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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방의 긍정 / 오후랑

 

 

나의 낮은 열두 시간 더하기 열두 시간 꺼지지 않는 낮은 좀 우울 했어요 내 표정을 보고 웃는 것을 본 적이 없어요 꽃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므로 그건 예외이고요

 

그래요 꽃 말고도 내게 향해줄 것을 찾다가 지난밤을 밤이 아닌 것처럼 꼴딱 샌 거죠 불어터진 라면발 같이 풀어진 졸음과 갓 삶은 계란처럼 뜨거운 열정이 마구 섞여 골라낼 이유 없는 은밀한 밤의 계단을 지나면

 

요란한 풀밭이 나와요 나는 투명 수채화처럼 색칠됐고요 겨드랑이가 부서질 듯이 날아봤어요 거친 붓칠 같은 숨결들이 빙빙 돌며 나의 길을 더 어지러이 파닥이게 하는 그런 일탈

 

 

조명발 좀 받아 보자고요 하룻밤쯤 멋진 이름으로 개명하고 싶어요 가령 별이라든가 주머니라든가 물론 작명소에 들러야죠 아핫 아버지 아시면

 

날갯죽지 확 꺾어 버리고 호적 파버린다 하실 텐데

 

괜찮아요 이미 얼굴을 다 잊어버린 이름들과 꽃 같은 조명 밑에 납작 엎드려 본 것이나 나선으로 머리를 흔들어대며 다 드러난 나를 외워댔던 일이나 또 너무 멀어 다시 올 리 없는 환각의 벽에 아주 시원하게 박치기를 해봐서

 

무서운 게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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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내가 쓴 시, 다른 사람이 읽어도 시가 맞는지 궁금”

 

폭설주의보가 내렸고 저는 기차를 타고 있습니다. 노트북 화면이 하얗고 고개 들어 창밖을 내다보면 세상이 하얗습니다. 그리고 제 머릿속도 하얘서 도대체 무슨 말을 써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환함이 도처에 깔려있네요.

 

어둠을 무서워합니다. 어둠이 무서워 불을 환히 켜놓는 것을 좋아합니다. 밤을 새워 일을 해야 할 때가 있었는데 건물 밖 나트륨 등 아래에 앉아 잠시 쉬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회사 뒤에 숲이 있었는데 숲에 사는 것들이 밤마다 불빛 아래 모이곤 하였습니다. 혼자가 아니구나. 혼자가 아님에 위로 받는 것으로 어둠을 지우고 싶어서 잠을 잘 때도 불을 켜고 잤습니다. 참 이기적이지요. 나의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내가 아닌 것들을 소모시켰던 겁니다.

 

시를 읽고 싶어서 내가 읽는 시를 제대로 읽는지 알고 싶어서 자꾸만 시를 읽었습니다. 시를 읽다보니 시를 쓰고 싶어졌습니다. 쓰긴 했는데 내가 쓴 시를 남들이 읽어도 시가 맞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당선소감을 쓰고 있습니다. 시가 완성이 되어서 그런 것이라 생각하지 않아요. 시가 될법한 지점에 있는 것을 뽑아 주신 거라 생각합니다.

 

도망가는 시를 붙잡지 못할 때가 많은데, 더 써보라고 저를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가능성을 봐주셔서 기쁩니다.

 

묵묵히 지지해준 경석, 바하 그리고 성미자, 김안심 여사님 사랑합니다. 격려해주고 열심히 읽어준 니건, 은실, 지선 그리고 오총사 사랑해. 고맙습니다.

 

 

 

 

[심사평] “참신한 발상 안정적으로 끌어가는 솜씨 일품”

 

본심에 올라온 일곱 분의 작품에서 먼저 네 분의 작품을 가려 뽑았다. 김태춘의 시는 빛나는 문장이 있었다. “자고나면 아이들이 사라지는 거야/바보 같은 바나나가 범인이라니” 같은 구절은 낯설고 참신하다. 오후랑의 시는 참신한 발상을 끌어가는 솜씨가 일품이었으며 언어유희나 은유와 상징 사용에도 능했다.

 

이은정은 어떤 것이 시가 되는지는 알고 있다. 특히 ‘낙하’에서 화자의 불안한 심리를 “한꺼번에 실려 온 걸음 같아/난간에 부딪히는 발소리”로 표현한 대목이 좋았다. 김혜윰의 시는 특히 “수술실로 들어가는 사람의 마지막 손을 놓친 듯/나의 목소리는 끝까지 잠기고 있습니다” 같은 구절엔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이 중 두 사람으로 선택지를 줄이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은정은 어떤 발견과 인식이 자기만의 개성에 이르지 못했다. 반전이나 재해석 없는 나열은 독자에게 감동을 줄 수 없다. 김혜윰의 시는 이미지나 진술들이 파편화 되었다는 점이 약점이었고, 시상을 끝까지 전개해 가는 힘이 약했다.

 

김태춘은 시적인 문장을 구사할 줄 알았고, 시적 감수성이 좋았다. 다만 “대상 없는 저주가 술병에 쌓이고 우리는 불판 위에서 자폭 한다” 같은 문장은 독자가 공감하기 어려웠고, “먼지 자욱한 광고가 끌고 가는 늘어진 시간” 같은 경우에도 관념을 사물화 한 점은 좋았으나, ‘광고가 끌고’에서 ‘끌고’에 의문표를 붙일 수밖에 없었다. 자기 문장의 옥석을 가려 더 밀도 높은 시를 써낸다면, 빛나는 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오후랑의 ‘나방의 긍정’을 당선작으로 뽑는다. 어떤 작품을 뽑아도 좋을 만큼 수준이 골랐다는 점에 신뢰가 갔다. 특히 “조명발 좀 받아 보자고요 하룻밤쯤 멋진 이름으로 개명하고 싶어요” 같은 엉뚱해 보이는 진술이 시적 일관성 속에서 살아있다는 게 돋보였다.

 

- 심사위원 : 이대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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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퇴 / 강희정

 

 

드르륵 교실문 열리는 소리

 

슨상님 야가 아침만 되믄

밥상머리에서 빗질을 했산단 말이요

긴 머리카락 짜르라 해도 안 짜르고

구신이 밥 달라 한 것도 아니고

참말로 아침마다 뭔 짓인지 모르것어라

 

킥킥 입을 가리고 웃어 대는 책상들

아버지는 한 말 또 하고 한 말 또 하고

낮술이 뺀질뺀질 빨갛게 웃고 있는

4교시 수업 시간

 

덩달아 붉어진 내 얼굴은 밖으로만

내달리고 싶어

 

아버님 살펴가세요 어서가세요

얘들아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일찍 점심 먹고 운동장 나가 놀아라

나보다 먼저 교실 밖으로 나가버린 선생님

 

달걀 프라이가 들국화처럼 피어 있는

생일 도시락이

아버지 손을 잡고 산들산들 집으로 걸어간다

 

 

 

 

[당선소감] “시의 길에선 남과 다른 내가 더 나일 수 있다

 

눈을 가리고 귀를 닫았다. 의지가 개입할 겨를이 없이 바깥을 향해 열린 모든 세포를 걸어 잠갔다. 물속에 오랫동안 잠겨 있었다.

 

정지된 시간을 다독여 수면 위로 올라와 녹슨 세포를 깨우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갇혀 있던 감각 촉수가 언어와 결합하며 나를 한 걸음씩 움직이게 했다.

 

기억처럼 지워졌다가 되살아난 진실이 시어가 되어 꿈틀거린다. 하얀 종이 위에서 먹고 마시고 잠이 든다.

 

행복과 불행이 서로 곁눈질하면서 달린다. 이 둘에게서 언제나 허둥대지만, 그래도 나는 나아간다. 시와 사랑을 향해. 세상을 향해...

 

시의 길에서는 남들과 다름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큰 위안이 됩니다. 다르니 내가 더 나일 수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광주일보와 이병률 시인께 감사드립니다. 서울디지털대학교 이재무, 오봉옥 교수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정윤천, 이대흠 시인님께 감사드리고 첫눈 시빚기반 회원들, 시를 향해 탄탄한 근육을 보여준 선배 시인들과 기쁨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작년과 올해 바삐 곁을 떠나신 부모님께 영예를 안겨 드립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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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쨍하고도 명징한 시, 탁한 세상에 차려놓는 기쁨

 

시가 반드시 고통을 통과한 형태의 무엇은 아닐 것이다. 번민과 고뇌를 통과한 흔적을 날것의 형태로 그려 놓을 필요는 어디에도 없다. 꼭 그래야 하는 것처럼 누구나 쓸 수 있을 것 같은 시라거나 더군다나 그 누구도 홀릴 수 없는 시라면 신춘문예 같은 공모에선 감점법으로 접근하게 된다. 장점이 충분한 작품을 두고 고민을 했다.

 

진영심의 꾸미지오 미용실은 제목부터 즐거운 이야기의 향을 품고 있는 것 같아 여러번 읽게 되었다. 잘려나가는 머리카락을 바늘에 비유했다는 사실에 일단 선자는 놀랐다. 하지만 바늘을 연상하고 바늘귀까지 끌어와 착상에 성공했다면 바늘귀에 뭐라도 꿰어야 하는데 그것이 빠진 채 후루룩 시를 맺고 말았다.

 

결국 강희정의 조퇴를 당선작으로 선한다.

 

새해에 여는 시 한 편으로서의 자격과 미덕을 찾자면 단연 양명함이었다.

 

동시(童詩)의 마스크를 쓴 시라고 가볍게 평할 수 있겠으나 이 시의 아름다움은 시 속에서 자기 자신이 들어갈 자리를 과감할 정도로 배제시키는 능력으로 완성도를 일으켰고 그것은 어떻게든 자신을 과잉하게 드러내려는 수많은 응모작들 속에서 분명한 빛을 발하는 지점이기도 하였다. 멋진 다이빙이었다. 쨍하고도 명징한 시 한 편을 골라 탁한 세상의 공기에 차려놓는 기쁨이 나만의 것이 아니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이병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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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다 잊어버리자 잊혀지거나 등등 / 이서영 

 

 

고유의 방식으로 꿈은 형태를 지운다 처음부터 순서대로 지우개로 지우는 것과 다르게 아무데서나 지우고 싶은 것부터 지운다 깨끗하게는 아니고 주변을 쓱쓱 뭉텅뭉텅 어떤 부분은 둥근 빵덩어리로 보이다 만지려 하면 밀가루처럼 아늑해져서 모양이 참 막연해져서 무엇이었더라 말할 수 없게 한다 어떤 수업을 들었는데 어떤 칭찬을 받았는데 무어라 말할 수 없다 뭐였더라 그것은 안개처럼 잡히지 않는 희미함 무게도 감촉도 없지만 분명 거기 있는 알갱이들 나는 안개로 건물을 짓고 지붕을 뚫은 철근을 보고 낙서가 적힌 흑판을 본다 내 편이 아닌 사람들과 일을 하다 싸움이 나고 또 금방 화해한다 맥락에 관여하지 않는 사람들과 내기를 하고 나는 지략을 세워 크게 승리한다 다만 칭찬이 무엇의 결과였는지 명확치 않다

 

 

 

 

[당선소감] “내 여물지 못한 아픔 선별해주신 분께 감사”

 

자기 전에 발바닥에 바셀린을 발라두었는데 밤새 신발도 없이 어디를 헤맨 것처럼 발바닥이 아팠다. 깨어나 보면 또 아무렇지 않았다.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없었던 건 아니겠지. 내가 헤맸을 골목들 어둠들…. 오랫동안 만진 생각이 있었다. 조금씩 수정하면서 눕거나 앉거나 습관에 기대어 조금씩 변경하면서. 대부분 좋지 않거나 쓸모없어서 버리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그 밖의 용도에 대해서 생각했다. 차마 말하지 못했던 것, 용도보다 훨씬 앞선 것, 거기 있을 뿐이라는 듯. 커튼이 항상 묶여 있는 것처럼,

시를 썼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라는 주문을 언제부터 받았던가. 나를 넘어서기 위해 조금만 더 해야 한다는데 난 그 조금만 더를 어찌해야 하는 것인지 손도 못대고. 어쩌면 조금만 더는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일지도 몰라. 죽을 때까지 조금만 더 하기 위해 애쓰고 있으면 어쩌나, 나는 정말 어쩌나, 이 가여운 나는, 어디로 사라지고 누가 와야 이 습관의 나는 대체되는 것일까,

당선 소식을 들었다. 나의 밤들이 말들이 그것인 채로 당선 소식을 들었다.

그래, 시를 더 써보겠느냐고, 마치 꿈처럼 연락이 왔다. 다른 호흡 다른 표정 한 번도 본 적 없는 환영 같은 불확실감에 휩싸여 당선 소식을 들었다. 내 여물지 못한 아픔을 선별해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린다. 시로 이어져 긴 시간의 터널을 함께 걸어온 ‘생오지문예창작촌’, ‘시가 흐르는 행복학교’ 문우들과 이 영광을 함께 하고 싶다. 늘 격려해주시고 기다려주셨던 박순원 교수님, 김성철 교수님, 유홍준 선생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나의 엄마, 어머님, 이 기쁨은 온전히 두 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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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일상의 감각 잡아채려는 의지 돋보여”

 

한 해를 정리하는 자리에서 우리들의 언어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한 해 동안 내면으로부터 쉼 없이 길어 올린 언어들을 대면하는 일은 축제 같았다. 자신들만의 목소리로 삶의 투쟁을 지속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경이로웠다. 시는 삶의 어떤 형식이기 때문이다. 그 언어 형식 안에는 삶의 여러 단면들을 통해 즐겁거나 기쁘고, 아름답거나 시린 우리네 조용한 비명들이 녹음되어 있었다.

이번 광주일보 신춘문예에 응모된 시들 중에는 ‘사람과 언어가 만나 전류를 만들어내는 작품’들을 여럿 만날 수 있어 숨이 찼다.

최종심에 오른 작품 가운데 현이령은 조근조근하고 잔잔해서 뭔가 있을 듯하여 아주 여러 번을 읽지만 결국 분위기만 읽혔다. 김완두는 발랄함과 특이한 시선이 개성이 무기인 듯하지만 의외성과 유아적인 밑그림을 받치고 있는 것은 허무함이었다. 김영숙의 시는 일상적이며 사변적인 틀에 걸려 시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홍여니는 읽는 이를 의식하지 않고 혼자서만 달리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

마지막까지 내 손을 떠나지 않은 건 이서영과 엄경은의 시. 이서영의 ‘뭉클’과 ‘잊다 잊어버리자 잊혀지거나 등등’을 집중적으로 읽었다. ‘뭉클’은 선명해서 맑게 다가온다. ‘잊다…’는 숨기면서, 드러내면서, 은밀하게 직조되어 있다. 또한 특유의 건조함이 세련된 미학을 만들고 있다. 엄경은의 ‘기본과 기분’은 무엇이 시로 탄생되는지를 잘 아는 숙련된 예비 시인의 작품이라 감탄했다. 하지만 ‘기본’에 대해 잘 그려내고 있다가 ‘기분’을 언급하면서 맺는 한 줄이 시 전체를 단번에 파괴하는 느낌이었다.

이서영의 ‘잊다 잊어버리자 잊혀지거나 등등’을 당선작으로 뽑는다. 자칫 흘러버리기 쉬운 일상의 감각을 잡아채려는 의지와 선명하지 않은 자신의 내면을 환대하는 방식으로 그려낸 화법이 아름다웠다. 당선을 축하하며 칙칙하기만 한 세상에 더 많은 울림들을 차려놓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이병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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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은 몇 겹의 하늘을 깨고 달아나는지 / 선혜경

 

 

그런 걸 뭐하러 세어두고 있겠어,
당신은 꿈에서도 폭우가 내린다는 사실을 모르나봐요, 창틀을 베고 누운 당신도 닫힌 서랍보다 늦게 눅눅해지는데

궁금해
그런 날의 당신은
그림자 대신 검은 석유를 품고 다녔는지

그런 날의 빗방울에게서
풍경의 심장이 뚝뚝 떨어져 나갈 때
벌려둔 손가락 마디마디가 아팠는지

새벽의 혀를 길게 베어 문 촛불처럼
가장 빨리 죽는 건 악몽이라 믿으며


밤새 얼얼하게 녹아내리는 것들은 모두
내일의 미아가 되어 버리기를

품,
이라 발음하면
옅어진 등불에 팔다리가 생겼는지

촛농이 굳어버린 하늘을 정면으로 마주치며
빛에 익사하길 바랐다

상처투성이의 손금을 털어내려고
손바닥을 자꾸만 흔들어도

온통 웅덩이였다

모르는 사람의 초상을 여기저기 그리고 다녔다

 

 

 

 

2020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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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아무것도 몰랐던 열다섯 살처럼 다시 시작”

 

무언가 말하고 싶은데 단어가 기억나지 않을 때 저는 시를 썼습니다. 내내 온몸이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어요. 여러 편을 써도 이런 마음이 가시질 않았고, 제발 떠나가라 기도하며 시를 오랫동안 붙잡고 있었습니다. 항상 마음은 언어보다 앞섰고 나는 걔를 따라갈 수 없었거든요. 그러다보니 시만큼은 제일 잘 알고 계속 내 곁에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러던 와중 당선 전화를 받게 됐습니다.

기쁘다기 보단 두려운 마음이 먼저 들었어요. 늘 곁에 있었던 시가 갑자기 처음 보는 사람처럼 느껴졌어요. 나는 시와 다시 통성명하고 친해질 수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들로 잠도 편히 못 잤던 것 같습니다.

쓸모없는 일이라면 아무거나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며칠 동안을 몰두하고 있었는데, 닭살 돋듯이 간지러운 기분이 또다시 들기 시작했어요. 그때 생각했습니다. 한 번 더 막무가내로 시랑 친해져봐야겠다고. 아마 저는 내일도 무언가를 끄적거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무것도 몰랐던 열다섯 살처럼 다시 시작해보고 싶어요.

제가 썼던 시마다 아낌없이 칭찬만 해주셨던 나희덕 선생님 감사하고 보고 싶어요. 올 한 해 동안 자신의 시처럼 퇴고 방향을 같이 고민해주셨던 안희연 교수님 감사해요. 지겹도록 내 시를 계속해서 읽어주었던 서연이와 늘 옆에서 응원해줬던 도영이 사랑해요. 그리고 짧은 시간에도 많은 조언 해주셨던 조선대 문창과 교수님들, 문창과 시 스터디, 당선 소식을 기뻐해준 부모님도 감사하다는 말 전하고 싶어요.

이제 제 인생에 있어서 시는 빠질 수 없는 존재인 것 같아요. 약간은 두렵고 설레는 마음으로 내일을 써보려고 합니다.

 

 

 

 

[심사평] 지나칠수 없는 골똘함, 명랑한 머뭇거림의 미학

 

최종적으로 살펴본 작품은 ‘보성댁 출항기’, ‘스타킹을 신고’, ‘등뼈 해장국’, ‘빗방울은 몇 겹의 하늘을 깨고 달아나는지’, ‘양귀비와 사귀다’, ‘아버지의 창고’ 등의 원고를 보낸 여섯 분의 작품이었다. 금년 신춘문예 투고 작품들은 이미지를 위주로 한 작품보다는 말하기 방식에 기댄 작품이 많았다.

‘보성댁 출항기’를 쓴 이는 시 쓰는 솜씨가 안정되어 있으나, 자기만의 어법이 없다. ‘스타킹을 신고’의 투고자는 ‘현재의 기억은 늘 과거의 기억에 불친절 해’ 같은 구절이 빛나지만, 몇 군데 시상 전개가 자연스럽지 않은 점이 걸린다. ‘등뼈해장국’의 경우에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솜씨가 좋으나, 상상력에 새로움이 없다.

시는 모범 답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모든 답지를 지우고 난 후에 새로 쓴 한 줄의 고민 속에 있다. ‘양귀비와 사귀다’의 투고자는 구어체 활용 능력이 뛰어나고, 시상을 낯설게 전개하는 솜씨는 좋으나, 작위적 수사가 많다.

‘아버지의 창고’를 투고한 이는 사투리를 굴리는 솜씨가 일품이다. 그러나 시는 일상에서 주고받는 말을 그대로 옮긴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고민 끝에 ‘빗방울은 몇 겹의 하늘을 깨고 달아나는지’ 외 2편을 투고한 선혜경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는다.

선씨의 작품은 표면적으로 읽으면 시어의 의미가 선명히 다가오지 않는다. 그 점이 씨의 약점일수도 있겠다. 그러나 문장과 문장 사이에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골똘함, 명랑한 머뭇거림이 있다. 속도 위주의 세상에 이런 느림 하나가 있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선씨의 손을 들어준다.

- 심사위원 이대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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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릉 / 강대선

 

 

아가미를 버들가지에 꿰인 메기가 탁자에 앉아 있다


딸려온 물빛이 거무스름하다


물내가 전부였을 것 같은 저 입으로

뻐끔거리는 허공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고향을 바라보려는 듯 눈을 부라린다 수염은 그가 한 마을의 유지였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구릉이 실은 고분이었다는 구깃구깃한 신문기사가 메기 앞에 놓인다

고분에는 왕이었을 어쩌면 한 고을의 유지였을 사람의 뼈와 금으로 된 장신구가 신발과 나란히 앉아 있었다고 한다

신발이 수염이었을까

구릉 속으로 유영을 하는 메기가 버들가지를 빠져 나온다

한 때는 잘 나갔던 기억으로 살아온 주인장이 하품을 한다 눈물이 찔끔거리는 메기가 끓는 탕 속으로 몸을 던진다 구릉은 왠지 메기의 잘 나가던 한 때처럼 쓸쓸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신발처럼 남겨진 버들가지를 허공으로 보내준다

한 번은 어디론가 훨훨 날아보고 싶었다는

아버지의 遺志였다

 

 

 

 

햇살 한 까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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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시가 내게 자유를 줬지만 어깨는 무거워졌다”

 

원고를 보내지 못하고 며칠을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바라봄의 시간 동안 문득 시들이 갇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너무 안에만 가둬 둔 것이었을까.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다시 시를 썼습니다. 그리고 시를 보냈습니다. 그렇게 날아간 시는 당선 소식을 물고 돌아왔습니다. 날개가 가벼워졌습니다. 내가 시를 쓴 것이 아니라 시가 나를 쓴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저도 조금 더 가벼워져서 날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가 저에게 자유를 준 것입니다.

당선의 기쁨을 주신 심사위원님과 광주일보에 감사를 드립니다. 시와 함께 한 시간은 매 시간이 고통스럽지만 기쁨이었습니다. 허형만 은사님과 정윤천 교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시의 열정으로 가득한 지송시회, 시빚기반 식구들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함께 한 시간들 속에서 제 시는 태어났습니다. 사랑하는 제자들과 이 기쁨을 같이 하고 싶습니다. 세상에 나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어깨가 이전보다 가벼울 줄 알았는데 오히려 무거워졌습니다. 그러나 무게에 짓눌리지는 않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함께 살아가는 이웃의 이야기를 시에 담고 싶습니다. 제 시가 추운 세상을 데워주는 따뜻한 구들장이 되었으면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메타자본세콰이어 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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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언어·수사 과잉시대, 오랜만에 만난 여백의 감각

 

시는 뜻과 이미지에 기대면서도 뜻과 이미지를 넘어서는 시적 울림이 있어야 한다. 뜻과 이미지가 건축물이라면 울림은 건축을 있게 하는 여백의 공간이다. 대상과 현실을 해석하면서도 여백을 품고 있는 언어는 지금 여기의 시를 두근거리는 미지의 상태로 있게 한다.

재래의 서정시들로부터 아슬아슬한 언어실험, 현실에 대한 핍진한 묘사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개성의 향연을 뒤로 예심을 통과한 20여편의 작품 중 최종적으로 ‘표준형 인간’과 ‘우리들의 시간은 없고’, ‘구릉’이 남았다.

먼저 ‘표준형 인간’은 생활 세계의 구체적 현장에서 세계의 그늘을 탐색하는 아이러니한 어조가 인상적이었으나 ‘나는 복제물이 많다’ 같은 기시감 있는 문장들과 덜컹거리는 호흡이 다소 아쉬웠다. ‘우리들의 시간은 없고’는 구어체의 자연스러운 흐름과 탄력있는 이미지 운용, 세계의 그늘과 존재의 그늘을 씨줄과 날줄로 조직하는 날렵한 구성력이 돋보였다. 동봉한 시편들 또한 평균 이상의 고른 수준으로 안정감이 있었으나 문제는 그 안정감이 예측 가능한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당선작으로 선정한 ‘구릉’은 신선한 이미지가 일품이다. 일상 공간의 대상들을 재구성함으로써 낯설게 하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고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도약 또한 감탄스러운 데가 있다. 고고학적 상상력을 인유하는 방식에 있어 기운 흔적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없겠으나 예상치 못한 가족서사와의 결합을 통해 절제된 방식으로 갈무리한 결구는 불만을 잊게 하는 긴 여운을 갖고 있다. 그리하여 시적공간 내에 머물던 파문이 시적공간 밖으로 퍼져나간다. 언어와 수사가 과잉된 시대, 참으로 오랜만에 만나는 여백의 감각이 아닌가.

 

심사위원 손택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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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악공들 / 김정현

 

 

시리아 굶주린 혈(血)의 사막에서 금빛 모래사장 해변
의 춘곤증자들에게
창백한 시체가 한 조각 잘린 구름으로 떠밀려올 때
견고한 일상의 고딕 질서를 덩어리째 뒤집어쓴 도시
사람들은
아주 잠깐 경악한다 경쾌한 악당 같던
미디어의 충만한 리듬은 조심스레 끝장났고 스무 살
열사병,
비릿한 합주를 나눴던 벌거숭이 몽상가들마저

순순히 날 선 악곡(樂曲)을 포기하고 거리로 집결했다
관현악단 같은 햄릿들로
거대한 복수를 꿈꾸던 어릿광대들과 리어처럼 선명히
울부짖을 미치광이들은
이미 쓰레기 가득한 거리에 당도했고 간밤 골목마다
신명나던 두드림,
핏물 같은 구토로 조율 당한 오필리아들은 누굴 위해
저리도 침묵하나 지난 계절
아무도 돌아오지 못할 악공(樂工)이 돼버린 소년소녀
들은
제일 아름다운 물의 파동으로 우리의 동공을 적셔대는

관(管) 같은 고통은 현(絃)의 비명은 끝까지 살아남아
살아있는 자들의 금 간 심장을 날카롭게 연주하네 누
구도 화음 낸 적 없는데
누구나 펼침화음인 사람들 오래전 강을 건넜던 백수

광부의 그림자처럼
낯빛들 어둑했다 저 멀리 바닷바람이 붉은 산호처럼
뻗쳐 와도
바닥의 가장자리마다 고요히 쌓여 있는 물의 영혼들
가느다란 여음(餘音)에도 휩쓸리지 않으려
악공들 모두 기슭을 간신히 부여잡고 온몸을 떨고만
있는데,

경찰 차단선이 순식간에 벽을 쳤다 다시금 주검을 쌓아 올렸다 숨통이 통증으로 나뒹굴고 머리통은 으깨졌다 미치광이들과 어릿광대들이 찢어지자 분노는 산산조각 났고 눈먼 오필리아들만이 거리에 남아 안티고네처럼 울부짖었다 그러나 지난밤처럼 늙어버린 내 영혼은 모텔 난간에 기대선 채 한밤의 열기를 한가로이 관망했다 돌멩이가 날아들기도 했지만 나는 운 좋게 상처 하나 없다 이내 살수차가 물대포를 시연하자 누군가의 연설은 깨끗하게 뭉개졌고 최루액에 토악질하던 학생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가까스로 시위대열에서 이탈한 노동자와 첫 의무를 이행하던 의경은 공사(工事) 중인 상가에서 마주쳤다 너부러진 각목이 수직으로 빛났고 시멘트는 지루할 만큼 천천히 굳어가고만 있었다 하지만,

아침에 나를 눈 뜨게 한 건 햄릿이 아니었다 리어가
아니었다 오필리아도
시위대도 아니었다 단지 춘곤 가득한 내 하품이었다
찔끔 눈물 한 방울의
아직도 선연한 비극을 미디어는 밤낮없이 이국(異國)의
해변에서 송출하고
모래 속 조그마한 얼굴을 묻고서 끝없이 바다를 향하
는 어린 시체는
아무런 말이 없다 나는 기어이 리드미컬,
어젯밤 핏방울을 허밍으로 흘려대며 담배를 입에 가져가는 데
거리의 소란했던 혁명마저
담담히 쓰레기 자루 속으로 쓸어 담는 저 사람은 누구
일까
다시금 어느 해변으론 한 구의 시신이 푸르스름하게
떠밀려오고
나는 먼지투성이 밤거리가 화염으로 솟구칠 때마다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못할 악몽을 꾸곤 했다 그런데
그 꿈을 정말 악몽이라 해야 할까
악공들이 한가로이 모래찜질하던 날 붙들곤 파도처럼
바다를 켜며 앞으로 나아가고
포말처럼 다시 바닷속으로 빨려들던 물속의 푸가를
난간 밖으로 담배꽁초는 자유롭게 튕겨 나가고
나는 더 이상 세계의 깊이로는 도무지 빠지고 싶지 않

부드럽게 출렁이던 물침대를 조율하러 또다시 모텔로
기어들어 간다
낮잠은 지옥만큼 나를 끌어당기고
나는 천국 같은 이 단단한 세계가 하루의 시작처럼 아
주 조금 마음에 든다

 

 

 

 

2018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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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기꺼이 앓고 싶은 시라는 열사병"

 

기차를 탔다.

새들은 날개 없이도 날아올랐고 나는 열차의 지붕 위에서 잠이 들었다.

부러진 갈비뼈가 열차와 열차 사이로 떨어지는 동안 갈라진 손톱들은 새로 돋아났지만 기차는 달리고 또 달려 기어이 세계의 끝에 당도하곤 했다.

‘우리’에서 잠시 떨어져 나와 ‘나’가 될 때마다 저는 곤혹의 연속이었습니다. 시는 언제나 푸르스름하게 제 주위를 맴도는데 저는 어렵게 시의 꽁무니를 잡았다가도 너무 쉽게 놓쳐버리곤 했습니다. 최첨단의 시대에 시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아무것도 없습니다는 대답이 벌써 눈앞에 어른거리는데 저는 가만히 모른 척하기로 합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기어이 시라는 쓸모없음에 매혹당하기를 바라고 기꺼이 시라는 열사병을 한 번이라도 더 앓고 싶은 것입니다.

최두석 선생님, 최수철 선생님, 임철우 선생님, 서영채 선생님, 주인석 선생님, 조동범 선생님, 늘 감사한 마음입니다. 이사라 선생님, 김미도 선생님, 박금산 선생님, 신연우 선생님, 최승호 선생님, 감사하다는 말로는 부족한 걸 알지만 항상 감사한 마음입니다. 특히 김지순 누님, 오효진 선배, 이승영님, 김새봄님께 다시 한번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부족한 글을 선택해주신 나희덕 선생님께는 감사의 마음과 함께 더욱 정진하겠다는 약속을 단단히 해봅니다. 마지막으로 어머니와 누나들 사랑하는 조카들과 함께 천천히 시를 써나가겠습니다.

 

 

 

 

 

[심사평] "아름다운 파동 일으키는 노래 이어지길"

 

예심을 통과한 15명의 작품 중에서 마지막까지 남겨진 것은 김정현, 한형석, 김정식의 시들이었다.

김정식의 시는 간결한 구어체를 구사하며 독자를 자연스럽게 시적 공간으로 끌어들인다. 샤갈이나 천경자 등 회화를 모티프 삼아 예술적 감각과 조형미를 보여준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하지만 작품세계가 다소 협소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한형석의 시는 감정을 조율하면서 언어적 긴장을 끝까지 밀고나가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때로는 자신을 가두는 틀을 과감하게 깨뜨리는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그에 비해 김정현의 시는 이미지의 전개가 활달하고, 원심력을 지닌 시행들이 시적 공간을 자유롭게 열어나간다. 잦은 직유와 산문적 호흡은 시를 약간 산만하게 만드는 면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가닥을 놓치지 않고 독자를 어느 낯선 지점에 정확히 데려다 놓는다. 당선작으로 뽑은 ‘물의 악공들’ 역시 시리아의 사막에서 시작해 고통스러운 죽음의 현실 곳곳을 돌아다니며 “바닥의 가장자리마다 고요히 쌓여있는 물의 영혼들”을 불러낸다. 앞으로도 그의 노래가 아프고 아름다운 파동으로 “우리의 동공을 적셔”주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나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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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음이 길어질 때 / 진혜진

 

 

포도에서 만납시다

머리와 어깨를 맞댄

돌담을 돌면 포도밭이 있다

맛이고 흔적인

우리의 간격은 포도송이로 옮겨가고

담장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처럼

지지대를 타고 몸을 쌓는다

씨를 품는다

우리는 서로 기댄 채 손끝이 뜨거워지고

포도는 오래 매달릴수록 그늘의 맛이 깊어진다

입꼬리 올린 갈림길마다 가위눌린 꿈에서

쓴맛이 돈다

포도는 입맞춤으로 열리고 선택으로 흩어진다

바둑판 위에서 반집을 지키는

흑백의 돌처럼

우리는 내려올 수 없는 온도

피가 둥글어진다

언젠가 통화음이 길어졌을 때

그것이 마지막 고별이라는 걸 알았고

덩굴인 엄마가 욱신거려

그해 포도 씨는 자꾸만 씹혔다

깨물어 버릴까

한 팔이 눌리고 한 다리가 불면인 잠버릇이 생긴 곳

자유로를 지나 수목장 가는 길 포도 알맹이를 삼킨다

하나의 맛이 두 개의 흔적을 낸다

단단히 쌓은 탑을 나는 한 알 한 알 허물고 있다

탑이 물컹하다

 

 

 

 

2017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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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이제 시와 오롯이 동거하기로”

 

마음을 비워야지 하면 욕심이 찼다. 욕심을 비워야지 하면 적막이 찼다. 시의 여정이 그러했다. 이번에는 그래 이번에는…

 

언제부턴가 도서관 계단을 세는 버릇이 생겼다. 송이에서 포도를 한 알 두 알 빼 먹듯이.

 

통화음이 길어질 때 포도송이에서 저를 떼어내주신 심사위원님들과 광주일보 신문사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내 상상력을 지지해주시고 충고와 격려 해주신 분들 고맙습니다.

 

그리고 얼굴 모르는 구성원이 되어 강의를 듣고 있습니다. 경희사이버대 교수님들께도 감사드리며 나의 당선을 기원하며 촛불을 밝혀주신 분들과, 마음을 모아준 친구 시인들, 그리고 스터디 선배님들, 일일이 이름 거론하지 않아도 제 마음 속에 각인 되어 있는 것 아시죠?

 

저녁 무렵에 걸려온 전화 한 통화. “여보세요 혹시 진혜진씨 아닌가요?”

 

이제 시와 오롯이 동거하기로 한다.

 

 

 

 

포도에서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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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만남과 헤어짐의 진부한 사건 포도의 이미지로 생기를 얻다”

 

시는 가끔 속인다. 속이는 주체는 시 자체다. 쓰는 사람도 속이는 줄 모르고 속이고, 읽는 사람도 속는 줄 모르고 속는다. 시가 때로는 쓰는 사람을 초과하고 읽는 사람을 홀릴 때가 있다는 것, 그것이 시의 위력이자 위험이다. 그러니 단 한 편의 수작만으로는 시인을 믿을 수가 없다. 그것이 시인이 아니라 시 자체의 능력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김상현 씨의 ‘기다리는 여자’ 외 5편은 체험과 관찰에서 서정적 순간들을 이끌어내는 기예가 능숙했다. 이봄 씨의 ‘빙하기의 식사’ 외 2편은 부드러운 묘사와 딱딱한 진술을 교직하는 능력이 강점이었다. 이서영 씨의 ‘암전’ 외 4편과 이재민 씨의 ‘두근두근 동물원’ 외 4편은 삶의 내막을 투시하는 시선이 깊다는 점이 닮았다. 전자의 ‘10년 후’와 후자의 ‘간지’ 같은 작품은 여느 앤솔로지에 포함되어도 손색없을 수작이었다. 장수연 씨의 ‘나무의 표정을 빌리다’ 외 3편은 화술의 나이가 젊은데 특히 ‘비닐하우스’의 발랄한 상상력이 인상적이었다.

 

이분들에게서는 가장 좋은 시 한 편을 선뜻 골라낼 수 있었다. 그러나 김기숙 씨의 ‘선잠’ 외 3편과 진혜진 씨의 ‘먼지의 결혼식’ 외 4편의 경우는 그럴 수가 없었다. 김기숙 씨는 감정을 냉철하게 통제하고 정교한 언어의 구조물을 만드는 일에 실패가 없었고, 진혜진 씨의 작품들 역시 발상과 화술에서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었다. 이 점이 오히려 두 사람을 주목하게 만들었다.

 

이중 진혜진 씨의 작품, 특히 ‘통화음이 길어질 때’가 선택된 것은 심사자의 취향이 개입한 결과다. 만남과 헤어짐이라는 진부한 사건이 포도의 이미지로 생기를 얻는 장면들이 아름다웠다. 진혜진 씨에게 보내는 축하만큼의 진심을, 김기숙 씨에게 보내는 위로에도 담고 싶다.

 

심사위원 신형철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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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 / 임주아

 

 

당신이 내 처음이야 말하던 젊은 아빠 입가엔 수염이 복숭아솜털처럼 엷게 돋아나 있었겠지 엄마는 겁도 없이 복숭아를 앙물었겠지 언제부터 뱃속에 단물이 똑똑 차오르고 있었는지 모르지 이상하다 이상하다 당신이 매일 쓰다듬은 곡선이 나였는지 
 

​그해 여름 홍수 난 집 마당에 떨어진 복숭아 두 알 막 태어난 아기 얼굴 같은, 산모가 위험하니 그냥 낳으세요, 그냥 나온 나는 태어나 백도복숭아처럼 물컹한 젖을 물고 눈을 끔뻑거렸겠지 눕혀두면 하루종일 잠만 자니 얼마나 좋은지 엄마는 말했지
 

​깨어나면 조금은 소란스러운 십 층집 어느 날 무선전화기가 날아다니는 종종 창문 밖으로 식탁 의자가 떨어지는 떨어진 의자가 일층 정원을 박살내는 동네방네 돌아다닌 소문이 햇볕을 꺾는 대낮 바람결에 모빌은 돌아가지 아이 좋아, 동해안 한 바퀴 시원하게 돌고 온 아빠 곰 같은 등 뒤에 서너 해 살다간 여자 풋복숭아 자국 돋아나는 눈두덩이 엄마 어디 가
 

​짓이겨진 과육을 뚝뚝 흘리면서 나는 천천히 무릎을 쓰다듬지 뭉게뭉게 피어나는 욕탕에서 오랜만에 만난 당신의 살을 만지지 복숭아껍질 따가운 살갗, 엉덩이가 반으로 쪼개지는 기분이야 붉은 속살, 아빠와 엄마 사이에서 온탕과 냉탕 사이에서 애인과 남자 사이에서 갈팡질팡 놀지 더 이상 처음이 아닌 우리에게 또 한 철이

 

 

 

 

2015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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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아빠께 바친다, 슬프지 않게 열심히 쓰겠다

 

꿈을 꾸었다. 바다 한가운데에서였다. 그는 물에 빠져 오래 나오지 못한 사람처럼 몸이 퉁퉁 불어있었다. 왼쪽 이마는 어디 심하게 부딪쳤는지 불룩 튀어나와 시퍼랬고, 손가락은 마디마다 흰 뼈가 드러나 있었다. 물 위에 상반신만 내놓은 채 아무 미동도 없는 그가 가만히 내 눈을 응시했다. 그리고는 오래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내가 너를 구했다. 핏방울이 관자놀이를 타고 그의 손가락에 떨어졌다. 그를 구하고 싶었다.

얼마 전 수첩엔 이렇게 적혀있었다. 우리의 평생은 잘못된 자리에 놓인 모든 것들을 제자리로 옮겨놓는 데 쓰일 것이다. 다시 고쳐 쓴다.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나는 당신을 구하지 못했다고. 보고 싶다고.

아버지가 내 옆에 없다는 사실을 알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다 자랐으므로 그의 옆엔 늘 내가 없었으므로. 하지만 그가 이곳에 없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얼마나 더 걸릴지, 모르겠다. 떠난 사람을 바라볼 때, 그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을 때, 문장으로 복원해보려 애쓸 때, 다 쓴 베개에 울컥 쏟길 때, 등과 벽이 맞대어 질 때, 겨우 생각나지 않을 때, 문득 아버지는 꿈에 나타날 것이다. 살아 한 번도 보여드리지 못했던 시를 내민다. 슬프지 않도록 열심히 쓰겠다.

 

 

 

 

[심사평] 혼잣말에 귀 기울이게 하는 흡입력 뛰어나

 

공허하고 관념적인 진술 대신에 구체적인 삶에 언어를 밀착시키는 시들이 늘어났다. 그만큼 삶의 문제가 절박하다는 인식이 시를 쓰는 이들 사이에 공감을 얻고 있다는 뜻이리라. 현실의 문제로부터 멀찍이 달아나 몽환의 숲을 헤매던 언어가 조금씩 재정비되고 있는 것 같아 반가웠다.

당선작으로 고른 임주아 씨의 ‘복숭아’는 가족사의 한 단면을 명징하게 부조해 보여주고 있다. 시적 대상에 자신의 체험을 비벼 넣는 솜씨가 만만치 않고, 독자를 시의 안쪽으로 끌어당기는 능력이 뛰어나다. 요즈음 유행하는 시들이 혼잣말을 그저 혼자 중얼거리고 마는데 이 시는 혼잣말에 끝까지 귀를 기울이도록 하는 시적인 흡입력이 각별하다. 축하한다.

끝까지 겨룬 응모작 중에 이인서 씨의 ‘말이 달아났다’는 “돌아갈 수 없다면 그곳이 낙원인지 모른다”는 첫 문장이 매혹적이다. 기억에서 끌어올린 소재를 시간의 경과와 중첩해서 시상을 전개시키고 있는데, 매우 안정된 호흡이 오히려 불안스럽다는 게 흠이었다.

엄정숙 씨의 ‘외인출입금지’는 인적 끊어진 ‘빈집’을 자신의 호흡으로 노래하고 있는 시다. 묘사도 적절하다. 다만 시의 뒷부분에 등장하는 ‘나’의 역할이 시에서 지나치게 미미하게 다뤄졌다는 게 불만이다.

이삼례 씨의 ‘미용실 앞면과 뒷면은 서로 닮아가는 것이다’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미용실 벽면의 거울을 소재로 상상력을 펼쳐 보이는 시다. 때로 돌출된 이미지가 시 속에 용해되지 못하고 돌부리처럼 걸릴 때가 있다. 완벽한 퇴고에 소홀했다는 증거가 아닐까. 이밖에 이동한, 김형미, 허승호, 박미경 씨의 작품들을 유심히 읽었다. 한꺼풀만 벗으면 모두 훌륭한 시인이 될 수 있는 분들이다. 습작시절에는 무엇보다 온몸으로 긴장할 줄 아는 능력이 필요하다.

심사위원 안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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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드리안의 담요 / 배세복

 

 

성큼성큼 들어와 붉은 사각형을 담요에 던지며 그가 말했다 너희들에게 어울리는 빛이야 그때부터 그는 우리집 벽에 살았다 어느 해 나는 내 서재를 한 번도 열어주지 않으면서도 간신히 아내의 장롱 속에 들어간 적 있다 캄캄했다 오래 전 걸어두었던 희망 같은 단어에 곰팡이가 슬기 시작했다 그날 그는 검푸른 색깔을 마구 칠했다 살짝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그 무렵 나는 회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유사한 색깔의 연속은 불안을 가져온다 마치 잘못 맞춰진 목욕탕 타일의 무늬처럼, 그리하여 바람 푸르던 날 우리는 감탄사들을 날려 보냈다 공중에서 흩어지는, 알고 보니 겨우 몇 개 밖에 안 되던 노란 한숨같은 것, 올해에는 어떤 색을 보여줄까 형형색색의 아주 큰 보석을 보여줄게! 그는 한 해에 하나씩 그린 아홉 개의 사각형에 테두리를 치고 있었다 집을 지은 후 귀퉁이를 여러 날 마름질하듯 천천히, 잠이 덜 깬 우리들을 격자무늬로 엮어주며 서서히 벽 속으로 사라져갔다

 

 

 

 

몬드리안의 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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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문학과 더 치열한 싸움 이어나갈 것”

 

당신과 인연을 맺고 두 번이나 십 주년이 지났습니다. 싸움도 못하면서 매일 당신과 싸웠습니다. 어느 해인가 처음으로 싸움을 시작하고 그해 마지막 날, 그간의 내력에 붉게 사각형을 그려 보았습니다. 그 다음해에도 싸움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푸른 사각형……, 그 다음해엔 다시 노란 사각형……. 이렇게 근 이십여 년을 싸웠지만 승자는 없었습니다. 지친 채 백기를 들려던 오늘, 누군가 싸움의 경과를 알려옵니다. 당신과 저의 싸움에서 하루만 쉬어가도 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싸움이 끝난 게 아니겠지요. 이긴 건 더더욱 아니겠지요. 허나 오늘만큼은 사각형 무늬 가득한 담요를 덮고 달콤한 잠을 푹 자야겠습니다. 하지만 곧 깨어나겠습니다. 다시 저는 당신의 코피를 터뜨리거나 혹은 당신에게 광대뼈가 함몰되도록 얻어맞아 한 장 또 한 장, 여러 장의 담요를 차곡차곡 포개놓아야 할 테니까요, 사각형을 한 칸 두 칸 다시 채워야할 테니까요.


시의 길을 처음 열어주시고 묵묵히 지켜봐주신 구재기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늘 한결같이 못난 선배를 걱정해주던 길상호 시인, 청림문학동인회 선후배님들과 기쁨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부모님과, 오랫동안 유일한 독자였던 아내의 손도 꼬옥 잡아보겠습니다. 


부족한 저를 세상에 발가벗겨 주신 광주일보와 안도현 심사위원님께 깊이 고개 숙입니다. 세간살이를 집어던지면서라도, 문학과 더욱 치열하게 싸울 것을 약속드립니다.

 

 

 

목화밭 목화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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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차분히 읊조리는 시어 … 서사·서정적 감각 균형”

 

시들이 독자에게 애써 말을 건네지 않는다. 어떤 절실한 심장을 향해 하소연하거나 자신의 주장을 펼치지 않고 독자를 설득하려는 마음도 없다. 그저 중얼거린다. 일정한 수준에 올라와 있는 시들일수록 소재가 제한적이다. 일상의 소소한 안쪽을 들춰 보여줄 뿐이다. 


분명히 다른 사람이 쓴 시인데 시어가 중복되는 경우가 수없이 많이 발견된다. 이미지를 비틀지도 않고 파격도 엿보이지 않는다. 이런 현상이 시단의 흐름이라면 새로운 시인은 주도적인 흐름을 혁파하는 자세를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당선작으로 고른 배세복 씨의 ‘몬드리안의 담요’도 위와 같은 혐의에서 크게 자유롭지는 않다. 하지만 서사적인 것과 서정적인 것을 균형 잡힌 감각으로 배합하는 능력은 다른 응모자들의 시와 뚜렷이 구별된다. 


말하고자 하는 것을 언어의 내부로 숨기면서 결국은 할 말을 다 하는 시다. 화자의 목소리가 들뜨지 않고 차분한 것은 그만큼 내공이 쌓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함께 응모한 시들도 단아한 서정의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신뢰를 두텁게 했다.


고현도 씨의 ‘까치의 독후감’은 그리 새롭지 않은 소재를 자신으로 눈으로 해석하는 남다른 기량이 엿보인다. 시적 대상을 꼼꼼하게 묘사하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고 있어 호감이 간다. 그러나 시를 전개하는 데 몰두하다 보니 시인의 사유가 배어들 틈을 만들지 못한 게 걸렸다. 


이정희 씨의 ‘신바람 수선집’은 유쾌한 동시적 작풍이 눈길을 끌었다. 수선집에 있을 법한 사물들이 마치 식구들처럼 명랑하게 움직이고 있어 흥미로웠다. 다만 시를 마무리하는 후반부가 지나치게 작위적이어서 아쉽다.


최종심에 오른 작품 중에서 김옥진, 최영은, 문화영, 조희진, 이세빈 씨의 시들을 마지막까지 눈여겨 읽었다. 모두들 건투를 빈다.


심사위원 안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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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립니다] 신춘문예 ‘시’ 당선 취소합니다
‘삼거리 점방’ 표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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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본보 신춘문예 시 부문 김승필씨의 ‘삼거리 점방’ 당선을 취소합니다. 이 작품은 이덕규 시인의 ‘논두렁’ 작품 표절인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습니다. ‘중복 응모나 작품의 표절이 밝혀질 경우에 당선이 취소됩니다’라는 본사 신춘문예 응모 요강에 따라 해당 작품의 당선을 취소합니다.

 

해당 작품 응모자도 ‘당선취소결정’을 수용했습니다. 광주일보 시 부문 신춘문예 심사를 맡았던 박남준·김정란 시인도 “당선 취소 결정에 이견이 없다”고 밝혔습니다. 두 심사위원의 판단은 광주일보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자세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께 사과드리며,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신춘문예 응모작을 더욱 철저히 검증하겠습니다.
2013년 01월 11일(금)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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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신춘문예 ‘시’ 표절 의견-김정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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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은 곤혹스럽다. 확신을 가지고 당선작으로 망설임 없이 선택했는데, 표절 의혹이 제기되다니…. 우선 사과부터 전한다. 심사위원이 세상에 발표되는 모든 작품들을 꿰고 있지 못한 다음에야 어쩔 수 없이 실수도 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실수는 실수이니, 다른 핑계를 어찌 늘어놓겠는가. 민망하고 참담하다.

 

김승필의 작품 ‘삼거리 점방’과 이덕규의 ‘논두렁’을 꼼꼼히 비교한 결과,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표절이라는 판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표절이란 자구를 그대로 가져다 베끼는 것만이 표절이 아니다. 두 작품 사이에 완벽하게 일치하는 대목은 동사 “밀어넣고”와 “넣고”, “마시면”과 명사 “무뜩뚝이 아버지”, “후르르 뚝딱”이라는 의성어뿐이지만, 몇 자가 원작과 표절 의혹 작품에서 일치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자구를 베끼는 것보다 더 위험한 것은 창작 아이디어를 베끼는 것이다. 두 작품은 시적 발상이 완전히 똑같다. ‘시적 발상이 완전한 무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닌 다음에야 비슷할 수 있지 않은가’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문제가 되는 시적 발상은 비슷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소외되고 못난 것들을 한데 비벼 한끼 물텀벙 먹듯이 먹는다’라는 발상도 똑같을 뿐 아니라, 그 안에 사람들을 밀어넣어 마신다는 설정까지 똑같다. 특히 “무뚝뚝이 아버지”를 밀어넣는다는 발상, 극복하지 못한 아버지의 고집을 “먹어버림”으로써 오이디푸스적 상처를 극복한다는 심리적·시적 전략이 똑같다. 사람을 음식처럼 먹는다는 것은 매우 독특한 상상력이다. 그것이 우연히 겹쳐질 확률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옳다. 더욱이 두 작품은 의태어와 의성어를 특유의 토속적 호흡에 섞어 시의 리듬을 구성지게 만드는 외적 특징마저 똑같다. 역시 우연의 일치로 보기 힘들다.

 

의도적인 표절이 아니라고 해도, 표절은 표절이다. 나로서는 두 작품의 유사성이 전적인 우연의 결과라고 보기 힘들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매우 유감스럽다.

 

2013 신춘문예 ‘시’ 표절 의견-박남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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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단한 지 몇 년 되지 않은 시절, 두어 번 아주 당혹스러운 문제에 부딪혔었다. 문득 영감처럼 떠오른 시의 한 구절이 어디선가 보았던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누구의 시였지? 밤새 시집을 들춰보며 찾아보았다. 그런 문장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어느 누구의 시에 그와 같은 표현이 발견되었다면 일찌감치 그 문장을 포기할 수 있었을 것이다.

 

며칠을 끙끙거리며 안절부절 시집들을 뒤졌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 문장이 들어간 시마저도 포기해버린 경우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 문장으로 인해 살이 돋고 옷을 입혔기 때문이다.

 

어떤 강력한 인상이 뇌리에 박혀 무의식 속에 자리 잡히기도 한다. 진실로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있는 것이 비슷한 조건이 주어지면 반사 신경처럼 뛰쳐나올 수도 있다. 모든 예술가, 시인이나 창작자들이 무의식적으로 떠오른 느낌에 취하지 않겠는가.

 

올해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자 또한 그러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심사위원의 한 사람으로 미리 점검해보지 못한 좁은 안목으로 인해 독자 여러분과 당선자에게 심려를 끼쳤음을 사과한다. 또한, 광주일보사에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말씀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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