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그컵 외 4편 / 최은여
앵두를 줍는다
나와 앵두는 소나기를 맞았다
앵두는 떨어지고 나는 떨어지지 않았다
앵두는 깨끗해졌다
우리의 이마는 닮았다
빗줄기 하나가 앵두를 겨냥해 때릴 때
저항 없이 공중에서 조금 머물다 내려앉는다
푸른 잎을 끌어안고 내려앉는다
낙하의 끝은 안전하다
공처럼 튀어 오르지 않고 공처럼 구른다
시멘트 바닥은 나쁘지 않다
외상을 입지 않았다
앵두를 따라가던 내 무릎이 깨졌다
빨간 빗물이 짓물러 고였고
앵두처럼 통통해졌다
가득 찬 것은 주물러 터트리고 싶어진다
차오른 빗물을 세차게 밟는다
고였던 앵두가 사방으로
튀어 오르고
바닥이 앵두를 줍는다고 정신없이 내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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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도서관 열람실에서의 중얼거림
나이 많은 사람들은 지겨워, 중학생들이 표정을 만든다
네까짓 것들이 뭘 알고 떠드니?
오늘 도서관은 이런 분위기이다
책은 번호 순서대로 잘 꽂혀있다
ㅅ 다음 ㅇ
아버지 다음 할아버지
검색대의 첫 번째 책이 입을 연다
검색대의 마지막 책이 눈을 끔벅인다
나는 너보다 먼저 태어났고 너는 나보다 뒷번호를 가졌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이 방에는 거짓말이 많고 왜곡이 많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이 방에는 장난이 많고 낙서가 많다
사서는 턱이 빠지도록 하품을 하고 있다
기침 소리와 끼이익 의자 소리
열람실의 환풍기
친구들은 벌써 도망갔다 도서관으로부터
귀를 틀어막으며
비명을 지르며
이제 아무도 보지 않는 종이책에서 묵은 살냄새가 난다
나는 내가 틀렸다고 말한 것이 다 맞았으면 좋겠다
미러링
누가 방문 입구에 커다란 거울을 걸어놓고 갔다
나는 이제 거울 안에서 웃는 사람
나는 거울이 만든, 털이 북실한 꼬리를 가진 사람 종류
나는 하루 내내 표정을 짓는 거울
나는 의도치 않는 흐름
자꾸 내려가는 입꼬리를 바지춤 올리듯 추켜 세우고 세운다
조커의 입꼬리는 의도를 다 읽혀 버렸고
웃음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를 놓치고 말았다
자살이 너무 슬퍼서
나는 조커의 웃음을 샀다 혀를 날름날름 입술에 침을 잔뜩 묻히고
너는 잘 웃는다 거울이 혐의를 씌운다
증거는 잡혔다 거울 속
내 이마에 먼지가 묻었다
내 가슴팍에 손자국이 찍혔다
무거운 거울을 등에 업고 허리가 휘도록 온 시내를 쏘다닌다
표정 하나쯤 달고 다녀야 사람들이 겨우 봐 준다
등에서 미끄러지면 산산조각 날 얼굴
같이 주워 줄 사람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
굴러가는 파편을 끝까지 따라 가지 못하고
잘 가 가볍게 작별 인사를 해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니 조심해
너는 잘 웃는 사람, 거울 속에 갇혀 산다
예민한 장난
움직이지 않는다
내가 건드리기 전까지
작고 얄미운 새 떼가
덤불 속에 들어앉아 있어
나는 돌멩이를 주워 던지는 시늉만 한 사람
작고 얄미운 새 떼가
한 번 옮기고 믿지 못해 또 한 번 옮기고
새와 내가 장난을 해
덤불을 향해 나무 작대기를 던지는 시늉만으로
새들이 달아나 준다
달아나면서 끝없이 재잘댄다
나는 알아들을 수 없는 그들의 기호를 사용한다
새가 새로 움직인다
나보다 빠르다는 것을 나보다 가볍다는 것을
나는 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나는 계속 나인 채 보고 있다
같은 자리 같은 무게 같은
새는 계속 새로 있다
내 이름은 Run
단면은 쉽고 양면은
어려워
자를 수 있는 것만 양면을 가졌어요 단면은
양면의 절반이 아니에요
나의 단면은 겉과 속이 같아요
단면은 실체,
단면은 전부,
나의 얼굴은 단면이에요
배달에 지친 나는 계단 모서리에 앉아
건물과 건물 사이 어스름 해의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어요
햄버거집 탁자 위 단면은 단면 쪽으로 단면 쪽으로 기울어
한 입 베어 먹을 때마다 이게 저녁밥이야 하는
입 모양으로 오물거려요
다시 밤이 와도 나는 언제나 한쪽만을 선택할 수밖에 없어요
전속력으로
단면으로 이어진 길을 달려보아요
나는 단면 끝까지 가 보기로 했어요
조각조각 이어붙인 오토바이를 타고 조각조각
단면으로 울어요
단면으로 걱정하고 단면으로 포장을 하고
단면으로 노래하고 단면으로 프린트해요 단면과 단면이 만나
이제 양면이 되기 싫은 나는 처음부터 단면이었어요
[수상소감]
시를 쓰는 몇 해 동안 제가 사는 작은 도시 서북쪽 우리 동네 하천가에는 벚꽃과 접시꽃이 여러 번 피고 지고 수양버들이 새로 심어졌습니다. 길고양이가 새끼를 낳았을 때 저는 예민해졌습니다. 하천 둑길에 서 있는 느티나무 아래에서 시를 묻고 새가 불러주는 답을 받아 적었습니다. 자괴감에 빠져 있기도 하고 가끔 시적 흥분 상태에 놓여 있기도 했습니다.
당선 전화를 받은 후, 필사하고 습작하던 A4 종이 뭉치를 정리했습니다.
나룻배도 없고 뱃사공도 없는 저에게 크고 깊은 등단의 강을 건너는 것은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수영을 못합니다. 물은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자연입니다. 그런 저는 하얀 종이배를 꼬깃꼬깃 접고 띄워서 조금씩 멀리 나아가는 연습을 했습니다. 깊은 곳은 쳐다보지도 못했습니다. 종이배가 찢어지면 다음 날 더 두꺼운 종이배를 접어서 올라탔습니다. 가끔 바람이 밀어주면 마음이 출렁거렸습니다. 늘 혼자였고 또 혼자였습니다.
어느 날 존경하는 시인과 대화하던 중 ‘작가’라는 단어를 들었습니다. 솔직함을 시의 미덕으로 알고 있던 저에게 ‘작가’라는 단어 풀이는 노가 없는 뱃사공의 거친 손에 노를 잡혀주는 느낌이었습니다. 한 번도 이르지 못한 강 건너 아름다운 숲에 가보고 싶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남원시 운봉읍 행정마을 서어나무숲에 다녀왔습니다. 서늘하고 고요한 시를 쓰겠습니다. 성실하고 미련한 글 노동자로 살겠습니다. 외롭고 고달픈 누군가가 서어나무 같은 시를 만나 편안히 쉬었다 갔으면 좋겠습니다.
저를 허물어 시인으로 빚어주신 ‘수요반’ 선생님들께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부족한 시를 선택해 주신 심사위원 안도현 선생님, 김륭 선생님, 유홍준 선생님께 더 좋은 시를 쓰기 위해 더 좋은 사람이 되겠다고 말씀드립니다. 시를 더 공부해도 된다는 허락으로 여기겠습니다.
[심사평] 그의 육체가 그의 언어와 싸운 고투의 흔적
본심 작품
이은정 「생리전증후군」 외
최은여 「머그컵」 외
라환희 「화양연화」 외
이은우 「라라의 창」 외
김나형 「비둘기, 투신」 외
김수형 「야호에 찍는 마침표」 외
삼백사십여 명이 응모, 해를 거듭할수록 그 열기가 뜨거워지는 최치원 신인문학상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예심을 거쳐 본심으로 넘어온 여섯 분의 응모작들은 그 가능성 못지않게 편차 또한 뚜렷했다. 모든 시는 모두 다르게 태어나고 언제 어디서든 각각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는 지극히 보편적인 사실을 새삼 확인하며, 심사위원들은 머리를 맞대고 숙고를 거듭했다. 그리고 시는 필연적인 산물이 아니라 우연(생의 새로운 범주 혹은 미지의 세계)으로 만들어지거나 수혈되는 영혼의 양식에 가깝다는 상식적인 명제를 바탕으로 두 분의 작품을 주목해서 읽었다. 최은여(「머그컵」외), 이은우(「라라의 창」외) 씨의 작품은 각기 다른 개성을 음미할 수 있는 세계를 펼쳐 보여 흥미로웠고, 그만큼 심사위원들의 마음은 설렜다.
이은우 씨의「라라의 창」외 4편의 시편들은 자기만의 스타일로 밀고나가는 패기와 언술의 새로움이 돋보였다. 그만큼 끝까지 심사위원들을 고심하게 만들었지만 서사를 통해 드러나는 이미지가 다소 불투명하다는 흠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곧 시적 긴장감을 떨어뜨리는 일부 상투적인 진술들과 맞물려 사고의 깊이와 메시지가 다소 약하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특히 「라라의 창」의 경우 문장을 부리는 능력만큼이나 탁월한 이미지를 전경화하는 능력이 돋보였지만 마지막 연(“겨울이 노랗게/창을 두드릴 거야”)의 임팩트가 못내 아쉬웠다. 결국 이번 심사는 우리 시의 새로운 가능성을 전제로 오랜 토론을 거쳐 최은여(「머그컵」외) 씨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둘 다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자신들만의 시적 스타일을 견지하고 있었지만 보다 새롭고 다른 시라는 점에서 이견이 없었다.
최은여(「머그컵」외) 씨의 작품들은 아주 오래된 서정을 새로운 시의 표면 위로 어떻게 끌어올리는지 보여준다. 그의 작품들은 우선 그만의 세계를 정직하고 정확한 언어와 이미지로 보여준다.「머그컵」이란 시적 대상과 내면의 관계가 상투적이지 않게 혼융되면서 육체와 정신에 제각기 기댄 한 인간으로서의 욕망과 그 욕망에 대한 저항을 독창적으로 펼쳐 보인다. 간결한 메시지이지만 그 서사가 단순히 읽히기보다 보이게 하고 나아가 독자들이 동참하게 하는 극화의 형식이어서 묘한 매력에 빠져들게 한다. “앵두를 줍는다//나와 앵두는 소나기를 맞았다/앵두는 떨어지고 나는 떨어지지 않았다”로 시작, “가득 찬 것은 주물러 터트리고 싶어진다/차오른 빗물을 세차게 밟는다/고였던 앵두가 사방으로/튀어 오르고/바닥이 앵두를 줍는다고 정신없이 내달린다”는 결말에 도착할 수 있는 능력은 오랜 습작시간과 그의 육체가 그의 언어와 싸운 고투의 흔적이다.
「미러링」, 「예민한 장난」, 「내 이름은 Run」등의 작품 또한 자연스러운 언술과 맞물린 서사의 개성적인 조형능력이 돋보인다. 사소한 일상을 담은「서부도서관 열람실에서의 중얼거림」같은 작품에서도 “이제 아무도 보지 않는 종이책에서 묵은 살냄새가 난다/나는 내가 틀렸다고 말한 것이 다 맞았으면 좋겠다”는 진술로 확인되듯 그의 시적인식은 얼핏 평범한 언술이지만 주술적이다. 극도로 개인적이면서도 우울(?)할 정도로 합창적인 현실과의 조우를 시적에너지로 견인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반증이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더불어 이은우 씨에겐 어쭙잖은 격려 대신 조만간 시의 길을 함께 걷게 될 것이란 심사위원들의 예감을 전한다.
- 심사위원 안도현 김륭(글) 유홍준 / 예심위원 김경린 성금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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