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일째 / 황정희
구 일째 울진 산불이 타고 있다
한 할머니가 우사 문을 열고
다 타 죽는다 퍼뜩 도망가거래이 퍼뜩 내빼거라 꼭 살거라
필사적으로 소들을 우사 밖으로 내몰고 있다
불길이 내려오는 화면을 바라보며
밀쳐놓은 와이셔츠를 당겨 다린다
발등에 내려앉은 석양처럼 당신은 다가오려 했고
나는 내 발등을 찍어 당신이 집 나간 지도
구 일째
똑 똑
똑똑 똑똑
똑똑똑 똑똑똑
빗소리다
쏟아지는 빗소리가 진화를 몰고 와
우산을 쓰고 돌아온 당신 속으로 질주하는 나는 맨발
날 밝아
체육관으로 피했던 할머니가 집으로 돌아갔을 때
다 타버린 우사 앞에서 할머니를 기다리는 소들의 모습이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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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아낌없는 조언으로 이끌어준 스승·문우들에 감사”
흔들렸습니다. 하늘에서 땅속 뿌리까지. 흔들리면 오는가 봅니다. 사랑도 따뜻함도 눈짓도 첫눈도 그리고 휴대전화?. 소백산 아래 영주 고을이,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이, 무섬의 외나무다리가 흔들렸습니다. 뜨거웠습니다. 잠깐의 순간이 나를 녹여 땅속으로 흘러 뿌리를 찾아 엄마를 불렀습니다. 가장 추운 날 가장 뜨거운 맛을 보며 어느 시인의 시처럼 우물의 뚜껑이 닫히듯 눈을 감았습니다.
시조만 고집했던 저는 경희사이버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다니면서 시를 쓰게 됐습니다. 김기택 교수님의 강의에 매료돼 시를 접하는 시간이 길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교수님! 시를 만지고 먹고 보고 듣게 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넓은 사막의 모래바람과 맞서는 길 위에서 앞으로 가지도 뒤돌아서지도 못할 때 제 손을 잡아 이끌어주신 이돈형 선생님 너무 감사합니다.
그리고 함께 시를 흠뻑 패주던 시 깡패 문우들 고맙습니다. 제 시가 문우들에게 두들겨 맞아 조금은 말랑말랑해지나 봅니다. 지난여름이 이 겨울보다 더 뜨거운 건 내일이 있기 때문이겠죠? 늘 많은 조언으로 저를 이끌어준 김분홍 선생님 고맙습니다. 저를 믿고 묵묵히 기다려준 제 식구들 그리고 한국문인협회 영주지부 회원들과 이 기쁨을 함께하겠습니다. 끝으로 제 손에 입김을 불어넣어 주신 나희덕·장석남 심사위원 선생님께 누가 되지 않도록 정진하고 공부하며 쓰겠습니다.
[심사평] 감정 노출 없이 넌지시 제시되는 새로운 시공 ‘매혹적’
분명 신춘문예는 축제다. 사는 일 곁에서 문학(시)을 알게 되고 배우고 쓰고 하던 사람들이 자신의 소출을 모아 제출한다. 소식을 기다리는 동안 마음속에서는 한창 운동회가 열렸을 것이다. 그렇게 축제는 지나간다.
그 가운데 단 한 사람이 남는다. ‘구 일째’ 외 4편을 보낸 황정희씨가 올해 당선자다. 축하를 보낸다.
투고된 작품들의 대체적인 경향은 ‘농민신문’이라는 제호를 염두에 두고 거기에 맞춤한 시들을 모아 보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다. 선자를 포함한 모든 독자는 매체 성격과는 별개로 단지 ‘문학(시)’을 발견하고 싶고 그것도 새로운 문학을 설레며 기다릴 뿐이다.
당선작을 포함한 다섯편 시 모두 잘 정제되어 있었다. 세상의 비극을 응시하되 그 현상을 자기 안에 끌어들여서 앙금으로 가라앉힌 모습이다. 얼핏 보면 아무 이야기도 아닌 듯하나 그 이면에는 들끓는 아픔과 성찰이 놓여 있다. 이즈음 떠도는 시들, 노래방 조명처럼 휘도는 언어의 쇄말 속에서 분명한 미덕이 아닐 수 없다.
산불을 만난 할머니가 키우던 소들을 우사 밖으로 내모는 텔레비전 영상과 화자의 사적인 경험이 중첩되어 전개된다든지 우연히 마주하게 된 싸움 구경에서 자신이 “아침에 산뜻하게 다려준 청색 남방이 찢겨져 있는 (‘지나쳤다’)” 장면을 발견하고는 이내 모른 척 돌아서는 모습에서 독자는 각각 처해진 삶의 조건 속에 숨어 있는 위선과 성찰을 동시에 발견하게 된다. 특별한 감정의 노출 없이 넌지시 제시되는 이 새로운 시공(時空)은 음미해볼수록 매혹적이다. 앞으로도 이 시의 축제가 계속 이어지기를 바란다.
‘읽는 바닥들’과 ‘저수지의 집필방식’ 등이 최종 토의 대상이었으나 이른바 ‘운때’가 맞지 않아 아쉽게 되었음을 ‘굳이’ 밝힌다.
- 심사위원 : 장석남 시인, 나희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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