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樂器  (외 4편)

  

한 그루 소리에 매인 가지들이 문을 닫고 모든 소리는 사라지는 쪽으로 옮겨 간다

이때 현은 끊어져 있다

 

줄이 끊어진 악기가 벌판에 오래 서 있다

바람이 열리지 않는 소리를 두드리다 돌아가고

전정剪한 가지들 빈 틈마다 음표들이 돋는 봄이 되면

푸른 손들이 현에 달라붙을 것이다

조만간 날아오르는 소리를 내는

악기가 될 것이다.

 

화두話頭가 방음에 붙어 녹슬어 가고 있다

 

미처 감기지 못한 짧은 탄성이 내는 계절

되돌아오지 못하는 소리를 잘라

귀를 키운다.

공중조율에는 실음이 손끝에서 버려지고

연주가 없는날, 적요한 햇빛만 무음으로 가지를 휘고 있다

현이 돋아나는 날씨

공명이   몰려오는 곳으로 꽃들이 졌다

 

소리가 여럿이 되는 무렵

수십 줄의 현에서 검은 음이 떨어져 넓어질 것이다.

지난 겨울 부러진 가지 들에는 불구의 소리가 있고

단단해진 목질의 내부에

무기 가득한 악보가 길다

 

소리를 모으는 곳은 가지 끝이 제격이지만, 가장 높은 음은 가장 먼저 끊어지기도 하여

흩어지는 곳 또한 가지 끝이 제격이다

 

 

 

 

 

흩어지는 방식

 

새의 흔적에 나무들이 긴 회랑처럼 앉아 있다.

 

혼자 타는 나무는 없다.

 

물기가 날아오르며 연기를 흉내 내는 나무들

혼자 날아가는 구름은 없다

여러 개의 방을 거느린 직선의 저택에 숨어 있는 것과 열린 것이 함께 있다

아궁이 저쪽이 꼭 방은 아닐 것이고

울음을 보태는 곳이 꼭 아궁이 앞만도 아닌 것처럼

아직 젖어있는 것들의 흩어지는 방식이지

 

부친의 방들이 타이머 안에서 잘라지고 마르고...

문 저쪽에서 재가 되어 나올 때까지

양쪽의 세상에 마음을 두고 흐느끼다 그치다 연기처럼

내 몸에 첫 불을 밀어 넣을 때를 생각하는 시간

 

제일 뜨거운 곳은 눈일 것이라는 확신.

나무는 어느 방에 불을 키우고 있는지

가장 불붙기 쉬운 잎들은 다 털어버리고 있는 철

그 틈 틈을 열어

구름을 채워 넣고 있는 시간

첫 불 앞에서는 혼자 우는 울음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

 

연기는 구름의 흔적이라고 필기된 나무의 그늘 한 장을 오래 보관하고 있다

그곳에서 물의 냄새가 났던가

희고 넓은 연기에다 나도 첫 문장을 적는다.

맨 처음 한 줄,

첫 불 들어가는 빈 방이 있다.

 

 

 

 

타워크레인

 

잣나무 밑동에 사다리가 걸쳐져 있다.

작년 가을, 이氏 아저씨 마지막 나무에 오른 흔적이다.

흔들리는 공중, 마지막 잡았던 힘

걸어서 내려오라고 누군가 치우지 않은 길이다.

꼭대기에 열매를 달아놓는 습성

사람을 겨냥한 나무의 비책 같다.

 

사다리는 나무의 飛階쯤 될까

신갈에서 용인 가는 어디쯤 중단된 공사장

타워크레인 꼭대기에 승강기가 매달려 있다

자본의 열매가 하나 둘 떨어져 오르내리는 것을 잃은 크레인

이氏 아저씨는 잣나무 밑동쯤에

직립을 거두어들이고

사다리를 비워놓았듯.

 

나뭇가지 물어 나르던 새들 집은 늘 비어있다

半月은 빈 달이 아니듯

나무는 새 열매를 얻어 계절을 채워갈 것이고

높은 곳은 비어있는 때가 많아 空中.

 

지상과 몸 바꾸며

계절의 이름을 만들어냈듯

없는 사람을 따라간 계절은 간절기쯤 될까

누군가 잡고 흔드는 듯 공중이 세차게 흔들리고 있다.

 

 

 

 

뒤늦은 관계

 

날아오르지 못한 소리들 틈에 귀를 꽂습니다. 움직이는 것이 늘 소리는 아니었지요. 귀를 넣기 전 벌써 닿아버린 소리 시제를 고칠 겨를이 없습니다.

꽃잎이 깨져

겹겹의 잎들이 날리는 봄날의 허공

모든 색은

깨진 곳에서 흘러나오는 것이겠지요.

 

 공중에서는 불규칙이 규칙일 수 있습니다. 천둥은 번개 속에서 걸어 나오고 비행운은 소리르 바삐 비행시킵니다. 귀르 움직여야 소리를 잡을 수 있지요.

 

붉은 색깔과 한 얼굴은 서로

안면을 모르는 관계이겠지요.

 

땅에서는 경적 음을 알아차리기 전, 마찰음으로 닿는 때가 많아서 비행운이 끌려가지 않고 남아 있습니다.

슬픔은 스프레이로 뿌려지고

오래 일어나지 않아 지워지갰지요.

 

 

 

 

인저리 타임 

 

터널 입구, 인저리 타임이 주어진다

후반전까지 무승부, 터널 안에서 치러진 3분

터널 빠져나오는 데는 4분,

승부수는 터널 밖 봄날이었다

잎들이 긴 수액의 터널을 지나서 가지 밖으로 혀를 내밀고 있었다

 

장자의 꿈처럼 지난 가을 터널 지나온 것 같은데

밖은 봄이 되어 있었다

 

산 것을 위한 생석회 분사는 늦가을부터 봄까지 이어졌고

두문불출의 시간은 결국 산 것들을 향한 권면의 시간

그 모두를 건너 오늘 오일장이 섰다

곡식들, 마른 고추들이 지키던 낯익은 좌판에는

이른 봄 것들이 나와 앉아 있다

그 한쪽, 메두즐 각진 모서리마다 겨울 칩거들이 발효되어 있고

팔려나가지 못한 것들이 장 바닥에서 난처한 하루를 계량하고 있다

 

인저리 타임도 끝이 나고, 장날도 저물고

장자의 꿈은 다시 어느 터널 속으로 들어가게 될까

하루를 계량하던 계량법으로 그 꿈을 계량하면

지난 겨울은 가장 긴 터널, 4분이었을까

 

난처한 봄날, 잔설이 어제 묻힌 송아지 얼룩처럼 곳곳에 박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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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풀밭 위의 식사*를 할 수 있을까요 (외 4편 )

  

    마지막 고해는 6개월 전이었습니다 (당신의 얼굴을 못 본 것은 수십 년이군요)

 

  고해소 앞에 서서 한동안 들추지 않던 마음 갈피 뒤적이는데, 앞사람 손에 들린 두터운 ‘協商論’ 눈에 들어왔다 순간, 망각의 수면 위로 떠오르는 죄의 목록들 나의 신은 칸막이 뒤에 숨어있고, 내 죄는 아직 실존 중인데 지루함에 몸 비틀며 창조론 애통해할 그의 얼굴 궁금하다 주석처럼 매달린 변명 뒤에 감추고 문을 열려는 찰나, 십자가의 힘을 빌려 부디 성공하라는 눈빛 건네는 책표지. 한 평도 안 되는 고해소 안에서 팽팽 머리를 굴려본다 나의 뇌가 칸막이를 밀쳐낼 듯 부풀고 다리는 점점 오그라든다 나는 진화하는 중일까?

 

  그런데 당신, 제가 보이긴 하나요? 고해소를 풀밭으로 꺼내는 건 어떨까요? 저는 소심해서 당신 눈을 보며 고백하진 못해요 예쁜 파라솔 쓴 채 간단히 고해하고, 무릎에 건조한 보속**의 장미 떨어뜨리면, 당신은 그쪽에서 이쪽으로 건너오실건가요? 같이 풀밭 위의 식사를 할 수 있을까요? 아님, 죄가 남긴 우묵한 그림자를 무릎으로 지우며 제가 건너갈까요? 아참, 제 무릎은 이미 이천년 전에 닳았는데 어쩌죠? 

 

*마네의 그림 제목

**보속: 가톨릭에서 지은 죄를 적절한 방법으로 보상하거나 대가를 치르는 것을 말한다

 

 

 

말 키우기

 

오늘 난 예쁜 말 한 마리 선물 받았어

부드러운 갈기와 긴 속눈썹

잘 생긴 이빨과 곧게 뻗은 다리를 가진,

말이 자유롭게 달릴 때

그를 좇아 부드럽게 흔들리는 저 풀들을 보아

풀들은 말을 사랑하지

바람도 말을 사랑하지

그 속에서 거대해지는 말

 

나의 마구간엔, 수십 년씩 키운 말들도 있고

그 속에서 갓 태어난 말도 있지만

대부분 늙어 편자는 닳고

가끔 헛발질하며 절뚝거리는,

혹은, 갇혀만 있어 제대로 뛸 수도 없는

그런 말들 투성이야

그래선지 선물 받은 이 말에게 나는 끌려

 

나의 말은 한때

초원 위를 달리기도 하고

사막 위를 무심히 걷기도 했어

때론 트랑고 빙벽에 아끼던 말을 묻은 적도 있지

나를 태우고 봄바람이거나, 모래바람이거나,

눈보라가 되기도 하던 말들

 

당신,

침묵이 참다참다 토해내는 하얀 입김 속

형태를 드러내는 저 말 한 마리

같이 키워보지 않을래요

 

 

 

 뼈를 세우다

 

  지금 바다를 우려내고 있어 고래와 상어, 청어가 끓는 바다를 맛보려 하는 중이야 내가 방심한 사이 멸치 떼를 몰고 가던 파도 한 채 끓어올랐지 냄비 위로 파닥파닥, 작은 은빛 파도가 꼬리를 쳤어 힘이 없고 작은 것들은 떼로 몰려다니지 어떻게 이 작은 것들이 뼈를 세우는지 몰라 나도 휘어진 내면의 등뼈 세우고 싶었어

 

  몸 속 굳은 내장과 라면처럼 꼬들꼬들한 상념 떼어내는 순간 당신도 허옇게 뒤집힌 그의 눈을 보게 될지도 몰라 물결을 놓치면서 눈 감아버린 그를, 졸지에 떼죽음 당한 무리 속 그를, 어쩌면 조금은 이해할 수도 있겠지 은빛 배와 검은 등줄기 가로지르는 뼈는 그냥 놔두는 것이 좋아 안으로 숨어버린 그의 까만 눈동자가 몸속을 뒤지고 있을지도 몰라

 

  그의 많은 이야기는 가늘고 마른 뼛속에서 우러나오지 멸치를 통째로 씹어 먹을 때 살짝, 혀를 찌르며 씹히는 뼈의 말도 맛있지만 오래오래 끓여보는 거야 비린내도 흐물흐물, 뼈도 물컹해질 때까지

 

  내 휘어진 뼈가 점차 일어서고 있어

 

 

 

 

모자의 어깨

 

 위에서 아래로 쓰는 모자의

방향성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자꾸만 직선을 긋게 돼

위에서 아래로, 그 뻣뻣한 형식에 비해

모자를 아름답게 하는 것은 챙의 곡선

수직을 떠받치는 수평의 유연함을 사랑해

물결을 닮은,

동물의 귀를 닮은,

토성의 고리를 닮은.

떨어지는 힘을 부둥켜안으려는

탄력 있는 어깨가 참 따뜻해

 

가끔 지하도 계단에서 뒤집힌 모자를 만나기도 해

그럴 때면 난 물구나무를 서야하나 망설이지

물구나무 선 채 계단을 내려가는 사내 본 적 있어

그의 손이 바닥을 읽어가는 쪽으로

모자가 좇아가려고 해

위를 향해 열린 모자의 어깨가 흔들려

뒤집힌 모자는 수치심을 몰라

무너진 형식 위로 쌓이는 싸늘한 눈빛

무너지는 것의 속도는 예측할 수 없지

저 어깨가 불안해

 

주머니 속 손이 모자 속내를 읽어

어둠이 때론 어둠을 밀치기도 하지

모두들 자신의 모자를 푹 눌러쓴 채

바쁜 척 걸어가던 뒷모습을 기억해

그건 나였어

아니, 너 아니었니?

뒤집힌 모자가 나를 따라오고 있어          

 

 

 

 

 

내 어깨 위의 검은 개

 -슬픔에 관하여

 

 내 어깨엔 제법 큰, 검은 점 있어요

제발, 성형외과 전화번호를 알려주는

친절한 짓 하지 마세요

이건 제가 키우는 애완견이랍니다

어느 아티스트가 어깨에 얹고 다니는 고양이 인형과는

본질부터 다르죠

이것은 살아있는 검은 개? 라 할 수 있죠

키운 지는 꽤 오래 되었구요

어느새 이렇게 부쩍 자라났는지

믿지 않으시겠지만, 난 이 녀석을 사랑해요

 

이 녀석은 봄만 되면 내 목을 조르곤 해

그럴 때면 커튼을 쳐줘야 해요

좀체 떨어지지 않으려는 버릇 때문에

무거워진 어깨를 견디기 힘들 때면

가끔씩, 한 번 물면 놓지 않는 것들에 대해

마음 놓고 물어뜯을 미래를 꿈꾸기도 해요

 

한 번도 바닥으로 내려온 적 없고

큰 소리로 운 적 없는 이 녀석을 위해

오늘 저녁엔 ‘죽음과 소녀’**를 틀어놓을까 봐요

성찬을 준비하는 거예요

살아 있는 것들은 식욕을 갖기 마련이죠

기꺼이 내 오른 팔을 한 접시 내놓겠어요

나는 불구가 되겠지만

웃을 수 있어요

내 어깨 위의 검은 개가 스스로 내려올 때까지

나는 계속 춤을 출래요

아, 커튼은 그냥 놔두세요

봄꽃들의 아우성, 너무 환하면

또 다시 내 목을 조를 테니까요

 

*  배수아의 소설 ‘당나귀들’ 소제목 인용

** 슈베르트의 현악4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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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code / 김별 

 

오래전부터 너의 코드네임을 알아내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렇지만 오늘 너의 패션 코디법은 애매하다

이것은 너만의 유머코드를 위한 실패자의 짧은 말장난

 

코드만 꽂으면 맹렬히 작동되던 전기의자의 간편함을 아직도 기억한다

하긴 언제부턴가 정크 푸드에 톡 쏘는 맛이 흔해졌고

제임스 본드가 탄 콩코드를 톡 쏴서 격추시킨 사람은 아마도 도마 안-중-근, 이었던가

어쨌거나 콩코드가 치타보다 빠르다는 건 명백히 루머일 것이다

누군가 치타를 추월해 앞서가는 콩코드를 내게도 보여달라

한 번도 눈으로 보지 못한 것들과,

눈에는 비치지도 않던 것들을 나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

총알이 눈에 보이질 않아서 격추를 당하고도 믿지 못했듯이, 아무래도

너를 한 번만 더 보았다면 좋았을 것이다

 

나는 네가 지난여름에 쓰던 코드네임을 알고 있다

이것은 패배를 인정하는 실패자의 유머코드

에 딱 맞는 거짓 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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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피나라 일기예보 / 김미량

먼저 구름 모습 보시겠습니다
지루성피부구름 여전히 북상 중입니다
오랜 염증으로 허리 잘린 나무들이 누워있는 곳
두피나무가 푸석푸석한 머리 흔들면 한 차례 싸락눈 내립니다
쎄라스톤 연고로도 녹지 않는 끈질긴 집착이 덤으로 내립니다
외출 시엔 우산을 준비하세요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눈들이 위험하게 쌓여 눈사태도 발효 중이니
눈 다발지역은 잠시 대피를 바랍니다
상처가 눈덩이처럼 불어난
두피 아랫마을은 심각한 상황입니다
손가락이라 불리는 건달 다섯 명이 몰려다니며
제집인 양 집집마다 빨간딱지 붙이고 다닙니다
가려움 심해지는 봄이 오기 전에 그들을 수배 중입니다
오후 3시 헬기를 투입해 두피지방 스케일링 실시합니다
폭풍 같은 한 시간 얌전히 견뎌내시길 바랍니다
바람이 두피지방을 지나가는 시간은 3시 40분
박하사탕을 빨던 바람의 혓바닥 두피를 핥고 지날 때
아으 알싸한 쾌감에 두 눈 감으셔도 좋습니다
앞으로 미스터 브러시군 두피지역 단독 방문합니다
부드러운 손길에 찰랑찰랑 가로수 흔들리면
웃음소리 마을을 술렁이다 잠이 들 것으로 보입니다
두피 전 지역으로 오후에 적은 양의 비 소식 있습니다
우울했던 마음 마른 타월로 뽀송뽀송 달래주시고
외출 시 검은 재킷의 유혹만 뿌리치시기 바랍니다
우산은 접고 사소한 고민 주저 없이 들고 나가
톡톡 털어 버리시길 당부 드립니다
이상, 날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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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 한 근 끊어가세요

하얀 셔츠로 낯을 가리고
큐빅 핀으로 마음 빗장을 채운 밤,

도마 위에서 숭숭 잘려나가는
우울한 기억 한 점,
좌충우돌 바늘을 세우는
당신의 혓바닥 한 점,
나날이 늘어가는 바람의 이간질 한 점,
돌돌 말아
적당히 흘린 눈물에 효력 잃은 부적을 넣으면
소스 맛은 마음먹기 달라서 새콤한 후회도
달디단 희망으로 미각을 조종합니다

잇몸은 더 이상 이빨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으므로 꼭꼭 리듬을 씹으며 레일을
통과해야 합니다 당신도 맛보세요 이, 기가 막힌 안성맞춤 감정조절

후식으로 주문을 외워 비를 부릅니다
저 구질구질한 비는 예쁜 심장이 탐나는지
비의 몸에 빨대를 꽂기도 전에 내 몸을 덮쳐요
썩으려는 몸은 처방받은 방부제가 지탱해줘요
심장은 언제나 볼륨을 높이고, 혈압을 간섭하려들어요

저울조차 거부해 값을 매길 수 없는 나는
중년으로 분리된 근수 미달
이제 그만 어둔 터널에서 나를 뱉어버려요
맑은 피 수혈 받으러 동굴 밖으로 걸어 나갈 시간
누가 이 안대 좀 벗겨줄 수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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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구합니다

전봇대에 나열된 집의 문패를 읽는다
오를 대로 오른 집의 몸을 잡고 까치발 딛고서면
거기, 높은 혈압 외부로 노출한
집주인 연락처 당당하게 걸려 있다
호주머니 속으로 낱장의 주인 떼어내 구겨 넣는다
전세 행 왕복으로 예매해둔 설움
꼬깃꼬깃 접어 둔 주머니 속 몇 번씩 안전을 확인한다
노란색 위험금지 구역에 불법으로 세운 집
원룸 투룸 쓰리룸 켜켜이 떡시루 닮았다
아랫목을 뜨겁게 달구고 지나가는 사람을 부르며
바람 앞에도 물러서지 않는 종이 집
어느 날 비라도 들이치면 원룸 하나 선뜻 내어주기도 하는,
저 집에 들어 집 한 채 찜하고 미친 척 살아보면 안 되나
미처 떼어내지 못한 창문 한 짝
팔랑팔랑 바람과 맞서는 위태로운 집
대출금 앞에 위태로운 게 어디 내 심장뿐인가
오르다 끝내는 하늘에 닿을
저 늘어난 집의 목에 깁스 채울 날 오리라
전봇대는 집 없는 자의 전용 자석 광고판
지붕도 없는 하얀 집이 입춘 지나도록 눈 맞고 있다
철컥철컥 내 눈이 먼저 붙어버리는
저기, 저 대기 중인 집 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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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불을 씹다

토막 난 개불이 꿈틀거린다
젓가락을 타고 오르다가
입에 닿는 순간 오므라들며 굳어간다
우리는 토막 난 바다에 둘러앉아 부지런히
고통을 덜어주는 의식을 치른다
초장을 듬뿍 찍어 개불의 비명을 지우고
엄지와 검지에 힘을 모아 젓가락으로 들어 올리면
매끄럽게 나를 통과하는 쫄깃한 주검의 맛
나도 한때 깊고 어두운 길을 통과해야 했다
정체 모를 점액질 흥건한 거리를 질척거리다
공연히 혓바닥을 깨물며
오랫동안 습기를 따라 돌아다녔다
태양 앞으로 불려가는
단 한 번의 기회도 얻지 못한 채
그늘 아래 축축한 몸을 말렸다
상처가 또 다른 상처를 향해 문을 연다
빈 접시에 누군가 나를 씹다가 뱉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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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말에 대한 예의

안녕 사장님
당신의 긴 혀를 날름 끊어먹고 사라진 꽃뱀의 아지트는 어디 있나요
당신이 던져 준 부러진 토막말 줍느라 두 손은 바닥에 붙었어요
캐비닛에 한 달째 보류 중인 자존심도 이제 그만 결제를 해줘요
아랫배가 부풀어 오르는 사장님
당신이 키우던 말들은 영양실조에 걸려 위험해요

도마뱀은 당신이 사랑하는 애완동물
무서워요 사장님
밤마다 잘라먹은 꼬리의 살점이 이빨에 끼었어요
입 좀 다물어 봐요
비린내가 폴폴 날아와
내 얼굴에 불시착한 불행한 금요일
퇴근길에 또 당신을 만났어요
엘리베이터 안,
뽕브라가 들통 난 게 분명해요
심장이 오그라들어도 당당한 나는 올드미스
문이 열리고 펑! 연기처럼 사라지려는 찰라
스커트 뒷자락을 시침질하듯 찔러대는
당신의 반말이 바늘귀에 딱 걸렸어요

오늘밤 꿈속으로 놀러오세요
수술대 위에 누운 당신은 나의 환자
윙크 한 방이면 전신마취쯤 문제 없어요
아직도 웃고 있는 당신,
걱정 말아요 지퍼는 안전하게 보호해줄게요
배를 가르면 기형의 누 떼 한 쌍 웅크리고 있고
엊그제 회식 때 먹은 흑염소 울음도 고였을 테지요
꽃뱀은 두 개의 혀를 달고 스르륵 자취를 감추네요
불쌍한 도마뱀 꼬리 조각조각 이어 붙여요
아, 이제 문을 닫아야 할 시간
푹 꺼진 뱃속에다 작년 가을 햇빛에 소독한
들국화를 켜켜이 뿌리고 봉합해요
마취가 풀리려는지 기침을 하시는 사장님
내일 아침 향기로운 존댓말이 입속에서
빠져나와도 너무 놀라지 말아요
사장님, 내 맘에 맞게 당신을 조립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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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세계의 나무들 / 김호기

1-乾期의 나무들
건풍에 허공이 말라가는 시간이 있는 곳
빠르지 못해 오래 도망가는 거북이, 등에 붙어있는 잎
어느 바람이 뒤집으면 오래 버둥거리는 각질의 잎
바람이 거느리고 있는 낯모르는 수족들과
딱딱하게 굳어진 쥐들이 떨어지는 나무의 외곽
화석처럼 이름 모를 짐승들의 뼈가 부서지는 곳 그곳,
계절이 없는 나무는 아무 곳에서나 서서 잠을 잔다

건기의 바람이 맨몸으로 흔들린다.
맨몸의 바람이 숨어들면서 숲은 달아나 버렸다
달아나지 못한 눅눅한 바람은 움트지 않았다
건기의 땅에는 한 번쯤 바람을 타고 배가 지나간 자리의 흔적이 있다


2-雨期의 나무들
원주민의 알싸한 요통이 강물에 비린내를 푼다.
나무들이 버린 폭우.
편지를 쓰던 펜촉의 허리가 열대우림의 우기를 머금은 듯 휘어져 있고
토착어들은 죄다 구부러져 있다.

물총새가 토템폴에 물고기를 내리칠 때. 푸른색의 활자들에서는 나무가 자라난다. 새의 토템을 깎을 땐 반드시 이름이 없는 나무여야 새가 날아가지 않는다. 카누가 지나가는 강가에는 걸어 다니는 나무들로 분주하고 길은 점점 더 깊은 숲 속으로 밀려났다. 인간을 숭배하는 나무들의 가지마다에는 살아있는 쥐들의 울음소리가 시끄럽다.


3-구름나무
오래전 푸른 지능은 모두 구름이 되었다
내려다보는 연체의 종족은 어느 밤, 죽은 나무 위에 살며시 내려앉는다고 한다.
오랜 역설의 시간을 올라 구름이 되고 싶은 푸른 엽록의 지능
반짝이는 수많은 걸음을 허공으로 다 날려 보내고
대신, 구름의 흰 잎을 얻는다고 한다
그때부터 나무들의 후생에는 흰 연기가 피어오른다고 한다.

허공에도 傳說이 있다면 모두 나무가 키운 것들이다
다만 바람은 시든 두 겹의 눈꺼풀을 똑, 따서는 후 하고 불어버릴 뿐이었다.
-색맹을 깨닫는 순간 색맹이 아닌 것들에게 새로운 종의 색깔들이 생겨난다.

모든 첫 번째 풍경은 어둠에서 생겨나기 시작했다.
색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은 장애를 앓고 있는 것이다
자화상은 나를 바라볼 수 없으며 색맹에게는 색을 가르칠 수 없었다.
눈은 색깔이라는 지팡이를 짚고
더듬거리고 있는 중이다
바람이 그린 초상화는 언제나 색이 칠해지지 않았다
물이 되지 못한 것들이 사막으로 모여들고
나는 저 속에서 말을 곧잘 잃어버리고 돌아서며 주머니를 뒤지곤 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들을 거느리고 있고
미지라는 말은 언제나 간지럽다

눈을 감을 때마다 풍경들은 기이하게 일그러져 쉬고 있는 중이다.
불안은 숨어서 빛을 훔쳐본다는 것이며, 별의 진실은 먼지라는 것이다
풍경의 밑그림은 먼지이며
풍경을 지우는 것 또한 먼지라는 것이다

처음 기다림을 가르쳤던 그곳은 먼지만 가득했다
먼지 책 몇 페이지쯤에는 누군가 후 하고 불었던 흔적이 있고
바다는 노인을 품은 채 하늘과 서로 쓰다듬고 있다
우리는 모두 표준형 우울을 앓고 있을 뿐이다

풍경을 채우고 있는 것들.
당신은 또 누구죠 풍경이 내게 물어왔다
낡은 시간들이 녹슬어 흘러내리는 풍경
모든 소실점들이 소실되어가는 중이라고 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멸종에 이른 풍경들을 간간히 들썩이게 하는 바람을 격려할 뿐
아무도 색을 따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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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침대

스스로 자라고 스스로 소멸하는 구름의 뼈
너무 큰 옷을 입고 있지는 않나
그런 구름을 보며 사람들은 꼭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닮았다고 말한다.
가끔은 길가 웅덩이가 구름과 닮아 있기도 했다.
내려다보는 즉시 가장 먼 곳의 존재를 흉내 내는 구름

혹은, 너무 일찍 날아오른 어린 아이들이
편한 침대 같은 저곳에 누워 무형의 무게를 재곤 한다
날 수 있다고 믿는 아이들
저 구름을 만질 수 있다고 믿었다.
아이들의 입에선 항상 구름이
몽글몽글하게 풀어져 나왔다.
구름이 금방 거대한 침대로 변하고,
하늘에서 양치는 아이가 나타나서
늑대와 사이좋게 양떼구름을 몰고 사라졌다.

손에 잡을 수 없는 것들.
사람에게서 떠난 먼지들과
불에 타버린 하얀 재가 하늘로 날아가는 일이 저처럼 다양하다
혹은, 몇몇의 가벼운 영혼들이 사라지는 곳이기도 하고

늘 변하는 하늘의 구름은
지금은 여기 없는 누군가가
놀며 남긴 흔적들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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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에서 까마귀가 날아왔다

귓속에서 옥수수 씨앗을 꺼내들자
손바닥에서 씨앗이 자란다.
펼친 두 손들이 한 시대를 그렇게 걸었다
이미 멸종한 시간들이 태양을 향해
폐를 꺼내들고 점을 친다.
너 이것들을 훔쳐가지 마라
훔쳐 달아난 이들은 영원히 굶주렸다

사막으로 도망간 그들은 협곡 바위에 뼈마디가 모두 부서졌다. 오아시스 갈대에 사지가 잘려나가고 선인장에 여러 조각으로 찢겨나가더니 결국 뜨거운 모래 속으로 삼켜지고 말았다. 그렇게 태양은 이글거리고

가시 위에 던져진 라마들이 아직 살아있고
바람이 죽음을 파먹으려 허공을 맴돌았다
벌어진 가슴으로 벌레가 기어들어가는
그 앞에, 손바닥의 옥수수를 바치던 시간
피 묻은 갈대를 걸어둔 대문마다
곧 춤을 춰야 할 출생의 울음들이
이미 한 시대를 걸어오고, 걸어가 버린다.

순례자들은 태양을 향해 춤을 추었다
라마는 바람의 울음으로 무리를 짓는다.

여전히 태양은 이글거리고
자꾸만 까마귀가 날아오는
날아오르는

바람은 무리를 짓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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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 중독자

겨울의 창문은 책을 읽을 때마다 입김을 만들어낸다.
바람이 활자 위로 창밖을 자꾸만 두드리고 싶어지는 밤
담배는 한 중독의 생을 태운다.
물에 젖은 백묵으로 적은 젖은 편지를 말리며 왼팔에 한 땀씩 바람을 새긴다.
녹아내리는 바람들을 휴지로 지그시 누를 때마다 눈물이 흘렀다
이 활자들을 다시는 쓰지 않으려고
주소를 먹어버렸다.
버려진 블랙홀의 한쪽으로 내 울음을 막았다.
서서히, 중독되는 것들이란 그런 것이다
다른 한 생에 대항하기 위한 한 알의 방법을 삼킨다
귓가에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마치 난청 같은 기억들이다
살아있음으로 죽음이 가득하다

잔혹한 거짓은 없다
교회 종탑이 오래된 건물을 흔들며 신들을 부른다
순간을 조용히 기다렸을 시간들이 이곳까지 울려 퍼진다
넌 저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냄새도 맡지 못했고 너는 내 경계만을 찢어놓고 멀리 도망가 버렸다
길을 잃은 바람은 슬픔으로 전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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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음, 夏葉, 음표 / 주영헌

축 처진 나무의 이파리들이 그늘의자에 걸쳐 있다.
葉綠은 하얀 생각들로 가득했고 허공은 중심으로 빙그르 돌기 시작했다.
바닥으로 흘러내리려고만 하는 잎의 무게.
잎의 방향은 화살표처럼 언젠가 떨어질 곳을 가늠하고 있고, 의자는 빈 시소처럼 익숙한 바람의 줄기에 걸려 있다.
걸터앉아있기 좋은 시간
잠시 눈을 감아도 좋아
그러나 아주 잠시, 아직 잠들 때가 아니니까.
떨어뜨리려고 해도 찐득하게 달라붙어 있는 머릿속.
빈 둥지를 닮은 두통처럼
葉生이라는 것에 조금 더 달라 붙어있어야지.

쉴 새 없이 흔들리는 음표들.
오선지를 가득 채워가는 낮고 높은 음들
삐거덕거리는 반음과 쉼표로 한 악장의 시간을 넘기는 소리들
눈꺼풀이 시간을 닫으려고만 하는 오후

한참을 눈을 감고 있다 떴다
빈 사무실은 소리 없이 햇볕의 줄기를 향해 자라고 있고
창틀 사이로 여름 황사가
의자 하나를 차지하고 있다.
기울어진 큰바늘 시침이 낮은음자리 음표를 꺼내어 어디론가 알 수 없는 이명을 수신하고 있다.

音들이 꽉 들어차면 와르르 분해될 節氣들.
허공에 막 걸쳐있는 잎의 음표를 바람이 獨奏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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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빌라

빌라 한 채가 호수 한가운데로 이사를 왔다.
멘 처음 길은 불화에서 소통으로 가려고 했던 것 같다
떠들썩한 집들이가 끝나고
새로 생긴 빌라엔 올해만도 몇 사람이 입주를 했다
꽁꽁 닫힌 한여름 창문 속에서도 외출도 하지 않는 사람들
손잡이가 없는 현관, 흐릿 번져가는 입구
누구도 지나 온 시절이 번지지 않은 사람은 없다
똑똑 두드리는 소리를 먹어치우는 집
그 집 앞으로 이어지는 길은
이어졌다 끊기기를 반복한다.
물고기도 사람도 구름도 같이 뛰어 노는 길
버드나무가 긴 잎사귀로 빌라 주위를 비질하고 있다.

고요가 품고 있는 집들
점심나절 한바탕 소나기가 지나간 후
끊겼던 길이 다시 연결됐다.
수면 속에 숨어있던 창문들이 하나둘 떠오른다.
여름 장마가 묻어 있는 유리창을 닦아내고
오래된 얼굴 하나가 창문을 연다.
햇볕을 쬐지 못해 핏기 없는 얼굴, 나뭇잎 한 장이 떨어진다
잠시 멍한 얼굴에 주름이 생기고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에 닫혀 버리는 창문
바람의 무늬 밑으로 숨어버리는 얼굴.

아무런 공력 없이 만들어진 이 건물은 작은 바람에도 구겨진다
잎들이 둥둥 떠 있는 계절에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을
이 집에는 무게가 없는 사람들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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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田

지난겨울 추위에 새싹을 뻿긴
빈 콩 쭉정이만 춘삼월을 조문하는 묵전
한여름 푸른 그늘을 키웠을 담배 대공이 드문드문 폐가 기둥처럼 남아 있다.
오래전 이곳에도 집이 있었다고 한다.
학업을 꺾고 도시로 나간 누이들의 귀향을 마중하러
신작로까지 한걸음에 달음질치던
담배 순만큼 푸른 아이들이 살던 그때
아이들만큼 젊었던 밭은 한 계절도 쉬어 가지 않았다.
연초건조장이 이쯤에 있었고
담배 잎 푸른 연기가 자욱하던
아이들의 나이가 무거워지는 만큼 농자금도 무거워져
점점 굽어가는 등, 김씨는
신작로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했다.

이사 가서도 처음은 밭을 놀리지 않았다고 한다.
계절마다 곡식을 심다
겨울을 먼저 쉬고 가을도 쉬고
묵田 옆으로 묵村이 생겨났다.
반쯤 해동된 밭(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다.
한쪽에선 아직도 타닥거리며 타고 있는 불씨들
반쯤 타다만 담배 대궁에선 흰 연기가 피어오르고
그 뒤편 그늘이 잘 들지 않는 곳엔
또 다른 생을 막 살기 시작한, 김씨의
둥그런 집 하나가 지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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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음의 지점

이쯤의 지점은 졸음이 유일한 소일이다
레일을 달리는 기차소리가 한적한 숨소리 같다
잠든 몸을 달리는 숨소리
이 공중의 객차는 지금 어느 곳으로 유영하고 있을까
틈틈이 잠의 문을 여는 生時
덜컹거리는 어느 꿈의 차창에 정차한 불면의 빛들
허공으로 달리는 잠의 좌석이 불편하다
간혹 까무룩 빠져드는 잠의 생애를 알리는 안내방송이
과속방지턱처럼 튀어나온다.

정차가 없는 生
정면으로 흘러가는 후경을 묵묵히 바라보며
저 낯선 풍경의 깊숙한 곳으로 흘러가는 시간
음지의 비탈에 녹지 않은 몇 평의 흰 겨울들이 소금처럼 빛나고
흰 구름의 이불을 덮고 있는 창천
몇 개의 터널이 끊어놓은 채널의 정차들과
하품처럼 토해놓는 낯선 후경들

내 몸의 일정한 이 숨소리들은 지금 어디를 달려가고 있을까
다만 짧은 순간을 향해
긴 시간을 달려가는 두근두근 진동
아무리 몸을 구기며 고쳐 앉아도 불편하기만 한
난청의 지점들이 몸을 흐르고 있을 뿐이다

누군가 남겨 놓고 간 잔여분의 잠
잠들지 않는 좌석에서 흘러 나왔을 불편한 자세의 生들
구름을 끌어올려 잠을 덮고 참았을,
수천의 갈래를 돌아 소리의 집으로 모여드는 길
풍경을 바꾸고 싶지만
이미 앞자리는 내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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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자

庵子는 몇 년째 구불한 길을 키우고 있다
물을 길어 올리기 힘든 배롱나무는
맨몸으로 절기를 구부려 수액을 마중하고 있다
사람의 나이를 지난 노승은 며칠째 생각을 끊고 있는 중이다
문을 열어주지 않는 쓸쓸한 풍경의 고리
물을 다 비운 늦가을 雨氣가 한가하다
지금쯤에는 부처도 穀氣를 끊고 있겠다
생각을 버린 노승은
등신불의 거푸집을 만드느라 고요만 채우고 있는데
어느 목구멍을 넘어 온 새의 소리가
고요를 쪼아 터트리고 있다
모든 허공은 나무들의 거푸집이겠다.
나무의 가장 격렬한 움직임이 정지이듯
五行을 다 버린 허공이 할 일이란 나무의 허영을 재는 일이다
비스듬히 누운 탑의 그림자를 몇 차례 밟아도
점점 더 풀어질 뿐인 오후
人內無人이 왕래했을 짧은 길에는 門의 무늬만 가득하다

이생을 다녀가는 물이 너무 무겁다
흔들리며 가볍게 비워가는 나뭇가지들
뒤집어진 한 해가 천천히 말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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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 세탁 / 이일림

심심하던 바람이 구름의 주리를 틀자
세상은 세탁기가 되어 돌아가네
허공에서 우우, 하고 갑자기 물이 쏟아지자
사람들도 우우, 하고 돌고 돌며 뛰어가네
삽시간에 거리는 말끔해지고
무거운 흙먼지에 눌려있던
진록의 잎들이 바람을 타고 팔랑거리네
그 위에서 빗방울들 다다다다,
바쁘게 모터에 전동을 켜네
강풍이 몰려와 전동축엔 가속도가 붙네
세상은 가벼운 부레처럼 둥둥 뜨고
동그란 눈들 와글와글 물속의 부유를 누리네
땅바닥 흥건히 고인 빗물에 발을 담그네
가슴속 잠긴 모터 하나 돌아가네
훌라후프를 돌리듯 중심을 추스르자
두두둑, 잔뼈들 새하얗게 정립하는 소리
다시 나타나신 옥탑방 할머니 춘희씨
지원금도 장기도 返還하겠다는
양심에 김 오르는 고리 으사샥,
튤립나무 넓적하니 뒤집힌 치맛단에
잠긴 햇살 몰래 와 무지개를 슬어놓네
하얀 종아리가 무색무취로 빛나네
슴슴하던 땅
붕어처럼 연거푸 입술을 뻐끔뻐끔거리네

 

 


대차대조표 길論 / 이일림

누군가 도로에 호치키스를 찍어 놓았다
사는 일 더러 저장도 필요하듯
잠시 참조 철을 판독하고 간 자리
눈물 몇 방울 호치키스 옆에 떨어져 있다
나도 한때 깨알같은 글씨 눈 시려
현재를 꾸짖는 뒷바퀴에 걸린 적 있다
그는 얼마나 긴 길을 읽었던 것일까
밝은 날 어둠 같은 회계장부
앙칼지게 해독되지 않던
생의 전환점에서 잠시 바라본 높푸른 하늘에서
검은 갈가마귀 떼라도 본 것일까
호치키스 찍힌 자리로 자동차들 생각 없이
팡팡 길을 내고 있다
길은 흑지(黑地)를 널며 호치키스의 체온을 담는다
가끔 가슴이 뭉클한지 한쪽으로 기우뚱 쏠린다
바람결 일찍 떨어진 낙엽 하나 뒹굴며
괄호 안으로 들어가 보려 애쓰는 통에
끌리듯 빨려 내 안의 아직 마무리 못한
쉼표 찍어 둔 사항들 끄집어낸다
에이포용지를 넘기면 반복 읽어 내려가지만
좀체 소통되지 않는 글 속의 붉은 신호
잘 되면 파지로 이용할 수도 있다며
나를 짓누르는 누군가의 철저한 대차대조

신속한 신호정리를 하듯
푸른 눈 내려받은 도로
빠르게 길의 서책 넘기고 있다

 

 

 


시간의 화석 / 이일림

길가에 앉아 지렁이 한 마리가 쌓아가는
단단한 시간의 화석 바라본다
수많은 걸음이 땅 위에 지도처럼 남아 있다
군더더기 없는 바람이 맨살을 스치고 간다
저 젖은 우주는 얼마나 맵게 시간의 두엄을 삭힌 것일까
언제 풀어낼지도 모를 압축된 프로필
비가 되고 눈이 되던 그들 긴 이야기 속으로 우리는
가장 적막한 시간의 한 페이지를 알뜰히 걷는 것이다
스쳐가는 바람 속으로 나의 일부가 사라진다

그것은 흙에 가까웠다
육체는 결국 바람의 한 오라기
바람의 부피가 서서히 정점으로 내달아
세월의 담장과 담장 사이 談話가 쌓이고
대지의 둘레 그 껍질을 견고하게 만드는
일종의 聖禮式이 끝나면
영혼은 서서히 침잠하여 수로가 되는데
겹겹이 쌓인 시간의 등껍질 속
가만히 귀 기울이면
거기, 땅 속에 신비롭고 창창한 맑은 音 있어
꿈틀거리는 태아의 손가락 끝을 따라
소리의 긴 통로 두드려 보면
차륵차륵 우주의 물방앗간 물레질 소리
달큼한 생명의 향기 흙내음

나는 지금
먼 기억 회로를 떠듬떠듬 굴리고 있다

 

 

 


신발의 그늘 / 이일림

내가 물어보면
그는 어딘가를 간다고 한다
나도 알 수 없는데
그는 어딘가를 자꾸만 가자 한다
내가 가자고 말할 거라는 것을
미리 알아차린 듯이,
내 위치가 가벼우면 가벼울수록
울퉁불퉁한 길에 지치고 힘들어한다
잘 생기지도 부드럽지도 못한 나는
갔던 곳에 또 가고
갔다가 또 오는 가난한 본능이다
오랜 시간 부르튼 생각들
이젠 뒤꿈치에 딱딱하게 굳어 있다
언젠가 그 생각들 머리끝을 들면
발 속의 마른 창자를 휘감을지도 모른다
그는 어디든 갈 수 있는 火藥庫이므로
그동안 조용히 있으라며 군화 같은
명령을 내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발은 신발의 그늘을 미처 보지 못한다
늘 신발이 발을 감싸고 있었으므로,
말하자면 또 하나의 발인 셈이다
누가 강자인지 약자인지 모른 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그는
나를 꼬옥 움켜쥐고 늘상,
끈끈한 대화를 주도한다

 

 


밤의 강단 / 이일림

깊은 밤이 날카롭게 운다
잠에 곤히 취한 사람들
밤의 밖 소리 틈에 합체한다
저 야생고양이에게 무슨 일이 생겨
이 한밤 찢어진 어둠을 깁는 걸까
허공이 소리를 잡아와
열리는 신음
쫓는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
또 다른 울음이다
밤의 명치끝이 쭈뼛쭈뼛 흰 띠를 긋는다
날카로운 것은 어디서나 깊이를 숨기고 있다
근방 어디쯤서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이라고
잠 속의 꿈이 중얼거린다
모성의 본능이 잠든 옆 아이를 끌어안는다
층층 두껍게 쌓인 어둠 속에서
소리가 소리를 찾아다니는 허공의 난무(亂舞)
나도 언젠가 꿈을 트럭에 치인 적이 있다며
잊어버린 잠이 잃어버린 나를 찾는다
도로의 속도에 길든 기계들에
두 귀 매달려 삶의 핸들 잡는다
안심인 듯
불안인 듯
아침을 기다리는 본성으로
밤의 강단은 아른아른 깊어만 가고

새벽은 곧 흑백의 필름을 인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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룰랄라 정전 / 이진

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춰라!

정전이에요 티브이가 꺼지고 모니터도 캄캄해지고 조용해진 냉장고, 어둠 속 팽팽해지는 귓바퀴를 타고 전기밥솥 타이머가 공회전하네요 시금치를 팽개친 더듬이손 양초를 찾고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던 손가락 손전등을 찾네요

촛불이 자석처럼 가족을 끌어다 앉히네요 촛불두레밥상이 되었네요 연등처럼 피어나는 웃음 밝아서 눈빛 장난기로 반짝이고 풀벌레소리 환하게 안겨오네요 고추불꽃을 사내애가 재빠른 손놀림으로 잘라대고 성냥팔이 계집애 성냥불을 켜대네요 시간의 고봉밥을 마주하자 절로 배부른 아이들 촛농으로 장난을 치네요 양초가 금세 울보가 되고요

전기가 쉽게 들어올 것 같진 않죠?

엄마가 두 손 맞잡아 그림자오리를 그리네요 어이들 토끼를 놀리고요 엄마는 토끼를 오리라 우기고 아이들은 오리를 토끼라고 우기네요 하얀 실크벽지 위로 뒤뚱뒤뚱 깡충깡충 마술벽지 연못이다가도 금방 풀밭으로 변하지요 토끼들이 함부로 풀을 뜯어먹어도 마법에 걸린 풀밭은 상처받는 법이 없지요

시간에 발목 잡힌 엄마가 낙타를 만들어 보이자 순식간에 모래바람 자욱한 실크로드가 펼쳐지네요 수척한 제 그림자를 숨긴 외봉낙타가 사막을 다 건너오기도 전에 꿈의 고봉밥 미리 퍼먹은 아이들 꿈나라에 들고요 아침이면 아이들은 소금심부름을 가게 될지도 모르죠

룰랄라 시간차 여행 중인 타임머신
정지된 밥솥은 타이머를 잊은 지 오래지요

 

 


달팽이관이 불안하다 / 이진

무심코 던지는 말들이 징검다리가 된다
내가 건너갈 수 없는
돌과 돌 사이에서 가라앉는 말들
그 간격이 힘에 부칠 때도 있다
네가 뒤통수를 후려치면서 나의 달팽이관을 점령한다
드릴로 귀와 귀 사이에 터널을 뚫는다
소리가 소리를 집어삼켜버려
소리 속에서도 소리를 들을 수 없다
누가 이 소리의 블랙박스를 해독해 주었으면
종일 되새김질로 짓는 말의 감옥
달팽이집을 내려놓기로 작정한다
달팽이관은 지금 청소 중

 

 


수박 / 이진

제왕절개로 태어난 달콤하고 붉은 生

내 무덤을 내가 파고 있다
숟가락으로 파먹어 들어가는 만큼
줄어드는 삶이
등가죽에 금방 들러붙는다

말라버린 탯줄 같은 밥줄
후생까지 반짝거릴 까만 씨눈들만 남긴 채
마침내 바닥이 나고 마는 막장인생
쪽박 깨듯 부수고 싶은 빈 밥통 뒤집어엎어
머리에 쓰면

초록 줄무늬 내 모자
아직은 푸른 무덤

 

 

 


껍질경전 / 이진

태풍에 발목 부러진 소나무 한 그루
생의 끈을 놓지 않고 와불처럼 누워 있다
껍데기는 가라* 누가 그랬던가
제 속살 다 빼앗겨버린 채 껍질만으로
가까스로 땅속 뿌리 한 가닥 잡고 있다

나이테 잃은 소나무 제 나이도 잊고
상처 위에 켜켜이 상처를 쌓아
두툼해진 접목
줄기도 껍질도 아닌 껍질줄기가 되었다

껍데기에 매달린 생의 내력이 저 와불에 새겨져 있다
길게 펼친 껍질경전을
오며 가며 사람들이 읽는다
거친 흘림체로 씌어진 끈질긴 목숨

죽어서 다시 사는 나무

* 신동엽 시인의 시


 

 

냉장고 사내 / 이진

잠들면 떠메고 가도 모르는 집채만한 몸뚱이
그는 한 기의 무덤처럼 덤덤하다
뱃구레만 채워놓으면 세상은 만사형통이다
학교로 유아원으로 아이들을 내보내고 아내도 마트로 출근하면
그때부터 그는 잠의 바다로 출항한다
출렁이는 뱃속은 먹이사슬의 대합실
프로크루테스의 침대처럼 발치에는 발목 잘린 식물성이
머리맡은 머리 잘린 동물성 차지다
삼겹살, 고등어, 꽃게, 닭도리탕, 잡채, 비름나물, 해물탕
한바탕 뜨겁다가 식어버린 것들까지 영역을 다투고
미식가인 사내는 잠 속에서도 연신 입맛을 다신다
날 좀 보소! 휴대폰 소리가 요란하게 꿈의 행성을 폭파하면
철커덕! 유아원 다녀온 사내아이가 아이스크림에 목매고
초등학생 딸이 딸기우유를 꺼내 들고 모니터 속으로 사라진다
아내가 유통기한 지난 먹거리를 다시 채워 넣을 때까지
심장에 빨간 불이 켜지도록 그는 어미 새처럼 제 속을 내어준다
제 목줄을 가족들이 쥐고 잇다는 것을 사내는 안다
드라이아이스처럼 기어 나오는 새벽녘의 울음소리
탯줄 같은 투석기를 등 뒤로 감춘 채
자신의 관 속에서 서서히 부패하는 사내,
쿵! 무너지는 순간까지
그는 결코 등 돌리는 법 없이
오늘도 아침이 그득한 한 집의 식탁을 피워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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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 김우섭

나무가 서 있었지

찬비를 맞으며 나무 한 그루 서 있고
나는
그 나무 아래서 우산을 쓴 채로 누군가를 기다리며
소리죽여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젖은 이파리들이
갑자기 환하게 생기가 돌고
수많은 귀를 열기 시작했지

나무는 귀가 천 개도 넘어
어떤 귀는 노래를 담아 홀로 듣기도 하고
어떤 귀는
비 내리는 소리를 따라 먼 곳까지
흘러가기도 했지
기다리는 사람은 오질 않고
노래도
빗줄기도
나무의 귓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밤새 어두운 길만
소리 없이 반짝거렸지

이른 아침,
골목에는 떨어진 귀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고
나무는
남은 귀를 마저 열어놓은 채
온몸이 비에 젖어있었지
소한과 대한을 지나고
겨울이 끝날 때까지
얼어붙은 귀들이 더 이상은 흔들리지 않을 때까지
나무는 그렇게
침묵의 빛으로 서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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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현반점

그대가
입에 물었던 사탕을 꺼내어 내게 줄 때
창가에 자라던 곰팡이들이
노란 꽃을 피우네

아프지도 않은데 겨울이 다 지났다

다다미방에 앉아 엽차를 마시다
불현듯 나누는 그리움
오호츠크 해에서는 둥그런 편서풍이 불어오고
가슴 속 목록마다
압정처럼 박히는 별빛들

네 생각만으로
계단이 젖고
계단이 뿌리인 집이 젖고
집보다 큰 물방울들이 씨앗을 꺼내 河口로
흘려보낼 때

밤새
마른 귓불이 간질거리고
기다려도 오지 않는 눈
밑둥만 남은 보리밭 속에서
조잘대는 씨앗들
기억이나 하려는지
오호츠크 해에서 따뜻한 편서풍이 불어올 때

그때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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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

가을이 다 가도록 사내는
집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모든 아픈 것들이 집안으로 들어와
꽃밭을 이루고, 꿈을 꾸듯 아득해 하곤 했다
간혹 그 꽃들의 뿌리가
사내의 잠자리까지 찾아 들어와 힘들게
몇 개의 씨앗을 틔우기도 했다
아침마다 신문이 오고, 그것이
세상과 유일한 만남이었으므로
차가운 마루에 앉아서도, 부엌에서 무언가 끓는 소리를
낼 때도, 창 밖 화단이 바람에 수런거릴 때도
손에서 떼지 못하고
어떤 결별의 후일담을 읽는 듯 했다
가끔,
집밖의 일이 궁금할 때면 기타를 꺼내
오래 전 노래를 불렀다
노래가 불러낸 물소리들이 기타를 적시고
세간을 다 적시고, 어딘가 숨어있던
마른 머리카락들이 둥둥 떠올라 그리운 손길처럼
사내의 어깨에 내려앉곤 했다
잊히지 않을 날들이 첨벙첨벙
가을을 질러오다 뒤뜰 감나무에 붉게 걸리면
빛나는 깃을 가진 새들이 찾아와
너무 늦었다는 듯
위로의 말을 전해줄 것만 같았다
가을이 다 가도록 사내의 집에는
모든 아픈 것들이 뿌리를 내리고, 밤이면
산등성이까지 환하게 별이 떠올랐다
세상의 잃어버린 길과 무성한 소문들이
안개처럼 집 주위를 맴돌고
가느다랗게 새어나오는 창밖의 불빛 따라
몇 개의 꽃들이 날아오르는 것을
아무도 보지 못했다 간혹
아픈 관절을 꺾듯 누군가 눈 밟는 소리가
담 너머까지 들려오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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