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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목원 / 권승섭

 

 

버스를 기다린다 신호가 바뀌고 사람이 오가고

그동안 그를 만난다

 

어디를 가냐고

그가 묻는다

 

나무를 사러 간다고 대답한다

 

우리 집 마당의 이팝나무에 대해 그가 묻는다

 

잘 자란다고

나는 대답한다

 

그런데 또 나무를 심냐고 그가 묻는다

 

물음이 있는 동안 나는 어딘가 없었다

없음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무슨 나무를 살 것이냐고 그가 묻는다

 

 

내가 대답이 없자

나무는 어떻게 들고 올 것이냐고 묻는다

 

나는 여전히 말이 없다

먼 사람이 된다

 

초점이 향하는 곳에 나무가 있었다

 

잎사귀로는 헤아릴 수 없어서

 

기둥으로 그루를 세야 할 것들이

무수했다

 

다음에 나무를 함께 사러 가자고

그가 말한다

 

아마도 그 일은 없을 것이다

 

언젠가 그를 나무라 부른 적이 있었는데

다시금 지나가는 비슷한 얼굴의 나무는

 

 

 

 

예스이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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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詩의 힘으로 제법 살아가더니… 이젠 詩를 놓을 수 없게 됐다

 

승섭이는 초록색의 시를 쓰는 것 같다고. 너의 시를 읽으면 너와 함께 있는 기분이 든다고. 너의 시를 읽고 오래도록 울었다고. 잔잔하고 고요한 산들바람을 맞는 것 같다고. 이야기해준 말들이 가장 먼저 맴돕니다. 시의 힘은 때때로 말의 힘보다 훨씬 크게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보드라운 흙 속에서 발아를 기다리는 씨앗의 힘과 같습니다. 너무 섬세하면 예민해지는 구석도 생기기 마련이지만, 한 번 힘을 내면 높이 자라고 깊이 뿌리 내립니다. 그래서 시의 힘으로 살아가는 일이 제법 좋습니다. 겁도 많고, 자주 불안해하고, 연약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지만 시를 통해 일종의 용기를 얻습니다. 그렇기에 시는 제게 놓을 수 없는 것이 됐습니다.

 

어린나무의 그늘 아래로 초대하고 싶은 사람이 많습니다. 시를 읽고 쓰는 기쁨을 느끼게 해주셨던 박경아 선생님, 시를 공부하는 첫 번째 길에 계셨던 배은별 선생님, 늘 따뜻한 마음으로 시를 이끌어 주셨던 이지호 선생님 감사합니다. 저의 개성을 발견해 주시고 믿음을 주셨던 김경후 교수님, 앞으로도 계속 시를 써나가 보라고 말씀해 주신 남진우 교수님, 많이 칭찬해 주시고 얼마 전까지도 꼭 시인이 되라고 말씀해 주셨던 이영주 교수님, 섬세하게 시들을 봐주시고 저보다도 당선을 기뻐해 주셨던 천수호 교수님. 모두 감사드립니다.

 

굴림, 느루, 절정 친구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C파트, A파트, B파트를 함께했던 시 전공 친구들에게도 마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나를 사랑이라고 불러주는, 아가라고 불러주는 두 분께도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심사평] ‘체험의 일단’을 시적 상황으로 변환시키는 기량 뛰어나

 

올해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의 두드러진 특징은 생활감상문과 같은 시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물론 시는 생활에서 나온다. 소재를 취하고 정서를 진솔하게 표현하는 것도 시의 중요한 줄기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감각을 통한 변용과 깊은 사유의 맛이 결여된 감상은 넋두리와 소품에 그칠 뿐이다. 구성이 승했던 때에 작위가 문제였다면 지나치게 감상적인 진술은 절제와 엄밀함을 통해 독자에게 호소하는 시적 문장의 힘을 아쉬워하게 만든다. 다시 한번 감수성과 지성의 통합이라는, 현대시와 관련한 고전적인 경구를 떠올리며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을 읽었음을 덧붙여 본다.

 

‘히에로글리프’는 미술관에서의 감상을 시공을 넘나드는 사유로 확장시킨 것이 인상적이었지만 후반부 이후에 긴장감이 떨어지는 것이 아쉬웠다. ‘템플 스테이’는 일상에서 길어온 잔잔한 사유가 매력적이지만 마지막 대목에 있는 다소 이질적인 논평자적 마무리가 사족이 되고 말았다.

 

‘묘목원’에 대한 숙고가 있었다. 투고된 작품들이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가를 고려함과 동시에 당선작으로 손색이 없는 한 작품을 내밀어 놓을 수 있는가에 대한 의견이 오고 갔다. 그 결과, 심사위원들은 과장과 작위가 없이 단정한 문장을 통해 체험의 일단을 문제적인 시적 상황으로 변환시키는 기량을 믿어보기로 했다.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사건에서 중층적인 의미가 배어나게 하는 시적 구성도 돋보였다. 군더더기 없이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다.

 

- 심사위원 : 정호승 시인·조강석 문학평론가(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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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유지에서 / 채윤희

중국 부채를 유럽 박물관에서 본다

초록색을 좋아하는 나는

딱정벌레 날개 위에 누워 있다

한때 공작부인의 소유였다는 황금색 부채

예수는 얼핏 부처의 형상을 하고 있다

약속의 땅은 그림 한 뼘

물가로 사람을 인도한다는 뿔 달린 짐승은 없다

한 끝이 접혔다가 다시 펼쳐진다

떨어진 금박은 지난 세기 속에 고여 있고

사탕껍질이 바스락거린다

잇새로 빠져나와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받아 적을 수 없는 소리

파란색을 좋아하는 나는

물총새 깃털을 덮고 잠든다

멸종에 임박한 이유는 오직 아름답기 때문

핀셋이 나를 들어올리고

길이 든 가위가 살을 북, 찢으며 들어간다

기원에 대한 해설은 유추 가능한 외국어로 쓰여 있다

따옴표 속 고어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오랜 세월 파랑은 고결함이었고 다른 대륙에 이르러 불온함이 되었다

존재하지 않던 한 끝 열릴 때

나, 아름다운 부채가 되기

열망은 그곳에서 끝난다

 

 

[당선소감] 괜히 글 쓰고, 괜히 혼자 여행하고괜히 그랬다 싶은 일들이 시가 됐다

 

채윤희 씨당선 연락을 받았다. “엄마!” 비명을 지르며 따뜻한 품을 끌어안았다. 엉엉 울기에 이상적인 순간이었고 거의 그럴 뻔했다. 그러나 끓는 물에 들어간 지 10분을 훌쩍 넘긴 파스타를 걱정하는 마음이 울컥 치미는 마음을 기어코 짓눌렀다. 퉁퉁 불어버린 파스타를 소스가 담긴 팬으로 옮겨 담았다. “어휴, 비명이 들리기에 사실 벌레가 나온 줄 알았다.”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새우가 그릇마다 세 마리씩 배분되었는지 살폈다. 지금 새우가 문제인가. 그러나 새우가 문제이기는 했다. 내가 네 마리를 먹으면 누군가는 두 마리를 먹게 될 테니까. 회심의 파스타였는데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새우가 세 마리이기는 했다, 다행히도.

 

당선작의 제목을 알려드렸다. “, 너 비행기 놓친 곳!” 아니라고 답하면서도 그편이 재미있었을 텐데 괜히 정정했나 싶었다. 괜히 그랬다 싶은 일들은 늘 일어났다. 괜히 글을 쓴다 그랬다, 괜히 다른 공부를 한다 그랬다, 괜히 혼자 여행한다 그랬다. 그렇게 괜히 그랬다 싶은 일들이 시가 되었다. 조촐한 당선소감을 읽고 있는 당신도 당신만의 괜한 순간을 긍정하게 된다면 좋겠다.

 

감사할 사람들이 많다. 우선 언제나 응원해준 엄마와 아빠, 할머니와 동생에게 사랑을 보낸다. 예술을 한답시고 빌빌거리는 친구 셋의 술값을 턱턱 내준 이 선생. 이제 갚을게. 나의 6. 응어리진 애정을 풀기엔 나의 언어가 모자라다. 마지막으로, 항상 무언가를 그르치고 있다는 감각으로 살아가면서도 스스로를 사랑하는 걸 멈추지 않은 나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열심히 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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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시간-공간 넘나드는 활달한 상상력, 매력적으로 다가와

 

최종심에 올라온 작품들은 대체로 무난했다. 달리 말하면 위험도 모험도 드물었다는 말이다. 안정적 기량이 우선인 것은 틀림없지만 개성적인 목소리가 많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균일함은 우리가 보낸 한 해의 격동과도 거리가 있어 보였다. 시가 삶의 불안을 고스란히 드러낼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시대의 삶의 환경과 동떨어진 기예를 겨루는 경연도 썩 유쾌한 것만은 아니다. 본심 심사위원들이 만나서 가장 먼저 나눈 얘기는 바로 이 의아함에 대한 것이었다.

 

오래 논의한 세 작품은 남겨진 여름’, ‘씨앗의 감정’, ‘경유지에서였다. ‘남겨진 여름은 문장의 신선함이 눈에 띄었고 근경과 원경을 오가며 사유를 전개하는 리듬도 흥미로웠다. 다만 긴장을 끝까지 유지하지 못하고 시의 마지막 연에서 상투형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아쉬웠다. 압축과 절제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씨앗의 감정은 이질적인 이미지를 하나의 시상을 중심으로 그러모으는 솜씨를 보여줬다. 씨앗을 소재로 한 사유가 다양한 이미지를 통해 변주되는 양상은 신선했다. 그러나 시의 마지막 대목에서 대사를 그르쳤다. 모든 시가 기승전결과 대미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심사위원들은 긴 논의 끝에 경유지에서를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활달한 상상력이 매력적인 작품이다. 나아가 찰나적 순간을 자신의 삶에 대한 사유로 길어오는 기량도 믿음직스럽다. 함께 투고된 작품들이 고른 기량을 보인 것은 아니었지만 한 작품을 고르라면 이 작품일 수밖에 없다는 것에 대한 동의가 있었다. 기대와 더불어 축하의 마음을 전한다.

 

심사위원 정호승 시인·조강석 문학평론가(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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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돌 / 이근석

나는 토끼처럼 웅크리고 앉아 형의 작은 입을 바라보았다. 그 입에선 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형한테선 지난여름 바닷가 냄새가 나, 이름을 모르는 물고기들 몇 마리 그 입속에 살고 있을 것만 같다. 무너지는 파도를 보러 가자, 타러 가자, 말하는

형은 여기 있는 사람이 아닌 것 같다.

미래를 이야기했다. 미래가 아직 닿아있지 않다는 사실이 형을 들뜨게 했다. 미래는 돌 속에 있어, 우리가 아직 살아보지 못한 이야기가 번져있어, 우리가 미래로 가져가자, 그때

우리는 서로를 바라본다.

그동안 우리는 몇 번 죽은 것 같아. 여름, 여름 계속 쌓아 올린 돌 속으로 우리가 자꾸만 죽었던 것 같아. 여기가 우리가 가장 멀리까지 온 미래였는데 보지 못하고 우리가 가져온 돌 속으론 지금 눈이 내리는데

내리는 눈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내리는 눈 속으로 계속 내리는 눈 이야기.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우리가 우리들 속으로 파묻혀가는 이야기들을

우리가 했다.

전화벨이 울렸다, 계속

전화벨이 울리고 있다

 

 

 

 

 

[당선소감] 시인이라는 이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싶다

 

각자의 시가 있다는 말이 좋았다. 기미였다 두드러질 때 좋았다. 환경이 변하고 이런저런 사건의 여파가 시를 바꾸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좋았다. 이전의 시와 다음 시의 거리를 확인하는 것도 좋았다. 그대로 그 시가 있고 어느 날 돌아볼 때 이렇게도 보이고 또 저렇게도 보이는 게 좋았다.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침착하고 치열한 사람들이 좋았다. 나는 그들과 그들의 시에 자주 의지해왔다.

 

살아가면서 쓰지 않는 삶을 배워야 했다. 읽지 않는 삶도 덤으로. 그런 건 배움과 삶이 한 몸이어서 그저 산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것도 시를 쓰는 과정이라고 혹자는 말하였지만 그건 그냥 시가 없는 세상이던데. 그럴 땐 시 쓰는 당위에 대해 생각하면 그저 이런 생각만 들었다. ‘세상엔 이미 훌륭한 시인들이 많이 있고 나는 좋은 시를 쓸 재능도 자신도 없다.’

 

나이가 차갔다. 구직하려 하였으나 어느 사업체에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나한테는 가망이 보이지 않았다. 이것들은 구직 요망의 시일는지 모른다. 내가 아니라 내 정황이 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에 관한 나의 자질은 참혹했던 현실이지 내 개인의 것이 아니다.

 

그리고 언제나 현실을 함께 살아준 나의 사람들이 있었다. 받게 된 것에 따라올 이유와 책임이 있다면 전자는 그들의 까닭으로, 후자는 내가 지었으면 한다. 모두가 아프지 않았으면 한다. 슬프지 않았으면 한다. 잘 지내었으면 한다. 예심 본심에서 심사해주신 분들의 노고에도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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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자연스러운 리듬감으로 과장없이 표현해

 

11명의 작품이 최종 논의 대상이 됐다. 우선 드는 생각은 다양성이 아쉽다는 것이다. 질적으로 고르지만 단정한 묘사와 소소한 토로가 주를 이뤘다. 예년보다 표준형에 수렴되는 경향이 강해졌다는 것은 모험과 담론이 활성화되지 않는 시단의 풍경을 보여주는 듯해 슬쩍 미안해지기도 했다.

 

구조5편은 시적 묘사의 특이성이 무엇인지 여실히 보여준다. 사태를 목전에 놓고 주도면밀하게 살피는 힘을 보여준다. 한 대목 한 대목 인상적인 묘사들이 눈에 띄었다. 그런데 묘사가 구조를 이루지는 못했다. 근사하게 그려 보이는 능력은 사태를 전체적으로 헤아리는 사유 없이는 왕왕 심부름꾼의 성실함에 그치기 마련이다.

 

수변5편은 우선 문장 단위에서 매력을 발한다. 문장의 힘과 이미지의 리듬이 조화를 이뤄 마지막까지 검토 대상이었다. 산문 투의 진술에 대한 아쉬움, 절제가 더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조금 더 기다려봄 직하다는 의견과 부합해 다음을 기약하게 됐다.

 

여름의 돌5편이 당선작인 이유는 무엇보다도 자연스러운 리듬감 때문이다. 과장이나 과잉 없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자연스러운 리듬에 실어 말할 수 있는 것은 범상해 보이나 드문 기량이다. 일종의 빼어난 예사로움에 달한 기량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여름의 돌은 청년의 불안과 기대를 수일한 이미지와 자연스러운 리듬을 통해 순조롭게 표현해 당선에 값한다. 과감함이 숙제라면 숙제인데 안정 없는 기획보다 신뢰할 만한 시적 진술이 올해의 선택이 된 것은 당선자에게 영광이자 도전이 될 것이다. 축하의 악수를 건넨다.

 

- 심사위원 문정희 시인, 조강석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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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를 따르는 사람 / 김동규

 

 

창가에 앉아 우유를 따르고 있었다. 당신은 조용히 그것을 따르고 부드러운 빛이 쏟아졌다. 둘러맨 앞치마가 하얗고 당신의 얼굴이 희고 빛이 나는 곳은 밝고 빛이 없는 곳에서도 우유를 따르고

 

우연한 기회에 인사를 건네고 거기에서 우유를 따르고 다음 날에도 성실하게 우유를 따르는 그런 사람에게 매일 우유를 따르는 게 지겹진 않나요, 그곳은 고요하고 그곳에서 당신을 계속 지켜보기로 하고

 

어떤 날엔 TV를 켰는데 우유를 따르는 당신이 출연한다. 책에서도 우유를 따르는 당신이 등장한다. 당신이 앉아있는 지면에 부드러운 빛이 쏟아지고 서가가 빛나고 읽던 것을 덮어도 빛나는 창가에서 우유를 따르는 당신이

 

우유를 따르고 있었다. 여기서 우유를 마시는 사람도 없잖아요, 그런데도 차분하게 우유를 따르고 열 번을 쳐다보면 열 잔이 되는 우유가 있다. 실내는 눈부시고 새하얗게 차오르는 잔이 가득해지고

 

그런데 누가 우유를 옮겨요, 지켜봐도 우유를 옮기는 사람이 없는데 우유를 가져다준 적이 없는데, 당신도 환하고 실내도 환하고 당신이 우유를 계속 따라서 그런 거잖아요 문밖에서 발목이 젖고 우유가 넘치고

 

우유가 흐르는 골목이 차갑고 당신은 계속 따를 수 있겠어요, 당신의 손이 새것처럼 빛나고 있었다.

 

 

 

2020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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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더 많은 사람과 어딘가로 향한다거기에는 꽃도 새도 있다

 

지하철이었다. 거기서 이름을 들었다. 몇 가지 질문과 답변이 오가고 처음 듣는 목소리로부터 축하한다는 말을 들었다. 어제는 호명되지 않았지만 오늘은 그렇게 되었다. 이것도 삶이다.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 시가 꼭 내 것만 같았다. 어느 날부터는 시가 나보다 나았다. 시를 쓰고 거기서부터 떠나는 게 좋았다. 또 어느 날엔 시가 나보다 훨씬 더 나았다. 노란 옥스퍼드 노트에 또박또박 써내려갔다. 거기에 살고 있는 기분 같은 게 있었다. 더 이상 노트에 적지 않고 타이핑을 했다. 어느 순간에는 손가락에서 무언가 흘러나오는 것도 같았다. 거기에 삶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다. 상관이 없다. 초대 받은 시도 그렇게 나왔다. 앞으로도 즐겁고 외롭고 무지한 일들이 펼쳐질 거다.

 

문을 열어준 김혜순·조강석 선생님께 감사를 표한다. 이승하 선생님께 각별한 마음을 전한다. 천변을 함께 걸었던 그날의 이수명 선생님은 사랑하는 시인이다. 김근 선생님, 그리고 빠뜨릴 수 없는 작인(作人)이 있다. 더 아득한 곳에 윤한로 선생님도 있다. 예쁘기만 했던 학창 시절의 그 이름을 다 부르지 못해 미안하다. 반드시 불러야 하는 이름도 있다. 하형은 거의 모든 시를 함께 읽어주었다. 그리고 수영과 신지도 있다. 울고 싶지만 울 수 없는 일이 있는 것처럼, 부르고 싶지만 부를 수 없는 이름도 있다. 이런 것도 삶이다.

 

무궁한 세계에 사는 엄마 아빠. 그 둘 아래서 나는 자랐다. 함께 자란 동생도 있다. 더 많은 선생, 더 많은 사람과 어딘가로 향한다. 거기에는 꽃도 있고 새도 있다. 나는 이게 진짜 삶이라고 말해본다.

 

 

 

 

[심사평] 일상을 이야기로 벼리고 재기 담아무늬 짜는 솜씨가 일품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을 일별하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개성적인 목소리가 드물다는 것이었다. 동화적 상상력에 기대어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놓았지만 매력적인 문장을 찾기 어려운 작품이 다수 있었다. 공들여 말들을 조직해 놓았지만 그 이음매만 불거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쉽게 몇몇 기성 시인의 영향을 떠올릴 수 있는 작품들도 종종 눈에 띄었다. 그렇지만 당선권에 든 몇몇 작품의 우위를 가리기 위해서는 숙고를 거듭해야 했다.

 

말이 간다5편은 동화적 상상력에 기대고 있지만 풍부한 이미지가 사용되었고 이미지들이 겹치면서 오히려 뜻이 투명해지는 신선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고른 수준의 말끔한 작품들 중 당선작이 될 만한 개성을 보여주는 작품이 없었다는 게 아쉽다. ‘무너진 그늘을 건너는 동안 어깨에 수북해진 새들5편은 장점과 단점이 같은 지점에서 발견됐다. 개성 있는 자기만의 문장이 돋보였으나 이로 인해 때로는 어설프고 작위적인 문장이 돌출하고 있다는 점이 아쉬웠다.

 

짧지 않은 논의 끝에 결국 우유를 따르는 사람을 당선작으로 고르기로 결정했다. 일상을 이야기로 벼리고 여기에 재기를 담아 삶에 대한 일반적 인식을 흔드는 힘을 지니고 있는 작품이었다. 가상과 가정의 세계를 덧붙여 무늬를 짜는 솜씨가 일품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예사로워 보이는 비범함을 기대하게 하는 작품들이었다. 당선을 축하하며 더 큰 성취를 기원한다.

 

- 심사위원 김혜순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 · 조강석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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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캉 / 최인호

 

 

발목이 세상을 바꿀 것이다

 

불란서 댄서들은 하이힐에 올라야 비로소

태어나지

발끝을 모으지

분란은 구두 속에도 있고

탁아소에도 있고 어쩌면

내리는 눈의 결정 속에서도 자라고

 

오후 세시에는 캉캉이 없다

 

모르는 사람이랑 대화하려면 쓸데없는 말들이 필요해요

식탁 아래서 발을 흔들고

유쾌해졌지 아무것도 흔들리지 않는 것 같아서

몰래 휘파람 부는 것 같아서

뉴스를 튼다

신은 인간을 만들었고

인간은 가십을 만들죠

상반신만 보이는 아나운서의 팔을 믿으며

캉캉은 감춰지는 중

양말 속에 주머니 속에

불란서 댄서들의 스포티한

팬티 속에

빨간 주름치마가 되어

덤블링이 되어

지구가 돌아간다

 

구세군 냄비에 눈이 쌓이고 내년에는

내년의 근심이 기다리겠지 고향이 어디입니까 묻는다면

제왕절개 했습니다 답하겠지 아무것도 흔들리지 않는 것 같아서

마음은 캉캉.

발끝을 들어올릴 때마다

불거지는 중

 

 

 

2019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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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시간에게 미안하지 않게 더 감각하겠습니다 끝까지 밀고 나가겠습니다, 착각뿐이라 해도

 

아침에 문밖으로 나가서, 저녁에 문 안으로 돌아옵니다. 오늘은 어쨌든 ‘0’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양말을 신었다가 잘 때는, 양말을 벗습니다. 최후의 나는 나체일 수 있을까요? 태어났을 때는 2.1kg이었다는데, 그 후로 서른 해를 넘긴 지금 이 몸 위에 얹어진 것들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시를 쓸 때면 나는 나에게 가장 성가신 사람입니다. 거울 안에도, 휴대전화 액정 속에도, 동공의 안과 밖에도 내가 있습니다. 나는 나를 벗을 수 없습니다. 나와 얘기하려면 다른 사람과 얘기할 때보다 더 많은 관심사가 필요합니다. 금세 피곤해져 발을 씻고 잠에 듭니다. 앞과 뒤가 없는 얘기가 이불 속으로 들어옵니다. 살이 찐 것만 같습니다.

 

감사드립니다. 기도하는 손과 시 쓰는 손 사이에서 살아가게 하신 하나님께, 스스로를 사랑하기 힘든 나를 사랑해 주시는 부모님께, 항상 그곳에 있어 주신 김행숙 선생님께, 끊임없이 도전하시는 최정례 선생님께, 함께 아파해 준 시나락과 창비학당, 교회와 동네 친구들에게. 그리고 어둠 속에서 이름을 불러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충분히 오해하겠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이 착각뿐이라 할지라도 끝까지 밀고 나가겠습니다. 이 몸을 뚫고 지나가는 시간들에 미안하지 않도록 조금이라도 더 감각하겠습니다. 너무 많은 것을 빚지고 있어서 일일이 말하지 못하는 것을 사과드립니다. 피곤하시더라도 조금씩만 더 행복해지셨으면 좋겠습니다.

 

 

 

 

[심사평] 대담한 문장으로 사유의 힘 과장 없이 표현 심적 상태, 진술 대신 묘사완성도 돋보여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작품들은 예년에 비해 균일한 수준을 유지하지 못했다. 작품들은 전체적으로 수준의 편차가 컸고, 동시에 개개인의 작품 5편이 고르게 일정한 수준에 오른 경우도 드물었다. 그러나 문학적 성취는 평균에서 비롯되는 것만은 아니다. 평균을 어림잡는 일과 당선작을 선별하는 일이 이 경우에는 조금 달랐다.

 

4명의 작품이 최종 논의 대상이 되었다. ‘아보카도의 날5편은 비교적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지만 잘 만들어진 조립품을 연상시켰다. 거듭 읽을수록 접합부가 불거지는 듯한 점이 아쉬움을 남긴다. ‘랑헨에서5편은 자연스럽게 읽히는 리듬감을 갖춘 측면에서 강점이 있지만 감상적인 전개가 아쉬웠다. ‘305편은 사유의 폭과 문장의 수일성(秀逸性)이 돋보였다. 특히 ‘30같은 작품은 당선권에 근접했다. 그러나 다소 건조하고 예사로운 어조로 일상을 묘사하는 여타 작품들에서 기시감을 느낄 수 있었다. 조금 더 개성 있게 썼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든다.

 

캉캉이 당선된 이유는 문장의 대담함과 사유의 힘이 과장 없이 잘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이미지들이 신선하면서도 힘 있는 문장을 통해 전개되고 있으며 진술 대신 묘사를 통해 심적 상태를 제시하는 요령을 확보한 작품이다. 단 한 편의 높은 완성도가 심사과정을 마무리 지었다. 기대를 안고 축하를 건넨다.

 

- 심사위원 김혜순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조강석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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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 / 변선우

 

 

나는 기나긴 몸짓이다 흥건하게 엎질러져 있고 그렇담 액체인걸까 어딘가로 흐르고 있고 흐른다는 건 결국인 걸까 힘을 다해 펼쳐져 있다 그렇담 일기인 걸까 저 두 발은 두 눈을 써내려가는 걸까 드러낼 자신이 없고 드러낼 문장이 없다 나는 손이 있었다면 총을 쏘아보았을 것이다 꽝! 하는 소리와 살아나는 사람들, 나는 기뻐할 수 있을까 그렇담 사람인 걸까 질투는 씹어 삼키는 걸까 살아있는 건 나밖에 없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걸까 고래가 나를 건너간다 고래의 두 발은 내 아래에서 자유롭다 나의 이야기가 아니다 고래의 이야기는 시작도 안했으며 채식을 시작한 고래가 있다 저 끝에 과수원이 있다 고래는 풀밭에 매달려 나를 읽어내린다 나의 미래는 거기에 적혀있을까 나의 몸이 다시 시작되고 잘려지고 이어지는데 과일들은 입을 지우지 않는다 고래의 고향이 싱싱해지는 신호인 걸까 멀어지는 장면에서 검정이 튀어 오른다 내가 저걸 건너간다면복도의 이야기가 아니다 길을 사이에 두고 무수한 과일이 열리고 있다 그 안에 무수한 손잡이

 

 

 

2018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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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잠들기 전 다시, 시를 쓰러 떠나겠습니다 나를 잡아먹는, 한없이 살아있는 밤 속으로

 

어둡고 축축한 시간을 지나오다 당선 소식을 들은 건, 서점 화장실이었습니다. 그만, 맨바닥에 널브러졌습니다. 오래 달린 사람처럼 다리가 무거웠습니다. 영혼을 거울 속에 박제해두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왜 거기에 두고 왔을까질문을 업고 방에 들어왔는데, 책상에 엎질러진 진통제 상자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저 모서리들이 나를 지나다니는 것 같은 기분. 자꾸만 아팠습니다. ‘더 쓸 수 있겠구나싶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진통제를 깨물어 먹으며 빈 몸으로 책상에 앉았습니다. 이게 내 전부인 것처럼. 내 몸을 횡단하는 무수한 알약과 슬픔을 사랑할 각오를 했습니다. , 책 몇 권과 영혼을 데리러 어느 날 서점에 가볼 작정입니다.

 

부족한 시를 선택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제 시의 전부인 김완하 선생님, 제 앎의 전부인 조해옥 선생님 고맙습니다. 수없이 깨지고 무너져도 시 속에서 버틸 수 있던 건 손미 선생님 덕분이었어요. 제 롤모델인 박송이 선생님, 감사합니다.

 

우리 소고기 공동체, 응원해 준 연구실 식구들, 고마워요. 나의 친구들, 덕분에 웃을 수 있었어. 대학원 원우님들, 끝까지 함께 가요.

 

나의 전부인 김종중 집사님, 변진순 집사님. 첫 독자, 선미 누나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며 잠들기 전 다시, 시를 쓰러 떠나겠습니다. 알약이 내리는 책상 앞으로. 나를 잡아먹는, 한없이 살아있는 밤 속으로.

 

 

 

 

[심사평] 다층적 은유에 의한 소재의 확장 흥미로운 시적 사유의 전개 보여줘

 

본심에 올라온 23명의 작품들은 대체로 일정 수준 이상의 성취도를 보였다. ‘저격수5편은 시적 발상에 있어 독특함과 힘을 보여줬지만 상식적 진술과 지나치게 평이한 문장들이 종종 눈에 띄어 아쉬웠다. ‘저격수이외 작품들이 수준의 편차를 지닌 것도 최종 결정을 유보하게 만들었다. 이는 시적 묘사의 힘을 보여주는 골목의 흉터와 같은 작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반부와 달리 후반부에서 문장의 탄성이 떨어지고 이 작품 이외의 작품들에서 이를 만회할 만한 신뢰를 구하기는 어려웠다.

 

오렌지 저장소5편은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비유가 참신하고 소재를 시적으로 묘사하는 역량 역시 돋보였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당선작과 더불어 검토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더러 지나치게 설명적인 문장들이 눈에 띄었기에 조금만 덜 친절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이런 점들을 세세히 검토하며 변선우 씨의 복도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우선 응모한 작품 모두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적 역량에 대한 신뢰감을 주었다. ‘복도는 소재를 다층적 은유에 의해 능란하게 확장함으로써 흥미로운 시적 사유의 전개를 보여줬다. 시가 감상에 지나치게 의존하며 과장으로 치닫거나 지적 퍼즐로 스스로를 축소시키는 현상이 빈번하게 목도되는 이즈음에 소재를 집요하게 응시하는 힘과 다층적 사유를 전개하는 역량을 지닌 신인에게 출발의 즐거움과 불쾌하지 않은 부담감을 함께 안겨주는 것이 제법 그럴듯한 일이라고 결론 내렸다. 변선우 씨에게 축하의 악수와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 심사위원 김혜순 시인(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조강석 문학평론가(인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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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의 에세이 / 김기형

 

 

손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굿모닝 굿모닝 

 

손에게 손을 주거나 다른 것을 주지 말아야 한다

손을 없게 하자

침묵의 완전한 몸을 세우기 위해서 어느 순간 손을 높이,

높이 던지겠다

 

손이 손이 아닌 채로 돌아와 주면 좋을 일

손이 손이 아닌 것으로 나타나면 좋을 것이다 굿모닝 굿모닝

 

각오가 필요하다 '나에게 손이 필요 없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일종의

 

나는 아직 손을 예찬하고 나는 아직도 손을 사랑하고 있다 손의 지시와 손의 의지에 의존하여 손과 함께 가

고 있다 손과 함께 머문 곳이 많다 사실이다 나는 손을 포기하지 못하였다'제발 손이여'라고 부르고 있다 '제

발 손이여 너의 감각을 내게 다오, 너의 중간과 끝, 뭉뚝한 말들을 나에게 소리치게 해다오'라고 외친다 손이

더 빠르게 가서 말할 때, 나는 손에게 경배하는 것이다

 

손의 탈출은 없다 

 

다만 손들이 떨어진 골목을 찾고 있다

해안가에 앉아 손도 없고 목도 없는 생물들에게서 그들의 뱃가죽을 보면서 골목을 뒤진다!

손의 이야기는 끝이 나지 않는다 손은 쉬지 않는다 손이 멈추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손은 자신이 팔

딱거리는 물고기 보다 훨씬 더 생동하고 멀리간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한다

 

손이 말하는 불필요, 손이 가지려 하지 않는 얼굴

 

손은 얼굴을 때린다 친다 부순다 허물기 위하여 진흙을 바른다 손은 으깰 수 있다 손은 먼 곳으로 던질 힘이

있다 손이 손을 부른다 손이 나타나면 눈을 뜨고 있던 얼굴들이 모두 눈을 감고 손에게 고분하다 손에게 말

하지 않고 손의 이야기를 기다린다 손은 다른 침묵을 가진다

 

손의 얼개가 거미줄처럼

거미줄과 거미줄 그리고 또 그런 거미줄이 모여든 것처럼 내빼지 못할 통로를 연다

손 사이에서 망각한다 손 안에서 정신을 잃는다 손의 춤을 본다 그 춤을 보면서 죽어갈 것이다

스러져가는 얼굴들이 감기는 눈을 어쩌지 못한다 나는 손에게 조각이 난다

손을 감출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울었지만 동그랗게 몸을 만 손이 어떤 불을 피우는지, 무엇을 터트리려고

굳세어지는지

이 공포 속에서 손에 대한 복종으로 계속 심장이 뛴다고 말한다

 

손을 놓고 가만히

 

탁자 앞으로 돌아온다 손이 응시한다 손이 그대로 있겠다고 한다

손이 뒤를 본다

손을 뗀다 반짝하고 떨어진다

 

 

 

2017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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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우리가 희미하지만 함께 있다는 사실 가 알려주리라 믿어

 

유일한 것이 있다고 믿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런 것은 꼭 아픈 몸으로 나타나 사라지거나 반대 방향으로 달아나곤 했습니다. 그리고 허물지 못할 믿음, 시가 저와 있습니다. 제게 닿아있는 시는 저를 빈 방에 두는 손과 같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과 침묵에 대해서 얼마나 머물러 살아야 하는 것일지, 빈 몸을 생각합니다. 제가 가진 시선은 매우 조그마한 것들에 있어서 불온한 것들을 향해 마음이 늘 쓰였습니다.

 

마주하고 있는 것을, 손 위에 오른 것을, 모를 곳에서 날아온 날짐승의 몸을, 빛이 쏘고 떠난 빈 뜰을 불러들이고 싶습니다. 우리가 희미하지만 함께 있다는 사실을 시가 알려줄 것이라, 작게 열린 길을 더듬어 갑니다.

 

살아온 것이 놀라워서 오늘도 고요히, 하나님께 온 마음으로 감사합니다. 머물고 있는 것이 평안인지 신의 부재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던 저에게, 부드러운 손이 내려와 어딘가를 쓸고 갔다는 느낌으로 앉아있습니다. 오늘의 저는 기쁘고 또 기쁩니다.

 

사랑이 넘치는, 존경하는 엄마 아빠, 항상 고맙고 미안한 언니, 반짝이는 조카 민유와 오빠, 새언니, 제가 가진 것이 무엇일까요. 무엇이든 한아름 안겨주고 싶어요. 나와 닮은 친구, 은영 언니, 해선, 희연, 선정, 골목길을 돌며 만날 때마다 큰 위로를 얻어요. 고마워요.

 

나의 아름다운 김행숙 시인, 투명해서 바람결에 만나보는 이원 시인, 나의 선생님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목소리가 식지 않도록 오늘도 자꾸, 계속해서 쓰겠습니다. 새로운 호명이 되겠습니다.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심사평] 손을 매개로 한 전개 시적 사유확장 돋보여

 

예심에 의해 선택된 작품들 중 5명의 시를 집중 검토했다. ‘아마이드 밤 골목5편의 시는 작은 행위들을 모아 하나의 이국적이고 신화적인 공간을 축조해가는 시들이 재미있었다. 하지만 문장들을 주어, 서술어만으로 짧게 분절하자 오히려 행위들이 표현되지 않고 설명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부재의 형태5편의 시는 같은 제목의 시를 쓴 그리스 시인 야니스 리초스와는 달리 사다리를 오르는 동작과 묘사를 통해 시공간의 안팎에서 부재의 형태를 발견해 나가는 시적 전개가 있었다. 그러나 같이 응모한 다른 시들의 긴장감이 떨어졌다.

 

여름 자매5편의 시는 소꿉놀이, 유년기의 자매애 같은 이야기들이 스며들어 있는 환한 시들이었다. 마치 우리가 싫어하는 것들은 깊이 묻어 버린세계, ‘계속해서 실종되는세계를 불러오는 듯했지만 시적 국면이 조금 단순했다.

 

창문5편의 시는 얼핏 보면 내부의 어둠, 검정을 성찰하는 시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분법으로 나누어진 것들을 뭉개는 도형을 시가 그리려 한다고 느껴졌다.

응모된 시들이 고루 안정적이고, 스스로 발명한 문장들이 빛났다. ‘손의 에세이5편의 시는 우선 다면적으로 시적 사유를 개진하는 힘이 있었다. 이를테면 손에 대해 생각하면서도, 손을 없애 보고, 손과 함께 머문 곳을 생각하고, 얼굴을 없앨 수 있는 손을 그려내고, 손의 얼개를 떠올리고, 손에 의해 부서지면서 손의 통치를 생각해 보는 전개가 돋보였다. 작은 지점들을 통과해 나가면서 큰 무늬를 그려내는 확장이 좋았다. 최종적으로 창문손의 에세이중에서 손의 에세이를 당선작으로 선했다.

  

- 심사위원 황현산 문학평론가·김혜순 시인(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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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과 뿌리에 관한 식물학 / 조성호

 

 

입술을 달싹일 때 해안선이 느리게 펼쳐진다 거기 혀가 있다 행려병자의 시체 같은

 

풀잎처럼 흔들리는 그림자달은 빙산이 되어 은빛을 풀어헤친다 물빛을 깨고 비치나무 냄새 번져오는

 

젖을 희끗희끗 빤다 안개, 서늘한 빗방울, 물방울 띄워올린다 뿌리가 부풀어오른다 물거품처럼

 

*

웅웅거리고 부서지고 내장처럼 고요 쏟아져 내리고 내려야 할 역을 잃고 흘러가는 페름 행 전신주 흰 눈송이들 백야의 건반을 치는 사내 창문을 두드리는 나뭇가지 길고 가는 손가락 갈라지고 떠도는 핏방울 소용돌이 변두리로 나를 싣고 창 밖 쁘이찌 야흐 행 마주보며 또 길게 늘어나고 민무늬 토기처럼 얼굴 금이 가고 스쳐가는 가가문비나무 그늘 나뭇가지 그림자 일렁이는 시간 산란하는 밤의 시작을 경계를 지나 나는 또 바라보고 있고

 

마젤란 펭귄들 발자국 소리 울음 아 미역줄기처럼 늘어지고

 

*

움푹 파인 자국, 발자국들, 혀 뿌리가 길게 늘어져 꿈틀거린다 하얀 모래밭 그리고 하얀 추위, 그리고 하얀 포말

 

기억과 마디가 끊긴 생선뼈와 조개 무덤 사이를 가마우지들 종종 걸어나오고

점령할 수 없는 나라의 국경, 우수아이아, 숲길, 뒤틀린 비치나무 뿌리, 물거품이 사그라든다

 

 

 

 

2016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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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절벽에 섰을 때 들려온 말 , 더 고민해야 한다

 

지금 이 시간은 혹독했던 과정보다 뜻깊은 순간을 떠올리고 싶다. 근래에는 , , 고민해야 한다는 말씀이, 힘을 들여야 한다는 말씀이 들려오곤 했다. 고백하자면 절벽에 서 있을 때 들려온 귀한 말씀들이었다.

 

한 선생님은 인상적인 하나의 시적 표현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고 했다. 하지만 내 둔탁한 감수성으로는 언어의 질감을 매만지며 이미지의 흐름을 좇는 것만도 벅찼다. 한 선생님은 또 버리는 쾌감을 맛보라고 했다. 긴장이 풀리면서 우연의 빛나는 표현과 잠시 조우할 때도 있었다. 교착상태에서 탁한 감정과 부박한 언어를 경계하며 잊혀지지 않는 순간들을, 화자 중심의 시선으로 쉽게 결론짓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제 새해가 되면 나의 아름다운 고창에 가야겠다. 오래 비워둔 집에 보일러를 돌리고 아버지가 머물러 계신 산소에도 들러야지, 그리고 어머니가 보고 싶다.

 

오랜 시간 섬세한 눈길로 미욱한 제자를 깨우치고 기다리고 또 지켜주었던 오형엽 교수님, 고맙습니다. 선생님의 한결같은 마음이 없었다면 시가 시작되는 이 자리에 이르지 못했을 것만 같습니다.

 

어머님 같았던 김미란 오태환 강웅식 선생님. 귀한 선생님들과의 만남을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모두 고맙습니다. 밥과 술과 안식처로 내 가난한 영혼을 항상 그 자리에 서서 지켜준 올곧은 동혁. 우리 시천(詩川) 동인인 진실한 승진 형, 명민한 형철, 용국 형, 원경, 모던한 의리남 원준에게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이제, 진섭 형 차례입니다. 민영, 종만 선배님. 초등 친구 성규. 연구실의 아름다운 청년 영찬, 시로 도발할 때 가장 아름다운 보영 병주 혜미 지민 은진 누님 고맙습니다. 이제는 오래된 기와집처럼 진한 할머니 냄새 물씬한 내 어머니, 가족들.

 

읽을 때마다 눈이 부신 황현산 김혜순 선생님. 두 분 심사위원 선생님께 정진할 것을 다짐해 봅니다. 동아일보사에도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심사평] 빠른 질주-멈춤의 리듬감언어적 상상력이 돋보여

 

본심에서 6명의 작품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펜트하우스4편의 시는 비유를 적절히 운용해서 한 편의 시를 끌고 간다. ‘엄마가 방안에 앉아 재봉틀로 짝퉁 루이비통에 유성들을 박아넣는 경험에서 시가 발아한다. 그 자리에서 재봉틀은 유성이 되고, 방은 펜트하우스가 되고, 인공위성을 미행하며, 재봉틀의 잔소리가 음속을 돌파한다. 비유된 세계와 실제 세계가 일대일로 대응하고 있다. 다른 시에서도 자신의 입으로 불어야만 하는 진술행위와 유리알 전구 만들기 같은 두 가지 행위가 불다라는 동사의 주어로서 같은 의미를 내포해 배열되고 있다. 그러나 시 한 편에 다 포함될 수 없는 문장들이 돌출하고, 비유에 치중하느라 현실감을 놓쳐 버리는 부분이 지적됐다.

 

훈풍4편의 시는 시편마다에 들어 있는 간곡한 말, 경험을 고백할 때 언뜻 보이는 아픈 정경들의 표현이 좋았다. 자신의 기억을 말에 걸칠 때 그 말의 결을 스스로 발명해 내는 것이 시의 새로움이란 사실을 증명하는 문장들이 있었다. 그러나 영특한 손놀림’, ‘팔딱이는 주먹 심장처럼 두 개의 단어나 세 개의 단어로 경험을 응축해 버린 어구가 많고, 이 부분들이 오히려 시를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입과 뿌리에 관한 식물학4편은 상상력으로 시를 끌고 간다. 은유된 언어의 머뭇거림과 확장, 빠른 질주와 멈춤이 한 편의 시를 완성한다. 시는 마치 점령할 수 없는 나라의 국경처럼언어로 만든 점과 선, 리듬으로 시에 여러 개의 경계를 설정한다. 동시에 언어적 상상으로 세상을 더듬어 나가고, 더불어 떠나고, 정신의 세계를 어루만진다. 무작정 떠나는 것이 아니라 단어와 단어, 음운과 음운들이 서로 조응하면서 달려간다. 시의 입술을 달싹여 저 마젤란 펭귄이 사는 곳까지 뿌리를 내리며 가는 것이 아마도 이 시인의 식물학이리라. 논의 끝에 응모작 5편 모두 고른 시적 개성과 성취를 가진 점을 높이 사서 입과 뿌리에 관한 식물학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 심사위원 황현산 문학평론가·김혜순 시인(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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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창규

 

 

나는 쌈을 즐깁니다

재료에 대한 나만의 식견도 있죠

동굴 속의 어둠은 눅눅한 김 같아서 등불에 살짝 구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낱장으로 싸먹는 것들은 싱겁죠

강된장, 과카몰리* 등 다양한 <쌈장 개발의 기원>

 

봄철, 입맛이 풀릴 때

나는 구멍이 송송, 뚫린 배춧잎을 새로운 쌈장에 찍어먹습니다

달콤한 진딧물 감로를 섞어 만든 장

어떤 배설물은 때로 훌륭한 식재료가 되죠

 

두꺼운 것들은 싸먹기 곤란합니다

스치면 베이는 얇은 종잇장에도 누명과 모함은 숨겨있죠

적에게 붙잡히면 품속의 기밀이 구겨 한입에 삼켜요

무덤까지 싸들고 가는 비밀도 있습니다

 

어둠의 봉지에 싸인 이 밤

구멍 난 방충망은 경계가 소홀합니다

누군가 달의 뒷장에 몰래 싸놓은 알들

나는 긴 혀로 나방을 돌돌 말아먹는 두꺼비를 증인으로 세웁니다

사각사각, 저 달을 갉아먹는 애벌레들

 

수줍은 달을 보쌈해간 개기월식

삼킬 수 없는 과욕은 역류되기도 하죠

보름달을 훔쳤다는 나의 누명이 시간의 부분식으로 벗겨지고 있습니다

 

* 아보카도를 으깬 것에 양파, 토마토, 고추 등을 섞어 만든 멕시코식 쌈장

 

 

 

 

2015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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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가난한 꿈으로 사치스러웠던 날들를 만나 따뜻했다

 

나는 타인의 재능에 절망한 적 있다. 비교와 차이는 열등감을 낳기 쉬워서 자신을 돌아보기보다는 무고한 남을 원망하거나 시기하기 쉽다. 어쩌면 나는 남보다 내 자신을 더 미워할까봐 두려웠는지 모른다.

 

10년 동안 나는 내 삶의 혁명을 꿈꿔왔다. 그러나 삶을 견디는 것은 힘들었고,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내게 재능은 물론이고 운도 따르지 않는 것 같았다. 이런 실패한 혁명가에게 시()가 찾아왔다. 한 발짝만 뒤로 물러나면 벼랑인 것을. 당선을 기대하지 않았다고 쓴다면 내 양심을 속이는 것.

 

가난한 꿈으로 사치스러웠던 날들. 좌절로 괴로웠을 때, 아직도 내가 살아있다고 느낀 순간은 당신을 만날 때였다. 여느 날과 똑같은 오늘, 온몸으로 맞는 눈이 참 따뜻하다.

 

저마다의 간절함이 모두 이루어지기를. 그래도 내 인생이 무모한 반란으로 끝나지 않아 다행이다.

 

종교와 예술 사이에서 갈등한 저를 잡아준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아버지 어머니, 감사합니다. 박주택 선생님, 이원 선생님, 마경덕 선생님의 가르침으로 시인이 되었습니다.

 

선규, 현준, 효주, 동기, 소중한 친구들, 시인이 되는 걸 꼭 보고 싶다고 한 창호 형, 암이 빨리 낫기를 기도할게요. 멀리 떠나온 경희문예창작단에도 좋은 소식이 되기를.

 

황현산, 김혜순 선생님께도 깊은 감사를 드리며 끝으로 하늘에 계신 친어머니와도 이 기쁨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심사평] 자연의 변화와 삼투파노라마처럼 전개시인의 탐구 돋보여

 

본심의 심사 대상이 된 작품들을 읽으면서, 이 시들을 쓸 때 이 응모자들은 자신의 내부로부터 어떤 간절한 욕구가 있었는가, 아니면 어떤 경로로 시를 쓰는 과정에 입문하게 되어 습관처럼 시를 쓰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질문해 보고 싶었다. 그만큼 장식과 조립에 치중한 시가 많았으며 재주나 재치에 기댄 시가 많았다. 응모작 전체가 고른 수준을 갖춘 예도 드물었다.

 

김태형의 수상한 식인3편은 일종의 은유 놀이로서 노르웨이라는 거처를 시에 등장시켜 자유자재로 그 거처의 경계를 입술이나 국경으로 늘려 잡으며 유희하고 있었다. 우리는 가끔 우리의 집을 은유해서 노르웨이같은 이름으로 비유해 불러야만 할 것 같지 않은가. 시가 재미있는 지점들을 품고 있었지만 함께 응모된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같은 시들에는 이 시를 쓴 시인의 역량을 의심케 만드는 거친 일면이 있었다.

 

김상도의 졸립다가 마른4편은 거미줄에 걸린 줄도 모르는 곤충처럼, 우리의 일요일 같은 휴식이나 평화, 그 뒤에 도사린 위태로움을 슬며시 혹은 경쾌하게 던지는 솜씨가 좋았다. 그런 상황을 졸립다가 마르는같은 형용 어귀로 눙쳐 버리는 것도 재미있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뒤에 붙은 4편의 언어 실험적인 시들이나 나열, 조립의 시들이 이 시의 감동을 반감시켰다.

 

4편은 동굴 속의 어둠’, ‘스치면 베이는 얇은 종잇장’, ‘어둠의 봉지에 싸인 이 밤’, ‘구멍난 방충망’, ‘달의 뒷장’, ‘긴 혀’, ‘보쌈으로 비유하고, 이 비유에 어울리는 쌈장을 달콤한 진딧물 감로를 섞어 만든 장으로 만들고 난 다음 이 모든 사물과 자연 현상을 흡입하는 나를 내세워 자연의 아름다운 변화와 삼투, 세월과 일식을 파노라마처럼 전개하고 있었다. 유쾌한 유머가 있고, 축소와 확장이 화자의 입을 통해 전개되는 재미가 있었다. 그렇지만 시 속의 는 쌈을 멋지게 비유해 낼 수 있지만, 과연 이러한 의 현상들이 시적 화자의 감각들을 통과했다고 볼 수 있겠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그럼에도 응모작들이 각각 다른 경향성을 보이기는 하지만 5편 모두가 그 나름의 탐구가 있는 점을 높이 사서 을 당선작으로 선하는 데 합의했다.

 

- 심사위원 황현산 문학평론가·김혜순 시인(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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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시계 / 이서빈

 

 

겨울, 오리가 연못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저녁이면 다시 걸어 나온다.

 

연못으로 들어간 발자국과 나간 발자국으로 눈은 녹는다. 시침으로 웅덩이가 닫히고, 방수까지 되는 시간들.

 

오리는 손목이 없는 대신 뭉툭한 부리의 시간을 가지고 있어 무심한 시보(時報)를 알린다. 시침과 분침이 걸어 나간 연못은 점점 얼어간다.

 

여름 지나 가을 가는 사이 흰 날짜 표지 건널목처럼 가지런하다.

 

시계 안엔 날짜 없고 시간만 있다.

반복하는 시차만 있다.

오리 날아간 날짜들, 어느 달은 28마리, 어느 달은 31마리

가끔 붉거나 푸른 자국도 있다.

 

무게가 덜 찬 몇 마리만 얼어있는 웅덩이를 보면

손목시계보다 벗어 놓고 간 시계가 더 많을 것 같다.

 

결빙된 시간을 깨면

수 세기 전 물속에 스며있던 오차들이

꽥꽥거리며 걸어 나올 것 같다.

웅크렸던 깃털을 털고

꽁꽁 얼다 풀리다 할 것 같다.

 

오늘밤 웅덩이는 캄캄하고

수억 광년 연대기를 기록한 저 별빛들이 가득 들어있는 하늘은

누군가 잃어버린 야광 시계다.

 

 

 

2014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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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빨간불에서 오래 기다렸는데 이젠 잡고 올라갈 버팀목 생겨

 

빨간 불에서 오래 기다렸다. 겨울이 혹독하게 추울수록 봄볕의 따스함이 소중함을 아는 법이다. 그 먼 길들 위에서 지금은 날개가 없는 말도 날고 소도 날고 있다. 모두 빛나는 천지간을 건너가야 할 때이다. ‘당선이란 말 한마디에 일어난 일들. 이제 잡고 올라갈 튼튼한 버팀목 하나를 얻었다.

 

욕창이 생긴 등으로 나날을 뒤척이고 계시는 아버님과 간병하시는 어머님. 당선 소식에 장하다를 외치셨다. 너무 좋아 자꾸 우신다는 소리에 가슴이 저리다. 간병에 지치신 어머님도 고맙다를 연발하셨다. 과분한 사랑이다. 바람만 불어도 에미 왔나 나가보라며 성화하셨다는 말에 많이 울었다. 며느리가 가져온 음식은 뭐든 맛있다고 잘 드시는 아버님, 완쾌하셔서 봄에는 꽃보다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나시길. 늘 말없이 지켜봐 주시는 친정 부모님께도 당선소식 전해 드린다.

 

오늘이 있기까지 가지치고 덩굴손을 잘라주신 모든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인간이 먼저 되라 강조하신 신세훈 선생께 고맙다는 인사드린다. 당신은 대쪽같은 선비정신으로 시 정신을 다져주셨다. 이 나라 가난하고 힘든 시인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 주셨다. 헤진 가방, 오래되고 낡은 옷이 어떤 명품보다도 더 값지게 보이는 건 아마도 선생의 삶 자체가 명품인 까닭이겠지. 제자가 된 것이 자랑스럽다. 함께 공부하는 자유문학 문예교실화요반 동료들, 나와 친한 모든 분과 이 기쁨 나누고 싶다. 온갖 투정 다 받아주고 도와준 남편이 고맙고, 두 아들 상걸, 치걸, 사랑한다.

 

심사위원 오세영, 장석주 선생께 최선을 다 할 것을 약속드린다. 그리고 이 시대의 모든 젊은 시인들. 어느 날 문득 돌아보니, 당신들이 있었다. 그때부터 뒤돌아서 당신들을 따라가고 있다. 꽃지게 지고 내내 신세 지겠다.

 

 

 

 

함께, 울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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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삶과 세계를 아우르는 交響열린 감각 천진한 발상 돋보여

 

이담하 조상호 정지윤 성지형 유준상 김본희 임수현 문희정 임승훈 이인숙 이서빈, 열한 분의 시가 본심에 올라왔다. 첨단과 전위는 없었다. 열린 감각, 언어 감수성, 시를 찾아내는 촉() 같은 시의 기본 재능을 갖춘 시들이다.

 

이인숙의 갈대모텔’, 임승훈의 순종적인 남자’, 문희정의 몽유 이후’, 임수현의 노곡동’, 이서빈의 오리시계를 최종 결심작으로 골랐다. ‘갈대모텔은 깔끔한 서정시다. ‘흔들리는 것들은 흔들리는 것들을 잠재우고/흔들림에 기대어 다시 일어선다라는 시구 정도는 예사로 쓸 수 있는 시인이다. 다만 갈대숲을 새들과 바람의 모텔로 본 발상이 평이했다.

 

순종적인 남자는 낯선 이미지들을 엮고 시공을 확장하는 재능이 놀라웠다. 큰 재능의 잠재성을 확인했지만 조탁(彫琢)이 더 필요하다.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유기적 관련도 느슨했다. ‘노곡동은 홍수 속에 내팽개쳐진 이들의 시련을 따뜻한 관조와 유머에 버무려 시로 써냈다. 유머는 이 시인의 장점이다. 더 좋은 시인이 되기 위해 사유의 입체성을 갖추시길.

 

몽유 이후는 성장통을 다룬 시다. ‘쥐젖이 돋아난 어머니의 팔 안쪽을 더 이상 만지작거리지 않았다같은 시구처럼 체험의 구체성이 도드라졌다. 안정되었으나 화법이 새롭지는 않았다. 사유의 도약이 필요하다. 고심 끝에 심사위원들이 당선작으로 선택한 것은 이서빈의 오리시계. 완결미가 상대적으로 돋보였다. 놀랄 만큼 새롭지는 않지만 발상이 천진하고 관찰력이 좋았다. 삶과 세계를 아우르는 교향(交響)이 있고, 특히 우주 시공을 한 점 구체적 사물로 전환시키는 마지막 연이 좋았다. 신기성(新奇性)에 쏠리고 감각의 착종에 매달리는 시류에 휩쓸려 재능을 낭비하지 않고 자기 시를 쓸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판단했다.

 

- 심사위원 오세영 시인,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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