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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인의 죽음 / 박성민

 

1
변두리 허름한 헌책방
먼지를 푹 뒤집어 쓴
시집 한권 툭툭 털며 읽는다
여성지와 중학교 문제집 사이에 꽂혀있는
시인 박정만
〈그대에게 가는 길〉 유고시집
기필코 한 주먹만 더 살아야겠다던
시인의 시집
靈肉을 짜내 쓴 시인의 피울음이
곰팡이로 앉아 있는 시집 속
시인의 눈은 눈물겹게도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헌책방 나와 낮술 마시며
시인이 응시하던 하늘을 보았다
타다 남은 연탄 같은 여름 해 아래
질식할 것 같은
어떤 삶의 원형을

2
죽음이란 결국 무엇인가
밀려 떨어지는 톱밥처럼 우울하게
이 땅에서 시인의 죽음은
이래도 되는 것일까
정육점 쇠꼬챙이에 걸린
고기 덩어리 같은
아아, 시의 살과 피

3
짙은, 먹빛으로, 빠르게, 번지는, 구름떼
불현듯, 쏟아지는
장대비 (아아, 저 쇠창살, 쇠창살)

 

 

 

 

어쩌자고 그대는 먼 곳에 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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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20대의 시기에 시는 저의 전부였고 삶의 버팀목이었습니다. 한 줄의 시구로 고민하고 날을 지새우며 쓰고 또 쓰고, 신춘문예에 응모하여 그 때마다 쓰라린 잔을 마셨습니다. 납으로 만든 날개를 달고 태양근처까지 간 이카루스가 녹아버린 납덩이 때문에 추락하듯이, 항상 부풀었던 꿈은 이내 녹아 내렸고 추락은 저의 몫이었습니다. 한동안은 시와 전혀 관련 없는 일에 6년여를 매달리기도 했고 시 쓰는 일을 잊고자 노력하기도 했지만, 어느 날 문득 눈 떠보니 거울 속에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 얼굴 하나가 저를 보고 있었습니다.

20대 때의 열정과 패기가 다 사라진,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살아져 가고 있는, 거울 속 사내가 저라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습니다. 다시 펜을 잡고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은 돼지가 아니어서 불행하다는 李箱의 말처럼…. 먼 길을 돌아 왔지만 다시 돌아온 이 길을 이젠 곁눈질하지 않고 똑바로 갈렵니다. 저로 인하여 상처 받았을 분들께 죄송스러운 마음입니다.

창 밖을 보니 불 밝힌 가로등 주변으로 모여드는 눈이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더 많은 눈들은 쓸쓸히 어둠 속에서 흩날리고 있음을 잘 압니다. 가로등 바깥, 어둠 속에서 쓸쓸히 내리는 눈 같은 저의 부끄러운 시를 읽어주신 전남일보사와 심사위원님께 고개 숙여 감사 드립니다. 이제부터라는 생각으로 더욱 열심히 쓰겠습니다.

저의 정신적 지주이신 아버님과 대학시절 제 시의 토양을 내려 주신 허형만 시인님께 감사드립니다. 광기에 가까운 열정으로 시를 썼던 풀잎문학 식구들과 작가회의의 고마운 분들 이름이 떠오릅니다. 제 몸 태우지 않고는 익지 못하는 군고구마처럼 좋은 시를 쓰기 위해 뜨겁게 익어가렵니다.

 

 

 

숲을 금으로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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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본심에 올라온 14편 중 최종까지 관심을 끌었던 작품은 `황야에서 정거' `어느 시인의 죽음', `햇살, 종합병원 62병동' 등 3편이었다. 심사 관점은 시는 첫째 무엇보다 정서 반응의 언어고, 지극히 사적이고 고백적인 언어란 점, 둘째는 이에 따른 언어 미학의 성취도, 셋째는 한 시대를 관통하고 있는 시인의 정체성(정신)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점, 넷째는 따뜻한 구원의식을 지니고 있는가 하는 관점이었다.


`황야에서 정거'는 시적 상황과 응축, 묘사 기법에 개성이 돋보였으며, `햇살, 종합병원 62병동'은 비록 서툴고 산만한 언어의 조탁 능력에도 불구하고 자기 구원의식이 충만한 따뜻한 작품이었다.

 

`어느 시인의 죽음'은 `황야에서 정거'가 놓치고 있는 자기 정체성의 확인, 그리고 `햇살, 종합병원 62병동'이 놓치고 있는 언어의 조탁 능력 등이 동시에 극복되었다는 점에서 당선작으로 밀었다.


`죽음이란 결국 무엇인가'라는 유통 언어의 상투적 시행이 거슬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적 긴장미가 시종일관 팽팽하게 유지되고 있어 감동적 체험이 뒷받침 되었다는 점도 밝혀둔다. 더욱 정진하기 바라며 당선을 축하한다.


송수권 시인, 순천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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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은 길을 묻지 않는다 / 정경이


우항리에서

그곳에 가면 싱싱한 그리움의 지느러미를 달고 있는 발자국을 신어 볼 수 있다 따뜻한 햇살이 발등을 콕콕 쪼는 해변을 따라 달려가다 보면 손톱만한 꽃들이 까르르르 하얀 웃음 흩뿌리고 갈대들이 뒷걸음질치며 다정하게 손 흔드는 호숫가, 생기 넘치는 풍경들은 여러 장의 궁금증을 복사한다 궁금증을 살짝 들추면 잔물결이 발을 간지럽히는데도 웃음을 참고 발자국 걸어나온다 그런데 누가 저렇게 헐렁한 신발을 신고 다녔을까
바위에 박힌 발자국은 서로 부서지지 않기 위해 촘촘히 껴안고 있다 1억년이 넘도록 흐트러 지지 않은 발자국의 깊이만큼 두꺼운 사랑, 껴안고 돌이 된 채로 백열등 만한 심장을 찾아 환하게 불 밝히고 있을 심장을 찾아 헤맸는지도 모른다 때론 누울 곳 없는 정신 툭하면 집 을 나갔을 것이고. 발자국은 그렇게 호수가 되고 바다가 되고 바위가 되고 다시 길이 되어 1억년 밖으로 나섰는데 생각해보면 나는 참 어수선한 길을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 다 화석처럼 박힌 관습의 발자국들을 정신없이 좇아 다녔을 뿐
슬그머니 신발을 벗고 발자국 신어 본다 지금껏 내 발등을 밟고 있던 발자국 하나 얼른 벗 어 놓고 도망치듯 빠져 나오는데 깨금발로 따라오는 커다란 발자국 나도 깨금발로 걷고 있 다 우항리를 벗어 날 때쯤 나의 걸음은 경쾌하고 길도 신발을 신고 내 팔짱을 낀다


*우항리: 전남 해남군 황산면 우항리 공룡발자국화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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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속의 길 / 정시우


달이 거리에 얼어 있다
제 속으로 깊어지는 달을 걸으며
금남로를 유영하는 눈(目)
쩡, 하고 금가는 소리에 하늘을 본다
낮달이다
반은 어디론가 숨고 반은 낮에도 눈빛이 형형하다

거리를 기웃거리며 보이지 않는 달의 반을 찾는다. 사람들은 퇴적암처럼 층층이 시간을 딛 고 있는 멀티비전 속 공룡과 자동차, 사라진 시대와 사라질 시대가 손 잡는 것을 본다. 눈이 자꾸 지상으로 가라앉고, 균열진 콘크리트 틈새에서 오롯이 자라나서 말라가던 꽃대는 허물 을 벗는다. 나는 본다. 걸을수록 낯선 거리, 부유하는 열망들 사이, 만지면 부스러질 것 같은 얼굴로 눈사람처럼 뭉쳐져서 겨울을 건너고 있는 맹인의 적선 바구니에 어린 손가락이 넣는 동전 하나를. 한낮에 교감하는 해와 달의 빛에 반짝 환해지는 눈사람. 어린 손가락이 보이지 않는 달의 반쪽을 감싸고 있다.

가끔씩 아이들이 근접하는 하늘
달의 길이 사람의 길에 닿을 때
지구가 잠깐 자전을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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