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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대산대학문학상 수상작-베로니카 외 3편

 

 

베로니카*/박채림

 

 

  우리는 애초에 하나의 몸이었다. 아니, 몸짓이었나?

 

  나는 당신 손등에 잘못 그어진 흉터. 지난밤 꿈에 길게 칼자국을 남긴 얼굴 가린 귀신. 당신의 잘 웃지 못하는 왼쪽 입꼬리. 저장도 안하는 참 못 나온 쎌카. 당신이 태어날 때 처음 보고 놀란 그 환환 빛처럼, 나도 버튼이 잘못 눌린 복사기에 얼굴이 끼었을 때 태어났어요. 그 환환 빛 말이죠. 내가 어머! 하고 부끄럽게 비명을 질러보았는데요. 그 순간에도 나는 스무개, 서른개로 늘어나고 있더란 말이죠.

 

  우리는 죽은 쥐들과 귀신 들린 인형과 벌레들이 우글대는 베개 등등. 캄캄한 지구에서 신나게 달리기를 하는 중이죠. 시든 꽃을 들고 제일 먼저 당신에게 도착하면 신나서 팔짝팔짝 뛰어올라요. 잘못 도착한 세계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이방인이네요. 누군가 우리를 제자리에 돌려놓기 전에 최대한 수줍게 웃으면서 악수 청하는 포즈를 취하고 있어요.

 

  깜찍한 상상들 지겨워요. 우린 그냥 하나의 소문일 뿐인데요 뭘. 내가 나랑 또 나랑 나들이랑 손에 손잡고 귓속말로 내가 누구인지 수소문하는 동안 살비듬이 떨어져나가듯 내가 또 한움큼 세상에 나동그라졌어요.꽉잡아. 이런 말할 새도 없었죠. 스무개 서른개씩 나는 어제도 오늘도 나를 왕창 흘리고 다녔어요.

 

  저기 사납게 쏟아지는 빗방울 보이나요. 저 신나게 튀어오르는 물의 분열증. 창밖을 서성이며 호시탐탐 안을 노려보는 형형색색의 눈동자들. 깨어지고 다시 손잡기놀이 하며 소리 지르고 웃고 울고 발악하는 한바탕 술래잡기. 수없이 얼굴 바꾸며 쏟아지고 지워지는 지구의 상상. 나였는데 다시 보니 당신이었고 또 그였으며 이젠 그녀였는데 알고 보니 다 나더라 아니 다 당신이더라 하는 물기 어린 장난말.

 

  저기 찌라시 같은 내가 보이네요. 그래요 우리는 애초부터 과대광고였어요.

 

 

*끄시슈또프 끼에슬롭끼 감독의 영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맛있는 입술/박채림

 

 

   

  나를 만져봐도 괜찮아요. 경멸하는 얼굴이라면 나쁘지 않겠지만 당신의 부끄러운 표정은 견딜 수가 없으니 그냥 무심하게 만져보세요. 간지럽지 않아요. 할퀴거나 하지 않을게요. 우리 주인님 손톱 끝에 매달린 무수한 눈알들은 매번 붉게 충혈되어서는 도로록 도로록 빨주노추 검은자위를 굴리고는 했는데요. 내 털을 헤치고 맨살로 만져지는 시선들 때문에 나는 밤새 간지러워서 몸서리를 치곤했어요. 그러니까 이 정도는 괜찮아요. 뭣하면 보답하는 뜻에서 오늘밤 부엌 창문을 살짝 열어두는 것도 좋겠네요.

 

  나는 그냥 고양이고요, 두 개의 코트를 입고 있어요. 얼룩말과 겨울 하늘이 교차할 때마다 밤과 낮이, 어제와 오늘이, 주인님과 당신들이 자꾸만 몸을 바꿨어요. 무수히 내 몸을 애무하는 당신들과 주인님과 얼룩말과 겨울 하늘이 가난한 표정을 내 몸에 돋을새김할 때마다 나는 몇 번이고 기꺼이 죽었어요. 그러고는 꿈 한자락에 내 웃음소리를 묻혀갔잖아요. 주인님과 당신들은 자꾸만 악몽이라고 나를 원망했지만요.

 

  주인님이 풍선 불 듯 내 항문에 공기를 불어넣어요. 말랑말랑한 내 몸이 애드벌룬처럼 마구 부풀어오르네요. 생선 비린내 진동하는 내 얄미운 입술에 입 맞춘 주인님 때문에 나는 또 간지러워서, 둥실둥실 떠올라요. 발밑의 지구는 슬프고 황홀한 오렌지빛이에요. 바닥에서 올려다본 하늘과 비슷한 모양새라서 더 슬픈걸요. 저기 긴 실타래 풀고 있는 주인님의 얼굴이 보여요. 따뜻한 달에 입 맞추려고 나는 더 높이 높이 떠올라요. 주인님의 저 순진한 눈알들이 보이나요. 저 슬픈 상상들을 포식하는 달의 작은 입술에선 벌써부터 달콤한 냄새가 나요. 부럽다고 데룩데룩 소리치는 눈알들은 사실 내 뱃속에 모두 있어요.

 

  나를 만져봐도 괜찮아요. 내게 입 맞춰도 괜찮아요. 창문은 아무래도 좋아요. 내 분홍색 배를 뒤집어 귀를 대봐요. 괜찮아요. 세상에 맛없는 욕망들도 있는 법이죠. 달도 눈알도 악몽도 모두 내 뱃속에 집어넣고 휘휘 저었어요.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런데 저기요. 뭣하면 그 입술 잠깐 베어 물어도 괜찮나요. 아주 잠깐인데요 뭐. 아주 짧은 키스라고 생각하면 되는걸요. 네. 아주 잠깐만요.

 

 

심사평(349명 응모)

자기세대의 분열증을 21세기적 감수성으로 재기발랄하게 그려

 

시 쓰기에서의 넉넉함이나 새로움을 운문적이냐, 산문적이냐 하는 관점에서 살펴볼 일만은 아니다. 시인은 자신의 이미지를 통해 우리에게 세계와 우리들 자신에 관해 무엇인가를 말하는 셈이고, 그 ‘무엇인가’는 우리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진실로 밝혀준다. 시는 단순한 운율이 아니라 구체적 알맹이인 리듬, 즉 이미지로서 존재한다. 때문에 시적 이미지의 본질적인 새로움은 말하는 이가 존재의 창조성을 얼마만큼 실현했느냐가 중요하다. 운문적 형식이든 산문적 형식이든 자신의 절실함을 빼어난 이미지로 형상화하여 시적인 것에 도달한다면,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에서 서로 어긋난다 하더라도 그 모두는 오늘날 시의 성취가 될 수 있다.

 

제6회 대산대학문학상 시부문에 응모된 작품들은 지난 해와 마찬가지로 시의 산문화가 큰 흐름을 차지하고 있다. 젊은 대학생들은 온갖 욕망들이 들끓는 도시 속의 삶 사이에서 발생하는 디스토피아적 세계를 산문적 형식으로 고문하고 비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쓰기일수록 자신만의 내면화된 기법이 요구되며, 개체적 존재의 세속성과 욕망의 미세한 균열을 자신의 시속에 드러낼 수 있는 변별력 있는 목소리가 요구된다.

 

심사는 지난 해와 마찬가지로 예심과 본심을 통합하여 진행하였고, 1차 심사를 거쳐 압축된 13명의 시들이 본심에서 논의되었다.

 

당선작으로 결정된 박채림(서울예대 2학년)의 「베로니카」외 3편은 언어의 세공이나 시적 개성의 새로움에서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 시인은 재기발랄하고 그로테스크한 발상을 잘 아우른다. 자아란 상충되고 보완되는 다발들을 모아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피해의식에 물들지 않은 21세기적 감수성으로 전해준다. 우리는 허위적인 세계 속에서 상충되는 여러 자아들에 눌려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특히 「베로니카」는 자기 세대의 분열증이 전 세대와 어떻게 다른지 그 변별점을 인상적으로 그려나간다. 버튼이 잘못 눌린 복사기에서 토해져 나오는 ‘찌라시’로 비유되는 이 세대의 분열증은 “잘못 도착한 세계에서” ‘소문’이고 ‘이방인’일 수밖에 없으나, 그것은 내면의 어둠을 확 벗어던진 발랄한 감각에 의해 구성된다. 가령 다음과 같은 구절이 그렇다. “저 슬픈 상상들을 포식하는 달의 작은 입술은 벌써부터 달콤한 냄새가 나요. 부럽다고 데룩데룩 소리치는 눈알들은 사실 내 뱃속에 모두 있어요”(「맛있는 입술」). 그러나 이 시인의 작품들에서 보이는 감각들은 안으로 응축되지 못한 채 가볍게 떠오르는 경향이 있다. 시는 감각적인 쾌감도 중요하지만 그 단계를 넘어설 수 있는 자신만의 세계에 대한 깊은 깨달음과 울림을 간직할 수 있어야 한다. 앞으로 자기의 감성을 살리면서 시적 조화를 심화시켜나갈 새로운 방법에 대해 고민해야 할 것이다. 어느 시인의 말대로 “참된 자아가 언어를 찾아 말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눈부신 사건이 된다”(테드 휴즈)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한편 당선작과 끝까지 자웅을 겨룬 각기 다른 응모자의「바람실」과 「수화를 듣는다」는 서정시의 정수를 보여주는 감정을 뜨개질하는 솜씨가 뛰어나고 안정된 시적 품격을 보여주었으나 익숙한 세계를 벗어나지 못해 안타깝게 밀려났다. 또한「악몽」은 언어유희에 바탕을 둔 발랄한 상상력이 장점이었으나 테크닉에 머문 한계가 지적되었다. 수상자에게는 정진을, 응모자 여러분께는 건필을 기대한다.

 

 

- 심사위원 : 김승희 김정환 박형준

  

출처 : (사)충북시를사랑하는사람들
글쓴이 : 반소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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