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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가 되어가는 풍경 / 김혜린

 

 

물레 위에서 점토를 돌린다

선생님은 마음의 형태대로 도자기가 성형된다고 말했다

점토가 돌아가는 물레가 있고

물레는 원을 그린다

물레가 빚어내는 바람이 원의 형태로 부드럽게 손을 휘감는다

 

생각하는 동안 점토는 쉽게 뭉그러지고

도자기는 곡선이지만 원은 아닌 형태로 성형된다

가끔 한쪽으로 기울고 일그러진다

 

그러는 동안 창밖의 개들은 풀밭 위를 빙글빙글 돈다

꼬리를 쫓으며 도는 개의 주변으로 풍경이 둥글게 말린다

부드럽고 단단한 개의 몸속에서 튀어나오려 하는 수백 개의 동그라미들

 

개들을 보면 사람은 마음속으로 무엇을 그리며 사는지 궁금해졌다

 

이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잘 재단된 옷을 입고

같은 사이즈의 길을 걷는다

 

지도를 보지 않아도 언젠가 집으로 연결되는 길에서

길을 잃는 방법을 잃어버린 동네에서

구획이 잘 나누어진 길을 직선으로 가로지른다

 

어느새 공원은 개들이 풀어놓은 동심원으로 가득 찬다

 

나는 원을 그리는 법을 배운다

꼬리에 시선을 두고 여백에 시선을 두고 선에 시선을 두고

 

시선을 한 곳에 집중하면 더 많이 돌 수 있다

넘어지지 않을 수 있다

 

누군가 내 손끝과 반대쪽 손끝 사이의 거리를 잰다

선은 아름답게 구부러져 있다

 

원이 아닌, 모든 곡선을 그리고 있다

 

아직 백자가 어떤 모형으로 구워질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나는 정성 들여 유약을 칠한다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는 길에서

여기가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은

희고 맑다

 

어느새 풍경은 백자가 되어 있다

 

 

예스이십사

 

deg.kr

- 에드픽 제휴 사이트로 소정의 수수료를 받습니다.

 
 
 

[당선소감] 보고자 마음먹으면 티끌에도 우주가 보여

 

오늘은 눈이 내렸습니다. 눈이 내리면 집 앞을 쓸어야 하지만, 저는 여전히 눈은 좋은 소식이라 생각해요. 투고하던 날에는 할머니가 꿈에 나왔습니다. 그런 것들이 좋은 징조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런 징조들에 배신당한 적이 너무 많아, 그냥 내리는 눈을 구경하며 일이나 하자,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믿을 수 없게 당선 소식을 알리는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당선이 된다면 멋진 말들을 늘어놓고 싶었는데, 그건 아무래도 저와 거리가 먼 것 같아 그냥 제 얘기를 하겠습니다. 아주 어릴 적부터 시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이번이 신춘문예에 투고한 지 10년째 되는 해입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태연해지면 좋을 텐데, 저는 그렇게 멋있는 사람이 아니라, 해가 갈수록 조바심을 내고 전전긍긍하며 보냈습니다. 간절히 무언가를 발견하기를 바라며 풀숲을 들여다보고, 밤이 될 때까지 공원의 오리들을 지켜보고, 낯선 도시의 낯선 역에 내려서 헤매도 보고. 무언가를 계속 찾아다녔습니다. 너무 간절한 꿈이었는데, 꼭 내가 되고 싶었지만, 또 꼭 나일 이유는 없어서. 그저 쓰고 또 썼습니다. 이룰 수 없는 꿈도 꿈이라 생각하며, 꿈을 미워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나날들이었습니다. 그사이에 또 출근을 하고, 밥을 먹고, 시를 쓰고, 시를 아는 척도 해보고. 이해하는 척도 해보고.

 

그러니까 시는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보고자 마음먹으면 작은 티끌 하나에서도 우주가 보이고, 보고자 마음먹지 않으면 드넓은 우주에서 작은 티끌 하나도 보이지 않으니까요. 제게 시는 한 번도 쉽게 다가온 적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사랑하는 존재였습니다. 시가 무엇인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게 다가오는 무언가, 제가 보는 무언가가 시라고 믿으며 계속 쓰겠습니다. 멈추지 않고 계속 쓰면 그게 무언가가 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아직 앞으로 어떤 시들을 쓰게 될지 모르겠지만, 백자를 굽는 마음으로 정성 들여 쓰겠습니다. 제게 다음,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는 기회를 주신 나희덕 선생님, 박형준 선생님, 문태준 선생님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겐 조만간 눈처럼 좋은 소식과 함께 연락하겠습니다. 다만, 소식을 전할 수 없는. 할머니, 아버지. 당신들이 내게 준 이름이 여기에 있어요.

 

 

 

[심사평] ‘마음의 형태’를 부드러운 조형미에 빼어나게 견줘

 

시 부문에 응모한 작품들을 세밀하게 읽었다. 작년에 비해 응모 편수는 조금 줄었지만, 응모작들의 수준은 높다는 데에 심사위원들은 의견을 같이했다. 일정 수준 이상의 작품들이 많아서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다. 응모작들은 개인적 서사를 시로 풀어낸 작품들의 비중이 컸는데, 이 작품들을 통해 삶의 질곡과 통증, 소통의 회복에 대한 열망을 느낄 수 있었다. 시적 모티프로 폐점과 채무, 구직과 고된 노동 등이 두드러지게 눈에 띄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곤고한 일상을 체감할 수도 있었다. 심사위원들이 마지막까지 주목한 작품들은 ‘행방’ ‘비광’ ‘인공눈물’ ‘어린이는 자란다’ ‘백자가 되어가는 풍경’이었다.

 

‘행방’은 외할머니의 부음을 들은 시적 화자의 내면을 담담하게 노래한 작품이었다. ‘귤’ 냄새로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이미지화하는 능력이 뛰어났고, 마음의 누선을 건드려 뭉클했다. 도입부가 다소 평이해서 아쉬움이 있었다.

 

‘비광’은 삼촌이 겪은 비탄의 내용을 기록한 작품이었다. 가게 구조와 “오 도씩 기울어진 화장실”에 대한 정밀한 관찰과 묘사가 돋보였다. 그리고 그것을 삼촌에게 곧 닥칠 절망에 대한 어두운 암시로 유효하게 연결시켰다. 개인적 체험을 보다 보편적으로 확장했다면 좋지 않았을까 싶었다.

 

‘인공눈물’은 함께 보내온 다른 시편들에 비해 새로웠다. 사물을 결합해서 정서를 만들어내는 신선한 솜씨가 있었다. 이 작품은 영화를 보며 “울지 않는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화자의 행위를 통해 오히려 우리의 가슴에 있는 공통의, 애련(哀憐)의 감정을 발견해내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돌려놓을 수 있는 모양은 없어요”와 같은 표현에서처럼 모호한 진술이 더러 있었다.

 

‘어린이는 자란다’는 성장기를 다뤘는데 자아와 가족과의 관계를 진솔하게 표현해 감동적이었다. 시행의 경쾌한 보법도 인상적이었다. 서사가 길어지면서 긴장감을 상쇄하는 점을 보완할 필요가 있었다.

 

고심 끝에 심사위원들은 ‘백자가 되어가는 풍경’을 당선작으로 뽑는 데에 동의했다. 우선 이 작품을 포함해 응모한 작품들의 수준이 고르고 안정적이었다. 산문적인 느낌이 없지 않았지만, 생신(生新)한 이미지와 사유의 쌓임이 특별하게 만들어낸 시구들이 곳곳에 보석처럼 박혀 있어서 시를 견고하게 지탱하고 견인해낸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특히 당선작은 맑고 투명한 시선으로 마음속에 있는 깨끗한 서정을 빚어내는 데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단순하게 도자기를 빚어내는 경과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구획된 직선과는 대별되는 곡선과 둥긂을 지향하는 마음의 형태를 백자의 부드럽게 굽은 조형미에 빼어나게 견주었다. 이러한 안목과 감각이라면 앞으로 시단에서 자신만의 육성을 산뜻하고 묵직하게 표출할 신예라는 데에 깊은 신뢰와 기대를 갖게 했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 심사위원 나희덕·문태준·박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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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자 놀이 / 김보나

 

 

내 방엔 뜯지 않은 택배가

여러 개 있다

 

심심해지면

상자를 하나씩 열어 본다

 

오래 기다린 상자는

갑자기 쏟아지는 풍경에 깜짝 놀라거나

눈을 떴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건 착각이야

세계는

 

누군가 눈을 뜨기 전에

먼저

빛으로 눈꺼풀을 틀어막지

 

나는 상자가 간직한 것을 꺼내며 즐거워한다

 

울 니트의 시절은 지났고

이 세제는 필요하다

 

새로 산 화분을 꺼내

덩굴을 옮겨 심으면

내 손은 순식간에 흙투성이가 된다

 

그래도 돼

뮤렌베키아 줄기가 휘어지는 방향을 따라가도 돼

 

친구는 이것을 선물하면서

식물은

쏟아지는 빛의 자취를 따라가며

자란다고 말했지

 

방을 둘러보면

여전히 상자가 수북하다

 

이삿짐이거나

유품 같다

 

빈 상자가 늘고

열 만한 것이 사라져 가면

 

나는 이 방을 통째로 들어

리본으로 묶을 궁리를 해 본다

 

 

 

 

[당선소감] 다르게 말하는 방법 활자가 열어준 세계

 

겨울의 초입, 갑상선암 진단을 받았다. 완치 가능성은 높지만 갑상선을 절제하는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마음이 얼어붙었다. 출퇴근길, 바삐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생각했다. 단단한 빙하가 된 것 같다고, 점점 부서지고 작아질 얼음이 되어 먼 하류로 떠내려가는 것 같다고.

 

막막한 그때, 당선 전화를 받았다. 거짓말처럼 생일에 걸려 온 전화는 이렇게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엔딩 크레디트가 내려진 것처럼 살지 말라고, 너는 이제 활자의 세계에서 다시 태어날 거라고.

 

언젠가, ‘얼음의 노래를 들은 적이 있다. 촬영감독 요나 인톤은 팽팽한 빙판이 호수 한가운데에서 깨지는 순간을 영상으로 포착했다. 길고 깊은 균열이 생기는 그때, 얼음은 노래한다. 나는 무언가를 잃어 가는 사람들의 곁에 있고 싶다. 그러한 방식으로 노래하는 법을 배우기로 하면서.

 

고마운 사람들의 이름이 어둠 속에서 하얗게 떠오른다. 서툰 나를 받아 주는 아네스와 베드로, 오빠와 두 동생과 다투고 또 사랑하며 살아갈 것이다. 삼십 대가 되면 좋은 일이 더 많이 찾아온다고 한 혜지 언니, 초등학생 때부터 서로 곁을 지켜 준 미혜와 수인, 평생 미더운 눈빛 서우종 선생님, 널 믿는다는 말 대신 말없이 손을 잡는 진희, 언니는 시인이 될 거라고 나보다 앞서 믿은 윤혜, 함께 글을 쓰고 사계절의 풍경을 여행한 지혜, 혜배, 혜라에게 고맙다. 무지개책갈피와 상처를 드러내지 않는 글쓰기 친구들, ‘SOH’가 있어 일하는 나날 가운데에서도 마음을 가다듬으며 읽고 쓸 수 있었다. 쭈뼛대며 수업에 찾아온 사범대생을 격려한 한영옥 시인님,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는 법에 대해 알려 준 김상혁, 황인찬, 김소연, 김언 시인님과 첫걸음을 응원해 준 심사위원님들께 갓 우린 차처럼 따뜻한 감사를 전하고 싶다.

 

모두에게 행운이 깃들었으면 좋겠다. 숨은 씨앗을 어떻게든 찾아내 싹을 틔우는, 햇빛을 닮은 힘이 이 글에 어리면 좋겠다. 앞으로도 활자를 믿고 쓰면서, 어쩌면 날 녹일지도 모를 빛과 사랑을 따라 흔들리며 나아가고 싶다.

 

 

 

 

[심사평] 평범한 소재서 리듬감 이끌어낸 상상력서정시 품격 한층 높여

 

심사는 예심과 본심을 통합해 진행됐고, 논의를 거쳐 10여 편의 작품이 본심에 올랐다. 이 중에서 가뭄’ ‘포도’ ‘청년 희망 회복’ ‘상자 놀이가 경합한 끝에 상자 놀이가 당선작으로 선정됐다. 마지막에 아쉽게 수상의 영예에서 밀려난 다른 작품들 역시 서정적 울림과 개성을 지닌 높은 수준을 보여줬다는 것이 심사위원들의 중론이었다.

 

가뭄은 자연어의 결합을 통해 영혼의 갈증과 슬픔을 형상화해내는 언어 감각이 눈에 띄었다. ‘포도는 도입부의 돌발적인 이미지가 끝까지 유지되는 흡인력과 의미의 여운을 증폭시키는 간결한 시상 전개가 인상적이었다. ‘청년 희망 회복은 변두리 재개발지와 도시계획 차원에서의 개발행위의 상관관계를 통해 사회적 관심을 환기해내는 시선의 힘이 돋보였다. ‘상자 놀이는 평범한 일상의 소재에서 운문적 리듬감을 이끌어내는 풍부한 상상력과 감성이 감탄을 자아냈다.

 

이 작품들에 대한 심사위원들의 일차 의견 교환이 있고 난 다음 가뭄은 언어 감각의 화려함에 비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불투명하다는 점, ‘포도는 돌올한 언어 배치가 인상적이지만 한편으론 그것이 행간의 깊이를 모호하게 만든다는 점이 각각 지적돼 제외됐다. 최종적으로 청년 희망 회복상자 놀이가 남았다. ‘청년 희망 회복은 재개발지에 꽂힌 깃발을 통해 세계가 재편되고 그 안으로 모든 것이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는 현실을 지적하는 사회적 비판의식과 구체적 사실감이 코로나19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의 마음을 대변한다. 다소 시가 직설적이고 산문적이라는 점이 고심케 해 당선작이 되지 못했지만 이 응모자의 앞날을 기대하게 한다. 결국 끝까지 남은 상자 놀이가 별다른 이견 없이 만장일치로 당선작으로 선정됐다.

 

우선 상자 놀이는 간결하면서도 풍부한 여백의 미가 서정시로서 갖춰야 할 품격을 한층 높인다. 시상을 전개하는 맑고 순수한 시행의 흐름이 행과 행, 연과 연 사이에서 막힘없이 운용돼 운문적 리듬감으로 충일하다. 또 시행과 시행을 건너뛰는 간결함과 담백함으로 우리 마음의 여백에 잔잔한 파문을 남기는 풍부한 상상력이 여운을 자아낸다. 이 시는 뜯지 않은 택배라는 평범한 일상의 소재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것을 구태의연하게 쓰지 않고 현실에 발을 댄 독특한 시선으로 변주하는 공간 변용 능력과 감정의 안배가 뛰어나다. 상자의 닫혀 있음과 열림, 그를 통해 드러나는 어둠과 빛이 팬데믹 시대의 도시적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속내를 주거 공간에 집약해낸다. 무엇보다 당선작과 함께 보내온 응모작들의 수준이 고른 점도 안심케 하는 대목이다. 산문화와 장식적인 수사가 대세를 이루는 오늘날의 시적 풍경 속에서 이 신예시인이 현실 세계와 상상 세계를 덧대어 어떤 삶의 박동과 리듬을 우리에게 선물해줄지 큰 기대를 가지며,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나희덕·박형준·문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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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등장하지 않는 이 거울이 마음에 든다 / 남수우 

 

 

한 사람에게 가장 먼 곳은

자신의 뒷모습이었네

 

그는 그 먼 곳을 안으러 간다고 했다

 

절뚝이며 그가 사라진 거울 속에서 내가 방을 돌보는 동안

거실의 소란이 문틈을 흔든다

 

본드로 붙여둔 유리잔 손잡이처럼

들킬까 봐

자꾸만 귀가 자랐다

문밖이 가둔 이불 속에서

나는 한쪽 다리로 풍경을 옮기는 사람을 본다

 

이곳이 아니길

이곳이 아닌 나머지이길

중얼거릴수록 그가 흐릿해졌다

 

이마를 기억한 손이 거울 끝까지 굴러가 있었다

 

거실의 빛이 문틈을 가를 때 그는 이 방을 겨눌 것이다

번쩍이는 총구를 지구 끝까지 늘리며

제 뒤통수를 겨냥한다 해도 누구의 탓은 아니지

 

거울에 남은 손자국을 따라 짚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내게 뒷모습을 안겨주던 날 모서리가 처음 삼킨 태양을 생각했다

흉터를 간직한 햇살이

따갑게 몸 안을 맴돌고 있을 거라고

 

뒷모습뿐인 액자를 돌려세운다

 

거울 속에는

하얀 입김으로 떠오른 민낯들이 너무 많았다

 

 

 

 

 

[당선소감] 당신을 위한 하나 온전히 그려볼수 있길

 

아주 오래전 누군가 나를 위해 죽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믿었다. 그 불가능을 속삭였던 입술은 이제 영원한 뒷모습으로 내게 남아 있다. 내게 주어진 이야기. 이 믿음으로 사람 하나 불러 세우지 못하지만, 한편으론 이 믿음으로 가능한 생활이 있다면, 그것이 전부라는 생각도 든다. 누군가의 죽음이 나와 무관하지 않으므로. 여전히 그 뒷모습이 누구의 것인지 모른다. 그것은 퇴근길 전철에서 졸고 있는 흐린 눈이었다가, 국밥집에서 보았던 알찬 팔뚝이었다가, 같은 우산 아래 설핏 닿은 손등이었다가, 빈 유모차를 밀고 가는 둥근 이마였다. 어쩌면 내가 아닌 모든 것일지도. 나의 생활이 되도록 그 누군가를 향한 애도이기를 바랐지만, 부끄럽게도 충분한 적이 하루도 없었음을 고백한다.

 

그런데도 기다렸다. 기다림 없이 기다렸다. 언젠가 내가 당신을 위한 품 하나를 온전히 그려볼 수 있기를. 매일 저녁 꼬박꼬박 수원지의 둘레를 달리듯, 불안한 내가 완전한 원을 결코 그릴 수 없을지라도 말이다. 이제 더 이상 문학에 구원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삶에 대한 어떤 자세를 나는 문학에서 길어 보았다. 그리고 다시 이야기가 있었다. 돌 하나를 쥐고 네가 오고 있다고 들었다. 미리 마중 나와 기다려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한 시절을 묶어 두고 사람들을 떠나 있었다. 그동안 외면했던 문제들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싶었다. 용서와 화해로 생활을 돌보던 나날을 지나, 지금 어딘가에서 나를 기억하고 있을 누군가에게 가장 먼저 건강과 안부를 묻고 싶다. 문학을 통해 만난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함께 무수히 산에 올랐던 꽃가루 산악회 친구들에게. 전당포 필름의 태민이 형과 캔버스 앞의 빈이 형에게. 늘 멀리 떠나 있던 나를 향해 손 흔들어 준 동생 수안이와 부모님께, 여러 계절을 지나 곁이었다. 그리고 내가 아껴 발음하는 단 하나의 소리에게, 감사와 애정을 접어 부친다. 문득 너무 먼 곳에 있는 세 사람의 얼굴이 떠오른다. 보이지 않아도 곁에 있다고 적어 보았다.

 

 

 

 

 

[심사평] ‘에 대한 예민한 감각과 사유좋은 시인으로 살 것이란 믿음 들어

 

올해부터는 예심과 본심을 통합하게 돼 심사하는 데 오래 걸리긴 했지만, 전체적인 수준이나 경향을 파악하면서 좋은 작품을 선별해갈 수 있었다. 725명의 투고작 3625편을 읽는다는 것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어려운 시절을 통과하고 있는 이 시대의 풍경과 사람들의 내면을 읽어내는 일이기도 해서 더 각별하게 느껴졌다. 예년보다 무겁고 우울한 분위기가 강해졌고 상상력도 다소 위축된 것처럼 보였지만 경제적 어려움과 심리적 고립, 관계의 단절 등을 뚫고 희미한 빛을 찾아 나가려는 고투가 시편마다 절실하게 담겨 있었다.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시대에 시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을 품고 수많은 기록과 증언, 고백과 발언, 노래와 기원들을 공감하며 읽었다. 심사자들이 마지막까지 주목한 작품은 가드닝’ ‘흰 토르소와 천사들의 나날’ ‘인공호수’ ‘에그조프쉬시즘’ ‘서른셋, 생일이 아직 또렷한’ ‘아무도 등장하지 않는 이 거울이 마음에 든다등이었다. 이 여섯 분의 작품은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고 남다른 개성을 지니고 있어서 무엇을 당선작으로 해도 좋을 만큼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가드닝은 간결하고 리드미컬한 언어로 의미의 여운을 증폭시키는 시적 재능과 섬세하고 투명한 감각이 매력적이었다. 그런데 이 식물적 언어의 세계는 다소 수동적이고 부서지기 쉬운 느낌이 들기도 했다. ‘흰 토르소와 천사들의 나날은 현실의 남루함을 환상으로 감싸며 따뜻하고 환하게 만드는 힘을 지녔다. 인상적인 문장이 많지만 세부에 들이는 공력에 비해 전체적 구조나 결말이 약하다는 점이 아쉬웠다. ‘인공호수는 군더더기 없는 언어로 의미를 구축해나가는 솜씨가 노련하고 관찰력과 집중력이 뛰어난 작품이다. 그런데 사진을 찍듯이 묘사 위주로 전개하다 보니 다소 평면적인 느낌을 주기도 한다. ‘에그조프쉬시즘은 원룸에서 일어난 고독사와 애완견을 중심으로 사회적 비극이 어떻게 봉합되는지를 강렬하게 보여준다. 다른 작품들에서도 도시와 문명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드러나고 있는데, 작품 간의 편차가 크다는 아쉬움이 들었다. ‘서른셋, 생일이 아직 또렷한은 운문성과 산문성을 적절히 조율하며 긴장을 유지하고 있지만, 묘사와 진술의 연결이 좀 더 자연스럽고 뒷심이 있으면 좋겠다.

 

당선작으로 뽑은 아무도 등장하지 않는 이 거울이 마음에 든다는 뒷모습과 거울을 둘러싼 사유의 변주가 거울의 안과 밖, 문의 안과 밖, 지구와 태양 등으로 확장되며 몇 겹의 비유적 공간을 만들어낸다. 산문적 언어로 쉽게 환원되지 않는 이 모호함은 본드로 붙여둔 유리잔 손잡이처럼 미세한 균열의 기억과 무수한 틈을 내장하고 있다. 에 대한 예민한 감각과 사유가 그를 좋은 시인으로 살게 하리라는 믿음이 들었다. 당선을 축하드리고, 앞으로도 자신의 뒷모습” “그 먼 곳을 안으러매 순간 떠나는 시인이 되길 바란다.

 

심사위원 나희덕·박형준·문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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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투 / 차유오

 

 

물속에 잠겨 있을 때는 숨만 생각한다

커다란 바위가 된 것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손바닥으로 물이 들어온다

 

나는 서서히 빠져나가는 물의 모양을

떠올리고

볼 수 없는 사람의 손바닥을 잡게 된다

 

물결은 아이의 울음처럼 퍼져나간다

내가 가지 못한 곳까지 흘러가면서

 

하얀 파동은 나를 어디론가 데려가려 하고

 

나는 떠오르는 기포가 되어

물 위로 올라간다

 

숨을 버리고 나면

가빠지는 호흡이 생겨난다

 

무거워진 공기는 온몸에 달라붙다가

흩어져버린다

 

물속은 울어도 들키지 않는 곳

슬프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모든 걸 지워준다

 

계속해서 투명해지는 기억들

 

이곳에는 내가 잠길 수 있을 만큼의 물이 있다

 

버린 숨이 입안으로 들어오려 한다

 

 

 

 

2020 신춘문예 당선시집

 

nefing.com

 

 

 

[당선소감] 세상에 숨겨져 있는 아름다움 찾아다닐 것

 

시를 쓸 때 떠오르는 대로 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의미를 담아 읽어준다. 시를 읽어준 사람들을 잊지 않고 쓸 것이다.

 

문정희 선생님, 김기택 선생님, 박형준 선생님, 문태준 선생님. 제 시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장 사랑하는 엄마 아빠, 엄마 아빠가 행복한 일을 했으면 좋겠어요. 남진우 교수님, 천수호 교수님, 김경후 교수님, 신수정 교수님, 편혜영 교수님, 김유진 교수님, 김효진 교수님, 교수님들의 수업을 들을 수 있어서 행복했어요. 사랑하는 박상수 교수님, 교수님의 다정함을 잊지 못할 거예요. 지연아, 지원아, 종희야, 서로를 알고 있는 우리가 좋아. 애리야, 놀 때마다 즐거운 네가 좋아. 유나야, 이상한 얘기를 할 수 있는 네가 좋아. 지수야, 해임아, 싫은 사람을 같이 욕해주는 너희가 좋아. 희진아, 까칠해도 착한 네가 좋아. 희주야, 엽사를 보내주는 네가 좋아. 소랑아, 볼 때마다 웃긴 네가 좋아. 효정아, 나를 이뻐해주는 네가 좋아. 현정아, 나를 이해해주는 네가 좋아. 영후야, 놀려도 웃을 수 있는 네가 좋아. 세영아, 인영아, 혜지야, 하늘아, 강한 너희가 좋아. 태연아, 학회장을 같이한 네가 좋아. 원경아, 똑 부러지는 네가 좋아. 수연이 형, 형 같은 형이 있어서 좋아. 찬연아, 시작이라고 말해준 네가 좋아. 작앤비 친구들아, 종일 함께 있어도 어색하지 않은 너희가 좋아. 둥이야, 귀여운 네가 좋아.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남는 건 마음 같다. 가끔은 잊을 때가 있지만, 어떻게든 기억하고 싶다. 세상에는 숨겨져 있어 아름다운 게 있다. 나는 그것들을 찾아다닐 것이다.

 

 

 

 

 

[심사평] 내면 탐색 능력 뛰어나 앞으로 큰 작품 쓰리라 기대

 

본심에 오른 18명의 응모작은 고르고 안정된 수준을 보여주었으나 눈에 띄는 한 편은 잘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 자백은 높은 완성도와 주제에 대한 집중력이, ‘침투는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신인다운 신선함이 눈길을 끌었다. 숙고를 거듭한 끝에 침투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자백은 말을 하지 않아야 하는 상황, 혼자인데도 제 안에서 나오려는 원시적이고 무의식적인 발화를 억누르고 스스로 제 말을 검열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진실한 발화가 무엇인지 묻는 문제의식이 강렬하다. 삶을 화석화시키는 일상적 발화와 형태도 체계도 없는 무의식적인 발화 사이에 끼어 있는 극적인 상황을 제시함으로써 이 질문에 긴장감을 끌어올린 점도 음미할 만하다. 그러나 관념을 작위적으로 드러낸 은유가 단점으로 지적됐다.

 

당선작 침투는 잠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화자의 내면과 물속이라는 공간에 대한 미시적이고도 섬세한 묘사가 돋보였다. 이 시는 빈약한 숨통에 존재의 모든 것을 기대야 하는 물속의 상황을 자신에게 부여하고, 몸으로 침투하는 물의 압력과 숨 막힘, 밀폐된 공간에 대한 두려움, 볼 수 없는 사람의 손바닥이라도 잡아야 하는 치명적인 막막함을 냉정하게 관찰하는데, 그 시선에서 일상적 자아와는 다른 존재를 발견하고 사유할 수 있는 틈이 생긴다.

 

친숙한 물 밖의 세계와 다른 시공간인 물속은 화자를 저항할 수 없는 숨 막힘으로 압박하는 고통스러운 곳이지만, 동시에 울어도 들키지 않고 슬픔조차 무화되는 완전한 고독이 있는 매혹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익사할 것 같은 공포와 숨을 버려서 완전하게 혼자가 되는 자유가 교차하는 심리의 이중성이 시에 독특한 에너지를 부여한다. 광장이라고 할 수 있는 물 밖에서 밀실이라고 할 수 있는 물속으로 가려고 하면서도 벗어나려는 심리는 내면에서 일어나는 시의 비밀스러운 사건을 은밀하게 엿보게 한다. 물속 이미지와 움직임을 통해 내면을 탐색하는 탁월한 능력은 앞으로 더 큰 작품을 쓸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주기에 충분했다.

 

심사위원 문정희·김기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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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할머니와 아무르 강가에서 / 조온윤

 

 

할머니가 있어

아직 사라지지 않은

 

가판대 위 물고기의 눈알처럼

죽어가면서도 시선을 잃지 않아서

그 아득한 세월의 흔들의자에 앉아 여전히

이승의 장경을 관망하고 있는

 

아무르 강가에서 늙고 지친 호랑이가

밀렵꾼들에게 가족을 잃은 마지막 호랑이가

수면 위로 얼굴을 비추는 순간

마르고 거친 혓바닥을 내밀어 적시는 순간

늙은 호랑이는 마주하게 되지

마지막 할머니를

 

초원 위를 뛰어가는 사슴들을 멀리서

그저 멀리서 바라보고만 있는 위구르족 여자의 시선을

그 시선의 수심을 도무지 헤아릴 수가 없어서

심해어의 눈처럼

어딘가에 있겠지만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무언가 보고 있겠지만 무얼 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초점이 없이도 자전하는 지구본처럼

 

물고기의 눈알이 빨간 국물에 적셔졌다면, 지금쯤 식탁 위에서

눈알을 도려냈다면 어두컴컴한 하수구 어디쯤에서

삼켰다면 고래의 뱃속에서

여전히 관망하지

세계를

그곳의 공감각을

 

머지않아 모든 할머니들이 사라진 시대가 온다고 해도

목을 축이러 찾아간 아무르 강가에서

저 멀리 초원 위를 뛰어다니는 사슴들밖엔 바라볼 수 없다고 해도

 

호랑이는 그 눈을 죽는 순간까지 기억하지

죽은 뒤에도 시선을 잃지 않아서

흔들의자는 혼자서도 오랫동안 흔들거리지

 

 

 

2019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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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입에 가지를 물고 돌아온 하얀 새를 본 것만 같다

 

학교를 졸업한 뒤 이제는 무얼 하며 살아야 할까 생각하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혼자서 망양 한가운데를 표류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시를 쓰는 일이 혼자서만 보는 새를 기르는 것처럼 무력하고 무용하게 느껴졌다. 이제는 새를 놓아주어야 할까. 새는 내 안에 갇혀 병들고 있는 걸까.

 

불안하고 슬펐다. 새를 풀어주어도 새가 나를 떠나지 않길 바랐다. 뭍을 그리워하며 비둘기를 날려 보냈던 방주 위의 노아처럼, 실은 내가 발 디딜 수 있는 곳이 있길 바라며 먼 곳으로 흰 종이를 부치고 또 부쳤던 거 같다. 입에 가지를 물고 돌아온 하얀 새를 본 것만 같다.

 

그간 나의 방주가 되어준 사람들에게 감사드리고 싶다. 언젠가 생의 이면을 읽고 얻은 힘이 지금도 내 안에 남아있다. 이승우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마음이 힘들었을 때 나희덕 선생님께서는 사라지지 않는 알약을 건네주셨다. 마음에 감기가 든 거라고 여기라던 말씀을 여전히 알약처럼 품고 있다. 감기는 흔한 거고 며칠 앓고 털고 일어나면 그만이다. 신형철 선생님께서 내 등을 쓰다듬으며 위로해주신 것을 기억하실는지 모르겠다. 어떤 온기는 몸에 그대로 남아 식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가능성을 봐주신 문화일보와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말이 없어 지루한 내 곁을 떠나지 않아 준 친구들에게 고맙다. 그리고 내색은 않지만 분명 나를 사랑하고 있을 누나, 이와, 엄마에게, 나 또한 사랑한다고 전하고 싶다. 아빠에게, 더는 미워하지 않는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심사평] 자연의 냉혹한 질서와 죽음의 공포, 삶의 애착을 무심하게 바라 봐

 

신춘문예 시 심사는 35편의 완성도가 높고 고른 투고작 중에서 투고자의 역량이 집중된 한 편을 선정한다. 우리 시단에 즐거운 자극을 줄 새로움도 기대하게 된다. 이런 점이 이른바 신춘문예 유형을 형성하게 되는 것 같다. 예심에서 올라온 13명의 작품 중에서 마지막까지 논의된 그 한 편사돈’ ‘헤드셋 소녀’ ‘바닥 꽃 핀다’ ‘마지막 할머니와 아무르 강가에서4편이었다.

 

사돈은 사물의 모습이나 움직임을 소리로 듣고 냄새로 감지하는 빼어난 공감각적 이미지로 표현하면서 만물이 사돈이라는 인식을 드러낸 작품이다. 귀로 듣는 말에서 벗어나 세계와 온몸으로 교감하려는 태도가 주목할 만했으나 비약이 심한 몇몇 문장들은 부자연스러웠다. ‘헤드셋 소녀는 헤드셋 음악에 스스로 갇혀 지내는 소녀의 내면적 움직임을 체험시키는 감각적인 이미지와 그 음악을 연상시키는 스타카토 리듬이 인상적이었다. 표현 기법만으로 본다면 으뜸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소녀의 목소리에서 어른의 관념이 감지되어 아쉬웠다. ‘바닥 꽃 핀다는 냄비에 끓는 물에서 단단한 바닥을 뚫고 올라와 꽃피우는 봄의 에너지를 즐겁게 상상한 점, 일상의 경험을 자연스럽게 육화시킨 점이 볼만하였으나 미적 인식보다 아이디어에 의존한 점은 한계로 지적되었다.

 

숙고와 논의를 거쳐 죽기 직전에 할머니가 바라본 풍경과 할머니의 죽음을 기억하는 호랑이의 시선을 스케일이 큰 상상력으로 진술한 마지막 할머니와 아무르 강가에서를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이 시는 지상의 수많은 삶과 죽음을 자신의 몸으로 겪어낸 것 같은 할머니가 자신의 마지막을 풍경화처럼 바라보는 시선과 개개의 삶을 넘어 생태계에 각인된 기억에 따라 움직이는 호랑이의 시선을 교차시키고 있다. 서로 얽히면서 소멸되어가는 두 시선은 자연의 냉혹한 질서와 죽음의 공포, 삶의 애착을 무심하게 바라보는 어떤 거대한 눈을 떠올리게 한다.

 

이 시는 우리 현실과 다소 거리가 있는 소재와 한 편의 시가 감당하기 쉽지 않은 큰 주제로 인해 관념에 떨어질 위험이 있으나 세밀하고 끈질긴 상상과 삶과 죽음의 순환을 꿰뚫는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한 통찰이 그런 우려를 잘 떨쳐내고 있다.

 

심사위원 정호승·김기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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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코니의 시간 / 박은영

 

 

필리핀의 한 마을에선

암벽에 철심을 박아 관을 올려놓는 장례법이 있다

고인은

두 다리를 뻗고 허공의 난간에 몸을 맡긴다

이까짓 두려움쯤이야

살아있을 당시 이미 겪어낸 일이므로

무서워 떠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암벽을 오르던 바람이 관뚜껑을 발로 차거나

철심을 휘어도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그저 웃는다

평온한 경직,

아버지는 정년퇴직 후 발코니에서 화초를 키웠다

생은 난간에 기대어 서는 일

허공과 허공 사이

무수한 추락 앞에 내성이 생기는 일이라고

당신은 통유리 너머에서 그저 웃는다

암벽 같은 등으로 봄이 아슬아슬 이울고 있을 때

붉은 시클라멘이 피었다

막다른 향기가

서녘의 난간을 오래 붙잡고 서있었다

발아래 아득한 소실점

더 이상 천적으로부터 훼손당하는 일은 없겠다

하얀 유골 한 구가 바람의 멍든 발을 매만져준다

해 저무는 발코니, 세상이 한눈에 보인다

 

 

 

2018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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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5이별 통보한 애인이 내 발목 잡은 기분

 

허기가 졌다. 국거리용 소고기를 구워 먹고 책상에 앉아 끼적거리고 있는 사이 당선 연락을 받았다. 예고 없이 찾아온 전화였다. 멍하니 하루를 보냈다. 나보다 지인들이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당선작은 5년 전에 써놓고 묵혀두었던 시다. 그토록 간절하게 원했던 겨울은 그때였었다. 우리, 이제 헤어져. 애인에게 이별 통보를 하고 돌아서는데 나쁜 남자였던 그가 발목을 붙잡은 기분이다. 사는 일이 이렇다. 내 뜻대로 되는 게 어디 있던가.

 

시 쓰는 거 힘드니까 그만두라는 말로 매년 위로하던 가족들, 이종섶·조수일·김형미 시인님, 이건수·한철희 목사님내가 나로 살아갈 수 있는 건 전적으로 이분들의 존재 덕분이다. 특히, 나의 아들아! 창문 없는 고시원을 거쳐 이민 가방을 끌고 그 먼 길을 가는 동안 얼마나 막막했니. 비록 웅크리고 꿈을 꾸지만 볕 들 날이 너에게 오리라 믿는다. 너와 나는 약하지만 언제나 강했다.

 

황동규, 정호승 선생님께 머리 숙여 깊이 감사를 드린다. 아무튼 이건 기적이다. 겨자씨만 한 믿음이 나에게 있었던가. 돌이켜보면 나의 반석, 나의 구원, 나의 산성이신 하나님 아버지께 부끄러울 따름이다. , 겨울이 가고 그 길로 다시 추운 겨울이 오겠지만 이제 나는 시편 같은 봄을 기다릴 것이다.

 

 

 

구름은 울 준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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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風葬문화라는 구체성 통해 삶과 죽음의 동일성 깨닫게 해

 

시는 말과 언어를 다루는 기술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인간 삶의 내면을 응시하는 깊은 사고와 이해에서 나온다는 점을 투고자들이 간과하고 있는 듯해서 안타깝다. 우리 삶과 유리된 채 공연히 초현실적으로 매끄럽게 톡톡 튀는 느낌을 주는 작품이 많다는 것은 시를 쓰는 기술이 앞선 작품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본심 최종심까지 오른 작품은 이창원의 금요일기’, 홍경나의 먼우물’, 최민주의 그림자 동물원’, 이영란의 ’, 박은영의 발코니의 시간’ 5편이었다. 이 중에서 피상적이고 관념적이며 감상적인 작품을 먼저 배제하고 나자 발코니의 시간’ 2편이 남게 됐다.

 

이라는 말의 유사성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한 시다. 짚을 감아줌으로써 감나무는 혹한의 겨울을 견딜 수 있고, 그 짚 속에 기어든 벌레들 또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는 내용이 시의 전체를 이루고 있으나 평이함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나무에 짚을 감아주는 의미가 모성적 차원으로까지 승화됐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나무들도 영혼이 있다면/ 저 짚에 조용히 은거하고 있을 것이다와 같은 결구 또한 평이하고 안이하다고 판단돼 결국 발코니의 시간이 당선작으로 결정됐다.

 

발코니의 시간은 삶의 고통에 대한 견딤이 죽음의 고통 또한 견디게 해준다는 중의적 의미가 내포된 시다. 정년퇴직한 뒤 발코니에서 화초를 키우는 아버지의 현재적 삶과 암벽에서 풍장의 과정을 겪고 있는 죽음의 삶을 발코니의 통유리를 경계로 대비함으로써 삶과 죽음의 동일성을 깨닫게 해준다. 자연적인 해체의 과정을 견디는 풍장 그 자체가 바로 오늘의 삶에서도 가장 요구되는 인내의 덕목이라는 것이다. 삶과 죽음이라는 관념성을 풍장 문화라는 구체성을 통해 나타내고 있는 점이 이 시의 힘이자 장점이다. 신춘문예에 당선된다는 것은 마치 하나의 새로운 우주를 만난 듯한 기쁨일 것이다. 진심으로 당선을 축하한다.

 

심사위원 황동규·정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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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판화 / 진창윤

 

 

목판 위에 칼을 대면

마을에 눈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목 안쪽으로 흘러들어 고이는 풍경들은 늘 배경이다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는 여자의

문 따는 소리를 들으려면 손목에 힘을 빼야 한다

칼은 골목을 따라 가로등을 세우고 지붕 위에 기와를 덮고

용마루 위의 길고양이 걸음을 붙들고

담장에 막혀 크는 감나무의 가지를 펼쳐준다

나는 여자의 발소리와 아이의

소리 없는 울음을 나무에 새겨 넣기 위해

밤이 골목 끝에서 떼쓰며 우는 것도 잊어야 한다

불 꺼진 문틈으로 냄비 타는 냄새가 새어나오더라도

칼을 놓지 않아야 한다, 그쯤 되면

밤 열두 시의 종소리도 새겨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삶의 여백은 언제나 좁아서

칼이 지나간 움푹 팬 자리는 서럽고 아프다

지붕 위로 어두운 윤곽이 드러나면 드문드문 송곳을 찍어

마치 박다 만 못 자국처럼 별을 새겨 넣는다

드디어 깜깜한 하늘에 귀가 없는 별이 뜬다

여자는 퉁퉁 불은 이불을 아이의 턱밑까지 덮어주었다

내 칼이 닿지 않는 곳마다 눈이 내리고 있다

 

 

 

2017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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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그냥 습관처럼 쓰며 무지렁이처럼 살 터

 

영상의 시대, 예술의 죽음을 선언한 시대, 문자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라고, 가려움에 견딜 수 없어 토하고 마는 어떤 묵상이라고 믿으며, 자꾸만 녹아 들어가는 빙산 위에 허수아비처럼 서 있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기형도 때문이었습니다. 2년 정도를 아무것도 안 하고 시만 읽고 시만 썼습니다. 아니 시 흉내를 냈습니다. 색이 다른 단어가 만나는 경계에서 출렁거리는 낯선 감흥. 그 맛깔나는 단어들을 찾아 문장 속을 헤엄치다가 잠들다가 했습니다. 누군가는 말했습니다. 좀 더 간절해야 한다고, 좀 더 절박해야 한다고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에서,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일들이 일상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동화적 상상력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어쩌면 무모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잠깐 스쳤을 뿐인데, 뭐가 묻어난다는 말을 듣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자연에 대하여, 자신에 대하여 질문하며 살아가겠습니다. 어떡하면 지루한 얘기를 지루하지 않게 말할까 고민하겠습니다.

 

이제 돌아오지 못할 길에 들어섰습니다, 속절없이 주어진 시간을 무모하게 써 내려 가겠습니다. 부질없음을 탓하지 않고, 그냥 습관처럼 하던 일을 계속하며 무지렁이처럼 살아보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거울 속의 나를 몰라보고 그냥 웃습니다. 들어가는 문은 있으나 나가는 문은 없습니다.

 

서툴기 짝이 없는 저를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또한, 우석대 문창과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독하게 살겠습니다.

 

 

 

 

[심사평] 조각 칼끝 따라 삶의 고단함 담아내詩的 형성력 완성

 

언어를 다루는 말솜씨는 있다. 말들을 재미나게 쓰기는 썼다. 그래서 내용이 불확실하지만 싱겁지는 않다. 그렇지만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알 수 있어야 할 거 아니냐.”

 

말재주만 가지고 시를 너무 쉽게 쓴다. 그런데 삶을 구체적으로 형상화시키지 않아서 말의 유희만 느껴진다. 전체적으로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이는 본심 심사 과정에서 심사위원들이 나눈 대화의 한 부분이다. 이 대화 속에 오늘날 신춘문예 투고 시의 문제점이 깊게 드러나 있다.

 

가능한 한 위의 문제점을 불식시킬 수 있는 작품을 고른 끝에 진창윤의 목판화’, 고은진주의 장어는 지글지글 속에 산다’, 이언주의 사과를 깎다가3편이 최종심에 올랐다.

 

장어는 지글지글 속에 산다는 장어를 잡아 생계를 잇는 한 가족의 가난하지만 따뜻한 풍경이 그려져 있으나 시적 응집력이 약하고 산만하다는 결점이 두드러졌다.

 

사과를 깎다가사과를 깎다보면/ , 껍질이 끊어지는 소리/ 꼭 눈길을 걷던 당신이/ 뒤를 돌아볼 것 같아등 서정적 개성이 두드러진 부분이 있으나 전체적으로 단순한 소품에 머무르고 있다는 점이 단점이었다.

 

목판화시로 쓴 목판화의 구체적 풍경을 통해 시적 형성력을 완성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우선 호감이 갔다. 목판을 깎는 조각도의 칼끝을 따라 눈 내리는 겨울밤 골목을 배경으로 삶의 고단한 한순간이 진솔하고 과장됨 없이 그려져 있다.

 

불 꺼진 문틈으로 냄비 타는 냄새가 새어나오더라도/ 칼을 놓지 않아야 한다, 그쯤 되면/ 밤 열두 시의 종소리도 새겨넣을 수 있을 것이다라든가, “지붕 위로 어두운 윤곽이 드러나면 드문드문 송곳을 찍어/ 마치 박다 만 못 자국처럼 별을 새겨 넣는다등에서 알 수 있듯이 삶과 시가 유리되지 않고 일체화되어 있는 점에서 당선작으로 선정하게 되었다.

 

자폐적 언어의 유희화가 왜곡된 대세를 이루고 있는 오늘의 한국 시단에서 이러한 구체적 형성력의 높이를 지닌 시를 만난 것은 큰 기쁨이다.

 

심사위원 황동규·정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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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수 / 김재필

 

 

하염없이 눈물 쏟는 애인을

또 하염없는 입맞춤으로 달래본 사람이 알 것이다

같은 이에게 다른 피가 돌 때가 있단 사실을

 

지뢰를 밟았을 때 떠오르는 감정은 아직 발 떼지 않았다는 것

너는 위험한 마음으로 바닥을 문지른다

 

너도 이제 그만 목소리를 내보려 한다

그러나 침묵하고 싶지 않을 때에야 침묵다운 무거움이 온다는 걸

우린 이제 알고 있다

 

네 혀에 도달할 문장을 기다린다

난간을 벗어나지 못하고 늘어지는 고드름처럼

오랠수록 흉기가 되는

 

조금씩 심장 가까이

이 겨울 속으로 완전히 입수하기 전에

 

 

 

 

2016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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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함께 해줬던 사람에게 보상 되길 바라며 써

 

Soli Deo Gloria.

 

준모 형께 감사하다. 이런 날이 오면 가장 먼저 형의 이름을 쓰고 싶었다. 감사하고 감사하다.

 

언어로 가해자도 피해자도 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런 무능이 허락되기 전까지 어떻게 견뎌야 할까. 이런 태도가 모두에게 중요할 수 없으므로 농담은 필연적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자기 언어를 삼키기 때문에 외롭단 걸 알게 되면 농담은 미운 애인 같다. 만약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을 인간이 언어를 연마한다면, 그런 생은 도대체 어떤 수수께끼의 대답이 되는 건지 생각하며 웃었다. 그런 세계에 누가 거주할 수 있을지 생각했다. 언젠가 그런 인간이 방문했을 때, 그에게 필요한 대답을 할 수 있길 바란다.

 

오랜 시간 함께 해줬던 사람에게 어떤 식으로든 보상이 되길 바라며 썼다.

 

뽑아주신 황동규 선생님, 정호승 선생님, 김기택 선생님, 문태준 선생님께 감사 인사드리고 싶다. 부족한 작품이지만 가능성을 봐주신 것이라 생각한다. 무엇보다 마음의 빚을 덜게 해주심에 감사하다. 스승이신 박찬일 교수님께 감사하다. 조금이나마 힘이 되셨기를 바란다. 졸업 후에도 이끌어 주신 이형우 선생님께도 감사하다. 제자라 말하기엔 민망하여 성함을 적진 않지만 청강을 허락해주셨던 선생님께도 감사하다. 인정이란 걸 가르쳐주신 김미향 선생님께도 감사하다. 그리고 부모님께 감사하다. 역시 어떤 식으로든 보상이 되신다면 행복할 거 같다. 더 많은 분께 감사하고 있다. 말 대신 찾아뵙는 걸로 대신하겠다.

 

 

 

 

 

[심사평] 최근 응모작 추상·관념의 유희 과해 입수소통의 모호성 벗어나

 

최근 신춘문예 응모 시는 갈수록 모호성이 두드러지는 부정적 특성을 지닌다. 구체에서 일탈된 추상과 관념의 언어 유희가 지나쳐 소통의 길이 꽉 막혀 있다. 언어와 언어의 시적 관계가 이리 꼬이고 저리 꼬여 도대체 무엇을 왜 이야기하고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마치 배배 꼬인 언어의 꽈배기를 맛도 보지 못하고 마냥 들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시도 인간을 위해 쓰는 것이므로 기본적으로 인간과의 소통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갈수록 그 소통의 길이 막혀있다. 이제는 시의 불통마저도 유행인가. 불통으로 훈련된 투고시를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다. 분별없는 불통의 세계에서 분별 있는 소통의 세계로의 전환이 시급한 시점이다.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4편이었다. ‘패러글라이딩 하는 새’(김영미)는 소통이 가능하다는 장점보다 날개를 펼칠 때보다 접을 때가/ 더 어려운 결정이라는 것을등의 통속적 단점이 더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강물학교’(진창윤)는 강물을 찾아오는 겨울 철새들에 대한 진술적 묘사가 진부하고 지루하게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먼저 탈락하였다. ‘평행한 세계’(강은재) 또한 꿈속과 꿈 밖의 경계를 넘나드는 만남의 세계가 펼쳐져 있으나 결국 멀리 있어도 우리는 하나인 것 같다” “나도 내가 좋아질 때가 있다 이런 것은 혼자만 아는 비밀이다등의 통속적 산문성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당선작 입수(入水)’(김재필)는 비교적 소통의 모호성에서 벗어난 시다. 내가 너(애인)의 사랑의 강물 속으로 입수하는 과정의 순간을 짧으나마 극명하게 그렸다. ‘지뢰를 밟았을 때 떠오르는 감정은 아직 발 떼지 않았다는 것/ 너는 위험한 마음으로 바닥을 문지른다라는 표현은 이 시의 백미다. 지뢰를 밟았을 때 발을 떼면 생명을 잃게 되므로 발을 떼지 않고 있는 상태, 그 절체절명한 상태에서의 기다림과 그리움이 이 시의 전체적 정조를 이룬다.

 

다른 시에 비해 작품성이 높다는 장점도 있지만 소통이 가능한 시라는 장점에 더 마음이 기울어져 당선작으로 결정되었다.

 

시를 쓰는 일도 끊임없이 노력하는 일이므로 당선자는 남다른 노력을 통해 한국시단을 풍요롭게 꽃피워주길 바란다.

 

심사위원 황동규·정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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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계절 / 최영랑

 

 

빈집엔 봄이 오지 않고 여름도 오지 않고 빈집의 계절만이 서성거린다

 

빈집은 쉽게 들어갈 수 없고 대문 안에 들어서도 속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곳은 시끄럽고 어스름한 저녁 누구라도 거부하는 빈집만의 습관이 있다

 

그림자 없는 대문에서 빈집의 툇마루를 바라보면 그곳은 포근했던 무릎, 포근한 미소가 떠올라 헐렁한 하루가 부풀었다 사라진다 눈을 감고 나는 경직된 다리를 뻗는다

 

가끔 무릎을 내어주는 거기, 정류장처럼 너그럽다 잡초들이 슬그머니 들어와 영역 다툼에 휘말려도 장독대의 도깨비풀이 항아리 속을 욕심내어도 그냥 말줄임표만 사용할 뿐이다

 

빈집은 기다린다 밤나무가 뒷마당에 밤톨을 툭 툭 던지고 바람이 기왓장을 와장창 깨뜨릴 때도 빈집은 그냥 좋은 날이야라고 말한다 빈집은 어느 때보다 여유로워 멀리 떨어져 있어도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내가 바라보는 집이 자꾸만 멀어져 간다 그 집에 가까이 가야 한다 들어가 마당을 지나 툇마루에 가서 닳은 무릎을 위로해주어야 한다

 

 

 

 

2015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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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빈집이 되어버린 어머니그대로 사랑합니다

 

폭풍으로 집이 무너지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 여진이 가시질 않아 따끈한 차 한 잔을 들고 출렁이는 생각들을 눈발에 하나둘 날려 보내고 있었습니다. 평온해지려는 시간 속으로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당선 소식이었습니다. 예지몽이었나! 무너짐이 새로운 시작이라니.

 

낙숫물을 즐겨 바라보곤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단단했던 댓돌에 둥근 홈이 생겨나고 그곳에 빗물이 고이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언제부턴가 현실과 꿈속을 넘나드시는 어머니, “좋은 날이야라고 하시면서 활짝 웃을 때마다, 가슴에 찬바람 부는 빈집으로 웅크리고 계셨음을 알기나 하시려나. 아무리 덮어도 빈집이 되어버린 어머니, 지금 그대로의 당신을 사랑합니다.

 

돌이켜보니 고마운 분들. 새로운 상상력을 분출하게 해주신 김영남 선생님, 늘 따뜻한 벗이 되어준 정동진카페 식구들, 누구보다 기뻐하실 부모님, 묵묵히 응원해주던 남편 그리고 경표, 경훈, 친구들, 일일이 마음 전하지 않아도 소식 듣고 기뻐해주실 저를 아는 분들과 기쁨 나누고 싶습니다.

 

언어들을 문장에 가둬 놓고 못내 미안한 마음이 들 때쯤, 동토의 땅을 새롭게 일굴 수 있도록 해주신 황동규, 정호승 선생님 감사드립니다. 선생님들 이름에 허물이 되지 않도록 좋은 작품으로 보답하겠습니다. 길을 내어 주신 문화일보에도 감사드립니다. 개성적인 시인으로 거듭 태어날 것을 약속합니다.

 

눈이 내립니다. 빈집에 가봐야겠습니다.

 

툇마루에 가서 다리 한번 쭉 뻗어 봐야겠습니다.

 

 

 

 

 

[심사평] 모성 통해 사랑과 고통의 본질 깨달아

 

신춘문예는 한국 문학의 축제다. 새로운 시인이 탄생하는 축제의 한마당이다. 이 축제에 참여한 이는 맛있는 음식도 나누어 먹고 오랜만에 배도 좀 불러야 한다. 그러나 이번 축제의 상에 놓인 음식들은 숙성과 발효가 되지 않은 겉절이들이 유난히 많았다. 시는 겉절이보다 오래 숙성되고 발효된 맛의 깊이를 요구한다. 그릇에 담긴 음식이 제대로 된 음식이 아니라면 그릇 또한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모순과 부조리를 이야기하는 시라 하더라도 부조리하다는 메시지밖에 없다면 그 또한 시로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최종심까지 올라온 작품은 박현영의 <유형에 대한 탐구>, 박민서의 <실록>, 김재인의 <오늘의 만남>, 최영은의 <어머니의 계절> 4편이었다. <유형에 대한 탐구>는 유형에 대한 구체성이 모호했다. 제목이라는 그릇만 크고 그릇에 담긴 내용은 유형에 대해 날마다 간구했지만/ 질문은 의문으로 남아/ 이곳을 비추는 하나의 불빛이 된다처럼 모호했다. <실록> 또한 무화과 묘목을 심으려고 판/ 마당 한 귀퉁이에서 녹슨 자물통이 나왔다고 했으나, ‘녹슨 자물통이 시의 내용물로 제시만 되고 그 의미에 대한 추구가 결여되었다. <오늘의 만남> 또한 수사는 화려하나 만남의 내용이 빈약하다는 점에서 신뢰하기 어려웠다. 다행히 모성을 빈집에 비유한 <어머니의 계절>은 비교적 완성도가 높았다. 모성을 통해 사랑과 고통의 본질을 깨닫고 있다는 점 또한 돋보여 당선작으로 결정할 수 있었다. 시를 쓰는 일도 노력하는 일이다. 당선자는 더욱 노력함으로써 한국 시단의 밑거름이 되는 시인으로 성장해주길 바란다.

 

심사위원 : 황동규·정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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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사유상 / 최찬상

 

 

면벽한 자세만

철로 남기고

그는 어디 가고 없다

 

어떤 것은 자세만으로도

생각이므로

그는 그 안에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겠다

 

한 자세로

녹이 슬었으므로

천 갈래 만 갈래로 흘러내린 생각이

이제, 어디 가닿는 데가 없어도

반짝이겠다

 

 

 

 

2014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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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詩語 함께하던 길 끝에서 설렘·두려움 만나

 

당선 전화를 받는 순간 잠시 휘청거렸습니다. 가슴속 한 장소에서 설렘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동안 나의 길잡이가 되어 준 수많은 시들이 까맣게 지워진 나의 정수리 위에서 반짝입니다. 짧은 길을 두고 먼 길을 돌아오는 길. 닳아버린 신발 밑창에서 해가 지고 어둠 속에서 말들이 바스락거립니다. 한밤, 피곤에 지친 말들을 보듬고 위로하며 또 신발 밑창에서 빨갛게 해가 뜨기를 기다립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솔길이 있음을 압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하나씩의 모퉁이입니다. 이제 저도 그 오솔길을 출발할 채비가 되었습니다.

 

스스로 빛나지 않는 모래 알갱이 같은 제 시를 앞자리에 놓아 주신 황동규, 정호승 선생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김기택, 조은 예심위원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제 시의 첫 장을 펼쳐 준 문화일보에 감사드립니다. 저보다 더 외진 사각지대에, 겨울밤 아궁이에서 갓 구워낸 따뜻한 말들이, 가 닿을 수 있도록 정진하겠습니다.

 

라는 이름으로 고통을 준 사랑하는 가족 인숙, 준영, 준하에게 용서를 빌며, 부모님의 부재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추운 겨울 제가 지피는 작은 불씨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안부를 묻습니다.

 

얼어붙은 하늘을 횡단하는, 강철의 날개들을 동경하며…….

 

 

 

 

 

 

[심사평] 상투성 과감하게 벗어나힘의 낭비없이 짜여져

 

신춘문예 당선시에 어떤 유형이 있다고 여겨져 가능한 한 그 유형에서 벗어난 작품을 선택하자는 데에 의견이 모아졌다. 김고유의 마음론’, 박민서의 구유’, 김미선의 고요한 천둥’, 최찬상의 반가사유상등이 그런 관점에서 최종심에 올랐다.

 

마음론은 인간의 마음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짐승에 비유한 점이 신선했으나 순백의 언어가 차갑게 빛난다등의 구태의연한 표현들이 그 신선함을 떨어뜨렸다.

 

구유는 왜 굳이 산문 형식으로 써야 했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 주었으며, 이는 한국현대시의 어떤 유형의 유행에 의존한 것이라고 여겨졌다.

 

고요한 천둥은 일상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의 다양한 의미를 다각도로 추구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 역시 군더더기가 많았다. ‘이제 당신은 처음의 고요다이후 마지막 두 연은 삭제하는 게 시의 완결성을 위해서는 오히려 더 나았다.

 

당선작 반가사유상은 신춘문예 시의 상투성을 과감하게 벗어난 작품이어서 눈에 띄었다. ‘반가사유라는 관념과 추상을 반가사유상으로 구체화하는 데 성공했다.

 

전체적으로 잘 짜여 있음으로써 힘의 낭비가 없었다. 둘째 연 어떤 것은 자세만으로도/ 생각이므로/ 그는 그 안에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겠다는 이 시의 백미다. 외면의 형상을 통해 존재의 내면에 대한 구도적 성찰이 돋보인다.

 

논어에 나오는 회사후소(繪事後素)’ ‘본질이 있은 연후에 꾸밈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를 깊게 생각하게 해주는 시다. 시는 인간을 이해하게 하는 부분이 있으므로 당선자는 더욱 인간을 이해하게 할 수 있는 시를 열심히 써주길 바란다.

 

심사위원 황동규·정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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