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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단추 / 손택수


내가 반하는 것들은 대개 단추가 많다

꼭꼭 채운 단추는 풀어보고 싶어지고

과하게 풀어진 단추는 다시

얌전하게 채워주고 싶어진다

참을성이 부족해서

난폭하게 질주하는 지퍼는 질색

감질이 나면 좀 어떤가

단추를 풀고 채우는 시간을 기다릴 줄 안다는 건

낮과 밤 사이에,

해와 달을

금단추 은단추처럼 달아줄 줄 안다는 것


무덤가에 찬바람 든다고, 꽃이 핀다

용케 제 구멍 위로 쑤욱 고개를 내민 민들레

지상과 지하, 틈이 벌어지지 않게

흔들리는 실뿌리 야무지게 채워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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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파람을 부는 개 / 강경호


우리집 개는 제가 사람인 줄 안다

단 한 번도 개를 보지 못하고

늘 사람만 보았기 때문이다

동족인 개를 만나면 짖을지도 모를 우리집 개는

사람과 개의 분별을 학습하지 못해

내게 아이처럼 어리광을 부리지만

제 목에 사슬을 채운 내겐

다만, 똥개일 뿐이다


우리집 개는 짖지 못한다

눈 뜨기도 전에 어미가 죽었으므로

우유를 주고 밥을 주는 내가 짖지 못하기 때문에

오직 나에게 학습한 휘파람만 분다

무료하게 꽃을 바라보다가 휘파람을 불고

석류나무 가지의 새를 향해 휘파람을 불고

집에 찾아오는 사람들을 향해 휘파람을 부는

개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우리집 개는 짖지 못한다






프란치스꼬와 참새


낮 미사가 끝나고 모두 돌아간 뒤

참새 한 마리 날아와

프란치스꼬 성인 손바닥과

성모님 어깨를 오가며

연신 성당을 비집고 다닌다


내가 성당 처마 끝에 선

프란치스꼬 성인에게 다가가자

내 어깨 위에 앉을 듯하다가

내가 놀라자 놀란 듯 날아가 버린다


세례명이 프란치스꼬인 내가

프란치스꼬 성인을 바라보자

참새는 성인의 머리에 앉아

자꾸만 뭐라고 하고

그걸 알아들은 듯 성인은 꼼짝 않고 서 있다


한참 후에야

참새와 성인이

서로 장난치다가 노래 부르다가

기도한다는 걸 알았다






나무의 침묵


겨울이 오면

나무는 제가 뱉어낸 말들 버리고

벌거숭이가 된다


아기처럼 조심스럽게

부드럽고 연한 신록의 말문을 열었다가

한여름 신록의 무성한 입담으로

비바람치는 어둠 속에서 비명도 질렀지만

온몸이 뜨거워진 날

서로에게 건네는 화려한 언어도 한 때,


나무는 겨울이 오면

그동안 내뱉었던 모든 말들 버리고

얼음 같은 침묵 앞에서

할 말을 잊는다






蓮實


우리 어머니 처녀 적 저고리 같은

연분홍 그늘 깊은 연꽃 오래 보잣더니

금세 부서지고

심청이 앉았던

노란 술을 단 연둣빛 연밥에

촘촘히 심청의 생각이 자라고 있다

심봉사 눈처럼 꺼먹한 蓮實이

튼실하게 자라고 있다


― 500년 후에도 싹을 틔울 수 있다는

연꽃의 씨앗, 蓮實처럼―


우리 어머니 보릿고개시절

밤늦게까지 보릿방아 찧던 절구통

그 속에 키우는 연꽃이

올 장맛속에도 꽃대를 밀어 올리는데

평생 일 독毒으로

백내장 녹내장으로 침침해지는

우리 어머니의 눈

언젠가는 심봉사처럼 세상이 밝아질 것만 같아

날마다 바라보는

까맣게 익어가는 蓮實






無心


여든 일곱 되신 우리 아버지

하릴 없이 TV만 보시는데

리모컨을 작동할 줄 몰라

붙박이 채널만 보시는데


아침 먹고 TV 보시다가

점심 먹고 보는 TV

졸음에 머리가 무거워져

끄벅, TV속으로 막 들어가시는 아버지


희미하게 눈을 치켜뜨고 TV를 보시는데

손녀딸 보는 '톰과 제리'를 보시는데

비키니 차림의 아가씨들 몸매 늘씬한

속옷 광고를 보시다가

재방송 연속극 또 보시는데

어느 샌가 쇼파에 기대어 주무시는

아무도 없는 한낮의 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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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를 삶는 / 윤관영


국수를 삶는 밤이다

일어나는 거품을 주저앉히며

창밖을 본다 滿開한

벚나무 아래 평상에서 소리가 들린다

웃음 소리가 들린다

젓다가 찬물에 헹군다

누가 아들과 아내 떼어놓고 살라 안 했는데 이러고 있듯

벚꽃은 피었다

기러기아빠라는 말에는 국수처럼 느린 슬픔이 있다

비빈 국수 냄비의 귀때기를 들고

저 벚꽃나무에 뛰어내리고 싶은 밤이다

저 별에게 국수를 권해 볼까

국수가 풀어지듯

소주가 몸 속에서 풀리듯

국수를 삶는 내가

벚꽃에 풀리고 있다


국수가 에부수수

벚꽃처럼 끓는 밤이다






이즈막, 꽃 / 윤관녕


상추 따는 여인의 엉덩이가

쌈처럼 보인 적 있다

서 있는 모습으로는 깻잎 딸 때였지만

이는 원경이 좋다

안경알에 떨어진 담을 입바람으로

분다

네모난 꽃은 없고

네모난 꽃은 없고

나비는 날개가 크지만

몸통은 벌을 닮았다

잎 다 따가고 남은 곳에 핀 담배꽃

배추꽃, 감자꽃, 장다리꽃, 부추꽃, 가지꽃, 깨꽃

꽃도 인제 먹는 꽃이 예쁘다

이즈막 그렇다

번지는 사과꽃 복사꽃, 잘 안 뵈는 모과꽃 살구꽃

꽃은 왜.

둥글 넓적인가

여인의 엉덩이야 그저

묻은 독에서 김치를 꺼낼 때나

장 드는 때가 첫대바기 좋지만, 그건

다, 어머니로 해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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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척, 아프다 / 길상호


술 취해 전봇대에 대고

오줌 내갈기다가 씨♡팔씨♡팔 욕이

팔랑이며 입에 달라붙을 때에도

전깃줄은 모르는 척, 아프다

꼬리 잘린 뱀처럼 참을 수 없어

수많은 길 방향도 없이 떠돌 때에도

아프다 아프다 모르는 척,

너와 나의 집 사이 언제나 팽팽하게

긴장을 풀지 못하는 인연이란 게 있어서

때로는 축 늘어지고 싶어도

때로는 끊어버리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감전된 사랑이란 게 있어서

네가 없어도 나는 전깃줄 끝의

저린 고통을 받아

오늘도 모르는 척,

밥을 끓이고 불을 밝힌다

가끔 새벽녘 바람이 불면 우우웅...

작은 울음소리 들리는 것도 같지만

그래도 인연은 모르는 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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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독서 /박현수


영원히

제자(制字) 원리에 갇히지 않는 문자로

가득한 책

흔들리는 그림자로만 적힌

희미한 구문들이

끝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책

다른 이의

지문이 잔뜩 묻은 서적에

초연하던 예언자,

그의 말처럼 모든 책은

한 페이지의 표지에 불과하리니

허락되지 않은 내용이여

서지학은

얼마나 헛된 학문일 것인가

가장 가까이 있기에

한 번 펼쳐

보았다가 나는 결혼했다

한 번도

독파된 적이 없는 난해한 서적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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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징가 계보학 / 권혁웅



1. 마징가 Z


  기운 센 천하장사가 우리 옆집에 살았다 밤만 되면 갈지자로 걸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고철을 수집하는 사람이었지만 고철보다는 진로를 더 많이 모

았다 아내가 밤마다 우리 집에 도망을 왔는데, 새벽이 되면 계란 프라이를 만들

어 돌아가곤 했다 그는 무쇠로 만든 사람, 지칠 줄 모르고 그릇과 프라이팬과

화장품을 창문으로 던졌다 계란 한 판이 금세 없어졌다


2. 그레이트 마징가


어느 날 천하장사가 흠씬 얻어맞았다  아내와 가재를 번갈아 두들겨 패는 소란

을  참다못해 옆집 남자가 나섰던 것이다 오방떡을 만들어 파는 사내였는데,

오방떡 만드는 무쇠 틀로 천하장사의 얼굴에 타원형 무늬를 여럿 새겨 넣었다

고 한다 오방떡 기계로 계란빵도 만든다 그가 옆집의 계란 사용법을 유감스러

워 했음에 틀림이 없다


3. 짱가


  위대한 그 이름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그가 오후에 나가서  한밤에 돌아오는

동안,  그의 아내는 한밤에 나가서 오후에 돌아오더니  마침내 집을 나와 먼 산

을 넘어 날아갔다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겼다 그 일이 사내의 집에서

가 아니라 먼 산 너머에서 생겼다는 게 문제였다 사내는 오방떡 장사를 때려치

우고, 엄청난 기운으로, 여자를 찾아다녔다 계란으로 먼 산 치기였다


4. 그랜다이저


  여자는 날아서 어디로 갔을까? 내가 아는 4대 명산은 낙산, 성북산, 개운산

그리고 미아리 고개, 그 너머가 외계였다 수많은 버스가 UFO 군단처럼 고개

를 넘어왔다가 고개를 넘어갔다 사내에게 驛馬가 있었다면 여자에게는 桃花

가 있었다 말 타고 찾아간 계곡, 복숭아꽃 시냇물에 떠내려 오니… 그들이 거

기서 세월과 계란을 잊은 채… 초록빛 자연과 푸른 하늘과… 내내 행복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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喪家에 모인 구두들 / 유홍준


저녁 喪家에 구두들이 모인다

아무리 단정히 벗어놓아도

문상을 하고 나면 흐트러져 있는 신발들

젠장, 구두가 구두를

짓밟는 게 삶이다

밟히지 않는 건 亡者의 신발뿐이다

정리가 되지 않는 喪家의 구두들이여

저건 네 구두고

저건 네 슬리퍼야

돼지고기 삶는 마당 가에

어울리지 않는 화환 몇 개 세워놓고

봉투 받아라 봉투,

화투짝처럼 배를 까뒤집는 구두들

밤 깊어 헐렁한 구두 하나 아무렇게나 꿰 신고

담장 가에 가서 오줌을 누면, 보인다

北天에 새로 생긴 신발자리 별 몇 개






해변의 발자국 / 유홍준


얼마나 무거운 남자가 지나갔는지

발자국이, 항문처럼

깊다


모래 괄약근이 발자국을 죄고 있다

모래 위의 발자국이 똥구멍처럼, 오므러져 있다


바다가 긴 혀를 내밀고

그 남자의

괄약근을 핥는다


누가 바닥에 갈매기 문양이 새겨진 신발을 신고 지나갔을까?


나는 익사자의 운동화를 툭, 걷어찬다

갈매기가 기겁을 하고 날아오른다






깊은 밥그릇 / 유홍준


못쓰게 된 밥그릇에 모이를 담아

병아리를 기른다 병아리가

대가리를 망치처럼 끄덕그리며 모이를 쫀다

부리가 밥그릇 속에 빠져 보이지 않는다

더 깊이 주둥이를 먹이에 박으려고

앞으로 기울어진 몸

발목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


깊은 밥그릇, 병아리를 죽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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