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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시작 신인상 당선작] 김영호 배지영

 
고공에서 외 4편 김영호


고공에서 

 


황조롱이 한 마리가 바람과 주파수를 맞추는 중 고층건물에 오르면 창문이 자주 흔들려 자꾸만 속삭이는 통유리 진실 창밖으로 펼쳐지는 실외가 아닌 실내

 

조용히 실체와 그림자가 어긋나는 중

 

이것은 어느 봄날의 연애 이것은 한 남자가 두 여자를 사랑하는 얘기 두 여자의 사랑으로 끝나는 얘기

 

사랑은 즐거워 우리는 말이 안 통해하지만 같은 곳에서 비를 맞을 거야 아니라고 하면 아니야, 맞다고 하면 맞아, 나는 순종적인 아내 매일 아침 불륜을 저지르는 손가락

 

그리고 정교하게 칼집 난 구름들만 남았다 구름들은 계속해서 제 몸에 칼집을 내지 부드러운 육질을 위해 빛과 바람이 마음대로 드나드는 칼집이 되지

 

그러나 길이 있어도 가지 않을 거야

 

은유의 맥박이 멈추고 공중의 거대하고 낡은 쇠사슬이 쳐진다 더 이상 날지 못하고 가라앉는 새 구속되는 즐거움 구속되는 턱뼈 고립되고 싶어 높이 서고 싶어

 

수백 개의 섬이 석양에 일그러지며 하나의 선이 되어간다 일제히 내리는 비 땅에서부터 천천히 일어나는 비

 




에너지

 

 

건너편 옥상에서 태양열 집열판이

빛을 끌어모으고 있다

 

창가 옆에서 그는 잠들었다

그의 남색 셔츠가 빛나고 있다

 

조도가 최대에 이르자

교실바닥에 비치는 창문의 힘줄

 

에너지를 모으고 잇어

 

멀리서 누군가 그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의 눈빛과 말투

생각과 그림자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순간 뒷문이 열리고 거대한 빛과 함께

그가 사라졌다

 

여전히 그는 꿈꾸고 있었다

꿈꾸는 척하고 있었다

밤새도록 교실이 환하게 빛났다

 




아름다운 정원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 마을에

소년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직 소년이 아끼는 초록 전지 가위와

검고 낡은 장화만이

정원 수풀 사이로 언뜻 보였다고 했다

 

그에 관한한 마을 사람들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정말

그의 전지가위는 사정없이 쳐냈기 때문이다

 

정원은 흠잡을 데 없었다

조화로운 색채와 풍부한 조도

자랑거리를 떠나서 마을 사람들은

진정으로 정원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귀 먹은 노인 하나가

정원의 빈 가위질 소리에 뛰쳐나갔다는데.............

 

아무도 그를 보지 못했다

마을 사람들은 소년을 의심했으나

누구도 소년의 이름을 꺼낼 수 없었다

 

모두의 집에 초록 전지가위와 낡은 장화가 하나씩은 있었기 때문이다

 

며칠이 지나고 마을은 다시 평화를 되찾았다

고요하고 아름다운 마을

 

마을 사람들은 흠잡을 데 없었다

조화로운 색채와 풍부한 조도

자랑거리를 떠나서 정원은

진정으로 마을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연날리기

 

 

오늘은 연을 띄웠다

우리는 서로 사랑한다

 

아 하고 입 벌리면

당신 입속에 가늘게 떨리는 댓가지가 보여

 

우리는 안정된 기류에 들고 싶었다

묘기와 같은

흔들림만 있는

 

서로 경멸하기로 해

영원히 놓아주지 않을게

높이가 필요한 것뿐이니까

 

십이월의 바람이 연의 마음에 둥근 구멍을 내고 있었다

 

더 이상 품어지지 않을 때까지

얼레는 멈추지 않고 돌아가고

 

실이 풀려나는 만큼

우리는 가까워지는 거야

 

팽팽한 연실 혹은

당신과 나

 

우리는 이제

사랑이라 굳게 믿고 있다


 

 

 

실종

 

 

나무는 천천히 공중으로 가지를 뻗어 나가고 있었다 밑동이 없었다 그곳으로 바람이 지나가다 멈춰 섰다 여긴 어디지 나는 누구일까

 

한참을 서성이던 여자는 주위를 둘러보고 두터운 외투 속에 감춰두었던 긴 목을 뻗어 올리고 있었다 머리에서 두 개의 뿔이 천천히 자라났다

 

애초부터 느낌은 없었다 예측은 모두 거짓말이 되었다 천체관측학자들은 오늘, 대기권을 향해 전속력으로 상승하는 운석을 목격했으나 발표하지 않았다

 

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과녁

계속해서 생겨나는 물음

 

구름이 걷히자 드러나는 하얗고 거대한 공중의 교각 그 위에 가스통을 실은 트럭 불붙는 트럭 나의 트럭


천체의 어깨가 탈골된 뒤에도 봄은 오고 잎은 자랐다 불 꺼진 동물원에서 기린은 계속해서 잎을 뜯어 먹고 아래에서 나는 물었다

 

무슨 맛입니까?

 






속기 외 4편 배지영


속기 

 


나는 당신을 아주 빠르게 받아 적는다

잘 보이지 않는 모습과

질 들리지 않는 말이 있었지만

이것은 예비의 착상이었기에

모호함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가볍게 넘기며

어떠한 점과 글자들이 지나가고 기록이

너무 빠른 나머지

스케치를 하듯이

당신은 이제 선 하나로 설명이 된다

추상적이다 피카소의 소처럼

나는 당신을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안도한다

당신은 당신이 아니게 되었지만

전부라고 해도 무방하다

당신은 지긋지긋하게도

거의 모든 곳에서 생겨나고 있다

당신은

나의 신이다


 

 


모닝 베이커리

 

 

당신과 사랑을 나누면 허벅지

안쪽이 붕 뜨는 기분이다

 

달달하게 반죽한 밀가루가

오븐에 부플어 오른 것처럼

 

금방 꺼내어 펄펄 뜨거운 상태도,

아주 식어사 차갑게 바삭바삭

바스라져버리는 상태도 아닌 미적지근한 온도

 

말랑한 겉 부분과

습도 높은 공기로 가득 찬 그곳

고소한 냄새

 

서로의 손이 깍지를 끼면

어린아이의 손과

요리의 끝을 맺는다

 

등줄기에 매달린 당신과

좋은 하루의 작별키스를 한다

아직도 난 그 미적지근한 온도를 유지한 채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한다

 

당신의 품은

따뜻한 집이자 짐이다


 

 

 

꽃자리

 

 

내가 사랑한 건 까마귀였다

할머니는 깨를 볶아 대야에 담았고

고양이는 거기에 똥을 쌌다

신이 일하지 않는 돼지의 긴 코를 잘랐다

오빠는 자르지 않은 연근을 던진다

등 굽은 검은 염소의 호흡이 무너지면

검불은 어김없이 타오른다

입술 색이 같은 여고생들이 떼로 몰려오자

자궁 속에서 밤나무가 자랐다

은하수가 유성의 닻을 애만지고

매미 위에 기름공이가 고깔춤을 추자

가을 햇덧에 서리병아리가 태어났다

씨 없는 처녀 땅은

살꽃 한번 못 피우고

흉터 같은 그늘만 솟아난다

떠돌이 여자의 몸이고 싶다

 

 



과조*

 

 

너는 어쩜 눈이 이렇게 기니

감은 눈 위로

알록달록 색깔을 칠하며

네 성병에 대해 침묵했던 그 시간

자, 봐봐 하고 손거울을 건네자

너는

바닥에 반사된

한 뼘 정도의 빛에

가만히 손을 대어본다

곧 죽을 병아리처럼

꾸벅꾸벅 졸다가

이젠 좀 괜찮아진 것 같다는 너

그랬니, 그랬니, 대답하다가

다 담지도 못할 말이 쏟아져

내 살에 도로 붙었다

삶을 놓아버린 사람에게

대화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도대체 뭐가 괜찮은 건데, 라는 말은

배 속에서

산산이 찢어두기로 한다

 


*볕이 적게 비치다

 

 

 


기질

 

 

입을 벌려야 할까 입을 다물어야 할까

시청 입구에 큰 붕어는 하루에도 멏 번씩 고민을 한다

그게 오래된 고민이었다는 것조차 계속 잊는 듯

무엇 하나 뱉지도 삼키지도 않는 입질을 계속했다

 

입을 벌렸다가

입을 다물었다가

혀를 내밀었다가

말아 넣었다가

 

말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게만큼이나 짓눌리는 액체의 부력을

최대한 친화적으로 참아내려

 

붕어는 정확한 발음이라는 걸 하려다 말았다

살아남기 위해서

평생을 불행함에 몰입했다

 

턱의 기억이

사라진지 오래다





출처 : 신춘문예공모나라
글쓴이 : copyzigi 원글보기
메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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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회 시작신인상 당선작] 최원 차성환

 

마른 잠 외 4/ 최원

 

 

천년 묵은 뱀은 팔다리가 생기고 귀가 자라고

사람처럼 말도 한다는데

뱀 한 마리가 똬리를 틀고 있다

 

목줄기에 차곡차곡 빛이 쌓인다

한 손에 잡고 있는 푸른 술병

항온동물로서 여름 햇살을 온전히 받으며

생의 일부가 삭제되는 중이다

 

뱀은 밟는 것이 아니다

뱀은 죽이는 것이 아니다

뱀은 발을 구르고 주문을 외우며 몰아내야 하는

멸시의 동물이 아니다

뱀은 그냥 뱀이어서 살다 보면 돌돌 말릴 일도 있으므로

머리와 꼬리가 맞닿은 잠

시작과 끝을 구분할 수 없는 잠의 머리맡에서

한낮이 발효되는 것이다

 

한때 우리에게는 궁극이라 불리는

아름답게 독기 서린 꼬리가 있었고

태양의 밀어를 해석하는 귀가 있었고

나무의 그림자는 이쪽에서 저쪽으로

부드럽게 얼굴을 쓸고 지나갔다

 

늙은 유두 같은 꼬리를 물고

꾸는 꿈은 무르다

쉽게 부스러지는 꿈의 밖에서

오후의 느린 햇살이 어깨를 누른다

누구에게나 일몰이 올 것이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끌고

인파 속으로 흘러드는 그의 뒤에서

하루가 짧은 얼굴을 풀어 놓는다

 

 

 

앵두나무 맞은편

 

 

연탄 화로 둘레에 세 중노인 매일 앉아 있다

골목길 건너 담장 밖으로

앵두가 빨갛게 익었다

 

페인트 벗겨진 담벼락마다

재개발 공고문이 너덜거리는 이 동네에서

꽃이 피기 전부터 열매가 익을 때까지

한 무리 새처럼

그들은 같은 얘기만 한다

달궈진 석쇠 위에 알밤 몇 개

어제는 찬성 둘 반대 하나

오늘은 찬성 하나 반대 둘

그런 걸 변심이라 하는데 내 맘 나도 모르겠다며

자진처럼 벌주를 마시는 걸 변명이라 하는데

찬반의 주장들이 귀 떨어진 밤처럼 피식피식 익어 갈 때

안주가 익기를 기다리는 그들은

때론 아군으로 때론 적군으로

변심과 변명을 데워진 혈액처럼 순환시킨다

 

떨어진 앵두를 주워 술잔에 담근다 그런 게 있다

술잔에 빠지면 커 보이는 앵두처럼

붉고 둥근 것은 달콤할 것이라는 오래된 인식처럼

식어 가는 화로 위에 부풀어 오르는 저녁

잔이 채워졌다 비워졌다 한다

앵두가 커 보였다 작아 보였다 한다

먹을 수도 먹지 않을 수도 없는

붉고 둥글고 말랑거리는 것이

술잔 속에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한다

입술에 닿았다 떨어졌다 한다 

 

 

 

미주 명신 아진 그리고 나

 

우리는 회현동의 오래된 삼류 호텔 술집에 함께 있었다 명신과 나는 술을 나르고 미주는 술을 따랐다 아진은 미주의 옆자리에서 사내들에게 쉽게 가슴을 꺼내 보이던 여자 미주는 아름다운 구슬처럼 화장한 검은 눈이 도도한 여자 그런 여자를 사랑하지 않을 사내는 없을 것이므로 미주가 지나칠 때 이는 바람 앞에서 명신과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곤 했다 그것이 그녀의 영혼이라고 생각했던 명신은 언제부턴가 미주의 앞에서 말을 쉽게 잊었다 미주는 많은 사내들이 찾는 여자였으므로 취한 메뚜기처럼 룸을 옮겨 다니곤 했는데, 그러다 사내들에게 들키곤 했는데, 명신은 미주 대신 따귀를 맞았고 미주는 호텔 룸 키를 들고 사내와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날 술집에서 명신은 마른 화초처럼 취했다 어릴수록 흔한 일에 분노했고 명신은 그것이 사랑이라고 믿었다 막 전역한 명신은 눈이 붉은 사내 미주와 아진을 꼬드겨 질척하게 놀아 볼까 반쪽짜리 농을 치던 나를 노려볼 때도 복학할 때까지만이라고 더듬더듬 말할 때도 그랬다 그러는 사이에도 사내들은 미주를 사랑했을 것이다 하룻밤 사랑하고 한동안 잊고 다시 하룻밤 사랑하고 긴 시간 잊고 다시 하룻밤 사랑하고 긴 시간 잊곤 하며 시간이 흐르고 있었을 것이다 몇 년 후 명신은 지하철 기관사가 됐다고 마지막 전화를 했다 그렇게 흘러가던 시간의 끝인 어느 아침 출근길 미주를 본 것이다 내가 열차에서 내리고 반대 방향에서 열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어두워지면 모이고 해 뜰 무렵 헤어지던 시절의 기억은 그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그 원숙한 여인은 미주였을 것이다 찌익찌익 옷상자에 박스테이프 붙이는 소리가 먼지처럼 매캐하던 회현동의 지하철역이었으므로 미주여야 했다 명신 또한 그 시각 뜨거운 바람을 몰고 들어오던 열차의 운전석에서 미주를 봤어야 하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계단을 오르고 있었고 아직 열차가 움직이고 있었지만 한눈에 알아봤어야 하는 것이다 한 시절의 사랑이라는 것이 그렇듯, 어둠 속을 달리던 명신에게 인파 속에서도 그 시절의 사랑을 단번에 찾아내는 것은 의무였을 것이다 그날 거기에 미주가 있었고 내가 미주를 봤으며 명신도 미주를 봤어야 하는 것이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내리고 타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을 시간이라는 말을 뼈저리게 공감하며 명신의 붉은 눈은 미주를 움켜쥐고 있어야 한다 나와 아진, 그리고 낡은 술집에서의 한때를 기억해 냈어야 한다 그 시절의 표정으로 문 닫는 것을 잠깐 잊어도 좋았을 것이나 명신은 미주를 향한 욕망 혹은 채우지 못한 욕정 대신 자신만을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를 떠올리며 열차를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운행은 순조로울 것이고 명신은 조금은 들뜬 그러나 중년의 목소리로 차내 방송을 했을 것이다 문 닫습니다 열차 출발합니다 이 열차는 당고개를 출발하여 오이도까지 가는 열차입니다 감사합니다 아니다, 특별한 날의 특별한 방송을 중년의 명신은 했을 것이다 지하를 벗어나 중천을 향해 서서히 기어오르는 태양빛 가득한 지상을 언덕을 지나 평지로 때론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흰 구름의 동쪽에서 노을 짙은 서쪽으로 나아가는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바랄 법한 생을 빗댄 방송을 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랬어야 한다 그러므로 바쁜 출근길 말 없는 사람들이 생은 어찌 됐건 해피엔딩이라고 믿으며 출근 도장을 찍을 것이고 하루를 또다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모두가 바라듯 해피엔딩이어야 한다 그것이 내가 이 상투적인 이야기를 써 나가는 이유이지 않은가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가볍게 쥔 주먹에서 사연의 모래가 유행가처럼 흘러내려 세상은 뿌연 삶의 색이다

 

 

 

안개의 긴 이름

 

 

마흔 살에도 한 편의 시 같은 연애를 할 수 있을까 인구의 절반은 여자 나는 애인도 없고 아내도 없고 아이도 없으므로 바닥을 친 인간 어쩌면 지금이 바닥

얼굴이 붉어지도록 부끄럽던 날 꽃을 꺾어 팽개치던 날 시와 연애 중입니다 고개를 돌리고 고백하던 그날

집으로 돌아와 2연과 3연 사이 의미와 무의미가 혼재된 나의 문장들 사이에 검은 털이 무성한 음부를 그려 넣었습니다 내 모든 시들은 416

쎈타를 까! 쎈타를! (주먹을 휘두르며 소리를 지르는 사내들 화면은 흑백)

펜 끝에서 태어난 나의 애인 방바닥과 침대에 널려 있는 애인들 매일매일이 피곤한 아침입니다 몸에 달라붙어 바스락거리는 애인들 끈적거리는 애인들

두 주먹 불끈 쥐고 힘차게 외치던 호시절의 구호처럼 모든 힘이 중앙으로 집중되는 날들이 있었습니다 그 까마득한 날들을 등지고 앉아 발톱을 자릅니다 내 몸의 끝과 끝에서만 자라나는 단단한 것들 사사십육 사사십육

이제껏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는 것을 갖게 된다면,

나는 어찌해야 하나요 일기를 쓰다가 새로운 형식의 곱셈을 생각하는데 복서의 눈이 찢어지고 던져진 흰 수건 울컥, 눈물이 나옵니다 나는 이토록 흰 수건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밟히고 구겨진 나의 애인들은 철없는 아이처럼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세상의 절반은 육지 절반은 바다

살을 파고든 발톱을 자른 자리에서 몇 방울 피가 났습니다 등을 구부리고 발가락에 호호 입김을 불어 줍니다 발이 따뜻해지고 내 마음도 따뜻해지고 오늘 밤 자고 나면 나는 이제 절뚝거리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세상의 모든 것이 아름다워지지는 않겠지만 발가락을 주무르며 아름다울수록 긴 이름을 지어 주는 시대를 생각합니다

 

 

 

밤의 패턴

 

 

도시가 어둠 속에서 소화되고 있다

물러지고 흐려지고 뒤죽박죽

섞이고 있다

 

가로등은 멀리 있으므로 있으나 마나

각자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서로를 향해

걷는 모양새다

 

당신의 얼굴이나 나의 얼굴이

검게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

모든 결정은 동공의 권역에서 이뤄진다

 

당신과 나의 얼굴에 하나씩

선명하게 빛나는 점, 약속도 없이

담배를 물고 있으므로 우연이다

 

자의 반 타의 반 주먹을 휘두른다

우리는, 힘겹게 휘두르며 생각한다

도무지 맞지를 않아

사실,

우리는 먼 곳으로부터 가까운 곳으로,

흑점으로부터 붉은 불꽃의 눈동자에게로

다가왔으므로 필연이다

침과 침이 섞이고 피와 피가 섞인다

 

까닥까닥 흔들리는 전등 아래

흐트러진 머리를 등지고 앉아

국수를 말아 먹는다

 

 

당선 소감

 

결론은 그렇습니다.

 

어쩌다 내가 이 길에 들어서게 된 건가. 기억의 잿간을 뒤적이다 눅눅해진 한 줌의 당신을 집어 들었습니다. 지금 문득 꺼냈다는 건 한동안 파묻혀 있었다는 것.

 

그 시절 우리는 행복과 고통과 원죄들을 함께 생산하고 나누어 가졌습니다. 그리고 진눈깨비 내리던, 내겐 무참함이 더해지던 이른 봄의 어느 날을 마지막으로 당신의 음성을 다시 들을 수 없었습니다만, 그 무참함이 이 뜬금없는 길을 향한 첫 걸음이었음을 비로소 시인합니다. 그렇게 십 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나름 꿀피부를 자랑하던 내 얼굴에는 기미가 내려앉았고, 당신에 대한 그리움 혹은 증오를 시로 승화시키려 애쓰는 흔한 과오를 범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이 말을 하고 싶어 턱없이 모자란 나의 능력에도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잘 살고 계시죠? 그렇다면 더 잘 사세요.’ 제법 그럴 듯한 말을 하고 싶지만 어떤 미사여구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혹여 너무 가늘어서 인식하기 어려울 정도라도 당신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연결선이 있다면 오늘부로 SWITCH OFF.

 

이 귀중한 기회를 저에게 주신 계간 <시작> 채상우 발행인님과 김춘식, 이형권, 유성호, 홍용희, 임지연, 이찬, 이현승 심사 위원님들께 진심으로 허리와 머리를 함께 숙여 감사드립니다. 저는 육십억 지구인을 감동시킬 한 편의 시보다 이 당선 소감이 더 쓰고 싶었습니다.

 

지금은 사라졌으나, 긴 시간 이끌어 주신 시사랑 목요반 선생님들 그리고 박정석, 김승일 두 팀장님께 감사 인사드립니다.

 

저의 등단 소식을 듣고 엉엉 울어 버리신 이복수 여사님, 끈질기게 나를 시인이라 불러 주신 임병두 형님, 석봉 형, 흥식 형, 기덕, 절친 수정, 성기, 재근, 류경, 재희, 3임 씨 또 누구지? 암튼 사랑합니다.

 

현재 혼미한 정신 상태로 인하여 앞서 열거하지 못한, 내 휴대전화기에 입력되어 있는, 저를 응원해 준 수많은 친구들 고마워요. 사실 진부한 표현이기도 하고 부끄러워 대놓고 말은 못 했지만 여러분은 나의 일생이라는 시의 가장 힘 있는 한 행 한 행입니다.

 

서일대학 문예창작과 동기들과 선후배님들, 많이 늦었습니다. 그사이 학과 통합이란 이름으로 타과인 듯 타과 아닌 타과 같은 학과가 된다고 하던데 이제 저는 등단 턱으로 소주 한잔 사 줄 후배들을 잃게 되었습니다. ,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방도 없음으로.

 

마지막으로

 

탕아였거나, 혹은 아무것도 아니었고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것도 아닐 그런 저를 시인으로 만들어 놓으신 장석원 교수님. 이제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무리 몸부림쳐 봐도 할 수 있는 건 고작 고맙습니다라는 말밖에 없는 저는 어찌해야 합니까.

   

최원

1974년 충남 안면도 출생. 서일대학 문예창작학과 졸업. 저서로 <버선발로 디딘 누룩>(공저)이 있음

 

 

 

 

 

 

붉은 방 외 4/ 차성환

   

 

트럭에 실린 토마토가 가파른 비탈을 오른다

개들은 혓바닥을 토해 내며 뒤를 쫓고

트로트에 맞춰 들썩이는 토마토

토마토가 왔어요 맛 좋고 싱싱한 토마토

확성기에 들어간 토마토가 온 동네를 구르며 깨우다

부서진 담벼락 앞에 멈춘다

포클레인이 커다란 아가리를 쳐들고 있다

집과 집이 바짝 맞닿은 크레바스의 깊은 골목에서

아이들은 곰팡이 핀 얼굴로 기어 나오고

아줌마들이 넝쿨 같은 손가락을 뻗는다

한 손 한 손 건네받은 토마토를

가슴팍에 묻어 조금씩 베어 문다

아이들은 토마토 힘줄을 물고 빨고

개들은 바닥에 터진 토마토를 할짝거린다

이곳에는 누구나 다 기울어져 산다

쓰러지지 않게 어깨를 기댄 판자촌

깨진 유리창 너머,

아직 철거되지 않은 생이 붉은 방을 켜고

채 익지 않은 밤을 기다린다

한없이 부풀어 오르는 토마토

그림자를 널어놓은 빨랫줄 위로

발갛게 무른 달이 떠오르고 있다

 

 

 

모래 여자

  

 

오지 않는다 모레 온다고 했던 모래 여자,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했건만 떠나자마자 사채업자가 들이닥쳐 잘라 버렸다 모래밥을 안쳐 놓고 오지에 가서 오지 않는 여자 오늘 밤도 내일 밤도 아닌 모레 온다고 한 여자 잘린 손가락에 대마초가 피고 냄새를 맡은 경찰이 철문을 두들긴다 방구석에 놓인 관 뚜껑이 열리고 삼베옷을 입은 아버지가 튀어나온다 아버지는 대마 잎을 염소처럼 뜯어 먹고 나는 염소젖을 쓰다듬으며 음마음마 소리내 운다 모레에 오지 않을 것 같고 와도 안 될 것 같은 여자 귓가엔 사이렌 소리가 울리고 도시는 황사로 가득한데 치맛자락을 붙잡은 내게 모레에 올게 모래를 흩뿌리며 사라진 여자 뻑뻑한 눈알을 긁어 대는 나를 두고 모레 온다며 떠난 여자 모래를 씹으며 모레를 세면 손가락들이 모래로 떨어지고 방 안에 나 대신 모래 한 푸대 부려 놓고 달아난 여자 대마 꽃처럼 푸슬푸슬한 붉은 입술로 도망간 모래, 모레, 모래 여자

 

 

 

검은 구두

 

 

발을 집어넣다가 물컹한 쥐를 밟은 후로는 팬티도 뒤집어서 털어 입는다 가끔씩 바퀴벌레가 기어 나오고 여자의 긴 머리카락이 뽑혀 나오는 검은 구두, 뒤꿈치가 까지고 새끼발톱이 뭉개져 피 칠갑을 하며 내 발을 길들인 검은 구두 봄날의 잔디를 깔창에 깔고 뽀송한 구름을 구겨 넣고 습기 제거 해충 박멸의 구호를 외치던 그해 여름 아스팔트 위로 천 개의 구두가 달려오는 장마가 지나가고 가을이 와도 구두 속에는 계속 비가 내린다 어디선가 시체 썩는 냄새가 나고 나는 비를 피해 숨어 다닌다 내 발은 불어 터져 구두를 벗을 수 없는데 미칠 듯이 가려운 발등을 뒷굽으로 찍어 댄다 점액질을 흘리며 나를 끌고 다니는 검은 구두, 간신히 구둣방을 찾아 발을 내밀자 이 구두는 당신 발이라니까 의사의 멱살을 잡고 바닥에 주저앉아 밑창을 뜯어 보지만 우라지게 튼튼한 겨울 아무도 찾지 않는 숲의 제철소를 찾아가 용접가위로 검은 구두를 뜯는다 울컥울컥 검붉은 핏물이 터져 나오는 검은 구두 손바닥만 한 날개를 편 바퀴벌레 떼가 날아오르고 머리카락이 수챗구멍을 꽉 막아 죽은 쥐가 물 위로 떠오른다 나는 소스라치게 검은 구두를 집어 던지고,  

 

다시 까맣게 때가 타기 시작한 새 구두를 신은 맨발이 흰 눈밭을 걸어가고 있었다

 

 

 

Ah! Monde

 

 

이빨 사이에서 와그작 부서진다 툭 툭 터진다 사방으로 파편이 튀고 사람들이 숨는다 아몬드 4년 전 떠나간 애인한테서 전화가 온다 수화기가 없이 벨만 울린다 아몬드 오래전 죽은 아버지가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말을 한다 안방으로 들고 간 밥상을 물끄러미 보고만 있으신다 아몬드 햇빛이 아이스크림 위에 아몬드처럼 부서진다 나는 놀이공원에 혼자 눅눅해진 콘에 담겨 흘러내린다 아몬드 육개장에 얼굴을 파묻고 퍼먹는다 떨어지는 눈물에 국물이 줄지 않는다 아몬드 어머니의 주름치마를 잡은 손 안에 계속 주름이 접혀 들어온다 나사 하나가 손에 들려 있다 아몬드 석가모니 그림자 서린 수자타 마을의 강을 건넌다 발목이 물에 흘려 떠내려간다 아몬드 숨을 참고 물속으로 들어간다 나는 항상 이불 속에서 질식사 직전에 빠져나온다 아몬드 가슴 위에 포개 놓은 손이 박쥐가 돼서 파닥거린다 방 안을 날아다닌다 아몬드 머리가 달아난 검은 지네가 입속에서 기어 나온다 와그작 와그작 아몬드 사이에서 이빨이 부서진다

 

 

 

모시모시

 

 

흰 벽지에 검은 못이 박혀 있다 콘크리트 벽을 뚫고 들어간 못의 뿌리가 자란다 검은 실 줄기가 밤새 퍼져 나가 베개 위에 긴 머리카락을 펼쳐 놓는다 못에 걸어 둔 시계가 시간을 잃고 초침이 경련한다 아기 울음소리가 들린다 못의 뿌리가 기어간다 장롱에서 그물에 감긴 아기가 끌려 나온다 벽의 모서리에서 시멘트 가루가 조금씩 떨어진다 바짝 마른 동공을 등 뒤에서 뻗어 나온 모세혈관이 움켜쥐고 있다 몸에 있는 점들이 천장에 달려가 별자리처럼 박힌다 슬금슬금 다가오는 검은 못의 촉수, 살갗이 곤두선다 점이 있던 자리에 핏물이 맺힌다 서랍 속 장도리를 꺼내 구석에서 울고 있는 아기를 내려친다 시계를 부순다 이놈의 못이 이놈의 못이 장도리의 쇠발톱에 못을 걸어 뽑는다 끌려 나오는 검은 뿌리 헐떡거리는 못을 뿌리째 씹어 먹는다 못이 빠진 구멍에 터진 수도 배관이 검붉은 피를 쏟아 낸다 방 안에 핏물이 고인다 나는 축축한 웅덩이 한가운데서 깨어난다

 

 

 

당선 소감

 

대관람차 안에서 등단 소식이 담긴 전화를 받았습니다. 오랜 꿈이었기에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대관람차는 상층부를 향해 반원을 그리며 떠오르고 다시 나머지 반을 찾아 내려옵니다. 지상에 발을 딛고 내려왔을 때 각오가 생겼습니다. 지금 쓰고 있는 시보다 더 나은 시를 쓰겠습니다. 아직 쓰지 않은 시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살겠습니다.

 

등단을 하면 제게 처음 시를 가르쳐 주신 김혜순 선생님께 가장 먼저 소식을 알려 드리고 싶었습니다. 오랫동안 뵙지 못해 죄송스럽지만 기쁜 마음으로 인사드리고 싶습니다.

 

항상 저를 독려해 주시고 일깨워 주시는 서울과기대의 최승호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수사적 표현에 매달리지 말고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서 시가 출발해야 한다는 말씀 가슴 깊이 새겨듣겠습니다.

 

한양시창작단의 문우들과 강동우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지난 1년 동안 함께 참 지지고 볶고 많이 했습니다. 같이했기에 시가 즐거웠습니다. 우리는 내내 즐거울 것입니다.

 

유성호 선생님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선생님 곁에서 시를 읽고 배우면서 저를 돌아보고 조금 더 성숙할 수 있었습니다. 늘 겸손한 자세로 시를 열심히 살아내겠습니다.

 

끝으로 <시작> 편집 위원님들과 채상우 발행인님께 감사드립니다.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앞으로의 가능성을 보고 뽑아 주신 거라 생각합니다. 그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꼭 보여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차성환

1978년 서울 출생. 서울예술대 문예창작과 졸업.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석사 졸업. 현재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 과정 중.

 

 

 

 

심사평

 

이번 2015년도 제13회 시작신인상 시 부문에 응모한 신인들과 시편들은 모두 140, 990편이었다. 투고된 몇몇 시편들은 한국시의 변화된 지형과 예술적 짜임을 다시금 절감케 하는 흐뭇한 느낌을 자아내기도 했지만, 대다수의 응모작들은 기실 단 한 편만으로도 자격 미달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쉽게 감지할 수 있을 만큼 투박하고 조악한 수준을 보여 주었다. 우리 심사 위원들은 990편의 작품들을 서로 돌려 읽으면서, 당선을 염두에 두고 집중적인 토론을 벌어야 할 응모작들을 어렵지 않게 선별할 수 있었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마지막까지 집중적으로 토론을 벌인 신인들은 다섯 명이었고, 몇 차례의 재독 과정을 통해 두 신인의 당선을 최종적으로 확정할 수 있었다.

 

임희정의 응모작들은 세련되고 완성도 높은 이미지 조각술이 눈길을 끌었다. 일종의 알레고리적 이야기 구조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 기법의 차원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또한 일상적 차원의 개연성을 멀찌감치 벗어나, 귀기와 전율스런 육체의 이미지들을 예술적 내용으로 삼을 수 있는 미학적 용기의 차원에서도 후한 점수를 얻었다. 그러나 저 세련된 이미지 조각술과 미학적 용기를 감싸 쥘 수 있는 그만의 예술적 사유와 일관성의 구도가 과연 무엇인가라는 물음 앞에서 심사 위원들의 동의를 이끌어 내지 못했다.

 

김미소의 응모작들은 이국적이고 독특한 소재 활용이 돋보였다. 인도 등지의 힌두문화권에서 행해지는 제식을 소재로 삼은 목을 펴는 사람이라든지, 디지털 문화에 따른 전자 쓰레기를 제제로 삼아 현대 문명 비판을 시도한 <쓰레기 섬 창조주> 같은 작품들이 그러하다. 또한 육체적 상상력을 활용하여 감각의 구체적 질감과 기억의 문제를 결부시킨 <길 위에서> 역시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자신의 시작의 고뇌를 알레고리 구조를 활용하여 형상화한 <지면 없는 추락>이나 인간의 죽음의 과정을 추적한 <영정 앞에서> 같은 작품들은 이 신인의 시작법과 전체적인 시풍이 자연스럽게 엇물리지 않는 문제점을 노출시켰고, 언어의 숙련도와 예술적 세공술의 차원에서 신뢰하기 어려운 불균형한 모습을 곳곳에서 드러냈다. 또한 제 기술적 장점들을 온전히 자신의 예술적 프레임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사유의 깊이와 구성력의 차원에서 적지 않은 약점을 보여 주었다. 자신의 시편들 전체를 마치 숨결처럼 제 몸에 들러붙게 만들 수 있는 예술적 직관력과 구성력의 확보를 주문하고 싶다.

 

박민서의 응모작들은 이른바 몸의 세계를 제 예술적 상상력의 바탕으로 삼고 있는 시편들이 지닐 수 있는 여러 장점들을 고스란히 포괄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또한 끈적거리는 질감으로 휘감겨 오는 점액질의 상상력을 형상화하는 이미지 조각술이나, 비유법의 정통적인 기술과 방법론을 구사할 수 있는 언어적 숙련도의 차원에서 후한 평가를 얻었다. 그러나 응모한 몇몇 작품들은 조악한 수준의 발상과 사유를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었다, 이후 보다 많은 예술적 연마의 과정이 요청된다는 것이 심사 위원들의 공통된 의견과 시각이었다. 단편적인 시적 기법과 부분적인 세공술의 숙련도를 넘어서, 한 편의 시 작품 전체를 일관된 예술적 짜임새로 갈무리할 수 있는 구성력이 요청된다고 하겠다. 곧 각각의 시편들과 그것들 사이에서 자신의 독자적인 시어의 음영과 예술적 구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안목과 상상력과 구성력이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이다.

 

차성환의 응모작들은 우리 일상의 세부를 밀착 인화할 수 있는 섬세한 관찰력의 차원에서 심사 위원들 대다수를 충족시켰다고 하겠다. 특히 쉽사리 눈에 띄지 않는 사물의 세부들을 집요하게 소묘하면서 그 뒷면의 침묵의 공간에서 어떤 감성의 음영을 소리 없이 환기시킬 수 있는 기술적 숙련도에서 신뢰감을 주었다. 물론 응모한 작품들 가운데 일부는 예술적 세공의 완성도와 마름질의 밀도의 차원에서 의심스런 부분을 노출시켰기에, 당선 여부를 두고 심사 위원들 사이에서 집중적인 토의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심사 위원들은 저 관찰력의 집요함과 언어들 사이로 휘감긴 끈덕진 질감의 내면성을 신뢰하기로 했고, 결국 당선자의 한 사람으로 결정하였다. 당선을 축하한다. 보다 빼어난 시편들을 지속적으로 산출해 낼 수 있는 큰 시인으로 성장하기를 기원한다.

 

최원의 시편들은 오랜 시적 수련을 거친 자만이 빚어낼 수 있는 정제된 언어의 밀도 높은 짜임새와 더불어, 상이한 여러 소재들을 제 몸의 리듬감으로 이끌고 갈 수 있는 예술적 일관성의 구도를 충실하게 구비하고 있었다. 심사 위원들 모두에게서 공통된 호평이 이어졌다. 특히 응모작들 모두가 빠짐없이 고른 수준과 예술적 세공의 밀도를 자랑하고 있다는 점에서, 심사 위원들 사이에서 처음부터 당선을 염두에 둔 토의가 이루어졌다고 하겠다. 일상의 차원에서 매번 벌어지는 착시와 오인과 왜곡의 현상들을 진득하게 가라앉은 낮은 음색으로 소묘한 <앵두나무 맞은편>이나, 일상 세계의 소소한 인연들이 시간의 깊이를 가로지르며 일구어 내는 저 운명과 우연의 현란한 엇갈림을 밀착 인화의 기법으로 그려 낸 <미주 명신 아진 그리고 나>는 이 신인의 만만찮은 재능과 수련의 과정을 충실하게 예증해 준다. 또한 우리 삶 곳곳에 깃든 저 황폐한 진실들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돌파하려는 잔인한 리얼리즘의 세계를 견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심사 위원들 모두 어렵지 않게 만장일치로 당선을 결정했다. 동료가 된 것을 환영한다. 한국시의 미래를 이끌어 갈 수 있는 기대주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심사위원 김춘식 유성호 이형권 홍용희 이현승 임지연 이찬()

 

출처 : 신춘문예공모나라
글쓴이 : copyzigi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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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상 처리 / 안정희

 

    웃통을 벗은 사내들이 가랑이 사이로 참치 한 마리를 고정한다 그들이 신은 장화가 닿을 때 차가웠다 부드러웠다 짙은 눈썹 아래 사내의 눈빛이 참치 등 위로 미끄러진다 이렇게 밝은 빛을 본 적이 없다 너무 많은 산소로 익사할 것 같아 양초가 여러 개 놓인 샹들리에가 하늘에 달려 삐걱삐걱 흔들린다 사내의 땀이 떨어지면 촛농처럼 뜨거웠다

 

 뇌를 내리칠 몽둥이가 올라간다 눈꺼풀이 없어 눈을 뜬 채 눈알이 툭! ! 오바댜 스바냐 잘 배치되어 있던 신앙의 내장과 생식기관이 흩어진다 갈라디아 말라기 흔들리는 수만의 양초 불빛들, 무엇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 개론 서적의 제목들, 여행 사진들, 소화되지 못한 푸질리어, 자바리가 갑판 위에서 뒤섞인다 샹들리에 크리스털이 쏟아진다 날카로운 유리 조각에 베이는 생각들, 터지는 제목들, 버려질 피 묻은 것들이 비리다

 

  바늘 없는 주사기를 꼽고 수술대 위에 누워 있었다 아가미와 꼬리가 잘린다 하역을 위해 몸에 구멍을 낸다 고리에 걸려 밀려가며 마침내 환자가 될 수 있었을까 줄줄이 급속 냉동되는 판단들 싱싱한 죽음들이 냉동실에 다랑다랑 매달린다 나는 겨우 깨어난다 익힌 결론들이 칸칸이 생선살처럼 부서질 것이다 물에 빠진 물고기로 살아왔다

 

 

 

 

심벌즈 독주회

   

찌에 매달린 낚싯대처럼

구부정하게 휜 등

쉴 수 없는 대통령의 휴가 같고

흰색 노트에 흰색 글씨들만 쓰이고

수면에서 보일락 말락

잠이 들락 생각이 날락

엄연히 낚시 중 같은 배경이 필요했고

뭔가를 하고 있다는 위로가 있어야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나는 무대 가운데 앉혀진 심벌즈 연주자

양손에 무거운 심벌즈를 들고

소리 없는 연주를 한다

기다리는 한 음표가 이 곡의 악보에 있을까

이 음악회의 청중들은

쉬는 중일까 기다리는 중일까

목요일에도, 베란다에도, 너의 얼굴에도

찌들이, 음표가 움직인다

 

수면 아래로, 눈에 묻은 물을 훔칠 틈도 없이

수면 위로, 젖은 머리칼로 얼굴을 덮고

물 안팎의 가쁜 호흡 중에도

익사하지 않는 얼굴들

음표를 무는 입술

!

 

온몸에 전해지는 트레몰로

비포장 트랙, 빈 트럭 안을 울리는

트레몰로 트레몰로

털털 빈털터리로

 

 

 

 

 

Jennifer Lopez American Vogue 2004*

 

  하늘거리는 푸른 드레스를 입은 그녀, 시커먼 사냥개들을 몰고 간다. 아름다운 팔이 팽팽하게 당기고 있는 검은 모가지. 시상식 카펫처럼 늘어진 붉은 혀들. 킬힐을 신고 카펫을 밟는다. 혀 위에서 그녀는 무사할까? 아가리에서 침들이 떨어진다. 바람이 불 때마다 드레스가 부풀고 그림자의 치수가 늘어난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는 나의 배경에서 무엇이 사라지는지 알려 주곤 했다. 토요일의 침대에서 빠져나와 사진전 티켓 창구 앞에 묶여도, 사나운 쇼핑백들에 달려 다녀도, 너를 사랑해도, 나는 사라지는 것들 앞에 길들지 않는다.

 

  사냥개가 뛴다. 두 가지 세 가지 네 가지 늘어나는 모가지를 더 힘주어 잡는다. 사냥개의 목에 걸린 시폰 스카프처럼 그녀는 날리고, 하이힐이 벗겨지고, 사각사각 바람이 그녀의 푸른 드레스를 베어 문다. 사냥개들은 더 길게 혀를 늘어뜨린다. 혀가 당기고 있는 여자, 수십 마리의 사냥개가 그녀를 몰고 간다.

 

* 사진작가 Mario Testino의 작품.

 

 

 

 

 

 

길 막히는 사막

 

두바이사막 사파리

디젤 지프가 나의 앞을 따라다닌다

부연 바람은 부랴부랴 흩어지지만

바로바로 바퀴 자국은 사라지지만

나는 바로 앞만 볼 수 있는 들쥐 레밍이 된다

 

끼어드는 차들로

빠지지 않는 차들로

앞이 점점 길어진다

최근에 쓰여진 역사처럼

원조가 있다는 골목처럼

 

내가 따라가지 않아도

끊임없이 앞에 나타나는 언니, 헤겔, 아브라함

내가 운전하는 대로

당신들은 계속 내 앞을 달린다

 

사나운 사자 한 마리가 나타나

지프가 갑자기 멈춘다

연쇄 충돌로 핸들이 날아가고

범퍼가 줄줄이 찌그러진다

시동도 걸지 않고, 엔진의 열기도 없이

견인 고리에 매달려 가는 당신들

 

그때 깨진 앞 유리를 달고

나의 기가 막힌 사파리가 시작되었다

길 없는 사막에서

 

 

 

 

 

 

무빙워크

 

  누워 눈을 깜빡인다 속눈썹에 쓸리는 깜깜한 날들, 눈을 감은 걸까 뜨고도 이제 볼 수 없는 걸까 들숨에 빨려 오는 검정 비닐, 날숨은 멀리 가지 못하고 요일의 배치는 흩어진다 서리태처럼 흩어진다 콩콩 목요일은 장롱 밑으로, 콩콩 월요일은 링거액 안으로, 찾을 수 없는 요일들은 찾을 수 없는 곳으로만 굴러간다 잃어버린 요일은 남은 요일들로 채울 수 없었다 비닐봉지에 담긴 두부처럼 으깨지기 쉬운 얼굴, 깜빡깜빡 속눈썹에 찔려 어둠이 찢어진다 흐르는 얼굴을 막기 위해, 봉지 위에 봉지, 봉지 밑에 봉지 가득한 봉합에 속눈썹이 안구 쪽을 향해 자란다 눈물이 자란다 보지 않고도, 걷지 않고도, 뒤돌아서서도 간다 눈물을 환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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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드름의 기원 / 김광섭

 

고드름을 쥐여 주고 떠났네.

돌아서면 녹아내리는 울상

얼룩처럼 곡선을 이루었네.

낙원을 떠난 그대,

운명은 서서히 변방으로 흘러갔네.

그대에게 직립을 가르친 세계에서

하강하는 순간순간

붙잡으려 할수록 손금에 그늘이 서렸네.

사과나무 아래서 해빙의 기록을 써 내려갔네.

정수리로 선과 악을 밀어내며

뱀의 허물에서

곧게 서는 척추의 문장을 적었네.

낙하

낙하

내면에서 방울지는 음악.

그대는 걷는 생각에 골몰했네.

발자국은 늑골 안에서 발견되었고

엇갈리는 일은 깍지를 끼는 일.

투명해졌네.

사천 년이 흘러 되찾은 갈빗대

봄의 입속으로 뿔을 감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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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만드는 골목외 4편

 

류명순

  

바람이 녹슨 자물통을 잡아 흔들며 대답을 강요한다

복덕방에 고여 있던 시간이 유리창에 달라붙어 풍경으로 위장한다

잡풀들이 잃어버린 번지를 기웃거리며 대궁을 내민다

가옥들이 파산한 사내 등을 기댄 여자의 고개처럼 슬픔을 진열한다

 

칠성댁이 행방불명된 딸의 얼굴을 안고 골목을 나선다

전단지 속 눈빛이 별의 온도로 반짝인다

같은 주파수를 가진 사람들이 발걸음을 덮어쓴다

경전에도 없는 기호로 음각된 골목, 침묵의 색깔로 굳는다

 

<마지막 처분 95% 세일>

전봇대에 묶인 밥상 크기 현수막만 새카맣게 시끄럽다

 

한 번도 팔린 적 없는 동네에는 어둠이 먼저 퇴근한다

북두칠성이 끼니 거른 외등을 하나둘 깨운다

우거짓국 냄새가 낮은 지붕마다 방점을 찍는다

 

손잡이만 반들거리는 고물 리어카가 파지를 가득 싣고 와 골목 한켠을 복원한다

칠성댁이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외우며 돌아온다

다리로 침묵을 지고 나갔던 사람들이 입으로 다리를 끌고 온다

유리창에 그림자를 맡긴 사람들이 뿔뿔이 집으로 들어간다

유리창 풍경이 몇 년 전 시간으로 창문을 복원한다

 

바람이 갸웃거리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를 밤새 읽는다

제 발로 쓴 골목을 저승길로 읽는 사람은 문맹이 아니다

 

 

 

 

고문은 진화 한다

 

  불시에 나를 구속한 스티븐 존슨*은 희대의 고문기술자다. 눈을 떠 빛을 데려오면 그는 내 장기마다 하루 치의 수명을 부여한다. 오늘은 그가 되돌이표 그려진 악보처럼 나를 연주 한다.

 

  나는 한 번도 그의 음표를 벗어난 신음을 뱉어낸 적이 없다. 이십 년 전에는 첼로 현처럼 휜 척추로 연주했고, 십 년 전에는 각막에 펼친 건반을 올려 차며 연주를 했다

 

  그가 내게 배려한 유일한 자유는 목숨이다. 나는 사디스트가 되어 나를 때리고 마조이스트가 되어 고통을 충전했으므로 내 목숨과 고통은 정비례한다. 나는 희열이 있는 곳으로 진화했다. 통증으로 사정을 완성하던 날, 그는 새로운 고문기술을 접목했다. 손톱이 뽑힐 때 음역 밖의 신음을 연주한 것은 실수였다.

 그가 내게서 손톱과 닮은 둥근 각도를 찾아 뽑아내기 시작했다 발톱을 뽑아내고 앞니를 뽑아내고 각막을 뽑아내고 결국 양지에서 나를 뽑아 음지에 가두었다.

  눈을 떠도 빛을 데려오지 못하므로 나의 하루는 길이가 없다. 열쇠가 없는 안구의 독방에서 내 묵비권이 완성됐다. 내가 내게 종신형을 언도하자 고문이 멎었다. 그는 외로움이라는 열쇠를 목숨에 꽂아놓고 사라졌다.

신음을 연주해서 형기를 채워야 하는 내가 고통 없음이 더 큰 고통임을 알았을 때,

  나는 외로움을 비틀어 고통을 초대한다. 그가 내 장기를 하나 둘 두드려 깨운다. 나는 목숨에 없는 빠른 박자로 신음을 연주한다. 그가 관장하는 하루가 짧아지기 시작한다.

 

 

*스티븐 존슨: 약물 알레르기로 눈의 점막을 손상시켜 실명에 이르는 난치병

 

 

 

 

사람의 품

 

미루나무 껍질에서 나이테의 파동이 보인다

나뭇가지들이 손가락 한 마디씩 늘인다

이파리가 그늘의 나선을 돌린다

 

넓어지는 그늘에 내가 얼룩 하나로 섞인다

 

내 잠꼬대가 다른 사람 호흡으로 바뀌자 그늘이 확장을 멈춘다

옹이 빛깔의 눈동자가 전생을 끌어당긴다

한 사람이 기도로 미래를 바라보고 있다

 

합장의 어둠을 열고 무작정 걸어 들어간다

매일 다녔던 것처럼 익숙한 길 끝에

내 얼룩과 마침맞은 공간이 파여 있다

 

먹는 자세를 하고서야 꿈을 꾼다

한 사람이 손 그림자로 내 배를 쓰다듬고 있다

품에 안긴 내가 그늘의 속도로 자란다

 

아기 발길질에 얼룩이 깨진다

내가 서쪽을 향해 꿈틀거리며 깨어난다

 

내 눈동자에 한 사의 얼룩이 고여 있다

내가 그의 기억을 외우려고 하자 그늘이 나를 팽개친다

그늘이 사지를 숨기며 미루나무 속으로 사라진다

 

사람의 얼룩을 품으로 키워내면 어머니가 된다

 

 

   

형법 제38조

  

충혈된 눈에 들어온 형법 제38조가 수갑을 채운다

방안을 아는 유일한 목격자

서른여덟을 염탐하는 담쟁이가 방안을 기웃거린다

법전 속에 숨긴 법문이 미궁에 빠져든다

승자독식사회의 알리바이를 밝혀내기 위해

육법전서의 침묵을 몇 년째 추적해 보지만

여전히 끝은 보이지 않고 제자리 잠복 중이다

 

그림자를 체포해 가는 그믐달이 보이지 않을 때

고양이가 어머니기도를 의심스레 쏘아본다

잠을 취조하는 시계 소리에

별들이 돌아갈 채비를 서두른다

또다시 법률사전을 비워내야 하는 공복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파산선고를 받은 등골뼈들이

호시탐탐 무릎까지 넘보고 있다

기다리지 못한 사랑을 수첩에 기록하고

날 선 법과사전에 시선을 책갈피로 꽂아두면

두 눈에 고여 있던 하늘이 빛을 흘린다

법복보다 더 까만 어둠이 밀려오는 골목

고시촌 하늘엔 별도 법문처럼 뜬다

 

 

 

   

무덤으로 가는 앤디워홀

  

나를 버리러 지하로 간다

캔버스와 판화도구 버리러

내가 사랑하던 마릴린 먼로도 버리러

세상의 희롱과 박수까지 버리러

주유소도 편의점도 없는 지하의 길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나 혼자의 길

 

누구 하나 환호하지 않는다

침묵하는 사물들, 구조는 단순하다

주검을 대량생산하는 공장도 없는

무의식의 풍경 속으로 내가 들어간다

나를 다녀간 사람들이 기록해둔 필름처럼

기억이 기억을 물고 시간과 공간을 넘나든다

 

문득, 까마귀가 울 것 같은 적막이 몰려들고

붓을 든 낯선 손을 따라

무덤속이 밀밭으로 변하고 있다

복제된 그림이 제멋대로 불어나 무덤을 밝힌다

 

버리는 것은 끝이 아니고

또 하나의 부재를 달고 새롭게 태어난다

수많은 존재들을 버린 내 몸이 한없이 추락한다

낯선 내가 나를 붙잡아 콜라병에 담는다

순간 내 몸이 하늘로 솟구쳐 오른다

 

 

류명순 :

경기도 안성 출생. 한국 방송대 문화교양학과 3학년 재학 중.

저서 :  잃어버린 20년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외 4편

 

김명호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상상 뿐 나 이제 돌아서려네 고개 숙이고 있던 수은등이 마지막 시선 한 조각을 떨어트리네 당신의 눈길이 차곡차곡 쌓인 골목 내 기다림에 닳고 단 모퉁이 당신의 체온 대신 깨진 벽보 한 장에 기대네 더 이상 당신이 내가 아닌 첫 시간, 눈 감은 수은등 대신 당신의 방을 지키려 하네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상상 뿐 손을 쥐고 태어났지만 처음부터 빈손이었네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사과를 깎는 일과 같더군 손을 베이고 나서야 나를 향해 칼을 쥐고 있다는 걸 알았네 당신을 코르크 마개처럼 빼낼 순 없겠지 하지만 이제 배경이 되어야 할 시간 그동안 고단했을 수은등을 놓아줘야 할 뿐 초승달이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네 나와 눈이 마주친 별들이 하나둘 흥건히 떨고 있네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상상 뿐, 이제 당신도 상상이 되려하네

 

 

 

 

한 짝

  

신발 밑바닥의 껌 딱지처럼

누구라도 붙들고 싶은 날

인력소개소 앞에서 악수를 청하는

목장갑 한, 짝

길을 베고 때 묻은 얼굴을 붉히며

처음인 듯 서툴게 망설이며

어쩌면 목장갑은 일용직 잡부로 못 박혀

붉은 빨판으로 쇳조각만을 붙잡았을 것이다

만난 적 없기에 더 닿고 싶었을 체온

어느 누구도 왼손으로 악수하지 않는다

관심에 차이는 깡통마저 부러웠을 날들

골판지 상자가 손 잡아 줄 만도 하지만 이미

킬로그램당 백이십오 원이 수거해 갔을 것이다

무관심이 시간당 백오십 미리로 쏟아져

상처난 손가락 끝을 때린다

단물만 뺐기고 뱉어진 내 마지막 퇴근길에

손 내미는 목장갑 한, 짝

 

그래, 악수

 

 

 

 

루어

 

내가 낚싯감이었던 거야

 

빛살이 되어 파도의 속살을 가로질러 덥석

싱싱한 기대 대신 입술을 꿰뚫은 날카로운 착각

몸부림칠수록 미늘은 깊숙히 박히고

부레를 부풀릴수록 낚싯줄은 긴장

비늘을 움켜쥐는 또 다른 바늘들

빼곡한 통점을 털어 버리고 싶지만

그것마저 놔주지 않는 악력

바다를 배경으로 훌라춤을 출렁이던 여자는

산호도 진주도 아닌 루어*일 뿐

 

세상을 사냥할 수 있다는 확신은

결국 세상에 낚였다는 관통상이 되지

아가미를 열어 납추 같은 한숨을 떨어트린다

이젠 먹이의 배경에 언제나 바늘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나인 거야

온몸을 찢어 바늘과 헤어져야지

이젠 루어를 만들어

촉수를 감춰야 할 나인 거야

이젠 내가 세상을 속여야 할 차례인 거지 

 

나는 루어(淚漁)

 

*루어(lure): 생미끼가 아닌 눈속임용 미끼로 플라스틱이나 금속 재질로 만든다.

 

 

 

 

아내의 시집

 

   아내는 어느새 셋방살이 같은 잠에 빠졌네요 가게부에 밥풀처럼 납작 달라붙어서요 의류수거함 대신 아내 차지가 된 제 뜨게옷의 보플도, 때 넘긴 파마머리도 투정을 거두고 같이 잠들었네요 아내는 쪽잠 속에서도 흥정을 하는지 깎아 달라고 잠꼬대가 졸린 눈을 비비네요 저는 생활정보지를 접고 말을 걸어 봅니다

  -마수걸이라 그렇게는 안 돼요

  -그래도 깎아… 주세요

  된소리를 발음할 때마다 아내의 눈썹 사이가 구겨져요 아내가 젖몸살을 앓으며 걷던 가계부 속으로 눈길을 피해 봅니다 올 나간 우리 가족을 숫자와 기호로 옮겨 놨네요 북쪽 말로 남편은 '나그네'라던데, 저는 아내의 가게부에서 길을 잃네요 매일 생리통을 앓는 가게부는 아내의 시(詩)네요 한 장 한 편 한 편 이미 아내의 시집(詩集)이네요

  -그럼 그렇게 가져가요, 아가씨

  미안함에 선심을 써 봅니다 덤으로 싸 준 아가씨란 말에 에누리 없는 웃음이 커져요 비닐 봉다리에 제 것과 애들 것만 담아 꿈길을 돌아올 아내 저는 꿈에서마저 시를 쓰느라 부르튼 아내의 두 발을 주무르네요 아내의 거친 발톱이 오늘 왜 이리도 제 눈을 찌르는지, 왜 이리도 제 가슴에 박히는지 비로소 알 것 같네요

 

  남쪽 말로 아내는 '가시'라고 하데요

 

 

 

 

생명선 기차

  

아이가 운다

기차 소리 때문일까

빗소리 때문일까

최선을 다해 울어 보지만 아이의 울음은

누구의 잠도 건드릴 수 없는 물결무늬

몸에 꼭 맞던 잠을 벗어던지고

아이를 건져 올린다

불인한 아이의 손끝이 내 눈을 더듬는

순간, 본다

손바닥을 힘껏 달려야 할 생명선이

시작하자마자 잘려 버린 것을

 

아이가 운다

기차 소리 사이로 아이의 울음이 침목이 된다

창문 너머에서 미안한 듯 서성이는 빗소리

아이도 눈물 자국 같은 생명선을 따라

어디쯤 가고 있는 것일까

나는 변명밖에 모르는 처방전에

건널목 차단기를 내린다

나는 손끝을 깨물어 피를 내

아이의 시든 생명선 끝에

바다를 향해 달릴 철도를

잇고 잇고

또 잇는다 

 

 

김명호:

1977년 서울 출생. 이후 전주에서 성장. 원광대 국문과와 고려대 국문과 졸업

2002년 대산대학문학상 소설 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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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의 입과 심장의 거리 외 4편

 

   이문경

 

 

 

생각보다 심장이 먼저 반응하는 것은

이미 흘러 내려 높이를 잃은 눈물

엑스레이에는 잡히지 않는 흉통

누군가 움켜잡았다가 놓은 심장

 

위선의 눈동자는

속눈썹 아래 감출 수 있어도

의미 잃은 말은 벌레에 갉아 먹힌 잎의 그물맥

그물눈의 문양을 온몸으로 가진 기린은

진실을 거르는 그물을 가진 것이다

 

기린이 말하지 않는 이유는

멀리 볼 수 있는 눈으로

많은 것을 알기 때문,

기린이 말하지 않는 이유는

기린의 입과 심장과의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이다

 

깊은 우물에서 두레박을 들어 올리듯

성악가의 성대가

보이지 않는 소리를 들어 올린다

청동의 아리아는

가장 정직한 호흡,

말을 잃은 기린의 성대는

심장과 교신한다

심장을 통과해야만 목소리는 완성되는 것

목소리는 눈동자보다

정직하다

 

 

 

 

거리의 발레리나

 

   여자는 하얀 레이스에 흰나비가 날아다니는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가요 아무도 몰라요 그녀가 나가는지. 그녀는 이제 교대역에서 사당역까지 걸어도 다리가 하나도 안 아파요 흰 나비와 새는 그녀를 날아다니게 하는 걸요 그러다 그녀는 가로수에 부딪칠 뻔해요 흰 나비와 새가 연둣빛 잎사귀로 옮겨가려고 하잖아요 글쎄 그녀의 발이 아스팔트에 빠진 줄을 까맣게 모르나 봐요 불온한 봄이 시작되고 있어요

 

   여자는 꽉 막힌 도로에 정차해 있는 자동차 사이를 날아다녀요 시계를 들여다보며 신경질을 내던 남자가 그녀를 보고 쿡쿡 웃어요 그녀는 그 남자가 비둘기 같다는 생각을 해요 운전대를 잡고 졸던 여자는 뒷 차의 경적소리에 깨어나 그녀를 보고 웃고 있어요 이 많은 사람들이 왜 이 시간에 다 길 위에 있는 건지, 그녀는 그들이 이상해 보여요 그들도 어쩌면 거미줄에 갇힌 걸까요

 

   거미가 쳐 놓은 그물 속, 그녀는 거미줄에 갇혀버렸어요 이름도 나이도 알 수 없는 거미가 그녀에게 다가와, 그녀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어요 여자는 자신의 얼굴도 자신의 이름도 잃어버렸어요 그녀가 달고 다닌 이름표는 너무 무거웠거든요 이제 그녀는 이름표 대신 날개를 가지게 되었어요

 

   그들의 눈동자가 그녀를 따라와요 그들도 날개가 필요한가요 그런데 울다 닫힌 동공이 그녀를 쳐다보고 있어요 그 눈동자는 깊고 어두워 동굴처럼 안전해 보여요 그녀는 그곳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해요 날개가 아파오기 시작했거든요 불온한 봄이, 계속되고 있어요…….

 

 

 

 

가진 적 없는 돌

 

마당에서 공기놀이를 했네 높이 올릴수록 더 많은 돌 가질 수 있었네

계집아이는 혼자였네 돌로 만든 城이 여자아이를 지켜주었다네

혼자라는 건 편안한 불안, 혼자라는 건 자신의 온기로 공깃돌

데우는 것이라고, 다가오는 어둠이 알게 해 주어서 무서웠네

그런 밤이면 풀 먹인 이불홑청을 이마까지 끌어올려도  

잠이 오지 않았네

 

마당에서 공기놀이를 했네 높이 올릴수록 더 많은 돌 가질 수 있었네

계집아이는 혼자였네 돌로 만든 城이 여자아이를 지켜주었다네

놓쳐버린 돌은 어디로 간 것일까, 알 수 없는 밤이 지나면 

반짝이던 것은 움켜쥔 손 펴기도 전에 너무 빨리 지나가 버린다네

너무 많은 것들은 너무 늦게 알게 된다네

 

마당에서 공기놀이를 했네 높이 올릴수록 더 많은 돌 가질 수 있었네

그러나 그 돌, 버려야만 가질 수 있는 돌이었네

 

 

 

 

새장 속의 어둠

 

지금은 밤이야

너를 내려다보고 있는

내 은빛 날개를 만져 봐

아니 날개 말고 그 아래

내 몸을 만져 봐

조약돌 같은 거기

파도치는 내 심장

우린 거기 살고 있었던 거야

 

한 마리 새와 함께

 

바지랑대 끝 잠자리 날개처럼

나는 가볍고

불면의 밤을 건너 온

새의 눈꺼풀처럼 나는 무거워

 

깃털도 무거워지는

밤이야

천칭(天秤) 왼편에는

너의 깃털

오른편 천칭 위에는

나의 심장 25그램을 올려놓는다

내 심장 속, 눈 감은 적 없는 새 한 마리

 

새장 문을 열어준다

노래하는 새가

그 노래를 잊었기에

 

 

 

 

인형놀이

 

    1 

페달을 밟으며 한강변을 달린다

긴 머리카락이 여자의 얼굴에 쏟아진다

자전거에는

영혼이 없다고?

당신이 닦아줄 수는 없어도

내 눈물 닦아주는 자전거

어때요 전 속력으로

내가 달린다면

 

   2

아파트 주차장 구석진 자리

검은 털실뭉치처럼 웅크린 고양이 한 마리

실타래 풀리듯 소리 없이

승용차 엔진에 다가가

온기를 끌어안는다

고양이에겐

영혼이 없다고

당신이 말한다면

그렇다면 이건 어때요

고양이도 나처럼

말을 할 수 있다면

 

   3

자동차 시동을 끄고

남자는 아파트 안으로 사라진다

인큐베이터 속,

잠든 얼굴을 비추는 할로겐 조명

따뜻한 양수 속에서 밀려 나와

인큐베이터 안에서 잠든 미숙아는

물속을 부유한다

물속의 집은 고요를 생산한다

 

 

 

—————

▲ 이문경 / 1963년 경북 울진 출생. 한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재학.

 

 

------------------------------------------------------------------------------------------------

 

 

 

너의 귓속은 겨울 외 4편

 

   남궁선

 

전나무 숲엔 하얀 꼬리의 여우들이

알전구처럼 빛난다 눈이 내리고 있구나

나는 까치발을 들고 창밖을 바라본다

다정한 밤의 풍경

 

검은 손의 너는 내 어깨 위로 기어오르고

가느다란 팔로 목을 감싼다

 

우리는 한 번의 겨울도 가져 본 적이 없지, 검은손거미원숭이야

 

눈밭 위에 맨발로 꽃잎을 그려 넣을 때

나는 한 자리에서 뱅글뱅글 돌아야겠구나

발가락에 닿는 차갑다는 그 감촉은 어떤 느낌일까

 

발꿈치를 내리고 침대로 돌아와

모서리에 웅크리고 앉는다

 

나는 투명하고 뾰족한 얼음조각에 스며드는

어떤 열기에 대해 상상한다, 검은손거미원숭이야

 

내 목을 감싸고 있는 날카로운 손톱을 조금 더 눌러준다면

아주 붉은 것이 부드럽고

따뜻한 퐁듀처럼 흘러내릴 텐데

 

하얀 꼬리의 여우들은 볼 수 있을까, 내 방 가득 차오르는 눈물의 깊이

얼음가시에 찔려 빨갛게 터지고 싶은 내 두 발

 

 

 

 

스테인드글라스

 

   여행자의 일요미사, 성당의 보랏빛 지붕 위로 해가 지고 있습니다 밀떡을 먹으러 신부님께 다가갑니다 길게 늘어선 사람들이 뱀의 혓바닥을 내밀고 사라집니다 조그만 밀떡은 어떤 맛일까요 상처와기적의신부님 구원과은총의신부님 신부님에게 어울리는 이름이죠

 

   입을 벌렸습니다 신부님이 양미간을 찌푸립니다 너의 혓바닥은 너무 짧아 이곳에선 아무도 너를 모르지 너를 모른다는 것만이 네 존재의 표식 얼굴이 활활 타오릅니다

 

    비쩍 마른 자칼이 사막에서 죽은 것들의 몸을 헤집을 때, 완전하게 침묵할 줄 아는 자칼의 눈과 발톱과 이빨의 탐욕을 알고 있습니까 새로운 굶주림이 너에게 찾아왔으니 너는 속된 것을 내어 놓고 불멸을 약속 받으라 오른손 중지는 왜 자꾸 오른쪽으로 휠까요

 

   햇빛 아래 이글거리며 증발하는 초록빛, 청개구리를 한입에 꿀꺽 삼킨다면 너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 거야 불신은 혓바닥의 진화를 가져왔습니다 벼락과 말씀과 보복으로 가득 찬 신부님의 두터운 성대

 

   아직도 비가 오는 날이면 청개구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습관은 습관입니까 하나의 문장을 만 번씩 쓴다면 그 문장이 옷을 입고 사람처럼 걸어 다닌다는 것을 인디언들은 아직도 믿습니까 밀떡은 하얗고 꽃은 아름답습니다 희망의 계획서가 사라진 검은 수첩만이 가장 용감해져갔습니다

 

 

 

 

나는 하얀 장미를 원했고 장미 위로 눈이 내렸다

 

   주름 접기

 

   우리는 창의 가운데서 등을 맞대고 흰 커튼에 주름을 접으며 천천히 전진하였다 커튼에 우아한 주름이 겹겹이 쌓여갈 때 창은 여전히 넓고 창백한 입술이 얇아져 갔다

 

   동작대교 아래서

 

   남산타워가 보이는 강변 공원에서 나는 노래를 부르다 그대는 왈츠를 추다 마주쳤다 왈츠가 멈추고 노래가 끊겼다 한밤의 어둠을 껴안은 그대의 두 눈이 흔들리고 동작대교 난간에 매달린 분홍 초록 보라의 불빛이 그대의 눈에 맺혔다

 

   그댄 너무 많은 빛깔의 눈을 가진 자

 

   리본

 

   환자복을 입은 창문이여 우리는 병적으로 창을 닦고 병적으로 리본을 부풀렸지 대청소의 날 만족할 줄 모르는 투명한 감독관의 안경알이여, 손에 들린 걸레는 허밍처럼 고요히 흔들리고

 

   첫눈

 

  화단의 젖은 흙이 단내를 풍길 때

 

  눈이 온다 왈츠를 추는 그대의 오리털 파카 위로 추리닝 바지 아래로 속눈썹을 스치고 눈이 온다 창문에서 나뭇가지에서 강변에서 멀어지는 눈이

 

 

 

 

건기 시대

  

건기의 밤엔 목마른 나뭇잎이 나를 강간하러 온다 

커다란 낙엽이 짐승의 울음 되어 지붕을 덮을 때

나무의 뼈를 핥는 달

낙엽과 대결하는 이 구도는  

오래 전, 모닥불을 피워 놓고 공포를 계산하던 나의 눈동자

두려운 내 두 귀가 숲속에 날카로운 길을 만들었다  

나는 바싹 마른 대지에 이빨을 박고 이 밤을 흡혈한다

고목의 발목 위로 나뭇잎이 수북이 쌓인다

지상의 마지막 물방울을 삼켜버린 구름이 조금씩 계절을 옮겨가고

타오르는 불의 시간,

나는 밤을 지새운 세밀화가처럼

떠오르는 태양을 등지고 나의 눈을 쉬게 한다

 

 

 

 

타오르는 무덤

 

   여행자 수첩

 

강해질 필요가 없는 개

먹을 것을 줘도 살랑대지 않는 개, 그러나

주면 먹는 개와 함께

오직 하나의 표정으로 앉아 있다

이곳은 혓바늘이 돋는 건기

 

중국식당의 중국아줌마는 중국말로 인사를 한다

내 귀에 너무도 익숙해서 나는 내가 중국인인줄 알았다

쌀국수 35바트 물 두 개 20바트

타이마사지 150바트

맥주 30바트 싱글룸 150바트(후불)

주방장이 타이커리를 만들 듯이

몰인정 ․비정․ 무책임과 상관없는 여행자수첩은

숫자만 빼곡하다

  

   짝눈

 

그는 짝눈을 고치려고 일 년 동안

잘 보이는 눈을 가리고 장님처럼 살았다

삼각플라스크 비이커 메스실린더에

알 수 없는 원소들을 섞으며 놀고 있을 때

그곳은 눈동자가 희어지는 건기

 

그의 오른쪽 눈을 덮은 교정안대는 떨어져 나갔다

복숭아에 박혀 꿈틀대는 애벌레를 꿀꺽 삼키던 날들이었다

염산과 수소와 헬륨을 섞었을까, 어두운 방 안에서 불길이 솟았을 때

 

   건기의 숲

 

건기의 숲엔 저절로 불이나기도 한다

타오르는 무덤 위를 펄럭이며 날아오르는 영혼이 있다

내 혓바닥과 당신의 눈동자가 서로 먼 곳에 있더라도

 

 

 

—————

▲ 남궁선 / 1973년 인천 강화 출생. 장안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성신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 수료. 2009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시창작기금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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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신인상 심사를 시작하면서 심사위원들은 요즈음의 신인 발굴에 대해 이런저런 의견을 나누었다. 우리는 신춘문예를 비롯하여 주요 문예지들의 신인상 당선작들이나 당선자들이 적잖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는 데에 공감을 했다. 그 하나는 소위 신춘문예 스타일이 따로 있다고 할 정도로 ‘판박이’ 작품이 당선되는 사례가 많다는 점이다. 이런 작품은 대개 인생이나 세계에 대한 심도 있는 고민이나 개성적인 표현을 향한 치열한 도전정신이 결여된 한계를 드러낸다. 그래서 문제작보다는 문제가 없는 작품, 즉 무난하고 단정한 작품이 당선되는 사례가 많다고 하겠다. 다른 하나는 당선자들의 연령대가 높아지고 성별도 여성 편향성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젊은 세대나 남성이 신인 공모에 당선되는 사례가 드문 것은 요즈음 우리 시단이 지닌 문제적 측면이 아닐 수 없다. 시의 능력에서 남녀나 노소에 의한 차이가 있을 수는 없겠지만, 시의 경향에서 편협한 성별의식이나 세대의식이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은 걱정스럽지 않을 수 없다.

   심사위원들은 이러한 문제점들을 마음 한 구석에 밀어놓고 엄정하고 신중하게 심사를 진행해 나갔다. 예심을 거쳐 올라온 시편들은 모두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너무 단정하거나 그저 무난한 시들은 외형적인 완성도가 높을지라도 심사위원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오히려 약간의 무리가 따르더라도 삶에 대한 깊은 성찰과 참신하고 예리한 언어 감각을 도전적으로 보여주는 시편들에 눈길을 주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심사위원들의 주목을 받은 것은 남궁선의 「너의 귓속은 겨울」 외 4편, 이문경의 「기린의 입과 심장의 거리」 외 5편, 황경철의 「흑백사진」 외 4편, 강민정의 「천사금렵구」 외 4편, 전형주의 「그늘제조법」 외 7편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시적 새로움에 대한 고민과 다양한 창작 경험이 충실히 반영된 것들이어서 심사위원들을 매우 고민스럽게 했다. 하여 다시 꼼꼼하게 윤독을 하고 토론을 하는 과정을 거쳐서 결국 남궁선과 이문경을 수상자로 선정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나머지 세 사람들도 기성 시인 못지않은 믿음직스러운 역량을 갖추고는 있으나, 아직 언어를 장악하는 능력이나 시상 전개의 안정감이 다소 부족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남궁선의 시는 비극적 세계 인식을 감각적 언어로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개성이 돋보인다. 요즈음 시에서 비극적 세계관 자체도 흔치 않지만, 그것을 감각적 언어로 드러낼 수 있다는 것도 평범하지는 않다. 비극적인 것과 감각적인 것은 서로 모순되지만, 이 모순이 오히려 그녀의 시에 개성을 부여한다. 이 모순으로 인해 비극은 더 비극적인 것으로 강조되는 동시에, 단순한 슬픔의 재현을 넘어 삶의 진실을 현현하는 통로의 구실을 하게 된다. 당선작인 「너의 귓속은 겨울」은 “내 방”과 “창밖”의 공간적 대립 구도와 선명한 감각의 언어들을 통해 삶의 비극성을 강조하는 시이다. 삶의 비극성은 “내 방”의 “나”와 “검은손거미원숭이”는 순수성과 야생성을 상실했다는 데서 온다. 반대로 “하얀 꼬리의 여우들”이 있는 “창밖”의 “겨울”은 순수성과 야생성이 살아 있는 세계이다. “나”가 지향하는 “알전구처럼 빛나”는 “하얀 꼬리의 여우들”를 소망하거나, “나” 자신의 “아주 붉은” 피가 “퐁듀처럼 흘러내리”기를 염원하는 것은 그러한 세계를 지향하는 마음과 다르지 않다. 또한 「스테인드글라스」의 “희망의 계획서가 사라진 검은 수첩”이나, 「나는 하얀 장미를 원했고 장미 위로 눈이 내렸다」의 “창문에서 나뭇가지에서 강변에서 멀지는 눈”도 그런 비극성과 관련된 세계를 흥미롭게 형상화한다.

   이문경의 시는 삶의 궁극적 가치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안정감 있는 언어로 전개해 나간다. 성찰의 대상은 요즈음 시에서 시적 대상으로 직접 취택되는 사례가 아주 드문 편에 속하는 진실, 자유, 순수 등이다. 그래서 그녀의 시에는 관념적인 언어들이 자주 등장하여 고답적이고 교훈적이라는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그에 상응하는 참신하고 적실한 메타포들을 찾아내는 데 성공함으로써 그러한 인상을 충분히 불식시켜 주고 있다. 당선작인 「기린의 입과 심장의 거리」에서 “그물눈의 문양을 온몸으로 가진 기린은/진실을 거르는 그물을 가진 것”, “기린이 말하지 않는 이유는/기린의 입과 심장과의 거리가/너무 멀기 때문”이라는 식의 에피그램(epigram)은 인상적이다. 내면적이고 관념적인 대상을 ‘기린’의 외적 이미지와 생리적 특징을 통해 설득력 있게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가진 적이 없는 돌」과 「거리의 발레리나」에서도 버림으로써 소중한 것을 얻는다는 역설적 깨달음, 속박당하는 삶에서의 일탈 욕구와 같은 관념적 내용에 맞춤으로 어울리는 형상을 찾아내는 솜씨가 마뜩하다.

   이번 신인상 공모에도 경향 각지에서 많은 분들이 응모해 주셨다. 시를 향한 열정과 <시작신인상>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신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당선자로 선정된 두 사람에게는 진심으로 축하의 말씀을 전한다. 시인이 된다는 것은 보들레르가 노래했던 ‘알바트로스’처럼 지상에서는 불편하기 그지없는 ‘거대한 날개’를 소유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시의 하늘을 향한 비상을 꿈꾸고 도전해야만 하는 것이 시인의 운명이 아닐까 한다. 부디 고루한 시와 시단의 메커니즘에 길들여지지 말고 자신만의 개성적인 시세계를 오롯하게 개척해 나가기를 바랄 뿐이다.

 

 

심사위원  본심- 김춘식 이형권 홍용희 유성호 // 예심- 박판식 박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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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사한 그늘 / 이선균

 

태양이 이글거리며 쏟아지는 날이면

민박집 노부부 생기가 살아납니다

촘촘히 심어놓은 비치파라솔

싱그런 그늘막 삐져나오는 아기들 웃음소리

옥수수빛 여름 영글어갑니다

태풍 모라꼿에 밤잠 설치기도 했지만 엉겨붙는

늦더위에 여름 한철 그늘농사 모처럼 풍작입니다.

서울 아들도 내려와 옥수수 삶으며

취직 걱정 푸른 파도 위 띄워 보내고

그늘 한 자락에 바람 한 자루 덤으로 얹어주는

이 화창한 음지의 나날,

식당 설거지며 모텔 청소부로 돌고 돌아온

노부부의 고단한 저녁바다

파도가 헛발질로 우회하는 모래톱 솔기 따끔거립니다.

시간의 그늘 화사하게 펼쳐지던 하루가

환한 어둠살로 접혀지고

일기예보에 귀 세운 늦은 밥상 조마조마하지만

화끈거리는 즐거움 이내 곯아 떨어집니다

내일은 몇 채의 그늘막 파도칠 수 있을까요

폭죽 요란하게 쏘아올리는 밤

천개의 별빛 쏟아져내립니다

 

 

-----------------

이선균 / 1961년생. 경기 포천 출생.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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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에 관한 기억들 (외 4편)

김정웅

1
이따금
추억의 부피가 더욱 커지는 날이 있다 똑, 똑―
물이 넘쳐흐르는 소리, 완전히 잠글 수 없는 마음에는
배수구를 낼 필요가 있다 설거지를 하다가
울어 본 적이 있는가, 이 더러운 그릇들이 마음이다
싹싹 비우지 못한 그대가 여전히 많다

2
자주 영혼을 엎지르는 사람은
쉬이 타인의 인생을 더럽힌다, 누군가의 인생에서
잘 지워지지 않는 얼룩으로 산다는 거,
나는 나를 벗어 어두운 세탁기 안에 넣는다
세탁기가 돌아갈 때는 소리내어 울어도 좋을 것이다
단번에 울음을 끌 수 있는 전원 버튼이
몸에도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3
이 모든 일상적 불행은
있지도 않은 고기를 찾아 김치찌개를 뒤적대거나
아버지의 작업복을 몰래 뒤져
담배 몇 개비를 꺼내는 것과는 다른
슬픔, 물을 갈다가 깨뜨린 꽃병,
산산조각이 난 외부를
병의 주둥이는 꽉 붙들고 있다
함부로 엎질러진 입구는 견고하다



가장자리의 힘

버림받은 것들이
세상의 가장자리로 모인다, 지난 봄
꽃잎이 모인 길가로 다시
낙엽들이 모이고, 너의 부드러운 내부로
차마 들어가지 못한 나는, 그대의 생
그 아름다운 가녘을 따라 아주 천천히 걷는다
아무 사연도 담지 못한 빈 소주병이
밀려오는 해변이나, 점점 그늘을 밀어내는
산자락을 따라, 완전히 어두워질 때까지
걸어 본 자는 안다, 지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빛은
왜 세상의 경계로만 모이는지,
검은 머리칼 흩날리며 가는 저 황혼은
너의 내부에서는 볼 수 없었던
外界의 색이었음을, 내 몸의 끄트머리
손발톱처럼 가장자리는 단단하다
아무리 자르고 잘라내도
다시 자라나는 힘이 있다, 여러 번
사랑에게 버림을 받고도
가장자리계*는 쉬이 망가지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리,
모든 버림받은 것들이 모인다
끈질긴 숨을 몰아쉬면서,

―――
* (대뇌)변연계. 감정, 욕구, 기억 등을 담당하는 뇌의 중심핵 근처에
대뇌반구의 가장 안쪽 모서리를 따라 있는 몇 개의 뇌 구조의 집합체.



나는 사막이다
―낙타가 울고 간 밤

잠에서 깼을 때 눈가에 물이 고여 있다면
밤사이 낙타가 울고 간 것이다
내가 낙타를 사랑하기 전에 낙타의 등은
반듯했었다 낙타의 등이 굽은 이유는
나의 사랑이 굴곡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사막이다, 뱀이나 전갈처럼
한껏 독을 품지 않으면 추억들은 견딜 수 없다,
미라처럼, 죽은 후에도 차마 썩지 못하고
끝끝내 견뎌내야만 하는 사랑이 여기에 있다,
그 어떤 그리움도 뿌리내리지 못하는
지독한 내륙에서 길을 잃은 사랑, 매일 밤
사막이 비를 그리워하듯* 그대가 그립다 그러므로
잠에서 깼을 때 비가 내리고 있다면
밤사이 낙타가 울고 간 것이다, 두 번 다시
내 생에 범람하지 못할 그대,
지금은 어느 곳에서 비를 뿌리고 있을까
하늘을 향해 쩍― 입을 벌린
목마름이 여기에 있다, 아무리 발자국을 지워도
결국 길을 잃는 것은 낙타가 아니라 사막이다
낙타가 울고 간 격정의 밤, 나는 마침내
잎을 모두 뜯어 삼키고 메마른 나무처럼 버려진다**
나는 사막이다, 지금 나는
나를 견딜 수 없다

―――
* 팝그룹 EVERYTHING BUT THE GIRL의 노래 「Missing」중에서.
** 집회서 6장 3절 중에서. 



내 귓속에 도청장치

이렇게 술을 많이 마신 날에는
내 귓속 달팽이들이 우,우─ 하고 운다.
이 세상 어딘가에서
내가 버린 여자가 달팽이처럼 몸을 말고
우─ 하고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술을 모르던 어릴 적, 귓속에서 달팽이들이 우는 날에는
나는 내가 미쳤다고 생각했었다.

이렇게 술을 많이 마신 날에는
나는 내 살을 꼬집어 비튼다. 비틀은 지리마다
스멀스멀
달팽이들이 기어다닌다.
내 고통이 낳은 달팽이들이 너에게 가 닿으려면
나는 얼마나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나.
고통에도 모양이 있다면
나선형일 것이다.
사랑이란
맨살에 나사를 조이는 것, 이렇게
술을 많이 마신 날에는
이 세상 어딘가에서
내가 버린 여자가 나사처럼 몸을 말고
내 심장을 겨누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달팽이의 짓무른 살점이
나사처럼 단단해지려면, 나는
얼마나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나.

이렇게 술을 많이 마신 날에는
손바닥으로 탁─탁─ 귀때기를 때린다.
그녀가 떠나며 박아 넣은
내 귓속 도청장치, 달팽이들이 죽어버리도록…
여전히 나는
내가 미쳤다고 생각한다.



저수지의 개들

한여름마다 꼭 시체가 떠오르는
이 저수지는 쉽게 들키지 않는다 뛰어내리기 좋은
절벽들은 낭만적이다, 산등성이에서
달려 내려온 숲의 속도가
짙다, 사람 얼굴을 뒤집어쓴 개들이
몽둥이를 들고
사람 얼굴을 뒤집어쓰지 못한
개를 끌고 숲 속으로 들어간다, 이따금
새들이 날아올랐지만
대형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천박한 사운드가 너무 커서
비명은 들리지 않았다, 가마솥에서는 물이 끓고
저녁이 되기도 전에 개들은 취해 버린다
임자 있는 몸이 임자 있는 몸을 희롱하고, 모든 사랑은
개수작이었다
바짓말을 적시며 물가에서 뛰어노는 저 아이들은
속옷이 완전히 젖는 날 어른이 될 것이다
개가 개를 먹고
개 같은 하루가 가고, 저 저수지 속
물고기들에게 살점을 툭툭 떼어 던져주고 싶은,
더 줄 것이 없어지면 마음까지
모두 내던지고 싶은 날들이 간다

--------------------
▲ 김정웅 / 1980년 서울 출생. 2007년 경기대학교 무역학과 졸업.
주소 : 서울시 금천구 독산2동

 


=============================================================================================


내 슬픈 전설의 25 페이지* (외 4편)

기세은

아빠는 등푸른 생선을 즐겨 먹다가
바다로 떠났다
그 이후
내 머리카락에 파란 물고기가 살고 있다
머리카락이 자랄 때마다
파란 물고기도 무거워진다
두통이 심해서 병원에 갔다
의사는 의혹이 심하다는 진단을 내렸다
하루는 미용실에 갔다
파란 물고기가 다치지 않게
머리를 잘라달라고 했더니
머리에 이상이 있는 것이 아니냐며 비아냥거렸다
갑자기 아빠가 불쌍해졌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더 이상 두통이 심해
고개를 들지 못할 지경에 이르자
바다로 찾아갔다
머리를 흔들어 댔지만
파란 물고기는
빠져나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아빠 하고 불러 봤더니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는 아빠가 보인다
지느러미를 흔들며 들어오라 한다
지느러미가 없다고 했더니
너는 이미 등이 몹시 푸르께하다고 하며
군침을 삼킨다

―――
* 천경자 화가의 그림 제목.



눈부신 방

매트 위에서
나는 혼자였다
뒤꿈치 들고 걸었더니
둘이 되었다
퍽 놀랍기도 했다
서로에게 누구시오 라며 질문을 해댔다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심심해서
물구나무서기를 했다
그랬더니 셋으로 늘어났다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묻는 것은 피차 예의상 그만두었다
앞구르기로 가서
뒷구르기로 되돌아왔다
도무지 부딪히지도 않았다
서운하지도 않았다
곧 이어 넷, 다섯…
점점 수가 늘었다
누구도 동요하지 않았다
제각기
되돌아갈 시간에 사라졌다
퍽이나 고요한 하루였다

 


도드리*

나는 당신을 어른이라고 불렀다
어른이란 의미를 몰랐다
매일 매일
당신은 나에게 설명해 주었다
나날이 귀와 눈이 멀어져갔다
반년이 지났는데도
당신은 여전히 똑같은 설명만 반복했다
드디어 모든 감각을 상실하자
나는 어른 흉내를 내었다
당신은 나를 어른이라고 불렀다
이번에는 내가
매일 매일
당신에게 콧노래를 불러주며 춤을 췄다
당신 역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고
어른에 대한 불신을 키워 나갔다
당신은 반항하기 시작했고
혁명을 일으켰다
나는 방심한 나머지
혁명의 희생자가 되었다
이제 당신이 어른이 될 차례다
나는 색다른 혁명을 꿈꾸고 있다

―――
* '다시 돌아서 들어간다'는 뜻.



마녀 사냥

그녀는 원래부터 마녀는 아니었다
그녀에게 비밀 하나가 있었다
친구들에게 토로하려 했으나 친구들은 외면했다
답답함에 매일매일 가슴을 두들기다
파란 멍이 생겼다
눈물이 났다
파란 눈물이었다
파란 눈물을 병에 담아두고
매일 밤 파란 눈물을 머리카락에 발랐다
그녀가 파란 머리카락을 가지게 되었을 때
친구들은 파란 머리카락의 색다름에 반했다
친구들은 그녀에게
모든 비밀을 털어놓았다
이제 그녀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지만
기쁘지도 않았다
머리카락이 자랄수록
병에 담긴 파란 눈물이 줄어들었다
아무리 가슴을 세게 두들겨도
더 이상 파란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빈 병만 남았다
파란 머리카락은 사라졌다
친구들은 그녀를 마녀라고 즉단했다




베스트 프랜드

친구야, 친구야
작년 너와 마지막 전화 통화에서
나는 앞날이 막막하다고 했어
나는 다 지나간다고 했어
얼마 전 우연히 너를 보았어
너는 나를 못 알아보는 것 같았어
깜짝 놀랐어
눈알이 보이지 않았어
그동안 너에게 무심했던 나는
크게 낙심했어
세상이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것만 같았어
눈을 감아도 다 보였어
그래서 너의 눈알을 되찾아주기로 했어
먼저 파출소에 신고하고
눈알이 갈만한 장소에 눈알 찾기 포스터를 붙였어
라디오 사연으로 올리기도 했지
방송되자 눈알을 비난하는 댓글이 빗발쳤어
눈물을 흘리고 있을 눈알을 생각하자
눈알이 빠질 듯 아팠어
거울을 들여다보니
눈알이 네 개나 있었어
너를 찾아갔어
너는 예전보다 밝은 미소로 나를 맞이해줬어
내 덕분에
보이지 않는 세상을 볼 수 있게 됐다고 했어
진심으로 축하하면서
너와 헤어졌어
집에서 돌아오는 내내
나는 네가 생각나지 않았어
다음 날
나는 내가 누군지 기억나지 않았어

-------------------
▲ 기세은 / 1984년 출생. 명지대학교 청소년지도학과, 문예창작학과 복수전공 4학년.
주소 : 서울시 강동구 성내1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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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7회 시작 신인상 심사평 】


바티칸의 시스티나 성당을 찾은 사람들은 누구나 고개를 젖힌 채 감탄에 젖게 된다. 그곳에는 신의 영감의 화가 미켈란젤로가 그린 천장화 〈천지창조〉가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구약성서의 창세기에 바탕 한 〈천지창조〉의 연작에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는 〈아담의 창조〉 장면을 만날 수 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손끝으로 생명을 불어넣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과 아담의 손끝이 서로 연속성을 이루고 있으나 완전히 마주치지는 못하고 있다. 연속성과 단절이라는 모순 명제가 미묘하게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피조물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과 완전히 합치되지 못하는 숙명을 지닌 것이다. 그래서 지상의 세계는 천상의 세계를 지향하고 갈망하면서도 항상 갈등, 분열, 파행의 세속적 그림자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하나님과 아담의 손끝이 마주치지 못한 미세한 거리, 여기가 바로 지상에서 끊임없이 시가 생성되는 자리가 아닐까? 시는 현실과 꿈, 세속과 신성, 하강과 상승의 틈새에서 그 불연속성의 초극을 위해 전전긍긍 고투하는 과정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요즘처럼 정치권의 퇴행적인 행태와 경제적 한파가 소용돌이치는 현실 속에서도 더욱 늘어난 2009년 제7회 《시작》신인상 투고작을 마주하면서 시를 생성시키는 동력은 불화와 고통의 공간이라는 원론적인 명제를 새삼 더욱 깊이 환기하게 되었다. 120여 명의 1,500여 편이 넘는 작품을 대하면서 우리 시대의 결핍과 원망의 시적 삶의 현장과 화법을 살펴볼 수 있었다. 심사위원들은 오랜 논의 끝에 김정웅과 기세은의 작품을 2009년 당선작으로 정하는 데 합의하였다.

기세은의 「내 슬픈 전설의 25 페이지」를 포함한 9편의 작품은 날카롭고 경쾌하면서도 그로테스크한 상상의 진경을 싱그럽게 펼쳐 보이고 있었다. "내 머리카락에 파란 물고기가 살고 있다"는 "슬픈 전설"의 환정적인 토로나 "모든 감각을 상실"하면서 "어른"이 된 과정을 노래한(「도드리」) 시편들에서 매우 "색다른 혁명"적 언어의 가능성을 읽을 수 있었다.

한편, 김정웅의 응모작들에서는 그늘 깊은 삶의 언어를 표현하는 숙성된 솜씨를 만끽하는 기쁨을 얻을 수 있었다. "나는 사막이다, 지금 나는 / 나를 견딜 수 없다"(「나는 사막이다」)와 같은 진술은 "마음까지 / 모두 내던지"(「저수지의 개들」)는 시적 삶의 열정과 가능성을 동시에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그의 응모작들의 고른 수준도 믿음직한 기대를 갖게 했다. 서로 시적 성향은 다르지만 문학적 성취도에서 오늘날의 우리 시단을 선도적으로 헤쳐나갈 주역이 될 수 있다는 판단 하에 공동 당선을 결정했다. 거듭 축하하며 문운을 빈다.

심사위원 : 홍용희, 유성호, 김춘식, 이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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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타임 스토리 / 김민서

물 속에 잠든 산이 고요하다
고수레를 하듯 떡밥을 풀고
바늘에 꿰인 구더기를 던지자
산등성이에서 곤히 자던 별들이 진저리를 친다

산을 흔들며 다가온 물고기들
입질만 하다 돌아가고
작은 흔들림에도 소스라쳐
낚아 챈 낚싯대에 물비늘만 파닥거린다

고기는 온다고
자넘이 참붕어가 퍼덕이며 온다고
물 속의 산 속으로 미끼를 던지지만
물의 살점만 뜯어 돌아온 빈 바늘들
상처를 여미는 가슴에서 물음표로 흔들린다

새벽 이슬에 젖은 별들이
야광찌를 물고
하나 둘 날아오를 때까지
물위에 떠 있는 이지러진 얼굴
수시로 확인할 때
강을 베고 누운 이마 위에는
매듭 풀린 바람의 차가운 손이 얹히고
부르튼 입술은 또 하루를 입질한다

 


자벌레 / 김민서

전셋집을 옮겨 앉을 때
꽃사과나무 한 그루 선물 받았네
볕 잘 드는 창가에 놓아두니
연둣빛 혀들의 수다는 즐거워
꽃 같은 사과 달릴 날 손꼽아 기다렸네

바람은 대추나무를 건너오며
가시를 세우는데
꽃 사과나무
어쩐 일인지 빛을 잃었네
짧아지는 겨울 해를 좇아 자리를 옮겨주어도
자꾸만 시들어가서
아주 죽어버린 것은 아닌지
아픈 가지 하나를 꺾으려다가
손가락 끝에 물컹!

가던 마음을 저버리고
생생하게 전해져오는 음지의 탄력,
꽃 사과나무 시들어간 만큼
통통하게 살이 오른 벌레 한 마리
나만큼이나 놀라
온몸을 오그라뜨리며 나뒹구네

어떤 보이지 않는 눈 있어
천연덕스레 꽃사과나무에 세 들어 살았네
어디에도 몸 두지 못한 바람이
생의 흐린 창문을 흔드는 이 겨울날
마른 꽃사과나무 가지 아래
꿈틀거리며 온몸으로 몸부림치네



매 맞는 여자 / 김민서

스쿼시
감옥의 죄수들이 하던 운동이라고 했다

뛰쳐나가고 싶은 갈망과
주저앉을 수밖에 없는 절망이
때리고 매 맞으며
서로에게 길들여지는 공간
그 속으로
말캉한 고무공 하나와 라켓을 들고
스스로 걸어 들어가 수인이 된다

라켓을 휘두를 때마다
네 개의 벽면은
순식간에 안면을 바꾸었고
노란 점박이 공은 끝없이 튀어나와
팔다리의 순발력을 조롱했다

하고 싶은 일도
하지 못할 일도 없는
안일이 온몸을 휘감아 올 때
안면몰수와 비웃음의 채찍
흠씬 맞으며
길들여진 것은

과연, 공이었을까?



봉선화 / 김민서

어디로든 스며야 할 마음들,
멍울져 맺혔다

멍울의 심장 짓이겨
생명의 즙을 얻으면
그 꽃들 스며
새로이
인연의 꽃 피어날 것처럼
불길해서 좋았다

모래집 같은 가슴에
봉숭아 꽃물 들이고
그대 간 뒤
손톱 끝으로 붉은 계절이 자란다
자라난 계절은 모두 사막이다
모래알을 헤는 뜨거운 시간들
서리찬 한숨으로 언다

불과 얼음을
한꺼번에 안기고 간 그대여
한때 우리의 꿈이었던
무사한 이 시간들은 차라리 병이다
아무런 증세도 없이 수백 년의 잠복기만 있는



자반고등어 / 김민서

배를 가르고
세속을 버린다
간물에 몸을 씻고
아가미 가득 마른 소금 채운다
터진 속살을 껴안는 소금의
짜디짠 포옹
모든 잡념이 증발한다

얼음송곳 찔러오는
생선가게 좌판에 누우니
한때 겁 없이 마구 삼킨
푸른 파도 출렁인다
멱목처럼 덮여오는 드라이아이스
거리에 주검을 펼쳐놓고
비로소 완성하는
결빙의 포옹

혼 나간 지체는 저리도 평안할까
짜디짠 결빙의 포옹 앞에서
단 한 번도 누군가를
따뜻하게 안아주지 못했던
마음의 배 가른다


--------------
김민서 / 본명 김정란. 서울 출생.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재학 중.
주소 : 서울 강남구 개포3동.

 

 


新 고려장 / 박정수

경로당 앞, 낙엽들을 시청에서 거두어 간다고 혹여 믿고 있지는 않나요. 바람은 뒷일을 책임지지 않아요. 누구 눈여겨본 적 있나요, 왕벚꽃나무 뒤를

장례식장 건너편에 경로당이 있어요 상갓집 신발들처럼 아무렇게나 벗겨진 낙엽들이 수북했어요 주.말.이.었.어.요. 속수무책인 바람이 불기 시작했어요 젊은 한때 일기를 지우듯 무거운 비질을 시작하는 노인들, 조급한 비질 같았지요 바람은 짓궂었어요 흩어지는 낙엽들이 달아나는 손자의 웃음소리로 들렸나 봐요 그저 껄껄 이번엔 느린 비질이었어요

또 다른 죽음을 축하해 주는 弔花가 장례식장을 들어가고 있었지요

몰래 넘겨다본 경로당엔 이 빠진 화투짝이 낙엽처럼 구르고 있었어요 지게에 업히지 않고 걸어온 이곳은 전기도 수도도 부족함이 없어 보였지만, 햇살 드는 통로는 보이지 않았지요 지방신문 조그만 기사처럼 읽혔어요 십 원짜리의 손놀림들이 국숫발처럼 힘없어 보였거든요 간혹, 훈수 두는 목소리는 창을 넘어 들렸지만 해가 바뀔 때마다 주머니에서 꺼내는 전화기는 영 소리를 울리지 않았어요 몇 번은 괜히 번호를 누르곤 음료수마냥 흔들어보는 순간 훅, 콧속으로 겨자씨가 들어왔어요

장례식장에서 멋진 리무진이 나오고 있었어요 뒤덮인 꽃들, 무엇을 축하하는지 알 수 없었어요



學生府君神位 / 박정수

세상 모든 祭日은 죽은 자의 어제다

예사롭지 않은 바람, 엘리베이터 속으로 따라붙고
기억들이란 스틸사진처럼 덜미를 갖고 있다
갖고 있는 기억을 비웃기라도 하듯
엘리베이터는 14층까지 오르고 이쯤 되면 세상의 모든 인기척들
가뭄에 콩 나듯 희박하다
紅東白西, 켜 있던 티비가 꺼지고 魚東肉西가 켜진다
신용불량의 과일차림이 마무리되고
겨울을 보낸 밤알의 벌레 먹은 자리가 꿈틀 흐려진다
늘 번창도 쇠퇴도 없는 둘째의 라이터가 켜지고 잠깐, 후손들은 꺼진다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듯
香연기에 매달린 祭主의 初獻이 거나해지는 동안
이웃집의 부부싸움은 절정에 치닫고
이제부터가 시뮬레이션이 좀더 진지해지는 때다
국과 갱물이 바꿔지는 동안
뒷짐을 진 막내의 지난밤 과음이 어슴푸레 흔들리고
혹시 집을 잘못 찾았나
구석으로 몰리던 사내의 음성이 아랫배까지 힘이 들어간 듯,
원래 제사란 건 죽은 자들의 어제가 아니겠는가
飮福을 하는 숟가락들 중 하나가 유난히 빛난다



마네킹 / 박정수
―독백

쇼윈도로 몰려드는 시선들, 나의 사랑은 늘 충전 중이다

나를 사랑하는 그녀,
누구에게나 나를 멋지게 소개하고 싶어한다
늦은 시간 나와 마주하고 있는 그녀
긴 생머리를 뒤로 젖히며
청바지에 줄무늬 후드티를 입혀주고는
눈빛이 상기되어 한 시간 내내 나만 바라보고 있다
저런 표정일 때 그녀는 유난히 입술만 붉다
연인처럼 그녀가 나를 안아 바닥에 눕힌다
눈을 감을 수 없는 나
그녀는 아랑곳 않고 미니스커트 다리 사이로 나를 뉘어둔 채
내 엉덩이를 까고 바지를 벗긴다
하체와 분리되어 뉘어진 채 내가 폭발할 것만 같다
나는 여전히 눈을 감을 수 없는데
오늘 그녀는 검정 망사팬티를 입고 있다
내 팔은 어디로 갔지,
그녀의 다리가 점점 길어지고
할로겐 열기가 내 심장을 자극한다, 밖은 깊은 어둠인데
그녀와 나 둘뿐인 공간, 달빛도 없는 밖은 더 깊은 어둠인데
순간, 그녀가 연인인 듯 나를 안아 올린다
내 하체와 상체가 결합된 순간,
나의 체액이 그녀의 손에 축축이 묻어난다
새로운 힙합바지의 지퍼를 올려주고 벨트를 채.운.다
분리된 양팔이 그녀의 숨소리처럼 헐떡, 내게로 왔다
멀리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
지금, 그녀의 입술은 더 붉어져 있다 그녀의 입술을 범했다

마.법.에.걸.려.멈.춰.버.린.나,



노루페인트 / 박정수

색깔을 그려내는 남자
녹이 핀 트럭을 타고 매일 같은 시간 가게를 연다
계절과 무관하게 신나 냄새나는 작업복이 벽을 타고 다닐 땐
그 빛깔에 스스로 취한 듯 흔들거린다
햇살은 그를 믿는다
붓을 잡으면 그 또한 햇살을 믿는다
그리하여, 사랑은 늘 다른 서로로 갈아입는 것이다

비 내리는 어느 아침, 녹이 핀 트럭이 비를 맞고 있다
큰 눈의 노루 또한 통유리에 붙어 글썽, 눈물이 고인 듯하고
모처럼 커피 향기가 문을 열었다
오늘은 작업복이 아닌 낡은 청바지, 빗소리에 리듬을 타듯
제멋대로 그어진 페인트 자국은 싱싱한 빗줄기 같다
쨍쨍한 날 한 번도 보지 못한 남자의 눈에 오늘은 무지개가 떴다

출장 중이란 팻말이 걸리면
가게 통유리엔 노루가 혼자 가게를 지킨다



秋 / 박정수

콩은 말을 아껴
말 많은 대추나무를 택한 것이다
타고 오른 넝쿨을 걷어 내리느라
남자는 뒤꿈치를 곤두세우며 안간힘을 쏟는다
여름내 들어준 이야기가 서 말은 되는지
올라간 넝쿨은 제 뿌리 쪽을 두려움이 내려다보고 있다
대추나무가 꽃핀 시절부터 들려준 말들,
비밀이 많았었나, 자꾸자꾸 붉어지고
속말 한 톨 꺼내지 않고 넝쿨만 올린 콩은
꼭 다문 입술이 제법 단단하다

남자가 낫으로 넝쿨을 잘라낸다
줄기가 파삭, 두려웠던 것일까
한꺼번에 와르르 쏟아놓는 말들
친구 배반하고 호박씨 까는 음흉한 뒷거래 같다
보증 빚 남기고 도망간 ?처럼
파삭, 파삭 와르르
낫이 목을 조였던 것이지
가을바람마저 낫질 해대는 남자
중얼중얼 서 말의 콩알보다 할말이 많아 보인다
맷돌 호박 하나 엉덩이를 깔고 헤프게 웃고 있다

모르는 채 단내를 내고 있는 대추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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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수 / 본명 박혜정. 1965년 경북 칠곡 출생. 제2회 최치원 신인문학상.
주소 : 경기도 안성시 당왕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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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사평

풍문에 의하면 우리나라 시인의 총 인구수가 무려 2만 여명에 이른다 한다. 80년대 초반 1,000여 명에 이르던 숫자에 비하면 그야말로 괄목상대할 수적 증가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풍문이 어느 정도 사실에 근거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풍문에 의례 실리게 마련인 어느 정도의 과장과 허세를 감안하더라도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역사상 전례 없는 시인공화국 시대임을 부인할 수는 없으리라. 이런 증가 추세라면 일본 하이쿠 시인의 숫자 5만 명을 따라잡는 날도 멀지 않으리라. 시인의 숫자가 많아서이겠지만 일본 시단의 경우 시인과 독자 사이의 거리나 경계가 거의 없어진다고 한다. 창조자 혹은 생산자(시인)가 바로 수용자 혹은 소비자(독자)이고, 독자가 바로 시인인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시단도 일본의 경우와 흡사한 조짐을 벌써부터 보여 온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현실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볼 것만은 아니다. 외연 확대가 반드시 부정적 현상만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풍부한 자원 속에서 시간의 풍화작용을 이겨낼 고전적 명편들이 내재, 산출될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겠기 때문이다. 문제는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한다는 그레샴의 법칙이 시단에 적용될 경우이다. 양적 확대가 질적 발전이나 향상을 위한 토대가 되지 않는다면 단순한 외연 확대가 무슨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을 것인가. 그것은 말 그대로 거품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과연, 미상불 우리는 시의 르네상스를 구가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문학의 종언이니 시의 죽음이니 하는 평단 내외의 우려 섞인 진단과 달리 문학 현장에서의 창작의 열기는 날로 뜨거워져 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특유한 사례에 해당되리라. 이는 고무적 현상으로 우리 문학 지형에 있어 지적 목록이나 재산이 될지언정 결코 냉소나 폄하의 대상이 아니다. 다만 거듭 주의해야 할 것은 그 열기가 창조적 생산을 결과하는 것으로 작동되어야 함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올해도 많은 시인 지망생들(180명)의 응모작들이 있었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20명 가운데 우리는 박정수, 김민서, 심기랑, 이병기 등 네 분의 시편들을 각별히 주목하여 꼼꼼하게 읽었다. 오랜 숙고 끝에 김민서 씨와 박정수 씨를 2008년 제6회 『시작』신인상 당선자로 꼽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박정수 씨의 시편들은 일상의 세목에 주목하여 그것을 언어 형상미학을 통해 구조화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가령 소외 계층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보일 때에도 그것이 연민이나 동정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대상과의 일정한 미적 거리와 객관성을 지킴으로써 감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오랜 시력의 경험이 아니면 구사하기 힘든 언어의 장악력도 돋보였다.

김민서 씨의 시편들은 하나같이 구조의 안정감이 돋보이고 또 시의 세계를 맑고 투명한 언어로 명징하게 드러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그녀의 시편들에 구사된 언어의 결은 체를 통과한 가루처럼 곱고 섬세하다. 그러나 그러한 언어의 세공으로 그녀는 우리 현실에 미만한 무거운 삶의 문제들을 촘촘히 엮어내는 능력을 발휘하고 있어 주목을 끌었다.

이병기 씨와 심기랑 씨의 시편들 또한 충분히 주목에 요하는 시의 특징들을 갖추고 있었으나 이병기 씨의 경우 시의 상상력이 현실의 물적 토대에 기반하지 않았다는 점이, 심기랑 씨의 경우 제출된 작품들에 편차가 있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시인 2만 명 시대에 진입한 두 분 시인은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라는 비상한 각오로 '시작(詩作)'에 임해야 할 것이다. 이름뿐인 그 흔한 시인이 아니라 우리 시문학 발전에 기여하는 시인으로 살기 위하여 초심을 잃지 말고 초지일관하는 각고의 노력을 아끼지 말기 바란다. 당선자들에게 축하를, 낙선자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보낸다.


심사위원 : 이재무, 이형권, 유성호, 홍용희, 김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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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위에 쓴 가족 / 한우진

 

전근대적으로 눈을 기다린다
눈을 재촉한다
회색 양철지붕이 칼을 물고 나뭇가지를 친다
겨울이냐, 겨울이다

눈이 쌓인다
눈이 그친다
거기에 이름을 쓴다 여편네 이름을 쓴다
여편네도 쓴다 자식 이름을 쓴다
아들도 쓰고 딸도 쓴다 미래의 이름을 쓴다
눈을 밟는다 눈이 녹는다
내가 쓴 여편네의 이름이 사라진다
딸이, 아들이 쓴 먼데 있는 이름도 사라진다
여편네가 쓴 자식 이름은 사라지지 않는다
여편네가 쓴 자식 이름이 사라지지 않는다
눈이 녹은 뒤 나는
여편네가 이름 쓴 자리를 한참 들여다본다
땅이 깊게 패여 있다

 

 

 

겨울 유서遺書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네 글씨체가 아니구나, 아니라며
너에게 뛰어내리는,
너를 어쩌지 못하고 발만 동동,
눈발이 허리를 비튼다.
네가 쓴 자서自序 한 줄도
언제 한번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은 내가
어쩌지 못하고 눈발을 맞는다.
눈발이 발목을 꺾는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
강이 흐르면서 유서를 쓴다.
나무체였다가 구름체였다가
드문드문 창호지를 바른 얼음 밑으로
너의 서체書體가 드러난다.
살아야겠다, 살아야겠다,
강이 살얼음 물고 유서를 쓴다

 

 

 

 

 

 아버지는 북이다 한 번도 북을 두드려 보지 못하고 북을 향해 누웠다
나는 생전의 아버지 앞에서 한 번도 북을 위로 놓고 지도를 펴 보지 않았
다 북을 발밑에 깔고 남으로 서울을 지나 괴산, 충주를 손톱으로 눌렀다
피 묻히고 얼룩진 자리가 고향이 아닌가요, 나는 우기고 싶었지만 아버
지는 북을 따뜻한 남쪽으로 그리워했다 형편없는 마당이었지만 목련은
피었다 목련은 남을 등지고 북으로만 꽃을 피웠다 아직 맺히지도 못한
나는 아버지 등을 돌려보세요, 이쪽이 따듯한걸요, 남풍이 불어도 아버
지는 북을 향해 단추를 풀었다 북창이 많은 집일수록 아버지는 값을 높
게 쳐주었다 내가 북리北里에 편지를 써대기 시작할 무렵 북관에서 새들
이 날아올랐다 그것 보렴 두드릴 수 있다니깐 그러나 새들은 얼음덩어
리로 북적거렸다 아버지는 누가 두드려주지 않는 북처럼 윗목에 놓여졌
다 아직도 아버지는 북이다 어김없이 올해도 나는 북을 향해 아들과 함
께 절을 하였다 아버지 북 받으세요

 

 

 

 

등이 벗겨진 나무는 엎드려 울지 않는다

《부록》

 

1

군데군데 어둠에 손을 데인 어머니
늦게 오시고, 숙제는 하지 못했다
다른 집들이 오순도순 숟가락을 부딪칠 때 나는
우물에 가서 감자를 씻었다
교복을 벗지 않고 입은 채로 잤다
꿈이지만, 지겨운 지게야 더러운 지게야, 구덩이를 팠다

 

2

알록달록 연애가 끝나고
아내는 반지하 단칸방에 도배를 했다
사진을 걸면서 새가 되세요
와이셔츠 흰색은 빛났다
나는 돌멩이가 핀 구두를 신고
어둠을 내려놓고 오는 버스를 기다렸다

 

3

도란도란 사월이 꽃을 낳고
화병에 꽂힌 딸은 두각을 나타냈다
내 등에 꽃잎을 파스처럼 붙이면서 회춘回春하세요
작업복은 회청回靑을 쏟은 듯 좋구나
나는 철공소에서 늦도록 못을 만들고
못대가리처럼 쓰러져 막차로 돌아왔다

 

4

이리저리 밥상 겸 책상은 삐거덕거렸다
부푼 꽃, 무거운 꽃, 화병을 놓을 데가 없구나
내 시는 혁명이 지나간 뒤의 깃발처럼 구겨졌다
기울어진 가계家系에 찬바람 드는 창문만 늘어났다
아내는 처녀적 옷으로 커튼을 만들고
덜컹덜컹 나는 낯선 어둠을 묻힌 채 문 앞에서 서성댔다

 

5

삐걱빼각 아침이 되자
내가 가지고 온 못은 모조리 녹슬었다

 

 

 

 

 

가구를 바꾸며

 

가구를 버리려고 수북한 먼지덩이를 턴다.
가구에 들러붙어 있는 기름때를 닦는다.
가구하고 내통해 본 지도 오래다.
처음에 새것이었을 때, 아내와 번갈아 쳐다보며
예쁘다, 좋구나 하며 말 걸고 쓰다듬었는데
가구도 늙어 상대하지 않으니 먼지만 모아 쓸쓸함을 견뎠구나
처진 가슴 휘어진 다리 외면당한 분풀이로 때만 찌웠구나.

아내하고 간지러운 귓속말 더듬어본 지 오래다.
아내의 욕망은 트고 꿈은 자주 삐걱거린다.
아내의 일상에 두텁게 때 낀 지 오래다.
아내는 추억의 연애봉지에 든 세제로 권태를 닦는 모양인데
빛나지 않는 삶은 잘 열리지 않는 서랍이다.
아내의 문 열어본 지 오래다.
아내의 갈망은 굽은 빨래판처럼 뒤뚱거린다
일요일마다 나는 빨래판 위에 빨래처럼 누워도 보는 것인데
아내는 오자誤字투성이 내 몸을 끌어당기기도 하는 것인데,

새 가구가 놓인다. 반듯하게 놓인다.
나무냄새와 시너냄새 섞여 방안을 덥힌다.
새것은 무슨 티를 내도 꼭 내네요,
더 닦을 것도 없는데 아내는 자꾸 걸레질을 하면서
어지간히 다 새것인데 사람만 헌것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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