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덕룡 시인 <하멜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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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탁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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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바람이 불어서 / 문태준
봄바람이 불어서
찬물결이 웃고
봄바람이 불어서
굴에서 뱀이 나오고
봄바람이 불어서
밑돌이 헐겁고
봄바람이 불어서
진 빚을 갚고
새 빚을 내고
봄바람이 불어서
귀신이 흐늘거리고
봄바람이 불어서
저쪽으로 가는 불빛
세계의 푸른 두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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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벨 서점 / 강은교
아마도 너는 거기서
희푸른 나무 간판에 생(生)이라는 글자가 발돋움하고 서서 저녁 별빛을 만지는 것을 볼 것이다.
글자 뒤에선 비탈이 빼꼼이 입술을 내밀 것이다
혹은 꿈길이 금빛 머리칼을 팔락일 것이다
잘 안 열리는 문을 두 손으로 밀고 들어오면
헌 책장을 밟고 선 문턱이 세상의 온갖 무게를 받아안고 낑낑거리고 있는 것을 볼 것이다
구불거리는 계단으로 다가서면
눈시울들이 너를 향해 쭈삣쭈삣 내려올 것이다.
그 꼭대기에 겁에 질린 듯 새하얘진 얼굴로 밑을 내려다 보고 있는 철쭉 한그루
아마도 너는 그 때
사람들이 수첩처럼 조심히 벼랑들을 꺼내 탁자에 얹는 것을 볼 것이다
꽃잎 밑 나 닮은 의자 위엔 연분홍 그늘들이 웅성이며 내려앉을 것이고,
아, 거길 아는가
꿈길이 벼랑의 속마음에 깃을 대고
가슴이 진자줏빛 오미자차처럼 끓고 있는 그곳을
남몰래 눈시울을 닦는, 너울대는 옷소매들, 돛들을, 떠 있는 배들을
배들은 오늘 어딘가 아름다운 항구로 떠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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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 김수복
저녁때가 되자 골목은 더욱 깊어졌다
덜컥, 몸이 잠기고
마취된 골목
골목 안의 평화가 잠시 다녀갔다
아득한 길,
내장으로 은밀하게
기쁘게 혹은 슬프게 드나들었던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이제 그 골목길은
가택연금되었고,
그렇게 집으로 가는 모든 길이 잘려나갔다
노을이 물드는 골목을
필사적으로 빠져나온다
골목 입구에 나서서
허위와
암세포와
모든 절망의 과거를 폭로한다
지나온 모든 민족주의와 모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와 맑스와 레닌과 모택동과
그러나 김구와 소월과 윤동주,
그러나 모든 상처는
몸과 거리로 통하는 출구,
골목 안에서 사유를 하고
혁명을 꿈꾸고 권력과 맞서서
고독한 쓰레기통 속에서
침을 뱉어 진흙을 눈에 발랐다
눈이 멀어야 눈을 뜰 수 있었다
밖으로 나가는 길은 보이지 않는 법,
들어오는 길만의 고독한
저 먼,
억압의,
목을 치던 꿈속의 길들도
이제는 눈을 뜨고
아득한 골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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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고미혜 기자 = 계간 '서정시학'은 제5회 서정시학 작품상 수상자로 문학평론가 황현산 고려대 교수를 선정했다고 29일 밝혔다.
수상작은 '서정시학' 겨울호에 발표한 평론 '세속과의 완전한 불화-이성선론'이다.
심사위원들은 "이 비평문으로 하여 우리는, 올해 10주기를 맞은 한 서정시인의 언어에 흐르는 일관된 주제와 심층적 방법과 섬세한 시선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며 "이 모든 것이 황현산 특유의 비평적 안목과 솜씨를 통해 간결하게 부조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시상식은 내달 6일 오후 고려대 100주년 기념관에서 있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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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생김새 / 김경미
모든 육체는 어둠을 틀에 부어 주조해낸 것
어둠의 생김새가 육체를 가르는 것 어둠의 콧날이
좀 더 두툼해지면 분꽃은 나팔꽃이 되고
다리가 길어지면 뱀은 기린의 육체가 되지
어둠의 등에 혹이 돋자 사람들은 그 어둠의 생김새를 가리켜
낙타라 불렀다
곁을 이룬 불투명 그 안을 들어가는 건 오직 목숨의
해부와 정지뿐
목숨을 지키는 건 어둠의 모습을 해체하지 않는 것
제 것이어도 단 한번 들어가 본 적 없는,
어둠으로 나선의 계단을 내고 검은 문을 단 집들
기차 같은, 밤길 속에서도 차창 안 불빛 속의 얼굴들
투명 유리 너머 들여다보이는 기차 같은 것, 아니어서
모든 생은 끝내
제 몸 밖에서의 풍찬노숙인 것
꽃잎들은 한없이 얇고 납작한 어둠의 무게를 가져
바람처럼 아름다운가
그러나 어둠이 적을수록 개미허리처럼 약한 것
그리하여 밤 밀물지기 전 석양을 사랑하듯
어둠의 숙명을 많이 아는 자일수록
나 사랑하는 것이니
거울 속 저편의 어두운 나신(裸身)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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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목수의 집 짓는 이야기 / 황학주
기적처럼 바다 가까운 데 있는 집을 생각하며 살았다
순서가 없는 일이었다
집터가 없을 때에 내 주머니에 있는 집
설계도를 본 사람 없어도
집 한 채가 통째로 뜨는 창은
미리 완성되어 수면에 반짝였다
나무 야생화 돌들을 먼저 심어
밤바다 소금별들과 무선 전화를 개통해 두고
허가 받지 않은 채 파도소리를 등기했다
하루는 곰곰이 생각하다
출입문 낼 허공 옆 수국 심을 허공에게
지분을 떼 주었다
제 안의 어둠에 바짝 붙은 길고긴 해안선을 타고
다음 항구까지 갈 수 있는 집의 도면이 고립에게서 나왔기에
섬들을 다치지 않게 거실 안으로 들이는 공법은
외로움에게서 배웠다
물 위로 밤이 오가는 시간 내내
지면에 닿지 않고 서성이는 물새들과
파도의 도서관에 대해 이야기했다
개가식으로 정렬된 푸르고 흰 책등이
마을로 가는 징검다리가 되어줄 수 있을까
바다 코앞이지만 바다의 일부를 살짝 가려둘 정도로
주인이 바다를 좋아하니
바다도 집을 좋아해 줄 수 있도록
자연으로 짓는 게 기본
순서를 생각하면 순서가 없고
준비해서 지으려면 준비가 없는
넓고 넓은 바닷가
현관문이 아직 먼데 신발을 벗고
맨발인 마음으로 들어가는 집,
내 집터는 언제나 당신의 바닷가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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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綠陰) / 이진명
하산길이었다
아래로 동네 집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지
흠칫, 가슴이 펄떡 한다
다시 산으로 올라갈까
집으로 가지 말까
녹음이 찌르르르 울었다
산과 집을 오간 짧은 사이
밟고 있던 그늘 바위에 없던 이끼가 뻗치고
괜히 발 하나가 흘렀다
가슴이 한번 펄떡 한 거였는데
별이 튀게 발목이 비틀렸다
어디로 비틀린 것일까
집으로 가면 새끼가 있고
새끼가 끌어안고 먹는 제일 보기 싫은 라면이 있다
어디로 비틀린 것일까
산으로 가면 죽은 엄마가 있고 죽은 외할머니가 있고
그이들 그림자처럼 앉고 서는 線香 타는 냄새의 독바위가 있다
집에는 버려야 할 묵은 우유가 두 병 있고
산에는 나를 보지 못하는
눈물이 고이는 내 여자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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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집 全씨 / 김사인
가령 그토록 빠르게 면발을 뽑아내는 일
훔쳐보는 코흘리개들 쪽으로 큰 눈 찡긋 우수어린 웃음 지어주는 일
앞으로 목을 빼고 큰 키 휘청휘청 걸어가는 일
더러운 앞치마는 풀어 시덥잖다는 듯 구석으로 뭉쳐 던지는 일
기묘한 액센트로 말하는 일 중국집 全씨처럼
장래 희망으로야 대통령도 장군도 싫지는 않았지만
돈 많은 사장이나 비행기조종사도 꼭 싫지는 않았지만
눈부셨지 껌 잘 씹는 중국집 全씨
입을 움직일 때마다 따닥따닥 소리가 나던
휘파람을 불면
지나는 처녀들 어김없이 킬킬거리던
뱀 모가지를 맨손으로 눌러서 잡던
어느 가을 웃말 김씨한테 맞아
코피를 흘리며 울던 홀아비 全씨
다 찢어진 그 난닝구 서러운 갈비뼈 같이는 아니고 싶었으나
저만치 기둥 뒤에서 섧게 따라울던 그의 어린 아들 같이는 아니고 싶었으나 (나도 슬퍼 조금 따라는 울었지만)
벗꽃 질 무렵
어린 아들 데리고 사라진 중국인 全씨
아모레 아줌마하고라던가
가게 안집 큰 누나라고 하던가
그 길로 자기 별로 돌아간 걸까
그 곳에서 다시 중국집을 내고 난닝구 바람에 껌을 씹으며
멋지게도 면발을 뽑고 있을까
어린 날의 내 우상 중국집 全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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