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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빛나는 밤에 외 4편 / 김새하

 

 

 

 

상트페테르부르크 오래된 서점 풍경만큼 비를 맞고 싱싱한 커피 냄새가 난다 피의 사원으로 가는 길엔 행위예술 중인 까마귀 동전을 물고 눈썹이 긴 여자 바람에 날리는 빠삐용 치마와 네바강을 거닐 때 심장을 짜낸 비트가 출렁거리며 외치는 이름 달을 찾느라 검은 물속의 푸른 눈을 뜨는 백야 차이콥스키 음악은 배 위 바람을 맞고 옛날에 받았던 편지는 아침을 만난 가로등이 된다

 

푸른 밤을 보는 깃발과 검은 밤을 보는 등대는 다리를 보며 잠긴 생각과 하얀 하늘을 걷는다

 

행복을 만드는 사람은 안경을 고쳐 쓰고 내시경을 들여다보는 찢어질 듯 팽팽한 창자다

망치를 때리는 두개골 소리는 흰색과 검은색이 반복되는 얼룩무늬

혼자라고 해놓고 항상 혼자가 아닌 것과 혼자가 아니지만 항상 혼자인 것의 별이 빛나는 밤에*

버킷리스트를 꿈꾸고 침을 삼키다 사레에 걸리는 일은 심심찮게 목젖을 때린다

 

이제 어디가

어디 가긴 출근해야지

팔리지 않는 집과 백야를 보내던 구멍 난 주머니

TV를 켜 논 채 들었던 잠을 깨는 방에 오로라 같은 커튼

정년퇴직을 꿈꾸는 남자가

밤새 돌아간 선풍기에 휴식을 주고

축축한 출근 도장을 찍는다

엘리베이터를 호출합니다 하향 엘리베이터가 도착합니다

여행을 끝내는 것은 잘리지 않는 거리에 셔터를 내리는 것

우린 아직 사랑이구나

 

*고흐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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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반복

 

 

외로움 깊이 재려는 시도

 

바닷가 모래 위 텐트, 잠든 아이들을 위해 통삼겹바베큐를 준비하는 사내 능숙한 칼솜씨와 적절한 소스의 양, 세심한 불 조절, 직업을 짐작하게 한다

호텔 테라스의 햇빛이 어울리는 외모지만 자연 속 사색을 좋아한다며 공기 한 토막 잘라 깔고 누웠다 시선은 선글라스 너머 바다로 향한다 어젯밤 마지막으로 내준 코발트 빛 푸딩이 일렁거린다 해변의 여인 힙업 아래 탱탱한 허벅지 죄책감 없는 사진을 시식, 입맛 다시는 식도를 뜨겁게 내려간다, 물속에서 노는 딸 해변으로 나오면 몇 조각 저며져 무료한 듯 무료하지 않은 시간을 채우는 쉬운 재료로 내정됐다

저녁 메뉴는 감자와 판타체를 곁들인 신선한 양다리, 초고속 요리를 꿈꾼다 접시에 담긴 날 것들 부끄러워 석양을 잡는다 뜨거운 양다리 육즙, 턱을 타고 내린다

 

슬픔이 눈물의 눈물을 닦는 시간을 배우고

다음 슬픔을 기쁘게 기다리는 동안 외로움의 방향을 찾던 나침반, 수행하지 못한 임무와 모래 무덤을 판다 눈 어두운 청개구리의 절망 비가 내린다 흠뻑 내려버려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장래희망

 

 

 

 

욕조의 물은 얕은수로 끌어당긴다

제 몸 식는 줄 모르고

이 몸을 끌어당겨 무얼 하려는지

 

뜨거운 물로 녹여 만든 붉은 푸딩을

백열등 아래 흔들어주길 몰래 바란다

 

조심해야 할 시간이다

 

항상 먼저 다가오는 이별

이미지 없는 그림을 그린다

 

뚝뚝 떨어져 놓인 퍼즐 조각

여백이 채워지면

우리는 무엇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뼛가루에 피를 섞고 채를 친 살을 얹어

천천히를 오랫동안 먹여 키운다면

무엇인가는 우리가 될 수 있다

 

비가 내리고 비를 보며 샤워를 하고

책을 펴고 비를 보고

사랑을 나누고 잠을 잔다

 

꿈속에서 쓴 시를 기억하려

눈꺼풀 안쪽에 새겼더니

눈을 뜨면 올라가 버린다

시인이 웃는다

 

 

 

 

 

 

갈비뼈 소사

 

 

 

 

갈비뼈 한대를 뽑아 빈자리를 내려다보니

다른 갈비뼈가 자라고 있다

손에 든 갈비뼈에서 푸른 소금물이 떨어지고

자라나는 갈비뼈에는 갈매기가 날갯짓을 하고 있다

갈매기를 잡아 날개를 꺾으면 자라나는 갈비뼈는 아프지 않겠지

오락가락하는 숨길은 싸한 맛에 혀를 날름

갈비뼈를 핥아먹으려 들어 손에 든 뼈다귀로 숨길을 막아버린다

숨 쉬지 못하게 틀어막고 갈비뼈가 시리지 않도록 두 손으로 가슴을 감싸 쥔다

바람이 들락거리지 못하게

천둥이 쾅쾅 두드려보지 못하게

이미 밖으로 나온 갈비뼈는 계속 푸른 바닷물을 흘려도

새 갈비뼈는 그 자리를 지키게

가슴에서 또 삐져나오지 않게

그래서 찬바람을 만나지 않고 부서져 내리지 않게

손에 든 갈비뼈로 쾅쾅쾅 못을 쳐 가슴을 닫는다

바다가 흘러내린다

 

 

 

 

 

 

 

 밧줄

 

 

썩은 밧줄이 있다

더는 배를 부두에 매어둘 수 없는

낡다 못해 썩은 밧줄이다

갈매기 한 마리씩 더 앉는 것에도

숨차게 출렁거린다

보는 사람마다 잘라내라 아우성이다

썩어도 준치라고 큰 배를 잡고 생을 채워온 나를

한 번에 잘라내지는 못하나보다

어제 입은 상처 위에

오늘도 내리치는 칼이 날카롭다

밤이슬 검은 공기에 몸을 늘어뜨린다

이대로 풀어져 바다로 내려가길 기도한다

부둣가에 떠 있는 쓰레기들이 물냉면의 고명처럼 떠 있다

축 늘어진 모습 웃음이 되었다

얼마나 다행인가

 

아침노을이 가고 난 뒤 피부는 뙤악하게 쪼여온다

밤새 아문 상처가 두렵다

내일도 계속될 일을 또 다른 오늘에 맞이한다

썩은 밧줄이 있다

오늘도 잘리기 위해 기다리는 밧줄이다

 

칼을 내려놓고

풀어줄 사람 없는 밧줄

처음 모습이 생각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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