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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때 / 신재희

 

느리게 다가오는 물의 걸음

물의 속도가 멈춘 자리 계곡의 바닥이 미끈거린다

 

거세게 흐르지 못하는 물길은 이 자리에서

얼마나 머뭇거렸을까

물의 엉덩이가 닿았던 자리마다 물때가 끼었다

 

구불구불 휘돌아온 물소리를 먹고 자라는 돌들

줄어든 계곡물에 뒤척일 기력이 없어 안색이 누렇다

길쭉하거나

납작하거나

둥글거나

계곡의 슬하에서 뒹굴며 자란 물의 피붙이들

 

수면 아래 제 몸피만큼 걸쳐 입은 물때는

정체된 속도에 주저앉은 습생의 뿌리들이다

 

물의 허리를 잡다 발목이 휘청거린다

물의 지느러미도 낮은 곳을 따라 구부러질 뿐

찌든 물때는 쉬 벗겨지지 않는다

 

돌멩이 하나 집어

허물조차 껴안고 살던 숨결을 물에 씻는다

말간 얼굴을 드러내며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살아난다

 

계곡의 물소리가 줄어들어도

고요히 파닥거리며, 뒤척이며

물의 때를 기다리는 돌멩이들

 

물때를 벗은 싱싱한 맥박이 손바닥을 타고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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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치 똥 / 안광숙


멸치 똥을 깐다

변비 앓은 채로 죽어 할 이야기 막힌


삶보다 긴 주검이 달라붙은 멸치를 염습하면

방부제 없이

잘 건조된 완벽한 미라 한 구

내게 말을 걸어온다

바다의 비밀을 까발려줄까 삶은 쓰고

생땀보다 짜다는 걸 미리 알려줄까, 까맣게 윤기 나는 멸치 똥


죽은 바다와

살아 있는 멸치의 꼬리지느러미에 새긴

섬세한 증언

까맣게 속 탄 말들

뜬눈으로 말라 우북우북 쌓인다


오동나무를 흉내 낸 종이관 속에 오래 들어 있다가

사람들에게 팔려온

누군가의 입맛이 된 주검

소금기를 떠난 적이 없는

가슴을 도려낸 멸치들 육수에 풍덩 빠져

한때 뜨거웠던 시절을 우려낸다


입밖으로 내뱉지 못한 뼈를 남기고

객사한 미련들은 집을 떠나온 지 얼마인가


잘 비운 주검하나 끓이면

우러나는 파도는 더욱 진한 맛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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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리나무 / 김향숙


종아리에 싸리나무 흔적이 있었네

아버지의 꾸중이 다녀간 날이었네

천방지축의 나이

주먹을 쥐고 이를 앙다물 때

여린 싸리나무 회초리가 흔들리는 중심을 잡아주었네

눈물과 후회

원망이 묻어 잇는 그 기억을 만지면

참싸리꽃으로 환하게 피어나네

소쿠리와 채반이 되던 싸리나무가

몸에 스며들어 나를 일으켰네

쓰디쓴 그 맛

종아리에 새겨진 문신이

약초가 되기까지 한참을 기다리는 동안

아버지가 나의 싸리나무였다는 걸 깨달아

내 여린 뼈가 단단히 여물어 갔네

여름이 지날 때쯤 뒷산에 피던 본홍꽃

사방에 널렸어도 지나치기만 했는데

회초리를 든 아버지가 보이네

낭창낭창 휘어져도 부러지지 말라던 말씀

늙어 회초리를 들 기운조차 없으셔서

내가 사릿대를 꺾었네

싸리꽃은 여전히 피어나고

밑줄을 긋던 말씀은

내 몸에 붉은 꽃으로 남아 있는데

아버지는 다시 피어나지 못하네

한 줌 싸릿대를 안고 산을 내려오는

내 가슴 깊은 곳에

싸리꽃 붉게 피어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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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 혹은 줄에 관한 단상 / 지연구

 

 

택배로 부칠

상자를 묶을 포장 끈이 모자라

끈을 이어 묶다가 짧은 끈을 바라보네

애초부터 가진 끈이 짧았던 아버지

당신 끈을 내게 이어주려 무진 애를 쓰셨지

국민학교 사 년, 남의 집 더부살이

그 끈에 묶인 매듭이

모난 돌맹이처럼 늘 가슴에 배겨 아팠네

월요일 아침 애국 조회시간

줄서기가 삐뚤어져 얻어맞던 선생님의 회초리는

좋은 줄을 가져야 한다는 가르침 같았네

친구들의 질기고 화려한 나일론 줄에

새끼줄 같은 나의 끈을 슬쩍 묶어보았지만

신분이 다른 줄은 금세 풀어지고 말았네

시화공단, 꽤나 큰 포장끈 공장에서

삼십여 년 끈을 만지며 살았지만

늘어진 삶의 끈을 팽팽하게 당겨주지 못했네

너무나 느슨하고 헝클어져버려서

줄에 넘어진 생활이 동강동강 끊어지고 말았네

토막난 생활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다시 이을 수는 없었네

이어 묶은 끈으로 상자를 포장하고

매듭지어진 곳에 남은 끈을 잘라버리네

이어지지 않는 끈을

아버지도 그만 싹둑 잘라버리고 짧은 숨을 놓으셨지

 

포장 끝낸 상자를 우체국에 맡기고 돌아오는 거리

썩은 동아줄에 매달렸다 떨어지며 울부짖는*

호랑이 울음소리 여기저기 들리네

달님과 햇님이 된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간간이 들려오는 듯하네

 

* 전래동화 <햇님 달님>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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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의 문서 / 김하연

 

아버지가 밭을 매도하기로 했다

하지만 본래 소유권은 땅을 기름지게 한 거름의 몫이라며

아버지 헛기침 소리 깊어진다

워낭소리로 구두 계약 맺은 황소의 증명은

오래 전부터 게으름 피운 죄로 시효가 지났다

하지만 저 태양의 도장밥을 들고

마음이 기울어지는 해거름 등기소에 붉은 날인을 받자

지독한 진드기 등에 얹고 길을 내던 황소도

밭의 일부를 받을 수 있는 직계존속으로 인정하기로 했다

이에 질세라 쑥대밭을 만들던 잡초도 눈독 들이며

분할 청구를 시도한다

하지만 잡초를 이겨낸 앙증맞은 강낭콩 꽃과

울타리가 되어 준 돌담과

땀을 훔쳐 주던 갈바람에 잠재적 지분이 있으므로

그들에게 우선순위가 주어져야 했다

어느새 드렁 칡이 내려와 일가를 내세우고 있다

이럴 때는 믿을만한 법적 후견인이 필요하다

얽히고설킨 감자밭과 고구마 밭이 입담을 거들고 있다

아버지는 흙을 닮아 분쟁 없는 포슬포슬한 성정을 가졌기에

별도의 판단이 필요해 잠시 유보하기로 한다

그러기 이전에 부양의 의무를 다한 수수, 보리, 귀리에게

먼저 물어보기로 한다

집안의 재정을 담당하여 어머니의 푼돈이 되기도

손주들 용돈이 되어주었으니

아버지는 그들에게 마음을 더 쓰고 싶었던 것이다

자연에게 되돌려 줄 게 없는 인생은 얼마나 허무하던가

아버지 된장에 풋고추 찍어 새참을 드시더니

몹쓸 탄저병으로 돌연 떠나보낸 여럿 자식들을 그리며

 매운 맛 하나 그들의 몫으로

밭 한가운데 그렁그렁 남겨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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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빨래방 외 4편

 

 

 

 

드럼통이 지구의다 기우뚱

기우뚱 축을 따라 도는 게 아니라

통통 떨어지는 동전들을 따라 돈다

대륙을 넘어온 황사와 남지나해의 수평선이

어깨를 겯고 소쿠라지는 빨래방

밤낮 세탁기 하나로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가

우랄산맥과 치악산이 줄줄이 이어진다

갠지스 강변을 떠돌다 온 운동화도 꺼덕꺼덕

돌고 자전거 기름 묻은 청바지도

돌고 히말라야 물소리 스며든 네팔 티셔츠도

덜컹거리는 궤도를 따라 달리고 있다

위도와 경도가 마구 뒤섞이는 지구의

중국발 미세먼지 이동경로 영상이 실시간

거품을 물고 소쿠라진다

아무리 탈탈 털어도 마지막 체액 한 방울은

은근슬쩍 섞여 들 것만 같은,

여기는 원곡동 밤의 빨래터

, , 통 방 하나로 세상은 밤낮을 모르고 통한다

동전을 집어삼키느라 환하게

불 켜진 행성

 

 

    

 

 

 

 

나의 오른팔은 왼팔보다 향기롭다

 

 

 

 

고생대의 석회암 지대가 몸으로 흘러들었다

 

화산재 모래바람 속에 묻힌 화석처럼

줄기 속으로 광물질이 스며든,

꼭 나무 같았는데 만져보니 돌이었다

 

오른쪽 어깨에 석회가 뿌리내린 것 같다

진화에 진화를 거듭 마침내

화석 인간이 돼버린 건가

 

돌아 누울 때마다 동굴을 스치는 바람이 긴

신음을 끌며 가는

지층의 밤,

 

어깨에 불이 이는 듯 뼈들이 깨어나고 있다

제 상처를 핥는 짐승처럼 종순에서 떨어지는 뜨거운 소리

웅크린 바닥을 타고 흐른다

 

장례용으로 쓰인다는 생석회,

미리 흙에다 잘 섞어놓은 후 뿌려야 한다는데

 

나는 아플 때만 나를 들여다보는 습성이 있다

내가 내 속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펼쳐진 백야

어쩌면 내가 나를 미리 장례 중인지도 모를,

 

화석 인간이 고생대 지층에서 눈을 뜬다

 

 

 

 

 

 

 

웃음 가스

 

 

 

 

마시면 약한 히스테리 증상이 나타난다

고통에 대해 무감각, 더러

웃기까지 한다

 

스마트 폰에 엘리베이터 모니터에 지하철 스크린 광고판에 지치지도 않고 웃음이 폭발한다 웃음소리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일요일 밤 개그 콘서트에 붙들려 오징어를 질겅이며 웃는다 아래턱이 빠질까 감염된 몸은 좀체 다물어지지 않는데 홀몸노인 고독 사 사망 후 30일이 지나 발견. 6세 여아 혼자 집을 지키다 화재로 질식사. 압구정동 인질극, 40cm 흉기 들고 하단 뉴스 자막이 발 빠르게 지나간다

 

마취제로 사용하는 아산화질소, 장시간 흡입하면

웃다가 죽을지도 모르지

 

폭소와 신음 사이에서

마취 중 각성

환자처럼 연신,

실룩대는 얼굴

 

 

 

 

 

 

 

 

 

 

 

 

 

 

 

 

생일 케이크 촛불

 

 

 

 

산에 누가 불을 지폈나,

연기인가 했더니

백양나무다

백양나무가

피어오르고 있다

스스로 연기가 되고 있다

다 태우고

뼈만 남았다

기억하느냐 오늘을

손뼉을 칠 이파리는 다 떨어졌지만

백양나무가

풀어지고 있다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마술을 피우는 것도 아니고

오직, 벗어날 수 없는 몸을

피어오르고 있다

산능선을 넘어온 바람이

불어 끈 나무

흰 연기로 정지해 있다

 

누가,

나무 아래에 아길 묻고

생일 케이크

촛불을 켠다

 

 

 

 

 

 

 

 

 

봄 소리

 

 

 

 

농학교에서 나온 아이가 맹학교 쪽으로 간다

 

점자 벽화 앞에는 제 차림이 얼마나 어여쁜지

도무지 알 길이 없는 소녀가

기다리고 있다

 

머리를 매만지고 수줍어하는 눈치를 보아

소풍이라도 가는 모양이다

 

택시를 잡고 있다

소년이 한 쪽 손을 들고 있다가 잡고 있던 손을 꼭 쥐면,

소녀가 여의도- 한다

 

윤중로에 벚꽃이 한창이겠다

향기가 예까지 퍼져오는 듯한데

택시는 그냥 지나간다

그래도 둘은 마냥 좋아 보인다

 

나무들 수화도 볼 수 없고,

바람에 꽃잎 날리는 소리도 들을 수 없지만

 

 

 

 

출처 : 시 산 맥
글쓴이 : 시산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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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평사리 토지문학제 대상 시부문 당선작] 김혜영

 

 

실종

 

 

신천댁이 사라졌다

사흘 전까지도 웃으며 고기도 드시고

아무런 조짐이 없었다고 하지만

십수 년 전 영감이 사라지고 나서

아니 그 이전 고물고물한 아이들의 젊은 엄마일 때

설거지물을 텃밭에 뿌리러 나올 때면

가끔씩 검은 머리와 눈썹이 흐릿해지는 것을 보았다

그러다가 일곱이나 되는 아이들과 그 친구들이

대청마루에 북적일 때면 담박에

선명한 색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 간격이 너무 멀어 처음엔 눈치 채지 못했지만

새 날을 헐어낼수록 새 밤을 흘려보낼수록

온 몸의 빛깔이 옅어지기 시작했다

홀로 빈 집에서 벽 속으로 스며들었다가

마당 들어서며 부르면 느릿느릿 걸어나오곤 했다

옷감의 물이 빠지듯 짙은 색에서 옅은 색으로

형체가 사라지고 실루엣으로만 보이는 날이 늘어갔다

명절이나 휴가철 자식들이 들르는 날엔

온전한 모습으로 돌아와 지내다가

시간이 흐르면 온몸의 색이 바랬다

벽 속으로 사라지는 날이 잦아지고

옅은 회색빛을 띠다가 허공에서 불쑥

한 팔이 솟아나곤 했다

일 년 전 작은 딸이 부산으로 모셔갔을 때

실루엣만이 따라갔다가 한참 후

겨우겨우 뒤따라갔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다시 고향집 돌아와 한달 후

신천댁 벽 속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2014 평사리 토지문학제 대상 시부문 당선작 심사평

 

세상이 도무지 요령부득이라는 느낌, 뭔가 떳떳치 않고 답답하다는 느낌은 한두 사람의 것이 아닐 듯하다. 이런 시절에 시를 잡고 견디는 노릇은 갑절의 고달픔이 따를 수밖에 없다. 갈피를 잃고 마음이 분노와 미움에 휩쓸리면, 날은 서겠으되 감화력의 폭을 잃기 쉽다. 그렇다고 호시절의 꽃노래와 말놀이를 계속하자 해도 스스로 용납하기 어렵거나, 흥이 살아나지 않는다. 그런가하면 시절의 세간사에 민감한 것만이 전부일 수 없는 차원이 또한 시에는 분명 있는 것이어서, 마음의 정처를 세우는 일이 더더욱 간단치 않다. 어느 쪽이든 심호흡을 요하는 시절이다. 하기야 유사 이래 기구하지 않은 시절이 얼마나 있었는가.

 

다만 좋은 시라면, 그 형태가 어떠하건 사사로움을 넘는 대속과 희생의 차원을 지니지 않을 수는 없다는 것, 그럼으로써 읽는 사람과 쓰는 사람, 나와 남을 아우르는 우리라는 것을 어느 수준에선가 구현하게 된다는 것은 말할 수 있는 듯하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신인상의 심사는 대체로 한 세대 쯤 앞의 사람들이 맡는다. (그리고 그것이 자연스럽다) 인생과 언어의 새로운 사용법, 새로운 질감, 새로운 창법에 민감한, 모험심 가득한 젊은 후보자들에게 이것은 부담이자 갈등일 것이다. 심사위원으로 대표되는 기성의 것들은 불가피하게 보수적이고 방어적이며 몸이 무겁기 때문이다. 신인들은 바로 그런 미적 기득권을 돌파해야 한다. 자신의 매력으로 흡인하고 승복시켜야 한다. 그럴 때라야 문을 열어주는 것이다. ‘새롭되, 수긍되는 미적 새로움이라는 이율배반의 요구가 부과되고 있는 것이다. 이 때 낯섦에 대한 기성체제의 신중함이 실은 진정한 새로움에 대한 간절함의 다른 표현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립적인 것 간의 종합을 도모하는, 상극과 상생, 적대와 의존의 동시적 지양을 통해 새로운 문학적 우리를 구성하고자 하는 정신이야말로 모든 신인 선발제도의 본질이자 지혜인 것이다. 따라서 신인선발제도는 일견 새로움에 대해 방어적이지만 실은 진정한 도전과 패기에 목말라하고 있다는 것, 결코 기성의 겉멋만 따라 익힌 애늙은이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환기해두고자 한다.

 

예심위원들의 수고를 거쳐 본심에 회부된 것은 모두 16분으로, 대체로 고르고 높은 수준의 시들이었다. 다만 원만하고 덕스러운 시들에 비해, 전위적 모험과 도발의 언어들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 것이 한편 섭섭했다. 독회를 거쳐 네 분으로 다시 압축했다.

 

<거미집 외>는 언어에 대한 노련함과 시적 조형 감각이 도드라졌지만, 바로 그 이유에서 미루어졌다. 언어와 언어 사이에 탄력을 부여하는 감각 훌륭했지만, 어디선지 낯익은 조제방식과 구성원리가 거슬렸고, 현학과 허세의 우려가 지적되었기 때문이다.

 

<콩이 기원 외>는 풍부한 방언의 활용으로 매력적이었다. 이것은 백년도 안 된 인위적 표준어체계에 의해 제압되고만, 문어 기호화한 우리 글, 말의 현실에 대한 각성으로서 의미있는 것이었다. 입말의 생명성에 젖줄이 닿아있지 않으면 글말은 결코 온전할 수 없다. 그 뜻을 높이 사면서도, 다할 자리와 덜할 자리를 분간하는 심미적 균형감이 더 섬세하게 단련되어야 한다는 지적이 있었다.

 

<토우의 도시 외>는 세계를 향한 차분하고 깊은 시선이 인상적이었다. 이미지나 언어의 과용 없이도 깊이를 감당해내는 시적 구심력이 남달랐다. 다만 본 상의 운영규정을 넘는 경력으로 인하여 최종검토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었다.

 

<실종 외>는 고르게 높은 수준이었을 뿐 아니라, 눈의 깊이와 신선함이 감동적이었다. 우리 사회가 지난 백년의 근대화를 거쳐 마침내 도달한 자리의 쓰디씀을 그의 시들은 서늘한 시선과 상상력으로 포착해내고 있었다. 우리는 그 진지함과 시선의 신선함을 높이 사고, 표제작품인 <실종>을 당선작으로 삼는 데에 합의했다. 점차 색이 바래가다 마침내 벽 속으로 스며 실종을 완성하는 신천댁의 이미지는 가볍지 않은 울림을 동반한다. 다만 중복적이라고 느껴지는 대목들이 정돈된다면 좀더 시가 팽팽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견도 있었다는 점을 조심스럽지만 덧붙여 둔다. 깊고 아름다운 시인이 될 것을 믿는다.

 

심사위원 (강남주, 김사인)

출처 : 신춘문예공모나라
글쓴이 : copyzigi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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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의 풍장 / 한교만  

 

푸조나무 밑에 여행가방 하나가 버려져있다 무정형의 폐기물 잠금장치

가  풀리지 않아 안을 들여다 볼 수가 없다   어느 저녁쯤에야 반쯤 열린

가방 안에는 장거리 여행에 필요한 목록들이 가방주인의 취향대로 꼼꼼

하게 배열되어 있었다

 

공중을 날기 위해 모든 목록들은 초경량으로 압축되어 있었다   이렇게

가벼운 것들만 넣고 다녔으니 여기까지 쉽게 날아올 수 있었으리라

 

실밥이 풀린 안주머니에는

기내식의 흔적이 조금 남아있었는데

여독旅毒을 잘게 부수기 위한

옥수수 콘 몇 알과

출처가 불분명한 모래들

월동지의 메뉴가 소화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시차적응에 실패한 것이 틀림없었다

 

이동거리를 재는 손목시계는 날짜변경선에 부딪치면서 가방 한쪽 구석

에 찌그러져 있었다   버려지기 전에 한 번도 쉬지 않고 째깍거렸던  들

숨과 날숨이 동시에 멈춰있었다

 

긴 여행이 끝난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가방의 잠금장치를 푼 바람이

내장을 말끔히 비우기 위해 좁은 통로를 들락거리고,

 

십진법의  아라비아 숫자들 몇 개 나무 그늘 밑에 떨어져 있다   비밀번

호를 해제하기 위해 여러 번 쪼았는지, 끝이 너덜너덜하게 해진 바람의

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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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 장마 / 신윤서

 

 

누이가 다녀간 뒤

도시는 장마권에 접어들었다

먼지 낀 창틀을 타고 검은 빗물이 흘러내렸다

짙은 눈 화장을 한 여자가

아파트 복도 끝에서 울고 있었다

여자들은 왜 모두, 문 밖으로 나와 울고 섰는지

누이는 왜 잿빛 승복차림으로

먼 길 떠도는지

문 안에서 여자들은 울지 않는다

무표정한 눈빛은 문밖을 나섰을 때 울음이

되어 터져 나온다

저 길 끝을 돌며

빗물과 함께 소용돌이치며 흘러가는

여자들의 눈물을 본다

장마가 길어지고

파르스름하게 깎인 누이의 무덤 같은 머리엔

무성한 생각들이 잡풀처럼 자라다 베어질 것이다

닫힌 문 안에선

빗소리로 번식하는 푸른 곰팡이들

누이가 미처 뿌리 뽑지 못한

입을 다문 말들이 창궐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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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선 / 정순

 

저녁의 딱딱하고 고단한 파도 한 켠에

세월 하나 뒹굴고 있다

부력의 한쪽을 추억으로 비워낸 듯

기우뚱 균형을 놓아버리고서는 낡은 부피를 달래고 있다

얼핏 보아 고기들의 길을 단념한지 오래인 듯한,

따라온 길 파도에 녹이 슬어 보이지 않는다

저 배도 한때는 사랑을 했거나 어느 이름 모를 추억 속에서

며칠이고 향긋한 정박을 했을 것이다

불 켜진 환락의 깊이를 쏘다니거나 가슴 속으로 저며드는

이름 모를 물살들에게 운명을 맡기며 추억을 탕진했을,

나 이쯤에서 저 배의 소멸들에 대해 받아내려 한다

기억 속 깊이 끼어 있는 몇 줌의 항해일지와

폐유같은 어둠 저쪽에서 환락을 장만하던

나폴리 마르세이유 요코하마의 날들과

며칠이고 정지된 엔진 근처에서 뜬눈으로 보내던

불임의 위도와 경도를 짚어보려 한다

이튿날이면 폐유처럼 떠오르던 희망이라는 낯선 부력의 위로는

어느 해협에서 배운 악몽이었을까

나는 조용히 언젠가의 서풍이 불아와

가슴 속에서 일러주었던 말이라도 실천하듯

관념 속 무례한 부력을 내려놓고서

노을이 내주기 시작하는 저녁 쪽으로 어스름한 귀향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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