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거리의 왕 노릇/이재훈-
하늘에 다리를 놓고 싶었지
구름이 다리에 걸터앉아 쉬는 풍경을 꿈꾼 거지
속도가 폐부를 훑고 지나가는 아침
햇살은 더 이상 찬란하지 않고
지루한 시간을 못 견뎌 핸드폰을 만지작대지
언제부터인가 그리워하는 시간이 내겐 없지
플래카드엔 권유와 명령만 있을 뿐
전투력 가진 말들이 길거리 여기저기서 뽐을 내지
문명의 한 구석에 제 이름을 새기려는 영혼들
왕 노릇하려고, 서로 왕 노릇하려고
생명을 능가하고, 죽음을 능가하는 이웃들
나는 왕의 언어가 없고
법의 언어가 없고
왕을 심판하는 언어가 없지
부끄러움이 없는 언어의 세계를 꿈꿀 뿐이지
이 세계에 없던 언어를 찾아 나설 뿐이지
아름다운 운율은 규칙이 아니라
당신의 입술 때문에 만들어지지
중얼거리는 입술로 거리의 왕이 되지
죄와 의義를 구분하지 못하는 머리들이
거리에 둥둥 떠다니고 광장엔 사람들이 자꾸 모이지
새벽녘 농부가 곡괭이를 들고 집을 나서지
새벽녘 회사원이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서지
느릿하다 때론 떠들썩한 발소리가 거리에 가득하지
문득 신들이 사는 세계를 구경하고 싶었지
<2>-대리자(代理者)/이재훈-
내 머리를 쓰다듬는 자들. 아무나 붙잡고 정죄하는 자들. 도시는 매일 불타오르네. 악한 자들만이 주위에 득실거리네. 그
들은 내 목에 빨대를 꽂고 골수까지 빨아먹지. 철학자의 수백 마디를 좇는 자들. 등대지기의 침묵을 모르는 자들. 목에 창이
꽂혀 말을 할 수 없을 때 비로소 비굴하게 손을 비비는 자들. 냄새나는 사람들.
구름이 하늘의 몸속으로 사라지는 날. 나는 한없이 약해져서 울고 있지. 위로하는 자는 없고 속이는 자가 너무 많아. 그렇
지만 이 엄살은 모두 기획된 것. 더 타락하기 위해 준비된 것. 더 성스럽기 위해 예비한 것. 거룩한 엄살은 악마를 교란시킬
수 있는 무기라네.
난 순진하게도 사람들의 말을 믿었네. 이 세계를 말하지 말고 써야 하네. 가르치는 언어가 아니라 감각을 일깨우는 글자
들. 피부에 달라붙어 생채기를 내고 콧속으로 들어가 온몸을 서늘하게 만드는 단 한 줄의 시를 써야 하네.
빨간 옷을 입고 신호등과 우측통행의 세계에 들어서면 온몸이 경직되지. 비겁한 자들은 고개 숙이면 자꾸 우쭐대지. 고개
를 끄덕이면 자꾸 자랑하지. 고요한 밤에 이르면, 사방이 어지럽게 돌아가네. 귓속에서 청소기 소리가 들리네. 아무 냄새도
없이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네. 뜻을 알 수 없는 분절음들이 부호처럼 굉음 속에서 파닥거리네.
<3>-스틱스*, 서울/이재훈-
소돔 땅엔 얼음이 언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큰 강은 축복의 물
다디단 물을 먹고
소돔 거리를 걸어가는 유다의 후예들
매서운 바람에 맞서려고 모자를 깊이 눌러 쓰고
꽝꽝 언 강으로 나간다
강물엔 사람들이 허우적대고 있다
스스로 얼음을 깨고 몸을 넣는다
숨이 끊어진 사람들이 둥둥 떠다닌다
노래도 없는 시간들을 사는 강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고
강물에 뛰어들어 허우적대는 사람들
서로의 머리채를 붙잡고 발목과 허리를 붙잡고
물속으로 잠기는 사람들
비명과 아우성이 강가에 가득하다
피 냄새를 맡고 바다에서부터 날아온 갈매기들이
비명처럼 끼룩댄다
높은 건물을 지어 벽을 만들고
지폐를 만들어 불행의 그물을 깁는 도시
한 척의 나룻배도 없이 강물이 꽁꽁 언다
여전히 도끼를 들고 얼음을 깨고 물로 뛰어드는
사람들이 줄 지어 가고 있다
줄 지어 전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타동차를 타고 간다
시청에서 개선가가 울리고
교회에서는 장송곡이 울린다
강으로부터 날아온 비명이 가득하다
*스틱스(Styx) : 이승과 저승을 가로지르는 강
<4>-동화의 세계/이재훈-
나무에 등을 기대고 있는 사내
늘 땅을 딛고 서 있는 나무
감상적인 게 죄가 되는 삶을 생각하지
나무의 높이만큼 타오르는 물줄기
화산이 폭발할 때처럼, 온 사위가 환한 봄날
당신을 만났지
당신이 내게 준 시큼한 절망들
상스러운 말들이 줄지어 다니는 학교 앞
어둠 속에서 오직 나무만이 황금빛으로 발하고 있었지
모든 사람들은 희미한 실루엣으로만 존재할 뿐
나 또한 한낱 이 세계의 배경일 텐데
배경에 지나지 않는 사람들이란
매일 동화 쓰는 시간을 맞이하지
희미한 달이 낡은 뱃전을 어루만지며 다가오는데
밤이 환상의 세계라면
저녁은 동화의 세계
저녁이 되면 광장에 사람들이 모이지
광장의 사람들은 어떤 저녁을 매일 그리고 있을까
하얀 치자꽃을 꺾어 어두워 가는 책상 위에 두고
달금하고 앳된 향기와 함께 조금씩 늙어가는 시간
풀어진 눈으로 넘어가는 해를 보는 시간
늘어진 삶에 끼어든 늙은 햇살이 온몸을 휘감지
나무에 몸을 기댄 자는 고독해지지
<5>-나르치스/이재훈-
순례의 여정엔 늘 사랑이 있었네
젖을 제때 짜지 못한 암소의 배엔 고름이 차고
죽은 자들의 얼굴엔 고통과 평화가 함께 스미는 걸 봤네
내게 사랑은 늘 들판과 외양간의 고통 속에 있었지
자네의 여정엔 아직도 구원만이 있는 건가
어머니가 보고 싶네. 그럴 필요까진 없었는데
어머니가 내게는 또 다른 구원의 징표가 되었었네
이 땅엔 내 존재를 온전히 감당할만한 대상이 없었네
나는 거친 아버지의 세계만 알았지 어머니의 세계는 몰랐다네
사회가 요구하는 이념과 도덕에만 관심있었지
하지만 날 구원해주는 것은 언어가 없는 원시의 감각이었네
그럴 때쯤 마치 마술처럼, 성애의 욕망과
죽음과 예술의 열정이 한꺼번에 찾아왔네
내 정념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말일세
나르치스. 사십은 늙은 나이가 아니라고 생각하네
사랑도 예술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나이지
한때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날 지탱해간다고 생각했지
죽음은 받아들이면 그뿐인데 말이야
세상 그 어디에도 가장 마땅한 이유는 없네 그럴듯할 뿐이지
이 도시 속에서 나는 사십 년의 광야처럼 매일 순례하며 살고 있다네
순례의 삶이 이 도시에 있다는 것을 자네는 믿겠나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네
나무의 짐을 나눠지고 새들의 소리를 들으며
침묵하며 자꾸 울고만 싶네
나는 언젠가 자네의 품에서 서서히 죽어가겠지
내 체온이 식어가는 감각을 오로지 자네에게 보여줄 수 있어 다행이네
나르치스, 자네는 따뜻한 포도주와 부드러운 빵을 원하겠지만
나는 배추를 넣은 된장국을 먹고 싶네
하얀 눈이 내린 들판을 홀로 걷고 싶은 날이네
말이 없어도 언어가 없어도 알 수 있는 세계를 언제 알려줄 텐가
가장 힘든 길은 아름다운 길이라고 했나
이제 순례를 떠날 때가 되었네 나르치스
자네의 단호한 목소리와 예감하는 눈빛이 그립네
나의 고향인 대지의 소리가 귓가에 가득하네
<6>-평원의 밤/이재훈-
막막해졌네. 타인에게 무심해지고, 타인의 죽음에 무심해졌네. 모든 감정에 무심해졌네. 가르치는 자들이 내놓는 규율에
무심해졌네. 단순히 어지러움 때문이네. 고개를 숙이다 고개를 들면 어지럽네. 빙빙 돌고 울렁거리네. 앉아도 누워도 빙빙
도네. 과음 때문이네. 두통 때문이네. 내 몸에 잡초들을 태우려 했네. 산화하는 것만이 아름다운 거라 여겼네. 악수도 청하지
않고 떠나는 게 배려라 생각했네. 슬픔이 없는 세계는 없지. 나는 아름답게 슬픈 동물이고 싶었네. 충만한 마음으로 춤을 출
것이네.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건 내 옷자락에 배었던 냄새 한 다발.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해 슬픈 밤이네. 천둥이 음악소
리를 덮을 무렵. 자정의 달빛이 머리칼을 적실 무렵. 저 우주에 몸을 눕히고 별들을 덮을 것이네. 아무 언어도 없이 심연에
잠길 것이네. 평원에 앉아 바람의 마음을 얻을 것이네.
<7>-디스(Diss)*/이재훈-
피부가 구멍을 닫으면 우리는 작은 관에 갇히지. 몸을 붙잡고 통곡하는 소리. 통곡하다 울다 지쳐가는 한숨 소리. 뜨거운
몸뚱이는 차가운 쇳덩이에 들어가지. 화염으로 가루가 되지. 가루가 되어 땅속에 파묻히거나 서랍에 들어가지. 가루가 될 몸
들끼리, 서로 숭배하고, 경멸하고, 질투하는 가녀린 몸. 몸 때문에 죄를 짓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어리석은 몸. 아기가 작은
입술을 오므려 지저귀지. 예쁜 말들, 다독이는 말들, 나무라는 말들로 훈육된 아이. 혼자 밥을 먹고, 보채고, 울다 웃지. 밤이
되면 천사들과 피리를 부는 아이들. 결국 가루가 될 아이들. 울음이 될 아이들. 빌딩에서 썩어가는 아이들. 날 키운 모든 이
들을 경멸할 거야. 바람에 가시가 돋아나 따갑지. 고개를 숙이고 지나는 아이들. 자동차 바퀴들만 가득하지
* diss : 다른 사람을 폄하하는 말이나 행동.
<8>-치미는 몸/이재훈-
나신으로 잠든 여인을 그리네. 그리워하는 병에 걸려 매일 참회의 시를 쓰지. 독을 먹고 거울에 몸을 비추면 거리에서 들
리는 모든 철학이 뱃속에서부터 치밀어 올라. 내가 매일 서러운 것은 단지 이 몸뚱이 때문인데. 늘 몸의 말들이 머릿속에서
왱왱대지.
졸고 있는 오후. 몸이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 이리저리 펄럭이네. 나를 부르는 소리, 내게 명령하는 소리, 멀리서 풍겨오는
몸 썩는 소리. 푹 썩어 물컹한 몸으로 의자에 파묻히네. 저녁이 되면 식탁에 앉아 뱃속에 고기를 우겨넣지, 육즙을 맛본 혀
가, 살 씹는 맛을 아는 혀가 쉬지 않고 날름거리네. 살을 뜯어 먹고, 쪄먹고, 튀겨먹고, 태워먹고, 살 먹는 소리가 자정이 지
나도록 쩝쩝 쩝쩝쩝 들리지.
내 몸이 썩고 썩어 문드러지면 폴폴 날리는 꽃잎으로 남을까. 신비한 탄생의 시간을 생각하니 심장이 두근거리네. 꽃잎은
늘 가벼운 죽음이지만 난 그런 죽음이 좋네. 꽃잎은 가장 장중하게 땅에 안착하겠지. 그리곤 온 대지가 울리고 뜨거운 눈물
이 차오르는 첫 경험을 주겠지.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땅과 함께 밤새 울 것이네.
<9>-풀이 던진 질문/이재훈-
계절을 탓하지 말 것. 피었다지는 것은 순간이다. 노을은 경계도 없이 제 몸을 허문다. 그 몸 아래 조그맣게 엎드려 졸고
있는 풀 한 포기. 마치 제 몸을 갉아먹기라도 하듯. 이렇듯 탁월한 빛은 가장 아름다운 노래가 된다. 형형한 눈빛을 가진 젊
은 농부. 검은 나뭇가지의 실루엣, 미망인의 경계심처럼, 풍경은 슬금슬금 조바심치며 온다. 한때는 여자의 육체가 모든 갈
망을 잠재울 수 있다고 믿었다. 머릿속 영상은 늘 어둠이 밀려와 있다. 어둠을 갉아먹는 산속 외딴 불빛 하나.
선량한 바람을 맞는다. 해가 지기 전의 결기처럼 무엇에 사로잡혔을까. 무엇에 놀랐을까. 산속에서 만난 한 사람. 흰 옷을
입고, 울고 있는 한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났을까. 머리를 숙이니 나를 빤히 보고 있는 풀 한 포기. 하늘거리며 바람 속으로 제
피를 흘리고 있다.
<10>-황금의 입/이재훈-
바람이 불면 이별하겠다
바람이 온몸을 휘젓고 나가야
간신히 나지막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꽃이 피는 것엔 이유가 없고
나의 욕망도 이유가 없다
배려는 늘 사람을 고뇌하게 만든다
그대와 나 사이
팽팽한 거리만 있었다면
나는 당신을 사랑했을 텐데
언제부턴가 몸속에 나비를 키우며 산다
싱그럽고 건강한 몸 내음에 취한 나비 떼가
몸속에서 팔랑거린다
제 몸속 나비 한 마리가 다른 몸을 찾아가는 일을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내 몸에 한 마리의 나비만 남을 무렵
그 퀭한 광야를 품고 다니는 저녁
움직임 없는 구름의 속도를
무슨 까닭으로 이리저리 책망할까
숲의 교훈도 무력하고 늦은 햇살의 위로도
눈이 따갑기만 하다
겨울이 넘어가고 있었고
신비한 그림자만 남았다
침묵하는 입술만 씰룩대었다
<<이재훈 시인 약력>>
*1972년 강원도 영월 출생.
*1998년《현대시》로 등단.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문학동네, 2005)와『명왕성 되다』(민음사, 2011).
*기타 저서 『현대시와 허무의식』『딜레마의 시학』『부재와 수사학』등.
*인터뷰집 『나는 시인이다』.
*현재『현대시』 부주간이며 중앙대와 건양대에 출강.
-《현대시》2014년 5월호
출처 : 詩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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