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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음, 夏葉, 음표 / 주영헌

축 처진 나무의 이파리들이 그늘의자에 걸쳐 있다.
葉綠은 하얀 생각들로 가득했고 허공은 중심으로 빙그르 돌기 시작했다.
바닥으로 흘러내리려고만 하는 잎의 무게.
잎의 방향은 화살표처럼 언젠가 떨어질 곳을 가늠하고 있고, 의자는 빈 시소처럼 익숙한 바람의 줄기에 걸려 있다.
걸터앉아있기 좋은 시간
잠시 눈을 감아도 좋아
그러나 아주 잠시, 아직 잠들 때가 아니니까.
떨어뜨리려고 해도 찐득하게 달라붙어 있는 머릿속.
빈 둥지를 닮은 두통처럼
葉生이라는 것에 조금 더 달라 붙어있어야지.

쉴 새 없이 흔들리는 음표들.
오선지를 가득 채워가는 낮고 높은 음들
삐거덕거리는 반음과 쉼표로 한 악장의 시간을 넘기는 소리들
눈꺼풀이 시간을 닫으려고만 하는 오후

한참을 눈을 감고 있다 떴다
빈 사무실은 소리 없이 햇볕의 줄기를 향해 자라고 있고
창틀 사이로 여름 황사가
의자 하나를 차지하고 있다.
기울어진 큰바늘 시침이 낮은음자리 음표를 꺼내어 어디론가 알 수 없는 이명을 수신하고 있다.

音들이 꽉 들어차면 와르르 분해될 節氣들.
허공에 막 걸쳐있는 잎의 음표를 바람이 獨奏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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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빌라

빌라 한 채가 호수 한가운데로 이사를 왔다.
멘 처음 길은 불화에서 소통으로 가려고 했던 것 같다
떠들썩한 집들이가 끝나고
새로 생긴 빌라엔 올해만도 몇 사람이 입주를 했다
꽁꽁 닫힌 한여름 창문 속에서도 외출도 하지 않는 사람들
손잡이가 없는 현관, 흐릿 번져가는 입구
누구도 지나 온 시절이 번지지 않은 사람은 없다
똑똑 두드리는 소리를 먹어치우는 집
그 집 앞으로 이어지는 길은
이어졌다 끊기기를 반복한다.
물고기도 사람도 구름도 같이 뛰어 노는 길
버드나무가 긴 잎사귀로 빌라 주위를 비질하고 있다.

고요가 품고 있는 집들
점심나절 한바탕 소나기가 지나간 후
끊겼던 길이 다시 연결됐다.
수면 속에 숨어있던 창문들이 하나둘 떠오른다.
여름 장마가 묻어 있는 유리창을 닦아내고
오래된 얼굴 하나가 창문을 연다.
햇볕을 쬐지 못해 핏기 없는 얼굴, 나뭇잎 한 장이 떨어진다
잠시 멍한 얼굴에 주름이 생기고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에 닫혀 버리는 창문
바람의 무늬 밑으로 숨어버리는 얼굴.

아무런 공력 없이 만들어진 이 건물은 작은 바람에도 구겨진다
잎들이 둥둥 떠 있는 계절에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을
이 집에는 무게가 없는 사람들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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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田

지난겨울 추위에 새싹을 뻿긴
빈 콩 쭉정이만 춘삼월을 조문하는 묵전
한여름 푸른 그늘을 키웠을 담배 대공이 드문드문 폐가 기둥처럼 남아 있다.
오래전 이곳에도 집이 있었다고 한다.
학업을 꺾고 도시로 나간 누이들의 귀향을 마중하러
신작로까지 한걸음에 달음질치던
담배 순만큼 푸른 아이들이 살던 그때
아이들만큼 젊었던 밭은 한 계절도 쉬어 가지 않았다.
연초건조장이 이쯤에 있었고
담배 잎 푸른 연기가 자욱하던
아이들의 나이가 무거워지는 만큼 농자금도 무거워져
점점 굽어가는 등, 김씨는
신작로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했다.

이사 가서도 처음은 밭을 놀리지 않았다고 한다.
계절마다 곡식을 심다
겨울을 먼저 쉬고 가을도 쉬고
묵田 옆으로 묵村이 생겨났다.
반쯤 해동된 밭(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다.
한쪽에선 아직도 타닥거리며 타고 있는 불씨들
반쯤 타다만 담배 대궁에선 흰 연기가 피어오르고
그 뒤편 그늘이 잘 들지 않는 곳엔
또 다른 생을 막 살기 시작한, 김씨의
둥그런 집 하나가 지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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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음의 지점

이쯤의 지점은 졸음이 유일한 소일이다
레일을 달리는 기차소리가 한적한 숨소리 같다
잠든 몸을 달리는 숨소리
이 공중의 객차는 지금 어느 곳으로 유영하고 있을까
틈틈이 잠의 문을 여는 生時
덜컹거리는 어느 꿈의 차창에 정차한 불면의 빛들
허공으로 달리는 잠의 좌석이 불편하다
간혹 까무룩 빠져드는 잠의 생애를 알리는 안내방송이
과속방지턱처럼 튀어나온다.

정차가 없는 生
정면으로 흘러가는 후경을 묵묵히 바라보며
저 낯선 풍경의 깊숙한 곳으로 흘러가는 시간
음지의 비탈에 녹지 않은 몇 평의 흰 겨울들이 소금처럼 빛나고
흰 구름의 이불을 덮고 있는 창천
몇 개의 터널이 끊어놓은 채널의 정차들과
하품처럼 토해놓는 낯선 후경들

내 몸의 일정한 이 숨소리들은 지금 어디를 달려가고 있을까
다만 짧은 순간을 향해
긴 시간을 달려가는 두근두근 진동
아무리 몸을 구기며 고쳐 앉아도 불편하기만 한
난청의 지점들이 몸을 흐르고 있을 뿐이다

누군가 남겨 놓고 간 잔여분의 잠
잠들지 않는 좌석에서 흘러 나왔을 불편한 자세의 生들
구름을 끌어올려 잠을 덮고 참았을,
수천의 갈래를 돌아 소리의 집으로 모여드는 길
풍경을 바꾸고 싶지만
이미 앞자리는 내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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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자

庵子는 몇 년째 구불한 길을 키우고 있다
물을 길어 올리기 힘든 배롱나무는
맨몸으로 절기를 구부려 수액을 마중하고 있다
사람의 나이를 지난 노승은 며칠째 생각을 끊고 있는 중이다
문을 열어주지 않는 쓸쓸한 풍경의 고리
물을 다 비운 늦가을 雨氣가 한가하다
지금쯤에는 부처도 穀氣를 끊고 있겠다
생각을 버린 노승은
등신불의 거푸집을 만드느라 고요만 채우고 있는데
어느 목구멍을 넘어 온 새의 소리가
고요를 쪼아 터트리고 있다
모든 허공은 나무들의 거푸집이겠다.
나무의 가장 격렬한 움직임이 정지이듯
五行을 다 버린 허공이 할 일이란 나무의 허영을 재는 일이다
비스듬히 누운 탑의 그림자를 몇 차례 밟아도
점점 더 풀어질 뿐인 오후
人內無人이 왕래했을 짧은 길에는 門의 무늬만 가득하다

이생을 다녀가는 물이 너무 무겁다
흔들리며 가볍게 비워가는 나뭇가지들
뒤집어진 한 해가 천천히 말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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