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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렬, 최요한의 삽집베스트 두 번째코너「‘공정’은 개뿔!」



- 권수진 -
한 마리의 똥돼지를 키우기 위해
봄부터 외교부는
그렇게 특별채용을 서둘렀나 보다

한 마리의 똥돼지를 만들기 위해
유장관은 비정규직에서 정규직 전환평가를
필기시험 없이 집단토론과 면접만으로 지시를 했었나 보다

행여나 합격할까 가슴 조이던
돈 없고 빽 없는 서민들의 뒤안길에서
정부 부처, 군대, 학교, 금융기관 등
우리 사회 곳곳에 퍼져 있는 음서제도여,

똥돼지가 판을 치는 세상을 만들려고
대한민국엔 똥돼지 서식지가 저리 퍼지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출처 : 한국노동방송국
글쓴이 : 한국노동방송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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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시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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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정치이념

 

 

1. 우리식 사회주의


  동구사회주의가 몰락하고 소련이 해체되자 북한은 엄청난 충격을 받고 체제유지에 총력을 집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북한정권이 사회주의 몰락의 도미노 현상을 차단하고, 변화의 물결이 침투하지 않도록 주민들을 단속하기 위하여 내놓은 두 가지 하위 통치이념은 ‘우리식 사회주의’와 ‘조선민족제일주의’이다.

  북한은 1980년대 말부터 ‘우리식대로 살자’는 구호를 대대적으로 내세우면서 이른바 주체사상에 기초한다는 ‘우리식 사회주의’를 집중 선전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동구 사회주의의 몰락에 대해 “오늘날 일부 나라들에서 사회주의가 좌절한 것은 일시적 현상이며 인류가 사회주의에로 나아가는 것은 그 어떤 힘으로도 막을 수 없는 력사의 법칙”이고 사회주의의 일시적 좌절의 이유는 주체사상과 같은 위대한 사상이 없었고 김일성·김정일 부자와 같은 위대한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다원주의를 지향하는 동구의 민주화와 개혁·개방에 대해서는 “제국주의자들이 사회주의를 파괴하기 위해 경제협력과 원조를 미끼로 침투해 들어온 반동적 책동의 결과”라고 입장을 정리한 다음 “사회주의 사회에서 사상의 자유화와 정치에서의 다당제를 허용하는 것은 결국 사회주의 사회의 기초를 허물고 인민의 정권을 전복하기 위한 반혁명적 책동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대신 “우리식 사회주의 체제는 인민대중에게 자주적이며 창조적인 생활을 보장해주는 가장 우월한 사회제도”라고 선전하면서 “수령, 당, 대중이 일심단결하여 사회주의 제도를 튼튼히 고수하고 사회주의 위업을 끝까지 완성시켜 나아가기 위해 몸 바쳐 투쟁하자”고 주민들을 학습시켰다. 즉 ‘우리식 사회주의’란 ‘영원불멸의 주체사상’에 기초한 가장 독창적이고 우월한 사회주의, 다시 말해서 인류의 참된 복지생활이 보장되는 이상사회를 구현한 정치제도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주민들에게는 어떠한 시련이 닥쳐오더라도 한 걸음도 물러서거나 주저함이 없이 김정일 중심으로 굳게 뭉쳐 주체사상을 구현한 우리식 사회주의를 끝까지 지켜나갈 것을 촉구하였다.

  한편 2002년 1월 신년 공동사설에서 “수령이 탁월하고 사상이 위대하며 군대가 위력하고 제도가 우월하기에 우리식 사회주의 위업은 반드시 승리한다”라며 ‘우리식 사회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수령 ‧ 사상 ‧ 군대 ‧ 제도의 ‘4대 제일주의’를 제시하고 있다.


2. 조선민족 제일주의


  ‘조선민족제일주의’는 1986년 7월 김정일의 당중앙위원회 책임일꾼들과의 담화 ‘주체사상 교양에서 제기되는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에서 처음 등장하였다. 이후 1989년 12월 당중앙위원회 책임일꾼들에게 행한 김정일 연설 ‘조선민족 제일주의 정신을 높이 발양시키자’에서 본격 강조되었으며 1990년대 들어서는 북한주민들에게 집중적으로 교육되었다.

  북한은 조선민족제일주의의 원천이 첫째 김일성과 김정일이라는 지도자, 둘째 주체사상, 셋째 혁명전통, 넷째 ‘우리식 사회주의’, 다섯째 민족의 고유한 역사에서 나온다고 주장하고 있다. 결국 조선민족제일주의는 민족적 우월성을 내세워 붕괴된 여타 사회주의 국가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킴으로써 내부적으로 주민들의 사상적 동요를 막고 체제결속을 도모하기 위해 제창된 하위 통치이념이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대남 측면에서는 민족대단결 논리를 뒷받침하여 통일전선을 구축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심각한 경제난에도 불구하고 많은 자재와 노력을 들여 1994년 10월 단군릉을 완공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이다.


3. 붉은기 사상


  북한이 주장하는 ‘붉은기 사상’에서의 붉은기는 1920~30년대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시기에 불리어졌다는 적기가에서 유래된 것으로 ‘항일 빨치산의 투쟁정신’을 지칭하는 것이다. 따라서 붉은기 사상이란 항일 투쟁 시기 김일성에게 혁명 동지들이 보여주었던 ‘자력갱생’, ‘간고 분투정신’, ‘수령결사 옹위정신’, ‘혁명적 낙관주의 정신’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최근 북한이 주민들에게 ‘붉은기 사상’을 강조하는 것은 당면한 어려움 상황을 김정일에 대한 충성과 인고의 정신 등으로 무장하여 극복하도록 유도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 사망 이후에는 붉은기 기치(95. 8) → 붉은기 철학(96. 1) → 붉은기 사상(97. 1) 등으로 지속적으로 강도 높게 주장해 오고 있다. 그러나 ‘붉은기 철학’이란 것도 “주체사상에 기초하여 혁명 원리를 밝힌 것”이라고 하여 주체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하위개념으로 성격을 규정하고 있다.

  김일성 사망(1994. 7), 자연재해 등 체제위기 국면이 전개되던 1995년부터 김정일은 “적들이 바라는 것은 우리의 사상이 희어지는 것이나, 우리는 붉다”며 사회주의 붕괴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이를 지키는 보루로서 자신을 부각시키면서, 사회주의 순결성, 체제보루를 상징하는 ‘붉은기 사상’을 내놓았다.

  ‘붉은기 사상’은 1995년 8월 28일자 노동신문에 ‘붉은기를 높이 들고 나가자’라는 논설이 실린 이후부터 북한의 각종 언론보도에 등장하였다. 이어 1996년 신년 공동사설에서 ‘붉은기를 높이 들고 새해의 진군을 힘차게 다그쳐 나가자’라는 제목을 내세우면서부터 ‘붉은기 사상’의 선전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붉은기 사상’은 심각한 경제난으로 체제위기를 느낀 북한 지도부가 체제수호의 구호로서 내세운 것으로 그 선전의 강도를 높였을 뿐 주체사상을 대체할 정도는 아니었다. ‘붉은기 사상’의 기초인 ‘붉은기 철학’이 주체의 혁명철학에 기초해서 일심단결의 혁명철학과 신념의 철학을 담고 있는 것으로 설명되는데, 이는 ‘붉은기 사상’이 주체사상에 기초하되 새로운 상황에 직면해서 이를 돌파하기 위해 나온 체제수호의 논리라는 점을 말해주는 것이다.

  ‘붉은기 사상’은 “어떤 배신도 모르며 사소한 사상적 변질도 없는 일심단결의 상징이며 혁명적 지조와 절개로 죽어서도 붉은 기폭에 싸여 영도자의 품속에서 영생하려는 신념의 기치”로 표현된다. 그러나 1997년 10월 김정일이 조선노동당 총비서로 취임하고 황장엽 망명

(1997. 2) 등으로 인한 북한사회의 충격이 어느 정도 가시면서 ‘붉은기 사상’에 대한 강조도 줄어들었다.


4. 강성대국론


  강성대국론은 1998년에 본격 등장한 이념이다. 1998년 2월 김정일의 자강도 현지지도 및 ‘8·15’를 전후하여 ‘강성대국’이라는 용어가 제시되었다. 이어 8월 22일 노동신문 정론‘강성대국’이 발표되고, 같은 해 8월 31일 ‘광명성 1호’를 발사하고서는 이를 강성대국으로 진입하는 신호탄인 것처럼 의미를 부여하는 등 대대적으로 선전하기 시작하였다. 북한이 주장하는 강성대국 건설론은 3가지 측면으로 제시된다. 첫째는 사상·정치의 강국 건설이고, 둘째는 군사의 강국 건설이며, 셋째는 경제의 강국 건설이다.

  북한은 사상의 강국이란 “주체사상에 기초한 당과 혁명대오의 공고한 사상의지적 통일단결이 이룩된 나라”를 말하며, 군사의 강국은 “강력한 공격수단과 방어수단을 다 갖춘 무적필승의 강군, 전민 무장화, 전국 요새화가 빛나게 실현되여 그 어떤 원쑤도 범접할 수 없는 난공불락의 보루”를 뜻하고, 경제의 강국이란 “사회주의 건설을 다그쳐 경제를 활성화하고 자립경제의 위력을 높이 발양시키면 우리 조국은 모든 면에서 강대한 나라로 빛을 뿌리게 된다”는 의미라고 설명하고 있다.

  한편 북한은 2001년 신년 공동사설에서 ‘신사고’에 기초하여 강성대국 건설을 위한 모든 부문, 모든 분야에 ‘종자론’1)을 관철할 것을 촉구하였다. ‘신사고론’은 강력한 국가 경제력을 확보하기 위해 새 세기의 요구에 맞게 사고방식, 투쟁기풍 등에서 근본적인 혁신을 이루어야한다는 것으로 과거 다른 나라의 낡은 틀과 관례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고 ‘우리식’대로의 방법론을 강조하고 있다. 북한이 강성대국론을 내놓은 배경에는 대내적으로 김정일 시대의 출범에 즈음하여 주민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새로운 정치이념이 필요하고, 대외적으로는 북한정권이 건재함을 과시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점 등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1) ‘종자론’은 1973년 4월 김정일의 논문「영화예술론」에서 제시된 이론으로 “사업에서 근본을 이루는 핵을 틀어쥐고 근원적 문제부터 혁명적으로 풀어 사업전반에서 변혁을 이룩해 나간다”는 종자 중시의 논리이다.


출처 : 경남대학교 철학인들의 모임
글쓴이 : 권수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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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경이
글쓴이 : 원경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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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



1.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의미


  (1) 공산주의

  공산주의(communism)의 어원은 ‘commune’인데 이는 ‘다른 사람과의 나눔 혹은 사귐’을 뜻하는 라틴어로서 공동체 재산이 구성원 모두에게 속하는 사회제도를 일컫는다. 따라서 공산주의란 사유재산을 부정하여 재산의 공유를 실현시킴으로써 계급이 없는 평등한 사회를 이룩하려는 사상 및 운동을 말한다. 공산주의는 사유재산과 계급 및 국가가 완전히 소멸된 높은 단계의 사회주의로 제2의 사회주의라고도 불린다.


  (2) 사회주의

  일반적으로 사회주의 사상이라고 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현된 거대한 생산력을 한층 더 발전시켜 이것을 참된 자본주의의 기초 조건인 생산수단의 사유제를 부정하여 생산 수단의 공유화와 경제의 계획화를 기해야 한다고 보는 사상이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과도기로 완전한 공산주의 실현이 되기 이전에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이루어지는 단계를 말한다.


2. 사회주의 형성과정


  (1) 사회주의 등장 배경

  초기 자본주의는 자유주의 이념을 기반으로 사유재산제, 자유계약, 자유 시장제도를 근간으로 한다. 이는 유럽의 정신적 ‧ 경제적 성장에 크게 기여를 하였으나 빈부격차, 실업자 증대, 물질주의 팽배 등과 같은 자본주의의 모순에 봉착하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사회주의가 등장하였다. 이는 새로운 인간과 이상사회에 대한 열망의 표현이었다.


  (2) 사회주의 특징

  사회주의의 특징은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자유주의적인 인간관에 반하는 사회중심의 인간관을 강조한다. 인간은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상호 의존적 존재로서 개인의 능력과 인간성은 사회적 산물이라는 것이다. 둘째, 생산 수단의 공동 소유와 통제를 핵심 원리로 한다. 자본주의의 문제점은 사유재산제에서 비롯되므로 생산 수단의 국유화로 불평등의 문제가 해소될 수 있다고 보았다. 셋째, 경제적 불평등의 해소를 중요한 이념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이념은 물질적 결핍으로부터 인간 해방을 의미하며, 물질적 재화의 생산보다는 분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생산<분배)


3. 사회주의의 발전과정


  (1) 사회주의 기원

  현대 사회주의 운동은 1848년 ‘공산당 선언’에 의해 대표되는 마르크스주의에 기원을 두 고 있지만 그 사상적 기원은 고대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플라톤은 《국가》(republic)에서 지도자의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였는데, 그 방법으로 공동 소유, 공동생활, 자녀의 공동교육을 강조하여 사욕에 의한 재산의 형성을 차단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초기 그리스도교도 공동체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핍박을 통해 사회에서 벗어나 소규모의 공동체에서 공동 작업을 토대로 소박한 생활을 하여 사회주의의 원형이 되었다. 토마스 모어(T. More)의 유토피아 사상 역시 공동으로 생산하고 공동으로 분배하는 사회를 그리고 있다.


  (2) 공상적 사회주의

  공상적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발달하지 않고 노동자와 자본가의 계급투쟁도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에 자본주의 단점을 바로 잡기 위해 이상사회에 관한 공상적 계획을 세웠으며, 정의와 이성에 의해서 이를 실현시키려 하였다.

  19세기 이전까지는 디거스나 평등주의자 등 비교적 소수의 사상가들에 의해 주도되어 왔다. 그 후로 19세기 초부터 자본주의의 병폐가 가장 심한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하나의 학파를 형성하게 되었고, 사회주의 운동 역시 점차 확고하게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계몽주의 후예로 자처했던 C. H. 생시몽, C. 푸리에, R. 오언 등을 비롯한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평등과 합리성의 이름으로 기존 체제를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양심적인 인도주의자였으며 전통적인 권위를 불신하고 이성의 힘을 통해 인간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들은 이상과 사회적 현실과의 모순 속에서 현존의 사회질서를 철저하게 고발하였을 뿐만 아니라 더 나은 사회질서 원리를 정식화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초기 사회주의자들은 산업 사회의 현실을 인정하고 이것을 유토피아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즉 그들은 산업 사회가 약속한 물질적 풍요의 기반 위에서 새로운 사회의 원리를 구상하였다. 더욱이 사회 개혁을 목표로 하는 운동이 당시에는 없었기 때문에 그들 자신의 역량으로 대중들을 움직이려고 노력하였다. 즉 사회주의 사회와 미래를 예견하였으나 노동자 계급이 발달하지 않은 당시의 시대적 제약을 반영하여 노동자 계급을 단순한 구제 대상으로만 보았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공상적 사회주의자로 불리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비록 그들이 실패한 사상가로서 평가되기는 하지만 사회주의 사상의 발전에 기여한 점은 간과할 수 없다. 그들은 후일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과학적 사회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는 지적 토양을 제공하였다.


  (3) 과학적 사회주의

  과학적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주의를 말한다. 19세기 3가지 정신적 주조(主潮), 즉 독일의 고전 철학, 영국의 고전 경제학 및 프랑스의 혁명적 학설과 결합된 사회주의를 그 원천 또는 구성부분으로 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 체계는 G. W. 헤겔, L. 포이어바흐 등 19세기 독일의 고전 철학에서 변증법과 유물론을, 또 영국의 고전경제학 중에서도 특히 D. 리카도의 경제학으로부터 노동 가치설을, 그리고 프랑스의 사회주의자들로부터 사회주의 사상을 계승 ‧ 발전시킴으로써 형성되었다.

  마르크스(K. Marx, 1818~1883)는 <공산당 선언>,<자본론> 등에서 자본주의 붕괴와 프롤레타리아 독재 및 계급 없는 사회의 도래를 역사적 필연성의 차원에서 주장하였다. 이러한 마르크스주의는 공산주의라는 강력한 이데올로기로 등장함으로써 사회주의 운동을 자극하였으며, 사회주의 운동의 가장 큰 지적 연원이 되었다.


  (4) 역사 사회 발전 5단계

  마르크스와 엥겔스(F. Engels, 1820~1895)는 <공산당 선언>에서 인류 역사를 원시 공산주의 사회, 고대 노예제 사회, 중세 봉건주의 사회,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 설명한 뒤 자본주의 사회가 고도로 발달된 사회에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의해 공산주의 사회가 도래할 것을 예언하였다.

  마르크스는 생산력과 생산 관계의 모순이 일어난다는 관점에서 인류 역사의 발전을 결정론적으로 제시하였다. 마르크스의 설명에 의하면, 최초의 원시적 단계에서는 사유재산이 없었고, 계급의 분화와 국가도 없었다. 그러나 사유재산이 생겨나면서부터 계급의 분화가 시작되었다. 최초의 계급 사회는 노예 사회로 노예가 재산으로 사유되었다. 이후의 사회에서는 봉건적 지주라는 신흥 계급이 생겨 봉건 사회의 지배 계급으로 등장하였다. 봉건 사회의 테두리 안에서 상인 계급은 서서히 성장하게 되었고, 이들은 점차 혁명적 세력이 되어 마침내 봉건적 권력을 타도하게 되었다.

  마지막 발전 단계에서 자본주의 사회는 그 태내에 자체의 멸망을 재촉하게 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성장시키게 된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승리로 종결된 혁명은 사회주의 사회로 넘어가게 된다. 여기에는 계급투쟁이나 억압이 없으며, 나아가서는 그 이상의 혁명도 필요하지 않다. 이는 계급투쟁에 의하여 추진되는 인류의 역사가 필연적으로 나아가는 진로의 완전한 윤곽을 표시한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계급투쟁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전 구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역사의 의미에 관한 관념, 공산주의의 종국적 승리에 대한 확신, 민중 제계급 제국민에 대한 태도, 공산주의의 윤리 및 공산주의자의 이데올로기 통일에 대한 주장 등이 모두 역사 발전의 5단계에서 도출되는 것이다.


인류사회의 역사 발전단계

원시

고대

중세

근대

공산주의

공산주의

노예제

봉건주의

자본주의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공상 사회가 잉태되려면 기나긴 진통이 수반되며, 그 과도기에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대개 과도기는 ‘사회주의’라는 용어로 지칭되었으며, 사회주의가 무르익어 사유재산과 계급 및 국가가 완전히 소멸된 보다 높은 단계에 도달한 경우에 ‘공산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공산주의는 사ㅚ주의의 제2단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자체모순에 의한 필연적 붕괴

프롤레타리아

독재

계급 없는 사회



4. 공산주의 출현과 전개


  1917년 제1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러시아에서는 레닌(V. N. Lenin, 1870~1924)의 주도로 볼셰비키 혁명을 일으켜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였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거의 발달하지 못한 농업 국가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게 되면서 공산주의 사회건설에 많은 혼란이 발생하였다.

  대체로 스탈린 사망 이전인 1950년대 중반 이전까지 세계의 공산당들은 소련을 정점으로 하는 일원적 계층구조를 유지하였다. 그 이후 세계의 공산주의 운동은 다원화되면서 소련 중심의 공산주의 운동이 아닌 다양한 길이 모색되기 시작하였다. ‘자치 관리 사회주의’ 표방했던 유고슬라비아 이외에도 중국 공산당이 독자 노선을 천명하기에 이르렀다.


  (1) 유고슬라비아의 자치 관리 사회주의

  1940년대 말 유고슬라비아의 티도(J. B. Tito)가 국영기업을 노동자에게 이양하고 기업의 소유를 국가에서 사회의 소유로 전환하여, 원칙적으로 기업이 자율성을 갖는 자치적인 시장경제를 만든 데서 기인한다. 1948년 스탈린과 대립한 끝에 코민포름(Cominform)으로부터 제명된 유고슬라비아 지도자 티토의 정치 이념과 그에 의해 대표되는 유고슬라비아의 정책과 체제, 나치 독일군에 대한 해방투쟁 과정에서 국민적 지지를 획득했던 티토는 다른 동유럽 공산당 지도자들과는 달리 소련의 종주권에 대한 민족주의적인 반기를 들 수 있었다.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서 축출되었음에도 유고가 자기의 실정에 맞는 자주관리노선을 내걸고 독자적인 체제를 정착시키게 되자 1956년 소련과의 관계를 자주적 차원에서 회복할 수 있었다. 엄격하고 경직된 사회주의적 체제 변혁을 고집하지 않는 유고의 독자적인 정책은 서유럽의 많은 지식인들과 여론에서 혹평을 받게 되었고,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의 대표적인 모델이 되었다.


  (2) 중국의 흑묘백묘론

  원래 흑묘백묘는 중국 쓰촨성(四川省) 지방의 속담인 흑묘황묘(黑猫黃猫)에서 유래한 용어를 변형시킨 것으로, ‘흑묘백묘 주노서 취시호묘’(黑猫白猫 住老鼠 就是好猫)의 줄임말이다. 즉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뜻이다. 중국의 개혁과 개방을 이끈 덩샤오핑(鄧小平)이 1979년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와 주장하면서 유명해진 말로, 흔히 흑묘백묘론이라고 한다. 고양이 빛깔이 어떻든 고양이는 쥐만 잘 잡으면 되듯이,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상관없이 중국 인민을 잘 살게 하면 그것이 제일이라는 뜻이다.

  부유해질 수 있는 사람부터 먼저 부유해지라는 뜻의 선부론(先富論)과 함께 덩샤오핑의 경제정책을 가장 잘 대변하는 용어이다. 그 뒤 흑묘백묘론은 1980년대 중국식 시장경제를 대표하는 용어로 자리 잡았고, 덩샤오핑의 이러한 개혁·개방정책에 힘입어 중국은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거듭하였다. 다시 말해 경제정책은 흑묘백묘식으로 추진하고, 정치는 기존의 공산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정경분리의 정책을 통해 덩샤오핑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중국식 사회주의를 탄생시켰다.


  1970년대 중반 이후에는 서구의 공산주의자들이 사회주의로의 민주적 도정(道程)이라는 기치를 높이 들었다. 이미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민주 사회주의가 서유럽에서 부상하였는데 그들은 계급투쟁과 폭력혁명을 통해 사회 혁명론을 내세우는 공산주의자들에게 등을 돌리고 의회라는 정당한 절차와 민주적 절차를 거쳐 자본주의 병폐를 고쳐 나가겠다는 점진적 사회 개혁론을 주창하였다. 그리고 끝내 마르크스주의와의 완전 결별을 선언하였다. 서독의 사회민주당, 영국의 노동당, 프랑스의 사회당 등은 범세계적인 기구로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출범시켰다.(1951)

  이들 정당들은 서구의 자본주의 질서에 자연스럽게 통합되었으며, 그 이후 서구 여러 나라에서 집권 정당으로 부상하였다. 또한 1980년대 후반 소련에서는 고르바초프(M. S. Gorbachyov, 1931~ )가 자본주의 체제로의 전환을 선언하였다. 고르바초프의 개혁과 개방 정책은 1985년 체르넨코가 죽자 새 서기장에 선출되어 소련 최고의 지도자로 떠오른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로 집약된 일련의 민주화 조치를 추진한 것을 말한다. 이는 동구권에도 영향을 끼쳐 동구의 사회주의 또한 소련을 뒤따라 자본주의 체제로 전환하게 되었다.


  (3) 사회 민주주의와 민주 사회주의

  국제적인 사회주의 운동을 목표로 조직된 ‘제1인터내셔널’과 ‘제2인터내셔널’은 사상적 통일을 이루지 못한 채 제1차 세계대전을 고비로 와해되고 말았다. 그 후 1919년 러시아에서는 레님의 주도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제3인터내셔널)인 코민테른(Comintern)이 창설되었는데 이것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을 배제시킨 공산주의자들의 국제조직이었다. 한편 비혁명적인 방법을 통해 사회주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던 사회주의 정당들은 코민테른의 등장에 자극을 받아 1923년 ‘사회주의 노동자 인터내셔널’(The Labor and Socialist International)을 결성하였다. 여기에 참여한 정당들은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자신들의 주장을 사회민주주의라고 명명하였다. 이것은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볼 때,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사회 민주당이 추구했던 수정된 형태의 마르크스주의로서, 폭력이 아닌 평화적이고 의회주의적인 방을 통해 이상사회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그 후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나치 독일에 의해 점령된 유럽 국가들로부터 추방된 사회주의자들이 런던에 모여 국제 조직 결성에 합의하고, 1846년에 ‘국제 사회주의자 회의’(The International Socialist Conference)를 출범시켰다. 그리고 이듬해인 1947년에는 국제 사회주의자 회의의 집행기관으로서 기존의 ‘사회주의 노동자 인터내셔널’을 발전시킨 국제 사회주의자 회의 위원회를 설치하였다. 이후 소련에 편입된 동구의 사회주의 정당들과 이탈이라 좌파 사회당이 탈퇴하고 순수한 민주 사회주의들만이 참여한 1952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제8차 대회는 조직의 명칭을 ‘사회주의 인터내셔널’(The Socialist International)로 바꾸고 민주 사회주의의 목적과 임무라는 강령을 채택 발표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민주 사회주의 선언’ 또는 ‘프랑크푸르트 선언’이다.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은 공산주의에 대치되는 순수한 민주 사회주의자들만이 국제조직으로 성장하였다.


5. 공산주의 사상의 쇠퇴


  오늘날 전체주의(全體主義)는 사회사상으로서의 위력과 힘을 상실한지 오래다. 이탈리아의 파시즘 국가, 히틀러(A. Hitler, 1889~1945)의 나치 독일, 스탈린(I. V. 1879~1953) 통치 하의 소련 등의 전체주의는 퇴조하였다. 군사력에 의한 국위 신장을 국가의 주요 목표로 생각하여 사회 구조나 국민의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을 군사적 가치에 종속시키려고 했던 독일 제국과 만주 사변에서 제2차 세계대전 시까지의 일본의 군국주의(軍國主義)도 마찬가지다. 군국주의는 독일과 일본의 운명이 말해주는 것처럼 현대의 총력전을 위해서는 매우 부적합한 체제임에 틀림없으며 신생 국가의 군사정권은 이른바 근대화를 위한 과두제(寡頭制)의 한 형태에 불과한 것이다.


  (1) 전체주의와 군국주의

  군국주의는 군사력에 의한 대외적 발전을 중시하여 전쟁과 그 준비를 위한 정책이나 제도를 국민생활에서 최상위에 두고 정치, 문화, 교육 등 모든 생활영역을 이에 전면적으로 종속시키려는 사상과 행동양식이다. 그리고 전체주의는 개인은 전체 속에서 비로소 존재 가치를 갖는다는 주장 아래 강력한 국가 권력으로 국민 생활을 간섭 ‧ 통제하는 사상 및 체제이다. 처음에는 이탈리아의 파시즘, 독일의 나치즘, 일본의 군국주의 등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냉전 체제 속에서 공산주의를 지칭하게 되어 반공산주의 슬로건으로 전용되기 시작하였다.

  프리드리히와 브랜진스키는《전체주의 독재와 독재정부》에서 전체주의적 독재를 현대 산업 사회의 특징과 결부시켜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첫째, 기존 사회를 과격하게 배척하며 세계정복을 계획하는 이데올로기, 둘째, 권력을 독점한 국가 관료제와 권력이 융합된 과두적 대중정당, 셋째, 사회 ‧ 국가 ‧ 정당을 통제하는 비밀경찰, 넷째, 여론 조작을 위한 매스미디어의 독점, 다섯째, 단체들의 관료주의적 획일화이다. 요약하면 이들은 현대적 기술의 발달을 통하여 통제의 전체성이 확보되고 있는 정치 체제를 전체주의 정치 체제로 보았다.


  (2) 평등주의 노선과 실용주의 노선

  공산주의 또한 스스로의 딜레마에 빠져 몰락의 길을 걸었다. 현존하는 공산주의 체제는 어느 나라에서나 ‘계급 없는 사회’라는 유토피아적 목표와 현실적으로 중시하지 않을 수 없는 근대화 목표 간의 갈등 때문에 적지 않은 딜레마를 경험해야만 했다. 근대화를 달성하기 위해서 경제적 효율성을 앞세우고 물질적 유인책을 쓰게 되면 기술관료 계층의 특권화가 조장되고 불평등이 심화되어 유토피아적 목표 자체가 위협 당하게 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유토피아적 목표에 충실하기 위해서 평등을 앞세운다면 개인의 자유는 더욱 억압되고 일에 대한 동기는 약화되어 결국 경제 침체의 늪으로 빠지게 된다. 그 때문에 많은 나라가 ‘평등주의 노선’과 ‘실용주의 노선’ 가운데서 갈등을 겪기도 했다.


평등주의 노선

계급없는 사회

라는 목표의 과도한 추진

자유 억압

일에 대한 동기 약화

경제 침체


실용주의 노선

근대화

추진

물질적 유인책 필요

기술관료 계층의 특권화 조장

유토피아적

목표 위협



  (3) 자유의 결핍

  기존 공산주의 체제가 지닌 가장 큰 문제점 중의 하나는 ‘자유의 결핍’에서 비롯되었다. 개인의 자유나 창의성, 그리고 책임감이 고갈된 사회에서 경직된 관료 독재 체제가 구축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개인의 창의성과 시장의 자동조절 기능을 외면한 채, 국가 독점적 생산 양식에만 의존하던 공산 국가들은 하나같이 경제 발전에 실패하였으며, 자유뿐만 아니라 물질적 토대마저도 약화되었다.


  (4) 평등의 허구화

  공산주의에서 가장 앞세울 수 있는 덕목이 ‘평등’이라는 가치이다. 그런데 공산국가에서는 낙후된 경제로 인하여 전반적인 복지 수준이 매우 낮았으며 생활수준도 하향적으로 평준화되었기 때문에 평등이라는 가치마저도 허구가 되고 말았다.


6. 자본주의 체제에 주는 교훈


  아직도 지구촌에는 공산주의 정권이 잔존하고 있으나 대부분의 국가가 자본주의 경제 원리를 도입해 변화를 꾀하고 있으며 공산주의 본래의 모습은 점점 자취를 감추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오늘날 자본주의가 만연한 현대 사회에서 빈부격차, 불평등과 같은 자본주의 내부의 문제에 경종을 울려 결함을 보완할 수 있는 사회사상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자본주의 쇄신과 발전을 위하여 공산주의에서 표방했던 이상 중에서 긍정적 측면을 과감하게 수용하고, 민주적 방법으로 그 정책적 실천에 앞장서서 시대의 흐름에 걸맞는 제도적 보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공산주의의 역사적 몰락 과정에서 나타난 또 하나의 역설적 현상은 줄곧 폭력으로만 지탱되었던 이들 체계가 스스로의 각성과 함께 민중의 평화스러운 저항에 힘없이 무너졌다는 사실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중요한 역사의 교훈을 얻게 된다. 국민의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지 못하는 체제는 당이나 군대 그리고 비밀경찰이라는 실로 막강한 억압 구조를 가지고도 스스로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이다.


출처 : 경남대학교 철학인들의 모임
글쓴이 : 권수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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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 진중권, 우석훈, 셋이 뭉쳤습니다.

오세훈의 지난 4년을 평가합니다.

감동과 재미? 확실히 보장합니다!!!

노회찬, 진중권, 우석훈의 장외토론 2부 하이라이트 영상입니다.
출처 : 노회찬
글쓴이 : 노회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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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의 주체사상

 


  (1) 형성과정

  북한에서‘주체’라는 용어가 처음 공식적으로 제기된 것은 1955년 12월 28일 개최된 당 선전선동원대회에서 한 ‘사상 사업에서 교조주의와 형식주의를 퇴치하고 주체를 확립할 데 대하여’라는 김일성의 연설에서이다. 당시 김일성이 당 사업에서 주체 확립의 필요성을 제기한 데에는 북한전역에 소련의 영향력이 강력하게 미치고 있어 이로부터의 독자성을 어느 정도 확보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동 연설에서 ‘주체’는 당면한 사상사업 방향을 제시하는데 그쳤다. 그러나 김일성이 당내의 여러 파벌에 대한 숙청을 계속하면서 경제에서의 자립, 국방에서의 자위 등 다른 분야로 확대 적용되었다. 그리고 중·소간 이념분쟁의 격화로 국제공산주의운동 대열에서 현대 수정주의에 관한 시비가 벌어지자 대외정치 명분으로까지 활용되기 시작하였다.

  ‘주체’가 ‘주체사상’으로 된 것은 김일성의 1인 지배권력 강화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김일성의 절대 권력이 확고해지고 김일성에 대한 개인숭배화가 대대적으로 추진된 것은 1967년의 일이다. 이때부터 김일성 우상화의 이론적 근거가 되는 당의 ‘유일사상체계’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당의 유일사상체계의 확립을 위해서는 주체사상에 기초한 정치 사상적 통일이 필요하다고 강조되었다. 따라서 ‘주체사상’의 등장은 김일성의 1인 지배 강화 ‘유일사상체계’ 확립과 관련이 깊다고 할 수 있다. ‘주체사상’은 1970년대에 들어서자 당의 유일한 이념으로서 혁명과 건설의 지도적 지침으로 표방되기 시작하였다. 1970년 제5차 당 대회에서 주체사상을 당 이념으로 공식화하여 당 규약에 명문화하였다. 1972년에 제정된 헌법은 주체사상을 공식 통치이데올로기로 규정하였다.

  김정일은 당 중앙위 제5기 제8차 전원회의(1974.2.12)에서 후계자로 결정된 후 ‘전국 당 선전 일군 강습회’(1974.2.19)에서 주체사상을 ‘김일성주의’로 정식화하였다. 북한은 ‘김일성주의’를 “주체시대의 요구를 반영하고 나온 새롭고 독창적인 혁명사상”으로서 “주체의 사상, 리론 및 방법의 체계”라고 강조하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구별 지었다. 한편 1974년4월에는 ‘당의 유일사상 체계 확립 10대 원칙’을 발표하였다.

  1980년 10월 제6차 당 대회에서 김정일이 후계자로 공식 등장한 이후에는 주체사상을 ‘현시대 로동계급의 영생불멸의 지도이념’이라고 하여 마르크스-레닌주의보다 우월한 사상으로 그 지위를 격상시켰다. 1982년 이후 ‘사상에서의 주체, 정치에서의 자주, 경제에서의 자립, 국방에서의 자위’를 지도적 원칙의 한 부분으로 구성하는 등 주체사상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였고, 1986년 이후 ‘사회정치적 생명체론’을 놓았다.

  이와 같이 북한은 1950년대 중반에‘주체’라는 용어를 처음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1970년대에 와서 주체사상을 확립하였다. 김정일은 김일성이 1930년 6월 말, 중국 만주의 장춘현 ‘카륜’에서 열린 ‘공청 및 반제청년동맹 지도간부회의’에서 주체사상 창시를 선포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김일성이 1930년대에는 중국공산당의 무장부대인 동북항일연군에서, 그리고 1940년대 초반에는 소련군의 정찰부대인 88특별여단에서 활동하였다는 점에서 볼 때 그가 1930년에 주체사상을 창시하였다는 김정일의 주장은 근거가 희박한 것이다.


  (2) 기능과 내용

  북한에서는 주체사상이 정치체제와 주민생활 그리고 대외관계 등 모든 분야에서 유일한 지도이념으로 된다. 김일성 사후에 발표된 김정일의 논문들도 ‘주체사상에 기초한 우리식 사회주의 건설’을 강조하고 있다. 주체사상은 노동당과 국가 활동의 유일한 지도적 지침으로 기능하고 있다. 당 규약 전문에는 “조선로동당은 오직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주체사상, 혁명사상에 의해 지도된다”고 되어 있으며, 1998년 9월 개정된 사회주의 헌법 제3조는 “주체사상을 자기활동의 지도적 지침으로 삼는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북한의 주민들도 교양과 학습과정을 통하여 주체사상을 삶의 기준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주체사상 교양에는 원리교양, 충실성 교양, 김일성·김정일의 혁명역사·전통 교양, 당 정책 교양, 계급교양 등이 주종을 이룬다. 주체사상은 북한 주민들의 삶 자체를 규정짓는 하나의 준거틀이라 할 수 있다.

  주체사상은 대외면에서 자주노선의 추구라는 명분하에 폐쇄체제를 합리화하는 준거로서 이용되고 있으며, 대남면에서는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을 해석하는 기준으로, 남조선혁명 및 공산화통일을 정당화하는 도구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주체사상은 대내외 정세변화에 부응하여 그 내용도 새로운 면들을 보충하면서 변화를 거듭해 왔다. 북한은 주체사상이란 말을 처음 사용할 때, 그 내용에 대해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철학적 원리에 기초한 사상이라 했다. 여기서 사람이란 집체적 용어인 인민대중을 의미한다. 김일성은 “주체사상이란 한마디로 말하여 혁명과 건설의 주인은 인민대중이며 혁명과 건설을 추동하는 힘도 인민대중에게 있다는 사상이다”라고 말했다.

  주체사상은 사람이 자주성과 창조성, 의식성을 가지고 자기 운명을 자주적·창조적으로 개척해 가는 사회적 존재라는 사실을 밝혔다고 한다. 그러나 주체사상에서 말하는 사람의 자주성·창조성·의식성 개념에는 하나의 중요한 전제가 붙는다. 그것은 ‘혁명적 수령관’이다. 인

민 대중이 역사의 주체이지만 아무 조건 없이 자기 운명을 자주적·창조적으로 개척해 나갈 수는 없다고 한다. 인민대중이 역사의 주체로서 역할을 다하자면 반드시 수령의 올바른 영도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수령의 지도가 주체 확립에서 핵이 되는 셈이다. 이 점에서 주체사상에서의 수령의 역할과 지위는 그 기원과 종말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1986년에는 ‘수령·당·대중’이 수령을 뇌수(腦髓)로 하는 하나의 유기체적 통일체이며, 이들은 하나의 운명공동체라는 점을 강조한 ‘사회정치적 생명체론’을 그 내용에 추가하였다. 김정일은 “인민대중은 당의 령도 밑에 수령을 중심으로 조직 사상적으로 결속됨으로써 영생하는 하나의 사회정치적 생명체를 이룰 때 역사의 자주적인 주체가 된다”고 하여 ‘수령론’에서 더 나아가 ‘사회정치적 생명체’란 개념을 제시하였다.

  사회정치적 생명체 이론이 등장함으로써 혁명적 수령관은 최상의 수준으로 강화되었다. “혁명의 주체는 다름 아닌 수령, 당, 대중의 통일체”이며 “수령, 당, 대중은 하나의 생명체로서 생사 운명을 같이하는 사회정치적 생명체로 결합”되어 있다고 한다.

  사회정치적 생명체 이론은 곧바로 ‘혈연론’으로 발전하고 있다. 그것은 인민대중이 혁명위업을 승리의 한 길로 이끌어 주는 ‘어버이 수령’으로부터 영생하는 생명을 받았다는 데에 근거하고 있다. 김정일은 “온 사회가 하나의 사회정치적 생명체를 이루고 개인과 집단의 자주성이 다 같이 실현되는 완전한 집단주의적 사회관계”로 되어간다고 강조한다. 북한은 이와 같은 주체사상의 혈연론으로 세습체제의 정당성을 설명하고 있다.


  (3) 최근 위상 변화

  주체사상이 지닌 북한사회에 대한 지배력은 절대적이었으나, 1990년대 중반 이래 지속되는 경제난 속에 그 실천적 유용성이 저하되면서 강조빈도가 점차 낮아지기 시작했다. 김정일의 권력승계 이후 ‘붉은기 사상’, ‘강성대국론’, ‘선군정치론’등 경제난국에 대처하고 체제를 안정화하기 위한 행동 강령적 성격의 슬로건들이 주체사상을 대신하여 정치적 기치로 활용되고 있다.

  유일한 최고지도이념으로서의 주체사상의 공식적 위상과는 별개로 실질적 정책지침으로서의 실효성은 최근 다소 감소한다는 평가가 일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주체사상이 지배이념으로서 자리를 내놓았다는 것은 아니며 김정일이 권력을 승계한 이후 정세에 따른 하위 실천이념들의 부각 필요에 의해 그 강조의 수위를 낮추었다고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1. 주체사상의 변화과정과 시대별 특징


  주체사상은 북한의 핵심 통치이념으로서, 북한 정치체제의 규범적 지침이자 지도적 강령으로 기능한다. 주체사상은 북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와 주민가치 및 생활영역에 이르기까지 전 국가적 영역에서 영향력을 파급시킨다. 조선노동당 규약의 전문은 “조선로동당은 오직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주체사상, 혁명사상에 의해 지도된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1998년 개정헌법은 제3조에서 “주체사상을 자기 활동의 지도적 지침으로 삼는다”라고 명기하고 있다.

  북한에서 주체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중반이라고 할 수 있다. 1955년 ‘사상에서의 주체’를 시작으로, 1956년 ‘경제에서의 자립’, 1957년 ‘정치(내정)에서의 자주’, 1962년 ‘국방에서의 자위’, 그리고 1966년 ‘정치(외교)에서의 자주’를 표명하면서 주체사상은 그 이론적 체계화를 시도하였다. 주체사상이라는 명칭이 정립되기 시작한 것은 1967년에 접어들면서이며, 1970년 조선노동당 제5차 당대회를 통해 주체사상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동등한 위상을 점하며 조선노동당의 공식 이념으로 채택되었다. 그리고 10년 후인 1980년 제6차 당대회에서 주체사상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떨쳐내고 독자적 통치이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론적 측면에서 볼 때 주체사상은 초기 북한정권의 이념적 강령인 마르크스-레닌주의로부터의 부분적 이탈을 의미한다. 사회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적 시각을 수정함으로써 주체사상은 상부구조의 주요 구성체인 인간 의식이 사회변화와 역사전이의 과정에서 능동적 역할을 수행한다고 강조한다. 즉, 주체사상은 경제적 생산관계가 그 안에서 활동하는 행위자들의 의식과 행동을 주도적으로 결정한다는 견해를 수정하면서, 인간의 의식적이고 주체적인 사고와 행위에 의해 경제구조와 사회와 역사가 변화한다는 논리를 제시한다.

  그러나 주체사상의 본질을 분석해 보면 여전히 전통적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토대 위에 일국사회주의와 일인독재 지배체제를 용해시킨 스탈린주의적 특성이 현저하게 부각된다. 주체사상의 귀결점은 북한 주민들의 주체의식을 주도하는 수령의 리더십이고, 이 리더십 행사의 양태는 스탈린식 독재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단지, 스탈린식 일국사회주의가 다민족국가인 소련을 배경으로 구성된 반면, 북한식 사회주의는 단일 민족주의적 색채를 강하게 표출하고 있을 뿐이다.

  주체사상에 민족주의적 유산이 깊게 투영된 요인으로는 일제 식민지 시대의 경험이나 미국을 비롯한 서구 세계에 대한 공포와 반감, 그리고 소련과 중국 등 거대 우방국과의 비대칭적인 협력관계의 불편함 등이 지적되고 있다. 이들 요인들은 상호 복합적으로 기능하면서 북한 지도부로 하여금 자신들이 실제적 혹은 잠재적 적국들에게 둘러싸여 끊임없이 위협당하고 있다는 이른바 ‘포위 피해의식’(siege mentality)을 갖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의식의 반작용이 바로 주체사상 내의 민족주의 강조로 이어지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편, 민족주의와 더불어 주체사상을 마르크스-레닌주의로부터 이탈시키는 또 다른 결정적 변수는 유교적 사상의 투영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이래 한국사회를 지배해온 유교적 전통은 강력한 절대 권력의 통치자에 의한 후원주의적(paternalistic) 통치체제가 북한에 정립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하고 있다. 유교적 전통은 스탈린주의의 특성과는 다소 다른 형태로 절대 권력의 일인통치를 지원하는 주체사상의 문화적 하부구조를 북한사회에 생성시키고 있다.

  주체사상을 마르크스-레닌주의로부터 차별화시키는 추가적 요인으로는 유기체론적 사회 및 국가구성을 강조하는 유기체적 전체주의와 인간 의식이 사회와 역사를 주도한다는 유심론의 도입일 것이다. ‘사회주의 대가정론’ 등으로 일컬어지는 유기체적 전체주의는 유교적 사상의 전통과 더불어 북한의 가부장적 일인지배체제를 옹호하는 사상적 토대로 기능한다. 또한 인간의 의식적이고 주체적인 행위를 강조하는 유심론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유물론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평가된다. 결국 주체사상은 다양한 사상들의 지속적 혼합을 통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변형시키는 복합적 사고틀을 추구하고 있지만, 이로 인해 논리적 일체성에 있어서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주체사상의 형성과정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초기에는 제국주의 사상과 문화의 침투에 대한 민족주의적 대응의 성격을 강하게 표출하여 북한주민의 대외적 주체의식을 확보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한편, 정치적으로는 흐루시초프에 의한 스탈린 격하운동이 구소련 및 중국 내 수정주의자들에 의한 일인독재 지배체제 비판을 촉발함에 따라, 이 같은 비판의 유입을 대내적으로 절연시키며 북한의 독재지배체제를 옹호하는 데 주력한다. 대외적으로는 중·소 간 교조주의자 대 수정주의자의 이념분쟁이 가열되는 상황에서 북한의 독자적 생존을 위해 중·소 사이에서 중립적 위치를 고수하려는 외교 전략적 대응이 정치 이념적으로 표출된 측면도 있다.

  1960년대 이후 북한은 김일성 개인우상화에 치중하며 주체사상의 ‘김일성주의’로의 이론적 변환작업을 시도하였다. 주체형의 공산주의자들이 따라 배워야 할 모범적 인간형으로 김일성의 소년시절이 제시되는가 하면, 인간에게 육체적 생명보다 더 중요한 사회정치적 생명을 주는 존재가 바로 김일성이라는 우상화 논리가 전개되었다. 혁명과 건설을 추진하는 주체인 인민대중의 정점에 수령이 존재하며, 수령은 인민대중을 인도하는 지적 영도자의 역할을 담당한다는 이른바 ‘수령론’은 김일성 개인 우상화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수령론’의 내용은 인민대중들이 개별적 이해관계의 차이를 상호 극복하는 데 한계를 지니기 때문에 수령의 올바른 지도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주체사상은 김일성의 공식 후계자로 등장한 김정일을 우상화하기 위해 세습수령에 대한 지속적 충성심을 강조하는 작업이 더해진다. 주체의 위업은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없는 만큼 대를 이어가며 주체의 위업이 달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주의권 내에서도 유례가 없는 부자세습의 상황을 정당화하기 위해 세습 전제왕조에 대한 기존의 비판적 시각까지도 바꿔놓은 것이다.

  1980년대 후반 이후 동구 사회주의권과 소련이 연속적으로 붕괴함에 따라 북한은 체제 존속에 위협을 느끼고 주체사상의 논리적 보강을 통해 북한식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강조하고자 노력하였다. ‘우리식 사회주의’라는 기치를 전면에 내건 북한의 주체사상은 북한식 사회주의가 이미 붕괴한 동구권 사회주의와 어떻게 차별화되는지를 설명하고 북한 사회주의의 붕괴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북한은 1994년 김일성 사망 이래 주체사상의 ‘김정일주의’로의 전환을 부분적으로 시도하였다. 1996년 이래 간행되고 있는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동지의 사상이론’시리즈는 주체사상의 김정일주의화 작업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이후 심각한 경제난을 극복해야 하는 현실적 난제에 직면하면서 북한사회는 실리적 사고의 확대를 경험하게 되며, 이는 이념적 지배력을 수행하는 주체사상의 위력을 약화시키고 주체사상에 대한 활발한 논의를 저해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주체사상에 대한 논의는 더욱 위축되는 과정을 밟게 된다. 선군정치의 기치가 북한정치의 전면에 부상함에 따라 주체사상의 사회적 구속력이 저하되는 현상이 표출되고 있다. 그렇다고 주체사상이 북한사회의 이념적 지주로서의 기능을 포기하고 고사(枯死)의 과정을 밟아갈 것이라고 예단하기는 이르다. 왜냐하면 내외적 환경의 변화에 따라 내용을 끊임없이 재구성해 온 주체사상이 향후 어떠한 형태로 변화를 도모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2. 주체사상의 실효성과 한계


  북한의 주민들은 학습과 교화 과정을 통하여 주체사상을 일상화하는 삶을 영위하도록 요구받고 있다. 북한은 주체사상이야말로 혁명적 사회건설의 기초를 이루며, 주체사상의 일상화는 어떠한 난관도 극복하여 궁극적으로‘우리식 사회주의’의 승리를 가져올 토대라고 주창한다. 주체사상은 “민족해방, 계급해방, 인간해방에 관한 이론과 사회개조, 자연개조, 인간개조에 관한 이론이 전면적으로 체계화되고 완성된 공산주의 혁명이론이며 무오류의 사상으로서 그 현실적 실천성을 확보한 사상”임을 강조한다.

  주체사상이 지닌 북한사회에 대한 지배력은 실로 절대적이고도 전범위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체사상도 1990년대 중반 이래 지속되는 심각한 경제난 속에서 그 실천적 유용성이 저하되면서 언급의 빈도가 축소되고 있다. 김정일의 권력승계 이후 ‘붉은 기 사상’, ‘사회주의 강성대국건설(강성대국론)’, ‘선군정치론’ 등 경제난국에 대처하고 체제를 안정화하기 위한 행동 강령적 성격의 슬로건들이 주체사상을 대신하여 정치적 기치로 활용되고 있다. 이는 주체사상이 유일한 최고지도 이념이라는 공식적 위상과는 별도로 실질적 정책지침으로서의 실효성을 상실하였고, 이에 따라 사회적 영향력도 저하되었다는 평가가 이루어지는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더욱이, 극심한 경제난이 장기화되면서 북한 주민들의 주체사상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는 상황이 초래되고 있다. 간혹 사회주의 국가의 생필품 수급체계에서 사실상 소외된 개인들이 나름대로 자기생존의 방식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이를 합리화하기 위한 자기정당화 논리로 주체의 의미를 활용하는 풍조도 북한사회 내에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주체의 기치가 내실없는 외형적 슬로건으로만 지속되는 상황에서 주체사상에 대한 불신과 비판의 대두는 불가피할 것이다. ‘우리식사회주의’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정치적 수사가 북한의 붕괴 우려에 대한 효율적 대응기제로 작동하는 데 한계를 지니는 것은 명백하다.

  주체사상에 대한 비판은 다양한 시각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우선 이론적 측면에서 볼 때, 인간의지의 절대성과 유물론적 경제결정주의가 공존하는 이론 구성에서 과연 논리적 일체성이 확보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상부구조와 하부구조 간의 불명확한 상호 연계성도 추가적 논란을 구성한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국제 연대주의와 민족주의적 사회주의 간의 논리적 상충 여부 등 주체사상을 둘러싼 여러 이론적 질문들은 체계적 설명을 요구하고 있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스탈린주의, 민족주의, 유교사상, 유기체적 전체주의, 인간 중심의 유심론 등 상충될 수 있는 이념들의 난삽한 집산체로 구성된 주체사상에 대해 명쾌한 논리적 일관성을 기대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주체사상에 대한 가장 현실적인 비판은 북한식 사회주의라는 기치가 사실상 개인의 권력 독점 및 우상화를 위한 정략적 도구로 활용되어 왔다는 점이다. 북한이 직면한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외교적 위기에서 인민대중을 혁명의 주체로 확인시키고 이들의 사고와 행동을 독려함으로써 위기의 극복을 시도하는 주체사상이 일인지배체제 강화와 우상화라는 왜곡된 용도로 차용되면서 주체사상은 그 진실성과 일관성을 상실하고 있다. ‘수령론’의 근저에서 인민대중은 주체가 상징하는 진정한 주인의 자격을 획득하지 못하고 수령의 지도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수동적 객체로 전락하고 있다. 사회주의 역사상 유례가 없는 부자세습화를 추구하면서 주체사상은 주인 잃은 의식과 행동의 강령으로 표류하고 있다.

  현재 북한에서 주체사상은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운 초법적 통치이념의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주체사상은 신격화된 김일성에 의해 창시된 것으로서 그간 북한체제의 존립 자체를 대변하는 이념체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주체사상이 내적 논리상의 오류를 지닐 뿐만 아니라 외적 변화에 대응하는 데 지나치게 경직적이라는 내외적 한계에 직면해 있다는 점이다.

  21세기의 급변하는 시대적 조류에 부응하며 자국의 이익을 지켜가는 국가이념 체계로서의 주체사상의 한계는 너무도 명백하다. 북한의 생존과 발전을 위한 근원적 해법은 북한사회에 내재하는 총체적 경직성의 탈피일 것이다. 그 같은 경직성 탈피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과제를 구성하는 것은 결국 주체사상의 해체뿐이다.


 

 

 

출처 : 경남대학교 철학인들의 모임
글쓴이 : 권수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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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선군정치 사상

 

 

1. 선군정치 사상
 

  선군정치는 김일성 사망 이후 김정일 체제의 본격적인 가동이 준비되던 1995년 초에 처음 논의되기 시작하였으며, 1998년에 북한의 핵심적 통치 기치로 정착하였다. 사회주의 혁명을 주도하며 북한사회의 발전적 추동력을 제공하는 군의 역할을 강조하는 선군정치는 군의 영향력을 정치 및 경제뿐만 아니라 교육, 문화, 예술 등에 이르기까지 북한사회의 전 영역에 투영시키고 있다. 선군정치 하에서 군은 당을 제치고 지도자와 사회주의 체제의 옹호를 위한 중심 기구로의 위상 제고를 꾀하게 되었다. 군 인사의 정치참여를 공식적으로 체계화시키는 등 군을 정치의 전면으로 대두시키는 선군정치는 북한식 군국주의 정치의 대두를 주도하고 있다.

  선군정치가 제기된 가장 직접적인 배경은 김일성 사후 지속되는 경제난 속에서 김정일 정권이 생존을 위해 권력의 근간을 당보다는 군에 의존하게 된 대내적 환경이다. 북한의 극심한 경제난은 당이 인민에게 기본적 삶의 조건을 제공하고 인민은 정권에 대한 지지 및 정통성을 부여해 왔던 사회주의적 후원주의 체제를 와해시켰다. 선군정치는 군이 가진 자원과 역량을 활용함으로써 인민경제의 회복을 꾀하는 한편, 당의 저하된 사회통제 기능을 군 조직을 통해 보완하고 또한 당의 역할까지 대체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즉, 사회주의의 내적 정통성을 제공하는 당의 기능 약화에 직면하여, 군의 위상과 역할을 재정립하는 북한식 군국주의를 통해 체제적 위기를 극복하고 정권의 정통성을 만회하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선군정치는 군의 확대된 역할을 통해 군을 인민의 삶 속에 직접적으로 연계시키면서 군에 대한 인민의 의존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간기구가 아닌 군이 사회 내의 방대한 연결 고리를 토대로 다각적 사회통제를 시도하는 당의 기능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을지는 아직 검증되지 않은 과제로 남아 있다. 군과 인민의 일원화를 추구한다는 기치에도 불구하고, 선군정치는 지도자와 인민 사이에 사회 외부적 조직인 거대한 군이 개입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선군정치가 당에 의한 군의 통제를 통해 인민 우위를 정립시키는 정통 사회주의의 통치 방식을 포기하고 정권 유지를 위해 북한식 군국주의로 이행한다는 비판을 회피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선군정치의 또 다른 배경은 악화되는 외교적 고립으로부터 초래되는 대외적 안보위협에 대한 북한의 증대된 불안이다. 동구 사회주의권과 구소련의 붕괴 이후 북한의 외교적 고립은 가속화되어 왔고, 최근 수년 동안 부시 행정부와의 대결적 구도는 자위적 군사력에 대한 북한의 우려를 제고시켜 왔다. 오랜 기간 축적된 거대한 군 조직의 존재와 북한사회에 내재된 군국주의 성향 등은 선군정치의 발현을 후원하는 국내적 요인들이다. 이미 주도권을 상실하고 있는 남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그나마 경쟁력을 보존하고 있는 군사부문에 대한 자부심과 집착 또한 북한이 선군정치를 지향하게 된 배경 요인이다.

  경제적 위기 상황 속에서 정권의 정통성 결여에 직면하고 외교적 고립 속에서 자기존립에 대한 위협을 경험하는 김정일 정권에게 선군정치는 정권 유지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일 수도 있다. 선군정치는 산적한 대내외적 문제들 속에서 정권 유지에 대한 불안감을 지닌 김정일 정권이 체제 안정화를 도모하는 마지막 수단으로 인식될 수 있다. 따라서 경제 난국과 외교 고립의 두 핵심 난제가 해소되어 체제 안정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북한은 선군정치를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선군정치를 이론적으로 체계화한 선군정치사상이 주체사상을 대체하여 김정일 시대 새로운 통치이념으로 부상할 것인가는 아직 미지수이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선군정치 사상은 주체사상에 대응할 수 있는 이념체계라기보다는 김정일 정권의 통치 방식을 정당화하는 정치 슬로건 역할에 치중하고 있다. 선군정치사상이 독자성을 확보하는 통치이념으로 부상하기 위해서는 이론적 구성과 내용 등의 측면에서 현저한 진화를 필요로 하지만, 그 성공 가능성은 거의 희박한 것으로 보인다.

 

 

 2. 선군정치론


  1995년 이후 김정일 정치의 특징으로 선전되고 있는 것이 이른바 선군정치이다. ‘선군정치’라는 용어는 1997년 12월 처음으로 등장하였으나, 군 중시의 정치방식은 김일성 사후 1995년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의 선군정치는 “인민군대 강화에 최대의 힘을 넣고 인민군대의 위력에 의거하여 혁명과 건설의 전반 사업을 힘 있게 밀고 나가는 특유의 정치”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군사선행, 군 중시’의 정치라고 할 수 있다.

  김정일은 “독창적인 위대한 선군정치로 인민군대를 주체혁명의 기둥으로 부강조국 건설의 주력군”으로 내세우고 있으며“, 경제건설보다 중요한 것은 군대를 강하게 만드는 것이며 총대가 강하면 강대한 나라가 될 수 있다”는 표현으로 선군정치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특히 “국방공업은 나라의 부강 번영과 인민의 행복, 혁명의 승리적 전진을 담보하는 국가정치의 첫째가는 중대사”라고 함으로써 다른 어느 분야보다 국방력의 강화에 매진할 것을 강조하였다.

  또한 북한은 선군사상이 주체사상에 기초하였고 새로운 시대상황에 맞게 정립된 것으로 주체사상은 선군정치를 구현하기 위한 방법론적 지침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주체사상이 추구하는 국가의 자주성을 수호하는 것은 선군정치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하여 선군정치가 주체사상을 현실적으로 가장 잘 구현하는 정치방식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선군정치는 이른바 1990년대 중반의 ‘고난의 행군’시기에 군의 정치·경제·사회적 선도역할을 통해 대내외적인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의도에서 강조되기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선군정치는 군 중시의 정치로서 “군사를 국사중의 제일국사로 내세우고 군력강화에 나라의 총력을 기울이는 군사선행의 정치”로 규정된다.

  또한 선군정치는 “인민군대를 핵심으로 하여 혁명대오를 튼튼히 꾸리고 혁명적 군인정신을 무기로 하여 사회주의 건설을 밀고 나가는 것”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북한은 이러한 군 중시 정치를 “김정일 동지의 기상이자 우리 당의 기질이고 김정일 동지식이자 우리 당의 혁명방식”이라고 하는가 하면 “군대는 곧 당이고 국가이며 인민”이라는 데까지 확대 해석하고 있다. 군 중시 사상을 반영한 국방위주의 정치라고 규정하고 있는 이 선군정치론은 오늘날 김정일 체제 유지의 독창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통치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북한당국은 이와 같은 군 우선의 의지를 수시로 표현해 왔다. 1997년 신년 공동사설은“인민군대의 총창우에 사회주의의 운명과 부강조국이 있다”고 주장했다. 1997년 2월 15일 김정일의 55회 생일을 축하하여 정권기관들이 보낸 축하문에는 “군대가 혁명주체의 핵심역량, 주력군을 이루며 군대는 곧 인민이고 국가”라고 강조했다. 1998년 3월 9일 노동신문은“군대를 기둥으로 하여 혁명을 완성해 나가야 하며 군대를 본보기로 온 사회와 혁명대군을 정예화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군 고위간부들의 권력핵심의 인사에서도 두드러진다. 무엇보다도 김정일 자신이 1998년 9월에 이어 2003년 9월, 2009년 4월에도 국가 최고의 직책인 ‘국방위원장’에 재추대되었다. 2003년 9월 최고인민회의 제11기 제1차 회의에서 혁명1세대인 이을설, 백학림 등 군부

원로들이 일선에서 퇴진하였지만 2009년 4월 9일 최고인민회의 제12기 제1차 회의 개최 이후에도 군부 실세인 조명록, 김영춘, 김일철, 이용무 등 핵심계층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1996년에는 4월 25일 인민군창건일과 7월 27일 ‘조국해방전쟁 승리 기념일’(정전협정 체결일) 등 군관련 기념일을 공휴일이자 ‘국가명절’로 지정하였다.

  선군정치의 표방으로 군부의 역할도 확대되었다. 2003년 3월 노동신문에서 “인민군대는 혁명의 주력군으로 혁명과 건설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청류다리, 금릉동굴, 금강산 발전소, 문화유적지 건설 등 대부분의 중요 경제건설 사업과 각종 우상화 선전물을 군 인력으로 건설했다. 그 밖에도 군대는 무역회사와 공장, 기업소, 광산, 협동농장 등을 포함하는 방대한 ‘제2경제’를 운영하고 있으며 심지어 농사와 철도운행, 중요 치안업무 등에도 간여하고 있다.

  1998년 신년 공동사설에서 “인민군대가 창조한 정신과 도덕, 문화와 생활기풍을 사업과 생활에 철저히 구현해 나가야 한다”며 사회가 군을 따라 배울 것을 독려하였다. 또한 ‘군민일치 모범군 쟁취운’, ‘우리초소 우리학교 운동’을 벌여 군과 사회의 일체화를 꾀하고, 2002년부터는 군민일치 ‧ 관병일치 ‧ 군정배합의 실현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2004년 1월 이후 선군사상을 전체사회에 일색화하려는 ‘선군사상 일색화’를 주창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선군사상의 핵심인 혁명의 수뇌부 결사옹위정신을 사회 전체에 확산시킴으로써 전 인민들을 체제보위를 위한 전사로 만들고, 혁명적 군인정신을 전 사회에 보급함으로써 모든 사업을 군대식 사업방식으로 추진하여 경제회생의 추동력으로 삼고자 한 것이다.

 

출처 : 경남대학교 철학인들의 모임
글쓴이 : 권수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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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별장 ‘이화장’ 사적 지정 예고

 

 

문화재청은 서울 종로구 이화동에 있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별장 이화장(梨花莊)을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으로 승격 지정을 예고했다고 4일 밝혔다. 현재는 서울특별시 기념물이다.


이화장은 초대 정부의 조각본부가 있었던 역사적 장소로서 가치를 높게 평가 받았다. 이곳은 1948년 8월3일 윤치영 내무장관을 비롯한 초대 각료 전원을 결정해 발표한 장소다. 또 이승만 대통령이 1947년 10월18일부터 10개월, 그리고 4·19혁명으로 하야한 직후인 1960년 4월28일부터 하와이로 망명한 같은 해 5월29일까지 머문 장소이기도 하다.

 

주요건물로 1939년에 지어진 본채와 조각당 등은 20세기 초반 한옥의 변천양식을 잘 보여준다.

 

2005년 사적으로 지정된 경교장(京橋莊)에 이어 이화장이 사적으로 지정 예고됨에 따라 정부수립과 관련된 주요 건물 2곳이 모두 국가지정문화재로 보호를 받게 됐다.

 

서울신문 강병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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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라이트, 친일파가 이승만을 국부라 칭송하는 이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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