인상 심사평

                  _ 심사위원 : 김종해, 장석주, 정효구


   본심에 오른 작품들을 읽고 내가 고른 것은 김서주 씨의 「기린씨에게 보내는 편지」 외 9편, 이수진 씨의 「의자」 외 9편 등이다. 두 사람은 언어 감각, 상상력의 생동감, 상투성과의 싸움 등에서 의미있는 성과를 거두고 있다. 무엇보다도 두 사람은 자기 체험을 새로운 ‘눈’으로 보고, 그것을 섬세한 언어의 풍경으로 바꿔낼 수 있는 재능이 있다고 보았다. 다만, 두 사람의 시적 독창성도 영구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적어두고 싶다. 우선 김서주 씨. 지루하고 권태로운 일상을 천진한 눈으로 훑고 발랄하게 뒤집으며 심미적 이성으로 제 구성해내는 능력이 뛰어나다. 의식을 가사상태로 만드는 일상의 자명성들을 뒤엎는 상상의 유희들이 돋보인다.「오후 저편에서 태풍이 밀려올 때」「비에 농담」 등이 그렇다. “연인과 나는 서로의 주머니에서 하루치의 골목을 꺼내 오랫동안 입을 맞추고 있었는데요”(「기린씨에게 보내는 편지」), “오늘부터 우리는 머리 위에 태양이 떠오르는 나쁜 꿈을 꿀 것이다”(「그럴듯한 종말」), “당신의 목소리는 당신이 갖고 있는 등의 체온을 닮았어”(「네가 이곳에서 보게 될 것들」)와 같은 구절들에서도 상투성에서 벗어난 시인의 사유와 상상력을 볼 수 있었다. 다음 이수진 씨.「꽃에 대한 단상」「그림자」를 좋게 읽었다. 18세 소녀가 썼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은유의 전압(電壓)이 높고 세련되었다. “악마라고 발음하자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밤들의 몸들이 팽팽해졌다/그림자를 빌어 부릅뜬 태양을 채찍질했다/그늘마다 발굽이 생겼다”(「그림자」)와 같은 구절을 보라. “나는 의자를 버렸는데 거기 앉았던 것들은 도무지 버려지지가 않아/매일 밤 부서진 자신의 신전에 기도를 하고 돌아오는 앉은뱅이 남자가 있지만, 의자에게는 썩은 발목도 자라나고 무럭무럭 구름도 피어나지/(중략)/구름을 구름이 타고 놀고 태양에는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흑점들의 발자국/예를들면 식탁과 식탁의 섬세한 틈/구름과 태양까지의 거리/머나먼 별과 방금 막 발현된 핏방울”(「의자」)나, “소년 속에서는 다른 소녀와 다른 여자와 다른 소년이 싹텄다/상한 우유팩을 살피는 섬세한 감정으로 나비를 접었다”(「꽃에 대한 단상」)와 같은 구절도 충분히 매혹적이다. 상상력은 오성(悟性)과 무관하게 사물의 핵심을 찌른다. 이게 직관의 힘이다.

 

  「이것은 어느 날의 코메디」외 10편을 투고한 최라라 씨가 당선자로 결정되었다. 심사위원이 세 명이고, 세 명의 뜻이 엇갈릴 때 절충과 타협의 화학작용으로 예상과는 다른 결과를 낳기도 하는 법. 나는 망설였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당선에 동의했다. 최라라 씨의 시는 능숙하다. 이 능숙함이 함정일 수도 있다. 모든 능숙함은 잉여를 낳는다. 재능의 능숙함은 약간의 모자람과 여백을 참지 못한다. 납득할 수 없는 불가해성, 결론의 유보를 용납하지도 않는다. 시는 이성의 논리가 아니라 ‘존재’의 느낌으로 이루어진다. 차라리 ‘존재’의 불가해한 심오성이다. 그 심오성에 가 닿으려면 깊은 교호 작용이 있기 전까지는 대상을 해석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고 견뎌낼 수 있어야 한다. 의심이 없는 믿음은 광신이 되고, 회의하지 않는 지식은 재앙이 되기도 했다는 점을 기억하기 바란다. 대개 좋은 시인들은 자기의 재능을 의심하고, 자기의 신념을 회의한다. 최라라의 시들은 그의 시구와 같이 “빈틈없이 안정적”(「나는 나를 충전한다」)이다. 하지만 ‘안정적’인 게 반드시 좋은 것일까? 좋은 시인은 결핍과 불안정성을 그것을 있는 그대로 견디며 받아들이고, 그것을 도약의 내적 질료로 쓴다. 시의 세계에서 ‘잉여’는 악덕이고 질병이다. 물론 「이것은 어느 날의 코메디」나 「비를 맞는 자세」나 「어디선가 본 듯한 딸기잼」들의 시적 수준은 앞의 김서주 씨나 이수진 씨의 가장 좋은 시와 견주어도 떨어지지 않는다. 거기에 체험의 하중(荷重)을 받아내는 사유의 내공도 만만치 않다. 다만 최라라 씨가 어느 지점에서 쉽게 상투성과 손잡는 게 안타깝다. 상투성에 기대는 것은 게으른 탓이다. 더 큰 시인으로 도약하기 위해, 작은 완성들을 부끄러워하고, 크고 작은 실패들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바란다. 당선을 축하한다.


장석주/시인·문학평론가 

출처 : 푸른 시의 방
글쓴이 : 강인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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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화술사 하차투리안 외4편

 

박은정

 

 


하차투리안은 네모난 박스를 들고 유랑을 한다
왈츠를 추듯 우거진 정글을 가볍게 턴을 하고
수백 년 동안 사라진 기억을 단숨에 기억해내는 우년함
하차투리안은 단련되어간다
침묵으로 만든 꽃다발을 창에 걸고
무수히 오르내리는 밤들처럼
앞발을 들고 하차투리안
네모난 박스는 죽은 인형들의 집합체
입을 열면 비가 내리고 온 강이 범람하고
떠내려간 사람들은 다시 언덕을 기어 올라온다
당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표정은 말문이 막힌 표정
그러니까 슬프고 발랄한 침묵으로
오늘은 아주 이상한 일들이 많은 날일 테니까
정오가 되면 하차투리안은 이불을 말고
흔들의자에 기대 낮잠을 잤다
귀가 먼 부랑자들이 노래를 부른다
하차투리안 하차투리안 우리의 전사 하차투리안
당신은 우리의 복화술사
당신은 입을 다물고 눈을 감고
매일매일 비밀을 발설하지
멋쩍게 웃던 하차투리안이 잠시 코를 곤다
일상의 불운 따위는 개나 던져주라지
하차투리안이 걷는다 두 팔을 크게 흔들며
그의 마법이 뚱뚱해졌다 날씬해졌다
늑골 속에서 회오리가 분다
수정 구슬을 들고 타로카드를 섞으며
내 목소리가 들리니
너는 지금 딴청을 부리고 있지만
우리는 한때 불운을 즐기기 않았어
무감각과 무기력을 유일한 취미라고 하면 어떨까
당신의 입에서 나비가 날아다니고
내일 하루도 늙지 않고 죽을 수 있다면
거룩하게 잠이 들텐데
우리는 목소리를 잃은지 오래
날마다 똑같은 생을 되풀이하는 복화술사
문득 살아온 날들이 행방불명된다

 

 

Fade Out*


오늘밤 액스트라 행인들이 지나갑니다
장렬하게 눈을 감는 건 오래된 기억을 더듬기 위한 신호입니다
막이 오르면 흑백의 그림자들이 하나 둘 모여들지요
잠깐, 가벼워지고 싶습니다. 오늘밤 오래 허락하신다면
망설이던 당신이 담배를 물고 스스로를 생각하는 동안
알몸의 각도가 되는 건 시간문제지요. 몸짓의 비주얼이 좋으니까요
속임수는 아주 간단합니다. 그토록 점멸하는 불빛들,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정의롭지 못한 일이지요
광대뼈가 튀어나온 얼굴이 수즙게 멀어지고 있군요
멀어질수록 허상은 선명하게 반영됩니다
모든 증후군은 위독합니다 출근길 신호등은 막바지에 거룩하구요
나는 매일 똑같은 처방전을 받아 적습니다
누군가의 인기척을 수소문하는 동안
관객들이여, 위독한 추측은 당분간 보류입니다
이상하거나 어색한 부분들은 바로 배경이 될테니까요
아, 마지막 대사를 놓친 당신이 오버랩되는군요
당신의 수치심이 유머가 되는 경계를 생각합니다
망각으로 가는 노래는  모두 끝이 없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희미해져가는 것
속임수는 아주 간단합니다

 

 

*천천히 어두워지며 암전 상태가 되는 것

 


출처 : 산복도로에 쪽배가 떴다
글쓴이 : 양귀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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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단시] 제15회 《시인세계》신인작품 공모 당선작/기혁|┏등단·좋은詩

좋은소식 | 조회 4 | 10.03.08 08:11 http://cafe.daum.net/sechonsa/P4PB/27436 
//

제15회 《시인세계》신인작품 공모 당선작_기혁

 

                                                                          심사위원/ 김종해, 신달자, 장석주 시인

 

사춘기 아침 (외 4편)

 

  기 혁

 

 

어떤 장르에는 대사가 없다

'얘기하는 사람1'과 '지나가는 사람 2'는 수군거림으로 명백해진다

주인공 B를 기다리는 플랫폼에서 비둘기 몇 마리가 방치되었다

대사와는 무관하지만 그들도 목적이 있었다

잡지를 접은 두 손이 비슷한 뉘앙스로 포켓에 들어간다

잠복한 형사들의 수만큼 일상에서 가족을 만난다

그런 날이면 이유 없이 녹차가 썼고

두고 온 가방을 찾기 위해 지난 밤을 뒤졌다

스카치테이프로 개미를 잡는 엄마와

죽은 개미의 수만큼 악몽이 발견되곤 했다

개종한 다음날에도 신발에 껌이 붙는 이유를

젖꽃판에 털이 자라는 것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누나의 속옷이 청바지에 물들고

물 빠진 청바지에 핑크색 얼룩이 남아도

햇살은 처음부터 색깔만 말려 주었다

주인공 B가 떠나가는 플랫폼에

장르에 없던 도둑고양이가 들어온다

도둑고양이를 발로 차는 누군가

C에게 고함을 지른다

'아버지1'이 울렁거림으로 희미해진다

식탁에 올릴 생선대가리 속으로

독이 든 저녁을 넣고 싶었다

무심코 껴안은 사람들과

지하철마다 부딪치는 그들의 성기가

두 눈을 예외로 만든다 나는

안개, 안개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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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단어의 세계

 

 

에베레스트경이 초모랑마*를 발견한 뒤에도

늘어난 건 몇 방울의 잉크

핼리혜성이나 B612가 발견된 다음에도

몇 가지 수학공식이 늘어났을 뿐

노트 정리를 잘하면

곳곳의 세계를 발견할 수 있다.

이름 붙이지 못한 구십 퍼센트 바다생물도

약간의 여백이면 충분해

'모든'이라는 단어가 미래를 예언하고

조물주처럼 보살펴주고 있기에.

몇 번씩 전쟁을 치렀지만

지우개가루엔 흔적이 남지 않는다.

반듯하게 접으면 작고 가벼워

죽은 친구의 이름이나

낯선 전화번호 따위가 적혀 있는 지구

가끔씩 글자를 혼동한 사람들은

바람과 지하철의 공통점을 이야기한다.

이유 없이 울다가, 웃기도 한다.

'우리'라는 단어가 처음 발견되던 날,

외계인이 쓴 방명록 같았다는 아르디**의 소감

그녀의 노트엔 보탤 수 없는 유머가 있다.

 

 

*초모랑마, 영국 측량기사들이 들어오기 전부터 에베레스트를 부르던 이름.

**'아르디피테쿠스 라미두스'라는 학명이 붙은 이 화석은 440만년 전 인류로 추정되고 있다'

최고의 인류로 알려진 '오스트랄로 피테쿠스 아파렌시스<루시>'보다 120만 년 정도 앞선다. 미국<사이언스>지 선정'올해의 10대 과학적 성과'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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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닐의 기원

 

 

   검정비닐을 들어 올린 바람은 자신의 손가락만 사용하려 들었어요 어린 가축의 혓바닥이나 토막 난 고등어 따위가 담겨 있던 검정비닐이에요 가슴을 받치고 손잡이 없는 주둥이를 벌리면 제 것 같은 핏물이 흘러요

 

   온몸이 찢겨져도 담지 못할 내용은 없었죠 계단을 오르고 새떼를 오르고 자주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던 검정비닐이에요 시간이 지날수록 검정비닐이 묵직해졌어요 바람은 몰랐죠, 바스락거리는 목젖이 돋아날 줄은 사소한 시빗거릴 주워 담을 줄 말이에요 인류학자들의 논쟁거릴 삼켜버렸어요 언어를 통째로 씹어 침묵만 내뱉기도 했구요

 

   검정비닐이 두려워요, 사람들은 호주머니 가득 목소릴 숨기거나 깊은 밤 고함을 지르고 도망 다녔어요 자신의 메아리에 놀라서 긍정도 부정도 아닌 신음을 낸 적도 많았죠 검정비닐을 들던 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린 밤에는 사나운 풍문이 떼지어 몰려왔답니다 모국어와 전화기를 의심하다 눈짓과 몸짓이 뒤섞인 당신의 홍당무에도 바람이 들지 몰라요

 

   저기 검정비닐을 든 엄마가 두 다리로 걸어오네요 비닐을 벗고 심호흡하고 있어요 유대인이나 말갈족의 표정도 지을 수 있군요 허공에 허파를 만들고 속을 드러낼 시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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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사과

 

 

   이곳에서 너는 사적인 공간이야. 나의 이빨과 혓바닥이 머물다 간 싸구려 호텔이야. 식욕과 성욕이 동시에 교차하는 혼숙을 허락하는 거실이야. 붉은색 하드커버를 가진 너는 포르노그래피를 떠올리게 하지.가장 은밀한 부위에는 신화를 숨기고 있어. 그곳으로부터 나는 고전적 성교양식을 학습해

 

   이곳의 모든 이야기는 당신의 낯빛을 바꾸는데 일조했어요. 만유인력의 법칙은 당신에게 지구를 떠넘긴 최초의 사건이었죠. 그럼으로써 당신은 지구의 종말 따위에 절망하지 않았어요. 지독한 현실주의자의 입 속에서 '달다'의 반대말을 고민하지도 않았죠. '사과'의 '맛'에 대해 사유하는 당신은 당신의 사진으로부터 가장 먼 종족이에요.

 

   그러나 신앙을 가질 수 없는 그는 숭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고해성사는 오직 벌레들에게만 허락된 특권입니다. 아무도 그와 같은 사과를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를 모릅니다. 그는 식탁에 둘러앉은 동거인입니다. 그에게 사과를 받아먹은 그는 반으로 쪼개집니다. 그 속에 그의 사적인 공간이 열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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턱선

 

 

서로 다른 골격을 가진 해안선

 

푸른 말들이 쏟아내는 거품 속에서

뒤틀린 혀의 관절을 기억해

 

허술한 두개골을 받치고 있던 두 손

썰물이 두고 간 파도소리에 기대고 있어

 

낯선 백사장을 따라 몇 바퀴

귓바퀴를 돌아보면

원점에 가깝게 중심이 멀어져 있지

 

구명조끼 같은 입술을 붙들고 표류하는

삐걱거리는

침묵은 아직 스스로 가라앉는 법을 몰라요,

 

너의 해안가, 허공의 난파선 한 척

커튼을 열고 흘러내린 그곳엔

 

가슴 밑바닥까지 이어진 물길이 열리죠

몸통 없는 지느러미만 파닥거리죠

 

붉은 방 갯벌이 깊어지는 계단

하얀 방파제로 버텨온 이빨 시려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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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민족사랑문화인협회
글쓴이 : 삼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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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회 <시인세계> 신인상  시 당선작

베스트셀러 읽어 보세요   외 4편 / 하여진

세상의 모든 저녁   외 4편 / 노지연

 

 

 

 

베스트셀러 읽어 보세요 / 하여진

 

 

손을 대지 않아도 바람이 넘겨주는 책장
시속 60에서 머들령 터널 지나고 나면 시속 80으로 넘겨주는데요
덜커덩 넘어가는 깊은 하늘 속으로 기러기 한 마리 날아가는  
삽화 한 장 펄럭이네요.
가로, 세로, 글자들, 무덤 같은 괄호는 빨간 밑줄 그으며
산을 읽을 때는 세로로 읽어야 해요.
돌로 눌러두지 못한 산의 기억들이 골짜기를 열고
눈포단 밑으로 흐르는 도정搗精의 물소리
투명한 맨발로 온산을 졸졸졸졸 날아다녀요.
태양이 산 그림자 지우고 내려오는 아침
청국장 냄새 굴뚝마다 진동하는 산내마을 이야기 속에
‘끼니는 잘 챙겨뭉냐’ 어머님 음성에 울컥 빠지다 보면
어느새 목적지에 닿습니다.
노면 고르지 못함 고인물 튐 과속방지턱
읽어가다 다시 떠오르는 문장,
우좌로 이중 굽은 도로표지는 굽은 길 오를 때
급하게 먹은 마음일랑 한번쯤 쉬었다 가는 바람의 길.
가끔 반사경에서 튀어나온 트럭이 책장을 휙 넘길 때
눈으로 꼭 밟고 있어야 해요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
계절을 꿀꺽 삼켜버리거든요.
걱정하지 마세요. 인생은 짜여진 목차처럼 
안개가 가라앉으면 길섶으로 봄은 되돌아와요.
지금 읽고 있는 농공단지에 눈이 내리네요.
숫눈 쌓인 캄캄한 이면을 침 발라 얼른 넘기면
까만 유리창에 비친 남자와 여자가 주고받은 대화 속에
나도 하마터면 길을 잃을 뻔했거든요.
산다는 게 좀 슬프지도 않으면 재미있겠어요?
그만 졸다, 잘못 내려온 길을 되짚어 갑니다.
헤드라이트에 살아나는 17번국도,
먼 우주에서 내려온
황금오리알, 별자리가 뜨는 밤.
책갈피로 그믐달 끼워놓고  
읽다 만 책을 덮습니다, 밤새도록
달이 책 속에서 자라네요. 

 

 


봄, 익스프레스 / 하여진

 

 

바람 팽팽한 날
신대방동 버짐 샛길로 묵은 봄 싣고
가릉가릉 1.5톤 용달차 달려오네
앞좌석에 앉은 노부부
희나리진 얼굴 위로 벚꽃 휘날리는데
서로 부딪치어
그냥저냥 더 깨질 것도 없는
저 지는 봄 송이 좀 보소     
뿌리 불거진 주름살 손 꼭 붙잡고
언제 아랫목 한번 탐한 적 있었던가
그저 시린 윗목에서 굳은살 박이도록
허드렛일 궁시렁 한번 해본 적 없던 일평생
풀었다 쌓다 헐거워진 고샅길
단스 서랍 열리고 닫히는 옹이 속
꽃샘잎샘에 아차! 얼어버린 삶의 고랭지
꾹꾹 눌러 밟은 풋보리 누렇게
빛바랜 시절도 묶여 있겠네
테이프로 박은 깨진 거울 사이
오글오글 봄빛 스며드는 봄에는
봄에는 말여, 손 없는 날 꼽지 않아도
아무 때고 저승으로 옮겨가도 좋제
설 지난 쑥떡에 곰팡이 핀 봄 언덕 어디
전입한 주소에 새순 돋듯
늘그막에 또 물오르것다.

 

 

 

부서진 오아시스*  / 하여진

 

 

  스무 개의 젖꼭지를 가진 여자를 나는 알고 있어 물만 먹고 사는 시한부 인생인 그녀, 썩는 것보다 더 두려운 건 부서지는 거였어. 그녀에게 달라붙어 젖을 빨고 있는 한 아름의 꽃, 그녀는 몸에 묻어나는 이슬의 냄새며 바람의 무늬를 보고 내일쯤은 비가 오리라는 것을 알아, 톱밥과 모래로 태어난 몸뚱어리 구멍 뚫어 자신의 젖을 남김없이 주는 게 그녀의 소망이었어 “거기 누구 없어요 이름 없는 풀꽃이라도 괜찮아요 나는 아직 젖이 남아 있어요” 골목을 지나다 들었어 쓰레기통에 부서진 오아시스가 울고 있었어. 세상에서 가장 목마른 이름이 오아시스였어.


* 오아시스 : 꽃집에서 꽃꽂이용으로 사용하는 초록색 수반. 모래와 톱밥으로 만든다.


 

 

몸뻬꽃 / 하여진

 

 

가난에는 사이즈가 없어요
줄였다 늘였다 입을 수 있는 몸
입다 보면 뒤가 앞이 되기도 하지요
앞뒤 없는 사람은 가랑이 사이 덧댄
지느러미 한 장씩 가지고 있어요
선창가 새벽부터 소독차 지나가고 
갈매기 울음도 하얗게 소독되고 있어요
새벽을 싣고 온 배에 올라
병어, 조기, 선별해주고 일당 외에 받은 고기로
모퉁이 난전에 생선 팔던 여자
뒷 생선 받고 준 몸값에 아이까지 얻었지요
젖 물릴 때면 옆구리까지 흘러내린 아이 머리통이
갈라진 토마토 같았어요
반평생 핏대 세워 지킨 그늘 아래
절망의 때가 번들거려요
마수 없어 헐렁해진 몸
암막새 수막새 생의 파도 휘적휘적 가르며
영혼까지 덤으로 담아주는 여자 
단속반 실랑이에 나자빠져
흩어진 고등어를 주워 담는 그녀
시든 몸에도 꽃이 피지요
사시사철 피어 있는 저 꽃무늬 몸뻬

 

 

 
물 위의 빈집  / 하여진

 

 

  이제 충돌할 것 없다. 난간을 잃은 뱃머리 군데군데 자란 버섯못, 정박한 배에 일곱시가 켜진다 필라멘트 끊긴 항해등에 빛이 들고, 풍향계는 늙은 귀로 덜커덕 덜커덕 파도를 읽는다 낮은 선실 밑, 피가 돌지 않는 전선은 스파크 일던 그날처럼 얽혀 있다. 빳빳이 날 세운 펄럭이는 풀 한 포기 내려앉은 모든 것들의 버팀목이다. 갑판 찌그러진 통발에 아침 햇살이 잡혀 들썩거리고, 바람은 깨진 유리창을 들락거린다.
 

  빈집은 빈집이 되고부터 녹슨 시간을 밖으로 퍼냈던가, 卍자로 금이 간 사이마다 아침 햇살이 깁고 있다. 삐걱 삐이걱 낮은 휘파람소리, 선실 벽시계는 언제나 7시, 담배를 붙여 물던 그을린 팔뚝은 어디로 갔는가, 뒤집힌 구두 한 짝이 소라껍질처럼 선실에 뒹굴고. 


  비를 피해 다녀간 새 발자국이 어지럽다 쇠말뚝에 묶인 닻처럼 가라앉은 그림자들, 먼 수평선에서 달려온 파도가 “편지요, 편지,” 자꾸만 빈집을 두드린다.

 

 

 

하여진 시인
1960년 광주출생 광주여자대학 문창과 중퇴. 방통대 국문과 수업

 

 

 

 

세상의 모든 저녁 / 노지연

 

 

당신의 신전 속에는 구름이 구워지는 상점*이 있지
나는 따끈한 달과 바람을 넣고 달콤한 구름을 만들 거야
당신의 신전이 모든 어둠을 어둑어둑 집어먹기 전에


1
복제품, 달


잘 익은 달을 허공에 깨뜨려 먹는 맛!


움푹 패인 달이 휘청거리며
느릿느릿 자신의 늘어난 태엽을 감아올린다
윤기나는 밤이 감은 눈을 번쩍 뜨며
헐렁한 그림자들의 나사를 조인다
차곡차곡 진열된 어둠들이 짧게 흔들린다
복제된 달의 그림자들이
정육점의 고깃덩어리처럼
신전의 허방에 대롱대롱 매달린다
어둠의 입술에 흥건한 침이 고인다
복제된 달이 담쟁이넝쿨처럼 일제히
신전의 기둥을 휘감는다
어둠이 휘발성이 되어
비닐봉지처럼 붕붕 날아오른다
허공으로 후드득 증발한다


2
바람의 신전


당신이 당신의 신전에 앉아 기도를 할 때
나는 당신의 신전에 걸린 바람들을 걸쳐 입고
당신을 복제하지


점점 달이 떠올라
나는 자꾸만 기침이 나와
사실, 이건 오래 전
우리 몸 속에 내재된 어둠의 본능이지
나는 당신을 입고
당신은 나를 입고
우리를 스쳐 지나가던 바람들이
끊임없이 당신과 나를 복제하지
매일매일 당신과 내가 늘어나지


어둠이 늑대처럼 갸르릉
기침을 하며 몰려오지


3
구름 BASKIN ROBBINS 31


복제된 달을 좋아해
차가운 핏방울 냄새를 사랑해
이 세상 모든 복제품들을 구워줘
모락모락 피어나는 바람을 넣고
뭉텅뭉텅해진 구름을 먹을 테야
입 한 가득 번져오는 차가운 핏방울!


낡은 태양을 구워 넣은 체리주빌레와
그림자들을 노릇노릇 구워 넣은
피스타치오 아몬드를 먹어봐


점점 모호해지는 어둠의 경계
눈 녹듯 사라지는 구름들을
한 입 가득 털어 넣고

신전 위로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나
당신의 신전 속에는
구름이 구워지는 상점이 있지


* 김중일의 시 「구름이 구워지는 상점」에서 인용.

 

 


달의 뒤편 / 노지연

 


  나는 전생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였을지도 몰라 매일 매일이 새롭지 모든 것이 지루할 때면 비틀즈의 음악을 틀고 뜨개질을 해, 한올 한올, 나는 지금 당신을 엮고 있는 거야 아니 나와 당신을 엮고 있는 거야


  당신은 자꾸 안녕이라 말하고 나는 안녕하냐고 말하지*
  내가 뜨개질을 하고 있으면 저 달의 뒤편 어딘가에 당신이 앉아 컵라면을 먹고 있을 것만 같아


  비릿한 바람이 스쳐 지나갈 때 나는 당신이 감아올린 컵라면 면발들에 대해 생각하지 점점 가벼워지는 것은 내 생生이야 당신이 감아올린 것은 내 생生이야 점점 늘어나는 당신의 그림자 어쩌면 나는 전생에 당신의 마론인형이었을까?


  뜨개질된 탯줄 속에서 모유냄새가 나, 당신이 달 속으로 들어가 늘어난 당신의 그림자를 쓰다듬을 때 나는 뜨개질된 당신과 나의 탯줄을 쓰다듬지 당신의 입 속에는 자꾸만 마른 침이 고이고


* 비틀즈의 노래 가사 인용.

 

 


국경의 여인숙 / 노지연

 


1
저 타오르는 지평선
국경의 여인숙이 불을 켜는 시간*
물레를 돌리던 공주가
백 년을 하루처럼 자고 있는 동안
태양의 뒤편 어딘가에서
밀봉되지 않은 눈동자들이 몰려와
쉴 새 없이 눈을 깜빡이며
여인숙 앞을 지나갈 때
저 지평선 사이로 번져오는 붉은 노을


이곳에 불시착한 바람들이 허방에 매달려
잠자는 공주를 훔쳐보고 돌아갈 때
공주의 손가락 마디마디에는
회오리바람 같은 파문이 일고
중심을 잃은 새들이 자신의 중심을 찾아
달의 뒤편으로 후드득 날아오를 때
백마 탄 왕자의 그림자는 점점 더 길어지고


물레위로 목쉰 마녀의 노랫소리가
삐걱삐걱 흘러나오는 사이
공주의 몸 속에서 풀려나온
무수한 꿈의 장면들이
허공을 가로지르며
지평선 속으로 사라지고


2
저 태양의 뒤편
국경의 여인숙이 불을 끄는 시간**
붉은 석양이 벙글어진 꽃잎처럼
하나 둘 떨어지고


백 년이 하루가 되어
물레 위에서 돌아갈 때
왕자가 성문을 열어젖히고
삐걱거리는 계단 위로
어둠의 입자들을 우수수 쏟아낼 때


무수한 꿈의 장면들이 몸을 섞으며
지평선 사이로 번져 오르는 저녁
점점 뚜렷해지는
태양과 태양의 뒤편의 경계

 

** 김선재의 시 「태양의 서쪽」에서 인용

 

 

 

모던타임스 / 노지연

 


  파란대문을 사랑했다 누나는 매일 분꽃을 따 머리 위에 꽂고 다녔다 사람들은 누나를 데리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아이스크림을 사 주었다 네온사인이 번뜩이는 밤이었다 점점 부풀어 오르는 누나의 배를 발로 뻥 차보고 싶었다 그 사이 내가 벗긴 양파껍질들은 점점 늘어나 양배추처럼 풍성해졌다 자꾸만 눈이 따가웠다


  파란대문은 언제나 굳게 닫혀 있었다 파란대문 앞을 지날 때마다 본드냄새가 났다 나는 아무도 모르게 파란대문 앞에서 매일 줄넘기를 했다 그 사이에도 내가 벗겨야 할 양파껍질들은 날로 늘어나 나는 자꾸만 배가 고팠다 폴짝폴짝 뛰어오를 때마다 하늘의 색깔이 바뀌었다 분꽃이 떨어지던 계절이었다


  더 이상 누나는 분꽃을 머리에 꽂지 않았다 누나 몫의 양파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자꾸만 눈이 매웠다 나는 폴짝폴짝 줄넘기를 하며 뜨끈뜨끈한 녹색 위액을 내 몫의 양파 위에 뱉어내었다 자꾸만 하늘의 색깔이 바뀌었다 도시에는 파란 네온사인이 대문 대신 박혀 있었다


  나는 파란대문을 찾으러 네온사인이 번뜩이는 거리로 걸어갔다 누나가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유리창 사이로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폴짝폴짝 줄넘기 줄을 넘지 않았다 내가 레고인형처럼 사람들의 걸음걸이를 흉내낼 때마다 얼굴의 근육이 일그러졌다 나는 여전히 파란대문을 사랑했다

 

 

 

Snapshot / 노지연

 


사내가 비닐봉지 속에 고등어 몇 마리를 담고 뛴다


사내가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에 밀착시킨다


사내의 왼쪽다리가 앞으로 튕겨져 나갈 듯 지상을 향하고 있다


허공으로 치켜든 사내의 오른쪽 발바닥이 허방에 대롱대롱 매달린다


그 뒤를 사내의 왼쪽 손에 들린 비닐봉지가 쫓는다


검게 매몰된 시간들이 잘 당겨진 북처럼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다


토막난 고등어가 다문 입을 활짝 열고 비린내를 우수수 쏟아낸다


사내의 몸이 검고 윤기 나는 밤 속으로 밀폐된다


사내가 점점 둥글어진다


순식간에 사내가 희미해진다

 

 

 
노지연 시인
1991년 출생. 고양예술고등학교 문예창작학과 2학년 재학 중. 추계예술대학교 고교생 백일장 장원. 명지대학교 고교생 박일장 차상. 전북대학교 고교생 백일장 차상등

 

 

 

 

□ 심사평

 

 

[김종해]


경쾌한 시와 상상력의 시


  예심을 통과한 열다섯 명의 투고작 가운데 우리 선자들은 최종적으로 다섯 명의 작품으로 압축하는 데 합의했다. 최종심에 남은 다섯 명은 임봄의 「당신의 연애사」, 이정훈의 「밤나무집 가계」, 정학명의 「구름정원의 기억」, 노지연의 「세상의 모든 저녁」, 하여진의 「베스트셀러 읽어보세요」 이상이다. 이 가운데 임봄, 이정훈, 정학영 세 분은 당선작을 5편으로 뽑는 《시인세계》 신인 공모 규정 때문에, 한두 편은 뛰어난 기량을 보였지만 나머지 작품의 미비로 탈락했다.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으로 하여진의 「베스트셀러 읽어보세요」(외 9편)와 노지연의 「세상의 모든 저녁」(외 11편) 이상 두 사람이 경합했다.

  오랜 논의와 토의를 거치며, 심사 장소를 인근 음식점의 저녁 식탁으로 바꿔가면서 선자들은 의견을 조율했다. 결과, 선자들은 두 사람 모두를 당선시키기로 전원 합의했다.

  하여진의 시 「베스트셀러 읽어보세요」는 시행詩行이 매끄럽고 이미지의 흐름이 막힘이 없이 시원스럽게 읽혀지는 시다. 시속 60km~80km를 달리는 한 드라이버의 운전감각과, 속독으로 읽는 독서의 길찾기가 연관을 지으며 시로 잘 짜여져 있다. 시시때때로 변하는 풍광과 끼어드는 문장, 일월과 계절의 흐름이 있는가 하면, 과속 방지턱이 있고, ‘밤새도록 달이 책 속에서’ 자라는 독서의 묘미가 있다. 경쾌하고 재미있게 읽혀진다. 오랜 언어 수행을 닦은 사람으로 보인다.

  노지연의 시 「세상의 모든 저녁」은 상상력의 공간이 넓고 언어운용이 활달하다. 환상과 상상력이 빚어내는 독특한 우주의 요리법을 구미 당기게 ‘당신의 신전’ 안에 펼쳐보인다. 상상력이 만들어 내는 먹음직한 음식― ‘따끈한 달과 바람’, ‘잘 익은 달을 허공에 깨뜨려 먹는 맛’을 잘 체현해 낸다. 우주와 천체의 움직임을 사람의 미각과 결합시켜 저녁 식탁 위에 먹음직스럽게 올려놓은 이 시인의 상상력은 믿을 만하다. 그러나 이런 류의 시들이 자칫 빠지기 쉬운 함정은 관념이다. 환상과 가공의 세계에 머물지 않고 좀더 현실의식과 실체감에 시의 무게를 두었으면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두 시인의 전도를 축원한다.

 

 

[강은교]

 

부드럽게 이어진 시의 맥


  문제는 맥脈이었다. 소리의 맥, 의미의 맥, 이미지의 맥이 객관화를 이루면서 극사極私에서 초극사超極私를 이루는 시를 찾아 이번에도 시읽기의 여행을 하였다.

  마지막 독회를 통해 남은 시들은 「밤나무집 가계」 외(이정훈), 「당신의 연애사」 외(임봄), 「세상의 모든 저녁」 외(노지연), 「구름정원의 기억」 외(정학명), 「베스트셀러 읽어보세요」 외(하여진)의 시편들이었다. 「밤나무집 가계」 외(이정훈)의 시들은 발랄한 이미지가 아주 좋은 시라고 할 수 있었으나, 소리와 소리심이 없었다. 즉 그 이미지들이 얹혀 출렁일 육화肉化된 소리-소리심과 이미지들을 받칠 의미의 핵이 없었다. 그에 비해 「당신의 연애사」 외(임봄)의 시편들은 시들을 관통하는 소리심(그 시인만의 리듬)이 있었을 뿐 아니라, 신선한 이미지와 이미지의 연결이 부드러워 시의 맥이 잘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의미의 핵’이 약했으며 이는 곧 절규라고 할 수 있는 소리가 없는 것이었으므로 읽는 이를 맥빠지게 하였다. 따라서 그 아름다운 이미지들은 시 전체를 받칠 ‘발견’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있었다. 「구름정원의 기억」 외(정학명)의 시편들도 위에 언급한 시의 장점과 단점들을 거의 모두 가지고 있었다.  개개의 이미지들은 아름답고 현란했으나, 맥이 이어지지 않았으며, 결과적으로 객관화를 통해 읽는 이와 연결되어, 극히 개인에서 출발하는 ‘극사’의 시가 ‘초극사의 시’로 일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위의 시편들을 다시 읽으며 토의한 결과 「세상의 모든 저녁」(노지연)과 「베스트셀러 읽어보세요」(하여진)의 시편들이 남게 되어 심사자들은 다시 고민에 빠졌다. 왜냐하면 두 시인의 시들은 경향은 아주 달랐으나, 응모시 10편이 아주 고른 수준을 지니고 있었고, 부드럽게 시의 맥이 이어졌으며 소리와 소리심에 얹힌 이미지들은 ‘발견’의 ‘객관화’에 이르고 있었다. 시적 문제 제기라고 할 수 있는 ‘의미의 핵’도 감동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결국 두 시인의 시편들을 다 당선작으로 하기로 하였다. 더구나 한 시인은 50대가 되는 시인이었으며 반면 한 시인은 아직 10대 후반의 시인이었으므로 그 두 시인의 시적 가능성은 그 어느 것을 더 우위에 둘 수 없게 하였다. 정진을 바란다. 두 시인 모두 그 ‘울림의 시들’을 앞으로의 시단에 펼치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문인수]

 

지천명의 신인과 17세의 노시인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온전히 제것인 말은 없다”는 일갈은 진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들은 사물에 대한 재발견을 위해 끊임없이 관찰하고 자문자답한다. 그리하여 그것을 영판 달리 적으려 노력한다. 그 결실이 곧 한 편의 시다. 따라서 이 시에 담긴 내용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생각)이어야 하며, 그러나 지금까지 그 누구도 한 적 없는 말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진정 새로운 시가 될 것이며, 또한 시인과 독자가 잘 통하는 시가 될 것이다.

  예심을 거쳐 넘어온 열다섯 분의 응모작들을 읽으면서 내내 안타깝고 답답하게 느낀 점은 시를 쓰느라고 참 너무 불필요한 고생을 하는구나 싶은 것이었다. 다수의 작품이 의미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시의 기본 요건인 ‘소통’을 무슨 ‘낡은 것’쯤으로 치부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소위 낯설게 하기에, 멋들어지게 표현하기에만 골몰한 나머지 오히려 요령부득의 생경한 ‘혼잣말’에 빠져버린 시가 많았다. 이 같은 ‘오버’는 자신의 소중한 공부며 사유가 시 속에서 아무런 역할도 못하게 된 요인인 것이다.

  최종적으로 논의의 대상이 된 다섯 분의 작품, 「베스트셀러 읽어보세요」 외, 「세상의 모든 저녁」 외, 「당신의 연애사」 외, 「구름 정원의 기억」 외, 「밤나무집 가계」 외 등의 작품을 다시 돌려 읽었다. 그리고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불통’의 문제에서 비교적 혐의가 없거나 적은 하여진 씨와 노지연 양을 당선의 자리에 함께 올린 것. 지천명에 시력 30년의 저력, 이미 “돌로 눌러두지 못한 산의 기억들이 골짜기를 여는…” 장관을 읽어내는 하여진 씨의 큰 스케일과 안정된 어조를 샀으며, 기발하게도 “잘 익은 달을 허공에 깨뜨려 먹는 맛!”을 보는, 아직은 고등학교 2학년 신분인 묘령, 노지연 양의 재기에 넘치는 발랄함과 그 무한한 가능성을 샀다.

  그러나 심사위원들은 모두 하여진 씨에겐 시인이라는 자리에 안주해버리지는 않을까 하고 우려했으며, 노지연 양에겐 시인이라는 영예가 오히려 무슨 족쇄가 되거나 자만에 빠지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하고 걱정한 바 있음을 귀띔해 둔다. 두 시인을 내보내는 설렘과 기쁨이 크다. 축하드린다.  

 

 

[예심평 - 권혁웅]

 

 고른 수준의 응모작들

 

 심사를 하다 보면 때로 지나친 훈련이 시를 망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시에도 훈련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습작이란 사실 문턱과 같은 것이다. 문턱을 지나면 문이 닫히고, 우리는 애써 그 다음 문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문턱 이전을 잊을수록 시에는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데 되풀이된 훈련은 감수성을 깎고 다듬어 평균적인 수준으로 만들어버린다. 가르친 스승을 닮고, 나누는 동료를 닮고, 좋아하는 시편들을 닮는다. 닮은꼴을 벗어나기 위해서 시인이 되는 것인데, 시인이 되기 위해 닮아간다는 것은 슬픈 역설이다. 물론 미학은 강압을 필요로 하지만, 이때의 강압은 미의식의 몫이지, 스승의 몫이 아니다. 미의식은 대상과 교감하는 자의식이기 때문이다. 《시인세계》의 명성 덕분인지, 투고된 작품들은 거의가 수준급이었다. 이만큼 고른 수준의 응모자들을 만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눈길을 잡아채는 단 한 명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고심 끝에 열다섯 명을 골라서 본심에 올렸다. 우리보다 훨씬 눈이 밝은 본심위원들께서 잘 찾으실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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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지도* 외 4편

신 은 영

*마음의 지도 사람들이 찾는 마음의 지도가
어쩌면 발바닥에 있을지도 모른다
늘 밑바닥과 마주하며 넓어지는 발
한 번도 얼굴과 정면으로 서 본 적 없는 발바닥에
마음이 훤히 보이는 표정이 있을지도 모른다
굳은살 떼어내 지문이라도 사라지면
스스로 길을 헤매고 자꾸만 안쪽으로 혹은 바깥쪽으로
발바닥 부르트도록 걸을지도 모른다
움푹 파였지만 무엇도 고여 있지 않고
항상 비어 있는 자리
서걱이는 바람의 길목 앞에서
아치형의 발바닥이 지탱하는 삶의 무게가 아름답다
양팔저울의 저쪽에는 달이 기울고
발바닥도 없이 뒹구는 별들이 끄떡끄떡 다가오는 날에
둥근 봉분을 두 발 밑에 아스라이 밟고 사는 사람들
산언덕의 봉분을 차례로 밟으며 올라선 밤하늘에서
둥둥 떠다니는 별빛을 베고 누워
만날 수 없는 발밑을 생각하고
흐린 날이거나 개인 날이거나
좀처럼 얼굴 들지 않는 발바닥처럼
쏟아지는 별빛도 새벽녘의 안개도 모른 척하고
고개 숙인 채 나도 이 시절을 지나볼거나
웅덩이에 물보라가 일듯이
하늘이 흐려지며 웅왕거릴 때
내가 가야 할 길이 멀리 있지 않음을 생각하고
비로소 고개를 들어
하늘의 발바닥이 길을 보여주는구나
네 마음의 길은 또 얼마나 구불구불한지 다시금 상상해보며
안아볼 수도 없는 거대한 지도를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얼마나 많은 길들이 아득한 내 마음 지탱하고 있을까
다시 한 번 떠날 길을 내다보는 것이다

*빈센트 워드가 감독한 영화 제목



구름을 파는 상점

탁자 위에 구름이 한 잔 놓여 있다

갈증은, 잠시 참아야 한다 구름에 설탕을 넣고 흔들 때 하늘 가득 휘
몰아치는 솜사탕 릴리리 릴리리 입에 넣고 찰방찰방 씹는 어릴 적 물
장구치던 강물의 온도 침이 고인다 아, 지울 수 없는 물의 성질 다만 물
은 고여야 하는 것일까 흘러야 하는 것일까 꿀꺽, 침을 삼킨다

구름은 걸으면서도 마실 수 있다 양수의 기억은 언제나 나를 꿈틀거
리게 한다 구름을 들고 침대에 앉는다 출렁거리는 하늘, 넘칠 듯 냄비
를 넘실거리는 뜨거운 증기, 밤새 베갯잇을 적시는 이들을 위해 침대
위에선 구름을 쏟지 말자

나는 구름이 자욱한 이불 위에서 잠깨고 구름을 입고 외출한다 가는
곳마다 비를 몰고 다니는 구름의 정령이 된다

구름을 파는 상점에 앉아 내리는 비를 바라보자 내가 기다리는 이는
물로서 오실 것이다 형체 없이 걸어와도 절대 쏟아지는 법이 없다 눈
부처로 잠시 어리는 구름, 머문 흔적이 없다 마른 대지에 나가기 전 나
는 오늘도 구름 한 잔을 테이크아웃한다

 


밤의 노래

낮잠을 자면 가위로 하루를 잘라 먹는 것만 같아 노란 색 없는 무지
개, 손 하나 넣으면 쑥 빠지는 허공의 깊이, 빛을 질질 흘리며 하루해가
지고 말지

오래 전 사람들은 나라를 세웠어 성의 운명은 쇠약하는 것이지 쥐들
만 남아 찍찍거리는 성, 사람들은 성을 뛰쳐나와 혼자 살면서 부패하는
성을 남몰래 그리워하였어

오늘 성에서 노래가 들리네……. 어젯밤에 우리 아빠가 다정하신 모
습으로 한 손에는 크레파스를 사가지고 오셨어요……. 한밤중에 크레
파스를 들고 나는 그 성을 찾아갔지 크레파스로 잡목 숲에 길을 그렸
어 배가 고프면 산딸기를 그려 먹고 아무 데서나 잠이 들었지 노란색
이 없어서 밝은 해는, 그릴 수 없었어

성에 들어가니 소녀가 쭈그려 앉아 울다가 고개를 들었어 크레파스
병정들이 그를 다치게 했어요, 나는 손에 있는 크레파스를 얼른 감추고
는 소녀 옆에 앉아 어둡고 축축한 성에서 함께 울었어

밖에서는 오래도록 비가 내렸어 지금, 혹시 네가 사는 곳에서도 그
비가 내리니? 네가 가진 노란색으로 해님을 그려봐 아름다운 화분을
키워볼게


오래된 농담


아, 아 내가 지금부터 몸 이곳저곳을 이야기한다고 나를 변태라고 생
각하지는 말아요 나 그냥 평범한 놈입니다

여자의 어깨에 살짝 삐져나온 브래지어 끈을 본 적 있죠? 레이스 달
린 브레지어 끈 옆으로 촘촘히 박혀 있는 살점들 그 주름과 옹골옹골
붉은 딱지와 그리고 숨결을

홍시가 익어가는 계절 그녀는 소매를 조금 걷어 올려 입고 볼록 나온
아랫배에는 또 다른 씨앗이 굵어가고 있었지요 나는 씨앗의 숨소리를
들으며 스웨터의 보푸라기 아래 은밀한 집과 뻗어나가는 길을, 뒤뜰을
걷고 또 걷듯이 바라보곤 했답니다

때때로 숨겨 놓은 꿀 훔쳐 먹듯 그 몸을 더듬어보기도 했습니다 밖에
나가면 하루해가 저물도록 달달하고 불안한 맛이 목젖 깊숙이 후끈거
렸습니다

홍시처럼 오래 익으면 기어이 물컹해지는 여자들이 집집마다 잠들
어 있겠지요 무릎을 굽혀 고개를 숙이면 둥글게 말아지기도 하는 길을
끝내 한 번 안고 싶은 밤입니다 돌돌 말아 옆구리에 끼고 멀리 나가도
문득 선해지는 길에 눕습니다 몰캉몰캉한 살 만지며 잠들던 시절처럼


바람이 가는 길

여름밤 엄마와 나란히 누워 회전하는 선풍기 바라보면서 아, 바람도
쪼갤 수 있구나 생각한다 사과가 두 쪽으로 경쾌하게 갈라지듯 나 태
어나던 날 우리의 이별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 사과가 품고 있던 씨를
도려내던 기억으로 나는 또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꿈꾸고 있다
휘황한 바람의 결을 둘로 꼭같이 나누듯 나란히 누운 여자 둘의 슬픔
을 사과 쩍, 가르듯 나눠버리면 금세 한 귀퉁이 물렁거리며 썩어갈 텐
데 한 쪽으로 기울어야만 아스라이 버틸 수 있는 무게중심이 여기에
있다 서로 돌아눕는 저녁 바람에도 등이 있어 서늘한 길이 엎치락뒤치
락 땀을 식혀주는 것인데 좀처럼 제 집은 찾지 못하는 바람의 뿌리는
어디서 오는가
어느 뿌리이기에 우리를 감싸 보이지 않는 스산함에 가슴 떨며 이 밤
을 건너가게 하는가 어둠이 깊어지면 은밀한 바람 숨죽이며 지나가려
나 은하수 반짝이는 강물을 건너 캄캄한 발밑 더듬으며 디딤돌 밟을
때 저 멀리 반짝이는 것은 바람인지 뿌리인지, 간혹 어깨를 스치는 물
수제비에 놀라며 문득 누군가 바라보고 있는 것을 느낄 때 짐짓 은하
수를 끌어다 풀어 놓으며 혼자서 은빛 기억을 경쾌하게 뛰어가기도 하
지만…….
그래, 오늘은 사과를 쪼개듯 김치를 젓가락으로 나누듯 머리를 양 갈
래로 땋아 내리듯 바람도 쪼개어 긴 여름밤 지날 수 있어 다행이다 밤
의 한편을 끌어안으며 내 눈썹을 쓸고 가는 바람의 손길은 자작나무로
자라 멀리 손 흔들며 반짝이네




□ 당선소감


시詩, 따뜻하고 아늑한 언어의 집

외로운 시절을 지날 때마다, 사람에게는 집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
습니다. 첫째로 사람은 곤한 육신을 뉘일 수 있는 집이 있어야 하지만
그 집이 있다고 해서 모두가 행복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 사람에게
집이 생기는 순간이 있는데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입니다.
생각만 해도 따뜻하고 안온한 그 거처는 보이지는 않지만 가슴이 꽉
메어올 적마다 기댈 수 있는 곳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잃기도 하고 때
론 서로 할퀴기도 하니 육체가 깃드는 곳이나 영혼이 깃드는 곳이나
장만하기는 매한가지로 어려운 것 같습니다.

나는 시가 따뜻하고 아늑한 언어의 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언어는 벼린 날과 같아서 잘못 다루면 다듬어지지 않은 목재처럼 손에
가시가 박히지만 그 재료와 성질에 맞게 다듬으면 비를 피하고 눈과
추위를 막을 수 있는 근사한 집이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 내가 지은 집에서 영원히 산다 하지는 않겠지만 눈보라 내리
치는 허허벌판을 지나다 만나는 허름한 여관이라도 며칠 밤 편히 쉬다
가 다시 한 번 보따리 질끈 동여맬 수 있다면, 그이의 뒷모습 한없이 바
라볼 수 있다면 내게는 그런 낙이 없을 것입니다.

부족한 시를 마다 않고 읽어주신 이시영 선생님, 이름만 떠올려도 벅
찬 꿈이 되는 안도현 선생님, 시의 조형법을 가르쳐 주신 박종성 선생
님, 퇴고의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신 김중일 선생님께 머리 숙여 감사드
립니다. 초고를 맨 처음 읽어주던 미선언니와 곁에서 항상 자신감을
심어준 지나언니, 오랜 친구 송이, 함께 고생한 단국대, 우석대 문창과
학우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끝으로 부족한 시를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과 첫 길을 열어준
《시인세계》에 감사드리며 별똥처럼 스치우는 시인이 아니라 뜨거운
열정으로 마지막 한줌까지 타오르며 좋은 작품으로 보답할 것을 다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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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몸이 전부나사다


-하린(河潾) 


하청에 하청을 거듭할수록

본체의 중심에서 멀어지는 사내들이

자취방에 모여 라면에 소주를 마시며

음란비디오를 보던 밤이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욕이 나온다

씨발로 시작해서 좆도로 끝나는 환각제 같은 배설물이

밤하늘 가득 사정되고 서러운 별들은 촘촘해진다

매혹적인 망사스타킹의 여자

아! 신음소리 까지도 친절하다

더 이상 체위는 신선하지 않고

떠난 애인들만 머릿속에서 지쳐간다

그렇게 욕구불만의 밤은 섣부른 발기로 졸아 들고

꿈속에선 CF 속 여자 배우와 자동기계가 되어 섹스를 한다

에어컨을 선전하며 바람을 매번 일으키는 인기 절정의 여자

그녀가 재생시키는 웃음의 값은

이십년 동안 결근 한번 안하고

나사를 박아야 하는 질긴 시간의 값이다

하루 종일 이천 개도 넘는 수나사가 암나사와 만난다

나사들은 화려한 디자인에 갇혀 죽었고

생각은 모두 단순화되어 규격 박스 안에 담긴다

더러는 조인 나사를 풀고 싶어 떠났던 녀석도 있다

조금 더 안쪽의 중심부품으로 살아 보겠다고

차선을 자꾸 변경하다 다시 아웃사이더로 밀려난

옥탑방 구석에 버려진 소주병 같은 녀석들

그 녀석들 다 돌아와 라면에 소주를 마시고 포르노를 본다

온몸이 전부 나사인 세상을 향해 울부짖는 청산가리 사내들

신나를 들이 붓고 싶은 밤을 지난다




날개를 접다


꼭 생리하는 날 물을 준다 건망증에 걸린 후

물 주는 날을 일일이 맞출 수 없는 여자

한 달에 한번 산세베리아에게 하혈을 권한다

물받이로 내려온 건 30일 동안 쌓인 욕망의 파편일까?

정해진 양만큼만 받아들이고 뱉어내는

식물의 본능 앞에 여자는 배신감을 느낀다


전자파에 취한 몸으로 만월(滿月)을 기다렸던 산세베리아

건조한 언어만 되풀이 하는 TV 옆에서

행복과 불행의 조건을 드라마로 세뇌당하고 있다

여자에게 불필요한 정보를 뉴스가 전한다

일정한 주기로 찾아왔던 남자의 행방은 알 수 없고

지독한 황사가 곧 덮쳐올 거라고 주절댄다

늘 가슴 속에 거대한 설계도를 품고 있던 남자는

정밀한 기계처럼 움직이며

사랑도 오차 범위 안에서만 허용했다

이 화분 좀 맡아 줘 꼭 찾으러 올게

남자의 다짐은 짧은 간결체였다

폐경기에 접어 든 엄마가 욕을 하고 갔지만

여자는 엄마의 싸구려 파마약 냄새에 더 화가 났다

목 안에서 모래 바람이 소용돌이 쳤고

산세베리아는 끝내 꽃으로 둔갑하지 않았다

이파리 끝이 뾰족하게 핏대를 세운다

달의 피를 모조리 마셔버린 기세로

하늘을 향한 아테나가 되어 주려나?

아주 조금씩 달이 날개를 접는다





흰 가운에 대한 기억


저 노인이 무슨 일로 1번 국도를 건너 가려했을까?

그런 구차한 질문 따윈 던져서는 안 되지요

낯선 사람에게 알몸을 다 맡긴 배짱 좋은 노인이

저승과 이승이 갈라서는 길목에서

먼 길 가다가 제 몸 확인하러 오기 전에

모든 과정을 냉정하게 처리해야만 합니다

빈틈을 보이다간 울컥 두려움이나 역겨움이 올라와

자꾸 뒤돌아보게 되고 밤새 뒤척이게 되지요

급속 냉동으로 굳어진 몸을

마트에서 산 냉동 닭이라 생각하며 구석구석 닦아야 합니다

탄력을 잃은 몸매의 암컷이군요

검버섯을 잔뜩 피워낸 얼굴과 깡마른 손

볼품없이 힘줄만 튀어나온 발을 보니 고생 꾀나 했겠습니다

쪼글쪼글 정기를 다 내준 가슴을 보세요

오래 전 가동을 멈춘 폐공장이 같지 않습니까?

컴컴한 사타구니를 보니까 자식을 다섯 이상 낳았고

너무 일찍 영감을 떠나보낸 섹스의 흔적마저 희미하네요

갑자기 사고를 당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배설을 하는 겁니다

눈을 감지 마세요

사체 앞에 뻔뻔스러워져야 진짜 전문가가 되는 것입니다

휘거나 부러진 뼈를 다시 맞춰놓고

마지막으로 모든 구멍마다 솜으로 틀어막으세요

외떨어진 마을에서 농사나 짓는 과부댁 노인은 이제

일당을 지불받게 될 최고의 물건이 된 겁니다

사연도 없는 고사목이 된 거지요



정신병원이 있는 그림


1. 


가까운 숲 속에 정신병원이 있다

병원의 불빛은 밤마다 야광찌처럼 빛나고

하루 종일 울거나 웃는 자들이 그곳에서 늙어간다

의사들은 영혼이 가장 맑아지는 시간을 골라

야생의 이미지로 가득 찬 비디오를 반복해서 틀어준다

동물의 왕국과 공룡대탐험을 보면

3D입체 게임을 즐기는 효과가 있다고 하던데

그들은 바보를 흉내 낸 코미디 프로를 가장 좋아한다

  

일제히 소등을 하면 병원은 잠수함처럼 가라앉는다

그 때부터 소문은 산 아래 마을로 번져간다

눈깔 뒤집힌 짐승이 매미처럼 철창에 매달려 울부짖다

진정제를 투여 받고 죽어 간다는 소리

간호원과 은밀한 거래를 하여 탈출한 짐승이

먹을 걸 훔치러 마을로 내려와

어린 아이의 심장을 파먹는다는 소리

두려운 소문이 조무래기의 베개 아래로 와서 웅성거린다

누군가 다년간 흔적이 이불 위에 그려지곤 했다


2. 


미칠 일을 처음 경험한 나이는 열일곱 살 때였다

친구 하나가 특이하게 양쪽 손목에 힘줄을 따냈다

붉은 반항심을 폭발적으로 토해 내고 싶어서라고 했다

그럴 거면 빨리 죽어버려

소리친 소녀는 전학을 갔고 한 동안 교사들은 진지해졌다

뼛가루가 뿌려진 강물에서는 젖은 비명 소리가 자꾸 울렁거렸고

종일 강가에 앉아 빈 낚시 바늘만 꽂았다

하루는 외제차 한 대가 큰 길을 지나 정신병원으로 빨려 들어갔다

여자 아이가 코스모스를 잡으려고 차창 밖으로 금간 손목을 내보였다

손목이 금간 아이와 코스모스, 외제차가 잘 어울리는

그림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낚싯대에서 묵직한 신호가 왔다




누추한 가족사3

―유리 상자


소읍의 쇠약해져 가는 학교 앞에서

유리를 팔던 어머니는 그 당시

틈을 가장 잘 이용하는 마술사였다

한동안 학교의 유리는 주기적으로 깨어졌고

보수적인 태엽만 돌리던 교장 선생의 훈계는

머릿속에서 이미 파열된 상태였다

어설픈 청춘들이 자해하듯 담뱃불을 자꾸 지졌다

날을 세우고 싶던 아이들은 틈 하나씩 만들고 사라졌고

어머니는 환상의 빈자리가 커지기 전에 새 유리를 끼웠다

포개진 유리 사이로 공업용 다이아몬드 칼이 지나가면

유리들은 모범생 흉내를 내며 일렬횡대로 갈라졌다

그렇게 틈의 배후엔 유리가 있었고

문을 열 때마다 위선(僞善)으로 가득 찬 어머니가 드르륵 거렸다


직접 유리를 잘라 보고 싶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건 깨진 유리를 가지고

만취한 아버지를 매일 도려내는 일 뿐이었다

화학 물질 가득한 신발공장에서 문득

유리 구두를 신고 날아오르고 싶다던

누이의 유언이 연서(戀書)용 편지지를 타고 날아왔고

어머니는 더 이상 유리를 자르지 않았다

마네킹처럼 변한 내가 자라는 것을 거부한 채 

어머니가 만든 쇼윈도 안에서 박제된 채 살아가고 있었다

 

 

 

하린(河潾) 

전남 영광 출생. 1998년 광주매일 신춘문예 시 당선. 2008년 <<시인세계>> 시 당선. 현재 중앙대학교 일반대학원 문예창작과 박사과정, 시전문지 계간《열린시학》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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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작품 공모 당선 취소 소견서


제10회 《시인세계》신인작품 공모 당선작 발표가 난 지 얼마 안 되어 한 독자로부터 당선시인 안성덕의 「저승사자를 따라가다」가 인터넷 블로그에 나도는 「어느 인터넷 동호회 장례식장 얘기」의 개작 혹은 차용임을 알리는 메일이 전송되었다. 두 문건을 검토해 본 결과 안성덕의 「저승사자를 따라가다」가 인터넷 블로그에 나도는 이야기의 차용적 개작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우리가 안성덕의 응모작 11편 중 이 작품을 당선작 5편의 하나로 뽑은 것은 이 작품이 지닌 발상의 신선함과 상황의 기발함, 시어 선택의 해학성 때문이었는데 그 연원이 기존의 공표된 언술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작품의 독창성에 중대한 손상이 가해지는 것이다.
응모자는 그러한 작품은 이 한 편뿐이며 블로그에 유포된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어서 시로 재구성한 것이고 그러한 사실을 각주로 밝히지 못한 점이 실수라고 해명하였지만, 우리들은 그러한 해명이 신인상 당선작이 생명처럼 지켜야 할 독창성이 유실된 점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고 판단하였다. 물론 시인이 시를 쓸 때는 이미 알려진 설화나 사건을 바탕으로 시를 쓰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은 자신의 언어와 상상력으로 소재를 변용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예술 행위다. 그것은 자신의 새로운 문법으로 새로운 정신을 열어가는 일이다. 거침없이 종횡하는 인터넷 정보의 홍수 속에서 출처를 알 수 없는 언어가 난무하는 요즈음 이러한 창작의 기본 정신이 흐려지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응모자의 다른 작품이 모두 개성이 뚜렷하고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우리 심사위원들은 고심 끝에 당선 취소의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미래의 가능성을 지닌 시인을 천거하는 일보다 창작의 정도가 무엇인지를 알리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예상치 못한 일로 파문을 일으킨 점에 대해 사과드리며 이 일이 하나의 경종이 되어 다시는 이런 일이 재연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2007년 8월 23일

                                     심사위원 - 김종해,강은교,이숭원

 



저승사자를 따라가다 (당선취소 유발 작품)



산신령님 이름이 뭐죠, 부음을 접하고 달려간 산악회원의 상가 영안실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카페에서 우린 닉넴으로 통했으니까요. 누군가 핸폰으로 산신령님의 실명을 알아냈죠. 갹출한 부의금을 넣고 막 돌아서려는데 접수처 청년 방명록에 서명을 부탁하더라고요. 김만수, 평소대로 써넣으려다 가만 생각해 보니 글쎄 상주가 우릴 무슨 수로 알아보겠어요. 그래요. 고심 끝에 솔낭구, 뒤이어 고갤 끄덕이던 산꼭대기님도 닉넴을 써넣습디다. 접수처 청년 표정 참 묘해지더구만요. 일행이 선녀와 나무꾼, 이라고 계속 써넣자, 딱 뭐 씹은 얼굴을 하더라니까요. 민망하긴 우리도 매한가지였지요. 화톳불이 그렇게 화끈거리는 줄 미처 몰랐다니까요. 쥐구멍에 그냥 대가리 콱 처박고 싶은데 일행 중 하나가 자꾸만 머뭇거립니다. 누군가 거듭 채근을 해대고, 마지못해 개미만한 글씨로 에헤라디아, 라고 써넣는 순간 마지막 남은 회원 글쎄 총알처럼 뛰쳐나갑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들은, 저승사자님 같이 가요.
쪽팔려 딱 죽고 싶더라고요.


심사평
● 김종해. 강은교. 이숭원 



예심에서 본심으로 넘어온 작품들을 심사위원들이 돌려가며 열심히 읽은 결과 대부분의 작품들이 모두 나름대로 독창적인 언어의 담금질들을 보여주곤 있었으나 그 이미지들이 작위적이어서 진정성이 문제가 되었으며 어떤 시들은 그 이미지가 너무 폭력적이기까지 하여 읽고 있는 심사위원의 눈을 찌푸리게 할 정도였고, 그렇지 않은 경우라 할지라도 그 현란성은 오히려 시를 산만하게 하고 있었다. 아나모르포즈(anamorphose)를 지나치게 실천하고 있다고 할까. anamorphose는 사물의 피상적인 외양 너머에 숨겨져 있는 새로운 모습을 드러나게 하는 현대시의 중요한 기법이 되긴 하나, 그것이 잘 실천될 경우에는 대상 너머에 숨어 있는 생각도 못한 '울림'이 울리게 마련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응모시들은 지나치게 그 기술을 사용한 결과 오히려 작위성과 산만성을 드러내기만 할 뿐 시적 울림이 없었다. 그 옛날의 시론, '이규보의 신의론(新意論)'이 새삼 생각날 정도였다.
그러한 시의 숲길을 거쳐 최종으로 남은 작품은 「금」외 8편, 「꽃을 바라보는 법」외 9편, 「링거 플러그」외 11편, 「조용한 가족」외 9편, 「속, 편안합니다」외 10편이었다.
심사위원들은 이 시들을 보다 심도 깊게 토의하며 재삼, 재사 돌려가며 읽었다. 그 결과 이 중 「금」외 8편, 「링거 플러그」외 11편의 시들은, 그 중 몇 편은 그 언어를 다루는 솜씨, 그리하여 '울림'을 마련하는 솜씨 등이 상당한 수준에 있었으나 대체로 그 시적 수준이 고르지 않아 대상으로 뽑기에는 적당치 않다는 결론에 도달하였으며, 「꽃을 바라보는 법」외 10편은 그 시적 구성이 만만치는 않았으나 언어와 필연성과의 관계, 울림과 시적 메시지와의 관계, 성찰성 등이 문제로 지적되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두 시인의 시편들은 <<유성애의「조용한 가족」외 9편,>> 「속, 편안합니다」외 10편이었다. 이 중 그 알레고리성이 뛰어나며 여운 내지는 울림이 있고, 전편의 시적 수준이 고를 뿐 아니라 읽는 이로 하여금 웃음을 유발하게까지 만드는 「속, 편안합니다」외 10편을 대상작으로 선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인에게 당부하고 싶 것은 자신만의 그 '틀'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다. 문운을 바란다. 그러나 나머지 네 시인도 언젠가는 문단에서 만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두 정진하시기를 빈다. -강은교






출처 : 시인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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