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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추에 여지없다 할 세네갈産 / 김민정

—마음이 아주아주 우주 5

 

구운 갈치를 보면 일단 우리 갈치 같지

그런데 제주 아니고는 대부분이 세네갈産

갈치는 낚는 거라지 은빛 비늘에 상처 나면

사가지를 않는다지 그보다는 잡히지를 않는다지

갈치가 즐기는 물 온도가 18도라나 우아하기도 하지

즐기는 물 온도를 알기도 하고 어쨌거나

갈치의 원산지를 검은 매직으로 새내갈,

새대가리로 읽게 만든 생선구이집도 두엇 가봤단 말이지

세네갈,

축구 말고 아는 거라곤

시인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가 초대 대통령을 역임한

세네갈,

그러니 이명박 대통령도 시 좀 읽으세요 했다가

텔레비전 책 프로그램에서 통편집도 당하게 만든

세네갈,

수도는 다카르

국가는 ‘모든 국민이 그대의 코라와 발라폰을 친다네’

코라와 발라폰을 치며 놀라고 대통령이 권하는

놀라운 나라라니

세네갈,

녹색 심장의 섬유여

형제들이여, 어깨에서 어깨로 모여라

세네갈인들이여 일어나라

바다와 봄에, 스텝과 숲에 들어가라*

역시나 시인 대통령이 써서 그런가

보우하사도 없고 일편단심도 없고

충성도 없고 만세도 없구나

세네갈,

우리는 갈치를 수입하고 우리는 새마을운동을 수출하고

마키 살 현 세네갈 대통령을 초청한 자리까지는 좋았는데

방한 기념으로 수건은 왜 찍나 그걸 왜 목에 둘둘 감나

복싱 하나 주무 하나 결국엔 한번 해보겠다는 심사인가

‘새마을리더 봉사단 파견을 통한 해외 시범마을 조성사업’

돔보알라르바와 딸바흘레, 이 두 마을이 성공했다는데

본 사람이 있어야 믿지 가본 사람이 아니라야 믿지

재세네갈한인회 회장보다 부회장이 낫지 않을까

헛된 믿음으로 찍히고 말 발등이라면 재기니한인회,

재말리한인회 두 회장에게 속아보는 게 차라리 나을까

세네갈,

갈치 먹다 알게 된 거지만 사실 갈치보다 먹어주는 게

앵무새라니까 세네갈産 앵무를 한국서들 사고 판다지

아프리카라는 연두

아프리카라는 노랑

아프리카라는 잿빛 삼색의

세네갈,

앵무새 앵에 앵무새 무

한자로 다들 쓰는데 나만 못 쓰나

鸚鵡

이 세네갈,

앵무 



————

* 녹색 심장의 섬유여 형제들이여, 어깨에서 어깨로 모여라 세네갈인들이여 일어나라 바다와 봄에, 스텝과 숲에 들어가라—세네갈 국가 후렴 부분에서







홀이 모든 것이 숫자로 보인다고 했다 / 김승일

 

보르헤스

 

어떤 아침 그가 내게 물어보았다

보르헤스, 무엇이 보이지?

 

내가 무엇이 보이는지 말해주었을 때

그가 나를 후려갈겼다

 

멍청아 보르헤스는 장님이야

 

나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사람이군 장님도 본다 눈을 감아도 안개가 보인다

나는 아직 노란색과 파란색 그리고 초록색을 볼 수 있는데 그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이렇게 말해야지 그는 실명의 세계를

 

상상하는 사람이다

 

 

기계의 주인

 

감옥엔 다른 이들도 있다 나는 병역을 거부하여 여기에 수감되었고 그 전에는 화가였고 그 전에는 시인이었다 오늘 아침에 무서운 일이 벌어졌다 나는 그 광경을 그림으로 그려보고 싶었지만 눈을 뜰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는 내가 시인이었을 때를 기억해

이렇게 시를 쓰다가

 

나는 내가 오늘 한 번도 눈을 뜬 적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누가 내 몸을 들고

「너는 이제 다시 그냥 기계다」라고 입력했는데

 

나는 이 일이 이제 너는 시인도 아니고 앤디 워홀도 아니고 병역을 거부하지도 않았다는 것만을 의미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건 내 눈이 이제 다시 기계눈이라 인간이 보는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햇살을 보게 되었다는 것을

 

뜻했던 것이다

 

하지만 만약 이 시의 화자인 기계가 정말로 자기가 기계라고 믿는다면 애초에 홀*에는 눈이 달려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내 기계를 들고 다음과 같이 입력했음을 틀림없다 너는 고장난 홀이다

 

 

————

* 홀 : 키워드를 입력하면 자신이 그 키워드(지시체)라고 착각하는 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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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거리의 왕 노릇/이재훈-

​​

 ​​

​하늘에 다리를 놓고 싶었지

구름이 다리에 걸터앉아 쉬는 풍경을 꿈꾼 거지

속도가 폐부를 훑고 지나가는 아침

햇살은 더 이상 찬란하지 않고

지루한 시간을 못 견뎌 핸드폰을 만지작대지

언제부터인가 그리워하는 시간이 내겐 없지

플래카드엔 권유와 명령만 있을 뿐

전투력 가진 말들이 길거리 여기저기서 뽐을 내지

문명의 한 구석에 제 이름을 새기려는 영혼들

왕 노릇하려고, 서로 왕 노릇하려고

생명을 능가하고, 죽음을 능가하는 이웃들
나는 왕의 언어가 없고

법의 언어가 없고
왕을 심판하는 언어가 없지
부끄러움이 없는 언어의 세계를 꿈꿀 뿐이지
이 세계에 없던 언어를 찾아 나설 뿐이지
아름다운 운율은 규칙이 아니라
당신의 입술 때문에 만들어지지

​중얼거리는 입술로 거리의 왕이 되지

​죄와 의義를 구분하지 못하는 머리들이

​거리에 둥둥 떠다니고 광장엔 사람들이 자꾸 모이지

​새벽녘 농부가 곡괭이를 들고 집을 나서지

​새벽녘 회사원이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서지

​느릿하다 때론 떠들썩한 발소리가 거리에 가득하지

​문득 신들이 사는 세계를 구경하고 싶었지

 

<2>-​대리자(代理者)/이재훈-

 

 

   내 머리를 쓰다듬는 자들. 아무나 붙잡고 정죄하는 자들. 도시는 매일 불타오르네. 악한 자들만이 주위에 득실거리네. 그

들은 내 목에 빨대를 꽂고 골수까지 빨아먹지. 철학자의 수백 마디를 좇는 자들. 등대지기의 침묵을 모르는 자들. 목에 창이

꽂혀 말을 할 수 없을 때 비로소 비굴하게 손을 비비는 자들. 냄새나는 사람들.

 

   구름이 하늘의 몸속으로 사라지는 날. 나는 한없이 약해져서 울고 있지. 위로하는 자는 없고 속이는 자가 너무 많아. 그렇

지만 이 엄살은 모두 기획된 것. 더 타락하기 위해 준비된 것. 더 성스럽기 위해 예비한 것. 거룩한 엄살은 악마를 교란시킬

수 있는 무기라네.

   ​난 순진하게도 사람들의 말을 믿었네. 이 세계를 말하지 말고 써야 하네. 가르치는 언어가 아니라 감각을 일깨우는 글자

들. 피부에 달라붙어 생채기를 내고 콧속으로 들어가 온몸을 서늘하게 만드는 단 한 줄의 시를 써야 하네.

 

   빨간 옷을 입고 신호등과 우측통행의 세계에 들어서면 온몸이 경직되지. 비겁한 자들은 고개 숙이면 자꾸 우쭐대지. 고개

를 끄덕이면 자꾸 자랑하지. 고요한 밤에 이르면, 사방이 어지럽게 돌아가네. 귓속에서 청소기 소리가 들리네. 아무 냄새도

없이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네. 뜻을 알 수 없는 분절음들이 부호처럼 굉음 속에서 파닥거리네.

​<3>-​​​스틱스*, 서울/이재훈-

 


소돔 땅엔 얼음이 언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큰 강은 축복의 물
다디단 물을 먹고
소돔 거리를 걸어가는 유다의 후예들
매서운 바람에 맞서려고 모자를 깊이 눌러 쓰고
꽝꽝 언 강으로 나간다
강물엔 사람들이 허우적대고 있다
스스로 얼음을 깨고 몸을 넣는다
숨이 끊어진 사람들이 둥둥 떠다닌다
노래도 없는 시간들을 사는 강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고
강물에 뛰어들어 허우적대는 사람들
서로의 머리채를 붙잡고 발목과 허리를 붙잡고
물속으로 잠기는 사람들
비명과 아우성이 강가에 가득하다
피 냄새를 맡고 바다에서부터 날아온 갈매기들이
비명처럼 끼룩댄다
높은 건물을 지어 벽을 만들고
지폐를 만들어 불행의 그물을 깁는 도시
한 척의 나룻배도 없이 강물이 꽁꽁 언다
여전히 도끼를 들고 얼음을 깨고 물로 뛰어드는
사람들이 줄 지어 가고 있다
줄 지어 전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타동차를 타고 간다
시청에서 개선가가 울리고
교회에서는 장송곡이 울린다
강으로부터 날아온 비명이 가득하다

 

*스틱스(Styx) : 이승과 저승을 가로지르는 강


<4>-동화의 세계/이재훈-

 

 

나무에 등을 기대고 있는 사내

늘 땅을 딛고 서 있는 나무

감상적인 게 죄가 되는 삶을 생각하지
나무의 높이만큼 타오르는 물줄기

화산이 폭발할 때처럼, 온 사위가 환한 봄날

당신을 만났지

당신이 내게 준 시큼한 절망들

상스러운 말들이 줄지어 다니는 학교 앞

어둠 속에서 오직 나무만이 황금빛으로 발하고 있었지

모든 사람들은 희미한 실루엣으로만 존재할 뿐

나 또한 한낱 이 세계의 배경일 텐데

배경에 지나지 않는 사람들이란

매일 동화 쓰는 시간을 맞이하지

희미한 달이 낡은 뱃전을 어루만지며 다가오는데

​밤이 환상의 세계라면

저녁은 동화의 세계

​저녁이 되면 광장에 사람들이 모이지

광장의 사람들은 어떤 저녁을 매일 그리고 있을까

하얀 치자꽃을 꺾어 어두워 가는 책상 위에 두고

달금하고 앳된 향기와 함께 조금씩 늙어가는 시간

풀어진 눈으로 넘어가는 해를 보는 시간

늘어진 삶에 끼어든 늙은 햇살이 온몸을 휘감지

나무에 몸을 기댄 자는 고독해지지

​​

<5>-​​​나르치스/이재훈-

​​

 

​순례의 여정엔 늘 사랑이 있었네

젖을 제때 짜지 못한 암소의 배엔 고름이 차고

죽은 자들의 얼굴엔 고통과 평화가 함께 스미는 걸 봤네

내게 사랑은 늘 들판과 외양간의 고통 속에 있었지

자네의 여정엔 아직도 구원만이 있는 건가

어머니가 보고 싶네. 그럴 필요까진 없었는데

어머니가 내게는 또 다른 구원의 징표가 되었었네

이 땅엔 내 존재를 온전히 감당할만한 대상이 없었네

나는 거친 아버지의 세계만 알았지 어머니의 세계는 몰랐다네

사회가 요구하는 이념과 도덕에만 관심있었지

하지만 날 구원해주는 것은 언어가 없는 원시의 감각이었네

그럴 때쯤 마치 마술처럼, 성애의 욕망과

죽음과 예술의 열정이 한꺼번에 찾아왔네

내 정념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말일세

나르치스. 사십은 늙은 나이가 아니라고 생각하네

사랑도 예술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나이지

한때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날 지탱해간다고 생각했지

죽음은 받아들이면 그뿐인데 말이야

세상 그 어디에도 가장 마땅한 이유는 없네 그럴듯할 뿐이지

이 도시 속에서 나는 사십 년의 광야처럼 매일 순례하며 살고 있다네
순례의 삶이 이 도시에 있다는 것을 자네는 믿겠나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네

나무의 짐을 나눠지고 새들의 소리를 들으며

침묵하며 자꾸 울고만 싶네

나는 언젠가 자네의 품에서 서서히 죽어가겠지

내 체온이 식어가는 감각을 오로지 자네에게 보여줄 수 있어 다행이네

나르치스, 자네는 따뜻한 포도주와 부드러운 빵을 원하겠지만

나는 배추를 넣은 된장국을 먹고 싶네

하얀 눈이 내린 들판을 홀로 걷고 싶은 날이네

말이 없어도 언어가 없어도 알 수 있는 세계를 언제 알려줄 텐가

가장 힘든 길은 아름다운 길이라고 했나

이제 순례를 떠날 때가 되었네 나르치스

자네의 단호한 목소리와 예감하는 눈빛이 그립네

나의 고향인 대지의 소리가 귓가에 가득하네

 

<6>-평원의 밤/이재훈-

 

 

   막막해졌네. 타인에게 무심해지고, 타인의 죽음에 무심해졌네. 모든 감정에 무심해졌네. 가르치는 자들이 내놓는 규율에

무심해졌네. 단순히 어지러움 때문이네. 고개를 숙이다 고개를 들면 어지럽네. 빙빙 돌고 울렁거리네. 앉아도 누워도 빙빙

도네. 과음 때문이네. 두통 때문이네. 내 몸에 잡초들을 태우려 했네. 산화하는 것만이 아름다운 거라 여겼네. 악수도 청하지

않고 떠나는 게 배려라 생각했네. 슬픔이 없는 세계는 없지. 나는 아름답게 슬픈 동물이고 싶었네. 충만한 마음으로 춤을 출

것이네.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건 내 옷자락에 배었던 냄새 한 다발.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해 슬픈 밤이네. 천둥이 음악소

리를 덮을 무렵. 자정의 달빛이 머리칼을 적실 무렵. 저 우주에 몸을 눕히고 별들을 덮을 것이네. 아무 언어도 없이 심연에

잠길 것이네. 평원에 앉아 바람의 마음을 얻을 것이네.

<7>-​​​디스(Diss)*/이재훈-

​​

​   피부가 구멍을 닫으면 우리는 작은 관에 갇히지. 몸을 붙잡고 통곡하는 소리. 통곡하다 울다 지쳐가는 한숨 소리. 뜨거운

몸뚱이는 차가운 쇳덩이에 들어가지. 화염으로 가루가 되지. 가루가 되어 땅속에 파묻히거나 서랍에 들어가지. 가루가 될 몸

들끼리, 서로 숭배하고, 경멸하고, 질투하는 가녀린 몸. 몸 때문에 죄를 짓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어리석은 몸. 아기가 작은

입술을 오므려 지저귀지. 예쁜 말들, 다독이는 말들, 나무라는 말들로 훈육된 아이. 혼자 밥을 먹고, 보채고, 울다 웃지. 밤이

되면 천사들과 피리를 부는 아이들. 결국 가루가 될 아이들. 울음이 될 아이들. 빌딩에서 썩어가는 아이들. 날 키운 모든 이

들을 경멸할 거야. 바람에 가시가 돋아나 따갑지. 고개를 숙이고 지나는 아이들. 자동차 바퀴들만 가득하지


* diss : 다른 사람을 폄하하는 말이나 행동.

 

<8>-치미는 몸/이재훈-​


 

  ​나신으로 잠든 여인을 그리네. 그리워하는 병에 걸려 매일 참회의 시를 쓰지. 독을 먹고 거울에 몸을 비추면 거리에서 들

리는 모든 철학이 뱃속에서부터 치밀어 올라. 내가 매일 서러운 것은 단지 이 몸뚱이 때문인데. 늘 몸의 말들이 머릿속에서

왱왱대지.


   졸고 있는 오후. 몸이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 이리저리 펄럭이네. 나를 부르는 소리, 내게 명령하는 소리, 멀리서 풍겨오는

몸 썩는 소리. 푹 썩어 물컹한 몸으로 의자에 파묻히네. 저녁이 되면 식탁에 앉아 뱃속에 고기를 우겨넣지, 육즙을 맛본 혀

가, 살 씹는 맛을 아는 혀가 쉬지 않고 날름거리네. 살을 뜯어 먹고, 쪄먹고, 튀겨먹고, 태워먹고, 살 먹는 소리가 자정이 지

나도록 쩝쩝 쩝쩝쩝 들리지.


   내 몸이 썩고 썩어 문드러지면 폴폴 날리는 꽃잎으로 남을까. 신비한 탄생의 시간을 생각하니 심장이 두근거리네. 꽃잎은

늘 가벼운 죽음이지만 난 그런 죽음이 좋네. 꽃잎은 가장 장중하게 땅에 안착하겠지. 그리곤 온 대지가 울리고 뜨거운 눈물

이 차오르는 첫 경험을 주겠지.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땅과 함께 밤새 울 것이네.
 

​<9>-풀이 던진 질문/이재훈-

 

 

  계절을 탓하지 말 것. 피었다지는 것은 순간이다. 노을은 경계도 없이 제 몸을 허문다. 그 몸 아래 조그맣게 엎드려 졸고

있는 풀 한 포기. 마치 제 몸을 갉아먹기라도 하듯. 이렇듯 탁월한 빛은 가장 아름다운 노래가 된다. 형형한 눈빛을 가진 젊

은 농부. 검은 나뭇가지의 실루엣, 미망인의 경계심처럼, 풍경은 슬금슬금 조바심치며 온다. 한때는 여자의 육체가 모든 갈

망을 잠재울 수 있다고 믿었다. 머릿속 영상은 늘 어둠이 밀려와 있다. 어둠을 갉아먹는 산속 외딴 불빛 하나.


   선량한 바람을 맞는다. 해가 지기 전의 결기처럼 무엇에 사로잡혔을까. 무엇에 놀랐을까. 산속에서 만난 한 사람. 흰 옷을

입고, 울고 있는 한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났을까. 머리를 숙이니 나를 빤히 보고 있는 풀 한 포기. 하늘거리며 바람 속으로 제

피를 흘리고 있다.

 

<10>-황금의 입/이재훈-

​​

 

​바람이 불면 이별하겠다
바람이 온몸을 휘젓고 나가야
간신히 나지막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꽃이 피는 것엔 이유가 없고

나의 욕망도 이유가 없다

배려는 늘 사람을 고뇌하게 만든다

그대와 나 사이

팽팽한 거리만 있었다면

나는 당신을 사랑했을 텐데

언제부턴가 몸속에 나비를 키우며 산다

싱그럽고 건강한 몸 내음에 취한 나비 떼가

몸속에서 팔랑거린다

제 몸속 나비 한 마리가 다른 몸을 찾아가는 일을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내 몸에 한 마리의 나비만 남을 무렵

그 퀭한 광야를 품고 다니는 저녁

​움직임 없는 구름의 속도를

무슨 까닭으로 이리저리 책망할까

숲의 교훈도 무력하고 늦은 햇살의 위로도

눈이 따갑기만 하다

겨울이 넘어가고 있었고

신비한 그림자만 남았다

침묵하는 입술만 씰룩대었다

 

​<<이재훈 시인 약력>>

 

*1972년 강원도 영월 출생.

*1998년《현대시》로 등단.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문학동네, 2005)와『명왕성 되다』(민음사, 2011).

*기타 저서 『현대시와 허무의식』『딜레마의 시학』『부재와 수사학』등. 

*인터뷰집 『나는 시인이다』.

*현재『현대시』 부주간이며 중앙대와 건양대에 출강.

-《현대시》2014년 5월호

출처 : 詩 동행
글쓴이 : yanggo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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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손의 그늘 / 우대식

 

용서하라

용서하라

용서하시라

이 가을날 나의 사랑을

얼마 남지 않은 저 잔광의 빛으로

당신을 몰고 가는 일

그것이 내 연애법이다

그 몰입에 얼마나 당신이 괴로워했을 줄

모든 빛이 꺼지고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처럼

당신과 내가 어느 풀밭에 앉아 있다 하자

젓가락을 들어 당신은 내 입에 음식을 넣어준다

음식 밑에 바쳐진 당신의 왼손

그 아래로 그늘이 진다

왼손의 그늘,

지상에서 내 삶이란

당신이 만들어준 왼손의 그늘에서 놀다 가는 일

놀다가 가끔 당신이 그리워 우는 일

코스모스처럼 내 등을 툭 한번 쳐보다가

돌아가는 당신의 늦은 귀가

그림자가 사라질 때

나의 연애는

파탄의 골목길

용재 오닐의 비올라 소리 같은 깊고 슬픈

당신의 오랜 귀가

 

 

 

 

 

 

 

 

 

 

[심사평]

 

특히 매회 수상자에서 비껴간 우대식의 시가 이번 수상 대상자로 심사위원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우리 시의 흐름이 지닌 어떤 영악스러운 계산성에 그가 그동안 편승하지 않고 묵묵히 극복해가고 있는 자세 때문이었을 것이다. (...) 나는 그의 어눌한 연애가 갖는 그만의 파탄의 골목길을 훔쳐보는 것을 좋아한다. <왼손의 그늘>! 그것이 보이기까지 그가 걸어온 길이 바로 파탄의 골목길이다. 그 삶의 환유를 우리는 소중하게 읽어야 한다. 정진규

 

우대식의 시에는 살아온 자기 생의 상처가 있고, 고뇌하는 자기 생의 사유가 담겨 있다. 언어로 그린 간결한 이미지의 데생 같은 우대식의 는 지금까지 살아온 시인의 가파른 삶의 궤적을 나타내 보인다. 자기 삶과 시와의 대비가 간결하고 극명하게 드러나 있는 이 같은 우대식의 진일보한 화법은 시로서의 높은 성취를 보여준다. 김종해

 

그의 시 가운데 왼손의 그늘에서 그 떨림은 사뭇 독특한 반향을 일으킨다. ‘지상의 화자가 놀다 가는’, 그러다가 당신이 그리워울 수밖에 없는 당신이 만들어준 왼손의 그늘은 황량한 만큼 아름답고 아름다운 만큼 황량한 역설의 미학을 드리운다. 오태환

 

시가 만들어주는 <왼손의 그늘>에서 놀다 가는 일이 얼마나 쓸쓸하고 애틋한지 그는 늘 돌아가려는 곳이 있어 보인다. 그곳이 고향 같기도 하고 애인의 품속 같기도 하고 그가 추구하는 시의 아름다움이 완결되는 곳 같기도 하다. 조말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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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스민 향기는 어두운 두 개의 콧구멍을 지나서 탄생했다 / 조말선

 

피가 번질까 봐 테두리를 그렸다

바닥으로 떨어질까 봐 바닥으로 내려놓았다

너를 만들고 보니 더 외로워졌다

매달리면 추락을 염려했다

장미는 나와 같이 피지 않았다

맨드라미는 혼자 흘러내리고 있었다

재스민 향기는 어두운 두 개의 콧구멍을 지나서 탄생했다

테두리를 그리자마자 지울 궁리를 했다

입구를 원하는 자가 생기자 출구를 원하는 자가 생겼다

남겨둔 부분에 대한 연구는 성과가 컸지만

남겨진 부분이 계속 나타났다

손가락이 사라지도록 장갑을 꼈다

얼굴이 지워지도록 모자를 썼다

삭제키를 눌러서 모두 지웠다

강물은 어둠 속에서도 바닥이었다

노을은 너무 멀어서 계속 남겨졌다

문을 열었지만 문 안에 있거나 문밖에 있었다

늪에 다다랐지만 전망대에서 조금도 나아가지지 않았다

열정과 늪은 한통속이었다

차들이 지나갔다

햇빛이 지나갔다

히아신스 향기가 매우 빨리 지나갔다

나는 계속 지나가고 있었다

남겨진 부분에 대해서 연구하고 싶었다

식구들이 흩어질까 봐 액자에 끼웠다

식구들이 나와 벽 사이에 끼여 있었다

싱크대에 가까워질 때 식탁에서 멀어졌다

꽃들은 피었지만 꽃나무에서 멀어졌다

네게서 멀어질 때 내가 가까워지는 것은 분명히 있다

겁탈을 꿈꾸며 독서를 했다

칼이거나 향료이거나 얼음이거나 반란이거나 아름다움이거나 독이거나

돋보기의 도수가 올라갔다

노을은 사라졌으므로 탐구가 중단되기 일쑤였다

강물은 다시 푸르렀다

검푸른 얼굴들이 마주보았다

서로 어두워지고 있었다

비를 좋아하면서 우산을 펴는 것은 멜로다

더 이상 우산 밖으로 손바닥을 펴지 않기로 했다

흘러내리는 생각을 턱이 뾰족하게 깎아냈다

손바닥으로 턱을 떠받칠 때 손바닥의 생각은 섞이지 않는다

여름은 빽빽해졌다

여름은 벌레처럼 단어들이 창궐했다

명쾌한 명사는 점점 수식어가 많아졌다

당신의 아름다운 눈을 찾기 위해 수식어를 헤치고 나아갔다

당신의 눈은 점점 깊어졌다

나는 구 번 트랙을 돌며 당신의 아름다운 눈을 노래했다

당신은 구 번 외의 어느 트랙도 거부했다

나를 재생하고 재생했지만

당신은 나를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수상소감] 당신이라는 장소를 탐하며...

 

언젠가부터 사람이라는 장소성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만나러간다. 누군가와 가까워진다. 누군가와 멀어진다는 일상어를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사람은 정지하기도 하고 움직이기도 하며 변화하는 장소입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만나면 싫든 좋든 탐험을 시작합니다. 흥미가 떨어지면 곧 중단되기도 하지만 사람과의 관계는 거대한 장소의 탐험인 것입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성실한 자세로 그 장소를 파고들어 가는 방법이 있는가 하면 단번에 일별하는 직관의 작용도 믿을 만합니다. 한 아름에 안기는 그 좁은 장소는 생각보다 쉽게 정복되지 않습니다.[]라는 장소는 또 어떻고요. 엄밀히 말하면 정복은 목적이 아닙니다. 나와 나의 관계, 나와 너의 관계의 지속에서 빚어지는 잡음의 탐험이 오히려 맞는 말이겠는데 그 지리멸렬을 즐기는 한 방편으로 시를 쓰고 있습니다. 시라는 장소를 탐험하며 사람을 조금 더 깊숙이 파고들어 가는 느낌이 듭니다.

지금 살고 있는 곳은 참 낯선 곳입니다. 동네야 다 그렇고 그런 곳이지만 낯익은 사람이 없다는 뜻에서 그렇습니다. 굳이 낯익은 사람을 만들고 싶지 않은 마음은 무엇일까요. 낯선 동네에 오고 보니 사람 생각이 납니다. 멀리 있는 사람들을 찬찬히 살펴보게 됩니다. 뚝 떨어져 홀로 있는 나를 찬찬히 살펴보게 됩니다. 사람은 장소이되 움직이는 장소라서 필요할 때마다 가까이 끌어당겨 들여다봅니다. 나를 들여다보는 일조차도 버겁습니다.

이즈음에 상을 주시니 감사히 받습니다. 독설이 취미인 세드나 식구들은 마음껏 악담을 늘어놓겠지요. 그 악담 때문에 집에 돌아가서는 모두 빠드득 이를 갈았다는 걸 아는 사람은 알겠지요. 서로서로 질투의 화신이라고 으르릉거리는 모습들이 든든합니다. 솔직한 비판이 무심한 덕담보다 정이 깊어졌습니다. 시는 몰라도 시인 이름은 아는 김삼경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갈 길이 먼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주요약력

- 1998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당선,

- 시집 매우 가벼운 담론』『둥근 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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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자(聾者)들의 음악 / 조연호

 

 

단지(團地) 앞에 매화(梅花)가 폈더군요

그건 친절(親切)합니다

오로지 악용(惡用)될 수 있는 것처럼요


이제 그만 두고 손을 씻겠다는 말,

떠난 사람을 숙변(宿便)으로 갚을 수밖에 없다는 말,

늘 이런 진정(鎭靜)들이 자비(慈悲) 뒤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수심(水深)이어야 할 하늘에

다정(多情)한 사람은 벼룩을 뿌리고 있습니다

앞뒤로 하나의 자음(子音)만 올 수 있는 계절에

창조로 무성한 주둥이를 박고


귀를 잃은 아이가 오직 물고기를 물이게 할 수 있었던 것처럼

평원으로 보낸 편지는 태양을 잘못된 책이게 하는 고독을 펼치고 있으니

손가락의 이 희박(稀薄) 사이

괴물지(怪物誌)와 따뜻한 의족(義足)을 나눕니다


경악(驚愕)은 잠을 깬 인간(人間)에게 있습니다

개문발차(開門發車) 하는 정거장을 또 지는 해에 얹으며

망인(亡人) 앞에 생간(生肝)처럼 앉아

결코 해독(解毒)을 잃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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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인간2 / 권혁웅


   방금 골목길을 돌아 나온 木皮를 보았다 유모차에 폐지를 싣고 가는 저 할머니, 나무가 되어가는 손으로 나무 아기를 거두신다 칭얼대던 2009년생 경향신문이 금세 얌전해진다 나무族들의 하루가 시작이다 햇빛의 삼투압은 여전해서 얼굴을 쓰다듬으면 혈관 있던 자리에서 펄떡이는 물관이 만져진다 옹이 같은 입은 걸친 게 없어서 깊고 다정한 소리를 낸다 버섯은 생목에서만 자라는 범, 검버섯들을 덕지덕지 붙인 채 양지바른 곳으로 뿌리를 옮기는 데 75년이 걸렸구나 그래도 차들 무서운 줄은 알아서 할머니, 길을 건널 때만 엉금썰썰이다


―《문예연구》2010년 봄호


 


노모2


   등잔 밑이 어두운 게 노안인데요, 어머니는 마루 불을 아끼려고 밤 열 시가 통성기도 시간입니다 그것은 하도 많이 들었어도 도무지 모르겠는 방언인데요, 케쎄라 마이테라 키테라 바이쎄라…… 경음과 격음들을 무진장 실어 나르는 게 이번엔 하느님께 아마 좀 따질 게 있나봅니다 한국에서는 제일 큰 고치가 아닐까 싶어요 어머니, 웅크렸다가 허리를 펴면서 날마다 거듭나는데요, 그 전에 직계와 방계를 아울러 긴 사설을 엮습니다 분가한 자식들은 혈압 약을 먹고요, 마흔이 넘은 막내아들만 옆방에서 책을 읽다가 눈살을 찌푸리는데요, 그건 다른 게 아니라 등잔 밑이 어두워서거든요 하늘 길을 바라보는 어머니를 하도 많이 닮아서거든요 그 다음에야 격양가 소리가 이어집니다 아으 위 증즐가 태평성대……를 부르는 코는 참 크고 장해요 아직 어머니를 땅에 붙잡아두는 등잔 밑 부스럭거림이 아니라면 또 그건 무엇이겠습니까


      ―《문학들》2009년 겨울호


 


소오강호

―드라마 7


  몸이 허공에 뜬 후에야 尹은 도를 알았다 첫 번째 걸음에 고장 난 브레이크와 생명보험의 관계를, 두 번째 걸음에 자기 앞에 어동육서, 좌포우혜를 펼칠 安의 심모원려를,


  그리고 마지막 걸음에 조강지처인 자기 대신에 들어설 현모양처의 어렴풋한 윤곽을 알았다 윤은 허공답보의 초식을 깨쳤으나 그것을 시전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었다


  구사일생이란 꼭, 반드시, 살아난다는 뜻이다 주화입마를 극복하고 천신만고와 전신성형을 거쳐서 윤은 돌아왔다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찍어서 남이 된 여자가 여기에 있으니, 이것이 남비근성이다


  윤은 환영대법을 펼쳤다 태양혈에 찍어둔 점 하나로 순식간에 안의 기를 빨아들였다 뜨거운 차 한 잔 마실 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미혼산 없이도 안의 혼은 공사장의 비산먼지였다


  금강불괴는 다진 고기가 되었고 만년한철은 녹은 봄눈이 되었다 안의 몸과 마음 얘기다 남이라는 글자에서 점 하나를 지워 님이 된 남자가 여기에 있으니, 이것이 님비현상이다


  안이 현모양처를 버리고 조강지처에게 돌아온 그날 밤, 윤은 안의 귀에 대고 전음입밀의 수법으로 속삭였다 꿈에서 깨면 너는 날개 잘린 나비가 되어 있을 거야, 거기 잘린 장자보다는 낫잖아? 안 그래?


  윤이 안과 동귀어진 하려는 순간, 만년인형설삼을 닮은 아이 하나가 들어온다 엄마 없는 하늘 아래가 거기다 때 아닌 경극이지만, 윤의 단전에는 뜨겁게 치미는 게 있다 물론 안의 눈에서도


  만천화우와 행운유수는 암기와 독수지만 엔딩 신으로도 상관은 없다 꽃비 아래서 윤과 안과 아이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염화미소를 짓는다 남비와 님비 사이에서, 다들 비위도 좋다 참 좋다


―《시와 세계》2010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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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 / 위선환

 


  몸속에 가시뼈를 키우는 물고기가 자라나는 가시뼈에 속살이 찔리는 첫째 풍경 속에서는 


  몸속에 두 귀를 묻어버린 물고기의 몸속보다 깊은 적막을, 적막하므로 무한한 그 깊이를


  누가 내 이름이라 지어 불렀다. 대답하는 목소리가 떨렸다.


  눈 뜨고 처음 내다본 앞 바다에 희끗희끗 눈발이 날리는 둘째 풍경 속에서는


  야윈 손이 반음씩 낮은 음을 짚어가는 저녁 무렵에 어둑하게 어스름이 깔리는 音調를

 

  새들은 어둔 하늘로 날고 살 속에서는 신열을 앓는 뼈가 사뭇 떠는 오한을


  누가 내 이름이라 지어 불렀다. 대답하는 목소리가 떨렸다.


  잠깐씩 돌아다본 들판에 돌아다볼 때마다 눈발이 굵어지는 셋째 풍경 속에서는


  눈까풀에 점점이 점 찍힌 점무늬 아래로 한없이 떨어져 내리는 반점들의 하염없는 나부낌을


  아득하게 깊어진 눈구멍 속에서 속날개를 털며 자잘하게 날갯짓도 하는 설렘을


  누가 내 이름이라 지어 불렀다. 대답하는 목소리가 떨렸다.


  물굽이와 들판과 나를 덮고 묻는 눈발이 자욱하게 쏟아지는 마지막 풍경 속에서는


  천 마리씩 떨어지는 여러 무리 새떼들이 바짝 마른 가슴팍을 땅바닥에 부딪치며 몸 부수는 저것이


  폭설인 것을


  내리 꽂고 혹은 치솟는 만 마리 물고기들은 물고기들끼리 부딪쳐서 산산조각 나는 것 또한


  폭설인 것을


  따로 이름 지어 부르지 않았다. 깜깜하게 쏟아지는 눈발 속에서, 누구인가 그가!


  내 이름이라 지어 불렀다. 대답하는 목소리가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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赤記 / 장석원


다스려지는 자의 눈빛으로

적들의 피를 바라보듯 햇빛 너머를 응시한다

죽은 그를 빨아올려 허공에 뱉어낸

나무의 적의를 나는 알 것 같다

젖어 있는 나무의 뿌리를

그를 휘감은 검은 핏줄의 약력을


아버지의 목덜미를 깨물듯 나무에 이를 박는다

단풍의 아가리에 머리를 쑤셔 박는다

그가 나를 사랑한 후에 쏟은 피

빨아 먹힌 후 그 몸은 빈 자루에 불과할 것이다


목 매달린 죄인처럼 바람결에 흔들리면서

확산되는 피의 영역에 갇혀 나는 처단되기를 기다린다


나의 눈구멍으로

모든 것이 빨려든다

거기 고요가 점화된다


붉은 고요에 감염되어 아버지를 기다리며

석양 속에서 나는 존다 빠르게 잊혀지기를 꿈꾼다

어둠이 이마를 만지자 나는 번지듯이 건너간다


가장 근원적인 혁명은 사랑하며 홀로 부패되는 것

그의 먹이가 되는 것 그를 먹이는 것


나를 흡수하여 점점 붉어지는 아버지

밖으로 허물어지면서 몸피를 키우는

소모되고 사라지려는 저 붉음이

사랑이 될 수 있는 유일한 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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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간다 / 이인원


질기고 긴 문장 붕대로 꿈틀대는 그리움을

꽁꽁 殮해 두러 간다


과월호 잡지 신세 같은 쓸쓸함을

훌훌 거풍시키러 간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에도 깨서 보채는 외로움을

고문서보다 깊은 잠재우러 간다


머릿속에 빼곡한 ‘너’라는 낱말을

모조리 삭제하러 간다


고전이 되지 못할 내 비밀을

고전 속에 암호처럼 밑줄 그어두러 간다


끝내 못 다 읽은 어떤 사랑이야기를

아쉽지만 기일 반납하러 간다


온갖 잡다한 사연 다 끌어안고도 의연한 도서관을

눈꼽만큼이라도 닮으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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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고래 / 이병률


거인고래는 크지 않습니다

왼 눈은 감정 있는 것을 보고

오른 눈은 죽어 있는 것을 보기를 좋아합니다

상처가 생기면 상처 된 자리를 스스로 떼어내 번지지 않게 하며

백 오십년을 살 뿐 오래 살지 않습니다

그 일생의 한번 나의 천막에 들른다 하였습니다


밤은 어둡고 꽃들은 서로를 모른 체 하는 사이

나는 그의 눈을 받아먹고 고양이 되고 얼음이 되고 눈발이 되려

질척이며 그가 오는 소리를 향하여 몸 돌리려 하였습니다

헌데 거인고래는 살아오지 않는 존재라 하였습니다

기다리는 일은 구실이며 병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니 설레는 일 없도록 다 내려놓아야겠는데

팔뚝에 불을 질러 연기를 피우는 천막 밖의 저 큰 나무

큰 나무 아래 몸에서 몸위로 까무러치는 수천의 달(月)들


혹 내가 터를 옮길 적마다 서 있던 저 나무 한그루가 거인고래는 아니었는지요

그것으로 다녀간 것으로 치자는 셈은 아닌지요

거인고래가 다녀가고 나와 내 생각의 풍경들은 마지막을 바라보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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