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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맨 끝 방 / 김정현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새기려 할수록 점점 지워져만 갔다 내 몸 곳곳

 

허기의 냄새 같은 게 통증처럼 쌓여 있었다 지하철 한구석,

 

한나절 깨부쉈던 건물 부스러길 입 안 가득 우물거리다 집 앞까지 오면

 

어느새 밤의 입구였다 무심히 내다 버렸던 생일을 허겁지겁 식어 빠진 미역국에 말 때

 

마음 언저리 슬며시 커졌던 어떤 불빛은 내가 불어 보기도 전에

 

꺼져 버렸다 가만히 엎드려 베개에 얼굴을 묻으면 누군가의 살갗에서 맡았던 냄새 설핏,

 

구겨진 가슴 한쪽이 욱신욱신하면서도 조금 퍼지는 듯도 했지만

 

결국 슬픔도 나를 잠시 어루만지다 슬며시 떠나 버렸다

 

종일 나르던 벽돌 한 장처럼 쓰러져 간신히 잠이 들면 아침은 매번 추락하듯

 

당도해 있었다 새벽 끝자락 뭉뚝한 절벽 꼭대기 내가 사는 방 한 칸에서 내려다본 이 도시는

 

푸르스름하게 입 벌린 채로 혼곤히 잠들어 있는 무지갱처럼 생겼고

 

나는 언젠가 가파르게 뿌리내린 계단에서 선연히 굴러떨어지며

 

심장 한편에 가까스로 불을 밝히려는 어둑어둑한 사람의 영혼만 하염없이 바라보다,

 

비로소 내 이름 적힌 집 한 채 쓸쓸히 얻을 것 같았다 아무도

 

내가 어디 사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누구나 다 아는 듯해 나는 늘,

 

남몰래 번진 곰팡이처럼 눅눅하게 빈방을 떠났다가 아릿아릿

 

빈방으로 되돌아오곤 했다

 

 

 

 심사위원 문동만, 안현미, 김현(이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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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아파트 / 박이레

 

 

장미 피었네

담장 위 철망까지 올라

붉은 장미 만발하네

 

101동과 111동은 직선거리 일이 분

담장 못 넘으니 돌아서 십여 분

지난봄, 가시철망 공사가 보강되었네

 

100동 사람들은 110동 사람들을 임대충*이라 하고

옆 단지 사람들은 100동 사람들을 주공 거지*라 한다는데

세상모르고 장미꽃, 자꾸 덤불을 이루고

 

전거지*와 월거지*

105동에 사는 나

저 덤불, 오래 바라보네

 

덩굴장미 더 피어오르네

아파트 값 오르고 내리는지 모르고

가시철조망 왜 더해졌는지 모르고

철망 위로 오르고 오르네

 

벌레와 거지의 눈길 난무하던 허공 사방으로

장미 덩굴 타오르네

자정 넘은 가로등 아래서도 온통, 붉네

 

혹한기도 길었는데

폭염기가 길고 기네

 

* ‘임대충’은 임대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을 비하하는 용어로, ‘주공 거지’는 ‘주공아파트 거지’의 준말로 쓰이며,

‘월거지’는 ‘월세 사는 거지’, ‘전거지’는 ‘전세 사는 거지’를 가리킨다고 한다.

 

 

 

걸어도, 걸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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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의 노동해방, 인간해방 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1988년 제정된 전태일문학상2020년 올해로 28회째를 맞았다. 특히 올해는 19701113일 스물세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청년 전태일이 50주기를 맞이하는 해이다. 많은 문학상이 생겨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하고 있지만, 전태일문학상은 모든 노동자의 이름으로 불리는 전태일처럼 여전히 삶과 함께하는 문학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28회 전태일 전태일문학상은 309명이 1,208편의 시를, 소설은 134명이 170편의 소설을, 116명이 149편의 생활글을, 6명이 6편의 르포를 응모하였으며, 15회 전태일청소년문학상은 101명이 307편의 시를, 145명이 145편의 산문을, 14명이 14편의 독후감을 응모하였다.

 

시 부문 당선작은 시민의 삶을 축약된 언어로표현한 장미아파트4편이며, 소설 부문은 투박한 문장 속에 용솟음치는 진정성으로 묘사한 어금니가 선정되었다. 생활글 부문 당선작 걸어도, 걸어도는 평생 노동자로 산 아버지의 병간호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을 서정적으로 그렸으며, 특히 올해부터 생활글과 별도로 공모한 르포 부문 당선작 다크 투어는 아시아 곳곳을 찾아다니며 기록되지 않은 역사를 드러냄으로써 기록은 그 자체로 연대의 한 방식임을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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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은 손 / 김철

 

 

지금은 폐업한 저곳은

한때 똑같은 손들이 쉴 새 없던 곳

어떤 손에 맡겨도 척척 만들어지던 것들이

가끔은 손가락을 찌를 때

그때만 잠깐 달라지던 손, 손들

늙은 엄마의 똥 귀저기를 갈던 손

치켜든 주먹을 만류하던 손

도시락을 싸고 설거지를 하고

이스트처럼 부풀던 제빵사 필기 문제집을 넘기던 손

온갖 손들이 모여 똑같은 일을 하던 곳

가장 낮은 단가의 수량들이

최저임금으로 쏜살같던 곳

백 개를 조립하면 은전 몇 닢

만개를 조립하면 아껴먹어야 하는

, 뿌듯한 삼겹살

언뜻 보면 백 송이도 넘는

활짝 핀 목련꽃같이 모여 있던 손들

그리고 형광등 아래 거대한 몸통의 자본

그 자본의 한 부분만 만들어 내던

가난한 밑천 같던 가내 수공업

조각만 만지다 전체를 잃어버리는

똑같은 손들의 저 아득한

하청의 하층들

 

 

 

살아남은 자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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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의 노동해방, 인간해방 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1988년 제정된 전태일문학상이 올해로 27회째를 맞았습니다. 그 짝인 전태일청소년문학상도 올해로 벌써 14회째입니다.

 

27회 전태일문학상에는 시 192/753, 소설 97/118, 생활·기록문 77/104편이 접수되었습니다. 14회 청소년문학상에는 시 145/491, 산문 149/154, 독후감 35/35편이 응모되었습니다.

 

전태일문학상 시 부문 당선작은 똑같은 손4편입니다. 시인이 선택한 제재들을 그려내는 상상력이 좋습니다. 노동에 대한 주제 의식도 깊습니다. 투고한 작품들 모두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 단단해질 거라는 믿음도 들었습니다. 하청의 하층을 작업하는 손들, 단체 행동하는 블루컬러의 나무들, 스탬프를 먹는 저녁 등을 인식하는 시인의 시선이 환기력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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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아쇠수지증후군 / 강성남

 

 

오른쪽 엄지가 말을 듣지 않는다

일자로 굳어 구부러지지 않거나, 기역 자로 구부러진 채

펴지지 않기를 반복한다

억울한 맘이 들었는지 자다가도 심통을 부린다

 

손가락 하나를 지나치게 부려먹었다

힘줄이 부어 마디와 마디 소통이 안 된다

물건을 집는 것은 물론 매듭을 풀거나

팬을 잡는 일, 문 여는 일조차 힘겹다

 

힘줄 몇 가닥이 손목과 어깨, 생활 전체에 통증을 준다

주사를 맞고, 레이저 시술 10, 파라핀 요법 20

탈니플루메이트 정, 에렉신 정, 아르티스 정

약 부작용이 있다하니 페니라민 정까지 처방해 준다

 

낫으로 무를 자르다가 검지를 잘랐던 어머니

국문과에 가고 싶다는 내게, 동생들은 어떻게 하냐고

내 꿈을 단칼에 자르셨다

나는 떨어진 지골이 되어 팔딱팔딱 뛰며 울었다

 

손에 화농이 잘 드는 큰 동생, 어머니의 첫 번째 손가락이다

이혼 후 새 가정을 꾸린 둘째

다니던 직장 나와 뒤늦게 자격증 준비하는 막내

모두 어머니의 아픈 손가락이다

 

오해의 톱날에, 가난 때문에

한순간의 실수로 잘려 나간 손가락들을 생각한다

 

왼손 정맥혈을 과도로 자른 적이 있다

솟구치는 피를 백지로 받았는데 동백이, 해당화가 피었다

누군가의 꽃이 되기도 했다

 

손가락 하나에는 X-ray로도 초음파로도 알 수 없는 비밀이 있다

온몸의 통점이 모여 있는 손가락 때문에

목숨의 방어벽이 무너지기도 한다

 

폐암 말기인 아버지는 손을 다쳐 손을 쓸 수 없어,

옷에 이불에 똥칠을 하셨다

다음날로 요양원에 보내야 했다

 

손은 짝을 잘 만나야한다. 손가락에도 눈과 귀와 감정이 있다

자신만의 주관과 고집이 있다

 

사랑했지만 그런 줄 몰랐던, 아꼈지만 가장 소홀히 했던

그는 내 오른쪽 엄지였다

 

 

 

방아쇠수지증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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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해방, 인간해방을 부르짖으면서 스스로를 불살랐던 전태일 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1988년 제정된 전태일문학상이 올해로 26회째를 맞았다. 이보다 13년 뒤에 제정된 전태일청소년문학상은 이번이 13회째이다.

 

올해 전태일문학상 응모작은 시, 소설, 생활·기록문 세 부문에 각각 750(응모자 173), 106(87), 104(83)이었으며, 예심과 본심을 거쳐 세 부문에서 각각 당선작이 선정되었다. 시 부문에는 이번 수상작품집의 표제작으로 게재된 강성남의 방아쇠수지증후군2편이, 소설 부문에는 권행백의 악어, 생활·기록문 부문에는 일곱째별의 유성기업 이야기가 당선작으로 선정되었다.

 

전체적으로 작품의 형식이며 어휘의 사용이며 주제의식이 젊어졌다는 인상을 준 시 부문 응모작 중 당선작 방아쇠수지증후군2편은 평면적인 구성과 산문체의 문장이 언뜻언뜻 보여 긴장감이 부족하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체험을 구체적으로 담아 작품에 힘이 있고, 비유와 상상력의 사용으로 작품의 건조함을 극복했으며, 세계를 끌어안는 인식으로 휴머니즘의 가치를 심화시킨작품이라는 심사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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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아버지들 / 이온정

 

 

그때 그곳의 가장들은 모두 얼굴이 검었다  지하가 어두웠고 무거운 지하의 힘으로 나라도 사람들도 살아가는, 도처가 검은 색으로 발광되던 때였다.

 

여자들은 땅속에서 올라온 탄 덩이와 돌을 분간해내는 선탄부 일로 검은 화장일색이었다 다른 곳보다 검은 밤이 더 길었던 곳, 갱부의 헬멧엔 아스라한 은하의 별들이 매달려 있었지만 별들이란 꼭 멀리 있는 게 아니어서 눈앞의 어둠을 밝히는 데도 급급했다

 

 굳세게 달려간 은하 갱도 650,* 등에 걸머진 막장마다 세우고 금길 뚫는 발파뜸은 서슴지 않는,

 

은하계로 가는 길은 좁고도 멀었다

 

검은색은 힘이 세었고 흰색은 비웃거리에 불과하던 시절, 광산미**와 가다오리***로는 성에 안 차는지 얄팍한 간주마저 뭉텅뭉텅 잘라 먹다 끝내는 이색의 동색이 혈전을 벌이던 곳,

 

방전 마스크를 쓴 아버지들의 채굴기, 지금도 깊은 갱도 하나씩 숨결 사이에 숨겨 놓고 육탈의 끄트머리에서 컹컹 검은 기침을 하며 별무리처럼 허공에 떠 있는 것이다

 

 

* 갱의 수

** 광부들에게 월급 대신 공급하는 가장 품질이 낮고 값싼 쌀

*** 한 주마다 갑, 을, 병방 순서로 교대하다 주휴일이 안 날 때는 잇달아 하는 근무 

 

 

 

수상한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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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부문 당선작인 이온정의 검은 아버지들3편은, ‘갱부의 헬멧아스라한 은하의 별들을 보려는 노력과 함성에서 아직도 귀에 광장깃발의 세월을 담고 농꾼으로 살아가고 있는 난청’ ‘천수만 씨지지직거리는세월을 한 편의 시에 오롯이 담아보려는 노력 등이 돋보인다. 과거가 결코 현재와 단절될 수 없고 결국 미래의 이야기라는 것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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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구석기뎐 외 6편 / 김희원

 

2012년 6월 한국교양기초교육원 제1회 대학생 고전 에세이 대회 은상 수상
2012년 10월 남원 춘향 문화원 독서 감상문 우수상 수상
2014년 8월 성균관대학교 일반대학원 중어중문학과 석사과정 수료
2015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신 구석기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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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시의 상상력은 그 무엇으로부터도 자유로워야 한다

 

노동해방, 인간해방을 외치며 스스로를 불살랐던 전태일의 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1988년 제정된 ‘전태일문학상’이 올해로 24회째를 맞았다. 이보다 13년 뒤에 제정된 ‘전태일청소년문학상’은 이번이 11회째이다.

제24회 전태일문학상에는 시, 소설, 생활·기록문 부문에 각각 797편(응모자 187명), 114편(70명), 136편(101명)의 작품이 접수되었다. 당선작으로는 시 부문에 김희원의 「新 구석기뎐」외 6편이, 소설 부문은 아쉽게도 당선작을 내지 못했고, 생활·기록문 부문에 이경수의 「가리봉 청춘들의 삶」 외 1편이 선정되었다. 응모작 심사는 예심과 본심으로 나뉘어, 시 부문 예심은 문동만, 송경동 시인이 본심은 백무산, 정우영 시인이, 소설 부문 예심은 정하진, 오수연, 본심은 윤정모, 이인휘 소설가가, 생활·기록문 부문 예심은 최경주 소설가, 안미선 작가, 본심은 김해자 시인과 신순애 작가가 심사를 맡았다.

시 부문 당선작 「新 구석기뎐」등을 쓴 김희원의 시에는 그만의 호흡이 들어 있어 선자들의 눈길을 잡아끈다. 우리시대 청춘들의 난감한 시대적 허기를 무난하게 시로 풀어내고 있다. 하지만 시적 사유가 고만고만해서 작품들이 서로 튀질 않는다. 생각과 언어가 서로 끌고 밀면서 치열하게 싸워야 시가 새로워진다. 그중 「新 구석기뎐」을 당선작으로 내기로 했는데 이 작품의 호소가 조금은 나았기 때문이다. 당선을 계기로 하여, 좀더 구체적이고 생생한 자신만의 캐릭터를 찾아내기 바란다.

본심에 올라온 여러 작품들의 각기 다른 장점과 미덕에도 불구하고, 생활글 이경수의 「가리봉 청춘들의 삶」을 당선작으로 올리는 이유는 우선적으로 소박한 삶의 날것 그대로의 냄새가 배어나오는 절박성과 체험의 구체성 및 진실성 때문이다. 이 작품에는 1980년대 가리봉 벌집 혹은 닭장집 풍경이 바로 눈앞에 보이듯 잘 묘사되어 있다. 도배지, 화장실, 공동 화장실, 부엌문 및 토요일 오거리 정경 등 세부묘사와 이웃의 모습과 공장 노동자들의 활기찬 모습이 활동사진처럼 살아 움직인다. 누추하되 천하지 않으며, 가난하되 빈곤으로 찌들지 않고, 노동 밖에 낭만과 관계와 사랑과 꿈이 있다. 디지털한 문명과 오늘의 노동자들이 잃어버린 풍경을 돋을새김하는 능력은 글 쓰는 이의 소박하고 진솔하며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이웃의 삶을 사랑하는 태도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좋은 기록은 미사여구나 감상이 끼여들 여지가 없다. 과장도 엄살도 배제하고 미화의 욕구조차 벗어버리고 대상에 핍진하게 다가간 작품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이경수의 「가리봉 청춘들의 삶」이 그러한 점을 잘 보여주고 있는 글이다.

올해 작품집은 예년과 달리 ‘올해의 르포르타주’ 면을 신설했다. 한 해 동안 발표된 르포 작품들 중 독자들과 다시 읽고 싶은 작품을 선정해 지면에 싣는 기획이다. 이는 기록자로서 충실했던 전태일의‘기록 정신’을 이어받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송기역의 「너는 살고 내가 죽었다」는 박선영 열사의 모친인 오영자의 생애를 담았고, 서분숙의 「안녕들 하십니까」는 안녕하지 못한 청춘을 사는 태우와 점환의 사연을 담고 있다. 정윤영의 「“이러다 노동자 다 죽는다”」는 홍종인 유성기업 전 지부장의 목소리를 통해 유성기업에서 그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기록하고 있다.

전태일청소년문학상은 올해로 11회를 맞이했다. 산문 부문의 올해 응모작들은 어른들의 세계를 다룬 작품이 많았던 이전과 달리, 청소년 자신들의 세계와 삶을 다룬 작품이 부쩍 늘었다. 반가운 변화이다. 이로 인해 올해 전태일청소년문학상 수상작들은 청소년들이 서 있는 자리를 확인하는 지면이 될 것이다. 전태일 열사는 일기, 편지, 수기, 소설 등을 통해 어른들의 세계가 아닌, 자신이 몸담은 곳, 자신의 삶이 놓여 있는 곳에서 소재를 찾고 글을 썼다. 청소년들이 이 점을 헤아리길 기대한다고 심사위원들은 밝히고 있다.

심사는 시 부문에선 김성규, 박소란 시인이 예심을, 배창환, 맹문재 시인이 본심을 맡고, 산문 부문에선 신혜진 소설가, 김대현 문학평론가가 예심을, 안재성, 김한수 소설가가 본심을, 독후감 부문에선 신지영 아동청소년문학작가와 유현아 시인이 예심을, 박일환 시인이 본심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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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다른 길들 / 이동우

 

 

주인 잃은 신발이 멈춘 곳

길의 끝이 있다

 

버려진 것들에겐

죽창 같은 겨울바람만 이어져

 

화려한 신차 발표장 뒤편으로 모인

막다른 길

 

작업화부터 목발까지

순번을 단 신발들

발소리조차 얼어붙어

길바닥에 웅크려 있다

 

굴뚝 위의 외침을 기억하는 안전화

해고 후 막노동판을 전전하던 운동화

 

대한문 앞 핏빛 향내가 철거된 뒤

꺽인 깃대 끝에 매달려 보낸 밤들

촛불의 메아리는 가 닿을 곳이 없다

 

삭발하고 곡기 끊은 숨탄것들이

걸음, 걸음마다 북소리처럼 운다

 

눈보라 속 맨발로 떠난 주인

그의 부활을 믿지 않는

텅 빈 신발이 혼잣말한다

나라도 던지지 그랬어?

 

남겨진 이들은

불온한 땅을 딛기 거부하며

오체투지로 끊어진 길을 잇는다

 

 

 

 

발광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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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해방, 인간해방을 외치며 스스로를 불살랐던 전태일의 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1988년 제정된 전태일문학상이 올해로 23회째를 맞았다. 이보다 13년 뒤에 제정된 전태일청소년문학상은 이번이 10회째이다.

 

23회 전태일문학상에는 시, 소설, 생활·기록문 부문에 각각 873(응모자 186), 71(65), 115(90)의 작품이 접수되었다. 당선작으로는 시 부문에 이동우의 ??막다른 길들?3편이, 소설 부문에 김주욱의 ?발광생물?, 생활·기록문 부문에 김동수의 ?나도 청소노동자다?가 선정되었다. 응모작 심사는 예심과 본심으로 나뉘어, 시 부문 예심은 송경동, 문동만, 본심은 백무산, 김용락 시인이, 소설 부문 예심은 홍명진, 이재웅, 본심은 윤정모, 김남일 소설가가, 생활·기록문 부문 예심은 최경주 소설가, 안미선 르포작가, 본심은 신순애 작가, 김해자 시인이 심사를 맡았다.

 

시 부문 당선작 막다른 길들은 쌍용차 사태를 다루고 있다. 목숨을 잃은 26명 노동자들의 주인 잃은 신발로 시작하는 이 시는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이자 노동현실에 날카로운 고발로 읽힌다. 심시위원들은 이 시가 그런 비정함을 즉물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뒤로 숨기면서도 현실을 효과적으로 표출하고, 아울러 범상치 않은 결론으로 시를 이끌어가는 솜씨가 돋보였다.”고 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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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이댄서 / 정지윤

 

 

묶인 일들은 풀어버려요 원피스는 바람과

함께 추는 브레이크 댄스

과장된 스텝이 우리를 살게 하죠

 

문자로 날아오는 해고 통지

부은 내 얼굴을 깎아요

 

나는 새우깡에 길들여진 갈매기처럼 날아요

출렁이는 지갑

때론 팔 수 없는 계약들이 있죠

 

흔들릴 때 호명해요 껍질 속의 휘파람

영안실에 두고 온

이력서들을 불러볼까요

 

터질 듯 가벼운

통지서가 우리를 춤추게 해요

더 가벼운 것들로 허기를 채우는 우리는

밀폐된 입을 가진 댄서

 

닿을 수 없는 몸 안에 갇혀 흔들리며

끝없이 증식되는 그림자들

 

 

 

참치캔 의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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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하의 날들 / 권상진

 

 

이 골목은 열대의 모세혈관

쪽문 깊숙한 곳까지 폭염을 나르던 적도의 시간들이

출구를 헤매는 골방에서

노인은 지팡이와 함께 싸늘하게 발견 되었다

 

직립의 시간은 끝난 지 이미 오래인 듯

폭염을 등에 진 채 골방에 ㄱ 자로 누운,

저 경건한 자세가 되기까지 열대의 밤은

블랙홀처럼 폭염을 빨아들였을 것이다

 

극한의 외로움은 영하의 온도를 지녔다

버려진 시선들만 싸락눈처럼 쌓이는 골목 어귀는

외로움의 온도가 연일 기록적으로 갱신되고 있었다

홑청 같은 그의 피부에 살얼음이 얼던 날

맹렬하게 그의 체온을 데우던 열대의 밤은 결국

조등인 양 달을 대문 밖에 내걸었다

 

열대의 대륙에서 견뎌야 했던 영하의 날들이 저문다

강변 공원에 삼삼오오 몰려든 사람들

시린 영혼들을 위해 기꺼이 폭염을 견디던 그들은

부의처럼 더운 심장을 강바닥에 내려놓고

자정이 지나도록 돌아갈 줄 모른다

 

빙하기 지층처럼 견고하던 얼굴에서

겹겹의 표정들이 차례로 녹아내린다

사람의 끝에서도 꽃이 피다니,

오래전 퇴적된 노인의 미소가 환하게 한 번 피었다 진다

 

생의 아슬한 등고선에 기대 사는 지표 인간들

빈방이 하나씩 늘어나면서부터

여기까지가 사람의 경계라는 듯

골목은 폭염을 다시 들이고

인적 없던 골방마다 간간이 낯선 인기척들

걱정스레 쪽문을 밀치고 있다

 

 

 

눈물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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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견고한 반어 의식으로 사회적 소외 날카롭게 고발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 중 폐업 처분4편은 선택한 상황들을 차분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관찰하는 것 이상의 깊은 세계 인식이 필요하다. 택배의 기사9편은 제재들을 구체적으로 그렸는데 좀 더 긴장감 있는 표현력이 요구된다. 허공에도 이웃이 산다2편은 감상적인 시어의 사용을 자제하면 주제 의식을 심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영하의 날들3편은 반어 의식을 통해 사회적 모순을 고발하고 있는데, 직설적인 목소리를 내세운 기존의 노동시를 극복하는 면이어서 주목했다. 그리하여 폭염으로 인해 세상을 뜬 쪽방의 노인을 그린 영하의 날들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노인의 죽음이 날씨 때문이 아니라 극한의 외로움, 즉 영하의 상황 때문이라는 시인의 인식은 우리 사회의 음지를 새롭게 확인시켜준다. 양극화가 심화되어 생명까지 위협당하는 인간 소외의 문제를 객관적이며 분석적으로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이와 같은 비판 의식은 전태일 열사가 노동 해방을 온몸으로 추구한 정신을 계승하는 모습이다. 인간 가치가 점점 무시되거나 왜곡되고 있는 신자유주의 시대를 직시하고 소외된 얼굴들을 기꺼이 품기를 기대한다.

 

- 예심 : 송경동, 김사이 / 본심 : 백무산, 맹문재

 

 

 

사람의 얼굴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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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로크 / 이태정

 

 

중학교를 졸업하고 양장학원에 등록했다

학원 이름은 노라노

노라노, 노라노 발음하면

놀아 너, 놀아 너로 들렸다

놀고 싶은 청춘은 무럭무럭 자라 사춘기를 맞았고

그것을 누른 것은 노루발이었다

 

꽃무늬 원단에 그려진

하얀 초크선을 따라가다 보면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았고

그런 날엔 내 마음도 꽃밭에 자리를 잡았다

나비와 함께 꽃길을 걷다 잠시 한 눈을 팔면

봉재선을 따라 손가락도 박음질 되었다

그렇게 우리들의 오후는 자주 피를 흘렸다

재단사의 가위질보다 정확하게 잘려 나간 하루

작업장에 폴폴 날리는 먼지를 꽃향기 대신 맡으며

먼지보다 가벼운 수다를 커피 한 잔에 타 마셨다

 

런닝구 한 장 입고 라디오에 귀를 열어놓으면

낭만적 우울이 속성으로 치유되던 시절에도

치유되지 않은 상처는 있었다

상처를 보듬으며 과부하 상태로 버티던 유일한 무기는

무쇠 같은 몸뚱이뿐이었다

수천 벌 치맛단과 바짓단을 뒤집으며

오버로크 박을 땐 힘이 솟았다

가느다란 실오라기들이 횡대로 드러누웠다

도로 위에 드러누운 시위대의 인간띠처럼

가늘게, 그러나 촘촘히 박혔다

 

 

 

포이동 이야기(외)

 

nefing.com

 

 

 

[심사평]

 

20회를 맞는 전태일문학상에 많은 작품들이 투고되었다. 노동 해방과 인간 해방을 온몸으로 추구한 전태일의 정신을 기리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에 고무적이지 않을 수 없다. 예심을 거쳐 올라온 원고 중에서 최종적으로 논의된 것은 벽돌5, 나사렛의 집4, 오버로크8편이었다.

 

벽돌5편은 담장 속에 들어 있는 벽돌을 이웃과 함께하는 노동자들의 꿈으로 연결하거나, 밤하늘의 초승달 모습을 철야 작업을 하는 생산직 노동자로 연결하는 데서 볼 수 있듯이 상상력이 뛰어나고 문장의 표현력이 눈에 띈다. 노동자로서의 삶의 실제를 좀 더 구체적으로 그려내었으면 좋겠다.

 

나사렛의 집4편 역시 좋은 표현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만 노동자로서의 주체적인 모습이 약하다. 달의 분화구를 파다에서는 탄광의 막장으로 들어가는 광부의 마음을 나름대로 그리고 있지만, 나머지 작품들은 가난한 집과 골목을 그리는 데 머무르고 있어 아쉽다.

 

오버로크8편을 당선작으로 결정하는 데는 어려움 없이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제재들을 다소 투박하지만 구체적이면서도 차분하게 묘사한 면이 좋았다. 인간 가치를 지향하려고 고민하는 모습에도 공감했다. 수천 벌의 옷을 만드는 여성 노동자들이며(오버로크), 목숨을 걸고 피자 배달을 하는 십대의 젊은이들이며( 십대의 꿈), 서른이 넘도록 취직자리가 없어 이력서를 쓰지 못한 채 부모에게 의지하고 있는 청년 실업자(늙은 독수리의 선택) 등을 외면하지 않는 시인 정신이 더욱 확장되길 기대한다.

 

전태일의 정신을 40년 동안 몸소 실천한 이소선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1년이 되었다. 그동안 어머니가 키워낸 수많은 전태일이 사회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노동자들이 살아가기란 여전히 어렵다. 불안정한 일자리와 실직으로 인한 소득 감소, 먹거리에서부터 교통비나 전셋집에 이르기까지 치솟는 물가, 기득권 계층의 비인격적인 대우 등으로 노동자들이 인간답게 살아가기란 참으로 힘든 것이다. 이와 같은 삶의 조건에 맞서고자 전태일문학상에 응모한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과 아울러 격려의 박수를 드린다.

 

- 예심 : 김사이, 고영서 / 본심 : 맹문재, 정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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