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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무 / 김영욱

 


이거리 저거리 각거리

 

다리헤기로 밤새우는 도깨비를 닮았나,

 

소리기생 화초기생 수기생의 눈치 보며

 

수발드는 춤꾼은 사내

 

길거리에서 죽은 귀신 불러내라,

 

달 밝은 밤에 부푼 치마 속에는

 

한 다리 두 다리 세 다리

 

어기적어기적 걸음마부터 바라춤을 흉내 내는

 

한둘은 암놈, 서이 너이는 수놈,

 

버선코가 닳도록 도드리로 놀아보자,

 

사다리 오다리 넉장다리 외다리

 

신라귀신도 나오너라,

 

허튼 가락이 오장육부 건드려

 

몸짓은 몸부림 되고 호흡은 인불이 되고

 

가위 눌린 뼈다귀도 허옇게 떠오르는

 

달 밝은 밤에 신라의 밤에

 

반월성 무너진 다리 아래

 

흐르는 물소리가 후들후들 떨렸나,

 

역신(疫神)이 죽음을 넘보려

 

그림자를 달아놓았다는

 

이 다리도 저 다리도 헛다리라,

 

물밑에서 그 다리 열릴 적에

 

처용아, 어느 탈에 외로움을 숨겼기에

 

이거리 저거리 각거리, 휘영청

 

네온이 밝은 밤에 어기적어기적

 

홀로 어느 거리로 살풀이를 갈거나.

 

 

 

 

 

[심사평]

 

 

당선작을 선정함에 있어 심사위원들이 쉽게 의견일치에 이르렀다. 각자 심사한 후에 순위를 매기는 형식을 취하였는데 심사 위원 만장일치로 <처용무>를 당선작으로 결정하였음은 그만큼 작품이 돋보였기 때문이다.

 

응모된 작품들은 전반적으로 신라의 정신이 담긴 사적지와 유물들을 등가물로 가져와 시로 형상화하는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많은 작품들이 현학적이며 관념적인 것과는 대조적으로 당선작은 물상에 기대어 서사를 회화적으로 풀고 있으며, 처용무의 춤사위를 흐느적이는 언어의 리듬으로 묘사하여 오늘날의 처용으로 시각화하였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당선작을 제외한 작품들 중 검색된 지식의 나열이나 산문과 시를 구별하지 못하는 응모작들이 다수 보였고, 대상에 몰입하기에 급급하다보니 시인의 체험이 녹아들지 못하거나, 현재를 사는 시인의 현실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 등이 지적되었다. 시는 과거의 기록을 들춰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대한 암묵적 제시도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는 요소임을 다시 한 번 새겨보아야 할 것이다.

 

결심에 오른 작품들로는 <남산석불은 코가 없다>, <얼굴무늬 수막새>, <양동마을 고목나무>, <안녕은 돌고 돌고> 등이 있었다. 주제를 끌고 가는 힘이 좋고 언어를 다루는 기교의 능숙함 등이 느껴지나 시의 완성도 면에서 아쉬움이 있었다. 아무튼 많은 응모작들이 바탕에 성실한 신라정신을 탐색하고 있다는 점에서 후년을 더욱 기대한다.

 

 

심사위원                 


구광렬(시인, 소설가, 실천문학 주간)

김광희(시인, /시조)

박윤배(시인, 형상시학회 대표이사)

이임수(시인, 필명: 이사가, 동국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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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 앞 / 손은조

 

별을 와락 끌어안은 집

능소화 핀 대문 틈으로

밤마다 흐드러지던 집

박하분 뽀야니

물봉선 같은 입술로

너는 나를 갈무리했다

네 발굽 꼭꼭 찍어

너에게로 간다

그는 고삐를 놓아 버렸다

말다래에 풀잎이 이지러진다

추상 같던 맹세

한 잔 술에 허물어버린

바람벽의 주인을 싣고

너에게로 간다

별이 울고

이우는 별에 밤이 얽어진다

천관녀야 천관녀야

내 목에 속아나는 선혈이

네 그림자 깍지 끼고 강물로 흘러도

그 집 앞에 치닫는 마음은

천년을 꼬박 한자리

오늘도 검붉은 봉오리로 돋아나는

길고 긴 내 모가지

 

 

 

15회 월명문학상 심사평

 

 

 

본심에서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2, 목어, 토우, , 연뿌리에 지난 바람이 다시 지나간다, 하심, 탑곡에서, 그 집 앞 8편이었다.

2 목어는 힘이 있는 작품이다. 다만 시를 표현하려는 의욕이 앞서다 보니, 말의 함축과 울림이 얕아지는 흠이 있었다. 때로는 과감하게 언어를 잘라내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으면 한다. 토우의 전반부는 신선하게 잘 읽혔다. 그러나 오호라 신생의 축복이로세”, “도리천이 어디메냐에서 보이는 설익은 표현과 정해진 방향성의 노출이 아쉬웠다. 은 김알지의 탄생 신화를 무리 없이 시화하고 있어 눈길이 갔다. 그러나 변태를 한다 부분의 시적 긴장이 아쉬웠다.

연뿌리에 지난 갈바람이 다시 지나간다하심을 투고한 사람과 탑곡에서 그 집 앞을 투고한 사람 사이에서 오래 망설였다. 언어를 갈무리하는 솜씨가 있는 사람들이어서 어느 하나를 버리기가 쉽지 않았다. 하심은 마른 나물을 파는 할머니 이야기인데, 할머니와 자연이 잡아당기는 절묘한 중력이 있었으나 잠결에 낀 등산화 앞부리 부분의 가독성이 아쉬웠다. 탑곡에서는 유머가 적절히 스며있어 시적 긴장을 높이지만 떠꺼머리 나무꾼이 업고 가버렸네라고 단정하는 부분에서 화자의 개입이 작품에 흠을 내고 있었다. 연뿌리에 지난 갈바람이 다시 지나간다 연뿌리를 지나간 바람이 흙, , , 꿈의 껍질, 이별, 질문과 대답 등 무수한 파문을 만든다는 오밀조밀한 상상력의 짜임으로 완성도를 높인 작품이다. 그 집 앞은 화자가 김유신의 말()이다. 시는 이런 부분에서 선명한 개성을 띤다. 언어도 힘 있고 성큼성큼 문장의 뜻도 깊고 야무지다. 특히 천년을 꼬박 한자리/오늘도 검붉은 봉오리로 돋아나는/길고 긴 내 모가지라는 결구가 돌올하다.

오랜 고민 끝에 가독성과 월명문학상의 성격에 더 부합한다는 판단 하에 그 집 앞을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응모자 여러분의 정진을 기원한다.

 

심사

이임수 전 동국대핚교 국문학과 교수

김광희 (시인, 2006년 전북도민일보 신춘 시 당선, 2016 농민신문 신춘 시조 당선)

손진은 (시인, 8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등단, 경주대 문창과 교수)심사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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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나라에서 / 배가브리엘

- 황성의 무인

 

옛날 옛적 먼 나라에서

많은 왕들과 더 많은 공주들이 살았던 나라에서

파랗게 빛나는 연못 물결 반짝이는 잎사귀

투명한 유리잔이 호화롭게 떠다니던 그늘에서

 

누구는 명주실을 조으고 누구는 대나무를 다듬고

누구는 그저 머리를 질끈 묶고

지금 나처럼, 지금 나처럼 그저 자주색 옷 하나 걸치고

맨발도 부끄럽잖고 그냥 그늘 아래에서 소매를 털어

 

세상엔 우리 둘 뿐이야 멀고 먼 나라에서 우리뿐이야

공기도 물도 없어 소리도 없는 곳인데 우리는 여기 있어

우리 발로 사뿐, 발바닥을 눌러 질끈

여린 살결에 사금파리 묻으면 그저 슬쩍 웃을 뿐

 

금관도 옥대도 없는 우리가 왕과 공주보다 귀해서

흰 발꿈치를 움직여, 그 뒤로 솟아나는 꽃을 봐

수줍게 내민 봉우리에 즐거워

가죽신도 마다않고 먼 나라에서 춤을, 끝나지 않는 춤을 춰

 

 

 

2017 월명문학상 심사평

 

일단 여섯 분의 작품을 뽑아놓고 며칠 간 묵혀 두면서 고민하기로 하였다.

시간을 두고 읽다 보니 첫인상과는 달리 작품의 높낮이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분들의 작품은 전체적으로 신라정신을 바탕으로 쓰여진 시들인데, 당선작의 기준은 그 신라정신이 얼마나 곰삭은 상태로 녹아있는가 였다.

그 결과 이 분들 가운데 먼저 세 분의 작품이 떨어져 나갔다.

저 능청맞게 생긴 오리가는 어법이 신선하고 가독성이 있었다. 그러나 생각이란 말이 연마다 별 차이 없이 붙어 있어 이를 달리 형상화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계림사를 읽다는 회화나무, 팽나무. 까치, 낙엽, 왕버들, 다람쥐, 낮달을 모두 숭고한 의미로 끌어당기는 솜씨가 뛰어났으나 결구 처리가 도식적인 느낌이 들었다. 탑곡에서는 유머와 재치가 살아넘치는 작품이다. 탑곡에 새겨진 부처와 협시보살, 비천상, 스님, 사자들이 인적이 뜸한 저녁이면 근엄한 모습을 풀고 저마다 일상적인 모습으로 돌아갔다가 이튿날 새벽 다시 바위 속으로 들어간다는 신선한 발상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동봉한 두 편의 작품이 앞의 작품을 못 받쳐주고 있어서 아쉬웠다. 세 분 모두 작품마다 편차가 있었다.

다보탑, 의 향기 2, 천년의 숲, 천년의 길 2, 먼 나라에서 2편의 작품을 두고 선자들은 오래 고민하였다. 신라정신을 형상화하는 미학적 측면에서 저마다 오래 공들인 내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보탑, 의 향기외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두드러진 특징은 기개가 살아있다는 것이다. 다만 생사여래生死如來의 틀을/벗어나지 못해도/진산사리의 다보여래가 돋아나고 등의 표현에서 관념적인 말을 녹여서 썼다면 더 우뚝한 작품이 될 수 있겠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천년의 숲, 천년의 길 2편은 언어 다루는 맵시가 좋고, 군데군데 순우리말을 갈무리하는 솜씨도 눈여겨 볼 만 했다. 그러나 전체를 마무리하는 종장에서 강렬성이 두드러지지 못했다. 먼 나라에서 2편은 삼국유사 속의 스토리가 손에 잡힐 듯 오늘의 시점에서 형상화되고 있다는 점이 좋았다.

세 분의 작품은 참으로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오랜 숙고 끝에 우리는 먼 나라에서를 당선작으로 하기로 하였다. 이 작품도 아쉬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부제가 없다는 것이다. 독자가 스스로 찾아가는 여지를 두고 있다고 하더라도 부제를 붙이기 바란다.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이임수

경주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손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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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그물 / 김재호

 

그들은

새 그물에 무엇을 담그려고 했을까

사방에 펼쳐진 땅으로는 부족해서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관찰하고

드넓은 바다를 향해 고개를 돌렸을지 모르겠다

 

새 그물로 무엇을 잡으려고 했을까

한낱 왕의 의지로는 역부족이라 느껴

신하들의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고

쉬;ㅂ사리 부서지고 마는 민심을

모으려고 했을지 모르겠다

 

새 그물을 보며 무엇을 떠올렸을까

담고 담다보면 찾지 못하여 잊어버리니

버리고 또 버리며 마지막 남게 될

참된 뜻을 바랬을지 모르겠다

 

얽히고 설킨 윤회의 끈은 절대로 끊어지지 않고

외세의 침략이나 지축을 흔드는 천재에도

낡아 헤지는 경우가 없으니

그들의 그물은 지금까지도 우리 손에

온전히 새 그물로 남아 있다.

 

 

 

심사평

 

신라의 의미를 현대적으로 조망하지 못하거나 미학적으로 형상화하지 못한 작품을 걸러내고 선자들의 손이 남겨진 작품은 다섯 분의 십여 편이었다. 그 중에서도 최종심의 대상이 되었던 작품은 새 그물,나의 첨성대,첨성대세 편이었다. 이들 작품은 어느 것을 당선작으로 뽑아도 무방할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 그러나 한 편을 골라내야 하기에 선자들은 이 작품들을 꼼꼼하게 읽어나가며 단점을 짚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첨성대는 첨성대를 할머니와 동일시하여 촘촘하게 빚어내는 상상력과 이를 뒷받침하는 묘사가 돋보였다. 삶의 경험이 녹아있다는 점에서는 이번 응모작 가운데서 발군이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을 유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언어운용에 있어서 응축과 핍진성이 부족하였기 때문이다. 불필요한 언어를 과감하게 덜어내는 훈련을 했으면 한다.

첨성대는 시적 화자를 첨성대로 잡아 시를 운용하는 능력과, 낭만이 있었던 신라인과 메마른 현대인의 대비를 효과적으로 시도하고 있는 점이 좋았다. 형태시의 시도도 의욕적이었다. 그러나 1-3연에서 매력적으로 끌고 가던 묘사는 무뚝뚝한 신라인과/말없이/별들을 헤아린 적이 있었다로 된 4연에서 너무 단조로워져서 균형이 깨져버렸다.

새 그물은 우선 보기에 지적인 작품이다. 지적인 속성은 시에서 보통 경계한다. 그러나 이 시는 신라라는 언어의 해석을 지금껏 볼 수 없는 새로운 시야로 끌어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이 그물은 땅과 바다, 끝간 데 없는 하늘’(1)은 물론 왕의 의지와 흐트러진 신하의 마음, 백성들의 심성’(2), 나아가 마지막으로 남게 될 참된 뜻’(3), ‘침략과 천재天災(4)’를 넘어 아직도 미지의 새로움으로 펼쳐져 있다.

이번에 지진으로 흔들린 마음까지를 다잡고 머언 미래에도 여전히 펼쳐질 새 그물, 그 이름 신라가 찬연하기 그지없다. 흔쾌하게 당선작으로 선했다. 좋은 작품을 뽑게 되어 기쁘다.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이임수

경주대학교 한국어교원학과 손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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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천관사지에서 / 박진숙

-庾信의 言

                     

기거라, 내 부루마, 꺼덕이는 실한 목아지.

는개 내리는 국경 넘어 갈기는 춤을 추고

南川물 죄다 퍼마신들 삭지 않을 꽃불인데

 

웅숭 깊은 우물 속 푸르른 바닥 끝까지

화살통, 그보다 더한 國法마저 버려둔 채

목아지 길게 드리우고  원없이 울고 싶으이.

 

용왕님 진동항아리, 어느 님께 비손드리뇨.

핫어미로 한뉘 보내고 어느 머언 시절에

부루마, 내 슬픈 목아지 따시웁게 안으리이까.

 

 

 

 

 

 

 

[가작] 점자도서관 / 유택상

 

하늘 속에 책이 펼쳐져 있었어요

피리소리도 들려요

나는 날마다

풀잎 위에 누워 책의 페이지를 넘기고 건조해진 채색의 무늬를

우듬지에 매달린 울긋불긋한 단풍을 떼어냈고요

별을 내리고 돌아온 날

서까래 같은 갈비뼈 사이로 아기들이 자라고 우린 행간에

묻어 있는 문장을 읽고 있었지요

문설주 틈으로 스며든 바람이 세간을 흔들고 있어요

다독일수록 딱딱하게 굳어가는 책장

물푸레나무 한 잎만큼의 밝기와 자작나무의 설법으로

산비둘기 알만한 온기를 품으면 문장 사이를 서성이다

밑줄들 속으로

고단함도 별이 될 수 있을까요

 쥐똥나무 열매만한 어둠이 내리면

숲 속 깊은 곳에서 붉게 흐르는 상처의 내력들

굴참나무 곁에서 바라보면 언제나 별이 꿈틀거리지요.

밤은 서둘러 숲으로 가고

까막딱따구리와 까치들이 꿈과 희망이 경전이 되었지요

구겨진 골목을 지났어요

된장국 냄새가 달빛에 출렁거렸지요

등허리에 햇볕은 다정하고 괄호 안의 갇힌 시간들은

목록의 전설로 남는 다는 것을 책장은 알고 있지요

이제 별이 잠들 시간이에요

단풍나무 도서관 진열대에 따스한 불기둥을 만들고 있고요

내가 밤마다 밑줄을 그어 놓은 페이지들이 환하게

낙목(落木)의 몸이 되어 꽃피우고 있었지요

별똥별은 우주의 일부분이지만 그 일부분이 삭아져 부서져

내렸지만 책장은 잎사귀의 햇빛을 저장하는 숲속이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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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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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기와(人面紋瓦當) / 이상윤

 

 

얼마나 사무치면 천년도 찰나인가

무정한 비바람에 태산은 사라져도

깨어진 웃음 한 조각 봄꽃으로 피었네

붉은 해 뜨고 지는 영겁의 아린 역사

빛 속에 숨은 어둠 차마 씻진 못해도

한 장의 와당 되도록 속울음도 울었으리

시월단풍 곱게 익는 뜨거운 천년의 땅

시간 속에 잠긴 길 휘적휘적 걸어가면

찬 마음 긴 갈피마다 궤적처럼 쌓이는

이제야 알 것 같은 사람의 사랑이여

애증도 연분이라 이렇게 깊어지면

나 또한 와당이 되어 한 천년을 가겠네

 

 

 

 

 

[심사평] 면면히 이어질 사랑의 역사성

  신라의 미소, 한국인의 미소 하면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막새기와 파편 한 조각에 남아 있는, 구름을 헤치며 나타난 보름달처럼 맑은 웃음을 풍기며 모습을 드러낸 여성의 얼굴이다. 당선작 <웃는 기와[人面紋瓦當]>는 바로 그 웃음의 의미를 천착한 작품이다.
  시인이 그 웃음에서 발견하게 된 것은 ‘사랑’이다. 그 사랑은 천년의 역사 동안 쌓인 속울음과 찬 마음의 갈피, 우리 삶의 애증들을 두루두루 보듬어 피워낸, 천지가 변해도 오롯이 남아 있을 정신이다. 시인은 우리 역시 이런 깊어진 사랑에 사무칠 수 있다면 와당이 되어 천년을 가야한다고 면면히 이어질 사랑의 역사성을 역설한다. 이 점이 바로 신라정신이 잡아낸 현재적 지점이다. 또 한편의 투고작 <피리>역시 하나의 주제를 붙들고 일관되게 밀고나가는 힘과 형상화가 빼어났다.  
  가작 「청운교 홍예문」은 홍예문의 건축원리에서 헌신과 희생의 진정한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시인은 두려움 없이 자신을 베어내고 던지는 희생의 정신은 비움마저도 비우고, 버림의 의식마저도 버린 상태에서야 진정한 꽃을 피울 수 있다고 묘사한다. 이는 화랑정신의 현대적 계승과도 관련이 있다. 같은 응모자의 <신라기행>은 형상화는 빼어났으나 주제의식의 분산이 아쉬웠다.  
  올해는 당선작과 가작 두 편 모두 시조에서 나왔다. 이밖에 예심에서는 시조 <다시, 금빛 무대>와 시 <활의 기억>, <불국사 법고>, <구불구불 포석정> 등의 작품들이 올라왔다. 시의 작품수준이 예년에 미치지 못하고, <활의 기억>이 눈길을 끌었으나 좋은 발상에도 군더더기가 많았다. 모든 분들의 정진을 당부한다.  


                - 이임수(시인,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손진은(시인, 경주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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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사과의 향가 / 정경용

 

 

천마총 묘실처럼 익은

사과를 가르자 까만 씨앗 두 알이

꽃물을 두른 중심자리에

나란히 합장되어 있다

 

여름 한 철 순장시킨

바람의 천마도가 갈기를 휘날리고

햇살금관의 휘황한 광채를 내뿜는다

빛줄기로 날을 벼린 검과

별빛 옥의 귀거리와 달무리 팔찌가

토함산 일출의 파동처럼

향기 속에 발굴된다

 

우주의 혼으로 세공한

신성한 맛을 느끼는 입속

깊은 샘물에서 길어 올려진

달디 단 청량감이 일렁인다

아름다운 신화의 울림이 번지면서

십장생이 한데 어울어진

화평의 세계가 펼쳐진다

 

향내가 콧날을 우둑 세우고

과육이 신라의 계보로 흘러들어

혈맥에 향가의 노래를 엮는다

화강암보다 흰뼈로

성골의 몸을 일으켜 세운다

고난으로 익힌 맛의 비의가

무릎에 스며들어 겸손해진다

 

부모님의 합장된 묘에 올린

사과에서 정신의 유물을 읽는다

박물관 같은 시간이 살아나

낮고 드높은 자존을 유산으로

신령한 기운을 일깨운다

 

 

 

 

 

[가작] 첨성대 / 함국환

 

 

별밭 언저리에 원두막을 짓고

서리하는 자를 없게 하라

별을 따는 자 보이거든

달을 한 입 물게 하고

또 보이거든

다시 달을 한 입 주어

달이 점점 작아지더라도

열매들을 잘 지키어라

 

가끔 밭에 들어가

열매를 계수하라

추수하는 날이 이르면

잘 여문 별들은

더욱 빛을 발할 지매

 

동방에서 가장 먼저 택하여

별밭 관리권을 너희에게 주노니

더 밝은 빛으로

후손에게 비취도록

원두막을 지어라

너희 심성 같은

어머니의 몸 같은

첨성대를 지어라.

 

 

 

 

질주

 

nefing.com

 

 

 

 

[심사평]

 

전국적으로 수준 높은 작품들이 상당히 많이 들어와서 월명문학상의 권위를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본심을 통과한 20여편의 작품들은 끝까지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웠지만 「사과의 향가」(정경용), 「첨성대」(함국환), 「뜰앞에 반짝이는」(김미숙), 「전설의 기린」(시조, 신기용) 등 4편이 마지막으로 선자들의 손에 남았다. 「전설의 기린」은 동봉한 「첨성대」와 함께 서정성과 감동성이 돋보이는 작품이었으나 사유를 끝까지 밀고 나가는 힘이 약간 미약했다. 「뜰앞에 반짝이는」은 「열암곡 마애불상」과 함께 사물(불상)의 재해석이 뛰어나고 시에 재치를 부여하는 능력도 있어 읽는 이의 마음을 끝까지 사로잡았다. 하지만 작품을 꼼꼼히 정독해 본 결과 기성 시인의 작품과의 차별성이 약하다는 이유로 제외되었다. 그러나 좋은 작품이다.

 

그리하여 선자들의 손에 남은 작품은 「첨성대」와 「사과의 향가」였다. 전자는 첨성대를 하늘 별밭의 별을 지키는 원두막으로 형상화하고, 그 열매인 별(예지의 빛)을 더욱 밝게 하여 후손에게 비치게 하라는 선덕여왕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사과의 향가」는 부모님의 묘에 올린 사과 한 알 속에 천마총에서 발굴된 모든 기물들을 담아내고, 그 과육을 깨물 때 향가가 내 혈맥에 내장되면서 나를 새롭게 한다는 주제의식을 무리 없이 형상화시켜 내고 있다. 선자들은 「첨성대」는 시행의 띄어쓰기가 되어 있지 않은 점과 세부묘사와 스케일 면에서 「사과의 향가」가 좀 더 뛰어나다는 점을 들어 「사과의 향가」를 당선작으로,「첨성대」를 가작으로 결정하였다. 월명문학상이 전국 어느 곳에 내어놓아도 손색이 없는 작품들의 경연장이 된 것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한다.

 

심사위원 : 이임수 동국대 교수, 손진은 경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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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문화축제위원회가 주최한 열아홉 번째 월명재(月明齋)가 음력 구월 보름인 10월11일 저녁 7시 첨성대 잔디광장에서 성황리에 개최됐다.

 

신라 경덕왕 때의 고승으로 우리 문학사상 가장 격조 높은 도솔가와 제망매가를 남긴 월명대사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경주시민 등 300여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루었다.

 

이날 최고의 볼거리는 깊어진 가을하늘에 소원 담은 풍등을 날려 올리고 원로 서예가이신 정담 조필제 선생의 불두와 여천 선생의 無로 그리는 문자탑, 김경수 화가의 힘 있는 붓의 터치, 목공예가 서승암 진행자의 구수한 우리가락에 참석자들은 장단을 맞추며 흥겨워했다.

 

매년 추모제와 함께 월명문학상 시상식이 있었으나 올해는 응모수량이 기대치에 못 미쳐 수상자를 내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

 

경주문화축제 월명문학상 관계자(동국대 경주캠퍼스 이임수 교수)는 20회 월명재 월명문학상에는 미리부터 활발히 홍보를 전개해서 전국에서 많은 응모자가 참여해 월명문학상이 전국규모의 문학상이 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이날 역대 문학상 수상자(김경애, 김광희, 이종암, 한기운, 권기만, 윤승원, 장선희, 김희동) 시인들이 참석해 월명재의 의미를 한층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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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떡갈나무 숲이 울창한 이유 / 황재윤

 

이제 구보 시작이네요

부동자세로 한참 햇살의 훈화를 듣던 몸들,

축 처져 서로 기댄 열외들 몇, 한따가리를 하는지

저녁 벼락의 꾸짖는 소리 크게 번쩍거리면

어둠에 숨은 정신들마저 화들짝, 불을 켰는데요, 가끔

그 불짝대기 몸 후려치는 광경에 저도 순간 번쩍! 했었어요

거기다 빗방울, 물빳다 소린 어찌나 육중히 내 귓바퀼

타고 흐르던지, 실신해버린 몇과 남은 몇몇

흙에다 머릴 처박고 있었습니다 안쓰러이 그리고 툭, 툭

긴장한 총구로 풀벌레 쏘아대던 사격, 저조한

명중률 탓인지 피멍 들도록 바람주먹 얻어맞다 결국

웃통 벗고 혹한에 흰 군장 기우뚱, 메고 종일 뺑뺑이를

돌았는데요 햇살의 원위치! 그 노오란 구령이 떨어져서야 겨우

하느적, 하느적 연두 옷 챙겨 입던 벗들,

참 힘드네요 이렇게 온 몸으로 필사적이어야만

한 시절 울창할 수 있다는 게

황성공원 떡갈나무 숲

운동화와 마주친 탄피들 재빨리 수거하던 다람쥐랑

‘출입금지’ 현수막 앞에서 돌아나가는 사람들 등지고

괜스레 기웃거리다 친구들의 위협사격 몇 발에

냉큼 내빼는 발도 몇 보입니다

 

 

 

 


[가작] 임해전지에서 / 김유정

 

오리떼 무단횡단에

일렁이는 연못은 바다의 안부를 묻는다.

여독을 덜 푼 파도는 덤으로 밀려오고

연못의 진흙 벌

어제가 숨바꼭질하고 있다.

그리운 것은

고래의 긴 하품 같은 시간의 한 모퉁이

바람은 무료배송으로 천년을 넘어 왔다.

우쭐우쭐 달려오는 한 사내의 어깨에

무생물의 얼굴들이 시간을 엮어 달려 나오고

너는 순한 입을 벌려 창백한 고백을 한다.

삭발한 낡은 목선(木船) 한 척

누구의 손안에서 익숙했던 주령구

가출한 서까래와 기와 몇 조각은

복숭뼈가 시리다 자꾸 까치발을 한다.

이름을 도난당한 몇 개의 얼굴들도 따라와

아린 기침을 해댄다.

낮달 같은 구부러진 하늘로

기러기 떼 몸 뒤척이며

풀어지는 연못.


 

 

 


[심사평] 역동적 감각, 현대성 돋보여

  오늘도 월명의 후예들은 저마다의 감각과 사유로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기 위한 고투를 계속하고 있다. 본심에서 논의되었던 작품들은 「포석정의 달」「연꽃, 말문 열다」「임해전지에서」「떡갈나무 숲이 울창한 이유」등이었다. 「포석정의 달」은 경순왕의 독백으로 이루어진 잘 빚어진 시편이다. 하지만 왕의 사유가 너무 초월적이고 순응적이라는 단점이 지적되었다. 「연꽃, 말문 열다」역시 공들여 쓴 작품이지만 셋째 수 초장 “연회로 망친 나라 경순왕의 늦은 후회”라는 평면적인 말이 결정적으로 거슬렸다. 「임해전지에서」는 과거와 현재가 교감하고 대화하는 역동적인 이미지를 잘 구사하여 역사의 광휘와 비애를 새롭게 묻고 있는 점이 좋았다. 그러나 더 강하게 밀고 나가지 못한 점은 아쉬웠다. 「떡갈나무 숲이 울창한 이유」를 당선작으로 뽑은 이유는 무엇보다도 월명의 정신을 현대화하고 있다는 점에서였다. 정지해 있는 떡갈나무들을 훈련을 받는 병사들로 묘사하고 번개와 비, 바람, 햇살을 기합의 이미지로 잡아 고난을 이겨낸 떡갈나무들의 자세가 오늘의 푸른 숲을 있게 한다는 메시지를 무리 없이 소화하고 있다.

  월명 스님이 대금 소리로 움직이는 하늘의 달을 멈추게 했다면, 이 작품은 그 반대로 그냥 심겨져 있는 듯이 보이는 떡갈나무를 오늘의 싱싱한 젊은이로 환치하여 신라정신의 새로운 광맥을 발굴했다는 점을 높이 사고 싶다.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이임수

경주대학교 국제한국어교원학과 교수 손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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