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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받을 채비 / 이서

 

망초꽃 위에 앉은 고추잠자리가 꼬리를 공중으로 치켜들수록

가을 하늘은 점점 맑아지는데

누가 어스름 뜬 부두막에 군불을 지핀다

 

연기는 하늘에 부스럼을 일으키듯 꾸물댄다

공복으로 떨고 앉은 달이 굴뚝으로 와서

방구들로 불 들어가는 소리 듣는다

 

공복의 국경을 넘은 장닭 우는 소리여

마을의 길이란 길을 죄다 지우는 그믐이여

그러나 어둠은 별의 주소를 적었다 지웠다 하듯

달의 선반에 몰래 올려놓고 바람 속을 걸어본다

 

나는 아버지가 속곳에 지린 똥무더기같이 환한

불을 때고 눅눅한 풀로 모깃불 놓고

토방에 앉아 미어터지게 밀려오는 뭇별자리를 본다

 

굶주린 사마귀 날개소리가 힘에 겨웁게 나는 사이

줄 끊겨 날아간 연기는그만 어정어정 주저 앉는다

그때 첩첩 골짜기에서 나온 바람이 삭고

섬돌 뒤에 숨은 귀뚜라미가

큰 여치 울음만 골라 쳐부수며 울고

중추절 앞두던 달 구렁이가 늘그막 허물을 벗는다

 

게으른 가증이 오듯이

가만히 수척해진 물소리를 보듬어 안는 첫서리같이

나는 복사뼈가 시려도, 나뭇잎이 물드는 시월을 맛본다

 

실핏줄 잔뜩 웅크린 나뭇잎 몇 개 인사 시늉 하듯이

내 앞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떨어질 때

저만치 집의 그림자도 첫눈 받을 채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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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 / 정미정

 

나무의 중심은

제 속에 있는 게 아니었다

떨구어냈던 약점들

지나가는 되지빠귀 한 쌍을 불러 세워

가장 허술한 틈서리 둥지가 되었다

심한 바람이 밑동을 치면

기울기를 맞추느라

말없던 이모부, 불임의 이모에게 매단

느닷없는 혹처럼

추가 되던 둥지

잎이 마르자

되지빠귀 부리가 마르자

홀랑 벗어놓고 간

야윈 둥지

아직도 중심을 잡느라 용을 쓰는 것이다

아슬아슬 그 경계로

나무는 추운 겨울을 또 한번 건너는 것이다

위태한 가계에 달리는 절망 한 움큼을 위해

가슴팍이 뻐근하도록

마른 수액을 자꾸 올려보는 것

기꺼이

제 속에다 품어 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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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에게 배우는 둥근 것들 / 박혜란

 

아직 다 녹지 않은 커피, 스푼으로 휘휘 돌리다보면 빙글빙글 어머니가 훌라후프 속에 있는 게야 돌아가는 훌라후프를 따라 어머니의 허리는 한쪽으로 기울곤 하던데 그 능선에는 왜 이리도 달이 많아 소란스러운지 애야, 길은 내 손바닥처럼 뻔하지 길이 멀어 보여도 지구는 끊임없이 돌아가지 않니 하시는 게야

 

바퀴가 지면 마찰하는 소리, 페달이 삐걱거리는 소리, 둥글게 부푼 어머니가 배를 쥐고 쓸러지는 소리, 자전거가 커다란 지구를 쥐고 돌리고 있지 휜 바람이 손끝의 둥근 지문을 매만지며 그 사이로 흐르고, 페달을 밟을 때마다 찰그랑, 찰그랑 주머니에 넣어둔 열쇠소리가 허벅지를 콕콕 찌르네 자전거에서 내리면 기묘한 리듬을 타고 마치 춤이라도 춰야 될 듯 흘러나오는 휘파람, 이제 그도 사라지고 없겠지

 

넘어지는 반대쪽이 아니라 넘어지는 쪽으로 핸들을 꺽으렴 뱅뱅 돌돌 어미 말을 떠올려 보면 반드시 옆으로 넘어질 것만 같은 날들이 지나쳐가네 토성의 꼬리처럼 훌라후프 휘휘 돌리고, 수천 개의 달이 떠 환한 마음, 어머니가 가르쳐 준 자전거의 주법대로 나는 가로질러 가네 처녀 젖가슴 마냥 탱탱한 바퀴가 휜 길을 들어 올리지

 

바퀴자국을 따라 떨어지는 별 잃은 허공은 배꼽 속처럼 캄캄한 저녁이어라 지나간 밤들아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둥긂을 따라 뻗어나가라 거친 숨을 내쉬며 종아리는 팔딱팔딱 소녀를 지나쳐 와서 잔 속 까만 블랙홀 속으로 시간을 이어가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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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팽팽한 고요 / 정미경

 

벽은 소리로 가득 차 단단하다

소리를 제 몸 속에 구겨 넣은

가야금, 벽에 걸려 있다

움직이는 것만이 스스로

소리를 낼 수 있는 건 아니지

 

바람과 비벼지는 소리

끌어안으면서 꼭 그 깊이만큼 밀어내는

줄과 줄 사이는 팽팽하다

모서리를 빠져나와 어디론가 흘러간

물무늬 하나 소리를 따라

가만히 허리를 편다

 

열 두개의 발, 끊어진 가지 사이로

겨울을 건너는 소리들은 또

얼마나 단단해지려는지

속으로 제 힘살을 감아

먼 곳의 소리 하나 당겨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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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우물 / 김화섭

 

바다가 보이는 산복도로 귀퉁이에 우물 하나 있다

그 시절 한 노파가 졸고 간 후

또 다른 노파가 와서 재활용 딱지를 붙인 소파에 누워

온종일 우물물을 퍼올리고 있었다, 바다가 손에 잡힐 듯 했다

제 몸을 북북 긁으며 살갗의 이끼를 걷어내던 노파

순간, 개망초가 절레절레 고개 흔들며 흰나비를 불렀다

그때마다 노파의 눈꺼풀이 열려서 한참 우물을 들여다보곤 하였다

그러다가 수면에 비친 제모습이 너무나 측은한 지

마치 거울을 닦듯 두레박을 내려 캄캄한 어둠을 빡빡 문질렀다

종일 문질러도 눈 한번 깜박이면 다시 깊어지는 그늘

저녁이 되자 아랫동네에서 내려온 풀씨들이 뿌리를 내리려고

샘이 마른 노파의 젖꼭지를 쿡쿡 찔러보기도 했다

때때로 푹꺼진 자궁 속으로 깊이 손과 발을 뻗다가

끝내는 시멘트 바닥보다 더 단단해진 밑바닥으로

쭈글쭈글해진 검버섯 자궁 속으로 풀씨들이 한껏 날아들었다

기울어진 몸은 한사코 바다 쪽으로 눈길을 주기만 했는데,

 

오래된 무관심이 산 아래로 데굴데굴 굴러간 후

풍문은 노파를 삼키고 바다를 삼키고 파도 소리를 삼켜 버렸다

조금 더 깊이 바다를 내려다보던 추억마저 떠나버렸다

망초도 나비도 꽃무늬 소파도 매미 소리만 몰아오는

오직 직립의 아파트만 하늘을 찌르는 대낮,

저 안을 들여다보세요, 푸른 이끼를 걷어내면

탱글탱글한 수정보다 맑고 찬 바람이 부는 것을요

누군가 와서 소리 칠것만 같은데  

우리 모두가 주인이었던 자리, 그 노파의 생식기 같던

그 쭈글쭈글 마른 젖가슴 같던 자리, 무너진 풍경 너머

폐경의 우물 하나, 폭염의 시간을 요케 견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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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김화섭 마른 우물

 

최우수상

정미경 벽, 팽팽한 고요

박혜란 자전거에게 배우는 둥근 것들

 

우수상

이서 첫눈 받을 채비

정미정 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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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산 / 임만근

 

눈이 낸 길이 하얗게 비탈을 타고 내려오고 있다

 

물어뜯을 듯 허옇게 이빨을 드러낸 삭풍을

자력으로 이겨내 보려는 듯

옷을 벗고 엉거주춤 서 있는 겨울 나목들.

어깨를 맞대고

서로의 맥박소리를 들으며

반가운 친구처럼 서로의 잔등이를 두들겨 준다

 

나목들은 견뎌낼수록 궁리가 되는 듯

마주보는 눈빛이 더 맑다

눈빛만 보아도 큰 위안이 되어주는 이웃, 바위와 잡목들

어우러져 이젠 바람이 응고된 휘파람소리쯤 무섭지 않은 듯,

 

햇살 품으로 살며시 안겨든 응달을 보자

등뼈가 닳은 산들은

옹그린 허리를 펴고

잎눈과 꽃눈, 피목들에게도 젖을 물린다

더욱 옹이를 빚고 있는 나목들을

품어 안은 겨울산

산등성이 삽목해 놓은 철탑들에게도 수인사를 보낸다

 

이윽고 산들이 젖을 먹이던 암캐처럼 슬그머니 일어나

앞 두 다리를 뻗쳐 기지개를 켜곤

뗏목을 짓고 도시 가운데로 흘러드는

인근 겨울산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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