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를 기다리며 외
전문영
1
할머니는 오래된 노래를 지우듯 화분의 잎을 닦는다
사과가 담겨 있던 스티로폼 망이 찢어지던 날
땅에 떨어졌던 사과는 모두 묻었다 그 자리를 더듬듯
할머니는 스티로폼 망으로 꽃을 만들어 가지 끝마다 매단다
사과는 이제 없는데 저 조그만 해먹 위에서 무엇이 쉬고 있는지
할머니는 결코 말해주지 않는다
2
어느 날 손가락들이 한 나병 환자를 두고 갔다
그것은 달밤의 계곡물 위로 사과가 떠내려가는 일과 같고
이후 그녀는 늘 고개를 숙이고 걷는다
사과를 영영 잃어버렸다고 말하면서도
혹시 진딧물이 기어오를까 두려워 발밑을 살피는 것이다
매주 목요일 내가 그녀의 등에 물을 끼얹으면
그녀는 안심한다 사과 먹는 벌레가 다 쓸려 내려간다고
샤워기를 등에 갖다 대면 그녀의 손등은 살짝 구부러진다
이제 막 사과를 쥐려고 하는 사람처럼
창문은 얼룩져 밖을 헤아릴 수 없고
그녀는 사과 같은 건 모두 놀이터에 있다고 믿는다
봉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의 놀이터에서
한 소녀가 발을 굴러 그네를 띄우고 있다
그 어떤 사과도 도달하지 못했던 천진한 곡선을 그리며
발바닥이 깨끗하게 퍼진 채로 공중에 떠오른다
그 순간의 출렁임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바나나, 멜론, 포도, 복숭아…… 다만 사과는 아닌 그 무엇이다
소녀는 아직 사과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다
3
조카는 사과밭 사이를 뛰었다 숨었다 정신이 없다
일교차가 심할수록 사과는 덜 시어진다고 하니
조카는 분명 지금 달아져가는 중이다
어른의 손가락은 아이들의 첫 사과인지도 모른다
내 검지를 쥔 조카의 악력이 대단하다
다섯 손가락이 각자의 위치로부터 힘껏 내 검지를 밀어낸다
조카는 기도란 미는 힘이란 것을 벌써 안다
기도가 기도를 밀고
손바닥이 손바닥을 밀듯이
사과나무가 자신의 손목을 밀어내자
나뭇잎은 간구하던 몸짓 그대로
손끝이 조금 말려든 채 흙 위에 눕는다
사과를 기다리는 것처럼
스코틀랜드 야드
1
어디긴 어디야, 도로 위지
라는 말을 끝으로 네 전화가 끊어졌다
이건 어딜 가나 스코틀랜드 야드라는 얘기나 다름없다
런던 경시청 건물은 그레이트 스코틀랜드 야드 안에 위치해 스코틀랜드 야드를 불렸다
하지만 이사한 건물들마저 모조리 스코틀랜드 야드라고 불리자 다들 걱정하기 시작했다
이러다간 런던 전역이 스코틀랜드 야드가 될 지경이었으니까
2
게임 스코틀랜드 야드의 규칙
—도둑 Mr. X는 택시, 버스, 지하철을 타고 런던을 돌아다닌다
—경찰은Mr. X를 스코틀랜드 야드 안으로 데려가야 한다
3
남동생은 유도에서 낙법을 제일 중요하게 여겼다
마치 매쳐지거나 넘어지길 고대하는 사람처럼
물론 칼을 사고 베이지 않으면 베일 때까지 신경 쓰인다
그래도 칼이 나를 베려고 작정하면 낙법은 전혀 쓸모가 없는데
아무리 말해도 동생은 내게 낙법을 가르치려 들었다
낙법은 몸이 땅에 닿기 전
손이나 팔로 먼저 바닥을 딛는 기술이다
즉, 몸에서 손과 팔을 떼어놓는 것이다
네게서 다시 전화가 온다 이제 역전앞이란다
그래도 네가 보이지 않는 건
나는 역전이고 너는 역전앞이기 때문이다
역전은 낙법을 배우면서 앞을 떼어버렸고
역전앞은 역전의 공격이 두려워 관망 중이다
신중한 동생은 경기에서 결코 낙법을 쓰는 일이 없었다
마치 낙법의 바깥에 영영 내던져진 사람처럼
어쩌면 낙법은 동생 앞을 내내 서성였고
동생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마 너도 낙법을 배웠다면 좋았을 거다 그랬다면
역전앞에서 쓰러지는 순간이 곧 역전이라는 걸 알았을 테니까
쓰러지면서 닿으려 할 때 역전은 결코 물러나지 않는다
4
Mr. X는 지하철을 기다리다가 경찰에 붙들렸다
경찰이 그를 바닥에 내동댕이치는 순간
Mr. X는 본능적으로 낙법을 취하고는 스스로 놀랐다
아무리 잠깐이라지만 자신의 전부인 손을 몸에서 떼어놓았다니!
그래도 경찰이 그를 두고 돌아가려 했을 때만큼은 아니었다
Mr. X가 이유를 묻자 경찰이 속삭였다
당신은 이미 스코틀랜드 야드 안에 있소
곧 지하철이 도착했지만 Mr. X는 움직일 수 없었다
어딜 가나 스코틀랜드 야드라면
낙법도, 낙법의 바깥도 소용없어졌다는 얘기였으니까
팬시
편재적이라는 말 알아?
그건 문방구의 다른 이름이다
문을 열면 오른쪽엔 소년이 왼쪽엔 소녀가 있고
공룡이 소년을 편들고 곰돌이가 소녀의 뒤에 선다
1000원에 스티커, 색연필, 줄넘기로 빼곡해지는 생활!
공책을 고를 때는 위에서 두 번째 공책을 빼낸다
그게 제일 위에 놓인 공책보다 조금 낫다는 건 내가 발견한 법칙
나처럼 머릴 잘 굴리는 애는 좀처럼 없다
공책표지는 한 소년의 일생을 예고한다
"제이에겐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오렌지 더벅머리의 제이는 바람개비를 불고 있다
곧 바람이 불어올 것처럼
그 다음을 기대하며 페이지를 넘겨보지만
교실에서도 집에 돌아가서도
아무도 제이에 대해서는 적지 않는다
"다들 그렇게 살아"라는 말을 들을 때
쑥 하고 꺼져내리는 느낌으로
벌써 공책 한권을 다 썼다
제이의 삶이 한번 훌렁 뒤집히면 뒤표지다
거기서 제이는 헬apt을 쓰고 구호를 외치는 중이다
"제이는 초콜릿을 좋아해!"라고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이야기가 시작될 거라고 아직 믿고 있다
공책이 쌓이면 소년들은 제이의 얼굴을 하고
"다들 그렇게 산다며?" 중얼거리다가
문방구에서 우르르 빠져나와 도로 주변을 얼쩡거린다
모범이 택시라면 한대 훔칠 기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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