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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지의 밤 / 서재진

 

이누이트의 외투 깃마다 빡빡한 바람이 들이 닥친다

당신 어서 도망가라

 

내뱉은 말 모두 시퍼렇게 얼어붙어 입김이 되는 땅

부끄러운 고백이 당신 입술 녹일텐데, 그렇다면 추워서 어디에도 가지 못할 텐데 칼이 침엽수처럼 돋아날 텐데

 

노파가 어린 사냥꾼에게 설화를 전하는 밤이다

부모를 죽인 자식이 당신 가슴팍에 살고 있다고 아니 당신은 짐승 한마리도 건드려본 적 없다고, 사실은 얼어붙은 땅 위로만 걸어다닌다고 당신은 발자국이 없는 사람이라고

올가미와 칼을 든 사람들이 바람의 역방향으로 서서 소근거린다

말하지 않을 게 당신을 찾지도 않을 게벙어리와 장님이 연애하는 것처럼

 

바람도 방향도 없이

 

당신이 태어났을 적 배꼽에서 솟구친 울음

거기서 이 땅의 첫 꽃이 피었다는데

영구동토에는 발자국이 남지 않는 법, 그래서 당신은

발자국 대신 피 한방울 피 두 방울 흘리며 도망 갔다고

 

어린 이누이트가 놓친 늑대, 그 늑대가 새끼를 낳고 새끼 늑대가 자라 어렸던 이누이트의 자식을 잡아먹을 때쯤

 

내가 무사히 노파가 된다면 이야기를 전하겠다

 

바람의 역방향으로 해가 진 밤이다

극지에서 적도로 날아가던 날짐슴이 물에 빠져 죽은 밤이다

벙어리와 장님이 서로 입술만 더듬던 밤이다

 

꽃 피는 것을 본적 없는 사람들이 모피를 입고 짐승을 사냥한다

아니 혹은

꽃 지는 것을 느낀 적 없는 짐승들이 모피의 냄새를 따라 사람을 사냥하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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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의 커튼콜 / 육호수

 

   살점 없는 십자가를 왜 바다에 던지나

 먹다 만 빵을 바다에 던지면 새들이 뛰어들어 헤엄쳤다

 부끄럼도 없이

 아름답게

 

 파도는 내가 버린 얼굴들이었으므로

 나의 해변은 항상 모래성보다 먼저 폐허였다

 알아들을 수 없는 농담처럼

 내게 맞지 않는 신발들만 밀려왔다

 

 썰물, 모래 위엔 두마리의 물고기

 젖은 이불을 덮어주면 끝없이 불어나며 파닥였다

 집에 돌아와도 파닥파닥, 끝나지 않는 커튼콜

 

 짠바람 먹은 베개 밑에 칼을 묻고

 아무도 아이를 배지 않는 이불을 덮었다

 잠을 깨지 않는 얼굴들 일흔명을 일곱번씩

 집에서 몰아냈다

 일흔번째, 일흔의 일흔번째에도 파도가 왔다

 

 그러다 내가 먼저 잠이 드는 날이면

 모르는 사람 잠에서 깨어 해변에 나무를 심었다

 잠든 내 머리를 빗기면

 조용히 나무가 자라고

 나무에 새긴 이름들

 산모의 튼 살처럼 갈라질 때까지도

 짝짝짝 끝나지 않는

 

 커튼콜; 신이 떠날 때 우리에게 그림자라는 뿔이 돋아났다

 

 나를 집어 바다에 던지면 검은 개들이 따라 뛰어들었다

 용서도 없이

 아름답게

 

 바다 위 부표를 볼 때면 젖니가 흔들렸다

 구름은 바다의 끝자리에서 뛰어내려 선분이 되었다

 멀어지는 뒤통수처럼 하늘이 돌아눕고 있었다

 

 커튼콜, 내가 살아난 이유를 오래 설명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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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 / 장성호

 

우리는 기다렸다

 

이 길을 통해 그들이 곧 지나갈 것이라는 소식이 있었다 총신을 겨눈 채로 우리는 말이 없고 이따금 수풀이 조금 흔들리는 것으로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믿기로 하면서

 

그들은 언제 올까 묻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었다 매복이었으니까 정적 속에서 새떼가 날아올랐다 평소 같았으면 새를 쏘고 박수를 쳤겠지 새를 맞추지는 않았지만 같이 박수를 치자 말하고 싶었지만 매복이었으니까 우리는 점점 우리라는 보호색을 가진 혼자가 되고

 

빈 길을 응시했다

본 적 없는 그들의 모습을 만들었다 지우면서

본 적 없는 그들의 머리에 아는 얼굴을 붙이면서

 

방아쇠를 당기는 상상을 하면

우리는 모두 죽었던 적이 있는 사람들

 

총신을 겨눈 채로 해가 졌다 그들이 곧 올 것이라고 말해 준 이는 누구일까 생각했다 바람이 불었고 수풀이 흔들렸다 이제 돌아가자, 말하려고 옆을 봤는데 어둠 속에는 가득한 얼굴들 돌아가자, 돌아가자 중얼거렸는데

 

총성이 울렸다

보이지 않는 곳을 향해 총을 쏘면서 우리는 우리에게 너무 쉽게 그들이 되고

 

전추 속에서 밤이 지났다 햇빛이 들기 시작한 숲을 둘러봤는데

아무도 죽지 않았다 죽은 새들이 가득했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박수를 치면서 수풀 속으로 들어갔다

텅 빈 숲이었는데 행군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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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사이클 / 김종연

 

새벽에 부음을 들었습니다 거짓말입니다 의사는 죽은 지 백년이 넘은 환자의 예를 들면서 자신이 죽었다고 믿게 되는 것도 하나의 증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죽은 지 백년이 지났지만 이렇게도 살아 잇습니다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부활이라고 한다면 영원히 사는 것은 증상입니다만 저는 제 손으로 시신을 몇 번이나 수습한 적이 있습니다 운명에 대해서도 잠시 생각해보았지만 깊은 퇴폐의 밤을 보내도 범해지지 않는 삶이었습니다 무언가 저를 이토록 아름답게 만들고 있습니다

 

아이가 있는 창부가 아이를 생각하다 절정을 맞게 되는 것처럼 다 잃고 조금 구하는 일입니다 사랑 없이도 저를 흔드는 비밀은 거의 다 보고 나서야 재방송인 걸 깨닫게 되는 판타지입니다 여자는 이미 낳아버린 아이를 안고 자주 저울에 올라갑니다

 

백년 후의 제가 누워  있는 작은 방 안에서 체념할 수 있는 인생이 아직도 몸을 쓸어주고 갑니다 이 새벽의 몰락과 부흥을 동시에 바라면서 하룻밤 만에 부활하고 이들을 기다린 여자가 되어

 

너는 내가 죽었다는 말에도 눈 하나 깜짝이지 않는구나 백년 전에 죽은 아이가 백년 후의 거짓말 때문에 다시 태어나고 있습니다.

 

 

 

 

심사위원

 

 시 부문 : 손택수(시인), 이영광(시인), 조용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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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로 가는 새벽 / 김응규

 

모기향 위에 개미 한마리가 있었다

나는 무언가에 쫓기듯

잠을 이루지 못했고

천천히 타들어오는 불에

개미는 이따금 놀라했다

펜 끝으로 먹이를 나르는 새벽

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활자들을 배열하는 일을 했다

혼자 불이 켜진 방에는

시간이 혼자서 앞서갔다

나는 가느다란 선을 따라서

개미굴을 구석구석 비집었고

혼자서 알을 낳고 있는 여왕에게

고통의 내용을 읊어주었다

깊고도 짧은 시간을 지나서

나는 먹이를 구하러 가는

일개미를 따라 굴 밖으로 나왔다

빛이 엷게 들어왔다

하얀 접시 위에는 모기향이

재가 되어 가지런히 가라앉아 있었고

개미는 어디론가 사라진 후였다

이대로 괜찮겠냐는

몽롱한 소리가 들렸다

나는

 

종이에 적었다

 

 

 

-《창작과 비평》 2014년 봄호, 제12회 대산대학문학상 수상시 중 1편

 

 

[심사평]

 

우리들은 투고된 700여명의 작품을 나누어 각 3편씩을 뽑아 모두 9편을 가지고 본격적인 논의를 하기로 하였다. 투고자의 정보를 알 수 없도록 이름과 주소, 학교명을 가린 채 진행한 이 첫 번째 작업에서 우리들은 우연히도 3편을 일치시킬 수 있었다. 시를 보는 눈이 서로 다를 줄 알았는데, 논의를 해갈수록 비슷한 점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가운데 2명이 공동으로 뽑은 1편을 한 분이 추천하여 모두 4편을 가지고 최종 심의를 하였다.  

「우선 앵무새 혀 사용법」외 4편을 응모한 분의 표제시는 앵무새의 혀를 펜으로 전환하는 비유적 기법이 매혹적이었다. 한 사물을 다른 사물로 대체하는 시의 기본기를 잘 알고 있는 분이었다. 다른 시「말」에서도 “혀끝에 속력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건”이라는 느닷없는, 그러면서도 상상이 가능한 낯선 진술이 마음에 들었다. 긴 호흡을 통한 긴장의 유지와 균일한 작품성이 장점이었다. 그러나 메시지 전달이 명확하지 않다는 한계에 부딪혔다.

「인력」외 4편을 응모한 분의 시는 행간이 좋았다. 짧은 호흡의 시지만 언어가 행간을 신선하게 뛰어다닌다. 수준 높은 인식이 존재한다. “한 바퀴를 다 회전하는 손잡이는 없다 딱 반 바퀴 돌고 다시 반 바퀴를 되돌아 문이 열리면”이라는 식의 진술이 그렇다. 다른 시 「트랙」은 시간에 의해서 구축되는 인간의 운명을 비유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던진 것과 놓친 것에는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인식에 공감했다. 그러나 간혹 건너 뛴 행간을 되돌아 가야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결국 우리들은 「다음날로 가는 새벽」외 4편을 응모한 분의 작품 가운데, 섬세한 요리의 상상력으로 죽음을 응시한 「동물적인 죽음-Melting pot」와 「가로등 밑」을 당선작으로 뽑는 데 합의하였다. 우선 이 분의 시는 잘 읽혔다. 시행을 따라가면서 심상이 그대로 떠올랐다. 그러면서도 은유가 깊었다. 특히 주목한 시는 「가로등 밑」이었다. 정황묘사가 세밀하고 트릭과 능청, 기대 배반의 말부림이 좋았다. 한마디로 시 읽는 재미가 있었다. “비둘기 한 마리가 차에 치었는데/ 바나나껍질 옆으로 날아가 같은 포즈로 누었다”라는 표현들이 그랬다. 공부를 쉬지 않으면 대성할 분이다. 

공광규 ‧ 이수명 ‧ 이정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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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역사 / 권지연

 

 

심사평
 

 어떤 문학적 장면을 가지고 나타날 것인가. 한 시인의 출현이라는 것이 단지 그의 개인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시단과 문학사의 의미 있는 표정이 되는 것임을 생각해볼 때, 그리고 그것이 더욱이 젊고 도전적인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일 때, 이 기대는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새로이 막 도래한 어떤 장면 앞에 멈추어 서게 될 것인가, 하는 설레임은 작품들을 읽고 심사하는 내내 이어졌는데, 그래서인지 심사는 논의에 논의를 거듭하게 되는 장고 속에 치러졌다.

올해 시부문은 총 278명이 응모하였다. 응모작들 대부분은 이미지의 탄생이나 이의 감각적 포착, 언어의 기쁨들을 적절하게 감지하고 있어서, 무엇이 시가 되는 것인지를 잘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느껴졌다. 다만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응모자들이 선배시인들의 영향에 많이 눌려 있는 점이다. 영향이라는 것은 물론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고, 받는 것이 받지 않는 것보다 정신적으로 풍부해질 수 있는 것이지만, 문제는 영향의 단순한 배치가 아니라 그것이 확장과 변전을 넘어 탈환의 가능성을 얼마나 보여주느냐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최근의 몇몇 젊은 시인들의 어법이나 이미지가 생경하게 감지되고 있는 작품들을 대했을 때 아쉬움이 컸다. 출처를 들고 다니기보다 출처를 뚫고 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논의가 길어진 원인 중의 하나는 응모자의 작품들이 각각 수준이 고르지 않다는 데에도 있었다. 한두 편의 작품이 잘 생겼어도 나머지는 다시 태어나기 위해 좀 더 기다려야할 것 같았다. 따라서 작품들의 고른 완성도와 개성을 겸비한 최후의 1인을 찾기 위해 고심해야만 했다.

1차 심사를 거쳐「중력」외 4편,「불의 리듬」외 4편,「몸 없는 집」외 4편,「폭력의 역사」외 4편,「낙타가 타들어간다」외 4편,「당신을 암기합니다」외 4편을 2차 심사에 올렸고, 이 중「불의 리듬」외 4편,「몸 없는 집」외 4편,「폭력의 역사」외 4편을 놓고 최종 심사에 들어갔다. 논의는 쉽지 않았다. 셋 모두 완성도와 나름의 개성을 갖추고 있다고 판단되었고, 나름의 미흡함이 느껴졌다.

「불의 리듬」외 4편은 물질적 상상력의 기하학적 구성이라는 독특한 전개 방식이 돋보였다. 응결과 도약, 밀폐와 전진, 구상과 추상의 대면과 교차가 인상적이었다. 이 힘의 균형이 장점이라면, 또 한편으로 이 균형을 무너뜨린 속살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일 것 같았다. 잠긴 문이 스스로 열리는 지점까지 더 나아간다면 피가 돌고 힘이 붙을 예사롭지 않은 솜씨로 보였다.

「몸 없는 집」외 4편은 오래 들여다본 언어들과 삶의 풍경들, 단정하고 깊이 있는 성찰로 매편마다 차분한 전개를 하고 있어서 눈길을 머무르게 했다. 언어로 내밀한 호흡을 해온 오랜 내력이 느껴졌다. 앞으로 이 호흡이 좀 더 출렁이면서 위태로움을 무릅쓰고, 가파른 자유를 향해 스스럼없이 나아가기를 지켜봐야할 것 같았다.

당선작으로 선정된「폭력의 역사」외 4편은 거침없고 활달한 언어들이 쏟아져 나와 전투를 치르는 언어의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언어의 물욕, 언어의 사심, 언어의 돌출과 이물감이 사물들을 느닷없이 헤집고 벌려놓는 장면들이 신선했다. 언어가 사물들의 위태로움을 편들고 부유하는 것은 언어가 스스로 사물이 되고 사물의 잉여가 되는 생생한 현장이기도 했다. 비록 이 과정이 함께 수록된 시들에서 이미지까지 부서지고 해체되는 무차별성으로 종종 인도되지만, 이러한 위기와 모험에까지 두루 격려를 보낸다. 새로운 시인의 탄생을 축하하며 큰 시인으로 성장해나가길 기대한다.

 

                                                                             김기택 이수명 이정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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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기가 망설여진다. 스마트폰에 빠진 사람들을 지켜보는 마음이 편하지 않아서이다. 스마트폰이 나오기 전에는 책을 읽는 사람을 간간이 볼 수 있었는데, 순식간에 그런 사람들까지 집어삼킨 스마트폰이라는 괴물을 대학생 예비 시인들은 어떻게 부리고 있을까. 요즘 젊은 시인들이 쓰는 작품과 대학생들이 쓰는 작품은 분명히 구분될 거라는 기대가 모아져, 설레는 마음으로 응모작품을 읽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응모작들이 편차가 심해 같은 사람이 쓴 거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글을 쓰는데 있어 게으름보다 더 나쁜 습관은 조급함일 것이다. 차서 흘러넘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는 조급함이야말로 글을 망치는 지름길이 된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절실하지도 않은 것을 절실한 척 가공해서 쓰는 글은 여지없이 독자에게 들키고 만다. 절실함을 너머 절박함을 가지고 쓰는 글이야 말로 독자를 압도하고도 남을 것이다.

이러쿵저러쿵 설명하기 급급한 응모작과 여기저기에서 기성시인의 시를 옮겨와 짜깁기한 응모작을 만날 때는 가슴이 아팠다. 또한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지나간 길을 택해 손쉽게 시를 쓰는 사람들도 있었다. 자신이 아니면 아무도 갈 수 없는 길을 걸어가야 진정한 시인이 아닐까. 외로움을 견뎠을 때 얻게 되는 쾌감이 진정 시가 아닐까.

반복해서 응모작을 읽는 동안 만들어진 시와 그렇지 않은 시를 분별해낼 수 있었다. 처음 읽을 때는 그럴 듯한데, 읽으면 읽을수록 자연스럽지 못하거나 틈이 벌어지고 아무것도 아닌 것을 포장만 잘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속에서 잘 발효된 이미지를 사용하기 보다는 책이나 영화, 인터넷에서 보고 느낀 조각들을 끌어다 쓰고 있었다. 무의식의 도움 없이 현재의식만으로 시를 쓰다 보니 한계가 드러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상상력은 기발한데 끝까지 끌어가는 집요한 의지가 부족한 작품도 여럿 보였다.

예심에 오른「나는 빛보다 작았다」외,「시계론()」외,「아이다호」외,「기절낙지」외,「눈 오는 전주」외,「산책 하는 이의 즐거움」외, 「뱀눈나비」외, 일곱 명의 작품을 놓고 고심한 끝에「산책 하는 이의 즐거움」외,「뱀눈나비」외, 두 명의 작품을 최종 논의하게 되었다. 앞 응모작은 한 번에 쓰여진 것처럼 자연스러운 반면 압축이 되어 있지 않았고 초점을 맞추는 데도 실패했다. 뒤의 작품은 이미지를 정확하게 포착하여 묘사하는 능숙한 솜씨를 보여주었으나 형식의 면에서 새로움을 보여주지 못했다. 하지만 대상을 집요하게 관찰해서 이미지를 포착해 꿰어 엮는 능력이 예사롭지 않아보였다. 당선작품으로 뽑아도 손색없는 작품이었다.

당선작으로 뽑힌「산책 하는 이의 즐거움」외 4편은 틀에 얽매이지 않은 상상력이 장점이었다. 하지만 함께 투고한 두 편의 작품은 함량미달이었음 꼭 기억했으면 좋겠다. 처절하게 데생도 하지 않고 추상화를 그리는 화가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심사위원들은 당선자의 가능성을 믿어보기로 했다.

 

                                                                                   심사위원 : 고형렬 김소연 이윤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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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도 제9회 대산대학문학상 수상작]

 

수달외 2편

   

        서령

 

 

모음으로 미끄러지는 동그란 것들은 금세 빠져나가요

미꾸라지의 매끈한 언어 속에 담긴 촉감을 사냥하기엔 나는

너무 몸집이 커요 차라리 나를 수증기처럼 가볍게 혹은

푸른 물결 무늬로 만들어주지 그랬나요?

나는 물속에서도 젖지 않는 촉촉한 책

두껍고 작은 소리들을 책갈피 삼아 적들의 습격을 감지하죠

나를 스치는 모래알들의 평온함을 따라

밤새도록 여행하는 것을 좋아해요

내 머리 위로 드리우는 달의 반짝임을 도도하게 쓰고요

내 수염을 튕겨낼 때 나는 열대과일처럼 달아오르죠

사람들은 내가 물속에만 있는 은둔자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비오는 날 지상으로 올라가는 것을 좋아해요

온 세상이 숨구멍을 열어놓은 밤에 평온하게 익어가는

바람의 숨소리로 나의 영역을 표시하는 거죠

나는 물을 좋아하지만 잎사귀를 갉아먹는 여우비,

혹은 나무 밑에 자라는 식물의 꿈을 꾸는 수달입니다

창백한 세상, 어지럽게 굴러가는 눈동자들을 떠올려요

한데 헤엄치며 구르다가 앞발 뒷발 서로에게 내밀다보면

내 작은 수달의 집에 나무 하나 심을 자리 생기지 않겠어요?

 

 

 

나무의 방

 

 

나는 나이테가 달팽이관으로 꿈틀대는 이곳에서 소리를 키우지

내 안에는 발성연습을 하는 성악가가 있어 여름을 핑그르르 돌리지

동그란 알맹이로 삼켰을 때의 간지러움이랄까

비 오는 날 온몸은 피아노 줄이 되어 팽팽하게 긴장하기 시작해

개구리와의 싸움은 생각보다 치열하거든

나는 소리를 데굴데굴 굴려 하나의 줄로 노래하는 걸 연습중이야

내 안에는 작은 구멍이 있어 바람의 통로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지름길이 있지 이 길 위에서 만난 호탕한 개미는 번개를 흉내내고 있잖아

그때마다 천장이 무너질지 모르니 조심해야 한다고 주의를 주었어

내 속눈썹 위에서 파르르 떨어지는 노을은 곱게 개여

감잎으로 물드는 중이야 유리병에 어둠이 담기듯

공기가 새어나오는 저녁이 되어도 나는 잠들지 않아

늘어지는 오페라는 지루하다며 빨리

가을을 몰고 온 옥수수수염의 지시에 따라

차곡차곡 쌓여 있는 푸른 수염을 허무는 중이거든

당분간 휴업을 선언한 매미를 감시할 예정이야

 

나무의 방에

볼일이 있으신 분은 발밑에 떨어진 잎사귀에 메모를 남겨주세요

 

 

 

카프카도서관

 

 

구름이 뱉어내는 우레소리가 심상치 않다

나는 오늘도 내 영혼이 깃든 도서관으로 간다

오래 묵은 책의 첫 페이지를 열자

누군가 밑줄 그어놓은 연필심냄새가 아찔하게 좋다

예쁘고 화려한 책 속에 나를 가두고

부패한 하루를 구겨넣는다

창밖으로 비의 그림자가 바람을 몰고 나올 때

나는 책의 오솔길을 따라 산책을 나선다

 

책갈피에서 나는 소멸의 냄새들,

나는 이곳에 꿈과 설렘을 코끼리 발자국처럼 묻는다

밤이면 책들이 울울창창한 관목숲이 되는지도 몰라

내 몸에는 햇살과 바람 그리고 여우비의 숨결이 있다

보름달이 풍경을 갉는 나비의 애벌레가 되고

박쥐들이 햇볕의 젖이 좋아 꿈을 꾸는 이곳은

카프카의 도서관, 언제나 고독의 그림자만 가득하다

그러나 내 안에는 식물성과 육식성의 욕망들이

뿔을 맞대고 있는지 그것들이 힘을 뿔끈 쓸 때마다

나는 『변신』의 그레고리의 삶을 떠올리는 것이다

 

창밖에는 다시 햇살이 잠자리 날개처럼 날카롭다

나는 푸른빛 어스름의 글자들을 배불리 갉아먹고

책을 덮듯이 내 얼굴을 도서관에 처박고 낮잠에 든다

 

 

- 『창작과비평2011.봄호

 

 

* 이서령 :1991년생. 서울예대 문창과 1학년 재학.

출처 : The Poet`s Garden
글쓴이 : 고드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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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잎이 뜨는 방 외 2편

                        

              배성현

 

 

새벽안개 속에서 물살은 포복을 감행한다

그 집에 닿자마자 벽을 긁는 차가운 수면

오차 없이 불어난 강물의 발육을 기록한다

수목 예정지구의 버려진 방안에 숨어, 오늘도

숨을 쉬는 남자, 크리넥스 휴지 한 장을 집어

흰꽃을 접는 일로 물안개 낀 뿌연 아침을 연다

남자의 얼굴에 원무와 수납계원이 새겨놓는 독촉의

입김은 마른 땅을 삼키는 강물의 이빨보다 사나웠다

치유를 거부하는 여자의 몸은 그래서 남자의

발목에 채워진 서늘한 수갑 같았다

강물 속으로 허공의 한 귀퉁이 꺼지는 소리

폐옥에 몰린 그들을 위협할 때마다 여자는 머리의

모공을 활짝 열어 죽음의 시간을 앞당긴다

여자의 머리에서 뽑힌 검은 모발이 기구한

흔적만 남은 남루한 장판을 어지럽히면 그림 속

연필 선을 집어올리듯 남자는 몸을 잃은 머리카락을

하나씩 쥐어 마른 입술 사이에 문다

여자의 몸속에서 호흡의 선율이 낮아지는 잠

수몰을 노리는 강물의 그들의 방을 포위한다

남자는 여자의 죽음이 두려워

입속에 문 머리카락을 천천히 실패에 감고

더 이상 감을 것 없는 실패를 겨드랑이에 품고

휴지를 뽑아 계속 똑같은 꽃만 접는다

새벽녘, 수면이 뱉어내는 낮은 음성을

꽃잎의 감촉으로 견뎌내고

그들이 방 안에 들여놓은 유일한 비키니옷장 하나

허기진 뱃속을 마른 수의 대신 흰 꽃잎으로 채운다

문턱을 넘어서면 바로, 남자의 발등을

움켜쥐는 서늘한 물의 관절들이 있다

물에 잠긴 남자의 구두속에 알을 털어낸 민물고기

구부렸던 허리를 펴고 몸을 흔들며 강물 속으로 사라진다

새로 품은 알의 부피만큼 더 큰 몰락의 기쁨을 핥아가는 강물은

문턱을 향해 가늘고 긴 손가락을 뻗는다

강물이 방안으로 밀려들어 여자의 몸을 축축하게 적신다

남자가 비키니옷장의 지퍼를 가르는 순간

방 안을 점령한 얕은 수면 위로 흰 꽃들이 터져나온다

자신의 낡은 혁대를 풀어 여자의 시신을 허리에 매다는 남자

물속에 발을 담그고 천천히 방문을 나선다

여자는 바람의 숨결에 접착된 봄나방처럼 방 안의 꽃잎을 이끌고

가볍고 부드렵게 물살에 떠가고

수면 아래 부력의 법칙을 배반하며 서로의

무게로 서서히 가라앉는 여자와 남자

그들의 부피를 품어 수위를 높인 강물은

폐옥을 넘어 어둠 속 달빛에 닿기 위해 손톱을 세운다


 

꽃살문


여자의 팔과 다리는 발육의 증거가 아니라

퇴화의 흔적이었다 그녀의 손발은 미친 여자의

자궁 속에서 태양의 흑점에 닿은 적이 있다

태양의 표면에서 꼿꼿이 직립하던 원시의 불꽃들

바람의 입김처럼 날아 그녀의 팔다리에 달라붙었다

접촉이 뜨거움이라는 것 아는 달팽이 촉수처럼

밖으로 내밀지 못한 만큼 몸속으로 파고든 그녀의 팔과 다리

그녀만 아는 내밀한 꽃길이 되어 몸 안에 열렸다

입속에 달을 물고 침만 흘리던 모자란 연수아재

그녀의 몸을 품고 들개처럼 후각을 열었다

꽃길을 찾아내어 수눅선 세운 발끝으로

사박사박 걸었다던 연수아재

두 마리 새가 넝쿨로 서로의 부리를 묶어 시간의

태엽을 감는 동안 연수아재 입속에 고인 침이

원시림의 빗물처럼 흘러 그녀의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녀 안의 꽃길은 물방울의 힘줄로 생성된 석화동굴처럼

온난한 공기를 품고 은밀하게 깊어져갔다

팔다리가 없어 발톱도 손톱도 없는 여자

그녀의 기쁨은 오직 머리카락으로만 자랐다

달만 알아 모욕과 구박의 설움만 훔치던 연수아재

꽃길과 이어진 내밀한 굴속에 숨어

그녀의 내부를 끌어안았다

바람이 새들의 저격을 노리고

새들의 부력으로 갈대가 눕는 겨울

그들은 무너진 암자로 갔다

떨어진 문짝에는 봄꽃만이 푸르렀으니

연수아재, 꽃살문의 안팎을 바꿔 달았다

팔다리 없는 그녀의 배는 먼지 낀 꽃밭에 누워

지구를 공전하는 태양의 둘레를 닮아가고

연수아재, 그녀의 긴 머리 잘라내어

겨우니 아기의 검은 배냇저고리만 짰다

그녀의 몸 안에 생성된꽃굴 속에서

아이와 함께 자라나는 연수아재

꽃망울 속에 잎을 숨긴 성긴 겨드랑꽃눈이 되었다

화분을 마치지 못한 봄날의 벌과 나비들이

꽃살문 바깥으로 달라붙어 밤새 날개를 태우고

말을 잃은 꽃들은 온몸을 흔들며 수화를 나누었다

꽃들의 묵음은 그렇게 향내가 되어 천천히

겨울의 차가운 폭설을 지우고 있었다



 

그들의 피부호흡법


강물의 허리를 자르고 발끝을 세워 수심을 짚어가는 꽃제비들

그늘의 남루한 옷 속에는 그들도 모르는 피부가 숨쉬고 있다

어둠을 찌르는 탄환 한발, 막 총구를 빠져나온

저 너머의 비명이 강물의 허공을 뒤흔든다

생생한 죽음의 육성을 들으며 두 눈을 감았다 뜨는 소년

골반에 고요한 수면을 걸친 채 온몸을 부르르

떨다 강물에 오줌을 섞는다

온기에 굶주렸던 담수어들 차가운 아가미를 벌려

소년의 사타구니 사이로 서서히 몰려든다

그림자를 흘리며 다가오는 것들

소년의 입속에 맺힌 물방울들 하나씩 지워가고

두려움에 눈뜬 꽃제비의 혓바닥은

마침내 단단하게 굳어 묵직한 사슬이 된다

입 밖에 낼 수 없어 딱딱한 혀끝을 삼킨 그들

위 속에 닿은 침묵의 결속이 풀릴 때까지

양서류의 피부를 벗을 수 없다

근시의 눈으로 앞서가는 형의 등허리에

촘촘한 시선을 박음질하는 소년

멈추지 않고 느릿느릿 강물을 건너다보며

발가락 사이로 불갈퀴 돋아나는 것도 모른다

국경선을 지우며 위태로운 강물을

횡단하기까지 허기는 초침이었던 것

굶주린 어머니가 소년의 메마른 호물을 물어뜯어

새로운 피부를 일깨울 때마다 그들은

피부호흡으로 지상의 마른 공기를 깨달아갔다

어둠을 떠가는 구름처럼 거부도 모른 채 입을 다문 소년들

하반신을 차가운 강물과 맞바꾼 채

비늘을 잃은 수십마리 물고기떼 거느리고

물속의 어둠을 휘적휘적 헤쳐 간다

혈관을 흐르는 슬픈 귀소본능으로

국경 너머 샛길을 외면하고 집으로 돌아와야만 하는 꽃제비들

수도 없이 국경을 넘나들다 변종이 되어버린 그들은

하루의 절반을 음지 속 양서류의 마음으로 산다

 

 

출처 : The Poet`s Garden
글쓴이 : 고드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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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동자승, 주지스님 따라 계곡 갔다가 맑은 물 속 흐르는 얼음 보고 깜짝 놀란다. 경을 외지 못해 졸던 계절은 그해 겨울의 선율이었고 눈 쌓인 대숲이 딱, 분별 꺾으며 만들던 화음이었다. 예끼 이 녀석, 전생에 무엇이었길래 이리 말을 안 듣는고? 스님, 스님, 난 전생에 계곡물이 콸콸 흐르는 물소리였어. 어린 부처가 웃는다. 그리고 폭설(暴雪), 절이 완벽하게 고립된다. 걱정스런 표정으로 총무가 핸드폰으로 여기저기에 연락을 취하며 안절부절 못하는 사이 동자승은 경내에 가만히 앉아 풍경 끝에 맺히는 이슬을 멍하니 바라본다. 한 방울의 맑은 음악은 자기 속에 주위의 모든 세상을 담아 둥글게 감싸고 있었다.

 

  - 제7회 대산대학문학상 시부문 수상작

출처 : 악마의 번뇌_ 올바르게(身,言,書,判)
글쓴이 : 그리운 하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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