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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 외 4편 / 최재훈
 
나는 언제나 당신의 가방 안에
든 것이 궁금했다.
 
나를 만나는 동안 당신은
단 한 번도 가방을 열지 않았고,
우리 사이엔 늘 그 낡고 빛바랜 가방이 놓여 있었다.
밥을 먹다 화장실을 갈 때도
비좁은 버스 안에서도
막다른 골목에서 키스를 할 때도
당신의 가방은 당신의 손에서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마치 당신과 가방이 한 몸이 되어버린 것처럼,
그래서 어떨 땐 당신을 버리는 것이 가방에게도
가혹한 일이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까지 하면서,
 
언제부턴가 당신과의 만남이
실밥에 걸린 지퍼처럼 막막해져 갈 때,
나는 당신의 가방을 의심하고 추궁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당신의 가방은 철문처럼
입술을 열지 않았고
그 순간에도 당신은 그것의 등을 쓰다듬으며
울음을 삼키고 있었다.
당신과 내가, 아니 가방과 내가
건너야 할 세계는 마침내 짝다리를 짚고 서서
우리를 밋밋하게 혹은 멀뚱멀뚱
내려다보는 것이었다.
 
나는 언제나 당신보다
당신의 가방이 더 궁금했지만,
 
당신의 마른 식욕이 상한 나를 삼키고
화장실에 갇혀 식은땀을 흘리는 동안
나는 이미 당신을 토하고 입가를 닦고 있었다는 걸,
비좁은 버스 안에서 당신이 나를 찾아 입구를 헤매는 동안
나는 늘 출구 쪽에서 다음 정류장을 되뇌고 있었다는 걸,
우리의 키스는 모퉁이가 사라진 막다른 골목이었고 내 혀끝은
안간힘을 다해 돌아갈 길을 찾고 있었다는 걸,
 
그러나 어쩌면 나는 당신보다 당신 가방보다,
나의 빈 가방을 당신에게 보여주기가
죽을 만큼 싫었는지 모른다.
 
나와 당신은, 아니 당신 가방과 나는,
아니 나의 가방과 당신은
그렇게 각자의 허공을 담고 있었는지 모른다.
마치 우리와 가방이 한 몸이 되어버린 것처럼,
그래서 어떨 땐 우리를 버리는 것이 빈 가방에게도
쓸쓸한 일이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까지 하면서,
 
 
 

  
기이한 소년
 
소년은 태어나자마자 무섭게 자라기 시작했다.
왜소한 부모는 그의 엄청난 식사량을 감당할 수 없었다.
소년의 몸이 반지하 단칸방을 모두 차지하게 되자,
부모는 그를 이삿짐 트럭에 싣고 무작정 동물원을 찾아갔다.
동물원 관계자들은 소년을 보고 공포에 질렸으나,
곧 그들의 쓰러져가는 동물원을 일으킬 모의를 진행했다.
소년의 몸은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듯 부풀고 있었고
부모는 안도하며 생활의 수렁 속으로 되돌아갔다.
동물원은 우리 안의 소년을 사진 속에 담아 부모에게 전달했다.
부모는 가끔 그것을 들여다보며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지만,
그 속에서 그들은 우리 안에 갇힌 그들 자신을 보았다.
소년은 부모의 기억에서 손쉽게 잘려나갔다.
 
동물원은 소년의 몸이 더욱 거대해지길 원했다.
조련사는 닥치는 대로 먹이를 주었다.
그즈음 도시는 날마다 자신의 치부를 도려냈고
그 흉터 위에 콘크리트를 깔고 빛나는 대리석을 세웠다.
치부의 더미가 폐수를 따라 도시 외곽으로 흘러들어 악취를 뿜어댔다.
조련사는 그것들을 굶주린 소년의 우리 안에 던져주었다.
동물보호단체에서 동물원의 비인도적인 처사에 대해 항의했지만,
그들도 소년의 정체성에 대해 확신을 하지 못한 채 되돌아갔다.
 
동물원은 관람객들로 북적였다.
오직 기이한 소년을 보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비행기가 날아왔고,
고가로 출시된 동물원 패키지 여행상품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조련사는 소년에게 몇 가지 동작과 말을 가르쳐
관람객들의 입에서 탄성이 쏟아질 쇼를 준비했다.
소년은 무거운 몸을 꿈틀거리며 춤을 췄고,
동굴 같은 입술을 열어 비명의 메아리를 토해냈다.
누군가 소년의 눈가에 맺힌 것을 가리키며 소리 질렀지만,
그도 곧 자신의 슬픔에 목이 메어갔다.
 
이윽고 소년의 몸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해지자
동물원은 그를 도살하여야 할 때가 왔음을 알렸다.
식량문제 연구가들은 소년을 신의 선물로 칭송했다.
세계 곳곳에서 전문 도살자들이 속속 도착했고,
소년의 살덩이는 그들의 정교한 칼날에 의해 분해되었다.
굶주린 사람들이 부러진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댔으나
그들의 몫은 그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소년의 뼈를 보기 위해 아이들이 박물관으로 몰려들었다.
아이들은 무턱대고 울거나 이유 없이 웃고 떠들었지만,
곧 어른들의 기침 소리가 도착하자
어둠 사이로 재빨리 거대한 몸을 숨기는 것이었다.
 
그때 아이들의 떨리는 입술을
소년의 앙상한 뼈가 천천히 핥고 있었다.
 
 



     
펜(Pen)
 
그는 외다리다.
혼자서는 어디로도 떠나지 못한다.
쓰러뜨리면 쓰러졌던 그대로 쓰러져있다.
뒤척이지 않는다.
누군가 일으켜 세워주면
어깨에 기대 기우뚱 말이 없다.
그의 발목은 뿌리가 없고
그래서 아무리 아름다운 꽃병에 꽂아 놓아도
향기 한 모금 고이지 않는다.
그는 고개 숙여 발밑을 들여다본 적 없다.
어쩌다 그를 부축해서 걸어간 길 위에
검은 발자국이 드러나지만,
그의 눈은 언제나 텅 빈 곳을 향해 뚫려있다.
 
어떤 이는 그의 발자국을 읽으며
눈물을 흘리고 침을 뱉기도 하지만,
그는 스스로 운명을 바꾼 적 없으므로
그의 태생은 죄도 보람도 없다.
그러므로 그에겐 요람도 용서도 없으며,
다만 그의 뱃속에는 실패의 씨앗만
무성하게 자랄 뿐이라고 누군가는 말한다.
뻣뻣하게 굳은 그의 몸을 쓰다듬으며
주술처럼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무속인들,
저들의 연약한 입을 통해
그의 텅 빈 정신은 횡설수설할 뿐이다.
 
휘어진 길의 등을 망치로 때려 곧게 펴자
걷는 사람들은 더 이상 비틀대지 않는다.
거리는 두루마리 화장지처럼 아침을
깨끗한 백지로 갈아 끼우고,
행인들과 깡통 소리 나는 그들의 천적들은
밑줄을 길게 그으며 무심코 강조된 삶이 된다.
간혹 바닥에 얼룩을 떨어뜨리고 달아나는
청년의 꽁무니를 늙은 비둘기가 물고 있다.
비둘기들이 공원을 서성이면 노인들이 우르르 몰려와
먹다 만 과자부스러기를 던져준다.
 
그때 나는 한 방울의 진심도 이 길 위에
흘려본 적 없으므로,
좁쌀 쏟아지듯 내리는 빗방울, 따가운 바늘 세례.
내일은 믿기 어려운 종교를 하나 더 추가하고
그와 함께 가까운 사원을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하는 나를 생각한다.
 
그는 태생이 외다리다.
혼자서는 어떤 꿈속도 걸어가지 못한다.
어느 날 난 그의 목발이 되어 주리라 다짐했다.
그의 발끝에 새까맣게 고인 핏물을
악착같이 짜내며
난 나의 결백을 주장한다.
 
 



  

 

거울이 없는 방에선 내가 종일 보이지 않는다.
 
바닥을 기어가던 바퀴벌레 한 마리가
벽 앞에 주춤거리며 서 있다.
그도 잃어버린 게 있다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시력을 잃은 형광등 불빛이 비틀거리다 벽에 부딪힌다.
몇 개의 낡은 가구들이 이 광경을 숨죽이며 지켜보다
이내 눈을 감아버린다.
가구 위에 놓여있던 몸을 나는 간신히 일으킨다.
텅 빈 몸통을 뚫고 뻗어 나온 다리가
잎사귀 같은 걸음을 흘리며 그에게 다가간다.
그러나 무례한 침입자는 그 자리에서 꿈적도 하지 않는다,
마치 그곳에 질긴 목숨의 뿌리를 내린 것처럼.
검은 몸을 감싸며 번들거리고 있는 그의 정신을
손가락으로 찔러보려다 그만둔다.
 
너의 몸은 누구의 눈에서 빠져나온 검은 눈동자인가.
나의 존재를 의심하는 저 섬뜩한 응시,
 
어쩌면 저 눈빛은 두려움에 떨며 어둠 속에 숨어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의 의심과 공포를 납작하게 밟아볼 텐가.
마침내 그의 가는 다리가 벽을 기어오른다,
뭔가에 쫓기듯 뒤를 연신 힐끔거리며.
깨진 구슬 같은 눈알이 나를 빠져나와 벽을 타고 그를 쫓아간다.
너는 네 생의 불안 어디까지 도망갈 텐가.
한참을 기어오르던 그가 갑자기 멈춰서더니
정신없이 벽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그리곤 벽 속으로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다.
나는 멍하니 벽 앞에 서 있다.
빈 벽을 쓰다듬는다,
벽이 출렁거린다.
 
다음날 나는 거울을 달기 위해
창백한 벽의 얼굴에 못을 박는다.
순간 그 안에서 물컹한 혓바닥들이
우글거리며 기어 나온다.
 
 
 



 
절망에서 손쉽게 걸어 나오는 법

 
보안 검색대를 통과한 기분은 어떻습니까?
보안 요원이 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무것도 소지하지 않은 사람이라 말합니다.
가방에 주섬주섬 빈손을 주워 담으며 저는 식은땀을 흘립니다.
아무것도 들키지 않은 사람은 심지어 울음을 펼쳐 보입니다.
 
저는 주머니 없는 몸을 가졌지만 늘 검문검색을 당합니다.
사람들이 표정을 읽을 수 있도록 저는 손바닥을 펼치고 다닙니다.
주먹을 쥔 청년들은 표정이 없어 비장해 보이지만,
보안 요원에 의해 강제로 펴진 그들의 주먹은 텅 비어있습니다.
몇몇 늙은이들은 철근 같은 등뼈가 발각되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어딘지 모르게 저의 몸통은 수상해 보이지만 뼈를 소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검색대를 통과하지 못한 제가 저편에서 손톱을 물어뜯고 있습니다.
저는 저편의 저를 바라보며 주춤거립니다.
그는 온몸에 주머니를 가득 달고 있습니다.
옆구리를 똑딱 열더니 그가 무언가를 만지작거립니다.
보안 요원이 다가와 그의 눈과 입과 귀를 끄르고 한참을 들여다봅니다.
아무래도 그는 뾰족한 것을 숨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눈을 비벼 그를 지우고 저는 조용히 뒤돌아섭니다.
제 항공권에는 도착지가 적혀있지 않습니다.
저는 되돌아가야 할지 오랫동안 망설입니다.
창밖에는 거대한 비둘기들이 바닥에 떨어진 햇빛 부스러기를 쪼며
날개를 까맣게 잊어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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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목 4

 

성금숙

 

 

우리가 된 우리는 서로 길들여지고 길들었다

길들여지는 것은 자신과 멀어지는 일이어서

우리의 목은 우리로 돌아가 있었다

우리 속 고독에 대해 입 없는 것처럼 함구하고

침묵으로 누운 우리의 저녁

어긋난 입모양들이 덜그럭거렸다

 

굳게 닫힌 우리 문

바깥 생각을 우리에 심으면

눈이 발생하고 뾰족하게 싹이 났다

반듯한 이마로 뻗는 뿌리들

 

우리의 우리 틈에서 자란 뿔들로 이마가 울퉁불퉁해진 우리는

없으므로 보이지 않는,

우리 문을 두리번거렸다

 

폭풍이 지난 후

고요한 우리 속

 

처음부터 없던 우리에서

처음부터 있던 우리 밖으로

우리에서 멀어질수록 가까워지는 초원으로

우리는 점차 눈길을 돌렸다

멀어져서 희미해진 우리의 우리를 넘는 순간

우리는 벌써 우리의 우리로부터 까마득해졌다

우리의 목은 우리에서 각자에게로 돌아왔다

 

 

 

 

진동하는 침묵

 

 

 

 

 

침묵을 멈추지 않네

 

죽어서 싹이 돋고

꺼진 듯 불씨를 키우고

 

내 입으로 쏜 말이

총알처럼 날아가 날카롭게 박힌

 

당신이라는 문장을 떠올리면

일렬로 날아가던 새들이 흩어지고

공중이 활처럼 휘어졌다 펴지고

눈이 내리고 비가 내리네

 

비의 말을 도르르 말아 낙하시키던

마른 연잎은 목을 꺾었네

꽁꽁 언 연못에 돌을 던지며

가까스로 이를 보이며 웃던

당신을 멈춰야 하네

 

당신에게 나는 검은 사람

검은 머리 검은 웃음

천 개의 먹칠한 숫자

 

진동하는 당신의 침묵을 꺼야 하네

 

당신에게 박힌 말을 빼서

거꾸로 내 심장에 박아야 하네

어둠이 더미로 몰려오기 전

당신을 제발, 멈추게 해야 하네

 

 

 

 

 

 

 

 

하얀 생각을 뭉치면

그 겹겹은 어둡습니다

검은 생각들,

 

사람을 둥글게 뭉치면

덩어리가 됩니다

 

깔깔대고 박수를 치고 연대하는

뭉치기 좋은 광장은 사람을

사람은 눈을 뭉칩니다

 

뭉친 덩어리를

굴리고 받고 던지고

던지고 받고 굴리고

덩어리는 오른쪽 왼쪽

골고루 불어납니다

 

역삼각형 얼굴에 찢어진 눈꼬리

사람들이 내게 둥글둥글하다고 말하는 것은

내가 덩어리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뭉치느라 늘 어깨통증이 있습니다만,

눈 내리는 광장을 보며 또 눈을 뭉칩니다

불어나기를 멈추지 않아서 나는 떠오릅니다

 

둥둥 떠오른,

 

납작한 그 뒤통수를

처진 눈꺼풀 안쪽에서

나의 슬픈 눈이 지켜봅니다

 


 

 

훔쳐서 쓰다

 

 

 

 

초록이 죽고

초록이 번진

 

풍경을 훔쳤다

 

내막 없는 슬픔처럼 아름답게

서어나무 가슴에 뻥 뚫린 구멍

벌레에 잠식당한

둥근 무늬들

못 자국처럼 몸에 파인

네 흔적을 실크로 가렸다

은폐할수록 그 속에 발이 빠져서

소멸되고 있을 때

 

숲에서 벌레에 먹힌 서어나무 구멍이

이끼를 키우며 사는 것을 보았다

죽음의 생기를

북돋는 숨소리

그 풍경을 훔쳐서

내 몸속에 지녔다

 

훔친 생기를

수시로 나의 표정에 썼다

발칙하게도,

나는 점점 발랄해져가고 있다

 

 

 

 

 

눈물이 핑 돌다

 

 

 

 

시곗바늘이 또박또박 돈다

 

경비원이 멱살을 잡은 잠을 뒤로 돌린다

골목이 담을 넘은 소문을 돌린다

신호등이 사거리를 팽이처럼 팽팽 돌린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르내리는 사람들

왼쪽 얼굴과 오른쪽 얼굴이 포개진다

 

불변의 일상이 나를 돌린다

나는 팔랑개비처럼 팔랑팔랑 돌며

우리 집 구석구석을 돌린다

 

밥값을 계산하다 바닥에 떨어뜨린 동전이 돌다 쓰러진다

돌지 않는 돈을 세다

아스피린을 삼킨 오렌지분식 사장님

 

참도 거짓도 옹호하지 않고

회전문이 돈다

 

도는 것들은 닳아서 반들거리고

도는 것들은 들어왔으면 나가야 해서

내 입구로 들어온 것은 출구를 찾아 몸속을 돈다

 

이다지도 황홀하게 돌아가는 세상

출구가 가까워질수록 속도가 빨라진다

 

나를 부르는 사람이 없으므로 편안한 날들이 지속된다

채널을 돌리다 개그콘서트를 본다

너무 우스워 눈물이 핑 돈다

 

 

 

 

 

정남진신인시문학상 수상 소감

 

 

문지방을 넘다

 

 

  잠 못 들고 뒤척이던 여름밤, 노래 소리에 끌려 마당으로 나가면 저수지 건너에서 물에 빠지며 찰람찰람 건너오는 불빛들이 있었다. 그때 나는 어린 마음에 그 불빛의 일원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다. 망설이다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찾아간 시와의 만남. 내 상상은 단단한 시멘트 같아서 시와의 동침은 방 구석구석에 먼지를 쌓이게 했다. 겁도 없이 그렇게 시작한 시작(詩作)으로 나는 아픈 것보다 더 아픈, 아프지 않은 증세를 행복하게 앓았다.

  오늘 당선소식은 문 밖 어두운 곳에 서 있는 내게 불이 환하게 켜진 방문을 열어준 것은 아닐까! 꽃다발을 안겨주며 문지방을 넘어오라고 어릴 적 마음속에 깊게 음각된 저수지 건너 불빛의 일원이 되라고 허락해준 것은 아닐까! 꽃다발도 축하도 왁자함도 시들겠지만 내 방에 남을 그 향기는 상장처럼 걸어놓고 끝까지 같이 할 것이다. 앞으로 시를 만나는 날이나 만나지 못하는 날이나 눈 마주치는 것들에게 말을 걸고 듣도록 노력할 것이다. 시가 퇴색되지 않도록 낡고 허름한 나의 서랍을 끊임없이 열 것이다.

  나의 사랑하는 가족과 엄마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또한 주저앉으려 할 때마다 나를 북돋아주고 다독여준 분들과 나와 인연이 된 분들 모두에게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미흡한 시를 선해주신 전기철, 배홍배, 조윤희 선생님 그리고 이 상의 관계자 여러분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곧 첫 기일을 맞는 아버지의 영전에 당선의 기쁨과 시를 바칩니다.

 

 

성금숙

충남 부여 출생

한남대학교 국어교육과 졸업

이메일 sees1221@hanmail.net

 

 

 

 

 

 

 

 

 

 

 

 


출처 : 시 산 맥
글쓴이 : 시산맥 원글보기
메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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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의 연대기 외 4

  김경린

 

                                                       

  일요일은 차갑고 고요하다

  마치, 빙하기를 건너는 매머드처럼 그릉그릉 울고 있는 냉동고가 일요일을 횡단하고 있다

 

  제자리에서 일제히 뭉그러진 채로 펼쳐져 있는 시간들

  사과는 몇 등분으로 쪼개 놓을까

 

  창문이 얼고 허공마저 얼어붙었다

  새를 쫓는 바람의 형태를 관찰하는 습관이 생겨났다

  발 손 눈 나 너 우리 각기 다른 모양의 조각들이 문틀에 수북하게 쌓여 있다

 

  텔레비전에서 낯익은 사람들이 오고 간다

  이야기의 양면은 마약같이 내 몸에 스며들고 마취된 감정으로 잠시 잠깐 빙하의 온도는 잊기로 했다 

  

  빙하의 언덕을 넘는 매머드를 사냥하러 가려는 엄마의 칼 가는 소리

  얼음의 식탁 앞에서 우리는 잠깐 얽히고 마주치고 돌아서면 빙하의 바람 속으로 사라졌다

 

  일요일이 갔고 또다시 일요일이 왔고 빙하기는 떠날 줄 모르고 갈변된 사과는 말라 비틀어져 있고 일요일은 아직 오지 않았고

 

  우리는 여전히 빙하의 동굴에 얼음처럼 앉아서 매머드의 울음소리를 어둠이 깊어지도록 듣고 있다

 

 

 

 

 

 

 

 

 

 

 

 

푸른수염

 

 

                                      

식빵처럼 딱딱해지는 구름을 한 겹씩 벗겨낸다

아버지와 아버지 사이에서 나는 가끔 멋있게 뭉개졌다

 

늘 새장 속에 들어가 앉아 있지만

내가 새라는 것을 아무도 믿지 않았다

새들에게 손을 내밀자 숲은 더 멀어졌다

 

끼니를 알 수 없는 밥을 먹었다

끝없이 자라나는 계단을 오르는 꿈은 반복되었다

 

깊은 밤,

벽에 기댈 때마다 벽 속에서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폭풍은 언제쯤 도착할까

수초는 어느 방향으로 움직여야 하나

 

새장문은 열릴 것이고

아직 날개는 돋지 않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가 좋았다

 

멋지게 뭉개지고 아름답게 문드러지는

그러나 잘 죽지 않는 나를

새장 주인은 팔을 휘휘 저으며 날려 보낼 것이다

 

어둠이 내일을 끌고 올 때

이런 예감은 왜 꼭 맞아떨어지는 걸까

 

 

 

 

낯선 뱀 한 마리

 

 

                                                                              

  도로를 가로질러가는 뱀, 우리는 언제 한 번 만났던 인연처럼 비명을 지르고 눈을 맞췄다.

 입술이 내 입술에 와 닿았을 때 심장이 간지러워지는

 

 너를 만났을 때도 그랬다. 낯선 체온으로 가득해지고 하루는 지루하게 길어졌다. 빨갛게 익어가는 열매의 씨앗들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한낮의 태양은 이물감처럼 부풀어지고 

 

  혀를 오므리면 투명한 젤리가 된다.

  너는 낮과 밤사이에 놓인 휘파람

  물결모양의 손가락들은 가벼운 농담을 쏟아낸다손끝에서 손끝으로 맞물리는 안부가 불편해 오랫동안 노래를 불렀다.

 

  나는 비켜서는 방법을 모르고

  나뭇가지가 새를 흔들면 나뭇잎처럼 떨어져 켜켜이 쌓이는 공중 

  햇빛에 익숙해져 있는 나비를 본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계절은 가고 계절이 왔다.

  천천히 움직이는 뱀을 보며 가끔 방에서 길을 잃었다. 가볍게 끊어지는 들숨과 날숨의 뒤척임들. 나무가 기울어지는 방향으로 나는 점점 익숙해져 갔다.

 

  우리는 아직도 여기와 거기에 있다.

  소름이 돋은 살결로 포옹하는 방법을 찾고 있는 중이다.

  도로의 뱀은 먼 풀밭에서 목구멍까지 밀고 들어오는 몇 개의 발자국과 온기를 뱉어내고 있다.  

 

 

 

 

 

 

 

 

잠자는 인형과의 동거

 

   

 

가끔, 인구조사 때

혼자라고 적을 때도 둘이라고 적을 때도 있었다

 

동전을 한 움큼 주웠고

문지방까지 물이 찰방거렸다는 꿈 이야기

죽은 말들이 새어 나왔다

 

잠자는 인형의 눈을 들여다본다

머리맡에는 흰 꽃병이 정직한 자세로 놓여 있다

 

아무 일도 없는 오후

빨래 건조대가 바람에 쓰러진다

벽돌을 주워 지탱하고서야 삐딱하게 서 있는

 

애벌레처럼 여름이 꿈틀거렸다

나무들은 기형의 자세를 좋아했고 서로의 마음이 선명해지도록 나뭇잎들은 건강해졌다

 

소통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침대는 질퍽거렸고

불가피하게 바람과 창문의 대화만 듣는다

 

인형의 손아귀에 잡힌 내 팔목은 차가워지고 투명해진다

여름과 아무 상관없는 입술은

지상에서 못다 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창백해지는 인형의 표정과는 상관없이

뼛속까지 초록이 되는 여름

 

 

딴짓

 

 

 

 

  어울리지 않지만 결혼식은 좋아해. 극적인 상황에서 나는 어항 속에서 잠을 잤다. 우리의 관계에서는 달콤한 냄새가 난다. 이별을 위해 부케를 던졌다. 물속 모퉁이를 돌고 돌면 나의 결혼식. 햇빛을 머리에 이면 우리는 두 개의 동그라미가 되었다.

  오늘을 기억해 백 한 번째야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벽은 물고기 꽃누르미 향으로 가득해서 자주 물을 뿌려 적셔주었다. 결혼식장으로 가는 길은 공기방울로 엮어진 다리. 나를 툭, 던지면 파장이 일어나겠지.

   천연덕스럽게 호주머니 속에서는 울음이 쏟아져 나올 것이고 블루마운틴 한 잔이 생각나는 오후. 결혼식은 또 다른 결혼식을 지워가는 일. 눈을 뜨면 시간은 분주해져 갔다. 어울리지 않지만 결혼식은 좋아해.

 

 

 

 

 

 

정남진신인시문학상 수상 소감


 

   어떤 말이 어울릴까요? 이런저런 단어를 생각해 봐도 딱히 떠오르는 단어가 없습니다. 단순하게 감사하다는 말 외엔 그 어떠한 말도 대체불가인 것 같습니다. 나 스스로 나를 위로하고자 시작되었던 글쓰기는 점점 시간이 갈수록 나는 나를 모르겠고.... 내가 더 낯설어졌습니다. 내가 나를 가두는 것이 이렇게 쉬운 일이었을까요? 잘 알지도 못하는 시의 세계에 갇혀 버린 내가 안쓰럽기도 했습니다. 나를 읽고 나를 쓰는 그곳이 축축했던 것 같기도 하고, 칠흑 같은 어둠이 가끔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빛은 늘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나와는 상관없다는 듯이....

   저 밑바닥 축축하고 어두운 곳에서 고개 한번 들지 못하고 뒹굴던 나의 손을 잡아주신 심사위원 전기철 선생님, 배홍배 선생님, 조윤희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많이 외로웠고 두려웠던 시간들이었습니다. 이 시간들 다 잊고 새롭게 나를 알고 만들어가라는 뜻으로 알고 열심히 좋은 글 쓰겠습니다. 이 상을 만든 정남진과 시산맥에도 감사드립니다.

끊임없이 나를 북돋아주었던 친구들에게도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 전합니다.

 

  

 

김경린

 

경기 여주출생

서울디지털대학교졸업

이메일 profond@hanmail.net

 

 

 

 

 

 

 

 

 

 

 

 

 

 

정남진신인시문학상 심사평

 

 

 

   예심에서 올라온 15편의 무기명으로 올라온 응모작들을 전기철 시인, 조윤희 시인과 함께 차례로 읽으며 A B C 점수를 매기고 우수작 4명을 선정한 후 다시 심사하여 최종 수상자를 선정하기로 하였다. 장승은의 손에 대한 짐작4, 문은성의 무대 연출자의 권고4, 김경린의 일요일의 연대기4편 그리고 성금숙의 우리의 목7편이 먼저 뽑혔다. 장승은은 언어 속에 내포된 것들이 스스로 파괴되거나 위협당하여 재생성되는 시어들을 배열하는 힘이 한두 편 작품에서 눈에 띄나 그 힘이 지속적이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 문은성은 신선하고 발랄한 시적 태도와 때로는 눈을 번쩍 뜨게 하는 충격이 유쾌한 당혹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가볍고 현란한 기교는 머리끝까지 불태우지만 이내 허공으로 사라져버리는 공허함이 시를 읽고 난 후 찾아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남은 성금숙과 김경린의 시를 놓고 세 명의 심사자가 숙고한 끝에 두 사람을 공동 수상자로 선정하기로 합의했다. 각각 모던함과 전통성에 있어 우열을 가리기 힘들 만큼 완성도가 높았기 때문이다.

   김경린의 시는 잘 읽힌다. 시에 쓰인 소재나 시대와의 상관성, 인간 생활의 반영 등의 시를 보는 시각의 문제로부터 자유롭다. 응모한 다섯 편의 작품들에 사용된 언어 조건이 시인의 시 세계를 문제 삼을 만한 비판의 환경을 초월하고 있다. 본문을 읽는 내내 시에 대한 몰입과 자주 충돌하는 환각적 성향의 이미지들은 기존의 시에 도전하는 언어의 유희나 낯선 충격이 아닌 명백한 쾌감으로 다가온다. 작품 일요일의 연대기의 빙하기를 건너 일요일을 횡단하는 매머드를 사냥하기 위해 칼을 가는 엄마, 그리고 바람 속으로 사라지며 그녀와 맞서는 시적 화자가 전후 모순의 대립 항을 이루게 하는 것이나, 환유적 보상의 억압된 공간인 얼음 식탁이 몇 등분된 사과와 텔레비전에 나오는 낯익은 사람들에 의해 완곡하게 와해되는 결말은 시인의 놀라운 솜씨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작품 푸른 수염늘 새장 속에 들어가 있지만/ 내가 새라는 것을 아무도 믿지 않았다/.../ 새장의 문은 열릴 것이고/ 아직 날개는 돋지 않았다부분과 작품 낯선 뱀 한 마리천천히 움직이는 뱀을 보며 나는 가끔 방에서 길을 잃었다/.../ 소름 돋는 살결로 포옹하는 방법을 찾고 있는 중이다에서 보듯 의미적으로 상충되는 인식의 언어로부터 상호 등가의 교묘한 의미론적 변용이 발생하게 하는 언어적 적절성 또한 탁월하다. 이어지는 작품 잠자는 인형과의 동거아무 일도 없는 오후/ 빨래 건조대가 바람에 쓰러진다와 작품 딴짓이별을 위해 부케를 던지는 나부분 역시 김경린 시인의 배타적인 어휘들이 주는 통일된 언어의 미적 충격을 경험하게 한다.

성금숙의 시는 안정되었다. 전통적인 시의 형식에 충실하게 봉사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닌, 관례적인 시의 변별을 무효화시키고 있다는 뜻도 아닌 세련되고 완전한 시의 정의를 보여주고 있다는 말이다. 감각적 경험에 의존하면서도 어떤 1차적 묘사도 제외한 채 묘사되지 않은 전제들의 여백 속에 숨은 대상들을 묘사한다. 각각의 의미 항들은 서로를 계속 지시하며, 서로의 의미들을 무효화시키면서 3차적 의미를 생성하는 힘을 보여준다. 작품 우리의 목에서 우리와 우리는 동음이의어로 쓰인다. 우리라는 한 단어 속에 주지와 매체가 동시에 포함되어 있다. 대체로 시에선 매체에 의해 주지가 현상되는 동기의 부여가 일반적인데 시인은 유추의 근거를 생략하고 있다. 우리의 빛나는 사전적 명시성의 그늘 아래 은폐된 원관념이 직관되는 유머러스한 시적 풍경을 연출하는 독특한 능력을 성금숙 시인은 지녔다. 평범한 일상 소재가 독자에게 주는 심리적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전달의 문제, 즉 시적 수사학의 과제는 이같은 독특한 시적 연출력에 의해 이미 해결되고도 남음이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작품 진동하는 침묵당신이란 문장을 떠올리면/ 일렬로 날아가는 새들이 흩어지고/.../ 당신에게 나는 검은 사람/.../ 천개의 먹칠한 숫자에선 확장된 심상 혹은 병치 영역으로 던져지는 언어의 궁극적인 아찔한 속도감을 체험하고, 작품 사람을 뭉치면 덩어리가 됩니다부분과 작품들 훔쳐서 쓰다눈물이 핑 돌다초록이 죽고/ 초록이 번진/ 초록을 훔쳤지부분, “밥값을 계산하다 바닥에 떨어진 동전이 돌다 쓰러진다/ 돌지 않는 돈을 세다 아스피린을 삼킨 오렌지 분식 사장님같은 표현은 어둑한 시의 무대에 첫발을 딛는 시인 스스로에게 깔아주는 찬란한 빛의 그림자를 보는 느낌이다.

   두 분에게 축하의 말을 전하며 오래 시단에서 견디는 그래서 자신의 시세계를 갖추는 시인이 되기를 바란다.

 

 

예심 심사위원 : 문정영 강주

본심 심사위원 : 전기철 조윤희 배홍배()

 

 


출처 : 시 산 맥
글쓴이 : 시산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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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 정남진신인시문학상 수상작품 강주 시인

 

심장과 날씨 4

 

 

창문을 열었어

너의 한쪽 가슴이 보인다

 

어젯밤으로 되돌아 가

 

소설을 읽었다

열심히 해도 아무것도 되지 않는 세상을 열심히 살아내는 주인공의 이야기 계속 숨이 차올랐다 이름을 불렀지만 읽는 자와 읽히는 자의 거리는 멀었다 점점 더 멀어졌다

 

모조리 빼앗기고 하나씩 되찾는 것에 불과한

 

소년이 출구를 던졌다

깨진 출구는 다시 입구가 되었고 소년을 삼켰다 입구와 출구 사이에서 소년은 소년을 벗어나고 있었다

틀림없이 소년이었지만 더 이상 소년이 아닌

어둠보다 빛이 무서웠어

풍경들이 일제히 눈을 뜨고 나를 노려보는 것 같아 어떤 책은 눈이 아니라 손으로 읽어야 하는 거잖아 읽어본 적 있니?

 

젖은 손에 가만히 내 손을 빠뜨린다

 

창문을 열었어

너의 한쪽 가슴이 보인다

 

기울어질 테야

 

하나의 몸속에 또 하나의 심장이 겹쳐 있다

입구는 어떻게 출구가 되는 걸까

 

오늘은 날씨를 극복해야 한다

 

 

 

해피엔딩

 

 

 

주맹증을 알아

 

층계를 내려오면서

뒤돌아보면

 

새하얗게 닦고 있는 손

눈이 내려

 

아름답지 않지 라고 말하면

아름다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해

이상한 엘리스야

쉽게 녹는 건 쉽게 더러워져

그늘을 덮어 주겠니

 

결심했어

공을 툭 찼을 때 저절로 멈출 때까지

공을 갖지 않을 거야

층계의 홀수들은 아름답지 않아

짝수를 떠올렸니?

아름다움은 딛는 거야

홀수에 가지런히 발을 벗어 놓고

주맹증을 앓아

 

지금까지 시각적으로 말해서 미안해

 

눈송이 하나의 밝기로

층계를 오르지

 

뒤돌아보면

반쯤 녹은 내가 얼굴을 줍고 있어

 

 

 

 

팬터마임

 

 

 

흐릿한 손금사이에 입김을 불면

,

지금부터 당신에게로 뻗어가는

서사가 뚜렷해진다

 

왼손에서 더 먼 왼손으로 옮겨가는 말들

 

모든 서사를 진동모드로 전환한다면,

 

껍질을 뚫고 나오는 감정을 번역해

점점 말랑해지는 촉각으로 자랄 때까지

 

눈동자에서 꺼낼 수 있는 것들

젖은 날개와 접은 날개

표정을 주목해

얼굴은 흩어졌다가 모이는 광장

 

비둘기로 무엇을 묶을까

 

무대를 장악해

클라이맥스의 순간

폭설로 고립된 너를 찾아갈게

떼 지어 날아가는 까마귀의 자막쯤 놓쳐도 괜찮아

 

모퉁이를 돌면

그 다음 모퉁이가 궁금해진다

엇갈린 매듭을 풀기 위해

절벽이 필요하다

거기에 매달아 놓은 심장이 두근거린 적 있어

 

손바닥을 비벼

왼손과 오른손을 섞으면

마술처럼 사라지는 왼손과 헤어지는 왼손

 

손뼉이 날아오르는 비둘기처럼

 

 

 

바뀌는 순간

 

 

 

표정만 떼어낸다면 더 많은 거짓말을 만들 수 있지 눈밭에 두고 온 너의 표정을 찾으러 간 적 있어 녹아버린 후에 천천히 오는 것들

 

눈송이를 핥아먹으면 한 층씩 계단이 사라지지 이층에서 옥상까지 닿는 기분이 들지 네가 접어 보낸 봄비와 너의 이마는 결국 읽지 못했다 나는 너의 푸른 발등에서 고드름이 자라는 소리를 들었지 너의 기호와 나의 기질은 계절이 달랐을 뿐

 

네 몸에 손을 댔을 때 손가락들이 내려가던 이유

 

반드시 지는 게임이다 무기를 내려놓거나 총 대신 연필로 과녁을 만들거나

 

너의 말들은 손가락 끝에 달려 있다 손가락은 첼로의 감정 같은 것 자신을 보관하는 방식 새끼손가락에 나는 자꾸 밑줄을 긋는다 미리 떼어낸 달력 같아서

 

첫사랑의 장르는 환타지보다 르느와르

 

비밀은 아주 매력적인 캔버스지 작은 속삭임에도 별이 돋아난다 너를 엿듣는 기분은 반짝반짝 압축파일을 열면 반복적인 세계가 열리지 아무것도 안 보이면 전부 본 거야

 

창문을 달면 볼 수 있는 풍경은 오로지 나,

 

였다.

 

 

 

스위치

 

 

 

 탯줄을 잘랐을 때 반짝 세상을 옮겨가는 이야기 새의 부리가 꽃잎을 쪼았을 때 꽃은 위장에 불과하죠 새끼들의 주둥이와 어미새의 부리 사이에서 스위치가 꺼졌다 켜졌다 새는 반복되죠 빌딩은 하나이면서 여러 개의 눈을 깜박이죠 할 말이 점점 많아지고 있어요 엘리베이터에서 누른 숫자들은 연속으로 절뚝거려요 버튼으로 요약된 높이는 깊이를 간과하죠 달콤한 거짓말들이 몸의 당도를 높이고 있어요 순간 귀가 솔깃해요 진화와 퇴화가 동시에 진화하죠 썩은 이빨 사이로 자꾸만 죽은 감정들이 되살아나요 통증이야말로 생생한 동영상이죠 흑백사진 속의 트렁크가 입을 벌려요 추월할 수 없는 과거들이 쏟아지죠 웅덩이에서 수많은 발자국들이 시곗바늘을 옮겨요 감시카메라는 여전히 작동중이군요 동작들은 경건하고 눈빛들은 사나워지죠 눈빛에 베인 사건들이 기침을 토해내요 기침을 받아 적은 신문지는 전염병처럼 병실을 옮기고 있어요 병실을 구분하는 일이 최선이죠 난 새벽에 출발한 전류 나의 클라이맥스는 깜깜한 밤이에요

 

스위치를 켜면 빛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세계의 첫,

 

 

출처 : 시 산 맥
글쓴이 : 시산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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