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외 4편 / 이자인
늘 그만큼의 거리에서 당신을 향해 걸을 때
막 짓이겨진 풀냄새가 났습니다
들판을 건너온 바람결이 나를 휘감습니다
이파리들이 깃털처럼 아우성치며 돋더니
온몸이 말갈기처럼 일어납니다
푸른 등에서 말발굽소리 요란하게 들려옵니다
순간, 구겨진 길 하나가 허공으로 솟구치면서
펄럭이는 손 하나 보입니다
잠겼던 창문들이 열리고 길들이 쏟아집니다
한 여자의 손이 시간의 경계를 활시위처럼 끌어당깁니다
늑골에서 난폭하게 질주하는 기차소리가 들려옵니다
자, 이 손을 잡아
몸이 사라지도록 달렸지만
레일은 이마에 새겨진 지도처럼 휘발되지 못한 시간을 따라옵니다
얼마나 더 어두워져야 그 손을 잡을 수 있을까요
얼굴에서 깨진 거울 조각들이 쏟아집니다
수백 년 동안 겹겹의 벽을 달려온 여자가
마지막 벽 앞에서 몸을 던집니다
열리지 않는 창을 향해 자신이 검붉은 문이 되려 한걸까요
현관 밖에서 죽은 새 떼들이 날아갑니다
나는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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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에 클릭하다
벽 속에서 소년이 걸어 나왔다.
어둠에도 문이 있어 문 속에도 문이 있어 눈 속에서 문이 복제되고 있었다.
열 개의 문이 하나씩 닫힐 때마다 나는 더 이상 울지 않게 되지*
소년의 등 뒤에서 검은 튜울립이 일제히 피어났다.
몸속에갇힌길이똬리를틀고다른길을집어삼키고있어붉게터지는구름사이로익사한꿈들 이가득차올라
도시의 그림자극은 지하창고에서 불현듯 버찌열매를 달고 자라나기 시작했다.
성장을 멈춘 몸 안, 내장된 메모리칩에 시멘트 정원이 파이프처럼 펼쳐졌다.
저항하지 않으면 어둠도 맨홀처럼 깊어져, 튜울립이 시멘트 속에서 웃었다.
상자 속에서 소년의 무릎이 빌딩의 숱한 내부들처럼 자라나고 있었다.
자동차시동거는소리가아득한곳에서건너와나비핀을머리에맨어린아이가
하늘색원피스를팔랑거리며눈부신손을잡고빛의속도로사라져
어둠의 뒤편은 빛이 아니야 검은 물 위로 휘어지는 팔들이 사월의 달력에 갇혀
펄럭여
벽들이 강물처럼 솟구치기 시작했다 갑자기 소년들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영화-보이A(사이코 패스) 대사에서 인용
나비가 날아오는 시간
단백질은 쉽게 분해된다
그러므로 몸이 화석으로 남는 일은 드물다
유리컵 속에서
바람이 바람을 수정하는 동안
나비와 시간의 지층 사이로 뚫리는 투명한 통로
같은 하늘을
1억5천만 년 동안 날아오는 중
등 뒤 아득한 길 돌아와 내게 겹쳐지는 시간은
얼마나 사소하게 부서지는지
손등을 타고 넘는 물 근육들
혀 내밀었어
물의 머리가 물 꼬리 물고
내 연한 몸 휘감아
나사처럼 결합되는 물, 눈이 부셔
부재(不在)의 넓이 안에서 끌어당겨
주름진 물 얼굴을 지워
팔랑, 토기를 머리에 인 여인의 굽은 등이 일어서다
팔랑, 한 번의 날개짓에 수세기가 몰락하는 물의 서사
마음 속 빈곳 편집하고 있으면
까마득히 풀린 안개로
천년 앞 미루나무를 지나가
발등 출렁이는 거울 속에서
걸어온 보폭만큼 가벼워져
팔랑 팔랑 백악기를 건너가
억새
길이 우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다
때를 알고 돌아가는 것에서 이는 소리, 저 바람소리
바람보다 낮게 누워 오래도록 그가 흔들리는 걸 지켜보았다
무너지지 못하고 홀로 자전하는 어둠 속
길 위에 서서 중심을 잡는 어깨 위로
페가소스가 한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흘려보내라는 소리
새벽 이슥하도록 너의 중심에서 너의 바깥으로
나의 운행은 늘 슬픈 것이어서
그 길 끝에도 너는 있을 것이지만 그렇게 흘러서 가라
젖은 것들의 숙명은 그런 것이다
너를 만나러 가기 위해 왼손에 들고 갔던 출렁이는 강물이
제 울음소리 적시며 일몰 속으로 사라질 때
세계는 늘 마음 안에서 완성되는 것
붙잡는 건 허공을 움켜쥐는 일이어서
허공을 만나 본 자는 안다
흔들리며 일어서는 것이 춤이 된다는 걸
천일야화
나를 죽이고 싶어 하는 당신을 위해
밤마다 죽음의 노래를 불렀네
내 노래의 마침표를 찾는 당신의 칼은 길어지고 있네
몇 사람이던가, 스러진 발목들이 난폭한 춤을 출 때
노래하며 외줄을 탔네
치욕스런 외줄을 끊어 버려요, 누군가 소리쳤네
머리카락처럼 자라는 어둠의 노래에
무한증식! 당신은 태어나길 반복하네
보름달 우엉 우엉 우는 어느 밤
나는 당신을 죽이고 싶어 하네
날마다 한 생(生)씩을 건너온 전생이
비수로 당신에게 날아가 꽂혔네
당신과 나 한몸으로 칼춤을 추었네
이 노래의 끝은 어디인가
이제 그만 당신을 끌어안고
끝없이 재생되는 스크린 밖으로 나오고 싶네
하늘의 입을 틀어막고
자꾸 굴러 내리는 태양을 처형하고 싶네
당선 소감
당선 소식을 들으며 바라 본 하늘에는 비행운이 길처럼 하얗게 흩어지고 있었다. 새들은 제 흔적을 지우며 지나가는데 무거운 것들은 허공에서도 저렇게 흔적을 남기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전 여행길에서 목적지로 가는 마지막 버스를 놓치고 막막하게 서 있었을 때 문득, 한 방향으로 나 있던 길이 소실점 끝에서 수천의 길들로 열리고 있는 걸 목도하였다. 그 후부터 속수무책으로 나의 외도는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삶의 여정에서 단단한 일상의 프레임에 갇힌 내가 서서히 사물화 되어 갈 때, 또는 걷고 있는 길이 목적성으로 딱딱하게 굳어 갈 때, 잠시 속도를 늦추고 길이 말랑해지도록 길을 풀어놓곤 했다. 길과 나 사이의 틈새를 느슨하게 넓혀 길이 내 안으로 잘 스며들게 하는 일은 한껏 부풀어 오른 길 속에서 사물들의 속내를 잠시 엿볼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이는 시에게로 가까이 다가가는 일과도 무관하지 않을 듯싶다.
어쩌면 산다는 건 길 위에서 태어나 길 속에 집을 짓고 길을 걷다가 길 중에 소멸해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나의 시는 길과 길 사이에서 터졌다 사라지는 춤사위거나 어느 시인의 말처럼 젖어있는 모든 존재의 울음을 대신 울어주는 일일 것이다. 조금 더 욕심을 낸다면 그들의 숨겨진 비의를 잘 읽어낼 수 있으면 좋겠다.
세계와 잘 통정하기 위해 성긴 저녁별을 바라보며 길이 나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도록 일인칭을 또 한 번 내려놓는다.
시숙 되지 않은 작품을 세상에 내어놓게 해주신 심사위원님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시산맥 편집진들과 지리산문학회 관계자 분께도 깊은 감사의 말을 드린다. 이곳에 당도하기까지 많은 귀한 인연들이 손을 내밀어주었다. 그분들께도 진심을 담아 감사드린다. 부끄럽지 않은 시인이 되고자 노력하겠다. 그리고 시의 끈을 놓지 않도록 격려해주며 당선소식을 함께 기뻐해 준 문우들께 다시 한 번 고마움을 전한다.
최치원 신인문학상 심사평
‘시인’은 늘 ‘신인’을 품고 꿈꾸며 산다. ‘신인’에게 기대하거나 요구하는 바는 사실 제 자신에게 되묻고 탐색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어떤 ‘신인’을 고대하는가. 그런 질문은 일차적으로 심사 대상인 투고작들을 향해 있으면서 결국 오늘의 시를 들여다보고 내일의 시를 꿈꾸는 자리에 잇닿아 있다. 그래서 신인문학상은 오로지 당선자의 기쁨으로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시인들이 모두 함께 설레고 축하할 일이다.
예심(140명)을 거쳐 본심에 오른 작품은 모두 일곱 분의 것이었다. 이자인의 「어둠을 클릭하다」 외 4편, 신태희의 「달빛, 수유」 외 6편, 양기훈의 「안대」 외 4편, 권혜미의 「횡경막이 부풀어 오르는 시간」 외 11편, 한영철의 「모기」 외 7편, 전선용의 「트라우마」 외 6편, 양현주의 「곁」 외 7편이 그것이다. 그 중에서 세 명의 심사위원들이 주목하여 논의했던 작품은 「어둠을 클릭하다」 외 4편, 「달빛, 수유」 외 6편, 「안대」 외 4편이었다.
시는 ‘짓는’ 것이면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물론 ‘짓는’ 공력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시적 황홀이나 해방에 이를 수 없다. 대체적으로 시를 ‘만드는’ 데 들인 고심과 노력은 느껴지는데, 물처럼 꿈처럼 ‘흘러나오는’ 시적 출구와 통로는 상대적으로 희귀했다. 「안대」 외 4편의 시를 보내온 양기훈은 그러한 시적 무의식에 길이 트여 시의 몸을 실을 수 있게 되고, 한 편 한 편의 시를 움켜쥐고 있는 관념적인 도식이 시의 안쪽으로 한층 더 녹아든다면, 그의 인상적인 상상력과 집요함이 좀 더 빛을 발하게 될 것이라 여겨졌다. 「달빛, 수유」 외 6편의 시를 쓰는 신태희은 비교적 자연스럽게 출렁거리며 시적 탄성(彈性)에 몸을 싣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자연스러움’이 다소 익숙했고, ‘소품’과 ‘단상’에 머문 듯한 시편들이 많았다. 이것은 단지 시편의 ‘길이’가 짧다는 데서 기인한다기보다는 시적 사유와 감각이 운신하는 폭이 좁다는 인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자신이 가진 언어의 탄성에 업혀 더 멀리 밀려가도 좋을 것이다.
심사위원들이 「어둠을 클릭하다」 외 4편을 보내온 이자인을 당선자로 합의하는 데에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그는 시가 ‘짓는’ 것이면서 ‘흘러나오는’ 것이라는 것을 몸으로 터득하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다만 때때로 설명의 욕구가 시의 호흡을 돌보지 못하는 경우가 노출되었지만, 그의 시는 상상력의 흐름이 자연스러우면서도 의외의 방향으로 번지는 시적 점선들을 가지고 있다. 5편의 투고작 중에서 당선작으로 선정된 「아직,」은 당신과 나 ‘사이’의 거리(距離), 존재자들의 관계에 어쩔 수 없이 내재하는 그 보이지 않는 ‘거리’를 공감각화하여 ‘존재’로 드러내준 작품이다. 그 감각의 구체성과 치열함에 신인문학상을 돌리기로 하였다. 우리는 모두 당선자와 함께 설레고 기뻐하고 축하하고 싶다.
심사위원= 김명인(시인), 황학주(시인), 김행숙(시인) (대표집필 김행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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