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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없음

 

 

 

[심사평] 당선작을 선정하지 못하는 아쉬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신라문학상은 올해 제32회에도 그동안의 권위와 사랑에 힘입어 전국에서 수많은 응모자가 쇄도했다. 운영위원회의 엄격한 심사절차와 방법에 따라서 심사위원들이 1차 예비심사를 거치면서 합의 토론을 진행한 후에 당선작품을 선정하는 과정를 가졌다.

 

심사위원들은 작품의 소재의 상황설정과 전개과정에서 창출한 주제가 참신한 언어의 융합과 동시에 적절한 의미성을 함축하고 있는가에 중점을 두고 장시간의 독회를 계속한 결과 1차적으로 본심에서 논의할 6편의 작품을 선별하여 다시 심층적으로 논의하였다.

 

신라문학대상이라는 역사성에 비추어 작품의 수준이 언어의 함축과 주제의 선명성을 감도 높게 그 역량을 검토한 결과 모든 작품들이 수준 이상의 창작력을 발휘하였다는 의견일치를 보았으나 아쉽게도 최종 당선작은 선정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남겼다.

 

응모작 모든 작품들은 주최측에서 요구하는 신라문화와 관련된 작품의 우대라는 지침에 부응하듯이 신라의 역사를 반추하면서 소재와 주제를 투영하고 시적으로 형상화하였다는 평가였다.

 

그러나 응모자들이 응모요강의 절대성을 준수하지 않아서 약간의 흠결이 발생하여 결정적인 순위에서 제외되는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하는 아쉬움도 밝혀둔다. 이는 모든 응모자들이 앞으로는 응모요강이나 시상규정을 면밀하게 살펴서 정정당당하게 실력은 겨루어야 할 것이다.

 

시는 자신의 정서와 사유가 시 정신에 함축되어 인간적인 진실을 요구하는 최상의 가치관을 창출하는 숭고한 인생 작업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심사위원 : 정순영 김송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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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발굴되고 있다 / 방윤후


화석처럼 유적처럼


몇 억 년 후의 눈빛이 샅샅이 훑고 있다

캐릭터들이 화면에서 사실처럼 그려지듯

내 몸은 시뮬레이션 중


얼굴 주름처럼 점점 사라지고 자라목이 펴지면서

화소로 온전히 박동하고 있다

음악, 집, 자동차, 음식이 매장된

21세기 지층에서 표본으로 떠내는

누군가의 붓질,

멈칫멈칫 계통의 척추가 드러나고 있다


지구 대멸종 전후 살았던 일생이

조사되고 세밀히 분석되는 중이다


상아 없이 태어나는 코끼리,

긴 속눈썹의 태아들,

조류 곤충들의 돌출은 없었다


처음 수천 년의 변화가 백 년, 백 년이 십 년,

십 년이 불과 몇 달, 그 가속에서

추정되는 대량의 인류


편리는 문명을 채취하여 절멸로 이글리기도 한다

머리카락 혈흔 침만으로 분류되어

1,2초 후면 다운로드 된다

일망타진되는 진화는 얼마나 덧없는가


인공지능이 현생 생물을 대표할 때

완벽하게 복원되는 사람들이

무릎 꿇린 채 인터넷 공간에서

팝업창으로 분류되고 있다


발굴작업은 지쳐 간다

남은 생 끝까지 캐기에는 가치가 없는 걸까


생존이 도로 묻혀 지고 있다

나는 반쯤 드러났다 다시 덮인,

퇴화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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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행 / 오선주

 

경주에 오면 모든 것이 둥글어져라

토함산의 메아리처럼 둥글게 둥글게

떠오르는 태양을 안고

미소를 머금은 우리 님의 얼굴에도

연꽃송이 필락말락 떠오르는

고요한 아침이 묻혔어라

한 발 두 발 걸어와 한 몸뚱이로 둥글어져라

새싹 키우고 벌레 키우고

어머니가 된 고분처럼 둥글게 둥글게

굽은 능선 따라 모난 것도 둥글어져라

천 년 전 월지에 띄운 신라의 보름달도

경주에 오면

아라비아 호인(胡人)도 석굴암의 부처님도

굴렁쇠를 굴리던 아이처럼 아이가 되라

주령구를 돌리든 염주를 돌리든

쳇바퀴 도는 다람쥐의 삶,

회전문에 낀 옷자락도 닳고 닳아

세월이 가면 모든 것이 둥글어져라

그믐에서 보름까지 한 천 년쯤 더

윤회하는 달이 되어 둥글게 둥글게

항아리처럼 푸짐하게 만다라 되어

경주에 오면 고운 말만 아는 혀처럼

에밀레 에밀레, 슬픈 소리 아니라

천지를 진동하는 꽃향기로 피어나

신라인의 노래를 둥글게 둥글게,

오랜만에 그대, 경주에 오면

어디선가 한 번쯤 본 듯도 하게

천 년 전 임인 양 조금은 서먹하게

웃는, 그저 웃는

이름 모를 돌이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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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장殉葬의 얼굴 / 남시우

 

이 숲은 오래 전 깊은 바다 속에서 인양되었다

 

날것들의 비릿함이 녹슬어가는 어물전좌판 바닥을 기거나 심해를 헤엄치다 순장되어있던 갑각류 혹은, 지느러미들

 

마지막 파닥거림이 굳어 있는 진열된 어종들을 들여다보면 같은 이름으로 모여 있다 같은 종끼리 잡혀 온 순장이다

 

원산지 적힌 바다의 푯말이 짭짤한 식욕을 불러오고 살아서 누비던 바다가 또렷이 기록되어 있는 눈, 마지막으로 삼킨 파도가 목에 걸린 입은 다물지 못하고 열려있다

 

생의 어느 쪽이든 살아있는 값과 죽은 값은 있기 마련이고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 순례처럼 냄새나는 일별로 눈을 뜨고 있는 얼굴


물고기 한 마리 헤엄치지 못하는 골목에 수 백 마리의 그림자가 움직이고 있다

살아서 닿지 못한 간격을 좌판에서 좁히는 쌀쌀한 날씨에 절여진 한 쌍이다

 

비린 눈물 흘린 것들의 형태를 보고 싶다면 이 골목을 보라

 

시간을 벗고 일어서는 동안 의식의 마침표는 흐려진다


물고기 한 마리 헤엄치지 못하는 골목에 수 백 마리의 그림자가 움직이고 있다

 

지금껏 나는 순장된 것들이 제 살점에 절여둔 깊은 물살을 먹고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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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문진 피아노 / 윤상호


주막집에 걸친 청사초롱이
사풍沙風에 밀려 비틀거리고
홀로 떠있는 이방인의 불빛이
낙동강에 소슬히 아른거린다


삐거덕 삐거덕


물살에 젖은 여인의 흰 소매 자락을 타고서
사문진沙門津의 복사꽃이
발갛게 점점 타들어가고,


삐거덕 삐거덕


밤이슬에 젖은
검은 속눈썹을 타고서
청옥 속에 고인 먼 별찌들이
가물가물 흔들리는 돛대 등에 걸려
차마 저 산을 타고 넘지 못한다


구름이 달을 밀치니,
반反 쪼개진 흑칠한 절벽그림자 틈에
묻은 입술연지를 흰 소매 자락으로 훔치자
기이한 울음이 뱃머리를 잡고 축 늘어져
물길이 반半 걸음씩 총총 뒤따라오고


달빛이 물결에 요동을 치니
허공을 떠돌던 하얀 도깨비불이
검은 속눈썹 다섯가락 언저리에
글썽글썽 온全통 매달려서
잽싸게 아래위를 건너 타며 널을 뛴다


눈물이 달을 적시니,
높은 자리에 무릎 끓은 음音산한 기운이
구름 낀 하늘을 향해 열 손가락을 모으자
끝없이 떨어지는 빗방울이
도도한 역사의 강에 스며들어 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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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사지에서 / 김미순

 

운무에 싸인 산이 병풍이다
산 그림자 속에 포옥 담긴 동서탑
침묵으로서
신라천년의 역사
아픈 몸으로 들어선다
오랜 세기동안 눈과 비에 익숙하고
금당의 돌계단 태극문
사각인 턱 넓은 마음보인 형상속에 빠져들고
벌어진 틈 사이로 머리 푼 검은 연기가 나온다
알지 못한 애잔함, 뭔가를 위해
차가운 기운은 염주 한 알의 가르침이다
검은 살갗은 거칠어져 있고
나는 몇 바퀴 생사윤회 걸머지고
목이 저려 통증을 느낀다
발밑이 한참 그 곳에 붙어 있다
은밀한 내간체는 설화가 되고
네모난 구리 속 양각한 둘레를 만져보며
잠깐 묵념에 도달한다
중심을 잡아주는 상륜부 중추
촛대를 간직한 채
해풍 지나간 전각 틀, 녹물이 흐른다
울음이 올라오는 이 땅 위에 서서
어려운 퍼즐을 맞추며
바람이 불었던 물결 앞에서
용이 지나다니던 수로를 빠져 나온다

 

 

 

 

 

 


 


[심사평] 전설속의 싸인 운무(雲霧)같은 시

 

심사위원 세 사람은 각각 주워진 작품을 읽고 2편씩을 뽑아 앞에 내놓았다. 최종선에 올라온 6편의 작품을 놓고 당선작을 골라내는데 우리는 고심을 했다. 여기에서 다시 압축하여 하나를 당선작으로 미는데 골몰하다가 결국 ‘감은사지에서’를 당선작으로 밀게 되었다. 이 작품은 우선 시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시적인 뿌리를 역사적 사실에 두고 있었다. 역사적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시를 풀어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는 것에 심사위원들이 의견을 같이했다.

이 작품은 너무 완벽하지 않다는 것도 이 시의 장점이다. 사람이나 시작품에 있어서 너무 완벽하면 그 이상의 발전이 없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신라문학대상은 신인을 등단시키는 관문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래서 뒷맛이 개운치 않을지 모르나 앞으로의 시적 발전의 저의가 바닥에 깔려 있음을 발견하고 이것을 선택한 것이다. ‘은밀한 내간체는 설화가 되고’에서 이 시인의 능력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앞으로의 발전을 기대하면서 우리 시문단의 거목이 되길 기원하며 우선 축하의 눈짓을 보낸다.

 

심사위원: 문효치, 강희근, 정민호(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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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회 신라문학대상 시부문 당선작] 박용우

 

움직이는 마애석불

 

 

경주 남산 마애석불은 바위에서 빠져나오는 중이고

빠져나온 절반의 몸은 바위 속에 덜미를 잡힌 뒷몸이 가려워

어떡하나 어떡하나 그만 앞면이 풍화를 앓고

툭 코가 부서져 내리기도 했다

 

마애석불은 참꽃이

해마다 같은 얼굴로 식은땀 뻘뻘 흘리며 산을 올라오는 것이 애잔해

아무도 없는 달밤이면 스윽 바위에 달라붙은 손을 때려다 그만

바위째 몸이 굴러 떨어지기도 했다

 

경주박물관에 옮겨다 놓은 눈 하나 팔 하나

목 떨어진 마애석불과 함께

인부들이 채 찾지 못한, 떨어진 꽃잎 속에

그 아래 흙속에 묻혀있는 쪼가리 난 몸을 찾아 등성이까지 올라가면

오들오들 돋는 한기, 푸른 허공에 옷깃 단단히 채워주는 별들 유난히 반짝였다

 

저 아래 세상 뒤처져 올라오는 발자국소리 삐걱대고

건물 속에서 빠져나오는 찬란한 불빛들

생각해보면 아픔 없이 피는 불꽃은 없었다

우둘투둘한 산길의 밤을 꽃나무 뿌리로 걷느라

산중의 그림자는 하나같이

눈 하나 귀 하나 팔다리 하나씩 없는

귀먹고 눈먼 영락없는 불구였는데

달빛은 바위 속 푹 파인 눈자위에 괴여 자꾸 윤슬을 슬고

 

마애석불은 저 혼자 어두운 데서

저 아래 세상으로 굴러서라도 내려가려는지

마른 이끼 틈새기마다 돌가루가 자욱했다

 

 

 

 

 

 

 

 

 

당선소감

 

눈이 내리고 있었다. 밤새 뒤척이다 새벽에 길을 나섰다. 집들과 도로 위에 세워진 눈의 집이 발목을 붙잡았다. 아무것도 허물지 않고, 그 무엇도 다치지 않게 세워진 눈의 건축, 가장 낮은 자세로 품어야만 완성되는 집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미 세워져 있던 집과 도로와 나무들이 그 집의 숨은 기둥이 되어주고 있었다. 눈의 집은 한겨울을 날만큼 튼튼해 보였다.

 

시를 쓰는 동안 모든 것들을 무너뜨렸다 다시 세우기를 반복했다. 다시 세워진 시라는 집도 이틀이면 금가기 시작해 늘 재건축이 불가피했다. 그 집은 인공적인 자재로는 지을 수 없는 집이라는 것을 눈 속을 오래 걷고 난 후에야 깨닫는다. 늦은 후회가 뽀드득, 귀 기울여야만 들리는 소리로 부어오르는 발목을 다스리는 중이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멀다. 다행이다.

 

당선소식을 듣고 온몸에 통증이 한꺼번에 찾아왔다. 더 탄탄한 집을 지으라는 심사위원님들의 채찍이 몸속 깊이 지나갔으리라. 이 아픔 오래 간직하고 싶다는 말로 감사를 대신 올린다. 26회라는 긴 세월을 이어오며 문청들에게 길을 터주는 노고를 아끼지 않은 신라문학대상 관계자 선생님들께도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힘든 일상 속에서도 묵묵히 내 시의 첫 독자이기를 자청하던 아내, 시 쓰는 아들을 자랑스럽게 여겨주시던 어머니, 오랫동안 나를 시의 길로 견인해준 시창 동인들에게 술 한 잔 드려야겠다.

 

프로필

1969년 경남 김해 출생 / 2회 김승옥문학상 신인 추천작가상 / 시창 동인

 

 

 

 

 

 

26회 신라문학대상 시부문 심사평 / 역사를 바라보는 예리한 눈과 치열한 시정신

 

전반적으로 투고된 작품들의 수준이 높은 편이다. 언어 운용이 매끄럽고, 삶에서 우러나는 주제의식이 견고하다. 또한 시적 대상을 새롭게 드러내 보여주려는 노력과 자신만의 경험이나 내면의 세계를 보여주는데 부족함이 없는 작품들이 상당수 있어 심사위원들의 토론도 그만큼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가운데 낙엽이 가는 길은 잘 정돈된 조사법과 시적 비유가 우수하여 최종심에 올랐고, 특히 '신라문학대상'이라는 상 이름에 걸맞게 수막새」「경주의 봄」「움직이는 마애석불등은 신라시대의 설화와 전설, 유적을 제재로 하여 시적 대상을 감각적으로 응축해서 보여주어 역시 최종심에 올랐다. 수막새는 신라의 모습을 현대에 와서 새로운 해석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매우 인상적이었다. 경주의 봄은 오늘의 경주 속에서 살아가는 화자가 신라시대 수도였던 서라벌의 설화와 역사를 재현하며 쓴 서사시다. 화자의 생동감이 있는 섬세한 상상력은 시의 재미를 더한다. 다만 그 같은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몇몇 설화와 사실史實의 표피적인 상상력으로 '서라벌의 찬란한 봄'을 입체적으로 보여주지 못하는 서사의 한계가 아쉬웠다.

움직이는 마애석불은 경주 남산에 있는 마애석불을 주제로 쓴 시다. 신라시대 때 남산 바위에 부조되어 천년 역사의 오랜 시공時空을 거치며 풍우에 마모되고 해체되어가는 마애석불의 애잔한 모습을 그렸다. 시인은 마애석불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한다. '마애석불은 바위에서 빠져나오는 중이고' '절반의 몸은 바위 속에서 덜미를 잡힌 뒷몸''경주 박물관에 옮겨다 놓은 눈 하나 팔 하나/ 목 떨어진 마애석불'은 저 혼자 어두운 데서 저 아래 세상(인간세상)으로 굴러서라도 내려가려는 치열함을 보여준다. 역사를 바라보는 시인의 눈 또한 예리하다. 따라서 심사위원들은 이견 없이 만장일치로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는데 합의했다. 당선자에게는 진심으로 축하하며, 아쉽게도 최종심에서 탈락한 분들에게는 격려를 보낸다.

 

심사위원 김종해, 신규호, 허형만

 

 

출처 : 신춘문예공모나라
글쓴이 : copyzigi 원글보기
메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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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 서경

  

단단한 것들이 피고 지는 동안

몸에서 다시 꽃잎이 터지고

허공은 그만큼 밀려 났다

따뜻하다는 것을

위태롭다는 것으로 알아듣는

단 한 번도

괜찮다,라는 말 들어 본 적 없는

단 한 번도

활짝, 피어 본 적 없는 월지(月池)

꽉 다문 지퍼를 열고

바늘처럼 그의 꽃잎들이 쏟아져

낡아 가는 가슴 쪽에 쌓인다

허기진 그의 말들이

빈 공터 아래 씨앗을 뱉는 저녁

나는 아직 문 밖에서 꽃을 밟고 있다.

 

 

 

 

 

[심사평] 현실로서의 그 작가와 그런 삶

 

시는 특정한 내용을 형상화한 언어예술의 금자탑이다. 특히 역사적 사건도 그러하고 우리가 경험하는 환경 역시 달리 체험하면 새로운 느낌의 정보로 얼마든지 공유할 수 있어 그 장점이 된다.

그러므로 신라문학상은 그 나름대로의 생리를 가질 수 있고 구체적 형상화에도 특징적인 감동을 주었으면 좋겠다는 심사위원들의 관점 또한 고려되었다.

그래서 비록 상상의 영역이라고는 하나 ‘현실로서의 그 작가와 그런 삶’의 세계를 어떤 수순을 밟아 어떤 언어로 구성하느냐가 그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금년의 응모작에서도 숱한 역사적 취향과 그런 내력을 닮은 어휘를 많이 구사하고 있어 대부분의 심사위원들이 동정을 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여기 응모작 13번의 「연꽃」만 해도 불교적 분위기의 역사적 시간을 폭 넓게 끌어안고 있는 것이었고, 그리고 「황남대총, 봉분을 보다」(30번)도 역사적 시간 속에 묻은 향취를 오늘의 감각으로 잡는 특유의 재능에 많은 점수를 주었다. 또 「벽, 유전자」(21번)의 행간 속에 깔린 호흡이 마냥 간단하지 않은 것에 차선으로 손색이 없다는 동의를 얻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이런 계기로 크게 그리고 꾸준히 발돋움을 하면 가능한 세계가 높다는데 심사위원은 동의를 한 점을 알아주기 바란다.

 

성춘복․김후란․김종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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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종소리 / 최찬상

 

12만 근의 구리가 운다

바닥으로 바닥으로 울려 퍼지는 육중한 저음의

고요함. 속을 텅 비우고서야 차오르는

해맑은 침묵이 종 아래 그렁그렁 고여 있다

서라벌 일대에 둥근 원으로 울려 퍼지는 파문이

거기 한 점으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안으로부터 올라오는 소리이므로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귀로도 들을 수 있다. 아니

듣고도 듣지 못하는 귀를 막고서야 비로서 들을 수 있다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는 고요가

한밤의 고막을 타종한다

가까이 있어도 멀리 있어도, 낮은 곳에 있어도

높은 곳에 있어도 한결같은 은은함으로 울려 퍼지는 파문

그것은 12만 근의 구리가 아니다

만백성의 절규를 녹여 만든

음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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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신라는 발효 중 /  봉윤숙

 

 

백자 달 항아리가 보인다

이음새 말끔히 다듬어진 둥근 궤적 따라

동굴처럼 깊어지는 몰입의 경지

침묵의 모퉁이 돌아 나오는 망치질 소리

발효의 시간

 

그 백자 항아리 속

햇살 구워지고 소나무 향이 번지면

시간의 장작은 붉게 타 오르고

무심한 아름다움이

균열의 틈을 메우는데

 

거기 대나무 숲이 있는가

달빛은 어둠으로 휘어지며

새의 사랑은 변방에서 깊어지는데

더러 빠지는 깃털은 누구의 것인지

금낭화도 야윈 몸을 늘어뜨리며

고요의 목덜미를 적신다

허공의 뼈대를 세운다

 

숨겨진 달 항아리는

그늘 냄새를 풍기는 어둠

어둠의 주름이 환하게 펴지면

향기의 다락방엔 삐걱이는 사다리 뿐

 

그 곳에서 신라가 발효 중이다

 

 

 

 

꽃 앞의 계절

 

nefing.com

 

 

 

[당선소감]

 

불광불급 (不狂不及) 이라 했다.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다. 미쳐야 미친다. 미치려면 미쳐라. 지켜보는 이에게 광기로 비칠 만큼 정신의 뼈대를 하얗게 세우고, 미친듯이 몰두하지 않고는 결코 남들보다 우뚝한 보람을 나타낼 수가 없다. 정민의 "미쳐야 미친다"에 나오는 글귀다.

 

늘 미안했다. 시에게, 발꿈치 들고 담 너머를 기웃거리는 아이처럼 주변만 맴돌았다. 그러는 사이 다른 사람들은 벌써 저만치 가 있었다. 그렇지만 맴돌기를 멈출 수는 없다. 무뚝뚝한 담벼락이 나에게 답을 주는 그날까지 아니 밀랍인형처럼 흥건히 녹아내릴 때까지,

 

폭설이다. 강원도에만 눈이 온 것은 아니다. 바로 우리의 마음속에도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다. 실제와 상상이 흩날리는 곳에서, 내부와 외부가 서로 조응하는 곳에서, 멋진 저녁으로의 초대를 받을 것이다. 지상에 내리는 눈들은 제가 누울 곳을 찾아서 가는 것은 아닐까 아직도 시에 온전히 미치지 못하는 자신을 뒤돌아봅니다. 부족한 저에게 넘치는 가족이 있어 가능했습니다.

 

시의 손을 잡을 수 있게 먼저 손을 내밀어주신 숭의여대 강형철, 전기철 선생님 고맙습니다. 몇 해 동안 메타포와 오른쪽, 왼쪽 날개를 달 수 있게 깨우쳐 주신 김영남 선생님, 진심으로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같이 머리를 맞대고 공부하던 " 정동진역" 식구들, 함께한 시간들이 있어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부족한 저의 시를 이렇게 큰 상으로 보답해주신 경부문협 성춘복, 김후란, 김송배 선생님 깊은 감사 드립니다. 지금보다 훨씬 더 큰 모습으로 보답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심사평] 시적 구도와 주제의 투명성

 

현대시의 작품경향은 대체로 시적 소재와 구도의 설정에서 투명하고 명징한 주제의 투영이 창작의 본령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점에 착안하여 6백여 편의 응모작품들을 읽은 결과 모두가 이와 같은 시적 상황과 전개 과정에서 창출하는 주제에 부응하는 언어의 융합과 함께 각자의 개성에 따라 적절하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라문학대상이라는 역사와 전통이 작품의 수준과 응모자들의 시정신의 예측을 위해서는 우선 언어의 역량을 살피는 일이었다. 이는 시와 언어의 상관성은 그 작품의 성패를 가늠하는 일차적인 기준이 되어 시적 대상물에 대한 신선하면서도 함축된 의미의 요소들을 응축하고 있는가에 중점을 두고 심사에 임했다.

 

이 결과 <물 위에 지은 탑> < 지금 신라는 발효 중> 그리고 <감은사지에서> 등 세 편이 마지막까지 장시간의 논의를 필요로 했다. 이는 심사위원들이 정한 기준에 따라서 언어의 구사와 주제의 투명성이 작품의 골격으로 현현되어 그 메시지가 선명하게 전해지고 있는지를 몇 차례의 독해를 거쳐서 < 지금 신라는 발효 중> 을 당선작으로 선하였다.

 

이 작품에서는 " 백자 달 항아리' 를 통해서 탐색하는 '신라가 발효'하는 시적 구도와 접근이 '허공의 뼈대''어둠의 주름'이라는 이미지가 적시하는 언어와 동시에 조화를 잘 이루고 있어서 이러한 시적 정황들이 현대시의 의미성과 근접하게 발현되는 언어가 감응을 유로해서 공감의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현대시는 이미지의 창출에서 함축된 주제가 바로 언어와의 조화가 가장 적절하게 나타날 때 그 작품은 수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도 더욱 정진해서 좋은 작품 창작하기를 기원한다.

 

심사위원 성춘복, 김송배, 김후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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