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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공원 외 4/ 남현지

 

 

눈앞에 호수가 있고

나는 시민과 조경이 익숙한 듯이

벤치에 앉아서

 

방금 점심을 먹고 식당에서 나오다가

묶여 있는 개를 바라보는 회사원처럼

호수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었다

 

나는 그게 마음에 들었다

내가 배가 부르다는 게

큰 개가 묶여 있다는 게

 

누가 길을 물어서

여기 사는 사람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호수만 보이는데

 

꿈에서는 나도 찰랑거리다가

귀를 기울이면 자신이

물결처럼 쏟아져서 깨어났다

잉어 몇마리와 엉겨붙은 물풀을

떼어내면서

 

호수는 잘 묶여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건물처럼

고요하게

 

오늘 저녁은 뭐 먹지 생각하면서

호수를 따라 걸었다

삼십분 전에 본 사람이

다시 옆을 달리고 있다

 

 

 

 

빛의 생산

 

 

전기 좋아해요?

이제 그만

그걸 자연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담배를 마지막으로

집에 불타오르는 물건이 없어졌는데

한참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전기를 좋아하는구나

 

전기 없는 세계를

상상할 수 없습니다

 

만두 없는 세계

슬프지만 그럴 수 있고

종달새는 본 적도 없고

나 없는 세계는 지금도 뭐

 

언제부터

고통 없는 세계

그건 상상을 안 합니다

 

자연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봄기운이 완연한

오늘 날씨 이야기처럼 다들

두줄을 넘기지 말라고

고통에게 차례를 지키라고

말할 거라면

 

사물들은 다 잘 있습니다

가끔 고장이 나고

그것을 고치거나 버립니다

빛이 깜빡거리면

문제가 있는 거고

 

담배는 진짜 끊었습니다

 

 

 

 

퇴근

 

 

첫눈이 내리는데

갑자기 돈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나무에서 떨어져 나와

사과 상자 안에서

더 붉어진 사과 이야기

 

나무는 뭐라고 중얼거리다가

그만큼의 붉은색을

중개인들의 몫으로 넘겨주었다

 

모자라요?

가게 주인은 상한 사과를 덤으로 넣어주고

나는 충분하다고 다시 빼낸다

 

한밤중에 사과는

검은 봉지 안에서 조금 더 붉어지고

나무는 멀리서 눈을 맞고 서 있다

뭘 잘못한 사람처럼

엉거주춤하게

 

버스를 긴 줄로 기다리다가

집을 향해 걸었다

도로에 집으로 가지 못한 차들이

눈을 맞고 서 있고

떨어진 사과 하나는

붉은색을 들고 굴러갔다

 

 

 

 

앙코르 와트의 버섯 상인

 

 

간에 좋아요

살이 빠집니다

 

상황버섯을 팔던 상인은

실은 돈을 모아서

포카라로 가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거기서 인류의 멸망을 기다릴 거라고

관광객들에게

포카라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푸른 하늘

흰 구름

히말라야의 산기슭

 

나는 기쁩니다

버섯은 얼마입니까

 

 

 

 

 

실업자가 야구 보는 이야기

 

 

분명한 마음이 있었는데요

사라졌습니다

 

고장 난 사람처럼 야구만 보았습니다

공이 뭐라고

공은 분명한데 어디로 날아갈지 모르니까

개의 마음을 알 것 같고

공의 궤적만 보고 있어도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야구를 보는 동안

아픈 사람들의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공을 보는 개의 마음은 알아도

나를 보는 아픈 사람들의 마음은 모르겠는데

엄마는 내가 멀쩡해 보여요?

 

아름다움처럼 모르겠는데

나 없이 내게로 오는

그 마음들은

 

아무도 사할을 넘지 못하도록

투수와 타자가

긴장을 이루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쪽 아니면 저쪽으로

쉽게 하나가 되는데

그러려고 모인 거니까

 

온 힘을 다하여 야구를 보았습니다

분명한 것은 공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조금만 참아달라고 하던 사람들이 사라질 때까지

매일 죄송하다고 말해야 했던 전화기를 잊을 때까지

그러면 프랜차이즈 스타가 이적해도

돈이 모자라면 어쩔 수 없다고

이해하는 팬들만 남아서

 

내가 어리석었던 것 같습니다

어리석지 않으려면 어디에 서 있어야 할까요

포지션이 없으면 게임이 안 되고

응원팀이 없으면 야구가 재미없습니다

공놀이죠

돌아오지 않는 공도 가끔 있지만

야구에서는 돌고 돌아야 합니다

 

야구가 끝나면

아픈 사람에게 병원에 가야 한다고 답장합니다

사회보장제도를 알아보자고 말합니다

의사가 알려준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에 따라서

 

차라리 돈을 많이 벌지 그랬어........

그렇게 말해주는 시가 있었다면

저작권으로 농담을 나눌 수 있었을 텐데

 

맥주가 지겨워요

사라진 마음이 지겹습니다

공은 왜 자꾸 돌아와?

 

 

 

 

 

[심사평]

 

올해 창비신인시인상 응모에는 총 1138명이 귀한 작품을 보내주셨다. 많은 편수와 비례하여 미덕을 갖춘 작품이 많았기에 벅찬 마음으로 심사에 임했다. 팬데믹을 맞아 서로 마주하지 못하는 시간이 길었는데, 그사이 많은 분들의 언어의 밭에선 시가 이토록 풍성하게 가꿔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심사위원들뿐 아니라 시를 읽고 쓰는 모든 분들에게 힘이 되는 것 같았다. 심사위원들은 충분한 시간을 두고 응모작들을 검토한 뒤 4인의 작품을 최종 검토작으로 삼아 논의를 진행했다.

 

변신의 귀재9편의 작품은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을 찾아가기 위한 노력이 돋보였다. 언뜻 시적 연결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져 산발적이고 파편화된 진술이 아닌가 염려되었지만 개성적인 감각을 보여주는 표현들이 많았다. 작품 간의 편차가 있었는데 조련등이 빼어난 작품으로 꼽히는가 하면 트럭등은 아쉬움이 남는 작품으로 언급되었다. 시라는 장르가 무조건 하나의 정념을 보여주며 가지런하게 정리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시가 지니는 울퉁불퉁한 가독성의 영역이 있다면 이 응모자가 앞으로 보여줄 세계는 무궁무진할 것이다.

 

내 앞의 동경 씨 내 뒤의5편은 시를 전개하는 방식의 능란함이 눈길을 끌었다. 한행씩 떨어뜨려 놓으면 일견 평범해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행과 행이 만나서 연을 이루고 한편의 시를 이루는 과정에서 긴장감이 만들어지고 인상적인 이미지가 펼쳐졌다. 그것은 편안한 방식으로 시를 이끌어가면서도 자유롭고 거침없는 시행의 운용을 통해 자기의 목소리를 분명한 언어로 드러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함께 응모한 작품들이 고른 수준을 유지하지 못한 까닭에 세련된 방식과 그 안에 담긴 목소리의 결합이 온전히 본인의 것으로 체화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얼마쯤 의구심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응모작 전반에 드리워진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의 깊이도 미더움을 주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아쉽지만 손에서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당선작과 함께 마지막까지 논의된 작품은 빛의 정원4편이었다. 투고된 시들의 편차가 적고 이미 완성도 있는 시세계를 갖추고 있다는 점에 심사위원 모두가 동의했다. 또한 고유의 시적 서사와 정서가 풍부하게 해석될 여지가 있으며, 코로나 이후의 시대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힌다는 점에도 주목하였다. 다만 시들이 기대고 있는 이미지나 세계가 다소 좁고, ‘이나 미래등 시적인 이미지들을 가져오는 방식이 상투적이라는 단점이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 더욱 넓은 방향으로 시세계를 확장해나간다면 분명 단단하고 새로운 이야기들이 만들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계속해서 써달라는 응원의 말을 보탠다.

 

호수공원4편은 언뜻 수월하게 읽히는 말을 맵시 있게 엮어가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현실에 닿은 채 출발한 시의 시선은 지금 이곳에 정박해 있기보단 멀리까지 나아갈 줄 알았고 그를 다 경유하면서도 처음 자리에 버젓이 놓여 있던 어긋남을 응시할 줄 알았다. 매 작품마다 마지막 구절이 특히 인상적으로 다가왔는데, 생활에 깃드는 외딴 마음을 어떻게 달래야 하는지 침착하게 궁리하는 이의 면모가 근사하게 드러났다. 시가 다가왔다가 물러날 때마다 남기는 감정의 파동이 천천히 길게 이어진 탓에 논의를 시작하면서부터 마칠 때까지 모든 심사위원들이 손에서 좀처럼 놓지 못한 작품이다. 시에도 독자가 다시 돌아보도록 만드는 장력과 그를 유지하는 지구력이 있어야 한다면, 이 시편들은 그 힘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있다는 믿음을 주었다.

 

이에 심사위원들은 호수공원4편을 제21회 창비신인시인상 당선작으로 정한다. 당선자께서는 자신만의 화법으로 구축한 세계를 의심하지 말고 시로 하고 싶었던 '바로 그 일'을 더욱 자유로이 해주었으면 한다. 낙선을 하게 된 분들에게도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 보내주신 작품을 통해 머지않아 다시 만날 날이 오리라는 것을 감히 예감하게 해주셨다. 다른 무엇이 아닌 를 마주하는 태도가 이토록 치열한 이들이 함께 쓰고, 읽고 있으니 우리는 외롭지만은 않을 것이다. 옥고를 보내주신 많은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 심사위원 : 양경언, 유병록, 이근화, 주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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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의 노래

 

마음은 고여본 적 없다

 

마음이 예쁘다고 말한다고 해서 그 마음이 영영 예쁘게 있을 수는 없고, 마음이 무겁다고 말한다고 해서 내 마음이 계속 무거울 수는 없는 것이다.. 마음은 도대체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그건 미주와 미주라고 생각했던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앉아 다른 책을 읽다가

 

뒷목 위로

 

언젠가 미주가 제목을 짚어주었던 노래가 흘러나오고

미주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미주를 바라보았을 때

미주만이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이다

 

아무리 마음이 따뜻하다고 말해도 미주의 마음이 따뜻한 채로 있을 수는 없단 말입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도무지 없는 것이라서, 마음이 흐를 곳을 내버려둘 뿐입니다.

 

너는 미주의 노래와 만난 적 없다

미주의 노래는 처음부터 끝까지 미주의 노래일 뿐이다

 

 

 

 

 

오늘 태어나는 말들에게

 

오늘 우리는

누군가의 낮에 그늘을 만들 수도 있고

누군가의 밤에서 어둠을 몰아낼 수도 있다

 

말이 생각에서 태어났다고 해야 할가요. 공기에서 태어났다고 해야 할가요. 진짜 같은 말과 가짜 같은 말들, 아마도. 조금은. 언젠가와 같은 단어는 마음이 숨도록 내버려두기 좋습니다. 진짜 같은 마음에 취하도록 빚으시고 사랑을 증거하지 못하도록 만드신 날들.

 

어쨌거나 말은 지금 여기에서 태어났다는 말은 이곳을 맴돌다가 누구의 귓가에 뿌리를 내리고, 마음이 흐를 때 말은 곧이곧대로 흐르기로 결심한다

 

꿈에서 만날 수 있는 얼굴들, 당신이 기억에서 왔다면 이 꿈이 끝난 뒤에는 어디로 갑니까. 누구에게 건넨 말들은 누구의 귓가에 뿌리내립니까. 영영 모르는 이의 귓가로 흘러가는 가요. 평생을 솜털처럼 날아가는가요. 내 뜻과는 상관없네요.

 

사선으로 놓인 빛을 따라 말들이 지나간다 시간보다 이른 속도로 도착하고 있다

 

그 애는 혼자서도 먼 곳으로 흐르며 일렁이고 있다

영원히 오해받을 수 있는 시간들 오해받아야 하는 시간들

언제고 뒤늦은 시간들 속에서

 

 

 

 

 

 

내게 기쁨만을 보여주세요

 

당신은 매일매일 같은 시간에 나타나 우리는 언덕 위에 일렬로 서서 총을 겨누고 언제나 충분히 죽이지 못해서 그 환한 낮이면 다시

 

낮마다 언덕을 기어 올라가고

나는 당신을 죽이고

잠을 자고 일어나서 다시

언덕을 기어 올라가고

늘 같은 하루를 살고 당신에게 겨누며

우리는 얼어 죽였고 당신은 언덕을 기어 올라가고

 

내게 기쁨만을 알게 해줘요 당신은 언덕을 올라오고 싶지만 언젠가 도착하고 싶지만 않고 조금은 발을 멀리 뗀 채로 그래야만 바다에 떠밀려 짖지도 않고 그렇다고 발 딛고 살아갈 용기는 없는 그렇게 언덕을 닿지는 못한 채로

 

영원히 언덕을 올라가고만 싶은 사람으로

 

그렇게 남아주세요

 

당신이 나를 기억하고 있어요

아둔하게 웃어요 영원히 달려요

 

 

 

 

 

 

물 위에지은 집

어젯밤에 삼킨 알약이. 아침까지. 씁쓸하게 맴도는 이유가 뭐야. 몰라. 알 게 뭐야

 

언제부터 아무개 씨. 하고 부르는 일이 익숙해졌을가. 외로울가봐 나는 집에도 못 가요. 이상하고 어눌한 사투리로

 

씩씩하게. 올라가는 역사의 에스컬레이터. 가방근을 두 손으로 쥐고. 명량만화에 나오는 누구처럼. CCTV를 노려보며. 익숙해지지 않도록. 중요한 느낌이 그냥 지나가버리지 않도록

 

숲에 물감을 엎질렀는데, 다행히 홍수를 피해서 다시 색칠할 수 있어요. 다시 색칠하면 돼요.(정말?) 오늘은 명량소녀 내일은 말괄량이. 그래도 항생제는 쓰리게 녹고 나는 녹아내리는 그의 집이 되고. 

 

그럼 언젠가는 나 쉴 곳도 내가 될까요?

 

놓인 것은 열하나. 약은 물에서 느리게 녹고, 쉽게 삼킨다. 너도 위로가 필요하니. 고개를 숙이면 쏟아지는 하루. 혼자 돌아오는 길도 모르는. 저 너머의 수도꼭지

 

 

 

 

 

 

식도염

 

집에 들어가는 것은

내가 아는 가장 괜찮은 기억을 낚으러 가는 일입니다

 

닫힌 문을 열며 머뭇거립니다 생경한 예감입니다

 

안으로

다시 나오지 못할 만큼 안으로 들어갑니다

내 방으로 들어갑니다 저 방에 들렀다가 다시 나와도 됩니다

여전히 내 방이거든요

 

손님이 끊긴 지 오래인지라 가지고 있는 기억은 조약합니다

 

해묵은 독에서 어제의 쌀을 길어 올립니다

낡은 가구를 고쳐 쓰는 일이 즐겁습니다

나도 모르게 떨어뜨린 물건들을 찾으러 다닙니다

 

이 안에는 오직 내가 걸어온 무구한 길

손수 만든 발자국으로만 채웠습니다 그러나

가끔은 초대하지 않은 그림이 걸리기도 합니다

 

그 누구 여기에 있으라 한 적 없지만

가난한 마음으로도 충분히 이곳을 지깁니다

 

묵은 쌀의 까끌함이

살아 있다는 괴로움을 쏟아붓습니다

 

괜찮습니다

 

오늘의 쌀을 씹어 삼키지 못하는 것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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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수지의 목록


저수지에 개 하나 놓여 있다

트루먼이 연기하는 것이다


어두운 관객석 사람들 웅성거린다 너는 지루한 득 턱을 괸다 우리는 지정석에 앉았고 우리를 기다리는 개가 있고 이 모든 건 가까스로 완벽하


흰 가루가 된 외할머니를 가로수 아래 묻었지 사대강 사업으로 거대하게 꾸면진 영산강 공원에서 공원인데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았다

딱히 숨기려던 건 아니었어요

외삼촌이 맞담배를 피우자 했지 아직 미성년자인데 자꾸만 괜찮다고 다 그런 거라고 다 그런 게 뭘까 외삼촌의 불을 받으며 생각했다

가로수는 더 크게 자라겠지 한겨울의 바람이 불고 사라진 잎사귀 대신 나뭇가지가 흔들렸다 외할머니가 죽을 힘을 다해 우리를 비웃는 거야, 형이 말하고

돌아가는 장례 버스에서 외가 사람들은 잠깐 슬퍼해줬다 돈을 세던 손가락으로 얼굴을 긁는다 왜 슬픈 얼굴들은 다 배가 고파 보이는 걸까

자꾸 침이 고여 괜히 바닥에 침을 뱉었다

내일 부턴 학교에 가야 하는데 형은 다시 군대에 가야 하고 친구들에게 뭐라고 말할까 벌써 기대가 됐다

버스의 창문에 나란히 강이 비친다 저건 강이 아니라 저수지다, 아버지가 말하자 외가 사람들이 화를 내며 반박하고


긴터널을 지나왔다


일년에 한번

극장에 갔었지

먼 친척의 부고가

해마다 한번은

들려오던 것처럼

정한 적 없는 약속


누군가의 생일이었고

형과 내 이름을 자주

헷갈려 하던 사람과 함께

연극이 끝나면 극장을 나와

옆에 있는 호수를 보며 걸었지


형은 강이라 했고

나는 호수라 했는데

둘 다 아니었지

깊고 어두웠지

지금 당신이 밟고 

서 있는 그것처럼


그런다고 누가 알아 줄 것 같아요?

죽어봤자 다 까먹는다고요


트루먼이 연기를 하다 말고 우리를 본다

연기가 아니라 분명 우리를 보고 있다


사람들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저수지를 바라보는 연기라고

너는 생각할 수 있겠지만


관객석의 어둠은 지나치게 깊다

이것을 저수지라 말하기에는


개는 개를 무서워하지 않지만 나는 가끔 네가 무서워, 집에 돌아와 네가 아무말 없이 방문을 닫는 일을 나는 자주 앓는다


저 트루먼이라는 사람

어딘가에 익숙하다,

너는 말할 수도 있을 텐데


빛이 눈을 껌벅인다

무서운 빛이다


트루먼은 알고 있겠지

트루먼만이 우리를 볼 수 있으니까

저수지를 바라보는 트루먼이

점차 우리를 바라보게 될 때


암전

총소리

개의 신음


무대 위에 트루먼

트루먼을 관통한 트루먼

사라진 어둠을 끌어안은 채

쓰러지는 것


아직 박수가 끝나지 않았는데

너는 등 뒤에 구겨둔 외투를 꺼내 입는다


너를 이곳에 데려오고 싶었는데 너는 알았다고 다음엔 더 좋은 곳을 가지고 말한다


극장을 빠져나와 우린

밝은 무대 위를 걷는다









수프와 숲


베란다에서 거실로 화분을 옮기던 여자를 나는 여름의 숲에서 잃어버렸다


남겨진 식탁 위에 매일 숲이 자랐다 머리맡에 나무를 옮겨 심는 꿈을 궜다 숲을 향해 뛰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쫓다 잠에서 깨면 늘 혼자였다


몰래 훔쳐본 여자의 성격 속 메모를 떠올리면

두려움이 무성해지는 여름


"어떤 믿음은 너무나 울창해서 나를 찾을 수 없다"


죽은 나무들로 지어진 성당에 다녔지 도기를 움켜쥐듯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배웠어 어린 내가 고목을 찍어내릴 상상을 할 때마다 여자는 수프를 끓였다


오래도록 휘저으며 바라본다

팔팔 끓는 수프 위를 떠다니는 표정과

말없이 그 표정을 흔드는 하얀 손


나는 매일 일기장을 찢었다


식탁 위에서 식어가는 수프 겁이 번진 얼굴을 지워주던 하얀 손에 박힌 못들의 세례명은 손잡이였지 깊숙이 흐르는 마음을 움켜쥔 채 매달리는 것들


굳게 잠긴 울창함 속에서 구멍을 세는 아이

아이의 낡은 벽지 같은 등을 본다

이곳은 분명 숲이다 숲은 멀어지니까

맨발을 가졌으니까


멀어지던 아이가 구멍 속에 발을 담근 채 둥글게 몸을 말 때면 궁금해진다 방 안 가득 무너지는 것은 왜 혼자가 아닐까


숲에서 홀로 수프를 긇이다가

곰팡이처럼 떠다니는 표정들을 뒤섞는다


몸 안에 고인 빛을 쏟아내는 전등 아래

그림자와 그늘을 구별할 수 없어질 때까지 그것들이 뒤섞여 흉측하게 뭉쳐질 때까지 어디선가 종은 울리고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숲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대못


하굣길에는 갈대밭에 들러 혼자 울었지 아이들은 끈질기게 따라와 시체장사하는 애비자식이라고 놀렸다 나도 한명 쯤은 자신이 있어서

주머니 속 대못을 움켜쥐었지 교복바지 속에서 그것은 점차 커지는 것 같았다

그해 여름은 홍수가 잦아서 매일 밤 아이 하나 정도는 쉽게 떠내려갔다 급히 거리를 떠도는 아버지를 볼 때마다 사람들의 얼굴이 꿈틀거렸고

마을의 하나뿐인 뒷산 위 골동품처럼 쌓여 있는 무덤들 사이 아버지는 매일 대못을 박는다고 했다

교회도 없는데 마을에는 한동안 종소리가 났지

아버진 내게 보여준 적 있다 미리 파놓은 누군가의 묫자리, 비가 고여 큰 못이 된 그것이 찰랑거리던 모습

장의사는 마을에 하나면 족하다고 그 일을 너도 맡게 될 거라고 언젠가 벽에 걸린 작업복을 보는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려는 것 같았는데

집에 돌아와서 나는 하루 종일 손가락이 아팠지

빈손을 자꾸만 쥐어서

밤마다 몰래 아버지의 삽을 들고 집을 뛰쳐나갔어 그날도 마찬가지였지 뒷산에 올라가 땅을 팠지 주변에는 내가 매일 파놓은 구멍들이 있었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졌지

무딘 칼질 같은 장대비 소리

온 마을을 뒤흔들 것처럼 컸다


구멍들마다 물이 차올랐다 못처럼 박힌 구멍들이 징그러워졌지 온몸에 소름이 돋을만큼, 삽을 버리고 도망칠수록 더 길을 잃게 되는 산속에서

더는 그곳과 멀어질 수 없다고 느낄 때까지 계속 뛰었다 숨이 찰수록 자꾸 무언가를 움켜쥐게 되었는데


주변을 돌아보니 다시 갈대밭이었다


젖은 주머니 속 무언가

서서히 나를 찌르고 있었다









친구는 수련회에 다녀온 후로 말수가 줄었다 뾰족한 것이 무서워졌다고 했다 주위에 아무도 없이 홀로 튀어나온 게


운동장에 야구부 아이들이 줄줄이 엎드려 있다

뭉쳐진 그림자 위로 고이 튀어오르다

빈 유리병 같은 가을 속으로 가라앉고


빛이 보서지는 소리가 운동장을 메운다 더 잘하겠습니다, 기도문을 외우듯 아이들은 간절해진다 땅을 짚은 팔목들이 나란히 휘청거리는 저녁


창문 속 어둠을 가로지는 불빛들 사이로

불에 타고 있는 집을 꿈꾸곤 했다


지난여름 우리의 캠프파이어


사각의 거대한 불 위로 튀어오른 불씨들 공중에서 흩날린다 흰 종이에 무엇을 적어서 냈냐고, 물어도 친구는 아무 말이 없고


불을 둘러싼 채 우리는 거대한 원을 그리며 춤을 췄다 밤하늘에 녹아내리는 불씨 같은 춤을, 한 방향으로 돌기 시작하며


거대한 불 속으로

서서히 멀어져가는 집

누군가의 이름이 들어가

나오지 않고 있었다


마음에 있는 말을 그대로 저지르는 사람은 없지, 그것은 모두가 아는 마음 때론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귀를 잠갔다 우리는 경쟁하듯 더 빠르게 원을 돌고


이 노래가 끝나고 난 후

벌어질 일을 알고 있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


실은 

모두 같은 홈을 향하고 있는 걸

그라운드 위의 아이들처럼

우리에겐 집이란 건 멀리 있으니깐


캠프파이어의 불이 꺼지고

우리는 재가 흩어지듯 사라졌다


나는 돌아가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친구는 아무 말 없이 반 안에 누워 있고 나는 작은 창문으로


베이스를 잃어버린 아이가

홀로 서 있는 것을 보곤 했다

꺼져가는 전광판의 불빛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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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랑말 속달 우편


매일 죽음도 불사하는 숙련된 기수여야 함

고아 환영*


달리던 기수의 뺨에 벌레가 앉았다 그것을 만지자 힘없이 부서졌다 바람에 죽기도 하는구나 야생 선인장이 많은 고장을 지나고 있었다 식물의 생사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아직도 알지 못했다 매일 잠들기 전 기수는 그날 만난 바람을 필사했다 그것은 잘 썼다고도 못 썼다고도 말할 수 없는 일기였다 달리는 기수와 조랑말의 모양만큼 매일 바람은 일그러졌다 사무소를 출발한 기수는 열흘 이내에 동부의 모든 마을에 나타났다 기수는 작고 왜소해서 말에서 내리면 가장 먼 곳으로 심부름을 떠나온 아이 같았다 기수는 가끔 다른 지역의 기수에게 편지를 쓰기도 했다 다 쓴 편지를 자신의 가방에 넣고 스스로 배달하기도 했다 기수는 늘 휴대용 성경을 지니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는 이야기였다 한 사람이 태어난 이야기였다 기수는 매일 잠들기 전 누워 사무소에서 배운 대로 성호를 그었다 가슴 위로 그의 작은 손짓이 만든 바람이 잠깐 불다 사라졌다


* 조랑말 속달 우편(1860~61) 기수 모집 공고






그것의 단위


길 위에 버려진 신발들은 언제나 한 쌍은 아니였다 무수한 바람이 그곳에 발을 집어 넣어ㅆ지만 신발은 자기보다 빠른 것은 한번도 태워본 적 없었다 신발은 사실 혼자 있으면 한 발자국도 걷지 않았다 신발 한짝이 저곳에 놓일 수 있는 경우들을 상상하고 그중 가장 슬프지 않은 것을 믿기로 한다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무심하구나 그러나 상상과 믿음에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느니깐 나는 누구도 의심하지 말아야지


할머니가 죽었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나는 몹시 취해 있었다 그녀의 마지막 신발은 맨발이었겠지 이 고장에는 장례식장이 너무 많아 나는 가야할 곳을 찾지 못했다 가장 가까운 곳을 들러 명복을 빌었다 육개장은 짰다 그곳은 많은 신발들이 놓여 있었다 어지러워지는 대역을 수시로 정리하는 사람이 있었다 신발은 가지런히 놓일 때 더욱 죽은 사람의 것 같이 보인다 영혼을 세는 단위를 켤레라고 여기기 시작한다 그곳에서 사람들이 하나의 영혼을 위해 신발을 벗고 잠시 영혼이 되어 준다 그곳에서 아무도 나에게 어떤 사람이냐고 묻지 않았다 잠시 사람이 아니었던 동안







미래의 자리


너는 매년 가족들과 몇 기의 무덤을 돌보러 그 산에 갔는데 너는 그것들이 누구의 무덤인지는 모르지만 그곳의 모든 비석에 너의 이름이 있어서 너의 무덤도 그곳에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너는 그곳에 가면 오래 풀을 뽑았다 왔는데 잔디와 잡초가 어떻게 다른 것인지 몰라서 의심이 가는 풀을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느라 네가 만진 ㅍ 풀은 모두 중간에서 잘려 있었다 수풀 속에서 다양한 소리를 내는 벌레들이 그곳에 많았는데 한 번도 벌레를 본 적은 없어서 그것은 너의 가족들이 속으로 하는 말 같다고도 너는 말했다 우리는 함께 그 산에 올라 네가 누울 곳을 미리 바라보기도 하였다 한 명의 자리에 같이 누워보기도 하였다 그곳에서 숨소리도 메아리가 되었다







수경


어제처럼만 하면 돼 분홍색 한복을 입은 수경이 말했ㄷ 너의 왼쪽과 오른쪽 얼굴을 반복해서 바라보며 하나의 얼굴을 완성하는 춤을 추었다 그래도 겁이 나면 한 명의 엄마를 같이 바라보자


너의 어깨를 짚는 나의 자세를 너는 돌아보지 않고 손질해준다 너의 몸이 커질수록 매일 조금씩 이동하는 너의 지점


하나의 책상을 나눠 가지는 사람들이 커서 하나의 아이를 나눠 가지는 사이가 되는 것으로 알았고


우리는 책상에서 매일 새로운 무늬를 발견했다 나뭇결은 나무가 한때 격렬하게 춤추었던 흔적 새로운 무늬를 발견하지 못한 날에는 무늬를 새겨주었다    


너는 모든 것을 리본으로 접을 줄 알았다, 수명이 다한 것들만을 접었다 공중에서 잠자리의 날개가 떨어져나가는 것을 보았다


잘린  날개가 잠자리보다 오래 날았다 너는 그것을 주워 접다가 더 잘게 찢어버렸


우리의 몸이 더 이상 자라지 않을 때 춤은 완성된다 우리의 몸이 다시 작아지기 시작할 때 우리는 새로운 춤을 출 수 있다


잠자리를 묻고 내려가는 숲길이 어두워졌다 우리는 오래 헤맸고 만약 더 어두웠다면 숲속에서 빛을 내는 것들을 쉽게 알아볼 수 있을 텐데


그렇다면 눈을 감자 우리 모두 밤을 만들 줄 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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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창작과비평> 신인상 당선작_ 가정(외 4편) / 최지은

 

                                                심사위원 : 이영광 문태준 신미나 박준(이상 시인)

 

가정 (외 4편)

 

   최지은

 

 

 

우리는 말이 없다 낳은 사람은 그럴 수 있지

낳은 사람을 낳은 사람도

그럴 수 있지 우리는 동생을 나눠 가진 사이니까

그럴 수 있지

 

저녁상 앞에서 생각한다

 

죽은 이를 나누어 가진 사람들이 모두 모이면 한 사람이 완성된다

 

싹이 오른 감자였다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없는 푸른 감자

엄마는 그것으로 된장을 끓이고

우리는 뱃소리를 씹으며 감자를 삼키고

이 비는 계절을 쉽게 끝내려 한다

 

커튼처럼 출렁이는 바닥

주인을 모르는

손톱으로 주웠다

 

나는 몰래 그것을 서랍 안에 넣는다

서랍장 뒤로 넘어가버린 것들을 생각하면서

 

서랍을 열면 사진 속의 동생이 웃고 있다

손을 들어 이마를 가리고 있다

환한 햇살이 완성되고 있었다

 

우리는 각자의 방으로 흩어진다

 

우리가 눈 감으면

우리를 보러 오는 한 사람이 있었다

 

우리는 거기 있었다

 

 

 

기록

 

 

 

구름을 그리던 손이 젖는다

 

주먹을 쥐면

구름은 작아질까

비가 올까

 

구름을 보며 코끼리를 생각한 적은 있어도

코끼리를 보며 구름을 떠올린 적은 없지

 

이런 내가

구름을 완성할 수 있을까

 

테두리를 모두 닫아도 되는 걸까

 

열린 선과 선 사이로

 

바람이 불고

빗방울이 고이고

소문이 있고

그 밑에서 하염없이 태어나는 아이들의

아이와 아이와 아이들

 

아무에게도 발견되지 못한 소녀와

소녀의 이마 위로 떨어지는 하나의 빗방울을 생각한다

 

붓을 놓으면

이미 젖은 그림이다

 

창밖에는

검은 물이 가득하다

 

 

 

내가 태어날 때까지

 

 

 

   걷고 있다고 말했다 밤이라고 말했다 그대들은 밤에 어울리는 어둠을 찾았다 눈동자처럼 깊은 어둠이었다고 하자 그대들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남자와 그 여자가 있었다 두 사람은 이야기 속에서 걷고 있었다 서로의 부은 손을 잡고 있었다 방 한 칸을 얻으려 했다 깊은 밤을 배경에 두고 이야기 속에서 이야기가 되려고 걷고 있었다 남자와 여자는 노래를 만들었다 포개진 유리그릇처럼 어울리는 몸이었다 둘은 노래 속에서 다른 몸이 되어 갔다 나는 끝없이 노래를 이야기했다 그대들이 만들어내는 멜로디 안에서 노래는 완성되고 노래 속에서 여자의 몸은 붓고 있었다 나는 이야기 속에서 이야기했다 나를 낳은 사람과 낳은 사람을 낳은 사람들의 이야기 끝을 모르는 이야기 나는 작아지기도 했다 팔과 다리를 집어넣고 기억을 지우고 끝으로 끝으로 뒷걸음질하기도 했다 깊은 밤을 배경에 두고 걷고 있었다 이야기는 나를 환대하며 앞으로 앞으로 다가왔다 이야기 속에서 나는 태어나고 있었다

 

 

 

우리들

 

 

 

   심야버스였다. 내릴 곳을 몇 정거장 앞에 두고, 밝은 빛이 덤벼드는 검은 도로 위에 있었다. 우리들은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냉장고에는 내가 오면 나누어 먹으려던 한 소쿠리의 무른 딸기. 잘자리에 과일을 먹어 어쩌니. 우리 중 한 사람이 말하고. 자꾸만 흐르는 과즙. 말없이 과일을 입에 물고서. 우리는 이불과 이불을 덧대어 잠자리를 만든다. 이불을 덧댄 자리에 서로 눕겠다고 조그맣게 같이 웃고. 이제 자야지. 그래 자야지 그만 자야지. 미루고 미루는 잠. 먼저 잠드는 사람이 있고 잠이 들려 하는 사람이 있고. 잠들기 위해 먼 길을 온 사람이 있고. 한 사람은 깨어 있기로 한다. 어금니에 낀 딸기 씨를 혀끝으로 건드리면서 잠은 어떻게 드는 거였더라. 서로의 잠을 위해 잠자는 우리들. 눈뜨면 아직도 어두운 새벽이고. 나를 핥는 검은 개. 몇 해 전 이 방에서 죽은 그 검은 개. 어쩐 일이야 물으면 작고 붉은 혀로 나를 핥으며. 개는 외국어를 말하는 것 같다. 혀는 더 부드러워져서 손은 녹을 것만 같고. 아직 밖은 어두운데. 이불 속에서 몸을 일으키는 한 사람. 나는 본다. 헝클어진 머리. 손을 뻗어 액자를 손에 쥐는 한 사람. 바라보고 있다. 어두운 방안에 누워. 사진 속에 나는 개를 안고서. 웃고 있었다. 여전히 개는 나를 핥고. 이 장면 속에 내가 있었다.

 

 

 

벌레

 

 

 

   이 방의 주인은 아무 때나 이 방의 불을 밝히는 사람이다. 갑자기 환해지고 한꺼번에 어두워지는 이 방에서 자매는 종종 눈이 멀곤 했다.

   자매는 종일 이불 위에서 논다. 언니는 부모됨을 배운다며 달걀을 품고 다니고, 동생은 국어책을 펼치고 앉아 괄호를 그리고 있다. 이 괄호와 저 괄호가 등을 맞대고, 나비처럼. 그 사이를 건너뛰며 놀러 다녔다. 지워지는 비밀들이 생길 때마다 슬픈 소설이 되어갔다.

   사람이 사람을 낳는다니. 신기하지 않아? 여자가 아들을 낳는다니. 두렵지 않아? 나는 태어난 날을 모르고. 엄마의 기일도 모르고. 이런 건 왜 부끄러워지는 걸까? 자매는 마주 앉아 끝말잇기를 한다. 둘만 아는 이름을 불러와 놀려주고 쓰다듬다가 아주 잊어버리고.

   사촌이 다녀간 날이면 동생은 자꾸 목이 마르다고 했다. 물을 마시며 생각나는 것들은 반성문이 되어갔다. 맹물을 마시고도 설탕물처럼 끈적거리는 기억들. 날계란처럼 미끄러지는 시간들. 소녀들의 반성문은 얼마나 더 길어질까.

   물을 다 마시고 나면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것이 없었다. 자매는 오래 목이 말랐다. 물 위에도 집을 짓고 사는 벌레들이 있었다.

   때로 너무 작은 벌레들은 있는 힘껏 손가락을 놀려도 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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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은(崔智恩)

1986년생. 세종대 국어국문학신문방송학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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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요약

 

   최지은의 시는 사유의 넓이와 감각의 깊이에서 길어 올린 것들로 신산한 생활의 풍경을 담담하게 늘어놓는 진술들이 돋보였다. 시인은 순간적으로 얼굴을 드러내고 이내 감추는 삶의 불길함들을 곧잘 포착해내는 뛰어난 동체시력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것들을 다시 시로 재현해낼 때에는 자신만이 보고 느낀 특수한 미감만을 내세우지 않고 타인의 정서에도 곱게 가닿을 수 있는 보편적 아름다움을 획득해낸다는 점도 큰 장점으로 생각되었다.

 

 

 

                    —《창작과비평》2017년 가을호

출처 : 푸른 시의 방
글쓴이 : 강인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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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창비신인시인당선작] 한연희

 

수박이 아닌 것들에게 외 4

 

수박이 아닌 것들에게 
 

 

수박이 아닌 것들을 좋아한다 그러니까 얼어붙은 강, 누군가와 마주 잡은 손의 온기, 창문을 꼭꼭 닫아놓고서 누운 밤, 쟁반 가득 쌓인 귤껍질들이 말라가는 것을 좋아한다

 

여름은 창을 열고 나를 눅눅하게 만들기를 좋아한다 물이끼처럼 자꾸 방 안에 자라는 냄새들이, 귤 알갱이처럼 똑똑 씹히는 말들이 혓바닥에서 미끄러진다 곰이 그 위에 누워 있다

 

동물원 우리에 갇힌 곰이, 수박을 우걱우걱 먹어치우던 곰이 나를 쳐다본다 곰에게서 침 범벅의 수박물이 떨어진다 여기가 동물원이 아니라 내 방이라는 것을 알아갈 때쯤, 나는 혼자 남아 8월을 벗어난다

 

그러니까 수박이 아닌 것들을 좋아한다 차가운 방바닥에 눕는 것을 좋아한다 피가 나도록 긁는 것을 좋아한다 좋아하는 것들이 땀띠처럼 늘어난다 그러니까 나는 이 여름을 죽도록 좋아한다

 

햇빛이 끈질기게 커튼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다 잎사귀의 뒷면과 그늘 사이를 벌려놓는다 먹다 남긴 수박껍질에 초파리가 꼬인다 나는 손을 휘휘 저으며 그림자를 내쫓는 중이다 쌓인 빨래더미 위에, 식은 밥그릇 위에 고요가 내려앉는다

 

그러나 의지와 상관없이 종아리에 털들이 자라나는 걸, 머리카락이 뺨에 들러붙는 걸, 화분의 상추들이 맹렬하게 죽어가는 걸 여름은 내내 지켜보고 있다 좋아한다 좋아한다 쏟아지는 말을 주워 담을 수가 없다

 

 

 

 

파프리카로 말하기

 


도마 위에 파프리카 하나가 놓여 있다
일요일이 건네준 파프리카
이상하게 커다란 파프리카
파프리카를 씹어 먹으며 파프리카 파프리카 아프리카
자꾸자꾸 불렀다
뭉툭한 발가락들이 사라질 때까지
새로운 뿔이 생겨날 때까지
이상하고 아름다운 털들이 자라날 때까지 파프리카를 씹었다
달력에 표시한 오늘은 내가 세상에 태어난 날
축하해 축하해 나는 제대로 잊기로 하자
멀리 떠나 집으로 돌아오지 말자
엄마는 고장 난 냉장고 슬리퍼는 히스테릭한 강아지
아빠는 죽은 심장의 태엽장치 아기의 혓바닥을 먹은 나는 눈알을 도려낸 천사
새롭다는 기분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상한 작용을 만들어
폭주족 천사가 되어 영혼을 마구마구 더럽히자
파프리카는 어디서 태어나서 언제 죽어가는 것일까
저렇게 태연한 얼굴로 일요일들을 견딘 것일까
모래밭을 뒤적이다 얼굴을 든 저 개는 짖어본 적이 있을까
평원을 내달리는 치타를 본 적도 없는 내가
달려나간다
천사의 기도가 입 밖으로 쏟아져 나온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를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파프리카를 구하시옵소서

 

 

 


지갑 두고 나왔다

 

 

엄마를 두고 나왔다
집에서 한참을 멀어진 후에야 깨달았다
손안에 들어 있어야 할 엄마 손이 보이질 않았다

 

봄이 온 것 같았는데 꽃이 보이질  않았고
비가 온 것 같았는데 물웅덩이가 고이질 않았다
전봇대와 전봇대 사이를 최대한 느리게 걸으며
엄마와 화분은 얼마나 다른가 하고 생각했다

 

소파에서 식탁으로 침대로 화장실로 화분을 자꾸 옮겨놓았다
시들어버린 엄마를 어떻게든 회복하려고 했지만 화분은 죽고 말았다

 

엄마, 나도 엄마야
엄마가 하기 싫은 엄마야
벤치 같은 데다 흘려놓고 깜빡한 우산처럼 시시해져버린

 

집으로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
지갑 속에 넣는 걸 깜빡한 동전들이 가방 속에서 짤랑댔다
걸을 때마다 엄마, 엄마 부르는 것 같아
목이 자꾸 말랐다

 

세탁소에 걸린 셔츠들 사이에서 엄마 원피스를 보았다
슈퍼마켓 앞에서 식료품을 고르는 파마머리 엄마를 보았다
철물점에서 모종삽과 퇴비를 사는 엄마 손가락을 보았다

 

그러나 가방 속을 아무리 뒤져도 보이질 않았다
생수 한 병을 사는 나는, 결코 엄마가 아닌 나는

어, 지갑 두고 나왔다


계산대 옆에서 훌쩍 자라난 딸이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지금 엄마는 어디에 가 있는 거야?

 

 

 

 

자주 틀리는  맞춤법

 

 

일기 속에 오늘을 틀리게 써넣었다. 언니는 자주 모서리에 부딪힌다 나는 현명하다 골목은 흔한 배경이다 옆집 개는 죽는다 똥개야 살지 마 언니야 던지지 마 휘갈겨 쓴 문장들을 언니는 몰래 훔쳐 읽었다. 그리고 화를 냈다. 낮은 계단에게나, 새는 물컵에게나, 쭈그려 앉은 개에게나, 길 한복판에서 내게. 너는 왜 늘 네 멋대로니?

 

곧 바뀔 거라고 믿은 빨강은 멈췄다. 행인들이 그냥 건너가버렸다. 언니가 틀렸다. 나는 운이 많은 아이니까. 셋만 세면 언니가 다시 돌아올 거니까. 나는 숫자의 비밀을 알고 있으니까. 사거리에서 언니가 뒤돌아봤다. 내가 알고 있던 언니는 없었다. 언니야 괘찬지마 언니야 도라오지 마 어떡게 어떻해 멈추지 마

 

건너편 간판엔 각종 찌개 팜니다 어름있읍니다 나으 죄를 사하여 주십시오 옳바른 행동교정 이상한 글자들이 좋았다. 내 이야기가 비뚤어질수록 좋았다. 아무도 날 교정하지 못하는 게 좋았다. 정답과 멀어진 내가 좋았다. 틀린 간판은 어디에든 걸려 있고. 언제든 글자를 거꾸로 읽을 수 있으니까. 사라진 언니를 떠올리는 대신 오늘의 날씨를 읽었다.

 

맞춤법은 틀렸어, 기상예보는 틀렸어, 앨리스가 틀렸어, 대통령은 모르지, 언니가 옳았지, 백과사전이 옳았지, 철학자마저 옳았지, 그러니 내가 틀렸어, 뭐가 틀렸는지 몰랐고 아무도 틀리지 않았으니까 옳았어, 틀렸으니까 모르고 모르니까 웃기고, 불가능하게 구름이 툭 떨어져버리고, 꽉 막힌 도로에 싱크홀이 생겼다. 이제 나는 영영 틀린 사람이 되었다.

 

 

 


코 파기의 진수

 


어둠은 때론 어둠을 빨아들인다, 그건 나쁘지 않은 일이다
그녀와 나는 방과 후 교실에 남아 사물함을 후비고
먼지를 닦아낸다

 

대걸레로 딱정벌레를 세게 짓눌러버린 일, 그건 좋은 징조다
책가방들을 모아 소각장에 집어넣으니 불길이 치솟는다

 

언제 우리는 악마를 사로잡을 수 있었을까

 

코로 숨을 쉬어야 하니까 정성껏 쓸어놔야지 하는 마음
하루에 수십번씩 코를 풀 때마다 어서 코가 사라졌으면 하는 마음
사물함이 열릴 때마다 잿더미로 가득 채워놓고 싶은 마음

 

그런 마음들이 사물함에 죽은 새를 넣어둔다
깃털과 발톱들, 피 묻은 팬티와 불길함이 튀어나오자
담임은 사물함을 하나둘 없애버린다
서랍 안에 얼마나 많은 반성문을 채워야 이 세계를 떠날 수 있을까

 

그녀는 우아하게 코딱지를 튕기며 서랍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홀로 책상에 엎드려 코를 열심히 팠지만
친구들의 무관심 속에서 코피만 쏟아내다니

 

그건 좋지 않은 일이다

 

가끔씩 그녀를 찾으러 콧구멍 안으로 들락날락거린다
왜 모든 사물함은 제대로 된 마음과 연결되지 않는 걸까
재채기를 할 때마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손가락 하나가 콧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거나
악마의 예감이 콧속에서 마구 자라나거나
아무리 해도 찾을 수 없던 사물함 열쇠가 나온다거나

 

체육복을 벗을 때마다 맨살 냄새를 맡으면
어쩐지 나를 벌리고 그녀가 기어 나올 것만 같다

 

그건 좀 슬픈 일이다


 

 

 

한영희_1979년 경기 광명 출생

출처 : 신춘문예공모나라
글쓴이 : copyzigi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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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월주의보 외

 

김지윤

 

 

 

담장 밑에 표정이 떨어져 있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내가 떨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입을 맞추고 바람을 불어넣으니

달입니다

빗자루로 마당을 쓸면 구름도 집을 떠납니다

 

두 손에 물을 묻혀 얼굴을 닦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씻어도 닦이지 않는 표정이 있습니다

혀를 입술에 대보지만 나는 맛이 없습니다

나는 내 맛을 알고 싶습니다

 

입을 벌리고 달콤한 생각을 하며 달콤해지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달을 보며 수박이라고 말하면 달에도 줄무늬가 생길까요

눈을 감고 손을 더듬거리며 이건 냉장고 이건 티브이 이건 의자

모서리에 등을 기대앉으면 불안도 지탱하는 힘인 것 같습니다

 

입을 맞춘 달이 언제 저곳까지 차올랐는지

봄이라고 말하는 동안 봄이 오고

지구의 모든 목련나무 꽃들이 달로 한데 모였습니다

높은 곳에서 나를 본다면 어떤 표정으로 보일까요

내가 다시 지붕이나 마당, 골목에 내려앉습니다

 

 

 

물속의 사람들

 

 

네가 바닷속으로 들어가던 날

너와 함께 밥을먹고 커피를 마시던 식탁이나

소란스러운 설겆이가 만든 이 나간 유리그릇들이 떠올랐다

방 안 모든 것들이 저마다 자기 안에 숨을 채우고 살고 있었다

우리는 같은 집에서 살았지만 다른 집에서 함께 살았구나

 

밥그릇에 꽂아놓은 수저가 그릇을 떠날 때

나는 음식이 묻지 않은 깨끗한 식탁을 생각했다

사후는 주말 식탁에 앉아 홀로 밥을 먹는 세계

너는 정갈한 그릇에 담긴 한 사람 몫의 음식 같았다

 

나는 매일 정수리를 하늘에 부딪치고

바다에 들어간 사람은 저녁을 바다에 풀어 놓는다

창문을 열면 집 안으로 물이 쏟아지고

불리지 않으면 닦이지 않는 것들이 많구나

수면을 향하는 물거품들이 탄산수 같다던 네 말처럼

마음껏 슬퍼한 기억은 청량감이 들기도 했다

 

 

 

정원사의 꿈

 

 

기르던 개를 화분에 묻었어

새싹이 흙을 뚫고 올라와

 

흙을 걷고 죽은 개의 냄새를 맡곤 해

물을 줄 때면 나는 젖은 개의 표정을 알 수 있어

수면제를 먹고 잠든 엄마의 속눈썹이나

손도끼 날에 비친 아빠의 얼굴

어린 강아지의 목을 양팔로 끌어안으면

내 불안은 강아지의 불안으로 넘어가지

 

세상의 모든 정원사들이 모이는 만찬을 꿈꿨어

꽃과 나무들이 가득한 곳에 내가 서 있고

사람들은 술과 음식을 먹으며 침묵해

손수레에 실려 나오는 은색 접시

내가 키운 꽃이 잎을 흔들며 젖고

내가 키운 꽃이 허리 굽혀 울부짖어

 

기른날 보다 오래 물을 주고 있어

화분 밑으로 새는 적토를 치우며

엄마는 잠든지 오래

화분이 다 자라고 나면 함께 묻어드릴께

그러니 죽지 말고 잠들어 계셔요

 

 

 

투명 고양이

 

 

나무 그늘에 검은 고양이 한마리가 눈을 감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고양이에게 없는 사람

나 눈 감고 생각하니 나무 밑엔 그림자만

 

나는 고양이를 보고 있었다고 말할 수 없고

고양이는 기지개를 펴며 내 발끝에 닿는다

복숭아뼈에 얼굴을 비비는 고양이

발목이 지워지며 밤이 온다

 

검은 하늘에 투명한 고양이들이 모여 있다

 

고양이의 시간과 공간은

이곳과 달라서 고양이들은 추억이나 불안

이정표나 일방통행 등의 어떤 표기도 의존하지 않는다 꼬리를 세우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고양이의 도도한 걸음

 

나는 쓰지만 쓰는 건 실체가 없으므로

고양이가 방금 생긴 균열 속으로 들어간다

 

나는 빈 거실에 홀로 앉아 저녁을 먹는다고 쓰고

 

점심을 다 먹어치우지 않았다면

밤도 오지 않았을 텐데

골목을 걷는다

 

나는 내 고양이만 본다

 

 

 

오늘의 노동

 

 

버린 쪽지을 찾아 걷는 일

날려 보낸 종이비행기가 구름에 걸려 떨어지지 못하고

같은 계절 위로 다른 비가 끝도 없이 내려 운동화가 젖는 일

회색으로 변한 새 신발을 보며 우울해하는

 

내가 쓰고 버린 말들을 뱃속에 담는 일

폐지를 잔뜩 실은 채 홀로 높은 언덕을 걸어 오르다

덜컹, 날아간 종이보다 먼저 바닥에 주저앉는 일

 

몇년 전 연락이 끊긴 사람에게 계속 엽서를 보내고

마지막으로 만났던 장소를 맴돌고

올려다본 하늘에 휘청, 하루가 통째로 흔들리는 일

 

잠에서 깨지 않는 엄마 곁에 누워 가슴을 만지고

취한 아버지 몰래 날카로운 것들의 끝을 부러뜨리고

한데 모아 입안에 털어 삼키는 일

남몰래 혀를 씹는 버릇 같은 일

 

배 나온 알몸을 거울에 오래 비춰보고

거울 속 어디에 나를 방치하면

내가 잠에서 깨어나 잇몸을 보이며 웃는 일

오늘이 오후로 접혀 버려지는 그런

 

 

김지윤

1985년. 전남 나주 출생.

대진대 국문과 졸업 . kjygosu@naver.com

 

 

심사평

... 중략

  김소현, 김지연,김지윤의 시를 최종심에 올렸다...(중략)

  김지윤을 당선자로 뽑는다. 그의 시는 다른 응모자들의 작품에 비해 소탈하다. 그래서 천천히 마음을 움직이는 개성을 가졌다. 무엇보다도 기계적으로 학습된 수사에 기대지 않고 문장의 흐름 위에 자신의 정념을 위치시키는 방법론이 인상적이었다. 만약 이것이 반복된 학습의 결과라면 그의 시는 시적 기술을 극복한 사례이며, 반대로 절실한 표현의 효과라면 그의 정서는 자체로 시적인 결을 이룬다고 할만하다. 요컨데 그의 시가 거대하거나 완벽하거나 새롭게 때문에 심사자들이 그의 시를 꼽은 것은 아니다. 시적 전략과 과잉의 포즈가 만연한 시단에 비추어, 그가 보여준 직정과  낮은 어조와 소박한 도달이 좋았다. 당선자는 이 점에 대한 반성과 자부를 함께 가져야 할 것이다.

  독자가 없으면 시는 존재할 수 없다. 시를 두고 벌어지는 수많은 논의 속에서 가끔 잊게 되는 말이다. 심사자들은 첫 독자로서 작품에 감동하기를 원했다. 아쉽게 당선하지 못한 응모자들에게는 격려를, 당선자에게는 축하를 보낸다

-심사위원 : 김소연 백상웅. 신용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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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회 창비 신인문학상 시부문 당선작]

 

장마의 딸

 장마는 당신

 참 예쁜 당신의 이름

 

 

내가 낳았을 리 없는 장마의 딸,

너만 오면 예보에도 없던 장마가 시작이 돼.

이불이 마르질 않잖니.

축축한 불행 위에서 자는 건 이제 지겹구나.

 

흥건한 웅덩이를 보고 질색하는 나의 마미,

이 배꼽이 당신과 닮았는데 무슨 말씀을 하시나.

 

장마는 내 의도가 아니에요.

 

내 말은 듣지도 않는 나의 마미,

()을 하자면 나는 건조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태생이 질척질척이지만 배꼽은 잊고

쩍쩍 갈라진 틈으로 살고 싶었어요.

발밑 사탕처럼

 

반짝,

밟히다

깨지고

부서져

알록달록한 설탕가루로 날아가는

 

그런 건조함을 매일 상상했습니다.

 

(오늘은 얼굴이 내일은 이름이

나의 마미, 마침내 당신은 처녀로 돌아가는 거에요.)

 

장맛비가 요란한 오늘, 우리

주니어의 역사를 새로 쓸까요?

 

이십년 전 번개가 내 배로 옮겨 붙던

그날을 기억해요.

 

 

 

 

어항 속 지느러미는 여덟 금붕어는 하나

 

 

의 상자,

 

  당, , , , , , 뻐금뻐금 태어나 딱딱하게 얼어붙은 말들, 남편의 엉덩에 말 줄임표가 돼 따라붙는다. 새삼스럽게, 남편은 엉덩이를 살짝 피해버리지. 비빌은 뱀의 혀처럼 가만있질 못하죠. 결말을 앞둔 여배우처럼 의미심장하게, 무너지는 와이프, 엄마, 엄마, 엄마, 표정을 짓지 마세요. 꼭 살아 있는 사람 흉내 내듯. 찬 붓을 가슴에 대는 아들. 옆집 미시의 가슴을 똑같이 그린다. 엄마와 옆집 누나를 바꿔놓는 게 내 소원이에요. 뻐끔, 혓바닥을 내뱉는 순간 삽입되는 흰 夢, 저 긴 담배, 너는 담배 피우는 꼴도 네 아빠를 꼭 닮아가. (오래된 대본대로 뺨을 후려갈기곤) 엄마는 서럽게, 운다. 귀머거리 노인네는 지네, 지네, 디스크에 그렇게 좋다는데, 지네 타령을 한다. 머리칼에 물드는 하양의 꽁무늬를 잡으며.

  막다른 빙벽,

  금붕어의 체위는 지느러미 뒤의 지느러미.

 

  氷의 경계 위로 튀어오르는

  튤립 같은 금붕어의 입술

 

  금붕어의 여덟 번째 체위

 

   

 

 

쌍둥이

 

 

누나,

내 뒤통수엔 검은 새가 살아.

  눈 한번 깜박이지 않는

  긴 부리의 비밀이 살아.

  새는 나는 곳마다 검은 웅덩이,

  긴 부리가 만든 시커먼 멍들.

  , 속내를 흘리고 다니나봐.

  저기서 시적된 빗속에

  내 비빌이 쏟아지면 어쩌지. 비실비실 오줌처럼.

  누나,

  이 비행은

  새의 본능일까, 내 것일까,

  헷갈려.

  (창밖 가득 쏟아지는 새들과 함께 너, 떨어지며 지껄인다.

  이동네는무서워육교가가까워추락이가까워

  날낳은게엄마일까누나일까엄마가누나일까누나는처녀였을까

  머리가 드디어 땅에 닿을 때, 너 웃는다.)

  그리고 누나,

  그거 알어?

  엄마가 돌아왔어

 

 

 

 

 

쌍둥이

 

 

,

나는 유령인가보다.

내 말에 대꾸 한번 하질 않잖니.

팔차선 도로 한가운데의 팔자라더니,

십팔평 아파트 한가운데에서 메아리를 기다리는 꼴이야, 매일.

나물도 먹어라

(질긴 시금치나물)

내일은 뭘 해줄까.

......

실뱀 같은 화를 내는 우리 엄마

십팔평짜리 소꿉놀이를 한다.

지폐보다 영수증이 많은 날 바람은

적자적자적자, 불고

우리의 엄마는

너네까지 이러면 내 인생 모조리 핏빛 적자잖니, 하고

밥상을 엎는다.

칼이 어디 있더라, 찾는 사이

뒤통수에 구멍을 키우는 동생이 소리도 없이

내가 그랬지? 엄마가 돌아왔다고

웃는다.

   

 

 

 

  유전자 순환선

 

 

  태몽

 

  복숭아였지. 분명 하얗고 탐스러운 복숭아를 크게 한 입 베어물었는데 이상하게 비린내가 나지 뭐야. 다시 보니 그건, 엉덩이였어! 뒤록뒤록 살이 찐 돼지의 엉덩이, 히프! 넌 태어나기 전부터 내게, 오류였어.

 

  태초의 애인들

 

  차라리 뺨을 때려. 넣어달란 말 좀 하지 마. 불행을 생산할까봐 그래. 네 유전자를 못 믿느냐고? 난 내 유전를 맹신해. 자신있어? 자신 있어, 그래, 어디 들어와봐. 태초를 다시 시작하는 거야.

 

  모녀

 

  넌 내 마지막 자위야.

  당신은 내 어쩔 수 없는 자해고.

 

 *

 

  파란 잔디를 가로질러 뛰어오는 꼬마

  한 손엔 바닐라아이스크림이 질질.

  분홍색 치마가 뒤집힌다.

  애 다리가 너무 뚱뚱해, 생각하는 찰나

  꼬마가 내 소매를 잡아끈다.

 

  뭘 보고만 있어. 솜사탕이나 사오시지, 이 엄마야.

 

 

 

손유미 _ 1991년 인천출생 동덕여대 문예창작하과 재학. 2012년 제11회 대산대학문학상 희곡부문에 <달무리> 당선.

 

 

출처 : 신춘문예공모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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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를 기다리며

 

   전문영

 

 

1

 

할머니는 오래된 노래를 지우듯 화분의 잎을 닦는다

사과가 담겨 있던 스티로폼 망이 찢어지던 날

땅에 떨어졌던 사과는 모두 묻었다 그 자리를 더듬듯

할머니는 스티로폼 망으로 꽃을 만들어 가지 끝마다 매단다

사과는 이제 없는데 저 조그만 해먹 위에서 무엇이 쉬고 있는지

할머니는 결코 말해주지 않는다

 

2

 

어느 날 손가락들이 한 나병 환자를 두고 갔다

그것은 달밤의 계곡물 위로 사과가 떠내려가는 일과 같고

이후 그녀는 늘 고개를 숙이고 걷는다

사과를 영영 잃어버렸다고 말하면서도

혹시 진딧물이 기어오를까 두려워 발밑을 살피는 것이다

 

매주 목요일 내가 그녀의 등에 물을 끼얹으면

그녀는 안심한다 사과 먹는 벌레가 다 쓸려 내려간다고

샤워기를 등에 갖다 대면 그녀의 손등은 살짝 구부러진다

이제 막 사과를 쥐려고 하는 사람처럼

창문은 얼룩져 밖을 헤아릴 수 없고

그녀는 사과 같은 건 모두 놀이터에 있다고 믿는다

 

봉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의 놀이터에서

한 소녀가 발을 굴러 그네를 띄우고 있다

그 어떤 사과도 도달하지 못했던 천진한 곡선을 그리며

발바닥이 깨끗하게 퍼진 채로 공중에 떠오른다

그 순간의 출렁임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바나나, 멜론, 포도, 복숭아…… 다만 사과는 아닌 그 무엇이다

소녀는 아직 사과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다

 

3

 

조카는 사과밭 사이를 뛰었다 숨었다 정신이 없다

일교차가 심할수록 사과는 덜 시어진다고 하니

조카는 분명 지금 달아져가는 중이다

 

어른의 손가락은 아이들의 첫 사과인지도 모른다

내 검지를 쥔 조카의 악력이 대단하다

다섯 손가락이 각자의 위치로부터 힘껏 내 검지를 밀어낸다

조카는 기도란 미는 힘이란 것을 벌써 안다

 

기도가 기도를 밀고

손바닥이 손바닥을 밀듯이

사과나무가 자신의 손목을 밀어내자

나뭇잎은 간구하던 몸짓 그대로

손끝이 조금 말려든 채 흙 위에 눕는다

사과를 기다리는 것처럼

 

 

 

 

스코틀랜드 야드

 

 

1

 

어디긴 어디야, 도로 위지

라는 말을 끝으로 네 전화가 끊어졌다

이건 어딜 가나 스코틀랜드 야드라는 얘기나 다름없다

 

런던 경시청 건물은 그레이트 스코틀랜드 야드 안에 위치해 스코틀랜드 야드를 불렸다

하지만 이사한 건물들마저 모조리 스코틀랜드 야드라고 불리자 다들 걱정하기 시작했다

이러다간 런던 전역이 스코틀랜드 야드가 될 지경이었으니까

 

2

 

게임 스코틀랜드 야드의 규칙

—도둑 Mr. X는 택시, 버스, 지하철을 타고 런던을 돌아다닌다

—경찰은Mr. X를 스코틀랜드 야드 안으로 데려가야 한다

 

3

 

남동생은 유도에서 낙법을 제일 중요하게 여겼다

마치 매쳐지거나 넘어지길 고대하는 사람처럼

물론 칼을 사고 베이지 않으면 베일 때까지 신경 쓰인다

그래도 칼이 나를 베려고 작정하면 낙법은 전혀 쓸모가 없는데

아무리 말해도 동생은 내게 낙법을 가르치려 들었다

 

낙법은 몸이 땅에 닿기 전

손이나 팔로 먼저 바닥을 딛는 기술이다

즉, 몸에서 손과 팔을 떼어놓는 것이다

네게서 다시 전화가 온다 이제 역전앞이란다

그래도 네가 보이지 않는 건

나는 역전이고 너는 역전앞이기 때문이다

역전은 낙법을 배우면서 앞을 떼어버렸고

역전앞은 역전의 공격이 두려워 관망 중이다

 

신중한 동생은 경기에서 결코 낙법을 쓰는 일이 없었다

마치 낙법의 바깥에 영영 내던져진 사람처럼

어쩌면 낙법은 동생 앞을 내내 서성였고

동생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마 너도 낙법을 배웠다면 좋았을 거다 그랬다면

역전앞에서 쓰러지는 순간이 곧 역전이라는 걸 알았을 테니까

쓰러지면서 닿으려 할 때 역전은 결코 물러나지 않는다

 

4

 

Mr. X는 지하철을 기다리다가 경찰에 붙들렸다

경찰이 그를 바닥에 내동댕이치는 순간

Mr. X는 본능적으로 낙법을 취하고는 스스로 놀랐다

아무리 잠깐이라지만 자신의 전부인 손을 몸에서 떼어놓았다니!

그래도 경찰이 그를 두고 돌아가려 했을 때만큼은 아니었다

Mr. X가 이유를 묻자 경찰이 속삭였다

당신은 이미 스코틀랜드 야드 안에 있소

곧 지하철이 도착했지만 Mr. X는 움직일 수 없었다

어딜 가나 스코틀랜드 야드라면

낙법도, 낙법의 바깥도 소용없어졌다는 얘기였으니까

 

 

 

 

팬시

 

 

편재적이라는 말 알아?

 

그건 문방구의 다른 이름이다

문을 열면 오른쪽엔 소년이 왼쪽엔 소녀가 있고

공룡이 소년을 편들고 곰돌이가 소녀의 뒤에 선다

1000원에 스티커, 색연필, 줄넘기로 빼곡해지는 생활!

 

공책을 고를 때는 위에서 두 번째 공책을 빼낸다

그게 제일 위에 놓인 공책보다 조금 낫다는 건 내가 발견한 법칙

나처럼 머릴 잘 굴리는 애는 좀처럼 없다

 

공책표지는 한 소년의 일생을 예고한다

"제이에겐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오렌지 더벅머리의 제이는 바람개비를 불고 있다

곧 바람이 불어올 것처럼

그 다음을 기대하며 페이지를 넘겨보지만

교실에서도 집에 돌아가서도

아무도 제이에 대해서는 적지 않는다

 

"다들 그렇게 살아"라는 말을 들을 때

쑥 하고 꺼져내리는 느낌으로

벌써 공책 한권을 다 썼다

제이의 삶이 한번 훌렁 뒤집히면 뒤표지다

거기서 제이는 헬apt을 쓰고 구호를 외치는 중이다

"제이는 초콜릿을 좋아해!"라고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이야기가 시작될 거라고 아직 믿고 있다

 

공책이 쌓이면 소년들은 제이의 얼굴을 하고

"다들 그렇게 산다며?" 중얼거리다가

문방구에서 우르르 빠져나와 도로 주변을 얼쩡거린다

모범이 택시라면 한대 훔칠 기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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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트호브에서 온 편지 / 안희연(安姬燕)

 

나는 핏기가 남아 있는 도마와 반대편이라는 말을 좋아해요

 

오늘은 발목이 부러진 새들을 주워 꽃다발을 만들었지요

 

벌겋고 물컹한 얼굴들

뻐끔거리는 이 어린 것들을 좀 보세요

은밀해지기란 얼마나 쉬운 일인지

나의 화분은 치사량의 그늘을 머금고도 잘 자라고 있습니다

 

창밖엔 지겹도록 눈이 옵니다

 

나는 벽난로 속에 마른 장작을 넣다 말고

새하얀 몰락에 대해 생각해요

호수, 발자국, 목소리……

지붕 없는 것들은 모조리 파묻혔는데

장미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에겐 얼마나 많은 담장이 필요한 걸까요

초대하지 않은 편지만이 문을 두드려요

 

빈 액자를 걸어두고 기다려보는 거예요

돌아올지도 모르니까

물고기의 비늘을 긁어 담아놓은 유리병 속에

새벽이 들어 있을지도 모르니까

 

별들은 밤새도록 곤두박질치는 장면을 상연 중입니다

 

무릎을 켜면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것처럼

 

당신이 이 편지를 받을 즈음엔

나는 샛노란 국자를 들고 죽은 새의 무덤을 휘젓고 있겠지요

 

 * 고트호브: 그린란드의 수도로 ‘바람직한 희망’이라는 뜻.

 

 

 

 

필라멘트

 

내 눈 속에는 돌을 안고 가라앉는 사람이 있지

누군가 내 눈꺼풀을 덮어주면

 

흰 천에 덮인 채로 말라간다

키에 맞는 나무상자가 곁에 있다

 

목덜미를 끌고 가는 새벽

나는 침대 밑에서 오래된 외투를 꺼낸다

닿자마자 물크러지는 열매 같아

연필로 그린 새가 날아가고

 

창문을 열면 나무와 하늘과 여름이

새의 무게만큼 비어 있다

 

나를 엎지르면서 또 한 대의 기차가 지나가고

 

발목을 끊고 그림자도 달아나버리고

 

살짝살짝 어깨를 떨고 있는 고요

나는 우산을 접으면서 작아진다

 

 

 

 

입체안경

 

스크린은 도로를 감추고 있다.

 

승객을 가득 태운 버스가 간다. 차창마다 똑같은 옆모습이 붙어 있다. 우리는 이름 대신 번호를 가졌지.

 

버스를 그려서 그 안에 버스를 구겨넣었어. 원을 그려서 그 안에 얼굴을 구겨넣듯이.

 

긴 커브를 돌았다. 두 겹으로, 네 겹으로, 여덟 겹으로…… 흩어진다는 것. 목이 등 뒤로 돌아갈 때의 속도 같은 것.

 

손잡이는 말했어. 한 곳에 오래 머물기 위해 유연하게 흔들리는 법.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손을 내려도 여전히 손잡이에 매달려 있는 것이 있지. 오분 전의 얼굴. 삼십초 전의 가로수. 나는 나로부터 불시에 멀어지고

 

의자가 조금 흐트러진 것 같은데. 나는 의자의 구조에 대하여 의심을 품었다.

 

하루해가 저물 때까지 한 사람을 완성하는 일.

 

 

 

 

줄줄이 나무들이 쓰러집니다

  

   키 크는 일에 관해서라면 나도 조금 할 말이 있어요 허물어지는 계단을 달려와 단숨에 뛰어내리는 일 공중에 떠오를 때마다 나는 킥킥 비행기가 된 것 같지만 폭죽처럼 온몸은 터지고 바닥엔 흩뿌려진 색종이들 나는 아름다운 착지를 꿈꿔요 옥상은 매일 밤 높아져요

 

   누군가 나를 찢고 달아날 때마다 나는 매번 다른 사람이 되지요 나는 뺨이 붉은 소년이었다가 잇몸만 남은 노인이었다가…… 지금은 철길 위에 꼼짝없이 묶여 있네요 경쾌한 기적을 울리며 기적 없이 다가오는 것들, 바퀴가 끌고 갈 나는 어떤 모습일까요 토막 난 허리를 상상하면 거짓말처럼 배가 고파요 얼굴을 뒤적이다가 가는 고양이들

 

   줄줄이 나무들이 쓰러집니다 어제 죽은 내가 전하는 안부 같아서 나는 양팔을 벌리고 검은 해일을 안아요 다음 장면에선 비가 오고 철골만 남은 건물들이 유령처럼 서 있습니다 이곳에선 내가 주인공이에요 모자를 썼다 벗었다 쓰면서 스러져가는 불빛을 흉내내죠 목소리가 나오지 않지만 괜찮아요 가위를 든 손이 불현듯 나타났다 사라져도

 

   꽃병에 꽂혀 있는 흰 뼈들 성냥으로 만든 집은 자주 흔들립니다 방문을 열고 들어오면 방금 전 내다버린 상자들이 도착해 있고 창문은 추락을 보여줄 때 가장 선명해지지요 창밖의 아이들은 온종일 머리통을 공처럼 굴리며 놀아요 소매가 더러워지도록 땅을 파면 몸통들이 웃고 있고

 

   나도 따라 환하게 웃어봅니다 누군가 또 나를 찢고 달아나요 나는 다시 빛나는 눈을 가진 맹인이 되어…… 맹렬한 불 속에서…… 진짜 죽음이 와도 완성하지 못할 긴 편지를 쓰고 있어요 벽에서 태어난 새들의 날갯짓 소리가 들려와요

 

 

 ▲ 안희연 / 1986년생.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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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제12회 ‘창비신인시인상’에 접수된 426명의 원고를 심사위원 3인이 한달 간 검토했고, 각자 3명 내외로 2차심에 추천했다. 이들의 원고를 약 2주 간 집중 검토한 후 10월 18일 최종회의를 진행했다. 시를 통해 실패를 무릅쓰고 세계라는 감성공동체에 지속적으로 참여해나갈 강한 의지와 체력이 엿보이는 신인을 우리는 만나고 싶었다.

   거침없이 질주하는 언어가 인상적이나 알맞은 그릇에 담기지 못해 언어의 긴장감과 시적 전개가 다소 정체되어버린 김지은의 시편들을 아쉽게 내려놓으며, 최종적으로 심도 깊게 논의한 것은 김숙, 안희연, 장혜령 3인의 작품이었다.

   김숙의 「저녁의 저울」외 5편은 탄탄한 서정을 갖추었고 언어를 조율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서정적인 언어를 지루하지 않고 세련되게 다루는 솜씨가 인상적이다. 특히 표제작이 매우 아름다워 오래 붙잡고 있었다. 응모된 거의 모든 시편들이 큰 편차 없이 고른 수준을 보여주었으나, 다른 시적 공간으로 진입하려는 의지가 다소 약해 보였다. 시의 매혹은 어떤 완성에서 온다기보다, 지금껏 내가 내딛지 못한 다른 시공간으로 옮겨가는 중에 낯설고 막다른 상처처럼 얻어지는 듯하다.

   장혜령의 「이방인」외 9편은 자신만의 확고한 스타일이 있다. 특히 「이방인」은 수작이다. 사유는 날카로우며 유연하다. 언어는 개성적인 에스프리로 흠뻑 젖어 있다. 돌발적으로 툭 던져지는 듯한 구절은 시의 마지막으로 갈수록 놀랍게도 뚜렷한 하나의 전언을 향해 화살표처럼 모여든다. 장혜령은 당선자가 결정되기 직전까지 우리를 고심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런 고심을 「이방인」이라는 시를 통해서만 주로 안겨줬다는 데 아쉬움이 있다. 나머지 대부분의 작품들에서는 「이방인」을 통해 보여준 강점들이 거의 발휘되지 않았다. 만약 「이방인」이 이번에 응모한 시편들 중 비교적 최근에 창작된 것이라면, 장혜령은 지금 명백히 도약하고 있는 중이다.

   안희연의 「고트호브에서 온 편지」외 9편은 매우 감각적인 언어를 수집하고 배치하면서도 자신이 구사하는 언어의 진폭을 상당히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다. 당연히 그것은 진지한 고투의 산물이다. 동시에 실패를 무릅쓰고 부단히 다채로운 시공간을 창조하고자 노력한다. 이렇게 조탁된 시의 행간에는 침묵이 생명체처럼 도사리고 있고, 그 침묵이 주는 텐션은 매혹적이다. 이 모든 덕목은 최근 신인들에게 그리 흔히 발견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 현재보다 미래를 더 기대할 수 잇다는 점에 신뢰를 보내며 당선자로 선정했다.

   심심찮게 관찰되는 무거운 추 같은 미완의 세계를 발목에 매달고 난바다를 건너 또 다른 시의 영토로 한 번 더 도약하는 것은 지금부터 온전히 그의 몫이다. 앞으로 있을 그 고투의 과정에서 우리에게 부디 매혹을 선사해주길. 이 새로운 시인이 우리의 예감과 기대를 멋지게 증명해주길 부탁한다.

 

      [심사위원] 김중일, 박성우, 이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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