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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일째 / 황정희

구 일째 울진 산불이 타고 있다

한 할머니가 우사 문을 열고

다 타 죽는다 퍼뜩 도망가거래이 퍼뜩 내빼거라 꼭 살거라

필사적으로 소들을 우사 밖으로 내몰고 있다

불길이 내려오는 화면을 바라보며

밀쳐놓은 와이셔츠를 당겨 다린다

발등에 내려앉은 석양처럼 당신은 다가오려 했고

나는 내 발등을 찍어 당신이 집 나간 지도

구 일째

똑 똑

똑똑 똑똑

똑똑똑 똑똑똑

빗소리다

쏟아지는 빗소리가 진화를 몰고 와

우산을 쓰고 돌아온 당신 속으로 질주하는 나는 맨발

날 밝아

체육관으로 피했던 할머니가 집으로 돌아갔을 때

다 타버린 우사 앞에서 할머니를 기다리는 소들의 모습이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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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아낌없는 조언으로 이끌어준 스승·문우들에 감사”

 

흔들렸습니다. 하늘에서 땅속 뿌리까지. 흔들리면 오는가 봅니다. 사랑도 따뜻함도 눈짓도 첫눈도 그리고 휴대전화?. 소백산 아래 영주 고을이,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이, 무섬의 외나무다리가 흔들렸습니다. 뜨거웠습니다. 잠깐의 순간이 나를 녹여 땅속으로 흘러 뿌리를 찾아 엄마를 불렀습니다. 가장 추운 날 가장 뜨거운 맛을 보며 어느 시인의 시처럼 우물의 뚜껑이 닫히듯 눈을 감았습니다.

 

시조만 고집했던 저는 경희사이버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다니면서 시를 쓰게 됐습니다. 김기택 교수님의 강의에 매료돼 시를 접하는 시간이 길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교수님! 시를 만지고 먹고 보고 듣게 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넓은 사막의 모래바람과 맞서는 길 위에서 앞으로 가지도 뒤돌아서지도 못할 때 제 손을 잡아 이끌어주신 이돈형 선생님 너무 감사합니다.

 

그리고 함께 시를 흠뻑 패주던 시 깡패 문우들 고맙습니다. 제 시가 문우들에게 두들겨 맞아 조금은 말랑말랑해지나 봅니다. 지난여름이 이 겨울보다 더 뜨거운 건 내일이 있기 때문이겠죠? 늘 많은 조언으로 저를 이끌어준 김분홍 선생님 고맙습니다. 저를 믿고 묵묵히 기다려준 제 식구들 그리고 한국문인협회 영주지부 회원들과 이 기쁨을 함께하겠습니다. 끝으로 제 손에 입김을 불어넣어 주신 나희덕·장석남 심사위원 선생님께 누가 되지 않도록 정진하고 공부하며 쓰겠습니다.

 

 

 

[심사평] 감정 노출 없이 넌지시 제시되는 새로운 시공 ‘매혹적’

 

분명 신춘문예는 축제다. 사는 일 곁에서 문학(시)을 알게 되고 배우고 쓰고 하던 사람들이 자신의 소출을 모아 제출한다. 소식을 기다리는 동안 마음속에서는 한창 운동회가 열렸을 것이다. 그렇게 축제는 지나간다.

 

그 가운데 단 한 사람이 남는다. ‘구 일째’ 외 4편을 보낸 황정희씨가 올해 당선자다. 축하를 보낸다.

 

투고된 작품들의 대체적인 경향은 ‘농민신문’이라는 제호를 염두에 두고 거기에 맞춤한 시들을 모아 보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다. 선자를 포함한 모든 독자는 매체 성격과는 별개로 단지 ‘문학(시)’을 발견하고 싶고 그것도 새로운 문학을 설레며 기다릴 뿐이다.

 

당선작을 포함한 다섯편 시 모두 잘 정제되어 있었다. 세상의 비극을 응시하되 그 현상을 자기 안에 끌어들여서 앙금으로 가라앉힌 모습이다. 얼핏 보면 아무 이야기도 아닌 듯하나 그 이면에는 들끓는 아픔과 성찰이 놓여 있다. 이즈음 떠도는 시들, 노래방 조명처럼 휘도는 언어의 쇄말 속에서 분명한 미덕이 아닐 수 없다.

 

산불을 만난 할머니가 키우던 소들을 우사 밖으로 내모는 텔레비전 영상과 화자의 사적인 경험이 중첩되어 전개된다든지 우연히 마주하게 된 싸움 구경에서 자신이 “아침에 산뜻하게 다려준 청색 남방이 찢겨져 있는 (‘지나쳤다’)” 장면을 발견하고는 이내 모른 척 돌아서는 모습에서 독자는 각각 처해진 삶의 조건 속에 숨어 있는 위선과 성찰을 동시에 발견하게 된다. 특별한 감정의 노출 없이 넌지시 제시되는 이 새로운 시공(時空)은 음미해볼수록 매혹적이다. 앞으로도 이 시의 축제가 계속 이어지기를 바란다.

 

‘읽는 바닥들’과 ‘저수지의 집필방식’ 등이 최종 토의 대상이었으나 이른바 ‘운때’가 맞지 않아 아쉽게 되었음을 ‘굳이’ 밝힌다.

 

- 심사위원 : 장석남 시인, 나희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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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그러라고 할지 / 강영선 

 

 

시어른이 돌아가시고 아무도 살지 않는 시골집에서

안부 전화가 왔다

 

노인정에 가기는 어정쩡한 젊은 노인에게 방을 

내주어도 되냐고 동네 이장이 묻기에

그러라고 했다

 

마당의 빈터는 앞집에서 농기구를 갖다 놓아도 

되냐고 묻기에 그러라고 했다

 

샘가 감나무에 감이 무겁게 열리자 옆집에서

곶감을 좀 보내 줄 테니 감을 따도 되냐고 묻기에

그러라고 했다

 

빈 닭장에 닭을 키우고 싶은데 그래도 되냐고 묻기에

그러라고 했다

 

전기도 수도도 끊어 놓은 그 집에 물이 들어오고

불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동네에서 가장

밝은 집이 된 빈집

 

빈집의 주인은 빈집인데

멀리 있는 아들 내외에게 물어 온다

 

떼 내지 않은 나무 문패는 옛 주인의 이름으로 살아 있어

하늘 번지수를 동사무소 가서 물어야 할지

그러면 그러라고 할지

 

 

 

 

[당선소감] “정말 원하는 빛깔의 시 나올 때까지 정진삶 속 어둠이 시 자양분 돼 스승과 가족·문우들에 감사

 

광부이자 농부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의 고단한 삶을 다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새벽녘 낡은 자전거를 타고 막장으로 가던 바퀴 소리를 어렴풋이 기억합니다. 주말에는 사과밭에 농약을 치던 그의 젖은 등이 선연합니다. 노동의 무게로 아버지의 등은 늘 굽어 있었지만 그런 아버지에게 배운 건 게으름 피우지 않는 성실이었습니다. 그저 말없이 묵묵히 일하시는 모습이 평범한 나에게 시를 붙잡고 있게 했습니다.

 

살면서 어둠이 나를 늘 따라다닌다 생각하여 피하려고만 했던 지난날이 떠오릅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어둠 속에 있을 때 가장 밝았던 것입니다. 희망이라는 등불이 있었으니까요. 어둠을 끄면 밝음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걸 당선되고서 알게 되었습니다. 시와 나의 관계는 이런 게 아니었나 싶습니다. 어둠이 시를 짓는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천연염색은 여러 번의 색 입힘이 필요합니다. 고운 색을 얻으려면 먼저 불순물을 걸러내야 원하는 색이 나옵니다. 저는 겨우 초벌염색을 통과하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공을 들여야 정말 원하는 빛깔의 시가 나올지 모르겠으나 앞으로 더 정진하며 늘 남은 염색을 생각하겠습니다.

 

스승은 어둠에 있는 나에게 빛을 주는 존재라 여깁니다. 빛을 좇아가려고만 했던 저에게 빛이 찾아오게끔 길을 만들어준 존재였습니다. 평소에 많은 시를 읽어주시던 울산 중구문화의전당 조숙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응원해준 가족과 문우님께 고마운 마음을 드립니다. 서툰 저에게 고마운 빚을 남겨준 농민신문사와 심사위원님의 숙제를 풀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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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담백한 시어지만 행간에 깊은 사유 담아

 

<농민신문> 신춘문예는 다른 일간지와는 변별되는 특성이 있는 듯하다. 전통적 서정이나 생활의 실감이 전반적으로 강한 편이고, 실험적인 경향의 작품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그리고 도시 풍경보다는 농촌 현실에 대한 묘사나 자연과의 교감이 두드러진 편이다. 그야말로 대지에 뿌리내린 시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330명이 응모한 1943편의 투고작 가운데 다음 네 명의 시를 두고 마지막까지 논의를 이어갔다. 결이 곱고 섬세한 언어로 자연의 상징성을 잘 살린 <꽃누르미-그들의 압화> 4, 활달한 상상력과 구수한 입담으로 농본적 세계를 재미있게 표현한 <주걱을 읽어주시겠습니까> 6, 슬픔과 상실의 풍경조차 감정의 절제와 발랄한 언어감각으로 새롭게 조형해낸 <어떤 필기체> 4, 담백하고 간결한 시어와 리듬으로 생활의 단상을 묵직하게 펼쳐낸 <그러면 그러라고 할지> 4편 등은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웠다.

 

당선작으로 뽑은 <그러면 그러라고 할지>는 제목에서부터 묻어나는 어떤 무심함이 오히려 감정과 의미 과잉의 시대에서 신선하고 돋보이는 면이 있었다. 투고한 작품 전체가 얼핏 무심하고 담담해 보이지만 행간에 많은 이야기와 깊은 사유를 거느리고 있다. 아무도 살지 않는 시골집이 많은 이의 터전이 돼주고 서로 연결해주는 따뜻한 풍경이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이 시는 생활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시선과 타자를 따뜻하게 감싸 안는 태도에서 나온 것이다. 바로 그 점이 이 시인의 미덕이고 가능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심사위원 나희덕, 장석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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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 / 박은숙

 

 

허리가 굽은 노인이

식당 구석진 자리에 앉아

국수 한그릇을 시킨다

네명의 자리에 세명을 비워두는 식사

아마도 매 끼니를 빈자리들과의

합석이었을 것 같다

 

잘 뭉쳐져야 여러 가닥으로 나뉠 수 있는 국수, 수백번의 겹이

한뭉치 속에 모이는 일, 뜨겁게 끓인 다음에 다시 찬물에 식혀야

질겨지는 음식, 그 부피를 많이 불리는 음식은 힘이 없다지만,

그래서 여럿이 먹어도 한가지 소리를 내는 국수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 있는 저 노인의 슬하는

이남 삼녀의 망종(亡種)

꽃 핀 곳 없는 행색이지만

한때는 다복했었을 것이다.

 

잇몸으로 끊어도 잘 끊어지는 빗줄기 같은 국수,

똬리를 튼 국수를 젓가락으로 쿡 찔러 풀어 헤친다

 

치아도 없는 노인이 먹는데

후루룩, 비 내리는 소리가 난다

비 오는 날 마루에서 들리던 엄마의 청승같이

뚝뚝 끊던 빗소리,

맑은 물에 헹군 국수발 같은 주름이

입안에 가득 고인 빗소리에

바람이 흩날리며 든다.

 

 

 

 

[당선 소감] “절망도 기록하다보면 한편의 시…가족들·교수님께 감사”

 

희망보다는 절망이 무서워 기대를 갖지 않던 때가 있었습니다.

시를 쓰는 일은 즐거운 일이었지만 그 숙련을 묻는 일은 늘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살면서 희망보다는 절망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운 까닭이겠습니다.

가난했던 젊은 날 겨우 야간고등학교를 마친 것이 전부였던 저는 결혼하고 국숫집을 운영하며 11년째 다시 학교에 다니고 있으면서도 시를 놓지 않으려 애를 썼습니다.

올해초 남편이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 했지만, 시 쓰는 일은 지푸라기 한가닥인 양 잡고 있었습니다. 절망이나 체념의 일들도 기록하다 보면 시가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런 영광된 소식으로 남편의 건강도 좋아질 것이라 기대해봅니다.

손님상에 내기 위해 국수를 담다보면 이 가늘고 여린 가닥도 모아놓으면 그럴듯한 끼니가 된다는 것이 기특할 때가 있습니다. 제가 쓰는 시도 그와 같았으면 좋겠습니다.

조금은 늦은 감이 있지만 저에게 건네진 바통을 힘껏 잡고 달려보겠습니다. 결승점이 없는 트랙이 없듯이 결과가 없는 노력은 없을 테니까요. 꼭 선두가 아니면 어떻습니까. 전광판엔 꼴찌도 기록되는 것이니까요.

그동안 뒤에서 든든하게 믿고 응원해준 사랑하는 남편과 네 딸들, 그리고 문혜원 아주대학원 지도교수님과 늦깎이 학생 응원에 부족해도 매일 칭찬해주시던 국어국문과 교수님들께 영광을 바칩니다.

끝으로 심사위원 선생님들 한분 한분께 저에게 이어 달려 보라고 바통을 건네주신 것에 대해 머리 숙여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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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국수 소재로 화려한 수사 없이 삶을 담백하게 빚어내

 

<농민신문>이라는 매체의 특성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예심을 거쳐 올라온 총 스무명의 시가 공히 놓치지 않고 있는 것이 있었다.

속도의 저편으로 밀려난 삶의 그늘과 소외의 풍경을 그려내고, 타자들에 대한 저버릴 수 없는 관심을 어떻게 상투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재구성할 것인가에 시선이 모아져 있었다. 그중에서도 <밀행> 외 4편, <고라니> 외 4편, <노루발> 외 4편, <국수> 외 4편의 응모자들을 최종심에 올려놓고 집중적인 토의를 했다.

소재에 밀착하면서도 시적 인식의 확대를 도모한 <노루발>과 <국수>를 주목했다.

<노루발>은 경쾌한 어조와 동화적 상상력이 돋보였으나 동봉한 작품들의 에코페미니즘적 모성 서사가 익숙한 회로를 맴돌고 있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국수>는 설명적 진술과 어색한 표현들에도 불구하고 동봉한 작품들의 안정감이 깊은 신뢰를 줬다.

특히 천연두를 <빗방울 화석>으로 치환한 비유의 참신함, 삶의 악천후를 품은 균열을 신체화한 <흙벽>의 신선한 묘사력, 문명의 맥을 짚은 <멸종의 거리> 같은 작품들은 당선작 못지않게 빼어난 시편들이다.

어쩌면 더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소재를 선택해 삶을 빚어내는 솜씨를 보며 우리는 시의 독창성이 어떤 유형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질감의 문제이기도 함을 알게 된다.

과잉된 감각들과 화려한 수사의 먼지를 벗겨낸 자리에서 ‘맑은 물에 헹군 국수발 같은 주름’처럼 담백하게 씻긴 말들이, 겨우 존재하거나 잔상으로만 남은 부재의 측근들과 늘 함께 있기를 바란다.

새로움을 애써 여의면서 발효돼 나오는 시는 그때 굳이 새로움의 강박에 시달리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심사위원 손택수, 나희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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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씨창고 쉭쉭 / 이주송


멧돼지 한 마리
그 꺼칠한 털 속에는 웬만한 풀밭이나
산기슭이 들어있다

노루발, 뻐국새, 지칭개, 복수초, 현호색, 강아지풀,
질경이, 벌개미취, 금낭화, 산자고, 쇠별꽃

멀리 가고 싶은 풀씨들은 멧돼지 등에 올라타면 된다

제 몸에 눈 녹은 묵은 봄이 가려워
멧돼지는 부르르 온몸을 털어낼 터
씨앗들은 직파방식으로 파종될 것이다

북극의 스피츠베르겐섬에는 국제종자보관창고가 있다
먼 훗날의 구호(救護)를 위해 멧돼지 한 마리
그 쉭쉭거리는 씨앗창고를 기르고 싶다

이 산과 저 산
이쪽 풀밭과 저쪽 풀밭이라는 말
다 멧돼지의 등짝에서 떨어진 말일 것이다

그러니
너나들이로 섞이는 산
번지는 초록들은 멧돼지의 숨결
국경도 혈연도 지연도 없다

멧돼지 꼬리에서 반딧불이 날아오르고
꺼칠한 오해 속에서도
극지에서도 풀씨들이 움튼다

 

 

 

 

[당선 소감] “쉬지 않고 묵묵히 시의 길 걸을 것” 치유 위해 내디딘 걸음이 행운 전해줘 이끌어준 분들께 고맙다 말하고파

 

한해를 돌아보는 천변의 산책길에서 당선 소식을 받았습니다. 온몸의 통증으로 병원 순례를 하다가 무조건 시집을 읽었던 날들이 지나갔습니다. 시에 대한 첫걸음은 살기 위한 길이었고 고통의 유일한 탈출구였습니다. 치유로 시작한 글쓰기가 이렇게 큰 영광으로 이어지다니 아직도 얼떨떨합니다.

아버지가 개간한 산비탈 밭의 농작물은 늘 멧돼지들의 몫이었습니다. 형편없는 수확물 앞에 엄마의 하소연과 저들도 한식구라던 아버지의 뚝심이 엉기는 날이면 할머니 무릎에서 잠이 들곤 했습니다. 그런 날엔 멧돼지 등에 올라탄 채 산비탈을 오르내리며 농작물을 지키는 꿈을 꾸곤 했습니다. 멧돼지 발자국마다 애기똥풀이 피었고 개똥벌레들이 잡식동물들의 접근을 막아줬습니다. 잡초와 멧돼지랑 함께 먹고 살았던 유년의 밭은 이제 아버지와 함께 숲으로 돌아갔습니다. 도심 곳곳에 멧돼지가 출현하는 뉴스를 접할 때마다 그 산비탈 밭에서 한참을 서성이곤 합니다.

부족한 제 시를 뽑아주신 농민신문사와 심사위원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쉬지 않고 묵묵히 걷겠습니다.

오늘이 있기까지 이끌어주신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교수님들 감사합니다. 응원해주신 공광규·이종섶 선생님, 시클 고맙습니다. 지켜봐준 가족들 사랑합니다. 오늘도 요양병원에서 자식들만 기다리고 있을 엄마, 당신의 기도대로 생의 가장 큰 선물을 안고 달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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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밀고 가는 역량 섬세하며 힘차 … 야생동물과의 상생까지 다뤄

 

예심을 통과한 21명의 작품은 일정수준 이상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선자들의 손에 마지막까지 들려 있던 작품은 ‘그랴’와 ‘신기루’ 그리고 ‘풀씨창고 쉭쉭’이었다. ‘그랴’는 ‘그랴’라는 말을 통해 아버지와의 기억을 환하고 따뜻하게 더듬고 있는데, 시를 끌고 가는 힘이 남달랐다. 하지만 시적 긴장감이 아쉬웠고 다른 투고작에서 언어가 조금은 넘친다 싶었다. ‘신기루’는 독특한 비유와 이야기 방식으로 선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는데 모호한 지점이 없지 않았고 동봉한 작품에서 편차가 느껴졌다.

‘풀씨창고 쉭쉭’은 강인한 생명력과 역동적인 힘이 느껴지는 시였다. 그저 바람에 흔들리다 떨어지는 풀씨가 아닌 멧돼지의 등에 힘차게 올라타 대지를 거침없이 달려나가는 씨앗의 모습은 당찼고, 시를 밀고 가는 역량은 섬세하면서도 힘찼다. 선자들은 몇번이고 행간의 여백까지 반복해 읽어나가며 이 시에 결정적인 흠결이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았으나, 마지막 행까지 다 읽고 난 후에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멧돼지의 “그 꺼칠한 털 속에는 웬만한 풀밭이나/산기슭이 들어 있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다소 덜 다듬어지거나 서툰 지점이 없는 것은 아니나 “노루발, 뻐꾹채, 지칭개, 복수초, 현호색, 강아지풀/ 질경이, 별개미취, 금낭화, 산자고, 쇠별꽃”의 이름을 불러내는 것만으로도 묘한 서정성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이 “쉭쉭거리는 씨앗창고”의 풀씨는 “국경도 혈연도 지연도” 없이 극지에까지 초록의 생명력을 퍼트리고 있는데, 이 응모자는 말의 호흡을 나름의 방식으로 터득하고 있는 듯했다. 야생동물과 사람의 상생에 대한 고민과 질문까지 넌지시 덧붙여 던지고 있기도 한 이 시와 더불어 동봉한 다른 네편의 시에서도 신뢰를 주기에 충분한 역량을 보여주고 있어, 선자들은 논의의 끄트머리에 닿아 당선작으로 흔쾌히 동의했다.

이 작품들 외에도 ‘피싱’ ‘씨앗 열개’ ‘사후(死後)’ 등의 작품이 논의선상에 있었다는 것을 밝히면서 당선자에게는 축하를, 끝까지 최선을 다한 분들에게는 격려를 보낸다.

 

심사위원 곽재구, 박성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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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운 시간을 어느 곳에 쓰면 좋을까 / 이성배

 

 

미선나무 가지마다 밥알 같은 꽃들이 총상꽃차례로 수북하다

이 부드러운 시간을 어느 곳에 쓰면 좋을까

 

십여년 전 겨울,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무차별 폭격이 있을 때

나는 군고구마를 사 들고 눈 오는 거리를 걸었지 싶다

재빨리 움직이지 못하는 아이들과 그 어머니들은 사락사락 죽어갔다

 

하굣길에 장벽 쪽으로 돌을 던진 팔레스타인 소년 사미르 아와드가 이스라엘

군인들의 공격으로 현장에서 즉사한 20131,

나는 따뜻한 거실에서 유치원에서 돌아올 네살배기 딸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총상꽃차례 같은 폭탄 다발을 투하하는 인간적인, 그 인간적인 인류애

엉뚱하게 우리 집 마당에 던져진 밥다발을 두고

고슬고슬한 밥알에 어머니 젖가슴 냄새 비릿하게 스며있는

이 질기지 않은 의미를 어찌하면 좋을까

 

햇볕 좋은 마당에 과분한 꽃

장벽 아래 양지바를 팔레스타인의 언덕에

시리아와 아프가니스탄의 폐허 사이에 수북수북 피어

덤불 사이를 뛰노는 아이들 얼굴에 밥알이 하얗게 붙는다면

꽃 하나가 그럴 수 있다면

 

 

 

 

이 골목은 만만한 곳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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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어르신들의 祈福이 만들어준 선물” 건강검진 받은 날 당선 통보받아 선생님들께 반가운 소식 전할 것

 

혈관 나이 오십이라는 건강검진 결과를 받은 날 오후 당선 통보를 받았다. 혈관 건강에는 좋지 않았으리라. 순찰하다가 다리 불편한 노인들을 순찰차에 태워드리면 노인들은 가장 순한 말로 “복 받을 것”이라 했다. 이십년 가까이 묵은 말도 있었는데 이 말이 사실이라니…. 말의 무게와 울림은 새삼 경이롭다.

컨베이어벨트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시대, 뒤처진 사람들이 자꾸 눈에 밟힌다. 어느 한곳씩은 불편한, 느린 사람들과 함께 걷는 길이 편하다. 가만히 발음해볼수록 마음이 순해지는 ‘사람’이라는 말은 오래오래 나의 미숙한 글을 공글려줄 것이다.

여전히 충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널찍한 마당을 마련해두고 계신 정효구 선생님과 퇴임 후 ‘자연과 시의 이웃들’을 통해 여전히 인자한 미소를 나누시는 임보 선생님께 반가운 소식 전해야겠다. 생각나는 사람들은 너무 많아 천천히 만나야겠다.

국어국문학과 시창작 소모임 ‘사람들’은 언제나 나의 든든한 배경이다. 심사위원님들이 지그시 눌러준 지점 잊지 않겠다. 언제나 푸른 배추밭처럼 빛나는 농민신문사에도 감사한 마음 전한다.

 

 

 

 

희망 수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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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시상이 협소하지 않고 두루 넓어…작가의 굳센 기상 보여 내가 누리는 평화로운 시간, 어떤 의미인지 아프게 질문해

 

예심을 통과해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을 면밀하게 읽었다. 농촌을 시공간으로 한 작품들이 많았고, 농촌에서의 사실적인 형편을 시적으로 표현한 작품들이 많았다. 그런 만큼 시편들은 삶의 현장의 생생한 실감을 느끼게 했다. 마지막까지 경쟁한 작품들의 수준도 높았다.

심사위원들이 손에 쥐고 끝까지 고민했던 작품들은 ‘내 떠나온 골목’ ‘사과도 선크림을 바른다’ ‘화각장’ ‘부드러운 시간을 어느 곳에 쓰면 좋을까’였다. ‘내 떠나온 골목’은 골목에서의 추억을 통해 과거의 시간에 교우했던 옛사람을 불러내는 작품이었다. “미숙 은정 혜원 은희도 놀러 오고”라고 써서 직접 인명을 기술한 것이 정감 있고 특별하게 느껴진 반면, 골목의 아침 가로등 이름을 “‘이별’이거나 ‘후회’이거나 ‘눈물’”이라고 명명한 것은 상투적으로 느껴졌다. 염천에 사과농사를 짓는 농부의 애타는 심정을 고스란히 담은 ‘사과도 선크림을 바른다’는 방언의 활용이 효과적이었으나 감정의 과잉이 있어 아쉬웠다. ‘화각장’은 대상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능력이 돋보였다. 그러나 쇠뿔을 얇게 오려서 오동나무장에 붙이는 그 과정 그대로 시행이 전개되어서 극적인 효과는 오히려 줄어들게 된 것이 아닌가 싶었다.

고심 끝에 당선작으로 ‘부드러운 시간을 어느 곳에 쓰면 좋을까’를 선정했다. 우선 이 작품 외에 다른 작품들에서도 시 쓰는 이의 강기(剛氣)를 느낄 수 있었다. 또 당선작인 이 시는 시상이 협소하지 않았고 두루 넓었다. 이 시는 세계가 전쟁과 폭력과 가난의 고통 속에 있는데, 내가 지금 갖고 있는 이 평화로운 시간이 어떤 의미인지를 아프게 질문한다. 세계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사회적 주제와 연결되는 이러한 시의 창작은 타인의 고통에 점점 더 무감해지는 우리 시대에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앞으로도 자신만의 뚜렷한 육성으로 소신껏 시인의 길을 가길 당부드린다. 다시 한번 당선자에게 축하의 말을 전한다.

 

심사위원 곽재구,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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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풀 / 고은희
 

1

밀풀에서 꽃이 폭폭 끓는다. 부풀어 오른 밀풀은 겨울과 여름에 유용하다. 문살에 밀풀을 바르고 창호지를 바르고 무성한 숨을 바른다. 덩달아 지붕 위로 하얗고 얇은 첫눈이 내린다
 
귓불이 떨어져나간 단풍잎 몇 개가 붓살이 쓸고 간 거친 자리에 폴짝 내려앉는다. 겨울 문턱에서 말이 달리고 창호지 마르는 소리가 소복소복 들린다. 그러니까 문풍지는 밀풀이 모른척한 날개, 열렸다 닫히는 문이 구수한 밀풀냄새를 풍기며 날아다닌다.
 
2

​김치는 꽃이다. 사이사이 익어가는 배추김치뿐만 아니라 한 여름 열무김치를 들여다보면 온갖 색이 다 들어 있다. 푹 절인 열무에 홍고추를 썰어 넣고 푸른 실파를 뭉텅뭉텅, 마지막에 흰 밀풀을 넣어 섞어 피는 꽃.
 
밀풀이 돌아다니는 동안, 풋내라는 밑줄에 문풍지가 달려 나온다. 꽃이 피려고 사각사각 감칠맛이 날 때, 한데 섞이고 어우러져 동지섣달 한겨울을 불러낸다. 밍밍한 국물에서 팽팽한 문풍지 맛이 나게 하는 것, 밀풀이 꽃을 피우는 방법이다
 
3

살짝만 뜨거워져도 엉겨 붙는 밀풀의 힘, 배가 고프지 않은데도 배 아픈 때가 있다. 잘 풀어줘야 잘 붙는 힘, 풀죽은 열무가 밀풀을  만나 아삭아삭 기운을 차리듯 김치도 한겨울 문도 밀풀의 요기로 견딘다.
 
창호지 문에 구멍하나 뚫린 듯 
열무김치국물은 앙큼한 맛이다

 

 

 

 

 

 

[당선소감] “구순 아버지 칭찬처럼 ‘장한 시’ 쓰고 싶어” 소실점 끝 불안감 걷어준 낭보 시 곁에 두고 끝까지 견뎌갈 것
 

당선통보를 받았다. 동시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다. 구순을 향해 구부러진 목소리가 전화기 저편에서 카랑카랑 들려왔다. 오래전 <농민신문>을 애독하셨던, 농부인 아버지가 짧게 한마디 하셨다.

“장하다!”

장한 시를 쓰고 싶다. 아주 골똘하게 장한 궁리를 해보지만 장한 시 쓰기는 언제나 불안하다. 뻔히 보이는 가설을 붙들고 한밤을 보낸다. 애착이란 사랑하는 사람의 유품 같은 것, 나는 시를 애착한다. 내 허물을 간단하게 들키는 때가 허다하지만 시를 곁에 두고 끝까지 견디겠다. 새벽과 어둠을 함께 겪은 남편과 평생 팔 걷을 준비가 되어 있는 정화, 준혁, 준호에게 사랑을 전한다.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으로 인연을 맺은 조재학, 백성, 노수옥, 김순자, 이수니, 김영한, 이인, 강스텔라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매달 만나 합평하고 수다 떠는 일은 그 무엇에도 견줄 수 없는 즐거움이다.  

소실점 끝에 몰려 있던 불안을 순식간에 걷어내주신 심사위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감정의 진폭이 잔뜩 묻어 있는 맨발의 체온이 따뜻해진다.

특효약 같은 시의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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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밀풀, 고전적이고 담백한 작품…감칠맛 나는 언어 돋보여 ‘잘 풀어줘야 잘 붙는 힘’ 발휘…‘앙큼한 맛’ 담긴 시 써주길

 

모두 276명의 응모자 중 예심을 통과한 20명의 작품을 받았다. 20명의 작품은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접수번호 외에는 아무런 정보도 없는 임시 묶음 책 형태였다. 다산 선생이 ‘문장은 사람의 꽃이다’라고 했던가. 꽃밭에서 단점을 찾아보려고 며칠 혼났다. 다들 나름 빛났다.

두 심사위원은 각자 다섯편을 추려 최종 합평회서 만났다. 세편이 일치했고 다른 두편도 눈여겨봤던 작품이라는 점에서 미소를 나눌 수 있었다. 최종적으로 남은 작품은 ‘대설주의보’ ‘달팽이’ ‘밀풀’ ‘만가’ ‘해당화’였다.

시대의 아픔을 노래한 ‘만가’는 동봉한 다른 작품에서 설명적인 시 구절이 더러 드러나, ‘꽃잎을 까보면 충혈된 눈동자’ 같은 감각적인 이미지가 살아 있는 ‘해당화’는 앞부분의 긴 나열이 긴장감을 떨어뜨리고 있어, 먼저 미련을 접었다.

남은 세편을 올려놓고 한편을 결정하려고 하자, 단점은 가려지고 장점들만 부각됐다. ‘대설주의보’는 언어의 절제미를 보여준 산뜻하고 정갈한 작품이었으나 당선작으로 선하기에는 좀 소품이 아닌가 싶어 망설여졌다. 마지막까지 남은 ‘달팽이’는 함께 응모한 작품들 전체가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 더 애착이 갔다. 공사장 절벽에 매달린 노동자와 달팽이가 자연스럽게 연결되며 노동자의 삶을 잘 그려내고 있으나 과연 이 시가 새로운가를 문제 삼아 볼 수밖에 없었다.

당선작으로 결정한 ‘밀풀’은 고전적이고 담백한 작품이다. 작품을 형상화하는 능력과 언어를 감칠맛 나게 다루는 솜씨를 높이 봤다. 앞으로 ‘잘 풀어줘야 잘 붙는 힘’을 언어의 세계에서도 발휘해 ‘앙큼한 맛’ 나는 시 많이 써주길 바란다. 당선자를 축하하며 당선을 잠시 미뤘을 뿐인 응모자님들에게도 위로의 말을 전한다.

 

심사위원 곽재구, 함민복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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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등노을 / 정연희

 

 

소잔등에 부르르

바람이 올라타고 있다

곱슬거리는 바람을 쫓는 꼬리는

등뼈를 타고 나간 장식

억센 풀은 뿔이 되고

오래 되새김한 무료는 꼬리 끝에서 춤춘다

 

스프링을 닮은 잔등 속 간지러움은

온갖 풀끝을 탐식한 벌

한 마리 꽃의 몸속에 피는 봄

연한 풀잎이 키운 한 마리 소는

쌓아 놓은 풀 더미 같고

잔등은 가혹한 수레의 우두머리 같다

 

논두렁 길 따라 비스듬히 누운

온돌방 같은 소 한 마리

눈 안에 풀밭과

코뚜레 꿴 굴레의 말(言)을 숨기는

저 순응의 천성

가지런한 빗줄기가 껌벅 껌벅거린다

 

융단처럼 펼쳐놓은

노을빛 잔등이 봄빛으로 밝다

주인 닮은 뿔처럼 몸 기우는 날은

금방 쏟아질 것 같은 잔등의 딱지가

철석철석 박자를 맞추고

저 불그스름한 노을은

유순한 소의 엉덩짝을 산처럼 넘는다

 

 

[당선소감] “소눈 바라보다 어둠속 스위치 찾은 듯” 온세상 모든 빛이 내것인양 눈부셔 비바람·폭염에도 춤추듯 살아갈 것

 

소의 눈을 들여다보면 “다 안다, 네 맘”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어린 날 묻고 싶은 일들이 있을 때마다 한참 동안 바라본 소의 눈이 오늘은 내 눈 속에서 “다 안다, 그 맘”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만 같습니다.

눈을 뜬다고 다 어둠에서 벗어나는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어둠 속을 걸어 나오기 위해 스위치만 찾으려 한 시간들, 세상은 너무 넓어 마음 둘 곳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은 이제 갓 꽃눈을 뜬 여린 풀꽃, 온 세상의 모든 빛이 다 내 것이 된 그 풀꽃같이 눈부신 날입니다. 주름진 시간들에 푸릇한 이파리가 달리면 온갖 춤이 찾아오겠지요.

어디 춤뿐일까요? 온갖 바람의 종류와 비와 폭염이 찾아오겠지요. 그러면 저는 온갖 춤을 배우고 추임새를 준비하겠습니다.

서툰 춤사위에 추임새를 넣어주신 황인숙·함민복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상쾌한 추임새는 고이 간직하겠습니다.

열심히 살았습니다. 세상의 시간들에 부끄럽지 않게 살았습니다. 늦둥이 딸에겐 미안한 시간들이었지만 신춘문예 당선이라는 약속을 지킬 수 있어 더없이 행복한 날입니다. 착하고 묵묵한 <농민신문>에 당선되어 더없이 기쁩니다. 저의 모든 수식어들은 소의 눈에서 배운 것들입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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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거칠더라도 사람냄새 묻어나는 작품 대상 그려내고자 하는 치열함 돋보여”

 

총 244명의 응모작 중 예심을 통과한 19명의 작품을 사전에 전달받아 각자 읽고 합평회를 가졌다. 선자(選者)들은 우수한 작품이 많아 황금 나락 펼쳐진 들판 앞에 섰을 때처럼 행복하기도 했지만 고민도 컸음을 토로했다.

신문의 특성 때문인지 농촌을 소재로 한 작품이 많아 진부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들었지만 그런 작품은 없었다. 두부처럼 반듯하고 말랑말랑한 작품보다 비지처럼 좀 거칠더라도 마음에 씹히는 질감이 있는 작품들이 결국 남았다.

사람 냄새가 많이 묻어나는 작품을 선호하는, 응모작을 통해 앞날의 작품을 감히 예측해보는 선자들의 취향이 반영되었음을 실토한다.

논의 끝에 압축된 작품은 ‘가실’ ‘동그란 색연필’ ‘밥 먹는 나무’ ‘장수 산부인과’ ‘잔등 노을’이다.

‘가실’은 잘 발효된 남도 사투리의 야생적인 말맛이 일품이었으나 내용에서 농촌의 문제를 좀더 구체적으로 다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동그란 색연필’은 ‘뚜껑을 열고 뛰쳐나가는 각각의 눈동자들’처럼 상상력이 발랄하고 이미지를 오버랩시키는 기법이 돋보였다. 그러나 동봉한 작품 중에 긴장감을 잃고 풀어진 구절도 보여 안타까웠다.

참신하고 세련된 감각의 잔치를 보여준 ‘밥 먹는 나무’와 굵은 시상과 따뜻한 시선이 빛나는 ‘장수 산부인과’는 당선작으로 뽑아도 손색이 없었다.

당선작으로 결정한 ‘잔등 노을’은 이미지가 활달하고 선명하다. 대상을 그려내고자 하는 치열함이 절로 읽힌다. 직유를 줄여 행간의 이미지를 더 증폭시켰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덮고 그 치열한 힘이 그려낼 미래를 믿어보기로 했다. 치열함으로 치열함마저 넘은 담담한 마음이 이미 싹트고 있음도 소중히 보았다.

사람들이 아닌 시의 세계로부터 축하한다는 말을 듣는 시인이 되길 바라며 우선, 당선을 축하한다.

 

심사위원 함민복,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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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림6호* / 김우진

 

 

항아리에 물을 채우고 볍씨를 담갔다. 바람 한 잎과 구름을 벗겨낸 햇살도 꺾어 넣었다. 봄 논의 개구리 울음도 잡아다 넣었더니 비로소 항아리가 꽉 찼다.

 

나흘 밤의 고요가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어 항아리 문을 조심스럽게 열어본다.

 

저 경건한 나흘, 지나가는 빗소리도 발끝을 세우고 갔으며 파란색 바람이 일렁이다 갔으며 또한 파란 별들이 농부의 발목 근처에서 무수히 떴다 갔다.

 

항아리 속에서 적막의 힘이 차오른다. 씨앗들이 뿜어내는 발아의 열, 항아리가 드디어 익어가기 시작한다. 촉촉이 스며든 물기에 몸을 여는 씨앗들, 부드러워진 껍질을 걷어내며 깊은 잠에서 눈을 떴다. 귀가 열리고 부리가 생겼다. 몸속에 숨겨둔 하얀 발을 내밀었다. 흙이 묻지 않은 순결한 발들, 뿔을 달고 푸른 들판으로 달려가고 싶은, 서로의 어깨를 내어주며 도란거리는 그들 모습을 보고 나는 씨나락경전을 듣는다.

 

적막은 발아의 요람

작은 항아리 속에서 거대한 우주가 발아하고 있다. 

 

* ‘농림6호’는 1960~1970년대 재배된 볍씨 품종.

 

 

 

 

[당선소감] “시만 알던 나에게도 날개가…훨훨 날아 가야지”

 

시간만 켜켜이 낭비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결코 신은 헛되지 않게 저에게도 뜻밖의 행운을 주셨습니다.

 

오랫동안 땅 밑 어둠 속에 갇혀 살던 매미 유충이 땅 밖으로 나와 우화(羽化)하여 날개를 파닥이며 건너편 나무 위로 화르르 날아가듯, 시만 알고 시만 쓰던 저에게도 이제 날개를 달 기회를 주셨으니 저 넓은 허공을 향해 훨훨 날아가야겠습니다. 더 좋은 시를 더 많이 쓰라는 것으로 알고 열심히 쓰겠습니다.

 

저에게 날개를 달아 주신 농민신문사에 감사드리며 제 시를 올려 주신 황인숙 시인님과 함민복 시인님 두 분께 큰절 올립니다. 저를 항상 올바른 시의 길로 인도해 주신 동작문화센터 시창작반 맹문재 교수님, 마경덕 시인님, 고영 시인님 감사합니다. 동작문학 문우들과도 기쁨의 시간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그리고 1400광년 밖 초록별로 먼저 간 아내에게도 감사드리며 아버지를 응원해 준 두 아들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맛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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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위축되고 시들어가는 현실속 희망의 응원가”

 

본심에 오른 20명의 작품 100여편을 읽었다. 연륜이 감지되는 일정한 수준작은 많았으나 태양과 달처럼 우뚝하거나 바늘 끝처럼 외로운 수작이 없어 선자의 마음이 마냥 홀가분하지는 않았다.

 

‘씀바귀’ ‘나비들이 출몰하는 숲’ ‘이동 만물상’ ‘깻단은 기억해야 할 이름처럼 묵직했다’ ‘농림6호’를 놓고 선자들은 의견을 좁혀갔다.

 

‘씀바귀’는 격물치지의 정신으로, 한 사물을 통해 우리 삶을 담담한 어조로 그려내는 솜씨가 돋보였으나 함께 응모한 다른 작품에 “낡은 일상을 토악질해 쓸려나간다”와 같은 상투적인 시구들이 눈에 거슬렸다. ‘나비들이 출몰하는 숲’은 “사각의 창틀엔 읽기도 전에 몇 장씩 겹쳐 넘겨지는/성경책의 얄팍한 책장 같은 햇살”을 비롯해 빼어난 이미지들이 도처에서 빛난다. 또한 한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얼마나 공력을 쏟는가를 작품마다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상 전개 방식에 일정한 틀이 있어(우연일지도 모르지만 응모작 4편의 시 결구가 ‘있다’로 끝난다) 신춘문예를 의식한 작품이라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었다. ‘이동 만물상’은 군더더기 없는 정갈한 언어로 농촌마을의 현실을 잘 그려낸, 당선작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탄탄한 작품이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깻단은 기억해야 할 이름처럼 묵직했다’와 ‘농림6호’는 시를 위한 시가 아니고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시상이 발현된 시라 체득한 비유들이 생생하게 살아 있음을 높이 보았다.

 

제목이 당돌한 ‘농림6호’는 생명의 움틈을 세밀하고 애정에 찬 눈으로 바라다보며 자연의 신성을 발견해내는 시안이 깊어 좋았다. ‘농림6호’를 당선작으로 결정한 이유 중에는 위축되고 찌들고 시들어가는 시대의 현실에 희망의 응원가를 들려주고 싶은 선자들의 마음도 작용했음을 밝혀 둔다.

 

축하한다. 아울러 모든 응모자들에게 보내는 위로의 씨앗이 내년에는 축하의 꽃으로 피어나길 바란다.


심사위원 황인숙 시인, 함민복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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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잠 / 김겨리

 

 

고수레로 남겨 둔 홍시의 밀린 잠이 붉은 저녁이다

마당을 쓸던 노인이 허리를 굽히자 짧은 옷단 아래로 살짝 드러나는 등골,

그 깊은 계곡까지 노을이 들었다

무너지는 한쪽 벽에 봉창 달빛을 빚어 얽는 거미가

바람이 들지 않도록 거미줄을 암팡지게 엮는다

명아주 이파리 스적거림으로 창문을 단 집

구절초 꽃대로 세운 배흘림기둥에선 풍경(風磬) 소리가 향긋하다

노인이 굽혔던 허리를 펴면 가을볕이 어리광처럼 달려든다

도돌이표만 있는 가을볕은 노인의 십팔번이다

음정은 새털구름이고 박자는 떨어지는 은행잎,

아무나 풍월로 읊어도 진양조 장단

지붕엔 말표고무신 한 짝이 노을로 배꼽만 덮고 누워 있다

갈기털 다 빠진 목덜미에 솟대 그림자를 괴고 잠든 말굽은

아직도 따스한 발걸음을 기억하며

지붕에 올라가 누구를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긴 한숨을 쉬는 노인의 호흡이 가늘게 떨린다

허공에 써 놓은 점자로 되짚어 가는 길에도

과속방지턱이 있는지 바람도 잠시 주춤하는 법인데

어느새 성성해진 백발과 그믐달만 뜨는 눈썹

슬하에 노을 닮은 은행나무 한 그루만 달랑 둔 노인의 가계(家系)

입술에 허옇게 일어나는 각질을 옷소매로 쓱 훔치니

노을이 찍 묻어난다

노인의 등뒤로 달이 뜬다 어쩌면, 오늘밤

은행잎 한꺼번에 다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뜻

노을의 끄나풀이 길다

 

* 진양조 장단: 판소리에서 가장 느린 박자

 

 

 

 

분홍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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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참 아렸던 시간들정갈한 보폭으로 걸어갈 것

 

업무회의 중에 당선 통보를 받았다. 잠시 숨이 고르지 않을 때 창밖엔 혹한에 끌려가는 바람의 이마가 보였다.

 

지금은 오히려 내가 그 무엇인가에 의해 여기까지 이끌려 온 것 같은데, 무엇이었을까. 12월의 침엽(針葉)은 날카로웠지만 뭉툭한 그 무엇을 찌를 수는 없었다. 나를 들춰내는 일이란 참으로 아린 일이었다.

 

침잠해지는 시간이면 습관처럼 끼적이던 습작들을 꺼내놓고 물끄러미 바라본다. 저 여린 살갗으로 무엇을 치대고 누구를 감싸안을 수 있을까. 종내 허기진 등골처럼 움푹 파인 상념으로 자판에 올려놓은 손가락들이 가늘게 떨리곤 했다.

 

가끔씩 머리맡에 쌓이는 잠들을 흔들어 깨우다 내가 잠들곤 했다. 검은 비닐봉지로 나무젓가락으로 구겨진 종이컵으로 가위눌리던 시간들. 빈 들에 서 있는 허수아비가 떠올랐다. 바람을 견디고 이슬을 견디고 어둠을 견디는 것보다 더 힘겨운 건 내가 빈 들의 일부도 되지 못한다는 거.

 

내 시의 여백이 되어주신 홍··심 시인과 당진 시인들께도 감사드리며, 아내와 군복무 중인 두 아들, 어머니, 항상 뭉클한 감동입니다. 모든 지인들께 소박한 덕담이고 싶은 겨울, 얕은 시심을 헤아려 주신 농민신문사와 손해일· 황인숙 심사위원님께도 감사드리며, 이제부터 내딛는 한발 한발 정갈한 보폭으로 걸어가겠습니다.

 

 

 

 

나무가 무게를 버릴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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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시각·청각·촉각 생생풍부한 언어구사 인상적

 

총 열여덟명의 작품이 본심에 올라왔다. 전반적으로 농촌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 많았는데, 자연 풍광을 그리기보다 사소한 자연 하나하나를 씨앗으로 사람살이를 싹틔워 형상화하려는 자세가 마음에 와 닿았다. 다들 알다시피 농촌의 삶이란 평화롭기만 한 게 아니라 고된 것이고, 그 고된 만큼의 보상은 없어 소외감과 박탈감을 느끼기 쉬운 것이다. 그로 인한 서글픔이나 분노와 절망감을 세월호 등으로 외연을 확대한 작품, 그리고 현란하나 발랄한 어법으로 자신의 내면에 집중한 작품도 눈에 띄었다.

 

최종심에 오른 이는 김학중·조미희·장서영·이복희 등 네명이다. 모두 시 쓰기가 몸에 익은 솜씨로 저마다의 삶의 결을 보여주는 바여서 당선작 하나를 고르기는 지난한 일이었다. 재치있는 어법으로 말을 꼬고 비트는 조미희의 언어에 대한 감수성, 감칠맛 나게 시어를 운용하는 장서영의 우아하고 발랄한 정신, 오브제(사물)마다 생의 질척거림을 겹쳐 보여주는 이복희의 웅숭깊음, 제쳐두기 아쉬운 이들의 재능은 언제라도 빛을 볼 것이라 믿는다.

 

당선작은 김학중의 <분홍잠>이다. 가을 정취 물씬한 농촌 풍경을 배경으로 홀몸어르신의 하루 일상을 담았다. 내용이나 시어를 군더더기 없이 길게 끌고 나가는 힘이 있다. 줄글인데도 운율이 만져질 듯하다. 즉 언어구사가 풍부하고 내재율이 있는 시다. 농촌 홀몸어르신의 외로움과 그리움이 시각 청각 촉각에 생생히 스치는 듯하다. 배경은 농촌이지만 홀몸어르신 문제가 어찌 농촌만의 문제일까.

 

시적 대상에 제 감정을 흘리지 않고 객관적 거리를 두어야 독자를 보편적 감정으로 이끈다는 걸 익히 아는 시인이다.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손해일 시인,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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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독대가 활짝 피었다 / 봉윤숙 

 

 

8월의 뒤란은 출출하다
태양이 볼륨을 높이다가
긴 치맛자락 끌고 내려오면
슬픔도 허기 채워 가라앉고
그 반대쪽으로 풀벌레 소리가 화창하다
소란은 발가락을 꼼지락거리게 한다
그러나 나의 발걸음을 재촉하진 말자
살금살금 고민하며 다가오는 잎새
그 잎사귀 몇 잎 입에 물면
바람의 손가락도 짭조름해진다
빨랫줄 옷가지들이 바람을 몹시 귀찮아한다
옷가지들에 쫓겨난 바람이 장독대를 드나들며
뒷짐 지고 하늘바라기를 하거나
기어오르는 담쟁이 넝쿨 담벼락에 주저앉거나
풍경 속으로 그림자를 흐느적거리며 사라지게 한다
땡볕이 넓적해지면 계절이 새롭게 열린다
빛들도 숙성되며 바스락거리는 동안
내 인생의 무늬도 옅어지는 것은 아닌지
찬란한 정오
장독대에 나를 활짝 펼쳐 놓는다

 

 

 

꽃 앞의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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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좋은 작품으로 모든이에게 보답할 것”

 

가장 가까운 것이 가장 먼 것이다. 시란 그런 것일까. 순방향이거나 역방향이거나 시신경이 녹아 있는 곳, 출혈과 응고가 반복되었다. 소란을 앓던 두통이 머무르는 곳마다 폭설이 내렸다. 앞으로 더 나아가지도 그렇다고 뒤로 물러설 수도 없이 갇혀 살았다, 아주 오랫동안.


낮은 곳, 미약한 부분, 아래의 심정으로 생각하고 보려 했지만 눈은 항상 위로 치켜 떠 있었다. 그것이 문제였다. 시를 문지르던 손바닥을 펼쳐보면 껍질만 자글자글하다. 연약한 곳에서도 단단한 한 세상이 여물고 있을 것이다.


좁혀지지 않던 간격이 두근두근 싹을 틔운다. 무심함이 오래되면 범람하는 걸까. 기우뚱거리는 불안을 발굴해준 이브의 선물.


부족한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들께 고맙습니다. 좋은 시로 보답하겠습니다.


제 시의 앞 계절, 강형철·전기철·김영남 선생님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벌써 저만치 앞서가신 문우님들, 뒤따라 가겠습니다.


또한 저를 우뚝 서게 만들어주신 농민신문사의 앞날이 활짝 펼쳐지길 바랍니다.
 

오랜 세월 묵묵히 지켜봐준 신랑, 1월 초에 공부하러 미국으로 떠나는 사랑하는 딸, 나라의 부름을 받게 될 사랑하는 아들, 모두 고맙고 사랑합니다.


미열의 밤이 깊어갑니다. 눈 뜨면 새 날이 우리 앞에 떠오를 것입니다.

 

 

[심사평] “공감각적인 비유·상상력 전개 돋보여

 

가을 과원에서 잘 익은 싱그러운 햇과일을 고르는 즐거움 또는 아득한 심해에서 영롱한 진주를 건져 올리는 기쁨과도 같았다. 예심을 거쳐 익명으로 제시된 117편(20명)의 응모작 중에서 당선작을 고르는 감회가 그랬다. 응모자들 또한 언제쯤 당선의 영예가 주어져 새해 신춘문예 지면을 화려하게 장식할까 하는 기대와 설렘이 클 것이다.

심사위원 3명이 최종심에 올린 것은 <장독대가 활짝 피었다> <끈> <채비> 3편이었다. 3편 모두 당선작으로 손색이 없었으나 거듭된 윤독과 합의를 거쳐 <장독대가 활짝 피었다>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이 작가의 <산 너머 남촌> <풍경의 삽화> 등 나머지 응모작도 절차탁마를 보이는 고른 수준인 데다 풋풋한 감성과 농촌 정서를 맛깔스럽게 형상화하는 능력을 높이 샀다.

특히 당선작으로 뽑은 <장독대가 활짝 피었다>는 도시 아파트 생활로 사라져가는 ‘장독대’라는 객관적 상관물을 내세운 시상 전개와 언어 구사가 신선했다. 시의 첫 연에서는 ‘출출한 8월의 뒤란’으로 햇살이 내려오면 ‘슬픔도 허기 채워 가라앉고’ ‘반대쪽으로 풀벌레 소리가 화창하다’라며 전경을 제시하고 있다. 이어서 장독대로 다가오는 ‘잎사귀 몇 잎 입에 물면’ ‘바람의 손가락도 짭조름해진다’ ‘옷가지들에 쫓겨난 바람들이 뒷짐 지고 하늘바라기를 하거나’ ‘땡볕이 넓적해지면 빛들도 숙성되고 바스락거린다’ 같은 공감각적인 비유와 상상력 전개가 돋보인다. 아쉽게도 당선의 영예를 비껴난 많은 응모자들에게도 격려를 보내며 찬란한 미래를 기약한다.


심사위원 권영민 문학평론가, 김송배 시인, 손해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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