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수 / 박은숙
허리가 굽은 노인이
식당 구석진 자리에 앉아
국수 한그릇을 시킨다
네명의 자리에 세명을 비워두는 식사
아마도 매 끼니를 빈자리들과의
합석이었을 것 같다
잘 뭉쳐져야 여러 가닥으로 나뉠 수 있는 국수, 수백번의 겹이
한뭉치 속에 모이는 일, 뜨겁게 끓인 다음에 다시 찬물에 식혀야
질겨지는 음식, 그 부피를 많이 불리는 음식은 힘이 없다지만,
그래서 여럿이 먹어도 한가지 소리를 내는 국수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 있는 저 노인의 슬하는
이남 삼녀의 망종(亡種)
꽃 핀 곳 없는 행색이지만
한때는 다복했었을 것이다.
잇몸으로 끊어도 잘 끊어지는 빗줄기 같은 국수,
똬리를 튼 국수를 젓가락으로 쿡 찔러 풀어 헤친다
치아도 없는 노인이 먹는데
후루룩, 비 내리는 소리가 난다
비 오는 날 마루에서 들리던 엄마의 청승같이
뚝뚝 끊던 빗소리,
맑은 물에 헹군 국수발 같은 주름이
입안에 가득 고인 빗소리에
바람이 흩날리며 든다.
[당선 소감] “절망도 기록하다보면 한편의 시…가족들·교수님께 감사”
희망보다는 절망이 무서워 기대를 갖지 않던 때가 있었습니다.
시를 쓰는 일은 즐거운 일이었지만 그 숙련을 묻는 일은 늘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살면서 희망보다는 절망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운 까닭이겠습니다.
가난했던 젊은 날 겨우 야간고등학교를 마친 것이 전부였던 저는 결혼하고 국숫집을 운영하며 11년째 다시 학교에 다니고 있으면서도 시를 놓지 않으려 애를 썼습니다.
올해초 남편이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 했지만, 시 쓰는 일은 지푸라기 한가닥인 양 잡고 있었습니다. 절망이나 체념의 일들도 기록하다 보면 시가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런 영광된 소식으로 남편의 건강도 좋아질 것이라 기대해봅니다.
손님상에 내기 위해 국수를 담다보면 이 가늘고 여린 가닥도 모아놓으면 그럴듯한 끼니가 된다는 것이 기특할 때가 있습니다. 제가 쓰는 시도 그와 같았으면 좋겠습니다.
조금은 늦은 감이 있지만 저에게 건네진 바통을 힘껏 잡고 달려보겠습니다. 결승점이 없는 트랙이 없듯이 결과가 없는 노력은 없을 테니까요. 꼭 선두가 아니면 어떻습니까. 전광판엔 꼴찌도 기록되는 것이니까요.
그동안 뒤에서 든든하게 믿고 응원해준 사랑하는 남편과 네 딸들, 그리고 문혜원 아주대학원 지도교수님과 늦깎이 학생 응원에 부족해도 매일 칭찬해주시던 국어국문과 교수님들께 영광을 바칩니다.
끝으로 심사위원 선생님들 한분 한분께 저에게 이어 달려 보라고 바통을 건네주신 것에 대해 머리 숙여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애드픽 제휴 광고이며, 소정의 수수료를 지급 받을 수 있습니다.
[심사평] 국수 소재로 화려한 수사 없이 삶을 담백하게 빚어내
<농민신문>이라는 매체의 특성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예심을 거쳐 올라온 총 스무명의 시가 공히 놓치지 않고 있는 것이 있었다.
속도의 저편으로 밀려난 삶의 그늘과 소외의 풍경을 그려내고, 타자들에 대한 저버릴 수 없는 관심을 어떻게 상투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재구성할 것인가에 시선이 모아져 있었다. 그중에서도 <밀행> 외 4편, <고라니> 외 4편, <노루발> 외 4편, <국수> 외 4편의 응모자들을 최종심에 올려놓고 집중적인 토의를 했다.
소재에 밀착하면서도 시적 인식의 확대를 도모한 <노루발>과 <국수>를 주목했다.
<노루발>은 경쾌한 어조와 동화적 상상력이 돋보였으나 동봉한 작품들의 에코페미니즘적 모성 서사가 익숙한 회로를 맴돌고 있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국수>는 설명적 진술과 어색한 표현들에도 불구하고 동봉한 작품들의 안정감이 깊은 신뢰를 줬다.
특히 천연두를 <빗방울 화석>으로 치환한 비유의 참신함, 삶의 악천후를 품은 균열을 신체화한 <흙벽>의 신선한 묘사력, 문명의 맥을 짚은 <멸종의 거리> 같은 작품들은 당선작 못지않게 빼어난 시편들이다.
어쩌면 더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소재를 선택해 삶을 빚어내는 솜씨를 보며 우리는 시의 독창성이 어떤 유형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질감의 문제이기도 함을 알게 된다.
과잉된 감각들과 화려한 수사의 먼지를 벗겨낸 자리에서 ‘맑은 물에 헹군 국수발 같은 주름’처럼 담백하게 씻긴 말들이, 겨우 존재하거나 잔상으로만 남은 부재의 측근들과 늘 함께 있기를 바란다.
새로움을 애써 여의면서 발효돼 나오는 시는 그때 굳이 새로움의 강박에 시달리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심사위원 손택수, 나희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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