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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루와 나나 / 김희준 

 

 

 

 

 

가위를 쥐어봐요
                                                        우리는 유전자가 편집된 채 태어난 최초의 쌍둥이
                                                        에이즈에 걸리지 않는 미래형 맞춤 아기예요
                                                        말랑한 유리를 만지는 모순된 인류 미래의 심장입니다
                                                        크리스퍼 베이비(Crisper Baby)
                                                        바코드를 파란 엉덩이에 붙여도 좋겠습니다

 

 

어쩌다가 만들어졌어 루루는 득을 따지지만 나나는 우연이라 하지 8월은 어쩌다가 포도에게 빚을

져서는,여름을 담보한 과일이 속절없이 투명해져 가

 
루루, 무례한 씨를 가졌구나 당도 높은 태양이 바구니에서 후숙되는 중이야 다음 생은 입 없는 하

루살이가 좋겠어 평생 말을 연습하다가 끝내 소리할 수 없는 계절을 삼키다가 당신 이름이 유언이

되는 비루한 알몸이면 좋겠어

 
나나, 과일을 조심해야 해 파란 혈맥을 가진 여름을 함부로 만지는 건 위험해 태양이 파과하고 있어

바구니에 죽은 열기

가 번지고,

 
이리 와, 퍼즐을 맞추자
비어버린 부분을 맞춘 조각을 쏟아버렸지 이건 누가 잘라둔 장마일까

 
루루, 어쩌다가 태어났더라? 네가 죽는 걸 봐야겠어
여름이 오려둔 절기가 내리고 있어 바구니가 멍이 들고 우리는 금방 슬퍼지겠지
물컹한 태양을 만지다 보면 캄캄해지는 한쪽을 어떻게 해야 할까
포도 넝쿨에 매달린 우리는 알맹이만큼 다양한 안색이야

 
나나, 사랑스러운 말을 연습하자 우리가 우리라는 걸 알게 된 건 언제였더라 아파본 적 없는 루루가

아픔을 배우게 된 건 또 언제였지

 
넝쿨이 서걱거리는 저녁

 
정교한 탯줄을 빨아들이는 우리의 다음 생

 
나가자 나나, 돌아와 루루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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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희준이 자기 행성으로 돌아간 뒤 여러 일이 있었습니다. 크고 작은 일에서 문득문득 희준을 만납니다. 이렇게 아무데서나 희준이 보이니 이제 희준은 시공간을 자유롭게 다니는 몸을 가졌나 봅니다. 아득한 시간을 건너고 있는 제게 희준은 언제나 말합니다. 엄마, 괜찮아. 다 괜찮아질 거야. 그 말을 놓칠까 저는 자꾸 말에 기댑니다.

 

?루루와 나나?를 발표하고 바로 떠났으니 희준은 지면에 실린 글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희준에게 좋은 기별이 되어 닿았을 겁니다. 수상 소식을 들은 희준은 어떠할까 생각합니다. 아마 많이 웃을 겁니다. 웃음이 많은 아이니까요. 그리고 이렇게 말할 겁니다.

 

선생님 시가 너무 좋아요. 매일 절절 생각해요. 제가 많이 사랑해요.

 

또 이렇게 말할 겁니다.

많이 모자란 제게 큰 상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더 열심히. . 하겠습니다. 라고요.

 

이른 나이에 자기 행성으로 떠난 아이를 깊이 품어주신 시산맥과 심사위원님께 감사한 마음 전합니다. 김희준을 지구별에 오래 붙들어주신 모든 분께 고마운 마음 전합니다.

 

- 김희준 엄마 강재남 두손

 

 

 

 

 

 

   빗방울 랩소디 / 진혜진

 

 

   우산이 감옥이 될 때

 

  예고도 없이 소나기가 쏟아진다 손잡이는 피하거나 피하지 못할 것에

잡혀있다

  비를 펼치면 우산이 되지만 우산을 펼치면 감옥

 

  귀고리 목걸이 발찌 팔찌에 수감된 몸, 쇠창살 소리가 난다

  소나기 속의 소나기 나만 흠뻑 젖는다

 

  보도블록 위에서 이질감이 된 빗방울, 절반은 나의 울음 나머진 땅의 심

장에 커다란 구멍을 낼 것이다

 

  버스정류장 앞 넘치는 웅덩이가 막차를 기다리는 새벽 2시의 속수무책

과 만나 서로의 발목을 확인한다

 

  빗방울 여러분!

  심장이 없고 웃기만 하는 물의 가면을 벗기시겠습니까

  젖어서 만신창이가 된 표정을 바라만 보아도 되겠습니까

 

  어떤 상실은 끝보다 시작이 더 아프다

  누가 누구를 용서해야 끝이 날까

 

  검은 우산과 정차하지 않는 버스 바퀴와 폭우가 만들어 내는 피날레

 

  밑줄을 긋듯 질주하는 차가 나를 후경에 밀치고 사라질 때

 

  젖어서 죄가 되는 빗방울

  용서가 잠겨있는 빗방울

 

  우산은 비를 따라 용서 바깥으로 떠난다

 

 

 

 

포도에서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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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시산맥작품상은 매호 시산맥시회 회원들이 추천한다. 2020년 여름호부터 2021년 봄호에 게재된 작품 중 제11회 시산맥작품상 후보에 오른 작품은 21편이었다. 그중 1차 예심을 통과한 작품은 16, 2차 예심을 통과한 작품은 8편이었다. 본심을 맡은 강 수 시인과 김 륭 시인이 각각 2편의 작품을 최종심에 올렸으나 수상작을 선정하지 못해 시산맥작품상 기 수상자인 최정란 시인이 다시 작품을 추천, 다음의 3편을 최종 논의하였다.

 

이인주 여우를 위로함

진혜진 빗방울 랩소디

김희준 루루와 나나

 

이번 최종 예심에 오른 시들은 두 개의 전혀 다른 축에 토대를 두고 있다. 하나는 은유의 축을 기반에 둔 시들이고, 다른 하나는 환유의 축에 토대를 둔 시들이다. 은유의 축에 가까운 시들은 의미(메시지) 전달이 중심이 되고, 화자의 정서와 주제 의식이 비교적 명료하게 전달된다. 반면에 환유의 축에 가까운 시들은 시인의 무의식이나 자의식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파편화된 이미지와 초현실주의적 사유의 경향을 보여준다. 그동안 현대시의 흐름은 <은유적인 축>에서 벗어나 <환유적인 축>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바뀌어 왔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현대인의 정신적 삶의 세계를 반영하기에는 <환유적 이미지>가 더 적합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새로움>이라는 미학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유적인 시>는 조금 낡고 고루한 느낌이 들고, <환유적인 시>는 그 표현상의 특징으로 인해 더 새롭고 참신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시의 본령이 낯설게 하기를 통한 인식의 새로움을 환기하는 것이라는 측면에서, 이번에 최종 본심에 오른 시인들은 자신들만의 개성적인 방법으로 그러한 미학적 오체투지를 하고 있으며, 나름대로 성과를 달성하고 있다.

 

최종 본심에 오른 작품들은 <빗방울 랩소디> <루루와 나나> <여우를 위로함>이다. 이 중에서 환유적 축에 가까운 시들은 <빗방울 랩소디> <루루와 나나>이고 반면에 이들과 달리 상대적으로 은유적 축에 가까운 시는 <여우를 위로함>이다.

 

<여우를 위로함>여우라는 객관적 상관물을 통한 상상력의 변주를 통해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 의식이 비교적 선명하게 잘 드러나고 있다는 장점이 있다. ‘여우라는 기호의 의미를 다양하게 변주하면서, 이러한 변주를 상상력의 차원으로 확장하여, 화자의 삶에 대한 고뇌와 트라우마를 이미지화함으로써 독자의 공감대를 이끌어내고 있다. 이 시의 미덕은 각각의 이미지들이 매끄럽게 연결되고 이어지면서, 독자들로 하여금 여우로 표상되는 여성성에 대한 문제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한다는 점에 있다.

 

<빗방울 랩소디> <루루와 나나> 두 작품은 시어들이 기호화되어 있고, 이미지들이 파편화되어 있다. 시어와 시어 사이,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의미 간극을 최대로 벌려 놓았기 때문에, 독자의 상상력을 극대화시키고 있다. 이 시들은 파편화된 이미지들을 통하여 독자를 화자의 내면 속으로 이끈다. 거기서 우리는 시인이 현재 처해 있는 실존적 문제에 대해 <낯선 깨달음>을 얻고, 우리들 자신의 실존적 문제로 확산시키며 공감대를 형성해 나간다.

 

<빗방울 랩소디>소나기 속의 소나기 나만 흠뻑 젖는다와 같이 독자의 감성을 끌어들이는 흡입력 있는 이미지들이 매력적인 시이다. 하지만 이 시에서 소나기는 우리가 아는 소나기가 아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소나기속에 감춰져 있는 낯선 소나기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 시 속에 형상화되고 있는 빗방울도 낯선 빗방울이다. 시인은 그것의 시니피에(기의)죄의식으로 전환시킨다. 그 결과 화자를 적시고, 밤을 적시는 비는 를 환기시키고, ‘죄의식을 강화시키는 촉매제가 된다. 아울러 온 세상은 로 젖어 버린다. ‘우산하나로 어찌 그 죄를 피할 수 있으며 용서받을 수 있겠는가. 죄의식에 침윤된 화자는 스스로 죄수가 되고, 그 순간 세상은 감옥이 된다. 화자가 입은 옷은 죄수복이 되고, 화자가 치장한 액세서리는 수갑이 된다. 죄인으로서의 삶. 이러한 실존의식은 독자들에게 자신의 삶에 대한 문제의식을 환기해 준다. 이런 면에서, 이 작품은 소나기빗방울이라는 이미지를 끈기 있게 천착해나가는 시정신과 주제의식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루루와 나나>에 제시되는 이미지와 시어들은 죽음과 공포라는 시인의 무의식/자의식을 구체화하는 데 집중한다. ‘루루나나는 화자의 분열된 자아로 읽히며, 그것의 통합을 추구하는 시인의 욕망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이원적/대립적인 상상력을 통해 방황하는 시인의 내적/무의식적 갈등을 드러내면서, 끝까지 갈망하지만 성취하지 못하는 자아의 합일로 인한 고통을 처절하게 형상화해 내고 있다. 마지막 부분의 나가자 나나, 돌아와 루루는 그러한 사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구절이다.

 

나나루루는 엇박자로 움직이고 있으며, 영원히 같은 공간에 존재할 수 없는 실존의 간극을 형상화해주고 있다. 이런 면에서, 이 작품은 영원히 완성된 자아로 합일할 수 없는 현대인의 실존적 고통을 잘 그려내고 있는 수작이다.

 

이런 각자의 특성을 가진 3편의 작품을 가지고 심사자들은 오랫동안 고심을 하였다. 3편 다 수상작으로 충분하였으나, 이번 수상작으로는 환유적인 의미망을 잘 표출한 <빗방울 랩소디><루루와 나나>를 공동 수상작으로 선정하였다. 수상자에게는 축하의 말을 아쉽게 탈락한 분께는 다음을 기약해 본다.

 

심사위원 강수(시인. ), 김륭(시인), 최정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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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애인은 그라나다에 산다 / 오늘

 

 

지중해의 검은 돛을 펄럭이는 순백의 애인들 붉은 달이 녹은 바다는 위태로워서 건널 수 없고 괴여*, 네가 돌아오지 않음으로 기다림은 완성된다 알바이신 지구의 파고가 높은 날에는 이슬람틱한 휘파람이 떠밀려왔고 그런 밤이면 돌계단이 목에 감기는 악몽을 꾸느라 하루를 잊었다 돛을 품은 채 너를 기다린 적도 있다 그루밍 되는 슬픔 속으로 뒤늦은 네가 뛰어들길 바랐기 때문이다 밤의 기척을 뒤적거리면 한 움큼의 웃음 너를 타락시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증오하게 하는 것은 쉽다 돌아오지 않는 증오는 타락을 완성시키는 꿈이어서 이 광기는 한때의 우리에게서 온 것 어떻게 할 거야 너는 지겹도록 묻지만 지금은 혼돈을 지킬 차례 괴ㆀㅕ**, 돌아오지 않을까 봐 무서워지는 고백 어쩌면 검은 웃음 축축한 우리라는 균형

 

다시, 이별을 말하는 내게 서럽게 울다가 고개 들어 너는 말한다

지금 당신의 표정과 이 시간을 본 적이 있어

 

이별이 처음처럼 반복되고 있었다 내 애인이 살고 있는 그라나다에도 우기가 끝나간다

 

* 괴여: 내가 사랑한다.

** 괴ㆀㅕ: 내가 사랑을 받는다.

 

 

 

 

나비야, 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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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시인이 제10회 시산맥작품상을 수상했다. 수상작은 내 애인은 그라나다에 산다이며 상금 300만원.

 

시산맥작품상은 지난 한 해 계간 시산맥에 발표된 작품을 대상으로 한다. 오늘 시인의 작품은 9편의 후보작 중 선정됐다. 심사는 오현정 시인과 정윤천 시인, 안차애 시인이 맡았다.

 

심사위원들은 오늘 시인 작품에 대해 지금 여기와 그라나다 사이의 불화, 사랑하는 것과 사랑받는 것의 불화, 슬픔과 광기 사이의 불화를 소리와 색채, 외래어와 고어(古語), 입말과 관념어 등을 넘나들며 매끄럽게 직조해 신비로운 시편을 완성했다고 평했다.

 

오늘 시인은 한양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2006년 계간 서시로 등단했다. 아르코 창작기금을 받아 시집 나비야, 나야를 출간했다.

 

한편 시산맥작품상 기 수상자로는 김종미·김점용·신현락·차주일·문성해·최정란·이재연·김정진 시인 등이 있다.

 

이번 시상식은 오는 516일 서울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열린다. 이 자리에서는 2020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당선자 선혜경 시인에게 시산맥 등단패 수여식 및 2020년 시산맥 신인문학상 수상자 한상신 시인에 대한 시상식도 있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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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진

 

 

여기서 잠시 불을 붙였다 갑시다

 

여름을 빨리 불러오고 싶었어요 하지(夏至)의 높은 태양을

만원버스 안에서 같은 리듬으로 동시에

흔들리면서 서로를 기대하고

 

기다리면서

 

손이 녹을 수 있도록

몸이 따뜻해지도록

태울 것들을 좀 찾아봅시다

 

종점은 처음인가 봐요 당신에게서 반환점의 냄새가 나는데

한번 뒤돌아서 봐요 저 사람이 말하길

당신이 어제 앞에 앉았던 사람과 닮았다는데

 

잘 타는 것들 연기가

적게 나고 불빛이 멀리까지 가는 것들

내 전임자는 이런 여유를 허락한 적이 없었죠 원심력처럼 창밖을 보세요

동지(冬至)의 가까운 저녁을

저기 물미역처럼 하늘거리는 플라타너스들

 

전에는 이렇게 불을 피워 소식을 전했습니다

나는 잘 지냅니다 덕분에

 

잘 지내지 못해요

 

모닥불은 처음인가 봐요 어두웠다 밝아지는 건

주변의 습도가 높아서 그렇습니다 가스가 많으면

반짝거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다시 점점 멀어진다면

기념품 가게에서 그냥 나오는 사람처럼

여러 번 집었다 놓은 믿음은 어디쯤일까요

 

영생하는 사람은 늙지 않을까요 언제부터

소년이나 노인의 모습으로

망원경을 들어 기점을 찾아보세요

 

점차로

우리가 여기에 있다는

게 보일 겁니다

 

 

 

 

 

[수상소감]

 

마음이 자꾸 슬픈 것은 사람들이 화를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왜 저렇게 화가 나 있나. 왜 이렇게 날이 서 있나. 왜 이렇게 쉽게 분노를 하는가.

 

근데 왜 나는 이렇게 화가 날까.

 

화를 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고 어떻게 화를 풀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지하철을 걷다가 갑자기 앞을 막아서는 사람 때문에 울컥 화가 난 적도 있습니다. 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전에는…… 미워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조금 미워하긴 했지만 다시 만난다면 잠깐의 어색함을 견딘 후 다시 잘 지낼 수도 있을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미워하는 사람도, 만날 수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은 원체 그렇게 생긴 것이었습니다. 요 몇 년간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감정들을 다시 배우고 있었습니다. 분노, 슬픔, 후회, 회한, 죄책감, 미안, 부끄러움 같은 것들. 새삼 이것들이 이렇게 낯선 감정들이었는지 놀라웠고 여전히 슬프고 여전히 부끄럽고 여전히 미안하고 여전히…… 화가 납니다. 여전히 쉽게 화를 내고 마땅히 분노해야 할 것에 분노하기도 합니다.

 

나는 두려운 눈으로 주변을 살피며 누가 뒤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지 않은지, 누가 내게 화를 내고 있지 않은지 경계합니다. 하지만 무엇이 최선의 방어가 될 수 있을까요. 같이 분노하는 것? 혹은 더 깊이 숨어 들어가는 것?

 

과거에 천착하고 기억을 곱씹을수록 부끄러운 일들은 계속해서 떠올랐고 그런 기억들 때문에 반성의 목록은 길어져 갔습니다. 시를 속죄하듯 써 내려갔지만

 

시는 속죄가 될 수 없고 나를 정화시킬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차라리 끊임없이 두려워하며 부끄러워하고 그것들을 직시하며 한 글자씩 눌러 써야했습니다. 요즘은 이런 생각을 하며 쓰고 있었습니다. 시는 행동이 될 수 있을까? 시를 행동이라 부를 수 있을까.

 

지나간 감정과 행동들이 무거운 빚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이 어찌할 수 없는 부끄러움과 어찌할 수 없는 분노와 어찌할 수 없는 미안함 들을 청산하기 위해 애쓰며 지내고 쓸 것입니다.

 

수상 소식을 듣고 어쩐지 더 부끄러워졌습니다. 앞으로 더 경계하고 힘쓰라는 의미로 받겠습니다. 세 분 심사위원 선생님과 시산맥에 감사드립니다.

 

 

 

 

 

[심사평]

 

 

시인이 되겠다는 젊은 세대들의 관심과 열정은 여전히 두텁다. ‘여전히라는 부사가 필요한 것은 시를 쓰기에는 이 세상에 다른 것들이 무수히 차려지고 출현하고 있어서겠다. 하지만 시인이 되고 나서도 여전히 시인다운 시인이 되기까지 지난한 과정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복잡하고도 미묘하다. ‘이라는 것의 의미는 시인들의 행보에 기운을 실어주고 더더더 시인이 되어 가고 있음을 축복해 주는 일일 터.

 

9회 시산맥 작품상 본심에 넘겨온 작품은 총 5편이었다.

 

강재남 <일인칭 자기지시적 시점>

김관용 <바늘>

김정진 <()>

유병록 <짐작을 넘어>

전비담 <빈 삼다수 물병이 그리는 이름>

 

심사위원들이 당장 바랐던 것은 잘 쓴 시를 찾는 일이었겠지만 본심에 오른 여러 편의 시 앞에서는 그 이상의 의미를 찾는 일에 몰두하였다. 이 작은 선별의 작업이 시단에 풍부한 에너지를 쏟아붓는 일이 될 거라 생각하니 더욱 그러했다.

 

몇몇 작품에서 보이는 푸릇푸릇함은 고마웠다. 몇몇 작품에서 파도치는 역량들도 뜨거웠다.

 

그러다 두 편의 시로 압축을 보인 것은 그 두 편의 시에서 그 무엇을 넘어서는 면이 분명 보여서이고 작품의 밀도 또한 묵직해서였다. 시는 장면이기도 하지만 어떤 깊이에의 도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김정진 시인의 시와 유병록 시인의 시가 바로 그 두 편이었다.

 

김정진 시인의 작품, <()>에는 상징적인 질문과 인간의 감정이 배치되어 있다. 두 배치가 교차하면서 사람을 흡인한다는 점이 시를 여러 번 읽게 해주었으며 짧지 않은 시임에도 시가 일찍 끝나는 것이 아까울 정도였다.

 

유병록 시인의 작품, <짐작을 넘어>에는 인간사에 소금이라는 재료를 끼워 넣어 한 편의 시로 아주 잘 절여 놓았다. 읽으면 읽을수록 소금의 뒷맛 끝에 찾아오는 단맛을 읽었달까. 인생의 여러 신호들을 아름답게 받아들이는 마음도 존경스러웠다. 그래서 심사위원 모두는 그의 시 또한 여러 번을 읽었다.

 

본심에 오른 두 작품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는 두 작품의 호소력에 몸과 귀를 기울였다. 수상작 한 편을 가려내는 일로만 끝날 것이 아니라면, 상의 목소리를 좀 더 멀리 퍼뜨리려면 그 편이 의미가 있을 것 같아서였다. 최종결정한 작품이 김정진 시인의 작품이다. 김정진 시인의 이 시에는 시를 쓰면서도 삶을 그리워하는 아련함을 시 속에 제대로 풀어 놓은 것 같았다. 그 순정을 높게 치는 것으로 했다.

 

수상작 <()>만큼 새로움이 기쁨이 되는 상은 늘어나야 한다. 폼 잡는 상 말고, 시인 아닌 시 자체만을 격려하는 일도 많아져야 한다. 이 상과 이 상의 수상자가 그 받침이 된다면 더 없이 좋겠다. 아울러 좋은 시를 읽게 해준 젊은 시인들께 감사한다.

 

- 심사위원 장옥관 정채원 이병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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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에 검은 선을 그으며 / 이재연

 

 

오늘 내가 믿는 것은

밤의 솜털에 성냥불을 붙인 사람들의 아침

조용히 북쪽으로 날아가는 새들은

날개를 접고 주위를 주시한다

허공에 검은 선을 그으며

새들도 습관적으로 줄을 지어 날아간다

높이가 다른 냉담한 건물들과 함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우주의 한 구석에서

조금 경사진 길을 오르며 숨을 헐떡거리는 일

어디인가 무엇인가 아파도 많이 아파도

죽지 않는 영혼의 일 지루한 꿈의 일

그러니까 결국 새의 입장도

밤의 통증처럼 멀리 사라져가는

행인의 뒷모습과 같다

사랑을 취소하고 사랑을 꿈꾸는

새의 소리에는 인과가 없다

나를 생각하면 너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

낡은 체제에 매달리는 동안

불쑥불쑥 밀고 들어오는 꿈도

폭력이라는 것을 새는 알지 못한다

종일 숲에 매달리다 겨울이 간다

서로를 모르기 때문에 겨울이 간다

그럴 줄 알았다 그렇게 쉽게

네가 지나갈 줄 알았기 때문에

내일도 끝까지 허공에 취해 있을 것이라고

믿는 저녁, 새에 편입되어 읽던 책을 덮는다

 

 

 

쓸쓸함이 아직도 신비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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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꿈을 꿨다. 나는 바다와 가까운 곳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가까운 곳에 바다가 있었지만 그 바다와 나는 가깝지도 멀지도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바다에 대한 나의 애정은 특별한 것도 특별하지 않은 것도 없다. 그런 바다에 물이 들어오고 있었다. 일렁이는 파도가 점점 물의 수위를 높이고 있었다. 발 딛고 있는 모든 곳이 곧 물에 잠기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이곳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모래벽을 타고 올라가야 한다. 이제 물에 잠기지 않은 공간은 얼마 남아있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래벽을 타고 오르기를 시도했다. 바닷물은 모든 곳을 집어 삼킬 듯이 일렁이고 있었다. 깎아지른 절벽을 기어오르려고 버둥거렸지만 한 발자국도 올라갈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아우성이다. 이런 절벽을 잘 타지 못하며 기민하지도 못해 스스로 포기할지도 모르는 나 때문에 겁이 났다. 손도 발도 무디기만 하다. 도대체 쉬워 보이기만 하던 절벽이 몸을 내어 주지 않는다. 공포감이 점점 나를 조여 오는 순간 잠에서 깼다. 얼마나 다행인지 그 절망감과 공포감에서 빠져 나올 수 있다는 것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나는 민첩하지도 기민하지도 못했다. 그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조용히 움직이는 일이다. 움직이지 않으면 살 수 없으니 움직인다. 그것도 혼자나 소수와 함께 움직이는 것이 편하다. 부산하게 움직일 수는 없다. 부산하면 한 가지도 제대로 할 수 없다. 내 천성이 그렇다는 것이다. 내가 단순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도 오래되지 않는다. 단순해서 다행이다. 그 단순한 힘으로 시를 쓴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여기까지 오게는 했다. 시는 현실과 가깝지만 현실경제와는 멀다. 물질의 힘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해진 만큼 우리 삶의 질은 물질과 비례해지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 물질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물질이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물질의 가치가 그 밖의 가치를 잠식해버린 후 사람들이 그 물질의 노예가 되었을 때 우리 삶의 형태가 건강할 수는 없다. 효율성과 효용성의 프레임 속에 갇힌 인간 삶은 피로할 수밖에 없다. 후기근대의 주체들은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착취하며 살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물질의 풍요로움 속에 살면서도 주체들은 피로하다. 바다의 파도는 크게 일렁인다. 우리는 또 다른 입구 앞에 서있다. 예측이 분분한 미래의 입구 앞에 서있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이미 미래가 아니다. 우리는 이미 미래 속에 와 있는지 모른다. 에이아이가 그것이다.

 

이제 인간에게만이 인격이란 말이 주어질 수 있다는 생각은 착각일지 모른다. 감정과 감성을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최악의 경우 우리는 복제인간과 경쟁해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인간이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다행히 꿈에서 깨어났지만 그 꿈속에 있었을지라도 일렁이는 파도에 모든 인간이 수몰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어떻게든 어디서든 인간은 살아남으니까. 경제적 가치만이 효용인 시대에 경제적 가치가 없는 시를 쓰는 이유는 경제적 가치가 없는 것이야말로 경제적 가치가 전부인 현실의 모순과 부정을 극복할 수 있는 정신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바다 가까이서 살았지만 바다와 가깝지도 멀지도 않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바다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새로운 파도는 태어날 것이며 미래는 죽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 살아있는 동안 모든 시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움직일 것이다. 시는 육체를 입은 정신과 같은 것이니까. 시를 단순하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단순함의 힘으로 시를 밀고 나가고 싶다. 그런 내게 주어진 시산맥작품상은 소중하며 값진 것이다. 부족한 시를 선해 주시고 힘주신 심사위원님들과 시산맥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심사평]

 

()의 본령은 어디에 준거(準據)해야 타당한가. 갈수록 복잡해지고 혼란한 문화 속에서 매우 난삽해진 해체시의 진로 또한 어떤 관점에서 어떻게 재단해야 현명하다할 것인가. 근시안적인 편견을 접고 포용력 강한 눈높이로 작품을 아우르려면 어떤 자세, 어떤 노력이 배가 되어야할 것인가.

 

우리 한국문단은 1908년 신체시 이후 올해로 꼭 110년을 맞는다.

 

실험 시에서 출발한 신체시 이후 본격적인 서구 poetry를 수용하기 시작한 지 어느새 1세기가 훌쩍 흐른 것이다. 우리의 근대시가 이렇게 다양한 양태로 자리매김하기까지 커다란 획을 긋는 우리 문단의 흐름을 한번쯤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계간 시산맥은 전국의 시인들이 모여서 뜻을 이룬 시의 아고라이다. 이 담대한 집단은 근대시를 높은 안목으로 조망할 줄 아는 시인들이 이룩한 집성촌이자 시인들의 보금자리인 셈이다. 단순히 시를 사랑하는 동호인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다양한 목소리를 가진 시인들이 나름대로 개성을 뽐내며 전국적으로 모여든 커뮤니티, 현재 정회원 150명의 시산맥은 이제 국내는 물론 해외에까지 그 손길이 닿는 거대 집단이 되었다. 규모뿐만 아니라 견고한 응집력과 활달한 활동 면에서 시산맥의 위상은 우리 문단에 가히 획기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구랍 12월에 통권 32호를 내고 창간 10년을 코앞에 바라보는 시산맥이 이번에도 작품상을 뽑는다. 한해 4~5계절에 걸쳐 계간 시산맥에 게재된 작품들을 총괄, 거기서 좋은 작품을 골라내 선정하는 것으로 돼 있다.

 

예선을 거쳐서 이번 본심에 넘어온 작품은 총 18, 전부 제목과 시만 있을 뿐 시인의 이름은 생략된 채 익명으로 된 원고를 들고 세 명의 본심 심사위원들(김추인, 이화은, 김영찬 등)이 각기 6편씩 서로 돌아가며 작품을 검토하게 되었다. 익명 처리된 18편을 읽고 또 읽고 신중히 재고하는데 걸린 시간은 대략 두 세 시간가량.

 

우리는 각자 자신이 선택한 6편의 작품에 최고점수 5점 만점의 점수를 부여한 뒤 셋이서 이들 점수를 합산하는 방식으로 수상작을 뽑기로 하였다.

 

점수 합산을 마치고 난 뒤에야 우리는 작품 뒤에 숨어있던 작가의 실명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결과는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이은규 14, 나나너너」―서윤후 13, 녹은 이후」―이영주 13, 오른쪽 어깨에는 각이 살고 있다」― 정진혁 11, 전복」― 김분홍 12, 허공에 검은 선을 그으며」―이재연 14점 등 총 6편으로 압축돼 경합을 벌이게 된 것이다. 그래서 다시 1차 본심에서 가장 점수를 많이 얻은 이재연, 이은규, 서윤후, 이영주 등의 시가 2차 본심에서 최종 언급되었다.

 

약간 점수 차이가 났으나 우리들은 김분홍의 시, 전복이 완성도 면에서 결코 만만치 않은 작품이어서 아쉽다는 후일담을 나누기도 하였다. 그러나 끝까지 경합한 서윤후의 시와 이은규, 이재연의 시를 두고 우리는 다시 심사숙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분들 중에는 이미 큰 상을 탄 이력도 있어 가능하면 수상경력이 많지 않은 시인에게 기회를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여론도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조건을 뒤로 하고 심사위원 전원이 만장일치로 이재연의 시에 낙점한 것은 전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우리는 이재연을 선정하고 나서 자신들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이재연의 시, 허공에 검은 선을 그으며는 매우 안정적이고 담백한 작품이다. “오늘 내가 믿는 것은/ 밤의 솜털에 성냥불을 붙인 사람들의 아침으로 시작하는 이 시는, 난해하고도 난삽하기 짝이 없던 해체시로 인하여 한때 머리가 팽팽 아팠던 우리 문단에 시를 통한 위안, 시를 통한 마음의 평정이 아직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할 듯이 차분한 것이다. 서정을 기조로 안정되게 흐르는 리드미컬한 문체도 가히 일품이다. 이 시가 매력적인 것은 일체의 고리타분한 비유를 배재하고 시종 일관된 주제 하나로 공중을 건너는 새의 일상을 인간사에 편입, 안정된 알레고리를 차분히 확보한 것이 돋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종일 숲에 매달리다 겨울이 간다/ 서로를 모르기 때문에 겨울이 간다등 군데군데 경이로운 아포리즘 또한 읽는 이를 즐겁게 하는 시여서 기쁘다. 아마도 이런저런 요소가 알게 모르게 심사위원 전원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나 싶다. 수상을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김추인, 이화은, 김영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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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 속이기 / 최정란

 

 

노끈이나 나무에 매달아 놓으면

오래 간단다

그 말 믿지는 않지만

 

바나나 한 송아리를 묶어두기 위해서

나무를 찾다가

바나나 한 송아리를 박아두기 위해서

못을 찾다가

바나나 한 송아리를 매달아두기 위해서

망치를 찾다가

 

망치를 든 채 전화를 받는다

망치를 든 채 안부를 묻고

망치를 든 채 수다를 떨다가

왜 손에 망치를 들고 있을까, 잊는다

왜 못 하나가 거기 있을까, 잊는다

 

대화에 열중하느라

무심코 가장 날카로운 말로 애인의 가슴깊이

대못을 박는다

 

손에 망치와 못이 있으므로

 

어딘가에는 박아야 하므로

 

날카로운 말은 빨리 허기를 부르고

배가 고픈 나는 바나나를 먹는다

내 몸 위로 미끄러져 오는 바나나

내가 밟고 넘어지는 바나나

이윽고, 바나나 껍질처럼 휘어진

미끄러운 밤이 온다

 

검버섯이 생기기 시작한 바나나

썩어가기 시작해서 향기로운 바나나

검버섯이 피기 시작하는 바나나

바나나 바나나 오 바나나

 

날카로운 말은 꼭 애인의 가슴에 박아 넣는다

철철 흘리는 피를 보고야 만다

 

짐짓 속아주는 척 하는 사람아

사랑한다 사랑한다 고백하고 맹세하고

그리고 또 상처를 준다

 

몰래 기어들어가고 싶은 그림 속

무성한 파초잎 향기로운 이국의 마을에서

비로소 후회의 눈물을 흘리지만

또 다시 망치 자루를 드는 나날이여

 

바나나는 속지 않는다

다만 검은 향기를 풀어놓을 뿐

 

브래지어를 풀어헤치고 파초잎 지붕 아래 누운

내가 나를 속이기는

바나나를 속이기보다 어려워

 

오랫동안 나를 속인 나

속고 있는 줄도 모르는 나

이미 속을 대로 속아

더 이상 속을 것이 없는 바나나

오 바나나

 

 

 

 

장미 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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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시간 속이기

 

수상 소감 쓰기 강좌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진작에 미리 좀 써둘 걸, 생각하고 있습니다. 수상소감 쓰기가 시 쓰기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막막하고 낯설고 새로우니, 수상소감이라는 문학장르가 생겨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 또 쓰게 될 일이 생기면 그때는 능숙하게 쓸 수 있을런지요. 그때도 오늘처럼 크나큰 기쁨과 두근거림을 유지할 수 있기 바랍니다. 담담한 척 하지만 저, 떨고 있습니다.

 

바나나 속이기는 죽은 바나나를 살아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려는 시도입니다. 바닥에 수평으로 놓이는 대신 공중에 수직으로 걸려 있다고 바나나가 믿게 되면, 부패를 지연시켜 오래 싱싱함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합니다. 바나나가 정말 속는지 아닌지는 모릅니다만, 죽음을 삶으로 다시 회복시켜 보려는 이 터무니없는 시도는 잎과 줄기와 뿌리를 떠난 바나나가 다시 온전한 식물로 복원되는 상상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시를 쓰는 행위가 궁극적으로 죽음을 향해 가는 삶의 속도를 지체시키고 유예시킬 것이라고 믿습니다. 마치 바나나를 높은 곳에 걸어놓으면 빨리 시들지 않고 오래 간다고 믿는 것처럼, 이 믿음 또한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겠지요. 바나나 속이기는 결국 시간을 속여보려는 시도입니다. 그냥 속이면 시간이 쉽사리 속아 넘어가 주지 않을 것 같아서, 반복의 리듬을 가져오고, 미끄러운 촉각의 이미지를 빌려봅니다. 바나나의 욕망, 망치라는 가학, 그리고 못이라는 피학과 동시에 가학을 삼각구도로 연결해 봅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상처를 주는 일이 부지기수입니다. 가족과 사회가 가슴에 박는 치명적인 말의 못질은 사랑이라는 이름을 빌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차라리 무관심만도 못한 부모의 과도한 기대가 명랑한 천사를 무기력한 괴물로 기르기도 하고, 사랑이라는 이름의 구속이 사랑을 질식시키기도 합니다. 삶의 곳곳에 사랑이라는 이름의 못이 파놓은 못 자국이 어느 날 문득 블랙홀이 되어 삶을 통째로 빨아들이기도 합니다.

 

괜찮아, 괜찮아, 아침마다 거울 앞에 서서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사실 괜찮아, 괜찮아 라는 위로가 필요한 때는 괜찮지 않아, 괜찮지 않아, 소리치고 싶을 때입니다. 이 시대는 정말 괜찮지 않은 일 투성이입니다. 괜찮아, 괜찮아. 이 위로가 자신을 속이는 일이라는 것을 압니다. 모든 괜찮지 않은 순간을 괜찮지 않다고 정직하게 바라보다 보면 미쳐버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미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며 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하루도 잘 참고 잘 살았어. 저녁에 다시 못 박듯 저를 위로합니다. 이 정도면 정말 괜찮은 거야. 최소한 살아 있잖아.

 

시는 죽음의 순간이 오더라도 우리를 살게 할 것이라고 저를 속입니다. 확신하건대, 시와 더불어 우리는, 조금 덜 부패할 것입니다. 조금 느리고 완만하게 죽을 것입니다. 죽어도 다시 살 것입니다.

 

묵묵히 그리고 꾸준히 우뚝한 시의 봉우리를 키워가는 믿음직한 시산맥과, 시 앞에 더 오래 절망할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딜런 토머스의 시 한 구절로 수상소감을 맺고자 합니다. “푸른 도화선을 통해 꽃을 몰아가는 힘이 나의 푸른 나이 몰아가네 나무뿌리를 시들게 하는 힘이 나의 파괴자이니 나는 벙어리가 되어 구부러진 장미에게 말할 수 없네 내 청춘도 똑같은 겨울 열병으로 굽어졌음을”()

 

 

 

 

사슴목발 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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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성적(性的) 메타포와 사랑의 한 방식

 

시산맥작품상이 올해로 7회를 맞이했습니다. 1년간시산맥지에 실린 신작시 가운데 우수작을 선정하여 시상해 온 것인데, 해를 거듭하면서 수상자가 누구인가 관심이 커지고 있음을 실감합니다. 그만큼 객관적인 심사과정을 거치며, 선정된 시편은 작품성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올해는 작품상 후보에 오른 시편 가운데 각종 문예지 기 수상자와 시산맥편집진의 작품을 제외한 7편이 최종 논의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 강연호의 <인간적>, 윤의섭의 <느낌>, 이향의 <유리컵에 물기가 맺히지 않았다면>, 이화은의 <지독한 연민>, 최정란의 <바나나 속이기>, 이영식의 <두부를 건너는 여자>, 송종규의 <사막> 7편입니다. 심사위원들이 (이름이 가려진) 모든 작품을 돌려 읽은 후 최종 논의에 올린 것은 이 가운데에 윤의섭 <느낌>, 최정란 <바나나 속이기>, 이영식 <두부를 건너는 여자> 3편이었습니다.

 

시인의 이름을 지운 상태라 순전하게 작품의 완성도와 시적 상상력만이 시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격론을 거쳐 심사위원 과반수의 득점을 얻은 최정란의 <바나나 속이기>가 시산맥 작품상에 최종 선정되는 영예를 안게 되었습니다.

 

최정란의 <바나나 속이기>는 애인과 나의 관계를 성적 메타포로 풀고 있습니다. ‘바나나 묶어 두기바나나 속이기는 이 시의 중요한 맥락입니다. 바나나를 묶어두면 오래간다는 속설을 듣고 시적 화자는 바나나 한 송이를 묶어두기 위해서못을 찾고 망치를 찾고 나무를 찾다가 불현듯 걸려온 애인의 전화를 망치를 든 채받습니다. 여기서 바나나를 묶어 두려는 행위는 애인의 전화를 받으며 애인의 가슴 깊이 (말의) 대못을 받는 행위로 전이됩니다.

 

또한 사랑한다 고백하고 맹세하며 바나나를 속이허기나날이 또다시 바나나를 오래 (곁에) 두려는 욕구에 의해, 못과 망치를 들도록 자신을 내몹니다. 애인과 나의 관계 맺음은 바나나를 묶고 바나나를 속이려는 나의 열망(집착) 속에서 오히려 자신이 스스로 속고 있음을 깨닫는 아이러니함을 보여줍니다.

 

최정란의 <바나나 속이기>는 요컨대 애인과 나의 불균형한 관계 맺음을 직시하고 를 발견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긴요한 대상으로서 바나나를 설정하여, 그 성적 메타포를 통해 사랑의 한 방식을 드러내는바, 시적 성취에 도달하고 있는 수작으로 평가됩니다. 우수한 다른 시편들을 제치고 오랜 논의 끝에 최종 결정된 최정란의 <바나나 속이기>가 제7시산맥작품상을 수상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심사위원 유안진 송찬호 고봉준 전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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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당(草堂)두부가 오는 밤 / 문성해

 

 

옛날에는 생각도 못한 초당을 알아

서늘한 초당두부를 알아

동짓날 밤

선연한 선지를 썰 듯 썩둑썩둑 그것을 썰면

어느새 등 뒤로는

그 옛날 초당(草堂) 선생*이 난을 칠 때면

뒷목을 서늘케 하며 일어서던 대숲이 서고

대숲을 흉흉히 돌아나가던 된바람이 서고

그럴 때면 나는 초당 선생이 밀지(密旨)를 들려 보낸

이제 갓 생리 시작한 삼베속곳 일자무식의 여복(女卜)이 된다

 

때마침 개기월식하는 하늘 분위기로

가슴에 꼬깃꼬깃 품은 종잇장과

비린 열여섯 해를 바꿀 수도 있을 것 같고

저잣거리의 육두문자도 오늘 밤만큼은 들리지 않는다 하고

밤 종일 붙어 다니는 개새끼들에게도 한눈팔지 않고

다만 초당 선생 정지 간에서 저고리 가슴께가 노랗게 번진 유모가

밤마다 쑹덩쑹덩 썰어 먹던 그것 한 점만 우물거려봤으면

이 심부름 끝나면 내 그것 한 판만 얻어

뱃구레 홀쭉한 동생들과 실컷 먹으리라던

허리춤에 하늬바람 품은 듯 훨훨 재를 넘던 그 여복이

초당 선생 묵은 뒤란으로 죽어 돌아온 밤

 

그 앞에 서면 그 여복 생각에 선생도 목이 메였다는 그것을 나는

슬리퍼 찍찍 끌고 동네 마트에서 너무도 쉽게 공수 받아

이빨 빠진 할멈처럼 호물 호물 이리도 쉽게 먹는다는 생각에

그것이 오는 밤은

개짐**에 사타구니 쓸리는 줄 모르고 바삐 재를 넘던 그 여복처럼

목숨을 내놓지는 못할지언정

슴슴하고 먹먹한 시 한 편은 내놓아야 하지 않겠느냐며

우라질 초당두부가 오는 밤이다

 

* 허엽(?)1517-1580,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초당(草堂)이며 허균, 허난설헌의 아버지, 청백리이며 문장가, 조광조 윤근수 구수담 허자 등의 무죄를 주장하다가 파직 당함, 허엽은 강릉의 바닷물로 간을 한 두부를 만들게 했는데 그의 호를 따서 초당두부라고 하였다.

 

** 삼베를 기저귀처럼 잘라서 사용하던 옛날의 여성 생리대

 

 

 

 

내가 모르는 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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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참 많은 길을 돌아서 왔습니다. 긴가민가하면서도 저의 아둔함은 꼭 그 길의 막다른 끝을 보고 나서야 돌아오곤 했습니다. 물극필반(物極必反)이라고 했던가요? 극에 달해야만 반드시 돌아온다는 말을 사랑했습니다. 한번 발을 올린 이상은 그 길을 끝까지 맛봐야만 하는 직성으로 저의 발은 수시로 부어올랐습니다. 그러나 가면 안 되는 줄 알았던 그 길 위에서 저는 때때로 의외의 인연들을 만나 희희덕거리는 행운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나와는 하등 상관없는 인연들이라고 굳게 믿었기에 저는 가면을 쓰고 그들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무엇을 어찌해보겠다는 욕심이 없었기에 그들은 제게 들켰지만 저는 그들에게 들키지 않을 수가 있었습니다. 제가 가야 할 길이 그들 때문에 점점 멀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저는 그 짓을 좀처럼 끊어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제가 가리라 굳게 믿고 있었던 그 길이 원래부터 없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그 길은 대체 이 세상 어디에 있는 것인지요? 정말 있기나 한 건지요? 그것은 제가 어렸을 때 미루고 또 미루던 끝내는 밤새워도 하지 못하는 방학 숙제 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손안에 가장 비싸고 좋은 보석을 들고 있으면서도 남의 손에 든 돌덩이를 탐하고 있었던 게지요.

 

어쩌면 주는 것 없이도 내 앞에 달려와서 넙죽 엎드리는 이 길들과 인연들에게 이제 허리 숙여야 하는 나이가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살아가노라면 정답이니 필연이니 하는 말은 필요 없단 것을 요즘은 알게 됩니다. 모든 길들은 언젠가는 다 한곳에서 만나진다는 것과 모든 인연들은 그럴만해서 닿아 있다는 것도 이제는 머리 숙이고 받아들이려 합니다. 제가 만난, 만나지 못한 수많은 인연들이 제가 나기 한참 전부터 촘촘한 씨실 날실로 얽혀져 있었음을 생각하는 밤입니다.

 

더 좋은 작품을 쓰라는 채찍을 휘둘러주신 송찬호 선생님, 박남희 선생님, 유성호 선생님, 유정이 선생님께 허리 숙여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자기 연민과 넋두리에서 벗어난 시를 쓰라는 채찍으로 알고 달게 고통을 받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입술을 건너간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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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지속적으로 열어가는 시의 진경들

 

6회 시산맥작품상 본심에는 모두 열일곱 작품이 부쳐졌다. 시편들을 일별하는데, 시인의 이름은 지워져 있고 작품들만 제 모습 그대로 반짝이고 있다. 시인을 안 가르쳐주느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한다. 정말 시인이 누군지도 모르고 심사에 임하는 진풍경이 이어졌다. 어쨌든 다양하고 깊이 있는 미적 성취와 가능성으로 이분들 시편은 한결 같이 시산맥작품상의 제고된 위상을 보여주기에 족한 것이었다. 오랜 시간의 토론 끝에 심사위원들은 ?초당두부가 오는 밤?을 수상작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이 시편은 열여섯 나이의 여복이 늦은 밤 밀지를 가지고 어디론가 길을 떠났을 모습을 통해, 한 시대의 어둑하고 춥고 불온했을 순간을 서사적으로 담아낸다. 여복의 죽음과 시인이 느끼는 서늘한 초당두부의 감각이 아름다운 비극성의 언어를 만들어낸 것이다. 시적인 것서사적 흐름의 결속을 통해 우리는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존재 전환의 순간을 목도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지상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들의 비극적 존재 형식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감각적 선명성과 서사적 얼개로 시적 진경을 보여준 이 시편에 적극 공감하게 된다. 일견 어둑하고 쓸쓸해 보이는 언어를 통해, 존재의 심층을 따듯하게 감싸 안는 데서 이 시편은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나는 ?계단에 이르는 길?을 깊이 읽었다. 일상적으로 계단을 오르고 내려오고 바라보고 거기 머무르면서 우리는 온갖 충일한 감각의 순간으로 즐거운 상상을 하지 않는가. 반복과 점층을 통해 삶의 심연과 표층에서 일고 무너지는 우리의 존재 형식을 아름답게 형상화한 가편이었다고 생각된다.

 

심사가 진행되는 동안 심사위원들 사이에 적지 않은 이견이 제출되었지만, 이는 그야말로 에 관한 여러 생각과 감각 그리고 평가의 준거들을 절실하게 느끼게 해준 시간이었다. 이처럼 자신 있게 시산맥작품상 심사 과정의 공정성과 엄정함을 피력하면서, (나중에 해당 시인을 알게 되었지만) 문성해 시인의 수상을 거듭 축하한다. 우리 시의 진경을 열어가는 모습을 지속적으로 보여주기를 소망한다.

 

심사위원 송찬호 유성호 유정이 박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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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군가의 지주(地主)이다 / 차주일

늙은 삼각형의 공식

 

 

땀내 한 다랑이 경작하는 농사꾼과 악수할 때

손바닥으로 전해 오는 악력(握力)은 삼각형의 높이이다

얼굴이 경작하는 주름의 꼭짓점마다 땀방울이 열려 있다

땀이 늙은이 걸음처럼 느릿느릿 흘러내리는 건

얼굴에서 발까지 선분을 그어 품의 높이를 구하기 때문

소금기를 남기며 닳는 땀방울 자국을

사람의 약력(略歷)으로 출토해도 되나?

겨우내 무너진 밭두렁을 족장(足掌) 수로 재며

뙈기밭의 넓이를 구하던 이 허리 굽은 사내는 나의 첫 삼각형

등 굽혀 만든 앞품을 내 등에 밀착하고

새끼가 품의 넓이란 것 스스로 풀이하게 한 삼각형 공식

어린 손등에 손바닥을 밀착하여

까칠까칠한 수많은 꼭짓점을 별자리로 생각하게 한

엄지와 검지를 밑변과 빗변처럼 괴게 하여

절대 쓰러지지 않는 높이로 연필 거머쥐게 하고

내 이름자를 새 별자리 그리듯 처음 쓰게 한

피라미드처럼 몰락해버린 한 사내의 악력은, 왜 지금껏

사내의 품을 땀내로 환산하게 하는가

늙은 삼각형이 악수한 손을 놓지 않고 흔들어댄다

내 팔꿈치가 농사꾼의 허리 각도를 이해할 때

내 몸 통각점들이 지워진 선분을 다시 긋는다

내 이름자 획순으로 흐트러진 사내의 골격이 내 몸속에서 읽힐 때

연필심에 묻혔던 침만큼의 땀이 손바닥에 어린다

내 눈은 왜 땀에 젖은 손바닥을 꼭짓점으로 이해하는가

젖은 눈은 왜 나를 타인 되게 하는가

내가 누군가의 눈으로

그의 얼굴과 손과 발 세 변의 길이를 잰다

내가 누군가의 눈을 껌벅이며 곤혹스러워할 때

삼각형의 높이를 잴 눈물이 제자리에서 마른다

내가 이 점()에 염기를 경작하여

누군가의 발까지 이르는 높이 하나 짠내 나게 그으면

나는 누군가의 지주(地主)가 된다

 

 

 

어떤 새는 모음으로만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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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엄마, 살인을 했어요.

 

엄마, 오늘 참 서러운 일을 겪었어요. 그림 한 점을 삼백만 원에 팔았다는 화가에게 축하한다고 말했다가 핀잔을 들었어요. 물감 값이 얼마이고 들인 시간이 몇 날 며칠인데 지금 뭔 개소리하느냐, 천만 원도 헐값이라며 화를 내더군요. 그래서 “그럼, 선생님께서 극찬한 졸시 「얼굴」은 얼마쯤 할까요?”라고 물었더니 “시를 쓰는데 무슨 재료비가 들어간다고 돈을 바라?”라고 대답하더군요.


 엄마, 전 아무런 반박을 하지 못했어요. 예절 차리느라 그런 게 아니었는데, 반박 못 한 이유를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화를 다스리지 못해 당신께서 하지 말라는 욕을 뱉고 말았어요. 그런데도 상한 마음이 영 가시지 않았어요. 엄마, 열댓 정류장을 걸어 원고지 형식으로 배치된 고시원 쪽방으로 돌아와 문장 속 화자처럼 누웠는데, 내게도 십여 년 넘게 가져다 쓴 시 재료들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 외상값이 이토록 어마어마한 줄 몰랐어요. 그간 참 여러 종류의 잉크를 바꿔댔더군요. 그중 가장 순도 높은 잉크는 외로움과 슬픔으로만 살 수 있는 진품이었어요. 요즘은 가장 비싸게 산 잉크를 사용하고 있더군요. 한때 신처럼 존경하던 아빠를 연민으로 바라보는 딸의 눈빛으로 산 잉크는 필기감이 으뜸이에요.

 

엄마, 저는 왜 외로움과 슬픔으로 잉크를 사는 신앙을 갖게 되었을까요? 잉크를 살 때마다 장기를 도려내는 듯한 통증은 왜 그리도 황홀한지요? 아들의 지갑에서 도둑질한 돈으로 마약을 하며 영혼 몇 박자를 빌리는 뽕쟁이 음악가를 이해하게 될까요?


 엄마, 몇 날 며칠 걸려 쓴 시가 마음에 들지 않아 구겨서 버릴 때마다 원고지 속 관찰자와 중심인물은 어쭙잖은 시인을 바라보며 또 얼마나 마음 아팠을까요. 엄마, 화가 나서 잉크병을 집어 던졌어요. 잉크병은 아무리 멀리 던져도 제 마음에서만 깨어지더군요. 삽을 잡았다가, 들통을 지었다가……, 결국 하루도 못 넘기고 다시 원고지 앞에 투항하여 펜을 잡는 탕자처럼 말이죠. 엄마, 이럴 때마다 외우는 기도문이 제게도 있어요. “딸아, 죄송하다.” 이 주문은 슬픔을 부르는 데 최고로 영험하더군요.

 

 엄마, 기억하세요? 제 꿈이 당신의 슬하에서 원색일 때, 준비물로 도화지 한 장 챙겨주지 못한 걸 자학하며 어린 화가에게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세요?

 

엄마, 그때 왜 “아들아 미안하다.”가 아닌 “아들아 죄송하다.”는 단어 하나 바꾼 주문으로 제 미래의 언어까지 혼색시켜 놓은 건가요?

 

 엄마, 어미가 자식에게 쓰는 “죄송”이란 말이 얼마나 아픈 색깔인지 써낼 수 없어 저는 내일의 통증을 오늘 느끼는 형벌에 살고 있어요.


 엄마, 어린 제게 도화지 대신 주셨던 “죄송”이란 말을 이제 돌려드려야겠어요. 엄마, 그동안 제가 무한정 가져다 쓴 시 재료가 “엄마”였더군요. 창조주보다도 높은 신성성도, 기꺼이 돌을 맞는 창녀의 영혼도, 심지어 제 진심까지도 엄마를 빌리지 않으면 온전히 적어낼 수 없었더군요.

 

이런 사실을 깨닫고 나니, 화가의 뺨을 후려치지 못한 모자란 놈에게 너무 분했어요. 엄마, 당신을 헐값 취급당하게 한 죄송함은 살인을 생각하게 했어요. 그래서 화가를 만났던 곳으로 열댓 정류장을 다시 걸어갔어요. 칼을 쥔 한 놈이 홀로 남아 욕지거리하고 있더군요. 엄마, 구겨진 원고지 형식의 격자 창문에 어른거리는 그놈의 그림자와 저는 관찰자와 중심인물이 되어 마주 보았어요. 엄마, 그놈을 난도질해버린 자가 관찰자였는지 중심인물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젠 엄마를 헐값 취급하는 놈은 이 세상에 없을 거예요. 그러니 이제 저를 용서해 주세요. 존경하는 가족을 버리고, 평온한 삶을 버리고, 직장과 일을 버리고, 부양의 의무를 버리고, 극복 초월이 아닌 실패 초월로 나를 버리는 저를 용서해 주세요.

 

엄마, 당신이 씨앗으로 놓은 “사랑”을 “죄송”이라는 흉작으로 돌려드리니 제발 받아주세요. 엄마, 정말 죄송해요. 하지만 지금은 당신께 씨앗을 빌려야만 하는 계절이어서 저는 더 오래 홀로가 되어 떠돌아야만 해요. 그러다가 불쑥 외로움과 슬픔이 북받치면 다시 당신을 찾을지도 몰라요.


엄마, 당신에게 재료를 빌리려 가는 지름길은 왜 떠돌아야만 당도하는 외길뿐인가요?

 

 

 

 

냄새의 소유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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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늙은 삼각형 혹은 아버지의 내력(來歷)을 찾아서

 

제5회 시산맥작품상은 예년과 마찬가지로 최근 1년간 ?시산맥?에 게재된 시 가운데 추천받은 20편의 예심 작품이 그 심사 대상이 되었다. 예심에 올라온 20편의 작품들을 무기명 표기로 심사위원들이 돌려본 후 최종심사 대상으로 5편의 작품이 선정되었다. 차주일의 「나는 누군가의 지주이다-늙은 삼각형의 공식」, 김지녀의 「부화」, 정채원의 「새장을 키우는 사람」, 홍일표의 「북극거미」, 이덕규의 「고슴도치」가 남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이미 문학상을 받은 경력이 있는 홍일표, 이덕규 시인은 최종 심사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난맥 끝에 시산맥작품상을 수상하게 된 영예의 작품은 차주일의 「나는 누군가의 지주이다-늙은 삼각형의 공식」이다. 젊고 신선한 문학적 감각이 돋보이는 김지녀의 시와 생(生)의 깊이 있는 사색과 노련한 표현력이 눈길을 끈 정채원의 시를 제치고, 마침내 시산맥작품상을 수상하게 된 차주일의 시 「나는 누군가의 지주이다-늙은 삼각형의 공식」은 농사꾼/ 지주, 허리 굽은 사내/ 나, 악력(握力)/ 약력(略歷), 꼭짓점/ 별자리 등의 대척점들이 촘촘한 행간의 연결과 배치, 확장된 주제의식을 바탕으로 성실하게 써내려간 점이 심사자의 마음을 움직였다. 기교와 무의미가 난무하는 최근 시단에서 이처럼 통찰력 있는 시편을 만난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나는 누군가의 지주이다-늙은 삼각형의 공식」의 매력은 첫 행부터 강력하게 다가온다. “땀내 한 다랑이 경작하는 농사꾼과 악수할 때/ 손바닥으로 전해 오는 악력(握力)은 삼각형의 높이이다”가 압도하는 첫 문장의 힘은 마지막 행 “누군가의 발까지 이르는 높이 하나 짠 내 나게 그으면/ 나는 누군가의 지주가 된다”로 확장되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재)발견은 뚜렷한 시적 성과로 여겨진다.

 

 차주일의 시는, 화자가 주름지고 땀으로 얼룩진 농군의 손과 (대비되는) 매끈한 자신의 손을 마주 잡은 순간에, 섬광처럼 악력(握力)에서 솟구치는 삼각형을 불현듯 마주하고 그 늙은 농군의 손끝에서 한 평 땅을 일구는 삼각형의 공식을 발견한다는 시상(詩想)의 출발과 전개방식이 눈길을 끈다. 농사꾼의 생(生)이, 마주 잡은 손의 악력(握力)으로 읽히는 시적 상상력이 매우 독특하고 인상적이다. 특히 ‘늙은’ 삼각형의 공식으로 대변되는 ‘세월의 잔상’을 수학공식을 풀 듯 섬세하게 농군의 한 생을 풀어가고 있는 점이 매혹적이다. 마주 잡은 농군의 손은 내 아버지의 주름진 손을 기억하게 하는 계기가 되고, 농사꾼 아들인 나를 발견하게 한 찰나의 깨우침을 던져준다. 농군처럼, 아버지 역시 생의 전부인 농지에서 평생을 산 농사꾼이었으며, 나는 그 아버지의 ‘지주’로 살아왔다는 (부끄러운) 사실이 뒤늦은 깨달음으로 다가와 “염기(鹽氣)의 짠 내”로 (나의 눈을) “젖은 눈”이 되게 한다. “그(늙은 사내, 아버지)의 얼굴과 손과 발 세 변의 길이”로 마주한 “악력”의 삼각형을 통해 나는 아버지의 품의 넓이를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나는 “내 몸속에서 읽히”는 “통각점”들의 선분으로 만난 삶의 ‘공식’을 통해 아버지의 “약력”을 마침내 읽게 된다. 그러나 내가 아버지의 지주로 살아온 사실을 곤혹스러워하는 것은 아버지 품의 넓이야말로 딱 내가 이룬 만큼의, 그만큼의 인생으로 남겨진 아버지의 삶이란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나 ‘아버지’들의 지주가 되고, 아버지는 우리를 ‘지주로 살게 하는’ 늙은 삼각형의 토대가 되어준다는 것. 차주일의 시 「나는 누군가의 지주이다-늙은 삼각형의 공식」은 이러한 반성적 깨달음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시적 성취에 이른 ‘좋은 시’인 것이다. 영예의 시산맥작품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전해수(문학평론가, 본지편집기획집필위원)

 

 

 


[심사평] 당위와 존재의 짐을 지고 사막을 걸어가는 낙타들

 

시인이 시를 쓰는 행위는 일차적으로 어떤 이익이나 보상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 문단에 유수한 문학상들이 존재하는 것은 사막을 걸어가는 낙타에게 주는 물 한 모금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 한 모금을 마신 낙타는 얼마 가지 않아 또다시 갈증을 느끼게 되겠지만 그 물 한 모금의 희망이 낙타로 하여금 사막을 걸어갈 수 있게 해주는 힘의 원천이 된다. 물의 소중함은 가장 목이 마른 낙타에게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시산맥 작품상은 시의 사막을 걸어가는 낙타인 시인에게 건네주는 물 한 모금과 같은 것이다. 시산맥이 수많은 낙타들 중에서 오랫동안 목말라 있는 낙타를 찾아내어 물 한 모금 건네주는 일을 시작한 지 벌써 5년이 지났다. 사막을 건너는 낙타의 소중함은 낙타의 등에 무엇을 싣고 가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다르게 평가될 수 있다. 어떤 낙타는 당위(當爲,Sollen)라는 짐을, 어떤 낙타는 존재(存在,Sein)라는 짐을 지고 시의 사막을 걸어간다. 어떤 낙타는 이 두 가지 짐을 다 지고 사막을 건너는 경우도 있다.

 

 철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죽음을 맞게 되는 불완전한 현존재(Dasein)로서 결코 인간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가치인 당위와 일치할 수 없지만, 궁극적으로 ‘당위를 지향하는 존재’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존재와 당위가 완전히 일치하는 주체는 신(神)밖에 없다. 시인은 신이 아니지만 시적 언어와 상상력을 통해서 존재와 당위의 일치를 꿈꾸는 자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의 언어는 존재와 당위 사이에서 춤추는, 주술을 지니고 있는 시적 영매(Mediums)라고 말할 수 있다. 시인은 시적 언어로 당위와 존재 사이에 생명이 살아 꿈틀거리는 시적 공간을 창조해낸다. 낙타는 목적지에 기다리고 있을 어떤 이익이나 보상을 바라고 사막을 걸어가지 않지만, 낙타의 등에 실린 사유의 짐들로 인해서 그가 걸어가는 길은 비단길이 되기도 한다.

 

 우리 시단에서 좋은 시를 쓰는 시인을 찾아내어 작은 상을 주는 일은 사막을 걸어가는 수많은 낙타 중에서 어떤 특정한 낙타에게 물 한 모금 건네는 일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선택에는 언제나 편견이 작용하게 마련이지만 시산맥은 이러한 편견의 신기루를 넘어서 새로운 시의 지평을 걸어가는 낙타를 찾아내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제5회 시산맥 작품상 운영위원회는 시산맥 회원들로 구성된 수많은 시인들의 추천을 받은 20편의 작품들을 대상으로 엄밀한 심사를 거쳐서 최종적으로 다섯 분의 시인을 선정하고 2차 심사를 하여 최종 수상후보작을 결정하였다.

 

 최종 5편에 든 작품은 정채원 시인의 「새장을 키우는 사람」, 이덕규 시인의 「고슴도치」, 홍일표 시인의 「북극 거미」, 김지녀 시인의 「부화」, 차주일 시인의 「나는 누군가의 지주이다」 등이다. 이들 작품들은 어느 것을 선정해도 좋을 만큼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서 심사를 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심사자들은 이들 중에서 이미 물을 마셔서 갈증이 덜한 시인들보다, 오랫동안 새로운 시의 사막을 걸어왔음에도 물 한 모금 얻어 마시지 못한 시인들로 대상을 좁혀서 최종적으로 정채원, 김지녀, 차주일 등 세 분을 대상으로 심사를 한 결과 차주일 시인의 「나는 누군가의 지주이다」를 제5회 시산맥 작품상 수상작으로 선정하였다.

 

 최종 후보작에서는 제외되었으나 뛰어난 작품성을 보여준 홍일표 시인의 「북극 거미」는 마치 조정권의 「산정묘지」를 읽을 때처럼 비장미마저 느껴진 작품이다. 조정권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 역시 북극이라는 혹한의 공간을 배경으로 전개되는데, 아마도 극광(오로라)으로 표상되는 “공중의 혈맥을 더듬던 북극 거미”는 ‘국경 밖의 눈보라’가 되어 ‘눈썹 흰 노래’를 듣는 시인을 표상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여기서 시인으로 표상된 ‘북극 거미’는 ‘태어나지 않은 아이(詩)’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걸어오는 ‘검은 남자(밤)’를 기다려 ‘얼음 같은 그믐달’로 형상화된 시를 포획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일종의 메타시로 읽혀지는 이 시는 빛나는 비유를 통해 비장미가 느껴지는 새로운 시적 공간을 창출해내는 수작으로 평가된다.

 

 이덕규 시인의 「고슴도치」는 유적 속에서 발견된 ‘한 무더기의 녹슨 창’을 유월의 서늘한 숲에서 만난 ‘고슴도치’로 비유해내는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여기서 ‘녹슨 창’이 정치적으로 은폐된 ‘민초들의 무장봉기’로 형상화되면서 이 시는 일정한 알레고리의 형식을 갖추게 된다. 이 시는 아무리 오래된 정치적 억압도 결국은 고슴도치의 살을 뚫고 돋아나는 분노의 창에 의해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전언을 담고 있다. 시인이 ‘아름다운 창’으로 묘사하고 있는 ‘분노의 창’을 시로 본다면 이 시는 정치적인 폭력을 넘어서는 시의 위의를 보여준 명징한 작품으로, 힘없고 가난한 시인들에게 커다란 위로를 선사해준다.

 

정채원 시인의 「새장을 키우는 사람」은 ‘새장’으로 비유된 인간의 육체 속에 존재하는 ‘울음의 주체’인 새를 명징하게 형상화한 작품으로, 이 시 역시 메타시로 읽힌다. 여기서 시인의 육체는 “어느 쪽에 먹이가 더 많은지 어느 비탈에 걱정이 많은지”를 모르는 ‘눈 먼 방’으로 표상되어 “먹이보다 빛이라는 듯 제 그림자를 끌고 창가로 몰려드는 새들”인 시의 울음을 가둘 수 없는 새장으로 비유된다. 이처럼 새를 새장 속에 가두는 일은 지난하다. 하지만 새장 속에 갇힌 새의 울음을 듣는 일 역시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점에서 시인의 아이러니가 느껴진다. 하지만 이러한 아이러니야말로 이 시의 긴장감을 유지시켜주는 시적 장치라는 점에서 이 시의 균형 감각이 돋보인다.

 

 김지녀 시인의 「부화」는 나뭇가지 끝에 달을 잉태하는 창밖의 나무와 창 안에서 시의 부화를 꿈꾸는 주체인 시인을 ‘줄탁동시(啐啄同時)’의 관점에서 형상화한 작품으로, 이 시 역시 메타시라고 말할 수 있다. 시인에 의하면 시인이 시를 쓰는 행위는 나뭇가지 끝에 달이 뜨는 것과 같은 것인데, 그것은 ‘한 번도 잡아주지 않은 손(나뭇가지)’을 향해 달(詩)이 뜨는 것과 같은 지난한 일이라서 나무들이 사나워지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이는 새끼를 밴 짐승이 출산 때가 가까워지면 신경이 예민해져서 사나워지는 것과도 같은 이치이다. 그런데 시인이 꿈꾸는 알은 노른자위처럼 오롯하고 흰자위처럼 미끄러운 것을 흘리는 양면성을 지닌 알이다. 이것은 시가 지니고 있는 구심력과 원심력을 상징하는 것이어서 보다 명징하게 읽힌다. 하지만 알을 둘러싸고 있는 밤이라는 껍질은 쉽게 깨어지지 않는다. 시인은 시를 부화시키는 일이 “늙은 얼굴보다 더 두꺼워진 손을 잡고/ 담을 따라 이끼가 번”지는 인내의 과정을 거친 후에야 가능하다는 것을 설파하면서, 끝내 ‘한 번도 잡아주지 않은’ 시인의 손끝에서 달(詩)을 부화시키고 있다. 이처럼 이 시는 뛰어난 비유를 통해서 시창작 과정을 낯설게 현상화해 낸 수작이다.

 

 끝으로 제5회 시산맥 작품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차주일 시인의 「나는 누군가의 지주이다」는 시인 자신의 정체성을 농사꾼인 아버지의 존재성(삼각형)에서 찾아내는, 일종의 ‘뿌리찾기’라는 주제를 근간으로 하고 있는 수작이다. 특히 이 시는 앞의 시들에 비해 농사꾼인 아버지의 땀과 흙으로 표상되는 삶의 진정성이, 시인이 스스로 지주(시인)를 자각하게 되는 내밀한 과정 속에 녹아있어 감동을 더해준다. 이 시에서 농사꾼 아버지의 얼굴과 손과 발을 연결하는 삼각형으로 표상되는 땅은 시인이 아버지로부터 생래적으로 물려받은 시인의 영토라는 점에서 시적 당위성을 획득한다. 차주일 시인에 의하면 시인의 약력은 “땀이 늙은이 걸음처럼 느릿느릿 흘러”내려 “얼굴에서 발까지 선분을 그”으며 흘러내리는 “소금기를 남기며 닳는 땀방울 자국”같은 것이다. 시인은 “겨우내 무너진 밭두렁을 족장(足掌) 수로 재며/ 뙈기밭의 넓이를 구하던” 허리 굽은 사내인 아버지를 자신의 ‘첫 삼각형’ 즉 시인의 원형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시인의 사유는 드디어 “등 굽혀 만든 앞품을 내 등에 밀착하고/ 새끼가 품의 넓이란 것 스스로 풀이하게 한” 아버지의 삼각형의 공식이야말로 시인 자신의 삶의 공식임을 깨닫게 해준다. 이러한 시인의 깨달음은 시인으로 하여금 자신을 타자의 눈으로 새롭게 바라보는 객관적인 눈을 갖게 해준다. 시인에게 있어서 타자의 눈물 어린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는 일은 “염기를 경작”한 아버지의 땅을 물려받아 진정한 지주(주체적 시인)가 되는 일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차주일의 시는 삼각형으로 표상되는 튼실한 이미지의 영토 위에 세워진 아름다운 체험의 집이다. 이 시가 보여주는 튼실한 뼈대와 땀내 나는 살은 차주일 시인이 앞으로 세워나갈 시의 집이 얼마나 믿음직스러울지를 가늠해보는 중요한 척도가 된다.

 

 끝으로 제5회 시산맥 작품상이라는 문패 위에 차주일이라는 뛰어난 시인의 이름을 새기게 된 것은 시산맥의 기쁨이다. 다시 한 번 시산맥 작품상 수상자로 선정된 차주일 시인께 축하의 인사를 드리고, 아쉽게도 마지막 선에 들지 못한 시인들께 죄송스러운 마음을 얹어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해드린다.

 

박남희(본지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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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문 / 최은묵

 

 

터진 신발 밑창에서 땅과 연결된 문을 발견했다

발을 움직이자 나무뿌리 틈으로 소리들이 흘러나왔다

발가락에 힘을 주고 지냈으니 눌린 것들의 소란은 도무지 위로 오르지 못했던 거다

 

나무 밑동이 전해주는 야사(野史), 자식들 몰래 내뱉는 어머니의 한숨, 대개 이런 소리들은 바닥으로 깔리는데

 

누워야만 들리는 소리가 있다

 

퇴적층의 화석처럼 생생하게 굳어버린,

이따금, 죽음을 맞는 돼지의 비명처럼 높이 솟구치는,

발자국을 잃고 주저앉은 소리들

 

소나무는 자신이 들은 소리를 잎으로 콕콕 찍어 땅 속에 저장하고

땅에 발자국 한 번 남기지 못한 채 지워진 태아는 소리의 젖을 먹고 나무가 된다는 걸, 당신은 알까

 

낡은 라디오 잡음처럼 바닥을 기어 다니는 뿌리 곁에

밑창 터진 신발을 내려놓았다

서서히 땅의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오래된 소리들을 다 비워낸 문은 새로운 이야기로 층층이 굳어지고

나무들은 땅속에 입을 둔 채 소리들의 발자국으로 배를 채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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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아직도 갈대 잎을 흔들리게 하는 소리를 종이에 옮겨 놓지 못했습니다. 갈대숲까지 가는 길이 너무 멀기 때문입니다. 바닥을 기어가는 동안 숱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소리마다 냄새가 있고, 저는 사람 냄새에 머물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냄새는 사람 냄새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닥에 가까운 냄새일수록 아픔이 깊었습니다. 그런 냄새가 말하는 소리를 듣기 위해 바닥에 눕고 엎드리고 기었습니다.

 

바닥은 제가 은둔하는 터입니다. 이곳을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계절만이 때에 맞춰 찾아옵니다. 그런 곳에 누군가 다가오는 것이 낯설기만 합니다. 저는 아직 찾아야 할 냄새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시산맥작품상>은 낯선 손님이었습니다. 이 어색하고 어리둥절한 상황을 명확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저를 보고 사람들은 시인이라고 부릅니다. 학연, 지연, 인연 없이 문단을 배회하고 있는 저는 한때 좋은 시인과 좋은 시를 쓰는 시인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었습니다. 아직도 그 구분을 선명하게 가르지 못한 채 막연히 시 앞에 섭니다.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로 시 앞에 서면 늘 두렵습니다. 저에게 있어 시는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머무는 곳인데도 그렇습니다.

 

<땅의 문>을 찾기 위해 바닥에 누워있던 저의 소박한 몸부림을 주목해주신 <시산맥>에 감사드립니다. 바닥에서 음지에서 간혹 볕 좋은 담벼락 밑에서 조근조근 이야기를 들려준 투명한 영혼들에게 제일 먼저 이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곳에도 꽃이 피고 새가 울고 별이 뜨고 노래가 있다는 걸 사람들은 알까요?

 

아직도 들어야 하는 소리와 맡아야 하는 냄새가 많습니다. 어쩌면 평생 다 적지 못할 만큼 많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낮은 소리를 통해 위로를 받은 제가 무얼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드넓은 시의 길에서 무릎이 헤지도록 기어보겠습니다.

 

유명무명을 떠나 작품으로 인정받았다는 것은 큰 위로이며 격려입니다. 시산맥 작품상 수상자 전화 통보를 하면서 좋은 시를 발표하고 더 좋은 시를 쓰라던 박남희 시인의 조언은 큰 교훈이었습니다. 멈추지 않고 나아갈 수 있다는 건 새로운 세상을 향한 움직임이 분명합니다. 제가 쓴 시를 읽어주고 묵묵히 응원해주는 소수의 독자에게 두 번째로 수상소식을 전했습니다. 마치 본인들의 일처럼 기뻐해주신 분들께 또 하나의 빚을 졌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말이 지금의 기쁨과 어색함을 모면할 수 있는 최고의 표현입니다. 좋은 작품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노력하는 <시산맥>의 정신을 훼손하지 않도록 더 많이 고민하고 아파하겠습니다.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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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낮은 땅과 소통하는 터진 신발'

 

올해로 시산맥 작품상이 제정된 지 4년을 맞는다. 처음에 시산맥 작품상을 제정하면서 우선적으로 내세운 취지는 공정하고 깨끗한 작품상이 되도록 운영해나가는 것이었다. 그것은 우리나라에 수많은 문학상이 있지만 진정으로 공정하게 운영되는 문학상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문학상의 상금 액수나 문학상을 수상한 문인의 유명도가 권위를 대신하는 기존의 문학상보다, 상금의 액수는 적지만 오로지 문학성만을 기준으로 공정하게 운영되는 문학상이 더 권위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시산맥 작품상은 기존의 어떠한 문학상보다 부끄럽지 않은 문학상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1년 동안 시산맥 시인들에 의해 선정된 시산맥 작품상 후보작 20편은 저마다 그만한 규모와 무게를 지니고 있어서 어느 것을 선정해도 무방할 만큼 작품 수준이 높았다. 심사위원들은 시인들의 이름이 표기되지 않은 20편의 작품을 놓고 A, B, C로 점수를 매겨서 최종심에 여섯 작품을 올린 후 결선 심사에 들어갔다. 비교적 심사위원들의 고른 득표를 받은 작품은 송찬호의 <장미>, 안은주의 <물의 각>, 장옥관의 <탱자는, 탱자가 아닙니다>, 조정의 <시신기증>, 최은묵의 <땅의 문>, 황병승의 <목책 속의 더미dummy> 등이다. 작품성이 높은데도 덜 주목받은 숨은 보석을 발굴하려는 시산맥 심사의 내부 기준을 참고하여 이미 문학상을 많이 받은 분이나 등단 연조가 짧은 시인을 제외하고 마지막 결선에 올린 시인은 황병승, 조정, 최은묵 등 세분이다.

 

우선 황병승의 시는 제목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목책(나무 울타리) 속의 인형들이라는 상징적인 소재를 바탕으로 쓴 시인데, ‘설교 기계로 대변되는 기성세대의 낡은 가치관을 풍자하고 있는 일종의 알레고리 시이다. 이 시는 상징성 짙은 제목과 사회성 있는 주제에 비해 내용이 지나치게 산문적이어서 긴장감이 떨어진다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또한 이 시는 정치인으로 대변되는 기성세대의 가치관 뿐 아니라 기존 시의 문법까지 해체하려는 듯한 극단적 산문성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내용이 기성세대의 설교(가치관 강요)에 국한 되는 단조로움을 벗어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조정 시인의 작품은 어머니의 시신을 해부학교실에 기증하고 귀가하는 화자의 복잡한 마음을 에둘러 표현한, 간접화법이 돋보이는 시이다. 화자의 충혈된 눈을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머지않은 곳마다/ 신호등은 그 눈이 선지적으로 붉었다고 진술하는 것이나, 임종하는 어머니를 어머니는 영사기 리모콘의 꺼짐 버튼을 누르는 중이었다는 식으로 표현하는 간접화법은 슬픔을 억누르는 화자의 마음을 오히려 울림 있게 전달해준다. 이 작품은 작품의 진정성이나 절제된 표현 기법이 균형을 이룬 수작이다. 수상작과 마지막까지 겨룬 것만으로도 이 시인의 앞날이 기대된다.

 

끝으로 제4회 시산맥 작품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최은묵 시인의 <땅의 문>터진 신발 밑창에서 땅과 연결된 문을 발견한다는 참신한 발상을 바탕으로, 소외되고 억눌린 채 바닥으로 버려진 소리들에 귀 기울이는 화자의 마음이 따뜻한 울림이 되어 전달되는 시이다. 이 시는 터진 신발’, ‘나무뿌리’, ‘퇴적층의 화석같은 소외된 대상들을 자식 몰래 내뱉는 어머니의 한숨이나 죽음을 맞이하는 돼지’, ‘발자국 한 번 남기지 못 한 채 지워진 태아와 같은 숨은 야사(野史)와 연결지어 소통하게 함으로써 새로운 인식에 도달하게 해주는 수작이다. 특히 3연의 누워야만 들리는 소리가 있다는 진술은 직립 보행을 하면서 높은 곳만 바라보면서 사는 인간의 물신화된 욕망에 경종을 울리는 것이어서 시적 울림이 크게 다가온다. 또한 터진 신발을 통해 땅의 문을 열고 그동안 소외되고 버려졌던 땅의 소리를 듣게 된다는 상상력은 억지스럽지 않고 신선하다. 여기서 터진 시발은 문명의 상징인 신발의 소통부재를 뛰어넘어 맨발로 흙과 만나려는 시인의 소박한 마음의 기표이다.

 

물신화된 가치관이 지배하는 이 혼탁한 세상에서 이렇듯 소박하고 신선한 시인의 마음과 만나는 일은 쉽지 않다. 최은묵의 등단 연도는 일천하지만, 이 시인이 세상의 모든 타자를 깊이 바라볼 줄 아는 혜안과 뛰어난 시적 감수성은 시산맥 작품상 수상자로서 부족함이 없다할 것이다. 4회 시산맥 작품상 수상자로 선정된 최은묵 시인에게 다시 한 번 축하하고 아쉽게 선정되지 못한 모든 분들께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해드린다.

 

박남희(본지 주간)

 

 

 

[심사평] 타자(他者)인 수많은 존재들과의 인연

 

4회 시산맥 작품상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을 살펴본 결과, 역량있는 시인들의 철학적 깊이와 언어예술이 대체로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송찬호의 <장미>, 오태환의 <헛개나무야>, 유정이의 <아직>, 이정록의 <나비 수건>, 전기철의 <시인의 영토>, 조정인의 <땅꾼의 여자>, 최은묵의 <땅의 문> 등을 주목할 수 있었다. 이들 작품 중에서 오태환의 ?헛개나무야?나무라는 생명체의 존재양식을 심층적으로 투시하는 인식능력의 날선 검()을 보여주었다. 전기철의 ?시인의 영토?는 막힘없는 사색과 한계 없는 자유의 요람인 내면적 고독을 시의 근원으로 제시하였다. 그러나 최은묵의 ?땅의 문?와 타자(他者)의 관계, 개인과 세계의 관계, 인간과 자연의 관계, 고유한 존재양식(存在樣式)을 갖고 있는 모든 개체들의 상호관계 등을 포괄하고 있다고 판단되었다. 그의 시는 위에서 열거한 작품들보다 훨씬 더 넓은 시()의 스케일을 보여주고 있다.

 

최은묵의 <땅의 문>에서는 첫 시어(詩語) “터진 신발이 상징하듯이 생존소유를 위해 전진하기에 급급했던 현대인들의 소통 부재와 자아 상실을 암시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신발터졌다는 것은 현대인들의 정신적 병리현상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준다. “터진 신발은 현대인들의 부정적인 일상을 비판함과 동시에 그것을 변혁시킬 수 있는 긍정적 전환점을 제시한다. “터진 신발은 문학적 아이러니의 기능을 발휘하면서 언어예술과 시대정신(時代精神)을 자연스럽게 결합시키는 매개체가 되고 있다. “터진 신발밑창을 통하여 화자(話者)는 이 세계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존재들을 돌아보는 마음의 여백을 넓힌다. 그는 모든 생명체의 근원이자 반려(伴侶)과 연결된 생명선(生命線)을 만져본다. 그는 이라는 공동의 터전에서 함께 살아온 존재들의 삶을 의식하게 된다. “발가락에 힘을 주고 지냈으니 눌린 것들의 소란은 도무지 위로 오르지 못했던 거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화자는 타자(他者)들의 삶, 그들의 좌절, 그들의 애환에 귀를 닫고 살아 왔다. 화자를 포함하는 무수한 현대인들은 발자국을 잃고 주저앉은타자(他者)들의 삶의 소리를 소외시키며 살아 왔다. 그러나 신발터졌다는 아이러니를 보라! 자기중심의 어두운 감옥을 해체시키는 전환적 성찰의 힘을 발휘하지 않는가? “의 토박이 나무뿌리 틈으로 전해오는 소리들을 향해 마침내 귀를 여는 화자의 전향을 따라가자.

 

화자에게 잊혀진 이웃이었던 나무”. 그 이웃의 전언(傳言)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는 화자. “을 밟고 지나가는 인간이라는 이웃들의 환희, 절규, 아픔, 희망의 소리들과 그 발자국으로 배를 채우는나무. 이 초록빛 이웃을 닮아가려는 화자. 그는 나무가 번역해주는 이웃들의 주저앉은 소리들지워진 소리들을 편견 없는 자연의 언어로 전해 듣는다. 화자는 나무와의 생명적 유대감을 공감한다. 그는 나무라는 공생의 동반자를 통하여 나무의 나이테에 새겨진 수많은 이웃의 삶의 기록들을 읽는다.

 

최은묵의 시 <땅의 문>은 그의 시를 읽는 독자 개인과 수많은 타자(他者) 사이에 닫혀 있던 상호관계의 문을 열어주는 열쇠가 되었다. “나무와 인간의 상호관계를 예술적 미디어로 전용(轉用)하여 끊어졌던 소리들간의 소통의 네트워크를 복원하는 작품이 <땅의 문>이다. 소설가 토마스 만(Thomas Mann)문학이라는 예술은 현실을 정신적으로 승화시킨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최은묵의 시 <땅의 문>은 타자(他者)인 수많은 존재들과 시인이 맺고 있는 드넓은 관계망()현실을 형식미학 속에 용해하여 예술작품으로 승화시켰다. 시산맥 작품상 수상작으로 결정한 이유이기도 하다.

 

송용구(본지 편집기획집필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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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사막 / 신현락

 

 

호모사피엔스가 출현한 35천년의 시간은 화석이 모래로 전이하는 데 충분한 풍량이어서 학자들이 사막의 발원지를 추정하는 근거로 들기도 하지만 밤마다 모래가 바다에 빠져 죽은 이유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35천년 후, 그 자리는 소금사막의 발원지가 되었다

 

모래의 여자는 정갈한 소금으로 밥상을 차리고 바람을 기다린다 사막에서 바람을 많이 먹은 종들은 종종 변이를 일으키는데 그들이 사랑을 할 때는 서로의 입안에 소금을 조금씩 흘려보낸다 사랑을 구하기 위해서 남자들이 여자를 찾아오는 건 소금에 중독된 까닭이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모래의 동선을 보면 최초의 호모사피엔스가 여자인 것만은 분명하다 바람의 혀는 감미롭게 모래의 능선을 애무하지만 모래의 여자는 모래만 낳을 뿐이어서 몇 만 년 동안 처녀의 지평선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바람이 없는 날에는 가끔 소금이불을 햇빛에 펼쳐놓기도 한다

 

지금도 소금에 중독된 남자들이 모래의 여자를 찾아 간다 그러나 소금을 맛본 바람에게 혀를 내맡기다가 대륙을 이동하는 모래의 변종에게 눈을 다치기도 한다 눈 먼 사내들이 사막에서 길을 잃을 때 모래의 여자는 심해의 바다에서 막 건져 올린 싱싱한 소금을 그들 앞에 뿌려준다 그렇다고 소금을 한 주먹씩 집어 먹는 건 사막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아무리 극소의 미량이라도 한 알의 소금으로 치사량에 이를 수 있다

 

사랑을 많이 가진 남자의 입안을 들여다보면 소금바다가 출렁거린다 그들은 죽어서도 썩지 않는 사랑을 찾아 흰 뼈만 남은 몸으로 사막을 노 저어 간다 모래의 여자가 가시나무로 소금을 찍어 인간의 간을 맞추는 것은 이 세상으로 사막이 번져오는 이치와 다르지 않다

 

 

 

 

그리고 어떤 묘비는 나비의 죽음만을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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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아름다운 불씨

 

15호 태풍이 지난 이틀 뒤 14호 태풍이 북상한다는 소식을 근심스러운 마음으로 듣다가 전화를 받았습니다. 소형 태풍인 14호 태풍이 소멸하지 않고 대만 부근에 자리하고 있다가 대형태풍이 터준 길을 따라서 올라온다는 설명을 듣던 중이었습니다. 15호 태풍 뒤에 14호 태풍이 온다는 기별만큼이나 두렵고 신기했습니다. 문득 몇 년 전에 꿈속에서 시를 주시던 아버지가 생각났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구구단을 못 외워서 매일 나머지 공부를 하였던 저는 무엇이든 늦게 깨우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시를 쓴다고 한 지는 꽤 되었는데 여전히 전전긍긍하는 제가 안쓰러웠는지 저승에서도 편히 쉬지 못하고 현몽하셨던 것입니다.

 

아직 올해가 지나가지 않았습니다만 개인적으로 매우 부산한 해였습니다. 천성이 게으른 탓에 어떤 단체에 소속되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편인데 거부할 수 없는 사정으로 인하여 문예지 만드는 일에 참여하였고 뜻하지 않게 시집도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번민할 수 있는 시간을 뺏겨서 몸과 마음은 더욱 건강해진 것 같은데 한동안 열심히 하던 시작은 주춤할 수밖에 없는 한 해였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듣게 되는 수상 소식은 태풍 뒤에 보는 맑은 하늘과 같은 새로운 기쁨이었습니다. 제 시와 제가 몸담고 있는 시단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시가 가장 개인적인 상처를 드러내는 주관적인 장르라는 것은 시를 쓴다는 행위가 그만큼 절실함과 정직함을 요구한다는 것을 웅변합니다. 시간이 흘러가도 무의식에 흔적을 남기는 흉터를 누구나 지니고 있습니다만 그것을 쉽게 드러내려는 사람은 드물지요. 그것을 드러낸다는 것은 그만한 절실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저에게 그 이유를 묻는다면 울음이나 침묵이외의 적당한 대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말로 대답해야 하는 아이러니는 제가 처한 시적 상황입니다.

 

제가 살아왔던 세상은 제 시에서 가끔 등장하는 극지의 장소, 즉 사막, 우물, 절벽이나 히말라야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한때 저는 가시에 찔린 상처나 전갈의 울음만 써왔습니다. 제가 죽은 후에나 독자가 생길 것이라는 생각을 최근까지 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편한 시를 읽어주는 사람이 세상 어딘가에 있었습니다. 시 쓰기는 가장 외로운 작업이지만 저 보다 더 외로운 사람이 있었던 게지요. 아시다시피 시는 가장 개인적인 발화 양식입니다.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시는 존재의 가장 깊숙한 내면에 도달할 수 있으며 관계의 그물망으로 서로 소통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풍요로운 환경에서 탄생하는 시는 없습니다. 결핍이 오히려 시창작의 근원적 동기이자 풍요로운 상상력의 시발점이라는 깨달음으로 쓴 시가 ?소금사막?입니다. 이미 박남희 시인이 적절하게 지적하였듯이 생명과 죽음의 대립된 세계를 넘어서는 진실, 사랑의 한계와 영원성에 대한 탐구가 이 작품에 담겨 있습니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멀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시의 길은 자유의 길입니다. 한 곳에 머무는 시는 금세 부패합니다. 창조의 에너지는 부단한 변화와 자기 갱신 속에서 생성됩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시의 변화는 시인의 몸과 세계관이 같이 변해야 생명력을 갖습니다. 그렇지만 카멜레온처럼 피부만 변하는 시는 독자의 심금을 울릴 수 없습니다. 섣부른 변화는 오히려 자신의 시를 망칠 수 있다는 점도 염두에 두겠습니다. 주역에서 낳고 또 낳는 것이 역(:해와 달을 뜻하기도 함)’이라 하였듯이 생성은 서로 다른 것들을 받아들이고 통합하는 가운데 발생합니다. 저는 제가 낳은 시와 근친상간은 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아닌 것들과 더불어 새로운 언어와 세계를 낳고 또 낳겠습니다. 끝까지 간다는 말은 감히 할 수 없지만 중간만 낳아 놓고 시라고, 자유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아직 살아보지 못한 시간을 사는 것, 제가 아닌 것들과 더불어 자유롭게 세상을 살아보는 것이 제가 시를 쓰는 궁극적인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이 수상이 기쁜 이유는 단지 제 작품을 인정받았다는 사실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시단에 오로지 작품으로만 심사의 기준을 삼는 곳이 있다는 것, 공정함과 깨끗함이 살아 있는 시의 단체가 있다는 것, 이러한 시산맥의 신념은 저처럼 시를 쓰는 시인들에게 큰 희망이 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작고한 김남주 시인은 작은 불씨가 광야를 태운다고 썼습니다. 시산맥의 이러한 시도가 우리 시단의 아름다운 불씨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상을 외롭게 시를 쓰는 시인들의 이름을 대신하여 고맙게 받겠습니다.

 

끝으로 시산맥 심사위원께 감사드립니다. 이름 모를 소수의 독자들에게도 고개를 숙입니다. 시를 향한 그 맑은 눈빛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잊지 않겠습니다.

 

 

 

 

히말라야 독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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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소금사막을 건너는 말들의 축제

 

그동안 <시산맥> 작품상 심사를 하면서 느낀 점은 이 땅에 좋은 시를 쓰는 시인들이 참 많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 작품들을 충분히 향유할 수 있는 문학풍토는 아직도 일천하다고 생각된다. 문학을 하는 일이 문학상을 받기 위한 것은 아닐지라도, 때로는 언어의 금맥을 찾아 떠나는 시인들의 긴 여정에 문학상이 뜻밖에 만난 바위틈에서 터져 나오는 신선한 샘물이 되어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 땅에 존재하는 문학상은 대부분 상을 받는 소수의 시인들에게는 잠시의 예정된(?) 기쁨을 줄지는 모르지만, 상과 무관하게 열심히 좋은 시를 쓰는 다수의 시인들에게 오히려 편향된 문학풍토에 대한 회의와 실망감을 안겨줄 때가 많이 있다. 그것은 아직도 이 땅의 문학상이 학연, 지연(地緣, 知緣, 誌緣)의 끈에 얽매여서 공정성을 잃고 파행적으로 운영되는 현실의 당연한 결과물이다.

 

시산맥 작품상은 문단의 이러한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고 이 땅의 도처에 숨어있는 좋은 시인들을 발굴해내서 그들에게 더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문학의 장을 마련해주기 위해서 제정된 소박한 상이다. 이번에 결선에 올라온 시들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계간 <시산맥>지에 투고되는 시의 수준이 대체적으로 높고 고르다는 점이다. 이는 그동안 시산맥 작품상이 국내의 어느 문학상보다도 공정하고, 해가 거듭될수록 그 위상이 높아지고 있다는 반증이 된다. 이번에 최종결선에 오른 다섯 분의 작품들은 어느 것을 당선작으로 삼아도 좋을 만큼 작품성이 뛰어나서 당선작을 미리 예측하기가 어려웠다. 이는 1년간 <시산맥>에 발표된 작품을 대상으로 여러 예심위원들이 1차적으로 작품상 후보를 계절마다 5편씩 선정하고, 이들 작품을 대상으로 결선 심사위원들이 무기명 원고에 공정하게 투표를 해서 가장 표를 많이 받은 작품을 수상작으로 선정하는, 시산맥 작품상 선정 과정의 공정성과 무관하지 않다. (시산맥 시회 회원 50명의 추천위원도 한 사람의 심사위원 몫을 함.)

 

이번에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김수우의 <물의 새벽>, 신영배의 <아름다운 상자>, 신현락의 <소금사막>, 윤의섭의 <결로 무렵>, 조원의 <슬픈 레미콘> 등이다. 이들은 그동안 문학상과는 그다지 큰 인연이 없었지만 어떤 문학상에 내놓아도 좋을 만큼 작품성이 뛰어난 시를 써온 숨은 인재들이다. 5명의 심사워원은 시산맥 작품상 후보작 20편을 대상으로 좋은 작품 5편씩을 1차로 선정하였는데, 결선에 오른 작품들은 공히 2~5표를 받아서 최종심에 오르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유일하게 심사위원 전원의 5표를 얻은 작품이 이번에 시산맥 작품상 수상작이 된 신현락 시인의 <소금사막>이다. 여러 심사위원의 고른 표를 얻었다 하더라도 그 작품이 과연 가장 우수한 작품인지는 더 검토해 보아야 한다. 따라서 심사위원들은 표를 많이 받은 작품들을 대상으로 최종적인 의견을 나눈 결과, 신현락 시인의 작품을 수상작으로 선정하는데 만장일치로 동의하였다. 3회 시산맥 작품상 수상자가 된 신현락 시인께 진심으로 축하의 인사를 드리면서, 아쉽게도 수상하지 못한 시인들에게는 최종심에 오른 작품에 대한 간단한 작품평으로 감사와 위로의 말씀을 대신한다.

 

먼저 김수우 시인의 <물의 새벽>은 순환의 고리를 가지고 있는 물의 속성을 생명의 차원을 넘어 꿈과 문학의 차원으로까지 확장시키고 있는 수작이다. 이 작품은 물의 흐름을 꿈의 흐름과 삶의 흐름으로 은유함으로써 척박한 이 땅에서의 결핍된 삶이 물을 만나 궁극의 회복에 이르는 과정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 시는 이러한 표면적 의미코드 속에 지상의 모든 아가미가 새 소리를 내는 최초의 숲으로 상징되는 원초적 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이중적 의미 코드는 이 시가 가지고 있는 상상력의 폭이 의외로 넓고 깊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지만 이 시는 물고기(아가미)와 새의 연결고리가 될 만한 시적 진술이 없어서, 관념이 주체가 된 상상력과 이미지 전개에 머무는 아쉬움이 있다.

 

다음으로 신영배의 <아름다운 상자>는 김수우의 시처럼 물 이미지를 근간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물방울이 어떻게 아름다운 상자가 될 수 있는지를 감각적으로 보여주는 수작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자 이미지를 생각하면 상자의 폐쇄성을 먼저 생각하게 되는데, 이 작품은 그 상자가 물방울 상자라는 점에서 개방성과 유연성을 획득하고 있다. 그것은 신영배의 물방울 상자가 물방울이 맺혔다 떨어지고 다시 맺히며 커지는 과정을 둥근 손과 발을 길게 늘려본다 팔과 다리를 구부려 모서리를 만들어 본다 입으로 열고 닫는 말을 생각해 본다처럼, 대상을 감각적이고도 유려하게 형상화하는 표현미학을 이미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시는 뛰어난 감각에 비해 서사의 뼈대가 약해서 주제가 일상성에 머무는 한계가 있다.

 

다음으로 윤의섭의 <결로 무렵>은 이슬이 맺히기 시작하는 결로 무렵의 이슬방울을 바람-달빛-이슬의 연결고리를 매개로 하여 그리움에로 내면화시키는 형상화 작업이 이채로운 시이다. 특히 단지 촉각으로만 느낄 수 있는 바람달빛속에 깃든 그리움으로 변용시켜서 화자의 내면풍경을 드러내는 방식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이것은 이 시의 후반부에서 시인이 이슬을 구체적인 인간사의 내음으로 후각화하여 이슬은/ 이슬이기 이전에 숨이었다는 결론을 도출해내는 과정과 어울려 이 시의 강점으로 꼽힌다. 단지 후반부의 후각 이미지의 나열이 전반부의 절심함을 충분히 뒷받침해주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어서 조원의 <슬픈 레미콘>타원의 항아리로 표상되는 지구를 슬픈 레미콘으로 형상화하여 지구의 슬픈 미래를 조망해보고 있는 시이다. 시인에 의하면 지구는 몸통 가득 시멘트를 채우고 마지막 남은 10% 눈물을 간간이 뒤섞으며 짐승의 몸을 이어가는 고래로 표상된다. 시인이 지구의 슬픈 현실을 직시하면서 얼마를 돌려야 저 거대한 항아리가 깨어지나라고 탄식하고 있는 것은, 지구라는 거대한 레미콘이 생산해내는 것이 결국은 직사각의 한 장 벽돌로 압축될 수밖에 없는 현실의 실망감 때문이다. 조원의 시는 이처럼 레미콘지구의 유사성을 십분 활용하여 시인의 구체적인 현실인식을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매력적인 작품이다. 하지만 이 시는 표현이나 형상화의 완결성에 비해서 주제가 너무 낯익은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

 

끝으로 이번에 시산맥 작품상으로 선정된 신현락 시인의 <소금사막>은 전체적으로 산문시의 어법을 취하고 있으면서도, ‘소금모래’, ‘바다사막으로 상징되는 인간의 근원적 삶의 궤적을 더듬어가는 시인의 사유가 다채로운 긴장감과 이야기의 묘미를 느끼게 해주는 수작이다. 시인은 이 시의 초두에서 소금사막의 유래가 인간의 화석에서 시작되었음을 밝히면서 소금사막의 신비를 밝히는 일이 결국 인간의 신비를 밝히는 일임을 암시해주고 있다. 따라서 밤마다 모래가 바다에 빠져 죽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시인의 진술은 모래(사막)’의 삭막함과 바다의 생명성이 공존하는 아이러니한 인간의 삶의 비의를 말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이 시가 지니고 있는 삶의 근원적인 의미는 단지 관념에 머물지 않고 모래의 여자소금에 중독된 남자의 사랑이야기를 통해서 구체성을 얻고 있다. 이 시는 이렇듯 소금사막의 유래를 더듬어가는 과정을 구체적인 사랑 이야기로 짜임새 있게 연결해줌으로써 이미지와 서사가 튼실한 짜임새와 균형을 이루고 있는 수작이다. 특히 이 시가 보여주고 있는 이야기 구조는 소금사막이라는 중심소재가 가지고 있는 상반된 속성을 다양한 상상력으로 서사화하는 시인의 역량을 극대화해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여타 시들과 차별화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신현락의 시에도 드러나 있듯이 인간의 삶은 소금사막을 건너는 일에 비견된다. 이러한 사유의 연장선상에서 시인이 시를 쓰는 행위 역시 소금사막을 건너는 일이다. 그러므로 시인이 시를 쓰는 일은 모래여자가 정갈한 소금으로 밥상을 차리고 바람을기다리는 일이다. 시인은 소금사막으로 불어오는 바람의 신비한 힘에 목숨을 거는 존재들이다. 소금에 중독된 남자들이 모래여자를 찾아오듯이, 좋은 시는 시에 중독된 시인들에게 찾아온다. 이 땅의 시는 소금과도 같다. 썩은 냄새 풍기는 부패가 만연한 세상으로 우리는 지금 소금냄새 물씬 풍기는 한 시인을 내보낸다. 앞으로 그가 걸어갈 소금사막에 아름다운 바람의 발자국이 남게 되기를 기대해본다.

 

박남희(본지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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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도를 걸다 / 김점용

 

 

못박는 일은 쉽지 않다

단단한 시멘트벽

겨우 자리를 잡았다 싶어 조금만 힘을 주면

튕겨나가고

튕겨나간다

 

사람들도 그렇지

내 사람인가 싶을 때

속잎에 비치던 눈물

녹이 슬고

등을 보이고

 

더 이상 기다리는 일 없을 때

패인 못 자국

닿을 수 없는 그림으로라도 덮어보자고

의자 위에 발끝을 들고

조금 더 위에

조금 더 위에

 

천장을 뚫고 윗집 7층의 벽에 22층의 벽에

아파트 옥상에 든 둥근 달의 거실에

달에도 못 걸고 그 위에 더 높고 먼 별의 창문에

별이 아니라 보일 듯 말듯 가느다란 별빛에 못질을 하며

우리부리한 눈빛의 달마도를 걸고

 

먼 별빛

자꾸 헛것 가리키는

퍼렇게 먼등 손가락에 못질을 하며

날마다

날마다

입 꾹 다문 달마도를 걸고

 

 

 

 

나 혼자 남아 먼 사랑을 하였네

 

nefing.com

 

 

[심사평] 허공에 달마도를 거는 일과 시쓰기

 

시를 쓰는 일이나 사랑을 하는 일은 허방을 짚고 올라가 별빛 근처에 달마도를 거는 일이다. 심사를 하는 일은 허방에 걸린 달마도 속 보리달마의 표정을 읽어내는 일만큼 어렵다. 이번에 제2회 시산맥 작품상 후보작 15편을 놓고 심사를 하면서 다양한 스팩트럼을 보여주는 시들의 표정에 한편으로는 즐거웠고 또 한편으로는 약간의 곤혹스러움도 있었다. 심사를 하면서, 가수에게 등수를 매기는 것이 마땅찮아 나가수를 보지 않는다는 아내의 말이 문득 생각났다. 시에 등수를 매기는 일은 가수에게 등수를 매기는 일 못지않게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에 이처럼 문학상 제도가 많이 있다는 것은 가난하고 힘없는 시인들에게는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 매년 발표되는 문학상의 수상자를 살펴보면 작품보다는 작품 이외의 스팩이 더 돋보이는 경우가 많아서 씁쓸한 느낌을 갖게 한다. 교수가 되기 이전에는 상을 별로 받지 못하던 시인이 교수가 된 후에 상복이 쏟아지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보게 된다. 시산맥 작품상은 우리문단의 잘못된 관행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어 하는 시산맥 가족의 순수한 소망이 담긴 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산맥 작품상은 후보작 선정과 심사과정에 이르기까지 투명하고 공정하다. 시산맥 동인이 주축이 된 심사위원단은 그동안 시산맥의 시인들이 엄선한 시산맥 작품상 후보작 15편을 돌아가면서 읽고 무기명으로 복사된 원고에 A, B, C를 기표하는 방식으로 선정작업에 들어갔다. 이런 과정을 거쳐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김점용의달마도를 걸다,김행숙의어딘가, 어딘가에는 ,문인수의,유병록의구겨지고 나서야 ,임경섭의화석 ,허영숙의49등 총 6편이었다. 이들 작품은 나름대로의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지니고 있어서 심사를 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심사위원단은 이들 작품 중에서 김점용, 김행숙, 문인수의 시를 최종 후보작으로 압축하고 자유토론에 들어가 제2회 시산맥 작품상 수상작으로 김점용의달마도를 걸다를 선정하였다. 최종 후보작들은 어느 것을 당선작으로 해도 될 만큼 훌륭했지만, 타 작품에 비해 당선작은 발상이 개성적이고 이미지나 서사의 이면에 시의 주제를 거느리는 응집력이 좋았다. 심사과정에서 작품외적 요인이 문제가 되기도 했으나 시산맥과 관련이 있는 시인을 무조건 배제하는 일 역시 역차별이라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뛰어난 작품성으로 당당하게 수상자로 선정된 김점용 시인에게 축하인사를 드리며, 최종심에 오른 분들의 작품은 간략하게 심사평을 하는 것으로 감사와 위로의 말씀을 대신하고자 한다.

 

최종심에 오른 허영숙의 49은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꿈 속에서 겪은 일들을 통해 꿈과 현실, 현세와 내세가 맨드라미 씨앗이라는 생명적 이미지로 순환하는 과정을 진정성 있는 언어로 부조해내고 있다. 이 시는 피안에 들기 전에 머문다는 마흔아홉 날49제를 시의 모티브로 삼아 시적 서사와 이미지가 균형을 이루며 통일성 있게 전개되는 점이 좋았다. 하지만 시적 발상이 너무 안정적이라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다음으로 임경섭의 화석은 남녀 간의 이루어지기 어려운 미묘한 관계를 화석 이미지로 부조해내고 있다. 살아있는 물고기 이미지와 화석 이미지는 함께 어울리기 어려운 것임에도 시인 자신의 독특한 상상력으로 과감하게 융해시키는 솜씨가 돋보인다. 하지만 시적 화자인 나와 애인과의 관계를 인간과 물고기의 관계로 설정한 것은 튼실한 비유가 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애인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다시 태어난다고 하고 나빠지는 것을 죽는다고 표현하는 등 임경섭 시인만의 문체가 개성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면서도, 이 시의 중심 이미지인 화석과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어딘가 비약이 느껴진다.

 

유병록의구겨지고 나서야어둠으로 대변되는 시대적 어둠을 구겨진 종이를 통해서 역설적으로 풍자하고 있는 시이다. 종이에게도 눈부신 세계의 비밀을 누설하리라 다짐하던 시기가 있었지만, 이러한 종이의 소망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고, 종이는 구겨지고 나서야 처음으로 허공을 소유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 시에서 구겨진 몸을 다시 펼치지 말라는 듯이 어린 새끼처럼 겨우 잠든 어둠을 깨우지 말아 달라는종이의 고백은 뼈아프다. 유병록의 시는 전체적으로 균형잡힌 좋은 시이지만 안정된 시의 중심을 넘어서는 발상이 아쉽게 느껴진다.

 

수상작과 마지막까지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던 김행숙의어딘가, 어딘가에는은 화자가 밤하늘을 바라보며 별자리의 모양이나 별똥별의 움직임 등을 통해 어쩌면 자신이기도 한 누군가의 꿈을 읽고 있다. 김행숙의 시는 자아와 타자의 경계를 허물어서 세상을 바라보는 현대철학의 흐름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고, 우주 어딘가 고여 있을 절대적인 시간을 자신의 시간의 일부로 경험해보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시인의 이러한 사유는 시적 상상력을 다각화해서 시의 폭을 넓혀주고 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하지만 그것이 좀 더 구체적인 서사와 만나지 못해서 주제를 응집시키는 힘이 부족해보인다.

 

역시 김행숙의 작품과 더불어 수상작과 마지막 까지 경합을 벌였던 문인수의는 세렝게티에서 힘겹게 태어나서 대평원을 가로질러 가다가 끝내 악어에게 희생되기도 하는 누의 삶을 통해서 끈질긴 생명의 존재성을 부각시키고 있는 작품이다. 전체적으로 서사나 이미지가 선명하여 군더더기 없이 이어지는 화법이 매우 능숙하다. 이것은 문인수 시인의 다른 시에도 흔하게 보이는 것으로 그의 시가 지니고 있는 장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서사나 이미지의 선명함에 비해 그 이면에 감추어져 있어야 할 주제가 상대적으로 빈약해보인다.

 

이상에서 거론한 최종 후보작들을 누르고 당당히 수상의 영예를 안은 김점용의달마도를 걸다는 비교적 쉬운 어법으로 시를 끌고 나가고 있으면서도, 평범한 현실적 공간을 허물어서 새로운 시적 공간을 창출해내는 상상력이 돋보이는 시이다. 시인이 시멘트벽에 못을 박는 일의 어려움을 이루기 힘든 사랑에 비유한 것은, 그의 시가 가지고 있는 표현의 묘미와 어우러져 새로운 울림을 창조해내고 있다. 시인은 못이 튕겨져 나간 자국, 즉 사랑의 상처를 덮기 위해 그 곳에 달마도를 걸게 된다. 이러한 시인의 상상력은 달마도가 지니는 결핍의 상징성과 만나서 그 의미가 훨씬 증폭 된다. 특히 이 시의 후반부에 달마도가 집이라는 공간을 초월하여 달과 별이 있는 우주공간으로 상승하는 모습은, 시인이 현실 공간을 드높은 시적 상상력의 공간으로 승화시키는 것의 비유로도 읽힐 수 있다는 점에서 중의적이다. 이 시는 이러한 중의적 의미를 차치하더라도 쓰라린 사랑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묵묵히 달마도를 거는 행위를 통해서, 아픔을 간접화하여 극대화시키는 발상이나 기법이 범상하지 않게 느껴진다. 특히 이 시는 기존의 시들이 가지고 있는 상상력의 범주를 뛰어넘는 새로운 발상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당선작으로 손색이 없었다.

 

이러한 당선자에 대한 믿음은 그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우선 그의 두 번 째 시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다음의 시를 읽어보자.

 

 

깊은 산 등산로 한가운데 서서 사람들 손잡아주느라 닳고 닳은 나무줄기의 반질반질한 맨살에 새겨진 글자 은주

 

나는 그것이 남몰래 사랑하는 한 여인의 이름인지 이파리를 죄다 몸속으로 숨긴 그 나무의 이름인지 파란만장 푸른 잎물결 속에 숨은 빈 배의 이름인지 알 수가 없어 한참 동안 나무 주위를 맴돌다 돌아왔는데

 

아무래도 그 나무는 어떤 사람과 눈이 맞아 죽어서 올라가든가 내려가든가 하는 중인 것 같은데 거기에 소 한 마리 매어서 딸려 보낸 주인이 누군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어

 

한밤에 부엌 냉장고 돌아가는 소릴 들으며 이런저런 잡생각을 깔고 앉을 때나 강원도 깊은 산골에 두꺼운 방석을 펴면 이따금 귓전에 울리는 소 방울 소리가 메롱메롱 은주, 하고 날 놀리는 것 같아 평생을 그렇게 놀림받으며 살 것만 같아

 

―「메롱메롱 은주전문

 

 

화자는 깊은 산 등산로를 오르다 사람들 손잡아주느라 닳고 닳은 나무줄기의 반질반질한 맨살에 새겨진은주라는 글자를 보게 된다. 그러면서 그는 과연 은주가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게 된다. 그에게 은주는 남몰래 사랑한 여인의 이름일 수도 있고, 이파리를 죄다 몸속으로 숨긴 그 나무의 이름(隱柱)일 수도 있고, 파란만장 푸른 잎물결 속에 숨은 빈 배의 이름(隱舟)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시인은 은주가 사랑한 여인의 이름이든, 아니면 隱柱隱舟이든 상관없다는 듯이 그 의미의 범주를 열어놓는다. 굳이 은주의 의미를 짚어보면 여기서는 은유(隱喩)로 상징되는 시를 가리키고 있다고 생각된다. 따지고 보면 깊은 산 등산로 한가운데 서서 사람들 손잡아 주는 것이 시이고, 어떤 사람, 즉 시인과 눈이 맞아 죽어서 올라가든가 내려가든가 하는 중인 것이 시가 아닌가? 이런 관점에서 보면 메롱메롱 은주라는 놀림은 문명과 자연으로부터 모두 놀림감이 되어있는 시의 정체성과 무관하지 않다.

 

다음으로 그의 또 다른 시 건너다니는 우물을 읽어보자

 

 

한밤에 누가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여보세요 말씀하세요 내가 말해도 아무 대답이 없었습니다

가만히 들어보니 수화기 저편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무슨 일인지 물어볼 수도 없고 그냥 듣기만 했습니다

삽십 분이 지나고 한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는 평소에 차갑고 냉정한 사람

술을 많이 만신 모양입니다

무슨 말이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그는 계속 울기만 했습니다

중간중간 코를 풀어가면서 말입니다

먼저 말을 꺼낼까 몇 번을 망설였지만

어떤 말이 위로가 될지 몰라 그냥 듣기만 했습니다

그렇게 망설이며 그의 울음을 들어주는 사이

내게도 무슨 말 못할 사연이 생긴 것 같았습니다

이 추운 겨울밤에도 얼지 않는

깊은 우물이 하나 생긴 것 같았습니다

 

―「건너다니는 우물전문

 

 

은실에게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이 시는 은실이로 짐작되는 누군가 밤에 울면서 전화를 걸어와서 달래주려고 말을 걸었지만 말은 하지 않고 계속 울고 있는 울음소리를 듣다보니 자신의 마음에도 깊은 심연같은 우물이 생겨났다는 내용이다. 이 시는 표면적으로는 사랑했던 여인인 은실과의 사이에서 겪었던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시인이 우리에게 말하고 싶어하는 이면적 주제가 드러난다. 여기서의 은실이는 실제로 사랑하는 여인의 이름일 수도 있지만, 그 속에는 시라는 이름이 숨겨져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앞의 시에 나오는 은주나 이 시의 은실이는 모두 시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은유의 은()자를 픔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어서 은실이를 시로 읽는데 무리가 없다. 이런 관점에서 이 시를 다시 읽으면 어느 날 갑자기 시가 전화를 걸어왔는데 아무리 사연을 들어보려해도 시의 울음소리만 들렸는데 그 울음소리를 듣다보니 어느새 시인 자신의 가슴에 말 못할 사연즉 시심이 생겨나게 되어서 시인이 되었다는 내용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 된다. 따라서 이 시의 제목인 건너다니는 우물건너다니는 시의 우물의 의미로 읽히게 된다.

 

 

수만 가지의 색깔을 품은

바닥 없는 검은 우물

배추흰나비 한 마리

그 안을 날고 있다

 

―「심연에 대하여전문

 

 

서시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는 이 시에도 우물이 나오는데, 이 시의 우물역시 앞의 시의 우물과 같은 의미로 해석된다. 이 시에서 수만 가지의 색깔을 품은/바닥 없는 검은 우물이 인간의 마음이라면, 그 안을 날고 있는 배추흰나비는 시로 해석될 수 있다. 따라서 이 시의 제목에 나오는 심연은 시의 심연인 셈이다. 이렇듯 김점용의 시는 짧은 시 하나에도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다음의 시는 그의 아픈 가정사를 꿈속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준다.

 

외출했다 돌아오니 외양간의 소가 외로워 보인다 배가 고픈 줄 알고 풀을 주었더니 먹지 않는다 펌프질로 물을 받아 세수를 한다 소가 안 채 기둥에 매여 있다 얼굴에 비누칠을 하다 말고 왜 집에 아무도 없냐고 소에게 묻는다 소는 대답하지 않는다 뭔가 숨기는게 분명하다 내가 괜찮다며 말하라고 하자 소는 자기가 어머니를 죽였다며 운다 문득 안심이 된다 하지만 나는 슬퍼해야 하므로 소 머리를 안고 함께 운다 소 얼굴에 비누거품이 가득하다 내가 어디에 묻었냐고 묻자 부엌 앞 펌프 밑에 묻었단다 그리고 또 운다

 

 

하나뿐인 어머니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어디서든 자발적으로 망가지고 싶었다

내 안에 칼을 품고 있었구나

비누로 씻어 속죄할 양이면

나보다 더 간절하게

지나간 삶 전부를 되돌리고 싶으실

아버지의 세 번째 아내,

어머니

 

―「소가 어머니를 죽이다-14전문

 

 

이 시의 화자는 꿈속에서 소가 어머니를 죽이는 서사를 통해 어머니를 죽이고 싶도록 증오했던 시인 자신의 과거사를 고백하고 있다. 2연에서 시인이 하나뿐인 어머니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어디서는 자발적으로 망가지고 싶었다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어머니라는 존재는 애증의 관계를 넘어 근원적 트라우마를 갖게 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다. 말하자면 시인의 이러한 트라우마가 시인으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한 셈이다. 1연에 나오는 꿈속의 소는 화자인 와 구별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나의 또 다른 분신으로서 화자의 또 다른 퍼소나라고 말할 수 있다. 화자가 소 머리를 안고 울 때 소 얼굴에도 비누 거품이 가득하다는 표현만 보아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어머니를 죽인 소가 외로워 보이고 그 소가 안채 기둥에 매여 있다는 표현을 통해서 우리는 화자가 어렸을 때에 얼마나 어머니로부터 억압을 받고 자라왔는지를 알게 된다. 그런데 이 시에 나오는 는 앞에서 살펴본 시메롱메롱 은주에 등장하는 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김점용의 시는 대부분 그 안에 시인 자신의 서사를 숨기고 있다. 그의 시에 숨겨져 있는 서사를 올바로 읽어내는 일은 그의 시를 제대로 읽는 지름길이다. 김점용의 시가 언뜻 보면 쉬워 보이지만 꼼꼼히 읽어보면 그 안에 의외로 깊은 뜻을 내장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이번에 시산맥작품상을 수상한 달마도를 걸다도 범상한 듯한 표현 뒤에 범상치 않은 의미를 숨기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의 제2회 시산맥 작품상은 범상한 듯 하지만 범상하지 않은 좋은 시인을 새롭게 조명해주는 의미도 아울러 가지고 있다. 그동안 허공에 못을 박고 달마도를 거는 일로 힘들었을 김점용 시인에게 다시 한번 제2회 시산맥 작품상 수상을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박남희(시산맥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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