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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 / 김옥숙

 

 

낙타의 젖은 눈썹을 본 일이 있는가 그림 속 낙타의 눈을 들여다보지 말라

낙타의 길고 아름다운 눈썹에 손을 대지 말라

천년만년 그림 속에 박제가 되어있어야 할

낙타가 고개를 돌려 당신 앞으로 걸어나올 것이다

낙타가 당신에게 올라타라고 말을 건넨다

언젠가 낙타의 등에 올라타고

한없이 사막을 건너갔던 것처럼 낙타의 익숙한 등

불룩한 혹을 쓰다듬을 것이다 당신은

지쳐보이는 식구처럼 낙타가 안쓰러울 것이다

선인장들은 하늘에다 무수한 가시를 박아 넣고

메마른 하늘을 마구 찔러대고 있다

선인장의 눈과 귀는 뿌리에 있지 낙타가 말한다

캄캄한 지하에 눈과 귀를 박아 넣고

수만 미터 아래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를 찾아내는 거야

내 몸 속의 물을 꺼내 마셔, 괜찮아

낙타의 목을 끌어안고 우는 당신

낙타의 몸에서 물을 꺼내 마신다

모래바람이 불어와 낙타의 몸을 이불처럼 덮는다

당신은 눈물을 훔치며 그림 속을 걸어나온다

당신의 몸 속에 들어온 낙타 한 마리

문을 열면 모래 바람이 거세게 불고

당신의 늑골 속으로 기억 속으로 모래가 쌓이는 소리

당신은 몸 속의 낙타 한 마리 거느리고

사막을 건넌다 그림 속의 낙타는 눈썹이 길다

 

 

 

2003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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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빈 집 한 채가 있다. 뒤란에는 대나무 밭이 있다. 스스스 대숲을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들린다. 장독대 옆으로 말라 죽어가는 포도나무와 빗물이 고인 절구통이 놓여 있는 집, 허물어지는 담장 사이로 들쥐들이 드나드는 집, 마루에 먼지가 보 얗게 쌓이고 방안에는 눅눅한 시간이 곰팡내를 풍기고 있는 집, 식구들이 떠나온 집. 그 집 처마 밑에는 아직도 제비가 날아와 알을 품을 것이다.


우리 식구들이 떠나온 그 집이 꿈속에 자주 떠오른다. 산 위에서 우리 집 앞마당 을 내려다보실 아버지, 많이 외로우시리라. 술을 그리 좋아하시던 아버지는 가시 고 없고 아버지의 무덤에 술 한잔 쳐드리고 싶다.


나의 시는 고향에 두고 온 빈집이다. 가끔씩 그 집으로 들어가서 나는 마루를 닦 기도 하고 산을 바라보기도 하고 대숲을 지나는 바람 소리를 듣기도 한다. 내 마 음 속의 빈 집 한 채 결코 허물지 않으리라.


감사드려야 할 분들이 너무 많다. 가시밭길을 헤쳐오면서도 힘들다 한마디 하지 않은 나의 어머니에게 이 영광을 돌리고 싶다. 사랑하는 나의 가족들, 예리한 독 자가 되어주는 남편, 언니와 동생들, 친구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늘 자극이 되어주던 노정완 작가, 글벗 선배님들, 반월문학 동인들, 경희사이버대 학 박주택 교수님, 나의 시를 수업시간에 읽어주셨던 신경림.이기철 교수님께도 감사드린다 . 시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부족한 시를 뽑아주신 심사위원들께 울림이 깊은 시를 써서 보답하고 싶다.

 

 

 

새의 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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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사평] 시적상상력, 서사적 밀도 뛰어나


본심에 오른 작품 중에 논의의 대상이 되었던 작품은 「철탑」, 「머물어가는 사람들」, 「옻나무 숲으로 들어가는」, 「고서점에서」, 「결합」, 「매직아이」, 「곶감」, 「월전리」, 「어린골파」, 「낙타」, 「말이 그려진 방석」, 「지구촌 오지를 가다」, 「사월」, 「살꽃이 피다」, 「아리랑성냥」, 「홍인」, 「외딴묘지」, 「재봉틀」 등이었다.

모두들 그만그만한 수준을 지닌 작품들이었기 때문에 확실하게 이것이다라고 집어내기엔 어려움이 따랐다. 그러면서도 최후까지 남은 작품은 「살꽃이 피다」, 「사월」, 「말이 그려진 방석」, 「낙타」,「 어린 골파」, 「월전리」였다.

어린골파는 작품구성이나 서정적 처리가 가장 짜임새 있는 작품이었으나, 함께 투고한 다른 작품들이 편차가 심해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였다. 「말이 그려진 방석」과 「살꽃이 피다」는 두 작품 모두 나름대로의 어법을 지닌 독특한 감수성의 소유자라 생각되었다.

그런데 이것 이외의 작품에서 보이는 이미지와 이미지의 부자연스런 연결이 마음에 걸려 고심끝에 제외시켰다. 「월전리」는 싱싱한 감각과 활달한 감수성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낙타」와 함께 당선작으로 하고 싶을 정도였으나 한 작품을 선택해야하는 신춘문예의 응모방침에 따라 부득불 빠지게 된 아쉬움이 남는다. 시적상상력과 서사적 밀도가 더 뛰어났다는 점이 「낙타」가 당선작으로 선정된 이유였다. 더욱 정진한다면 모두에게 좋은 결실이 있을 것으로 믿는다


권기호(시인, 경북대교수), 정호승(시인, 현대문학북스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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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은 북국으로 날아간다 / 이향

 

 

강 건너 쌍림공단 쪽에서깃털에 따스함을 숨기고

쇠기러기 한 떼가 북국으로 날아간다

뭉텅뭉텅 욕설 게워내는 굴뚝 위로

폭설이 내려 세상의 길들 질척거린다

눈발에 못이긴 나무들 길게 휘어지고

섬유공장 연사실 대낮에도 알전구가 껌벅거린다

서른 두살의 조선족 김금화씨는

귀마개 꽁꽁 틀어막아도 눈내리는 소리 들린다

윙윙대는 기계소리가 푸른 뽕잎 갉아먹고

다급하게 실 토해내어 고치를 만든다

고치 속으로 들어간 그녀는

수천마리 나비가 되어 꿈 속을 날아다닌다

몰래 숨겨둔 적금통장에는

삼만원 미만의 싸락눈이 하얗게 쌓인다

두고 온 북국 눈발에 파묻힌 무도

연초록 싹 내밀어 봄을 기다리겠지

막내의 바짓단도 겨울해만큼 짧아졌는지

더 자랄데 없어 서걱이는 강둑의 갈대가

그리움에 얼굴 묻고 우는 저녁

젖몸살로 뒤척이다 뱉아놓은 보랏빛 한숨

한 가닥 물고 북국으로 날아가는

저 쇠기러기 떼

 

 

 

침묵이 침묵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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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당선 통지를 받던 날 저녁부터 지독한 몸살을 앓았다. 내 혈관 속의 흰피톨들이 반란을 일으킨 듯했다. 혈관 속으로 찔러넣은 링거 주사바늘이 깊디깊은 잠의 나락으로 자꾸 떠밀어넣었다.

 

고치 속에 갇힌 몽롱한 누에 같았다. 우화를 꿈꾸는 나비의 몸짓. 첫 도전에 덜컥 당선이라니. 나는 너무 쉽게 나비가 된 것이 아닌가. 다섯잠을 다 끝낸 누에는 자기 몸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실을 뽑아 제 몸과 영혼을 감싸안는다.

 

나는 이제 막 첫잠에서 깨어난 애벌레에 불과하다. 자라지 않은 날개로 세상을 향해 날아가려니 기쁨보다는 두려움이 앞선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을 갉아 먹어야 할지. 얼마나 많은 허물을 더 벗어야 제대로 된 말의 집 한채를 이룰 수 있을지 그저 막막하기만 하다.

 

그러나 내 몸은 텅비어 있다. 키 작은 잡풀들만 웅성거리는 황룡사 빈터같다. 말의 집 한채를 세우기 위해 조급하게 우왕좌왕하지는 않겠다. 잃어버린 목탑을 세우는 마음으로 한층 한층 탑을 쌓아 올리고 싶다.

 

시의 길로 이끌어 주신 박진형 선생께 이 기쁨을 안겨 드리며, 언제나 내편에서 응원해 준 가족들, 고령독서회 식구들, 애정어린 눈길을 주신 많은 분들께 고마움을 전하다. 또 나의 미숙한 날갯짓을 곱게 받아주신 심사위원님께 좋은 시로 보답할 것을 약속드린다.

 

 

 

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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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예심을 거쳐 본선에 올라온 40여편의 작품 중 최후까지 손안에 남은 작품은 10편 가량. 모두가 나름대로의 몸짓을 보이고 있는 수준작이어서 당선작을 뽑는데 고심이 많았다.

 

'중독 1'은 사이버시대 생활상을 시적 상상력으로 처리하는 내면이 돋보였고, '서라벌의 빗소리''가시연꽃의 비밀'은 우리 전통 속에 녹아있는 어떤 정한을 현대적 어법으로 길어낼 줄 아는 솜씨가 매력이 있었다.

 

'빙설'은 특이한 감각의 소유자였고, '달팽이'는 발상의 처리가 재미를 주고 있었다 . '건어물에 바다가 있다'는 건어물의 정경 묘사를 삶의 페이소스와 연결시킨 점이 좋았고, '텃밭'.'달못둑에 서서'.'내 사랑 수몰지역'.'새들은 북국으로 날아간다'는 모두 사회생활이 던져주는 의문의 여러 파편들을 진지한 시선으로 노래하고 있다는 점에서 호감이 가는 작품이었다.

 

그 중 요즘 남한 사회에서 겪게 되는 조선족들이 지닌 '코리안 드림'의 짙은 그늘을 지금 내 아픔처럼 시적 압축으로 형상화시키며 감동을 주고 있는 '새들은 북국으로 날아간다'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이 향씨의 작품 중에 역량을 보여주고 있는 '세 개의 바다'도 좋았으나 완성도와 압축의 의미를 고려, 이 작품을 선택했다.

 

심사위원 권기호(시인.경북대 교수) 정호승(시인.현대문학북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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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 / 조유인

 

 

실수로 들고 있던 유리잔을 떨어뜨린 적이 있습니다. 그때 유리잔은 바닥에 부딪치며 단 한 번의 파열음으로 산산조각이 나버렸지요. 소리가 빠져나간 유리잔, 그것은 꼭 혼이 빠져나간 몸뚱어리 같았습니다. 어쩌면 깨어지는 순간에 들린 바로 그 소리가 부서진 유리조각들을 그때까지 하나의 잔으로 꽉 붙잡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금관 역시 소리의 다른 모습일지 모릅니다. 금덩이를 천 번도 넘게 두드려 펴던 소리, 연푸른 경옥을 쪼개어 갈고 갈던 소리. 그 많은 소리들을 고스란히 쌓아 빛으로 일으킨 나무, 그 위에 따로 가린 고갱이들을 곡옥과 영락으로 빚어 찰랑찰랑 늘어뜨린, 세상에서 가장 눈부신 소리의 변용 말이지요.

 

빛의 몸을 입은 소리, 그것을 머리 위에 두신 임금님에겐 그 빛이 온몸을 휘돌아 마침내 세상을 다스리는 자애로운 음성으로 화했을 법합니다. 정말 그래요. 그쯤은 돼야 소리가 소리를 부른다는 이치 그대로, 여항과 저잣거리의 태평가에서부터 깊은 산 험한 골짜기 이름 없는 백성들의 작은 탄식소리까지 비로소 그 사슴뿔 같은 입식 속으로 낱낱이 빨려들지 않았겠습니까.

 

가볍고 얕은 소리들만 웃자라 오래고 실한 믿음들을 하나둘씩 허물어 가는 나날들, 나는 곧잘 박물관을 찾아 금관 앞에 섭니다. 그러면 그때마다 은하의 가장 빛나는 한 부분을 옮겨 온 것만 같은 빛무리에 휩싸여, 까마득 흘러간 저편의 소리에 닫혔던 마음이 활짝 열리곤 하는 것입니다. 마치도 행방이 묘연한 만파식적을 다시 찾아 듣는 듯.

 

 

 

 

2001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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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나이를 한두 살씩 먹을수록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도 한두 가지씩 사라진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운명이란 것도 겉으로는 거창하게 들리지만, 가능성의 한 갈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스물다섯 해 동안 내가 취했던 것은 모조리 다 열등의 갈래길들이었다. 살아가면서 찾아오는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오늘 내게 다가온 엄청난 가능성의 시작을 조금은 기뻐하며 받아들이고 싶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시인을 두고 '가슴으로 말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시는 '가슴으로 하는 말'이 될 터인데, 당선 소식을 듣자마자 여태껏 내가 했던 말들은 모두 혀끝에서만 맴돌아 나온 가성은 아닌가 싶어 덜컹 부끄러워진다.

 

시는 어떻게 수많은 사람들 사이를 지나 나에게 찾아온 것일까? 그래도 내가 가냘픈 신음이라도 내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일까? 그러면 이제부터라도 차근차근 심호흡부터 해야겠다.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소리를 만들 때까지 피나는 노력과 발성 연습도 해야 할 것이다.

 

내 작품 최초의 고급독자인 부모님께 어리광을 부릴 수 있어서 신난다. 지난봄 교사로 발령을 받아 한집에서 살게 된 형과 착한 동생과도 어깨동무하고 싶다. 영문과 및 국문과 교수님들, 동국문학회, 누구라고 얘기하면 빼먹을 이름이 있을까봐 차마 말 못하는 친구, 선후배님들과도 함께 기쁨을 나누고 싶다. 무엇보다도 졸작과 그 수많은 '의도적 오류'들에게 손을 들어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리며, 좋은 작품으로 꼭 보답해 드릴 것을 다짐해본다.

 

 

 

[심사평] 빛의 소리의 영롱환 합금 아름다워

 

자신의 내밀한 감정을 언어로 전달한다는 것은 클랙션 하나로 운전자의 짜증을 표현하거나, 두꺼운 코트 위로 등을 긁는 것과 마찬가지로 힘겹고 답답한 노릇이다. 언어의 꽃인 시는 바로 그 힘겹고 답답한 느낌이 트이면서 은폐된 삶이 내장 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달리 비유하자면 그것은 우연히 팔을 들어 올리는 순간, 윗 도리와 아랫도리 사이로 트이는 흰 살결 같은 것이다. 해마다 신춘의 좋은 시들은 숨겨진 삶의 맨살을 응시하게 한다.

 

동해와 만나는 여섯 번째 길’(김희영)땅은 제 속에 눈물을 가두고 살아간다’(임경림)는 비록 참신한 조망이나 색다른 관점을 보여 주는 것은 아니나, 전반적으로 안정감 있는 구성력을 갖춘 시들이다. 그러나 대개의 신춘문예 응모작들이 그러하듯이, 기성의 시풍과 범용한 수사에서 크게 자유롭지 못하다는 약점을 갖는다.

 

기형도의 말투를 연상케 하는 기이하고 황당한 어법으로 삶의 황폐와 좌절을 넋나 간 듯이 중얼거리는 한용국의 시들, 특히 실종내성등은 젊은 시의 새로운 물줄기를 가늠하게 하는 흥미로운 작품들이다. 다만 군데군데 납득할 수 없는 애매한 구절들이 글쓴이의 언어 통제력을 의심케 하고 장인으로서의 신뢰를 가로막는다.

 

당선작으로 결정된 조유인의 금관은 고대 석관의 밀폐된 뚜껑을 여는 듯한 돌출한 상상력을 빛과 소리의 영롱한 합금을 빚고 있다. 물론 간혹 추상화된 말들이 관념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가느다란 국수 다발처럼 힘을 잃는 듯한 느낌이나, 마지막 네 번째 연이 시적 의미의 종결에 별다른 기여를 못하고 사족처럼 내걸린 듯한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보이는 빛으로부터 들리는 소리를 읽어내고, 깨어짐으로부터 만들어짐의 비밀을 탐색하는 특이한 눈길은 유망한 시인으로서의 전도를 예감케 한다. 아울러 나직하고 느릿하면서도 끈기와 뚝심을 갖춘 꼬깃꼬깃한 말솜씨는 사소한 곤경에 쉽게 꺾이질 않을 근성 같은 것을 짐작케 한다.

 

당대의 신뢰할 만한 글쟁이로 살아남아 매일신춘문예의 이름을 빛내주기 바란다.

 

심사위원 권기호(시인.경북대 교수) 정호승(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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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 / 김성용

 

 

극장에 사무실에 학교에 어디에 어디에 있는 의자란 의자는

모두 네 발 달린 짐승이다 얼굴은 없고 아가리에는 발만 달린 의자는

흉측한 짐승이다 어둠에 몸을 숨길 줄 아는 감각과

햇빛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을 지니고 온종일을

숨소리도 내지 않고 먹이가 앉기만을 기다리는

의자는 필시 맹수의 조건을 두루 갖춘 네 발 달린 짐승이다

이 짐승에게는 권태도 없고 죽음도 없다 아니 죽음은 있다

안락한 죽음 편안한 죽음만 있다

먹이들은 자신들의 엉덩이가 깨물린 줄도 모르고

편안히 앉았다가 툭툭 엉덩이를 털고 일어서려 한다

그러나 한 번 붙잡은 먹이는 좀체 놓아주려 하지 않는 근성을 먹이들은 잘 모른다

이빨 자국이 아무리 선명해도 살이 짓이겨져도 알 수 없다

이 짐승은 혼자 있다고 해서 절대 외로워하는 법도 없다

떼를 지어 있어도 절대 떠들지 않는다 오직 먹이가 앉기만을 기다린다

그리곤 편안히 마비된다 서서히 안락사한다

제발 앉아 달라고 제발 혼자 앉아 달라고 호소하지 않는 의자는

누구보다 안락한 죽음만을 사랑하는 네발 달린 짐승이다

 

 

 

 

2000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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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알코올이 잠시 내 몸의 주인이었을 때, 전화가 왔다. 내가 세운 계획보다 앞서가는 현실을 알려주는 낯선 전화였다.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잠시 후 나는, 나를 앞서가는 현실 앞에서 먹먹하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제와 같은 모습으로 잠자리에 누웠다. 그러나 새천년을 알리는 제야의 종소리 서른 세 번이 술기운과 함께 지난 밤 내내 내게는 앞서 울리는 듯도 했다. 유독 '부끄럽다'는 종소리만이 기억에 남는다.

 

나보다 더 기뻐해 주시는 분들이 많다. 막내의 철없는 모습에 마음 졸이시며 살아오신 부모님과 가족들, 궁핍한 주머니 사정에도 꿋꿋이(?) 술자리를 지켜준 친구들, 형들, 그리고 문학을 이야기하며 함께 밤을 지새던 '까치노을'문학동아리 후배들, 그들이 기뻐하는 모습이 내게는 기쁨일 뿐이다.

 

무엇보다 시의 길로 입문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신 손진은 선생님, 배우는 학생들보다 더 큰 열정을 보여 주시고 가르쳐 주신 학과 장윤익, 여세주, 김주현, 구광본 선생님과 시를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죄송함과 감사함을 동시에 전한다. 담배를 끊을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에게도.

 

짝사랑에 고민하던 한 사내가 그동안 참았던 용기를 모두 풀어 고백하고 당당하게 퇴짜맞은 기분으로 이제 대문을 연다. 대문이 더듬거리며 열릴 것인가, 수다스럽게 열릴 것인가, 고민하지 않겠다. 제 자리에서 소외된 것들과의 한울림을 위하여 종신불퇴(終身不退)하겠다.

 

20세기의 작은 먼지가 21세기의 민들레를 꿈꾸며

 

 

 

[심사평]

 

응모된 시를 읽으면서 상향평준화 현상이 뚜렷하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2천여 편에 이르는 응모작 가운데 예선을 거친 작품들은 대부분 수준작으로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으나 상대적으로 두드러지는 작품이 눈에 띄지 않아 어려움이 따랐다.

 

김미영의 '보영약국은 따뜻한 말을 조제한다'는 일상사의 이면을 신선한 시각으로 그리고 있으나 '소설적'인 묘사에 그쳐 깊은 울림이 아쉬웠다. 이계희의 '볕이 잘 드는 마을'은 잔잔하고 단단하게 세상살이의 고랑을 파고 일궈내는 감수성이 돋보이지만 삶을 장악하고 뭉뚱그려내는 힘이 부족하다. 이별리의 '철길 사이'는 언어와 감정의 절제, 한층 높은 도약이 요구돼 좋은 시의 문턱에 머문 느낌이며, 유가형의 '기억의 상자에 빠집니다'는 발상이 참신하고 언어 감각이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무게가 실리지 않는 것이 흠이었다.

 

마지막까지 겨룬 작품은 신민철의 '앵무새와의 대화'와 김성용의 '의자'였다. '앵무새와의'는 독특한 시각으로 삶을 액자 속에 담아내는 기교가 능숙하고 언어의 행진이 현란하다. 하지만 말을 너무 이리저리 돌리는 바람에 삶에 대한 인식의 바닥이 얕아지는 느낌을 버리지 못하게 한다. 재미있는 언어유희와 세련된 감수성이 장점이자 약점을 만들고 있는 경우지만 좋은 시인으로서의 자질이 엿보이는 것은 분명하다. 언어보다는 삶에 더 기대고 삶을 더 깊이 들여다보기를 기대한다.

 

'앵무새와의'에 비해 '의자'는 완성도와 세련미가 떨어진다. 거칠고 튀며 난폭하다. 전체적인 숨고르기와 후반부의 마무리도 허술하다. 파괴적이고 현대적인 것까지 유형화되는 이 시대에 이런 유형의 시가 일종의 '상투성'으로 자리 잡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마저 없지 않다. 그러나 '의자'를 통해 우리의 삶이 사로잡힌 수렁을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파괴적이지만 역동적인 이미지로 삶의 '굳은 살'을 떨궈내는 힘을 지니고 있어 호감을 갖게 한다. 끊임없이 관습과 고정관념, 상식에 도전하는 패기와 힘을 견지하기 바라며 당선작으로 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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