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우물 / 김화섭
바다가 보이는 산복도로 귀퉁이에 우물 하나 있다
그 시절 한 노파가 졸고 간 후
또 다른 노파가 와서 재활용 딱지를 붙인 소파에 누워
온종일 우물물을 퍼올리고 있었다, 바다가 손에 잡힐 듯 했다
제 몸을 북북 긁으며 살갗의 이끼를 걷어내던 노파
순간, 개망초가 절레절레 고개 흔들며 흰나비를 불렀다
그때마다 노파의 눈꺼풀이 열려서 한참 우물을 들여다보곤 하였다
그러다가 수면에 비친 제모습이 너무나 측은한 지
마치 거울을 닦듯 두레박을 내려 캄캄한 어둠을 빡빡 문질렀다
종일 문질러도 눈 한번 깜박이면 다시 깊어지는 그늘
저녁이 되자 아랫동네에서 내려온 풀씨들이 뿌리를 내리려고
샘이 마른 노파의 젖꼭지를 쿡쿡 찔러보기도 했다
때때로 푹꺼진 자궁 속으로 깊이 손과 발을 뻗다가
끝내는 시멘트 바닥보다 더 단단해진 밑바닥으로
쭈글쭈글해진 검버섯 자궁 속으로 풀씨들이 한껏 날아들었다
기울어진 몸은 한사코 바다 쪽으로 눈길을 주기만 했는데,
오래된 무관심이 산 아래로 데굴데굴 굴러간 후
풍문은 노파를 삼키고 바다를 삼키고 파도 소리를 삼켜 버렸다
조금 더 깊이 바다를 내려다보던 추억마저 떠나버렸다
망초도 나비도 꽃무늬 소파도 매미 소리만 몰아오는
오직 직립의 아파트만 하늘을 찌르는 대낮,
저 안을 들여다보세요, 푸른 이끼를 걷어내면
탱글탱글한 수정보다 맑고 찬 바람이 부는 것을요
누군가 와서 소리 칠것만 같은데
우리 모두가 주인이었던 자리, 그 노파의 생식기 같던
그 쭈글쭈글 마른 젖가슴 같던 자리, 무너진 풍경 너머
폐경의 우물 하나, 폭염의 시간을 요케 견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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