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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쟁이덩굴 밑에서 낙서가 자란다 / 노춘기  

 

벽시계 건전지에서 파낸 탄소막대기로 기억에 낙서를 하던 소년은 배가 고파졌다 해가 지고 있었다


때묻은 옷을 입은 여자가 어디 사느냐고 물었을 때 소년은 그녀의 어깨 너머를 가리켰다


소년이 서 있던 골목을 지나온 사람들은 모두 얼굴 한 쪽이 비뚤어져 있었다


톱날 같은 바람이 몰려들어 뺨에 붉은 자국을 내는 동안 소년은 저녁의 태양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깜박거리는 두 눈 사이에 은화 같은 구멍이 반짝였다






가방은 큰 입을 가졌네 / 노춘기


가방은 큰 입을 가졌네 저녁의 거리를 지나오는 동안

깊은 숨을 들이키며 노래를 시작하네 가방의 큰 입이

흥얼거리는 주구(呪句)는 원을 그리고 가로등 불빛이 흔들리네

부도난 백화점의 쇼윈도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어떤 날은 가방이 그를 규정하지 불 꺼진 진열장 안에서

저 마네킹은 얼마나 오랫동안 먼지 낀 유리 건너를

내다보았던 것일까 손을 흘들다 멈춘 저 여자의 손에

들려 있었을 작은 가방, 가방이 보이네 유리에 붙어 선


오늘 저녁의 어둠은 왜 그렇게 일렀던 것인지 진열장 앞에서

아무것도 손에 들지 않은 딱딱한 그녀를 바라보는 동안

너무 많은 그림자들이 유리창 위에서 잊혀져갔네 이런


거대한 가방 앞에 서 있었던 것이지 가방이 불러주는 오래된

노래를 듣고 있었고 왠지 이곳에 온 적이 있었던 것만 같았지

이런 종류의 멜로디가 익숙했던 것이지 오래도록


머리를 숙이면 가방의 목소리가 들려왔네 놀랍게도 누군가 머리를

지그시 눌러주었지 그러자 가방 속이었네 가방 앞에서 머뭇거림이

길었던 게지 가방이 들려주는 노래는 아무도 용서하지 않았네

그래 용서할 줄 모르는 가방 앞에서 그 문이 닫히는 걸, 그 너머를


가방은 큰 입을 가졌고 그는 가방의 어깨에 매달려 저녁의 거리를

지나왔네 어두운 천장에 박힌 가로등이 가방의 걸음걸이에 맞춰

흘들리네 뚜벅뚜벅 너무 많은 것들이 가방 안을 들여다보네




노춘기 / 1973년생. 2003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제2회 월하지역문학상 심사

 

강은교(시인-동아대교수)

김선학(문학평론가-동국대교수)

남송우(문학평론가-부경대교수)

신덕룡(문학평론가-광주대교수)

(가나다 순) 등이

 

9월14일(목) 부산 온천장 농심호텔(오른쪽 위 사진-왼쪽부터 신덕룡, 김선학, 남송우, 강은교)에서 했다.

月下는 시인 김달진 선생의 아호.

김달진문학상(시.평론 두 부문)과 함께

선생의 시적 업적을 기려 제정한 상.

수상자 노춘기 시인으로 결정.

 

제 2회 월하 지역문학상 심사평(2006.9.14. 대표집필-신덕룡)  

제 2회 월하 김달진 지역문학상에 응모한 시인들 중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시인은 2명이었다. 강정이(「사용설명서」외 29편), 노춘기(「안개로부터 시작되는」외 35편)였는데, 이들의 작품들을 세심하게 읽은 결과 아래와 같은 생각을 공유했다.


강정이의 시편들은 개인의 삶과 일상에서 오는 고통을 시화했는데, 우선 삶에 대한 따뜻한 시선, 안정적인 구성과 자연스런 표현이 눈에 띄었다. 이는 세상을 바라보는 긍정적인 태도와 시적 대상을 오밀조밀 이끌어내어 시적 논리를 만들어가는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씨영감의 그림일기」에서 보듯 대상과 인식 사이의 거리가 짧아 주제가 쉽게 노출되고, 「단칸방」이나 「일상의 여자」 등에서 보듯 시적 상황이 과장되거나 불투명해서 시적 긴장이 떨어지는 것은 앞으로 극복해야 할 과제로 보였다.


노춘기의 시편들은 강정이와 시적 출발점부터 달랐다. 강정이가 자아와 세계 사이의 간극을 좁히려는 의지를 보이는 반면, 노춘기는 좁히기보다는 그것 자체를 비틀어 보이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안개로부터 시작되는」, 「담쟁이 덩굴 밑에서 낙서가 자란다」, 「가방은 큰 입을 가졌네」 등 대부분의 시편들에서 보이는 우울함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를 상상력과 참신한 이미지를 동원해 새롭게 펼쳐 놓는다. 그의 시에서 보이는 “들어온 곳과 나가는 곳은 다르다”(「한치도 움직이지 않고」)는 식의 어설픈 표현이나 “---네”로 끝나는 종결어미 등은 시적 긴장을 이완시키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시편들은 자유롭되 분방하거나 경박하지 않았다. 그의 시가 삶(체험)에 근거해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 모두 지난해에 비해 높은 수준을 보였으나, 시의 구조와 표현의 참신성에서 비교우위를 점한 노춘기를 당선자로 결정했다. 축하하며 더 열심히 정진할 것을 바란다. 또한, 월하지역문학상이 지역에서 활동하는 시인은 물론 출향인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보다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기를 바란다. ( 심사위원: 강은교.김선학.남송우.신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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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월하지역문학상 수상작   (0) 2011.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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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사는 소 / 김륭

 

1.

소(牛)를 키운다. 아파트 거실에서

밤마다 정육점 갈고리에 매달리는 꿈이라도 꾸는 건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몸서리치는

소.

 

애완동물을 사랑하는 아내와 어린 딸아이가

소를 등지고 앉아 햄버거를 먹고 있다.

우우 눈(目)으로 우는

소.

 

운동장만한 아파트가 고향집 외양간보다 불편한지

워워, 틈만 나면 슬그머니 집을 나가는 소.

지하 주차장이나 놀이터를 갈아엎어 아내 얼굴에 똥칠을 하는

우리 집 소는 뿔이 없다.

서울로 끌려오면서 팔아치운 논밭뙈기 그리운 날이면

사거리 맥도널드 체인점 앞에 모락모락 소똥 퍼질러 놓는다.

그때마다 난리가 난다.

어이구, 못살아 내가 못살아! 제발 집안에 편히 계세요

아내에게 사랑받는 우리집 소는 음매음매

자주 아프지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등골 빠질 만큼 실컷 부려먹은 소, 당장 도살장으로 모셔야하지만

아내는 애완동물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2.

아버지 참 눈치도 없다.

애완동물을 사랑하는 아내가

헬스클럽에서 돌아왔는지 모르고 꾸벅꾸벅, 졸고 있다.

거실 소파에 소똥 퍼질러 놓고 있다.

 

 

 

 

 


꽃등심 / 김륭


                 

보증 잘못서는 바람에 집 날리고

아내와 갈라선 후,


보증금 삼백에 월 십만 원 반 지하 단칸셋방에서

노란냄비 하나 품고 살다

슬리퍼 질질 끌고 나서는 문밖, 늦은 봄 햇살이 킬킬

꽃들에게 문병問病이나 가잔다


연인끼리 가족끼리 팔짱낀 거리 동해횟집 지나 사거리 신선정육점 앞에서

울컥, 몸이 물처럼 맑아져 토해내는

붉은 잎사귀!


심장이 칼을 물었다

꽃피우지 못한 생生의 등뼈 깊숙이

음매음매 소 한 마리 살고 있다는 동영상 메시지가 떴다


병명病名 없이 게워내는 선홍빛 각혈인줄 알았더니

칼질 급한 영혼의 비곗덩어리인줄 알았더니

쫄깃쫄깃하다


설움이란, 혓바닥 자근자근 깨물고 맛보는

내 삶의 꽃등심!

도대체 몇 근이나 될까?


어둔 목구멍 가득 숯불 피워놓고

히죽 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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