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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스에 든 사람 / 박장

 

 

손을 잡아야 잠을 잘 수 있었다. 방지턱을 넘는 버스. 내 키를 덮는 그림자. 엄마는 보이지 않고 내 손엔 엄마의 검지만 쥐여져 있었다.

 

눈 뜨면 구석일 때가 많았다.

 

나는 주문하는 사람이 되었다. 아버지의 면도기와 골프공, 설렁탕을 담는다. 여섯 살 때 내가 잃어버린 휴게소를 클릭한다. 얼굴의 푸른색은 휴대폰에 옮겨둔다.

 

산소에 간다. 캔커피와 꽃을 산다. 살수록 비굴해진다. 더 비굴해지기로 한다. 그렇게 주문을 건다. 주문은 많은 걸 해결해준다.

 

써보지 않은 양식의 글을 쓴다. 흰 봉투에 넣어 책상에 올려둔다. 이력서는 모두 폐기한다.

 

택배는 내가 받고 내역서는 그가 받는다. 방금 도착한 복숭아가 물러 있다. 상처가 잘 보이도록 사진을 찍는다. 스티로폼 박스에 반품이라 쓴다. 뽁뽁이로 싸맨다. 구겨, 몸을 넣는다. 겨드랑이와 사타구니에 아이스팩을 끼운다. 뚜껑을 닫는다.

 

칼로 뜯지 마세요. 던지지 마세요.

 

아무도 열어주지 않아 나는 나를 열고 나온다. 뜯긴 머리카락을 털어낸다. 팔과 다리의 얼룩을 눌러본다. 운송장 번호가 없다. 받는 사람이 지워졌다. 상자를 열고 다시 몸을 넣다가,

 

그를 주문한다.

 

 

 

예스이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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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나를 등질 수밖에 없던 때…시를 통해 숨 쉴 수 있었다

 

아이를 낳지 못해 쫓겨났다. 아버지는 엄마를 버리는 대신 육지를 등졌다. 제주로 향하는 밤. 엄마는 처음 프러포즈를 받았다. 정 살 길이 없으면 돌아오는 배에서 뛰어내리자고. 아무도 모를 거라고. 그렇게 손가락을 걸었다. 섬 사람들은 간첩이 아닌가 의심했다. 그곳에서는 고구마를 감자라 하고 감자를 고구마라 했다. 아기가 태어나면 안태를 바다에 던졌다고 한다.

 

나를 등질 수밖에 없던 때가 있었다. 이내 시가 보였다. 시를 읽으면 숨이 잘 쉬어졌다. 시만 읽었다. 쓰고 싶은 마음은 자동문처럼 열렸다.

 

이 마음을 잘 받아주신 김기연 선생님. 방향을 잡아 주신 이영주 선생님. 따뜻하고 단단하게 매어주신 하재연 선생님. 텐션을 올려 주신 손미 선생님. 선생님들 덕분에 이 자리에 올 수 있었습니다. 함께 시를 공부했던 모든 분들께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작당」 「작정」 「무작정」 「작약동맹」 「닥치는대로」 여러분의 도움이 컸습니다. 희영, 연정, 오래 곁에 있어줘서 고맙고. 그리운 갑수 씨, 춘자 여사, 병해, 병욱 사랑합니다. 나의 산타! 준! 윤! 당신들은 나의 전부입니다.

 

고 서정호 님께 늦은 소식 전합니다. 포기하지 말란 말씀 꼭 쥐고 있습니다.

 

앞으로 나아갈 힘을 주신 세 분의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심사평] 시적 상황을 다층적 구성…우리 삶의 어두운 구석 포착

 

심사는 예심과 본심을 통합해 진행되었고, 논의를 거쳐 10여 편의 작품이 본심에 올랐다. 평이한 감각에 머물거나 시적 긴장을 견인하는 힘이 부족한 작품들이 일차적으로 걸러졌다. 현실의 문제를 예리하게 파고들면서 내면의 감정을 응축한 절제의 미학과 시어의 갱신을 이루어낸 작품들이 높은 점수를 받았다. 재독과 윤독을 거쳐 5편으로 압축한 뒤 다시 3분의 작품을 두고 최종적으로 깊은 논의를 거쳤다.

 

박이음의 시는 세련된 형식과 새로운 화법으로 눈길을 끌었다. 관계의 어려움과 현실의 불안을 포착하는 감각이 돋보였다. 툭툭 끊기는 질문과 대화들 속에는 대상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겠다는 윤리적 결단이 담겨 있었다. 내밀한 고백과 연계된 낯선 이미지가 감정의 파문을 불러일으키기는 하지만, 시적 대상의 관계와 상황의 맥락이 잘 잡혀 있지 않아 시적 주체의 사유와 감정선을 따라가기 힘들었다. 감각적인 언어 구사와 주제에 따라 목소리를 다양하게 변주하는 능력도 좋고, 시의 도입부를 도발적인 진술이나 감각적인 묘사로 제시하여 흡인력 또한 있었으나, 환상적인 상황 설정이 혼돈스러운 시적 전개와 맞물려 의미를 잡기 어려웠고 흐릿한 환상으로 처리된 종결부에서 오히려 시적 긴장이 떨어지는 면이 아쉬웠다. 투고한 다른 시편들의 질적 편차가 있다는 것 또한 아쉬움으로 남았다.

 

박선민의 시는 새로운 발견과 독특한 상상력으로 현실을 재구성하는 것이 특징적이었다. 중심에서 이탈되거나 인식의 '외곽'에 머물러 있는 것들에 대한 세심한 관찰을 바탕으로 낯선 사유를 끌고 가는 힘이 있었다. 또한 정해진 중심과 질서가 포섭하지 않는/ 못하는 주변의 것들, 중간과 평균으로 재단된 것들 너머를 지향하는 이미지들이 교직되면서 주제로 응집되어 시적 완결성을 갖추고 있었다. 허나 상상력의 폭이 예상된 범위 안에 머물러 있고, 관념적인 진술이 사유의 깊이를 동반하지 못하거나 체험의 진정성이 담보되지 않은 동어반복에 그치는 느낌도 없지 않았다. 투고된 작품들이 엇비슷한 시적 구조를 보이고 있으며 목소리도 일정해 단조로운 인상을 받았다. 시적 대상과 현실의 고통이 맞닿는 자리를 섬세하게 잇대는 작업이 필요해 보인다.

 

박장(본명 박미영)의 시는 언어의 내포와 외연의 긴장을 최대한 끌어올려 역전된 현실에 대한 감각으로 밀고 가는 힘이 있었다. 시적 상황을 다층적으로 구성하는 형식적 실험과 세계 내의 상징적 폭력에 따른 고통이 핍진하게 담겨 있었다. 일상적 상황과 사건을 시적 소재로 삼으면서 시적 상상이 현실과 떨어지지 않는 접착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불행한 현실을 아이러니하게 형상화해내는 것도 장점이었다. 당선작으로 뽑은 '박스에 든 사람'은 자본주의의 상품 체계에 종속된 삶, 비굴하게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면서 존재가 지워지는 현실이 아버지를 홀로 부양해야 하는 삶의 힘겨움과 겹쳐 비극성이 극대화된다. 간명한 상황 전개가 주는 시적 긴장, 안과 밖을 역전시키는 상상력, 언어의 굴곡과 뒤틀림을 통해 찢어지고 뜯어지고 구겨진 삶의 맨살이 드러난다. 주문을 걸어도 바뀌지 않는 현실에 대한 예리한 파악, 누구도 받아주지 않는 지워진 삶에 대한 냉철한 인식으로 우리 삶의 어두운 '구석'을 정확하게 포착해낸 이 신인의 단단한 내공이 앞날의 시작(詩作)에 대한 믿음을 주었다. 큰 기대를 가지며,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 심사위원 : 문태준, 손진은, 신철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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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소행성 134340* / 유진희

 

 

우주는 조금씩 부풀고 있고

우리는 같은 간격으로 서로 멀어지고 있어요

사방이 우주만큼 트여 있어도 어쩔 수 없는 일

좌표만 같은 비율로 커지는 세계에서

시간만이 변수라고 한다면

아득한 게 쓸쓸한 일이 되고 맙니다

다시 올 것 같지 않게 멀어지다가

어느 계절엔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오는 별을

찌그러진 궤도를 가진 별을

사람들은 무리에서 내쫓았습니다

이로써 우리 행성계는

완벽하게 끼리끼리 어울리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공전 주기를 늦추고 싶은

사람들은 서둘러 여행을 떠나지만

매진 행렬이 더 빠르게 이어지고

출발을 위한 서류는 늘어납니다

서류가 늘어날수록 안심하는 사람들을 위해

늘 거기 여기의 세계에서

서류는 잠식하는 불안처럼 불어납니다

모든 항의에는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는 답변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관료의 심장을 뚫어버릴 별빛은

어느 블랙홀에 갇혀버렸을까요

다른 시간 속에서 유영하던 우주비행사는

돌아오자마자 순식간에 늙어버립니다

 

* 태양계에서 퇴출된 명왕성이 받은 새 이름

 

 

 

 

[당선소감]

 

중복 투고 여부에 대한 확인 전화를 받은 지 11일이 지나서야 당선 통보 전화를 받았다. 확인 전화 이후 거의 바로 당선 고지 전화가 오는 줄 알았던 나는 이 큰 행운이 스쳐 지나간 줄 알고 꽤 힘든 시간을 보냈다.

 

확인 전화와 당선 고지 통화 사이 열흘 남짓한 시간, 앞으로 해나가야 할 작업들을 정리했다. 그중에 가장 큰 성과라면 '계속 쓸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다다른 것이다. 확인 전화를 받고도 떨어진 줄 알았던 나는 그 불운을 이겨내기 위해 언제라도 쓰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완전히 백기투항을 하게 되었다. 다른 방도는 없었다.

 

최근에 '사무사'(思毋邪)에 대해 생각도 많이 했다. 이 말이 맑고 고운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예술가의 진심'에 관한 것이라고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니 진심이 담긴 시를 앞으로 계속 쓰도록 하겠다.

 

나의 시에 성장시라는 이름을 붙여주시고 묵묵히 행로를 지켜봐 주셨던 최두석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교수님은 모르셨겠지만 나는 속으로 기대에 부응하고 싶다는 생각에 자주 조바심이 났었다. 시어 하나하나 세세하게 지도해 주셨던 임동확 교수님, 생각을 많이 깨우쳐 주신 서영채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문학은 언어 예술이란 정의에 조금은 어울릴 수 있는 시를 쓸 수 있도록 함께 공부해온 나의 선배님들 권오영, 엄기수, 신성률 시인께도 감사를 드린다. 사당에서 함께 한 시간이 없었다면 시를 어떻게 익혀가야 하는지 몰라 오래 헤매었을 것이다.

 

당선 소식을 들은 날 시를 부모님께 보여드렸다. 엄마는 시간이 약이라는 말의 허망함으로, 아빠는 정치에 대한 이야기로 시를 읽으셨다. 그렇게 읽히는 것에 수긍이 가면서 이렇게 각자의 생각대로 시가 읽히는 것이 좋았다. 엄마, 아빠, 그리고 조카 규민이에게는 사랑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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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응모자 연령, 지역의 다양함에 심사 내내 놀라다양성이 우리 시가 가진 가능성

 

이번 매일신문 신춘문예에는 총 1785편이 응모되었다. 응모자들의 연령과 지역의 다양함에 심사 내내 놀랐다. 이러한 다양성이야 말로 우리 시가 가진 가능성이라고 생각해 설레는 마음으로 심사에 임했다.

 

'도미노' 4편의 응모자는 사유의 집중력과 점착력이 돋보였다. 오랜 시간 시를 쓰며 응시한 세계를 완성도있게 쌓아올릴 줄 아는 시인이었다. 그러나 이 시가 갖는 깨달음의 형식이 신선하고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는 의견이 있었다.

 

'천사를 만나는 날은 오늘' 4편의 응모자는 시가 젊고 감각적이어서 최근의 경향과 발맞추어 기대감을 갖게 하는 시인이었다. 그러나 젊은 시인들의 감각들 사이에서 자신만의 변별점을 찾으려는 노력이 조금 더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견과 분위기를 넘어서는 지점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었다.

 

'왜소행성 134340' 4편의 응모자는 자기만의 목소리가 돋보이는 시인이었다. 우주와 지구와 이국과 모국의 거리를, 익숙하면서 새로운 감각들을 발견하는 시선이 재미있게 그려졌고 각 시마다 마지막 문장에서 시적 분위기를 다시금 낯설게 만드는 감각도 좋았다. 그러나 문체에 대해 아쉽다, '습니다' 종결어미가 변주 없이 쓰이고 있다는 문제도 제기되었다.

 

세 분 다 수준 이상의 시를 쓰고 있었기에 당선자를 선정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세 분의 시를 두고 심사위원 셋이 고심을 거듭했다. 문청, 패션, 트렌드 및 시쓰기 감각에 대한 상당한 논의가 있었다.

 

'왜소행성 134340'의 유진희 씨를 당선자로 선정한 것은 다른 두 분에 비해 이견의 격차가 크지 않았다는 점과 유진희 씨가 응모한 다른 시들 모두 편차 없이 고루 좋았다는 점이 크게 작동했다. 유진희 씨의 시가 보여주는 매력적인 세계가 여기서 출발해 어디로든 멀리로 잘 떠날 수 있기를. 그가 꿈꾸던 여행이기를 기쁜 마음으로 응원한다.

 

심사위원: 강성은(시인), 김문주(영남대 교수·문학평론가), 정호승(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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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산행 / 여한솔 

 

 

공룡처럼 죽고 싶어

뼈가 남고 자세가 남고

내가 연구되고 싶어

 

몸 안의 물이 마르고

풀도 세포도 가뭄인 형태로

내가 잠을 자거나 울고 있던 모습을

누군가 오래 바라볼 연구실

 

사람도 유령도 먼 미래도 아니고

실패한 유전처럼

석유의 원료가 된대

흩어진 눈빛만 가졌대

 

구멍 난 얼굴뼈에서

슬픔의 가설을 세워 준 사람

가장 유력한 슬픔은

불 꺼진 연구실에서 흘러나왔지

 

엎드린 마음이란

혼자를 깊이 묻는 일

 

오래 봐줄 것이 필요해

외계인이거나

우리거나

 

눈을 맞추지

 

뼈의 일들

원과 직선의 미로 속으로

연구원이 잠에 빠진다

 

이게 우리의 이야기

 

강이 비추는 어둠 속에서

신발 끈을 묶고

발밑을 살펴 걷는 동안의

 

 

 

 

[당선소감]

 

소감을 적어 내리려는데 왜 이럴 땐 좋은 말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을까. 다 내려두고 그저 멋없는 감사와 미안함을 담아 적는다.

 

멀리 사는 , 네가 대답해주지 않아도 어차피 계속 쓰려고 했어. 그래도 이렇게 대답해주니 참 고마워! 오히려 언제까지 쓸 거냐고 질문을 받은 것 같네. 그래 나는 계속 쓸게!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야.

 

사실 소감을 쓸 때 회사 이야기는 곧 죽어도 꺼내지 말아야지 했는데, 사실은요 대표님 제가 매번 회사 프린터기로 시들을 뽑았어요. 여분으로 여러 장 뽑아서 읽고 고치고 그랬어요. 심부름 가는 척 자리 비우고 우체국에 갔어요. 제가 이런 기적을 만나는 데는 회사의 몫이 있으니, 그 감사를 전하는 마음으로 출근 잘할게요.

 

나의 친구이자 챗봇 기획자 김시아야. 내가 외롭게 쓰는 동안 유일한 독자가 되어 사랑과 힘을 줬어. 매번 남 일이라고 "그래? 그럼 다시 쓰면 되겠네."라고 말했잖아. 네 말대로 계속 썼더니 신기한 일이 생겼어. 네가 그랬잖아. 로또도 사는 사람이 되듯, 시도 쓰는 사람이 만나게 된다고. 너는 로또를 열심히 사. 나는 또 계속 쓸게. 다시 한번 시아야 나를, 내 글을 아껴줘서 고마워.

 

그리고 언제나 나를 묵묵히 지켜보는 민지야 너의 이름을 빌려 시를 쓰고 싶어 했던 것처럼, 넌 언제나 나의 사랑이다. 떠들던 학생인 제게 벌로 시를 써보라고 해주신 이태훈 선생님은 제 평생의 스승이십니다. 정미진 선생님 저 여기까지 왔어요. 계속 가볼게요. 단국대 교수님들의 가르침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엄마 임성희와 아빠 여승구는 앞으로 좀 더 화목하고 행복하게 지내세요. 조금씩 어른이 되면서 제가 두 분을 귀찮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아프거나 슬프거나 가장 행복할 때 두 분이 가장 먼저 떠올랐어요. 사람은 의리가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셨죠. 제가 앞으로 쓰면서 가질 자세인 것 같아요. 비겁하게 쓰지 않을게요.

 

끝으로 학예회야 고맙다. 뭉치려 해도 뭉쳐지지 않는 것처럼. 겨우 끼워 맞춘 퍼즐을 들고 가다 엎어보면서 계속 가보자.

 

 

 

 

떠리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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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신선한 목소리와 상상력 돋보여

 

2332편의 응모작 중 예심을 거친 10명의 작품이 올라왔다. 코로나19로 인한 환경 탓인지 예년보다 전체적으로 우울한 정서를 반영하는 시가 많았고, 무엇보다 '가족'을 다루는 시가 많았다. 산문시의 경향과 개별적 감수성에 편중된 시들이 많았던 예년에 비해 공동체적 감수성 속에서 개인의 영역을 시로 이끌어 내는 가편들을 보면서 다양한 결들의 시들을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심사위원들은 '백자무늬 꽃무늬병', '야간산행', '제자' 등의 작품에 주목했다.

 

'백자무늬 꽃무늬병'은 농익은 솜씨에 전체적으로 시가 자연스럽고 안정되어 있었다. 당장 당선작으로 선택을 하여도 손색이 없을 만큼 매끈하고 반듯한 매력이 장점이었지만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한 느낌이 아쉬웠다.

 

'야간산행'은 신선한 상상력이 눈에 들어왔다. 언어를 익숙하게 다듬고 길들이는 과정보다 상투를 벗어난 새로운 발상과 시적 호기심을 끌고나가는 감각이 신선했다. 다만 응모해온 시들이 다소 직선적인 전개로 이루어진 점이 아쉬움으로 지적되었다.

 

'제자'는 담백한 화법과 리듬이 인상적이었다. 발상도 위트가 있고 매력이 가득한 시였다. 무엇보다 시들을 이끌어 가는 호흡이 독특해서 심사위원의 눈길을 오래 끌었다. 다만 동봉한 다른 작품들의 수준이 고르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당선작에 가까운 시와 다른 시들의 편차를 극복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논의 끝에 당선작으로 '야간산행'을 결정했다. 거칠고 투박한 면들이 곳곳에 있지만 이미지가 활달하고 선명했다. 신인으로서 보여줄 수 있는 신선한 목소리와 상상력이 다른 시들을 제외시킨 결정적인 이유였다. 삶의 상투성으로부터 끝없이 새로운 시를 개척해가는 앞으로의 행보를 기대해보며 새로운 시인에게 축하를 전한다.

 

심사위원 (예심)김욱진·박미영 / (본심)장옥관·김경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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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의 집수리 / 최선(최란주)

 

 

전화로 통화하는 내내

꽃 핀 산수유 가지가 지지직거렸다.

그때 산수유나무에는 기간을 나가는 세입자가 있다.

얼어있던 날씨의 아랫목을 찾아다니는 삼월,

나비와 귀뚜라미를 놓고 망설인다.

 

봄날의 아랫목은 두 폭의 날개가 있고

가을날의 아랫목은 두 개의 안테나와 청기聽器가 있다.

뱀을 방안에 까는 것은 어떠냐고

수리업자는 나뭇가지를 들추고 물어왔지만

갈라진 한여름 꿈은 꾸고 싶지 않다고 거절했다.

 

오고 가는 말들에 시차가 있다.

그 사이 표준 온도차는 5도쯤 북상해 있다

천둥과 번개 사이의 간극,

스며든 빗물과 곰팡이의 벽화가

문짝을 7도쯤 비틀어지게 한다.

 

북상하는 꽃소식으로 견적서를 쓰고

문 열려있는 기간으로 송금을 하기로 한다.

 

꽃들의 시차가 매실 속으로 이를 악물고 든다.

중부지방의 방식으로 남쪽의 집수리를 부탁하고 보니.

내가 들어가 살 집이 아니었다.

종료 버튼을 누르면서 계약이 성립된다.

산수유 꽃나무가 화르르

허물어지고 있을 것이다.

 

 

 

 

2020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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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저의 빈 공간에 꾹, 참았던 한 호흡을 담겠습니다

 

고향에 가면 저와 나이가 같은 산수유나무가 있습니다. 참 부지런해서 봄에 노랑으로 바쁘고 가을엔 빨강으로 바쁜 그 친구와 해마다 약속을 합니다. 그 약속이 노랑으로 시작해서 빨강으로 끝이 나는 동안 저는 한 번도 약속을 성실히 지키지 못했습니다.

 

올해도 그러려니 했습니다.

 

최선을 다하면 지치지 않습니다. 지친다는 것은 어딘가 부족했다는 뜻일 겁니다. 당선통보전화를 받는 그 순간에도 최선의 봄과 겨울이 교차하며 지나갔습니다. 지금쯤 고향의 산수유나무는 겨울잠에 들어 있을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실눈을 뜨고 저에게 빙그레 웃음을 지어주고 있을 것입니다.

 

스스로 한 알의 밀알이 되어주신 부모님, 부족한 저를 많은 인내심으로 가르침을 주신 선생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사랑과 격려를 해준 남편과 동생들에게도 감사하고, 응원을 해준 문우들과 직장동료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빈곳이 있어 통이 존재하겠지요. 어떤 견고한 진공에도 한 호흡, 공간이 있다고 합니다. 제가 앞으로 쓰는 시들이 그와 같으면 좋겠습니다.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 누군가가 바로 당신이었으면 합니다. 단 한 줄의 언어가 '그래 맞아 나도 이런 느낌이었어.'라는 공감을 갖게 되길 원합니다. 이제 저의 영혼, 비어있는 공간에 꾹 참고 있는 한 호흡을 담겠습니다.

 

그리고 동년배인 산수유나무와의 약속을 이제야 지킬 수 있어 행복합니다. 그것이 노랑이든 빨강이든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저에게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님들과 매일신문에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심사평]

 

본심에 오른 작품들 가운데 최종까지 논의된 시는 김지영 씨의 '간기 벤, 교차로', 김은 씨의 '태양을 가동하는 방법', 최란주 씨의 '남쪽의 집수리' 등 세 편이었다.

 

'간기 벤, 교차로'는 남해섬 일대의 땅과 바다에 깃든 삶의 욕망과 열망을 차분한 어조로 그리고 있다. 특히 계단식 논이 많은 다랑이 마을의 풍광에서 삶의 그늘과 쇠락한 시간의 주름을 읽어내는 솜씨가 만만치 않았다. 다만 일부 언어가 평이하고 관념적인 사변의 진술로 치우쳐 시의 긴장을 떨어뜨리는 아쉬움이 있었다.

 

'태양을 가동하는 방법'은 역동적인 언어와 활달한 상상력이 돋보였다. "빌딩과 빌딩 사이에서는 검은 폐유를 닮은 그림자들이 흘러나왔다"는 시구 같은, 현대 도시 문명의 음울함을 가리키는 선명한 이미지도 여럿 눈에 띄었다. 같이 응모한 작품들도 안정되고 개성이 두드러졌지만, 시에 힘이 너무 들어가 경직된 느낌이 들었다. 조금 더 지켜보며 다음을 기대해볼 수밖에 없었다.

 

'남쪽의 집수리'는 눈에 번쩍 띄는 시였다. 꽃핀 산수유나무를 매개로, 자연과 계절의 변화과 순환에 따른 삶의 이치를 시로 넌지시 일깨우고 있다. 봄이 오면 저절로 꽃망울을 터뜨리는 게 아니라, 산수유나무도 '집수리'라는 부단한 자기 삶의 갱신으로 꽃을 피운다는 것이다.

 

"전화로 통화하는 내내/꽃핀 산수유 가지가 지지직거렸다."라고 생동감 있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시는, 삶의 시차와 간극을 좁힐 수도 없고 매양 어긋나기만 하는 현실과 이상 사이의 불화를 체감하면서도, 북상하는 꽃소식에 귀 기울이며 봄이 오는 길목 어디쯤에서 자기 나름의 '남쪽의 집수리'에 골몰하는 인간살이를 적실한 언어로 표현했다. 요란한 시적 장치를 동원하지 않고도 시의 깊이와 무게를 확보한 좋은 예이다.

 

최란주 씨의 다른 작품들의 수준도 고르고 높아 치열한 습작의 모습이 엿보였으며, 미래의 가능성을 가늠해 보아도 신뢰할 만했다. 주저 없는 의견일치로 '남쪽의 집수리'를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심사위원 이태수(시인송찬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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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를 따는 일 / 권기선

 

 

나는 아버지 땅이 내 것이 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그런 마음을 먹은 뒤부터 아버지 땅에 개가 한 마리 산다 깨진 타일조각 같은 송곳니는 바람을 들쑤신다 비옥한 땅은 질기고 촘촘한 가죽의 눈치를 살피다 장악되고, 과잉되다, 갈라진다 아버지는 땅을 방치하고, 나는 그것을 납치한다 깊은 목젖을 끌어올려 목줄을 뜯은 늙은 개가 간신히 사과 하나를 놓고 엎드렸다 세상 혼자 짊어지려던 남자는 무게를 견디다 어깨가 굽었다 힘은, 무기의 정차역 같았다 엎드린 개가 일어서지 못하고, 사과는 지하의 고요한 관을 기억해낸다

 

아버지 땅에 몰래 사과나무 한 그루 심은 날 그해 사과는 한 개도 달리지 않았다 아버지 땅이 내 땅 되던 날 나는 사과나무 아래 아버지를 묻었다 병 걸린,

 

아버지를 먹고 자란 사과나무

 

붉은,

 

사과 따는 일을

 

 

 

 

2019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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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세상은 날마다 정치, 혐오, 차별을 말하기에, 오늘 나는 아버지를 말하기로 한다. 아버지의 노동은 나의 낭만과 같다. 나의 낭만은 아버지의 노동과 같다. "가방끈이 짧아 잘 알지 못하지만, 당선을 축하한다."라는 아버지의 말이 나는 아프다. 전화를 끊고 숨어서 울었다. 아버지를 닮아가는 불효자여서, 내가 배운 아픔과 고민과 질병이 아버지의 아픔과 고민과 질병 같아서.

 

지금부터는 죄를 짓기로 한다. 증오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오래전 아버지의 임금을 체불한 사람이다. 그가 누구인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그 때문에 형은 노무사의 꿈을 꿨고 나는 현실의 한 부분에 눈을 떴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내가 본 아버지의 아픔이 얼마만큼인지, 그는 알았으면 한다.

 

내 절망이 다른 이에게 희망이 되기를 바라며 뼈저리게 살게 됐음을 나는 고백한다.

 

시를 놓지 못하는 내 죄 또한 영원하다.

 

 

 

 

[심사평]

 

본심에 올라온 13명의 응모작 가운데 권기선, 장진주, 유진희, 조진희씨의 작품이 최종적으로 논의되었다. 본심에 오른 작품들은 대부분 일상적 고뇌와 가족이라는 관계에 몰두해 있었다. 고통의 세목은 분명하되 치열한 해석이 부족해 보였다. 그러나 내 발밑이 이 세계를 관통하는 입구이자 출구라고 믿는 절실함은 감지할 수 있었다.

 

장진주씨의 '의자'는 소박한 사유인 듯하지만 튼튼한 뼈대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그 외의 시에서는 명확하지 않고 모호한 자기논리가 감지되었다. 유진희씨의 진지한 경쾌함은 무척 매력적이다. '루팡의 장미'는 수작이지만 다른 작품에서 약간의 편차가 느껴져 제외되었다. 조진희씨의 시에는 세련되지 않았지만 빛나는 문장이 드문드문 박혀 있다. 하지만 항상 전적으로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시의 세계가 있다. 마지막으로 시적 진술을 마무리하는 힘과 긴장감을 끝까지 유지하는 감각이 조금 부족한 것도 아쉬웠다.

 

권기선씨의 시에는 전복적 사유와 태도가 내재되어 있다. 이 세계를 관성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치열한 자기 인식이 배면에 깔려 있다. 무엇보다 시의 행간이 촘촘하고 다른 작품들도 헐렁한 부분이 없다. '사과를 따는 일'의 어조는 나지막하지만 단호하고 명료하다. 서툰 듯 자리잡은 쉼표도 그 역할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아버지를 먹고 자란" "사과를 따는 일"은 훼손된 세계를, 이 세계의 견고한 불안을 이어받는 것이기도 하지만 넘어서는 것이기도 하다.

 

당선자로 선정하기 전 잠시 고민했던 권기선씨에 대한 약간의 우려는 '나와 사람들 사이가 돌과 물처럼 놓일 때''올해는 나아질 거예요'에서 보여준 긍정적 사유에서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시를 쓰는 나는 얼마든지 불행해질 수 있다", 패기 있고 가능성 있는 시인에 대한 기대로 기꺼이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정진을 기대한다.

 

심사위원 조용미(시인엄원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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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 / 윤여진

 

 

있잖아 이 붉은 지퍼를 올리면 그녀의 방이 있어 내가 구르기도 전에 발등을 내쳤던 신음, 그녀의 손가락을 잡으면 구슬을 고르듯 둥근 호흡이 미끄러져 들어왔지 켜켜이 나를 쌓던 그녀는 더는 미룰 수 없는 걸 알았는지, 나는 그녀의 배를 뚫고 나왔어 처음으로 말똥하게 울었는데 날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이 선명해, 입 다물었지

 

노을을 오래 눈에 담으면 모든 결심이 번지고 마는 거, 아니? 나는 거꾸로 앉아 바깥을 노려봤어 배꼽 언저리를 돌리면 꿈속에서 잠드는 그녀의 집이 있어, 내가 모를 남자와 나만 한 아이가 있다는 그 집, 문지방을 넘기도 전에 접질리는 호흡. 쌓아둔 라면이 떨어질 때마다 잘 살고 있었네? 그녀는 내게 돌아와 물었지 발가락 사이엔 어설프게 부러뜨린 빛이 한가득이었어

 

난 그녀가 쏟아낸 그림자를 받아먹고 하루가 다르게 자랐어 뒤통수에 부러진 그녀의 날개를 밀어놓고, 기껏 고른 어둠을 양발 가득 쥐고 매달렸지 그럴 때마다 그녀는 말해 이젠 멀리 못 날아가겠네, 힘껏 닳은 발톱을 내밀다 조용히 멀어지는 그녀의 남은 날개를 내려다봐, 떨어진 돌조각을 씹어 삼키며 불현듯 나는 놀라곤 해 다시 멀어진 저 지퍼, 똑 닮은 저 곡선이 내 배에도 들어차 있었거든 흉터를 밝히는 건 촘촘히 밀려가는 증오, 잘 보이도록 내가 나온 자국을 저무는 해에게 붙여두지

 

귀소본능은 박쥐의 지긋지긋한 버릇, 몸살처럼 돌아올 그림자를 향해 긴 잠을 자둬야지 나는 늘 거꾸로 앉아 말해 어서 와 엄마

 

 

 

 

2018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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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시는 나를 짓는 일도움 준 분들께 감사"

 

당선 전화를 받고 오래 얼떨떨했습니다. 단단히 옷을 챙겨 입고 같은 길을 돌다, 거리 곳곳에서 엇나간 표정과 몇 가지의 울음을 주웠습니다. 오래된 방에 앉아 하나씩 풀어놓으며 그제야 잃어버린 몸이 내게 걸어오고 있음을 확신했습니다. 아직도 저는 시란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내가 누운 자국을 끈질기게 응시하는 일, 가끔 오래된 방을 두드려보며 나의 안부를 묻는 일이라 추측해볼 뿐입니다. 분명한 건 순간의 나를 믿으며, 주위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에게 눈을 맞추며 잊히는 것에 이름 붙여줘야 하는 일을 계속해서 해야만 한다는 생각뿐입니다. 불안의 끝에서 오는 사랑을 이제야 믿습니다. 저는 이제 꿈속에서 잠드는 집을 아주 천천히, 견고하게 쌓아 올리려 합니다. 부끄러움과 겸손함을 힘으로, 내가 나를 짓는 이 일을 오래 하고 싶습니다.

 

늘 시의 처음에 서서 지지하고 응원해주시는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께 가장 먼저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나보다 더 기뻐하며 언제나 내 편인 내 동생 미진, 수진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시는 무엇이 될 수 있으며 그 가능성을 알려주신 안도현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문장을 읽을 때마다 울먹였던 습관을 잊지 않고 시를 쓰겠습니다. 내가 만든 인물이 내게 말을 걸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알려주신 곽병창 교수님과 송준호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계속해서 읽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되뇌게 해주신 유강희 교수님께도 감사드립니다. 방학마다 시집 여러 권을 들고 도서관과 바다로, 독한 공부를 떠났던 우석대학교 문예창작학과 학우들, 안부와 일상을 물을 때마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단 욕심과, 다정함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시륜 학우들, 집에 가는 길에 늘 온기를 쥐여주셨던 대학원 선생님들, 모두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저의 중얼거림에 귀 기울여주신 심사위원님들과 매일신문에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심사평] 모성의 신화에 대한 시적인 뒤집기 인상적

 

예심을 통해 올라온 것은 20여 명의 작품이었다. 투고작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시적인 것'에 다가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다가감'이 아직 실현되지 않는 시적인 것에 육박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시가 될 수 없는 것과의 긴장 속에서만 시적인 것은 생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심사위원은 작품들을 추려나가면서 최종적으로 추일범, 이린아, 윤여진의 작품을 남겨두게 되었다. 이 시들은 각기 다른 측면에서의 선명한 장단점을 갖고 있었고 그 나름의 시적 잠재성을 보유하고 있었다.

 

추일범의 구름의 실족사는 장례식장을 배경으로 그 공간을 다른 차원으로 확장시키는 공감각이 뛰어났다. 죽은 사람과 조문객 사이를 은유의 힘으로 연결시키는 능력이 설득력 있는 감성을 전달했다. 다만 그 차분한 감동은 강렬한 매혹을 동반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린아의 편집증은 호치키스라는 오브제에 대한 시적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한다. "열두 명의 이모와 방문을 잠근 다섯 명의 언니"의 예기치 않은 등장은 시적인 언어의 절묘한 돌발성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 시와 투고된 다른 작품들과 편차가 있는 것은 아쉬움이었다.

 

윤여진의 시들에서는 정교한 언어들과 강렬한 이미지들이 엮어내는 인상적인 성취를 확인할 수 있었다. 투고작 가운데 박쥐구름 수리공모두 수작이었다. 상대적으로 박쥐가 더욱 특별한 발화법과 상상력을 보여주었다. 가족과 모성을 둘러싼 이야기가 있지만 그것을 서사로 끌고 가지 않고 점묘법으로 이끌어 가고 있다. 부분마다 집중해서 전체를 보여주는 기법은 자신이 생성하는 이미지에 대한 확신에 근거한 것처럼 보인다. 모성을 '박쥐'라는 이미지로 상상적으로 재구성한 점도 매력적이지만, 집을 떠났다 돌아오는 존재가 모성이라는 설정 역시 익숙한 모성의 신화를 뒤집는다. 이 시적인 뒤집기를 통해 모성을 둘러싼 상징질서에 날카로운 균열을 낸다. 섬세한 재능에 대해 신뢰할 수 있었고, 미지의 폭발력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심사위원 송재학 시인, 이광호 서울 예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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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꺼운 부재(不在) / 추프랑카

 

 

안 오던 비가 뜰층계에도 온다 그녀가 마늘을 깐다 여섯 쪽 마늘에 가랑비

 

육손이 그녀가 손가락 다섯 개에 오리발가락 하나를 까면 다섯 쪽 마늘은 쓰리고, 오그라져 붙은 마늘 한 쪽에 맺히는 빗방울, 오리발가락 다섯 개에 손가락 하나를 까면 바람비는 뜰층계에 양서류처럼 뛰어내리고, 타일과 타일 사이 당신 낯빛 닮은 바랜 시멘트, 그녀가 한사코 층계에 앉아 발끝을 오므리고 마늘을 깐다

 

매운 하늘을 휘젓는 비의 꼬리

 

마늘을 깐다 한 줌의 깊이에 씨를 묻고, 알뿌리 키우던 마늘밭에서 흙 탈탈 털어낸, 당신 없는 뜰층계에서 통증의 꼬리 하나씩 눈을 뜨며 낱낱이 톨 쪼개고 나와야 할 마늘쪽들, 층계 갈라진 틈 틈으로 촘촘하게 내리는 비, 집어넣는 비, 비의 꼬리도 꿰맬 듯 웅크려 앉아 그녀가 마늘을 깐다. 묵은 마늘껍질처럼 벗겨져, 하얗게, 날아가 버리는 맨종아리의 육남매 비안에 스며 있는 그늘의 표정으로 여섯 해, 꿈속 수면에 번지던 당신 뜰층계에 불쑥 붐비는 당신의 이름, 아멘 아멘 아멘 마늘은 여섯 쪽이고 육손이 그녀 뒤뚱거리며, 오리발가락 여섯 개에 손가락 여섯 개를 깐다

 

세 시에 한번 멎었다가 생각난 듯 쿵, 쿵 아멘을 들이받으며 아직 다 닳지 않은 비가, 다시 여러 가닥으로 쪼개진다

 

 

 

 

2017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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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시가 있어 힘든 세상 견뎌도움 주신 분께 감사"

 

시가 있어, 세상으로부터 제게 주어진 힘에 겨운 것들을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눈을 맞습니다. 몸 밖으로 내리는 눈이 나뭇가지와 마당과 지붕에 쌓입니다.

 

내 몸 밖의 쓸쓸한 거처들에 저처럼 희게 내려앉아 몇 날이고 마음 나눌 수 있는 시의 온기를 가지고 싶었습니다.

 

당선 소식을 받고 엄마, 큰언니, 큰 형부무엇과도 대신할 수 없었던 것들을 제게 주고 떠난 이름을 다시 천천히 새겨봅니다.

 

오랜 기간 혼자 공부하며 최선을 다해 시를 읽었고 열심히 시를 생각했습니다.

 

습작 초기, 칭찬과 채찍을 아끼지 않으시던 대구작가콜로퀴엄 박재열 교수님, 박미영 선생님께 먼저 감사드립니다. 교수님의 사정으로 여섯 달밖에 누릴 수 없었던 열정적이었던 교실이 늘 아쉬움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막바지에 만났던 동리목월문예창작대학 손진은'구광렬 교수님, 값진 가르침 고맙습니다. 늘 설레던 경주로의 길이었습니다. 문우들, 함께한 시간 행복했습니다.

 

아직 부족한 제게 시를 나눌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매일신문사와 심사를 맡아주신 장석주 선생님, 장옥관 선생님께 마음을 다해 감사드립니다.

 

공부밖에 모르던 아내를 위해 많은 것을 준 남편, 오래 망설이며 미뤄왔던 등단을 이제 합니다. 이 여정에서 잘 지내겠습니다.

 

수산아 항아야, 오늘도 서로 응원하며 받은 것들 열심히 누리며 살자.

 

 

 

 

[심사평] 모호한 화법이지만 '여섯' 리듬의 변주 뛰어나

 

책으로 묶인 예심 통과 작을 읽으며 시의 균질화 현상에 잠시 당황했다. 하나의 예로, 세계를 ''으로 펼치고, 일상을 '열람'하며, 물의 '문장'으로 바꾸는 환유(換喩)들은 범상한 재능으로 상투형에 가까운 것이다.

 

한 교재로 시를 배운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다. '시적인 것'에 갇히면 '날것의 감각'과 낡은 작법(作法)을 깨고 부수는 신인의 예기(銳氣)를 드러내기 힘들다. 스무 명의 본심 대상작들 중에서 1차로 고른 것은 송현숙, 이도형, 김재희, 박윤우, 김종숙, 김서림, 추프랑카 등 여섯 분의 시다. 이 중에서 송현숙의 '박스를 접다', 이도형의 '구름을 통과한 검은 새의 벼락', 김종숙의 ''를 눈여겨보았으나 상상력의 발랄함과 시적 갱신의 정도가 모자라다고 판단했다. 최종적으로 김서림의 '사해문서 외전(外傳)'과 추프랑카의 '두꺼운 부재(不在)'가 당선을 겨루었다. 김서림은 시를 빚는 조형력과 언어 구사가 좋았다. "물속에 파종된 햇빛" "달의 뒤꿈치에서 하얀 밤이 돋는다" "슬픈 거미들은 죽음의 전언을 행으로 옮긴다" 같이 의미를 감각화 하는 시구들은 반짝이지만, 낯익은 발상과 기성(旣成)의 영향이 어른거리는 것은 흠이다. '날것의 감각'이 미흡하다는 방증이다.

 

추프랑카의 '두꺼운 부재(不在)'는 모호하고 화법(話法)이 낯설지만, 우리는 그 낯섦을 '날것의 감각'으로 이해했다. 여섯 쪽 마늘, 육손이, 여섯 해, 육 남매 등에서 '여섯'은 잉여고, 덧나고 아픈 상처다. 시인은 상처를 화석화하고 정적인 것으로 소모하지 않는다. 이 특이점은 까고, 벗기고, 날아가고, 스미고, 붐비고, 들이받고, 쪼개지고등등 다양한 움직씨 활용으로 나타난다. '여섯'은 여러 가닥으로 쪼개지고 끝내 셀 수 없는 빗줄기로 전화(轉化)한다. '여섯'을 리듬에 실어 여러 겹의 의미로 변주하는 솜씨가 대단하다. 두 심사자는 추프랑카의 '두꺼운 부재(不在)'의 낯섦이 다른 응모자들이 보여주지 못한 시적 새로움의 징후라고 판단하면서 기쁘게 당선작에 올렸다.

 

심사위원 장석주(시인), 장옥관(계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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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 취소

 

 

 

 

2016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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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매일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인이 기성 문인임이 밝혀져 당선을 취소했음을 알려드립니다. 매일신춘문예 응모요강은 ‘동일한 원고를 다른 신춘문예에 중복 투고하거나 표절한 경우 또는 기성 문인이 동일 장르에 응모했을 경우 당선작 발표 이후에라도 당선을 취소한다. 일간지 신춘문예 및 일간지 문학상, 종합문예지(장르별 전문지 및 응모 자격이 제한된 문예지 제외) 동일 장르 당선자는 기성 문인으로 간주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2016년 매일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인은 2014년 다른 일간지 신인 문학상으로 등단한 작가임이 당선작 공고 직전 밝혀져 응모요강에 따라 당선을 취소했습니다. 2016 매일신춘문예 시 부문에는 1천858편이 접수됐으며, 엄정한 예심과 본심을 거쳐 당선작을 선정했습니다.

 

시인 박미영 씨와 김경주 씨가 예심을 맡아 주셨고, 문인수 시인과 채호기 서울예술대 교수가 본심을 맡아 주셨습니다. 전통과 권위를 자랑하며, 한국 문단의 대표적 문인들을 대거 배출해온 매일신춘문예가 2016년 시 부문 당선인을 내지 못했음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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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낚시 / 박예신

 

 

물상들이 번져가는 어슬한 하늘 움켜쥔 새벽. 틈으로 푸른빛 스치더니 이내 어둠은

 

바다를 기억으로 길게 풀어놓는다. 꽤 괜찮은 미끼를 산 낚시꾼이라면 으레 찾는 그 곳.

 

긴 장대 쥔 어둑한 손들이 끊임없이 베어대는 채찍소리.

 

벌어진 암흑 사이로는 가늠키 어려운 뭔가가 일렁이는 듯.

 

침묵은 침묵을 질러대고 산전수전이 무언으로 공간에 쟁쟁한 순간.

 

뇌리에 깊이 묻어둔 별 몇 개는 음파에 부딪혀

 

검푸른 바다로 떨어지고 은빛으로 부서진다.

 

하얀 포말 사이사이에 끼어있는 은빛 조각들이

 

꾼들의 주린 눈동자 위에 가득 들어찰 때까지.

 

한 살배기의 미소가 언뜻 지평선에 걸쳐있다. 하지만,

 

아이가 휩쓸린 별과 아버지가 뿌려진 달은 슬프다.

 

혹은 애상을, 혹은 사라진 순간을 건진다고 하는

 

이른 새벽이 연주하는 푸른빛 안개.

 

감정이 씨줄과 날줄로 낚싯줄에 엉키거나

 

그물로 한 움큼 건져지는 민생의 곳.

 

내일도 이곳을 지배할 만감의 울림은

 

태양의 저쪽 편으로부터 타오르다가

 

서서히 붉게 사그라든다.

 

 

 

 

2015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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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시는 우주 투영시에 우주를 담고파, 마음속 별들이 터질 때마다 글쓰기

 

한 편의 시 속에는 우주가 투영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 속에는 자전하는 인생들과 얽히고설킨 산전수전이 클러스터를 이루고 있는 듯이 보였다. 어제와 오늘의 모습이 다른 우주 속에 시인들이 묻어둔 시어들을 하나하나 캐내어 이리저리 깎아보고 비춰보는 과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즐거웠다. 어느 순간 나 또한 시에 우주를 담고 싶었다. 쉽게 캐내지 못할, 그렇기에 값어치 있는 미묘한 원석들을 시 속에 가득 묻어두고 싶었다. 이것이 내가 시를 읽고 쓰기 시작한 이유다.

 

별안간 모르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가 내게 당선 소식을 전했을 때 나는 머리를 어딘가에 쾅 하고 부딪히기라도 한 듯 정신이 아찔했다. 25년을 살면서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은 처음이었다. 덕분에 나도 모르게 작은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그것도 퇴근길 만원 버스 안에서. 단지 내 작품을 기한 내에 투고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성공했다고 느꼈던 나였는데, 2015년을 목전에 두고 이렇게 큰 상을 받아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나는 시를 전문적으로 배운 적도 없을뿐더러 대부분의 당선자처럼 문예창작과를 나온 적도, 문학 아카데미를 다닌 적도 없다. 나는 다만 이따금 마음속에 고이 숨겨둔 별들이 터져 나오려 할 때면 펜촉으로 풀어내곤 하던 평범한 영문과 학생일 뿐이다. 내가 아직껏 펜을 놓지 않게 된 것은, 8할이 어머니 덕분이다. 비록 어머니께서는 칠 형제를 거느린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태어나는 바람에 글에 대한 뜨거움을 대부분 방직공장 굴뚝 밖으로 날려 보내야 했지만 그 불씨까지 꺼지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위대한 도구는 기어코 그 뜨거움을 되살려내었고 감사하게도 나는 그것을 값없이 선물 받은 것 같다. 비록 변변찮은 형편에 학원 한 군데 못 보내 주셨다며 미안해하셨지만 어머니께선 유년시절부터 끊임없는 독서, 글쓰기 그리고 시쓰기를 통해 나를 다듬어 주셨다. 아마 어머니 당신께서 받지 못한 것들을 자식에게만큼은 전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어머니께 이 모든 영광을 돌리고 싶다.

 

또한 부족하나마 나에게 문단에 나갈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해 주신 심사위원님들에게도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묵묵히 문단을 이끌고 갈 우직한 한 마리 젊은 소가 될 것을 약속드린다.

 

 

 

 

[심사평] 시적 형상성에 재능이 자연스레 스며들어 가능성에 기대 걸어볼 만

 

예심을 거쳐 선자에게 의뢰된 작품들은 시심으로 보면 공들여 가다듬은 흔적이 역력하지만 감각이나 인식으로는 특별히 새로울 것이 없는 그만그만한 수준의 성취였다. 모름지기 신인이라면 참신함은 물론이지만, 시로써 자신에게 되물으려는 질문 또한 절절해야 할 것이다. 투고된 시편들의 스펙트럼이 연륜의 다채로움만큼 넓지 않았다는 것도 심사자에겐 유감이었다. 마지막까지 논의로 남았던 작품은 김태인 씨의 안개 서식지, 김정윤 씨의 캥거루주머니 속으로, 박예신 씨의 새벽 낚시, 이윤정 씨의 모자는 만년필을 써본 적이 없다등이었다.

 

김태인 씨의 시편은 집요한 비유의 힘이 습작의 공력을 느끼게 하지만, 체화되지 못한 관념이 시를 유연하게 끌고 가려는 동력을 어딘지 모르게 경색되게 한다. 각박한 의욕보다 비약이 가능하도록 여백을 남겨놓는 지혜가 때로는 소중한 것이다. 김정윤 씨의 시편은 정감이나 의식이 가 닿는 지향에서 어느 정도 견고한 시의 토대를 느끼게 한다. 그러나 응시의 대상과 시적 의도가 각각 다른 주파수를 갖고 있는 듯, 일체화되지 못하는 어색함이 화려한 수사를 공허한 독후에 빠지게 만든다.

 

이윤정 씨의 시편에서는 서로 무관한 사물들이 포개지며 자아내는 맥락의 삼투가 돋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앞에 언급한 분들에 비해 당선의 수준에 훨씬 가까이 접근해 있었다. 사변적인 주제조차 사물의 구체성에 풀어 넣으려는 주체의 시선은 마지막까지 심사자의 판단을 기우뚱거리게 했다. 그러나 시의 대상들이 제 본분을 지켜내도록 비유의 상호성을 끈기 있게 살폈으면 하는 아쉬움을 안게 하는 것이 흠이었다.

 

박예신 씨의 시편은 시의 미학을 의식하는 문제적 시선이 옅은 대신 해맑고 풋풋한 정감이 잔뜩 묻어나는 시편을 선보인다. 이는 노력해서 얻어낸 습작의 결과가 아니라 그 나름의 재능이 시적 형상성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경우가 아닐까 판단되었다. 그리하여 이 응모자의 세계는 이즈음 신인들이 보여주는 장황하고 난삽한 수사적 중첩에서 한 걸음 비켜선다. 아쉽다면 수사적 평면성을 떨치고 저만의 개성으로 부피가 부조되는 시의 구상력을 함께 건사하는 일이다.

 

숙고 끝에 박예신 씨의 새벽 낚시를 당선작으로 밀어올린다. 습작의 연조로 보아 앞으로의 가능성에 기대를 걸어보려는 것이다. 당선을 축하하며, 각고의 정진을 당부한다.

 

심사위원 김주연(문학평론가) 김명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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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이 / 박주용

 

 

난다 냄새 난다 나는 내가 긁어 부스럼이라 냄새 난다 나는 나를 날린 셈인데 냄새 나는 나는 나는 새에게도 냄새 난다 냄새는 냄새를 전이시켜 새똥 싼 내 하늘도 냄새 난다 냄새는 자꾸 가려워 구름을 비벼대는 것이어서 충혈 된 내 먹구름도 냄새 난다 소나기 한 줄금 쏟아내면 냄새가 사라질 것이란 기대는 금물 사납게 짖어대는 내 번개가 아직도 그 속에 눈이 번쩍 도사리고 있어 크릉크릉 냄새 난다 아귀를 맞추어 장미꽃을 밀어 올리던 내 거미줄에도 말 달리며 방방 뛰던 꽃물이 남아 있기는 마찬가지 옹헤야 냄새 난다 어절씨구 냄새 난다 소리 높여 노래 부르기는 시기상조 이제는 내가 나를 더불고 슬금슬금 거문고를 타야 할 때 내가 나를 데리고 묵상에 들어야 할 시간 소리 없이 냄새 나고 냄새 없이 냄새 난다 내가 나를 산책한 냄새 한 무더기 내 안을 단단히 버티어 간다.

 

 

 

점자 그녀가 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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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얇은 귀에 물고기를 통째로 날염했는지 핸드폰에서 냄새가 났습니다. 마중 나가던 손이 너무 떨려 그냥 흘려보냈습니다. 두려움과 설렘의 안테나 잘게 썰어 부재중 너머의 소리에 주파수를 맞춰 보았습니다. 순간 새들이 날아오르고, 지난 사월 아버지 곁에 벚꽃으로 가신 어머니가 오늘은 내게 눈꽃으로 오시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그립고 반가운 소식을 가지고 말입니다. 새들도 찔끔 눈물을 내려놓고 날아갑니다.

 

저는 시를 쓰며 그동안 낙엽수였습니다. 내 나무는 숨이 깊었던 달빛이 자꾸 흐릿해지고 뻐꾸기 울음도 등뼈를 슬슬 빠져나가 강물이 시나브로 말라갔습니다. 그 증상은 날로 심해져 습했던 속눈썹도 어리둥절해지고 점점 가벼워져 작은 바람에도 염기 없이 실실 웃었습니다. 숨 가쁘게 살아도 자꾸 주눅이 들어 옆으로 드러눕게 되고 가끔은 자신을 마셔버린 취객처럼 지그재그로 걸으며 구름 발자국을 찍어댔습니다. 앞으로도 이 증상은 계속 되겠지만 이제 든든한 뿌리 하나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겨울만 되면 고개 떨구던 나무를 믿고 응원해 준 사랑하는 사람과 딸 누리, 아들 한솔에게 먼저 고마움을 전합니다. 형 동생 내외를 비롯한 가족 분들, 특히 나뭇잎 신발로도 고향 청산을 지키고 계신 작은아버지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제자들을 비롯하여 몸을 담고 있는 건양학원의 가족들, 하현달로 용기를 준 충남대 국어국문학과 동기와 시목동인들, 옥천문인협회, 테니스동호인, 한우물 친구들 모두 고맙습니다.

 

반으로 접히는 나이에 한창나이로 날개를 달아주신 심사위원님과 매일신문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더 치열한 산책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정진하겠습니다.

 

 

 

지는 것들의 이름 불러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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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작가 나이 앞지른 시적 미덕

 

예심을 통과한 새로운 작품들을 읽는다는 것은 우선 즐거움에 가깝다. 우리 시단의 시적 근경인 난삽하고 편협한 가독성은 현저히 줄어들었고, 일상과 사유가 시의 그물망에 들어왔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다만 투고한 분들의 연령층이 높다는 것은 곤혹스럽다. 등단 연령의 상승은 신춘문예 뿐만 아니라 사회전반적인 현상이 아닌가. 이십 대에 등단한다는 희망은 이제 사치에 가까워졌다.

 

하지만 우리는 박주용 씨의 작품을 선택하는 하나의 사치를 누릴 수 있었다. 당선작은 박주용 씨가 투고한 세 작품, '나뭇잎 신발', '데칼코마니', '옹이'에서 가려야만 했다. 당선작인 '옹이'는 옹이를 소재로 섬세한 개성을 뽐내고 있다. 작품'옹이'는 옹이를 기의로, 냄새를 기표로 하되, 냄새라는 독특한 흔적만으로 시적 의도를 정치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옹이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자면 "나무에 박힌 가지의 그루터기. 또는 그것이 난 자리" 이면서 "굳은살"이거나 또는 "귀에 박힌 말이나 가슴에 맺힌 감정 따위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작품 '옹이'의 배후는"귀에 박힌 말이나 가슴에 맺힌 감정 따위"에 해당되겠다. 가슴에 맺힌 개별적 감정을 옹이/냄새가 주술적 공간과 서정적 공간을 통과하면서 자기 심화에 도달하게 되는 발화 과정이 노래말로 엮어졌다. 우리말의 리듬에 기댄 이 냄새의 상상력은 낯설지만 기시감에 가깝고, 재빠르지만 부박하지 않다. 해설도 분석도 필요없이 감각으로 다가오는 시적 속도감은 '옹이'의 매혹이다. 박주용 씨의 '옹이'를 당선작으로 미는데 심사위원 두 사람이 합의했지만 씨의 연령이 오십대라는 걸 우려했다는 점을 덧붙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어쩌랴, 시적 미덕이 나이를 앞질렀다.

 

다음에 거론된 분들의 작품도 몇 번이나 읽어야만 했다. 우선 이명우의 '실직''척추', 특히 '실직'에는 "햇빛에 나무가 더 가늘게 깍이고 있다"라는 시선이 있고, '척추'에는 "골조건물에 길게 세운 철근 몇 가닥 / 바람을 빼내지 못한 인부들의 허리를 갉아먹는다"라는 쓸쓸함이 있다. 조유희의 '앵무새의 난독증'과 김재연의 '슬리퍼(Sleeper)'도 우리가 주저한 작품이었다. "슬리퍼라는 단어가 / 영원히 잠든 사람들의 발자국, / 이라고 생각해보자"라는 '슬리퍼(Sleeper)'의 첫 연은 이후에도 두고두고 생각나는 구절이었다. 이 분들 역시 시인이 될 수 있는 역량을 가졌다고 믿어진다.

 

심사위원 문인수(시인송재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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