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스민 향기는 어두운 두 개의 콧구멍을 지나서 탄생했다 / 조말선
피가 번질까 봐 테두리를 그렸다
바닥으로 떨어질까 봐 바닥으로 내려놓았다
너를 만들고 보니 더 외로워졌다
매달리면 추락을 염려했다
장미는 나와 같이 피지 않았다
맨드라미는 혼자 흘러내리고 있었다
재스민 향기는 어두운 두 개의 콧구멍을 지나서 탄생했다
테두리를 그리자마자 지울 궁리를 했다
입구를 원하는 자가 생기자 출구를 원하는 자가 생겼다
남겨둔 부분에 대한 연구는 성과가 컸지만
남겨진 부분이 계속 나타났다
손가락이 사라지도록 장갑을 꼈다
얼굴이 지워지도록 모자를 썼다
삭제키를 눌러서 모두 지웠다
강물은 어둠 속에서도 바닥이었다
노을은 너무 멀어서 계속 남겨졌다
문을 열었지만 문 안에 있거나 문밖에 있었다
늪에 다다랐지만 전망대에서 조금도 나아가지지 않았다
열정과 늪은 한통속이었다
차들이 지나갔다
햇빛이 지나갔다
히아신스 향기가 매우 빨리 지나갔다
나는 계속 지나가고 있었다
남겨진 부분에 대해서 연구하고 싶었다
식구들이 흩어질까 봐 액자에 끼웠다
식구들이 나와 벽 사이에 끼여 있었다
싱크대에 가까워질 때 식탁에서 멀어졌다
꽃들은 피었지만 꽃나무에서 멀어졌다
네게서 멀어질 때 내가 가까워지는 것은 분명히 있다
겁탈을 꿈꾸며 독서를 했다
칼이거나 향료이거나 얼음이거나 반란이거나 아름다움이거나 독이거나
돋보기의 도수가 올라갔다
노을은 사라졌으므로 탐구가 중단되기 일쑤였다
강물은 다시 푸르렀다
검푸른 얼굴들이 마주보았다
서로 어두워지고 있었다
비를 좋아하면서 우산을 펴는 것은 멜로다
더 이상 우산 밖으로 손바닥을 펴지 않기로 했다
흘러내리는 생각을 턱이 뾰족하게 깎아냈다
손바닥으로 턱을 떠받칠 때 손바닥의 생각은 섞이지 않는다
여름은 빽빽해졌다
여름은 벌레처럼 단어들이 창궐했다
명쾌한 명사는 점점 수식어가 많아졌다
당신의 아름다운 눈을 찾기 위해 수식어를 헤치고 나아갔다
당신의 눈은 점점 깊어졌다
나는 구 번 트랙을 돌며 당신의 아름다운 눈을 노래했다
당신은 구 번 외의 어느 트랙도 거부했다
나를 재생하고 재생했지만
당신은 나를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수상소감] 당신이라는 장소를 탐하며...
언젠가부터 사람이라는 장소성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만나러간다. 누군가와 가까워진다. 누군가와 멀어진다는 일상어를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사람은 정지하기도 하고 움직이기도 하며 변화하는 장소입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만나면 싫든 좋든 탐험을 시작합니다. 흥미가 떨어지면 곧 중단되기도 하지만 사람과의 관계는 거대한 장소의 탐험인 것입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성실한 자세로 그 장소를 파고들어 가는 방법이 있는가 하면 단번에 일별하는 직관의 작용도 믿을 만합니다. 한 아름에 안기는 그 좁은 장소는 생각보다 쉽게 정복되지 않습니다.[나]라는 장소는 또 어떻고요. 엄밀히 말하면 정복은 목적이 아닙니다. 나와 나의 관계, 나와 너의 관계의 지속에서 빚어지는 잡음의 탐험이 오히려 맞는 말이겠는데 그 지리멸렬을 즐기는 한 방편으로 시를 쓰고 있습니다. 시라는 장소를 탐험하며 사람을 조금 더 깊숙이 파고들어 가는 느낌이 듭니다.
지금 살고 있는 곳은 참 낯선 곳입니다. 동네야 다 그렇고 그런 곳이지만 낯익은 사람이 없다는 뜻에서 그렇습니다. 굳이 낯익은 사람을 만들고 싶지 않은 마음은 무엇일까요. 낯선 동네에 오고 보니 사람 생각이 납니다. 멀리 있는 사람들을 찬찬히 살펴보게 됩니다. 뚝 떨어져 홀로 있는 나를 찬찬히 살펴보게 됩니다. 사람은 장소이되 움직이는 장소라서 필요할 때마다 가까이 끌어당겨 들여다봅니다. 나를 들여다보는 일조차도 버겁습니다.
이즈음에 상을 주시니 감사히 받습니다. 독설이 취미인 세드나 식구들은 마음껏 악담을 늘어놓겠지요. 그 악담 때문에 집에 돌아가서는 모두 빠드득 이를 갈았다는 걸 아는 사람은 알겠지요. 서로서로 질투의 화신이라고 으르릉거리는 모습들이 든든합니다. 솔직한 비판이 무심한 덕담보다 정이 깊어졌습니다. 시는 몰라도 시인 이름은 아는 김삼경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갈 길이 먼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주요약력
- 1998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당선,
- 시집 『매우 가벼운 담론』『둥근 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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