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버로크 / 이태정
중학교를 졸업하고 양장학원에 등록했다
학원 이름은 노라노
노라노, 노라노 발음하면
놀아 너, 놀아 너로 들렸다
놀고 싶은 청춘은 무럭무럭 자라 사춘기를 맞았고
그것을 누른 것은 노루발이었다
꽃무늬 원단에 그려진
하얀 초크선을 따라가다 보면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았고
그런 날엔 내 마음도 꽃밭에 자리를 잡았다
나비와 함께 꽃길을 걷다 잠시 한 눈을 팔면
봉재선을 따라 손가락도 박음질 되었다
그렇게 우리들의 오후는 자주 피를 흘렸다
재단사의 가위질보다 정확하게 잘려 나간 하루
작업장에 폴폴 날리는 먼지를 꽃향기 대신 맡으며
먼지보다 가벼운 수다를 커피 한 잔에 타 마셨다
런닝구 한 장 입고 라디오에 귀를 열어놓으면
낭만적 우울이 속성으로 치유되던 시절에도
치유되지 않은 상처는 있었다
상처를 보듬으며 과부하 상태로 버티던 유일한 무기는
무쇠 같은 몸뚱이뿐이었다
수천 벌 치맛단과 바짓단을 뒤집으며
오버로크 박을 땐 힘이 솟았다
가느다란 실오라기들이 횡대로 드러누웠다
도로 위에 드러누운 시위대의 인간띠처럼
가늘게, 그러나 촘촘히 박혔다
[심사평]
제20회를 맞는 전태일문학상에 많은 작품들이 투고되었다. 노동 해방과 인간 해방을 온몸으로 추구한 전태일의 정신을 기리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에 고무적이지 않을 수 없다. 예심을 거쳐 올라온 원고 중에서 최종적으로 논의된 것은 「벽돌」외 5편, 「나사렛의 집」외 4편, 「오버로크」외 8편이었다.
「벽돌」외 5편은 담장 속에 들어 있는 벽돌을 이웃과 함께하는 노동자들의 꿈으로 연결하거나, 밤하늘의 초승달 모습을 철야 작업을 하는 생산직 노동자로 연결하는 데서 볼 수 있듯이 상상력이 뛰어나고 문장의 표현력이 눈에 띈다. 노동자로서의 삶의 실제를 좀 더 구체적으로 그려내었으면 좋겠다.
「나사렛의 집」외 4편 역시 좋은 표현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만 노동자로서의 주체적인 모습이 약하다. 「달의 분화구를 파다」에서는 탄광의 막장으로 들어가는 광부의 마음을 나름대로 그리고 있지만, 나머지 작품들은 가난한 집과 골목을 그리는 데 머무르고 있어 아쉽다.
「오버로크」외 8편을 당선작으로 결정하는 데는 어려움 없이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제재들을 다소 투박하지만 구체적이면서도 차분하게 묘사한 면이 좋았다. 인간 가치를 지향하려고 고민하는 모습에도 공감했다. 수천 벌의 옷을 만드는 여성 노동자들이며(「오버로크」), 목숨을 걸고 피자 배달을 하는 십대의 젊은이들이며( 「십대의 꿈」), 서른이 넘도록 취직자리가 없어 이력서를 쓰지 못한 채 부모에게 의지하고 있는 청년 실업자(「늙은 독수리의 선택」) 등을 외면하지 않는 시인 정신이 더욱 확장되길 기대한다.
전태일의 정신을 40년 동안 몸소 실천한 이소선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1년이 되었다. 그동안 어머니가 키워낸 수많은 전태일이 사회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노동자들이 살아가기란 여전히 어렵다. 불안정한 일자리와 실직으로 인한 소득 감소, 먹거리에서부터 교통비나 전셋집에 이르기까지 치솟는 물가, 기득권 계층의 비인격적인 대우 등으로 노동자들이 인간답게 살아가기란 참으로 힘든 것이다. 이와 같은 삶의 조건에 맞서고자 전태일문학상에 응모한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과 아울러 격려의 박수를 드린다.
- 예심 : 김사이, 고영서 / 본심 : 맹문재, 정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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