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리지 않는 발소리 / 남호순
주인 잃은 탈의실
깊은 어둠 속 검정 안전화
고즈넉하게 자리 잡았다
흠집투성이다
주름 깊어진 곳에는
노동의 땀방울이
웃음으로 희석되어 빛난다
튼튼한 날개를 가진 새처럼
행복의 모이를 물어 나르다
말 못하는 기계 속에 남긴
비행, 마지막 절규였던 것일까
돌아오지 못하는 형님,
치매의 아버지는 자꾸 물으신다
큰 애는 언제 와!
형수는 나사 하나 빠진 것처럼 헐거워져
자꾸 컵을 떨어트린다
발 냄새 고여 있던 자리에
한기가 들어찬다
오소소 일어서는 소름에
봄 발끝이 닿았나 싶은데
타다닥 뛰어나가는 겨울 발소리
[심사평]
전태일문학상에 관심이 얼마나 높은지 올해는 1,000편 가까운 작품이 투고되었다. 전태일의 정신을 기리려고 하는 사람들의 뜨거운 마음에 우리는 놀랐지만 우려하기도 했다. 문학상의 취지에 동의해서 응모한 경우가 아니라면, 다시 말해 전태일문학상조차 타락한 자본가를 따르는 사람들의 사냥감으로 전락된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는가?
많은 응모작 중에서 <들리지 않는 발소리> 외 5편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이 작품은 안전화, 기게 소음, 주물과 목형, 잔업, 구조조정 등의 시어에서 볼 수 있듯이 공장 생활의 면면을 서정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렇지만 세련된 듯한 표현들이 노동 현실을 가볍게 하고, 설명식 문장들이 작품의 긴장미를 약화시키는 면을 보이고 있다. 앞으로 노동의 사회적 의미를 좀 더 고민하며 작품활동을 하길 기대한다.
이 빡에 <금속질의 빗소리> 외 작품들은 노동과 관계된 제재들을 아주 세련되게 표현하고 있었지만 진정성을 주지 못했다. <공단 골목 수제 과자점> 외 작품들은 소시민의 일상을 차분하게 잘 그렸지만 아무래도 사회 인식이 약했다. <순이> 외 작품들이나 <신사임당 초중도병>의 경우도 유사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힘내라, 병아리> 외 작품들은 수준차가 심해서 아쉬웠다. <정치인의 식사 예절> 외 작품들도, <경우 2년, 결국 2년>의 작품들도 마찬가지였다.
경영 악화를 구실로 생산직 노동자를 대규모로 해직시킨 회사에 대항하기 위해 ㅋ크레인에 올라가 농성을 벌이고 있는 한 여성을 응원하러 간 시민들을 경찰이 구타하고 체포영장이나 소환장을 발부하는 상황에 우리는 살고 있다. 한 일용직 노동자가 장마로 인해 일거리가 끊겨 자살하고 말았다. 전태일의 정신을 40년 동안 실천해온 이소선 어머니가 쓰러지기도 했다. 이와 같은 시대에 시를 응모한 분들이나 시를 읽을 우리나 사회 인식을 더욱 가져야 할 것이다. 투고한 모든 분들께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 심사위원 백무산, 맹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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