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공원 외 4편 / 남현지
눈앞에 호수가 있고
나는 시민과 조경이 익숙한 듯이
벤치에 앉아서
방금 점심을 먹고 식당에서 나오다가
묶여 있는 개를 바라보는 회사원처럼
호수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었다
나는 그게 마음에 들었다
내가 배가 부르다는 게
큰 개가 묶여 있다는 게
누가 길을 물어서
여기 사는 사람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호수만 보이는데
꿈에서는 나도 찰랑거리다가
귀를 기울이면 자신이
물결처럼 쏟아져서 깨어났다
잉어 몇마리와 엉겨붙은 물풀을
떼어내면서
호수는 잘 묶여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건물처럼
고요하게
오늘 저녁은 뭐 먹지 생각하면서
호수를 따라 걸었다
삼십분 전에 본 사람이
다시 옆을 달리고 있다
빛의 생산
전기 좋아해요?
이제 그만
그걸 자연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담배를 마지막으로
집에 불타오르는 물건이 없어졌는데
한참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전기를 좋아하는구나
전기 없는 세계를
상상할 수 없습니다
만두 없는 세계
슬프지만 그럴 수 있고
종달새는 본 적도 없고
나 없는 세계는 지금도 뭐
언제부터
고통 없는 세계
그건 상상을 안 합니다
자연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봄기운이 완연한
오늘 날씨 이야기처럼 다들
두줄을 넘기지 말라고
고통에게 차례를 지키라고
말할 거라면
사물들은 다 잘 있습니다
가끔 고장이 나고
그것을 고치거나 버립니다
빛이 깜빡거리면
문제가 있는 거고
담배는 진짜 끊었습니다
퇴근
첫눈이 내리는데
갑자기 돈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나무에서 떨어져 나와
사과 상자 안에서
더 붉어진 사과 이야기
나무는 뭐라고 중얼거리다가
그만큼의 붉은색을
중개인들의 몫으로 넘겨주었다
모자라요?
가게 주인은 상한 사과를 덤으로 넣어주고
나는 충분하다고 다시 빼낸다
한밤중에 사과는
검은 봉지 안에서 조금 더 붉어지고
나무는 멀리서 눈을 맞고 서 있다
뭘 잘못한 사람처럼
엉거주춤하게
버스를 긴 줄로 기다리다가
집을 향해 걸었다
도로에 집으로 가지 못한 차들이
눈을 맞고 서 있고
떨어진 사과 하나는
붉은색을 들고 굴러갔다
앙코르 와트의 버섯 상인
간에 좋아요
살이 빠집니다
상황버섯을 팔던 상인은
실은 돈을 모아서
포카라로 가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거기서 인류의 멸망을 기다릴 거라고
관광객들에게
포카라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푸른 하늘
흰 구름
히말라야의 산기슭
나는 기쁩니다
버섯은 얼마입니까
실업자가 야구 보는 이야기
분명한 마음이 있었는데요
사라졌습니다
고장 난 사람처럼 야구만 보았습니다
공이 뭐라고
공은 분명한데 어디로 날아갈지 모르니까
개의 마음을 알 것 같고
공의 궤적만 보고 있어도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야구를 보는 동안
아픈 사람들의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공을 보는 개의 마음은 알아도
나를 보는 아픈 사람들의 마음은 모르겠는데
엄마는 내가 멀쩡해 보여요?
아름다움처럼 모르겠는데
나 없이 내게로 오는
그 마음들은
아무도 사할을 넘지 못하도록
투수와 타자가
긴장을 이루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쪽 아니면 저쪽으로
쉽게 하나가 되는데
그러려고 모인 거니까
온 힘을 다하여 야구를 보았습니다
분명한 것은 공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조금만 참아달라고 하던 사람들이 사라질 때까지
매일 죄송하다고 말해야 했던 전화기를 잊을 때까지
그러면 프랜차이즈 스타가 이적해도
돈이 모자라면 어쩔 수 없다고
이해하는 팬들만 남아서
내가 어리석었던 것 같습니다
어리석지 않으려면 어디에 서 있어야 할까요
포지션이 없으면 게임이 안 되고
응원팀이 없으면 야구가 재미없습니다
공놀이죠
돌아오지 않는 공도 가끔 있지만
야구에서는 돌고 돌아야 합니다
야구가 끝나면
아픈 사람에게 병원에 가야 한다고 답장합니다
사회보장제도를 알아보자고 말합니다
의사가 알려준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에 따라서
차라리 돈을 많이 벌지 그랬어........
그렇게 말해주는 시가 있었다면
저작권으로 농담을 나눌 수 있었을 텐데
맥주가 지겨워요
사라진 마음이 지겹습니다
공은 왜 자꾸 돌아와?
[심사평]
올해 창비신인시인상 응모에는 총 1138명이 귀한 작품을 보내주셨다. 많은 편수와 비례하여 미덕을 갖춘 작품이 많았기에 벅찬 마음으로 심사에 임했다. 팬데믹을 맞아 서로 마주하지 못하는 시간이 길었는데, 그사이 많은 분들의 언어의 밭에선 시가 이토록 풍성하게 가꿔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심사위원들뿐 아니라 시를 읽고 쓰는 모든 분들에게 힘이 되는 것 같았다. 심사위원들은 충분한 시간을 두고 응모작들을 검토한 뒤 4인의 작품을 최종 검토작으로 삼아 논의를 진행했다.
「변신의 귀재」 외 9편의 작품은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을 찾아가기 위한 노력이 돋보였다. 언뜻 시적 연결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져 산발적이고 파편화된 진술이 아닌가 염려되었지만 개성적인 감각을 보여주는 표현들이 많았다. 작품 간의 편차가 있었는데 「조련」 등이 빼어난 작품으로 꼽히는가 하면 「트럭」 등은 아쉬움이 남는 작품으로 언급되었다. 시라는 장르가 무조건 하나의 정념을 보여주며 가지런하게 정리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시가 지니는 울퉁불퉁한 가독성의 영역이 있다면 이 응모자가 앞으로 보여줄 세계는 무궁무진할 것이다.
「내 앞의 동경 씨 내 뒤의」 외 5편은 시를 전개하는 방식의 능란함이 눈길을 끌었다. 한행씩 떨어뜨려 놓으면 일견 평범해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행과 행이 만나서 연을 이루고 한편의 시를 이루는 과정에서 긴장감이 만들어지고 인상적인 이미지가 펼쳐졌다. 그것은 편안한 방식으로 시를 이끌어가면서도 자유롭고 거침없는 시행의 운용을 통해 자기의 목소리를 분명한 언어로 드러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함께 응모한 작품들이 고른 수준을 유지하지 못한 까닭에 세련된 방식과 그 안에 담긴 목소리의 결합이 온전히 본인의 것으로 체화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얼마쯤 의구심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응모작 전반에 드리워진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의 깊이도 미더움을 주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아쉽지만 손에서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당선작과 함께 마지막까지 논의된 작품은 「빛의 정원」 외 4편이었다. 투고된 시들의 편차가 적고 이미 완성도 있는 시세계를 갖추고 있다는 점에 심사위원 모두가 동의했다. 또한 고유의 시적 서사와 정서가 풍부하게 해석될 여지가 있으며, 코로나 이후의 시대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힌다는 점에도 주목하였다. 다만 시들이 기대고 있는 이미지나 세계가 다소 좁고, ‘빛’이나 ‘미래’ 등 시적인 이미지들을 가져오는 방식이 상투적이라는 단점이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 더욱 넓은 방향으로 시세계를 확장해나간다면 분명 단단하고 새로운 이야기들이 만들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계속해서 써달라는 응원의 말을 보탠다.
「호수공원」 외 4편은 언뜻 수월하게 읽히는 말을 맵시 있게 엮어가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현실에 닿은 채 출발한 시의 시선은 지금 이곳에 정박해 있기보단 멀리까지 나아갈 줄 알았고 그를 다 경유하면서도 처음 자리에 버젓이 놓여 있던 어긋남을 응시할 줄 알았다. 매 작품마다 마지막 구절이 특히 인상적으로 다가왔는데, 생활에 깃드는 외딴 마음을 어떻게 달래야 하는지 침착하게 궁리하는 이의 면모가 근사하게 드러났다. 시가 다가왔다가 물러날 때마다 남기는 감정의 파동이 천천히 길게 이어진 탓에 논의를 시작하면서부터 마칠 때까지 모든 심사위원들이 손에서 좀처럼 놓지 못한 작품이다. 시에도 독자가 다시 돌아보도록 만드는 장력과 그를 유지하는 지구력이 있어야 한다면, 이 시편들은 그 힘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있다는 믿음을 주었다.
이에 심사위원들은 「호수공원」 외 4편을 제21회 창비신인시인상 당선작으로 정한다. 당선자께서는 자신만의 화법으로 구축한 세계를 의심하지 말고 시로 하고 싶었던 '바로 그 일'을 더욱 자유로이 해주었으면 한다. 낙선을 하게 된 분들에게도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 보내주신 작품을 통해 머지않아 다시 만날 날이 오리라는 것을 감히 예감하게 해주셨다. 다른 무엇이 아닌 ‘시’를 마주하는 태도가 이토록 치열한 이들이 함께 쓰고, 읽고 있으니 우리는 외롭지만은 않을 것이다. 옥고를 보내주신 많은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 심사위원 : 양경언, 유병록, 이근화, 주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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