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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계간「 시작 」가을호 신인상 당선작>
생일전야 / 이영옥
남자는 달려오는 빛을 향해 몸을 날렸다 다급한 순간에는 어떤 기억도 저
항하지 못한다 남자의 몸이 파닥거리다가 이내 조용해졌다 남자의 주변으
로 살비듬같은 햇살이 잠시 푸슥그렸다 호주머니 속에서 끌려나온 유서는
창백했다 세상의 고통들은 왜 똑같은 모서리를 가질까 남자의 절망은 여러
번 접혀진 채 천천히 닳아왔을 것이다 휘갈겨 쓴 모음과 자음들이 더듬거리
며 남자를 변명했다 생일전날 날짜가 맞아 떨어진 것은 순전히 남자의 수학
적 강박 때문이었다 TV를 켜자 아홉시 뉴스앵커가 알맞게 경직된 하루를
부검하고 있다 어두운 터널은 놀란 동공처럼 아득히 뚫려 있고 남자의 반
지하 단칸방에는 미역이 양푼을 검게 부풀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