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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고양이 / 김현주 

 

 

손끝에 떨어진 작은 눈물 한 조각에

지구 반대편 수만 년 전의 빙하가 서서히 녹고 있다

 

흩어지는 만년설 사이로 사파이어처럼 빛나는 파란 눈동자

작게 너울거리는 심장소리가 빼꼼히 나를 올려다본다

휘둥그랑 투명한 수염을 휘날리며

다정히 나의 세계에 뛰어들었던 고양이는

지금 어디쯤 있을까

 

강렬한 축문처럼 나를 감싸던 고양이가 사라진 지금

나는 달빛 한 조각의 자비도 없는 세상에 포위되었다

언제쯤 돼야 이 지긋지긋한 것들로부터 탈출할 수 있을까

무쇠 신을 끌며 터벅터벅 걸어가는 길고 긴 북극의 밤에는

길도 없고 이정표도 없고 고양이도 없다

 

가시처럼 불행의 취기만 가득 담은 냉담한 숨결을 통과하며

영원히 끝나지 않는 밤을 지난다

쇄빙선도 깨지 못한 얼음에 갇혀

일각고래와 청새치 바다거북이 가라앉은 심해 한가운데를

혼자 일렁이는 밤

 

천리라도 따라가고 만리라도 따라간다는

낯익은 이별가에 목이 메인다

동그랗게 떠있는 그곳을 향해

차가운 유빙과 얼어붙은 별들을 데리고 간다

먼지처럼 부서져 내리며 솟아오르는

나, 또는 고양이라는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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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복잡·치열한 일상 불현듯 멈출때… 시와 함께 걸어갈 것

 

복잡하고 치열하게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불현듯 시간이 멈출 때가 있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말이 되어 나오지 못한, 그 수많은 순간들이 떠오릅니다. 불빛으로 가득 찬 제주의 도심을 지나 숲길을 달리다 보면 문득 세상의 이면처럼 반듯하게 펼쳐진 들판이 나타납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한밤의 들판에는 세찬 바람을 따라 풀들이 눕는 소리와, 낮게 울려 퍼지는 말들의 수군거림, 아득히 들려오는 습한 천둥소리만 가득합니다. 방패처럼 나를 감싸던 시야와 소리가 멀어지고 하루 종일 흘러넘치던 것들이 온전히 사라지는 그 시간, 거대하고 희미한 은하수의 흔적 사이로 먼 곳의 별들이 아주 조금씩 움직입니다.

 

밤눈에 덮인 겨울 산사의 오솔길에는 작은 돌부처들이 줄지어 앉아 있습니다. 소복하게 눈 쌓인 동그란 어깨와 무릎 사이로, 빨간 산딸기 열매가 덩굴손을 꽉 쥐고 슬쩍 올라앉아 있기도 합니다. 끝없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오래된 삼나무 냄새와 낡은 전각을 감싸고 있는 지붕, 숲을 머금은 채 묵직하게 머무는 이끼의 흔적, 그 사이 어딘가에서 세상은 길의 끝자락을 쥐고 고요히 멈춰 기다리고 있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말이 되어 나오지 못한 수많은 것들을 떠올립니다. 침묵으로 가라앉은 시간을 따라 총총히 흩어진 것들,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을 외롭고 고요한 그들 사이에 여전히 내가 있음을 잊지 않겠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게 소중한 기회를 만들어주신 경인일보와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립니다. 시의 문을 열고 기꺼이 그 길로 이끌어 주신 최금진 선생님께 가장 깊은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시와 함께 모든 것의 경계를 넘어 꾸준히 걸어가겠습니다. 더불어 함께 하는 시와몽상 문우들께도 감사를 전합니다. 변함없는 자리에서 기다려주며 지지하고 응원해 준 중재씨와 우리 고양이들, 가슴 깊이 사랑합니다.

 

 

 

[심사평] 감각적 문장·세련된 은유로 한층 높인 시의 격조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응모자는 해마다 늘어나는 경향을 보인다. 올해도 마감 당일까지 1천여 편의 응모작이 접수되었다. 한편 한편이 응모자들의 땀과 고뇌의 산물일 것이다.

 

예심 없이 심사위원 두 사람에게 응모작품이 전달된 것이 12월 중순쯤이었다. 충분한 검토의 시간을 보내고 12월 20일, 심사위원 두 사람은 경인일보 사장실 옆 접견실에서 만나 당선후보자들의 작품을 놓고 협의를 계속했다.

 

두 사람이 테이블에 올려놓는 응모작마다 담당 기자가 일일이 인터넷 검색을 해나갔다. 순수 신인이어야 한다는 응모 요강에 맞는 사람인지를 확인했다.

 

모든 인쇄매체에 소개된 경력이 있는 응모자는 신인으로 보지 않았다. 많은 응모자가 이 조항에 걸려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의 꿈을 접어야 했다.

 

올해의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응모작들의 가장 큰 특징은 거대담론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예컨대 팬데믹이라던가 이태원 사태 같은 국가 사회적인 재앙 문제를 짚어가는 담론이 사라진 것은 아쉬운 대목이었다.

 

심사위원 두 사람은 '세계, 고양이'를 두고 장시간 논의를 계속했다. 그리고 응모작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작품이라는데 합의했다.

 

당선작은 차가운 분위기가 주조를 이루고 있지만 상승의 이미지로 시를 밀어 올린다는데 동의하고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읽을수록 만만치 않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선자 김현주는 감각적인 문장과 세련된 은유로 시의 품격을 높이며 형상화에 성공하고 있다. 첫 연의 도발적인 문장이 독자의 눈을 사로잡았다. '손끝에 떨어진 작은 눈물 한 조각에/지구 반대편 수만 년 전의 빙하가 서서히 녹고 있다'라는 문장이 마치 불온하게 타들어가기 시작하는 도화선 같다.

 

'달빛 한조각의 자비도 없는 세상에 포위 되'어 터벅터벅 걸어가는 북극의 밤은 그녀의 의식의 세계다.

 

그런가하면 '가시처럼 불행의 취기만 가득 담은 냉담한 숨결을 통과하며/영원히 끝나지 않은 밤을 지난다'와 같은 유려한 문장이 시의 격조를 한층 높이고 있다.

 

당선작은 투명한 얼음 같은 차가운 이미지로 빛난다. '동그랗게 떠 있는 그곳을 향해/차가운 유빙과 얼어붙은 별들을 데리고'가는 시인의 그곳은 먼지처럼 부서져 내리면서도 솟아오르는 대지일 것이다.

 

그녀의 시세계가 대지를 다 품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한국 시단의 별로 찬란하기를 빈다.

 

- 심사위원 김명인 시인·김윤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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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잘하는 요즘 애들 / 전예지

 

 

프린터기가 또 말썽이다

 

이 애물단지를 버리든가 고치든가 이게 대기업의 수준인가요?

 

하루에 기본 다섯 번을 1층에서 2층으로

걸어야 하는 에스컬레이터 아니면 계단으로

왼쪽 끝 후문 쪽에서 오른쪽 끝 정문 쪽으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프린터기를 하나 놔주면 이런 고생은 안 해도 될 텐데

겨우 몇 십 만원이 아까워서 사람을 갈아 버린다

두 여자는 욕이란 욕을 다 입에 담지만

차마 입을 벌리진 못한다 멋쩍게 서로 한숨만 쉴 뿐

 

낡고 늙은 마트에 새로 생긴 텅 빈 매장의 취급은 이 정도

 

[자리 비움]

 

자기는 왜 자꾸 마음대로 자리를 비워?

일하기 싫어?

 

하필 매니저가 없는 날

혼자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에게 본부장이 찾아온다

억울한 아르바이트생은 그나마 매니저보다 깡다구가 있다

 

프린터기가 2층에 있어서 왔다 갔다 하려면 어쩔 수,

 

말대꾸도 하고 참 요즘 애들 무섭다

 

눈이 순간 흰자로 뒤덮여진 아르바이트생을 보고

 

머리 빠진 본부장은 혀를 찬다

 

죄송합니다

 

속으로 본부장이 매장에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입으론 여전히

 

 

 

 

[당선소감] "어둡고 좁은 공간에서창백한 하루를 밤새 쓴다"

 

저는 외출이 잦지 않습니다. 저만의 공간은 어둡고 좁습니다. 그 좁은 폐허 속에 저만의 규칙과 행복이 편안합니다. 고독은 바람으로 불어오고, 저는 점점 더 속으로 파고듭니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들어간다는 게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저의 공간은 햇빛이 부족합니다. 햇빛이 싫어 숨은 대가는 사색(思索)과 현기(玄機)입니다. 겨울은 어느새 찾아오고, 저는 대신 비타민을 챙겨 먹습니다. 일어나자마자 먹는 비타민은 가장 흡수율이 좋습니다. 그렇게 채운 시리고 창백한 하루를 밤새 쓰고 시를 적습니다.

 

이런 저의 시가 마음에 드셨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저에겐 빈 곳이 많고 그 부분들이 드러나는 게 부끄럽습니다. 저는 곧잘 틈을 흠으로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금방이라도 당선이 전부 꿈이라는 소식이 전해질까 봐 그 생각에만 사로잡혀 상처받지 않으려 상처받았습니다. 그러나 저의 불안은 헛된 꿈인 듯 하루하루가 선명하게 행복합니다. 이제 저는 부족함을 알고, 더 열심히 살며 나의 틈을 채우면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에게 틈이 존재해도 흠이 아니라고 깨닫게 해주신 경인일보와 심사위원분들에게 감사합니다.

 

이번 겨울은 한동안 깨어나지 못할 것처럼 우울했습니다.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내 곁에 남아 있던 건 가족과 친구들이었습니다. 항상 곁에 있으면서도 가장 숨고 숨기는 딸을 믿고 응원해준 가족들 사랑합니다. 그리고 항상 자극제가 되는 글 잘 쓰는 나의 한신대 문창과 17학번 친구들. 글썽글썽 고마워! 마지막으로 2021년의 겨울에게. 나는 정말 노력하고 있어요. 믿어주세요. 사랑해요.

 

틈을 주고 채워지는 것에 불편해하지 않는

 

흠이 아닌 틈을 자랑하는

 

그런 사람이 되겠습니다.

 

그런 사랑을 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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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화려한 수사 없었지만일상의 소중함 일깨우는 어법"

 

2022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의 관심은 뜨거운 편이었다. 비록 응모편수는 지난해보다 약간 줄었지만 응모작품의 수준은 상당히 높았다는 게 중론이다.

 

우선 응모자들의 연령대가 20대부터 60대에 이르기까지 고루 분포되었지만 50~60대의 응모자가 많았다는 것도 특기할 만한 현상일 수 있다. 그만큼 사물을 응시하는 시각이 깊고 인식의 수준이 높았다고 보여진다.

 

시가 죽었다고 말하는 시인들이 있기는 하지만 시는 여전히 살아 있는 문학의 영역인 것을 응모 편수를 통해 알 수 있다.

 

응모작품의 가장 두드러진 경향으로는 거대담론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생명 문제라든가 환경 문제라든가 통일 문제라든가 코로나 팬데믹 문제라든가 하는 거대담론을 다룬 시편들이 눈에 띄지 않았다. 반면 개인의 일상생활에서 모티프를 얻거나 사소한 경험에서 소재를 찾는 경향이 도드라지고 있었다.

 

실험적인 응모작을 만날 수 없었다는 것도 아쉬운 대목이다. 이는 안정된 작품으로 위험부담 없이 순항하고 싶다는 의지의 발현일 것이다.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예시영의 '카이트 서퍼', 김현주의 '그림자를 수집하는 방법', 전예지의 '일 잘하는 요즘 애들'이었다. 심사위원 두 사람은 쉽게 합의에 이르지 못해 장시간 토론과 논의를 거쳤다.

 

'카이트 서퍼'는 활달한 상상력과 긴 호흡이 미덕이면서 '그리고 바람이 불면/이 연서(戀書)가 당신에게 도달할지 모른다'와 같은 당돌한 문장이 시선을 끌었지만 응모작 모두 숨 가쁘게 긴 호흡이 문제였다. 압축미를 보여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컸다.

 

김현주의 '그림자를 수집하는 방법'은 어법이 새롭지 않다는 데 심사위원의 의견이 일치했다. 산문시의 군데군데 상투성의 혐의가 보이는 것도 문제일 수 있었다. 그러나 '푸른 별빛이 숨죽인 그들의 입속에서 검게 변해 자라졌다'와 같은 문장은 돋보였다.

 

전예지의 '일 잘하는 요즘 애들'은 사무실의 지극히 일상적인 풍경이다. 프린터기가 말썽이어서 1층에서 2층으로 오르내려야하는 고충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화려한 수사를 구사하지도 않았으며 다양한 은유를 보여주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역병의 시대에 이와 같은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깨닫게 하는 신선한 어법이 이 작품의 힘이다.

 

일상의 수없이 많은 흐름 속에서 한 장면을 포착해서 성화해낸 전예지의 시적 감각이 예사롭지 않다는 데 두 심사위원은 공감하고 당선작으로 합의했다.

 

당선을 축하하고 훌륭한 시인으로 성장하기를 기대한다.

 

심사위원 김윤배 시인·김명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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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고 / 황정현

 

 

극지의 순록은 우아한 뿔을 가졌다

거친 발굽으로 수만 년을 걸어왔다

 

죽은 자식을 동토에 던지며 발길을 돌려야 했고

비틀걸음으로 얼음산을 넘어야 했고

 

살점을 떼어 어린 자식의 배를 불려야 했고

뿔을 세워 침입자에 맞서야 했고

 

온몸을 쏟아 무리를 지켰다

죽어서도 흙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치열한 싸움에서

늘 이기고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당신은 무덤을 등에 지고 돌아왔다

무덤은 살고 당신은 죽었다

 

무덤 속에서 얼음이 자라고 있다

얼음은 흙을 밀어 올려 산이 될 것이다

 

얼음의 계절이 오면 순록은

바늘잎나무숲으로 순례를 한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당신의 길이 보인다.

 

 

 

 

 

[당선소감] 작은방 낡은 의자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이 자리에 제가 앉아도 괜찮은가요?"

 

미안해요 여기

당신이 앉았던 자리인가요

 

접혀 있는 페이지는

당신이 읽던 페이지였고

 

아무렴 어떤 가요 슬픈 페이지를 넘기면

또 다른 슬픔이 펼쳐지는 걸요

 

유리창은 햇빛을 쏟아내더니

이내 비구름을 몰고 오네요

 

책 귀퉁이가 닳도록

당신이 읽던 페이지를 읽고 또 읽습니다

 

바라보는 일 밖에 할 줄 몰라서

다가가는 일도 제겐 큰 용기가 필요했지요

 

당신은 잠시 자리를 비운 걸요

이 자리엔 누구나 앉아도 괜찮습니다

 

 

작은방 낡은 의자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습니다. 삐걱삐걱 의자가 소리를 내면 제 뼈들도 뚜둑뚜둑 화답을 합니다. 그렇게 저도, 의자도 함께 낡아가겠지요. 세상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지만 외면하지 않겠습니다. 심장의 두근거림이 멈출 때까지 의자에 앉아 있겠습니다.

 

생애 처음으로 당선 소식을 전해주신 경인일보와 심사위원이신 김윤배, 김명인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함께 해준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뜁니다.

 

제게 피와 살을 주신 황의열·강신해님, 정숙광·선정선, 늘 저와 함께하는 김영형·김수민, 문전성시 최지온·서미숙·금희숙·김혜숙·염형기·박양미님, 문장강화 김산 선생님, 조재일님, 중앙대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이승하 교수님과 문우님들, 파피루스 김혜정·김율관·이해민님, 시와 찻잔 김희광 선생님과 문우님들, 용산도서관 이승희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이유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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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마지막 행간까지 존재적 사유 확장된 미학 눈길

 

이번 응모작들은 일상성에 노출된 실업, 가족, 반려, 생태 등을 소재로 한 사회적 문제에서부터 코로나19를 반영하듯 감염과 질병 등에 주목하며 삶의 보편적 중력에서 벗어나지 않는 시편들이 대부분이었다.

 

이 가운데 우리는 발상의 전환을 도모하는 다채로운 경향의 시편뿐만 아니라 인간 본연의 층위를 건드리는 시편들을 통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시의 자리를 살펴보았다.

 

여기서 모던한 시적 상상력으로 고유한 사물을 새롭게 견인하면서 긴장감 있게 구현하고 있는, 10편의 작품이 예심을 통과했다. 또한 예심을 거친 작품들은 은유의 한계를 유연하고 감각적인 발상으로 작동시키면서 시어만이 가질 수 있는 언어의 특질을 살리고 있다는 점에서 평균화된 시작에의 열정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심 작품들 중에서 구체화되지 못한 묘사들과 관념어들이 오히려 번뜩이는 상상력에 균열을 주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황정현씨의 '핑고'와 강현주씨의 '고양이' 등 두 편의 작품을 본심에 올려놓았다.

 

이 두 작품 모두 탁월한 상상력을 통해 존재의 모순을 해체하여 시적 언어로 편입시키는데 성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의가 없었다. 그러나 마지막 행간까지 존재적 사유와 확장된 미학을 끝까지 선보인 '핑고'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정연하지 않다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핑고'는 담담한 어조로 '빙산'의 푸른 내부를 응시하면서 '무덤 속 얼음''흙을 밀어 올리는' 생명의 신생과 사멸에의 '언어적 밀행'을 보여주고 있었기에 신예로서의 가능성에 초점을 맞췄다.

 

끝까지 입을 모았던 후보작 역시 공교롭게도 '빙하''너울거리는' 생명에의 내부조직을 '강렬한 축문'으로 읽어내는 냉담한 시선과 사물을 여과하는 치열한 시적 안목을 높이 평가했지만 아쉽게도 최종심에서 거쳤다.

 

- 심사위원 : 문태준, 권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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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뼈를 생각하며 / 이유운

 

 

당신이 또 여름이 왔다고 말하는 것은

축축하게 땀으로 젖은 내 등을

바람으로 깎아놓은 거친 손으로 훑어준다는 것을 의미했다

손가락 끝이 유독 단단했던 당신의 손톱은 언제나 창백한 회청색이었다

손톱이 왜 파랗지요 하고 물으면

요 안에는 바람이 담겨 있어서 그렇다고 대답하던

당신의 입술에는 뼈가 없었다

 

당신의 손이 습한 등을 훑으면 와사삭 소름이 돋아서

정말로 당신의 손톱에는 바람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당신은 바람으로 나를 만지며

내 등뼈는 당신 덕에 조약돌처럼 둥글어졌다

 

그리하여 아주 먼 미래에

누군가 내 등을 만지면

나는 바람으로 깎여 둥글고 부드러운 짐승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 먼 미래를 생각하면서

당신의 부푼 무릎 위에 바람의 모양을 그렸다

 

이제 그 먼 미래가 되어서 바람으로 깎인 나는

이 즈음에는 꼭 당신을 생각한다

바람을 담고 있던 당신의 손톱과

바람의 모양대로 부푼 당신의 무릎

 

나는 여름이 오면 반드시 당신의 뼈를 떠올리게 되어 있다

내가 만져보지 못한 당신의 뼈는 어떤 모양이었을까 하고

 

 

 

 

 

[당선소감] 파도 일렁거리는 모양 보여주는 부표 되고 싶다

 

어떤 이름들은 저를 다정하게 만듭니다.

 

이름에 꽃이 들어간 사람들은 저에게 미워하지 않고도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주었습니다.

 

이름에 파도가 들어간 사람들은 저에게 세상을 섬세하게 보는 방법을 알려 주었고, 제가 발음만을 겨우 알고 있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저에게 폭력적이지 않고 무관심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습니다.

 

저는 그 이름들 사이에서 제가 숨을 쉬는 방법을 글로 쓰는 것 같습니다. 이름들을 쓰고 곱씹으며 즐겁고 괴로울 때마다 제가 원하는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글을 쓰는 것은 하나도 특별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상을 그림으로 보고, 음악으로 이해하고, 춤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글은 꼭 그런, 세상과 어우러지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운 좋게도 이번 겨울, 그 어우러짐의 하나의 결이 된 것도 같습니다.

 

만약 이 글이 어떤 사람에게라도 흘러가서 그 사람을 일렁이게 만들었다면 제가 성공적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그리고 제가 성공적으로 글을 쓰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저는, 그리고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일렁거림을 느낍니다. 세상에 탈 것이 너무 많아서 생기는 불안이겠죠. 저는 게으르고 변명이 많아서 그 파도 전부를 넘어설 배는 못 되는 것 같습니다.

 

대신 그 일렁거리는 모양을 보여주는 부표 정도는 되는 명랑하고 씩씩한 사람이 되어 시를 쓰려고 합니다. 우리가 바다에 뛰어들기 전 위험한 암초와 해구의 깊이를 알려주는 이름이 되고 싶습니다.

 

그 이름을 위해 제게 올바른 길을 알려주시는 이규성 선생님, 김선희 선생님, 그리고 이 지 선생님께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저와 함께 괴로운 길을 명랑하게 가는 이화여대 철학과 벗들과 자신도 모르는 새에 제 시의 주인공이 되는 제 가족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제게 특별한 이름이 되는 유경, 소연, 건휘, 지호, 혜지, 시온, 환희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경인일보와 심사위원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언제나 글의 시작과 끝을 이렇게 맺습니다. 유운, 쓰고 사랑함.

 

 

 

 

 

#풀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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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바람으로 존재하는 당신에게 보내는 헌사

 

해마다 수천 명의 시인 지망생들이 신춘문예에 응모한다.

 

경인일보도 예외는 아니다. 매년 응모자가 늘어나는 추세다. 왜 시일까? 시에는 마법적 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시의 마법적 기능은 쾌락이고 인식이며 구원이다. 시를 쓰는 일도 감상하는 일도 즐거움이 바탕이다. 즐거움은 쾌락의 다른 말이다.

 

시는 사물에 대한 인식, 역사에 대한 인식, 사회에 대한 인식의 깊이를 달라지게 한다. 시적 구원은 우선 시인에게 먼저다. 시인의 구원 이후에 독자의 구원이 온다. 이러한 시의 마법적 기능이 많은 사람들을 시에 빠지게 한다.

 

올해의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응모작에는 시의 이와 같은 마법적 기능이 약화된 것을 느낀다. 실험적인 시들이 눈에 뜨지 않았다. 시적 모험은 광기에서 오는 것이고 광기는 쾌락에서 나오는 것인데 지나치게 안정적인 음역과 음색으로 노래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인식의 깊이가 깊어진 것도 아니었다. 역사적인 사실을 새롭게 해석하거나 시대정신을 추구하거나 사회의 병리현상을 들여다보거나 소외계층을 연민의 눈으로 보려는 노력이 적었다. 사물의 본질을 보려는 응모자가 크게 눈에 띄지 않았다는 것도 아쉬운 부분이다.

 

한 사물이나 소재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집중력이 부족하거나 불필요한 시적 장치로 산만한 전개에 머무는 응모작들이 많았다. 또한 10대부터 70대에 이르기까지 응모자의 연령층이 다양해졌다는 것도 특기할만한 일이다.

 

그런 속에서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의 이유운 씨와 '모래시계'의 신진영 씨를 만나게 된 것은 여간 기쁜 일이 아니었다.

 

이유운 씨의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는 이 세상에 바람으로 존재하는 당신에게 보내는 헌사다. '바람을 담고 있던 당신의 손톱과/바람의 모양대로 부푼 당신의 무릎'은 이유운 씨의 독창적인 문장이어서 울림이 크다.

 

신진영 씨의 '모래시계'는 가혹한 시대를 건너고 있는 젊음을 훼손한 악랄한 물고문을 은유적으로 노래한 작품이다. 첫행 '잘룩한 부분을 지나면서/모래들은 새로운 진술이 된다'부터 무언가 불길하고 심상치 않다.

 

심사위원 두 사람은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모래시계'를 놓고 장시간 논의를 했다. 논의 끝에 이유운 씨를 당선자로 밀기로 합의했다. 한국시단의 거목으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아깝게 당선 기회를 놓친 신진영 씨에게도 위로와 격려를 드린다.

 

- 심사위원 : 김윤배·김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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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깨다 / 하채연

 

 

등을 받치고 잠들었던 나무기둥에서

새벽이슬 냄새가 훅 끼쳐온다

사방에 울울창창하게 뻗은 녹음들

현시를 잊은 채 창공에 닿아 빛나고

꿈결처럼 말을 거는 선선한 바람에

나는 나무들이 지어놓은 미몽 속으로 걸어들어간다

새소리로 엮어놓은 문패를 열고 들어가자

억겁의 땅으로부터 솟은 나이테의 내력이

기둥을 키우며 나의 발목에 작고 푸른 원주를 새기고

육신과 나무, 나무와 육신 사이를 비집고 난 샛길 사이로

와본 적 있는 것만 같은 울렁이는 향수가 지천에 빛난다

목피들이 전생을 벗겨내는 소리가 알싸한 그 길목에선

곤줄박이 한 마리가 잎새 한 장을 전해준다

해독할 수 없는 이끼들의 필체로 쓰인 문장들

지워지지 않을 나의 태곳적 이름을 발설하고 있다

무한한 혈맥으로 엮인 나무 그늘 속

편안히 누워 흙이 된 이름들을 짚어본다

끝없이 이어져 불거진 이 뿌리들은 나를 이어주는 끈이었을까

억겁의 계절을 지나도 숨 쉬는 숲은

태양과 달을 이고 은빛 땀을 대지로 흘려보내고

나는 한 장의 연서를 쥐고 숲에서 깬다

뒤돌아보면 푸른 절경이 등허리에 축축하다

 

 

 

 

 

[당선소감] 시 쓰기... 종착역 없는 기차 타고 가는 기분

 

돌아가신 할머니가 잘 영근 알밤 무리를 쌓아올리고 있는 꿈을 꾼 날, 고향에 가는 길에 당선소식을 전해 받았습니다.

 

할머니의 뒷모습으로부터 이어진 긴 강, 시 쓰기. 종착역 없는 기차를 타고 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길고 긴 언어의 숲에서 제 나무 하나 찾는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누군가 놓고간 전언을 받아든 기분이었습니다.

 

너무 소중해 조심히 받아들고 한참을 곱씹었습니다. 시 한 편이 너무 무거워 쩔쩔매던 밤들, 설익은 마음 탓에 쓰기를 주저했던 순간들이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듯했습니다. 쭈뼛쭈뼛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 보이는 우리들일지라도 질기고 질긴 젖줄로 연결되어있다는 사실도 잊지않으리라 다짐했습니다.

 

가끔 세상이 믿기지 않아 눈을 비비고 다시 볼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반짝하는 건 무엇인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순간의 착각이나 망설임 같은건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늘 고민하고 그려 시 한 편으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다 나라고, 너라고도 부를 수 있는 개, 고양이, 동물, , 나무, 풀잎 늘 사랑합니다.

 

늘 친구처럼 손잡고 시 이야기하는 엄마, 가족들 항상 고맙고 감사해요. 제겐 고마운 스승들이 많이 계십니다.

 

고등학교 시절 가르쳐주신 선생님들, 아흔 아홉 개의 빛으로 빛나는 선생님, 동국대학교 선생님들, 박형준 선생님 부끄럽고 부족한 제 시 봐주시고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먼 곳에서 응원해주시는 지인들께도 두손 모아 감사를 전합니다. 아무것도 될 수 없어도 시 쓰는 우리라서 너무 행복해.

 

동국대학교 시 분과 영원하길! 나를 사랑하는 만큼 너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끝으로 아직도, 혹은 영원히 모를 시에게. 뜨고 다시 떠도 뜰 눈이 너무 많네요. 용기를 갖고 더 정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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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사물 바라보는 시선 깊고 메시지 견고

 

나이가 무색할 만큼 젊은 작가가 보여준 농익은 작품에 놀랍고 신선함을 느꼈다."

 

2019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심사를 맡은 심사위원들은 올해의 당선작을 '숲에서 깨다'로 정하는데 이견이 없었다.

 

심사위원들은 당선작에 대해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이 깊고, 전하는 메시지가 견고하다고 호평하며 성장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했다. 심사위원들은 올해 시 부문 응모작 총 1423편 가운데 본심에 오른 30편의 시 중 6편을 다시 추려 평가하며 고심을 거듭했다.

 

최종 심사에는 '곱슬의 방향', '가위 ', '호출신호, 창백하고 푸른 플라스틱', '걸리버여행기' , '구석의 깊이-비의 팔랭프세스트' 등 다양한 작품이 올라왔다. 올해 출품된 작품들은 주제에 있어 차별성이 있었다는 평을 받았다.

 

시리아 난민 등 애도가 짙고 다소 어두운 주제가 많았던 지난해와 달리 올해는 새로운 시대에 대한 기대감을 비롯해 실업, 경기침체 등 사회·경제적 문제, 정치적인 이슈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뤘다. 20~30대 젊은 응모자들이 그 어느 때보다 많아 신선하고, 재미있는 작품들이 많았다.

 

아쉬운 점도 지적됐다. 젊은 문학도들의 출품작들이 최근 유행하는 시의 경향을 따르는 경우가 많았는데, 심사위원들은 주로 생경하고 낯선 이미지들이 서로 결합하거나 시를 비학적으로 전치시키는 모습을 보여줘 시 읽기가 곤혹스러웠다고 말했다. 그에 비해 하채연 당선자의 '숲에서 깨다'는 시의 짜임새를 갖추면서도 시인만의 깊은 세계관이 엿보인다는 점에서 차별점을 선사했다.

 

새벽의 숲을 열어 재치는 해맑은 생각들이 긍정적으로 명랑하게 펼쳐있고, 숲에 존재하는 한 작은 개인이 우주와 교감하는 듯한 느낌을 안겨줬다며 이미지 자체가 매우 신선했다고 평가했다. 더불어 당선작을 포함해 응모된 작품 상당수가 어느 하나 크게 뒤처지는 것 없이 모두 고르게 작품성을 지녔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 심사위원 김명인 김윤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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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간 해변 / 이명선

 

 

검은 얼굴의 아이가 있어

조류를 타고 해변까지 밀려온 대륙의 아이가 있어

뿔뿔이 흘러가는 하늘에 흰 수리는 원을 그리며 비행하고 있어

 

거듭 얼굴이 풀어져 

뭍으로 오르려는 눈꺼풀이 흩어져 

 

반복의 역사는 번복되는 아이들로 가득해

창창한 것은 꿈의 세계야 검은 눈물로 적셔지는 땅도 있어 

 

우리에게 바다는 수평선 너머에도 있지만 

아이에겐 수평선 너머의 바다엔 해변이 없어

 

불시에 버리고 온 대륙처럼

감은 눈 속에서 모래 언덕이 푹푹 꺼지고 있어

 

반신반의 하는 얼굴이 있어

간절함은 체험이 아니야 찢기는 세계에 발을 담그면 붉은빛의 인내가 필요해

 

국경을 물고 가는 새야

하늘을 균일하게 나누면 새들로부터 망명한 낙원이 있을까

 

한참을 뛰어가도 숨이 차지 않는 해변이 있어

검은 얼굴의 아이가 부르던 난민의 노래가 밀려나가는 

 

 

 

 

[당선소감] 홀로서기를 마무리하며

 

며칠째 계속되던 한파주의보가 해제되었습니다. 당분간 한랭전선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전선이 사라진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안도합니다. 사라지지 않았는데 보이지 않을 때 저는 안도합니다. 베란다 밖으로 보이는 하늘을 올겨울 들어 처음 올려다봅니다. 시립니다.

 

시린데 온몸으로 퍼지지 않습니다. 지금 제가 뜨겁기 때문입니다. 눈이라도 펑펑 내린다면 더 시린 하늘을 찾아서 밖으로 나가려는 충동이 일 것입니다. 듣고 있던 노래의 볼륨을 더 줄입니다. 아예 들리지 않는다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제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혼자 생활하는 것이 편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걷다 보면 물 위거나 구름 위였습니다. 빠지거나 떨어질 수 있는 불편에 대한 직감으로 자주 붉거나 창백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낀다는 것이 평범이라는 걸 알지만 타고나길 그렇게 타고났나 봅니다.

 

그래서 늘 혼자 지냈습니다. 외출할 때마다 자주 모자를 썼습니다. 모자를 푹 눌러쓰면 타인의 시선뿐만 아니라 제가 보고자 하는 것들에서 가려질 것 같았습니다. 어떤 욕망도 제 것이 될 것 같지 않았습니다. 사라지지 않았는데 보이지 않을 때 저는 안도합니다.

 

저의 하루는 단순했습니다. 온종일 음악을 들으며 혼자 중얼거리는 것이 유일한 일이었습니다. 중얼거리다 보면 모든 중얼거림은 저에게로 다시 되돌아오곤 하였습니다. 되돌아오는 중얼거림을 언제부턴가 받아 적었습니다. 혼자 지내는 일치곤 매력적인 일이었습니다.

 

당선 소식을 받았습니다. 순간 혼자 중얼거릴 수가 없었습니다. 무작정 누군가에게 말을 걸어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여전히 없었습니다. 이제 사람과 사람 사이를 걸어가야겠습니다. 그 길을 내주신 경인일보사와 저의 중얼거림을 받아주신 심사위원님께 큰절 올립니다.

 

저에게 최초로 시를 보여주고 시의 길을 내준 이돈형 시인과 시의 날개를 펼치게 한 김지명 시인께 거듭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쓰겠습니다. 이 말이면 될 것 같습니다.

 

늘 애틋하게 지켜봐 주는 이종영, 이영선, 이영예, 김병찬 그리고 끝끝내 사랑인 재인이에게도 깊은 마음 전합니다. 하늘에서 지켜보고 계실 엄마, 아버지 곧 사진 가지고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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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절제·인내로 묘사한 인류의 비극

 

이명선 당선자의 '한순간 해변'은 지난 20159월 시리아 난민 아이의 죽음을 소재로 인류의 비극을 그린 작품이다. 심사위원들은 이 작품이 인류가 저지르고 있는 비극을 그리면서도 인내와 절제가 미덕인 시 세계를 펼쳤다고 평가했다.

 

1158편이 접수된 '2018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서 본심 심사위원들은 18편의 시를 골라 평가했다. 이 가운데 4편이 당선작 후보에 오르며, 심사위원의 매서운 심사대에 올랐다.

 

'한순간 해변''익투스' '수수께끼 나라의 첫 인사법' '미역국을 삼킨다는 것', 등이 당선 경쟁을 벌였다. 우선 '미역국을 삼킨다는 것'은 의미가 함축되도록 말을 활용하는 솜씨가 두드러진 작품이라는 평을 받으며 심사위원을 사로잡았다.

 

시상을 단단하게 다뤄본 느낌을 준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심사위원들은 섬세하게 형상화하는 작업이 아쉬웠다고 평했다.

 

종교적인 느낌이 강한 '익투스'는 시를 조여내는 실력, 한 편의 작품을 완성시키려는 의지가 읽히는 작품으로 잘 조정된 시적 발화를 보여줬다는 평을 이끌어냈다. '수수께끼 나라의 첫 인사법'은 시문이 유려하고 상상력이 돋보인 작품으로 마지막까지 당선작과 자웅을 겨뤘다.

 

본심 심사위원들은 '한순간 해변'의 이명선 당선자가 당선작 외에도 응모한 시가 고루 상당한 실력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줬다. 좋은 시인을 발굴했다고 입을 모았다.

 

반면 심사위원들은 응모자들이 실험적인 작품쓰기에 주저한 것에 대해선 아쉬움을 표했다. 현실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시에서 사유의 날카로움이 드러나지만, 대체로 서정적인 작품이 많았다고 지적했다.

 

심사위원들은 가족과 개인으로 세상을 보는 눈이 좁아진 것이 각박한 현실 속을 살아가는 이들의 생존법을 반영한 것 아닌가 하는 우려를 표했다.

 

마지막으로 시인을 꿈꾸는 응모자들에게 시를 통해 가보지 않은 낯선 곳에 가려는 노력을 당부했다.

 

- 심사위원 : 김명인, 김윤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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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역귀 / 성영희

 

 

미역은 귀로 산다

바위를 파고 듣는 미역줄기들

견내량 세찬 물길에 소용돌이로 붙어살다가

12첩 반상에 진수(珍羞)로 올려 졌다고 했던가

깜깜한 청력으로도 파도처럼 일어서는 돌의 꽃

귀로 자생하는 유연한 물살은

해초들의 텃밭 아닐까

 

미역을 따고나면 바위는 한동안 난청을 앓는다

돌의 포자인가,

물의 갈기인가, 움켜쥔 귀를 놓으면

어지러운 소리들은 수면 위로 올라와

물결이 된다

파도가 지날 때마다

온몸으로 흘려 쓰는 해초들의 수중악보

흘려 쓴 음표라고 함부로 고쳐 부르지 마라

얇고 가느다란 음파로도 춤을 추는

물의 하체다

 

저 깊은 곳으로부터 헤엄쳐 온 물의 후음이

긴 파도를 펼치는 시간

잠에서 깬 귀들이 쫑긋쫑긋 햇살을 읽는다

 

물결을 말리면 저런 모양이 될까

햇살을 만나면 야멸치게 물의 뼈를 버리는

바짝 마른 파도 한

 

 

 

 

[당선소감] 마르기 전 마지막 숨결을 풀어 놓을 것

 

당선 통보를 받는 순간 일생을 통틀어 가장 즐거운 귀를 경험했습니다. 수화기 반대쪽 귀를 다른 한 손으로 감싸며 이 순간이 제발 꿈으로 빠져나가지 않길 간절히 바랐습니다. 깜깜하게 닫혀 있던 귀를 열고 그 안쪽에 싱싱한 해조류 한 포기 착생하는 듯 짭조름한 눈물이 고였습니다. 돌에서도 꽃이 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 미역귀, 바짝 마른 미역귀를 물에 담그면 양푼 가득 푸른 바다는 수돗물에서도 탱탱하게 부풀곤 했습니다. 그건 마지막 숨결들을 풀어 놓는 일, 마르기 전의 물살을 기억해내는 일이었습니다.

 

제 몸을 원래대로 부풀리는 일, 잊지 않겠습니다. 시란 세찬 물길 속에서 소용돌이로 붙어사는 미역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흔들릴수록 어지럽고 어지러울수록 세찬 파도가 더욱 그리운 돌미역 같은 것. 귀를 잃고 난청을 앓는 돌과 바짝 마르면서 웅크린 미역귀처럼 다시 파도를 간절하게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몇 차례의 최종심에서 탈락하면서 깜깜하게 닫혀가던 내 귀에 천 번은 더 흔들려야 비로소 한 줄기 물살로 피어나는 미역귀처럼, 귀를 열고 다시 겸허해지라는 파도의 전언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난 주일은 뒤늦은 세례를 받은 날이었습니다. 길고 험한 파도를 지나 기도하는 삶을 선택한 저에게 찾아온 응답이 순은으로 아름답군요. 부족한 시를 끝까지 놓지 않고 격려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경인일보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또한 시 쓰는 딸을 누구보다 자랑스럽게 여기시며 마지막 손을 꼭 쥐어 주셨던 아버지와 홀로 남으신 어머니께 가장 먼저 이 영광을 드립니다. 시 쓴다고 아내로 엄마로 부족하기만 했던 저에게 묵묵히 응원의 힘을 실어준 남편과 딸 다영이와 아들 연욱에게 고맙고 감사한 마음 전하며 늘 든든한 방파제가 되어주신 문우님들과 이 기쁨을 함께 합니다.

 

 

 

귀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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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인생론적 깊이 구체화한 은유

 

2017년도 경인일보 신춘문예에는 참으로 많은 분들이 응모해주셨다. 그 매체적 위상이 하루하루 높아져가는 경인일보에 수준 높은 작품들이 이렇게 많이 투고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소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심사위원들은 본심에 부쳐진 작품들을 여러 차례 읽어가면서, 많은 작품이 만만찮은 안목과 역량을 보여주었다는 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 시단에서 주류를 형성한 시풍을 답습하거나 판박이에 가까운 관습적 언어를 보여주는 대신, 스스로의 경험적 구체성에 심의를 쏟은 것도 썩 긍정적으로 생각되었다. 이 모든 것이 한국 시의 좌표를 새롭게 개척해가려는 생성적 면모일 것이다. 심사위원들이 주목해서 읽은 분들을 가나다순으로 밝히면 강성애, 고은진주, 김기란, 김문숙, 나혜진, 성영희, 오세정, 이동우, 임상갑, 하예주 씨 등이었다. 오랜 토론과 숙의 끝에 심사위원들은 성영희 씨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당선작으로 결정된 성영희 씨의 '미역귀', 바위에 달라붙은 미역줄기의 외관과 생태와 속성을 활용하여 인생론적 깊이를 드러낸 수작이다. ''로 살아가는 미역은 비록 깜깜한 청력을 가졌을지라도 언제나 파도처럼 일어서는 '돌의 꽃'이다. 그런데 미역을 따고나면 바위는 난청을 앓게 되고, 그렇게 바위와 미역이 구성하는 바다 풍경이 잠에서 깬 귀를 열어 다시 햇살을 읽어내는 풍경은, 그 자체로 '쫑긋쫑긋' 삶의 이치를 듣게 되는 우리의 모습을 고스란히 은유해준다. 다른 출품작들도 균질적인 성취를 보여 크게 믿음이 갔다. 더욱 성숙한 시편들로 경인일보의 위상을 높여주기 바란다.

 

당선작에 들지는 못했지만, 구체성과 심미성을 갖춘 언어를 통해 자신만의 미학적 성채를 구축한 사례를 많이 발견하였다는 점을 덧붙인다. 대상을 좀 더 일상 쪽으로 구체화하여 우리 주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타자들을 애정 깊게 응시한 결실들도 많았다. 다음 기회에 더 풍성하고 빛나는 성과가 있을 것을 기대하면서, 이번 응모자 여러분의 힘찬 정진을 마음깊이 당부 드린다.

 

- 심사위원 : 신달자,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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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봉 / 김이솝

 


파르티잔들이
노모의 흐린 눈에 가을을 찔러 넣는다.
턱밑에 은빛 강물을 가두고 은어 떼를 몰고 간다.

쿵! 폭발하는 나무들.

온통 달거리 중인 대봉 밭에
감잎 진다.

며느리가 먹여주고 있는 대봉을
다 핥지 못하고
뚝뚝, 생혈(生血)을 떨구는 어머니.

남편과 아들이 묻힌 지리산 골짜기
유골을 찾을 때까진 살아 있어야 한다고
삽을 놓고 우는 섬진강변.

귀를 묻고 돌아오는 저녁.

 

 

 

 

[당선소감] 겨울비처럼 세상에 붐비는 시를 써갈 것

 

빗방울이 차갑게 공중에 붐비고 있습니다. 8층에서 내려다보는 세계는 어제와 다르지 않습니다. 어제까지의 김이솝이 아닌 것에 대하여 스스로 놀라고 있습니다.

 

신춘문예 당선 소식을 접하기 전과 후의 모습이 이렇게 다를 수가 있는 것인지! 정말 이래도 되는 건지. 어느 날 갑자기 시가 찾아와 평생 열병을 앓게 하고 시 중독자로 만들어 버리더니 이젠 아예 신춘문예 당선이라는 시 내림의 형벌을 가하고 맙니다.

 

그러나 나 자신이 자초한 일입니다. 그 운명을 받아들입니다. 세상의 모든 상처와 역사와 시간의 긴 타래 속에서 더 고뇌하고 좌절하고 극복하라는 명령을 내가 내립니다.

 

시가 나를 구원해 준 것처럼 내 시가 아파하는 모든 사람, 사물,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들을 치유하고 구원해 주기를 바랍니다.

 

소통되는 시를 쓰겠습니다. 지금 내리는 겨울비처럼 세상에 붐비는 시를 쓰겠습니다.

 

장석주 선생님 감사합니다. 신미균 시인님, 이진명 시인님, 임동윤 시인님, 문정영 시인님 감사합니다. 시사랑 회원님들, 서교동 시의 도반, 문우님들 감사합니다.

 

미천한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경인일보 담당자님들 정말 고맙습니다.

 

앞으로 좋은 시 쓰겠습니다!

 

 

 

 

 

이유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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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역사의 질곡이 준 상처를 보듬기 위하여

 

예상을 넘어서는 좋은 수준의 작품이, 그것도 예년보다 훨씬 많이 답지한 것은, 중앙과 지방의 간격이 그만큼 좁혀졌다는 뜻일 터이다. 수원과 인천은 물론 서울에서도 많은 예비시인들의 작품이 날아와 쌓였다.

 

당선작은 신춘문예 역사상 유례가 없었을 거라 생각되는데, 지리산 일대에서 준동하다 죽어간 두 파르티잔(빨치산)과 죽음을 지켜본 어떤 여성의 생을 다룬 시다. 현대사와 가족사와 개인사가 중첩되어 있는데 시는 짧다. 한국전쟁 전에, 전쟁 과정에, 그리고 휴전 후에 몇 명이 지리산 일대에서 죽어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남편과 아들이 묻힌 지리산 골짜기/ 유골을 찾을 때까진 살아 있어야 한다고 삽을 놓고 울던, 고인의 어머니와 아내는 이제 연로해 몸도 마음도 성치 못하다. “며느리가 먹여주고 있는 대봉을/ 다 핥지 못하고/ 뚝뚝, 생혈(生血)을 떨구는 어머니의 그 생혈은 눈물일까 홍시일까. 눈도 귀도 어두운 노파는 눈이 잘 안보이는 이유가, 귀가 잘 안 들리는 이유가 노환에만 있지 않다. 그 시절에 젊은 아낙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고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들었다. 노화로 인한 것이 아니라 60년 세월이 흘러도 아물지 않은 상처 때문임을 알고 있는 시인의 역사의식을 두 심사위원은 높이 사기로 했다. 생략과 비약이 좀 심한 것이 약점이지만 독특한 은유법과 의미심장한 상징화는 칭찬해줄 만한 장점이다.

 

작품 자체의 완성도는 소 발굽에서 꽃피고(박윤우)’가 단연 높았다. 문제는 이 작품을 받쳐주는 작품이 없다는 것이었다. 시 한 편만 놓고 본다면 신춘문예 당선작 중에서도 화제가 될 시인데 아쉽고 안타깝다.

 

도배사(홍정선)’의 튼튼한 주제의식, ‘늦은 마트(권수옥)’의 따뜻한 시선, ‘절름발이(이경동)’의 세심한 관찰력, ‘스타킹페티시(이인영)’의 신세대적 감각도 놓치기 아까웠지만 내년을 기약하며 더욱 열심히 습작하기 바란다. 한두 해 늦게 등단해서라도 오래오래 시를 쓰는 것이 중요한 일이므로. 당선자에게는 축하의 박수를 보내고, 낙선자들에게는 격려의 악수를 청한다.

 

- 심사위원 : 최동호, 이승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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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이크 / 이인서

 

 

쨍하는 소리와 함께 앞집 유리창이 깨졌다 얼음판을 돌로 친 것처럼 어느 일성이 내놓은 모자이크, 여전히 붙어 있는 파편들은 찡그린 얼굴 같다

 

작은 구멍이 난 곳을 정점으로 사방으로 퍼져나간 사나운 선들, 그 앞을 누군가 서성거리고 창밖의 나무 한 그루가 모자이크 처리된 채 서 있다

 

살얼음이 낀 12월의 안쪽은 왠지 범죄 냄새가 난다 조각 난 얼굴 위로 가끔 변검을 한 목소리가 튀어나오고 모자이크 속 남자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

 

깨어진 균열의 힘으로 버티고 서 있는 집, 깊숙한 구석까지는 채 다다르지 못한 금

 

깨진 햇빛 조각 하나가 섞여 있는 창문

 

문을 꽝, 닫으며 뛰쳐나가는 여자 뒤로 은행나무 마른 가지들이 뿌연 하늘을 모자이크 처리하고 있다

 

 

 

 

[당선소감] 겨울의 잔인한 풍경이 행운 가져다줘

 

얼마 전 스페인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바르셀로나, 피카소 작품이 전시된 미술관에서 피카소의 비둘기 한 마리를 사왔습니다. 가끔 들여다보며 주문을 외우곤 했지요.

 

그러던 중 잠깐 낮잠을 자고 일어나다가 꿈인 듯 생시인 듯 당선소식을 들었습니다. , 주문대로 이루어지다니 눈앞에서 희디흰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오르는 게 보였습니다.

 

늦게 시작한 공부로 인해 그동안 외로우셨을 우리 엄마, 사랑하는 가족들, 죄송해요. 그러나 사랑해요. 믿고 응원해준 준상 씨 고맙습니다.

 

그 겨울의 잔인한 풍경이 제게 이렇게 큰 행운을 가져다줄 줄은 몰랐습니다.

 

늘 생생한 상상력을 자극해주고 격려해주신 김영남 선생님과 정동진 회원님들 감사합니다. 그동안 길잡이가 되어준 수많은 시인들과 문장들에게도 고맙다고 인사합니다.

 

부족한 제 글을 뽑아주신 문정희 선생님, 유성호 선생님께도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더욱 열심히 좋은 시를 쓰라는 채찍으로 알고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쓰겠습니다.

 

 

 

 

말이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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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안정성·진정성·밀도 잘 어우러진 결실

 

경인일보 신춘문예에 참으로 많은 분들이 응모해주셨다. 그 매체적 위상이 하루하루 달라져가는 경인일보에 읽을 만한 작품들이 이렇게 많이 투고되고 있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심사위원들은 본심에 부쳐진 작품들을 여러 차례 읽어가면서, 일부 작품들이 만만찮은 안목과 역량을 보여주었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시단의 주류 형식을 추수하거나 판박이에 가까운 관습적 상상을 보여주지 않고, 스스로의 경험적 구체성에 정성을 쏟은 것도 퍽 긍정적으로 느껴졌다. 이 모든 것이 우리 시의 미래적 좌표를 개척해가는 생산적 면모라고 생각되었다. 심사위원들이 주목한 분들을 가나다순으로 밝히면 김건화, 김덕현, 김재희, 김효숙, 소선아, 오늘샘, 이인서, 이준성, 한용규 씨 등이었다. 오랜 토론 끝에 심사위원들은 이인서 씨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당선작으로 결정된 이인서 씨의 '모자이크'는 몇 개의 감각적 장면들을 모자이크한 일종의 감각 시편이다.

 

충격과 반응으로서의 '''파편' 사이에서, '구멍''사나운 선' 사이에서, '목소리''얼굴' 사이에서 각각의 모자이크들은 스스로의 독자성과 서로를 얽는 연관성을 동시에 완성하고 있다. 결국 "깨어진 균열의 힘으로 버티고 서 있는 집"이라든지 "깊숙한 구석까지는 채 다다르지 못한 금" 등의 표현이 시인이 ''를 통해 가 닿고자 하는 세계에 대한 불가피성과 불가능성을 동시에 알려준다. 그래서 "깨진 햇빛 조각 하나가 섞여 있는 창문"은 시인이 가 닿아야 할 ''의 궁극적 좌표가 되는 셈인데, 결국 이 시편은 자신이 어떤 시를 써야 할지를 모자이크로 그려낸 일종의 메타시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안정성과 진정성 그리고 밀도가 잘 어우러진 결실이라고 생각된다.

 

당선작이 되지는 못했지만, 구체성 있는 언어를 통해 자신만의 언어적 성채를 구축한 경우를 많이 발견하였다는 점을 덧붙인다. 시적 대상을 좀 더 일상 쪽으로 구체화하여 우리 주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타자들을 애정 깊게 응시한 결실들도 많았다. 다음 기회에 더욱 풍성하고도 빛나는 성과가 있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이번 응모자 여러분의 힘찬 정진을 당부 드린다.

 

- 심사위원 : 문정희,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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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의 난독증 / 조유희

 

 

의자 위에 두 개의 오렌지가 놓여있어요 나는 저 오렌지를 노란 앵무새라 불러요 한 마리는 어제로부터 날아왔고, 또 한 마리는 내일로부터 날아왔어요 어제의 혀가 내일의 혀를 그리워할 때, 당신은 내게 상큼한 거짓말로 다가왔어요

 

나는 당신을 앵무새라 불렀지요 당신과 나 사이의 간격은 너무 아슬해서 도저히 잡을 수 없어요 한 자리에 오래 머물지 못한 앵무새는 사·····해를 원했어요 그럴 때마다 하나씩 뽑아낸 깃털 때문인지 앵무새는 몇 초마다 각을 세워요 나는 우울한 오렌지를 갖고 싶었지요

 

구차한 변명 따윈 상관하지 않을래요 잊지 말자는 그 매혹적인 말, 그 말을 따라가면 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요? 어제의 의자에 내가 머물지 못한 것은 오늘의 당신이 혼자이기 때문이지요 혼자가 아니라 둘이라서 오렌지는 앵무새가 되고, 오늘의 의자가 어제의 오렌지를 기억하듯 나도 내일의 앵무새를 기억할래요 오렌지가 오렌지를 사랑하는 오늘밤에 과연 내가 당신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 경인일보 2014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앵무새의 난독증'이 타 신문 신춘문예에 중복 신청된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미리 고지한 본사 신춘문예 응모 규정을 어겼기에 당선을 취소합니다.

 

 

 

[당선소감] 혼자 아닌 세상 가르침 새길 것

 

아코디언같은 계단을 오를 때마다 행진곡처럼 돌진하였고, 연가처럼 슬퍼서 주저앉았고, 그러다가 심장 박동같은 운명임을 실감하는 순간 그렇게 백일몽에서 깨어났다. 아무것도 아닌 나를 발견한다.

 

오후 다섯 시, 휴대전화가 울린다. 나는 얼떨결에 신춘문예 당선 소식을 듣는다. 담당 기자분이 "기쁘지 않느냐"며 되묻는다. "나는 잠결에 받아서요"라고 대답한다.

 

시는 나를 들여다보는 거울이자 절대자다. 원고지 같은 당선에 잠시 주춤한다. 혼자 걸어가는 길이기에 나는 두렵다.

 

하지만 혼자가 아닌 세상과 함께 내게 들려주던 선생님들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언제 끝날지 모르는 여정에 동참한다.

 

나를 아껴준 문우와 원우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무엇보다 좌절할 때마다 나를 격려해 준 가족과 형제들에게 감사한다.

 

부족한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께 진심으로 감사 인사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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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연애시 빌려 불통의 시대 횡단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작품은 11인의 총 39편이다. 모처럼 따듯한 성탄 전날, 수원본사에서 회동한 심사위원들은 단도직입적으로 당선작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엘뤼시온''앵무새의 난독증'이 단연 돋보인다는 점에 쉽게 합의했다. 우선 두 후보자 모두 응모작들의 전체적 수준이 비교적 고르다는 점이 고려되었다. 작품들 사이의 비대칭성이 눈에 띄게 두드러지면 미래를 전적으로 신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들의 시는 아류로부터 자유롭다.

 

만만치 않은 시력(詩歷)이 감지됨에도 불구하고 읽고 나면 어떤 기시감(旣視感)에 약간의 실망을 금치 못하던 작품들에 대한 안타까움 탓에 두 작품이 보여준 자신만의 활달한 어법은 종요롭다.

 

'엘뤼시온'은 무엇보다 관념을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 사유능력이 주목된다. "타인의 웅변에 깃들어 살아왔다"로 시작되는 그 서두도 범상치 않지만 남의 시선에 지핀 즉자(卽自)가 그 장막을 찢고 스스로 대자(對自)로 진화하는 정신의 율동을 싱싱하게 보여주는 바가 아름답기조차 한 터다. 그런데 시 후반부로 갈수록 주의적(主意的)인 경구(警句)들이 돌출하여 관념성을 노출하는 게 흠이다. 교훈시 비슷한 경향성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과제다.

 

'앵무새의 난독증''당신'의 유혹에 응답하는 일종의 연애시다. 그렇다고 그냥 익숙한 낭만적 서정시냐 하면 아니다. 지적 조작이 만만치 않다. 리듬과 리듬, 이미지와 이미지, 그리고 논리와 논리 사이의 연락이 마치 재봉 자국이 보이지 않을 만큼 조밀한 터다. 그렇다고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갔나 하면 그것도 아니다.

 

이 시를 지배하는 어조는 기본적으로 해학이다. "어제의 혀가 내일의 혀를 그리워할 때, 당신은 내게 상큼한 거짓말로 다가왔어요"라든가, "잊지 말자는 그 매혹적인 말, 그 말을 따라가면 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요?"처럼 말과 말 사이가 성글다. 그 틈 사이로 사랑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실험하는 물음이 솟아오른다. "오렌지가 오렌지를 사랑하는 오늘밤에 과연 내가 당신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연애시를 빌려 이 불통의 시대를 횡단하는 용기를 불사하는 시인의 뜻이 이만큼 절실하다.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삼는 데 최종 합의하였다.

축하한다. 정진을 바란다.

 

- 심사위원 : 고은, 최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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