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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풍당당 분필氏 / 정경희

 

강의실에 상주하는 분필씨는요

평소엔 친절함 속에 뿔을 감추고 있지만

앉기 거부하거나 행동지침을 어기면

밑줄 좍좍 그어가며 날 길들이려 하죠

동강동강 제 몸 관절 부러뜨리며

어김없이 날카로운 뿔을 꺼내 위협해 와요

나는 뿔이 무서워 의자에 몸 구겨 넣고는

고분고분 말 잘 듣는 순한 양이 되어요

묻지도 않았는데 분필씨 생각대로 답하고

분필씨 습관대로 따라 행동하죠

가끔 경직되고 고루한 생각에

내 뿔 꺼내 맞서볼까 생각도 하지만요

그의 뿔은 워낙 완고해

내 같은 여린 뿔로는 감히 어림 없다나요?

그래서 나만의 대항 법을 터득했는데요

강의 내용 자장가 삼아

잠 계단에 비스듬히 앉아 있거나

창 밖 딴 세상 꿈꾸면서 그 뿔 숫제 무시해보죠

그러다가 뿔을 타고 밖으로 나가

강 건너고 구름 따라 달리기도 하고

발걸음 멈추고 비행기 접어 날리기도 해요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면

뿔을 먼저 달아준 건 나인지도 모르겠어요

지적이고 당당한 그 뿔이 멋스러워

스스로 닮아가려 애쓰는 건지도

쉿, 분필씨 다시 뿔을 꺼내고 있어요 세상이 갑자기 긴장하네요

 

 

 

 

[당선소감] 암흑 속에 반짝이는 별이었으면

 

오래도록 나무로 서 있었습니다. 사방으로 가지를 뻗었으나 어디로 가야할지 방향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해는 져서 어둠은 짙건만 걸음을 뗄 수 없는 시간들이 두툼한 낙엽으로 쌓였습니다. 자꾸 목이 마르고 뿌리 내릴 수 없는 조바심으로 올려다 본 하늘에 아, 총총히 박힌 별이라니…. 인적이 끊긴 어느 밤, 발자국 소리에 놀란 개 짖는 소리로 길을 잡아 새벽녘에야 사립문에 다다랐을 때의 안도감 같은, 아, 눈망울 맑은 별들의 반짝거림이라니…. 나의 시도 그렇게 위안 받고 또 그렇게 위안이 되었으면 하고 기다리던 긴 시간이 흘렀습니다.

당선 소식을 듣던 날 함박눈이 내렸습니다. 창밖을 바라보며 선물이었으면 하고 되뇌이던 주문이 기적처럼 하얗게 날아왔습니다. 여전히 길 위에서 서성거리지만 가지 사이로 빠져 나가는 바람과 이야기 나눌 수 있고 속삭이는 별을 머리 위로 올려다 볼 수 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시에 입문하도록 등 떠밀어주고 늘 힘이 되어준 남편과 당선 소식에 놀란 눈으로 나를 끌어안던 두 아들에게 먼저 사랑을 전합니다.

은유와 시의 본질을 깨우쳐주신 김영남 선생님, 덕분에 이름 없는 것에게 이름 붙이고 말 거는 일이 한결 쉬웠음을 고백합니다. 시가 곧 삶인 삶을 살라하시던 문학아카데미 박제천 선생님, 사람을 중심에 두고 작은 소리에도 귀 기울이며 살겠습니다.

오랜 시간 시의 발등에 쓴 잔을 들이부을 때도 늘 곁에서 힘이 되어준 이기홍, 최가예 시인님, 덕분에 칠전팔기 할 수 있어 고맙습니다. 도반이 있어 외롭지 않게 길 떠날 수 있었던 정동진회원과 문학아카데미 문우들, 먼 길 돌아가는 뒷모습 지켜봐준 어우름 회원과 제 이름에 기쁨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에게도 빨간 장미 한 송이를 드립니다.

그리고 하마터면 주저앉아 시의 끈을 놓아버릴 순간 손잡아주신 안도현 심사위원님께 깊은 감사를 올립니다. 아직 많이 부족하고 미약하지만 암흑 속에 반짝이는 별처럼 그렇게 정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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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기성세대 권위 상징 '뿔' 기발해

 

애매모호한 이미지를 구사하던 시들이 거의 사라졌다. 대신에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자분자분 이야기하는 시들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아직도 시가 개인적인 고백의 양식이라고 생각하는 구태의연한 시들을 제외하고 나니 수준 높은 시들이 한 소쿠리나 되었다.

마지막까지 손에 들고 있던 시들은 6명의 작품인데 하나같이 읽을 만했다. 최영화 씨의 '갯고둥'은 시적 대상을 유심히 관찰해낸 뒤에 얻은 사유가 일품이었다.

하지만 이 시의 핵심어인 '길'이라는 단어를 이십여 차례 이상 등장시키는 것은 치명적인 약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양은정 씨의 '신발을 위한 레시피'는 참신한 소재로 단번에 시선을 끌어당기는 시였다. 시의 중반부 이후 동어반복이 지루해서 좀 더 다른 감동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주명숙 씨의 '꽃시계 좌담'도 의욕적인 출발에 비해 뒤가 약했다. 대비의 기법을 왠지 서투르게 구사하는 느낌이다. 김수예 씨의 '아토피'는 활기찬 상상력을 보여주고 있지만 역시 뒤쪽으로 갈수록 집중력이 떨어지는 게 흠이었다. 나아름 씨의 '누가 냉장고를 열었을까?'와 정경희 씨의 '위풍당당 분필씨'를 놓고 고심을 거듭해야 했다.

두 작품 모두 독특한 발상, 거침없고 자유로운 표현 방식이 일품이었다.

앞의 작품은 상상의 보폭이 넓어 때로 엉뚱해 보이는 것도 매력이었다. 시는 이것이다, 라는 고정관념을 해체하고 있다는 점, 적절한 대화의 삽입으로 시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는 점도 좋게 보았다. 그런 장점들이 이 사람이 응모한 시편에 지나치게 많이 구사되고 있는 것이 불만이라면 불만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당선작으로 고른 '위풍당당 분필씨'는 기성세대의 권위를 '뿔'로 설정한 상징적 장치가 매우 기발하다.

기존의 질서에 도전하는 자의 난감함을 이처럼 능숙하게 표현하는 일은 범상치 않다.

게다가 함께 응모한 시들이 모두 만만치 않은 기량을 보여주고 있어 믿음직스럽기도 하다. 좋은 시를 당선작으로 뽑을 수 있어 즐거웠다. 부디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는 빛나는 시인이 되기를 바란다.

- 안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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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톱 안 남자 / 송해영

매니큐어 칠을 한 손톱 안엔

내 손톱을 장악한 한 남자가 살고 있다.

자꾸 자기 말 좀 들어보라며 나를 불러들인다.

무시를 할수록 자꾸 성가시게 군다.

귓가에 쟁쟁하게 맴도는 그 말은

달콤한 사탕을 물려주는 유혹과 같다.

더욱 들여다보라고 보채는 남자,

이 남자가 주는 카타르시스라니!

칠을 벗길수록 더욱 강해지는 스릴정도는

그도 잘 알고 있어 나를 정도껏 조종한다.

받아들이기 힘든 컬러를 자꾸 재촉한다.

바르라는 속삭임이 귓바퀴를 타고 들려오면

어쩔 수 없이 들여다보고 한참 얘기를 해주어야 한다.

이것으로 나는 어디에서나 돋보일 것을 예상한다.

그냥 이 남자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

이렇게 말을 잘 들으면 일주일은 잠잠할 테지.

손톱 속 남자는 변덕이 심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내가 원하는 것, 어느새 이 유혹에 빠져 있다.

손톱 안에 살고 있는 남자,

칠을 지우면 죽어버리는 가혹한 운명의 남자,

내 손톱 안엔 한 남자가 징그럽게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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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마음 속 갈등 절묘한 표현 돋보여"

이번 본심에 올라온 23명의 시들의 경향은 전반적으로 사회역사적 상상력의 퇴조가 뚜렷하다는 것이다. 시대의 흐름이라고 치부하기엔 문학의 사회적 기능의 약화가 염려스러울 정도였다. 이를 대체한 얄팍한 생태주의, 깊은 사유에 도달하지 못한 채 감상주의에 머무른 많은 내면의 시, 그리고 판타지들을 보면서 괴로움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다행히 주명숙의 '즐거운 제국', 강혜원의 '카나리아', 송해영의 '손톱 안 남자' 라는 시편들을 만난 것은 다행이었다.

주명숙의 시에서는 주방을 '즐거운 제국'으로 보고 거기서 '장기집권'을 누리는 주부 입장에서 "잘 버무려진 식단은 제국을 견인해 나갈 크레인이니까요"라고 말하는 그 발성법이 발랄하여 오래 눈길이 갔다. 강혜원의 시는 새장에 갇힌 아이새와 엄마새의 논전을 통해 아이새의 위험한 자유에 대한 갈망과 이에 대응하는 엄마새의 안일한 통찰을 대조적으로 드러내 세대간의 갈등과 소통을 말하고자 한 상상력이 빛나는 시였다.

송해영의 <손톱 안 남자>엔 반전이 있다. 일찍이 서정주의 시 이래 여자의 '손톱'은 성적코드였다. 이 손톱에 "받아들이기 힘든 컬러를 자꾸 재촉"하는 남자의 요구에 부응한 메니큐어칠 행위는 남자의 변덕스런 욕망에 노예가 되어가는 여자의 안쓰러운 심리가 반영된 것이다.

그런데 이 시의 반전은 남자가 원하는 것이 곧 "내가 원하는 것"이라는 진술로, 이는 우리 마음속의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갈등을 절묘하게 표현한 것이다. 하나의 마음은 남자의 '조종'을 거부하면서도 또 다른 마음은 어느새 나도 그를 조종하고 싶은 성적욕망 말이다.

위 시들 중에 한 편을 골라내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예심자를 불러 상의했으나 결국 나의 결정은 가능성 쪽에 무게를 둔 송해영이었다. 송해영은 다른 시편들도 일정한 수준을 유지해서 믿음이 갔지만 표현의 평이함이 자꾸 눈에 거슬렸다. 이를 보완하면 좋은 시인이 될 걸로 믿어 당선으로 민다.

- 심사위원 고재종 시인 광주ㆍ전남작가회의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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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의 낙관(落款) / 정도전 

새들에게 있어서

낙관이라는 습관은 오래된 풍습이었다

문신을 새긴 암벽마다 둥지가 되었고

뜨뜻한 아랫목이 되었으므로

발톱을 날카롭게 세우고 부리를 비벼 족적을 남기는 일은

축제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족적이란 새들의 풍향계였다가도 천적에게는

눈물일 수 있는 것

바닷가의 익룡 발자국 또한 그러했으리라

묵화 한 점 쳐 놓고 낙관을 해야 할 여백을 놓쳤다

자작나무 숲 물안개 사이로 새들이 까맣게 앉아 있었다

그루터기마다 태점(苔點)을 찍어놓은 듯 했다

부리는 날카로웠지만 발톱은 무뎠으니

새벽이 되도록 새들은 칠흑의 어둠을 방황해야 했다

돌아갈 곳 없는 묵화 속의 새들

강물에 먹물로나 풀어져 쪽배마냥 흘러가길 기다렸다

딱딱거리는 딱따구리는 한 칸짜리 초가집이 전부였으니

헛간이라도 한 곳 덧댔으면 좋으련만

이미 붓을 말끔히 빨아버린 뒤였다

한 무리의 새들이 화선지 밖으로 벗어나려는 찰나였다

잠시 흐름을 멈춘 강물 위에 낙관을 찍었다

푸드덕, 새들이 도처에서 솟구쳐 올랐다

[당선소감] 새들이 자유롭게 날 수 있도록

풍경이 숨 쉬는 창을 활짝 열어 놓아야겠다

소호 앞바다 바람개비가 어지럽게 돌고 있다. 바다에 코를 박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바람 따윈 적수가 되지 못한다. 바람개비를 돌리는 힘은 파고에 비례한다고 했으나 속력의 계수를 재는 일은 내 몫이다. 그러나 숫자가 아닌 언어의 놀음만으로 바람개비의 회전수를 가늠한다는 것은 내겐 아무래도 무리수다.

바다에 부표로 구획 지어진 빈 칸들이 늘 아우성이다. 가끔 새들의 발장난마저 없다면 그대로 화석이 될 뻔 하다. 난 바다 풍경이 숨 쉬는 높이의 창에 살면서도 부표의 의미를 해독하지 못한다. 그냥 삶의 물음표 정도로 단정 짓는다. 잊어야겠다며 중얼거릴 때마다 부표를 따라 바람은 일어서고 새는 밤새 베란다 창을 두드린다. 창문을 닫아버리면 그만이겠지만 새들을 달래는 일은 쉽지 않다. 온종일 눈이 답답하다. 근시에 노안의 징조까지 겹쳤다고 하니 시력(詩力)과 시력(視力)과의 상관계수는 유의미한 일일까 궁금하다.

풍경은 멀리서 볼수록 뚜렷해진다. 겨울밤, 추위에 꽁꽁 언 손을 녹여줄 수 있는 입김 같은 시를 쓰고 싶다. 따뜻할수록 혀끝의 미각이 오래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선해 주신 명지대 정끝별 교수님, 시안을 맑게 해 주신 전남대 평생교육원 신교수님, 화요문우님들, 추운 날에는 매생이 국 같은 속 풀이용 시가 제격이라는 아내, 뮤지컬 작가를 꿈꾸는 혜수, 생태도시의 밑그림을 그려 보이겠다는 환수, 많은 격려와 박수를 보내줄 내 따뜻한 선후배, 동료들과 이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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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깊이 있는 시적 사유ㆍ상상력 뛰어나”

 

스물네 분의 작품이 본심에 올랐다. 일상에 대한 따뜻한 관찰과 묘사가 주를 이루었으며, 서정적 진정성이라는 측면에서 모두 일정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작품들을 읽는 내내 시가 시인 까닭과 새로운 시인에게 기대하는 요건을 떠올려보곤 했다. 시가 여타의 산문과 변별되는 근본적인 지점은 시는 설명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시적 긴장 혹은 시적 비약 등으로 일컬어지는 바일 것이다. 시는 언어적 숙련을 기반으로 하는 응집이고 맺힘이다. 그러기에 시의 언어는 팽팽하고 첨예하게 벼려져 있기 마련이다. 모든 시인에게도 마찬가지겠으나 특히 신인에게 기대하는 개성의 새로움과 깊이는 더욱 간절하다.

 

선자의 손에는 끝까지 네 분의 작품이 남았다. 먼저 이문정 씨의 '장수풍뎅이 우화기'외 5편은 장수풍뎅이, 옥수수, 포장마차, 조약돌 등 서정적 사물에 대한 관찰과 묘사가 탁월했다. 그러나 일상적 대상들이야말로 그 대상을 새롭게 조명해내는 발견의 시선 없이는 시적 울림을 주기 어렵다. 정수원 씨의 '일획' 외 3편은 서정적 통찰이 빛나는 시편들이었다. 특히 강(물)을 일(一)획의 글자에 비유하는 시적 발상은 신선하다. 그러나 이 두 축을 엮어가는 점착력과 역동성이 미흡했다. 시적 통찰에 미달하는 것이 아니라 초과하는 시적 애매성일 때 그 의미가 웅숭깊게 될 것이다. 강혜원 씨의 '재기 발랄 모퉁이 쇼'외 3편은 본심에 오른 작품들 중 가장 활달했다. 유머와 해학의 시선으로 일상을 포착해내는 솜씨가 경쾌했다.

 

정영희 씨의 '새의 낙관(落款)'을 당선작으로 결정하는 데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작품이었다. 함께 응모된 다른 6편과의 시적 편차도 적을 뿐 아니라 시적 호흡과 상상력에 있어서도 그 음역(音域)이 넓은 편이어서 습작의 경륜을 짐작케 했다. 시간과 공간을 자유자재로 조물락거리는 시의 스케일이 넉넉하다. 묵화와 낙관과 여백을, 자연스럽고 정교하게, 새벽과 새와 족적과 직조해 가면서 시적 사유의 깊이를 더하고 있다. 군더더기가 없고 날렵하다. 이 한 편의 시가 새롭게 탄생한 시인에게 생의 '낙관'을 찍는 한 순간을 제공하였으니, 이제 “푸드득, 힘차게 솟구쳐 오르는” 일은 시인의 남은 몫일 것이다.

 

- 심사위원 정끝별 명지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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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와 이야기 / 이수윤

 

 

육차선 도로가 생기고

청과물 도매시장이 부쩍 몸피를 키워

산 밑의 각화동 마을은 몸을 더 엎드린다

 

예쁜 눈썹으로 웃는 기와는

알고 보면 지나온 이야기가 무거워

한평생 돌아눕지도 못한 거였다

아팠던, 그리고 달던 들숨과 날숨의 흔적에

풀꽃을 피우며 결리는 어깨뼈를 겯고

너나들이를 한다

그러다 문득

세월은 생각을 돌려놓는 큰손이라며

기와는 가끔씩 스스로를 돌아본다

 

된장 꽃으로 핀 푸른곰팡이도 밉지만은 않은 객

선선히 걷어내면 풋고추가 달다는 어머니는

 

먼데 소식에 귀를 세우는 능소화

하늘을 능멸하고 조소하는 그것을 왜 심으셨나

기와는 말없이 다 알고 있다

어머니의 젊음, 비릿한 날개를 단

붉은 꽃잎이 기와의 머릿속에 별처럼 누벼질 때

어머니는 오이냉국에 찬 밥 한 그릇의

밥상을 받기 위해 칠십 평생 달려온

밭고랑을 또 달린다

 

모서리가 닳아서 어머니 같은 기와 속엔

시간의 붉은 피가 이야기로 갇혀 있다

 

 

 

 

은행이 익어 갈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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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매몰 직전 당선 감사"


부활, 아기 예수의 탄생을 알리는 캐롤이 울려 퍼지는 오늘, 향기로운 전령이 도착했다.

 

뜨겁게 숨쉬다가 젖은 채 식어버렸던 나의 클론들아 지하에서나마 귀를 열고 들어라.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이 부활은 고스란히 너희의 몫이구나.

늦었지만 이 소중한 소식이 어두웠던 너네의 전생을 위로하겠니?

 

얼음 구유에서 식어가며 토해냈을 원망의 자모들을 분리해서 백지 위에 촘촘히 세운다면, 물고기 알 같은 나의 생리를 용서하겠니?

 

아테나의 분노 속에서 억울하게 사라져간 나의 아라크네여,

환한 등불이었던 너의 작품이 그 긴 세월 내게 보낸 응원을

헛되지 않게 하겠다.

 

내 안의 나야, 눈 속의 눈으로만 보이는 건강하게 솟구치는 귀두를 영접할 수 있겠니? 이제부터 태어나는 분신들의 진화를 고스란히 감당하겠니?

 

또 수 개의 물음표를 안았다. 치열하게 궁금해 하며 살아가야 할 나의 의무가 행복하다. 문학의 궤도를 벗어나 산 세월, 안드로메다처럼 여기실 존경하는 선생님들 제가 이렇게 살아있었습니다.

 

어버이 같으신 전원범 선생님, 광주대 대학원 문창과 선생님들, 이름도 아득하실 허형만 선생님, 부지런하고 씩씩한 서연정시인, 금초문학 동인님들, 우리시 동인님들. 희곡에 머리 부딪히고 몽롱하던 지문과 대사 여러분 그동안의 잠적을 용서하시겠습니까?  매몰당한, 압사 직전의 저를 발굴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 큰절 올립니다. 따뜻한 자리 마련해주신 전남일보사에도 감사드립니다.

 

폭서에도 얼어붙는 나의 냉기를 함께 참아준 진, 영, 용, 우야 사랑한다. 부모님, 감사합니다.

 

 

 

 

[심사평] "평범한 삶의 풍경 따스한 표현"

 

예심을 거쳐 선자에게 이른 서른 분의 작품을 차례로 읽는 동안 변화가 있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응모 편수가 장르 불문하고 두 배로 늘었다는 담당 기자의 전언이 있었거니와 본심에 오른 작품들의 수준이 상당한 것이었다.

 

본선에 오른 작품들을 숙독하는 과정에서 선자의 초점은 새로움이었다. 삶과 언어를 대하는 관점이 새로우면서도 이미지의 전개 속에 시인이 꿈꾸는 따뜻한 유토피아가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았다. 윤은희, 이병승, 고민교, 김재준, 최인숙, 정영희, 이명순, 일곱 분의 작품들이 최종심에 남았다

 

윤은희, 이병승, 고민교 씨의 응모작품들은 자유롭고 열린 시 세계를 지니고 있었다. 대상을 거칠게 몰아가는 힘이 느껴졌고 상상력의 분출 또한 보기 좋은 것이었다. 문제는 이 시편들이 인간의 삶을 보다 따뜻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승화 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고 세계를 끌어안기에 이 진술들은 개인적인 사유 쪽에 더 머물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김재준, 최인숙 씨의 작품들은 전아한 품격을 지니고 있었다. 고전적인 소재와 언어 속에서 오늘의 모습을 찾는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창작의 주요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전아함이 새로운 가치를 얻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정신의 깊이를 지녀야 할 것이다.

 

최종까지 선자에게 남은 작품은 정영희 씨의 '봄, 감전되다' 와 이명순 씨의 '기와 이야기'였다. 정영희 씨의 작품들은 언어가 지닌 풋풋한 상상력의 꿈이 최대의 아름다움이었다. 한 무리의 냉이꽃이 하얗게 잔물결 진다/ 마당 가득 돋아난 저릿한 음표를 밟고/ 고양이 한 마리 지나간다/와 같은 서정의 전개는 요즘 우리 시에서 보기 드문 것이었다.

 

이명순의 '기와 이야기'는 우리 일상 주위에서 찾을 수 있는 평범한 삶의 풍경을 노래한 것이다. 따스한 힘이 핏줄로 스며드는 우직한 느낌이 있다. 두 분의 작품 중 어느 분을 당선작으로 선정할 지 선자에게 몹시 난해한 일이었다. 숙고 끝에 '기와 이야기'를 당선작으로 결정하면서도 자꾸만 정영희 씨의 작품들을 돌아보게 된다. 우직하게 다가오는 따뜻한 삶의 꿈을 선자가 새로움으로 해석한 결과이지만 정영희 씨의 미래에도 함께 박수를 보낸다. 

 

심사위원 곽재구 시인ㆍ순천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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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여지도 / 조다윗

1.

내 영혼이 어느 산천 물줄기의 방점이라면 그 더딘 물소리가 끝없는 방물장수의 노래여도 좋겠다. 까마득한 옛 생각, 지도 하나를 그리는 밤, 고요의 헤진 발자국을 따라 걷다보면 어찌,들이고 산이고 섬인지 헤아릴 수 있을 까마는 능선과 능선이 만나는 무등산엔 소리그림자 짙다. 평야와 평야가 나란히 도사리는 푸른 꿈도 젖는다. 지칠 줄 모르고 다가갈 것만 같은 어지간히 어지러운 삶 예견이라도 하는 듯이, 휘감고 되돌아가야 할 그 길 꼭 잊지 말란 듯이 그래도 살별처럼 떨고 있는 간이역을 처연(凄然)의 뒤안길에서 기다리고 있다.

2.

'그 끝이 어느 경계 하나 끊고 살았으면 참 좋겠다.'라고, 생각하던 밤은 이토록 깊은 적막이다. 마치, 어머니의 가랑이처럼 길고 긴 포옹이다. 내 시의 근원지를 아직 잘 알지 못하겠으나, 늘 부려먹고 싶었던 어머니의 이름 대신 할미 가슴에 텃밭 한평 가꾸던 이유가 옛 지도의 성지처럼 신성함을 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주 잠시 내 마음 속에도 초록의 활기가 꽃을 피우던 날, '모든 길은 다시 하나의 길로 마주본다.'고 여우비가 산자와 죽은 자와 떠나간 자의 갈림길에서 등고선을 깊게 새겨두었다.

[당선소감] "더 좋은 시로 보답하고파"

먼저 이 모든 영광 주님의 것으로부터 주님께 돌립니다.

참으로 슬픈 소식들로 제 고향 일대는 지금 비통한 시간을 견디고 있습니다. 이제 막 여수에 내려와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참담한 심정에 휩싸인 저는, 환한 자리에서 소감문을 쓰기가 이토록 두렵고 송구합니다. 오늘만큼이라도 이 삶에 대한 공동체적 책임과 의무를 통감하고자 합니다.

작품을 선해주신 전남일보사와 심사위원 분들께 경이와 감사를 표합니다. 또한 썩고 장애 입은 시절 저를 끌어안아주신 감당치 못할 스승님들과 사이좋은 이웃이 있었음도 여기 기록해 둡니다. 수수밭 전별기, 적멸을 꿈꾸며, 제비꽃 여인숙, 말향고래 시인님들, 잊지 않겠습니다. (이 못난 제자와 아들을 용서하십시오, 詩부모님들) 그분들의 기도와 가르침 앞에 우뚝 서서 훗날 좋은 시로 보답하고자 합니다. 늘 참시인과 참제자로 거듭날 수 있도록 소망하고 있사오니, 더욱 정진하여 부끄러운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항상 최선을 다해 살도록 하겠습니다. 저를 길러주시는 할머니 사랑합니다. 우즈베크에 계신 강회진 교수님!, 학교에서 꼭 다시 만나요. 제 든든한 강상대 주임교수님 외 단국대, 한서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님께도 감사합니다. 광주ㆍ전남 민족문학작가회의 박혜강 회장님, 귀한 술과 말씀 깊이 새겨둡니다. 김준태 선생님, 어린아이의 목소리로 힘차게 다시 보고 싶습니다. 시누리와 문우들을 위하여. 광덕고, 안양예술고교 문창과여 영원하라. 장경동 목사님, 파이팅 하세요.

마지막으로,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이를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아멘. (고린도전서 9:16~17)

올 신춘의 시작과 끝을 저는 다만 이와 같이 뿌리고 맺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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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핵심 파고드는 패기있는 도전의식

예심을 거친 작품들을 읽어가는 동안 선자의 눈길을 끈 작품들은 아래 다섯 분의 시편들이었다.

'월세 방 있습니다'(김기훈) 외 6편의 작품들은 시상의 전개가 자연스러웠고 한 장 한 장 찍어 올린 언어의 정교함이 미려해 보였다. 반면 삶을 바라보는 치열한 인식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한 신인의 탄생이란 안정과 조화보다는 세계에 대한 신선한 꿈과 패기에 찬 도전의식 쪽에 보다 강한 의미 부여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모란꽃 마차' (박성진) 외 2편의 작품들은 전통적인 한국 서정시의 계보를 생각게 하는 작품이었다. 서정이 사라진 시대에 감정의 선율을 자연 속의 풍경들과 견주어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은 미덕이지만 이 작품 역시 신인이 지녀야 할 꿈과 패기의 차원에는 아쉬움이 있었다.

무늬들 (박시원)외 2편의 작품들은 꼼꼼하게 교직된 언어의 조각보를 바라보는 느낌이 있었다. 전통적인 여성 수공업의 세계에 현실의 삶을 투영하려는 노력은 소중하지만 보다 현대적이고 세련된 이미지를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선자의 최종적인 관심을 끈 작품은 '선운사 해우소 옆 홍매화' (정도전)외 3편과 '대동여지도' (조다윗) 외 5편이었다. 두 분의 작품들은 각각의 개성들이 차분하게 살아 숨쉬는 장점들을 지니고 있었다. 

정도전의 '선운사 해우소 옆 홍매화'는 갓 핀 홍매화의 선선한 모습을 붙박이장의 문틈을 비집고 나오는 외투 깃과 자연스런 연결로 표현하고 있다. 꽃의 개화 속에서 낡은 외투. 삶의 개화를 꿈꾸는 시인의 눈길이 비범하지 않은 것이다.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모든 것들을 꽃으로 바라보고 싶은 시인의 마음은 긍정적인 힘으로 세계의 진보에 기여를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다윗의 '대동여지도'는 언어를 다루는 시인의 힘이 우직하게 느껴졌다. 세계의 핵심에 정공법으로 접근하려는 이러한 정직한 힘은 언어의 충돌이나 지적인 교란에 전념하는 요즘의 신인들의 작품들에 비해서 상대적인 신뢰감을 주는 것이었다. 향후 그가 보다 따뜻한 시선으로 삶을 응시하고 세계의 순정한 꿈을 위한 서정성의 확보에 노력한다면 그가 한 신예작가로서 충분한 자기 목소리를 지닐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응모한 시편들이 일정한 수준을 균등하게 유지하고 있는 점을 상대적 우위로 여겨 최종 당선작을 '대동여지도'로 결정하였다. 한국 현대시를 위한 웅장하고 섬세한 소리결을 지닌 귀한 범종으로 거듭 태어나길 바란다.

- 심사위원 곽재구 <시인ㆍ순천대학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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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 요실금을 앓다 / 안오일

 

 

닦아내도 자꾸만 물 흘리는 냉장고
헐거워진 생이 요실금을 앓고 있다
짐짓 모른 체 방치했던 시난고난 푸념들
모종의 반란을 모의 하는가
그녀, 아슬아슬 몸 굴리는 소리
심상치 않다, 자꾸만 엇박자를 내는
그녀의 몸, 긴 터널의 끄트머리에서
슬픔의 온도를 조율하고 있다.
뜨겁게 열받아 속앓이를 하면서도
제 몸 칸칸이 들어찬 열 식구의 투정
적정한 온도로 받아내곤 하던
시간의 통로 어디쯤에서 놓쳐버렸을까
먼 바다 익명으로 떠돌던
등 푸른 고등어의 때
연하디 연한 그녀 분홍빛 수밀도의 때
세월도 모르게 찔끔찔끔 새고 있다.
입구가 출구임을 알아버린
그녀의 깊은 적요가 크르르르
뜨거운 소리를 낸다, 아직 부끄러운 듯
제 안을 밝혀주는 전등 자꾸 꺼버리는
쉰내 나는 그녀, 의 아랫도리에
화려한 반란이 시작되었다.

 

 

 

나는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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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새로운 시작…더욱 매진할 터"

감기약을 먹고 누워 있다가 전화를 받았다. 약 기운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당선되었다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한참을 그냥 앉아 있었다. 시와 함께 했던 그 긴 세월의 무게가 한꺼번에 휘발되는 듯 했다.

꿀벌은 날개가 너무 작아서 원래는 제대로 날 수 없는 몸의 구조라고 한다. 그러한 구조를 가지고도 꿀벌은, 수없이 반복된 연습으로 결국 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꿀벌의 쉼 없는 날갯짓, 삶에 대한 그 역동성이 꿀벌을 날 수 있게 해주었던 것처럼 나의 시 쓰기도 그러했던 것 같다.

지치고 힘들 때마다 더욱 삶에 촉수를 세워 시를 끄집어내어 다듬어 나갔다. 고통 속에서 지혜를 만들어나가는 세상의 이치처럼 끊임없이 주어지는 좌절을 내 삶의 거름으로 삼았다.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시의 길은 끝이 없다. 끝이 없다는 것은 항상 시작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늘 시작하는 마음으로 공부하며 시를 쓸 것이다.

감사한 분들이 참 많다. 먼저 부족한 시를 뽑아주신 고재종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리며 늘 위로와 격려를 해주신 여러 선생님들께도 감사드린다. 다 호명 할 수 없는 선배님과 후배들 그리고 함께하는 동인들 모두에게 감사할 뿐이다. 늘 마음을 다독여준 친구와 묵묵히 지켜봐준 남편과 아이들에게도, 오랫동안 곁에서 함께 해준 미승 언니와 영서에게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그래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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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2007 全日 신춘문예 시

 

시 지망생들은 왜 고향의 가난한 부모님 이야기에만 관심이 있을까. 그것도 왜 유년과 연관된 이야기에만 집중할까. 그렇게도 쓸 것이 없어서야 무얼 더 일러 말하겠는가. 아니 최소한 자본의 세계화 속에 신음하고 있는, 이 슬프고 노여운 세계를 사는 자기 삶, 자기 실존, 자기 존재조차 아무 것도 아니란 말인가.

 

이번 심사를 하면서 일국(一國)의 시인을 꿈꾸는 시 지망생들의 소재와 주제의식과 사유의 협소함에 대해 심한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아랫도리에 물 흘리는 냉장고의 내력에 대한 사유를 통해 그 냉장고를 운영하는 우리네 보통 여성들의 고단한 삶과 시간에 의한 생의 마모를 설득력 있게 표현한 안오일, 그리고 새벽 별에게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건/ 상징하는 바가 아무 것도 없어서야'라며 지금까지 별에 대한 상상력을 완전히 전복해버리는 이형경 등이 200여명의 응모자 중의 그럴 듯한 수확이었다.

 

그런데 이형경은 활달한 상상력과 전복을 통해 생의 이면을 들추려는 젊은 패기는 좋지만 시 전체의 유기적 통일성에 허점이 많았다.

 

그래서 나머지 응모작에서도 고른 수준과 삶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보여준 안오일을 당선작으로 민다.

 

안오일은 시에서 많은 수련이 엿보이지만 상상력 훈련을 하지 않으면 나중에 이형경에게 추월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해드리며, 축하를 보낸다.

 

심사위원 고재종 시인ㆍ문학들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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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위에 뜬 집 / 정동철


얼어 죽은 새들을 주우러 강변에 나갔다
일찍이 우리가 접어 날린 종이비행기들
한 무리 되새떼가 되어 이리저리 허공에 휩쓸리고 있었다
쩡쩡 얼어붙은 강은 속내 깊숙이
낡은 달력들을 흘려보내는 중이었다

미루나무 가지 사이로 빠르게,
추운 햇살 한 묶음 지나가던 동화 속의 집
왜 아버지는 거칠고 마른 삭정이만 골라
허공 위에 집을 지으셨을까
마루 밑에 놓인 신발들이 안쓰럽다며
어머니는 자꾸 창문 밖을 내다봤다
밥알 같은 눈발들이 지붕 낮은 집들을 지워버리는 동안

잠들 때마다 등을 쿡쿡 찔러대던
낡고 불편한 나뭇가지의 집
우리들의 하루는 종일 공중에 떠 있었다
귀 시린 겨울밤을 지우개로 지우며
연탄난로 위에 마른 건빵을 굽다가
갈라진 손등으로 벌건 연탄집게를 들어 글씨를 썼다

어디로 공처럼 튀어나갈 수도
굴러갈 수도 없었던 날들
사방연속무늬 벽면에서 철지난 통신표들이 노랗게 바래갔다
청색의 동치미국물을 마시며 우리는 조금씩 단단해져 갔지만
허공 위에 뜬 집에서는 쉽게 잠이 들 수 없었다




아버지 소처럼 말씀하시네 / 정동철


눈송이 몇점 손님처럼 찾아간 날
더 이상 견딜 것도 더 탕진할 것도 없는 나는 집으로 내려갔다
굴뚝에서 쇠죽 끓이는 연기가 흰 팔뚝을 들어
눈 덮인 지붕을 버텨 올리는 참이었다
늙은 암소 등을 빗질하며 나직나직 하시는 말씀이 외양간 밖으로 새어나오는데
눈을 머리에 인 단풍잎들이 고개를 이기지 못하는 것을 고향집은 아는 것이다
구수한 쇠죽 냄새가 등을 토닥거려주자
처마 밑으로 녹다만 눈덩이 하나 툭 떨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염치 하나 툭 떨어져도

할 말이 없는 거다
푸우-푸 뜨끈한 여물을 먹으며
늙은 암소가 입김을 불어가며 메주콩을 씹더라도
이 세상 모든 구멍이란 구멍마다 후끈거리는 몸으로 가득하더라도,
소에게도 할 말이 없는 거다
그래, 겸연쩍게 얼굴을 들고 외양간 문을 엿보는데
부엌에서 저녁 짓다가 어머니 힐끗 보고 하시는 말씀

아서라,
느 아부지가 지금 소허구 말씀을 허신다

이 한 마디가
짚을 썰어 가마솥에 넣고 잘 마른 꽁 깍지와 쌀겨를 뿌리고
찬물 두어 동이 붓고는 풍구를 돌려가며 쇠죽을 쑤고 계시던 아버지를
외양 밖으로 불러내시는 것이었다

눈송이 몇 점 또 손님처럼 오시는 것이었다.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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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꿈 속 시 잊지 않으려 머리맡에 메모장


어느덧 십여년이 흘렀습니다. 문학이 좋아서 시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던, 하루종일 시를 생각하고 잠들면서도 시를 생각하고 꿈속에서도 시를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꿈속에 쓴 시들은 왜 꿈을 깨면 기억이 나질 않던지. 아예 메모지를 머리맡에 두고 잠든 날도 많았습니다. 꿈결에 써둔 시들은 언제나 알 수 없는 기호가 되어 여러 날의 아침을 쓸쓸하게 하곤 했습니다.


밥을 벌러 세상에 나왔어도 신춘문예철만 되면 가슴이 두근거리는 건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시를 빙자해서 문학을 빙자해서 문학 이외의 것들에 너무 정신이 팔려 있지는 않았나 싶은 시절이었습니다. 문학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무기가 될 수 있다고 믿었지만 무기만 믿고 문학을 등한시하지 않았나 하는 자책이 든 것도 시쓰기를 그만두고 나서의 일입니다. 내가 울지 않으면 절대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울리지 못한다는 것도 나중에 알았습니다.


전북청년문학회 벗들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그들과 같이 가고자 했던 길, 여전히 우리 앞에 놓여 있는데 길을 앞에 두고 우리들은 각자의 밥을 팔러 세상 속으로 흩어졌습니다. 이제 그들이 답할 차례입니다.


늘 따르고 싶었던 최하림 선생님이 제 시를 뽑아주신 것이 제게는 더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뒤늦게 다시 시작한 시업이지만 결코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갑자기 원고지를 잡고 끙끙대는 저를 불안한 눈길로 바라보던 아내와도 기쁨을 같이하고 싶습니다. 아내는 늘 제 시의 첫 독자이자 마지막 독자이기도 합니다. 감사합니다.

 

 

 

 

[심사평] 인간의 둥근 삶 표현


신춘문예 시들을 심사하다 보면 거의 모든 시들이 기다림의 시학에 서툴다는 면이 보인다. 시는, 그 시가 지닌 내용만큼의 기다림의 시간을 요구한다. 그 시간은 한 달이 될 수 있고 일 년이 될 수 있고, 십 년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투고자들은 그만큼 기다려주지 못하고 마무리하려고 든다. 이성임의 '별을 굽는 여자'가 그 예에 속한다. 길거리에서 설탕을 끓여 별 모양을 찍어 파는 여자를 보고 '오글오글 모여 있는 햇살을 끌어안고/온종일 별을 찍어내고 있다'라고, 햇살과 별을 하나의 이미지로 뽑아내는 탁월함을 보여주었으면서도, 그 햇살이 어떻게 세계를 비추고 따뜻하게 하는지를 보려고 하지 않았다. 시란 쓰는 것이 아니고 낳는 것이다. 때문에 회임기간이 있어야 한다.

 

설정환의 '아버지는 둥글다' 외 9편도 기다릴 줄 모르는 면에서는 같다. 시 제목과 같이 인간의 삶은 둥근 것이다. 아버지의 삶도 암탉 수캐 염소 박새 등과 둥글게 굴러간다. 그런데 이 시에서 요구되는 것은 아버지와 암탉 수캐 염소 등이 어떻게 서로 상관하며 굴러가는 가를 형상화했어야 했다. 구체적인 묘사 없이 인간의 삶이 둥글다는 것을 독자들은 수용하지 못한다.

 

정동철의 '아버지 소처럼 말씀하시네'도 인간의 삶이 둥글고 뜨겁다는 것을 그린 작품이다. 눈오는 날 외양간에서 쇠죽을 쑤는 아버지의 모습이나, 아버지를 조금은 쓸쓸하고 따스운 시선으로 보는 아들이나 '느 아부지가 지금 소허구 말씀허신다'는 어머니의 한마디가 함께 둥근 원을 그린다. 사랑이 있는 풍경은 뜨거운 것이고 둥근 것이다. 거기에 시의 진정성이 자리한다. '허공 위에 뜬 집'도 언어들이 절도있고, 시의 보폭도 비유도 적절하다. '허공 위에 뜬 집'과 '아버지 소처럼 말씀하시네' 두편을 당선작으로 뽑는다. 정진하고 정진하기 바란다.

 

심사위원 최하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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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에 물을 준다 / 이선자

돌에 물을 준다

멈춘 것도 같고 늙어 가는 것도 같은

이 조용한 목마름에 물을 준다

이끼 품은 흙 한 덩이 옆으로 옮겨 온

너를 볼 때마다

너를 발견했던 물새우 투명한 그 강가의

밤이슬을 생각하며 내거 먼저 목말라

너에게 물을 준다

나를 건드리고 지나는 것들을 향해 손을 내밀 수도 없었고

뒤돌아 볼수도 없었다 나는 무거웠고 바람은 또 쉽게 지나갔다

움직일 수 없는 내게 바람은 어둠과 빛을 끌어다 주었다

때로 등을 태워 검어지기도 했고 목이 말라 창백해지기도 했다

아무하고도 말을 할수 없을때, 긴꼬챙이 같이 가슴을 뚫고 오는

빗줄기로 먹고살았다 아픔도,

더더구나 외로움 같은 건 나를 지나는

사람들 이야기로만 쓰여졌다 나는 몸을 문질렀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숨소리도 없이 몸을 문질렀다

내 몸에 무늬가 생겼다

으깨진 시간의 무늬 사이로 숨이 나왔다

강가 밤이슬 사라지고

소리 없이 웅크린 기억들이

나를 들여다보고 있다

너의 긴 길이 내 몸 속으로 들어 왔다

멈출 수도, 늙어갈 줄도 모르는

돌 속의 길이

나에게 물을 준다 

[당선소감 ]

언제부터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길 하나 품었다. 그 길은 어두웠다. 많은 사람들은 그 길이 너무 힘든 길이라거나 혹자들은 가보았자 무지개가 없다고도 했다. 그러나 그 길을 가는 사람들의 소리가 귓전을 떠나지 않았다. 사람들의 소리를 따라갔다. 그들의 길이었다. 나의 길을 꿈꿨다. 부엌의 싱크대 앞에서도, 아이들 꽁무니를 졸졸 따르는 부산한 하루 하루를 원망하면서도 나의 길을 꿈꿨다.

희미한 빛도 보이지 않는 길 앞에서 뒤돌아설까 생각도 했다. 그럴 때마다 다른 일을 하는 시간들이 무의미해지려는 것과 싸워야 했다. 시의 길은 나의 무기력과 맞서려는 길이다. 오늘 저녁도 나는 무기력한 길과 시의 길 앞에 망연히 서 있었던가. 아직은 멀었다고, 더 많은 시간을 가야 한다고 스스로 격려하면서 시의 길을 더듬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당선소식을 듣고 난 한참 후에야 어둡던 나의 길이 나타났다. 길 입구에 작은 불빛이 보인다. 불빛이 참으로 반갑다. 그 불빛을 따라 천천히 서두르지 않고 가리라.

불빛이 되어주신 전남일보사와 아직 서툴고 부족한 시를 선해주신 심사위원들께 머리숙여 감사드린다. 광주대 이은봉 교수님과 문예창작과 교수님들께 마음 다해 감사드린다. 힘이 되었던 고재종 선생님 격려 또한 잊을 수 없다. 진정으로 기뻐해주는 문우들과 따뜻한 겨울을 보내고 싶다.

가장 먼저 이 길을 제시했던 친구 또한 잊지 않는다. 그리고 당신의 몸 하나로 칠남매를 키우신 어머니가 생각난다. 늘 큰 사랑으로 품어주기만 하는 셋째 언니, 형제들과 기쁨을 같이 하고 싶다. 누구보다 기뻐할 남편과 아이들, 이 모든 것들 위에 계시는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

 

 

떠리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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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싱싱한 감각^유연한 시상 뛰어나”

예선을 거쳐 올라온 것은 아홉 사람의 시 44편이었다. 그 중에서 이선자씨의 `돌에 물을 준다'를 2005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이선자씨가 응모작품으로 보내온 시는 위의 `돌에 물을 준다' 외에 `비닐봉지', `소리의 집', `잠들지 않는 육교', `그림 속의 물' 등 다섯 편이었고 이 시들의 수준은 거의 균일하였다. 한 사람의 작품 수준이 고르다고 하는 것은 그 시작의 능력에 신뢰감을 가지게 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사물을 끌어들이는 이선자씨의 싱싱한 감각, 어휘의 적절한 절약, 유연하고 자연스러운 시상의 흐름도 장점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신춘문예의 시든 일반적인 시든, 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시의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시적 세계관으로부터 거리가 있는 시각, 지나치게 요설적이어서 부자연스러운 어휘들의 접합은 감동력이 약하다. 시가 아무리 개성의 문학이라고 해도 보편성을 너무 무시하면 요령부득의 암호가 될 수 있다.

최종까지 올라온 작품으로는 구본창씨의 `이 땅에 꽃이 존재하는 또 다른 이유'이다. 사설을 조금만 더 여과하면 좋은 작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문학의 길에 들어서는 이선자씨의 장도를 축하한다. 지금의 열정이 마르지 않도록 간수하면서 정성을 기울여 이끌어가기 바란다.

- 심사위원 이향아 호남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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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강 / 정철웅

 

겨울은 벌써 강으로 내려와 깊어졌다
저녁이 창백한 달 한 장
자작나무 숲에 걸어놓고 내려오면

나는 서둘러 강가로 나간다
영하의 기온이 시퍼런 칼날을 세워
통째로 귓바퀴를 오려내고
정신의 노둔함 속으로 저를 밀어 넣는다
내 안에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것들이
소스라치며 칼날을 피하고
나는 잠시 묵은 현기증을 꺼내어
서서히 달빛이 맑게 걸리는 나무에 기대어 둔다
강 건너 이제 막 눈을 뜬 불빛들이
저녁강의 어스름을 밟고 와
눈을 맞추며 따스함을 건네 온다
저곳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
발걸음이 고단한 곳마다 등불을 밝히면
이 지독한 혹한 속에서도 살아가는 일은 아름다운 것
낮은 불빛 아래 이마를 맞댈 생각이
빨랫줄처럼 그대의 창으로 날아가 매이고
나는 눈물뿐인 그리움을 꺼내 하얗게 널어둔다
저 혹한의 중심을 딛고 나는 건너가리니
고단한 삶의 누추를 단단히 얼리어 벽을 세우고
혹한의 맑음을 재단하여 창을 달아내면
그대의 이마에 징표처럼 돋아나는 분홍빛이여
내 삶의 남루들이 제각기 옷깃을 세우고 걸어가는
밤 깊은 겨울강의 단단한 얼음장 위,
한 무리 푸른 별빛이 쏟아지고 있다.

 

 

[당선소감] “시 통해 사랑하는 법 배워”

 세상을 후회 없이 살아내는 것이라는 것이 내게 다가온 모든 것을 사랑하는 일임을 깨닫고부터는 더더욱 벗어날 수 없는 일이 바로 시를 쓰는 일이었다.
 단 한번, 그것도 잠시 사랑의 달콤함을 맛보게 하고 그것으로 운명의 길을 지적해준 뒤 늘 기다림과 아픔만을 사월의 바람처럼 안겨준 여인처럼, 그렇게 시는 오랜 시간을 허무와 쓸쓸함의 가로등불 밑에서 기다림으로 나를 지치게 하였다.
 문득 그 모든 것이 허무하여 다시는 기다리지 않으리라 가슴을 베고 나면 어느새 한 줄기 담담한 안부를 묻듯 다가서는 도무지 떠나보낼 수 없던 여인처럼 시는 언제나 내 정수리쯤에 머무르다 내 걸음의 모든 방향을 지시하였었다.
 때론 내가 시를 버리지 않았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사실은 시가 한사코 나를 버리지 않았던 것을 안다. 나의 지극한 누추함과 고단함이 지금 나를 지탱하고 있음을 시는 늘 자상한 목소리와 몸짓으로 깨닫게 하였고 나는 어느새 내게 다가온 모든 것들의 한 겹 뒤를 들여다보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나 자신을 들여다보고 내가 가진 것이 얼마나 많은 지도 시는 깨닫게 하였다. 지금 이만큼 걸어온 것이 전적으로 시의 따스한 피톨이 내 몸을 돌고있는 탓임을 잘 안다. 늘 한결같지 못했던 나를 한사코 떠나지 않은 시를 내 남루한 외투 속에 끌어안는다.
 아침 창을 걷고 눈 내리는 나무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내 마음이 눈 속으로 걸어나가 마악 춤을 추려는데 당선을 알리는 전화가 공중을 가르고 내 낮은 방에 폭죽을 터뜨렸다.
 천지의 눈발로 퍼져나간 폭죽의 불꽃 아래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몰려나와 웃고 있었다. 그들이 함께 견디어 온 시간들에 감사드리고 싶다. 그리고 보잘 것 없는 작품을 뽑아 세상에 내보내주신 전남일보사와 심사위원님께 깊은 감사를 올린다.
 이제 정말 먼지 낀 창문을 깨끗이 닦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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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휴머니티 담은 서정성 강점”

 예심을 통과한 여러 작품 가운데서 최종까지 올라온 작품은, 정철웅씨의 `겨울강' 외 2편과 최혜경씨의 `헬로우 게바라' 외 4편이다.
 작품을 통하여 파악할 수 있는 두 사람의 공통점이라고 한다면 오랜 동안 시를 가까이 한 사람이라는 점, 그런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좋은 솜씨를 발휘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응모한 3편 혹은 5편의 작품들은 고른 수준을 유지하면서 자기 나름의 세계를 견지하고 있다.
 두 사람을 놓고 고민하다가 정철웅씨의 `겨울강'을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최혜경씨는 무거운 소재도 밝게 소화해내면서 어휘와 리듬이 조성하는 즐거움을 맛보게 한다. `바람이 세월세월하고 울'며(`갈대의 허리'), 여린 `순이 쿨렁쿨렁 자라고'(`순(筍)의 숨'), `우주의 등이 뻐끔뻐끔 빛을 피'우며(`목상(木像'), `실타래 같은 말이 샤갈샤갈 하고 내리는 밤'(`눈내리는 밤')이라고 최혜경씨는 노래한다.
 독창적인 의성어와 의태어를 발견하여 그 미감에 빠지는 것은 시인이 아니고는 어렵다. 그러나 장점도 승하면 단점이 될 수도 있으니, 낙천적인 해석이 시를 오히려 가볍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정철웅씨의 `겨울강', `눈내리는 저녁', `내 마음의 풍경'은 제목들이 시사하는 것처럼 서정성이 주도하는 작품들이다.
 시의 본질이 서정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문학사의 한 편에서는 의도적으로 비서정을 표방하면서 새로운 현대시를 모색하는 실험적 작업들이 활발하게 진행되어 왔다.
 그 와중에서 서정시는 구태와 진부의 징표인 것처럼 여기는 시각도 만만치 않으며, 그것이 일변도의 대책 없는 단순서정으로 계속될 때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정철웅씨의 서정성은 휴머니티의 또다른 이름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관류하는 서정을 조율하고 절제하면서 타자와 세계를 수용하며, 비정적 현실의 중심에 서서 서정을 그리워하기도 한다.
 한편, 절제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거기 경도되어 있거나 그쪽으로 쏠리기 쉽다는 말도 된다는 것을 유념했으면 한다. 정철웅씨의 장도를 진심으로 축하한다. 이제 행장을 수습하고 결코 수월치만은 않은 시의 전정, 그 길로 매진하기 바란다.

- 심사위원 이향아 〈시인호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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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 병어젓 / 박옥영


1
 이 새 저 새 해도 먹새가 으뜸이라
 고흥 진석화
 낙월도 백하 영암 모치젓
 강진 꼴두기 함평 병어젓
 푸욱푹 삭아
 짭짤하게 간이 들어도
 바다를 끼고 사는 제 어미 품속에 자라서
 입맛이 다 다른 법이라

2
 오늘이 벌써 칠일이니
 설장이 서겠네
 한창 병어젓, 엽삭젓 맛이 들겠네
 칼칼한 겨울비 내리는 장터
 해 지기 전부터 장작불 지필 것이네
 평생 보따리 챙겨들고 살아
 더러 모나고 휘어졌지만 억척스레 살아남은 얼굴들
 온 나절 선짓국 설설 끓다
 병어젓 한 쪽지에 간 맞추며
 훌훌 막걸리 들이켜 불을 쬘 것이네
 파장한 시장 모퉁이
 구구절절 마지막까지 지키고 서서
 수더분한 손매로 몇 십 번 손을 잡았을
 온갖 자식자랑 늘어놓는 목숨들
 아, 설 대목 바쁜 틈에도
 짭짤한 겨울비 내리고
 장바닥 여기저기 퍼 놓은 장국냄새
 아직 그리움 버리지 않았을 게고
 오랜 근심에 삭아 골골한 할머니 무릎 앞
 비좁은 틈새로 꾸역꾸역 파고 들어와
 갖은 흥정에도 저렇듯 넉살좋은 병어새끼들
 아직 싱싱하니 설 밑천이 되겠네
 철퍼덕 앉은 병어 몇 마리
 인사성 밝은 뉘 집 새끼 만나자
 도톰한 손바닥들 탁탁 치며
 금방이라도 팔딱 뛰어오를 듯 뛰어오를 듯

3
 비 오는 함평장터
 입심 좋게 타던 장작은
 삭아들수록 옹골찬 불담이 되고 함평 병어젓은
 뼈마디 살점 하나 하나
 푸욱푹 삭아야 제 맛이지
 겨울엔 더러 비가 내려야 제 맛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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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30대 중반 이상의 응모자가 많아서인지 전체적으로 젊고 참신한 시보다는 삶에서 얻어진 경험이나 깨달음을 담담하게 풀어내는 시들이 주조를 이루었다.
 발상과 표현의 탄력성이 약한 대신 차분하고 진솔한 어법을 보여주는 시들의 미덕이 나름대로 있기는 하지만, 신인을 발굴하는 신춘문예에서 이런 현상이 그리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본심에 올라온 시들 중에서 최종적으로 선자의 손에 남겨진 것은 박옥영, 김희철, 이지담, 장민하, 김영기의 시였다.
 김희철의 시는 묘사 속에 서사를 녹여 넣어서 인상적인 이미지들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지나친 생략이나 비약이 시의 서사적 구조를 모호하게 만들고, 전체적인 의미보다 부분적인 언어를 다듬는 데 공력을 들이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이지담의 시는 생활 속에서 소재를 찾아 시상을 차분하게 이끌어가는 힘이 있지만, 다소 작위적이고 어색한 표현이 종종 눈에 띈다. 주관적인 의미 부여가 좀더 보편성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
 장민하의 시는 어조가 활달하고 생동감이 느껴지는 게 특장이지만, 산만하게 흩어져 있는 시상을 좀더 압축하고 정제했으면 좋겠다. 김영기의 시는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이 만나 삐걱거리는 내면의 풍경을 보여준다. 그 삐걱거림을 더 깊이 내면화하면서 문학적 수련을 충분히 해나갔으면 한다.
 당선작으로 뽑힌 박옥영의 `함평 병어젓'은 향토적 정감과 자연스러운 입담으로 설 대목의 장날 풍경을 맛깔나게 그려내고 있다.
 이 시에서 푸욱 삭아 제맛을 내는 것은 함평 병어젓만이 아니다. 시장에 목숨을 붙이고 살아 숨쉬는 모든 존재들이 함께 부대끼는 모습은 아름답고 훈훈하다. 그러나 성찰적인 성격이 강한 다른 시들에서 깨달음이 너무 직설적으로 표현되거나 모호한 관념에 머무르고 있는 시구들이 발견되곤 한다.
 일정한 상투형에 따라 시를 의도적으로 만들기보다 시적 대상이 지니고 있는 고유한 숨결과 리듬을 살려낸다면, 그의 시가 좀더 새로워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번 당선이 그런 거듭남의 계기가 되기를 바라면서 축하의 인사를 드린다.

나희덕 (시인 조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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