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머그컵 외 4편 / 최은여

 

앵두를 줍는다

 

나와 앵두는 소나기를 맞았다

앵두는 떨어지고 나는 떨어지지 않았다

 

앵두는 깨끗해졌다

우리의 이마는 닮았다

빗줄기 하나가 앵두를 겨냥해 때릴 때

저항 없이 공중에서 조금 머물다 내려앉는다

푸른 잎을 끌어안고 내려앉는다

 

낙하의 끝은 안전하다

공처럼 튀어 오르지 않고 공처럼 구른다

시멘트 바닥은 나쁘지 않다

외상을 입지 않았다

 

앵두를 따라가던 내 무릎이 깨졌다

빨간 빗물이 짓물러 고였고

앵두처럼 통통해졌다

 

가득 찬 것은 주물러 터트리고 싶어진다

차오른 빗물을 세차게 밟는다

고였던 앵두가 사방으로

튀어 오르고

바닥이 앵두를 줍는다고 정신없이 내달린다

 

 

 

 

11번가

 

deg.kr

- 애드픽 제휴 광고이며, 소정의 수수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서부도서관 열람실에서의 중얼거림

 

나이 많은 사람들은 지겨워, 중학생들이 표정을 만든다

네까짓 것들이 뭘 알고 떠드니?

오늘 도서관은 이런 분위기이다

 

책은 번호 순서대로 잘 꽂혀있다

ㅅ 다음 ㅇ

아버지 다음 할아버지

 

검색대의 첫 번째 책이 입을 연다

검색대의 마지막 책이 눈을 끔벅인다

나는 너보다 먼저 태어났고 너는 나보다 뒷번호를 가졌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이 방에는 거짓말이 많고 왜곡이 많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이 방에는 장난이 많고 낙서가 많다

사서는 턱이 빠지도록 하품을 하고 있다

 

기침 소리와 끼이익 의자 소리

열람실의 환풍기

 

친구들은 벌써 도망갔다 도서관으로부터

귀를 틀어막으며

비명을 지르며

 

이제 아무도 보지 않는 종이책에서 묵은 살냄새가 난다

나는 내가 틀렸다고 말한 것이 다 맞았으면 좋겠다

 

 

 

미러링

 

누가 방문 입구에 커다란 거울을 걸어놓고 갔다

 

나는 이제 거울 안에서 웃는 사람

나는 거울이 만든, 털이 북실한 꼬리를 가진 사람 종류

나는 하루 내내 표정을 짓는 거울

나는 의도치 않는 흐름

 

자꾸 내려가는 입꼬리를 바지춤 올리듯 추켜 세우고 세운다

조커의 입꼬리는 의도를 다 읽혀 버렸고

웃음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를 놓치고 말았다

자살이 너무 슬퍼서

나는 조커의 웃음을 샀다 혀를 날름날름 입술에 침을 잔뜩 묻히고

 

너는 잘 웃는다 거울이 혐의를 씌운다

증거는 잡혔다 거울 속

내 이마에 먼지가 묻었다

내 가슴팍에 손자국이 찍혔다

 

무거운 거울을 등에 업고 허리가 휘도록 온 시내를 쏘다닌다

표정 하나쯤 달고 다녀야 사람들이 겨우 봐 준다

등에서 미끄러지면 산산조각 날 얼굴

같이 주워 줄 사람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

굴러가는 파편을 끝까지 따라 가지 못하고

잘 가 가볍게 작별 인사를 해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니 조심해

너는 잘 웃는 사람, 거울 속에 갇혀 산다

 

 

 

예민한 장난

 

움직이지 않는다

내가 건드리기 전까지

 

작고 얄미운 새 떼가

덤불 속에 들어앉아 있어

나는 돌멩이를 주워 던지는 시늉만 한 사람

 

작고 얄미운 새 떼가

 

한 번 옮기고 믿지 못해 또 한 번 옮기고

 

새와 내가 장난을 해

덤불을 향해 나무 작대기를 던지는 시늉만으로

 

새들이 달아나 준다

달아나면서 끝없이 재잘댄다

나는 알아들을 수 없는 그들의 기호를 사용한다

 

새가 새로 움직인다

나보다 빠르다는 것을 나보다 가볍다는 것을

나는 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나는 계속 나인 채 보고 있다

같은 자리 같은 무게 같은

 

새는 계속 새로 있다

 

 

 

내 이름은 Run

 

단면은 쉽고 양면은

어려워

 

자를 수 있는 것만 양면을 가졌어요 단면은

양면의 절반이 아니에요

나의 단면은 겉과 속이 같아요

 

단면은 실체,

단면은 전부,

나의 얼굴은 단면이에요

 

배달에 지친 나는 계단 모서리에 앉아

건물과 건물 사이 어스름 해의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어요

햄버거집 탁자 위 단면은 단면 쪽으로 단면 쪽으로 기울어

한 입 베어 먹을 때마다 이게 저녁밥이야 하는

입 모양으로 오물거려요

 

다시 밤이 와도 나는 언제나 한쪽만을 선택할 수밖에 없어요

전속력으로

 

단면으로 이어진 길을 달려보아요

나는 단면 끝까지 가 보기로 했어요

조각조각 이어붙인 오토바이를 타고 조각조각

 

단면으로 울어요

단면으로 걱정하고 단면으로 포장을 하고

단면으로 노래하고 단면으로 프린트해요 단면과 단면이 만나

이제 양면이 되기 싫은 나는 처음부터 단면이었어요

 

 

 

[수상소감]

 

시를 쓰는 몇 해 동안 제가 사는 작은 도시 서북쪽 우리 동네 하천가에는 벚꽃과 접시꽃이 여러 번 피고 지고 수양버들이 새로 심어졌습니다. 길고양이가 새끼를 낳았을 때 저는 예민해졌습니다. 하천 둑길에 서 있는 느티나무 아래에서 시를 묻고 새가 불러주는 답을 받아 적었습니다. 자괴감에 빠져 있기도 하고 가끔 시적 흥분 상태에 놓여 있기도 했습니다.

 

당선 전화를 받은 후, 필사하고 습작하던 A4 종이 뭉치를 정리했습니다.

 

나룻배도 없고 뱃사공도 없는 저에게 크고 깊은 등단의 강을 건너는 것은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수영을 못합니다. 물은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자연입니다. 그런 저는 하얀 종이배를 꼬깃꼬깃 접고 띄워서 조금씩 멀리 나아가는 연습을 했습니다. 깊은 곳은 쳐다보지도 못했습니다. 종이배가 찢어지면 다음 날 더 두꺼운 종이배를 접어서 올라탔습니다. 가끔 바람이 밀어주면 마음이 출렁거렸습니다. 늘 혼자였고 또 혼자였습니다.

 

어느 날 존경하는 시인과 대화하던 중 ‘작가’라는 단어를 들었습니다. 솔직함을 시의 미덕으로 알고 있던 저에게 ‘작가’라는 단어 풀이는 노가 없는 뱃사공의 거친 손에 노를 잡혀주는 느낌이었습니다. 한 번도 이르지 못한 강 건너 아름다운 숲에 가보고 싶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남원시 운봉읍 행정마을 서어나무숲에 다녀왔습니다. 서늘하고 고요한 시를 쓰겠습니다. 성실하고 미련한 글 노동자로 살겠습니다. 외롭고 고달픈 누군가가 서어나무 같은 시를 만나 편안히 쉬었다 갔으면 좋겠습니다.

 

저를 허물어 시인으로 빚어주신 ‘수요반’ 선생님들께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부족한 시를 선택해 주신 심사위원 안도현 선생님, 김륭 선생님, 유홍준 선생님께 더 좋은 시를 쓰기 위해 더 좋은 사람이 되겠다고 말씀드립니다. 시를 더 공부해도 된다는 허락으로 여기겠습니다.

 

 

 

[심사평] 그의 육체가 그의 언어와 싸운 고투의 흔적

 

본심 작품

 

이은정 「생리전증후군」 외

최은여 「머그컵」 외

라환희 「화양연화」 외

이은우 「라라의 창」 외

김나형 「비둘기, 투신」 외

김수형 「야호에 찍는 마침표」 외

 

삼백사십여 명이 응모, 해를 거듭할수록 그 열기가 뜨거워지는 최치원 신인문학상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예심을 거쳐 본심으로 넘어온 여섯 분의 응모작들은 그 가능성 못지않게 편차 또한 뚜렷했다. 모든 시는 모두 다르게 태어나고 언제 어디서든 각각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는 지극히 보편적인 사실을 새삼 확인하며, 심사위원들은 머리를 맞대고 숙고를 거듭했다. 그리고 시는 필연적인 산물이 아니라 우연(생의 새로운 범주 혹은 미지의 세계)으로 만들어지거나 수혈되는 영혼의 양식에 가깝다는 상식적인 명제를 바탕으로 두 분의 작품을 주목해서 읽었다. 최은여(「머그컵」외), 이은우(「라라의 창」외) 씨의 작품은 각기 다른 개성을 음미할 수 있는 세계를 펼쳐 보여 흥미로웠고, 그만큼 심사위원들의 마음은 설렜다.

 

이은우 씨의「라라의 창」외 4편의 시편들은 자기만의 스타일로 밀고나가는 패기와 언술의 새로움이 돋보였다. 그만큼 끝까지 심사위원들을 고심하게 만들었지만 서사를 통해 드러나는 이미지가 다소 불투명하다는 흠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곧 시적 긴장감을 떨어뜨리는 일부 상투적인 진술들과 맞물려 사고의 깊이와 메시지가 다소 약하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특히 「라라의 창」의 경우 문장을 부리는 능력만큼이나 탁월한 이미지를 전경화하는 능력이 돋보였지만 마지막 연(“겨울이 노랗게/창을 두드릴 거야”)의 임팩트가 못내 아쉬웠다. 결국 이번 심사는 우리 시의 새로운 가능성을 전제로 오랜 토론을 거쳐 최은여(「머그컵」외) 씨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둘 다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자신들만의 시적 스타일을 견지하고 있었지만 보다 새롭고 다른 시라는 점에서 이견이 없었다.

 

최은여(「머그컵」외) 씨의 작품들은 아주 오래된 서정을 새로운 시의 표면 위로 어떻게 끌어올리는지 보여준다. 그의 작품들은 우선 그만의 세계를 정직하고 정확한 언어와 이미지로 보여준다.「머그컵」이란 시적 대상과 내면의 관계가 상투적이지 않게 혼융되면서 육체와 정신에 제각기 기댄 한 인간으로서의 욕망과 그 욕망에 대한 저항을 독창적으로 펼쳐 보인다. 간결한 메시지이지만 그 서사가 단순히 읽히기보다 보이게 하고 나아가 독자들이 동참하게 하는 극화의 형식이어서 묘한 매력에 빠져들게 한다. “앵두를 줍는다//나와 앵두는 소나기를 맞았다/앵두는 떨어지고 나는 떨어지지 않았다”로 시작, “가득 찬 것은 주물러 터트리고 싶어진다/차오른 빗물을 세차게 밟는다/고였던 앵두가 사방으로/튀어 오르고/바닥이 앵두를 줍는다고 정신없이 내달린다”는 결말에 도착할 수 있는 능력은 오랜 습작시간과 그의 육체가 그의 언어와 싸운 고투의 흔적이다.

 

「미러링」, 「예민한 장난」, 「내 이름은 Run」등의 작품 또한 자연스러운 언술과 맞물린 서사의 개성적인 조형능력이 돋보인다. 사소한 일상을 담은「서부도서관 열람실에서의 중얼거림」같은 작품에서도 “이제 아무도 보지 않는 종이책에서 묵은 살냄새가 난다/나는 내가 틀렸다고 말한 것이 다 맞았으면 좋겠다”는 진술로 확인되듯 그의 시적인식은 얼핏 평범한 언술이지만 주술적이다. 극도로 개인적이면서도 우울(?)할 정도로 합창적인 현실과의 조우를 시적에너지로 견인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반증이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더불어 이은우 씨에겐 어쭙잖은 격려 대신 조만간 시의 길을 함께 걷게 될 것이란 심사위원들의 예감을 전한다.

 

- 심사위원 안도현 김륭(글) 유홍준 / 예심위원 김경린 성금숙 시인

 

 

728x90

 

 

우리들에 관한 독서 외 4편 / 강다솜

 

 

1.

노포동역에 내리자 갑자기 짠내가 밀려와

숨을 몰아쉰다,

누군가 또 한 페이지를 넘긴다

고양이가 자동차 아래 눈을 뜬 채 웅크리고

웅덩이에 고인 가로등 불빛이

바람에 한 겹씩 흘러내린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아,

자꾸 불어나며 뒤를 따르던 그림자가 소근거린다

내가 태어나 처음 한 일은 달그림자를 끌어다

바다를 한 겹 한 겹 꿰매는 일이었어

사람들은 누구나 그 책의 활자이기 때문에

이따금 늦은 시각에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지

 

2.

  지하철 한구석에서 고흐가 말했다 타라스콩이나 루앙에 가려면 기차를 타야 하듯이, 밤하늘의 저 별에 이르기 위해서는 죽음을 맞이해야만 한다고 늙어서 죽는다는 것은 별까지 걸어간다는 것이지

  안내방송이 들리고 열차 안의 불이 꺼졌다 승객들은 그림자처럼 밖으로 뛰어내렸다 다시 불이 켜졌다 나는 피터팬처럼 그림자가 없었다

 

3.

피터팬의 발에 그림자를 꿰매어 주던

웬디는 그가 한 권의 책이라는 걸 알고 있었을까?

이 바다 저편에는 우리들의 나라가 있어서

거기로 간 사람들은 영원히 나이를 먹지 않는다고,

때로 활자가 되고 싶은 몸은 그 대신에

여러 개의 그림자를 만든다

문득 웅덩이에 내 얼굴이 비치는 것을

한 겹씩 바람은 자꾸 들추어내고

고양이가 눈을 한 번 깜박였을까,

펼쳐진 풍경이 잠시

정지한다

 

 

 

 

11번가

 

deg.kr

- 애드픽 제휴 광고이며, 소정의 수수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물이 가다

 

 

 

생선을 몇 번 찔러보곤

물이 갔다고 하시며

걸음을 옮기는 우리 엄마

 

그 뒤로 세상의 물들이

천천히 흘러가네

빛을 잃어가는 생선의 눈알과 색 바랜 티셔츠

공중에 날리는 모래 먼지들

어릴 적 나를 한 번 지나간 구름이

지금 되돌아오네

 

어린 내가 업혀 있던

엄마의 등 뒤로 물비린내가 물씬

풍겨오네, 잡으려 해도

한 번도 잡을 수 없었던

꽃잎 같은 저 참새들 후두둑,

땅으로 하늘로 오르내리는 저녁

 

내 안에서도 소용돌이치는 물빛을 느끼며

온갖 풍경들과 흐름들 터벅터벅

발소리,

그렇게 물이 되어 천천히 흘러가네

우리는 다만 물 위로 걷듯이

금방 사라질 흔적만 남기고,

메아리 같은 울음을 하나씩

던지고 가듯

 

 

 

 

 

풍경을 녹음하는 여자

 

 

 

언제부턴가 집 앞 공원에 나와

늘 같은 벤치에 앉아 있는 여자

앞을 못 본다는 그 여자,

뒤에서 사람들이 장님이라고 수군거려도

미소 띤 얼굴이 물소리 같은 여자

 

그 여자의 몸은 축음기처럼

자기 안에 소리들을 담아두고 있다

손등 위로 지나는 햇빛의 소리

꽃잎을 흔드는 아지랑이 소리

가끔씩 피가 흐르는 소리, 머리카락이 자라는 소리에

어깨를 떨며 반응하기도 한다

어느 날 태풍이 지나가고 난 뒤

잠깐 멈추어 선 풍경들과

나뭇잎 위에 남아 있는 반짝이는 빗소리,

눈부신 소리들이 여자의 안에 차곡차곡 저장된다

높낮이 없는 음들이 모여 이루는

하나의 거대한 화음이 여자의 안에서

유리조각처럼 조심스럽게 반짝인다

 

공원에 올 수 없는 날이면

방 안에서 혼자 피아노를 치는 여자

가끔씩 눈을 감고 귀를 기울여

좋아하는 과거를 혼자 듣는 여자

공원에 밤이 오고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는 소리를

긴 음계처럼 오래오래 듣고 있는

그 여자

 

 

 

 

 

그의 유리공장

 

 

 

  유리병을 만드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그을려 검어진 피부가 유리보다도 반들거리는 남자 긴 쇠파이프로 숨을 불어넣을 때마다 부풀어 오르는 허공과 같이 목울대가 팽팽해지는 남자, 그의 작업장에서 바람은 처음으로 형태를 갖는다

 

  태아처럼 팔다리가 생겨난 바람들은 이따금 기지개를 켜듯 유리병 안에서 온몸을 진동시키며 울었다 그가 숨을 내쉴 때 풍경들도 몸을 떨며 저마다 다른 울음을 그의 날숨처럼 일정하고 길게 토해냈다 병 안에서 바람이 불고 나뭇잎이 흔들릴 때, 근육이 불뚝 솟은 그의 몸에서도 어떤 공기주머니 같은 울음이 부풀어오르다 천천히 가라앉곤 했다

 

  유리가 하나씩 부풀어 오를 때마다 점점 작아지는 남자 유리병 안에 들어 있는 목이 긴 소리들을 날마다 몸속에 진열하는 남자, 밤이 되자 손가락 끝에서부터 천천히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수많은 태아들을 품고 바람처럼 부풀어 오르는 그의 목울대만이 아직 뜨겁고 환하다 환하게 속을 비워내고 형태만 남은, 남자

 

  유리병을 나란히 세워놓은 그가 아직 식지 못한 채 마지막으로 공장 한구석에 진열된다 퍼즐처럼 붙어선 채 풍경을 이어가던 유리병들이 불에 덴 듯 바람에 잠깐 일그러진다

 

 

 

 

 

달리는 숲

 

 

 

불현듯 시장기를 느꼈다

태풍을 빨아들이며 숲은 순식간에 쑥쑥 자라고

나는 멀뚱히 서서 배를 만진다

 

오래전에 무엇이 달려가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물소 떼처럼 우글우글하고

엉킨 바람처럼 방향이 제멋대로인

그때도 지금처럼 배가 고파졌고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욕망을

잊자, 잊자고 나도 모르게 되뇌었다

 

나무들 속

갈라진 껍질의 틈으로

풀꽃 잎사귀와 무수한 빗방울들,

민들레 홀씨와 도둑고양이 같은 것들이

탯줄로 연결된 채 한데 숨 쉬고 있었다

그들이 숨을 내쉴 때마다

뱃속으로 끓는 듯한 바람이 스며들었다

나는 문득 내가 민들레 홀씨만 했을 적을 떠올린다

 

태풍의 눈처럼 조용한 나무 속

숨 쉬는 소리가 그렇게

공기를 진동시키며 울었고

숲이 성큼성큼 전진을 시작했다

잊자, 잊자, 하여도 생생하게 등을 훑고 지나가는

내 안의 채워지지 못한 허기

살아 있음, 그 살아 있음이

 

 

 

 

수상 소감

 

  물 위로 걷듯이 금방 사라질 흔적만 남기며 글쓰기를 했습니다. 완성한 시가 수십 편이라면, 쓰다 지워버린 시는 아마 천 편이 될 것 같습니다. 어쩌면 파도가 수만 번 밀려와야 겨우 하나의 지층이 생기듯 자연스러운 일이겠지요. 다만 바다와 달리 사람에게는 하고 싶은 말들이 넘치고 용기는 부족하기 때문에, 시를 진심으로 대하며 자유롭게 글쓰는 일이 늘 어렵고 숙제처럼 여겨지곤 합니다. 말에는 책임이 따르고, 마음에 맴도는 말이란 하지 않는 편이 나을 때가 많으니까요.

  이렇듯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는 부끄럽지만, 남기기 어려운 말보다는 침묵을 택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신인상에 처음 응모하면서도 당선되리라곤 감히 생각지 못했습니다만, 귀한 상과 소중한 기회를 주셔서 송구스러운 마음이 듭니다. 어렵더라도 앞으로는 침묵하기보다 더 배우고 노력하라는 의미로 받아, 좋은 시를 쓸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치원 문학상 심사평

 

어떻게 이런 일이

 

얼마 전에 두 분 선생님들과 한 자리에 모여 논의를 했던 투고작들에게, 간략하나마 심사평을 붙이기 위하여 필자는 다시 한 차례 모든 원고들을 살펴보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 자리는 그들 시에 관한한의 후일담인 셈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많지.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짧은 시를 쓰고 싶어 했던 자의

실패작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졸시 「어떻게 이런 일이」 전문

 

시들을 살피는 와중에 지독한 뇨의 마냥 밀려오던 시작(詩作)에 대한 욕구로 인해,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한 편의 시를 적어 보기에 이르고 말았다. 그렇게 짤막한 시 한 편을 얻게 되었다. 일견 생뚱맞아 보이기도 하는 인용 식(式)일 수 있어 보인다.

하지만 모든 시들의 일정 부분의 풍습은 “어떻게 이런 일이”의 등속을 헤아려 보거나 천착하는 데에 이르거나 바쳐져야 한다는 이유에서, 이들의 시 속에도 저류하고 있을지 모를 “어떻게 이런 일이”의 기척을 찾아 눈길을 주어 보았음을 밝히기로 한다.

 

여섯 사람의 시를 나누어 읽었던 시간은 어느 사이 두 사람의 세계로 압축되었다. 시를 나누어서 고른다거나 차등을 메기는 일은 어쩔 수없이 유효한 측면도 있었으나 한 편으론 따분하거나 무효한 일에 다름 아닐 수 있었다. 결국 현재의 모든 시들은 진화의 꿈을 간직해야 한다는 뜻에서 해보는 말이다.

“커다란 환풍기가 고래 울음을 내는 터널 안/ 갑자기 서야 하는 이유를 알고 싶어/ 앞을 내다보거나 라디오를 틀어 봐도/ 한순간 찾아온 암전에 대한 정보는 없다// 터널 입구를 들어서며 동공을 움츠리고/ 마주친 어둠에 대해 준비했었지만/ 앞선 차들의 급격한 멈춤에 가슴이 팔딱인다// 돌아갈 수도 나아갈 수도 없는 자리/ 어둠이 사방으로 짙어갈수록 문득 행복하다 말했던 거짓말이 후회된다/ 후회는 거짓말처럼 더욱 커진다// 구급차가 다가와 사고 차량 앞에 멈추고는/ 수습해야 할 슬픔의 일정을 알려준다// 삼켜진 것들은 불행이 자신을 피해 갔음에 안도한다(중략) 불안한 어둠 속에서 품었던 거짓말에 대한 의심조차 거짓말처럼 까무룩 잊어버린 채“ 이장호의 「피노키오는 다행이었어요」 일부

터널 안에서 만난 교통사고에서 발화된 이 시는 “거짓말”과 “피노키오”를 차용한 자아의 각성을 술회하는 방식을 갖추며 있다. 이장호의 다른 시편들 역시 이처럼 무난한 평균률의 진술들을 내포한다. 그러는 사이에도 그의 시의 안광이 “어떻게 이런 일이”의 돌연함이라거나 퀭한 우수의 높이라거나 너비를 좆아 갈 때. 언젠가는 그의 시가 자신의 이름으로 건설된 마을을 한 채 건사할 수도 있을 거라는 짐작을 비치며 지나갔다. 아쉽게 거기에서 멈춘 셈이다.

 

“생선을 몇 번 찔러보곤

물이 갔다고 하시며

걸음을 옮기는 우리 엄마

 

그 뒤로 세상의 물들이

천천히 흘러가네

빛을 잃어가는 생선의 눈알과 색 바랜 티셔츠

공중에 날리는 모래 먼지들

어릴 적 나를 한 번 지나간 구름이

지금 되돌아오네

 

어린 내가 업혀 있던

엄마의 등 뒤로 물비린내가 물씬

풍겨오네, 잡으려 해도

한 번도 잡을 수 없었던

꽃잎 같은 저 참새들 후두둑,

땅으로 하늘로 오르내리는 저녁

 

내 안에서도 소용돌이치는 물빛을 느끼며

온갖 풍경들과 흐름들 터벅터벅

발소리,

그렇게 물이 되어 천천히 흘러가네

우리는 다만 물 위로 걷듯이

금방 사라질 흔적만 남기고,

메아리 같은 울음을 하나씩

던지고 가듯”

 

강다솜의 「물이 가다」

 

머리 시로 놓인 “우리들의 독서”에서부터 강다솜의 시편들은 다른 이들의 작품에 비해 더 가파른 시의 그림자들을 거느리며 있어 보였다. 여기 인용된 “물이 가다”의 혼용 서술 기법 역시 눈여겨 볼만한 개미를 주고 있었다. 물(수분)이었다가 행색(물색)이었다가 물빛으로 드러나는 “물”의 이러저러한 면목들이 마침내 흔적만 남은 “발소리”로 화하는 지점에서, 이 시의 제목인 “물이 가다”라는 지시의 방향이 완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에게 자신의 시를 더하여 귀감의 세계들을 기대해 보는 마음으로, 강다솜의 시편들에게 올해의 “최치원 문학상”의 무거운 짐을 떠안기기로 정하였다. 축하를 드리는 마음과 함께 호된 정진의 날들을 빌기로 한다.

 

이번 제16회 최치원신인문학상은 총 203명이 응모하여 예심위원이 선정한 6명의 작품을 본심에 올렸다. 그중 본심에서 마지막까지 거론된 신인은 이장호, 강다솜의 작품이었다.

 

 

본심 : 곽재구(시인) 정윤천(시인. 글) 김중일

728x90

 

 

안개제조공장 굴뚝에 사는 소녀를 아니? 4편 / 정성원

 

 

일정한 무게를 가진 안개

폐가 부풀어 하늘로 붕붕 뜬다면 누구 배 좀 눌러주실 분?

 

허공에서 소녀가 뿜는 안개는 단조로운 모양이야

 

이를테면

 

안개공장장이 소녀로 가득 찬 옷장을 가졌다든지 한 명씩 꺼내 속을 갈라본다든지 겉은 늙고 속은 생생한 아이러니를 마주한다든지

 

옷장의 소녀가 갈라지는 건 단추야

그럼에도 심장이라 우겨볼까

 

상관없고,

 

소녀는 달마다 죽은 태양을 낳는다

 

죽은 태양에 뿌리내린 안개나무, 온기를 흡수하지 못한 꽃송이, <찾습니다> 전단지가 소리 지르며 피어나는 계절에

 

나무마다 물이 오르고

 

수많은 실종이 만개하는 모습은 어떨 것 같아?

 

멈추지 않는 는개, 머리어깨무릎발무릎발, 멈추지 않는 노래,

 

상실은 자주 노래를 부르게 한다

노래를 뿜어내는 굴뚝에서

 

포식자가 된 안개를 모른 척해줘

 

 

 

 

 

쿠팡

 

deg.kr

- 애드픽 제휴 광고이며, 소정의 수수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도무지 잠들지 않는 밤엔 해바라기를 생각해요

 

 

양이 울타리를 넘는다

 

양털베개를 벤다 양은 찢어진 입과 긴 손가락을 가졌다 숨을 마시려 배를 달싹일 때마다 밀쳐둔 잠이 일렁인다

 

해바라기 뿌리에 숨겨둔 태양은 집으로 갔을까

어리석은 글자를 쓴 날엔 더욱 허기지는 밤이 찾아오고

 

어둠이 입속으로 쏟아진다 단단한 글자가 심장을 찌른다

손가락을 펼치니 한낮이 보이고 한밤이 보이고

양이 울타리를 넘는다

 

허리를 동그랗게 말고 나를 빼곡히 알아가는 밤

불면은 불멸이 될 것이고 내 몸엔 양털이 돋을 것이고

 

해바라기가 허공으로 길을 내는 곳에서

 

눈을 감는다

생각과 생각 사이에서 꽃이 핀다 꽃잎이 흩날리는 벽지에 잠이 뒤척인다

 

점점 두꺼워지는 어둠

기분을 굽힌 잠이 어둠을 삼키다

 

일흔아홉 여든 마리, 이리저리 몸을 들썩이다가

 

빙글빙글 도는 해바라기 벽지를 본다 다시 눈을 감는다 양이 울타리를 넘는다

 

 

 

 

 

 

 

깊은 개념은 얕은 문학시간에 다 배운 것 같아요

 

봄을 가르치지 않는 학교에서 시를 배운다

시의 해석을 받아 적는 것은 신물 나는 일,

 

나에게 주어진 하늘은 네모난 창

위로의 말이 창밖에서 서성인다

 

이팝나무와 나비를 구분 못 하는 눈이 나에게 필요할까요 눈을 바람에게 주고 깊은 잠에 빠질까요

 

수척한 바람이 손짓을 한다

 

떨어지는 꽃잎이 구름 쪽으로 가닿는다

 

구름 너머 보이는 아버지

바다에서 출렁여야 할 당신이 햇볕물살을 그물에 담고 있다

 

빌어먹을 아버지,

나는 지금 푸른 비늘이 필요하다고요

 

이쯤에서

아버지에게 날개를 입혀주면 흥미로울까

 

. 생각 말고 잘- 생각하라던 문학 수업은 순전히 말장난

형식적인 문학 선생은 건조한 기호

아버지와 나는 아빠와 구름이라는 단조로운 공감각

언어를 탐색하는 우리는 일그러진 교실의 자화상

 

끝나는 종이 울린다

날개 입은 아버지가 손을 뻗는다

 

구름이 곡진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손가락선인장

 

장마가 시작되면 마르는 것을 생각해

비의 그림자가 버석거린다 냄새는 말캉하고

 

죽으면서 경쾌한 비

 

젖는 곳이 있다면 한쪽에선 증발하는 마음

 

공평한 방식으로 비가 내린다

 

비의 얼룩이 지워지면 백단이 핀다

오아시스로 가자, 서로의 손가락을 깨물며 광활한 모래 언덕으로 가자

 

갈망은 처음부터 목이 마르는 목적을 가졌지

그것은 행선지를 방황하는 모래알갱이처럼 우리의 방황이 깊어진다는 말

 

등을 구부릴 때마다 굴곡진 생의 촉수를 달고

한 번도 내 편인 적 없는 너를 생각할래

 

백단 숲에 손가락이 핀다

알 수 없는 감정이 괜찮다는 표정으로 흔들린다

비의 내용을 기록하는 손가락이 버석거린다

 

 

 

 

 

 

혼자 울어야 해서 시시한 상상만 해요

 

 

비밀을 도모했대

그러니까 우리는 하늘을 갖기로 했다는 말이래

비둘기 깃을 빌려 입고 하늘에 가까워질 때 시력을 나눠주기로 한 거래

 

꽤 기분 좋은 날이었대

 

손바닥을 펼치면 별의 잔해가 빼곡했대

그런 날은 많은 문을 그렸대

반짝이는 것을 보면 다 열 것 같았던 문은 종일 닫혀 있었대

 

뒤를 보아야 하는 순간을 모른 척한 거래

그렇다고 앞을 보는 것이 쉬웠다는 말은 아니래

 

쉽게 죽어야 하는 것들과 어렵게 살아야 하는 것들을 생각했대

하늘이 내일이라는 말 같아서 내일에 동조하지 않기로 했대

 

비둘기는 어쩌다가 인간의 눈을 탐내게 되었을까

 

비둘기 깃을 빌리는 날이 늘어갈수록 눈이 흐려졌대

비둘기는 자기가 사람 족속이 다 된 줄 알았대

 

뜸뜸하게 운 것 같기도 했다는데

 

별 냄새가 진동하는 밤에는 눈이 먼저 아파왔대

 

비둘기가 눈알을 쪼아 먹는 상상을 했대

숨을 크게 들이쉬고 팔을 활짝 펼쳤대

 

비둘기 깃을 입었대

날아야 하는 순간에도 발은 그대로 땅이더래

 

우리는 비밀에 침묵해야 했대

침묵할수록 또렷해지는 순간이 스펙트럼으로 터지더래

 

728x90

 

 

동물원에서 텔레비전 보기  4편 / 문이례

우리(We)와 우리(Cage) 사이

 

 

밖은 우리의 함정이었다

 

울타리를 친다는 건 거부의 표시일까

 

아무도 침범하지 않고 경계를 무너뜨리지 않는 게 관계망이라면 문 안쪽은 안전하다는 거겠지, 포식자가 걸어온 길엔 왜 자꾸 문이 사라지는 거니! 서로를 겪는 방식이 달라 곳곳에 우리가 필요했지 우리는,

 

우리가 있어 슬프다가도 우리가 있어서 안전하다는 생각

 

아이들과 동물원에 온 인솔교사는 호랑이보고 귀엽다를 난발하고

발톱을 감춘 호랑이가 원하는 게 뭔지, 이들의 뇌 속 세계

 

아무것도 모르는 해는 척, , , 돌아가고

 

어제는 아버지랑 실랑이하다가 휴지통이 날아왔지

변화구를 던지듯 심각하게 노려보던 눈

 

누군가의 내일이 여기라면

사각이 좀 더 안전한 방법이길,

 

모서리는 깎이더라도 우리의 안전이 될 수 있다는 모순!

 

매일매일 갇힌 동물처럼

어느 것 하나 함께라 부를 수 없는 나의 우리를

동물원 가서 묻는다, 갇힌 슬픔이 튀어나와 나를 덮칠 것 같아도

 

벗어나지 못하는 건 나만이 아니라는 것

물려받은 유전자가 그렇다는 걸

 

동물은 왕국을 포기하고,

텔레비전을 보는 우리는 우리를 훌쩍 뛰어넘지 못하는데

밖은 여전히 우리를 뛰쳐나간 아이들의 뒤집기가 한창이다

 

우리가 모르는 우리가 가끔 내 눈에만 보이지만

선뜻 먹이를 주지도

손을 내밀지도 않는

 

목숨을 건

네모 속 갇힌 최악의,

 

 

 

 

쿠팡

 

deg.kr

- 애드픽 제휴 광고이며, 소정의 수수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건넛방, 그 숲

 

홀연 문을 밀면 나무의 말이 들릴까요

 

꽉 닫힌 그의 서랍을 열 때는 무엇을 먼저 꺼낼까

누구도 예측 못 한 새들의 변명은 겨울이명으로 남아

두 귀는 뾰두라지처럼 감정을 부풀리고 있어요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무너지고 마는 폭설의 위협

어디까지가 그 서랍의 내면인지

 

자물통을 채우지 않아도

종종 열리지 않던

서로의 걸음은 그렇게 갈무리되죠

 

말의 눈꺼풀을 들춰보면 바람의 문자들이 적혀 있을 거예요

 

입을 닫고 각자의 방으로 흘러간 물관처럼

누구라도 소리 지를 것 같은 계단의 침묵

 

새벽녘, 초인종이 울리면 두려워요

숲을 훔쳐 사라진 달이라도 품어야 할지

아무 뜻 없이 읊조리는 후렴을 읽을 수 없어

모래폭풍이 지나간 빈방만 쳐다보죠

 

나무의 냄새를 좇고 있는

서랍 속엔 꺼내지 못한 말이 웅크리고 있어요

 

그냥 문을 닫기 두려워

내 귀가 열릴 때까지

 

새의 게스트하우스를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고 돌아서죠 

 

 

 

 

 

청춘들

  

1교시

 

실제처럼, 어설픈 엉덩이라도 흔들면

 

가벼운 손뼉쯤을 받을 수 있을까 구령이 반복되면, 어쭙잖은 농담들은 계속해서 따라붙고,

애인은 묻지 않은 내 엉덩이만 놀리지

하나 하면 둘이 아닌, ‘ 하고 걸어가는 발맞추기

 

-여긴 민방위 훈련장입니다!

 

아무도 뛰지 않는

저 밀림 속으로 맹렬하게 달려가는 공상으로

뒤뚱뒤뚱 엉덩이는 훈련 중,

술만 마시면 떠들던 옛 애인은

수영도 못하면서 해병대 나왔다 자랑질이고, 특수부대 나온 그 친구의 친구는 여자 뒤만 졸졸 따라다니다 돈만 털리고 차였다지

어정쩡한 하루

발이 묶인 우린 별수 없이 애인이랑 훈련 같지 않은 훈련으로 뒹굴고 나면, 온몸에선 땀이라도 나야지

하루는 어디서 보상받아야 할지, 서로의 총구 갖고 장난치듯

가슴 향해

빵야…… 빵야…… 하고 싶은

 

2교시

 

모든 지하는 구멍으로 통한다는 걸,

버스를 탈출해 지하로 흘러든 날

암흑 속에 갇힌 짐승도 웃음꽃이 피었지

지하를 지하고

올라오면

지켜야 하는 게 뭔지도 모를

주어 없이, 주인 없이

쏟아지는 햇살에 뿌루퉁해진 빨간 입술들

차라리 교복이라도 입고 뛸 걸 하는 생각

내가 똥개가 된 듯, 훈련 뒤의 어두운 그림자처럼

책상다리라도 있었으면

굴러가는 바퀴처럼, 치워진 책상다리 밑으로

이 도시의 착란을

 

민방위는 없고, 민간과 방위만 있는 21세기

 

교실로 들어서면 훈련보다 더 한 세상이 펼쳐지던 그때로 고! ! !

배가 고픈 아이처럼 매점으로 뛰어가던,

 

도로는 버스를 재촉하고

내 뱃속 훈련이라도 마치기 위해

이제 뛰어야지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여전히 훈련 중인

어정쩡한 오후를 씹고 있는

청춘들

 

 

 

 

 

입양

   

250가지의 항목을 꼼꼼히 표시하고도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모른 채

 

거품은 제거해주시고

속은 냉정하고 겉은 부드럽게

 

뜨거운 심장도 추가해주세요

 

커피에 샷 추가를 외치듯, 그 느낌만 품고 가족을 원하던 그녀

유리잔처럼 투명한 낯빛에도 가끔 그늘이 지듯

 

받아 든 주문서에 걸크러쉬한 속내를 내비치더니, 인큐베이터 속 빛이 들어오면 모르는 세계가 쿵, 떨어질 것 같아 조바심을 쳤다

 

카페 안엔 정자를 구하는 많은 여자가 주문서 들고 줄을 서고

 

아이 1, 2, 3, 4는 빛을 보기 시작하였다

 

한 여자가 투덜거리며 카페를 나서도

서로의 감각은 아닌 척,

주문서를 뽑으면 다시 샷 추가할 수 없다는 경고문만 입구에 나풀거리는데

 

커피 그라인더에서 나온, 단맛과 신맛이 혀를 마비시킬 동안

씁쓰레한 세상은, 우리의 웃음과 눈물까지 걸러내는지

 

아빠가 없어도 찾지 않는다. 체크

혼자서도 척척 일을 잘한다. 체크

놀이동산에 가자고 떼쓰지 않는다. , 등에 체크를 하고 있는 이들

 

아이는 어떤가요? 라는 질문에는

아직 잘!

차차 입맛에 적응되겠죠!

부적처럼 달고 다니는

 

엄마가 내 첫인상을 견디는 것처럼

난 태어나 한 번도 울지 않는 나를 견디는

 

여전히 카페 안은 샷 추가로 붐비고 

 


 

 

 

반사거울

  

걷는 것이 서툰 아이에겐

주춤거리는 억양은 집에 두고

 

마트료시카 인형처럼 숨겨진 얼굴이 불쑥 튀어나와, 아기일 때도 어른일 때도 항상 나는 없는, 난 나일 때가 제일 좋은

 

침대 밑에서 종일 입을 뾰족하게 만들지!

 

친척들을 만날 때는, 복사에 복사를 반복하는 입꼬리는 없어도, 거울만 툭, 툭 내밀면 난반사된 얼굴들 튕겨 나가는데 아니라고, 아니라고

 

어제의 대화는 어디에 박혀 있는지, 부메랑처럼 돌아오는 그들의 궁금증

 

자고 일어나면 어항 속에 갇힌 금붕어가 된 이야기, 입을 벌린 내게 쏟아지는 엄마의 알 수 없는 얼굴

 

부유물처럼 둥둥 떠다니는데,

 

나라는 아이는 하얗게 포장되어 침대 밑에 두고

사진 속 그는 책상에 앉아 고개만 끄떡이네,

 

울렁증을 앓듯 허파가 벌렁거려 쓸데없이 손톱만 뜯고 있는데

 

착한아이라서 그래,

그런 쪽팔리는 말 이제 사양할게

 

주머니 속 거울 꺼내 가십거리 얼굴 닦아내면

물방울처럼 사라지는,

728x90

...

728x90

 

 

별이 빛나는 밤에 외 4편 / 김새하

 

 

 

 

상트페테르부르크 오래된 서점 풍경만큼 비를 맞고 싱싱한 커피 냄새가 난다 피의 사원으로 가는 길엔 행위예술 중인 까마귀 동전을 물고 눈썹이 긴 여자 바람에 날리는 빠삐용 치마와 네바강을 거닐 때 심장을 짜낸 비트가 출렁거리며 외치는 이름 달을 찾느라 검은 물속의 푸른 눈을 뜨는 백야 차이콥스키 음악은 배 위 바람을 맞고 옛날에 받았던 편지는 아침을 만난 가로등이 된다

 

푸른 밤을 보는 깃발과 검은 밤을 보는 등대는 다리를 보며 잠긴 생각과 하얀 하늘을 걷는다

 

행복을 만드는 사람은 안경을 고쳐 쓰고 내시경을 들여다보는 찢어질 듯 팽팽한 창자다

망치를 때리는 두개골 소리는 흰색과 검은색이 반복되는 얼룩무늬

혼자라고 해놓고 항상 혼자가 아닌 것과 혼자가 아니지만 항상 혼자인 것의 별이 빛나는 밤에*

버킷리스트를 꿈꾸고 침을 삼키다 사레에 걸리는 일은 심심찮게 목젖을 때린다

 

이제 어디가

어디 가긴 출근해야지

팔리지 않는 집과 백야를 보내던 구멍 난 주머니

TV를 켜 논 채 들었던 잠을 깨는 방에 오로라 같은 커튼

정년퇴직을 꿈꾸는 남자가

밤새 돌아간 선풍기에 휴식을 주고

축축한 출근 도장을 찍는다

엘리베이터를 호출합니다 하향 엘리베이터가 도착합니다

여행을 끝내는 것은 잘리지 않는 거리에 셔터를 내리는 것

우린 아직 사랑이구나

 

*고흐의 그림

 

 

 

 

떠리몰

 

deg.kr

- 애드픽 제휴 광고이며, 소정의 수수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무한반복

 

 

외로움 깊이 재려는 시도

 

바닷가 모래 위 텐트, 잠든 아이들을 위해 통삼겹바베큐를 준비하는 사내 능숙한 칼솜씨와 적절한 소스의 양, 세심한 불 조절, 직업을 짐작하게 한다

호텔 테라스의 햇빛이 어울리는 외모지만 자연 속 사색을 좋아한다며 공기 한 토막 잘라 깔고 누웠다 시선은 선글라스 너머 바다로 향한다 어젯밤 마지막으로 내준 코발트 빛 푸딩이 일렁거린다 해변의 여인 힙업 아래 탱탱한 허벅지 죄책감 없는 사진을 시식, 입맛 다시는 식도를 뜨겁게 내려간다, 물속에서 노는 딸 해변으로 나오면 몇 조각 저며져 무료한 듯 무료하지 않은 시간을 채우는 쉬운 재료로 내정됐다

저녁 메뉴는 감자와 판타체를 곁들인 신선한 양다리, 초고속 요리를 꿈꾼다 접시에 담긴 날 것들 부끄러워 석양을 잡는다 뜨거운 양다리 육즙, 턱을 타고 내린다

 

슬픔이 눈물의 눈물을 닦는 시간을 배우고

다음 슬픔을 기쁘게 기다리는 동안 외로움의 방향을 찾던 나침반, 수행하지 못한 임무와 모래 무덤을 판다 눈 어두운 청개구리의 절망 비가 내린다 흠뻑 내려버려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장래희망

 

 

 

 

욕조의 물은 얕은수로 끌어당긴다

제 몸 식는 줄 모르고

이 몸을 끌어당겨 무얼 하려는지

 

뜨거운 물로 녹여 만든 붉은 푸딩을

백열등 아래 흔들어주길 몰래 바란다

 

조심해야 할 시간이다

 

항상 먼저 다가오는 이별

이미지 없는 그림을 그린다

 

뚝뚝 떨어져 놓인 퍼즐 조각

여백이 채워지면

우리는 무엇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뼛가루에 피를 섞고 채를 친 살을 얹어

천천히를 오랫동안 먹여 키운다면

무엇인가는 우리가 될 수 있다

 

비가 내리고 비를 보며 샤워를 하고

책을 펴고 비를 보고

사랑을 나누고 잠을 잔다

 

꿈속에서 쓴 시를 기억하려

눈꺼풀 안쪽에 새겼더니

눈을 뜨면 올라가 버린다

시인이 웃는다

 

 

 

 

 

 

갈비뼈 소사

 

 

 

 

갈비뼈 한대를 뽑아 빈자리를 내려다보니

다른 갈비뼈가 자라고 있다

손에 든 갈비뼈에서 푸른 소금물이 떨어지고

자라나는 갈비뼈에는 갈매기가 날갯짓을 하고 있다

갈매기를 잡아 날개를 꺾으면 자라나는 갈비뼈는 아프지 않겠지

오락가락하는 숨길은 싸한 맛에 혀를 날름

갈비뼈를 핥아먹으려 들어 손에 든 뼈다귀로 숨길을 막아버린다

숨 쉬지 못하게 틀어막고 갈비뼈가 시리지 않도록 두 손으로 가슴을 감싸 쥔다

바람이 들락거리지 못하게

천둥이 쾅쾅 두드려보지 못하게

이미 밖으로 나온 갈비뼈는 계속 푸른 바닷물을 흘려도

새 갈비뼈는 그 자리를 지키게

가슴에서 또 삐져나오지 않게

그래서 찬바람을 만나지 않고 부서져 내리지 않게

손에 든 갈비뼈로 쾅쾅쾅 못을 쳐 가슴을 닫는다

바다가 흘러내린다

 

 

 

 

 

 

 

 밧줄

 

 

썩은 밧줄이 있다

더는 배를 부두에 매어둘 수 없는

낡다 못해 썩은 밧줄이다

갈매기 한 마리씩 더 앉는 것에도

숨차게 출렁거린다

보는 사람마다 잘라내라 아우성이다

썩어도 준치라고 큰 배를 잡고 생을 채워온 나를

한 번에 잘라내지는 못하나보다

어제 입은 상처 위에

오늘도 내리치는 칼이 날카롭다

밤이슬 검은 공기에 몸을 늘어뜨린다

이대로 풀어져 바다로 내려가길 기도한다

부둣가에 떠 있는 쓰레기들이 물냉면의 고명처럼 떠 있다

축 늘어진 모습 웃음이 되었다

얼마나 다행인가

 

아침노을이 가고 난 뒤 피부는 뙤악하게 쪼여온다

밤새 아문 상처가 두렵다

내일도 계속될 일을 또 다른 오늘에 맞이한다

썩은 밧줄이 있다

오늘도 잘리기 위해 기다리는 밧줄이다

 

칼을 내려놓고

풀어줄 사람 없는 밧줄

처음 모습이 생각나지 않는다

 

 

728x90

 

 

붉은 수화 외 4편 / 최지원 

 

 잎이 넓은 나무일수록 잡음에 개의치 않는 무딘 청력을 타고났다

 

 그렇다고 나무의 귀가 아주 무딘 것은 아니다
 몸 밖으로 뻗어 있는 수많은 안테나는
 몇 억 광년 떨어진 별들의 교신까지 스캔 뜬다는 사실을
 나무가 남긴 나이테를 보고서야 알았다

 

 몸 전체가 소리를 기록해 놓은 엘피판이라니

 

 나무에게 읽혀지지 않는 소리란 없었겠다
 낱낱의 사물, 우주의 섭리가 깊이 해독될수록
 셀 수 없는 문을 입에 문 나무
 일 년에 한 번만 어눌한 말을 내뱉었다

 

 수시로 들락날락거리며 마음까지 휘저어대던,
 호들갑 떨던 바람의 수다에 잠시 응대해주던,
 뾰족이 내민 시퍼런 말로 풋내를 풍기는 수화
 타고 오르는 넝쿨의 여린 눈망울들에겐 치명적이라는 것

 

 나무가 수도 없이 반복하던 동의어에도 귀가 어두운 나는
 추락의 끝이 뿌리의 끝을 간지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무들이 자꾸 쏟아낸다, 붉게 익은 말

 

 지나가는 버스 안, 그림자로 스며 든 나무들
 몸속 깊숙이 붉게 읽힌 수화가 번성할 때
 내 귀는 당나귀처럼 삐죽삐죽 돋아났다

 

 

 

 

떠리몰

 

deg.kr

- 애드픽 제휴 광고이며, 소정의 수수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고무의 시간


 

먹선이 비치는 수묵담채화 속으로
급브레이크 자국 남긴 고무

 

돌돌 말아 한참 꾹 쥐고 있어 본들
고무에게는 축소 해석이 없으므로
돌아갈 곳은 구겨질 리 없는 본성이다

 

사방팔방으로 쑤셔 본들 유추 해석에 휘말려들지 않아
한지 위에 찍힌 고무는 늘 긍정적이다

 

웅덩이 투성이 고무에게 웅덩이란 없는 법이다

 

가위에 잘려도 평정심을 잃지 않으므로
여전히 고무이던 고무

 

고무가 만난, 셀 수 없는 깃발들
시도 때도 없이 펄럭임도 고무 안으로 들어오면
눈 내린 풍경처럼 잠잠해진다

 

도대체 고무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이 모든 일에 폭설처럼 태연자약한 고무

 

세상에 어떤 고무(鼓舞)적인 일을 만나본들
고무의 깊은 심중을 알 수 있을까

 

해답을 물어보려는 순간
그늘만 먹고 살아 온, 거실 한쪽 구석 고무나무
제 몸속의 미로를 풀어놓은 채 부정의 살점을 뜯어먹고 있다

 

찢기 직전의 한지가 고무를 팽팽하게 잡아당겨 본들
누군가 버리고 간 수묵담채화에게는
확대 해석이 불가능하도록 지상의 모든 길을
눈이 덮었다

 

  

설원의 나무

 

 

위, 아래 좌우가 아슬한 경계에 히말라야시다가 산다

 

설원 꿈꾸다 부드러워진 가시
촘촘히 층을 이루었으나
도심 한가운데 거대한 뿔로 선다는 것은 여간 어지러운 일 아닐 것

 

그러나 나는 이처럼 순한 뿔을 본 적 없다

 

절대 넘어서는 안 되는 경계란 시간 밖의 경계라는 것을 아는
히말라야시다

 

위에 누르는 무엇을 치받고 싶을 때
나는 뿔 같은 그늘에 앉아
커피 마시고 불끈 솟는 힘으로 종이컵 구긴다

 

그러나 뾰족한 창날처럼 우뚝 서
누군가를 찌르기 전
소통의 깃발 흔드는 히말라야시다

 

시도 때도 없이 고함치는 자폐의 뿔이기보다
천천히 밀어 올리는 허공의 피 몸 안에 당겨 넣어
힘보다 순리를 앞세우는
당신의 승리에 잔잔한 박수를 보낸다

 

깊고 넓은 지반은 갖진 못했지만
설원의 꿈 단번에 꾸게 하는 착한 뿔이어서
히말라야시다, 나는 네가 좋았다

 

  

뱅크만의 달

 

 

 뱅크만을 지배하는 달은 거울의 방을 가졌다

 

 지구본에도 없는, 내가 명명한 뱅크만엔
 조수간만의 차가 예측 불허였고
 한 달에 한 번 잠깐 밀려오는 밀물마저 급속도로 빠져나갔다
 한 번 빠져나간 썰물은 좀처럼 밀려올 줄 모르기에
 인력으로도 어쩔 수 없었다

 

 썰물의 시간이 길어 말라가는 바닥 위로
 달이 던진 음모의 그물망에서 소금기 품은 풀들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구멍에 숨어 두근거리는 가슴 붙들어 매거나
 간혹 두 눈 치켜들고 동정 살피는 뻘의 족속들은 점점 힘을  잃어갔다

 

 거울의 방 루이14세가 표독한 논리로 숨통 조여 올수록
 백이숙제처럼 완고하던 좌파 망둥어들마저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오른손 더 높이 받들어‘옳소,옳소’외칠 때
 짱뚱어, 따개비 같은 여린 목숨들은 아예 두 손 치켜들고
 닭장 속의 알만 낳는 폐계라도 되고 싶어졌다

 

 루이14세와 유사한 추종의 무리들과 달의 힘으로 돌고 있는
거울의 방 톱니바퀴
 맞물려 돌아야 환해 질 지상의 음모들

 

 뱅크만 달의 음모가 더 깊어지기 전에
 백이숙제를 위해 고사리 뜯다 손톱 새까매 진 내가
 거울의 방 안에 갇혀 눈물 닦던 소매로
 밀물의 시간을 기다리며
 다시 쓱쓱 거울을 닦고 있다

 

 

 

괄호안의 이야기

 

 

쪼개지 않고도 여름을 통째로 파먹었다

 

디비디바비디부, 내가 나를 유리성에 유배시켜 놓고
수박 속을 파낸 숟가락 끝에서
차갑게 식어 별똥별이 되어 질 목숨들
목구멍으로 꾸역꾸역 삼키곤 했었다

 

디비디바비디부, 으슥한 묘지의 쐐기풀 찾으러 갔으나
여린 목숨들의 온기가 식어 버린
해질 무렵의 바다, 눈앞에서 지울 수 없었다
중심문장에 부연설명 내리고 맛깔스런 묘사만 곁들여야하는 詩
도대체 쓸 수 없었다

 

디비디바비디부, 벽시계 속 추가 되어 조바심 나게
반복과 기다림 사이를 똑딱똑딱,
신선한 이야기가 아니면
금방 고개 돌리고야마는 갑(甲)들의 식성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뱅글뱅글 상모까지 돌리게 했다
한번쯤
고개라도 끄덕여 주길, 박수까지는 아니라도

 

식어가는 별똥별 위해 느낌표 하나 뜨겁게 찍는 일이란
괄호 밖을 배회할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
오물거리던 슬픔 뱉어내던 곳에서
가을, 철모르는 수박이 넝쿨을 뻗는다

 

디비디바비디부, 내가 나에게 건 마법 속에서
수박의 껍질 안쪽은 점점 비워져갔다
오목한 거기 느낌표 같은 숟가락만
남았다, 덩그러니

 

  

최치원신인문학상 심사평


 읽다보면 언어가 말을 걸어오는 시가 있다는 말, 자신의 얼굴과 목소리와 마음을 보여주면서 팔짱을 껴오는 시가 있다는 말. 보자기를 풀었을 때, 향기롭고 맛깔 나는 시의 선물이 펼쳐져야 심사자들의 눈도 더 밝아지는 거라는 이정록 시인의 기대 섞인 말에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응모작 앞에 앉았다.   
 
 예심(153명)을 거쳐 일곱 분의 작품이 본심에 올라왔다. 어향숙의「다락방의 몽상」외 4편, 김수형의「야흐에 찍는 마침표」외 4편, 김수진의「사막의 역사」외 4편, 최지원의 「붉은 수화」 외4편, 한인숙의 「자작나무」 외 4편, 조연재의 「완두콩」외 4편, 이이후의「저물어 가는 목소리가 들렸어」외 4편, 합계 35편의 작품이 그것이다. 이 중에서 심사위원들이 주목해 논의의 대상으로 삼은 응모작은 최지원의 「붉은 수화」외 4편, 한인숙의 「자작나무」외 4편, 이이후의 「저물어 가는 목소리가 들렸어」외 4편이었다.

 작품마다 긍정적 에너지를 많이 품고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엇비슷한 시문법으로 쓰인 탓에 각 응모자들의 시가 개성적이기 보다는 서로 닮아 보인다는 우려도 있었다. 심사위원들의 점수를 모은 결과 한인숙의「자작나무」외 4편은 자기호흡이 살아 있으나 산문적인 진술이 흠으로 여겨진다는 점이 감점 요인이었다. 이이후의「저물어 가는 목소리가 들렸어」외 4편은 이미저리의 혼란을 극복하고 ‘중심생각’에 초점을 맞췄으면 한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대상과의 거리유지가 적당하고 감각적인 이미지가 돋보인다는 점에서 심사위원들은 기꺼이 최지원 시인의 응모작을 당선작으로 택했다. 물론「붉은 수화」(나무의 나이테를 엘피판 이미지로 보는 등)에서 알 수 있듯 최지원 시인의 시세계가 오직 최지원 시인만의 어떤 것이 아니라는 염려도 있다. 그렇긴 하지만, 얼룩으로 소음으로 떠도는 세계의 파편들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몸으로 당겨와 충분히 구체적인 언어로 만들어 내는 감각과 내공이 예사롭지 않다. 이후의 작품들에서는 지적한 약점을 너끈히 뛰어넘으리라 믿으며 진심으로 축하의 박수를 보낸다.

 

심사위원: 안도현(시인) 이정록(시인) 류인서(시인). 대표집필 류인서

 

 

 

 
출처 : 송림산방
글쓴이 : 김욱진 원글보기
메모 :

</!-by_daum->

728x90

 

 

부불리나의 침대 외 4편 / 지관순

 

오르탕스 부인보다는 부불리나, 그렇게 불러주세요  

무슨 나팔 이름 같기도 하지만 이것은  

내 허리에 감겼던 깃발을 기념하는 일이지요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그를 기다리며   

새벽바다로 간 침대를 모른 척하기 좋은 이름이지요  

 

조르바, 아아 나쁜 새끼  

이건 앵무새가 그를 부르는 소리  

그가 꼭 나빠서 그런 건 아니에요  

과부들의 침대가 며칠 결혼할 수 있는 권리가 있듯이 
그도 이별하지 않고 떠날 권리가 있죠  

 

 살아간다는 것이 가벼운 먼지처럼 느껴지면   

 함께 낡아온 침대 귀퉁이를 쓰다듬으며 외쳐요  

 아가멤논호여. 이제 출정이다  

 바다로 간 침대는 목숨을 걸고 싸우지만  

 파선되기 직전에야 돌아올 수 있었지요 그러나 

 

떠난다는 건 안전을 확인하러 가는 건 아니고  

산다는 것 또한 별일 없이 살기 위한 건 아니니까요  

밤이면 달은 선인장 같은 내 등과 한쪽만 따뜻한 침대를  

저울에 올려 놓고 조롱했어요  

외로움을 계량하는 바늘이 몇 바퀴나 돌았는지 몰라요  

창피했지만 이젠 그것도 옛일,  

죽음의 입김이 나를 휘발시키려 하네요  

시간은 더 매달려 있고 싶은 과일을 떨어뜨리고   

합의 따위는 없어서 늘 소송에 휘말리지요  

 

내 소원이 뭐냐구요  

그건 별들이 차가운 발을 위로하러 이불 속에 들어왔다가  

내 침대에 두 명이 산다는 것을 알고 놀라 캄캄해지는 일 

 

조르바, 이 나쁘은.  

쉿, 앵무새여 부디 

  

육지가 보이네요  

이제 조금 있으면 정박하겠군요 다행히 난 파선되지도 않았지요  

그러나 이상해요  

멀미가 막 시작됐거든요

 

 

 

 

이유몰

 

deg.kr

- 애드픽 제휴 광고이며, 소정의 수수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새 울음 감별법

 

호로로공장이 가동되기 위하여  

배추흰나비애벌레는 아침 일찍   

꼬물거리는 허리와 솜털을 납품했다
살구나무 꽃은 눈이 닿을 때마다 
옷을 한 겹씩 벗어 흥을 돋우었고

주파수 맞지 않는 라디오는 

좁쌀을 굴리며 리듬 박스를 틀었다

굴뚝에선 연기가 꿀렁꿀렁 흘러나와

하늘로 전단지를 뿌렸다

 

한때 이 공장 연구실에선

신제품을 개발한답시고

노래와 울음을 분리시킨 적이 있었다

입을 벌리고 있다는 점에서,

전선줄이나 나뭇가지 가설무대에 올라갔다는 점에서 

종일 노래만 부른 날 저녁엔

참기름 띄운 노른자를 호로록 넘겼다

온몸을 들썩거린다는 점에서

다 듣고 난 후 사람들이 박수를 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울음만으로 출장 갔던 날 저녁엔

사라지지 않는 애조를 밤새도록 헹궈냈다

 

노래 사이에 낀 울음은 노래처럼 들리고

울음 사이에 낀 노래는 

울음처럼 들리는 결함이 발견됐지만

입맛대로 조절할 수 있다는 장점만 믿고 

시중에 내놓았다가 전량 리콜하기도 했다

한동안 앙코르의 환청에 시달렸다

 

누구는 구조의 문제라고 하고

누구는 기분의 문제라 했다

후일 연구일지 구석에서 낙서를 발견했다

울음인지 노래인지 감별하려는 바보들아

그건 간단하다

밥 먹기 전엔 울음, 밥 먹고 나면 노래!

 


연잎 치마

 

여름 내내 감침질한 항아리치마
줄기가 꺾어지자

치맛단 한 올 한 올 풀어 헤치며

물로 풍덩 뛰어드는데

 

치마 안에 시쳐둔 노을이 쏟아지는 거라

알을 슬고 간 잠자리 체위가 미끄러지는 거라

침 꼴깍 삼키고 있던

쇠물닭 발자국 흩어지는 거라

멋도 모르고 물속이 두 폭 환해지는 거라

 

물살이 비칠거리며 

낡은 숨소리 부축하러 왔다가

개구리 울음소리로 꿰맨 솔기

쩡 갈라놓고 가는 거라

 

물 밖에서 흔들리던 거미줄 하나 

놀라서 끊어지는 거라

대각선으로 버티며 졸던 바람도 툭 끊어져

만국기처럼 펄럭거리는 거라

멀리서 날아가던 쇠목테갈매기

영문도 모르고 중심을 잃는 거라

 

항아리치마 접시치마 되던 날에

 

  

감정 산책


산딸나무 꽃이 접히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 양산을 펴지 않았고

파란 하늘이 묽어질까봐 

수돗물을 세게 틀지 않았다 

 

보도블록의 금을 밟으면 어젯밤 꿈이 출렁

중앙선을

툭툭 차며 걸었다 

 

까치발을 해도 까치는 나를 모른 척해서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나에게 안녕?

 

내 목덜미가 

햇빛 잘 드는 창이 될 수 있다며

개미들이 줄지어 올라오고 있었다

 

충돌을 피하기 위해

바람은 구름보다 늦게 출발했으나 

내 입 속을 경유해도 되는 지 묻지 않았다

혀가 마를 시간이 필요했다

 

검정색 페인트 냄새가 시간을 불러 모았다

다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이 

어둠의 실금으로 몰려가 쭈뼛 서고

젤리로 만든 그늘은 자꾸 벽에서 흘러내렸다

 

물고기가 뜬 눈으로 뒤척이는 동안

나는 하나의 이름도 무거워

산딸나무 꽃 귀마개를 샀다

 

모든 감정을 침대에 넣고 잠갔다 

거미줄에 걸린 잠을 잤다           
           

 


  
뿌리야,     

이름이 잘못 불릴 때 뿔은 발바닥이 간지럽다    

양분을 먹고 산다는 점에서      

늘 곤두서 있다는 점에서 같은 가문이지만      

뿔은 물구나무 서 본 일이 없다  

  

뿔은 감정의 기상청이어서    

흐려질 때마다      

뿌우뿌우 각적을 불어     

눈물을 피신시키고  

   

무릎이 턱을 당겨와 골몰하는 저녁      

사다리를 내려      

지붕의 느낌을 산책시켜 주곤 한다 

    

구름과 밤늦게 어울려 다니다가     

비의 기분도 한 권 읽어보다가      

간혹 황소자리와 맞짱 뜨는 밤      

기진맥진해지는 잠의 시간을 좋아한다  

 

물론 잘못 불려진 이름을 꿈꾸는 밤도 있다     

한 칸씩 밟고 올라오면 뿌리도 뿔이 될 수 있을까     

한 칸씩 내려가면 나도 뿌리가 될 수 있을까 

      

이런 밤에도 접히지 못하는 뿔은
물구나무 선 꿈의 옆구리를 쿡쿡 찌른다
뿌리 닮은 뿔이 태어날 때까지  

 

 


[최치원신인문학상 수상소감]

 

  오후에 장바구니를 메고 걸으면 나를 돌려세우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막 날아오르는 새들, 안색이 바뀌는 하늘, 굳은 몸으로도 바람에 날갯짓을 쉬지 않는 배추흰나비, 그럴수록 엉키는 나무의 잎차례, 암호를 내지르고 사라지는 오토바이, 마치 그것이 내 몸에서 흘러나온 풍경 같아서 나를 들여다봅니다. 도대체 이 풍경들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거지? 납작하고 검은 입술을 가진 보도블록 위의 현자, 껌 자국이 답합니다. 무엇을 보든 그것은 당신 자신이라고. 그들과 대화하던 것들이 시가 되었습니다. 
  제가 쓴 시의 대부분은 장바구니의 마술이고 식재료들의 둔갑술이었습니다.

 

  시적인 것과 시 사이에서 멀미하던 날들을 저는 몽상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그 몽상을 가득 채우던 와인과 바람과 노을을 사랑합니다. 문득 깨어나면 사막이었고 막 부서지려는 파도 위였고 어지러운 부엌이었습니다. 그 몽상을 끓여 식탁에 올렸습니다.
  사람이 밥으로만 살 것이 아니어서 식탁엔 반찬보다 책들이 더 많았습니다. 하지만 책을 집어먹을 만큼 난시는 아니어서 성장기의 아이들은 꾸준히 성장했고 갱년기를 앞둔 남편과 나는 편안한 속도로 늙어갑니다.

 

  중학교 은사님께 보냈던 편지 한 줄로 나의 시는 시작되었습니다. 시의 문을 열어주시고 정신을 새겨주신 이원구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병일 선생님, 선생님께서 살려주신 형용사절 한 줄을 껴안고 뒹굴던 습작의 밤들은 벌써 추억입니다. 선생님의 지도편달과 격려가 없었다면 저는 이 자리에 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큰 감사를 드립니다.
  제게 문학의 요람이 된 도봉도서관, 그곳에서 1년 동안 함께 공부한 문우들, 내 영감을 건드려주는 블로그 친구들, 그리고 귀한 동생 경효에게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아빠의 눈물을 닦고 자랑이 되겠습니다. 엄마, 나 때문에 한 번 크게 웃으셨죠? 사랑합니다. 글쓰기 방해될까봐 일부러 전화도 삼가시는 어머니, 말없이 응시하시고 응원해주시는 아버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다빈아, 엄마의 행운과 기를 받아 올해 좋은 결과 있기를 바란다. 멋있게 잘 자라는 찬빈아, 그리고 굳은 밥 마른반찬 묵묵히 참아주는 성진씨, 사랑합니다.

 

  졸시에 문인수 선생님, 황인숙 선생님, 홍일표 선생님의 콧김과 손길이 스쳤다는 것만으로도 전율이 입니다. 앞으로 더욱 깊고 낮은 눈동자를 가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제 시가 어딘가에서 화해의 역할을, 어긋남에서 돌이키는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영광이겠습니다.

 

  오늘은 평화로운 폭염주의보가 있던 날이었습니다.

 

지관순
1968년 충남 서산 출생. 제 32회 마로니에 전국여성백일장 우수상 수상.
제 15회 안산 전국여성 백일장 장원.
이메일 ksvioletta@hanmail.net

 


[최치원신인문학상 심사평]

 

  심사위원들이 신인들에게 먼저 요구하는 것은 참신성이다. 기성 시인들이 수많은 시를 통하여 우려낸 것들이 아닌 자신만의 정공법을 가지고 시를 끌고 나가는 것이다. 자칫 기교를 먼저 배운 신인들이 장식적인 화려한 수사에 멈칫거린다면 앞으로의 행보에 빨간불이 켜진 것이다. 조금 거칠지만 안주하지 않은 자세가 필요하다. 그래야만 이 험난한 시단의 가시밭길을 제대로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

 

  예심(163명)을 거쳐 본심에 오른 작품은 모두 일곱 분의 것이었다. 김이솝의 「대봉」 외 9편, 김태인의 「새둥지를 그리세요」 외 4편, 시한의 「점령에 관하여」 외 4편, 조수일의 「늪은,」 외 4편, 지관순의 「부불리나의 침대」 외 4편, 황현민의 「빨간 거미줄」 외 4편, 허민의 「불안의 덧칠」 외 4편이 그것이다. 그중에서 세 명의 심사위원들이 주목하여 논의했던 작품은 「부불리나의 침대」 외 4편, 김이솝의 「대봉」 외 9편이었다.

 

  김이솝의 작품은 전통 서정에서 벗어나 새로운 서정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일상적인 농경의 소재를 가지고도 충분히 자신의 시세계를 열어가고 있으나 작품 수준의 편차에서 점수를 잃었다. 
  심사위원 모두 흔쾌히 지관순 시인의 응모작을 최치원신인문학상 당선자로 택했다. 수확이 끝난 포도나무 잎사귀 아래서 참으로 탐스럽고 싱싱한 포도송이를 발견한 느낌이랄까. 한눈에 번쩍 들어오는 시편들이었다. 등단 전인 게 맞나 싶게 유유히 언어를 갖고 놀며 탄탄한 서사를 구축하는 능숙함! 경험이든 상상력이든 풍부한 듯 느껴지는 이 새로운 시인이 맛보여주는 유머러스하고 풍부한 수사, 그에 속속 배인 관능과 갈증이 다른 시들에서는 어떻게 펼쳐질까 기대된다. 축하드리고 환영합니다! 
 
심사위원: 문인수(시인), 황인숙(시인), 홍일표(시인) (대표집필 황인숙)      

 

출처 : 시 산 맥
글쓴이 : 안은주 원글보기
메모 :

</!-by_daum->

728x90

 

 

아직, 4편 / 이자인

 

 

 

늘 그만큼의 거리에서 당신을 향해 걸을 때

막 짓이겨진 풀냄새가 났습니다

 

들판을 건너온 바람결이 나를 휘감습니다

이파리들이 깃털처럼 아우성치며 돋더니

온몸이 말갈기처럼 일어납니다

푸른 등에서 말발굽소리 요란하게 들려옵니다

 

순간, 구겨진 길 하나가 허공으로 솟구치면서

펄럭이는 손 하나 보입니다

잠겼던 창문들이 열리고 길들이 쏟아집니다

한 여자의 손이 시간의 경계를 활시위처럼 끌어당깁니다

 

늑골에서 난폭하게 질주하는 기차소리가 들려옵니다

, 이 손을 잡아

몸이 사라지도록 달렸지만

레일은 이마에 새겨진 지도처럼 휘발되지 못한 시간을 따라옵니다

 

얼마나 더 어두워져야 그 손을 잡을 수 있을까요

얼굴에서 깨진 거울 조각들이 쏟아집니다

 

수백 년 동안 겹겹의 벽을 달려온 여자가

마지막 벽 앞에서 몸을 던집니다

열리지 않는 창을 향해 자신이 검붉은 문이 되려 한걸까요

현관 밖에서 죽은 새 떼들이 날아갑니다

 

나는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몰

 

deg.kr

- 애드픽 제휴 광고이며, 소정의 수수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어둠에 클릭하다

 

 

벽 속에서 소년이 걸어 나왔다.

 

어둠에도 문이 있어 문 속에도 문이 있어 눈 속에서 문이 복제되고 있었다.

 

열 개의 문이 하나씩 닫힐 때마다 나는 더 이상 울지 않게 되지*

 

소년의 등 뒤에서 검은 튜울립이 일제히 피어났다.

 

몸속에갇힌길이똬리를틀고다른길을집어삼키고있어붉게터지는구름사이로익사한꿈들 이가득차올라

 

도시의 그림자극은 지하창고에서 불현듯 버찌열매를 달고 자라나기 시작했다.

 

성장을 멈춘 몸 안, 내장된 메모리칩에 시멘트 정원이 파이프처럼 펼쳐졌다.

 

저항하지 않으면 어둠도 맨홀처럼 깊어져, 튜울립이 시멘트 속에서 웃었다.

 

상자 속에서 소년의 무릎이 빌딩의 숱한 내부들처럼 자라나고 있었다.

 

자동차시동거는소리가아득한곳에서건너와나비핀을머리에맨어린아이가

하늘색원피스를팔랑거리며눈부신손을잡고빛의속도로사라져

 

어둠의 뒤편은 빛이 아니야 검은 물 위로 휘어지는 팔들이 사월의 달력에 갇혀

펄럭여

 

벽들이 강물처럼 솟구치기 시작했다 갑자기 소년들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영화-보이A(사이코 패스) 대사에서 인용

 

 

 

 

 

 

나비가 날아오는 시간

 

 

 

단백질은 쉽게 분해된다

그러므로 몸이 화석으로 남는 일은 드물다

 

유리컵 속에서

바람이 바람을 수정하는 동안

나비와 시간의 지층 사이로 뚫리는 투명한 통로

 

같은 하늘을

15천만 년 동안 날아오는 중

 

등 뒤 아득한 길 돌아와 내게 겹쳐지는 시간은

얼마나 사소하게 부서지는지

손등을 타고 넘는 물 근육들

혀 내밀었어

물의 머리가 물 꼬리 물고

내 연한 몸 휘감아

나사처럼 결합되는 물, 눈이 부셔

부재(不在)의 넓이 안에서 끌어당겨

주름진 물 얼굴을 지워

 

팔랑, 토기를 머리에 인 여인의 굽은 등이 일어서다

팔랑, 한 번의 날개짓에 수세기가 몰락하는 물의 서사

 

마음 속 빈곳 편집하고 있으면

까마득히 풀린 안개로

천년 앞 미루나무를 지나가

 

발등 출렁이는 거울 속에서

걸어온 보폭만큼 가벼워져

팔랑 팔랑 백악기를 건너가

 

 

 

 

억새

 

 

길이 우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다

 

때를 알고 돌아가는 것에서 이는 소리, 저 바람소리

바람보다 낮게 누워 오래도록 그가 흔들리는 걸 지켜보았다

 

무너지지 못하고 홀로 자전하는 어둠 속

길 위에 서서 중심을 잡는 어깨 위로

페가소스가 한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흘려보내라는 소리

새벽 이슥하도록 너의 중심에서 너의 바깥으로

나의 운행은 늘 슬픈 것이어서

그 길 끝에도 너는 있을 것이지만 그렇게 흘러서 가라

젖은 것들의 숙명은 그런 것이다

 

너를 만나러 가기 위해 왼손에 들고 갔던 출렁이는 강물이

제 울음소리 적시며 일몰 속으로 사라질 때

세계는 늘 마음 안에서 완성되는 것

 

붙잡는 건 허공을 움켜쥐는 일이어서

허공을 만나 본 자는 안다

흔들리며 일어서는 것이 춤이 된다는 걸

 

 

 

 

 

 

천일야화

 

 

나를 죽이고 싶어 하는 당신을 위해

밤마다 죽음의 노래를 불렀네

 

내 노래의 마침표를 찾는 당신의 칼은 길어지고 있네

몇 사람이던가, 스러진 발목들이 난폭한 춤을 출 때

노래하며 외줄을 탔네

치욕스런 외줄을 끊어 버려요, 누군가 소리쳤네

 

머리카락처럼 자라는 어둠의 노래에

무한증식! 당신은 태어나길 반복하네

 

보름달 우엉 우엉 우는 어느 밤

나는 당신을 죽이고 싶어 하네

날마다 한 생()씩을 건너온 전생이

비수로 당신에게 날아가 꽂혔네

당신과 나 한몸으로 칼춤을 추었네

 

이 노래의 끝은 어디인가

이제 그만 당신을 끌어안고

끝없이 재생되는 스크린 밖으로 나오고 싶네

하늘의 입을 틀어막고

자꾸 굴러 내리는 태양을 처형하고 싶네

 

 

 

 

 

당선 소감

 

  당선 소식을 들으며 바라 본 하늘에는 비행운이 길처럼 하얗게 흩어지고 있었다. 새들은 제 흔적을 지우며 지나가는데 무거운 것들은 허공에서도 저렇게 흔적을 남기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전 여행길에서 목적지로 가는 마지막 버스를 놓치고 막막하게 서 있었을 때 문득, 한 방향으로 나 있던 길이 소실점 끝에서 수천의 길들로 열리고 있는 걸 목도하였다. 그 후부터 속수무책으로 나의 외도는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삶의 여정에서 단단한 일상의 프레임에 갇힌 내가 서서히 사물화 되어 갈 때, 또는 걷고 있는 길이 목적성으로 딱딱하게 굳어 갈 때, 잠시 속도를 늦추고 길이 말랑해지도록 길을 풀어놓곤 했다. 길과 나 사이의 틈새를 느슨하게 넓혀 길이 내 안으로 잘 스며들게 하는 일은 한껏 부풀어 오른 길 속에서 사물들의 속내를 잠시 엿볼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이는 시에게로 가까이 다가가는 일과도 무관하지 않을 듯싶다.

 어쩌면 산다는 건 길 위에서 태어나 길 속에 집을 짓고 길을 걷다가 길 중에 소멸해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나의 시는 길과 길 사이에서 터졌다 사라지는 춤사위거나 어느 시인의 말처럼 젖어있는 모든 존재의 울음을 대신 울어주는 일일 것이다. 조금 더 욕심을 낸다면 그들의 숨겨진 비의를 잘 읽어낼 수 있으면 좋겠다.  

세계와 잘 통정하기 위해 성긴 저녁별을 바라보며 길이 나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도록 일인칭을 또 한 번 내려놓는다.

 

 시숙 되지 않은 작품을 세상에 내어놓게 해주신 심사위원님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시산맥 편집진들과 지리산문학회 관계자 분께도 깊은 감사의 말을 드린다. 이곳에 당도하기까지 많은 귀한 인연들이 손을 내밀어주었다. 그분들께도 진심을 담아 감사드린다. 부끄럽지 않은 시인이 되고자 노력하겠다. 그리고 시의 끈을 놓지 않도록 격려해주며 당선소식을 함께 기뻐해 준 문우들께 다시 한 번 고마움을 전한다.

 

 

 

 

최치원 신인문학상 심사평

 

시인은 늘 신인을 품고 꿈꾸며 산다. ‘신인에게 기대하거나 요구하는 바는 사실 제 자신에게 되묻고 탐색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어떤 신인을 고대하는가. 그런 질문은 일차적으로 심사 대상인 투고작들을 향해 있으면서 결국 오늘의 시를 들여다보고 내일의 시를 꿈꾸는 자리에 잇닿아 있다. 그래서 신인문학상은 오로지 당선자의 기쁨으로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시인들이 모두 함께 설레고 축하할 일이다.

 

예심(140)을 거쳐 본심에 오른 작품은 모두 일곱 분의 것이었다. 이자인의 어둠을 클릭하다4, 신태희의 달빛, 수유6, 양기훈의 안대4, 권혜미의 횡경막이 부풀어 오르는 시간11, 한영철의 모기7, 전선용의 트라우마6, 양현주의 7편이 그것이다. 그 중에서 세 명의 심사위원들이 주목하여 논의했던 작품은 어둠을 클릭하다4, 달빛, 수유6, 안대4편이었다.

 

시는 짓는것이면서 흘러나오는것이다. 물론 짓는공력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시적 황홀이나 해방에 이를 수 없다. 대체적으로 시를 만드는데 들인 고심과 노력은 느껴지는데, 물처럼 꿈처럼 흘러나오는시적 출구와 통로는 상대적으로 희귀했다. 안대4편의 시를 보내온 양기훈은 그러한 시적 무의식에 길이 트여 시의 몸을 실을 수 있게 되고, 한 편 한 편의 시를 움켜쥐고 있는 관념적인 도식이 시의 안쪽으로 한층 더 녹아든다면, 그의 인상적인 상상력과 집요함이 좀 더 빛을 발하게 될 것이라 여겨졌다. 달빛, 수유6편의 시를 쓰는 신태희은 비교적 자연스럽게 출렁거리며 시적 탄성(彈性)에 몸을 싣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자연스러움이 다소 익숙했고, ‘소품단상에 머문 듯한 시편들이 많았다. 이것은 단지 시편의 길이가 짧다는 데서 기인한다기보다는 시적 사유와 감각이 운신하는 폭이 좁다는 인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자신이 가진 언어의 탄성에 업혀 더 멀리 밀려가도 좋을 것이다.

 

심사위원들이 어둠을 클릭하다4편을 보내온 이자인을 당선자로 합의하는 데에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그는 시가 짓는것이면서 흘러나오는것이라는 것을 몸으로 터득하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다만 때때로 설명의 욕구가 시의 호흡을 돌보지 못하는 경우가 노출되었지만, 그의 시는 상상력의 흐름이 자연스러우면서도 의외의 방향으로 번지는 시적 점선들을 가지고 있다. 5편의 투고작 중에서 당선작으로 선정된 아직,은 당신과 나 사이의 거리(距離), 존재자들의 관계에 어쩔 수 없이 내재하는 그 보이지 않는 거리를 공감각화하여 존재로 드러내준 작품이다. 그 감각의 구체성과 치열함에 신인문학상을 돌리기로 하였다. 우리는 모두 당선자와 함께 설레고 기뻐하고 축하하고 싶다.

 

심사위원= 김명인(시인), 황학주(시인), 김행숙(시인) (대표집필 김행숙)

 

 

 

 

 

728x90

 

 

꽃의 체온 외 4편 / 전비담

 

겨우내 엠뷸런스가 울어서 그 병원에는 

곧 떨어질 이름들만 피었다

영안실로 가는 침대의 난간을 움켜쥐고 

절뚝이며 따라가는 얼굴처럼 

하얗게 질려서 

  

기어코 봄날 초입에

한주먹 틀어막은 울음이

툭. 떨어진다

이제는 저 혼자 복도를 걸어나갈 수 없는 것들이

군데군데 멍이 들거나 구멍이 뚫린 채로 

하나씩 호명될 때마다

한 줌의 시든 수의로 기록되는,

 

목련! 하고 부르면

뚝. 

뚝. 

한웅큼의 하얀 종말이 뛰어내릴 때

찬란하게 하얀 것들에서는

포르말린의 체온이 풍긴다

 

꽃, 

하고 입술 오므리면

죽음, 

하고 휘어진 복도를 

힘없이 돌아나오는 메아리

  

건물 뒤편에서

시신을 말리는 냉각팬이 

쉴 새 없이 돌아간다

누가 저걸 

죽은 꽃들의 누적된

향이 앓는 소리라 했나

  

목련 피는 소리 갸르릉거리는 밤에는 

죽은 내 친구가 입 안 가득  

덜 삭은 생을 물고 양치하는 소리 들리지 

 

하얀 꽃색 버려두고 

꽃향이 자꾸 내 뒤를 밟는 건

일찍 떠나 비릿해진

꽃의 체온 때문.

 

 

 

 

쿠팡

 

deg.kr

- 애드픽 제휴 광고이며, 소정의 수수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죽은 파도에 관한 에필로그

 

 파도가 죽었다 상의 한 마디 없이

 

성급하게 죽은 파도는 흰 거품을 피우고 

암청색 물고랑에 휘청거리다 바다가득 눕는다

바다는 파도가 누운 무덤이다  

 

바다는 저만치 물러나 있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짐짓 딴전을 피운다  

희미해져가기로 마음먹은 것은  

심장을 아무리 펼쳐도 품을 수 없다  

 

파도가 멈춰서 모든 미래가 유출되었으니

너무 중요한 허무는 모른 척하기로 한다 

다만 다 닳지 못하고 죽은 것은 돌아와  

그 무덤에 꽃을 피워야 한다  

 

바다는 낙하하는 해로부터 붉은 꽃씨를 받아

조로한 파도의 무덤에 눈물을 뿌린다   

꽃잎이 한 잎 한 잎 피어나는 건 혼자 죽은 파도의 의무거나

도착하기도 전에 해답이 된 미래의 기억놀이 

푸른 녹이 슨 물결로  

없는 파도의 붉은 말소리를 더듬는 무덤 위   

잘 익은 산호꽃인 줄 알았는데  

하얀 거품꽃이 피어 있다  

 

바다는 최초부터 파도의 에필로그라는 것,

을 다 지나고서야 알게 되었다.  

 

     

 

  

  로드킬

 

그날 밤 한 대의 자동차가 

하나의 비명과 충돌했다.

비명이 해처럼 부서졌다.

궤도를 일탈하지 않아도 궤도가 달아난 건

아무 짓도 안한 빨간 해에 눈이 멀어

길이 저혼자 길을 잃었기 때문이다.

 

지상의 먼지들이 놀라서

양철처럼 가벼워져 튀어올랐지만

먼지는 다만 먼지일 뿐

금방 가라앉는 유전자를 가진. 

 

금방 사라질 것들은

좀 더 있다 사라질 것들에

재빠르게 밀려난다.

 

도처엔 맨홀, 부서진 피를 

맨홀들이 끌어당긴다. 

맨홀은 길 위가 부서뜨린 

피의 후속조치.

그러므로 길 위의 일에 대해

길은 아무 짓 하지 않는다.

 

그날 밤 길 옆 아까시숲에서

목소리마다 가시울음

울던 새 한 마리

결국 자기 부리로 목을 찢고

숲의 경계를 넘었다. 

자기 목에 부리를 박은 새는

짹 소리도 내지 못한다.

그날 허공에 

한 뼘 새의 자리 지워졌을 뿐

길은 길끼리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길 위의 것들은 

붉은 해가 부서져도

그저 사소하게 

농담 주고받듯

지나쳐가야 한다.

  

 

 

 

 

종소리

 

동그란 투명이 그늘을 깨우러 간다

 

잠자는 그늘을 깨우다가

그늘을 꽉 쥐고 있는 못에 긁혀

투명이 빨강처럼 쭈뼛 아프지

그것은 못과 한통속 된 삐죽한 그늘의 소행*

투명이 가끔 빗금 긋는 

심장소리 내는 건 그 때문이야

 

한 가슴의 부서짐을 막을 수 있다면

속고 속고 또 속아도 

말없이 부서지는 

투명의 주소지는 유리의 영토 

그 나라의 언어는

뾰족한 혀도 기꺼이 안아 품는 

죽은 조개의 침묵

새의 부리가 유리의 나라를 

터트릴 수 없는 까닭이야

 

후미진 골목 구멍뚫린 바람벽도

동그랗게 채우는 투명은

바람벽의 땜장이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

아무도 보여주지 않는 그곳

가장 높은 종탑 중심에서 돌아가는

커다란 유리알 거울

볼 줄 아는 눈만 보는

투명의 유일한 관객

 

단 하나를 위해

달려가 스스로 텀벙텀벙

허공으로 뛰어드는

동그란 제병祭餠들

 

* 스톡홀름 증후군: 인질이 인질범에게 정신적으로 동화되는 심리적 현상

 

 

 

 

 

 

플래시

 

꽃이 떨다가 뛰어내리자

캄캄하던 꽃의 살 속에

플래시가 터졌다

뛰어내려서야

환해지는 꽃의 살 속

 

사뿐히, 날아

그러쥐던 허공을 놓아버리자

꽃 속에서 숨죽이던 도마뱀이

붉게 흥건해졌다

 

그제야 만져보았다 

이빨이 물컹해져버린

물,

비린 쇠냄새가 손가락 끝에 엉겨붙는

빨간 울음소리는

혀를 빼문 채 고개를 누인 개처럼

경계선을 잃었으므로

 

울음소리는

이제 곧 팔레트에 옮겨질 것이고

진공의 큐브 속에서 굴절되겠지

 

램프가 되었다가

담요가 되었다가

빨간 모자가 되다가

 

쫓아갈 우주의 시간표보다

훨씬 먼저 변형되어

이상한 냄새를 활짝,

피울 것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