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선] 나무들의 만찬 / 김봉래
햇볕을 맛있게 먹는 오후
숲 속이 온통 진수성찬이에요
한쪽에 잘 익은 그늘이 늘어져 있어요
낮부터 눈독들이던 장승부부가
슬금슬금 다가와 그늘 한 귀퉁이를 물고 있네요
저기 낮은 곳엔 화이트 와인이 졸졸 흘러요
손님으로 온 물잠자리 한 마리가
너무 마셨는지 비틀거리며 날아가요
오늘 음식 가운데 샐러드는 단연 최고에요
앞산 단풍에다 구름 드레싱으로 멋을 냈군요
쳐다보기만 해도 배가 불러요
거기에 혼성 콰르텟의 새소리까지 들려요
신난 바람이 살랑살랑 춤추자
점잖던 소나무도 따악! 하고 추임새를 넣고요
자작나무는 호들갑스럽게 박수를 쳐요
흥겨운 이곳과 달리 아늑한 양지쪽에는
나비들이 굽은 등나무와 함께 쉬고 있네요
아마 피곤하기도 할 거에요
오전부터 화려하게 차려입고
내내 손님들 안내를 했으니까요
갑자기 한 무리의 아이들이 나타나
나무의 팔에 매달리는군요
앗, 조심하세요! 햇볕이 쏟아질 수 있어요
저들끼리의 장난에 까르륵 터지는 동심,
다람쥐가 꾸러기들을 이끌고 어디론가 가네요
이제 식사를 마무리 해야겠어요
역시 최고의 반찬은 즐거움이에요
포만의 기쁨에 젖은 나무들,
이들이 올가을 휴양림 축제에
모두를 초대한대요. 가실래요?
[입선] 개우지를 그리며 / 강인호
송골재 너머 솔밭 개우지가 살아
밤길 혼자 걷는 사내를 따라오며
나뭇가지 꺾어던지며 장난을 걸고
동네 강아지를 잡아가기도 한다고
사내 셋이 아니면 밤길 그 산길을
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던 것인데
그래도 마음 둔 동네처녀 집 앞에
산토끼를 잡아다 놓기도 했다던데
언제부터인가 개우지 사라진 것이
솔밭 대신 인삼밭 생긴 그때인지
오솔길 흙길 포장된 그 즈음인지
그 처녀 도회지로 시집 간 후인지
지금은 개우지 오지 않는 송골재
산돼지 가족 내려와 밭을 헤집고
노루며 고라니가 새끼들 데리고
산책 다녀간 발자국만 남아 있다
*** 개호주(호랑이 새끼)를 우리 동네 어르신들께선 개우지라 부르신다
[입선] 주산지에서 / 박재선
어느 산기슭에 다다르자
지친 빗방울은
조용히 몸을 뉘기로 마음먹었다
오랜 기다림
품이 그리웠던 것이다
말없이 파고들고만 싶었을 것이다
속삭임 없이 뒤척임 없이
매캐한 하늘 떠도는 동안
먹구름 사이로 들었던 것이다
어데서 새들이 지저귀며 전하는 소리를
물안개 전설처럼 떠도는 호수 그 곳
허벅지까지 물 차오른 왕버들 할아버지들
귀 담그고 듣는 오래된 울림들에 대하여
귓바퀴 마다 기어 나온 달팽이들이
느릿느릿 끌고 가는 바위 같은 세월들에 대하여
쭈그리고 앉은 조약돌이 사각사각
신발 밑에서 몸을 부비는 소리들에 대하여
숲 속 이파리 사이 내려앉아
찰방이며 떠다니는 허공의 햇살들에 대하여
물결이 일면 온 하늘이 흔들리는
단 한 번도 마른 적 없는 수심에 대하여
빗방울은
어딘가 그리운 호수를 만나고 싶었다
굽이굽이 흘러 가고 싶었다
허나 낯선 산기슭, 아무렇게나 누워버렸다
눈을 감아버렸다
깊은 잠이 들어버렸다
어느 결에 산속 숨어든 시내를 따라
이미 꿈결처럼 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이미 귓가에 전설처럼 나지막이
왕버들에 앉은 새들이 지저귀는지도 모르고
이미 오솔길에 달팽이와 조약돌과 햇살이
모여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고
[입선] 겨울 숲길에 서 있었다 / 백승학
시련을 모르는 채 그저 뛰놀던 날의
뒷산 기슭에는 잎이 지고 있었으나
햇살들은 언제든지 추운 틈새의 끝자락에서 더욱 펄럭이거나
갈참나무 베어진 곳마다 더욱 쌓이다가
밤이 오고 나서도 여운으로 남아
길고 어두운 산허리를 하얗게 색칠하곤 하였다
모든 것에 눈부시던 강둑길 옆으로
산 그림자를 밟으며 돌아오던 그 저녁엔
살아갈 날들도 오늘처럼
눈부시지 싶었다
어리던 날에
겨울 숲길에 서 있었다
시련을 만났어도 그리 춥지 않던 날의
앞산 비탈에는 눈이 녹고 있었으나
바람들은 어쩐 일인지 가파른 골목 모서리를 더욱 적시거나
콘크리트 떨어져 나간 자리마다 더욱 머무르다가
시린 가슴을 오래도록 쓸어내리곤 하였다
그날도 우리들의 공터에는
빗물처럼 튀어 오르는 햇살들이 가득하였겠으나
사람들은 저마다 두고 온 산내음만
떠올리지 싶었다
힘겨운 날에
겨울 숲길에 서 있었다
시련이 지나고 난 후 바람마저 저물던 날의
먼 산 언덕에는 새가 날고 있었으나
마을 버스들이 먼 곳에서 돌아와
하나 둘 정류장에 멈춰 설 때
들녘이 아니었을 정류장이 어디겠으며
언 땅을 흔들던 기적 소리처럼
햇살 한 자락에도 가슴 두근대지 않을 기억이 어디 있으랴
좁은 골목 길 마다 발자국 소리 설레고
울음 같은 미소들이 가득하지 싶었다
저무는 날에
겨울 숲길에 서 있었다
[입선] 나무는 동성동본 이다 / 서상규
산의 혈맥을 받은 나무들,
뿌리와 뿌리가 혈통을 맺고
가문의 뼈대로 줄기를 일으킨다
육친이 인정을 나누는 가슴에
초록 잎맥이 새긴 지문으로
새날의 언약을 물들인다
맑게 마음결을 닦은 선한 눈매로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며
가지와 가지를 뻗는다
거센 비바람이 휘몰아칠 때
한 방향으로 흔들리며
올곧은 정신 자세를 가다듬는다
햇살 기운에 잎을 펼치고
물관에 엮인 근육으로 일어서서
태풍에 상처 입은 혈육을 품는다
아낌없이 베푸는 더운 사랑으로
나이테에 감긴 길을 풀어
생명의 숨길을 열어준다
가파른 능선에 터 잡은 가계에서
심장을 맞댄 파동으로
꽃을 피우고 열매를 익힌다
산이 펼친 푸른 호적등본에서
일가를 이룬 동성동본으로
일평생 동고동락하는 나무들,
마음을 닫은 무정한 사람 세상에
아름다운 가족사의 교훈으로
살림의 무성한 숲을 가꾼다
[입선] 떡갈나무 자서전 / 유택상
월악산 송계계곡 맑은 물에 등살 잡히자
구비구비 물줄기에 하늘호수 열린다
무장무장 터질듯 올라 온 노루귀꽃 애기똥풀 떡갈나무 그늘에서 푸르름으로 넘실거린다
돌멩이에 민낯을 대고 또박또박 글을 읽는다
이곳에서는 물소리도 산새 소리도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던 어머니에게 등불이 되어주는가
여름이 박힌 나뭇잎에서 작렬하는 태양의 연서를 적는다
가뿐 숨 몰아쉬며 올라 온 길
연두속으로 꽃물 번지자 손등을 타고 흐르던 땀이
행간을 지나 온 길 마디마디에 글자로 쓰여진다
오롯이 손바닥을 펴 물 한 모금 떠 마신다
첨버덩, 첨버덩, 산천어들이 물속을 유영한다
산들바람에 툭툭 나뭇잎이 춤을 춘다
수면 위에 떡갈잎의 호흡을 느낀다
내가 매일 읽는 국어사전의 목차마다 얼마나
많이 마음을 비워야 자연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 수 있을까
책을 펴서 월악의 맑은 물을 담아 자서전을 쓴다
내 마음에 떡갈나무의 시원한 바람과 물소리에
나무들의 거처를 만들고
무장무장 터질듯 부풀어 오른 잠을 청해본다
[입선] 야생화 자연 학습장에서 / 윤형돈
오늘 저녁 이 아담한 들꽃 풀 섶에
야생의 쓸쓸함이 내린다.
산기슭에 머무는 고적함이
어둑한 산 그림자를 데리고 올 때는
지나온 아랫마을 보다 더 핍진한
음영과 색조를 띤다.
나는 잠시 무료함에 젖어보지만
이 외로운 심사의 공간에
내 가난한 시의 영토가 있다
꽃 범의 꼬리가 피뢰침을 땅에 박고
절정의 꽃잎으로 흔들린다.
어느 날 세속의 정원에 강림하여
턱없이 웃자란 부처 꽃도
그 묘연함을 감추기 위한 몸짓으로
곁에 억새풀과 키 재기를 한다.
두메부추에게도 영혼이 있을까
갓 피어나 샛노란 해바라기의
내면 구조에 결박당한 소우주의
순수 혼이 그렇다고 말한다.
여린 숨결만이 소곤대는 코스모스
진영에서 알 수 없는 한 떼거리의
연민이 형형색색 밀려오는 시간.
[입선] 겨울 수묵화 / 최미루
화선지를 펼쳐놓고 그림을 그린다
산은 산대로 나무는 나무대로 색의 은유법은
한 폭의 겨울 그림을 위한 마련이었다는 듯
기꺼이 비워내며 차가운 백지가 된다
흑과 백의 운치를 알고 있는 겨울은
익숙한 필치로 산의 농담을 처리하고
가늘게 뻗은 나무에 점법(點法)의 눈을 뿌린다
부드러운 흰 눈이 산허리를 돌아
마을 어귀까지 내려오는 동안 엷게 번진 먹물은
숲에 잔잔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무거운 음영이 낮게 내려앉은 골짜기에
얼음벽 사이 흐르는 물소리를 첨가하니
뒷걸음치던 구름이 종이의 여백을 마저 메운다
바람이 지나가며 미심쩍은 부분에 마지막
마른 붓질을 한다
붓을 쥔 손에 한껏 힘이 들어갔는지
자작나무의 눈가루가 떨어지며 남은 햇살을 끌어당긴다
잠시 빛으로 채색을 시도해보다 이내 거두어들이는 바람
겨울 그림은 흑백의 궤적을 쫓아야 제맛이라는 듯
눈꺼풀 사이 굴뚝 연기의 춤사위를
가는 세필로 마무리하고 있다
[입선] 숲 / 최선옥
바람이 부위별로 봄을 저미는 창밖
하늘하늘 비늘이 날린다
민감한 바깥의 절기로 짓는
꽃그늘이 비릿하다
가문 길로 소금단지를 이고 나온 햇살이 파닥거리는 그늘을 절이고
나무들이 푸른 꽁지를 흔든다
아가미 밖으로 쿨럭,
터져 나오는 이파리들
나무들의 나이테는
어느 차가운 물밑의 지도를 헤엄쳐 나온
파란 등고선
파도를 따라 굽은 파문이다
부푼 봄 한철로 살아본 것들은 안다
시간의 비린 칼질이 이미 보이지 않는 몸의 결을 따라 지니고 있음을
왕성한 식욕이 가시를 발라내 층층 살을 떼어낸다
서서히 공기가 빠지듯 저를 내려놓는 꽃들
게으름은 길고 봄은 짧다
시간의 수로를 거슬러 오르는
미처 지우지 못한 어떤 마음이 훅, 비린내를 풍긴다
가장 낮은 곳으로 허물어지는
짜디짠 잠들이다
앙상한 뼈들을 숨기기 위해
푸른 살집을 늘리는 나무들이 자꾸만 아가미를 부풀린다
파도 출렁이는 숲
나는 나무들이 잘 헤엄칠 수 있도록 유리창을 말갛게 닦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