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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상] 나무는 번진다 / 이진환

 

 

빈 가지엔 허공뿐일까

농밀한 채색을 하며 긴장을 늦추지 못하던 산천이
붉은 기운에 머문 잠시

찬 기운이 거두어가는 땀 밴 자리에
보이지 않는 잎새를 준비하는 나뭇가지를 보고서야 혹독한 겸손을 본다

눈발 서럽게 덮어오는 빈 몸에도
우듬지의 묵묵함이 노을과 함께 내려앉는 새들의 둥지가 되고
밑동의 후덕함이 어스름과 함께 기어드는 것들의 거처가 된다

나서지 못하는 걸음을 두고
시름 깊은 날엔 강을 대신 흘려보내고
좋은 날은 구경삼아 구름을 대신으로 산하를 굽어보며
무심하여 헐벗을까 빈자리마다 다독이는
여린 뿌리들이 키 높이에도 어깨를 하고 내딛는 소란이 치열하다

자신을 채찍질하는 바람몰이가 성장의 통점이 되어
빈 가지를 말아쥔 뿌리의 힘이
한 점씩 옮아오는 냉기를 떼어내며 결핍에 겨운 나이테를 돌아 나올 때
침 마른 호흡은 수액에 감춘 새싹의 맥박이다

방정식의 삶이 아닌,
생명의 근원인 바닥의 함수로 자연에 순응하는
나무는 우연이 아닌 필연의 협연으로 조화를 이루는 산천을 갖는다

나무는 번진다

나무를 감싸고 계곡을 건너는 바람에 볕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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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상] 사려니 / 길덕호

 

시커먼 짱돌 하나 가슴에 쑤셔 놓고
사려니* 숲에 왔다.
절망의 무게가 이렇게 무거울 줄은 몰랐다.
삼나무 숲 그림자
화사한 온기는 그늘의 힘에 밀려나고
축축한 음지의 걸음으로
나에게로 들어왔다.

비자나무 바둑판의 눈금 위
단수에 걸린 새 한 마리
파닥이다 쓰러진다.
이번 생의 마지막은
이곳에서 비자목의 주름으로 살련다.
허방에 빠진 발목도 접질리는 삶이었다.
설문대할망*도 물에 빠져 죽어 버린
한이 맺혀 들끓는 가마솥의 죽이었다.

물찻 오름을 걸으면서 삼나무를 본다.
천 년의 세월을 견뎌낸 껍질이
상처를 싸매 해진 붕대처럼
오래된 절망의 시간을 감고 있었다.
절망은 보이지 않는 곳에 두고 보듬어
항아리에 담아서 곰살맞게 발효시키는 것
줄기와 가지의 가느란 지문에도 햇살이 깃들어
삼나무가 삶나무로 한 발 뭉클 다가선다.

사려니 오름을 오른다.
한 발 두 발 절정에 다다르면서
땀에도 젖지 않는 새의 부리로
그 이름을 읊조려 본다.
사려니 사려니 하다가
살려니 살려니 한다.

삼나무, 비자나무, 때죽나무, 편백나무
상처 입은 나무들이 옹이가 되어
더 깊이 더 단단하게 박혀 있었다.
허방에 빠진 발목에서 뿌리가 나고
줄기는 학의 둥지를 틀었다.

사려니 오름에서 해오름이 있었다.

 


* 사려니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남원읍 한신로에 있는 제주 오름들이 한눈에 보이는 오름 사려니 숲, 사려니 숲길로 유명하다.
* 설문대할망 : 제주도를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여신

 

 

 

 

 

 

 

[우수상] 뿌리의 반경 / 이정희

 

나무들은 흔들리는 반경만큼
뿌리를 뻗는다
흔들리는 반경은 나무들의 사회
그 안에 이웃이 있고 음지와 양지를 배치하며
태양의 입사각을 준비한다
새순을 밀어 올리는 일도
알고 보면 철저한 교육 뒤끝인 셈이다
어느 쪽도 편애하지 않고
둥근 지구를 닮은 반경에 순응하라는
바람교육헌장을 배우는 것이다
숲엔 나뭇가지들이 미명처럼 긁어놓은
생채기들이 맑은 날에는 다 보인다
수없이 바스락거리며 주고받던 귓속말
뿌리의 비명인 듯 말줄임표
바람 길에 납작 엎드린 빠른 체념
어느 땅속도 알고 보면 우주의 한 귀퉁이쯤
뿌리들의 사회가 아닌 곳이 없다

말도 반경을 가진다
햇살 같은 말은 샌들 바깥으로 튀어나온
발가락을 간질이고 봉인지 뜯긴 소문은
반경을 한참이나 벗어나지만
흔들리다 다시 중심을 찾는 반경들은
살짝만 비틀면 서로 겹치기 일쑤다
바람의 입김에 맞서는 뿌리가 없듯
늘 그 반경 안에 발을 묻고 있다
하물며 지구와 달도 중력이라는 반경을
굳게 믿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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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남한산성 심포니 / 이상우

 

겨울 남한산성, 떡갈나무 그늘 한 장에 주저앉아
저녁이 밀려드는 성벽 너머를 듣는다
둥치에 맞닿은 꼬리뼈부터 그늘이 부푸는 소리가 연주된다
십이월의 숲이란 마땅히 귀로 찾아들어야 하는 것
귓바퀴를 따라 둥글게 어둠이 말려들고
간명한 궤적의 가지들 사이로 맨살의 해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저녁이 오지 않는 숲이란 없다
물기 어린 어둠이 중저음의 음계로 숲을 연주할 때
가지들이 어째서 잎을 버렸는지 비로소 알 것만 같다
사방팔방 펼쳐진 텅 빈 가지 사이엔
낱장으로 펄럭거리는 어둠들
나무를 기르는 건 빛의 힘만으로 안 되는 일이다
어둠을 들여다보는 상상력이 숲을 온전히 숲으로 자라게 한다

밤이란 어쩌면 나무와 숲으로부터 시작되는 것
저물녘, 멍울진 해가 실밥 풀리는 소리를 내면
나무 둥치 밑 낙엽들이 소란해진다
무질서하게 쌓여있는 것 같은 저 잎들 사이엔
무수히 많은 길목이 숨겨져 있다
부드럽고 따뜻한 응달의 물길이 그사이에 흐르고,
하늘이 아니라 지상에서 저녁이 먼저 시작된다

마침내 해가 저물면 숲을 둘러싼 배경은 사라지고
모든 가지는 수 만 줄의 궤적으로 다시 드러난다
가진 걸 다 내려놓은 자만이 연탄(連彈)할 수 있는 간소한 선과 자세
밝음은 물론 그러하지만,
어둠 또한 나무를 다르게 들을 수 있는 귀를 만들어준다

남한산성 심포니,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성벽 너머
사시사철 불 밝힌 도시가 거기 있고, 나는 듣는다
언제나 환한 나머지, 어둠을 항시 죽이고 있는 도시
수 만 줄의 현이 저 도시를 모두 다르게 켜는걸

 

 

 

 

 

 

[우수상] 섶다리 / 이수진 

 

나무는 죽어서도
자신의 뼈를 빌려준다

어깨와 어깨를 걸어
폭우로 널뛰는 물의 마음 다잡아가며
봄꽃 만발한 산나물 바구니
사뿐히 걸을 수 있게

무명천 걸친
그렁그렁한 눈물 닦아주고
뼈 없는 슬픔 부축하며
밭을 건네주고 논을 건네준다

고봉밥 같은 길을 내며
거친 손등으로 눈보라 쓰윽 닦아낸
아버지의 저 듬직한 등처럼

꽁꽁 언 물속에서도 뿌리 내려
휘청거리는 어린것들의 걸음
주저앉지 않도록 모두 끌어안고 버틴다

나무는 오늘도 냇가에 서서
등이 휘도록 자신의 뼈를 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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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나는 겨울 자작나무 숲으로 간다 / 강성재 

허공의 뜰에 눈이 내리는 날이면 나는
겨울 자작나무 숲으로 간다
지상엔 눈부신 눈밭
올곧은 기도가 하늘에 가 닿는 산 아래
숲을 이룬 나무들은 왜
흰 살결인가를 생각한다
상처 없는 나무는 없다
한 생을 나도 상처 입은 나무처럼 살았다
아니 제 상처를 핥는 짐승처럼 살았다
이 곳에 와서 나는 다친 몸을 끌고
어디론가 흔적 없이 사라지던
눈표범을 생각한다
시베리아 바이칼호, 티베트 고원의
눈 쌓인 설원을 생각한다
귓불을 잡아당기며 산정을 넘는 칼바람 소리
지난가을 천 개의 씨앗을 가슴에 품은
자작나무 열매는 씨방의 문을 열고
바람이 불 때마다 하나, 둘
새를, 나비를 멀리 날려 보냈다
흰 피부에 검은 상처를 안고 있는 나무들
때론 나무의 상처가 위로가 될 때가 있다
지상으로 꺾인 나무는 불 속에 몸을 던져
자작자작 말을 건네 오고
휴일, 나비매듭을 엮은 사랑은 화촉*을 밝힌다
다시 청보랏빛 하늘을 뒤덮는 눈보라의 군무
가지마다 점묘화로 피어나는 눈꽃송이들
겨울 숲에서 얼마나 손발이 시려야
그대의 따뜻한 가슴에 닿을 수 있는 것인지
산등성이에서 나는 한 그루 자작나무가 되어
오래도록 당신을 기다리며* 서 있다

*화촉: 자작나무 껍질을 태워 불을 밝힌 데서 유래
*당신을 기다리며: 자작나무 꽃말






[우수상] 고사리 / 이희경

지리산 중턱에 걸어놓은 오선지에 별들이 모여들고 있어요
달궁 마을에 음악회가 열리려나 봐요
유난히 흥이 많은 물푸레나무가 비파를 키기 시작하네요
뿌리까지 귀가 달린 듯 두근거리는 내 울림통

편백나무 숲길로 들어가면 전직이 미용사였다는 수수꽃다리 아줌마가 보여요
가끔은 웃자란 풀들의 머리를 잘라주곤 하는데
어제는 참꽃마리가 향기에 취해 조는 바람에 귀에 상처를 낼 뻔 했다네요
그렇지만 나를 꼼짝 못하게 하는 건 꽃향기가 아니라 가위 소리였어요
내 안에 현으로 된 힘줄이 있는게 분명해요
내가 엄마의 주머니 안에 있을 때 귀를 대면 하프소리가 들렸으니깐요
작고 아담한 땅속 어디든 뿌리를 내리고
태양이 지나가는 자리에 16분음표를 터뜨리죠
그럴 때면 사제비나비 한 쌍이 첫눈으로 착각하고 가슴을 쓸어내릴 때도 있대요

땅속까지 들려오는 울림을 따라 다람쥐 할아비가 살고 있는 나무를 찾아갈래요
그곳에 가면 엄마의 무덤을 볼 수 있으니깐요
산고개 너머에선 눈치 빠른 바람이 한 걸음에 달려와 자고 있는 무덤을 톡톡 건드리네요
뒤따라온 갈퀴나물이 손을 입에 대고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는지 우는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요
앗! 겨드랑이가 간지러워요 주머니가 부풀어 오르고 있나 봐요
비가 와도 삭지 않는 주머니가 허공 속에 숨는 건 주변을 맴도는 엄마의 입김 때문이래요

이제 포자를 떠나보낼 때가 됐네요
머리부터 뿌리까지 빨갛게 변하지만
녹슬지 않고 새로 태어나는 거래요

부끄러운 듯 구부리는 손가락에 꽃반지 하나 끼워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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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나이테 / 최재영

 

잘려진 나무를 읽는다

분주했던 시절들을 기억하는지

선명한 경계사이

부풀어 오른 물관이 입술처럼, 붉다

남쪽으로 기울어진 동심원은

따뜻한 생각만으로도 잎을 틔우는 중이다

밤새 별들이 머물다 가는 자리

아침이면 신생의 이슬방울들 모여들어

온 우주를 가만히 불러 들였으리

밤낮없이 당신의 생을 접촉하느라

어느 지점 등고선이 급격히 휘어지고

거기 어디쯤 둥지를 틀었던

새들의 족적도 역력한데,

북으로 가는 길이었을까

다급한 무늬들의 간격으로 폭설이 휘날린다

변방으로 내달리는 서늘한 결의처럼

나무들의 행간이 촘촘해지고

다시, 뜨거운 한 생을 휘돌아나가는 나이테

나무는 죽어서도 생장을 멈추지 않는다

숲은 경건한 침묵으로 고요하다

 

 

 

 

 

[우수상] 나무의 자서전 / 서상규

 

나무로 뿌리내린 가계를 펼친다

나이테에 갈피를 접은 자서전으로

눈, 비, 구름, 바람의 자음을

햇빛의 모음으로 품은 글자들,

잎이 광합성에 쏟는 땀방울로

한 땀 한 자 새긴 문장을 읽는다

처마가 응달로 기운 살림에

첫 새벽을 깨는 새소리에 일어나

한 뙈기만한 허공을 일군다

힘줄로 가지를 뻗은 손아귀에

굳은살로 단단히 옹이가 박히는

생의 내력에서 열매를 읽는다

땡볕 속 혈맥을 달구는 문맥에

녹음 짙푸르게 가난을 일으켜

나뭇결로 겹겹이 페이지를 채운

큰 나무로 우둑 선 아버지

등 굽은 줄기를 곧고 바른 의지로

물관 속 굳센 뼈대를 세워

척박한 땅에서 결실의 때를 맞는다

단풍으로 따스한 지붕을 올리고

둥글고 충만하게 영근 과실로

마지막 책장을 등불인 양 밝힌다

순한 귀를 귀납법에 드리우고

밤하늘에 하얗게 센 별빛으로

우듬지 위에 끝말을 맺는다

아버지가 쓴 오자 없는 자서전을

새 길에 목판본처럼 탁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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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숲채비빔밥 / 이성엽

지나는 구름한점 푹 떠서 하얀 고두밥을 지어 놓는다.
참나무 등껍질 파란바람에 들들 볶아 식혀두고,
봉긋솟은 꽃나무순 쓸어모아
내리쏟는 소나기에 후드득 씻어
칡넝쿨 엮어만든 채반에 얹어 물기를 찌운다.

코끝내음 향나무 파릇이 숨을죽여
졸졸졸 계곡소리 흩어뿌려 조물조물 무치고
겨우내 묻어두었던 산나물뿌리
돌바위에 듬뿍올려 송송송 채썰어 가지런히 놓은후
산새소리 모로꺽어 퍼렇게 불을지펴 숲을 데운다.

새벽녘 산란한 시뻘건 태양 한알을 과감히 깨뜨려 고명으로 올리고
뒷곁에 맛나게 익은 노을고추장
한숟갈 푹 떠서 탁탁탁 털어넣어 숲을 비빈다.

이른아침 짜놓은 이슬기름 두어방울....
그렇게 쓱쓱쓱 숲을 비빈다.
오늘도 밥짓는 연기가 하얗게 피어오른다.

 

 

 

 

[동상] 주산지(注山池)에서 / 오영록

스님들이 목욕탕에 왔다동안거를 끝냈을 뿐인데 누대 헤어졌다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결가부좌를 틀고 앉아 등이라도 서로 밀어주는지통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후드득 빗방울 떨어지니 어 시원타, 어 시원타노승의 몸에서 쏟아지는 경전소리직박구리만 화들짝 난다햇빛으로 덥힌 온탕산그늘로 식힌 냉탕을 오가는 저 승가(僧伽)   바람 불 때마다 서로 머리를 밀어주는 저 모습아침이면 잠시 서산으로 바람 탁발(托鉢) 갔다가저녁이면 다시 동산에 올라 설법으로 몸을 말리는 그림자들때가 없으니 영혼을 씻고 있다저 속살을 슬쩍 훔쳐 본 적 있는데얼마나 씻고 있었는지 백옥보다 더 흰 성체(性體)만지면 뽀드득 소름 돋을 것 같은저렇게 천 년을 씻었으니 어찌 아니겠는가!얼마나 더 씻고 씻어야 혼까지 깨끗하게 만들 수 있는지유피(楡皮)가 되는지비 오는 날은 그 비 다 맞으며평등의 수면을 바둑판 삼아 똑똑 돌을 놓고 있다꽁꽁 얼어붙어 돌을 놓을 수 없으면무릎 착 꿇고 동안거에 들어묵언 수행 하겠지

 

 

 

 

 

[장려] 숲으로의 동행 / 장은선

봉분옆에 나란히 앉은 산꿩 한쌍
수풀을 박차오르며 우렁차게 울부짖는다
서로 짝을 잃지 않으려고
팽팽한 공처럼 울음통에서 하늘로 튕겨올리는 소리다
장끼가 날렵한 날개짓으로 해독할 수 없는
상형문자를 빈하늘에 그리고 가면
까투리가 이미 읽었다는 듯이
오르락 내리락 날개죽지로 지우고 간다
하늘은 사방 팔방이 길이고 자유인데
마주보며 양날개짓하는 곡예비행은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숲길마져 지우는
아름다운 동행이다
한톨의 양식을 포착한 까투리가
지상으로 곤두박질치자
장끼는 파수병처럼 경계를 늦추지 않아
그들의 사랑은 유희를 초월한 참생명이다
그들의 내밀한 언어인 오색꽁지로
영혼이 무르익은 사랑법이 펼쳐지면
청정한 솔숲도 화음으로 붉게 달아오르고
가을 저녁 노부부 비틀거리고 부축하며
숲속으로 산책하는 뒷모습이
멀리서보니 산꿩 한쌍을 닮았다

 

 

 

 

 

 

[장려] 여름 숲 / 정준호

나무 둥치에 구멍을 뚫는 딱따구리
순한 뱃속으로 탁란을 하고 있다
또 하나의 생명이 나무로 옮겨간다

기생寄生의 소리가 여름 숲을 흔든다
품 넓은 나무는 파문을 안으로 새겨 넣고 있다
뼈를 키우는 소리에 골몰하는 동안
계절은 나무에게 날개를 달아주고 날아가라 한다

커다란 구멍을 몸속에 품고
울렁거리는 구역질을 푸르게 토해내는
나도 저 나무에서 태어나 걸음마를 배우고 자랐다
수액을 먹고 나뭇가지 방향으로
솟구치는 법을 배우고 날갯짓을 습득했다
부력이 생겨나고 비행을 할 때 까지
도움닫기를 해주고 새 생명을 저 품에서 키워내고 있다

옹이가 생긴 나무는 푸른 잎을 흔들어 날려 보낸다
이따금씩 날아와 앉았다 가는 날개는
공중에 주소를 두고 있는데
아직도 소리를 쫒아 잔가지 뻗는 나무에선 젖 냄새가 난다

여름 숲은 새의 뼈가 자라는 계절
기생하기 좋은 계절엔 날아가는 것들도 많지만
탁란의 그림자가 남아있는 숲으로
낯익은 발걸음들이 돌아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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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공원 옆에 산다는 것은 / 조담우

 

해가 읽고 있는 나무가 두꺼워 보인다
우두커니 열려 있는 낱장에 녹색 글자가 반짝반짝
나무가 해에게 자기를 읽어 주고 있다
느낌과 시각 사이에 착각 비스듬히 삼 층에 내가 있다

해가 내게 시각을 주면 나무가 착각을 녹색 언어로 바꾼다
표의문자를 한글로 받아 쓸 때는 소리 변환을 한다
나무의 목소리가 스것스것 한다
내 귀는 오역한 적이 있긴 하다
물끄러미 서 있는 집중을 눈치 채고 해의 목소리와
따끔따끔한 눈초리까지 들려준다

소리를 본다는 것은 나무가 해를 듣는 것과 같다
나는 귀를 보고 귀는 나무를 듣는다
분명한 제 뜻으로 읽어 주지 않은 건 나무만이 아니다
활짝 열려 있는 원형 광장이 해와 나무를 듣고 있다

스스로 문자가 된 꽃이 광장의 귀를 당기는 느낌과
내가 듣는 음역 가운데 시각과 착각이 엉켜 있다
공원 옆에 산다는 것은 내가 나무를 듣고 있을 때
해가 나를 읽는다는 것

제대로 듣고 싶은 잠자리가 맴돈다
녹색 언어를 가장 잘 이해하는 오후가 광장을 밑줄 긋자
잔디가 촘촘한 귀를 낮추고 시야 끝까지 받아 적는다

꼼꼼히 듣고 있는 내 눈을 나무가 다시 읽는다.    

 

 

 

 

 

[은상] 한 장의 숲 / 남태현

 

바람이 숙면에 들어갈 때 숲은 한 폭의 잘 그려진 동양화다
흔들림 없는 나무에서 소리가 빠져나간 새들은 지저귀고
걸음을 세운 사람들 나무에 기대어 그늘을 발라먹고 있다
봄은 아직 여물지 않았는데 여름으로 걸어 들어가는 뒷모습이
드라이플라워처럼 말라 있다
잘 찍어낸 필름 한 통이 비 개인 하늘을 말아놓고
숨바꼭질하는 자작나무 잎에서 뭉개진 안개가 풀어진다
내일까지 물고 온 까치의 날개에서 구부러지는 숲의 배색
햇빛이 뿌려놓은 조각으로 퍼즐을 맞추고
외출하는 아내 닮은 꽃들에게 입맞춤하는 벌 나비
숲은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잘 차려진 식탁으로 변신한다
막 샤워를 마친 풀잎들이 옷 벗은 채 체면도 없다
푸른 살갗을 다 드러내 놓고도 저리 당당할 수 있는 나무
숲의 껍질을 발라낼 때마다 시큼한 단물로 맛있게 물든다
나무 사이로 바람이 걸어간 흔적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스스럼 없이 어깨동무하고 있는 풀잎 위에 잠깐 눈 붙이고 간
쪽잠이 풀어지면 몸을 웅크리고 있던 꽃들은 알을 깨고 부화한다
꽃들이 손가락 걸고 향기 풀어놓은 오솔길
사람들 발자국 나이테처럼 흙 속에 새겨 넣는다
나무마다 복사를 하는 그림자가 살을 찌우는
숲은 바람에 젖어도 한 폭 잘 다듬어진 절경은 젖지 않는다.

 

 

 

 

[장려] 수화 / 홍성남

 

나무들의 수화를 몸으로 읽고 있다
유리창 너머로 흔들리는 벚꽃이 소리 지를 때
성대의 울림통을 뚫고
혼신을 다해 메시지가 타전된다
함성에 나뭇가지가 기우뚱 중심을 놓치고
차가운 나무에서 보드라운 소리가 떨어진다
가지는 부러져도 나무의 말은 부러지지 않아
거친 껍질까지 환하게 부드러워진다
깊숙이 묻어둔 뿌리의 야심
하지 못했던 부드러운 말도 꺼내 놓는다
나는 가만히 속말로 대답한다
누구에게 전하고 싶어 속내가 굴러가는지
나무의 심장은 단단하게
말의 어깨를 받쳐 주었다
햇살 아래 고개를 갸웃갸웃 흔들며
달콤한 수다가 혈관을 타고 휘어진 가지 끝에서
끝으로 소문이 흘러 숲 속으로 뻗는다
나무 뒤에 응급실이 있다
다급한 소리가 유리창을 두드릴 때
나무의 수화는 그저 그뿐
더는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침묵을 삼키고 응축한 나무 나이테
말을 종일 굶은 나무 입속에 혓바늘이 돋았다 

 

 

 

 

[장려] 밤나무의 추억 / 박명서

-효드림 요양원에서

 


요양원에 계신 아버지를 찾아뵈었다.
간병인이 따로 있단 핑계로
한 달여 만에 들른 효드림 요양원
목초향 진동하는 소망실 한쪽 침대에서
아버진 아직 혼곤한 잠을 주무시고 계셨다.
아드님 오셨네요. 어르신 눈떠보셔요.
원장이 아버지의 눈꺼풀을 뒤집으며
침대 크랭크를 돌려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아부지 저 왔어요. 저 누구예요?
치매기로 못 알아볼 줄 알면서도
나는 어쩐지 옹색한 인사로
검버섯 핀 아버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간신히 눈을 뜨신 아버지
물기 없는 눈망울을 껌벅이며
닭발같은 손가락으로 내 손을 잡으셨다.


아부지, 산책시켜 드릴게요.
아내와 겨우 힘을 합해서
아버지를 휠체어에 싣고 마당으로 나갔다.
둥그렇게 둘쳐진 펜스 가운데
내 고향집 뒤란에 서 있는 것과 똑같이 생긴
밑동이 움푹 파인 밤나무가 보였다.
알밤은 이미 다 떨어진 지 오래
빈 쭉정이들만 듬성듬성 매달려 있었다.
아부지, 저 나무 무슨 나문지 아세요?
기억을 더듬게 해드리려고
헤벌어진 밤송이 하나 주워들고 오는 동안
어느새 아버지는 담요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계셨다.
밖에 나오니 좋으세요, 아버님?
아내가 의식이 돌아왔을 때 드려야한다며
요플레를 따 한 점 입에 넣어드렸다.


문득 아버지의 레파토리가 생각났다.
밤송이 하나에 밤 하나가 꽉 들어차 있어
내가 아들이라 예언했다던 태몽 이야기
서른아홉 늦은 나이에 첫 아들 본 기쁨으로
당신께서 직접 탯줄을 끊으셨다지.
대문이 없어 문지방에 금줄을 달았다가
동네사람 보라고 빨랫대에 높게 매달았다지.
중학교 올라가기 전 해 가을
난파선처럼 기울어 있는 양철지붕 위로
딱 따닥 딱 딱 알밤 떨어질 때
새벽 이부자리 속에서 나눈 대화도 떠올랐다.
아부지, 알밤은 왜 떨어져요?
이젠 컸으니 너 혼자 살아라, 하고 내보내는 거야.
저는 이담에도 아부지랑 살래요.
아버진 날 보고 효자라며 와락 껴안아주셨었지.


아버지의 무릎밑을 떠난 지 어언 40여 년
나는 늦게서야 비로소 알았노라.
가시 세워 독기 품으며
지붕같은 사랑으로 품어 안은 자식
이제 그만 떨어져 가거라
힘껏 밖으로 떼밀쳐내고는
해산한 몸으로 땅바닥에 나자빠진
푸석해진 밤송이가 바로 아버지였다는 것을.
아버지 춥지 않으세요?
나는 기저귀가 젖었는지 확인하려고
아버지의 아랫도리 속으로 손을 넣었다.
풀잠자리 날개같은 엷은 살갗이 감촉된 순간
갑자기 부끄러움이 밀려와
요양원 들어올 때 한 직원으로부터 받은
주머니 속 ‘장의(葬儀) 대행(代行)’ 전단지를
남 몰래 찢어버리고 말았다.

 

 

 

 

[장려] 푸른 나무의 유래 / 김민철

 

도롱이 옷을 입은 땅꾼이
비를 맞으며 바위 위에 앉는다
매미 한 마리가 풀냄새가 나는
땅꾼의 도롱이에 붙어
서글프게 울다가 잠든다
땅꾼은 그 자리를 뜨지 못하고
비가 그치고 매미가 잠에서 깨기 전까지
산제비 한 마리가 진흙을 씹고 와
땅꾼 어깨에 둥지를 트기 시작한다
단꿈을 꾼 것인지 모르겠는데
알이 꿈틀거리는 느낌과
껍질이 단단해지는 소리가
귓속으로 간지럽게 들어온다
어린 새와 매미가
아무것도 모른 채 터를 잡았으니
땅꾼은 이참에
나무가 되기로 마음먹는다
항상 작은 굴만 보는 버릇으로
흙에 뿌리를 내리는 일은 쉬웠고
햇빛을 지도로 사용했으니
하늘을 바라봐도 눈부시지 않는다
우두커니 나무가 된 땅꾼의
가지마다 맺힌 솔방울이
허물을 막 벗으려 온몸을
힘껏 뒤트는 방울뱀의 머리에 떨어지니
혓바닥을 잘못 깨문 방울뱀은
그 자리에서 비옥한 거름이 되었으므로
땅꾼은 환절기에도
전염병을 이겨내는 나무로 컸고
도롱이 옷도 늘 푸른빛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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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굴참나무를 읽다 / 김희현


옹이와 한 몸으로 사는 나무에선
묵은 종이 냄새가 난다
찢어진 쪽수처럼
상처는 나무의 이력을 늘려간다
청설모는 굴참나무의 교정사
밑줄 긋듯 나무를타고 오르며 상수리를 정독하고
솎아 낸 탈자들로 새끼를 키운다
새순에선 갓 출판 된 신간처럼 풋내가 난다
다람쥐의 건망증이 놓친 알맹이들
가벼운 것은 봄바람에 속을 드러내고
묵직한 것들만 싹을 틔운다
바람이 할퀸 나무는 더 단단하게 계절을 복사하고
폭우를 뚫고 나온 풋열매로 빼곡하다
금새 꺽이고 삭제되는 비문 같은 잔가지들
벌레가 지워버린 떡잎,
밝은 책 넘기듯 빛바랜 굴참나무를 펼치면
잘 여문 행간들이 쏟아진다
해를 거듭하며 고서古書가 되어가는
굴참나무에선
옆구리에 끼고 다녀 익숙한 문장처럼
오래된 향기가 난다
움푹 팬 밑동에 몰려든 풍뎅이들
수액 마시기 전
껍질에 숨은 숙성된 내용을 음미한다

 

 

[은상] 나무의 경전 / 윤신애

 

달이 부풀 때마다 새들이 내려와 발자국을 찍어 놓았다.
새들이 무거운 신발을 벗어놓고 나무에 깃들면
밤새 널어놓고 간 지문을 떠왔다.
산의 어깨를 짚고 내려와 시키지 않아도
선문답 같은 낱글자들을 숲에 그려놓는 수고에 새들은 인색하지 않았다.
고르게 지문을 남기는 버릇 때문이었다.
해질녘까지 교대로 산의 정수리에 다가가 나무를 끓일
제대로 된 불을 얻어오려다가 날개를 태워먹기도 했는데,
촘촘한 자간에 그을린 깃털이 남아 있기도 했다.
물비린내가 산을 감싼 날은 새들이 먼저
수평선까지 다녀온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무는 순서를 기다렸다가 소금물로 얼굴을 씻고
맨 나중에 온 새소리도 씻었다.
대숲을 지나는 바람을 불러다가 행간과 여백으로 통과시켜
가지마다 더도 덜도 없이 23행 14글자로 나뭇잎들이 경작되었다.
내장을 남김없이 비워야 깊이 울리는 목어(木魚)가
산을 흔들어 깨울 때 팔만 개의 경판이 숲을 뒤덮고 있었다.
닥나무를 헹궈 놓은 한지 위에
산이 스스로 진하게 고였다고 생각할 때마다
새의 족적으로 천천히 번졌다.

 

 

 

 

[동상] 나무 한 권 / 유택상

 

붉은점모시나비기린초 온종일 풀잎과 타전하고있다
은방울꽃 방울방울 종을 울린다
이슬이 눈물을 떨군다
개울물에 아침을 씻는다
까막닥따구리가 갈참나무에 앉아
딱다그르르 음율을 높인다
미나리아제비꽃이 하루에도 몇 번씩 자전을 읽는다
멧새의 울음이 계곡물 사이로 들린다
바람이 애기똥풀 질경이의 꽃들을 펼쳐 놓는다
푸름 잎들이 음색을 낸다
자작나무가 나뭇잎을 흔든다
숲길은 꽃들의 언어로 기록된 책이다
삭정이로 불 지피면 잉걸불에 단감나무 붉은 등불을 켠다
산에 들면 알록달록 옷 입은 호랑나비떼 
그러면 호명되기를 기다리는 이름들 
행간이 울퉁불퉁한 마디마디에
길 위에서 사색을 꿈을 꾼다
산을 오르는 동안 
새들이 개울물에 밑줄을 긋고 햇볕이 다녀간 
굴참나무 오리나무에 귀가 먹먹하다
초록이 무르익어 갈 무렵에는 
나무가 읽어 내려간 문장이 새롭다
새의 주소도 꽃잎의 향기도 게절속에서 
열매를 키운다
그럼 어디쯤일까
구름을 몰고 온 눈동자에 숲의 나날을 읽는다
풀잎과 나무사이 생의 어혈들 족적으로 가슴 시리다
햇볕이 내리자 앉은뱅이꽃 꽃잎 하나
툭, 떨군다

 

 

[동상] 느티나무 그늘 

지금은 매미소리가 한창입니다
나무 밑으로
오이 호박 가지 고추 옥수수 토마토 참외 주렁주렁 뒹글고
구철초 상사화 백일홍 갖가지 꽃으로 고봉으로 잔치를 합니다
산새들이 한가롭게 산을 넘고
땅은 무성해지는 동안 아이들은 눈망울로 자벌레의 눈물을 세어보고
어머니는 햇살을 풀어 물레를 돌리고 날마다 낡은 옷을 꿰멘 자리
그늘 아래 서면 우물가에서도 
반질반질 삶은 되살아나 언 땅을 녹이고 있습니다.
저무는 길 끝으로 창을 내고
시린 길 끝으로 건초처럼 메말라가던 물살처럼 생이 무거웠던 가슴들
그늘은 달빛에 젖어 노을처럼 아름다운 가을을 풀어 놓으셨습니다
내 유년 시절 시골 버스는 깊은 골짜기를 몇 굽이씩 휘돌아 나오고
해맑은 아이들은 일상이나 고전 등에서 수집해 온 초목에 촉수를 세우고
어느노래라도 불러서 신명나게 춤을 추고나면
질긴 목숨하나 옷소메에 눈물이 고여 있습니다

이젠, 가래질 하던 이미소도 쇠스랑도 탈곡기도 도리깨도 삽도 잠잠합니다.
다만 굽은 등으로 일궈 온 들깨 밭이 동내 어귀 들길마다 가득합니다

느티나무 그늘아래 서면 
산과 숲이 나무와 나무가 꽃과 꽃이 진열장입니다
매미울음이 박혀 있는 자리 폭염이 고요하게 잔잔한 무렵
부추꽃이 하얗게 피어습니다

 

 

 

 

[동상] 나무를 태우는 시간 / 한교만

 

마당에 나무가 누워있습니다
이십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지난 태풍에 일생이 베어진 뒷산 느티나무입니다
아버지가 도끼로 몇 차례 토막을 낸
기울기가 사라져 편안해 보이는 자세군요

어머니가 아궁이에 땔감으로 밀어 넣습니다
느티나무가 타닥타닥, 타들어갑니다
타닥거리며 몸을 뒤트는 의성어는
제 목소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고 있을까요

저녁연기는 오늘 밤 굴뚝을 비집고
얼마간의 무게로 허공을 밀어 올리겠지요
방이 데워지고 가마솥이 끓을 동안
어머니는 저고리 안의 땀을 훔치며
나무로부터 얼마쯤의 무게를 덜어 냈을까요
나무는 얼마나 가벼워 졌을까요

세 시간 뒤 나무 한 채가 사라졌군요
2킬로그램의 숯과 숯 주변을 떠나지 않는 20그램 남짓한 재
30그램이 조금 넘는 꾸불꾸불한 저녁연기와
5킬로그램 쯤 되는 가마솥의 열기
어머니 젖무덤 사이로 흘러내리던 땀 20그램을 남긴 채
나무는 흩어진 제 무게를 참아냅니다

저녁 내내 부엌 주변을 서성대다
20그램의 날갯짓으로 퍼덕거리는 새 한 마리는
느티나무에 둥지를 틀었던 후투티일까요

버릴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나무들의 타고남은 영혼의 무게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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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선] 나무들의 만찬 / 김봉래

 

햇볕을 맛있게 먹는 오후

숲 속이 온통 진수성찬이에요

한쪽에 잘 익은 그늘이 늘어져 있어요

낮부터 눈독들이던 장승부부가

슬금슬금 다가와 그늘 한 귀퉁이를 물고 있네요

저기 낮은 곳엔 화이트 와인이 졸졸 흘러요

손님으로 온 물잠자리 한 마리가

너무 마셨는지 비틀거리며 날아가요

오늘 음식 가운데 샐러드는 단연 최고에요

앞산 단풍에다 구름 드레싱으로 멋을 냈군요

쳐다보기만 해도 배가 불러요

거기에 혼성 콰르텟의 새소리까지 들려요

신난 바람이 살랑살랑 춤추자

점잖던 소나무도 따악! 하고 추임새를 넣고요

자작나무는 호들갑스럽게 박수를 쳐요

흥겨운 이곳과 달리 아늑한 양지쪽에는

나비들이 굽은 등나무와 함께 쉬고 있네요

아마 피곤하기도 할 거에요

오전부터 화려하게 차려입고

내내 손님들 안내를 했으니까요

갑자기 한 무리의 아이들이 나타나

나무의 팔에 매달리는군요

앗, 조심하세요! 햇볕이 쏟아질 수 있어요

저들끼리의 장난에 까르륵 터지는 동심,

다람쥐가 꾸러기들을 이끌고 어디론가 가네요

이제 식사를 마무리 해야겠어요

역시 최고의 반찬은 즐거움이에요

포만의 기쁨에 젖은 나무들,

이들이 올가을 휴양림 축제에

모두를 초대한대요. 가실래요?

 

 

 

[입선] 개우지를 그리며 / 강인호

  

송골재 너머 솔밭 개우지가 살아

밤길 혼자 걷는 사내를 따라오며

나뭇가지 꺾어던지며 장난을 걸고

동네 강아지를 잡아가기도 한다고

 

사내 셋이 아니면 밤길 그 산길을

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던 것인데

그래도 마음 둔 동네처녀 집 앞에

산토끼를 잡아다 놓기도 했다던데

 

언제부터인가 개우지 사라진 것이

솔밭 대신 인삼밭 생긴 그때인지

오솔길 흙길 포장된 그 즈음인지

그 처녀 도회지로 시집 간 후인지

 

지금은 개우지 오지 않는 송골재

산돼지 가족 내려와 밭을 헤집고

노루며 고라니가 새끼들 데리고

산책 다녀간 발자국만 남아 있다

 

*** 개호주(호랑이 새끼)를 우리 동네 어르신들께선 개우지라 부르신다

 

 

 

[입선] 주산지에서 / 박재선

  

어느 산기슭에 다다르자

지친 빗방울은

조용히 몸을 뉘기로 마음먹었다

오랜 기다림

품이 그리웠던 것이다

말없이 파고들고만 싶었을 것이다

속삭임 없이 뒤척임 없이

 

매캐한 하늘 떠도는 동안

먹구름 사이로 들었던 것이다

어데서 새들이 지저귀며 전하는 소리를

물안개 전설처럼 떠도는 호수 그 곳

허벅지까지 물 차오른 왕버들 할아버지들

귀 담그고 듣는 오래된 울림들에 대하여

귓바퀴 마다 기어 나온 달팽이들이

느릿느릿 끌고 가는 바위 같은 세월들에 대하여

쭈그리고 앉은 조약돌이 사각사각

신발 밑에서 몸을 부비는 소리들에 대하여

숲 속 이파리 사이 내려앉아

찰방이며 떠다니는 허공의 햇살들에 대하여

물결이 일면 온 하늘이 흔들리는

단 한 번도 마른 적 없는 수심에 대하여

 

빗방울은

어딘가 그리운 호수를 만나고 싶었다

굽이굽이 흘러 가고 싶었다

허나 낯선 산기슭, 아무렇게나 누워버렸다

눈을 감아버렸다

깊은 잠이 들어버렸다

 

어느 결에 산속 숨어든 시내를 따라

이미 꿈결처럼 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이미 귓가에 전설처럼 나지막이

왕버들에 앉은 새들이 지저귀는지도 모르고

이미 오솔길에 달팽이와 조약돌과 햇살이

모여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고

 

 

 

[입선] 겨울 숲길에 서 있었다 / 백승학

 

시련을 모르는 채 그저 뛰놀던 날의

뒷산 기슭에는 잎이 지고 있었으나

햇살들은 언제든지 추운 틈새의 끝자락에서 더욱 펄럭이거나

갈참나무 베어진 곳마다 더욱 쌓이다가

밤이 오고 나서도 여운으로 남아

길고 어두운 산허리를 하얗게 색칠하곤 하였다

모든 것에 눈부시던 강둑길 옆으로

산 그림자를 밟으며 돌아오던 그 저녁엔

살아갈 날들도 오늘처럼

눈부시지 싶었다

어리던 날에

겨울 숲길에 서 있었다

 

시련을 만났어도 그리 춥지 않던 날의

앞산 비탈에는 눈이 녹고 있었으나

바람들은 어쩐 일인지 가파른 골목 모서리를 더욱 적시거나

콘크리트 떨어져 나간 자리마다 더욱 머무르다가

시린 가슴을 오래도록 쓸어내리곤 하였다

그날도 우리들의 공터에는

빗물처럼 튀어 오르는 햇살들이 가득하였겠으나

사람들은 저마다 두고 온 산내음만

떠올리지 싶었다

힘겨운 날에

겨울 숲길에 서 있었다

 

시련이 지나고 난 후 바람마저 저물던 날의

먼 산 언덕에는 새가 날고 있었으나

마을 버스들이 먼 곳에서 돌아와

하나 둘 정류장에 멈춰 설 때

들녘이 아니었을 정류장이 어디겠으며

언 땅을 흔들던 기적 소리처럼

햇살 한 자락에도 가슴 두근대지 않을 기억이 어디 있으랴

좁은 골목 길 마다 발자국 소리 설레고

울음 같은 미소들이 가득하지 싶었다

저무는 날에

겨울 숲길에 서 있었다

 

 

 

[입선] 나무는 동성동본 이다 / 서상규

 

산의 혈맥을 받은 나무들,

뿌리와 뿌리가 혈통을 맺고

가문의 뼈대로 줄기를 일으킨다

육친이 인정을 나누는 가슴에

초록 잎맥이 새긴 지문으로

새날의 언약을 물들인다

맑게 마음결을 닦은 선한 눈매로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며

가지와 가지를 뻗는다

거센 비바람이 휘몰아칠 때

한 방향으로 흔들리며

올곧은 정신 자세를 가다듬는다

햇살 기운에 잎을 펼치고

물관에 엮인 근육으로 일어서서

태풍에 상처 입은 혈육을 품는다

아낌없이 베푸는 더운 사랑으로

나이테에 감긴 길을 풀어

생명의 숨길을 열어준다

가파른 능선에 터 잡은 가계에서

심장을 맞댄 파동으로

꽃을 피우고 열매를 익힌다

산이 펼친 푸른 호적등본에서

일가를 이룬 동성동본으로

일평생 동고동락하는 나무들,

마음을 닫은 무정한 사람 세상에

아름다운 가족사의 교훈으로

살림의 무성한 숲을 가꾼다

 

 

 

[입선] 떡갈나무 자서전 / 유택상

  

월악산 송계계곡 맑은 물에 등살 잡히자

구비구비 물줄기에 하늘호수 열린다

무장무장 터질듯 올라 온 노루귀꽃 애기똥풀 떡갈나무 그늘에서 푸르름으로 넘실거린다

돌멩이에 민낯을 대고 또박또박 글을 읽는다

이곳에서는 물소리도 산새 소리도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던 어머니에게 등불이 되어주는가

 

여름이 박힌 나뭇잎에서 작렬하는 태양의 연서를 적는다

가뿐 숨 몰아쉬며 올라 온 길

연두속으로 꽃물 번지자 손등을 타고 흐르던 땀이

행간을 지나 온 길 마디마디에 글자로 쓰여진다

오롯이 손바닥을 펴 물 한 모금 떠 마신다

첨버덩, 첨버덩, 산천어들이 물속을 유영한다

산들바람에 툭툭 나뭇잎이 춤을 춘다

수면 위에 떡갈잎의 호흡을 느낀다

내가 매일 읽는 국어사전의 목차마다 얼마나

많이 마음을 비워야 자연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 수 있을까

책을 펴서 월악의 맑은 물을 담아 자서전을 쓴다

 

내 마음에 떡갈나무의 시원한 바람과 물소리에

나무들의 거처를 만들고

무장무장 터질듯 부풀어 오른 잠을 청해본다

 

 

 

[입선] 야생화 자연 학습장에서 / 윤형돈

 

오늘 저녁 이 아담한 들꽃 풀 섶에

야생의 쓸쓸함이 내린다.

산기슭에 머무는 고적함이

어둑한 산 그림자를 데리고 올 때는

지나온 아랫마을 보다 더 핍진한

음영과 색조를 띤다.

나는 잠시 무료함에 젖어보지만

이 외로운 심사의 공간에

내 가난한 시의 영토가 있다

꽃 범의 꼬리가 피뢰침을 땅에 박고

절정의 꽃잎으로 흔들린다.

어느 날 세속의 정원에 강림하여

턱없이 웃자란 부처 꽃도

그 묘연함을 감추기 위한 몸짓으로

곁에 억새풀과 키 재기를 한다.

두메부추에게도 영혼이 있을까

갓 피어나 샛노란 해바라기의

내면 구조에 결박당한 소우주의

순수 혼이 그렇다고 말한다.

여린 숨결만이 소곤대는 코스모스

진영에서 알 수 없는 한 떼거리의

연민이 형형색색 밀려오는 시간.

 

 

 

[입선] 겨울 수묵화 / 최미루

  

화선지를 펼쳐놓고 그림을 그린다

산은 산대로 나무는 나무대로 색의 은유법은

한 폭의 겨울 그림을 위한 마련이었다는 듯

기꺼이 비워내며 차가운 백지가 된다

흑과 백의 운치를 알고 있는 겨울은

익숙한 필치로 산의 농담을 처리하고

가늘게 뻗은 나무에 점법(點法)의 눈을 뿌린다

부드러운 흰 눈이 산허리를 돌아

마을 어귀까지 내려오는 동안 엷게 번진 먹물은

숲에 잔잔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무거운 음영이 낮게 내려앉은 골짜기에

얼음벽 사이 흐르는 물소리를 첨가하니

뒷걸음치던 구름이 종이의 여백을 마저 메운다

바람이 지나가며 미심쩍은 부분에 마지막

마른 붓질을 한다

붓을 쥔 손에 한껏 힘이 들어갔는지

자작나무의 눈가루가 떨어지며 남은 햇살을 끌어당긴다

잠시 빛으로 채색을 시도해보다 이내 거두어들이는 바람

겨울 그림은 흑백의 궤적을 쫓아야 제맛이라는 듯

눈꺼풀 사이 굴뚝 연기의 춤사위를

가는 세필로 마무리하고 있다

 

 

 

[입선] 숲 / 최선옥

 

바람이 부위별로 봄을 저미는 창밖

하늘하늘 비늘이 날린다

민감한 바깥의 절기로 짓는

꽃그늘이 비릿하다

가문 길로 소금단지를 이고 나온 햇살이 파닥거리는 그늘을 절이고

나무들이 푸른 꽁지를 흔든다

아가미 밖으로 쿨럭,

터져 나오는 이파리들

 

나무들의 나이테는

어느 차가운 물밑의 지도를 헤엄쳐 나온

파란 등고선

파도를 따라 굽은 파문이다

 

부푼 봄 한철로 살아본 것들은 안다

시간의 비린 칼질이 이미 보이지 않는 몸의 결을 따라 지니고 있음을

 

왕성한 식욕이 가시를 발라내 층층 살을 떼어낸다

서서히 공기가 빠지듯 저를 내려놓는 꽃들

게으름은 길고 봄은 짧다

시간의 수로를 거슬러 오르는

미처 지우지 못한 어떤 마음이 훅, 비린내를 풍긴다

가장 낮은 곳으로 허물어지는

짜디짠 잠들이다

앙상한 뼈들을 숨기기 위해

푸른 살집을 늘리는 나무들이 자꾸만 아가미를 부풀린다

 

파도 출렁이는 숲

나는 나무들이 잘 헤엄칠 수 있도록 유리창을 말갛게 닦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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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 나무의 내력 / 서상규

  

숲에 꽂힌 책 한 권을 펼친다

자음과 모음의 광합성으로

푸른 음절을 엮어 잎맥을 틔운 나무에서

어머니의 일대기를 읽는다

가문 살림에 발톱이 닳도록 뻗어 내린

뿌리에서 길어 올린 샘물체를

꽃잎의 입술로 흘려보낸다

나비가 날갯짓으로 넘긴 페이지에

꽃가루받이로 맺은 풋과일,

어린 것을 배곯지 않게 하려고

글씨를 또박또박 파종한 가파른 밭고랑을

잎새의 호미질로 김을 맨다

굵은 땀을 발효된 거름으로 쏟으며

행간의 땅기운을 붇돋는다

온종일 노역에 무릎 저린 각운으로

늦은 저녁밥을 짓는다

식구들이 소복한 밥을 수저질 할 때

밥알이 둥둥 뜬 멀건 숭늉으로

나이테 속 공복을 달랜다

나무가 써나가는 고된 문맥에서

과일이 내재율로 과육을 부풀린다

생의 단락마다 옹이 박힌 관절로

나뭇가지가 단풍든 색연필로 밑줄을 그은

허공에 잘 영근 열매가 매달린다

마른 몸에 등줄기 굽은 어머니,

충만한 결실로 성장한 혈육을

산 너머 큰 세상으로 내보낸다

냉골인 빈방에 홀로 남겨진 마무의

낡은 표지를 가슴 시리게 닫는다

 

 

 

[동상] 할머니 나무 / 정미경

 

제주 어리목 산벚나무

단풍나무 어린 것들을 제 팔뚝에 키우고 있다

늙은 줄기 붙잡고 사는 어린것들은

산벚나무를 어미라 여길까

바람이 낳은 씨앗을 받아내 싹을 틔우고

빈 젖 물려 키우는 늙은 유모 산벚나무

높은 줄기 위에 목말 태우고 둥개둥개 얼러주며

어린 단풍 두 그루를 키운다

새소리 한 술, 발아래 산그늘도 한 젓가락

오물오물 받아먹고 자란다

고사리손이 자꾸만 빈 젖을 더듬는다

젖이 돌지 않는 할망나무

지나가는 먹구름 끌어다 치대

묽은 미음 쒀 먹이는 순간

후두두 빗방울 쏟아진다

새들마저 날아간 빈 가지

어린 단풍의 시린 발등을 이끼로 덮어주며

산벚나무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그늘마저 환해지는 봄날

바람에 장단 맞춰 춤추는 산벚꽃 속에서

노랫소리 들린다

한몸이 되어버린 저 단풍나무에도

다음 봄엔, 하얀 산벚꽃 피어날까

 

숲은 어미 없이도 그렇게 대를 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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